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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 Back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01 GG Vol. 21. 6. 10. 미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원근법(遠近法, perspective)에 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아주 짧게 정리하자면 원근법은 3차원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재현할 때 필요한 방법으로, 입체인 3차원 세계를 실제로는 입체가 아닌 2차원 평면 위에 재현하면서 마치 입체인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기도 하다. 화면 안에 적용된 원근법은 화면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드(grid)로 분할한다. 그리고 이 그리드를 기반으로 대상의 크기나 비율, 선명도, 색상, 명암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결정된다. 원근법은 무엇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관객의 눈은 어디에 어떻게 참여할지 같은 질문들, 더 나아가 화면의 전체적인 풍경을 결정하는 기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원근법은 단순히 멀리 있는 것은 작고 흐리게, 가까이 있는 것은 크고 선명하게 그린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 안의 모든 것이 배치되는 규칙, 어떤 것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를 결정하는 화면 구성의 내적 논리의 설계 방법론이다. 우리의 눈과 뇌는 화면이 제공하는 원근법에 의거하여 화면 내부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그 내부의 공간감에 우리의 신체를 동기화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입체감을 가지지 않는 평면 매체에서 원근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 회화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원근법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은 언제나 기묘하거나 이상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렇다면 모니터라는 평면을 사용하는 게임에서는 어떨까? 게임 내 원근법과 캐릭터의 이동, 크기, 비율 문제는 우리의 플레이 경험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MMORPG 게임의 경우 몬스터가 아닌 이상 혹은 몬스터조차도 배경 세계의 원근법에 착실히 순종한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임이 설정한 휴먼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며 캐릭터를 제외한 인게임 요소들, 예컨대 건축물, 아이템, 탈 것, 펫, 배경 같은 것들도 캐릭터의 크기에 맞추어 하나의 완결되고 고정된 원근법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1인칭 FPS 게임에서는 이 원근법이 더욱 강화된 형태로 드러난다. 서든어택이나 오버워치 같은 게임들에서는 주로 화면 정 가운데에 십자 모양이나 원, 탄젠트형의 에임(aim)이라고 부르는 조준점이 있다. 이 에임에 맞추어 1인칭 플레이어의 무기를 든 손이 정렬되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1점 투시 원근법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면 중앙에 소실점(vanishing point) 하나가 놓이는 1점 투시 원근법의 제1규칙, 가장 중요한 것을 소실점에 놓는다는 규칙은 회화에서 수차례 변용되었고, (프레임이라는 천성 때문에 회화에서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지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객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무엇을 둘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이런 게임들이 상정하는 게임 내 원근법은 우리의 실재와 최대한 유사하게 조성한다는 하나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게임들의 카메라가 얼마나 인간 같지 않은 시야로 날뛸 수 있느냐에 상관없이, X축과 Y축은 고정되어 있다. 아주 잠시 이색적인 뷰로 한 장면을 비춘다고 하여도 플레이의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는 X축과 Y축이다. 그러나 AOS 게임의 경우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도타나 카오스(CHAOS),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 같은 게임들이 포함되는 AOS 게임의 경우 축약되고 매우 인위적으로 가공된 세계를 배경으로 사용하며 이미 우리의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원근법, 그러므로 쉽게 도식화하기가 곤란한 형태의 원근법이 화면을 구성한다. 내가 가장 많이 플레이 해 본 리그 오브 레전드를 두고 논의를 좁혀 보자. 일반적으로 2차원 평면을 사선으로 기울인 쿼터 뷰(Quater View)를 사용하는 2.5차원 게임에서 X축과 Y축은 마름모 모양의 면을 구축하고 그 위에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맵을 비교해 보면 전자의 맵은 다이아몬드형, 후자의 맵은 정사각형으로 보기에 약간 다르지만 쿼터 뷰 게임이 설정하는 X축과 Y축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그림 1). (그림 1) 쿠키런 킹덤과 리그 오브 레전드의 소환사의 협곡 지도 (출처: 좌-쿠키런 킹덤 공식 유투브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VUIy7RaHcL4, 우-리그오브레전드 나무위키 https://namu.wiki/w/소환사의%20협곡)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특히 더 흥미로운 것은 이 Y축이 Y축이 아니라 X축으로 인식된다는 점에 있다. 퀸의 ‘후방지원’이나 자야의 ‘저항의 비상’ 같은 특정 챔피언의 특정 스킬은 X축 면에서 도약하며 (미니)맵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인게임 Y축을 가시화한다. 아예 Y축의 패러미터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형식의 스킬을 사용하는 갈리오나 판테온 같은 챔피언들도 있다. 아주 얕은 수준이지만 렉사이 같은 챔피언은 X축 평면 아래, 즉 -Y축의 공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의 시점을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2.5차원 쿼터 뷰로 설정하면서, 앞서 언급한 챔피언들이 스킬 사용으로 지면을 도약하면서 인 게임 원근법을 떠받치는 X축과 Y축이, 그리고 숨겨져 있던 Z축이 등장하며 서로 뒤엉키게된다. (좌, 그림 2) 쿼터 뷰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우, 그림 3)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이 상정하는 공간의 구성 원리 챔피언이 지면을 도약하면 지면 위에서 이동 시 Y축이 자연스럽게 Z축으로 변하고, 챔피언이 도약하는 방향은 Y축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챔피언은 X축의 연장된 면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데,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 X축의 방향이 달라지고, 여러 개의 방향이 이어지면서 X축은 (그림 2의 Y축이었던) Z축까지 가 닿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근법에 상관없이, 각 라인은 미니맵에서 보여지는 순서대로 탑-미드-바텀이다.) 즉, 리그 오브 레전드의 원근법은 고정된 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게임의 원근법은 캐릭터의 이동과 도약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축들을 뒤섞는다. 플레이어는 평균 20분의 플레이 타임 안에서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유동적인 축들에 놀랍도록 매끄럽고 빠르게 적응하는데, 이는 이전의 초지일관(初志一貫)적 시각성과는 물론 다른 양상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하나의 세계가 제공하는 원근법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다시 저것에서 이것으로 전환되는 유동적인 원근법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우리의 변화된 시각성이기도 하다. 이에 덧붙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스킨이나 캐릭터의 크기가 스킬의 적중 여부를 좌우하기도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챔피언 스킨 때문에 게임 내에서 챔피언의 크기와 부피, 모양, 그리고 스킬의 크기와 부피가 달라지면 조준의 방법도 미세하게 바뀌게 된다. 최근 추가된 서리불꽃 건틀릿(Frostfire Gauntlet) 같은 아이템에는 챔피언 크기를 키우는 옵션이 달려 있다. 인터넷에서 롤 챔피언 크기라고 검색하면 이 옵션이 도대체 왜 있는 거냐는 플레이어들의 의문과 위엄을 위하여, 재미를 위하여, 논타킷 공격을 대신 맞아 아군 보호, 사거리 증가 등의 답변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자신의 기존 캐릭터에 맞추어져 있던 원근법의 축 변화와 그로 인해 재구성된 시각성에 기반하는 공간감에 시시각각 적응하고야 만다. 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시각성이 기존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이 글의 주장을 보완하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캐릭터의 비율, 스케일, 거리감, 공간감 등 원근법에 관여된 여러 문제들이 관건에 오르게 된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 “이걸 맞는다고?” 혹은 “이걸 안 맞는다고?”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내 캐릭터에 스킬이 닿지 않았는데도 맞았다는 판정, 닿았는데도 맞지 않았다는 판정이 의아하기도 하다. 이처럼 이해되지 않는 판정의 순간은 오히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형성하는 공간감, 하나의 원근법에서 다른 원근법으로 교체되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할 시각성에 관하여 고민하기에 더 없이 적절한 출발점이다. 모니터 평면 안의 크기와 비율, 스케일과 동기화되어 있던 우리 신체의 공간감이 끊기고 기존 원근법의 축이 변화하는 지점, 플레이 시간 내내 계속해서 눈의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인 게임 원근법의 변화무쌍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한다.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1] 물론 입체 매체, 예를 들자면 조각에서도 원근법은 중요한 문제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들은 사람의 실제 몸과 비교하자면 머리가 훨씬 더 크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각을 주로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기 때문인데, 실제 사람의 비율대로 제작하면 멀리 있는 머리가 더 작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원근법은 크기와 비율의 문제에 관여한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 ​

  • [Editor's view]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Back [Editor's view]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02 GG Vol. 21. 8. 10. 근래들어 출시되는 많은 게임들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는 ‘복고’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 넘은 게임들이 새로운 플랫폼과 형식으로 다시 현역 복귀 신고를 줄줄이 하고 있는 분위기다. 왕년의 인기 게임들은 함께 성장해 이제는 중장년에 이른 게이머들에게 추억을 앞세우며 다시금 인기를 몰았다. 가장 최근 출시한 <디아블로 2: 레저렉션>은 20여년 전 게임규칙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PC방 게임순위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게임의 역사도 어느새 반세기가 넘어가기 시작한 만큼, 게임에도 이제는 복고라는 말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많은 인디게임들이 내세우는 8비트 도트그래픽 풍은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변하는 와중에 하나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고전 게임들이 안겨줬던 감성들은 이른바 ‘정신적 후속작’들을 통해 계승되기도 한다. <게임 제너레이션> 2호의 테마는 ‘레트로, 클래식, 복고’다. 복고 열풍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게임의 역사가 나름의 숙성을 거쳤다는 반증이고,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어떤 일련의 흐름들에 주목할 필요를 떠올린다. 과거지향적이면서도 마냥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레트로 게임들과 그 계승작들은 오늘날 우리에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인트로의 두 글은 각각 클래식 게임을 상정한다면 어떤 조건일지에 대한 고민과, 오늘날 레트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의 저변에 자리한 노스탤지어로서의 감성을 다룬다. 메인 기획에서는 레트로 시절에 존재했던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을 더듬고, 인류 최초의 디지털게임 세대로 일컬어볼 수 있을 노년 게이머의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보고자 했다. 인디게임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레트로 양식의 재구현은 어떤 맥락일지를 검토하고, 한국이 아닌 북유럽에서 이뤄지고 있는 레트로게임에 관한 담론들을 받아보았다. 트렌드 섹션의 세 꼭지 중 첫번째는 9월 팬데믹 상황에서 진행된 부산인디커넥트 2021 현장 직관의 경험을 듣고자 했다. 현직 변호사가 보는 <역전재판>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디아블로2: 레저렉션>의 출시를 기점으로 블리자드라는 대형 게임사의 변화를 지켜보고자 했다. 2호의 아티클들은 1호보다 숫자를 늘려 좀더 풍부하게 구성하고자 했다. 조이스틱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게임과 게이머의 공진화를 살펴봄으로써 기술문화연구의 측면에서 게임에 접근하는 시선의 의미를 볼 수 있었고, <퀘이크> 리마스터에 대한 비평은 메인기획에서도 다룬 레트로의 유유한 흐름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세계 최대 게임시장이면서도 정작 알려진 바는 적은 중국의 초창기 게임사에 대한 해외기고글은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새로운 정보들을 제공한다. 새로 신설한 북리뷰 코너에서는 매 호마다 게임을 다루는 서적과 논문, 연구자료들을 접하기 쉽게 정리하고자 한다. 첫 글로는 게임의 폭력성 문제를 다루며 올해 번역 출간된 <모럴 컴뱃>을 함께 읽는다. 게임을 다루는 젊은 작가들의 시도는 각각 게임에서 벌어지는 모험에서 나타나는 젠더 문제와 초창기 3D그래픽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접근을 다룬다. 인터뷰 기사는 오래된 레트로게이머이자 유튜버인 ‘꿀딴지곰’과 나눈 레트로게임 이야기와 ‘서울2033’으로 알려진 인디게임개발사 반지하게임즈 이유원대표와 나눈 인디게임 이야기를 정리했다. 프로그램 자체는 아카이빙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정작 프로그램을 통해 플레이어가 만들어낸 플레이는 설령 화면을 녹화한다 하더라도 보존이 쉽지 않은 것이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의 독특한 점일 것이다.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남은 편린을 여러 필자들과 함께 되짚으면서 떠오른 것은 지나간 나의 게임 플레이 순간들이었다. 말로 설명하려 해도 쉽게 전달되지 않는, 그러나 나의 기억 안에서만큼은 너무나도 짜릿했던, 혹은 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어떤 순간들은 기록하고 보존할 수 없기에 더욱 아련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노랫말대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레트로 게임을 거쳐 간 이들의 플레이일지도 모르겠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이코'에서 '갓오브워'까지: 사랑의 대상과 게이머의 나이듦에 대하여

    < Back '이코'에서 '갓오브워'까지: 사랑의 대상과 게이머의 나이듦에 대하여 16 GG Vol. 24. 2. 10. 게임 규칙을 넘어선 감정 투영 대상으로서의 등장인물 초창기 게임의 역사 속에서 가족은 게임 안이 아니라 게임 밖의 존재였다 . 플레이어 캐릭터는 대체로 혼자 위험천만한 스테이지들을 돌파해 나갔지만 ,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는 환경은 게임사의 광고에 의해 늘 가족적인 무언가로 일컬어지곤 했다 . 닌텐도 등의 가정용 콘솔 기기는 항상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거실에서 온 가족이 함께 게임하는 장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와 함께 하는 이들은 가족이라기보단 주로 ‘ 동료 ’ 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었다 . 롤플레잉 게임의 파티 시스템 , 여러 게임에 등장하는 조력자 등은 나름의 끈끈함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기능적인 관계맺음을 플레이어와 이어나가는 동료로서의 존재였다 . 2000 년대 들어와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 이코 ’ 는 그런 점에서 눈에 띄는데 ,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시작부터 끝까지 모험을 함께 하는 요르다는 ‘ 동료 ’ 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엔 사뭇 이질적인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 플레이어는 딱히 공격력이 없는 요르다의 손을 붙잡고 게임을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 분명 퍼즐과 같은 요소들에서의 해결을 돕는 조력자의 포지션이지만 실제로 ‘ 이코 ’ 를 플레이한 이들이 요르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동료보다는 조금 더 진한 무엇이었다 . 함께 싸우면서도 플레이어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존재로서의 요르다는 동료이자 퍼즐의 열쇠라는 기능적 관계 이상의 존재로 플레이어들에게 각인된 바 있었다 . 유사가족 관계의 조엘과 엘리 ‘ 이코 ’ 로부터 대략 10 여 년이 지난 뒤에 출시된 게임 ‘ 라스트 오브 어스 ’ 는 유사 가족 관계에 놓인 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모험을 풀어가는 새로운 시점을 선보였다 . 중년의 남성 주인공 조엘은 게임 프롤로그에서 딸을 잃었고 , 그런 그에게 임무로서 맡겨진 엘리라는 아이는 잃었던 딸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십대 소녀다 . ‘ 이코 ’ 처럼 둘은 서로 도와 가며 험난한 세계를 헤쳐나가지만 , ‘ 이코 ’ 에 비해 좀더 엘리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변화 혹은 발전이 있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무대 속에서 조엘과 엘리의 이야기는 단순히 모험의 기승전결을 풀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잘 맞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일종의 유사 가족 관계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진한 감동을 만들어낸 바 있었다 .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 라스트 오브 어스 ’ 로부터 받은 감정은 삭막하고 외로운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감정을 함께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유사 가족 관계가 유독 더 따뜻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갓오브워'에 이르러 혈연 가족으로 등장하는 조연 2001 년 ‘ 이코 ’ 에서 동료를 넘어선 무언가로 , 2013 년 ‘ 라스트 오브 어스 ’ 에서는 유사 가족 관계라고 이름붙여도 좋을 , 플레이어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존재는 2018 년의 ‘ 갓 오브 워 ’ 에서는 본격적으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으로 등장한다 . 전쟁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 시대를 휩쓸었던 주인공 크레토스는 후속작에서 아들을 둔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 크레토스의 캐릭터는 이러한 관계설정의 변화를 통해 크게 바뀌는데 , 전작에서는 가족을 잃은 뒤 신의 아들로서 자녀의 포지션을 맡았던 크레토스가 후속작에서는 가족관계 안에서의 아버지 포지션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 실제로 게임 안에서 크레토스와 아들 아트레우스의 관계는 철모르는 아이의 육아를 도맡는 크레토스의 관점으로 그려진다 . 아트레우스는 나름의 전투력은 갖추고 있지만 여전히 보호해야 할 대상이며 , 내러티브를 통해 크레토스는 아들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풀어낸다 . 후속작 ‘ 갓 오브 워 : 라그나로크 ’ 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는 아트레우스의 옆에서 자녀의 성장과 함께 부모가 맞는 새로운 도전들이 함께 그려지는 것을 보면 , ‘ 갓 오브 워 ’ 의 북유럽 시리즈는 상당부분 자녀라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맞았지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될 지는 모르는 부모의 입장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이들어가는 게이머 게임 안에서 기능적 조력자 이상의 감정을 담아내는 캐릭터와 주인공 캐릭터 사이의 관계는 ‘ 이코 ’ 의 2001 년부터 ‘ 갓 오브 워 ’ 의 2018 년 사이 근 20 여년 속에 점차 변화해 왔다 . 이 변화는 지켜야 할 동료에서 ‘ 라스트 오브 어스 ’ 의 유사 가족관계를 거쳐 마침내 혈연관계로 점차 가족이라는 구성을 향해 움직였는데 , 이는 특히 주인공 자체의 변화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 명확하게 ‘ 소년 ’ 의 포지션이었던 ‘ 이코 ’ 의 주인공과 달리 ‘ 갓 오브 워 ’ 의 크레토스는 명백하게 중년 남성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다 . 현실의 시간 변화를 함께 생각해 보면 게임 속 주인공 캐릭터의 나이듦은 마치 현실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2001 년에 소년이었던 주인공은 2018 년이 되면 열 일곱 살을 더 먹게 되는데 , 만약 2001 년 당시 20 세였던 플레이스테이션 이용자가 2018 년이 되면 37 세가 되는 것이다 . 단순한 생물학적인 나이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이 20 년 사이의 간극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갖는 주변 인간관계를 크게 변화시키고도 남을 시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 ‘ 이코 ’ 를 플레이하던 청년은 20 년 후 중장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20 년 전의 게이머들이 지금보다 젊은 세대였다면 , 이제 게이머 집단은 과거보다 조금 더 폭넓은 연령층이 되었다 . 디지털게임 이용자층은 연령과 성별 , 지역과 같은 여러 측면에서 과거보다 보편화되며 넓어졌고 , 과거 단지 어린이들의 놀잇감으로만 여겨졌던 게임은 적어도 ‘ 갓 오브 워 ’ 에 이르면 명백하게 중년기 게이머들을 타겟으로 삼는다 . ‘ 갓 오브 워 : 라그나로크 ’ 에서 다루는 사춘기 자녀의 방황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게임 주인공 캐릭터에 덧씌우는 일은 간접적으로 오늘날의 게이머들이 갖는 평균 연령이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의미한다 . 게임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일련의 유대관계와 사랑을 표현한다고 한다면 , 이 사랑은 게이머 집단의 나이듦에 따라 다른 형태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20 년 전의 게이머들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남성중심인 집단이었고 , 그런 그들에게 사랑은 가족보다는 신비함을 간직한 여성 캐릭터에게 투영된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장년이 된 그들에게 사랑의 투영 대상은 이제 자녀라는 , 가족이라는 새로운 테두리 안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 이러한 변화는 꽤 곳곳에서 감지된다 . 2023 년 출시된 ‘ 디아블로 4’ 에서는 기존 시리즈에서 보지 못했던 수많은 서브 퀘스트들이 등장하는데 , 이 중 적지 않은 분량이 자녀를 둔 등장인물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 자녀의 훈육을 위해 감옥에 보낸 부모가 결국 자식을 잃은 뒤 후회하는 내용이라거나 , 집나간 아이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등 ‘ 디아블로 4’ 에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감정을 다루고자 하는 퀘스트들이 포함된다 . 비슷하게 2020 년대에 출시된 게임 중 ‘ 잇 테이크스 투 ’ 또한 게이머 집단의 세대 변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사례다 . 어린 자녀를 가진 중장년기 부부의 이혼 위기를 코믹하게 풀어낸 이 게임 또한 사실상 중년 부부가 만날 수 있는 삶의 시기를 스케치한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오늘날 스탠드얼론 게이머의 중심은 중장년이다 게임 주인공 캐릭터를 둘러싼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트렌드 변화가 주로 PC, 콘솔 기반의 스탠드얼론 게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곱씹어볼 여지를 남긴다 .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거치면서 점차 PC 는 가정의 필수 가전제품이어야 할 이유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 게임을 하기 위해 구비해야 하는 게임전용 PC 는 이제 꽤나 고가품의 영역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 콘솔게임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지만 , 일정 수준 이상의 디스플레이가 기본적으로 요구되고 , 타이틀 가격이 8~10 만원을 오가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 아이들의 문화활동으로만 보기 어려운 비용 장벽을 가진 셈이기도 하다 .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유료 기반의 온라인게임들과 달리 , 일정 수준 이상의 공간과 시간 , 비용을 요구하는 PC/ 콘솔 기반의 스탠드얼론 게임들은 이제 확실히 중장년을 메인으로 삼는 활동이 되었다 . 게이머가 나이를 먹어 가는 과정과 함께 게임 콘텐츠 또한 나이를 먹었고 , 나이들어간다는 변화 속에서 게임을 통해 표현되는 게이머와 주인공 주변의 인간관계 또한 다르게 그려진다 . 모두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연애 – 결혼을 거치는 이른바 ‘ 정상가족 ’ 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 적어도 기술복제를 통해 대량유통되는 미디어 콘텐츠인 디지털게임은 산업적 관점에선 정상가족 안에서 부모라는 위치 혹은 그와 비슷한 세대가 겪게 되는 감정의 과정들을 다루고 싶어한다 . 지난 수십 년간 게임에 일어난 변화는 그래서 단지 기술의 발전과 이용자층의 확대만이 아니라 , 이 매체가 다루고자 하는 감정과 관계에도 나타난다 .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 Back 로우스코어 걸: (Not Really) Full Game Walkthrough 03 GG Vol. 21. 12. 10. 게임의 현실성에서 빠져나와, 잠시 현실의 게임성을 생각해보자. 세계가 0과 1의 현실로 재구성되고 있다 해도, 거기서의 ‘룰즈 오브 플레이’와 그에 따른 난관이 본질상 그대로라면 세계는 언제까지나 익숙한 현실일 뿐이다. 불균등하고 블록화된 구조로 작동하는 접속가능성(connectivity)이라든지, 메타버스와 관련해 각종 투기가 당연하다는 듯 횡행하는 상황 등을 둘러보면, 과거의 기술 물신적 낙관과는 다르게 가상 인프라의 역능 역시도 딱히 평평해지지 않는 세계의 현실에 귀속되어 있는 것 같다. * 《MODS》 (사진: 박승만) 공적 기금에 의지할 기회를 얻어서야 겨우 전시를 만들 수 있는 기획자 입장에서, 그럴 때마다 필자가 처한 상황도 그 현실의 일부임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된다. 동료 기획자들과 각자의 게이머적 시선으로 게임을 시각 예술의 문제와 교직해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MODS》 1) (합정지구, 2021)에 참여하면서, 우리 팀은 가상성과 링크된 레토릭으로서의 게임보다는 ‘경기’로서의 게임을 경유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기획된 게 바로 〈로우스코어 걸 Low Score Girls〉이다. 제목의 참조 대상은 다름아닌 〈하이스코어 걸 ハイスコアガール〉로, 이 만화의 주된 내러티브 공간인 아케이드 센터는 경기로서의 고전적 성격에 방점이 찍힌 장르의 게임이 주로 서비스되는 곳이다. 〈로우스코어 걸〉은 시각 예술과 연계된 이런저런 현실적 ‘난관’들에 대응하는 참여 작가들을, 그런 게임 안에서 경기의 논리를 배반하며 임의의 트랙을 질주하는 게이머들처럼 가시화하려 했다. ‘설정된 경로를 주파하는’ 게임 경험의 압축적이고 간명한 구조 때문인지, 레이싱은 과거 아케이드 게임 업계가 새로운 재현 기술을 우선적으로 시도해볼 수 있었던 주된 대상이었다. 세가(Sega)가 자랑했던 전설적 크리에이터 스즈키 유(鈴木裕)의 원근법적 집착으로 1985년 등장한 〈행온 Hang-On〉은 최초의 ‘체감형’ 레이싱 게임으로,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스프라이트 확대/축소 기능으로 구현된 유사 3D 서킷을 바이크 형태의 컨트롤러에 올라타 공략하게 된다. * 김예슬, 〈Skid〉 (사진: 박승만) * 〈Skid〉에 사용된 영상 김예슬의 〈Skid〉는 그런 식의 ‘체감’이 여과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기념비로, 스턴트 바이크 라이딩을 촬영한 라이브 푸티지와 CBR250을 커스터마이즈한 실제 스턴트 바이크가 활용됐다. 다리 밑이나 공터, 또는 공사 중인 고속도로 현장과 같은 곳을 물색해 이루어지는, ‘공도’ 밖의 장소에서야 구성 가능한 게임인 스턴트 라이딩. 스턴트 동작에 적합하도록 개조된 탓에 번호판이 부여될 수 없는 바이크는, 신체를 운반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차라리 신체의 연장에 해당하는 무엇처럼 다가온다. 일정한 물리적 위험이 담보된 채 스턴트 동작을 실연하는 순간의 자족적 열락과 같은 건 과연 ‘체감형’ 게임으로 재현될 수 있을까? 더불어, 시선을 과거로 돌려, ‘스포츠’로서의 바이크 너머 과거로 밀려난 오랜 ‘폭주’의 역사에 대해, 재현의 윤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고, 할 수 없었을까? 영상과 격절돼 단상 위로 미끄러진 ‘실물’ CBR250은, 열화된 현실인 게임과 열화된 게임인 현실 사이에서 진동하며 그런 부류의 질문들을 환기한다. * 김효재, 〈파쿠르 Parkour〉 (사진: 박승만) 김효재의 영상 설치 작업인 〈파쿠르 Parkour〉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아예 세계의 필요충분조건이 된 사변적 지평에서의 프리러닝을 다룬다. 1인칭 액션 게임 〈미러스 엣지 Mirror’s Edge〉의 소재였던 스포츠 파쿠르(Parkour)의 명칭은 ‘여정(journey)’을 뜻하는 프랑스어 ‘parcours’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렇듯 파쿠르는 규칙에 따른 순위를 다루는 ‘경기’가 아니라, 신체 능력만으로 지형지물에 자유로이 호응해 달려가며 이루어지는 구도적 수행이다. 파쿠르에 임하는 동안의 여정에서 느낄 수 있는 위험과 두려움이란 수행자에게 있어 자기 한계의 인식이기도 하지만, 그건 육체로부터의 예비된 자유를 지시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파쿠르 Parkour〉의 화자는 타율적 스틱과 버튼으로 매개되어야만 했던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에서의 ‘몸’이 완전히 불식된 세계를 살아가는 신인류로서, 현재의 파쿠르적 실천을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실현된 가능성의 잠재태로서 소환한다. 모든 게 데이터로 환원되어 연결된 세계. 그래서 ‘에어플레인 모드’에서조차 그 무엇과도 데이터 전이를 일으킬 수 있는 세계. 그곳에서 ‘몸’은 특정한 정체성의 고정적 준거가 아니라 유동적 연결망 내에서의 노드(node)에 가까운 잠정적 윤곽일 뿐이며, 의식의 흐름과 파쿠르적 몸짓은 같은 것이 돼 그 자체로 〈파쿠르 Parkour〉의 이미지 시퀀스를 형성하면서,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트랙션 데모를 보여준다. * 문주혜, 〈Dragon and Ten of Swords (사진: 박승만) 문주혜의 〈Dragon and Ten of Swords〉에서 미리 추상화/모듈화된 오브젝트의 집적으로 2D 횡스크롤 슈팅 게임의 보스처럼 보이는 용, 그리고 레이어의 질서를 넘어 근경에서부터 원경의 용의 몸을 베어내고 있는 듯한, 구상적 형태를 취하되 장식적 어조로 반복되는 검들의 조합은 지난 두 번의 개인전에 걸쳐 시도했던 상이한 작업 방식이 종합된 결과다. 작법을 변주하는 가운데 문주혜는 일관되게 전통적 재료인 장지를 사용하면서, 그 특유의 ‘스며드는’ 물질성을 통해 자신이 플레이하던 게임에서 채집했거나 참조한 이미지를 ‘봉인’해왔다. 크리스 고토-존스(Chris Goto-Jones)의 논의 2) 에서와 같이 게이머를 전통적 의미에서의 ‘무사’로 바라볼 수 있다면, 게이머의 의경(意景)이 표현된 회화는 일종의 사인화(士人畵)라 할 수 있을까? 문주혜의 작업을 두고 관성적으로 ‘동양화’라는 표현을 쓰는 부주의는 그런 농담 같은 지점에서야 그나마 허락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이 동양화라는 개념에 이제 어떤 의미론적 ‘규칙’이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행적 접근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굳이 농담처럼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맥락화와 역사화를 위한 동일성의 도식을 애써 추출해내려는 시선을 억제하고, 제도화된 개념인 ‘동양화’를 김효재의 〈파쿠르 Parkour〉가 ‘몸’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때의 가능한 운동성은 무엇일까? 〈로우스코어 걸〉의 후속 프로젝트는 바로 그 지점을 재차 게임과 결부시키며 출발하는데, 이에 대해선 〈로우스코어 걸〉의 공동 기획자 홍성화에 의해 추후의 지면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MODS》의 다른 프로젝트들이 기획자가 작가에 가까운 롤을 수행한 결과물을 선보이거나(TTT, 파핑파핑 리얼리티), 팀업된 기획자와 작가 각각의 결과물이 같은 층위에서 작동하게끔 하면서(Sync) 어느 정도씩은 거리를 뒀던 전시로서의 전형성을, 〈로우스코어 걸〉은 일반화된 양상의 기획전 형식을 취해 오히려 최대한 가져가고자 했다. 여기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로 〈로우스코어 걸〉은 《MODS》가 필연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는 ‘전시’란 형식을, ‘작가’, ‘공중(public)’, ‘예술’, 그리고 ‘예술계’와 같은 것들을 성립시키는 회로로부터 출력된 ‘게임’의 일부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볼 때 나머지 세 프로젝트가 그 시스템에 기판의 규격이 허용하는 어떤 외부 장치 같은 게 결합된 결과에 해당한다면, 〈로우스코어 걸〉은 순정 상태에 가까운 그 게임을 김예슬, 김효재, 문주혜 세 작가가 플레이하는 방식을 익숙한 ‘게임’의 장르적 이미지를 맥거핀 삼아 드러내고 싶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우린 〈로우스코어 걸〉이, 《MODS》에 빌트인(built-in)된 뭔가를 합정지구 1층에 선행 적시해두는 기획전이자 일종의 해체적 아케이드 센터로 보이길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코인 투입구 없이, 아무런 조작계 없이, 워크스루(walkthrough) 영상이나 마찬가지인 ‘보는 게임’임을 견지하면서, 그리고 나아가 ‘기판과 게이머의 단절’에 ‘플레이와 구경꾼의 단절’이 친화적으로 중첩되는 장일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전시와 관객 사이를 상호적이게 하는 충분히 투명하고 반질반질한 어떤 접면이 있어서 거기서부터 현실을 초과한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식의 향긋한 모델은 늘 의심스럽기에. ‘전시’와 ‘관객’이라는 조건부터가 이미 현실의 회로에 의한 구성물이기에. 1) https://www.artbava.com/exhibit/mods/ 2) Chris Goto-Jones, “Is Street Fighter a Martial Art? Virtual Ninja Theory, Ideology, and the Intentional Self-Transformation of Fighting-Gamers.” Japan Review 29 (2016): 171-208.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술기획자) 김세인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 멤버. 레거시로서의 미술, 또는 서브컬처로서의 미술에 대해 가끔씩 생각하며, 가끔씩 전시를 기획한다. ​ ​

  • 이렇게 흥미로운 스토리에 이렇게 진부한 요소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SF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의 충돌

    < Back 이렇게 흥미로운 스토리에 이렇게 진부한 요소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SF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의 충돌 10 GG Vol. 23. 2. 10. 엉덩이 모핑이 주가 되는 게임은 아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이하 〈니케〉)는 2022년 11월 시프트업에서 제작하고 레벨 인피니트에서 서비스하는 FPS/TPS 모바일 게임이다. 출시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광고에서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2019년 처음 트레일러가 발표되었을 당시 캐릭터들의 섹슈얼한 디자인과 가슴과 엉덩이의 모핑(morphing)이 과도하게 부각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화젯거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2022년 출시를 앞두고서도 미디어를 통한 광고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부각된 광고가 있었다. 그래서 출시 이후 게임에 대한 리뷰에 접근하는 유튜브 채널들 등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알 수 있다. 출시된 게임은 제작사인 시프트업의 이전 작품들이 그랬던것처럼 수려하지만 섹슈얼리티를 한껏 강조한 여성형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이들 캐릭터를 수집하여 플레이어인 지휘관이 일종의 미소녀 하렘을 만드는 형태를 보여준다. 거기에 가슴과 엉덩이 모핑이 강조된 게임이라니, 이러한 요소들을 좋아하는 유저들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정도의 의미에 그치는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진짜 흥미로운 요소들은 사실 부각해 광고한 것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바로 세계관의 설정과 스토리텔링이다. 우선 〈니케〉는 아주 완성도 높은 SF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세계관의 설정과 그 안에서 주가 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인 ‘니케’의 설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스토리 모두 잘 짜인 상태이다. 특히 튜토리얼 성격의 첫번째 챕터 이후에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홍보에 그치는 기타 게임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세계관 전체를 잘 조망하고 플레이어가 선택한 ‘지휘관’에 나를 이입시키는 장치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계속해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제작사는 왜, 엉덩이 모핑을 전면에 내세워서 게임을 홍보하는 전략을 취한 걸까? 게다가 인게임 상황에서는 더더욱 의아함이 커진다. 광고 등에서 한껏 강조했던 게임 상황에서의 캐릭터들의 뒷모습에서 보여주는 모핑은 눈길을 보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아무리 에임(aim)을 자동으로 설정해 놓고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더라도, 중간중간 상황에 개입해 줘야 하고 미션의 진행사항을 확인해 봐야하는 경우 캐릭터들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만한 여유는 없다. 결국 게임을 하는 상황에서는 이들의 캐릭터 디자인 정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캐릭터 정보창에 가서 따로 확인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승리의 여신: 니케〉에서 초반 광고로 부각되었던 엉덩이의 모핑과 같은 요소는 게임에 대한 특정 유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로만 작용하고, 게임을 수행하게 하는 요소로는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1) 그렇지만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스토리텔링인데, 한국에서 생각보다 많이 시도되지 않았던 SF적인 장르 세계관을 충실하게 구현해서 스토리 자체의 몰입감을 유의미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의 몰입도를 판단하는데 스토리텔링만 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니케〉의 경우 게임을 진행하게 하는 요소에 스토리텔링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세계관 자체가 그동안 한국에서 나온 SF 세계관의 게임 중에서도 꽤 완성도 높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완성도 높은 SF 스토리텔링의 장점 〈니케〉는 SF에서 자주 사용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상황에서의 디스토피아(Distopia)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들은 왜 아포칼립스 상황이 닥쳤는가에 따라서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의 양상과 구체성이 달라지게 되는데, 〈니케〉의 경우 아포칼립스를 추동한 요소가 기계 생명체인 ‘랩쳐’의 공격을 받고 지상에서 지하로 피신해 방주라는 거대 시설에서 생존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디스토피아 물이 그렇듯, 인류는 기계 생명체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니케’라는 사이보그를 발명했고, 그들을 통해 랩쳐들의 침공을 저지하고 랩쳐들에게 빼앗긴 지상의 탈환을 위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 이미지 출처: https://www.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19867063836200&id=100232432466330&_rdr 여기에서 흥미로운 지점들은 ‘니케’를 사이보그로 설정하고, 그들이 기존에는 보통의 인간이었으나 개조되면서 뇌를 NIMPH(Neuro-Implanted Machine for Protecting Human)라는 나노머신에 의해 컨트롤 당하는 개체들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으로 인해서 캐릭터들이 가지게 되는 다양한 요소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각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들을 소거당하고 인간에 의해서 조종되는 인형과 같은 존재들이 되었지만 유기체 뇌를 여전히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계의 몸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다양한 스토리의 설정이 가능하다. 이는 캐릭터들을 수집해야 하는 게임에서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존에 인간을 변형시켜 사이보그로 만들었다는 캐릭터들의 기본 설정은 비인간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억지스럽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니케〉는 캐릭터를 단순히 수집하고 단순히 전투의 지휘관으로 통제권을 가진 사용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는 것과 같이 캐릭터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재미를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내가 수집한 캐릭터들은 단순히 게임에서 활용하는 도구에서 그치지 않고, 수집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관계가 발전되는 형태를 보여준다는 특징이 생긴다. 2) 또한 이 지점에서 SF 스토리텔링의 성공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 흔히 비인간 캐릭터들을 설정하면 인간보다 월등한 특수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는 것에 그치는데 비해 〈니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비인간 캐릭터들은 뛰어난 능력과 함께, 인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같은 것들이 함께 부가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해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비인간 캐릭터들의 가능성들을 오히려 제한하는데, 〈니케〉에서는 사이보그(Cyborg)라는 설정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명확하게 활용하여 이러한 지점들을 극복하고 스토리의 풍부함을 확보하고 있다. 3) 그러기 때문에 게임 스토리 내에서 ‘니케’들은 자신이 인간으로부터 개조된 사이보그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도구라는 사실에 자조하거나 절망하기도 하지만 굳이 인간을 닮거나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인간과 니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사회적인 부조리나 그 사이에 일어나는 다양한 가치의 충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충돌에 마치 만화의 주인공처럼 부딪히는 주인공(유저)의 시각은 SF 스토리텔링이 보여주는 지금의 현상 너머의 진보적인 가능성을 그리는 특징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게다가 거대 사기업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기술력으로 회사를 구성하고, 수집해야 하는 ‘니케’들 역시 그 회사의 특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정들은 수집의 또 다른 구체성과 흥미를 유발한다. 일리시온(ELYSION)과 미실리스(MISSILIS), 테트라(TETRA)라는 거대 기업들이 소위 플레이어의 수집대상인 엘리트 니케들을 제작하는 회사들인데, 각각의 회사들 마다의 특징이 명확하게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서 등장하는 ‘니케’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프랭크 하버트(Frank Herbert)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듄(DUNE)〉에서의 세력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러한 구체적인 설정과 세계관 구조의 치밀함은 단순한 수집을 넘어, 캐릭터들을 확보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이야기가 풍부해진다는 장점을 가져온다. 섹슈얼리티한 캐릭터 디자인과 모핑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와 같이 〈니케〉는 SF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그동안 한국에서 선보였던 게임뿐 아니라 웬만한 미디어 콘텐츠를 통틀어서도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SF 스토리텔링의 경우 장르가 가지고 있는 관습(convention)이나 코드(code) 들의 외향적인 요소들만 차용하여 서사 내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2010년대 이후 소설 등에서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소되었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비롯해 게임과 같은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유독 그러한 문제점들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니케〉의 경우, 이러한 아쉬움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정도로 SF 스토리텔링을 적확하게 구현하고 있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캐릭터들을 모아서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다양하게 마주하는 문제와 해결 방식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부터, 해결을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인식의 전환 양상 역시 SF에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SF를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사고실험을 구현하고 있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나 〈호라이즌〉 시리즈와 같은 작품과의 결은 다르지만, 오히려 그들 작품에서 지나치게 프로파간다적이고 무겁게 다루려 했던 지점들을 재치있게 풀어냄으로써 모바일 게임이라는 형식 내에서 취할 수 있는 의미들을 효과적으로 구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오히려 캐릭터들에 반복되고 있는 섹슈얼리티한 디자인의 강조나 모핑 요소와 같은 것들이 더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아쉬움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등의 문제로 단순히 게임을 판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했을 때도 이러한 요소는 장르의 특성에서 효용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내에서 가상적 실재감을 확대시키는 현전감(Sense of Presence)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했을 때, 게임 플레이 시에 느껴지는 구체적인 정보가 시각작용, 그리고 그에 따라서 움직이는 조작감과 인터페이스의 요소들이 중요하다. 4) 하지만 〈니케〉에서는 게임 플레이시에 아주 복잡하고 거대하게 발생하는 적(랩쳐)을 처리하는 FPS라는 게임의 특징 상 짧은 시간내 복잡한 요소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가 처리해야 하는 상대에 내가 지정한 에임이 정확하게 가 있는가를 확인하고 혹여 빗나가 소모되는 탄이 없는지를 확인 해야지 캐릭터들의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거기에 모핑 등의 요소들을 넣음으로써 오히려 게임 중 인지되는 정보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히는 듯한 경향도 있어 일종의 사이버 멀미(cybersickness) 5) 를 유발하기도 한다. 아무리 방치형 게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해도 비효율적인 정보들이 게임내 난립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게다가 〈니케〉가 스스로 그려 놓은 세계관 내에서도 이러한 캐릭터 디자인들이 충돌하는 경우를 만들어낸다.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인 지휘관은 아무런 편견 없이 사이보그인 ‘니케’들을 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이 그 세계의 균열을 만들고, 다른 부조리들을 없애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특히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데 익숙한 비인간 ‘니케’들을 오히려 능동적으로 타자화와 대상화하지 않고 동일한 객체로 인식하고 대하는 모습이 세계관 전체에서 드러난다. 수많은 세계관 내 부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역시 그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게임에서 유저들은 편견과 대상화에 맞서는 능동적인 주체를 수행함에도 유독 성적으로 대상화된 부분들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이상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스토리를 쌓아 올라가면서 다양한 전사를 가진 캐릭터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아픔과 한계를 공유하는 경험이 늘어나면서 더 크게 와닿는 부분들이다. 나는 이들을 편견 없이 동일한 개체들도 대하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부분은 인간들이 도구적으로 성적 대상화한 지점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각종 편견을 걷어내는 플레이어의 스토리 전개가 쌓아질수록, 반대로 내적으로 쌓이는 묘한 도덕적 부채감 역시 생겨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캐릭터 디자인을 단순히 유저들의 성향과 호응의 문제로 보기에는 진지하게 쌓아 놓은 세계관 위에서 잃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지점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사전 테스트에서 유저들의 반응을 조사했을 때 78%가 ‘캐릭터의 외형 및 설정이 매력적’이었다고 답한 것이 레퍼런스가 되었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특정 요소를 부각한 외형적인 것들로 판단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게임을 플레이하면 할수록 하게 된다. 오히려 78%가 답변했을 때 외형과 더불어 함께 배치된 단어인 ‘설정’과 37%를 각각 치지했던 ‘스토리와 세계관의 몰입감’과 ‘독특하다’라고 답변했던 지점들을 상기해 보았으면 한다. 6) 왜냐하면 〈니케〉는 한국에서 SF 스토리텔링이 미디어 콘텐츠에 구현되었을 때,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과 완성도를 가져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토리의 치밀한 구성과 완성도를 가진 게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특히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는 검과 마법의 세계에 비해 SF적인 미래와 경이감(Sense of wonder)을 형성하는 세계관의 구성이 여전히 미흡한 현 상황에서 〈니케〉는 이정표로 삼을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후의 환상적인 세계관을 구성할 때 SF적인 요소들이 더 확장될 것으로 기대되는 미래에 이러한 요소들이 좀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 해당 부분은 개발사에서도 실제 게임을 출시하면서 언급한 부분이다. “독특한 캐릭터 표현으로 주목받았으나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즐길 거리가 많아 감상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초반의 홍보는 정말 의도적으로 특정 유저층에게 어필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게임시장에서 대중적이지 않은 SF 세계관을 비롯해 FPS와 수집형을 동시에 배치한 게임의 성격을 우회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출처: http://m.game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34 ) 2) 물론 이러한 스토리의 발전에 따라서 관계성이 변화하고, 이전과 다른 행동이나 외향, 반응 등을 이끌어 내는 것 자체가 새로운 형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등에서 그동안 충실하게 보여주었던 방법이고, <니케>는 이러한 방식을 아주 열심히 게임 안에서 구현하고 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서비스가 시작된 <우마무스메>, <무기마도>, <블루 아카이브>, <에버소울>과 같은 게임에도 이러한 요소들은 기본적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 캐릭터 스토리에 공을 들이는 수집형 게임들은 꾸준히 관심을 받고 성공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니케>의 경우 탄탄하게 구성된 SF 세계관 내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 있는 캐릭터 스토리들을 만들어 냈다는데서 이후의 다른 SF 세계관을 구성하는 게임 및 미디어 콘텐츠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3) 사이보그(Cyborg)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를 일컫는다. 미디어에서 사이보그에 대한 대중성을 확보해준 대표 콘텐츠인 <로보캅>(1987)의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을 보면 사이보그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들은 SF 서사 내에서는 다른 비인간 캐릭터들인 로봇(robot)이나 안드로이드(Android)들이 그 시작부터 인간중심주의 적인 위계를 가지고 인간에 대한 저항과 동경을 가지는 존재로 그려졌던 것에 비해, 인간의 의미에 대한 확장인 포스트휴먼(posthuman) 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개체로 볼 수 있다. 4) 이승제, 조현주, 「FPS 게임에 나타난 현전감의 구성 용인 연구」,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6(4), 한국디자인문화학회, 2010, pp.426-427 참조. 5) Rebenitsch, L., and Owen, C. “Review on cybersickness in applications and visual displays.”, Virtual Reality, 20(2), 2016, pp.101-125. 6) http://www.game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853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평론가) 이지용 SF로 박사학위를 받고 SF평론을 비롯한 문화예술평론과 해당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를 빌미로 게임기를 구입하고, 만화를 사 모으며 온갖 OTT를 구독중이다. ​ ​

  • 낚시스피릿의 별매 낚시 컨트롤러로부터 본 게임 경험의 확장

    < Back 낚시스피릿의 별매 낚시 컨트롤러로부터 본 게임 경험의 확장 11 GG Vol. 23. 4. 10. 전세계에서 게임을 하는 입력 인터페이스로 가장 많이 이용 되는 것은 무엇일까. 몇 년 전이라면 자신있게 게임 패드라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지금은 터치 인터페이스 역시 적지 않기 때문에 자신있게 게임 패드라 말할 수 는 없겠다. 다만 터치인터페이스 위에 구현되어있는 가상 패드까지 고려하면 현재에도 게임 입력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입력 인터페이스는 게임 패드일 것이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보았을때의 경향이며, 한국에서는 가정용 게임기보다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게임이 더 익숙하기 때문에 흔히 키마라고 부르는 키보드 마우스 컨트롤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게임패드는 지금 보기에는 게임을 하기에 매우 당연한 도구이고, 게임을 나타내기 위한 아이콘으로도 흔하게 사용된다. 많은 게임들이 게임패드를 지원하며, XBOX용 패드가 윈도우와 매우 잘 호환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게임은 게임패드에 최적화된 경험을 제공합니다.” 같은 안내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처음부터 게임패드로 게임을 즐겼던 것은 아니다. 굳이 〈둘을 위한 테니스tennis for two〉 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케이드 게임 시장의 신호탄을 쏜 〈퐁Pong〉은 다이얼 형태의 동그란 컨트롤러가 달려있었다. 어떤 아케이드 게임들은 조이스틱이 달려있기도 했다. 비행기를 조종하기 위한 스틱에서 온 컨트롤러 형태는 기계식 게임기를 거쳐 전자 아케이드 게임에서도 그대로 비행기를 조종하기 위해 자리 잡았다. 게임 개발자들은 이 스틱으로 굳이 비행기만 조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2차원 평면에서 움직여야 하는 모든 것들을 스틱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가정용 게임기로 여겨지는 마그나복스의 컨트롤러는 흰색 직육면체에 3개의 다이얼이 달려있는 형태였으며 아타리가 가정용으로 제작한 TV퐁은 게임기에 다이얼이 달려있는 형태였다. 이러한 다이얼이 달린 컨트롤러는 아타리가 만든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2600에서 패들paddle 이라 불리는 전용컨트롤러 형태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회전을 위한 컨트롤러를 칭하는 놉(knob), 휠(wheel), 다이얼(dial)대신 패들(paddle)이란 단어가 일반적인 호칭으로 자리잡았다. 기존 입력장치의 이름이 아닌 탁구채를 뜻하는 패들이 대표적인 이름으로 이유는 해당 컨트롤러가 탁구를 모사한 퐁을 위한 컨트롤러 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타리 2600의 컨트롤러중에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적이었던 것은 조이스틱이었다. 게임기에 기본으로 포함되어있는 이 조이스틱은 경쟁 게임 사들의 조이스틱 보다도 가장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직관적으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기는 아타리의 조이스틱을 가장 초기의 게임에 대한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 아타리 2600용 컨트롤러 미국 기업들이 과도한 경쟁 때문에 스스로 가정용 게임시장에 대한 매력을 못느껴 시장을 포기하는 동안 일본의 닌텐도는 패미콤을 준비해서 전 세계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차지했다. 자사의 게임&워치의 동키콩에서 사용한 방향키(D-pad)를 이용한 게임패드는 닌텐도 패미콤의 게임패드에도 들어갔다. 이 입력방식의 변화는 가정용 게임기의 입력방식의 가장 큰 패러다임 변화중 하나일 것이다. 방향키와 B,A 버튼이 달린 (그리고 스타트와 셀렉트버튼이 있는) NES의 게임 패드는 매끈한 플레이스테이션의 듀얼쇼크가 나오기 전까지 아타리의 조이스틱에 이어 게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 북미 NES용 컨트롤러 닌텐도는 패미콤의 출시와 함께 자사의 서드파티를 강력하게 관리했다. 미국 게임기 제작사들의 부진을 소프트웨어 관리에 실패한 것으로 보았던 닌텐도는 패미콤으로 출시되는 게임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미컴 용으로 제작하는 게임들은 대부분 게임패드에 최적화할 수 밖에 없었다. 오리사냥 같이 아주 특수한 닌텐도 전용 광선총(재퍼 - 일본에서는 그냥 총(Gun)으로 발매되었다. 모양 역시 그냥 리볼버 권총에 가까웠다.)을 지원하는 총 컨트롤러나 R.O.B나 파워글로브 같이 대중적으로 자리잡는데는 실패한 컨트롤러만이 게임패드와 차별화된 플레이를 제공했다. 패미콤 이후 가정용 게임의 컨트롤은 게임패드르 완전히 굳어졌다. 아케이드에서는 여전히 아케이드만의 독특한 조종 방식을 가진 게임들이 나왔지만, 이러한 아케이드용 게임들이 가정용 게임기로 이식되는 경우에도 대부분은 게임패드에 최적화된 조종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며 추가로 부가장치가 나올 때가 있었지만 그 가격은 대부분 게임 보다 비쌌고 가끔씩은 게임기보다도 비쌌다. 방향키와 두개의 버튼만 존재하던 게임패드는 게임기의 세대가 거듭되며 발전하면서 지금은 방향키와 조이스틱 두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4개의 입력버튼과 범퍼로 불리는 상단 좌우에 두개씩 위치한 버튼들 스타트 버튼과 옵션 버튼. 그리고 조이스틱을 버튼으로 활용하는 L3, R3 까지 10개의 버튼과 3개의 축입력장치가 거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현재는 대부분 자이로를 통한 6축센서와 함께 게임기에 따라 터치등의 추가 인터페이스가 들어가있기도 하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게임을 시작하기에는 과거의 게임기 비해선 복잡해졌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익숙해지면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의 게임 패드는 게임을 오래 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며, 게임 안의 캐릭터를 설명서를 보지 않더라도 대충 이전에 했던 감각으로 조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익숙함은 게임패드에 어울리지 않는 게임들이 거실에 자리잡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여전히 키보드와 마우스가 게임패드보다 편한 실시간 전략 장르나 AOS 같은 장르의 게임은 가정용 게임기보다는 컴퓨터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게임기와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게임패드와 키보드 마우스이외의 컨트롤러는 한정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주로 시뮬레이션 장르이다. 드라이빙 시뮬레이션과 플라이트 시뮬레이션 장르를 위한 주변기기인 드라이빙 휠과 플라이트스틱은 꾸준히 발매되고 있으며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각 장르의 마니아에게는 게임을 제대로 즐기려면 필수로 갖추어야 하는 장비로 인지되고 있다. 드라이빙휠의 경우는 특히 기능에 따라 장비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으며 실제 운전할 때 처럼 운전 상황에 따라 운전대에게 힘을 전달하는 포스피드백 기능이 있는 드라이빙 휠은 특히 더 비싼 가격이며 이를 위한 거치대나 시트. 좀 더 사실적인 게임을 위한 사람들에게는 시트를 움직여주는 모션시뮬레이터등의 장비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러한 부가장비의 경우 게임값을 넘어서 가끔은 컴퓨터 혹은 게임기 값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기는 힘들며, 이러한 게임들 대부분 게임 패드로도 게임을 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닌텐도 Wii 가 본격적으로 자이로와 가속센서를 사용하는 컨트롤러를 사용하면서 컨트롤러에 제한된 게임 플레이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스포츠게임이 있겠지만 그러한 변화를 하나를 언급하자면 기존에 존재하던 낚시 게임이 이러한 컨트롤러 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스포츠로서의 낚시는 아무래도 “손맛”이라 부르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아케이드를 제외한다면 지금으로선 실제 물고기의 움직임을 포스피드백으로 전달하는 낚시대 컨트롤러가 대중화된 적은 없다. 적어도 진동 덕분에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부분은 비단 6축을 사용하지 않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진동기능이 있는 컨트롤러를 사용한다면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동물의 숲에서의 낚시는 컨트롤러 진동의 특성을 잘 살려서 정품 컨트롤러가 아니면 그 느낌을 충분히 느낄수 없다. 컨트롤러를 흔들고 돌리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낚시 게임에 릴을 감는 행위를 컨트롤러를 돌리는 것으로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이 기능은 옵션이다. 손목의 건강과 함께 선택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 오락실은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극장 근처의 오락실이나 혹은 키즈카페 앞의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기계가 있다. * 쇼핑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딥 시 파티 딥 시 파티라는 이 게임은 국내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사실은 2012년에 일본에 출시된 반다이 남코의 〈낚시 스피릿〉과 흡사한 게임이다. 6인 까지 플레이 할 수 있다는 점은 비슷하긴 하지만 컨트롤러가 매립되어있어서 미끼를 던지는 것도 버튼으로 해야하며, 스크린이 1개라는 차이점이 있다.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반다이 남코의 〈낚시 스피릿(Ace Angler〉은 현실 낚시 보다는 일본의 전통축제에서 볼 수 있는 금붕어낚시 등의 영향이 더 큰 편이라 낚시 시뮬레이션이란 장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 로드, 플로트, 릴등을 선택해서 현실 낚시와 가깝게 즐기는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낚시 스피릿의 플레이 실제 낚시와는 거의 다른 물고리를 낚아 메달을 모으는 게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게임에선 다른 종류의 낚시 게임과는 같은 지점이 있다. 릴을 컨트롤하며 물고기가 낚였을 때 릴을 감아야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던지는 방향과 힘을 버튼으로 정하고 필살기가 있으며 보스 스테이지가 존재하는 현실 낚시와는 매우 동떨어진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을 낚시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라면 바로 이 컨트롤러 일 것이다. 2012년에 출시가되어 이제는 10년이 넘어가는 시리즈인 이 게임은 컨트롤러의 특성상 아케이드에서밖에 즐길수 없었지만 2019년에 닌텐도 스위치용으로 게임이 출시되면서 상황이 좀 바뀌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동전을 잡아먹는 아케이드 게임은 집에서 했으면 그 손맛을 위해 좋겠지만 6인용 게임기를 집에 들여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닌텐도 스위치의 조이콘은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지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오락실에서 낚시대를 휘두르고 릴을 감는 그 느낌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개발사는 게임의 고유한 조작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스위치 조이콘의 자이로센서와 각속도를 이용하여 조이콘을 휘두르는 형태로 낚시대를 던지고, 들고 돌리는 행위로 릴을 감는 동작을 재현했다. 전통적인 닌텐도 스위치와 컨트롤러를 붙여서 쓰는 방식으로도 게임을 하는데는 문제는 없다. 이경우는 다른 많은 낚시게임이 그렇듯이 버튼으로 릴을 감는다. * 인게임 도움말 닌텐도 스위치 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기로도 낚시 게임은 많이 나오는 편이며 고전이며 명작으로 불리는 세가 배스 피싱 같은걸 언급하지 않더라도 굳이 낚시 스피릿을 가져온 이유는 이 게임이 전용컨트롤러가 아닌 기존 컨트롤러에 붙여 쓰는 “사오콘”을 별매로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종류의 컨트롤러를 확장하는 개념은 Wii 리모콘부터 PS Move, 가깝게도 VR 컨트롤러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는 편이지만 낚시 스피릿의 경우 2019년에 〈Ace Angler 낚시스피릿 Nintendo Switch버전〉을 이번엔 2022년에 나온 〈Ace Angler 낚시스피릿 파닥파닥 즐거운 수족관〉이 두차례에 걸쳐 나왔는데 추가장치로 나온 사오콘의 형태가 다르다. 물론 새로 나온 파닥파닥 즐거운 수족관에서도 이전 버전의 추가장치를 지원하고는 있고 이러한 별매 사오콘이 없더라도 조이콘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컨트롤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며, 게임에 연결한 상태에서 버튼으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 호리사에서 나온 첫번째 사오콘 첫번째로 나온 사오콘의 특징이라면 결과적으로 조이콘 두개를 쥐고 흔드는 형태의 플레이를 좀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 가이드에 가깝다. 일본의 게임용 주변기기 전문 업체인 HORI사에서 제작한 이 컨트롤러는 결과적으로는 이 컨트롤러 없이도 같은 형식의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릴역할을 해주는 부분있어서 좀 더 줄을 감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에이스 앵글러 파닥파닥 즐거운 수족관과 함께 나온 두번째 사오콘 두번째로 나온 파닥파닥 즐거운 수족관과 함께 나온 사오콘은 조이콘 두개를 쓰는 형태가 아닌 하나만 쓰는 형태로 돌릴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나는 릴이 달려있는 형태인데, 왼쪽 조이콘과 오른쪽 조이콘의 버튼 배치가 다른 것에 대응하기 위해 릴을 분리할 수 있는 형태의 아이디어가 특히 돋보였다. 두 컨트롤러의 중대한 차이점이라면 첫번째 사오콘이 조이콘 두개가 달려있으면서 또한 릴에 조이콘 하나가 붙어있어야만 하는 구조라서 실제로는 무거워서 플레이가 힘든 구조 였다면 두번째 사오콘은 처음부터 회전을 조이콘틀 통해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바퀴 회전할 때마다 A버튼을 두번 누를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는 사실상의 연타기계라는 점이다. * 사오콘 연타 기믹 – 릴을 돌릴 때마다 흰 부분이 A버튼을 눌러준다 기계적으로 릴의 회전을 강제로 조이콘의 A버튼과 연결한 이 기믹 덕분에 정작 선택하는 A버튼을 누르기 힘들다는 단점이 생기긴 했으나 이전 버전보다 훨씬 가볍고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새로운 조이콘의 장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 조이콘들의 조작 역시 지원을 하지만 낚시 스피릿의 후속작에서 조이콘을 직접 회전하는 방식이 아닌 버튼을 통한 입력으로 돌린 이유는 아무래도 무게가 동반된 회전 조작이 조종에 부담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한다. 이 게임은 컨트롤이 없더라도 1개의 컨트롤러로 즐길 때의 조작 방법으로 낚은 후에는 어찌되었던 열심히 릴을 감는 동작을 모사해야 물고기를 낚을수 있다는 점에서 낚시 게임이 가지고 있는 주요한 조작으로는 릴을 감는 행위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낚시용 부가 컨트롤러로는 이미 Wii 리모트를 활용한 경우가 있었고 낚시 전용 컨트롤러로 가면 가정용 게임기는 물론 국내 PC용 게임으로도 나온 컨트롤러도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울 건 없다고 할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컨트롤러가 이러한 릴을 감는 장치를 어떻게든 구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낚시 컨트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VR 게임에서도 이러한 낚시 시뮬레이션이 점차 출시되고 있으며, 낚시가 주는 가장 큰 현장감을 제공하고 있다. VR 특유의 양손 컨트롤러는 현재로는 모두 게임패드를 절반으로 나눠 한쪽씩 쥐는 형태로 수렴하고 있으며 한손에 쥐기 편하도록 총의 손잡이 형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양손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많은 VR 게임들은 이 컨트롤러에 손을 매칭해서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가상 공간에 있는 물체와 상호작용 하도록 하고 있지만 물리적인 피드백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결국은 허우적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따로 이러한 컨트롤러를 끼워서 사용 할 수 있는 확장 컨트롤러가 나오기도 한다. 현재로선 가장 인터페이스의 확장에 진심인 것은 따로 물리적 비용이 필요없는 VR 장르의 게임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회전시키는 입력장치 인터페이스는 게임의 탄생과 함께 했지만 결국 기존 게임 컨트롤러에 포함되는데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레이싱휠이나 낚시 컨트롤러를 통해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은 아케이드에서 컨트롤러의 물성이 강하게 필요한 게임들만이 가정용 게임기에 피드백 되고 있지만 한차례 조이스틱이 사라졌다가 결국 게임패드에 포함되었던 것 처럼 새로운 물성이 게임 컨트롤러에 들어갈 수록 플레이의 가능성이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VR 공간이 될지 물리적 공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플레이의 확장은 게이머에게도 게임디자이너에게도 좀 더 많은 가능성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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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확률이 만드는 스킵: 즐거움과 귀찮음 사이를 맥동하는 플레이

    < Back 확률이 만드는 스킵: 즐거움과 귀찮음 사이를 맥동하는 플레이 17 GG Vol. 24. 4. 10. 초창기 놀이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운과 확률의 중요성은 꾸준히 강조되어 온 바 있었다 . 아곤 agon 과 알레아 alea 의 경합이라는 카이와의 놀이에 대한 이해는 디지털게임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 놀이매체의 중심을 관통한다 . ‘ 테트리스 ’ 에서 다음 블록으로 어떤 모양이 떨어지게 될 지를 예측하지 못하던 순간은 ‘ 리그 오브 레전드 ’ 에서도 평타가 치명타로 들어갈 확률을 생각하는 순간까지 이어지며 이 디지털 놀이를 주사위값에 의해 무작위로 변화하는 상황과 그에 맞춘 플레이어의 대응으로 만들어낸다 .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을 풍부한 경우의 수로 뽑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확률은 디지털게임에서 직면하는 상황의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며 빛을 발한다 . ‘ 다키스트 던전 ’ 에서 랜덤하게 튀어나오는 스트레스 상황과 영웅의 기상은 플레이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나락에서 극락까지의 폭넓은 감정 변화를 만들어내고 , ‘ 슬레이 더 스파이어 ’ 에서 매 라운드마다 주어지는 랜덤한 카드보상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예측불가능한 도전에 대해 예측과 적응으로 돌파하게 만드는 즐거움의 원천이다 . 많은 로그라이크 장르들이 사랑받는 이유의 중심에는 이러한 확률의 폭넓은 상황 재현력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모든 확률이 이처럼 풍부한 상황 재현의 원동력만으로 오늘날의 게임에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오히려 확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디지털게임의 어떤 순간에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 하는 의문감을 떠안곤 한다 . 서사 압축으로 기능하는 확률이 만드는 '스킵' 한때 해괴한 광고로 물의를 일으켰던 모바일게임 ‘ 왕이 되는 자 ’ 의 전투를 생각해보자 . ( 나는 연구 차원에서 억지로 플레이한 적이 있다 .) 이 게임에서 전투는 자신의 군사력과 적의 군사력을 각각 수치로 보여준 뒤 ‘ 공격하시겠습니까 ?’ 라는 문구를 보여주고 , 공격을 선택할 경우 각각의 군사력에 일정 확률을 더해 전투결과를 뽑아내는 형태로 구성된다 . 일종의 자동 전투와 같은 방식이다 . 자동전투는 본래 수동전투 ( 수동전투라는 표현 자체가 좀 어색하긴 하다 ) 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대체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 ‘ 토탈 워 ’ 시리즈의 경우 , 전술 화면에서 실제 병력들을 지휘해 벌이는 전투가 게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애당초 적과 아군의 병력 차이가 확연해 전투를 통해 플레이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수가 무의미하게 적을 경우 플레이어는 자동전투 버튼을 눌러 이 전투의 승패 결과값만을 받아들 수 있다 . 선택지로서의 자동전투는 나름 유의미하다 . 사례로 든 ‘ 토탈 워 ’ 시리즈의 경우 , 전략 영역에서의 플레이 또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중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지적인 전투에 일일이 공을 들이는 것 자체가 전략적 플레이에 비해 지루하고 귀찮은 일이 되며 , 이럴 때 자동전투 버튼은 플레이의 초점을 전술에서 대전략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 초반부에는 유의미했지만 점차 비중이 줄어드는 플레이의 특정 지점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 스킵 ’ 할 수 있게 만드는 자동전투는 확률이라는 장치를 통해 ‘ 스킵 ’ 을 제공함으로써 전략적 플레이의 연속성을 부각시킨다 . 흥미로운 점은 이 방식이 바로 ‘ 스킵 ’ 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 컴퓨터의 연산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황과 그렇게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사고하여 만들어내는 행동이 일정한 플로우 밖으로 벗어날 때 , 게임은 플레이의 두 주체 – 난이도와 숙련도 간의 긴장관계를 기본적으로 주어진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한 확률값으로 뽑아내며 과정을 스킵한다 . 이 때 확률은 원본이 되는 일련의 수동 전투를 대체하는 장치가 된다 .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그려냈어야 할 어떤 상호작용의 과정을 스킵한 뒤 , 그 결과만을 예상되는 값으로 출력하면서 확률은 마치 오늘날 인공지능들이 그러하듯 시작점과 종착점 사이의 모든 과정들을 스킵하는 도구가 된다 . 디지털게임 안의 세계를 지탱하는 뼈대는 수치화된 데이터다 . ‘ 테트리스 ’ 안의 세계는 2 차원 좌표계 안에 블록의 유무를 구현함으로써 만들어지고 , ‘ 발더스 게이트 3’ 의 캐릭터 간 감정은 각각의 이벤트를 거치며 합산된 값을 통해 만들어진다 . 이런 데이터들은 세계를 구현하는 일종의 형태소이지만 , 데이터는 단지 의미에 정렬된다고 해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적어도 두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 첫번째로는 각각의 데이터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세계로 거듭나야 하며 , 두번째로는 그 작동하는 세계에 플레이어가 개입하여 주어진 환경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 아주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 전자가 NPC 로 가득찬 , 마치 영화 ‘ 주먹왕 랄프 ’ 와 같은 세계라면 , 그 세계에 플레이어의 개입이 가능하게 만들어지는 시점부터를 우리는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단계를 전제로 놓고 다시 ‘ 스킵 ’ 의 문제를 살펴보면 , 우리는 이 ‘ 스킵 ’ 이 무엇을 건너뛰고 대체하는지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 완성된 , 작동하는 세계로서의 NPC 월드는 본래 사람에 의해 변화되도록 디자인되었으나 , 플레이어 대신 데이터 월드는 확률이라는 랜덤성에 기초해 외부로부터 자극받는다 . 자동전투 속에서 확률의 개입에 의해 스킵되는 대상은 외부자극 , 곧 플레이어인 것이다 . 놀고싶은 본능과 귀찮음의 본능 사이에서 디지털게임에서 확률이 쓰이는 방식은 앞서 이야기한 바처럼 그 자체로서보다는 어떤 목적에 의해 쓰이느냐에따라 게임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 로그라이크에서의 확률은 조합을 통한 경우의 수를 바탕으로 상황의 가짓수를 넓혀 더욱 다양한 플레이어 개입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쓰이고 , 자동전투에서의 확률은 플레이어의 개입 자체를 대체하여 NPC 월드를 NPC 들만의 월드로 만들어내는 데 쓰인다 . 다시 카이와의 아곤 – 알레아 개념으로 돌아가본다면 , 로그라이크적 확률이 다양성을 늘려 아곤의 비중을 두텁게 하는 것과 반대로 자동전투로서의 확률은 알레아의 비중을 두텁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확률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대체하는 경우의 양 극단인 아곤 – 알레아에서 100% 알레아만으로 이뤄지는 경우를 상상한다면 아마도 뽑기 , 도박 , 복권 내지는 포춘 쿠키와 같은 형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곤과 알레아 , 플레이어의 개입과 운적 요소 , 조금 더 구체화해서 이야기한다면 과정과 결과라는 두 축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 좋은 게임을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 그러나 확률이 대체하고자 했던 요소 , 인간의 개입이라는 요소가 갖는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 볼 필요가 있다 . 애초에 일정 수준에 이른 플레이어가 손쉬운 전투를 의미없다고 생각해 스킵하거나 , 특정 레벨에 도달하기 위해 무의미한 사냥을 필드에서 반복하는 행위를 이른바 ‘ 노가다 ’ 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우리는 개입하는 플레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속성 중 하나인 귀찮음을 발견한다 . 플레이어의 개입은 디지털게임이라는 요소의 특성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고 사실상 이 매체의 즐거움은 그 개입을 통해 이뤄지지만 , 동시에 개입의 속성은 양가적이다 .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이리저리 손과 머리를 굴리는 과정은 너무나 흥미롭지만 , 동시에 다른 매체활동에 비해 무척이나 귀찮고 복잡한 일이다 . 당장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책과 드라마 , 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그 자세로 전통적인 인터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디지털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 플레이가 가지고 있는 그 귀찮음의 속성이 확률이 플레이를 계속 대체하고자 시도되는 이유다 . 초창기에는 없었으나 , 롤플레잉 게임에 이르면 점차 전투가 ‘ 노가다 ’ 로 불리게 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게임적 의미로 주목하는 부분은 이 전투의 결과가 이미 예측되는 순간에 ‘ 노가다 ’ 라는 호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 난이도와 숙련도의 상호작용이 더 이상 두근두근한 기대값을 갖지 못하게 되는 순간 , 상호작용의 의미는 즐거움보다 귀찮음으로 크게 기울어버린다 . 복잡다난한 입력을 생략하고 , 양 측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몇 가지 확률공식만 돌려 경험치와 아이템만 뽑아내는 것은 플레이에 내재한 속성인 귀찮음을 극복하기 위한 게임 디자인과 , 그에 호응하는 이용자들의 합의로부터 이루어진다 . 그리고 이런 귀찮음의 문제는 단지 디지털게임에만 , 그리고 게임 플레이의 시작과 끝이라는 짧은 시간선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닌 것 같다 . 일정 부분 유비해보자면 우리는 점점 미디어가 주는 귀찮음을 자각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미디어 전반에서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 영상은 정속이 아니라 1.5 배속 , 2 배속으로 보는 것이 속편하고 , 그보다도 ‘10 분안에 몰아보기 ’ 가 훨씬 더 명쾌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날이다 . 한때 묘사의 섬세함으로도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었던 문자문학은 이제 ‘ 지리한 ’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빠르게 본론을 전개하는 것이 보다 널리 받아들여진다 . 숏폼이라는 15 초의 시간이 의미하는 인간의 미디어적 인내력은 시간선상의 매체에서는 배속과 숏폼으로 , 상호작용 매체에서는 개입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 아마도 추측하건대 이러한 변화는 개별 미디어나 수용자의 변화가 아니라 미디어 및 정보환경 전체의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소설의 결말을 굳이 지인으로부터 스포당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과거와는 달리 , 오늘날의 정보사회에서는 검색 한 번에 어지간한 정보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환경이다 . 검색어 입력 – 결과값 출력의 속도가 즉문즉답이 된 시대에서 고전적인 미디어들의 방식은 이제 정상속도가 아닌 ‘ 굳이 느려터진 ’ 상대 속도로 이용자들에게 체감된다 . 이미 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을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는 시청자가 배속을 택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 디지털게임의 플레이 또한 보다 빠른 형태의 외주형 플레이인 확률에 넘기기로 이용자들의 선택은 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한편으로는 고전적 플레이에 익숙하고 또한 이를 애정하는 입장이지만 , 더불어 유년기와 달리 쉽게 피로해지는 신체에 얹혀 사는 입장에서 게임 플레이가 가진 귀찮음의 속성은 갈수록 그 무게감을 더한다 . 시대의 매체 속도가 빨라지고 , 신체의 생체 속도는 느려지는 더블 부스터의 시대를 맞은 과거 유년기의 게임 키드들이 중년이 되어 보다 확률의 개입이 두터워진 게임을 붙잡고 소파에 눕는 이유는 한때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으로부터 감명받고 매료되었던 이유와 함께이기에 더욱 서글퍼진다 .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논문세미나]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

    < Back [논문세미나]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 11 GG Vol. 23. 4. 10. 이번 세미나에서 리뷰할 논문은 지난 2022년 8월 ‘게임 스터디즈(Game Studies)’라는 저널에 게재된 〈Press X to Wait: The Cultural Politics of Slow Game Time in Red Dead Redemption 2〉이다. 번역하면 “X를 눌러 기다리시오: 레드 데드 리뎀션 2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게임 시간의 문화정치” 정도 될 수 있다. 이 논문은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다룬다. 저자는 존 밴더호프(John Vanderhoef), 매튜 토마스 페인(Matthew Thomas Payne)이다. 둘 다 미국에서 미디어 관련 교수로 활동하고 있고, 특히 매튜 토마스 페인은 밀리터리 게임과 전쟁의 관계에 관한 저서를 쓴 이력이 있다. 게임 스터디즈는 게임의 학문적 연구를 주관하는 국제 학술 저널이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소속되어 있거나 열람권을 유료 결제해야 논문 전문을 읽을 수 있지만, 게임 스터디즈는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웹에서 무료로 논문을 제공하고 있다. 웹 기반으로 운영되며, 2001년부터 지금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전세계의 다양한 논문들이 게재되어 왔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다면 아래 URL에 접속하여 직접 읽어볼 수 있다: https://gamestudies.org/2203/articles/vanderhoef_payne 논문의 배경은 게임 리뷰에서 나타난 ‘불만’ 레드 데드 리뎀션2(Red Dead Redemption 2, 이하 레데리2)는 미국의 게임회사 락스타 게임즈(Rockstar Games)의 ‘레드 데드(Red Dead)’ 시리즈의 3번째 작이다. 동일 회사의 GTA(Grand Theft Auto) 시리즈로 잘 알려진 오픈월드 시스템에 1800년대 말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게임이 펼쳐진다. 그래서 ‘서부판 GT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018년 콘솔 플랫폼에 먼저 출시되었고, 1년 뒤에 PC 플랫폼에서도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레데리2는 출시 되자마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이 게임은 매우 현실적인 그래픽을 보여주었고 게임 전반에 탁월한 현실 고증이 배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초원을 활보하는 카우보이가 된 듯하게 말을 모는 방법이나 공간 이동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NPC가 플레이어의 상황에 반응하여 대화를 나누고, 야생 동물 등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이 현실감있게 구현 되었다. 레데리2의 자유도는 무궁무진해서 “이것도 될까?”하는 실험 영상 클립이 온라인 공유되어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2020년 스팀에서 올해의 게임을 수상할만큼 게임의 인기는 독보적이었고, 다수의 게임 어워드에서 노미네이트 되었다. 전작 이후 약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개발된 이 게임은 출시된 이후 락스타 게임즈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레데리2의 인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높은 평점과 별개로 사람들의 리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불만이 있던 것이다. 장점을 언급한 다음 게임 플레이가 “너무 느리다”, “지루하다”, “답답하다”라는 표현이 일색인 것이 여러 리뷰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게임의 현실성이 장점으로 평가되었지만, 동시에 캐릭터가 현실적인 속도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에 플레이어들은 지루하고 답답함을 느끼고 말았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이 현실성 구현이라는 단일한 특성이 가지는 양가적인 의미에 주목했다. "It is defiantly slow-paced, exuberantly unfun, and wholly unconcerned with catering to the needs or wants of its players" (이 게임은 분명히 느리고, 지루하며, 플레이어들의 요구나 욕구를 고려하지 않는다) – from 평론가 “game should be called Red Dead Slow Motion” (게임 이름은 '레드 데드 슬로우 모션'이라고 불려야 한다) – from 메타 크리틱 "It is a boring and tedious simulation game... with horribly unresponsive controls and terribly slow pacing” (이 게임은 지루하고 답답한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흉측할 만큼 반응이 늦은 컨트롤과 지나치게 느린 페이스로) – from 메타 크리틱 * 논문에서 언급된 레데리2의 해외 부정적인 리뷰들 무엇이 게임을 느리게 할까요? 우리는 ‘게임적 속도감’에 익숙해져있다. 떨어진 아이템에 스치면서 ‘줍기’ 버튼을 눌러 인벤토리로 즉시 이동시키고, 식재료를 선택하여 ‘요리하기’ 버튼을 누르면 순간적으로 음식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동할 때면 포탈이나 워프 기능을 사용해서 멀리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찾아갈 수 있다. 어찌보면 게임의 현실은 진행 속도가 빠르다기보다, 뒤따라 이어지는 불필요한(현실에서는 필요한) 과정을 삭제하고 바로 결과값을 제공하고 있다. ‘과정의 삭제’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레데리2는 게임적 속도감이 적용되지 않는다. 논문에서 다양한 예시들이 언급되지만, 대표적으로 시체에서 아이템을 얻을 때 직접 허리를 굽혀 뒤적이는 것이 그 예이다. 집 안에서 파밍을 할 때면 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가구를 일일히 손으로 열어서 확인해야한다. 공간 이동의 경우, 원거리 워프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게임 안에 (눈에 안 뜨이게) 제공되고는 있지만, 레데리2는 드넓은 맵을 말을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해야 하는 내러티브적 구조를 가진다. 게임에서 많은 일이 실제 우리가 행동하듯 벌어지도록 구현이 되어 있다. 이렇게 결과로 바로 이행되지 않고 현실처럼 모든 과정을 겪도록 하는 경험은 플레이어에게 불쾌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느린’ 감각을 게임의 부정적인 면으로 꼽고 있으니, 게임을 만든 회사의 입장에서는 개선이 필요한 사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게임 가격은 게임에 푹 빠지기 위한 값이다 레데리2는 AAA(트리플 A)게임이다. 트리플 A를 특집으로 다루었던 GG 지난 호에서 충분히 언급되었듯, AAA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 아주 긴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투입된다. 게임 산업에서 AAA는 영화 산업에서 쓰이는 ‘블록버스터’라는 말과 비슷하다. 게임의 퀄리티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만큼 큰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수려한 그래픽, 탄탄한 내러티브를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플레이어가 품을 수 있는 상상을 게임 내에서 최대한 허용하며 호불호를 줄이고 자유도와 사용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한 테스트 과정도 거치며 게임의 모난 면은 둥글게 깎여나간다. AAA게임의 신작 출시 소식이 예정되면, 사람들은 게임에서 어떻게 시간이 ‘순삭’ 될지 기대한다. 지갑을 손에 쥐고 결코 저렴하지 않는 그 값을 기꺼이 지불할 순간만을 기다리기도 한다. 게임에 몰입한 채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방대한 맵을 탐험하다 정신차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잘 시간이 되어있는 게 AAA 게임 플레이의 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AAA게임 플레이어가 가지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개발사는 게임 제작에 많은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 하나 하나 대충 그려내지 않기 위해 긴 시간동안 공을 들인다. 만약 표현이 어색해서 몰입이 깨지거나 개발 공수가 덜 들어간 것처럼 보여 게임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평을 듣게 되면 회사 이미지에 금이 갈 수도 있다. AAA 게임의 영역에서 게임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그 ‘몰입적 리얼리티’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공수가 과도한 나머지 너무 디테일한 표현으로 플레이어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기다려야하고 몰입이 깨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회사의 입장에서 게임의 현실감 추구가 가지는 모순적인 결과다. 논문의 저자들은 상업성의 최전선에 있는 AAA 게임이 현실적인 표현에서 두 가치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있는 현상을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의 순간으로 보고 있다. 제목에도 쓰여 있는 문화정치라는 말은, 문화의 영역에서 다양한 의미들이 충돌하고 각각 관계와 역학이 드러나는 상태 를 뜻한다. 고자본 투입의 결과로 고급 노동력을 오랜 시간 투입하여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AAA게임을 개발했지만 그 가치는 역설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일부 이끌게 되었다. 효율적인 진행을 추구하는 게임 시간의 헤게모니 2007년 게임 학술 기관인 DiGRA 컨퍼런스에 ‘플레이의 헤게모니(hegemony of play)’라는 주제로 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연구는 빠른 상호작용에 능숙하고 복잡한 공간을 파악해 공간 전환을 잘 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진 게임 디자인이 산업이나 플레이어 담론에서 주류 혹은 지향되어야 하는 가치로 일컫어지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문화 연구에서 주로 사용되는 헤게모니(hegemony)란 지배를 뜻하는 개념이다.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지배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것, 그러니까 어떠한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가 더 우월하고 지배적으로 생각되는 상태를 말한다. 2007년의 발표에 이어, 본 논문의 저자들은 레데리2를 통해 ‘게임 시간의 헤게모니 hegemonic game time’를 말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진행을 추구하는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가치로 인정된다. 이는 하나의 게임을 어떻게 헤매지 않고 빠르게 클리어 했는지의 문제다.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최소한의 아이템과 시간을 소비하여 원하는 목표로 도달함은 ‘게임을 잘하는’ 능력이며 우월한 가치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러한 게임에서의 시간 개념은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와도 연결되고, 어떠한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플레이어들에게 추구되어야 할 가치이며 개발사도 그에 맞게 어느 정도 ‘편리한’ 시스템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레데리2의 개발사는 그와는 반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게임을 통해 발견하는 우리 사회의 시간 개념 시간이라는 개념은 점차 발전해왔다. 산업자본주의, 후기 산업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시간은 낭비되어서는 안되는 귀한 가치로 여겨져 왔다. 동일한 시간 안에 더 많은 효율성을 추구하자는 목적 아래에 사회 시스템 전반의 모든 장치들이 움직이고 있다. ‘경제성’은 같은 의미를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시간 개념에 부합하기 위해서, 심지어 즐거움조차도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한다. 이 논문과 마찬가지로, 최근 발간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도 비슷한 현상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15초 뒤로’ 또는 ‘배속’ 기능을 통해 빠르게 시청할 수 있다. 또는 영화를 시청하는 대신, 영화 줄거리를 간략하게 전달하는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시간 압박이 발생하는 나머지 여가생활의 일환으로서 영화 한 편을 2시간동안 시청하는 과정보다 ‘영화를 봤다/안봤다’,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라는 경험의 유무로서 또는 지식의 습득으로서 콘텐츠 소비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 시간 개념에서 즐거운 여가생활이란, 시간이 낭비된다는 감각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 달성될 수 있다. 따라서 레데리2에서 플레이어가 주인공 아서 모건의 지난한 인생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키패드에 손이 결박되는 것처럼 느끼는 답답함과 그로 인해 몰입이 끊기면서 내가 얼마나 게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다시 ‘현생’을 자각하게 되는 이 감각은 우리 사회에서 귀중한 시간의 가치를 드러낸다. 온라인 리뷰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 가치와 멀어질 때 발생하는 긴장감과 불안함으로서 볼 수 있다고 분석될 수 있다. “(X)를 눌러 사색 하시겠습니까?” 이 논문은 그렇다고 레데리2가 극도로 느린 게임은 아니라고 주의한다. 글 전체에 걸쳐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지루함과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을 분석하고 있지만 게임을 더이상 못할 정도로 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문 또한 레데리2가 지루하다는 리뷰에 하나 더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AAA게임으로서 추구되어야 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가치가 담겼으나 그것이 ‘과했을 때’ 플레이어들에게 부정적인 감각이 발생한 것에 주목하고, 게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떠한 가치가 추구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목적 하에 연구를 전개해나갔다. 콘솔 게임기 패드에서 ‘X’는 어떤 행동 수행을 결정하는 키다. 하지만 레데리2에서는 X는 곧 플레이어에게 (잠시의) 기다림을 요하는 키이기도 하다. 레데리2라는 게임을 통해 AAA게임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게임 디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에 퍼진 시간 압박 인식은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더 나아가 이 논문을 통해 과정을 삭제하고 결과로 직행하는 ‘게임적 속도감’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게임이 현실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게임이 정말 현실과 같아졌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인지해야 한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

  •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미술의 근간이 될 때, 〈게임사회〉 리뷰

    < Back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미술의 근간이 될 때, 〈게임사회〉 리뷰 12 GG Vol. 23. 6. 10. 현대미술을 볼 때마다, 스스로가 현대 미술을 향유하는 이들과 관심이 거의 없는 일반 관객들 사이의 회색분자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딱히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어렸을 때부터 향유해온 것도 아니지만 뒤늦게 재미를 붙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래서 꿈보다 제법 마음에 드는 해몽이 나오면 그걸 감상으로 삼아 마음에 두기. 그게 나름의 현대 미술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비디오 게임 아트는 항상 있어왔고, 자연스레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게 본업과 연결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게임 자체가 흥미로운 소재여서일까? 어쨌거나 ‘미술관에 게임을 집어넣기’ 는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이란 무엇인가?” 이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굳이 구분지어야 할까?” 같은 번외격 논제는 차치하고 “정말로 게임의 바운더리는 한계가 없어서 미술관에도 적합한, 딱 알맞은 게임의 형태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마치 우주를 향한 궁극의 질문처럼 달콤하면서도 답답한 명제였다. 물론, 그동안 게임을 소재로 한 미술 작업은 이미 많았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히토 슈타이얼이나 하룬 파로키 등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김희천, 강정석 등 많은 이들이 이미 비디오 게임, 그리고 게임 플레잉을 가지고 여러 작업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거기서 더 나아가는 건 게임 자체의 형태, 게임이라는 미디어 자체를 미술관에 들이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즉 이는 개인이 상호작용하는 예술이 어떻게 전시 예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는 각종 상용 게임 엔진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고, 또 게임 플레이 경험을 가진 세대가 작가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경향이 더 늘어났다고 생각해왔다. 시도는 정말 많았다. 보는 게임을 소재로 한 영상 작업, 아니면 아예 보는 게임의 형태로 실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피처링 하는 작품, 김희천의 작품처럼 VR을 끼고 가상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 하물며 아예 게임 엔진으로 제작되어 직접 플레이어가 되어볼 수 있는 작품들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을 찾는 과정에서 전시관을 들락거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게임사회〉 는 그런 시도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 그리고 게임의 형태를 한 미술 작업, 게임을 소재로 한 영상 작업, 해킹한 게임기 기판으로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작품, 또는 게임을 비롯한 서브컬처를 특집처럼 다룬 작품들까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에서 위의 그 질문, “미술관에 적합한 게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는가 하면, 오히려 그 명제 자체를 뒤집어버리게 됐다. 〈게임사회〉 의 적지 않은 작품들은 그 형식 자체가 ‘비디오 게임’이라는 익숙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각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에는 그런 ‘게이머로서의 경험’ 또는 기반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각 작품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몇몇 전시 작품들이 ‘게이머적인 경험’ 의 연장선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컸다. 게이머로서의 경험과 결합하여 이 작품을 이해했을 때 그 깨달음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코리 아칸젤의 〈/로데오/ 할리우드 플레이하기〉 였다. 이 작품은 코리 아칸젤이 얼마나 게이머적 경험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AI툴 또는 자동화 매크로를 통해 양산형 P2W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함으로서 비인격적으로 변한 게임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소모시킴으로서 나오는 해학이 이 작업의 재미였다. 이는 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무분별한 결제유도와 반복적이고 재미없는 플레이로 가득 찬 양산형 모바일 게임에 대한 비판으로서 게이머들에게 매우 천착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또다른 좋은 예는 재키 코놀리의 〈지옥으로의 하강〉 이었다. 이 작품은 두가지의 보편적 경험에 기반하는데 먼저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한 사회봉쇄, 그리고 ‘GTA5’ 라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게임의 경험이다. 우리가 ‘GTA5’ 를 플레이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무엇이든 가능한 오픈월드’ 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좀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각종 금기가 해제된 오픈월드’ 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장 먼저 이 게임에서 생각하게 되는 건 살인과 약탈, 방화, 파괴 같은 현실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들이다. 형식적으로는 그보다 많은 행위가 가능하지만, 금기가 없다는 점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런 비일상적 일탈로 플레이가 귀결된다. 하지만 〈지옥으로의 하강〉 은 그런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플레이에서 벗어나 그 무대 자체를 보여준다. 얼마나 일상과 닮아있는지, 어떻게 이 세상이 대리세계로 인정받고 있는지를 비춘다. 고속도로 옆 편의점, 발전소 옆 철길, 이곳을 정처없이 걷는 주인공. 마치 플레이어들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 살인과 약탈, 기타 파괴적 플레이로 물들였던 이곳이 사실은 판데믹 같은 우울한 시기에 우리가 조용히 묻어 지낼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었냐고. 개인적으로 가장 나쁜 예는 〈노텔 (서울 에디션)〉 이었다. 전시 작품 중 가장 비디오 게임 그 자체의 형태를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이 작품을 실망스럽다고 한 것이 의외일 수도 있다. 전시된 작품 중 우리가 알고 있는 ‘비디오 게임’ 의 형태와 가장 닮아있는 작품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기대치와 작품의 실제가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한다. 〈노텔 (서울 에디션)〉은 말그대로 비디오 게임 컨트롤러를 쥐고 인게임 3D 공간을 탐험하는 작품이다. 비주얼적으로도 훌륭하고, 흔히 미술가들이 만든 게임에서 발생하는 기술적인 문제도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관객은 이 작품을 그 자체로 게임으로 인식하게 되고, 흔히 알고 있는 게임의 기준으로 이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 즉 어디까지나 공간을 구현하고 그 안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했을 뿐, 그 어떤 상호작용이나 탐험의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음이 크게 다가온다. 그러한 이유로 〈노텔 (서울 에디션)〉은 전시장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 작품이기도 했는데, 과연 비 미술인 또는 미술 관객으로서의 경험이 없는 이들, 또는 게이머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작품은 누군가 플레이하면 그 주변에 둘러앉아 그걸 지켜볼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컨트롤러를 이어 받아가며 플레이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대체로 한결같았다. “그래서 뭐지?”, “왜 아무 것도 없지?” 흥미롭게도 〈노텔 (서울 에디션)〉 그 형태적으로는 가장 게이머적 경험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직접 컨트롤러를 쥐고 플레이하며 겪게되는 경험은 ‘게임’ 이라고 하기엔 너무 황량한 것이었다. 굳이 이 작품을 게임의 장르적 해석으로 보자면 어드벤처 게임에 가까울 것이지만, 이 작품은 탐험의 이유와 목적, ‘왜’ 와 ‘무엇’ 이 결여되어 있었다. 물론 현대 미술 시조에서 그런 명확한 목표 지점을 설정하는 건 불필요한 일로, 또 작가가 관객의 이해를 제한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 작품은 ‘게임’ 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면서 동시에 좋은 미술 작업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졌다. 오히려 정말로 디스토피아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효율적인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작업들의 긍정과 부정을 정리해보면, 실상 게임을 미술관에 들여놓는데에 중요한 건 ‘형태’ 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지난해 보았던 이안 쳉의 〈세계건설〉 전시에서도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이안 쳉의 〈사절〉 연작은 무한한 길이를 가진 일종의 자동화 시뮬레이션이다. 그러나 ‘무한한 길이’ 라고 되어있었지만 그 무한한 길이는 그 안에서 유의미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적절히 하이라이트하지 못한다면 순간 만큼의 가치를 가지기 오히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 는 스크린 뒤에서 PC를 통해 실시간 렌더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게임 라이브 컷씬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정작 그것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방식은 폐쇄된 공간 안의 스크린 하나에서 상영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더 넓게 향유되고 더 깊이 플레이될 수 있는 작품이 이 공간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꼭 게임이라는 형태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게임플레이’ 라는 경험을 어떻게 미술관에서 재현하거나 또는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작가와 전시 관계자들이 ‘게이머로서의 경험’ 을 가지고, 이를 ‘게이머’ 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고 구성하는게 더 중요하다는, 어쩌면 너무 정석적이면서도 원점회귀적인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부분은 이전의 어떤 전시들보다도 영유아, 중년층, 20대 남성 같은 기존의 현대 미술 전시의 주 소비층이 아니었던 이들이 많이 보인 전시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게임이라는 소재 자체가 더 많은 이들을 현대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이끌어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들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많은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 안에서 목격한, 그리고 간단히 이야기 해본 관객들에게서는 확실히 조금은 아쉬운 반응들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게이머들이 비디오 게임 아트라는 좋은 가교를 두고도 현대 미술로 넘어오기 어렵게 할까. 이번 전시를 통해 가장 크게 느낀, 비디오 게임과 현대 미술의 불협화음은 ‘친절함’,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UI/UX 였다. 일반 관객들의 시선에서 현대미술은 기본적으로 불친절함을 소양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어느정도 오해와 편견이라는걸 알고 있다. 단순히 의미파악 자체에 여러모로 복합적인 사유와 다양한 의식의 단계가 필요한 것 자체로 불친절함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부적절한 표현이다. 많은 현대의 명시, 명작 영화들이 이해에 난점이 있다고 해서 ‘불친절’ 하다고 비판받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미술관의 미술은 기본적으로 작품 외의 정보 전달을 극히 줄이고 설명이라고 할만한 것은 오직 스테이트먼트 하나만을 남겨 놓는다. 영상 작품들은 이미 상영되고 있고, 관객이 영상의 중간에 들어오게 되면 문맥을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즉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도 적고, 관람환경도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어떤 전시 또는 작품을 이해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속 ‘수용’ 하면서, 이를 머리속에서 정제하고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고난한 정신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비디오 게임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UI/UX 의 덕목과 상충되는 면이 있다. 비디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항상 일련의 튜토리얼이나 툴팁을 통해 게임을 이해하고 ‘이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지켜야하는 룰, 그리고 필요한 덕목’ 을 학습받는다. 심지어 명시화된 튜토리얼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라도 그런 학습 곡선을 고려해 게임의 구조를 만들기 마련이다. 그리고나서 플레이어는 비로소 게임을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바로 이 과정이 결여되어 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 아트 전시가 시도되어 왔지만 충분히 상호작용성을 바탕으로 한 게임적 경험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 전시가 적었던 이유는 바로 이 UI/UX 가 관객과 전시/작품 사이의 게임적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것이 가이드라인과 튜토리얼과 툴팁으로 채워져야 한다면 우리가 가지는 이해의 폭은 극도로 좁을 것이고 특정 가치관에 편향된 이해를 다수가 공유하게 되는 다소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결여된다면 이해 자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기능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걸 하나의 재미로 여기고 있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현대미술이 소수의 향유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이유는 이 부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슬프게도 일반 대중에게 이제 미술관은 모던한 카메라 세트장처럼 쓰이고 있다. 즉 미술관은 비디오 게임처럼 ‘개인화된 경험’ 을 완전히 얻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환경이자 풍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이번 전시에서 단적으로 느낀 지점은 바로 각종 ‘불편한’ 컨트롤러와 연결된 게임들을 사람들이 직접 플레이할 때였다. 많은 사람들은 왜 익숙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배치된 컨트롤러로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스테이트먼트에는 그 의도가 써있기는 했지만 일목요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나름의 해석을 곁들여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적응형 컨트롤러 또는 비직관적인 컨트롤러로 게임을 함으로서, 장애인이 일반적인 컨트롤러로 게임을 할 때의 불편함을 비장애인들이 체험한다.” 라는 의도를 덧붙이자 그제서야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결국 현대 미술관 내에서 이루어진 정규 전시이기에 기존에 잡혀있는 미술 전시의 틀을 바꿀 수는 없었고, 그것이 더 많은 이해를 원하는 이들에게 장벽처럼 작용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타까운 점은 분명 게이머로서의 경험이 잘 녹아있는 좋은 작품들이 많았음에도 이를 수용하기 꽤 버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게임사회〉 전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게이머적인 경험이 베이스가 되었을 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MOMA 소장 게임 컬렉션은 그냥 평범하게 전시되었다면 오히려 플레이 되기 어려운 환경에 가져다 놓은, 죽은 게임이 되었을테지만 적절한 컨트롤러의 변형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앞서 언급한 코리 아칸젤의 작품, 그리고 재키 코놀리의 작품은 그 형태는 분명 평범한 영상 전시의 폼을 하고 있음에도 게이머로서의 경험과 천착되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번 전시에서 얻은 또다른 깨달음은 게임은 확실히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모을 힘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다녀갔지만 그동안 지켜 본 비 미술인 관객들의 행태는 딱 둘 중 하나였다. 그냥 슥 보고 지나가거나,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찍을 뿐. 하지만 이번 전시는 사뭇 달랐다. 많은 이들이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려고 했고, 작품을 보며 자신의 게임 경험을 떠올려 이야기하고, 직접 작품을 체험하고자 컨트롤러를 움직였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가진 힘, 그리고 동시에 오프라인 공간이라는 한계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게임사회〉 전시 또한 기존의 미술 전시들이 가진 일종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작품의 면면에서 느낀 ‘게이머로서의 경험’ 은 즐거웠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들러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을 더 느긋하게, 지긋이 관람하고 싶다. Tags: 게임사회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

  • Visually Impaired and Gaming: Overcoming the wall of prejudice

    < Back Visually Impaired and Gaming: Overcoming the wall of prejudice 12 GG Vol. 23. 6. 10. You can see This article's Korean version in below URL: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80 I sometimes have had chances to discuss about "game accessibility" ever since I started working for Banjiha Games (Korean word for "Semi-basement") as a writer, while representing people with visual impairment like me. Sure, I do like games. But I'm not good at it. And frankly speaking, my current work also has to do little with the game. So I must admit that I try to talk cautiously whenever such a topic arises. But in this article I will go ahead and talk about how I personally experienced gaming as an ordinary gamer. And perhaps point out a few remarks on how to make games more accessible and inclusive to visually impaired people. It is said that human rely most heavily on visual inputs from the eyes out of all the five primary senses of our body. Perhaps that is the reason why the inquiries and constructive discourse on game accessibility for the visually impaired still remain a challenging area – and are slow in progress even compared to games accessibility for other disabilities. Nevertheless, visual impaired like me have always been enjoying playing games. In the mid-1990s,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computers were expensive household items – far more than what is perceived nowadays. Therefore, I first learned the basics of how to use computers from a teacher. Here, one might wonder, 'How can visually impaired people use computers and smartphones?' A simple answer: Computers can read what is printed on the screen for you. Of course, there are several differences in how it works depending on each operating system – they might have slightly different functionalities or the name of the software, etc. But still, in principle, it works pretty similarly to each other. Returning to my childhood story, the teacher introduced me to a simple computer game. I think they wanted me to have fun while learning to use the new device. And that simple game became the first video game in my life. Back in the 1990s (in Korea), most games played by visually impaired people were sound-oriented. Memory games could be played while listening to voices, digital baseball games with matching numbers, or "Blue Flag and White Flag" games but on a computer. Those who knew how to deal with dial-up internet back then also enjoyed text-based MUDs (Multi-User Dungeon games), a predecessor of MMOs that we now know today. While the Korean game industry moved on from MUDs once the high-speed internet became common, these text-based adventures are still highly favored by people with blindness. I also used to enjoy various other digitally adapted board games such as computer chess, Yutnori , trump cards, etc. However, as the Windows operating system became more common and now the digital environment heavily leans towards mobile devices, things have become more difficult for the visually impaired to enjoy games. Apple later released the VoiceOver function on their iPhone series, which helped people with visual impairment to finally step into the world of the smart(phone)-era. However, we couldn't easily dive into the sea of mobile games as there were only very few mobile games that we could enjoy. Since the 2010s, most digital games that we get to play are still limited to audio-based games designed for those with difficulties with their vision. There are several different genres of games in this category, from action fighting games or RPGs in which you hear sounds to locate and defeat the enemy characters to trading card games, puzzle games, rhythm games, and simulations. But there were several challenges in playing these specially designed games. First and foremost, many only supported English language as they are imported games developed by foreign studios. At some point, I would wonder, "Am I playing a video game or taking an English test?" In addition, since these games were only targeting blind people as their main audience – which are already a niche market compared to the mainstream game market – and require familiarity with PC and mobile, inevitably the market size is small. Hence, not many studios target this market and thus limited choices on what you could play. Then what about games other than audio-based games? Well, there aren't that many. There are some text-based browser-based games and some mobile games, but many are, obviously, in English. There are very few – almost none – (text-based) games that offer at least a bare-minimum computer-assisted translation in Korean. In fact, as of 2022, there are only a handful of games that visually impaired Koreans can enjoy in their own language. The situation is the same even if we count text-based MUDs even if their game servers are still active. I'm not just trying to rant here. I'm not trying to say that we need more games for blind people because there are not enough games. It's not about making games that are functionally playable to people with visual impairment. It's more fundamental than that. As I mentioned earlier, audio-based games are (somewhat) functional for the visually impaired. But they are bad because they are bound to have limited market scalability with various practical challenges. So how do we resolve this? I suggest we should approach it from two perspectives: First, the implication for legal and institutional support. Frankly speaking, games are not the most burning issue for most visually impaired people in South Korea. We are still struggling to survive, to fight for our lives and work. In such a situation, the game accessibility discourse struggles to reach its first step. In 2021, the South Korean National Assembly proposed a bill for game accessibility – but there is still a long way to go. [Rep. Tae-kyung Ha: "Time is now to include game accessibility in the Game Promotion Act, and to build implication guidelines". – Interview from Thisisgame.com (online game news).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4/?n=123269 (20 April 2021)] Some might say that solving the issue of game accessibility is not urgent right now. But we must acknowledge the fact that games are already a cultural phenomenon. For instance, the recent hype on the "metaverse" is in part also in line with the way how games are designed and played. Game accessibility is, therefore, more and more becoming closer to the issue of our livelihood. There are so many instances where people with visual impairment have to do things in the 'gray area' to play games. So many occasions I had to juggle around somewhere in between the terrain between lawful and unlawful just to play video games. I have mentioned earlier that there are only a handful of games that can be played in Korean to people like us. Well, if you count games that offer the Korean language "officially" then the number becomes even more dismal. In such cases, one must play using an unauthorized accessible mode of the game – for instance, hacking into the game using admin (developer's) mode. There are some cases the game offers some accessibility, but not all. Let's say the game did offer a (or worked with the device’s) screen-to-audio function up to a certain level, but not completely, then that visually impaired gamer is now stuck – they cannot progress any further, wasting their in-app purchases if there were any. There are some audio-based games that are basically a copy-and-paste version of some of the famous games. While such productions clearly violate some market ethics, to be honest, I can't just blame those studios. Because those copied games are the only ways for us to play some of those famous games that we can otherwise only hear of – and as a gamer myself, that is undeniably a tempting opportunity. Furthermore, it is also quite interesting to play (hack) the game in unauthorized accessible mode, as it gives you a glimpse of how feasible it is to add accessibility functions to the game. Things can be done. Cases like these can be enforced by law upon bringing the discussion on game accessibility to the surface – to discuss and implement appropriate laws. Of course, regulations themselves wouldn't be able to solve the issue entirely, as it also requires the industry's awareness and will. I think one of the major issues behind the short list of games accessible for the visually impaired is not because of the technical problems. Rather it is the issue of perceptions, coming from misassumptions of the game industry thinking that games must be made entirely from scratch to accommodate the needs of visually impaired gamers. What we need, therefore, is a change in people's views. Games shouldn't be only for blind gamers. Games should be for all games – those that are visually fit or impaired alike. In fact, there are – few working – cases. One of those examples is the game Seoul 2033(서울 2033), a mobile game currently in development by Banjiha Games. The development of Seoul 2033 originally began without considering accessibility for players with visual impairment. Some brave visually impaired gamers, including myself, first tried the game and noticed that the game was inconvenient to play as some of the important stats in the game were not supported by screen-to-audio functions. It was somewhat playable though. Nevertheless, we left a review on the App Store – without expecting much in return. We were surprised that the developing team actively stepped up and responded to our needs. Since then, we are working closely with these passionate game developers, gradually updating the game's accessibility-related features. There are other text-based mobile games by Banjiha Games now that also work with iPhone's VoiceOver and Android's TalkBack features. [SBS News (news). Seoul 2033: An indie game that can also be played by people with visual impairment.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30699 (video, 20 April 2019)] I would say the development of VoiceOver functionality for Seoul 2033 was initiated by a bit of luck. Seoul 2033 is a text-based game in which the story changes depending on the player's choices as the game progresses. That being said, the game has fairly easy mechanics. They were also not based on regular game engines, so it was somewhat playable with the VoiceOver functionality on the smartphone. This allowed us to at least play enough of it to think of suggestions on how to improve it through the App Store review. But what ultimately made this idea turn into reality was how much the developers were devoted to making this happen. If the team at Bangiha Games just neglected our suggestion, if they thought people like us were not able to play games in the first place, this continuous effort of making a game also available to those with visual impairment wouldn't have happened. I also wouldn't have been able to join them as a game writer. Of course, even now, the game's VoiceOver compatibility is not perfect – with new issues popping up upon each update. Still, the developer's constant effort to communicate and resolve those issues is what matters to us. The game Seoul 2033 is, therefore, still being actively played among visually impaired gamers in Korea. * Demo of Seoul 2033 with VoiceOver Another example is The Lord and the Knight (성주와 기사), a mobile game developed by XYRALITY. It is a strategy game that reminds us of a browser-based Tribal War by InnoGames back in those days, in which the player can build their own fortress and conquer the surrounding area. The player can also form alliances with – or compete against – other players. One might wonder how people with blindness are able to play this game as it is a strategy game with maps. But that's not much of an issue. The game can present the direction and distances of the objects relative to my current coordinates. The case The Lord and the Knight is a prime example that games for visually impaired gamers are not solely in the genre of text-based games. With some change of thoughts and dedication, other various types of games can also become enjoyable. How about adding a coordinate feature in the game's map system so that the system can tell the players the key locations and NPCs on the map? How about buttons that are readable via the VoiceOver function on the device? This simple function is something that I often find lacking in many games out there. Hearing all those 'gray area' tricks that visually impaired gamers do just to make a game work is heartbreaking. And it is mainly because of the games' system and design that were built without even a slight consideration for accessibility for blind people. Therefore, I cannot express how much it is important to change people's views – breaking the wall of prejudice as a pathway for more accessible game worlds. Does technological advancement enrich our livelihood? People with disabilities have more chances to engage with the world thanks to some of the crucial technical improvements. Even at this right moment, I'm using a screen-to-voice program to write this article. But on the other hand, we must acknowledge the potential danger of advancing technologies in our lives too rapidly. We often hear stories of people with disabilities – including elderly people – struggling to order simple takeout foods because of high-tech touch-screen kiosk machines now taking over every corner of our world. I remember those times when people played MUD games because computers back then did not have the computational power to run advanced graphics. And those were the time when visually impaired gamers like us were more able to engage also with gamers without visual impairment. I believe lowering the curb height of the pedestrian road is far more pragmatically helpful than a set of supercomputers somewhere in the world to a person with a wheelchair. The cases like Seoul 2033 and The Lord and the Knight evidently show us the importance of overcoming the wall called prejudice. Surely, technical development and large-scale capital investments are important. But overcoming the prejudiced view that remains within ourselves is, I think, the most vital aspect needed to be further encouraged to improve game accessibility – and the inclusivity of our society as a whole. Perhaps this is the main reason why I like games. There are no prejudices or restrictions in the virtual game world. There, whatever the wall blocking me in the game is a wall that I can climb up and overcome. For about a year, with Banjiha Games, I was able to engage in the actual game-making process. I realized how much the game development process involves creative energy. “Disabilities and games”. One may think these two words don't add up that well for now. But I truly believe with game developers' passion and innovative ideas, one day, the combination of those two words will be felt as natural as it should be.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Writer of Banjiha Games) ShinHye Kang I am a blind person who is very interested in games. Currently, I am working as a Korean language teacher in a middle school and participating in the game story work of Banjiha Games.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 Back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 - <잇 테이크 투>로 본 게임 플레이어의 조건 01 GG Vol. 21. 6. 10. 2021년 상반기의 최대 화제작이자, 신데렐라를 뽑자면 첫번째로 나올 게임은 바로 <잇 테이크 투> 다. 아직도 영화 <깝스>에서 사타구니에 총을 끼우고 발사하던 장면을 연출한 장본인이라는 사실부터 떠오르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이자, 게임 제작자인 요제프 파레스의 이 최신작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물이다. <잇 테이크 투>는 그 특유의 보편성이 빛나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보편적 플레이의 집합체’ 라고 할 수 있다. 어느하나 완전히 새롭거나 원전을 찾기 어렵게 변용된 것이 없으며, 새로움 보다는 잘 편집되고 조율된 플레이의 연결이 빛이 나는 게임이다. 마치 순서대로 차려지는 가정식 백반 같다고나 할까. 이 게임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은 역시 다채로운 레거시 게임 플레이의 끝없는 연결이다. 이 게임은 2인 협동 게임이면서도, 기존 게임들의 장르적 메커니즘을 하나씩 따와 채워넣었다. 전체적으로는 2인 협동 퍼즐이라는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TPS, 비행 슈팅, 대전 격투, 리듬 액션, 플랫포머 등 수많은 클래식 메커니즘을 도구로 삼았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이 기존의 플레이 메카닉을 자유자재로 섞어넣은 탁월한 감각이 돋보인다. 이는 또한 게임의 한계점을 교묘히 가리는 효과도 낳는데, 앞서 말했듯 이 게임의 플레이 메카닉은 대부분 이미 있었던 클래식한 요소이기 때문에 반복하면서 피로를 느끼거나 자루함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이 게임은 그런 시기가 오기 직전에 새로운 플레이 메카닉으로 갈아치운다. 즉 잘 편집된 게임 플레이의 나열은, 익숙함을 신선함으로 전환하는 역설적 효과를 가져다 준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는 계속해서 ‘적응->숙련->응용’ 의 반복이다. 보통 하나의 핵심 메카닉을 추구하는 게임은 해당 플레이 메카닉에 플레이어가 충분히 익숙해지면 플레이 하기 위한 문턱, 허들을 높이는 식으로 대응한다. ‘레벨’ 로 대표되는 RPG적 성장 요소가 대표적이다. 이는 닌텐도 스위치로 나온 최근작 <페이퍼 마리오 종이접기 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이 게임은 기존의 게이머들, 특히 대중 게이머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만 하지만, <잇 테이크 투>는 반대로 플레이에 걸림돌이 되는 특징 또한 가지고 있다. 플레이 자체에 이런 저런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빛나게 하는 보편성, 하지만 반대로 그 보편성을 가로막는 플레이의 조건’ 의 대조는 다소 아이러니하다. <잇 테이크 투>를 플레이하는 와중에 든 생각은 이 게임이 왜 대단하고, 얼마나 천재적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플레이를 마무리짓고 나서 든 생각은 ‘이렇게 훌륭한데도 왜 국내에서는 폭넓게 플레이되고, 널리 알려지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플레이의 조건’ 에서 찾아보게 됐다. 지난해 직접 올해의 게임으로 뽑았던 게임, <하프라이프: 알릭스> 는 이런 맥락의 논란을 몰고 다녔다. 즉, VR이라는 기기가 필요한 게임이 어떻게 올해의 게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게임의 평가는 대중성 혹은 범용성을 꼭 포함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쉽게 반박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어찌되었건 플레이의 ‘조건’, 그것이 하드웨어이든, 아니면 플레이어가 갖춘 다른 어떤 여건이든 그 조건이 다소 높다면 과연 그 게임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남겼다. 비록 VR이라는 특수한 사례를 제쳐두고서라도,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한 조건을 요구한다. 사소하게는 기기 스펙에서부터, 나아가서는 플레이어의 실력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몇몇 게임들은 특유의 게임 플레이나 감각적 요소를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문화적 기반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 조건이 필수적일 수도, 그저 더해지면 좋은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잇 테이크 투>는 다른 게임에 비해 이례적으로 그 요구 선이 독특하다. 이는 ‘카우치 코옵(Couch Co-Op)’ 이라는 특성과 제작자의 전작과 달리 ‘가족’ 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카우치 코옵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카우치 코옵은 아직 가정 인터넷이 보급 되지 않은 2000년대 이전 가정용 콘솔 기기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로서, 콘솔 게이밍 기반이 20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콘솔 게이밍 기기는 네트워크 기능을 막 탑재하고 네트워크를 통한 코옵을 확장하였기에, 한국에서는 하나의 기기 앞에 여럿이 모여 분할 화면과 여러 개의 컨트롤러로 함께 플레이하는 문화가 흔치 않았던 것. 있더라도 <위닝 일레븐> 같은 스포츠 대결 게임 위주의 경험이 고작일 것이다. 한국에서 카우치 코옵과 가장 비슷한 문화를 찾아 보자면 한대의 PC로 다자가 한 게임을 공유하며 플레이하던 경험, 또는 오락실의 클래식 아케이드를 찾을 수 있다. 다행히도 21세기 들어 카우치 코옵을 중시하는 콘솔 게이밍 기기인 닌텐도의 Wii, 스위치 등이 저변을 넓히면서 오히려 한국에서는 Wii 방, 그리고 이후 닌텐도 스위치 커뮤니티를 통해 ‘추억의로서의 카우치 코옵’ 이라는 감각을 간접적으로 조립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한국인에게 ‘카우치 코옵’ 은 내가 스스로 겪고 자란 문화라기 보다는, 수입된 문화에 가깝다. 이 카우치 코옵의 감성은 <잇 테이크 투> 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카우치 코옵의 경험은 주로 청소년기에 형성되며, 일종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기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경험이 청소년기에 부재한 한국 게이머들에게는 훨씬 덜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이와 더불어, 게이밍 문화에 아직 짙게 남아있는 남성 중심적 기조는 <잇 테이크 투> 를 온전하게 창작자의 주제의식 그대로 받아들여 체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아직까지도 한국, 그리고 세계에서 청년-청소년이 아닌 기성세대에게 게임은 남성의 문화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가 들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게임이 2인 협동 게임일 뿐만 아니라 ‘자식을 가진 부부’ 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게임은 각각 이혼 위기를 맞이한 아내와 남편을 플레이하도록 한다. 또한 감정적으로 매우 풍부한 과정을 플레이에 담아두었다. 즉 대리체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이 게임의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어 구성은 역시 ‘부부’ 게이머가 함께 플레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잇 테이크 투> 는 생각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게이머 경력을 요구한다. 각종 기존 게임들의 레거시 플레이가 순간적으로 교체되고, 즉각적인 적응이 이 게임의 미덕이다. 비행 슈팅, 대전 격투, TPS 슈팅, 클래식 RPG 등 이 게임이 계속해서 변환하는 게임 메카닉은 코어 게이밍의 영역이며, 캐주얼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는 재미를 느끼기 전에 여러 자잘한 장벽으로 방해받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코어 게이머였던 여성을 찾기 힘든 현재 한국의 기혼 세대에게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분란의 원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즉, 여성들이 게임을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레거시 게임에 대한 선험적인 경험이 필요한 이 게임에서 ‘코어 게이머로서의 경력’ 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주변에서 부부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까지 현재 부모 세대(40대 이상)에게 게이밍이란 전적으로 남성의 문화, 또는 남성적 게임과 여성적 게임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행동 양식이 깊게 베어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훨씬 그 빈도가 높아보였다. 실제로 부부가 함께 플레이 했다는 감상, 후기의 절대적인 수가 해외가 더 높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여성들도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 게임을 접하는 기회가 남성만큼이나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세대를 불문하고 ‘여성 게이머’ 에 대한 멸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불거진 특정 여성 스트리머의 <리그 오브 레전드> 챌린저 논란이 대표적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등 대중적 게이머층을 형성한 경쟁 게임을 중심으로 게이밍은 점점 더 보편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코어 게이밍 문화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다. 그나마 닌텐도 스위치를 위시로 한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게임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여성 코어 게이머 층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그런 게이머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우리 모두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게이밍이 어떤 기본 교양, 소양으로 여겨지는 문화였다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장벽에 가로 막히지도 않고, 또는 부부 사이에 좋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로서 이 게임을 플레이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카우치 코옵이라는 플레이 방식이 주는 노스탤지어, 그리고 ‘부부의 갈등 해소’ 라는 중심 사건이 플레이어에게 깊이 천착하는 감성은 역으로 한국의 게이머들에게는 거리감을 두게 만든다. 이 두가지가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임을 고려할 때, 게임의 완성도에 비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요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잇 테이크 투>가 올해의 최고의 게임이 될만한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올해 상반기 출시작 중 이만큼 강렬한 게임 플레이를 보인 사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의는 순수하게 ‘게임 플레이’, 즉 직관적인 놀이로서의 재미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게임 플레이라는 핵심이 아닌 캐릭터의 외관, 이야기에 삽입된 전형적 요소, 마케팅 같은 외적 요인에 기댄 게임들에게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게임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논한 ‘플레이의 조건’ 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태초의 게임 ‘퐁’ 역시 2인이 아니면 플레이 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물론 어떤 한 문화의 시작점이 수십년이 지나도 절대적인 잣대로 남아있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론 꾸준히 요제프 파레스는 2인 플레이 게임을 만들어왔고, 때문에 전작과 동일한 플레이 저변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잇 테이크 투>가 전작과 달리 널리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대중적 접근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록 다른 대중적 게임에 비해서는 후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작에 비해서는 훨씬 진일보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우리가 자리잡은 게이밍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또는 그 변화가 충분히 급격하지 못하다면,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폭넓은 이해의 관점이다. 협소한 사건 그 자체나 자신의 1차적 경험에만 의존한 해석이 아니라 좀더 광의에서의 이해, 근본적으로 그 감정이 내게는 어떤 식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 찾아보는 수용의 자세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완전 연소한 게임의 가치를 곱씹을 수 있다면 된게 아닐까. 아마 올해 내내, <잇 테이크 투>가 고평가를 받는데 있어서 이 플레이의 조건은 내내 발목을 붙잡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이 게임은 카우치 코옵,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 많다고 보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있는 시도였다고 평하겠다. 더불어, 게임을 평가할 때마다 하는 말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세상에는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있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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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 Back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12 GG Vol. 23. 6. 10.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One may well ask: ‘are artworks not synonymous with inculcating aesthetic experiences?’ The answer to this can only be ‘of course’ yet the qualification here is that we have to be precise about the kinds of ‘experiences’ in question. If we expect computer games to be able to convey complex states of interiority encountered by a protagonist grappling with a gamut of emotions, then we would potentially be comparing the game to works of literature and philosophy (and judging it as such). The orientation that I suggest is, moving away from preoccupations of artistic status towards scrutinizing experience can potentially shift our attention away from pining for the acceptance of computer games into the fold of high culture – a dubious aim at best – to focusing on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is aim of deepening aims to have us become more attentive to our experiences and to then demand games that push the boundaries of existing experiences. ‘Aesthetics’ and ‘experience’ Computer games are multimedial works. In this respect, we might call them Gesamstkunstwerks (total works of art) made through collaborations of skilled individuals that go beyond the confines of a single medium. When we play them, we can focus on the experience as a whole or attune ourselves more narrowly to, for example, the visual representations, the animation, the level design, the dialogue, the musical score, etc. The notion of ‘experience’ that I have mentioned can be brought out via existing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aesthetics’ (or the ‘aesthetic’), which is a polyvalent one. Western aesthetics has generally demarcated aísthēsis (perception from the senses as well as discernment through them) from noesis (purely intellectual apprehension or the application of reason). ‘Aesthetics’ is often taken expansively to encompass the overlapping concepts of: ‘sensation’, or what presents itself to our sensory experiences in general; ‘perception’, where the activity of the viewer is crucial to the mode in which the object is apprehended or perceived; and ‘judgment’, in which aesthetic judgments are characterized by their not being mediated by the application of concepts or reason. ‘Game aesthetics’ may be taken to connote a degree of distinctiveness to computer games, digital games, or videogames. It can be tak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how it feels to play a game’; playing games can be said to yield particular kinds of experiences or perceptions through the senses, which can be studied with an aesthetic focus. The philosopher John Dewey consistently made the case for seeing continuity between so-called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Dewey thought that what was to be avoided was the human creature divided against itself, which happens when our capacities (emotional, intellectual, sensory) are not be allowed to work naturally in conjunction with one another but are instead compartmentalized or separated from each other. This occurs as soon as we think about the realm of ‘art’ as separate from the sphere of ‘life’. It happens as soon as we assume that aesthetic experiences are only to be had when we enter into the designated space of the art gallery or the opera house (and not outside of them). To do this is to leave behind all our other experiences to languish as non-aesthetic, or even to assume that they are merely ‘instrumental’ – geared towards and reducible to a direct end like earning a wage, cleaning the house, keeping fit, having a conversation with friends, and that there is nothing else to them. The potential richness of improving our immediate experiences, of integrating aesthetic experiences into individuals’ vital interests and lives would therefore be missed. This is not to put the blame at the feet of artists or curators or critics; it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not works in the art world that are not contributing to the deepening of our experience – there certainly are. Yet it is also the case that there are real financial interests in play that want to keep the art world as separate. Preserving its power of categorical consecration, its ability to bestow the symbolic status of ‘this is art’, is to keep the current ordering of the world. Built into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are many key assumptions. These assumptions are arguably hostile to our developing fine-grained attentiveness to the actual experiences of gameplay. The first assumption concerns how the concept of ‘art’ is deployed with the supposition that either some works are ‘art’ or they are not. This is a binary categorization that can stifle further questioning. Secondly, there is the invocation of ‘computer games’ as a single category, which does little to help us parse the very different sorts of gameplay available even within a single genre. Finally, there is the assumption that computer games are like (most) other artworks in that they are identifiable objects or works. In this framing, the value is thought to reside more in the expression of artistic insights into the work by the developer and less in the process of what the player brought to the gameplay in order to enliven the experienc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for them. When players report that a game like Dark Souls (2011, FromSoftware) helped them to battle depression, it is the psychological state (together with the dedication) that the player brought with them that, in a concatenation of player and game via a lengthy process, produced an experiential transformation in the player. Critics applying aesthetic criteria The film critic Roger Ebert caused controversy when, in 2005, he claimed that video games, which, by their nature require player choices, could not attain the stature of art, since serious art like film and literature all require authorial control. Although he later stated that it was foolish to deny that all games could not ever be art even in principle, his position arguably concretized a perspective that is held by many – that computer games are juvenile, unsophisticated, geared towards immediate gratification, saturated with bombastic visual effects, quantified so as to preclude ambiguity, pandering to vulgar emotions. I am less interested here in dissecting Ebert’s arguments or in mounting counter-arguments (others have already done this) than in pointing out the nature of the claim itself. It is a claim that in order for games to seriously contend for the status of art, they must become like other accepted art forms. For some, this is so uncontroversial as to go without saying. Even for some philosophers of computer games, it has been a difficult position to escape. Grant Tavinor is a philosopher of the arts. His writings have largely focused on the ontological issue of whether computer games can be deemed to be art. He has consistently held that this can be answered in the affirmative but has always severely qualified it so that only a subset of video games are properly considered art. His approach has been to turn to existing definitions of art – to analyse the extent to which computer games do or do not satisfy their conditions – yet to do so without championing any single theory. This is accomplished by taking the ‘cluster theory’ approach which posits a list of aesthetic properties; a computer game is deemed to be a work of art if it instantiates a sufficient number of these attributes. In his 2009 book, The Art of Videogames, Tavinor cites on page 177 the cluster definition given by aesthetician Berys Gaut, which had stated that the following properties counts toward something’s being a work of art (and the absence of which counts against its being art): (1) possessing positive aesthetic properties, such as being beautiful, graceful, or elegant (properties which ground a capacity to give sensuous pleasure); (2) being expressive of emotion; (3) being intellectually challenging (i.e., questioning received views and modes of thought); (4) being formally complex and coherent; (5) having a capacity to convey complex meanings; (6) exhibiting an individual point of view; (7) being an exercise of creative imagination (being original); (8) being an artifact or performance which is the product of a high degree of skill; (9) belonging to an established artistic form (music, painting, film, etc.); and (10) being the product of an intention to make a work of art. Tavinor emphasises that Gaut is not necessarily committed to these ten conditions in their particularity, only that they are the kind of conditions that should make up a successful cluster account of art. Clearly, Tavinor appears to share the view that such existing cluster theories are broadly correct in their articulation of such conditions, even if they reserve the right for themselves to make revisions on finer points. The application of this approach leads him to preclude games that have been recognized as classics, such as Space Invaders (1978, Taito) and 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from artistic status. This is because they only have very partial overlap with the cluster theory. About Red Dead Redemption, Tavinor says the following in a chapter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 (p.60): Red Dead Redemption is frequently and justly held up as a high point of recent game art, but even in this game the drama and narrative is a rather derivative and often ham-fisted approximation of the Western genre; treated as a film, it is firmly B grade. It is an unexceptionable statemen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found in video games are often of poor quality. Moreo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single instance where these aspects reach the heights of refinement they do in the confirmed arts. In other words, Red Dead Redemption appears to be judged primarily with regard to its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These elements can be more easily accommodated in cluster theories than may be the case with the feel or the rhythm of the gameplay experience as a product of its ‘interactivity’ (or some other framing of its distinctive qualities). Thus, although Tavinor believes that computer games should be treated, as a form of art, on their own terms, and not simply seen as derivative forms of pre-existing types, the reality of his applying a cluster theory amounts exactly to applying a list of qualities that come from extant theories of art. As such, these qualities were formulated in a cultural and historical milieu in which the candidacy of computer games as art, or even as capable of fostering experiences worthy of aesthetic consideration, were not genuinely entertained. Tavinor’s philosophical methodology determined the result. Are artists who work with games interested in gameplay? It is not just existing philosophical frameworks that have had a hard time with making sense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The art world has tended to exhibit computer games by presenting them in the neutral context of a historical overview, which sidesteps the issue of the qualities of their gameplay. The first UK exhibition to show games was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2002. 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lso took a historical approach in 2012 with The Art of Video Games, featuring games from Combat (1977) to LittleBigPlanet 2 (2011). Alternatively, other strategies include foregrounding commonly understood aspects of games such as the playable avatar, the premise of inhabiting a virtual world, or the representational aspects of games. The American artist Cory Arcangel is known for his conceptual focus on the visual aspects of computer games. His works rank amongst the most widely known ‘game-related art’, having been exhibited at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Whitney Museum and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 Chicago. One of Arcangel’s most celebrated pieces is his Super Mario Clouds, a video installation of the 1983 game Super Mario Bros. modded so as to be stripped of everything except the cyan sky and white 8-bit clouds game clouds drifting across it. There is no Mario, no koopa troopas, no goombas. Gameplay has been exorcised in favour of visual contemplation. In a similar vein, Arcangel’s 2011 exhibition at the Barbican called Beat the Champ, an installation that featured fourteen bowling games (from the 1970s to the 2000s) in chronological order, precluded gameplay( https://www.barbican.org.uk/whats-on/2011/event/cory-arcangel-beat-the-champ) . As the viewer walks through the space, the sounds that the encounter are not ones of bowling ball striking pins but the whir of ‘gutter balls’ as each of the games has been programmed by Arcangel so that the bowler does not score a single point. Thus, the gallery goer encounters the kind of authorial control lauded by Ebert. They are confronted with the audio-visual dimensions of failure in bowling games, designed to elicit a series of subsequent reflections. But when se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it is a determined failure that is shorn from social and gaming context that would give failure meaning. The presence of the consoles themselves at the exhibition – the gameplay on show are not mere recordings – further underscores your inability to play the games themselves. This is an inability to experience the tensions and anxieties involved in the gameplay, the dance of fingers on buttons, the acclimatization to gaming rhythms, the inevitable frustrations, and the judgment of which game might offer the most compelling gameplay and why this may be so.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artwork here is what Arcangel did with the games and how he displayed them. As with Super Mario Clouds, the claim to art lies in the conceptual and the visual aspects of the display – a language familiar to the art world. It is most certainly not the games themselves. The embodied challenges of the gameplay as an experience also do not feature.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Robbie Cooper’s installation Immersion (2008), on the other hand, does take gameplay as a point of interest. It documented the embodied reactions of users of digital media across the world( https://www.scienceandmediamuseum.org.uk/what-was-on/robbie-cooper-immersion) . A prominent component of this consists of children playing computer games. The high-definition video capture of the players’ faces (the camera is in the position of the screen so the players seems to look directly at u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can peer into the moment-by-moment mental states of the players. Although we cannot see the changing displays, we are able to draw correspondences between the sounds emanating from the game and the players’ facial expression and bodily postures. One girl is playing the fighting game Tekken 5: Dark Resurrection(2005, Namco). There are sounds accompanying the special effects as blows connect, as well as the grunts and yowls of the characters. We can piece together the unfolding action, since anyone who has played Tekken will remember which moves trigger which sounds. We see Cooper’s subjects’ bodily, emotional, and cognitive sense-making in process, how the action has been enacted by the player and how it then affects the player in the machinic loop between player and game that is gameplay. Yet while Cooper is able to bring our attention to the complexity of the players’ experiences in question here and how they are bound up with their bodily being in the world, he is not able to shed any further light on them. He holds up a mirror but does not comment.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Indie game makers have pushed our gaming experiences by challenging existing gaming conventions, by having us see what has been normalized within genres as accepted practice by players and developers to fit a model of ‘good gameplay’. Thus, they offer their commentaries on what has gone stale in the status quo of game design and what else we might have instead, what alternatives experiences are possible. Of course, larger developers have also done this; my contribution here is not to attempt a history of such innovations. There are innumerable indie examples to draw from here, and they have all been discussed at length by others elsewhere so I will keep this very short. Undertale (2015, Toby Fox) forced us to confront our own assumptions around the RPG genre by underscoring that what we thought was the only way in any situation might not in fact be the only one (and may indeed not be the only way for gameplay to occur); Braid (2008, Number None) opened up avenues for considerations of time-based mechanics, for thinking about causation that has influenced many other games; The 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 riffed on choice and freedom through the limits of replayability in order to question how freedom in games might ultimately be rather limited;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 tested the player’s relationship with themselves – whether they were able to ‘get over it’ or whether they were entrapped to exact unforgiving expectations on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ir own egos or self-identification as ‘hardcore gamers’. These and other games have provoked reflection on the gameplay experience. My point, however, is certainly not that we should await such thoughtful offerings and to pin all expectations of claims to artistic status and aesthetic experience on them. A deepening of the gameplay experience The Deweyan project called for an integration of art and life, which is something that is only possible when we are able to, as a community, bring the attention that we might reserve for art to everyday life. This is no small challenge. In this essay, I have been talking about the gameplay ‘experience’ and the need to deepen it. The best way to do this is for every individual to direct their attention to their own gaming experiences and to hone their ability to do so. This would be in keeping with the Deweyan idea of fostering a community of human beings that do not have their capacities divided into compartments corresponding to social norms. I can attempt to sketch out some general aspects of gameplay experience which are shared across a range of games, acknowledging that these descriptive generalizations are only pale shadows of the specific experiences that individuals actually have under specific circumstances: there is the joy in seeing our gradual skill-development as we internalize the game mechanics and come to act and respond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that we have inferred, which are also principles that we adapt over time; there is the strategic appraisal of different choices and the speculation over their possible outcomes; there is the strain in the exercise of memory in which pieces of information are selectively recalled or forgotten as they become relevant or obsolete; there is the intelligent but non-conscious focusing of attention to some moving stimuli and not others, a keeping track of the complex and ever-shifting landscape of moving opportunities and threats; there is an appreciation for the ebb and flow of the gameplay, for periods of rest and moments of being on the brink of loss or victory; there is a keenly honed spatial and temporal awareness applicable to specific contexts such as certain levels, where the action of a split-second condenses some possibilities and severs others; and finally, there is the pleasure in the ability to act automatically, intuitively, masterfully, in serene moments where control is both relinquished and yet exercised. It is the case that we can often be amnesiac with respect to our gameplay experiences. We play the game, relegating the experience to that of mere ‘fun’ in our own head, and then learn to forget about it afterwards. This is because we have not attempted to apply the aesthetic perspective to what we do not think is ‘art’. Alternatively, we might think about gaming only as a form of training to get better or of beating a challenge, measuring value by our progress in this respect. Instead, we might take time to mull over the contours and textures of our gameplay experiences, considering how they unfolded, how they are developing, how they might have been different, and what about them succeeded or failed to captivate us (and why). The demands of gameplay can of course make such reflections, in the moment of play, difficult. With greater proficiency in the game this becomes easier over time. Such accomplishment (both in the game and in attending to our experience) takes practice. As the philosopher of habit, Clare Carlisle has remarked, our attentiveness to thoughts, physical sensations and emotional responses can catch habit in the act and can lead to the cultivation of a connoisseurial sensitivity. Through this practice, we might come to a more refined understanding of the aesthetic value of gameplay experiences, in their complexity, and thus a deepening of our experience that will cascade into a greater appreciation of what games can potentially offer.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Feng Zhu Dr Feng Zhu is Lecturer in Games and Virtual Environments in the Department of Digital Humanities, King’s College London. He is interested in computer gameplay as a site from which to explore the intersection of power, subjectivity, and play. His research focuses on computer games and how we habituate ourselves through gameplay. In particular, it concerns forms of gameplay as longitudinal self-fashioning that may inculcate ambivalent forms of reflexivity and attention, some of which may be read in terms of an aesthetics of existence.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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