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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이에게 게임을! 국립재활원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인터뷰
그 중에서도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자립생활지원기술연구팀은 보조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2020년부터 노인·장애인 보조기기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경제적 가치 부문과 사회적 가치 부문으로 나뉜다. 전자가 개인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해외 보조기기를 국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라면, 후자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 수요를 공모를 통해 파악하여 수요자와 함께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이다. < Back 모든이에게 게임을! 국립재활원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인터뷰 04 GG Vol. 22. 2. 10. 필자는 약 반 년의 기간 동안 “그레이 게이머 연구”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50대에서 70대를 망라하는 노인 게이머들의 게임 경험을 청취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60대 할머니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평소 둔하고 무딘 손가락 때문에 애니팡 같은 쓰리매치 게임을 할 수 없었던 그 분은 펜슬이 달린 갤럭시 노트로 핸드폰을 바꾸면서 펜으로 꼭꼭 집어가며 원래는 할 수 없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즐거워하셨다. 이 일화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노년 게이머는 게임이 싫어서, 또는 게임의 재미를 몰라서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게임을 하는데 있어 자신의 신체에 잘 맞는 도구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 주목하여 모두가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위해 게임 보조기기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번 지면에서는 “누구나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슬로건 아래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게임 보조기기를 개발한 국립재활원의 보조기기 개발팀을 소개하고 프로젝트에 대해 나눈 대담을 소개할 예정이다. Q: 국립재활원과 보조기기 개발팀의 역할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일반 병원이 사고를 당한 환자들의 치료에 중점을 둔다면, 보건복지부 국립재활원은 사고에서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조기기는 필수이다. 그 중에서도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자립생활지원기술연구팀은 보조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2020년부터 노인·장애인 보조기기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경제적 가치 부문과 사회적 가치 부문으로 나뉜다. 전자가 개인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해외 보조기기를 국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라면, 후자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 수요를 공모를 통해 파악하여 수요자와 함께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이다. * 노인·장애인과 함께 보조기기를 개발하는 국립재활원 열린제작실 전경 Q: 기존에도 재활을 위해 게임이 사용되는 사례가 있지 않았나? 그러한 “재활 게임”과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재활 게임은 재활 과정 자체를 좀 더 쉽게 거쳐갈 수 있게 고안된 기능성 게임이다. 재활을 위해서는 같은 동작을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한다. 이 과정을 좀 덜 지루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재활 게임이다. 반면,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는 장애인들이 게임 플레이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즉 ‘레저’의 의미에서의 게임을 위해 보조기기를 개발하였다. * 보조장비를 만들기 위해 열린제작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도구들. Q: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과 성과를 소개해달라.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는 2020년 말 뇌병변장애인(장애가 심한 뇌성마비)의 어머님 다섯 분이 “장애인도 게임할 수 있나요?” 라는 신청을 함께 해 주셔서 시작하였다. 그 이후 자조모임의 형태로 뇌병변장애인과 가족,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게임보조기기를 개발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회의, 워크숍과 사용성평가 등을 진행하면서 각 신청인에게 적합한 형태의 보조기기를 개발, 개조하였다. 특히 모임에서 집중하였던 것은 조작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기존의 게임과 컨트롤러는 뇌병변장애인이 사용하기에 지나치게 복잡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적합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데 집중하였다. 간단한 조작으로도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가진 독자적 컨트롤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개발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호자나 활동지원사들이 그에 맞는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분들부터 게임 플레이에 익숙해져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성과를 취합한 결과 게임접근성 보조기기 12종(개발 10종, 개조 2종)을 개발하였고, 활용 매뉴얼 책자 ’누구나 게임을 할 수 있다’를 발간하였다. 책자는 추후 pdf파일 형식으로 무료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게임을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성취감을 얻고 간접경험을 얻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게임플레이가 장애인의 사회 복귀와 적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발견이자 수확이 아닐까. * 장애인의 기능수준을 고려하여 다양한 조이스틱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조작을 할 수 있는 게임 컨트롤러. 출처: 국립재활원 공식 유튜브 *게임 컨트롤러의 실물. Q: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게임 접근성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앞서 사업 성과에서 소개했듯, 장애인들에게 있어 게임은 성취감을 주고 간접경험을 제공받으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장애인이 한 명의 인격체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 게임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굉장히 크다. 게임을 하다 보면 컴퓨터를 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직업 훈련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또 영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등, 게임으로 쌓이기 시작한 성취의 감각은 연이어 쌓여나가 삶에 대한 의지로 형태가 변한다. 또한 게임 접근성의 문제는 노년 게이머 문제 와도 결부되어 있다. 지금의 젊은 게이머들 또한 나이가 들 것이다. 노화에 따른 반응속도의 저하와 시력 저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에 대비하여 게임을 조작하는 플레이어가 처한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상상하고 그것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낼 상상력과 기술이 지금부터라도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Q: 게임 접근성을 위해 국내 게임 개발사 및 퍼블리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해외 사례를 참고했다. 놀랍게도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장애 형태를 지닌 사람들도 각자에 맞는 게임 보조기기를 통해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에 맞춰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장애인 게임과 관련된 연구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와 ‘로지텍의 Adaptive gaming kit (어댑티브 게이밍 키트)’, ‘Nintendo의 Flex Controller’ 등의 연구 인프라와 그 결과물이 사회에 잘 자리 잡혀 있었다.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 주로 콘솔 게임이 연구 대상이 된 것 또한 이러한 해외의 상황,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장애인 게이밍에 대한 국내 게임 산업의 무관심과 맞닿아 있다. 플레이어의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 해외 콘솔 게임과 다르게 (닌텐도 Wii의 경우, 영유아의 게임 플레이를 위한 접근성 설정을 지원한다) 국내 게임은 주로 PC게임과 스마트폰 게임으로 양분되어 있고, 어느 쪽도 이 게임들의 경험에 맞는 컨트롤러나 소프트웨어 차원의 접근성 지원은 전무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 또한 국내 게임에 대한 반응이 더욱 좋았던 만큼, 국내 게임 제작사와 퍼블리셔들은 먼저 장애인 게이머와 노년 게이머 또한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게임에 잘 맞는 인터페이스가 게임 플레이의 경험을 더욱 높여주는 만큼 보다 다양한 게이머들이 처한 조건을 상상하고 구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Q: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이후 후속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연구가 가능할 것인가? 이전 질문과 이어서, PC게임이나 스마트폰 게임에 이식할 장애인용 컨트롤러를 개발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내 게임과 연계하여 진행한다면 더욱 뜻깊을 것이다. 더하여 이번에 진행된 프로젝트는 뇌병변장애인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분류하는 장애의 기준은 15가지나 된다. 다른 장애유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접근성과 컨트롤러 연구가 더 진행되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이번에 진행되었던 게임보조기기들이 상용제품으로 나와, 사용자들이 쉽게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 보조기기연구개발팀은 게임보조기기 외에도 노인과 장애인의 여가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보조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사진은 다양한 그림도구를 휠체어에 부착하는 그림그리기 보조기기. * 입술로 움직이고 바람을 불면서 컴퓨터를 제어할 수 있는 입술마우스. 상용제품이 높은 가격으로 접근이 쉽지 않아 저비용 제작이 가능한 키트화에 성공했다. 시력이 나쁜 사람이 일상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 안경을 쓰는 것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라면, 장애인들이 보다 즐겁고 편안하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여러 보조기기를 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놓인 신체적 조건이 다르며,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일상을 위해 일정 정도 보조기기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게이머 또한 각자 다른 신체적 조건 아래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깊이 고려한 게임이 설계되고 시장에 나왔을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진정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에서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운 인디음악 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예술사회학 연구와 (공연)사진 촬영에 매진중이다. 라캉 정신분석 철학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영번역을 맡았다.
-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 Back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05 GG Vol. 22. 4. 10. 평등한 게임이라는 환상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이유로 게임에 접근조차 어려운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극 빈곤층 등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많은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어린 고수들에게 게임의 도道를 사사 받은 풋내기 성인들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어쨌거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은 오늘날 게임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재능하나로 돌파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지는 따져볼 일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을 배반하는 데이터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령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NBA(전미농구협회)를 가난한 흑인들이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는 반대다. NBA는 점차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이 가난한 선수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규칙을 지키는 등의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 ‘게임을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는 무시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을 놔두는 것은 책임방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런 개입들은 필연적으로 게임을 더 돈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Pay to win이라는, 돈을 많이 낼수록 강해지고 승리하는 게임들의 승승장구와, 하나의 게임을 잡다하게 쪼개서 팔아치우는 부분유료화의 전면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자녀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프로게이머 학원에 보내주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계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인성’논란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문제들은 앞선 예처럼 교육과 양육환경의 문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프로스포츠들에 비하면 아직은 덜 체계화 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만약 e-sports가 진짜로 다른 인기 스포츠들만큼의 위상을 획득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경쟁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티어로 알 수도 없고, 반영되지도 않는다. 엄마가 모욕이 된 세계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렇듯이, 게임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무차별적 모욕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평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욕이 진짜로 ‘무차별적’인지는 살펴봐야 한다. 박서련의 단편 소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2)은 동명의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무용을 전공할 뻔하고, 외국계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은 중산층 가정주부인 ‘당신’3)의 이야기를 다룬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게임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부모인 당신은 고민 끝에 게임과외를 떠올린다. 최초로 찾아온 것은 명문대를 다니며 챌린저 티어인 남자 대학생이다. 그는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나무라며 부모라도 아이가 하는 게임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을 가르쳐 주겠다던 그는 그걸 빌미로 손을 잡고 가슴에 팔꿈치를 갖다 대며 성추행을 한다. 이제 어리지로 순진하지도 않은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고, 단호하게 그를 내쫓는다. 불쾌감을 뒤로하고 새롭게 만난 과외선생은 다이아 티어의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이다. 당신은 그에게 여성적 매력이 없음을 안도하며 아이의 과외선생으로 낙점하지만, 그는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선생의 등쌀에 떠밀리듯 당신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재능이 있었다. 당신은 승리를 쌓아가며 오랜만에 온전한 성취감을 맛본다. 순식간에 아이의 티어인 브론즈를 넘어 골드에 진입한 당신은, 때마침 아이의 라이벌이 아이와 전교회장 출마를 두고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은 불신하는 아이를 이겨 실력을 입증하고, 아이의 라이벌을 게임으로 불러내 보기 좋게 압살해버린다. 하지만 사실 게임을 그다지 잘 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라이벌은 패배에 승복하지 않고 아이의 계정에 접속해 있는 당신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알게 된다. 게임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욕설로 받아들여지고, 당신이 엄마라고 타이핑할 때마다 ‘XX’가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아이의 라이벌은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너희 엄마를 외치지만, 게임은 엄마인 당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이긴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패배감을 맛본다. 게임, 엄마, 여성 이 소설은 여성과 게임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례들을 엮어 한편의 악몽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악몽은 엄마의 것이다. 소설 속의 ‘당신’은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엄마이고, 자녀 양육에 관한 최신의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중산층이다. 훈육과 금지보다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고, 과도한 애정관계를 형성해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소위 깨인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은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은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고,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의존적이고 버릇없게 자라고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는 미숙한 어른임에도, 자신이 아이를 빈틈없이 케어하고 있다는 허위의 자족감에 빠져 있다. 따라서 소설은 엄마인 당신을 온전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빠져있는 함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심지어 공모하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게임문화에서 엄마의 표준적인 모습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는 존재이지만, 소설 속의 당신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의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조망하고 싶어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게임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지든 방임이든 개입이든 간에 게임은 엄마들에게 불안의 영역이다. 그것이 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나 연구들은 온전한 논의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말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마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게임에 맞서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역할들을 엄마가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양육과 돌봄이라는 문제가 엄마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일’로 여겨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삶이 평가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학업성적이나, 일의 성과 같은 것에 비해 양육은 지극히 평가가 어렵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 정도가 성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잘못이 되고야 만다.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양육의 책임을 모든 가족과 사회에 실질적으로 분산하고, 엄마들에게 합당한 사회적 인정과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마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운다. 직장에서는 자기만 조직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밖에서는 이기적인 ‘맘충’이고, 가족들에게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엄마이자 아내다. 게임에 대한 ‘엄마’들의 적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신의 의무는 아무것도 줄어든 것이 없는데, 남편과 자녀가 시간과 돈을 게임이라는 잘 알지도 못할 것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의 악몽은 여자에 대한 것이다. 게임에서 가장 심한의 모욕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형이다. 게임을 못한 것이 남자일지라도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엄마와 전국의 아무 상관없는 ‘혜지’들이고, 평생을 모쏠로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남자친구 따라서’ 게임을 시작한 줏대 없는 게이머 취급을 당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남자게이머들이 여자게이머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여긴다. 엄마, 선생님, 여가부(!)처럼 여자는 게임을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게이머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저도 그 여성은 나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며, 게임을 ‘가르쳐’줘야할 존재일 것이라는 가정이 붙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실력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에 휩싸이고, 폄훼당하기 일쑤다. 자신이 그 여성게이머보다 게임을 못하더라도, 게임실력을 의심하고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남성게이머들이 넘쳐난다. 게임문화의 공식적인 입장은 ‘게임만 잘하면 되지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이지만, 이것으로는 게임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딜루트는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서 많은 게임커뮤니티의 주류담론들이 모두를 동등한 게이머로만 대해야 하며, 친목질을 방지하고 성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드러내선 안 되는 성별은 오직 ‘여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지칭하고, 여성 게이머 이슈에서는 입을 모아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그런 것에 문제를 제기할 때 만 “남자건 여자건 그냥 각자 게임을 하면 그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4) 최근 몇 년간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게임업계의 성차별, 남성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아시아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흐름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게이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책임 있는 단위들이 하다못해 말이라도 차별에 대한 반대를 뚜렷하게 표하는데 반해, 한국과 아시아는 모든 것을 소비자-게이머들의 뜻이라며 회피하기에 바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일부 남성게이머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앞장서서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오늘날의 게임문화는 엄마에게도 여성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이렇게 특정한 남성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새로움도 품을 수 없음을, 그래서 결국에는 고립되고 도태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당신’은 게임을 통해 그간 얻지 못했던 승리감을 맛본다. 그가 현실에서 다뤄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고, 끝나지도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짧은 시간동안 승리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당신은 패배 역시 기뻤을지 모른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조차 없는 세상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판정을 내려주고, 심지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게임은 이미 현실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로 침식되어 있었고, 게임은 그를 “XX”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임의 세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 할 수 없고,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협곡에서도 똑같은 기울기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게임에서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지겨워진다. 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 기어코 현실의 가장 나쁜 것들을 끌고 들어오고야 마는가? 왜 누군가를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리는 것에서 음침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게임하는 것 대신에 진짜게이머와 가짜게이머를 구분하는 의미 없는 언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게임은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더 약탈적인 비즈니스모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지와 무시, 독성을 가득 머금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커뮤니티문화. 이 흐름들을 멈출 수 없다면, 게임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우리와 닮은 ‘게임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기 전에 게임을 되찾자. 이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1)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더 퀘스트, 2018.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3) 당신은 이름이 아닌 2인칭 대명사이다. 4)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평론가, 사회학연구자) 최태섭 지은 책으로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설명서》, 《한국, 남자》, 《잉여사회》 등이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홍성화
큐레이터학과 예술학을 전공했다. 최근 레트로 게임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전시들을 준비하고 있다. 홍성화 홍성화 큐레이터학과 예술학을 전공했다. 최근 레트로 게임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전시들을 준비하고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아카트로닉스’라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는 것이 있다. 호기심의 방은 말 그대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진귀하고 이국적인 것들, 때로는 괴이한 것들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주로 16-17세기 영국에서 개인 컬렉터들에 의해 만들어진 호기 심의 방은 박물관의 기원 중 하나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공간이 단순히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수집 공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보여졌다. 당대에 가치있던 고미술품이나 유물, 또는 명망있는 화가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김얼터 김얼터 리얼리티, 리얼리즘, 픽션, 그리고 매체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시험에 들게 만들거나 시험하는 사물을 좋아한다. 미술 전시와 전시에 관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으로 일하고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리그 오브 레전드의 유동적 원근법에 관한 노트 변화하는 원근법과 그에 맞추어 재편되는 게임 내 공간감, 플레이어의 시각성은 앞으로 우리의 시각 문화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각성은 과연 우리의 눈에 어떤 변화들을 불러들일까? 복수 개의 원근법, 회전하는 원근법이 구성하는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우리의 눈은 그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더 많고 풍성한 논의가 이 글 위에 쌓여 가기를 기대해 본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조기현
‘국민학교’ 때 친구 집에서 금성 FC-150과 패미컴을 처음 접했고, APPLE II+ 호환기종으로 컴퓨터에 입문했다. 중·고교 시절을 16비트 PC 게이머로 보낸 후 플레이스테이션을 접하며 가정용 게임기 유저로 전향, 게임으로 영어와 일본어 독해법을 익혔다. 이후 2002년부터 현재까지 (주)게임문화의 월간 GAMER'Z 수석기자로 재직중이다. 8~90년대 한국 게임 초창기의 궤적을 텍스트로 복각해보고 싶어 한다. 저서로는 〈한국 게임의 역사〉·〈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모두 공저), 감수로는 〈페르시아의 왕자 : 개발일지〉와 〈여신전생 페르소나 3·4 공식설정자료집〉 등이 있으며, 2019년부터 레트로 게임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해설하는 무크집 〈퍼펙트 카탈로그〉 시리즈 연작의 한국어판을 번역·감수하고 있다. 최신간은 〈패미컴 퍼펙트 카탈로그〉와 〈세가 초기 게임기+겜보이 퍼펙트 카탈로그〉(근간 예정)다. 조기현 조기현 ‘국민학교’ 때 친구 집에서 금성 FC-150과 패미컴을 처음 접했고, APPLE II+ 호환기종으로 컴퓨터에 입문했다. 중·고교 시절을 16비트 PC 게이머로 보낸 후 플레이스테이션을 접하며 가정용 게임기 유저로 전향, 게임으로 영어와 일본어 독해법 을 익혔다. 이후 2002년부터 현재까지 (주)게임문화의 월간 GAMER'Z 수석기자로 재직중이다. 8~90년대 한국 게임 초창기의 궤적을 텍스트로 복각해보고 싶어 한다. 저서로는 〈한국 게임의 역사〉·〈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모두 공저), 감수로는 〈페르시아의 왕자 : 개발일지〉와 〈여신전생 페르소나 3·4 공식설정자료집〉 등이 있으며, 2019년부터 레트로 게임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해설하는 무크집 〈퍼펙트 카탈로그〉 시리즈 연작의 한국어판을 번역·감수하고 있다. 최신간은 〈패미컴 퍼펙트 카탈로그〉와 〈세가 초기 게임기+겜보이 퍼펙트 카탈로그〉(근간 예정)다. Read More 버튼 읽기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어린 시절을 비디오 게임을 벗 삼아 왔기에 게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2000년대 중반쯤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 문서에 실린 고전 게임기들의 사진 퀄리티가 너무 조악했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웹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 웹 문서들의 사진자료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초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형편 되는 대로 찍어 자가 제공한 사진들 일색이었으므로, 그때 눈으로 봐도 거개가 저해상도 저퀄이기 일쑤였다. 물론 하드웨어 제작사가 말끔하게 찍은 공식 사진자료가 있기는 하나, 당연히 제작사에 저작권이 있는데다 언론사 등에나 한정적으로 제공되기에, 공공자료로 개방되어 인용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퀄리티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020년 이래 아이폰은 충전기 미포함으로 출시되고 있다. 애플에 따르면 이는 포장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서, 판매되는 아이폰 한 대당 소요되는 원자재량 및 포장용 패키지 절감을 통해 운송용 팔레트 한 대당 70% 더 많은 제품을 실을 수 있어 탄소 배출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Calma, 2020). < Back 그린게이밍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2 GG Vol. 25. 2.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만 또안 호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이정엽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 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비평의 쓸모 게임 비평 역시 앞서 언급한 시의성이나 대규모 자본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글의 형식은 게임 비평일 수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문하지 않는 존재는 점차 자기 합리화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는 현재 한국 게임이 처해 있는 다양한 위기들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버튼 읽기 게임에서 사랑이 재현되는 두 가지 형태 – 자기애와 애착 캐릭터에 대한 애착(attachment)은 단순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애착의 대상인 캐릭터가 절대 연애의 주체성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플레이어를 만족시킬만한 일러스트와 계량화된 수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된다. 버튼 읽기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버튼 읽기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버튼 읽기 부분유료결제는 영원할 것인가? 이처럼 2022년의 연말을 맞는 지금 게임 비즈니스 모델은 더 이상 게임 플레이의 외부에 존재하는 거래 행위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이제 게임 비즈니스 모델은 게임 플레이와 밸런스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게임 산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사업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만드는 회사와 개발자의 입장은 늘 조심스럽다. 유저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하며, 어떤 비즈니스 모델이 트렌드를 선도하는지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버튼 읽기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버튼 읽기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 Back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04 GG Vol. 22. 2. 10. 1. 미래는 널리 ‘분배’되지 않았다 사이버펑크의 효시가 되는 소설 『뉴로맨서』의 저자인 윌리엄 깁슨은 이렇게 적었다. “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 새로운 전자기기, 혁명적인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장할 때마다 수많은 IT기업가들과 평론가들, 테크노크라트들이 이 문구를 인용해 왔다. 기술혁신이 사회를 이끌고, 정체된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이라는 산업적 낙관주의에 기인한 인용들이다. 이들의 발언에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기술의 진보를 사회의 진보와 동일시하는 기술결정론적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는 하이테크 전문가집단과, 신산업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분리하려는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다. 우리 엘리트들이 열심히 개발하고 제도화할테니, 무지몽매한 당신들은 초개처럼 동참하기나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 새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해마다 스마트폰을 바꾸고 있지만 이를 직접 분해해 들여다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알파고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을 이겼는지 자세히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유튜브와 피드에서 엄청난 콘텐츠 소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왜 내 앞에 추천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얼리어댑션과 진보의 상징인 아이폰이 계획적 노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깁슨의 계시록적 문구를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 라고 섣불리 해석한다. 그러나 깁슨이 왜 ‘spread’ 가 아닌 ‘distribute’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가 실제 전달하고 싶었던 뉘앙스는 “미래가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데도, 적절히 사람들에게 분배되지 않았다.” 였을 것이다. 신기술은 역사적으로도 사회적 부의 불평등과 그에 따른 불만을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증기기관과 전기·화학 및 소재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19세기, 서구 사회는 전에 없던 엄청난 생산력을 획득했지만 절대 다수의 노동인구는 최악의 빈곤에 시달렸다.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당시 실태를 조사한 문헌을 인용하면서(특히 1850년대의 정부 보고서들) 산업도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20세보다도 짧았다!)과 영양상태가 선사시대 수렵·채집을 하던 인류보다 나빴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괜히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찰스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같은 책을 쓴 게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신 기술은 우리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조야한 공구로 노동하는 야만인들보다 더 오래 노동하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에게는 궁전을, 빈자들에게는 움막을 생산한다.” 2. 사이버펑크라는 반문화적 문제계 따라서 사이버네틱스 제어혁명이 일어난 당시, 선구적인 컴퓨터기술자들과 시민운동가들은 신기술에 대한 엄청난 우려와 낭만주의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행동주의를 선포했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들어갔는데, 왜 소수의 거대기업들이 그 권리를 독점하는가?’였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저 그런 타자기나 생산하던 IBM, 뜨내기 대학생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벼락부자가 된 것은 정부에서 주어진 특혜와 넘쳐나는 세금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자아내는 새로운 세계를 자본주의의 공간이 아닌,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통계(commons)로 만들기 위해서는 신기술들을 널리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기업과 국방성이 독점한 컴퓨터·인터넷을 만인이 조건 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공공재화 하는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공통의 네트워크는 이러한 이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확장시키는 정신적 통로들인 간-네트워크(inter-network), 인터넷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급진적인 정보기술 사상가인 존 페리 발로우는 199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공리주의이념을 월드와이드웹에 적용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종, 경제, 군사, 지역에 따른 특권과 편견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침묵과 동조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신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 현실의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관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는 물질이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휴머니티의 모든 감정과 표현이 연속적인 전체의 부분이며 비트의 전 지구적인 대화이다…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 존 페리 발로우,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1996) 사이버스페이스를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공간으로 상상하던 시기, 깁슨과 발로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대안적인 세계가 평등과 해방의 공동체로 건설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들의 기대처럼 초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환대와 존중이 공통윤리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과 참여가 꽃피우는 영토로 거듭났다. 개인홈페이지와 정보공유가 미덕이던 초창기 PC통신과 웹 1.0 시대는 실제로 그랬다. 누구나 익명 게시판에서 애정이 듬뿍 담긴 글과 답변을 주고받고, 선망하는 마음으로 채팅방에서 타인을 기다리며 서로 연결되는 순간을 꿈꾸던 그런 때가 있었다. 비록 오늘날 인터넷은 분노와 언설, 비아냥과 혐오로 점철되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핵티비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은 ‘물질이 아닌, 정신만이 존재하는’ 이 신세계에 새로운 문화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사회관계들(인종, 젠더, 지역, 세대 등)에 기반한 구 문화는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광대한 성간을 채워 넣기 시작한 것은 지배질서 문화가 아닌 반문화(counter culture)였다. 배타적 소유와 일방적 상품 생산-소비문화가 아니라 공유와 연대의 문화를 창조할 당위가 요청됐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임금노동, 인종주의로부터 인류의 정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반문화. 선택된 시민들만의 교양에 반대하는 재즈와 록음악,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힙합·레게, 부르주아의 패션을 비웃는 노동계급의 데님패션,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뉴에이지와 히피이즘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구의 합리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제국주의 전쟁과 범국가적 폭력, 홀로코스트, 주기마다 반복되는 경제대공황, 빈곤, 항구적 실업이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반문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이버-펑크’는 이와 같은 테크노 진보주의와 반문화 시대정신이라는 두 역사적 실타래가 엮이면서 등장한 문제계라 할 수 있다. 야심차게 장르명을 제목으로 차용한 〈사이버펑크 2077〉은 깁슨의 『뉴로맨서』를 필두로 해서 닐 스티븐슨의 『스노크래시』, 브루스 스털링의 『스키즈 매트릭스』, 영화 〈블레이드러너〉와 〈트론〉, 〈매트릭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와 〈아키라〉가 수놓은 사이버펑크의 별자리들을 하나의 은하계로 집대성한 게임이다. 〈2077〉은 그간 우리가 목겨해온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살풍경과 반문화적 열광에 대한 모든 노스탤지어가 망라되어 있다. 〈2077〉은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적 시공간을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어떤 유포리즘의 상상력이 결부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1. 오딧세이적 활극의 간-경계 시공간 〈2077〉은 세 가지의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스트릿 키드, 노마드, 기업하수인이 그것이다. 이 배경 설정은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19세기 대중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거리 부랑아의 SF적 재매개화라는 문제를 던진다. 거리를 비참하게 떠도는 부랑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해킹)을 무기삼아, 뒷골목 정보거래와 갱들과의 경쟁에서 성장해온 인물군상이다. 크게 한탕 해서 성공을 꿈꾸는 얼치기 현상금사냥꾼이 거대 기술기업-권력의 음모와 연루되어 고난을 맞이하는 구도다. 이는 『뉴로맨서』 이후 사이버펑크가 하나의 장르문법으로 구축해 온 서사에 조응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와 몰리가 거의 동일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이 설정은 〈공각기동대〉의 모토코와 바토로 차용되었으며, 『스노크래시』에서는 히로와 와이티라는 인물로 반복해서 나타난다. 일본도를 쓰는 한국계 피자배달부인 히로와 스케이트 배달부인 와이티는 메타버스(사이버스페이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지만 요즘엔 PVE나 NFT로 돈벼락을 맞을 수 있다며 온갖 사기가 판치는 그 메타버스가 맞다)에서는 잘 나가는 해커로, 유행하는 사이버 약물 ‘스노크래시’를 추적하는 의뢰를 맡고 그 과정에서 해커 갱단-거대기업의 권력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뉴로맨서』의 주인공 케이스는 한때 이름을 날렸던 사이버스페이스 카우보이(해커)였지만, 의뢰인의 정보를 빼돌린 댓가로 독극물 주사를 맞아 몰락한 인물이다. 케이스는 수수께끼의 인물 아미티지로부터 거대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센스/넷’에 침투해 전설적인 카우보이의 영혼이 복제된 데이터 ROM을 빼내면 대가로 신경복원술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고, 미녀 카우보이 ‘몰리’와 함께 침투극에 발을 내딛는다. ROM은 카우보이의 침입을 차단하는 방벽 ‘아이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블랙아이스’에 침투했다가 죽음을 당한 전설적인 카우보이 ‘딕시-플래트론’의 인격이 담겨진 데이터 집합체이다. 〈2077〉의 현상금사냥꾼 주인공 V와 사고로 그의 인격에 빙의되는 전설의 현상금사냥꾼 조니 실버핸드, 그리고 픽서의 영혼을 가두는 사이버감옥 ‘미코시’와 ‘소울킬러’ 흑막인 거대 군벌기업 아라사카는 사이버펑크의 문법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오딧세이적 활극을 연출한다. 그렇다면 왜 ‘활극’인가? 활극은 탈영토적이고, 대안적인 상상으로 재구축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험담이다. 물리적 현실의 제약이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국경과 민족을 넘나들며 초월적인 모험을 펼치는 시공간으로서 활극은 하나의 공통계이다. 활극은 기존의 법이나 사회계약이 작동하지 않고, 자유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정의와 공동선이 우선시되는 장소다. 무협의 ‘강호’, 웨스턴의 ‘황야’, 스페이스오페라의 ‘우주’는 이러한 활극 공간의 무정부성과 자유를 펼치는 무대다. 국경과 민족, 인종과 성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활극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웨스턴의 문법은 다양한 지리적 맥락에 따라 새로 번역되고 재조립된다. 한국의 만주웨스턴은 〈쇠사슬을 끊어라〉(197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등에서 보듯이 ‘황야’를 미국 서부가 아닌 만주로 옮겨놓는다(마찬가지로 커리웨스턴, 스파게티웨스턴, 스시웨스턴 등 각 지역마다 웨스턴을 차용한다). 김용의 무협소설에서 강조되는 ‘강호’에는 한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한민족까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넘나드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우주는 인간과 다양한 외계인 종족들이 만나고 협상하는 광활한 공통 공간으로서, 문화다양성이 자리잡은 대안세계에 대한 상상적 메타포가 도입된다. 요컨대 해안선과 산맥을 넘어 비물질의 신대륙을 건설한 사이버스페이스를 재현하는 문제로서 활극만큼 적절한 형식은 없을 것이다. 사이버펑크의 디스토피아적 도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활극은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의 이념을 역설적으로 재현하는 안티테제적 서사다. 〈2077〉의 나이트시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모험담은 사이버펑크의 활극을 고스란히 전유하는 동시에, 점점 악화되고 있는 자유와 기술 기축사회의 빅브라더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훌륭한 장치로 작동한다. 3.2. Turn on, Tune in, Drop out! 사이키델릭의 반자본주의적 시공간 〈2077〉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화려했던 사이버펑크의 반문화 흔적들이 사려 깊게 재현된다는 데에 있다. 선글라스와 가죽패션, 할리데이비슨과 메탈음악, 모히칸머리와 LSD, 프리섹스, 유체이탈과 화끈한 총격전, 일본도를 쓰는 테크노-사무라이, 말끝마다 은어와 욕설을 붙이는 쿨한 길거리 언어, 사랑 한 큰 술까지… 조니 씨발핸드와 나이트시티는 사이버펑크의 모든 문법들이 통하는 교과서 자체다. 일본도를 등에 맨 채, 마음에 맞는 라디오채널을 골라 들으며 유유자적 바이크를 타고 도시를 질주하는 경험은 다른 어떤 사이버펑크들보다 유의미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브레인댄스’ 라는 게임 속 영상기록매체(사실상 『멋진 신세계』의 촉감영화의 오마주인)에 들어가 재현을 만지고 조작하는 경험은 디지털 게임만의 고유한 매체성인 능동적 탐색과 조형행위를 십분 활용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제작사가 거창하게 광고했던 것과는 달리 한정적인 시퀀스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브레인댄스, 블랙월(현상금사냥꾼들을 막는 사이버 방벽) 너머의 초월적 이계에 대한 갈망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2077〉은 여타의 사이버펑크가 그러하듯 이 대안적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다. 〈공각기동대〉의 네트와 2501, 〈매트릭스〉의 매트릭스와 요원이 그렇듯 〈2077〉 또한 물질/관념, 육체/정신이 탈주하는 이데아로서 ‘사이버스페이스’를 묘사한다. 여기에서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및 사회적 제약도 한계로 작용하지 않는다. 신체는 죽었지만 영혼이 살아남아 사이버스페이스의 지성체가 된 넷러너 알트 커닝햄은 대표적인 알레고리다. 니체는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라고 했지만,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대탈주가 가능해진다. 1966년, 히피들의 성자이자 반문화의 선구자였던 티모시 리어리는 “전원을 켜고, 조율하고, 이탈하라!(turn on, tune in, drop out!)”라고 선동했다. 서구사회 전역에서 발발한 68혁명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는 수세기간 이어진 합리적 이성 중심 세계관에 신물이 난 터였다. 그 산물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계속된 경제공황과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로 파산을 선고받았다. 반대편 진영의 소련과 중국도 전체주의 감시국가로 변모하던 중이었다. 전 지구적 노동착취와 식민지 수탈, 감시국가, 전쟁에 사람들은 더 이상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지적이고 무능한 인간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혁파하길 열망했다. 이 열망을 동력삼아 다양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여성해방, 생태주의, 탈성장, 노동거부, 마을공동체, DIY, 프리섹스 등이 주요 골자였는데 이는 앙시앙 레짐(구 체계)의 사고방식과 전부 단절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즉 냉철한 이성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감성을 해방시켜 물질의 굴레로부터 이탈하는 영성혁명이 새 방법으로 대두된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요가를 배우고 인도와 중국, 터키에서 내면을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다(한국은 90-2000년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전통 직물을 입고, 밥 말리의 드레드헤어를 백인들도 따라한다. 이른바 ‘정신줄을 놓은 채 몽상과 꿈의 원천의식을 좆는’ 사이키델릭은 리어리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LSD나 마리화나의 환각을 통해 더욱 이상적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반문화를 추종하던 청년들과 이상주의자들은 거리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된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주 52시간 노동, 보편적 복지, 차별금지법, 지속가능경제 등은 이 시대 영성혁명의 맹아에서 발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공고한 노동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근면성실하게 노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아낌없이 쓰는 소비사회의 레짐은 이들 반문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부는 즉각 법을 입안시켜 LSD와 환각제를 불법으로 규제하고(한국에서 마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미디어는 내면을 좆는 사람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사회 탓만 하는 싸이코들, 성스러운 노동을 거부하는 이교도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반문화의 옹호자들은 이런 사회적 낙인을 비웃고 뒤틀었다. 이들은 구체제가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그 ‘펑크’가 되길 스스로 택했다. 외모를 괴이하게 꾸미고, 메탈 밴드를 결성하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고발하는 가사를 욕설처럼 내뱉으며, 튜닝한 오토바이로 도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되기를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사이버펑크는 반체제적 사이키델릭의 이념적 파편들이 장르의 문법 속에서 재결정화된 문장들인 동시에, 노동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이 ‘힙하게’ 재현되는 대중문화 장소이기도 하다. 메탈 밴드 ‘사무라이’를 이끌며 군벌 기업들의 폭정을 비판하던 조니 실버핸드가 아라사카로 쳐들어가 화끈한 파장을 일으키고, V에 탑승해 반문화의 환등도시 나이트시티를 거니는 플레이경험에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이트시티는 사이키델릭의 어둡지만 섹시한, 좌절된 이상향들이 펼쳐지는 그런 시공간이다. 3.3. Becoming with: 기술적 탈신체화의 시공간 자유로운 외형 커스터마이징과 신체개조 시스템, 등장인물들의 개성 넘치는 기계신체 구현들은 〈2077〉의 탈신체화된 마음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플레이어는 남성/여성의 외형과 성기를 교차 선택해서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젠더와 신체의 횡단을 시스템에서 구현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에 따라 달라지는 서사 상호작용 및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크게 네 명의 인물들과 연애를 할 수 있는 분기들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플레이어가 남성인 경우 게이 인 ‘캐리’와 여성 조력자 ‘팬앰’과 로맨스를 진행시킬 수 있으며, 여성인 경우 히스패닉 레즈비언인 ‘주디’와 남성 마초 ‘리버’와 연애를 선택할 수 있다. 남/녀라는 생물학적 성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경로들을 플레이어가 만들어갈 수 있으며, ‘탈 신체화’의 기술적 마법을 조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개발자들의 선견지명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강박때문에 억지로 끼워 넣은 설정이 아니라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다각적으로 이해했다는 징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질계의 질서가 해체되는 사이버펑크에서 신체는 더 이상 제약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무엇인가 될 수 있는 ‘becoming with ~’의 계기가 된다. 물질과 신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리퍼닥(사이보그 외과의)에게 인공 인지기관과 신체부위를 시술받으니, 더 이상 신체의 물리적 강도나 유전된 외형이라는 선험성이 무의미해진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인 마음의 신체 또한 변화한다. 사이버펑크에서는 여성을 얕잡아본다거나 인종에 편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적이다. 메레디스, 레지나, 로그, 다코타 스미스 같이 카리스마 넘치고 위험한 기계신체 여성들이 즐비한 나이트시티에서 그/녀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반면 미스티나 마마 웰즈, 이블린 같은 전통적인 성향의 여성들도 존재한다. 교조주의적 정체성 정치를 우회해 탈신체화된 판타지를 적절한 균형 속에서 실현하고 있기에, 〈2077〉은 사이버펑크의 장르적 유연성을 잘 전유했다 볼 수 있다. 포스트휴먼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1985년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다.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해러웨이 또한 사이버네틱스 과학기술이 인간 정신의 진보와 공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사이보그’는 신체의 한계에서 탈코드화되는 상생의 미래에 대한 고고학적 은유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외형과 물리적 차이, 성역할에 따른 사회권력의 관계망은 유사성의 원리로부터 기인한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생물학은 외형과 진화의 유사 정도에 따라 세세한 분류학을 만들어냈다. 개과, 고양이과, 파충류, 포유류 등의 분류는 유사성과 더불어 차이 또한 만들어낸다. 백인과는 다른 흑인, 남성과는 다른 여성, 아리아인과는 다른 하류인종, 유럽인과는 다른 아시아인, 위대한 한족과 야마토민족과 구분되는 야만족 등… 이분법에 기반해서 사회적 권력(너를 차별할 수 있는 나)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차이와 호혜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래·고양이와 협력하는 인간, 아시아인과 흑인 친구, 서로 협조하는 LGBT와 이성애자들, 서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남성과 여성 등. 주어진 신체의 날인으로부터 벗어나는 ‘탈 신체화’의 순간에야 차이를 넘어서서 ‘다른 누군가가 되어 함께하는 경험, 즉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을 상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병폐와 파괴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별의 상상을 연결하는 강력한 은유(사이보그)가 필요하다. 사이보그가 된다는 것, ‘사이버 펑크’의 탈 신체적 사회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름’을 넘어서 연대하는 경험이다. 인간, 개, 고양이 뿐 아니라 바이러스, 인공지능, 퇴비, 곤충, 유전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객체들과 반려종이 될 준비가 되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다. 기술은 미래에 그것을 가능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사이보그들이 활극을 펼치는 무정부적 시공간, 사이버펑크는 그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 된다. 4. 극단의 시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고학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NPC는 몇 안되고, 엄청난 고층 빌딩들이 늘어서 있지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처럼 물리적 자유의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사이버펑크의 팬이 아니라면 메인서사 진행과 큰 상관관계가 없는 대부분의 사이드퀘스트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버그는 화룡점정을 찍으며, 갑자기 영향력을 잃는 캐릭터들(대체 메레디스는 V를 불러내 질펀하게 즐긴 다음 어디로 사라진 걸까?), 서사 진행을 위해 소모되는 팩션(부두보이즈는 블랙월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가?) 등 미숙한 게이밍 설계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77〉은 사이버펑크 장르를 여러 방면에서 집대성한 정점으로 추켜세우기 아까움이 없는 작품이다. 사이버펑크가 제기하는 반문화, 탈신체화, 초월이라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쌓아올린 점, 그리고 각 주제들이 조화롭게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들과 조응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히 오늘날처럼 극단적인 분열과 적대가 판치는 하수상한 시대, 철로에서 이탈하지 않고 새롭게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뉴 클래식의 정류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사이보그 그 이후는 무엇이 도래할까? 인간 사회의 진보와 자유를 꿈꿨던 초창기 사이버펑크의 기획은 오늘날 종언을 고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인터넷을 대안적인 공간이라거나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의 장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 ‘사이버 공간’의 해프닝이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은 더 이상 공통계(commons)도 아니다. 카피레프트도, 자유소프트웨어 운동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의 빈 자리를 꿰찬 것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전지구에서 납세를 회피하며, 고용은 거의 하지 않는 다국적 IT 자본들. 어떻게 보면 〈2077〉과 같은 사이버펑크가 다시 귀환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2077〉의 멀티 엔딩 중 하나인 ‘악마’ 엔딩에는 거대기업 ‘아라사카에 완전히 항복하기’라는 선택지가 나온다. 말 그대로 그토록 죽어라 싸웠던 군벌독재 기업 아라사카에 백기투항하고, 생존을 위해 정신을 디지털 감옥인 미코시로 전송해 영원한 사이버 유령이 되어버리는 결말이다.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떻게 그때처럼 다시금 반문화를 일으키고 자유를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다만 그 발자국들이 만들어낸 길들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 순간 샛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77〉이 제시한 사이버펑크라는 문제계는, 오래된 스토리텔링과 미래지향적 매체기술을 버무려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이 도래할 우리의 미래에 다시금 묵시록적 개연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 Back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18 GG Vol. 24. 6. 10.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그런데 <페르소나3>는 여기에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커뮤 시스템’을 추가했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얼마나 발전시켜 놓았는지에 따라 악마 개념을 대신한 페르소나의 성능에 더해 일부 스토리 라인에도 영향을 주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페르소나 3>에선 던전과 전투만큼이나 일상 파트에서의 스케쥴 관리가 중요해졌다. 방과 후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가 던전-전투의 성과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게임 중에 ‘오늘은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할 때에는 단지 선택지를 고르는 것임에도 묘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반면 던전과 그 안에서의 전투는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결국 게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만일 게임이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할까’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하면, 던전RPG로서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이 게임 고유의 요소인 던전-전투와 연계된다는 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소나 3>는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 게임과 현실을 잇는 가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작인 <페르소나 4>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식이지만 일상의 재현에 보다 무게를 둔 느낌이다. 덕분에 고교 시절 친구들과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대리 체험하는 비중이 커졌다. 즐겁고도 그리운 느낌이 게임 전반을 지배한다. 3편에서 ‘타르타로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일직선 구조의 던전도 <페르소나 4>에서는 캐릭터별 특징에 맞는 던전이 스테이지별로 따로 구현되었는데, 이런 구조는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섀도’와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페르소나’의 개념도 조금 달라졌는데, 3편에선 단순히 소질과 각성의 문제였다면 <페르소나 4>에선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인격의 갑옷’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각 등장 인물의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동료 캐릭터의 서사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다. <페르소나 5>는 3편과 4편을 합친 모양새다. 분위기는 4편의 아기자기함 보다는 3편의 염세에 가깝다. 그러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각각의 캐릭터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4편을 연상하게 된다. 던전 역시 일직선 구조의 ‘메멘토스’와 캐릭터의 내면과 연계된 ‘팰리스’가 병존하고 있다. 3편과 비교해 다소 간략화 된 느낌이었던 전투 파트는 5편에선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변수 역시 많아졌다. 섀도를 설득해 페르소나로 흡수하는 시스템은 심지어 3편 이전으로의 회귀다. 이런 점에서 보면 <페르소나 5>는 시리즈 전체를 종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관점을 스토리를 중심에 놓는 것으로 바꿔보면 더 흥미로운 대목이 드러난다. 사실 <페르소나 3>는 서사 구조만 놓고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볼만하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는 대형 섀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싸움의 목적을 오인하게 하는 ‘흑막’, 주인공과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의 본래 목적 달성 여부를 고민하는 강적, 인류의 집단적 바람이 원인이 된 종말과 같은 요소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다소 식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코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된 시기는 1995년 말에서 1996년 초까지다. <페르소나 3>는 2006년에 출시되었다. 이 10년의 간극에도 불구 <페르소나 3>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걸 스토리를 중심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의 성공은 버블붕괴로 인한 사회적 혼란 및 이와 맞물린 비관주의의 확산과 떼어 놓고 평할 수 없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서 혼란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자민당이 스캔들과 비리 등으로 정권을 잃었다가 사회당과의 연정 등을 통해 간신히 되찾으면서 55년 체제가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경제적으로는 버블 붕괴로 인한 주요 금융회사의 도산이나 부동산 주가 폭락 등 자산시장의 경색이 문제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한신 아와지 대지진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이 작품을 향한 절대적 지지에는 이 모든 사태가 빚어낸 혼란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소나 3>가 나온 2006년의 상황은 1990년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는 구호와 함께 등장해 비교적 안정적 정치 기반을 구축하면서 ‘개혁’ 담론을 주도했는데,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를 이상화 해 밀어 붙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은 ‘버블붕괴’라는 폐허를 뒤로 하고 불안 속에서도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한다는 느낌으로 나름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시점에, 일상의 평화에 젖어 오히려 종말을 바라는 인류, 이대로 세상의 종말을 평화롭게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시선에 비유한다면 ‘돌아보는 시선’이다. 분명 어떤 점에서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닥친 자신의 문제라는 절박함은 상대적으로 희박한 것이다. 이게 <페르소나 3>의 서사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느껴지는 이유다. <페르소나 3>에 투영된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돌아보는 시선’이라면, <페르소나 4>는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선이 보는 세계는 지극히 개인화 되어 있다. 세계의 위기는 주인공이 잠시 살고 있는 이나바시라는 시골 마을에 국한된다. 본편에서 숙적은 주인공을 돌봐주는 삼촌의 직장 동료이다. 심지어 <페르소나 4> 최대의 반전은 주인공에게 최초의 시련을 부여하는 ‘흑막’이 기껏해야 동네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위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게임을 해보면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설정들에 현재성이 실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페르소나 4>는 2008년 7월에 출시됐는데 시기적으로 3편의 출시일과(2006년 7월)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페르소나 4>는 3편과 동시대성을 공유하며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 3>과 <페르소나 4>는 비유하자면 같은 화자의 다른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서 화자는 버블 붕괴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을 현재로 삼고 있다. 현재 시점에 비관주의가 득세했던 과거를 모사하며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게 <페르소나 3>, 과거를 뒤로 하고 눈 앞의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게 <페르소나 4>다. 따라서 <페르소나 3>가 세계의 종말을 주인공의 자기 희생을 통해 막는 얘기일지라도, 그건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소중한 삶을 지키기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페르소나 3>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나 나온 <페르소나 5>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된다. <페르소나 5>는 3편이나 4편처럼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쓴 티가 역력하다. 예를 들면 <페르소나 5>에서의 ‘페르소나’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 ‘반역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서 각성한다. 주인공들은 마음의 괴도단을 구성해 유력한 개인들을 개심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기득권에 의해 반격을 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기 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에 굴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세계가 왜곡된 원인인 세상의 질서 그 자체와 맞서는 데까지 전진한다. 이를 통해 확인하게 된 진실은 대중의 무세계성(worldlessness)에 기반한 욕망이 한데 모여 통제를 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의사를 대리하는 신을 자처하는 존재로부터 세계가 실제 통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성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인공들은 이 거짓된 신에 맞서 또 다른 반역을 일으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여기서 게임 제작진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3편과 4편에 비하면 선동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페르소나 5>에서 반복되는, 이전에서 없었던 이러한 코드는 어디서 나온 걸까? <페르소나 4>이후의 현실엔 크게 세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 2009년 자민당이 다시 한 번 정권을 잃고 민주당이 집권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두 번째,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세 번째, 2012년 아베 신조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해 다시 자민당 집권기가 열렸다. 아베 신조 정권은 1차 집권기(2006년)에 달성하지 못한 과제를 뒤늦게라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는 인상을 남기며 이런 저런 우파 지향의 의제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이른바 안보법제 논란으로 국회 주변에 12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일본 사회 및 시민운동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당시 언론은 1960년 안보투쟁 이래의 55년만의 최대 규모 운동으로 이 사안을 다뤘다. 이것이 <페르소나 5> 발매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다들 반역을 외치는 <페르소나 5> 특유의 분위기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반영한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또다시 변화되었다. 아베 신조의 장기 집권은 더 이상 없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아베 신조와 같은 강압적이고 일극지향적인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지지율은 저조하지만 원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탄탄한 편이다. 일본 사회의 우향우는 지속되고 있지만 안보법제 폐지 투쟁 때와 같은 격렬한 반대 운동은 없다. 밖의 상황은 심상찮지만 적어도 일본 내의 분위기를 보면 당분간은 이러한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 바로 그러한 때에, 과거 그러한 시기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기억한 <페르소나 3>가 <페르소나 3 리로드>로 되돌아왔다. <페르소나 3 리로드>는 <페르소나 3>를 거의 그대로 현대에 되풀이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페르소나 5>의 혁명은 실패했고, 우리는 그 이전으로 뒷걸음질쳐 온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현 시대에 맞는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려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누구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전히 새 작품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Tags: 일본, 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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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주)크래프톤이 후원하는 격월간 게임문화비평전문웹진. 게임비평 및 연구결과 수록. 게임문화 교양웹진, 게임 제너레이션 게임제너레이션은 한국 게임문화 담론을 선도해 나가고자 2021년 8월에 창간한 게임비평 전문 웹진입니다. 2개월에 한 번씩 GG는 동시대 디지털게임의 주요 주제를 선정해 다양한 시각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밝히고자 합니다. GG의 철학 GG는 오늘날 대중문화에서 디지털게임이 차지하는 영향력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디지털게임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게임을 하는 이도 안하는 이도 게임으로부터 영향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게임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문화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GG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현대 대중문화담론이 처한 위기는 무거움과 가벼움 양 쪽 모두를 딛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깊은 논의들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으며, 널리 퍼지는 이야기들은 게임문화담론의 깊이를 품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GG는 '학술지보다 가볍게, 웹진보다 무겁게'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다 게임문화를 보다 무겁게 다루는 일이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한 독자와 필자를 찾아내고 담론장에 유통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GG를 만드는 사람들 척박한 게임문화담론을 개척하는 일에는 많은 인력과 자원, 시간이 들어갑니다. GG는 게임문화재단에서 제작을 맡고 있으며, 그 후원을 (주)크래프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크래프톤의 후원은 전적으로 후원에 머무르며, 웹진 제작과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GG는 많은 게임연구자들과 협업하며 게임문화담론의 생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국내외를 망라한 젊고 명망있는 게임연구자들, 게임의 문화적 비평에 의지를 가진 비평가들이 GG와 함께합니다. 더불어 새로운 필진의 발굴을 위해 GG는 매년 1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주최, 동시대의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자 노력중입니다. GG가 꿈꾸는 미래 한국은 게임문화에 있어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문화담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비단 한국어권에 머물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GG는 장기적으로 한국의 게임문화담론을 전세계와 공유하고자 하는 미래를 꿈꿉니다. 해외의 다양한 게임연구, 담론, 비평을 공유하고, 또 한국에서 생산된 논의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넘어 전세계와 함께 디지털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서의 GG를 우리는 상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