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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 Back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GG Vol. 25. 4. 10.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 [1] 는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장르다. 이 장르는 태생부터 특정한 테이블 탑 게임을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모델로 삼으며 탄생했다. 초기 비디오게임 RPG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테이블탑 RPG(이하 TRPG)인 《던전즈 & 드래곤즈》(이하 D&D)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것에 목표로 두었다. 대부분 미국의 대학 내 인트라넷 시스템이었던 PLATO [2] 를 그 플랫폼으로, D&D를 즐기던 대학생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세간에도 잘 알려져있다. 또한 리처드 개리엇의 초기 작품인「아칼라베스」 역시 초기 버전의 제목이 DnD였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이 독특한 장르는 이러한 외부적 게임을 디지털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장르다. 물론 다른 장르들, 예를 들어 스포츠나 대전 격투 역시 현실의 ‘게임’을 디지털적으로 구현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RPG는 이들과는 다른 방식의 번역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RPG가 디지털의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대상이 육체의 운동이나 정형화된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TRPG를 구동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 그것은 TRPG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이 참가자들의 ‘언어’라는 사실이었다. TRPG 역시 대개는 적절히 구성된 게임 세계와 가변성이 큰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불편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한 기반적 틀거리에 한정된다. TRPG는 그 이상의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게임 내에 등장하는 장애물의 종류, 풀어야 하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참가자들 이외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요소가 완전히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설령 특정한 적 캐릭터에게 수치적 데이터가 있다고 한들, 그들이 어떤 배치로, 어떤 전략으로, 어느 정도의 사기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마음 가짐으로 플레이어들과 대립하는지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언어적 합의와 심판의 역할을 맡는 ‘게임 마스터’에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이러한 세계와 게임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상호 반응할 것인가, 당면한 문제를 어떠한 과정으로 해결할 것인가 역시 모두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확정된다. TRPG라는 게임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기반은 언어이며, 비디오 게임으로서의 RPG는 이 기반의 ‘거대함’을 번역하는 것을 요구받은 장르다. *「울티마」(1981)는 자율적으로 접촉 가능한 세계를 통해 거대함의 컨셉을 작동시킨다. 초기 미국의 컴퓨터 RPG(이하 CRPG)들은 이 거대함을 ‘게임 세계’라는 컨셉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세계는 선형적이거나 순환적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는 사전적으로 규정된 세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기능을 얻었다. 「울티마」는 탑뷰로 내려다본 세계와 1인칭의 시점으로 구현되는 던전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던전의 구성은 난수적이긴 했으나 일정한 패턴을 통해 구현되었다. 플레이어는 어떤 곳에 먼저 들를지, 무엇을 먼저 구매할지 따위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반응해나가야 했다. 「위저드리」는 그보다는 더 좁은 세계인 다층 구조의 지하 던전을 다루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물과 플레이어는 비선형적 관계를 맺었다. 좁은 지하의 터널 내부에서도 ‘어떤 방’을 ‘어떤 순서로’ 탐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몫이었으며, 때로는 모험을 포기하고 다시 지상으로 귀환해 상태를 재정비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물론 이러한 반응성의 세계는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이를테면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나 「조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CRPG는 이런 어드벤처 게임들과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체계를 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일종의 ‘수치에 의한 캐릭터 규정과 성장의 체계’다. 이 체계는 전적으로 그들이 원본으로 삼던 D&D의 것을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언어라는 구조를 완전히 빌려올 수 없었던 디지털의 방법론에서 이 수치 개념이야 말로 가장 구현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도 했다. 지미 메이허Jimmy Maher는 《CRPG의 르네상스 파트 1》에서 이 문제를 꽤나 신랄하게 비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CRPG는 전투와 병참 관리가 전부인 게임 엔진 위에 스토리와 세계 구축이라는 얇은 외피를 씌웠고, '롤플레잉role-playing' 게임이 아니라 '롤플레잉roll-playing'이 되었다.’ [3]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구현은 RPG라는 것이 초기 텍스트 어드벤처 혹은 다른 ‘거대한 서사’를 지탱하려는 비디오 게임 장르들과 구분되는 지점을 형성한다. RPG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위대해짐’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요컨 당대의 서사를 내포하는 다른 장르의 주인공들 역시 ‘더 복잡하고 장대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장애물과 마주하는 주인공 그 자체가 그에 상응할만한 존재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4] 하지만 RPG가 D&D로부터 빌려온 이 캐릭터 성장의 구조는 플레이어의 캐릭터에게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부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더 위대한 상태에 도달해 더 거대한 위협을 무찌르는 에픽epic [5] 의 서사의 구축이 가능해진다. [6] 한편 이러한 장대함의 구조는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을 대체할만한 또 하나의 컨셉, 즉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줬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장르인 RPG는 ‘(거대한) 게임 세계’와 ‘(거대한) 에픽의 서사’라는 두 가지 컨셉을 지닌 장르로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핵심은 이 두가지 컨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컨셉들이 발현시키는 고유한 RPG만의 체감 조건에 있다. 넓고 반응 가능한 세계, 그리고 점차 ‘위대해지는’ 캐릭터의 변화는 플레이어를 게임의 내부에서 ‘정처없이 서성거리’도록 내민다. 이런 구조는 원뿔형의 나선으로 토픽화 된다. 플레이어는 넓은 반응 중심의 게임 세계에서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정처없이’ 움직이고, 이러한 움직임이 캐릭터를 ‘점차 위로 상승’시켜 최종적으로는 꼭대기peak와 접촉한다. 이런 구조는 초기 미국의 RPG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코드를 어느 정도 변용해 받아들인 일본의 RPG(Japanese RPG, 이후 JRPG)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단, 이 하위 장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퀘스트」는 프로듀서의 지향 [7] 에 의해 ‘게임 세계’보다는 ‘에픽의 서사’가 더 강조되었고, 이후의 JRPG가 그러한 서사에 더 집중하도록 만드는 기반을 부여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RPG라는 것이 탄생한다. 선형 혹은 순환형 세계에서 변화를 가지지 않던 주인공들이 존재하던 세계에 ‘정처 없는’ 플레이가 들어선 것이다. 1990년대 : CRPG의 고전기 이렇게 형성된 RPG라는 장르는 1990년대에 이르러 그 형태가 더욱 졍교해진다.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Role-playing Game Studies》(2018) 에서 슐스Schules, 피터슨Pterson, 피카드Picard는 ‘게임 제작 수의 폭발적인 증가와 출시되는 게임의 질적 향상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학계와 팬들은 1990년대를 CRPG의 황금기로 간주한다.’ [8] 고 쓰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은 이후의 RPG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개의 게임들, 블리저드의 「디아블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인터플레이의 「폴 아웃」,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II : 대거 폴」,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 등이 발매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수/다종의 제작과 발매는 장르 내부에서의 적극적 분화를 이끌어낸다. 이 시기에 RPG가 유독 비디오 게임계의 주요 화두가 된 것은 비디오 게임 환경의 전적인 이동에 있기도 했다. 1990년대 개인용 PC의 보편화와 더불어 닌텐도, 세가의 적극적 공세는 비디오 게임의 소비 공간을 아케이드에서 가정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러한 소비 공간의 변화는 게임의 소비 방식 자체를 ‘일회적 양식’에서 ‘다회적 양식’으로 크게 변화시켰고, 플레이어들은 다회의 플레이가 맥락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월드」같은 플랫포머 게임조차 맥락적 다회 플레이를 의식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경혁은 《현질의 탄생》에서 이렇게 적는다. "(게임의 소비 공간의 변화를 통해)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변화는 긴 호흡의 게임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엔딩 없이 무제한으로 반복되던 초창기 게임들은 서서히 나름의 서사를 가진, 다시 말해 엔딩이 있는 게임의 형태로 변화했다. (...) 콘솔/PC 게임들이 보여주는 세이브/로드를 통해 초장 시간의 서사를 갖는 게임 플레이는 (...)" [9] 70~80년대에 발흥한 RPG라는 장르는 이러한 비디오 게임 소비의 공간적 변화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작동한다. 호리이 유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점점 강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거든요. AVG는 수수께끼가 막히면 할 일이 없어져버리지만, RPG라면 일단 레벨을 올리기만 해도 즐길 수 있잖아요. 수수께끼를 풀고 레벨도 올리면서 계속 나아가면 많이 놀 수 있는데다가,(후략)." [10] 이 시기를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etti의 장르 사이클에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고전기 [11] 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전기는 ‘중간단계로서 균형, 풍요, 안정 같은 고전적인 이상을 구현’ [12] 한다. 즉, 80년대에 만들어진 RPG라는 장르 규칙은 1990년대의 폭발적 증가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이상적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이 때의 RPG들이 무엇을 그 고전적 이상으로 삼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RPG를 ‘RPG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거대한 세계,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보다도 그것을 달성시키는 ‘양식 조건’, 수치적 캐릭터 구성과 그 성장 체계에 기울어진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RPG를 ‘다른 장르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RPG’라는 태그를 달 수 있는 조건은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수치화된 ‘능력치’라는 것이 있는지, 점수화된 경험을 모아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통해 이 시기에 ‘RPG화’라는 욕망은 이 메커니즘을 어떻게 이식하는지에 달려있었다. 예를들어 시에라 온라인이 이러한 ‘RPG성’을 이식해 만든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 「퀘스트 포 글로리」 [13] 의 경우, 역시나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양식 조건이다. 당시의 게임 잡지인 《PC 매거진》 1993년 1월호는 이 게임의 세번째 작품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사용한다. ‘이전의 「퀘스트 포 글로리」와 마찬가지로, QG3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CRPG)과 그래픽 어드벤처가 혼합된 게임입니다. 캐릭터의 특성과 능력은 능력치의 리스트에 의해 정의됩니다. 상황의 성공 여부는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지며, 연습을 통해 스킬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14] 이러한 규정은 연구자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구석이 있다. 2008년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에 실린 마이클 히친스Michael Hitchens와 앤더스 드레이센Anders Drachen의 《롤플레잉 게임의 다양한 얼굴들》에는 싱글 플레이어 디지털 롤플레잉 게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이러한 게임은 캐릭터의 수치적 표현에 의존하며, 펜 앤 페이퍼 게임의 전형적인 스킬과 능력의 수치적 향상에 따라 캐릭터가 성장한다.’ [15] 또한 2012년 발매된 《비디오 게임 대백과》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모든 RPG에는 정량화할 수 있는 특징(테이블탑 스타일 RPG에서 사용되는 캐릭터 시트와 동등한 디지털적 요소)을 가진 플레이어 캐릭터가 있으며 캐릭터의 성장이 성공의 중심 척도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RPG 규칙 시스템에는 자주 '경험치 레벨'이 포함되는데, 이는 게임에서의 성공적인 진행을 통해 새로운 능력과 스킬로 '레벨 업'할 수 있는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다.’ [16] *《PC GamePro》에서 배포한 「디아블로」(1996)의 리뷰 프린트 광고. 잡지에 따라서는 Action RPG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양식 조건만으로 RPG를 설명할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96년 블리저드의 「디아블로」가 출시된 뒤, 해당 게임을 CRPG로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7] 그럼에도 「디아블로」는 여러 게임 잡지들의 기사 등에서 ‘RPG’로 홍보되었으며 전통적 팬덤의 입장과 무관하게 RPG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즉 업계에서는 RPG라는 게임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수치적 캐릭터 규정과 성장 방식을 하나의 문법으로 사용했다. 설령 전통적 RPG의 팬덤이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편 이러한 비교적 가벼운 규정은 1990년대에 RPG의 제작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덕분에 다종으로 분화할 토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일본에서 탄생한 SRPG의 경우 세계와의 접촉이 선형적이고 불가역적임에도 불구하고 RPG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게임 무대stage에서의 자유로운 전술적 지침이 이러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일부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는 그것의 고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과 동시에 그것에 다종의 분화를 만드는 수정기의 초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분화는 크게는 RPG의 거대 컨셉을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느냐를 통해 분화되었다. 요컨대 지리적 요건에 의해서는 일시적으로 서구식 RPG(Western RPG, 이후 WRPG)라고 불리웠던 그것과 JRPG로, 인터넷이라는 기술 조건에 의해서는 단일 플레이어 RPG와 멀티 플레이어 RPG로 분화되었다. 이 때 이 분화를 만들어낸 배경에는 전적으로 RPG의 핵심인 ‘거대한 컨셉’에 대한 각자 다른 접근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할 필요는 있다. 90년대 말의 RPG 1 : 지리적 분화로서의 WRPG와 JRPG 먼저 지리적 분화는 RPG가 내포한 ‘거대함’의 컨셉을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테면 WRPG는 거대한 ‘세계’에 방점을 찍는 반면 JRPG는 거대한 ‘서사’에 방점을 찍는다. 특히 WRPG는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로, JRPG는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VII」로 이러한 특징의 엇갈림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일시적으로 침체기에 들어갔던 CRPG, 특히 D&D를 기반으로 하는 CRPG를 완전히 전복한 작품으로 꼽히는 「발더스 게이트」는 21세기 이후 서양식 RPG의 가장 모범적인 구성을 명백히 한다. 당연히 「발더스 게이트」 역시 에픽의 서사를 추구하지만, 그 내부에서 세계와의 접촉은 두 개념으로 분할되어 작동한다. 먼저 ‘주된 서사’는 챕터의 단위로 분절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각 챕터의 내부에서 세계를 향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실행해 세계의 수많은 요소와 접촉하고 상호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절차 기반의 세계 탐험은 이 게임보다 약 5년에 앞서 발매된 다이나믹스의 「크론도의 배신자」에서 이미 확립된 개념이긴 하나, 「발더스 게이트」는 이러한 세부적 접촉을 관리하는 저널의 역할, 그리고 각각의 접촉이 발생시키는 상당한 수준의 다면적 반응을 통해 세계 자체가 가진 생동성을 극히 도드라지게 만들어냈다. 단순히 세계에 흩뿌려진 작은 서사의 조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 캐릭터가 가진 특성이 대화의 양상에 반영되거나, 대화 양상이나 접촉의 순서가 이후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세계의 생동을 전달한다. 따라서 「발더스 게이트」에서 가장 핵심적인 코드는 결국 ‘세계’가 된다. 이는 그와 유사한 시기에 발매된 두 편의 「폴 아웃」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 결국 이 시기 WRPG는 초기 CRPG가 가져온 ‘세계’의 맥락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파이널 판타지 VII」는 전적으로 서사의 맥락을 향해만 나아간다. 발매 당시 「파이널 판타지 VII」는 서사의 중간을 채우는 화려한 컷씬으로 그 특징이 규정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온갖 기이한 요소들이 산재한데, 특히 이야기의 진행을 메우는 미니 게임의 역할이 그렇다. 「파이널 판타지 VII」에는 챕터와 챕터를 메우는 독특한 구성의 미니 게임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은 슬로프에서 스노우 보드 타기, 잠수함을 조종해 적기를 격추하기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발현되곤 한다. 게다가 각각의 미니게임은 (RPG의 규칙적 전제인) 플레이어의 성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완전 독립된 구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지점을 갖는다. 이들의 이상한 점은 이러한 외부적 플레이를 플레이어에게 강제하는 구성이라는 점에 있다. 마치 스퀘어 소프트는 자신들이 상정한 서사 전체를 ‘체험’시키려는 요량으로, 그러니까 서사가 허용한다면 그것을 게임 플레이로 해석해 체험시키겠다는 강력한 욕망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즉 이 세계는 「발더스 게이트」처럼 플레이어에게 반응하기 보다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반응하길 바란다. 이 반응 요청의 하부 구조에 ‘에픽의 서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기묘한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은 JRPG라는 것이 작동하는 원리가 그 무엇보다 ‘에픽의 서사’에 있음을 천명한다. JRPG는 ‘서사’라는 컨셉을 위해서라면 ‘세계’라는 축 마저 납작하게 만들 각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VII」(1997)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서사에 상응하는 미니게임을 갑작스럽게 던지곤 한다. 이들은 21세기 초를 규정하는 다른 중요한 RPG들, 블랙 아일 스튜디오의 「플레인스케이프 : 토먼트」(이하 「토먼트」)와 스퀘어 소프트의 「파이널 판타지 X」의 분명한 토대가 된다. 21세기 초 사반세기의 RPG의 규정에는 이들로부터 이어지는 지리적 양태를 무시할 수 없는 흔적이 있다. 90년대 말의 RPG 2 : 통신 기술의 기반으로부터의 멀티 플레이어 RPG 한편 20세기 말은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 혁명적 디지털 기술의 변모가 존재하던 시기다. 이 조건은 RPG라는 장르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데, 본디 RPG가 모델로 삼고 있던 TRPG는 그 자체가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 반응성의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동시에 감각 시킨다는 조건은 RPG의 이상적 모델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MORPG 또는 MMORPG는 그 선조로서 MUG를 가지고 있다. MUG는 기본적으로 「콜로설 케이브 어드벤처」 같은 텍스트 어드벤처를 다수의 환경이 동시에 즐기는 것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세계를 공유할 경우, 그 안에는 인식을 위한 ‘동일한 체계’가 필요하다. 결국 텍스트 어드벤처들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추상적 이미지만으로는 한계지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수치로 규정되는’ RPG의 양식적 기반이 그 내부에 들어선다. 그리고 인터넷의 전송 가능한 데이터의 수치가 증가함에 따라 텍스트라는 한계지점을 넘어 최종적으로 그래픽으로 운용되는 세계가 구동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MMORPG는 단연 1997년 출시된 「울티마 온라인」이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가장 확고히 인식되는 욕망은 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어떤 면에서 이 게임으로부터는 TRPG의 그것을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 ‘거대 세계’라는 컨셉 안에서라면 그것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까지도 느껴진다. 물론 TRPG의 언어라는 컨셉은 무한한 가능성의 조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와 대면하는 게임 마스터라는 접면을 토대로 한다. 하지만 「울티마 온라인」은 모든 플레이어 캐릭터가 직접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어줌으로서, 가상적 세계 그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구동’시키고 싶어한다. 플레이어는 필요에 따라 여러 캐릭터를 생성할 수 있는데, 보편적인 RPG의 주인공인 ‘모험을 하는’ 캐릭터 외에도 경제 활동에 투신하는 직업인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게임 내부에서 연결되고, 관계 맺고,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울티마 오리진」의 이상적 모델이다. 따라서 여러면에서 「울티마 온라인」이 상정하는 ‘거대 세계’의 모델은 TRPG의 그것보다 더 커다란 측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 두 세계라는 컨셉은 오히려 구분되어 버린다. 즉, 「울티마 온라인」의 진행은 어느 순간 CRPG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TRPG를 지나쳐버린다. 한편 싱글 플레이 RPG, 이를테면 「발더스 게이트」나 「디아블로」 등에서는 네트워크 기능을 통해 동일한 세션을 함께 즐기는 멀티 플레이가 탑재된다. 특히 D&D를 그 원전으로 삼는 「발더스 게이트」는 TRPG의 온라인 세션을 염두에 둔 구성임이 명백했다. 「발더스 게이트」를 동시에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세계의 구성물이 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반응하는 존재로만 기능하도록 구성되어있다. 사실상 이 구성은 디지털 구조에 게임 마스터의 역할을 뒤집어 씌운 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심플한 「디아블로」는 하나의 지하 던전을 함께 헤집고 다니는 반응적 ‘파티’를 구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 경험은 사실상 고전 아케이드 게임인 「건틀렛」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은 「울티마 온라인」이 품고 있는 ‘다수의 플레이어에 의해 거대 컨셉이 스스로 구현되는 것’과는 거리를 둔다. 어떤면에서 보면 이 두 분화의 관계는 WRPG와 JRPG의 더 거대한 버전처럼도 보인다. 이를테면 「울티마 온라인」은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더욱이 거대하게 만드는 대신, 에픽의 가능성을 극도로 줄여버린다. 「울티마 온라인」에서 감각하는 서사는 본질적이기 보다는 구성적이다. 따라서 체감적인 서사성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조지프 캠벨의 의미에서) ‘신화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마찰하며 만들 수 있는 서사에는 역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여전히 서사의 중심을 게임 시스템이 귀속시키려는 「발더스 게이트」는 더 전통적인 측에 속한다. 캠벨의 주장에 따라 신화적 서사가 ‘신의 세계’에 다녀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신 또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서의 서사를 인가하는 자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발더스 게이트」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게임 마스터라는 역할이며, 그것을 ‘기계 장치의 신’에 맡겨둠으로서 거대 서사라는 컨셉을 기능시킨다. 1990년대의 유산과 21세기 초의 RPG들 앞서 설명한 분화들의 결과는 21세기 초입의 가장 중요한 RPG로 그 효과를 연장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발더스 게이트」는 「토먼트」로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유산으로 남긴다. 이때 「토먼트」는 「발더스 게이트」가 가진 하이 판타지적 컨셉들로부터 이탈해 전투와 그에 준하는 세팅보다는 주인공 캐릭터인 ‘이름없는 자’가 어떻게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지에 더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게임 진행의 형식이 되어주는 것을 넘어, 「토먼트」가 궁극적으로 그리는 에픽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준다. 이렇게 「발더스 게이트」로부터 「토먼트」로 이어지는, 거대 세계의 컨셉을 통해 에픽의 서사를 달성한다는 개념은 21세기의 WRPG가 반복해서 품는 모델이 된다. 그 경향의 연장에는 바이오웨어의 「스타워즈 : 구 공화국의 기사단」 시리즈와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시리즈, 「폴아웃」 시리즈, 라이온헤드 스튜디오의 「페이블」 등으로 연장된다. 또 한편 「파이널 판타지 VII」에서부터 발흥한 JRPG의 태도는 동 시리즈의 신작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X」로 연장된다. 「파이널 판타지 X」는 이전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세계의 직관적 체험’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말미에 하늘을 나는 ‘비공정’을 획득해 세계의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었던 이 시리즈에서 ‘월드 맵’이라는 개념을 포기한 최초의 게임이다. 「파이널 판타지 X」의 세계는 길게 이어진 길쭉한 홈통이 몇개씩 연속으로 연결된 형태이며, 그 홈통들 사이사이를 연결하기 위한 넓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비공정에 탑승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그 행선지를 여러개의 선택지 중 하나로 선택하도록 요구받는다. 시각적으로는 세계의 가상 모델을 드러내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임의로 세계를 날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파이널 판타지 X」는 거대 세계라는 컨셉을 최소한도의 크기로 납작하게 만든 뒤, 에픽의 서사라는 컨셉만을 비대하게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면에서 21세기 JRPG를 규정하는 전제가 되어준다. 이를테면 21세기 초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아틀러스의 「페르소나」 시리즈 역시 그렇다. 본디 「진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외전임을 증명하는 ‘여신이문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제거한) 3편부터 그 게임 플레이가 크게 변화한다. 여기서부터 이 시리즈는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부감적 시선을 제거해버린다. 그리고 공간이 아닌 시간을 통해 길쭉한 홈통을 만들고 플레이어를 통과시킨다. 하루하루의 행동을 통해 앞으로 진행하도록 요구하는 게임의 구성은 거대 세계에 응하는 체험이라는 감각을 끊어버리고, 불가역적인 시간의 컨셉 안에 플레이어를 가둬버린다. 「페르소나」는 일정 시기마다 벌어지는 대형 이벤트와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간적 드라마를 공간의 개념보다 더 강조한다. 「페르소나」 역시 에픽의 서사 앞에서 세계의 규모를 납작하게 누르는 시리즈라 할 수 있다. 90년대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는 또 다른 인기 JRPG 시리즈인 「포켓몬스터」 시리즈 역시, 몇 개의 구역이 홈통이 되어 서사의 핵심 축인 ‘마을’의 연결고리로 작동한다. 물론 이후의 모든 JRPG가 이런 ‘연속된 홈통의 구조’를 가지지는 않겠지만, 이후 JRPG에선 서사의 컨셉이 세계의 컨셉보다 우위라는 것, 서사가 세계를 짓누르는 구성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파이널 판타지 III」와 「파이널 판타지 X」의 비공정 화면의 비교 한편 21세기의 초입에 등장한 또다른 서양의Western RPG인 「디아블로 2」는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전작인 「디아블로」로부터 이어진 던전 크롤링 중심의 이 게임은 「로그」로부터 빌려온 무작위 생성의 던전을 그 세계의 핵심 축으로 가진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세계의 반응을 기대하기 보다는 세계에 ‘반응하며’ 탐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구성은 어떤 면에서는 세계만을 비대하게 키워낸 MMORPG에 대응하며 존재하는 것 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반응성이 극히 적은 게임의 플레이는 웨스트우드의 「녹스」, 가스 파워드 게임의 「던전 시즈」 시리즈, 레이븐 소프트웨어의 「마블 얼티밋 얼라이언스」 등으로 이어지며 WRPG의 한 축을 이룬다. 단 이들은 첫번째 「디아블로」보다는 더 디테일한 서사를 중시하는 면이 있으나, WRPG와 유사한 정도의 반응적 세계를 구축하진 않는다는 면에서 다른 경향을 지닌다. 한편 MMORPG는 계속된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 플레이어를 구성물로서 세계를 구성하려는 욕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매달리는 측면이 있었다. 요컨 NPC에 의한 상행위를 완전히 지우고 플레이어들만으로 경제를 지탱하려 했었던 「애쉬론즈콜 2」나 플레이어를 세력에 귀속시키고 소통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플레이어들간의 군집적 결속을 유도하려 했던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특히 1999년 발매된 SOE의 「에버 퀘스트」는 이러한 시스템의 ‘특화된 지점’의 인적 네트워크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 세계의 구성에 있어 협력의 ‘필요성’을 통해 커뮤니티를 작동시키는 독특한 게임이었다. 「에버 퀘스트」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의 규모, 문제, 해결의 양상에서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어떤 면에서는 고전적 형태의 레벨 디자인의 변용을 통해) 방법론의 측면을 강화한다. 그 결과 플레이어들은 자의적으로 세계를 생동시켰으며, 「울티마 온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거대 세계’를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21세기의 MMORPG를 확고히 규정한 게임은 블리저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일 것이다. 「WoW」는 그 구성에 있어 이전의 MMORPG들이 거쳐온 다양한 개념들을 규합하고 있긴 하지만, 오히려 「울티마 온라인」의 논제인 ‘플레이어를 구성물로 세계를 구동’하려는 욕망으로부터는 꽤나 이탈해있다. 물론 팩션을 통한 응집이나, 인스턴스 던전과 레이드 등을 통해 발현되는 「에버 퀘스트」적인 커뮤니티 구성은 충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WoW」를 더 특별하게 만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싱글 플레이 RPG로부터 그 방법을 빌려온 ‘세계를 추동하는 거대한 서사’의 컨셉이기도 했다. ‘퀘스트 텍스트가 단순한 플레이버 텍스트가 아닌’ MMORPG로서 「WoW」는 독특한 지점에 있는 게임이다. 말하자면 「WoW」는 MMORPG가 끌고 나간 ‘거대 세계’의 컨셉을 이어받아 플레이어들을 구성물로 삼는 세계를 구축하는 한 편, 플레이어 캐릭터로 하여금 고전적인 RPG의 에픽 서사의 컨셉, 즉 ‘위대해지기’를 체감시키는 텍스트적 힘을 발휘하는 게임이다. 따라서 「WoW」의 강점은 적절한 정도의 수동성이다. 특히 2010년 벌어진 거대 이벤트 ‘대격변’은 그 수동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세계의 형태, 구조를 뒤바꾼 이 충격적인 이벤트는 플레이어들의 참여적 성질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엔 오직 부여된 서사만이 존재한다. 어떤 면에서 「WoW」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거대 서사’의 컨셉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이 수동적 변화를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 레벨링 시스템의 보편화와 장르 재정립의 시대 그러는 한편, 비디오 게임의 주 무대가 완전히 가정으로 바뀌어버린 21세기는 고전적인 RPG의 양식적 모델이 가진 독립성이 붕괴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21세기는 비디오 게임의 플레이 형식을 맥락적 다회성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기술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장르에서도 ‘위대해지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캡콤의 「귀무자」 시리즈나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의 「갓 오브 워」 시리즈, 세가의 「용과 같이」 초창기 시리즈는 모두 ‘액션 어드벤처’라는 장르의 형태에 귀속되어 있는 시리즈이다. 하지만 이들은 플레이어 캐릭터가 강화되는 일종의 성장 테이블을 지녀 장기간 세션의 반복을 통해 점차 에픽의 위대함에 가까워진다. 물론 예시로 든 게임들은 21세기 초에 등장해 그 초석을 마련한 게임들일 뿐이다. 21세기의 ‘커다란’ 게임들이란 대체로 수집, 구매, 강화, 스킬 트리 등의 성장 체계를 기본적인 언어로 삼는다. 따라서 이 약 20년의 시기는 1990년에 세워두었던 RPG의 양식적 모델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더 이상 RPG는 수치화된 캐릭터 구성과 레벨식 성장이라는 것으로 장르 모델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정처없는 서성거림’이라는 모델 역시 그 존속에 불투명함이 발생한다. 「GTA 3」부터 가속화된 ‘오픈월드’라는 형식의 확산은, RPG라는 규정의 여부와 무관하게 플레이어 캐릭터를 펼쳐진 세계에서 이리저리 떠돌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세계를 향해 어떠한 행동을 취하고 그 반응을 기대한다. 게임 세계의 규모를, 용량이 닿는 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작금의 게임 세계에서 ‘정처없는 서성거림’을 장르 특유의 체감적 모델로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는 셈이다. * 아케이드형 벨트 스크롤 액션 게임에 가까운「캐슬 크래셔즈」역시 정처 없이 떠돌거나(좌), 캐릭터를 성장(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를테면 소니의 「마블스 스파이더맨」은 RPG인가? 이 게임에는 명백한 형태의 성장 체계(RPG의 양식적 모델)가 존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이미 얼마든지 떠돌 수 있는 맨해튼의 지도(RPG의 체감적 모델)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게임을 ARPG로 부르지 않는다. 이런 구성은 락스테디의 「배트맨 : 아캄 수용소」를 위시한 아캄 시리즈나 레메디 엔터테인먼트의 「컨트롤」, 심지어는 베히모스의 「캐슬 크래셔즈」같은 아케이드 테이스트가 짙은 빗뎀업 게임까지 수도없이 찾아낼 수 있다. 물론 이 게임들에게서는 ‘세계의 디테일한 반응’이나, ‘고전적 성장 시스템’ 등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소소한 어긋남은 RPG라는 장르의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해왔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게임을 ‘RPG’라고 부르는 것을 저지하는 것일까? 오히려 이러한 물음이, 사반세기가 지난 바로 지금에 와서 RPG라고 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맞닿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21세기 RPG의 사반세기 : 지금 우리는 무엇을 ‘롤플레이’하는가. 2018년 Routledge로부터 발매된 《롤플레잉 게임 스터디즈》에서는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한 명의 플레이어가 컴퓨터 장치로 플레이한다. ● 플레이어는 가상의 게임 세계에서 하나 이상의 캐릭터의 행동을 생성하고 관리한다. ● 컴퓨터는 모든 비플레이어 캐릭터를 포함한 게임 규칙과 게임 세계의 내부 모델을 실행하고, 인터페이스를 통해 표현을 렌더링하며 플레이어의 입력에 따라 모델과 표현을 업데이트한다. ●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시청각적 표현을 생성하는 계산 모델에 의해 구성된다. ● 게임 세계는 일반적으로 판타지, SF, 호러 또는 이들의 혼합물인 일종의 장르 픽션의 것을 따른다. ● 시도할 수 있는 캐릭터의 행동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통해 제공되는 옵션으로 제한된다. ● 캐릭터의 능력과 행동의 결과는 일반적으로 정량적 확률 규칙 시스템 또는 플레이어의 반사 신경과 명령 입력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 게임은 보통 여러 세션에 걸쳐 진행된다. ● 게임 내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게임 세계의 광범위한 스크립트(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 행동 포함)를 통해 사전 계획된 플롯을 따라 명확한 종료 지점을 향해 안내되지만, 플레이어는 이러한 플롯이 끝나기 전/도중/후 언제든지 개방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 전투 처리를 위한 광범위한 규칙이 있다. ● 플레이어 캐릭터는 성장 시스템을 통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향상된다. [18] 비교적 최근에 정리된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규정이 앞서 제기한 RPG라는 장르 특성의 광범위화에 따른 해체 가능성을 돌파하도록 돕진 못한다. 요컨 상기의 모든 요건은 앞서 말했던 「마블스 스파이더맨」이나 그와 유사한 액션 어드벤처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RPG라는 장르의 개념적 소멸을 앞두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제와서 ‘21세기에는 모든 게임이 RPG다.’라는 성긴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해체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가 ‘RPG’라고 하는 것을 어떠한 감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캐릭터를 강화하고, 적과 조우해 전투하는 일을 겪는다고 해도 「데드 스페이스」는 명백히 RPG가 아니지만 「세계수의 미궁」은 명백히 RPG로 인식된다. 단순히 턴 베이스의 전투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감각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위쳐」나 「다크 소울」을 RPG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접근해보자. 지금의 RPG가 무엇인가를 규정 또는 재규정하려는 태도로부터 잠시 이탈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21세기의 RPG는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극도로 분화되거나 통합되어버린 세계를 향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은 구분짓기categorizing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는 게임들은 액션 어드벤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태도로의 ‘액션 RPG’ 군집이다. 특히 근래에 도드라지는 것은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을 위시한 일련의 느슨한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세계에 대한 극도로 희소한 규정이다. 요컨 소울 시리즈에서 플레이어에 대한 세계의 반응성이란 극도로 폭력적인 방향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어쩐지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 ‘세계’ 자체가 그러한 반응만을 가지는 곳이라고 규정하려는 뉘앙스가 있다. 쉽게 말해서 이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설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이 세계를 규정하는 특징이 그렇다. 오직 이 세계의 언어란 간접화법의 언어, 쉽게 말해 ‘플레이버 텍스트’를 통해 우회하는 언어로서 세계의 규정을 전달한다. 이 세계에 「발더스 게이트」의 논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이 게임이 ARPG이기 때문 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좀처럼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소울 시리즈는 초기 CRPG의 순수함을 유지하려 한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반응을 오직 ‘읽어야만’ 하는 세계. 읽는 시간 이외에는 세계가 가져다주는 극도의 폭력에 대항하며, 서성일 수 있는 품을 넓혀야 하는 그런 곳 말이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프로듀서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이런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감히 말하자면 「데몬즈 소울」에서는 소위 ‘게임 애호가’의 공통된 가치관,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는 ‘게임스러움’ 또는 ‘흥미로운 부분’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저드리」와 같은 많은 고전 게임이 가지고있는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게임의 속성 말입니다." [19] 즉 이 군집은 어떤 면에선 ‘행동의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던’ 시대의, 디지털 게임의 원시적인 개념들만으로 D&D의 형태를 재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기를 RPG라고 규정한다. 요컨 이것은 뒤틀린 형태의 에뮬레이션이다. 시대의 기술적 한계를 의도된 불편함과 폭력으로 규정하고는 그것을 최신의 기술로 되짚어 구현하려는 기이한 욕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군집에는 RPG라는 개념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존재한다. 이들은 RPG란 언어의 컨셉에 그 핵심이 있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다크 소울」과 그에 연계된 게임들에 있어 에픽을 창조하는 것은 ‘말’이 아닌 ‘글’이다. 또 다른 먼 군집은 대한민국에서 ‘수집형 RPG’라고 불리우는 군집이다. 이들은 (약간은 강경한 태도를 가지자면) RPG라는 그 어떠한 기반도 가지지 못한 기이한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이들은 스퀘어 에닉스의 「확산성 밀리언 아서」로부터 비롯된 CCG(Collective Card Game)의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수집의 대상이 ‘카드’가 아니라 수치화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RPG라는 위치를 점한다. 조은하는 이러한 한국형 수집 RPG의 시초적 게임으로 핀콘의 「헬로 히어로」를 들며, 이 장르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국내 개발사들은 일본 CCG가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을 일부 수용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일본 CCG의 일러스트 카드를 움직이는 2D, 3D 캐릭터로 바꾸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형식적인 전투 시스템을 화려한 스킬과 시네마틱 연출을 통해 볼거리를 만드는 작업들을 시도했다.’ [20] 여기서의 핵심 문구은 아마도 ‘스마트폰 환경 하에 효율적으로 재구성한 RPG 시스템’ 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발안하는 ‘RPG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990년대에 형성된, 양식 조건으로서의 RPG 구성요소, 즉 ‘수치화된 캐릭터와 그에 대한 성장 시스템’일 것이다. 요컨 모바일 중심의 이 ‘수집형 RPG’는 그러한 양식 조건이 바로 RPG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일군이다. 여기에는 세계에 대한 반응 추구, 생동성, 체감적인 ‘위대해지기’의 요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거대함의 두 컨셉(세계, 서사)이 모두 약화되어 작동하는 셈이다. 물론 수집형 RPG에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세계과의 면밀한 접촉과 극단적으로 유리된, 텍스트 어드벤처의 그것과 동등한 위상으로 작동한다. 쉽게 말해 수집형 RPG에서 ‘거대 세계의 컨셉’은 실종되어 있고, ‘거대 서사의 컨셉’은 장르 밖에서 작동한다. 오직 RPG라는 형태는 양식으로서 기능하는데 그친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ARPG적 변용들, 「원신」이나 「젠레스 존 제로」등은 세계와의 생동을 그려내며 조금은 더 원형적인 RPG의 형태로 나아가는 면이 있다. 한편 MMORPG의 군집은 조금 복잡한 양태를 가진다. 라이브 서비스라는 명목 하에, MMORPG는 그 플레이어 요구의 개념이 크게 변화한다. 한 축은 MMORPG의 본질적인 욕망인 ‘게임 세계’의 소유로 뻗어나가는 군집이다. 21세기 초에 서비스를 시작해 여전히 유지되는 「EVE 온라인」을 필두로 경제 체계나 생활 콘텐츠를 채워나가는 경향의 게임들 (「아키에이지」, 「알비온 온라인」, 「검은 사막」, 「코난 엑자일」 등)이 한 축을 이루는 반면, 게임 세계와의 반응보다는 특정한 챕터 등의 절기를 중심으로 서사를 지속적으로 지원받는 서사 중심의 MMORPG(「파이널 판타지 14」, 「스타 워즈 : 구 공화국」, 「엘더스크롤 온라인」,「로스트 아크」 등)가 한 축을 이룬다. 하지만 초기 MMORPG가 추구했던 ‘세계 그 자체의 거대한 운용’을 극히 시도하는 경향은 줄어들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게임이 다루는 세계가 ‘게임 세계’라는 범주를 추월하려는 경향을 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쉽게 알 수 있듯 「EVE 온라인」 등이 장기간 발전시켜온 이 가상의 세계는 결코 친절한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MMORPG는 이러한 비대해진 게임 세계가 곧 완전한 가상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한계 지점에 대한 토로와도 같다. MMO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가 TRPG가 다루는 게임 세계, ‘합의와 관리의 세계’를 추월해버렸을 때, 그 벽의 너머에서 접촉하는 것은 실제 세계의 영향력일 수 밖에 없다. MMORPG는 이미 C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순수한 게임 세계라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튀어나온 작은 혹, 현실세계의 영향이 장단기 반영되는 거울과도 같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오히려 여러면에서, 서사의 컨셉을 다시 끌고온 MMORPG들이 다시금 ‘ 체험 가능한 게임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결국 MMORPG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계라는 컨셉을 중심에 두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RPG’라는 장르의 논리만으로는 수집할 수 없는 더 거대하고 독립적인 장르가 되어버렸으며, 더욱이 그렇게 나아가게 될 것만 같다. 또 다른 군집은 JRPG의 순수성을 추종하는 군집이다. JRPG의 테이스트가 일종의 보편 가능성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0년에 《JRPG가 고쳐야 할 10가지 방식》 [21] 이라는 굴욕적인 칼럼이 게재되기도 했다. 불과 15년전까지만 해도 JRPG는 고전적 RPG의 순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온, 어떠한 변용된 돌연변이와도 같았다. 물론 해당 칼럼이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읽혔던 것은 아니나, 이러한 칼럼이 쓰여지고 유통된 배경에는 분명 서양 게이머 군집의 JRPG에 대한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제는 철저히 로컬리티의 결과물이다. 즉 ‘JRPG’라는 단어로부터 전달되는 지정학적 문제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칼럼이 정말로 JRPG가 ‘비교적 질이 낮은’ 장르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기까지 RPG란 정말로 동-서라는 세계로 그 형태가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5년 정도가 지난 지금, JRPG는 하나의 코드로서 지정학적 한계를 넘어선다. 흥미롭게도 근 10년 사이에 나온 JRPG의 코드를 가진 게임들에는 일본 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크로스 코드」(독일), 「코스믹 스타 히로인」(미국), 「피어 & 헝거」(핀란드), 「겟 인 더 카, 루저!」(캐나다), 「인디비지블」(미국), 「잭 무브」(대만), 「씨 오브 스타즈」(캐나다), 「클레르 옵스퀴르 : 33 원정대」(프랑스) 등등. 이는 게임 제작자의 세대 분리를 드러내는 통계적 결과일 수도 있다. 요컨대 JRPG를 서구세계에 알린 「파이널 판타지 VII」가 등장한지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코드를 자기 내부의 문화적 양식으로 인지하는 서구의 게임 제작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세대론보다 중요한 건 아마도 ‘세계’의 컨셉을 줄이고 ‘서사’의 컨셉을 증가시키는 밸런스의 RPG가 하나의 보편 가능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군집은 그러한 좁게 뻗은 길을 따르는 ‘위대해지기’ 역시 RPG라는 장르의 코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제 JRPG는 초기 CRPG의 간단한 번안물 이상이다. JRPG 역시 고전적 RPG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명백한 영역을 지닌 하위 장르로 영속할 것이다. *「씨 오브 스타즈」(2023)는 전적으로 90년대 JRPG의 감각을 되살린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는 「크로노 트리거」나 「슈퍼마리오 RPG」 등의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해야 하는 군집은, 그 무엇보다 본래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지닌 군집이다. 이 군집에는 다음과 같은 게임들을 넣을 수 있다. 뮤네이처의 「인격해체」, 안샤르 스튜디오의 「게임 덱」, 점프 오버 디 에이지의 「시티즌 슬리퍼」 그리고 ZA/UM의 「디스코 엘리시움」. 이러한 게임들은 전적으로 TRPG의 핵심인 ‘언어’를 믿는다.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언어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은 세계의 구조로 틈입해 세계의 반응을 이끈다. 그 사이에 플레이어가 구체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규정된 난수의 규칙rule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그리고 게임은 전적으로 언어에 귀속되어야 하므로, 규칙의 사용까지도 플레이어에게 ‘언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다. 이 군집은 RPG라는 장르가 탄생하던 시기에 목적하던 것을 다시금 획득하려 든다. 바로 TRPG를 순수한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추종한다. 이들의 목적은 ‘TRPG적인’ 플레이를 비디오 게임의 과정으로 번역해 이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군집의 게임이 갑자기 근 몇년 사이에 도드라진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아울캣 게임즈의 「패스파인더」 시리즈나 라리안 스튜디오의 「디비니티」 시리즈가 바이오웨어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과 (그리고 최근에 발매된 「발더스 게이트 3」와) 현재의 군집이 다른 것은,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적 어머니로서 D&D를 유일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게임 덱」, 「시티즌 슬리퍼」,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정확한 의미에서의 ‘전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캐릭터를 구성하는 수치적 체계가 시각적으로 보이는 ‘물리 세계’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서사의 중심 체계로서의 ‘언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22] 그런 면에서 이 구성의 배경에는 초기 게임 베이스의 TRPG가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 확산된 스토리 중심story-driven의 TRPG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들은 TRPG라는 테이블 게임계의 움직임과 조응하는 방식으로서의 비디오 게임을 지향하는 감각을 준다. 그리고 이 마지막 군집의 등장이 비교적 최근이라는 사실은, RPG라는 장르의 충분 조건이 보편화를 통해 해체되어가는 시대라는 사실과 충돌한다. 즉 모든 비디오 게임이 (비디오 게임 장르로서의) RPG가 되어가는 이 시대에, 이 게임들은 비디오 게임 바깥의 이상을 다시금 불러들여 RPG를 재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로베르트 쿠르비츠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롤플레잉 게임을 완전히 혁신하고 싶습니다. 그 혁명을 실현할 때까지 게임을 미세조정 했습니다. 스토리, 선택, 결과의 활용을 혁신하는 것이죠. 스킬의 용례. “스킬"이라는 의미. 저는 실제 삶, 인간의 상상력, 슬픔, 암시의 힘, 춤 등 테이블탑 RPG와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진정한 경험을 실제로 표현하는 평화로운 스킬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23]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달성은 섬세한 그래픽이나 구체적인 컷씬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것이 명백하다. 해결 가능성은 오직 언어, 언어 그리고 언어이다. 오직 언어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이 게임의 제작자들은 긴 시간을 우회해, 그리고 필요한 바로 이 때에 RPG라는 장르의 핵심으로 다시금 언어를 소환한다. 이때 이 언어의 필요성은 시대의 기술과 미묘한 접합점을 만든다. 이 시점에서 「언커버 더 스모킹건」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상향이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과 접촉하며 끝없이 앞질러 나갈 것인가? 글쎄, 그러한 예측까지는 아직 미진한 일인 것 같다. *「시티즌 슬리퍼」(2022)는 매일의 주사위를 굴리고 해당 주사위를 어떠한 업무에 쓰느냐로 하루의 진행이 결정된다. 하지만 결국 그런 행위의 중심에는 최종적으로 출력될 텍스트의 변형이라는 기대가 있다. 결국 RPG의, 약 반세기에 걸친 장르의 역사를 돌자 장르의 가장 순수한 조건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RPG는 언어라는 이상점으로 끝없이 향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금은 부정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언어라는 이상향이 RPG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21세기의 사반세기를 돌아 마주한 것은 언어의 순수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아니다. 70년대에 탄생하고, 90년대에 완숙하여, 2000년대에 끝없이 분화한 이 장르를 태초의 조건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RPG’라고 부르던 조건은 이제, 수많은 가능성들에 의해 취사적으로 선택되고 조립되고 분화되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 비디오 게임의 세계에 순수한 RPG라는 것은 규정 불가능하다.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가능성, 타 장르와의 융합, 혁신은 다 각기 다른 분류로서의 RPG로 기능할 것이다. 필요에 따라 몇 가지 군집들을 들긴 했지만, 이 내부에서 전부 다루지 못한 다른 가능성들(요컨 로그라이크 군집, 레벨링을 동원하는 메트로바니아 군집 등)도 존재한다. 어쩌면 이제 RPG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유가 전부 통괄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장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오는 RPG에 대한 가장 유효한 문장을 동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이 지난한 글을 호세 P. 제이갈과 세바스티안 디터딩이 《롤플레잉 게임의 규정》의 전반부를 열기 위해 사용한 문장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사실 롤플레잉 게임(RPG)은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게임 현상, 즉 예외, 특이점, 게임 같지 않은 게임일지도 모릅니다.” [24] [25] [1] RPG는 한국에서는 보통 비디오 게임의 장르로 일컬어지지만, 그 발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먼저 등장한 테이블탑 또는 라이브 액션 게임을 부르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특정한 수식없이 RPG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본 글은 비디오 게임의 장르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RPG라는 단어는 비디오 게임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맥락에 따라 CRPG라는 단어를 병용한다. 테이블탑 게임은 TRPG로 구분하여 표기한다. [2] Programmed Logic for Automatic Teaching Operations의 약자. 1960년대 초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의 도널드 비처가 중심이 되어 개발한 시스템으로 PLATO IV라는 독립적인 단말을 통해 구동되었다. [3] “So, most CRPGs spread a thin veneer of story and world-building atop game engines that were really all about combat and logistics; they became “roll-playing” rather than “role-playing” games.” (The CRPG Renaissance Part 1. https://www.filfre.net/2025/01/the-crpg-renaissance-part-1-fallout/ ) [4] 이를테면 캡콤의 플랫포밍 액션 게임인 「마계촌」에서 주인공 아서는 최종적으로 마왕 아스타로스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아서의 변화는 게임 플레이 와중 획득한 아이템에 기반한 것들이며, 이 가역적 변화는 언제든지 아서를 최초의 모습으로 되돌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RPG에서의 성장은 이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불가역성을 전제한 것이다. [5] 여기서 사용하는 에픽을 ‘서사시’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시’라는 형식보다 그것이 담지하는 서사적 특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 《장르의 해부Anatomy of Genre》에서 존 트루비John Truby는 에픽을 ‘한 인간 또는 집단에 의해 국가 또는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이야기’로 규정한다. [6] 그들이 원본으로 삼는 D&D 역시 이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D&D는 캐릭터의 진행에 따라 Basic, Expert, Companion, Master, Immortal라는 각기 다른 책을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최종적으로 위대해진 캐릭터는 Immortal 단계에 이르러 불멸자의 시험을 통과해 필멸자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 [7] 호리이 유지는 본래 만화의 스토리 작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원래 저는 코이케 카즈오 극화 서당에 다니다가 만화가 지망생을 거쳐 라이터가 된 케이스다 보니 극화 원작을 하자는 마음도 있었고요.” (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8] ‘The 1990s is generally viewed by academics and fans as a golden age for CRPGs due to the explosion of games that were developed and the quality of games released’(《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9] 《현질의 탄생》, 이경혁, 2022, 이상북스 [10] “だんだん強くなる、というのが面白いなと思ったんですよ。AVGって謎に詰まるとやることがなくなっちゃうけど、RPGならとりあえずレベルさえ上げれば楽しめるので、謎解きつつレベル上げつつでずっとやっていけば、いっぱい遊べるし、。”(PLANETS Vol. 7, 「호리이 유지 인터뷰 : 일본 게임의 진화가 향하는 곳」, 2010) [11] 루이스 자네티는 영화 장르의 변화 사이클을 초창기, 고전기, 수정기, 패러디기로 나눈다.자네티의 장르 사이클은 기본적으로 영화 장르의 이론에 적용하는 개념이지만, 시장을 형성하는 매체 전반의 장르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충분히 도움이 되기에 여기에 적용한다. [12] 《영화의 이해》, 루이스 자네티, 2017, K-Books [13] 이 시리즈의 3편은 국내에 동서게임채널을 통해 「영웅의 길 3」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4] ‘Like the other Quest for Glory games, QG3 is a hybrid of Computer Role-Playing Game (CRPG) and graphic adventure. Your character's attributes and abilities are defeined by a list of statistics. SUccess in a task depends on skill levels, and practive improves those skill.’ (《PC Mag》 Jan. 1993) [15] ‘These games rely on quantitative representations of the character, with character development following the quantitative improvement in skills and abilities typical of pen-and-paper games.’ (《Many Faces of Role-Playing Game》, 2008, International Journal of Role-playing Games - Issue 1, Michael Hitchens and Anders Drachen) [16] ‘one feature that is commonly considered a defining one is that all RPGs have playercharacters with quantifiable features (digital equivalents of the character sheets used in tabletop style RPGs), and character progression is used as a central measurement of success. Traditional RPG rule systems often include “experience levels,” meaning that successful advancement in games translates into “experience points” through which a PC can “level up” to new powers and skills.’ (《Encyclopedia of Video-Game》, 2012, Greenwood, Edited by Mark J. P. Wolf) [17] 구글 그룹에서 다음과 같은 유즈넷 대화를 찾을 수 있다. 해당 대화는 1997년 2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Diablo : an CRPG, what a joke!」 ( https://groups.google.com/g/comp.sys.ibm.pc.games.rpg/c/7wJEyHTsdkE/m/EnpYnKMTBnUJ?utm_source=chatgpt.com&pli=1 ) [18]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19] ‘If you dare to say, in "demon’s soul", I think that there is something that constructs game-like or interesting parts before the east-west of Ocean, with the common values of so-called "game lovers" . "Wizardry" It is a very simple and primitive game property that many of the classic games such as had.’ (「Interview with Mr. Hidetaka Miyazaki who gave birth to a world-class hit "Dark Soul" from inexperienced game production」, Gigazine, 2012) [20] 《한국형 수집 RPG 장르 형성 연구》, 조은하, 2018 [21] 《Top 10 Ways to Fix JRPGs》 ( https://www.ign.com/articles/2010/01/12/top-10-ways-to-fix-jrpgs ) [22] 「인격해체」만은 예외적으로 전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게임이 자신의 부모로 삼고 있는 것은 명백히 카오지움의 《크툴루의 부름》이다. [23] ‘I want to completely revolutionise role-playing games. We need to fine-tune our game until we make that revolution possible. To revolutionise the use of stories, choices, and consequences. The use of skills. What “skill” means. I want there to be peaceful skills that actually represent real life, human imagination, sadness, the power of suggestion, dance... you know, that whole range of authentic experiences you get from tabletop RPGs and from reality.’ (《Choose your own misadventure Part 2》, https://steamcommunity.com/games/632470/announcements/detail/1615021499154801682 ) [24] ‘In fact, role-playing games (RPGs) are maybe the most contentious game phenomenon: the exception, the outlier, the not-quite-a-game game.’ (《Role-Playing Game Studies》, 2018, Routedge, Edited by Sebastian Deterding and José Zagal) [25] 물론 해당 문장은 본문에서 테이블탑 RPG, 라이브 액션 RPG를 통괄하는 RPG라는 범주 전체를 포괄하는 문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분화해버린 비디오 게임 RPG에게도 충분히 통용되는 의미이리라. Tags: 롤플레잉, 장르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협업, 경쟁, 방송: MMO로부터 라이브 스트리밍과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21세기 북미 게임씬

    만약 당신이 2000년 이후에 태어난 게임팬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게임 매체를 비교적 쉽게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문화적(countercultural)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게임은 주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플레이어들이 직접 제작한 게임 관련 콘텐츠의 양도 엄청나게 방대해져서 게임을 종료한 뒤에도 좋아하는 게임들을 눈과 귀로 계속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 아무리 마이너한 게임일지라도 직접 플레이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거의 무한히 느껴질 지경이다. < Back 협업, 경쟁, 방송: MMO로부터 라이브 스트리밍과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21세기 북미 게임씬 GG Vol. 25. 4. 10. You can 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at: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c4322a54-d363-4b02-bd95-cca5eefb6413 익숙한 듯한 새로움 만약 당신이 2000년 이후에 태어난 게임팬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게임 매체를 비교적 쉽게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문화적(countercultural)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게임은 주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플레이어들이 직접 제작한 게임 관련 콘텐츠의 양도 엄청나게 방대해져서 게임을 종료한 뒤에도 좋아하는 게임들을 눈과 귀로 계속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 아무리 마이너한 게임일지라도 직접 플레이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거의 무한히 느껴질 지경이다. 이처럼 오늘날 게임을 둘러싼 문화적 공간은 게임 자체뿐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나 스팀, 디스코드 같은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넘나들며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새천년(2000년) 전후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1999년 캐나다에 사는 어린 게이머였던 나는 주1회 방영되던 30분짜리 TV프로그램 과 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내가 살던 지역에서 볼 수 있던 게임 관련 TV프로그램은 이 두 편이 전부였다. * 캐나다의 게임 TV프로그램 출처: Videoandarcade YouTube channel. [1] 이 두 프로그램 외에 게임 관련 콘텐츠를 접할 수 있던 채널은 주로 월간 게임 잡지였다. 당시 게임 잡지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었다. 우선 <닌텐도 파워(Nintendo Power)>처럼 자사의 최신 출시작 또는 출시 예정작을 홍보하는 장문의 광고 형식의 공식 잡지가 있었고, 다음으로는 <게임프로(GamePro)> 같은 게임비평지 계열, 마지막으로는 <넥스트 제너레이션(Next Generation)>처럼 최신 하드웨어나 업계 소식을 찾는 취미가들을 겨냥한 잡지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게임 관련 미디어라고는 최신 게임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하는 소수의 출판물과 눈 깜빡할 사이에 장면이 지나가버리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두 편 정도에 불과하던 시대로부터, 오늘날처럼 게임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이슈와 수많은 논쟁이 넘쳐나는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게임 미디어가 방대한 규모로 진화하게 된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을까? 우선 게임의 소비 환경과 그 문화적 공간은 단독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게임은 연구자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가 “컨버전스 문화(Convergence Culture)”라 명명한 현상의 한 단면인데, 여기서 컨버전스(융합)란 미디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결합되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2] . 게임은 영화, TV, 잡지뿐 아니라, 인터넷이 가능케 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콘텐츠들과 게임 디자인적 특징들까지 포함하는 복잡다단한 미디어 환경의 일부다. 21세기의 첫 25년간 우리가 함께 게임을 경험한 방식은 엄청나게 변화하였으며, 게임 문화의 발전은 ‘웹2.0’ 및 인터넷의 대중화에 의해 가능해진 컨버전스 시대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문화 생산자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게임 안팎으로 증대된 연결성을 바탕으로 공공 영역에서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게임 미디어 소비 시장에 있어 선두주자인 트위치나 유튜브가 2006년이 되어서야 등장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 시기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가 출시되면서 이미 어느 정도 번성하고 있던 온라인 게임 하위문화를 전지구적으로 대중화시킨지 2년 뒤의 시점이었다. 오늘날에는 신규 출시된 클래스나 메타게임적 고려사항들, 보스 공략 등을 설명해주는 수많은 영상들 없이 수백만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모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플레이어들은 온라인 상에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들을 실험하면서, 도전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복잡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들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동료 플레이어들과의 소통 방식을 학습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은 플레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엮어주는 새로운 온라인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했다. 한편 e스포츠는 아직 새로운 영역이었는데, 서구의 일부 열정적인 게이머와 주최자들은 한국의 인상적인 스타크래프트(StarCraft) e스포츠씬 [3] 에서 영감을 얻어 언젠가는 (게임)플레이가 게임이 단순한 취미나 열정 프로젝트를 넘어 게임 개발이 아닌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태웠다. 이러한 움직임이 전통 미디어 및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 기반의 미디어 제작 방식과 맞물리고, 1990년대 후반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갈수록 더 많은 일반인들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셀럽으로 간주되어가던 트렌드와 엮여 우리를 새로운 게임 문화적 풍경으로 이끌었다. MMO게임과 연결성과 사회성의 새로운 규범 멀티플레이 게임 자체가 새천년 전환기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의 MMO게임붐은 플레이어들을 한데 모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 1980년대 초반까지는 게임 아케이드(오락실)가 게임하는 주요 공간이었으며 [4] , 1990년대에는 가정용 콘솔과 주요 브랜드간 각축전이 주목을 받았다면, 2000년대는 단연 MMO게임의 시대였다. 머드(MUDs, Multi-user Dungeons) 같은 초기의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은 대개 텍스트 기반의 RPG 시스템을 통해 플레이어들을 연결시켰다. 이와 같은 원형적 형태의 MMO게임은 수백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을 연결시켰음에도 여전히 마이너한 게임 하위문화로 남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에버퀘스트(EverQuest)> [5] 와 <울티마 온라인(Ultima Online)> [6] 같은 게임들이 어느 정도 인기를 끌긴 했지만, <월드오브워크래프트 [7] 가 독특한 그래픽 스타일과 접근성 좋은 게임플레이를 통해 이끌어낸 대중적인 인기는 다른 차원의 수준이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그 자체로도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이전까지 틈새 장르로 머물러있던 MMO게임을 전례없는 방식으로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낸 것은 2006년 방영된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South Park)>의 “Make Love Not Warcraft” 에피소드였다. 이는 단순히 게임을 홍보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MMO 장르가 새로운 문화적 존재감을 획득했다는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게임사들로 하여금 자사의 MMO 게임들이 그와 같은 성공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월드오브워크래프트>에서 플레이어들이 다른 땅으로 이동하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다. 출처: 저자의 스크린샷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성공 이후 차기 대세 장르가 MMO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뒤를 이어 경쟁적으로 수많은 MMO게임들이 등장하면서 명백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은 예전에는 소수의 머드게임 열성팬들만 경험할 수 있었던 대규모의 플레이 기반 연결성을 MMO게임들이 보다 쉬운 접근성을 통해 제공해주었다는 점이다. MMO장르가 멀티플레이에 있어 경쟁과 협업의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체 세대의 플레이어들이 아바타 기반의 플레이 공간 내 온라인 연결성을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와 같은 플레이 기반의 연결성은 막을 수 없는 홍수와 같은 흐름을 형성했고, MMO장르가 유입시킨 연결성의 DNA는 소셜미디어와 모바일게임이 자사의 플랫폼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레버리지로 사용하면서 더욱 많은 장르로 확산되어 갔다. 오늘날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며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공유할 수 있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 친구들이 무엇을 어떻게 플레이하고 있는지 중요해졌고, 이는 <팜빌(Farmville)> [8] 같은 소셜 게임이나 싱글플레이 콘솔게임에서 업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차세대 MMO로서 게임 방송과 라이브 스트리밍 한편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웹사이트들은 게임 업계에 관한 이슈나 기술 발전에 대한 짧은 칼럼과 함께 게임 리뷰를 게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2010년대 말에 이르면서 가시적으로 변화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사건은 전통적인 게임 저널리즘 매체였던 게임스팟(Gamespot)의 편집장이었던 제프 거츠먼(Jeff Gerstman)의 퇴사와 함께 시작된 게임 웹사이트 자이언트밤(Giant Bomb)의 탄생과 발전이었다. 자이언트밤의 콘텐츠는 게임에 대한 이해가 깊은 플레이어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인 웹사이트 운영팀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에 좀 더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에 따라 기존 게임 리뷰나 기사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겉치레나 인위적인 요소가 없어졌고 대신 방송 진행자들이 보여주는 (게임에 대한) 진정성이나 방송 중 발생하는 즉흥적인 순간들이 게임 콘텐츠 그 자체만큼 중요한 부분으로 떠올랐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커뮤니티는 이용자 경험에 있어 핵심이었다. 트위치와 같은 라이브 스트리밍 사이트는 활성화된 채팅이 없으면 완전히 다른 사이트가 되어버리며, 유튜브의 ‘Let’s Play’나 자이언트밤의 영상들은 (관객들의) 코멘트와 토론이 가득한 커뮤니티의 장으로서 기능한다. 사람들은 화면 속 등장인물들이나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커뮤니티 구성원들로서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부분은 때때로 플레이하거나 토론 중인 게임 그 자체보다 중요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게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2000년 초반 연결성을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접착제로, 이는 플레이로 연결되는 일종의 건설 중인 사회와 같다고 볼 수 있었다. 북미에서 MMO게임 붐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은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였지만,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MMO게임이 만들어냈던 커뮤니티를 갈망했다. 현 시점에 플레이 기반의 사회성(sociality)를 지탱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렌더링된 디지털 판타지 세계 바깥의 사이트들이다. 연구자 셀리아 퍼스(Celia Pearce)는 <미스트 온라인: 우루 라이브(Myst Online: Uru Live)> [9] 가 서비스 종료된 후 그 플레이어들이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나 <데어닷컴( There.com )> [10] 같은 게임으로 옮겨갔음에도 여전히 강한 공동체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들을 게임 디아스포라(video game diaspora)라 지칭했다. 또 다른 게임연구자 미아 콘살보(Mia Consalvo)와 제이슨 베기(Jason Begy) 또한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 <파우나스피어(Faunasphere)>의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연락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함께 플레이할 새로운 게임을 찾는 등 ‘파우나스피어 플레이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플레이 활동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새로운 가상의 ‘고향(home)’을 찾는데 종종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다”고 언급했다 [11] (편집자 주: 북미와 같은 현상은 한국에서도 일어난 바 있으며, 이는 게임 <일랜시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 이 “새로운 가상의 고향”이 반드시 게임일 필요는 없다. 그 콘텐츠가 플레이와 관련되어 있는 걸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게임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직접 플레이하는 것만큼 - 때로는 그 이상으로 - 만족스러울 수 있는데, 특히 그러한 관람 행위가 이전의 게임 관계망 속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이루어질 때 더욱 그렇다 [12] . 시청자들은 스트리머가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에서 성공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구축하는 ‘메타적 성공(meta-success)’에도 관심을 갖는다. 길드원에게 물자를 공급하거나 보스전에서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성공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MMO게임은 플레이어들을 게임을 매개로 공유되는 사회적 공간으로 끌여들였다. 그러나 그 가상세계의 경계 너머에 비슷한 플레이 기반의 연결성이 구축되면, 플레이어들과 게임팬들은 더 이상 특정 게임 또는 그 디지털 지리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도 그러한 연결성과 사회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브 스트리밍의 성장은 어떤 종류의 게임이 인기를 얻을지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트리밍하기 좋은(streamable)” 게임이라는 개념은 “플레이 할만한(playable)” 게임만큼이나 중요해졌으며, 플레이하는 것만큼이나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게임들이 시장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 [13] , <배틀그라운드(PUBG)> [14 ] , <어몽어스(Among Us)> [15] 같은 게임들은 경쟁을 통해 매 순간 긴장감을 유발하며, 이러한 긴장감이야말로 집단적 관람 경험 속에서 게임을 대리 체험하는 핵심이 된다. 예를 들어 <엘든 링(Elden Ring)> [16] 의 성공은 단순히 게임 자체의 품질에서만 기인했다고 보기 어렵다. 스트리머들이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어럽게 분투하며 수없이 많은 바이럴한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지켜본 관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좌절과 (언젠가는 가능할) 궁극적인 성공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컨버전스가 절정에 달한 순간, e스포츠와 라이브 스트리밍은 완벽한 파트너가 되었다. 트위치가 관심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경쟁 게임을 제공하는 새로운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전 연구에서 나는 이러한 연결이 두 부문(역주: e스포츠와 라이브 스트리밍)의 성장을 도왔다고 언급한 바 있다: "e스포츠는 “2000년 10개였던 토너먼트가 2012년 696개로 증가’ [17] 하였고 현재는 전지구적으로 5억2천3백만명 규모의 시청자를 보유한 것으로 추산된다 [18] . 게임은 지난 수십년간 경쟁적 요소를 지녀왔지만, 현재 그 경쟁성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대중화되었다. 같은 시기동안 개별 인물들이 자신의 게임플레이를 타인들에게 방송하기 시작하면서 라이브 스트리밍 또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참여적 관객-커뮤니티 [19] 와 유사사회적 관계의 형성 [20] [21] 으로 이어졌다." 플랫폼의 시대 불확실한 미래 온라인게임 산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들은 기술산업 분야의 전략을 차용하여 자체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밸브(Valve)는 스팀을 게임 및 스킨과 같은 디지털 상품의 거래가 소셜플랫폼과 교차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시장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게임의 독성 문화(toxic culture)를 연구하면서 게임의 플랫폼 시대의 문화적 영향과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초기 음성 채팅 소프트웨어였던 벤트릴로(Ventrilo)나 팀스피크(Teamspeak) 등은 기초적인 VoIP(Voice over IP) 프로그램으로, 2015년에 출시되어 이용자 친화적 멀티 서버 소셜미디어 허브가 된 디스코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채널이 많지 않았고, 게임 콘텐츠를 다루는 방송사들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게임 문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 지에 대한 논의도 거의 없었고, 플레이어들이 옮겨 다닐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의 수도 얼마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밸브나 블리자드 같은 게임사들은 디즈니나 HBO같은 대형 미디어 기업들의 전례를 따라 개별적인 게임에 플레이어들을 묶어 두기 보다는, 자사의 독점 플랫폼(Valve의 Steam이나 Blizzard의 Battle.net 등) 내 다양한 게임들에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22] [23] . 지금도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 플랫폼화(platformization)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다. 현 시점에 명백한 사실은 지난 25년간 게임과 플랫폼, 장르를 초월하면서 플레이어들이 서로 더욱 가깝게 연결되어왔다는 것이다. 온라인 상에서 사람을 사귀고 교류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된 가운데, 이는 온라인 게임에서 파생된 독특한 언어로 이루어진 사회적 환경이 인터넷 문화와 결합되면서 이어진 결과다. 플레이어들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방대한 규모의 게임 라이브러리에 접근할 수 있으며, 게임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과 연결될 수 있다. 트위치, 스팀, 디스코드 등을 통해 우리가 좋아하는 게임들과 연결된 네트워크는 2차적 지속적인 가상세계(persistent virtual world)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계는 라이브 스트리밍과 유튜브 영상, e스포츠팀 팬덤, 그리고 다양한 서브커뮤니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커뮤니티는 게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화적 공간을 누가 소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례 없는 온라인 접근성에 바탕하고 있는 현재의 게임 풍경은 VR 같은 더욱 현실적이고 몰입적인 환경을 통해 우리를 더욱 가깝게 묶어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소위 “게임 문화 전쟁”이라 부르는 갈등 속에서 플레이어들을 분열시킬까? 현 시점에서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없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게임 문화의 미래가 과거만큼이나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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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Zanescu, Andrei, Lajeunesse, Marc, and French, Martin. “Gaming DOTA Players: Iterative Platform Design and Capture.” Proceedings of DiGRA 2019. Kyoto, Japan, August 6-10, 2019, 1-3. [23] Lajeunesse, Marc. “Transgressive…”, 2023. Tags: MMORPG, 온라인게임, 북미, 스트리밍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게임결제문화의 25년 변화가 드러내는 온라인게임의 특이점

    디지털게임의 결제수단과 결제방식은 오늘날 게임계 이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신작 타이틀과 DLC, 시즌패스의 가격과 가성비 논란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인게임 아이템의 가성비 문제, 이용자간 거래 문제, 그리고 확률형아이템 문제에 이르기까지 게임 분야의 핫 이슈 상당수는 게임의 결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 Back 게임결제문화의 25년 변화가 드러내는 온라인게임의 특이점 GG Vol. 25. 4. 10. 디지털게임의 결제수단과 결제방식은 오늘날 게임계 이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신작 타이틀과 DLC, 시즌패스의 가격과 가성비 논란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인게임 아이템의 가성비 문제, 이용자간 거래 문제, 그리고 확률형아이템 문제에 이르기까지 게임 분야의 핫 이슈 상당수는 게임의 결제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가격과 결제방식이 이슈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는 어떤 식으로든 디지털게임은 이제 경제규모와 산업적 측면에서 더 이상 무시할 만한 수준의 덩치가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이러한 이슈를 통해 터져나오는 이용자들의 불만이 단순한 가격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라는 이용행위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매체와 비교해 보면 좀더 흥미롭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나 음악을 두고 이와 같은 논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매체마다 물론 다양한 결제방식에 의해 유통되므로 이를 단순화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게임계에서 일어나는 결제방식의 문제는 대단히 독특하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DLC와 같은 방식은 책과 같을 수 있을까? 물론 1권을 봐야 2권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이나 웹소설 같은 매체와 유사한 부분은 있겠지만, 연작 시리즈 중에 3권만 사 볼 수 있다는 것과 아예 구매시에 “이 DLC는 원본 프로그램을 필요로 합니다”로 제한되는 경우가 같지는 않다. OTT 드라마를 보는 와중에 이야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주인공의 장비를 돈을 내고 강화하는 것은 가능한가? 어쩌면 이는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지을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온라인게임이지만, 2000년대와 지금의 결제가 다른 두 가지 포인트 하지만 이런 특징은 ‘오늘날의’ 디지털게임에만 국한된다. 21세기의 서막을 알렸던 25년전의 게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비와 유통, 결제의 방식을 되짚어보면, 디지털게임의 특수성이 초기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결제수단의 발전과 변화로부터 기인했음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온라인게임 붐은 2000년대부터는 본격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바람의나라>, <리니지>와 같은 정액제 온라인 게임들이 소수의 전유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인 붐을 타고 있었으며, <스타크래프트>는 직접 소프트웨어를 구매해서 소유하고 플레이하기보다는 한국에서는 PC방이라는 공간의 중개를 통해 공용공간에서의 시공간대여라는 방식으로 플레이되었다. 이는 온라인 이전 시대와 간단히 구분할 수 있는 변화인데, ‘재화에서 용역으로’라는 말로 눙쳐볼 수 있다. 온라인 인프라가 확장되면서 게임 소프트웨어는 재화에서 용역으로 상품의 속성을 변경했다. 한 번 구매하면 영구히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와 달리 서버 위에 소프트웨어가 올라가 있는 형태로 온라인게임이 작동하면서 게임 이용은 이용권한을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부여받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를 20세기 게임과 21세기 게임이라고 구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비스 이용의 형태로 보편화된 2025년의 디지털게임을 단순히 서비스 이용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또 2000년대와는 굉장히 다른 양식들이 자리잡은 상태다. 나는 여러 변화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변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지적해볼 수 있는 부분은 정액제에서 부분유료로의 서비스 결제방식 변화다. 2000년대 초반의 온라인 기반 게임들은 정액제를 주력으로 삼았다. 90년대 TELNET을 기반으로 운영되었던 <단군의땅>, <쥬라기공원>과 같은 MUD게임들이 사용시간당 요금을 부과했던 종량제 형태였다는 점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PC방이 대중적 게임공간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는 B2B형태로도 자리잡았는데, 이용자가 PC방에서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경우에도 이용자는 PC방에 종량제 방식의 이용요금을 지불하지만 PC방은 온라인게임 회사에 사용시간만큼의 금액을 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기반의 게임들이 게임산업의 과반을 차지하게 된 오늘날 정액제 기반의 요금은 과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며, 그 자리는 부분유료결제에 내주었다. 무료로 진입할 수 있지만 게임 플레이 속에서 일정한 패널티를 부과받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결제가 요구되는 형식이 2025년 게임 결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부적인 측면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 광고시청, 아이템결제와 같은 방식들이 존재하지만, 거시적으로는 이용자들로 하여금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당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에서 개별사용자마다 필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만큼의 요금을 결제하는 형태로 변화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변화로는 현금 기반 P2P거래의 감소세를 짚어볼 수 있다. 아이템, 캐릭터 등을 이용자 사이에서 거래하는 현금 기반 P2P거래에 대해서는 더 길게 할 이야기가 많지만, 여기서는 지난 25년 사이에 P2P거래가 발생했고, 이 거래에 대해 게임사들은 점차 개인간의 거래를 개인 – 게임사 간의 거래로 대체하고자 하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만을 다루려 한다. 싱글플레이 게임에서는 불가능했을 개인간 현금 아이템 거래는 온라인게임 환경이라는 전제가 들어서면서부터 가능해졌고, 실제로 등장한 것은 각 플레이어들로부터 발생한 수요와 공급으로부터였다. 단순화해서 이야기하자면 이는 크게 게임시간이 부족한 플레이어와 게임시간이 넉넉한 플레이어 사이의 시간교환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온라인게임 서버 안에 게임플레이의 결과물이 경험치, 레벨, 아이템 등으로 누적되는 상황에서 이 플레이의 잔여물들은 게임 플레이의 진척에 있어 과거 싱글플레이 시절에는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던 숙련도를 서버에 시간축 중심의 데이터로 쌓아낸 결과물로써 숙련도를 대체하는 효과를 낸다. 다시말해 게임에 들인 시간이 많아질수록 게임 내의 성취가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시간이 부족한, 이를테면 주5일 정시출퇴근을 해야 하는 이들로 대표되는 게이머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축적하지 못하고, 대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지만 가처분소득이 적은 게이머들과 현금 – 플레이시간의 맞교환을 이뤄내고자 한다. 그 결과물이 현금기반 아이템 거래이며, 이는 온라인게임의 성립 이후 최초에는 게임 내 재화로만 교환되던 아이템거래를 현금이라는 일반 매개를 통한 교환으로 이끌어냈다. 그러나 2025년의 온라인게임을 들여다보면 현금기반의 아이템거래는 과거보다 게임사에 의해 강하게 제한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이는 제한이라기보다는 시간 – 현금의 맞교환을 통한 이윤의 축적을 플레이어 개인이 아닌 게임사가 가져가고자 하는 흐름이 반영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개인간의 거래가 불가능하도록 아이템은 귀속, 기간제와 같은 형태로 변경되었으며, 이를 통해 부족한 시간을 현금으로 구매하고자 하는 이용자들의 거래처는 다른 이용자에서 게임사로 바뀌어 왔다. 교환가능해진 놀이시간의 대두 언급한 두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시간과의 연관성이다. 부분유료결제의 보편화는 정액제라는 동일한 시간단위 과금을 플레이어마다 다른 플레이시간의 가치에 따라 선택적으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시했고, 현금기반 P2P거래는 현금 – 시간의 맞교환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이 게임사가 이를 회수하려고 할 만큼 오늘날의 게임산업에서 거대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서비스로서의 디지털게임이 지난 25년간 결제 측면에서 겪은 변화는 플레이시간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시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문제에서 시간의 개념은 그동안 노동시간이라는 지점에서 두텁게 논의되어 온 바 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 시간을 포괄하는 놀이시간, 혹은 여가시간은 체계화되기보다는 노동시간과 병행하며 인간의 시간계를 구성하는 요소 정도로 다뤄져 온 바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온라인 기반 디지털게임의 플레이 시간은 오랜 변화 속에서 이제 독특한 개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놀이시간이 축적되어 더 나은 놀이를 위한 아이템과 같은 도구로 변환되고, 이는 충분한 플레이시간을 투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현금을 주고 구매할 의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온라인 게임의 등장 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놀이시간의 양적, 질적 전회와 교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은 21세기 첫 사반세기를 보낸 뒤 우리의 온라인게임 속에서 오늘날의 게임 현상을 특정할 수 있는 특이점으로 드러난다. Tags: 플랫폼, 산업, 결제, 정치경제학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Collaborate, Compete, and Broadcast: Gaming’s 21st Century Cultural Shifts from MMOs to Live Streaming and Online Platforms

    If you’re a video game enthusiast born after the year 2000, chances are good that you grew up with relatively easy access to video game media. Though gaming still maintains some of its countercultural reputation, it has simultaneously become a facet of mainstream culture, and the sheer volume of player-produced video game content has done a lot of legwork to keep our favorite games alive in our eyes and ears long after we’ve signed off for the night. For even some of the most obscure games, it feels like there is a limitless amount of game content available for players to consume without even needing to play. Video gaming’s cultural spaces now weave in and out of games, online communities, and numerous digital platforms like Steam and Discord.  < Back Collaborate, Compete, and Broadcast: Gaming’s 21st Century Cultural Shifts from MMOs to Live Streaming and Online Platforms GG Vol. 25. 4.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below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caffe7a3-6d3f-40e0-9c16-99fb33d9ee75 The Same as it Never Was If you’re a video game enthusiast born after the year 2000, chances are good that you grew up with relatively easy access to video game media. Though gaming still maintains some of its countercultural reputation, it has simultaneously become a facet of mainstream culture, and the sheer volume of player-produced video game content has done a lot of legwork to keep our favorite games alive in our eyes and ears long after we’ve signed off for the night. For even some of the most obscure games, it feels like there is a limitless amount of game content available for players to consume without even needing to play. Video gaming’s cultural spaces now weave in and out of games, online communities, and numerous digital platforms like Steam and Discord. At the turn of the millennium the situation was very different. As a young Canadian gamer in 1999, I have fond memories of waiting every week for two 30-minute television shows - Video and Arcade Top Ten and The Electric Playground - which were the only consistently available televised media about games in my area. * Canadian video game television show Video and Arcade Top Ten - Credit to videoandarcade YouTube channel. [1] To get our fix of game-related content outside of these programs we’d largely turn to monthly gaming magazines which came in three main varieties: proprietary magazines like Nintendo Power which essentially functioned as long-form commercials for recently released or upcoming products, review magazines like GamePro , or magazines directed at hobbyists looking for the latest hardware or industry details, like Next Generation . So how did we get from a handful of publications and two blink-and-you’ll-miss-them television shows a week that largely served to sell the newest games to players, to a vast repository of video game media that serves as a platform for numerous ongoing debates about various issues across gaming culture? The consumption environment of video games and their cultural spaces didn’t evolve on their own. Games are one facet of what Henry Jenkins dubbed “Convergence Culture” – effectively a whirlpool that unstoppably pulls disparate segments of culture together in new ways as our media technologies develop. [2] Video games are part of a complex media environment that involves film, television, magazines, and most critically, the emergent and novel forms of media content and game design affordances that the internet made possible. The first quarter of the 21st century saw an immense shift in how we experience games together, and the development of video game culture is a byproduct of the convergence era made possible by ‘web 2.0,’ and the democratization of the internet. Players became central figures as culture producers, and took on a more active role in publicly shaping culture through increased connectivity both in and out of game worlds. Consider that the current market leaders for game-related media consumption - Twitch and YouTube - didn’t even exist until 2006; two years after World of Warcraft launched and popularized an already flourishing subculture of online gaming across the globe. It may seem unthinkable now that millions of players could congregate together without myriad videos explaining all the new class changes, metagame concerns, and boss strategies, but at the time players were experimenting with new ways of interacting with each other online, and improvised new ways to communicate complex ideas about how to successfully overcome challenges together, all while learning new social contracts and ways of interacting with fellow players. Players were participating in the construction of a new online society; one where play served as the connective thread that linked disparate people together. At the same time, esports was a novelty with some aspiring gamers and organizers in the West turning to Korea’s impressive StarCraft [3] scene both for inspiration, and to validate burgeoning aspirations that one day the hobby or passion project of gaming could become a profession at the level of play, and not just at the level of game production. These forces collided with legacy media and emergent internet-driven media production – alongside the continuing trend originally propelled by reality television in the late 1990s of ordinary people becoming increasingly worthy of celebrity status in the public eye – to propel us towards a new gaming cultural landscape. MMOs and the New Normal of Connectivity and Sociality Though multiplayer gaming wasn’t a new phenomenon at the turn-of-the-millenium, the MMO boom of the early 2000s was foundational for bringing players together. In the same way that arcades were the central gaming spaces of the 1970s and early 1980s, [4] and home consoles and their respective brand wars were the focus of the 1990s, the 2000s became the era of the MMO. Earlier online multiplayer games like MUDs (Multi-user Dungeons) connected players together through largely text-based RPG systems, and though these proto-MMOs connected hundreds of players, they were still a relatively niche gaming subculture. While games like EverQuest [5] and Ultima Online [6] achieved some popularity in the late 1990s, World of Warcraft [7] brought a new level of popular appeal through its graphical style and smooth, approachable gameplay. Though World of Warcraft built a strong following on its own, the South Park episode “Make Love Not Warcraft” in 2006 put a formerly niche genre into the public sphere in previously unprecedented ways. Not only was this an unparalleled promotional moment for a game of this kind, but it signalled a new kind of cultural presence for the MMO genre that countless companies would strive to achieve through their own massively multiplayer games. * A congregation of players in World of Warcraft await a boat to travel to new lands - Author’s Screenshot. The most important takeaway from WoW ’s success and all the competing MMOs that followed would naturally be that MMOs were the next big thing – but MMOs afforded easier access to large-scale playful connection in a way that only a handful of MUD enthusiasts were able to access before. MMOs put both competitive and collaborative multiplayer opportunities in front of players, and most importantly they served as some of the first points of avatar-based online connectivity in play spaces for an entire generation of players. This kind of playful connectivity was a floodgate that could not be closed, and the DNA of MMO connection worked its way into countless genres as social media and mobile gaming leveraged the appeal of play for their own platforms. We could now join our friends, make new friends, and compare and share ourselves with others. More than ever before, it started to matter what and how our friends were playing, even on social media games like Farmville [8] , or as we chased achievements in our single-player console games. Video Game Broadcasting and Live Streaming as the Next MMO At the same time, in the mid 2000s, most websites were continuing to release short editorials focused on industry issues or technological developments , alongside a steady stream of video game reviews. Nearing the end of the first decade of the 2000s, there was a visible pivot – particularly visible in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website Giant Bomb, following Jeff Gerstman’s departure from Gamespot, which was a more conventional games journalism outlet. Giant Bomb’s content was more focused on discussions between members of the website team as informed players and experienced games journalists, without much of the pretense or artifice of traditional reviews or articles. The visible authenticity of the individuals who were broadcasting together, and the unplanned moments that would arise within segments, became as central to the overall experience of video game media consumption as the game content itself. In each of these cases, community is central to the audience experience. Twitch and similar live streaming sites aren’t the same without an active chat, and YouTube ‘Let’s Plays’ and Giant Bomb videos are a site for comment, discussion, and community. People identify with the personalities on screen and those who make themselves seen as members of these communities. This is often more important than the game that is being played or discussed – but that there is a game at all is an integral glue to that early 2000s connectivity: a society under construction linked together by play. While the MMO boom peaked in North America between 2008 and 2010, players of all kinds still clamored for the kind of communities that MMOs fostered, but now external sites had developed the infrastructure to support a play-based sociality outside of the confines of a fantastically rendered digital world. Celia Pearce wrote about the closure of the game Myst Online: Uru Live [9] and its players as a video game diaspora – as players maintained a strong sense of communal identification among one another even after they migrated to other games like Second Life and There.com . [10] Similarly, Mia Consalvo and Jason Begy found that players of the now defunct game Faunasphere stayed in touch and felt connected to each other as ‘ Faunasphere players,’ finding new games to play together or ways to stay in touch. They noted that players “actively work to form groups and relocate their play activities elsewhere, often investing great energy in the search for a new virtual ‘home.’” [11] This “new virtual home” isn’t necessarily a game even if the content might be play-related. Watching someone else play could be as satisfying as - sometimes more satisfying - than playing a game yourself, especially when this act of spectatorship is undertaken communally with friends and acquaintances from one’s own social network of prior gaming relationships. [12] Not only are viewers invested in the broadcaster’s success in the game they’re playing, but in their meta-success as a streamer trying to establish a career. Instead of trying to help our guildmates by providing them supplies or doing our part in a challenging boss fight, we’re now invested in the success of our favorite streamers. MMOs pulled players into shared social spaces through games, and once a similar playful connectivity was established outside the boundaries of virtual worlds, players and game fans alike were able to chase that connection and sociality without being tethered to a particular game and its digital geography. The growth of live streaming also affected what kinds of games would become popular. The idea of a “streamable” game is just as important as a playable game, and games that are just as fun to watch as they are to play became a key segment of the market. Games like League of Legends , [13] PUBG [14] , and Among Us [15] have tension built into every moment of gameplay through competition, and that tension is what makes experiencing these games vicariously as part of a collective audience their own pivotal gaming experiences. The success of Elden Ring , [16] for example, isn’t something we can attribute solely to the quality of the game, as streamers produce a bounty of viral moments of struggle through each challenging encounter attempted in front of thousands of viewers each, while the audience bonds as we share in our favorite streamer’s failures and (hopefully) eventual success. In a moment of peak convergence, esports and live streaming were perfect partners as Twitch served as a new centralized platform for putting competitive gaming in front of interested players. In my prior work, I note that this connection helped both sectors grow: "Esports grew from having “about 10 tournaments in 2000 to 696 in 2012,” [17] to have an estimated 523 million viewers across the globe. [18] While gaming has had a competitive element for decades, it reached new levels of saturation. Live streaming itself grew substantially during this time, as individual personalities began to broadcast their own gameplay for others, forming participatory audience-communities [19] and parasocial relationships. [20] [21] " The Platform Era and Uncertain Futures Taking a page out of the tech sector playbook, companies with a foothold in online gaming began to operate as ecosystems, such as Valve developing Steam into an all-encompassing market for games and cosmetic goods crossed with a social platform. In my work on toxic game culture, I outline the cultural impact and shape of gaming’s platform era: "Early voice communication software that players used like Ventrilo and Teamspeak were barebones VoiP programs, a far cry from the user-friendly multi-server social media-like hub that Discord has become since its release in 2015. There were fewer channels for players to connect to one-another across games, fewer broadcasters of gaming content circulating ideas about what the culture should look like, and there were also fewer online games overall for players to move between. Now,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larger media companies like Disney and HBO, video game companies like Valve and Blizzard have become less interested in keeping players within individual games, instead opting to invest players in various games that are housed in their proprietary platforms (Steam for Valve, Battle.net for Blizzard). [22] [23] " Players are now living through the effects of platformization, which are still developing and ongoing. What is clear at this point is that over twenty-five years, players have been pulled much closer together across game, platform, and genre. We have been conditioned to socialize online, but we have done so through a combination of internet culture and a social environment whose very language has developed out of the online gaming lexicon. There has never before been more access to vast libraries of games, and an even greater number of players with whom to share our gaming passions. In many ways the linked networks that run through Twitch, Steam, and Discord, alongside all our favorite games, have connected us in a second-level persistent virtual world. This world is one made up of live streams, YouTube videos, esport team fandoms, and other subcommunities, each with different stakes in what gaming means, and who the cultural space should belong to. Is our current gaming landscape of unprecedented online proximity set to pull us even closer together in even more realistic and immersive environments through VR, or are we primed in what many are calling gaming’s “culture wars,” to be driven apart? As of now there is no clear answer. The only thing that can definitively be said, is that the future of gaming culture is as unpredictable as its past. [1] Videoandarcade YouTube Channel. https://www.youtube.com/watch?v=OWFm2qU0k5o&ab_channel=videoandarcadetop10 (accessed March 26th, 2025). [2] Jenkins, Henry. Convergence Culture: Where Old and New Media Collide. New York: NYU Press, 2006. [3] Jin, Dal Yong. “Historiography of Korean Esports: Perspectives of Spectatorship.” International Journal of Communication 14 (2020): 3727-3745. [4] Kocurek, Carly A. Coin-Operated Americans: Rebooting Boyhood at the Video Game Arcad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5. [5] Sony, 1999. [6] EA, 1997. [7] Blizzard Entertainment, 2004. [8] Zynga, 2009. [9] Ubisoft, 2003. [10] Pearce, Celia. Communities of Play. Cambridge: The MIT Press, 2009, 7. [11] Consalvo, Mia, and Begy, Jason. Players and their Pets: Gaming Communities from Beta to Sunset.”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5, 91-92. [12] Consalvo, Mia, Marc Lajeunesse, and Andrei Zanescu. Streaming by the Rest of Us: Microstreaming on Twitch. Cambridge: MIT Press, 2025. [13] Riot Games, 2009. [14] Krafton, 2017. [15] Innersloth, 2021. [16] FromSoftware Inc., 2022. [17] Hiltscher, Julia. “A Short History of eSports.” eSports Yearbook 2013/2014 (2014): 9-15. [18] “Esports Ecosystem in 2023: Key Industry Companies, Viewership Growth Trends, and Market Revenue Stats.” Insider Intelligence article. January 1st, 2023. [19] Hamilton, William A., Garretson, Oliver, and Kerne, Andruid. “Streaming on Twitch: Fostering Participatory Communities of Play within Live Mixed Media.” CHI ‘14: Proceedings of the SIG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April 14th, 2014, 1315-1324. [20] Sherrick, Brett, et al. “How Parasocial Phenomena Contribute to Sense of Community on Twitch.” Journal of Broadcasting and Electronic Media 67, no 1 (2023): 47-67. [21] Lajeunesse, Marc. “Transgressive Positivity in Four Online Multiplayer Games.” PhD Dissertation, Concordia University, 2023. [22] Zanescu, Andrei, Lajeunesse, Marc, and French, Martin. “Gaming DOTA Players: Iterative Platform Design and Capture.” Proceedings of DiGRA 2019. Kyoto, Japan, August 6-10, 2019, 1-3. [23] Lajeunesse, Marc. “Transgressive…”, 2023. Tags: NorthAmerica, MMORPG, Online Game, live streaming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 게임제너레이션::필자::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마크 라제네스, Marc Lajeunesse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디아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 온라인 게임의 독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삼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공평하고 즐거운 놀이 경험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게임 내에서 더 많은 긍정적인 조건을 들어내기 위한 독성 현상에의 이해를 추구한다. 스팀 마켓플레이스와 DOTA 2에 관한 논문을 작성한 바 있고 곧 출시될 '트위치 마이크로스트리밍'의 공동 저자이다. Read More 버튼 읽기 협업, 경쟁, 방송: MMO로부터 라이브 스트리밍과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21세기 북미 게임씬 만약 당신이 2000년 이후에 태어난 게임팬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게임 매체를 비교적 쉽게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문화적(countercultural)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현 시점의 게임은 주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플레이어들이 직접 제작한 게임 관련 콘텐츠의 양도 엄청나게 방대해져서 게임을 종료한 뒤에도 좋아하는 게임들을 눈과 귀로 계속 즐길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 아무리 마이너한 게임일지라도 직접 플레이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거의 무한히 느껴질 지경이다. 버튼 읽기 두려움, 공포 그리고 폴아웃: 게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포의 양상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공포의 유형으로는 2가지가 있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은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의 악명 높은 장면을 플레이했을 때였다. 당시 <레지던트 이블>은 호러 게임이라기 보다는 속도가 느린 액션 게임쪽에 가까웠는데, 게임 내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뒤이어 또 다른 한 마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려움과 혼란, 공포를 느꼈다. 버튼 읽기 서구의 관점에서 본 〈로스트 아크〉와 한국 게임 3일간의 얼리 억세스 기간이 지난 2022년 2월 11일 〈로스트 아크〉가 서구의 백만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출시되었다. 한국의 개발사 스마일게이트(Smilegate)가 제작하고 서구의 아마존 게임 스튜디오(Amazon Game Studios)가 배급을 맡은 〈로스트아크〉는 서구 게이머들의 한국 게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지난 20여년 간 몇몇 한국산 게임이 서구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음에도, 게임 분야에서 뚜렷한 일본산 게임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한국 게임'에 대한 개념은 아직 서구권 게이머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서구권에서의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게임의 운영관리 방침, 유명 콘텐츠 제작자들의 참여, 그리고 한국의 〈로스트 아크〉 커뮤니티의 역할 등을 통해 〈로스트 아크〉는 한국의 게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서구 게이머들의 기대를 형성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있다. 버튼 읽기 곰고기 백파운드: 교육용 게임과 〈오레곤 트레일〉의 유산 현 시점에 〈오레곤 트레일(The Oregon Trail)〉에 대한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된다. MECC(Minnesota Educational Computing Consortium)가 만든 이 고전 게임에 대한 글은 수없이 많은데, 예컨대 캐릭터가 게임 내 여정 속에서 가장 많이 겪게 되는 이질(dysentery)은 유명한 관용구가 되어 온갖 상황에서 사용되어왔다. 이 글은 〈오레곤 트레일〉이 남긴 유산 그리고 여전히 미국의 게임문화와 주류 대중문화를 이어주고 있는 게임의 영향력에 대한 증언이다. 버튼 읽기 개발자, 문화, 그리고 현금: 서구 AAA 게임계의 세 가지 경향 AAA게임은 예술, 산업, 문화가 결합되는 영역으로서 지속되어왔다. 게임 연구는 그러한 요소들이 - 진전을 계속하는 가운데 - 과거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 정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 차기작 출시에 대한 기대 및 차기 하이프 사이클에 대한 예측 그리고 다가올 시상식에 대한 흥분 속에서, AAA게임 개발이 보다 높은 예술적 수준의 미래를 향해 최고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높이에 도달하기까지 훨씬 큰 극단의 고통이 수반될 것이다. 게임 언론계나 학계의 간섭, 그리고 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관련 운동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적법성, 노동자와 플레이어에 대한 착취 등 오랫동안 존속되어온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 만 또안 호

    만 또안 호 만 또안 호 Read More 버튼 읽기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 This is a Title 03 | 게임제너레이션 GG

    < Back This is a Title 03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This is placeholder text. To change this content, double-click on the element and click Change Content. Want to view and manage all your collections? Click on the Content Manager button in the Add panel on the left. Here, you can make changes to your content, add new fields, create dynamic pages and more. You can create as many collections as you need. Your collection is already set up for you with fields and content. Add your own, or import content from a CSV file. Add fields for any type of content you want to display, such as rich text, images, videos and more. You can also collect and store information from your site visitors using input elements like custom forms and fields. Be sure to click Sync after making changes in a collection, so visitors can see your newest content on your live site. Preview your site to check that all your elements are displaying content from the right collection fields. Previous Next

  • 게임제너레이션::필자::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김성은 김성은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국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인생 게임은 . ‘인생은 요지경’이 ‘인생은 낯설어’로 변화한 순간을 엿본 뒤로 게임이란 세계에도 푹 빠져있는 중입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공모전수상작] 게임으로부터의 선택, 선택으로부터의 풍경-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언더테일>의 제4의 벽 활용을 중심으로 퀀틱드림의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은 사람과 무척이나 유사한 안드로이드의 출현 이후, 그들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고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SF적 상상력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용 안드로이드 카라, 그리고 칼이란 인물을 위해 특별제작된 안드로이드 마커스, 이 셋이 초점화자가 되어 진행된다. 인터랙티브 비디오 게임 장르답게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러 다른 엔딩을 볼 수 있다.

  •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Back [공모전] 모바일 리듬 게임에서 ‘엄지러’를 선택하기-‘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 미쿠’를 중심으로 13 GG Vol. 23. 8. 10. ‘엄지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엄지족’이라는 신조어가 있었다. 2000년대 폭발적으로 보급된 스마트폰이 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때였다. 엄지를 이용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년을 일컬어 ‘엄지족’이라 불렀다. M으로 시작하는 것에 착안해 이들 세대를 모바일 세대, M 세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모두가 ‘엄지족’이자 모바일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족’, 다른 말로 ‘엄지러’는 여전히 실존한다. 스마트폰 리듬 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0년대 후반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모두가 ‘엄지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바일 리듬 게임의 세계에서 ‘엄지러’의 위치는 다소 미묘하다. 노트를 정확한 타이밍에 터치해야 하는 일반적인 포맷의 모바일 리듬 게임을 상상했을 때, 분명히 모바일 리듬 게임의 유저 대다수는 엄지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엄지러’다. 그러나 노트가 더 많이, 빨리 등장하며 고난도의 플레이가 요구될수록 뚱뚱한 엄지 두 개만을 움직이는 플레이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이론상 발로도 플레이할 수 있는 <지오메트리 대시Geometry Dash>나 엄지가 누비기 비교적 수월한 세로형 인터페이스의 <피아노 타일 2Piano Tiles 2>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모바일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한계가 있음을 알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엄지로 플레이하거나, 지금부터라도 낮은 레벨부터 다른 손가락을 사용하는 연습을 하며 플레이 스타일을 ‘교정’하는 방법이다. 전자를 선택한 이용자라도 이걸 엄지로 하라고 만든 것이 맞는지 의심되는 곡을 만나면 다시 갈등을 시작한다. 이 필연적인 고민은 하나의 의문을 낳는다.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인터페이스의 전환과 ‘엄지러’의 탄생 ‘엄지러’는 원래 리듬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계층이었다. 리듬 게임은 이전까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탑재한 아케이드 기기를 무기로 이용자를 매혹시켰다. 이용자는 강렬한 음악이 귓가를 때리는 오락실에서 버튼을 누르고, 돌리고, 발판을 밟고, 북을 치고, 기타를 치는 식으로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 오락실이 쇠퇴함에 따라 온라인과 콘솔, 모바일 등 각각의 형태를 기반으로 리듬 게임이 분화되었다. 모바일 리듬 게임으로 넘어오며 리듬 게임은 기존의 무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각양각색의 감각적인 콘트롤러 대신 게임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피처폰의 조악한 버튼, 조금 더 나아가서는 스마트폰의 작은 터치스크린뿐이었다. 이 터치스크린 속에서 특정한 버튼을 누르면 여전히 소프트웨어는 우리의 입력에 반응하지만, 과거와 같이 게임 소프트웨어 바깥에서 주어지는 ‘눌렸음’의 촉각적 신호는 사라진다.1) 이 물리적 제약은 감각적인 콘트롤러를 내세웠던 리듬 게임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대신 스마트폰은 리듬 게임에게 휴대성과 대중성을 가져다주었다. 게임사는 모바일 환경에 맞춰 ‘엄지족’이 엄지로 간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게끔 리듬 게임을 설계했고, ‘엄지족’은 엄지로 플레이를 했다. ‘엄지러’의 탄생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리듬스타 등의 피처폰 모바일 리듬 게임이 인기를 끌었으며, 2010년부터는 고사양의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아이폰, 안드로이드와 같은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기반으로 한 리듬 게임들이 개발되었다.2) 형태의 전환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으로 리듬 게임을 한다는 것은 게임사가 더는 이용자가 리듬 게임을 하는 방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케이드 리듬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정해진 장소로 가 정해진 콘트롤러를 정해진 방식으로 조작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모바일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용자들에게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그들은 불특정한 장소에서 불특정한 기기를 불특정한 방식으로 조작한다. 이용자는 카페에서 태블릿을 눕혀놓고 모든 손가락을 활용해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고, 핸드폰을 들고 집에 누워서 엄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으며 최신형 접히는 핸드폰을 산 것을 후회하며 접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검지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새롭고 다양한 사용자 경험 위에서 이전과 다른 플레이 문화가 축적됐다. 인터페이스의 전환이 새로운 장르적 전통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바일 리듬 게임에게 ‘어느 정도 엄지 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필수적인 동시에 중요하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해당 리듬 게임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캐릭터 IP를 내세운 대중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인 처럼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있는 한편, 아예 어려운 리듬 게임을 테마로 한 <다이나믹스Dynamix>처럼 엄지 플레이가 거의 불가능한 게임도 있다. <칼파KALPA>처럼 엄지 플레이 난이도와 다지 플레이 난이도를 이원화하는 선택을 하거나, 특정 레벨 이상부터 다지 플레이를 필수로 만드는 등의 절충안을 내놓은 경우도 존재한다.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하츠네미쿠’(이하 프로세카) 또한 이론상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었다. 주식회사 세가와 컬러풀 파레트, 크립톤 퓨처 미디어가 공동 개발한 프로세카는 보컬로이드 IP를 이용한 캐릭터 수집 요소를 결합해 만든 대표적인 모바일 리듬 게임 중 하나다. 이 리듬 게임이 호명된 이유는 이 게임이 더 이상 엄지로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서버에서 개최된 창작 콘테스트 ‘초고난이도 프로세카 ULTIMATE’의 당선작 3곡이 게임 내 최고 레벨을 경신하는 37레벨로 수록되며 이 명제가 깨진 것이다. 이는 게임의 프로듀서인 콘도 유이치로의 “모든 곡은 두 손가락으로 풀 콤보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과거 발언을 번복하는 문제로써 이용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다. 이에 게임사는 37레벨은 번외 레벨로 예외적인 경우이며, 이하의 레벨에서는 앞서 말한 원칙을 지키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사실 프로세카가 이론상으로 엄지로만 플레이가 가능했을 때에도 높은 난이도의 곡들은 거의 엄지로 플레이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프로세카에는 엄지만 사용하여 올 퍼펙트를 달성한 것이 확인되지 않은 곡이 다수 존재하며, 같은 난이도의 곡이라도 엄지로 플레이할 때 압도적으로 어려운 곡도 존재한다. 높은 난이도의 곡을 엄지로 플레이하는 이용자가 있더라도 그것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그리고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을 넘어,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엄지로만 플레이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왜 ‘엄지러’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물론 여러 손가락을 사용하려면 태블릿과 같은 일정 크기 이상의 터치스크린을 눕혀야 한다는 제약이 존재한다. 하지만 높은 난이도의 곡을 시도할 정도로 열성적인 이용자가 단지 그것 때문에 엄지를 고수한다는 점은 이상하다. 더 이상한 점은 여러 손가락으로 플레이하는 이용자조차 37레벨 곡 업데이트에 대하여 ‘엄지 배려’를 하라고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높은 난이도의 곡 플레이가 가능한 ‘엄지러’는 원래도 거의 없었는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가? ‘엄지러’라는 전통 이 모든 반응은 ‘엄지 플레이’와 ‘다지 플레이’의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 구분이 단순한 플레이 방식의 차이였다면 엄지로 32레벨까지 클리어하고 막히면 33레벨부터는 다지로 플레이 해 클리어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33레벨 ‘엄지’ 클리어와 33레벨 ‘다지’ 클리어를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게임 내적 시스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클리어하든 아무 구분 없이 표기되는 데도 말이다. 이용자들은 대신 게임 외적으로 엄지로 특정 레벨까지 클리어 한 사실을 자랑한다거나, 엄지로 특정 곡을 클리어 한 영상을 공유하며 그들만의 전통을 축적한다. ‘엄지러’를 기준으로 한 비공식 곡 난이도 표를 만들고, ‘다지러’가 엄지로 어디까지 플레이가 가능한지 도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축적된 전통 위에서 ‘엄지러’의 높은 난이도 도전은 몇몇 이용자의 기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모습은 플레이 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러 직업이 있는 RPG 게임에서 상이한 난이도의 직업 루트를 선택하는 것과 더욱 유사해 보인다. 하나의 직업으로 최종 보스를 처치했다는 사실이 인정받으면서도 그것이 곧 다른 직업의 성취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게임의 특징을 논할 때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점이 바로 게임과 이용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맥락과 이용자의 창조성이다. 이경혁3)은 게임 매체의 수용이 일종의 창조 행위라는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오락실의 <펌프 잇 업> 고수가 펼치는 두 발 외의 몸을 사용하는 펌프 퍼포먼스를 들었다. 이런 예시는 개별 이용자의 창조적 수용을 보여준다. ‘엄지러’의 전통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게임사를 포함한 모바일 리듬 게임이라는 장르의 구성원은 모두 이 암묵적인 장르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 외적으로 구축된 전통은 개별적인 창조적 행위가 아닌 인터페이스의 특징에서 촉발되어 장르의 구성원이 새롭게 창조한 ‘규범’에 가깝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앞선 프로세카 같은 리듬 게임은 특히 게임 내적 시스템의 영향으로 다른 모바일 리듬 게임보다 ‘엄지러’의 규범이 강하게 작용한다. 실제로 엄지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뿐만 아니라, 대중성을 위해 양적 랭킹 시스템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프로세카에는 일정 기간 동안의 플레이 횟수에 따른 양적 랭크인 이벤트 랭킹과 실력을 겨루는 질적 랭크인 랭크 매치가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양적으로 순위를 매길 때 더 유리한 플레이 방법은 당연히 엄지를 이용한 플레이다. 이러한 이원화는 엄지 플레이에 확실한 효용을 부여함으로써 엄지 플레이의 지위를 보장한다. ‘엄지러’를 선택하기 단순한 플레이 방식 이상의 ‘엄지러’ 전통을 고려했을 때, 프로듀서의 발언을 차치하고서라도 이론상 엄지로만 칠 수 없는 곡의 등장이 강한 논란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RPG 게임의 비유를 다시 가져오면,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지 여부와 별개로 하나의 직업 루트에만 번외 콘텐츠가 개방된 셈이니 말이다. 혹여 ‘다지러’로 전직하더라도, 모바일 리듬 게임을 하는 한 ‘엄지러’의 전통은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다시 질문해보자. 리듬 게임의 ‘엄지러’는 바뀌어야만 하는가? 무의미한 질문이다. 바꾼다 해도 내가 선택해 키운 ‘엄지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1) 이경혁 (2023.04.05.),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머물렀던 곳은 어디였을까: 터치스크린 시대의 숙련도, <게임제너레이션>,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152d8082-f4a1-486d-875d-a05088a28625 2) 강현구 (2019), 스마트폰을 위한 리듬게임 User Interface Design 연구, 석사학위,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3) 이경혁 (2019), <(놀이에서 디지털 게임까지) 게임의 이론>, 문화과학사.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원생) 손민정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현대문학과 문화를 공부 중입니다. 글과 함께한 만큼 게임과 늘 함께 해왔습니다. 별별 게임 다 합니다.

  •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 Back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12 GG Vol. 23. 6. 10.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재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볼 때 게임은 종래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이나 회화 등의 작품과 비교할 때 동적일뿐더러 상호작용적으로 작동된다.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로 무장한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동적인 행위성 덕분에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다소 수동적이었던 기존의 작품 관람 패턴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게임이 게임만을 소재로 한 박물관을 갖게 되고, 다른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전시를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게임이 독자적인 박물관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인 편견을 넘어 미술관에 전시되게 된 역사를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게임들 * MoMI에서 최초로 박물관에 전시된 아케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이 본격적으로 산업의 태동을 맞이한 시점을 1972년 아타리의 〈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9년에 이르러서야 게임은 처음으로 박물관에 전시될 기회를 갖게 된다. 미국 뉴욕의 Museum of the Moving Image (MoMI)는 “Hot Circuits: A Video Arcade”라는 이름의 전시에서 아케이드 게임들을 전시했다. 이 박물관의 창립 이사였던 로셸 슬로빈(Rochelle Slovin)은 비디오 게임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고 물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컴퓨터 스페이스(1971)〉나 〈퐁(1972)〉 같은 초기 아케이드 게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아스테로이드〉, 〈스페이스 인베이더〉, 〈슈퍼 브레이크 아웃〉, 〈트론〉 등 14종의 아케이드 게임이 전시되었다. MoMI의 이 초기 전시들은 이 박물관이 수집하고 있는 ‘동영상(moving image)’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이상의 인터랙션을 안겨주었기에 이러한 게임들을 전시할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게임은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운 좋게 게임에 호의적인 큐레이터를 만나 전시하게 된 새로운 매체 정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위의 사진처럼 MoMI의 전시는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던 아케이드 게임을 그대로 수집하여 가져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집된 게임의 예술적인 특질을 추출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해당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에게도 본인들이 예술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작가적 정체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로셸 슬로빈은 이러한 아케이드 게임들의 기술적인 특징이나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전시에 관한 에세이에서 “비디오 게임을 평가한다는 것은 TV과 영화, 그리고 현재의 뉴미디어를 지배하는 비디오-컴퓨터의 혼합 사이에서 구미디어와 뉴미디어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중요한 단계”라고 썼다.1) 그는 1989년의 전시 이후 20년이 지난 2009년의 시점에서 당시의 전시들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처럼 하나의 트렌드나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무언가의 시작”이었으며, “비디오 게임이 전 세대의 젊은 미국인들을 컴퓨터에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진 기술적인 시각화가 다른 매체와 다른 비디오 게임 고유의 독자적인 미학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초기 비디오 게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게임이 컴퓨터의 사고방식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게임이 탄도학이나 군사 시뮬레이션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초기 형태의 컴퓨터와 칩은 힘과 벡터라는 순수한 수학만을 다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이 비디오 게임으로 재현되었을 때, 여기에는 순수한 수학의 강한 흔적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의 독특한 순간이었다. 기술이 게임의 원동력이자 콘텐츠가 되었다. 이것은 내가 본 것처럼 기술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내용과 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의미였기 때문에 이것은 박물관에 유용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비디오 게임은 물리 법칙을 거의 감각적으로 시각화하고 느끼는 방식을 혁신 했다. 힘과 벡터 같은 물리적 법칙을 수학 공식을 통해 기술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의 비디오 게임은 박물관에 전시될만한 맥락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젋은 미국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을 게임이 적응시키고 있다는 사회적인 맥락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는 이 때를 즈음하여 게임이 단순히 아케이드만을 통해 소비되지 않고, 가정용 게임기나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초기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질 희소성과 보존 가치에 주목했다. 이 때부터 MoMI는 초기 아케이드 게임뿐만 아니라 랄프 베어로부터 기증받은 인류 최초의 가정용 게임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프로토타입 버전인 ‘브라운 박스’ 등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에도 MoMI의 주요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미디어 아트 옆에 놓인 게임 MoMI의 이 전시 이후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비디오 게임의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는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98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위치한 워커 아트 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린 “Beyond Interface” 전시나 2000년 UC 얼바인 대학에서 열린 “Shift-Ctrl”전, 2001년 뉴욕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열린 “010101: Art for our Times”, 그리고 같은 2001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Bitstreams”전이 그것이다. 이 당시 전시의 특징은 게임을 독자적으로 전시하기보다 게임과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동일선 상에 놓고 병렬적인 차원에서 이들의 유사성을 더듬어 나가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휘트니 미술관 Bitstreams에 전시된 제레미 블레이크의 미디어 아트 Station to Station (2001)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이르면 게임은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나름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당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하여 e스포츠의 가능성이 시작되었고, 3D 그래픽 카드의 출시를 통해 게임의 시각적인 표현력도 우수해지던 때였다. 물론 막 시작된 3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아직 언캐니 밸리의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기 어렵던 때였지만, 도트나 벡터 그래픽을 바탕으로 한 2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슈퍼패미컴이나 PC엔진과 같은 4세대 가정용 콘솔에서 절정에 이르러 하나의 스타일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부터 몇몇 작가들은 컴퓨터 그래픽과 인터랙션을 하나의 표현 도구로 삼고 이를 통해 뉴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 당시 미술관에 전시된 게임은 독자적인 전시로 구성하기는 어렵지만, 디지털 아트라는 범주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그 맥락에 묻어가면서 전시 맥락을 획득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도구로서의 디지털은 쉬운 복제와 편집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존 작품의 권위를 쉽게 패러디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당시에 나왔던 리디아 와초프스카의 〈브레이크 아웃〉 패러디는 기존의 비디오 게임 매커닉을 패러디하여 디지털 아트가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Lidia Wachowska, Breakout Animation Steal, 2002. 문제는 이처럼 게임이 디지털 아트와 더불어서 미술관에 점차 전시되면서 ‘예술 게임(art game)’과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games as a art form)’이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술가나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게임적 요소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예술가적 자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예술 게임과 상업적 게임 중 예술성이 뛰어난 게임인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2000년대 전후를 위시하여 지속적으로 미디어 아트 포맷 형태로 미술관에 숱하게 전시되었으나,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상업적 속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를 제작한 개발자의 예술적 자의식이 없거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에 전시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맥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란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에 있어서 흔히 게임의 본질적인 매체 효과로 간주되는 ‘재미’를 넘어 게임이 영감(inspiration)을 줄 수 있는 미학적 자질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석파정 서울미술관,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 (2019) 2019년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렸던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는 게임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 중 여러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을 전시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호주의 게임 개발사 Mountains에서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에서 퍼블리싱한 모바일 게임 〈플로렌스(Florence)〉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전시는 게임이 우리 사회 속에 어느새 미적 감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주요 매체로 자리매김했음을 일깨워준다. 독자적인 게임 박물관을 향하여 필자 역시 2010년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전시를 기획하면서 게임을 미술관에 넣어보려 노력한 적이 있다. 놀공발전소와 함께 준비했던 이 전시에서 우리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출시된 주요 게임 콘솔과 애플 II, MSX 등 한국에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개인용 컴퓨터들을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비치했고, 그 중 예술적으로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게임들을 게임 역사 순서대로 전시한 바 있다. 물론 이 때에도 게임만으로 미술관 전시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미술관 내외의 반감이 상당하여 상당수의 전시를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아트로 채워야 했었다. 때문에 필자는 전시 시작 입구 쪽에 백남준의 〈TV 촛불〉을 초를 켠 채로 세워놓았다. 백남준의 〈TV 촛불〉은 TV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게임이든 미디어아트이든 그 뿌리는 같으며, 이를 어떻게 채울지가 더 중요하다는 선불교 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나에게는 다가왔던 것이다. 이 작품의 선정은 미디어아트 없이는 게임만의 독자적인 미술관 전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일종의 소극적 저항이었던 셈이다. * 백남준, TV 촛불 이는 현재 제주도에 위치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오픈 수장고를 통해 선보이고 있는 방식과 유사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게임 콜렉션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The Strong Museum이나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Computerspielmuseum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오픈 수장고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 박물관들은 모두 전시된 게임 이상의 수많은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고, The Strong Museum만 게임업계나 학계 관계자들에게 폐가식 형태로 이를 공개하고 있다. The Strong Museum 내에 위치한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History of Electronic Games는 게임 그 자체를 수집, 보존, 전시하는 것을 넘어 실제 게임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최대한 존중하여 보관하고자 하는 곳이다. * 〈페르시아의 왕자〉 디렉터인 조던 메크너의 스토리보드와 모션 캡쳐 노트 필자가 이 박물관의 센터를 방문했을 때 놀런 부슈넬, 윌 라이트, 조던 메크너, 시드 마이어 등 유명 게임 개발자들의 다양한 게임 메커닉 스케치와 아타리 2600 등과 같은 올드 게임 콘솔의 디자인 설계도 등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이를 분류하는 체계 역시 이미 규정이 확립되어 있었다. 게임을 보존해야 할 미디어로 간주하고 이를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The Strong Museum의 사례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해준다. 1) Rochelle Slovin, “Hot Circuits: Reflection on the first museum retrospective of the video arcade game”, 2009. http://www.movingimagesource.us/articles/hot-circuits-20090115 Tags: 아카이빙, 박물관,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 Back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08 GG Vol. 22. 10. 10.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기계문명과 산업도시를 건설해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난 인간이지만 고양이 앞에서는 애정결핍 노예가 돼버린다. 오늘날 고양이는 신성불가침이라 할 수 있으며, 어쩌면 지구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을 굴복시킨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 필자와 7년간 삶을 함께하고 떠난 고양이, 제리입니다. 이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존재인 만큼, 고양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도 남다르다. 고양이는 왜 고롱거리는 걸까? 고양이는 왜 발치를 맴돌며 머리를 비비는 것일까? 쥐나 벌레를 선물로 바치는 고양이의 심리는 무엇일까? 동물행동학자가 아닌 일반 사람(집사)들이 고양이의 언어를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쓴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우화 속에서 의인화되지만, 고양이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쉽사리 의인화되지 않는 존재다. 사람들은 고양이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며,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하려고 든다. 고양이를 의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의묘화한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스스로를 굽신거리는 집사로 희화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 있는 힘껏 몸짓 발짓을 동원하는 노력과 비슷한 맥락이다. 타자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나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먼 곳에서 왔지만 가까워지고 싶은 존재, 친족이 되고 싶은 반려종으로서 고양이의 사회적 의미는 요즘 아주 의미심장하다. 〈스트레이〉는 이처럼 ‘고양이와 함께 되기’를 꿈꾸는 기묘한 심리를 투영한 게임이다. 고양이를 대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고양이가 되어보는 것이다. 고양이를 묘사한 문학·영화는 항상 있어왔고, 인기도 많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고양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인간 사회를 묘사하며,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은 진창에서 벗어나는 노숙자 ‘밥’과 가족이 된 길고양이의 실화를 다룬다. 이슬람 성전 쿠란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예배 중 자신의 품에 기어들어와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옷소매를 자른 일화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 고양이가 되어 발톱을 긁고, 점프하는 게이밍 경험은 그 이상이다. 〈스트레이〉는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의 관점에 위치시키면서, 객체라고 생각되는 비인간(고양이, 기계, 도시)들이 자아내는 사회적 관계를 SF의 형식 속에서 재배치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어디에서 왔는지, 가족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름이나 가족은 인간중심주의적 개념이며 비인간에게는 불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관을 비평하고자 했던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생동하는 비인간의 세계 게임은 폐허가 된 도시를 기웃거리다 지하로 떨어진 고양이의 탈출 여정을 그린다. 플레이어는 철저히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탐색하고 길을 만들어 나가야한다. 인간의 감각, 인간적인 사고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문을 지나가기 위해서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문을 긁어서 누군가가 열게 만들어야 하며, 거리의 평면적 공간이 아닌 건물의 수직적 공간을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어디든 네 발로 착지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 받은 고양이에게 인간의 2차원적 운동은 고루할 뿐이다. 이 이름 없는 고양이로 가장 빈번하게 발 디디는 곳은 환풍구, 파이프라인, 테라스 난간이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상 인간은 이런 식으로 공간을 인식하지도, 이동하지도 않는다. 〈스트레이〉에서는 인간적인 감각을 최대한 제쳐놓고 사고해야 한다. 게임은 매우 정교한 레벨링을 통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수직 도시 스테이지를 설계했으며, 각 페이즈들은 철저히 고양이의 동선에 최적화되어 있다. * 〈스트레이〉에서 인간 지각 요소인 미니맵, 위치표시기, 체력바, 마커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공간을 인식해야 하며, 사물과의 상호작용과 좌표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다소 불편하지만 이러한 비인간 감각에의 연동은 고양이만 갈 수 있는 경로와 퍼즐풀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공간 이동 경험은 낯설고 신비롭다. 기존의 게임 문법과 다르게, 우리는 고양이의 눈높이에서 사물들을 바라봐야 한다. 시선을 넓게 던지고, 어딘가를 항상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미니맵이나 지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좌표계가 공간 인식의 준거가 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는 도시 곳곳의 후미진 공간까지 아주 면밀히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탐색하면서 고양이의 감각으로 경로들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들에서, 소실점은 언제나 인간의 눈높이(혹은 총의 조준선)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선 이물감이 든다. 길을 헤매고, 화면을 올려다보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울렁거림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공간 디자인은 단순히 플레이어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로서의 경험을 재조직화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인간이라면 떠올리기 어려운 비밀 장소들을 발견하거나 문틈, 창살 사이를 비집고 다닐 수 있으며 수백 미터 아래를 가뿐히 뛰어내려 옆 건물로 이동할 수도 있다. 고양이의 입체적이고 아크로바틱한 운동 속에서 우리가 재발견하는 것은 탈인간적인 물질 감각이다. 무심히 지나친 타이어, 녹슨 드럼통, 콘크리트 쓰레기들은 역설적이게도 고양이가 유유히 지나다니는 길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스트레이〉는 산업문명의 기초가 되는 기계와 도시를 반생태적인 독성 공간이면서 동시에 보잘 것 없는 쓰레기더미로 묘사하는 중의 문법을 도입한다. 미디어학자인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의 말을 빌린다면, 상징과 해석을 강조하는 문학과 다르게 탐색과 항해를 강조하는 게이밍의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이 고양이의 행위성과 입체적인 도시 이동 경험을 중개하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의 독창적인 디자인은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고양이와 함께 되기’ 경험을 극적으로 증폭시킨다. 수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직조되어 있지만, 고양이가 자유롭게 도시 공간을 누비고 다니듯 플레이어는 손쉽게 고양이의 신체 행동과 동기화될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난해한 기믹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몇 가지 버튼만 적절한 타이밍에 누를 줄 안다면, 그리고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고할 줄 안다면 누구든 이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즐겼던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예컨대 인디아나 존스 게임 시리즈같은)의 담담한 재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스트레이〉의 세계에는 오로지 비인간 행위자들만 존재한다. 인간은 기후 재앙으로 멸종한 지 오래고, 인간의 하인 노릇을 하던 로봇종인 ‘컴패니언’과 주인공인 고양이만이 살아남았다. 인간의 흔적은 폐허가 된 지하도시에 즐비한 기계장치들에 검붉은 녹으로만 남아 있다. 인공지능에서 개성을 획득한 ‘컴패니언’ 들은 인간의 사고와 관습을 흉내내기는 하지만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말 그대로 새로운 생명체다. 읽을 수 없는 기계 언어로 쓰여진 간판들, 쓰러지고 부서진 건물들, 우스꽝스러운 복장에 외골수 행동을 하는 컴패니언들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명쾌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무엇인가?’ 이다. 함께-되기의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인간의 실존을 묻는 까뮈의 〈이방인〉이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처럼 난해하지 않다. 〈스트레이〉의 로봇종과 고양이, 그리고 고양이보그(catborg)인공지능 드론은 서로 돌보고 협생하는 관계다. 이 설정이야말로 게이밍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영리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소형 드론 B-12는 플레이어(즉 고양이)에게 계속 자신을 깨우라는 신호를 보내며, 나중에는 플레이어를 돕는 보철물로 합류한다. 고양이 전용 웨어러블에 탑재된 B-12는 생동하는 비인간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신 같은 존재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고, 고양이가 수집한 아이템을 디지털화해서 저장하며, 컴패니언-고양이 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기계언어 번역을 제공한다. 플레이어는 B-12로부터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퍼즐풀이 단서를 제공받지만, B-12가 위기에 처했을 때(과부하로 전원이 꺼지거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는 거꾸로 구해내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 고양이, 컴패니언(로봇종), 인공지능 드론은 협생 관계이다. 드론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고양이와 합체, 고양이보그(catborg)가 되어 플레이어의 진행을 돕는다. 게임 속 오브젝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라이트를 비출 뿐 아니라 컴패니언의 기계언어와 고양이의 야옹 소리를 번역해 소통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떠난 지하도시의 거주자 컴패니언은 고양이에게 다양한 도구를 제공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양이가 지면으로 나가도록 돕는다. 한편 고양이(플레이어)는 컴패니언의 생존을 위협하는 박테리아 균체 저크(zurk)를 물리치도록 도움을 주게 된다. 비인간 행위자들 간의 ‘함께-되기(becoming with)’의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야기한 자본주의와 기술의 문제들을 탈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상상력을 펼친다. 고양이와 드론, 모든 유기체를 갉아먹는 균체인 저크(zurk)로부터 지하도시에 격리된 로봇종인 컴패니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이 비인간-행위자들의 끈끈한 네트워크는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 바깥에서도 객체들만의 정치가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스트레이〉에서 이들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와 발명품들이다. 고양이와 드론, 그리고 로봇종의 여정을 가로막는 위협은 멸망한 인간이 고안해낸 것들이다. 기후재앙을 맞이한 인류는 탄소배출을 중단하는 대신 탄소를 먹어치우는 박테리아를 개발한다. 요즘의 기후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각국 정부들을 보면 정말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 선택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박테리아는 처음에는 플라스틱과 탄소를 먹어치우지만, 유기체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금속까지 먹어치우는 방향으로 진화해버린다. 저크(zurk) 균체가 된 박테리아는, 동물과 인간 뿐 아니라 기계생명체인 컴패니언들까지 집어삼키고, 그 결과 식량난으로 멸종한 인간에 이어 컴패니언들도 지하 방공호에 긴 세월 격리된다. 이들을 격리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규율하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경찰 로봇, 센티넬(sentinel) 들이다. 센티넬은 격리를 해제하자고 주장하는 인간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용도로 개발된 로봇들이지만, 인간이 사라진 후에는 밖으로 나가려는 컴패니언들을 억압하는 권력-기계가 된다. 포스트휴먼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비평하는 것처럼, 인간 중심주의가 자아낸 트러블(기후위기, 계급갈등, 프랑켄슈타인 과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비인간의 존재를 가로지르는 ‘함께-되기(becoming with)’가 전제되어야 한다. 〈스트레이〉는 그 방법들을 플레이어들의 퍼즐 풀이 속에 아주 적절히 풀어놓는다. 인류가 처한 트러블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옵션은 ‘어떻게 인간을 구할 것인가’ 라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 즉 어떻게 ‘비인간과 함께할 것인가’의 주제의식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게임에서 고양이의 시각에서 사고해야만 했듯이, 사물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을 재구성해야 한다. 고양이, 로봇, 인공지능 뿐 아니라 균체, 건물, 뗏목, 전기, 라디오, 악기, 금고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와 무기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함께-되기’가 요청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객체(비인간 행위자)가 되어 상호작용하는 경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브뤼노 라투르가 지적하듯이, 중요한 것은 끈끈하게 연결된 이 비인간 행위성들 속에서 가능한 정치, 즉 인간과 사물이 동등하게 객체이자 행위자임을 상정하는 가운데 그 네트워크가 창발할 수 있는 잠재적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이 게임의 매커닉을 두고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라고 부르는 맥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 이념으로서의 코스모폴리틱스는 아주 난해하고 사변적이다. 그런데 〈스트레이〉는 비인간인 동시에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양이의 행위성을 투사해, 함께-되기의 경험들을 퍼즐풀이 문법으로 수사하면서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캣스모폴리틱스’는 시네마나 문학에서는 달성되기 어렵겠지만, 〈스트레이〉 같은 게임에서는 고풍스럽고 위트넘치는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설득하게 된다. 그루브, 하모니, 에코, 고양이...펑크!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게임이 사이버펑크의 외형을 하고는 있으되 사이버펑크의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어원 자체가 다르다. 사이버펑크(cyberpunk)의 펑크는 거칠고, 단순하며 반항적인 하위문화인 펑크(punk, 메탈과 록)에서 온 것이지만 펑크(funk)는 깊이 있고 은은한 냄새, 그루브, 전자음과 리듬과 결부된 재즈적 무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의 거리와 녹슨 기계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가운데 고양이가 뛰노는 풍경은 아주 흥미롭지만, 〈스트레이〉는 권력의 감시와 대안적인 자유, 증강인간과 넷러너 등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주제의식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트랜스휴머니즘과 기후재앙 시나리오를 비판적으로 소묘한다. * 사이버펑크(cyberpunk)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그루브와 조화가 강조되는 에코펑크(echofunk)이다. 부드러운 플로우와 애시드 재즈, 기계와 고양이 간의 따뜻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태적인 감각이 되살아난다. 버스킹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테크노 음악을 발굴하는 로봇종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황폐한 지구를 떠날 궁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캣스모폴리틱스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 붓터치는 punk가 추구하는 강함(중독, 환각, 메탈, 가죽)이 아니라 funk의 부드러운 플로우 속에서 구현된다. 플레이어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는 공간, 혹은 이벤트가 벌어지는 페이즈에 들어설 때마다 펑키한 애시드 재즈를 접하게 되는데, 이는 급박한 긴장의 폭발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꾀하는 기존 대중문화의 문법과는 정 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감미로운 펑키 무드는 오히려 긴장을 이완시키고 공간의 사물들을 여유있게 살펴보도록 만드는데, 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오히려 느긋하게 고양이와 공간의 하모니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음악 뿐 아니라 펑크가 집약되는 공간은 아주 힙하고 히피스러운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플로우에 몸을 맡긴 채, 고양이를 움직여 이 사랑스러운 프랑스 애니메이션풍 미장센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한다. 소파에 누워 잠을 잘 수도, 카펫 위에 꾹꾹이를 할 수도 있으며 TV와 라디오를 켜거나 끌 수도 있고, 냥점프와 냥펀치로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행동은 느긋함을 유도하는 게임 매커닉과 펑키한 요소들(음악, 미장센)을 통해 조화되며, 느긋하게 진정된 상태가 아니면 좀처럼 되돌아보기 어려운 주제, 생태과 기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의 친애하는 고양이가 가로되, 기술의 진보는 문명의 진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레이〉는 고양이펑크인 동시에 에코펑크이며, 펑크가 구사하는 모든 느긋함의 미학을 플레이에 조화시키는 게임이다. 무엇보다, 〈스트레이〉의 캣스모폴리틱스 펑크는 인간의 자본주의 기술문명 자체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가는 현실, 즉 자본이 지구 지층을 뒤헤집는 자본세(capitalocene) 시대에 대한 가장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우화다. 집도, 이름도 없는 고양이가 되어 귀여운 잔꾀를 펼치는 체험을 통해 우리는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방법을 불현듯 깨닫게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조스 같은 억만장자들은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자, 태양계에 우주 콜로니를 만들자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있는 지구를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지구를 떠나는 방법이 아니라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이고, 고양이-기계-로봇이 서로 환대하는 모습에서 스스로와 타인을 돌보는 방법일 테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는 이렇게 말한다.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두 발은 여전히 지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영이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과 시신경제 (Necronomics) 시신경제 (Necronomics)는 아킬레 음벰베 (Achille Mbembe)의 시신정치 (Necropolitics)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다. 시신정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의 생명정치 (Biopolitics)가 권력이 생명의 영역을 지배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동시대의 현실은 죽음을 단지 생명권력 (Biopower)을 위한 수단으로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버튼 읽기 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버튼 읽기 - 부담 없는 플레이의 즐거움 를 통해 게임이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 언제나 방대하며 무거운 내용과 숭고함, 비장함, 웅장함과 같은 중후한 인상들이 반드시 효용적이지만은 아닐 수도 있으리란 것을 생각해 볼 만하리라. 물론 그렇다고 또 즐거움이란 게 꼭 가벼울 필요도 없지마는, 게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경험’이란 무조건 부피와 무게를 늘려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버튼 읽기 [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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