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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 Back 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17 GG Vol. 24. 4. 10.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 컴퓨터 – 디지털게임이라는 물적 기반과 콘텐츠 사이의 관계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는데 , 난수 random number 다 . 디지털 기술 기반의 컴퓨터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난수 생성이 불가능한 장치다 . 요즘은 듀얼코어 이상에서 몇 가지 방법으로 난수를 만드는 법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 애초에 주어진 데이터를 신속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기에서 외부 입력 없이 자체적으로 랜덤한 수를 뽑아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 하지만 그 컴퓨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에서 난수는 결정적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난수를 만들 수 없는 기계를 딛고 성립한 매체에서 난수가 필수요소에 가깝다는 점은 이 매체의 근본에 운과 확률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달리 정리해보면 , 결국 운과 확률로 만들어지는 게임의 흐름을 보조하기 위해 일련의 전자 연산장비가 도구로 활용된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 모든 디지털게임이 무작위의 결과물들만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최근의 이른바 AAA 급 게임에 이르면 영화의 작법을 따라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를 쭉 따라가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 이런 영역에서 디지털 주사위는 정해진 결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우연을 만드는 정도로 역할을 줄여나가는 추세다 . 하지만 우리가 이른바 ‘ 게임만의 독특한 재미 ’ 를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이 주사위의 힘이 개입한다 . ‘ 테트리스 ’ 에서 다음 블록이 예측되는 순간 , 이 게임은 상황대처가 아닌 암기력의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 액션 게임 등에서 확률로 표기된 치명타가 일정 타격 수마다 반복될 때 , ‘ 하스스톤 ’ 같은 카드게임 류에서 카드 덱이 랜덤이 아니라 순서를 지정할 수 있게 될 때 이들이 가진 재미는 사라진다 . 이런 맥락에서라면 주사위의 개입을 통해 다양해진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곧 플레이어의 플레이 행위가 된다 . 실재하는 우주와 세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가상공간 안에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 적어도 통제된 환경 안에서 디지털게임은 무작위 확률을 통해 상황을 ‘ 흩뜨러뜨린다 ’. 그리고 이를 정렬하고 재구성하여 주어진 과제를 클리어할 수 있을 만큼의 정돈을 만들어내는 것이 확률 개념을 상대할 때의 플레이가 갖는 역할이다 . 이 때 디지털 주사위가 만드는 확률의 역할은 ‘ 모르는 영역 ’ 의 창조다 . 확률을 통해 표현되는 디지털게임의 규칙들은 모두 ‘ 모름 ’ 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 테트리스에서 다음 블록이 무엇이 나올지 , ‘ 다크 소울 ’ 에서 보스가 다음 순간에 어떤 패턴으로 공격해 들어올지에 대해 디지털 주사위는 각 순간별로 플레이어에게 다음 순간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을 연출한다 . 디지털게임 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 늘어난 엔트로피를 줄여나가는 것이 플레이의 목적이 된다 . 온라인 네트워크가 보편화된 이후의 디지털게임에서는 이 엔트로피값의 증가에는 주사위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추가되는데 , 바로 플레이어다 . 싱글 플레이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맞상대하게 되는 대전형 멀티플레이의 순간에는 디지털 주사위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 모름 ’ 이 덧붙는다 . 상대가 어떤 패턴을 익숙하게 쓰는지 , 선호하는 캐릭터나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온라인 익명 매치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 이 때의 랜덤성은 아마도 매치메이킹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 어느 정도 게임 결과에 따라 매기는 랭킹에 의해 기대승률 50% 를 맞추는 보정이 이뤄진다고는 하지만 , 여전히 멀티플레이에서 내가 누구와 게임하게 될 지는 ‘ 모름 ’ 의 영역이다 . 이 랜덤한 매치메이킹의 효과는 랜덤을 애초부터 잘 만들 줄 모르는 디지털 연산장치의 확률 제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 모든 모르는 영역을 파훼하고자 하는 플레이어의 힘은 멀티플레이 영역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영원히 상대적인 극복의 굴레에 들어앉는다 . CPU 가 만들어내는 제한된 랜덤 상황은 결국 고정되어 있고 , 이는 어떻게든 파훼된다 . 수많은 게임 플레이 경험이 누적되며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계속 향상되지만 , 소프트웨어의 난이도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난이도 – 숙련도 경합에서 난이도의 제시가 상대방 플레이어라는 주사위보다 더한 경우의 수를 가진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 끝없이 향상되는 두 사람의 숙련도 덕택에 이 경합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순환의 고리를 돌게 된다 .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연산장치는 굳이 ‘ 모름 ’ 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일을 더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맞는다 . ‘ 모름 ’ 이라는 엔트로피를 기준으로 정리해 본다면 , 그래서 디지털 주사위는 사실 사람 혹은 사건이라는 실제로는 훨씬 더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매우 낮은 레벨에서 재현해 낼 뿐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 랜덤을 만들 줄 모르는 기계는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현실의 일부를 프로그래밍된 가상공간 안에 일부 재현할 뿐이다 . 다만 통제된 환경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작은 수준의 경우의 수는 오히려 그 엔트로피를 충분히 낮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 모름 ’ 이며 ,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이 ‘ 모름 ’ 에 도전할 가치가 충분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이른바 ‘ 공략 ’ 이라고 불리는 많은 패러텍스트들이 플레이와 동떨어지지 않은 맥락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다 . 게임 공략들은 게임 텍스트가 제시하는 ‘ 모름 ’ 의 상황에 펼쳐진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한 활동의 결과물들이다 . 어떤 이는 랜덤하게 떨어지는 아이템의 드랍률을 수집 , 분석해 최종적인 아이템 루팅 테이블을 만들고 이를 확률로 정리해 정례화한다 . 누군가는 주사위의 결과물에 다양한 수식적 치장을 가한 공격 / 방어의 메커니즘을 분석해 수식의 구조를 밝히고 , 이를 통해 최적의 공략 루트를 도식화한다 .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방에 분산된 채 높은 엔트로피를 지니고 있던 게임의 주사위가 만들어낸 세계는 공략이라는 정리된 장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정리된다 . 같은 맥락은 디지털 주사위가 아닌 사람과의 플레이에서도 나타난다 . ‘ 리그 오브 레전드 ’ 의 랜덤 매칭이 갖던 높은 엔트로피는 op.gg 와 같은 전적 사이트를 통해 체계적으로 나의 상대나 아군이 어떤 전적과 승률을 가지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한 데이터로 가공되며 해소된다. 게임 텍스트 내부에서의 플레이와는 별개로 , 확률이 만들어내는 ‘ 모름 ’ 의 영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는 텍스트 밖에서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줄어든다 . 결국 , 디지털게임이 만들어내는 재미도 요약해 보면 1,000 피스 퍼즐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완성된 그림을 무질서한 1 천개의 조각으로 쪼갠 뒤 , 이를 다시 맞추는 일에 재미라는 의미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 우리는 확률 기계가 제한적으로 생성해 낸 수많은 경우의 수 사이를 헤매며 다시금 이를 정리하고픈 욕망에 휩싸인다 . 게임 텍스트 안에서는 클리어와 엔딩 도달이라는 결과로 , 게임 텍스트 밖에서는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연산장치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의 데이터 엔트로피가 분명 정리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흥분하며 또 도전한다 . 설령 이 기계가 근본적으로 랜덤값을 만들기 어려운 장치라 해도 , 마치 화투장 48 개를 가지고 흩어놓은 뒤 다시 맞추는 패 떼기 놀이와 같이 ,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은 엔트로피 놀이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 아니 , 오히려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윤상의 노래 ‘ 달리기 ’ 에서처럼 ,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흥분하며 게임에 달려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Editor's View] 시간 속의 게임, 게임 속의 시간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존재들이 살아온 시간의 시간의 누적을 기록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 누적 속에서 놀이는 사실 오랫동안 잉여시간 취급을 받아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시간 속의 게임, 게임 속의 시간 21 GG Vol. 24. 12. 10.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존재들이 살아온 시간의 시간의 누적을 기록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 누적 속에서 놀이는 사실 오랫동안 잉여시간 취급을 받아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들어 놀이에 들어가는 많은 시간들은 더 이상 잉여에 머물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놀이는 그 자체로 돈이 드는 일이 되었고, 놀이를 만들어내는 기업은 상품으로서의 놀이를 팔아 이윤을 얻습니다. 생산의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21세기의 놀이이고, 아마도 그 대표적인 도구가 디지털게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간 속에서 게임은 이제 꽤나 공식적인 시간의 통제 안에 놓입니다. 게임하는 시간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모습들은 PC방과 온라인게임사의 정액제 요금, 셧다운제, 일정 시간동안 플레이하면 경고문이 뜨는 것과 같은 직접적 제도 뿐 아니라 게이머들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내재적 규율로서도 작동합니다. 게임 시간은 어떤 이들에겐 생산의 잉여시간이 아니라 생산시간과 경합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죠. 시간 속의 게임만이 게임과 시간의 전부 또한 아닙니다. 우리는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시간도 목도합니다. 하드웨어의 한계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시간 지연, 누적된 플레이시간이 계량화되는 아이템이라는 개념의 발흥은 이제 게임과 시간이 대단히 복잡한 방식으로 얽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GG 21호는 게임과 시간이 얽히는 여러 모습들의 일부를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물리량으로서일 수도 있고, 다분히 철학적인 개념일 수도 있고, 혹은 산업화와 표준화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객관적 기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게임과 시간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디지털게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다시금 체감합니다. GG 21호가 발행되는 2024년 12월의 시간은 사회적으로는 좀더 급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빠르게 째깍거리는 엄혹한 시간을 빨리 벗어나 따뜻하고 행복한 연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저우즈창, 周志强

    저우즈창, 周志强 저우즈창, 周志强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적 리얼리즘과 리얼리즘적 ‘게임’ - 상징계·상상계·실제계의 진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이 바로 여기 있다. 현실의 논리를 ‘게임 플레이’로 ‘번역’해 이데올로기적 설득에서 현실의 핵심을 빼앗는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비밀은 비디오 게임의 검열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버튼 읽기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 Back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02 GG Vol. 21. 8. 10. - 편집자 주: 이 글은 해외에서 투고한 원고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 병기하였습니다.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코모도어64(Commodore 64)로, 1980년대의 인기가 1990년대에도 이어지면서 그 이름이 사실상 핀란드의 게임세대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코모도어 64는 다른 유형의 디지털 플레이와 프로그래밍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관문과 같은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1997년 한국을 크게 덮쳤던 것처럼, 핀란드도 1990년에서 1993년 사이에 심각한 경제적 불황을 겪었다. 이후 컴퓨터와 고급 (가정용)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투자가 이어지는데, 노키아 휴대폰이 부상하는 게 바로 이 시기다. 가정용 컴퓨터 또한 널리 보급되었는데, 핀란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집에서 자신의 PC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지극히 낮은 인구 밀도 때문일 것이다(핀란드 인구는 5백만명이지만 지리적 크기는 한반도의 3배 이상이다). 이와 같은 문화적 맥락을 통해 알 수 있는 핀란드 레트로게임문화의 지역적 특색은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핀란드의 오랜 게임 개발의 역사 그리고 PC 중심적 플레이의 역사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지역 취미가들이 게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게임과 컴퓨터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지리적 특성상 공간적 구조가 상대적으로 넓은데, 이는 사람들이 과거의 테크놀로지를 수집, 저장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이와 같은 게임플레이의 기억에 대한 아카이빙과 수집, 그리고 (물리적, 가상적) 공유는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핵심적인 측면 중 하나다. 둘째, 핀란드의 컴퓨터게임 개발 및 플레이의 역사에 주된 영향을 끼친 플랫폼은 PC지만, 1990년대 및 2000년대 초반에 청소년기를 보낸 많은 사람들이 PC로 넘어가기 전(핀란드의 인구가 적기 때문에 PC 인터페이스는 결코 핀란드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그래서 PC를 사용하려면 먼저 영어에 능숙해져야 한다) 보다 어렸을 적에 콘솔을 소유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래 거의 모든 콘솔들이 핀란드에 출시되었고, 오늘날 많은 성인들은 자신이 성장기에 플레이했던 콘솔을 가지고 레트로 게임을 즐기면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재현하기를 즐긴다. 셋째,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이 2000년대 초반 노키아의 모바일 테크놀로지 붐과 함께 갈수록 많은 인기를 모으면서, 핀란드의 아케이드 게임 문화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게임 아케이드는 핀란드의 도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오락 문화였지만 사람들이 가정 내 게임 인프라에 보다 많이 투자하고 옮겨가면서 아케이드 게임을 향한 관심이 떨어졌고 업계의 수익성은 크게 하락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아케이드 경험을 되살릴 수 있는 레트로 게임공간으로서 게임 아케이드를 방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돌이켜볼 때, 핀란드의 레트로 게임문화가 여러 시대를 횡단하며 등장했던 특정 콘솔들과 다양한 개인용 컴퓨터 등 넓은 범주를 아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레트로게임 집단과 기업가들, 심지어는 박물관마저도 레트로 게임과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다. 레트로 게이머를 다루는 특집기사들, 레트로 게임을 수용하면서 즐기는 집단이나 그것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소셜미디어에서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다음은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 집단의 답변을 통해 그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먼저 템페레에 위치한 핀란드 게임박물관에서 일하는 니클라스 닐룬드(Niklas Nylund) 박사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이 박물관은 템페레시와 루프리키 매체 박물관(Media Museum Rupriikki), 사설 게임 박물관 펠리코네주니트(game collective Pelikonepeijoonit), 그리고 템페레 대학이 핀란드 게임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해 설립되었다. 2017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10만 유로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기부한 핀란드 게임열정가들에 힘 입어 게임 역사를 위한 공공의 아카이브 시설로 구축되었다. 이 곳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으로 지역주민과 방문객들 모두 게임문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닐룬드 박사에 따르면 핀란드 레트로게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개방성과 협업, 그리고 민주적 의사 결정에 있어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소규모 국가인 핀란드 특유의 대화하는 문화를 통해 상위 문화 유산 기관들이 처음부터 레트로 게이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다는 것이다(레트로 게이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닐룬드는 게임 보존에 관심이 있는 단체들이 핀란드 게임박물관 설립과 같은 프로젝트와 “게임 보존을 위한 토론회”를 함께 한 경험이 긍정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두번째 응답은 투르쿠 대학 ANC(Academic Nintendo Club)의 회장인 이에로 피칼라(Eero Pihkala)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ANC는 1980년대의 콘솔부터 e스포츠에 이르는 다양한 레트로 게임 여가활동을 제공하는 단체다. 이러한 유형의 클럽은 - 학술적이든 비학술적이든 - 핀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콘솔이나 컴퓨터에서부터 특정 장르에 이르기까지 그 전문성과 형태에 있어 다양하다. ANC를 대표하는 피칼라는 “핀란드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서로 상이한 여러 세대들이 - 최신 AAA 게임 시장을 추종하는 대신 - 동등하게 게임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게임문화의 역사를 보존하고 그 역사 내의 다양성의 유산을 찬양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레트로 게임이 “유동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핀란드인들에게 있어서는 MS-DOS와 PC 기반의 게임 활동이 핵심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는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대개 일본산) 아케이드 게임의 수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헬싱키 소재의 아케이드 홀 스고이(Sugoi)의 소유주인 마르쿠스 아우티오(Markus Autio)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는 노스탤지어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청소년기에 접했던 게임을 다시 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러한 게임이 반드시 직접 플레이했던 것일 필요도 없다. 그저 쇼핑센터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보았던 게임에 대해 남은 인상일 뿐이어도 상관 없다. 또는 당시 비디오게임 잡지에서 읽었던 게임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레트로 게임문화에 있어 핵심은 어떤 식으로든 그 게임에 친근감을 느낌으로써 노스탤지어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것”이다. 동일한 연장선에서 노스탤지어적 아케이드들이 현재 핀란드의 도시 풍경에 되돌아오면서 취미가들을 위한 (종종 사교를 위한) 레트로 게임용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레트로 게임문화의 세 가지 특성에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독특한 특성을 추가할 수 있겠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핀란드에서는 PC용 DIY 게임(대개 MS-DOS용 게임) 만들기 붐이 일었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대개 블랙코메디 등 풍자적이고 패러디 같은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게임들은 대체로 비영리적이었고 그 개발자들도 대개 익명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셰어웨어식 유통은 디스크 교환이나 게시판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활동들은 핀란드 게임 역사의 작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데, 레트로 게이머들이 그러한 게임들의 플레이를 실시간 방송으로 내보내거나 온라인 비디오를 만들어 소환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 가운데 다수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이거나 공격적인 콘텐츠를 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그와 같은 레트로 게임 활동을 알리는 것이 그 발생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것들이 후기의 문화적 발전에 끼친 영향 또한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Retrogaming in Finland Finland has a long and established history of computer game development, starting from the late 1970s and commercializing in the 1980s. The first esports tournament – which was not called “esport” at the time but “Finnish Computer Game Championships” – was held already in 1983, and gaming quickly evolved into one of the key leisure activities of adolescents by the early 1990s. The Commodore 64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is development, as its popularity in the 1980s and still in the 1990s became synonymous with the Finnish gaming generation as a gateway to other types of digital play and programming. Just as the Asian financial crisis hit Korea in 1997, Finland suffered a deep financial depression between 1990 and 1993, which was soon followed by further interest and investing in computers and high-class (home) technology, especially with the rise of Nokia mobile phones. Unlike in many other countries, home computers became standard household products across the population and people still play mostly at home with their own PCs – perhaps due to the scarce density of the population (Finland has only 5M people but is geographically more than three times larger than Korea). This cultural context has marked the Finnish retrogaming scene with local characteristics, which can be divided into three distinct domains. First, due to the long history of Finnish game making and PC driven play, a relatively large number of the local hobbyists are curious about game history and many people have personal game and computer collections. The geographic nature of Finland supports relatively spacious architecture, thus allowing people to store legacy technologies. This archiving, collecting, and sharing (physical and digital) gaming memories is one of the key aspects of Finnish retrogaming. Second, despite the PC having had a major impact on the history of Finnish computer game development and play, many adolescents of the 1990s and early 2000s had game consoles in their childhood years before moving to use PCs (PC interfaces were never translated to Finnish due to the small population so using one required fluent in English). Almost all international consoles have been released in Finland since the late 1980s and today many adults like to revisit their childhood by retrogaming with the consoles that formed a part of their childhood. Third, due to the increasing boom of home computers (and consoles) in the early 2000s with the Nokia mobile technology boom, the Finnish arcade gaming culture vanished almost entirely. Until the late 1990s, gaming arcades were still a common particle of Finnish cities and entertainment culture, but as people moved to invest (even) more on their home gaming infrastructures, the interest toward arcade games dropped and the business became unprofitable. Today, many people visit arcades as retro game spaces to relive former arcade experiences. Reflecting upon this historical background, retrogaming in Finland ranges from specific consoles to various personal computers across different decades. There are different active retrogaming groups, entrepreneurs and even museums set around retrogaming and hardware. It is not uncommon to stumble upon a news feature about retro gamers or various social media groups embracing or seeking to profit from retro games. Below, we elaborate on this history via three parties from whom we asked one simple question: What is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Our first response comes from PhD Niklas Nylund who works for the Finnish Game Museum in the city of Tampere. The Finnish Game Museum is a collaboration between the city of Tampere, Media Museum Rupriikki, game collective Pelikonepeijoonit and the University of Tampere set to represent Finnish gaming culture and how it has developed over the years. The Museum was opened in 2017 and was crowdfunded by Finnish gaming enthusiasts who donated 100,000€ to establish a public archive of game history. It is a meeting place for the past and the present, offering low-threshold participation in gaming culture for both locals and visitors. According to Nylund,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is its openness, collaboration, and respect for other people in democratic decision making. Finland is a small country, and its conversation culture is open to an extent that high cultural heritage institutions were from the start interested in having a dialogue with retro gamers and learning from them (and vice versa). Nylund adds that experiences have been positive with parties interested in preserving games through projects such as the Finnish game museum and having a shared “round table of game preserving.” Our second response is credited to Eero Pihkala, the president of Academic Nintendo Club (ANC) in Turku University. ANC is a hobby group offering free-time retrogaming activities around old and new games ranging from the 1980s consoles to retro esports. These kinds of clubs, academic and non-academic, are common in Finland and differ in format as well as specialization from specific consoles and computers to genre-based groups. According to Pihkala, representing ANC,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is appreciating games equally from all different generations. That’s how we can preserve the history of gaming culture(s) and celebrate the legacy of diversity in it as opposed to chasing the latest trends in the AAA-market.” They also add that retrogaming is a “fluid concept,” but for the Finns the MS-DOS and PC-based gaming activities form its core. Finally, we talked to Markus Autio who is the owner of Sugoi, an arcade hall in Helsinki known for its collection of (primarily Japanese) arcade games from the 1990s to this day. In Autio’s view, “Finnish retrogaming is about nostalgia. People love to revisit games that they knew as kids or teens. And it doesn't even have to be a game they remember playing, but maybe something they just saw in some darkened corner of a mall, having left a lasting impression. Or maybe they read about it in a videogame magazine at the time. The key of this retrogaming is to be familiar with the game in one way or another, which sparks nostalgic interest.” Along these lines, nostalgic arcades are currently making a small comeback to the Finnish cityscapes and provide a space for (often social) retro game sessions for more and less active hobbyists. In addition to the above three domains of retrogaming, one more unique feature can be noted as an endnote. From the 1980s to late 1990s, a wave of DIY-games for the PCs (usually MS-DOS) emerged in Finland, often representing satiric and parodic themes with dark humor. These games were primarily nonprofit, and the designers were standardly left anonymous. Their shareware distribution occurred via traded disks and early bulletin board systems, ultimately forming a small piece of Finnish gaming history that retro gamers summon by playing them in live-streams and creating online videos of them. Many of these games include content that is intentionally provocative or hostile; however, instead of refusing to acknowledge their existence, informed retrogaming activities can help understanding their historical context of emergence and to shed further light on their influences on later cultural developments. Ville Malinen is a PhD Candidate at University of Jyväskylä. His research is focused o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F1 racing and motor esports. He has written several journalistic articles about gaming in Finnish magazines and newspapers, and is interested in the philosophical issues arising from simulation games. Veli-Matti Karhulahti is Senior Researcher at University of Jyväskylä and holds Adjunct Professorship in University of Turku. His research tackles gaming, play, and technology use in many ways, and he is the author of the book Esport Play: Anticipation, Attachment, and Addiction in Psycholudic Development (Bloomsbury,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유베스퀼라대학, 연구자) 벨리 마띠 카훌라티, Veli Matti-Kahulathi 유베스퀼라 대학교의 시니어 연구자이자 투르투 대학(University of Turku)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게임과 플레이,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최근 〈Esports Play: Anticipation, Attachment, and Addiction in Psycholudic Development(Bloomsbury, 2020〉 를 저술했다.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 Back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04 GG Vol. 22. 2. 10.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인간이 오감 중 시각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해서는 다른 장애 영역에 비해서도 그 논의가 더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90년대부터 시각장애인들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중반에는 컴퓨터가 지금보다 훨씬 고가의 물건이었고, 컴퓨터의 기본적인 사용법부터 따로 강사 선생님에게 배웠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화면에 출력되는 내용을 읽어 주는 기능을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운영 체제에 따라 그 이름과 기능은 달라져 왔지만 기본 틀은 같다. 다시 컴퓨터를 배우던 초등학교 당시로 돌아와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고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가르쳐 주신 간단한 게임이 내 인생 첫 게임이었다. 90년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했던 게임들을 생각해 보면 음성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기억력 테스트 게임이나 숫자를 맞춰서 판정하는 야구 게임, 청기 백기 게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외에 PC 통신을 다룰 줄 알던 사람들은 현재의 MMORPG 게임의 원형 중 하나가 되는 텍스트 머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는데,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비시각장애인들이 화려한 그래픽과 더 다양한 기능이 지원되는 다른 게임으로 떠나간 뒤에도 시각장애인들은 여전히 머드 게임을 활발히 즐기고 있다. 그 외에도 체스나 윷놀이, 트럼프 등 보드 게임이나 카드 게임을 PC로 이식한 게임들을 즐기기도 했는데, 오히려 윈도우즈 운영체제가 보편화되고, 모바일로 환경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게임을 시각장애인들이 즐기기에는 더더욱 어려워진 것이 안타깝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애플에서 자사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낭독 기능인 보이스오버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면서 시각장애인들도 스마트 시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모바일 게임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거의 없었다. 2010년대 이후에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오디오 게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소리를 듣고 적의 위치를 파악해 물리치는 대전 액션 게임이나 RPG부터 TCG 게임, 퍼즐 게임, 리듬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등 그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게임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외국 제작사에서 만드는 게임들이라 영어 정도만 지원할 뿐이라 플레이를 하다 보면 게임을 하고 있는지 듣기 평가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그 중에서도 PC 및 모바일에 익숙한 일부 사람들을 고객층으로 하다 보니 시장 규모가 작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임들은 대부분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디오 게임 외에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돌아보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텍스트 위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웹게임이나 일부 모바일 게임인데 이마저도 대부분 영어 게임들이다. 번역기 돌린 수준이라도 한국어 지원을 해 주는 게임마저도 드문 실정이다. 사실상 2022년 현재 한국어로 시각장애인이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현재 서버가 살아 있는 텍스트 머드 게임들을 합쳐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적으니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오디오 게임 등은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들은 게임보다도 당장의 생존에 더 밀접한 생존권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관련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2021년도에 국회에서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하태경 의원 "게임법에 장애인 접근성 향상 넣고 가이드라인 개발하자“ - 디스이즈게임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4/?n=123269 )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문제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게다가 최근 떠오르고 있는 메타버스 또한 게임의 방식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은 이미 생활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다양한 게임들을 거쳐 오며 시각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줄타기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앞서 시각장애인이 한국어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언급했는데, 거기서 ‘정식으로’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면 그 개수는 더더욱 줄어들게 된다. 정식으로 플레이를 할 수 없어 개인 개발자가 개발하는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활용하여 플레이하거나, 우연히 어느 정도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일부 기능은 화면 낭독 기능으로 제대로 접근조차 되지 않아 현금 결제를 하고도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는 오디오 게임들 중에서도 다른 유명 게임의 게임 방식 등을 거의 그대로 베껴 오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라도 명성만 들어 보았던 유명 게임을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게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강한 유혹이다. 또한 일부 게임의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플레이하다 보면 제작사 차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한 논의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적절한 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 강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게임 업계의 인식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물론 기술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게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뒤따라야 할 것은 인식의 변화이다.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소수이지만 그런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반지하게임즈에서 제작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서울 2033〉의 예를 들고 싶다. 〈서울 2033〉은 출시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일부 용감한 시각장애인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레이를 시도해 본 결과 관리해야 할 중요한 수치를 읽어 주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기본적인 플레이 자체는 가능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앱스토어에 리뷰를 남겼는데 제작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셔서 지금까지도 접근성 관련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지하게임즈의 다른 텍스트 게임에도 아이폰의 보이스오버와 안드로이드의 토크백 접근성이 반영되고 있다. 사운드도 없고, 글도 많은데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모바일 인디게임서울2033 - 스브스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30699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 관련 개발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2033〉은 텍스트 기반으로 선택지를 고르면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방식의 게임이다. 즉, 복잡한 조작이 필요 없다. 개발 엔진도 일반적인 게임 엔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보이스오버로 어설프게나마 플레이가 가능해 개발사에 건의라도 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건의에 응답해 준 것은 결국 개발사의 의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반지하게임즈에서 시각장애인이 무슨 게임이냐며 무시했다면 지속적인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플레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나 또한 공모전에 참여해 스토리 작가로 활동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은 완벽하지 않고,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종종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련 건의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꾸준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유저들 사이에서 〈서울 2033〉은 여전히 활발하게 플레이되고 있다. * 〈서울 2033〉에 적용된 보이스오버 접근성 시연 영상. 또 한 가지 사례로 XYRALITY에서 개발한 모바일 게임 〈성주와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주와 기사〉는 예전에 유명했던 웹게임인 〈부족전쟁〉과 비슷한 방식의 게임으로 자신의 성채를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평정해 나가는 게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저들과 동맹을 맺기도 하며 경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방식의 게임은 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 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거리를 제시하고, 좌표 개념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플레이가 가능하다. 〈성주와 기사〉의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2033〉과 같이 소설과 비슷한 형식의 스토리 중심 게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게임들도 발상을 조금만 전환한다면 충분히 시각장애인들도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좌표 기능을 도입하고, 주요 지점이나 NPC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임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 게임은 방식이 간단해 보이는데 버튼에 보이스오버로 접근만 되어도 플레이가 가능할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동원되는 온갖 꼼수들을 보고 있자면 편견을 깨고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기술 발전이 언제나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애인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 시대보다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너무나 빠른 기술 발전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약자들을 도태시키기도 한다. 무인 키오스크 앞에서 난감해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화려한 그래픽이 게임에 도입되기 이전, 텍스트 머드 게임이 주류이던 시절에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이 오히려 다른 비시각장애인 게이머들과 공감대를 더 많이 형성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슈퍼 컴퓨터 한 대보다 도로의 턱 높이를 낮추는 것이 휠체어를 탄 사람의 활동에는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 2033〉이나 〈성주와 기사〉 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는 명확하다. 시각장애인, 나아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그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장애인의 각종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 투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편견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 속 세계에는 편견도 제약도 없다. 어떤 역경이라도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넘어설 수 있는 난관일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아주 조금이지만 게임을 만드는 현장을 엿보면서 게임을 만든다는 일은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과 게임. 지금 당장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지지만, 게임을 만드는 분들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모인다면 언젠가 그 두 단어의 조합도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반지하게임즈 스토리 작가) 강신혜 게임에 관심이 많은 시각장애인입니다.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동시에 반지하게임즈의 게임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게임과 시신경제 (Necronomics)

    시신경제 (Necronomics)는 아킬레 음벰베 (Achille Mbembe)의 시신정치 (Necropolitics)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다. 시신정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의 생명정치 (Biopolitics)가 권력이 생명의 영역을 지배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동시대의 현실은 죽음을 단지 생명권력 (Biopower)을 위한 수단으로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 Back 게임과 시신경제 (Necronomics) 22 GG Vol. 25. 2. 10. * <엘든 링>의 대표적 룬 노가다 장소 시신경제 (Necronomics)는 아킬레 음벰베 (Achille Mbembe)의 시신정치 (Necropolitics)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다. 시신정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의 생명정치 (Biopolitics)가 권력이 생명의 영역을 지배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동시대의 현실은 죽음을 단지 생명권력 (Biopower)을 위한 수단으로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1] . 즉,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라면 제도적 폭력이나 전쟁이 발생시키는 죽음은 결과적으로 생명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하는 장치여야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죽음으로 권력이 이양되었고 따라서 생명보다도 죽음 그 자체의 극대화가 목표라는 것이 시신정치의 전망이다 [2] . 시신경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생명이 가치를 띠고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곧 재화가 되는 체계에 주목한다. 즉, 살아있는 인간의 목숨보다 죽은 뒤 그 신체의 교환 가치가 더욱 높게 매겨지는 현실인 것이다. 게임 속에서 시신경제는 이미 가장 보편적인 체계 중 하나로 기용되고 있다. 적과의 전투를 주 플레이 내용으로 삼는 액션 게임에서 적의 죽음은 경험치뿐만 아니라 화폐의 축적에도 계산된다. 우리는 흔히 ‘노가다 (farming)’라는 어휘로 불리는, 획득 화폐의 극대화를 위한 적 살해의 최적 효율 전략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보통 적 살해 자체가 금전의 획득을 보장하지는 않고 시체의 인벤토리를 뒤져 적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금품을 노획하거나 장비를 장물로 팔아넘기는 행위를 통해 부차적으로 경제 활동을 일삼긴 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프롬소프트웨어 (FromSoftware)의 게임들과 같은 경우엔 추가적 노획 행위 없이도 죽음 그 자체가 화폐의 획득을 보장한다. <소울> 시리즈에서는 ‘소울’의 형태로, <엘든 링>에서는 ‘룬’의 형태로, <아머드 코어> 시리즈에서는 현상금의 형태로 보상이 들어온다. 특히 소울 (soul)은 말 그대로 영혼 그 자체로, <소울> 시리즈에선 플레이어가 죽인 자의 영혼을 재화로 획득하며 사용한다. <엘든 링>의 룬은 <소울> 시리즈의 보상 시스템을 그대로 계승함에 따라 조금 덜 직관적으로 되지만, 세계관 내 우주적 존재의 ‘축복’이라는 점에 따라 존재와 생명에 아주 핵심적인 요소를 살해 행위에서 얻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이다. <아머드 코어>에선 보상 금액의 형태보다 그것이 사용되는 방향이 시신경제에 접촉해 있는데, 현상금은 전부 주인공 파일럿 신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인 작중 기체 AC (Armored Core)의 부품들을 구매하고 강화하는 데에 투자된다. 특히 <아머드 코어 VI 루비콘의 화염>에서 주인공은 몸을 오로지 AC 탑승 및 조종에만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개조 받은 ‘강화인간’으로, 대신 그 외의 모든 신체 기능을 희생하는 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익어버려’ 기체 바깥에선 제대로 된 생활이나 거동을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작중 주인공이 살해하는 적들은 현재 사실상 그의 진정한 신체라고 말할 수 있는 AC의 활동 역량을 확장하는 금액으로 환산되고, 종국에는 재수술을 받아 AC 바깥에서도 그 자체로 활동할 수 있는 몸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다. 게임 내에서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 이름도 없는 주인공 강화인간 ‘C4-621’이 그런 극단적인 수술을 받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결국 <아머드 코어 VI 루비콘의 화염> 내에서 플레이어가 임하는 모든 전투와 파괴, 살해의 용도는 저당 잡힌 주인공의 신체를 되찾기 위해 채무 를 상환 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신체를 저당 잡는 튜토리얼 채무는 시신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로 ‘죄와 벌’이라는 인간 법과 도덕 세계의 발생지이다. 니체는 독일어로 ‘죄 (Schuld)’가 ‘채무 (Schulden)’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죄에 대한 벌은 언제나 등가물 을 가정하고 죄인을 고통 스럽게 해서라도 실제로 배상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 극히 경제적인 법을 각인시키기 위한 기억술 의 원형으로 고문을 꼽는다 [3] .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 만이 기억에 남는다. (중략)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 –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중략)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벌,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 인기 있었던 살가죽 벗기는 형벌,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4] 그러므로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규칙이라는 법을 전부 제대로 각인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튜토리얼에서 가장 효율적인 예시로 시신경제가 등장하는 것 또한 우연은 아니리라. 2007년도 게임 <어쌔신 크리드>에선 주인공이 튜토리얼 이후 계급을 강등당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장비를 빼앗기는데, 어째선지 전투 및 이동 기술 등 각종 다양한 신체 능력마저 덩달아 잃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2016년작 <용과 같이: 극>의 튜토리얼에선 가장 강한 ‘도지마의 용’ 전투 스타일을 모두 갖고 시작하지만 정작 튜토리얼이 끝나고 난 뒤엔 주인공이 10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터라 해당 신체 기술들을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이 게임들에서 계급과 인연 등을 차차 되갚아가며 다시 찾아야만 한다. 플레이어 캐릭터인 주인공은 분명 이 모든 신체 역량들의 원래 소유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튜토리얼이 끝난 직후 어느새 몸의 기능들을 저당 잡힌 채무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캐릭터의 신체는 외적인 시각에선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기능들이 ‘죽은’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튜토리얼에서 해당 게임 중 플레이 가능한 능력의 최대치를 맛보게 해주고 얼마만큼의 액션과 재미가 가능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연출 전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에게 주인공의 신체를 ‘죽여’ 앞으로 하나하나 갚아 나가야 하는 채무의 대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게임 내 규칙에 자연스럽게 복속시킬 것이란 점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죽은 신체의 교환 가치 *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 잘라 온 머리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현상금을 깎는 다트리 소령 (Major Dhatri)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 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채무자가 자신의 신체를 저당 잡힐 때 자기 자신 외에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있는 것이란 점이다. 즉, 니체의 채무법에서 채무자의 신체는 채무자 그 자신이 아니며 철저히 분리된다. 따라서 저당 잡힌 몸은 그 순간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닌 시체로서 죽은 물건이 된다. 시신경제에서 시체를 “돈벌이가 되는 물건”으로 만드는 건 죽음 그 자체이다 [6] . 즉, 단적으로 말해 시신경제는 장기매매라는 명백한 형태의 신체 부위 교환 형태를 굳이 띠지 않더라도 죽음 그 자체로 재화를 교환한다. 1755년 4월 24일 매사추세츠 영국령 식민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머릿가죽 하나당 70파운드의 현상금을 달았다 [7] . <폴아웃 3> (2008)에선 바로 매사추세츠에서 대략 683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수도 황무지에서 손가락 하나당 5에서 10병뚜껑으로, 귀 하나당 10에서 15병뚜껑으로 보상받는다. <폴아웃: 뉴 베가스> (2010)에선 매사추세츠에서 4348킬로미터 떨어진 모하비 황무지에서 머리 하나당 250병뚜껑을 보상받는다. 특히 <폴아웃: 뉴 베가스>의 머리는 해당 부위가 파손되었을 시 가격이 50병뚜껑으로 줄어든다. 단순히 죽음과 부위의 차원에 가격을 매기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의 보존도마저 산정하는 것이다. “채무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에서 채무의 상환량은 단순히 채무자가 입는 고통만이 아니라 채권자가 느끼는 쾌감까지 계산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8] 게임 속 시신경제는 게임 내에서 금전적 형태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을 때조차 신체의 죽음을 교환한다. 정확히는 오히려 게임 속 인물들의 신체에 아무런 부차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을 때만 작동하는 시신경제가 있다. 바로 죽음과 웃음의 교환이다. 가장 잔인한 고어 액션 게임에서마저 적의 죽음은 플레이어가 구가하는 살해 행위에서 느낄 수 있는 역동적 쾌감 이상의 보상을 항상 제공한다. 최소한 얼마만큼 잔인하게 더 많은 적을 더 효율적으로 빠르게 죽였는지를 추산하여 점수나 등급으로라도 보여주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일반적으로 게임이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없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신체를 훼손시키도록 만드는 게임들이 바로 고어 코미디 게임들이다. 2008년 플래시 게임 <해피 휠스 (Happy Wheels)>부터 2019년 <피플 플레이그라운드 (People Playground)>, 2024년 <헬다이버즈 2>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래그돌 (Ragdoll) [9] 고어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플레이어 캐릭터와 적의 구분 없이 그 어떤 죽음에도 고집스러우리만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경직된 래그돌 신체가 웃음을 자아내는 원리처럼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 이라는 희극의 기본 명제에 부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해당 캐릭터들의 신체에서 죽음이 응당 가져야만 할 의미마저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다 [10] . 심지어 적의 죽음에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의 죽음에 이렇다 할 페널티마저 크게 부여되지 않아, 죽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죽는 행위마저 권장된다. 따라서 모든 신체는 지킬 이유도 없고 언제든지 교체되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양陽의 가치도 음陰의 가치도 아무 의미도 없이 날아다니는 사지들, 육편들, 내장들은 피아의 구분도 없고 재화로서도, 그리고 당연히 인격으로서도 기능하지 않는다. 다만 그 ‘생명으로서 응당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이라는 성질이 래그돌 고어 게임들 속 죽음에서 발견되고 결국 죽음은 웃음이라는 쾌락과 교환되며 역시나 또 다시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행위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장르로서 시신경제: 과잉과 음의 미학 * <크루얼티 스쿼드>의 플레이 화면 지금까지 다룬 시신경제는 장르를 불문하고 게임이 신체를 기용하는 방식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등장했지만, 대주제이자 장르로서 이 개념에 투신하는 게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들도 세계관 전반을 시신경제가 감싸고 있고, <사이버펑크 2077> (2022)의 세계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편재한다. 우선 장기매매가 주 생계 수단인 ‘스캐빈저 (Scavengers)’라는 집단이 등장하고 <사이버펑크 2077>의 배경 ‘나이트 시티 (Night City)’ 사람들은 주인공과 NPC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아머드 코어> 시리즈에서 그러했듯이 ‘일을 하기 위한 몸을 사기 위해 일을 한다.’ 나이트 시티에선 강화인간의 수준을 넘어 모두의 일상적 신체 자체가 유기체보다는 무기물의 영역으로 대거 이동한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거진 인형人形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잔인함, 잔인함을 보장하는 인격은 신체의 죽음에 유지된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2077>조차 주제이자 내용으로서만 시신경제를 다룰 뿐 매체적 차원에서는 시신경제를 딱히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려한 그래픽의 AAA게임의 정반대편에서 ‘최악’, ‘최흉’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고 감히 말해도 어폐가 없을 <크루얼티 스쿼드> (2021)의 경우에는 게임의 모든 면이 전적으로 시신경제를 말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와서 망막에다가 직접 형광펜을 칠하고 썩은 찰흙을 덕지덕지 바르는 듯한 고채도 고대비 저-폴리곤 (Low-Polygon)의 끔찍한 비주얼과 누군가가 사용 중인 화장실을 그대로 공사하는 중 장비가 망가진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듯한 극악스러운 음향은 처음 마주했을 시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게임을 일정 시간 이상 플레이하면 진짜로 시청각적으로 고통스럽기 시작하게 되는 것을 넘어 두통마저 느껴진다. 메뉴 버튼의 기괴한 아이콘들은 정확히 뭐가 뭐를 가리키는지 눌러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나아가 듣도 보도 못한 HUD 프레임이 존재하는데, 다시 말해 정말로 1인칭 화면의 테두리를 상시 뒤틀린 이미지가 덮고 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레임의 상부 가운데에는 게임의 제목인 ‘CRUELTY SQUAD’가 계속 떠 있다. HP는 바의 형태도 아니고 게이지의 형태도 아니고 알 수 없는 방울-뭉치-덩어리의 형태로 정말 불필요하게 크게 화면에 부유한 채 꿈틀거리며 그 위엔 마찬가지로 생명 (LIFE)이란 글자가 굳이 쓰여 있다. 총알과 탄창 개수를 가리키는 숫자 사이에는 어째선지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고 총알을 발사하거나 무기를 바꾸는 등의 행위를 할 때에 이 얼굴은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전한다. 즉, 이 게임은 그래픽, 음향, UI를 불문하고 전력을 다해 실용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총을 장전할 때 R키와 같은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위아래로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는 기가 찰 지경이다. 문제는 이 흉물스럽고 황당한 디자인이 게임 속 극대화된 기업 자본주의 바이오펑크 디스토피아 사회의 끔찍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면면과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디스토피아는 과장되어 있기는 해도 당장 아무 인터넷 플랫폼이나 들어가 봐도 맞닥뜨릴 수 있는 주식 및 자기 계발 신봉자들처럼 NPC들이 ‘CEO 마음가짐 (CEO Mindset)’을 중언부언 읊어대고 펀코팝 (Funko Pop)의 패러디 천코팝 (Chunkopop)이 등장하는 등 작금의 현실이 지배받고 있는 체제와 크게 다르지도 않으므로 게임 속 세계가 어느 지점까지 ‘있는 그대로’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세계에 살며 해리되고 분열된 주인공의 정신 상태에 이러한 형태로 인식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이는 또한 현실에서도 개인들의 세계 인식 자체에 던질 수 있는 이미 고루한 실존적 질문이다. 구태여 인식과 세계의 현실을 분리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애초에 분리가 가능하지도 않을 만큼 이미 주인공은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철저히 뒤틀려 있다. 그의 두개골에는 총이 달려 있고 등에서는 가속을 위한 액체가 분비되며 내장은 밧줄처럼 사용된다. 그의 몸에는 살 위에 더 많은 살이, 내장 위에 더 많은 내장이 부착되어 있으며, 임계점을 넘은 생명 공학 그 자체가 구토하고 있다. 주인공은 회사 청산을 주 업무로 맡는 보안 업체 ‘크루얼티 스쿼드’의 청부업자로 <아머드 코어>, <사이버펑크 2077>의 연장선에서 번 돈으로 또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고 개조한 신체로 더 많은 돈을 번다. 죽음이 삶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죽음을 위해 매진된다. 게임을 켜면 짧게 지나가는 도입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삶에의 권위... (The Authority on life...)” 그리고 주인공의 수입원은 암살 의뢰의 보상이기도 하지만 임무 수행 중 암살 대상 외에 아무런 처벌도 손해도 없이 아주 자유롭게 죽일 수 있는 민간인들의 장기를 수확해 실시간으로 암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게임 내 실시간 시장에선 주식과 장기가 나란히 거래되며 노골적으로 시신이 경제의 부富라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말 그대로 시신경제에서 죽음이 최종적이며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해 주인공은 고용주를 죽이고 신마저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생의 요람 (Crade of Life)’에 도달해 그 자신이 신이 되는 결말에선 조르주 바타유 (George Bataille)의 『저주받은 몫』을 직접 인용하며 도대체 그래서 시신경제는 왜 죽음을 추구하며 작동하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지구 표면에서 에너지의 작용들이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는 원칙상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 (부)를 수용한다. 이러한 과잉의 에너지는 어떤 체계 (예를 들어 어떤 유기체)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면, 또는 에너지의 과잉이 그 성장에 전적으로 흡수될 수 없다면, 자발적이든 아니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든 아니면 파국적인 방식으로든, 필연적으로 그러한 과잉은 이득 없이 상실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11] 즉, <크루얼티 스쿼드>는 생의 과잉과 포화가 곧 죽음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음의 가치를 경제의 방향타로 잡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시신 경제에서 부富와 부腐는 하나이다. 모든 사회가 아무런 의심 없이 성장을 테제로 삼고 있는 현실과 상승 지향의 영적 전파가 시신경제를 이 땅에 소환하는 의식의 제단이다. <크루얼티 스쿼드> 게임으로서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감으로써, 효율, 실용, 세련, 편안에 반대되는 음의 가치를 매체의 모든 자원을 다해 표현함으로써 시신경제의 현실을 고발한다. [1] Achille Mbembe. “Necropolitics.” Public Cultur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3), vol. 15, no. 1, pp. 11–12. [2] Ibid., pp. 39-40. [3]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서울: 책세상), 402~406쪽. [4] 위의 책, 400~401쪽. [5] 위의 책, 404쪽. [6]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서울: 이음, 2019), 50쪽. [7] Massachusetts. Acts and Resolves, Public and Private, of the Province of the Massachusetts Bay (Boston: Wright & Potter, 1869-1920), vol. 15, p. 308. [8]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407쪽. [9] 래그돌은 본래 헝겊 인형이라는 뜻으로 게임 속 물리 엔진 상에서 관절에 힘이 없이 축 늘어진 채 허우적허우적 휘둘리는 신체 모델들을 일컫는다. [10] 앙리 베르그송. 『웃음』 (파주: 도슨트, 2022) 37쪽. [11]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파주: 문학동네, 2022), 29~30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How we talk about a medium reveals a lot about who we consider its target audience or user and what purposes we attribute to their engagement with the medium. The public discourse on digital games in both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for many years been characterized by the idea, that digital games was, roughly speaking, for young, teenage boys, who spend hours upon hours painted by the luminescence of the computer screen and immersed in mindless entertainment. This was of course never true. < Back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04 GG Vol. 22. 2. 10. - 이 글의 한글 번역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88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How we talk about a medium reveals a lot about who we consider its target audience or user and what purposes we attribute to their engagement with the medium. The public discourse on digital games in both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for many years been characterized by the idea, that digital games was, roughly speaking, for young, teenage boys, who spend hours upon hours painted by the luminescence of the computer screen and immersed in mindless entertainment. This was of course never true. Recently, however, many people have begun questioning this stereotype gamer and exploring the diversity of people who actually play games. But who are these ‘other’ players then? They may be toddlers who play their first game on their parents’ smartphone, the retired woman immersed in a game of Wordfeud, the ‘granny gamer’ playing CS: Go with their grandchild. But they may also be gaymers socializing around a game of Fortnite, or the young mother playing on her Nintendo Switch while her baby sleeps next to her and so on. Critiquing the norms of game culture Digital games are of course not played by stereotypes but by actual players who experience the games they play in unique and individual ways. During the last 10 years, game journalists, cultural critics and scholars have discussed the issue of representation of gender, ethnicity, disability, age, and bodies and in mainstream games. Although these discussions took off with the greatest intensity in North America, they are now also gaining speed in a European context under the heading of norm critique. The discussions about representation in games are essentially about three things: First, how does games portray different identities or aspects of peoples’ identities, if at all. Second, what is the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people in the player base of different games. And third, how are marginalized people represented in the game industry and under what conditions are they working. These three things are often intertwined in public discourse. It is often assumed that if a game represents someone, e.g., women, in a negative way, female players will generally turn away from the games. It is also often assumed that better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people in the game industry will result in better portrayals of these people in the game. Although there is certainly some truth to this, game scholars have also pointed out, that reality is much more complex than that. Games addressing serious topics Several studies have revealed a long-lasting imbalance in the number of female game characters, their roles and function in the game, and found that in their visual appearance, female characters have typically been highly sexualized. An analysis of over 500 games released between 1983 -2014 shows, that the sexualization of the female body peaked in the late 90’s and have been declining since 2006. This decline may mark a slow change in the way that the overall game industry thinks about their own games and its ability to address and raise awareness of serious topics. When British game company Ninja Theory, for example, released their game Hellblade: Senua’s Sacrifice in 2017, creative director of the company, Tameem Antoniades, explained in an interview that they wanted the game to be more than just entertainment, as they tried to offer an experience of how it is to suffer from psychosis, that would feel true to player. Similarly, Forgotten, a Danish indie game demo released in 2018, aimed to represent what it feels like to suffer from Alzheimer disease. The game is currently under development by Autoscopia Interactive. The European indie game industry has also started considering how to tell stories from the perspectives of socially and economically marginalized people. Bury me, my love, developed by French game company The Pixel Hunt, tells the story of a Syrian refugee as she makes her way through Europe to Paris. When another British AAA-game company, Playground Games, released the fifth installment in their racing game series Forza Horizon in Autumn 2021, it reached the headlines of mainstream media, that the character creation module in the game allowed players to choose gender-neutral pronouns to their character, as well as fit their characters with prosthetic limbs. Although much debate focusses on the representation of game characters, inclusive game design is of course not limited to this specific issue. The emergence of the indie game industry also sees an increase of games that delivers experiences that go beyond the well-tested model of the AAA-industry and offers modes of play that catered to players who cannot afford sitting several hours fixed in front of a computer. This is particularly true in Denmark where the game industry is mostly comprised of small-scale, indie developers, except from a few bigger studios such as IO Interactive. *Forgotten is a short game that aims to convey the experience of how it is to live with Altzheimer’s disease. In the image, the faces of game characters are blurred to give a sense of memory loss and disorientation. Expanding the player base This slow change can in part be explained by the second issue –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It seems that the game industry is becoming increasingly willing to try to reach a new target audience and in different ways cater for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Research shows that there is no direct causal relation between the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identities in games, and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and that marginalized groups, such as LGBTQ-people, have played games despite negative portrayals of LGBTQ characters in the game. As even mainstream media have gained an interest in the problematic portrayals of marginalized people in games, it becomes increasingly difficult for game companies to continue to reproduce these negative stereotypes. On the other hand, this public discourse also serves as an incentive to the game industry to latch onto new target demographics with strong spending powers. However, negative portrayals of marginalized identities in games only account for half of the problem. Many marginalized groups still experience bullying, discrimination and abusive behavior when playing especially online games. Her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when it comes to the marginalization of players, the discourse in Europe primarily revolves around the experience of (young) female players. The conditions of other marginalized groups, such as various ethnicities, socially- and economically marginalized people, and so on, are still lacking in the public discussions. This means, that while game have begun to tackle the issue of how to respectfully convey the stories of these marginalized identities, the game industry, have still not grasped the potential of addressing these groups as players. Improving working conditions through unionizing The marginalization of people in the game industry have received considerable attention in the last couple of years. Although this issue already attracted attention ten years ago, when marginalized workers, and especially female workers, of the game industry began spreading stories of discrimination, sexism, and harassment under the hashtag #1ReasonWhy , these issues have made the headlines again the last couple of years, as toxic work culture, sexual misconduct and abusive behavior have been exposed in the European AAA-industry. In the context of North Europe, scandals of a similar magnitude have yet to be exposed, although media stories have documented some cases of abusive conduct. Trade unions appear as obvious institutions to tackle such issue and better the conditions for marginalized workers. But even though the Scandinavian countries generally have a strong tradition for unionizing, it should be noted that worker in the Scandinavian game industry are still not by large unionized. Therefore, while many discussions are ongoing in the public discourse about how games responsibly represent marginalized people and how to provide an inclusive culture for players falling outside the normative stereotype of the male gamer, the is still call for a change in the organization of the game industry.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da Jørgensen Holds a PhD in game studies from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where her research revolved around gender representation, game culture and games as media. Today she works as a postdoctoral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효율 같은 건 필요 없어: 느리고 답답하게 게임하기

    효율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플레이 방식일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공에 관심 없는 것이나 열등하거나 패배적인, 혹은 의도에서 벗어난 부적응적인 태도라고 보긴 힘들다. <월든>에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속도를 발견했듯이, 무엇이 게임에서 ‘성공'인지 각자가 내리는 정의가 다를 뿐이며 플레이어 각각에게 존재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비효율적인 게임 플레이는 게임이 단순한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닌 복합적인 경험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 Back 효율 같은 건 필요 없어: 느리고 답답하게 게임하기 18 GG Vol. 24. 6. 10. * 데이비드 소로의 원작 <월든>은 2017년 디지털게임으로 발매된 바 있다. 스팀 등을 통해 플레이할 수 있다. 월든에 대한 단상 <월든(Walden)>이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라는 인물이 되어 그의 삶을 체험한다. 소로는 1845년에 도시를 떠나 숲 속 외딴 오두막에서 몇 년간 거주했고, 그때 깨달은 점들을 책 <월든>으로 썼다. 책과 동명의 게임 <월든>에서 플레이어는 1845년의 소로가 되어 당시의 삶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소로처럼 사계절 내내 매일 나무에 망치를 두드려 집을 수리하고,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옷을 기우며, 열매를 따서 병에 저장하고, 나룻배에 올라 노를 저어 호수를 이동한다. 실제 소로가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해보면서 여정을 하다보면 어느새 소로가 남긴 책 한 권, 월든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월든>에서 소로가 도시와의 오랜 분리 생활 끝에 알게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과 게임에서 모두 언급되듯, 모든 사물에게는 각자 고유한 삶의 속도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되었다. 사과나무는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와 계절에 맞게 성숙할 필요가 없었고, 어디선가 북소리 장단이 들려온다면 발걸음을 맞추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듣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적, 시간, 가치판단 때문에 굳이 자신의 것을 바꿔야 할 필요가 없다는 <월든>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단지 소로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미덕으로 여기는 ‘효율’이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만의 선택과 속도로 게임을 즐기기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속성뿐 아니라, 많은 게임들이 효율성을 추구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그에 맞춰 게임에서 최적의 선택을 찾아간다. 게임 문화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플레이는 많은 이들에게 이상적인 방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단순히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전개 방식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폭넓은 경험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일부 제작자들은 비효율을 강요하기도 한다. 효율 떨어지더라도 감수할만한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게임 <월든>의 철학을 게임 플레이에도 적용하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비효율의 사례와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효율성보다 더 우선되는 가치에는 어떤 것이 있는 지를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 게임 플레이의 다양성 또는 인간 플레이어의 다양성에 대해 짚어볼 것이다.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된 ‘비효율’ 게임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를 찾는 과정은 마치 퍼즐을 푸는 것과도 같다. ‘A라는 상황에서 B라는 아이템을 선택하고 C라는 행동을 하면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해답을 얻기 위해 플레이어는 수많은 조합이나 계산을 해보거나 공략을 찾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퍼즐의 답을 찾아나간다. 하지만 어떤 플레이어들은 퍼즐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게임이 보장하는 정도(正道)를 무시하고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을 고의적으로 행한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거나 과시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예를 들면 초보자의 무기를 가지고 보스 몬스터까지 격파하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게임 <다크소울> 시리즈에서는 “SL1 Run”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이는 캐릭터의 레벨을 전혀 올리지 않고 소울 레벨 1로 게임의 끝까지 완주하는 챌린지를 뜻한다. 쉽게 말해 ‘노렙업 플레이’이다. 스트리밍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플레이는 극단적인 모습에 무모하다는 감상을 전달하다가도 동시에 경외감을 선사하는 모습이다. 공격력이 매우 약한 초심자의 무기로 강력한 보스를 격파하는 이러한 도전은 사실 굉장히 비효율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의도된 비효율적 플레이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실력을 가장 쉽게 증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엄청난 시간의 플레이 타임이나 스피드런 기록의 수치가 의미하는 플레이어의 실력이 있듯, 알몸 상태의 막대기로 보스를 이기는 비효율적인 실황은 자신이 얼마나 실력자인지 알리고자 하는 플레이어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생긴 ‘비효율’ 승리나 성공이 아닌 다른 것에 게임 플레이의 목적이 있는 경우에도 비효율의 상황은 발생한다. 단순히 멋지다는 이유로 선택되는 무기, 장비, 스킬이 바로 그것이다. 어떠한 플레이어들은 능력적인 효과와는 상관 없이, 방어력이 비교적 낮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보인다는 이유로 그 옷을 선택하거나, 노출된 몸이 더 아름답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기도 한다. 또는 냉기 마법보다 화염 마법이 덜 효과적인 상황임에도 불길이 이글거리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더 강렬해보인다는 이유로 화염 마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취향의 문제에 캐릭터와의 관계로 비효율적인 선택이 배가되기도 한다.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포켓몬의 능력치를 따져 강력한 팀을 구성해 배틀을 진행해야 하지만, 자신과 게임 속에서 오랫동안 인연이 이어왔거나 더 귀엽다고 생각되는 포켓몬을 배정시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비효율적인 선택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하다. 수납력이 떨어지는 불편한 지갑이라도 누군가와의 추억이 담긴 선물이라면 기꺼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 스토리 전개를 위해 효율성을 과감히 포기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인간의 삶 자체를 시뮬레이션화한 게임 <심즈4>는 현실처럼 다양한 직업군을 제공한다.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 ‘심’이 성장해 성인이 되면 직업을 가질 수 있는데, 하루종일 글만 쓰는 작가부터 명망있는 사업가, 인스타 인플루언서까지 50개에 달하는 직업이 플레이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렇듯 각각 직업군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모두 다르고 근무시간, 출근 요일도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심즈4>에서 효율적인 플레이 방식은 캐릭터가 오랫동안 고소득 직장에서 능력을 쌓아 승진하고 부를 축적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심에게 극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주기 위해 비효율적인 결정을 내린다. 다른 직업과 비교했을 때 시급이 적은 바텐더나 화가를 시켜 힘겨운 삶에 살게 하고,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기 위해 승진 없이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낮은 보수의 직업을 이어나간다. 현실성을 강조해서 나타난 ‘비효율’ ‘탈것’이란 보통 게임에서 말, 자동차, 비행기처럼 캐릭터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도보로 먼 거리를 이용해야하는 상황에서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탈것은 게임에서 플레이의 효율을 증가시키는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플레이어의 시간을 아껴주는 편의성 콘텐츠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반면 어떤 게임들은 일부러 탈것을 존재시키지 않는다. 개발자의 의도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개발자들은 게임의 현실감을 증가시키고 싶은 의도에서 플레이어가 두 다리로 직접 걸어서 이동하도록 한다. 또는 탈것이 게임 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이동속도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탈것에게 기대하는 높은 속도의 이동이 아닌 실제로 그 수단이 현실에서 사용되는 시간의 그대로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현실성의 강조는 탈것뿐 아니라 게임 속 캐릭터의 생활 방식 자체에 적용될 수 있다. <레드 데드 리뎀션2>는 현실적인 연출을 묘사한 게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캐릭터가 직접 사냥하고, 가죽을 하나하나 벗기고, 요리를 하는 시간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다. 이러한 게임의 표현 방식은 일각에서는 현실성이 높아 몰입을 가져다준다는 평가 받기도 했지만 상당수의 플레이어의 시간을 잡아먹고 답답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플레이타임 대비 얻은 게임 속 자원의 형편 없음을 지적했다.( 게임제너레이션 11호 글 참조) 혹자는 이런 상황을 보고 개발자들이 ‘낭만’을 추구한 결과라고 표현한다. ‘낭만’은 상대적인 가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낭만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답답함 뿐인 부정적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소위 ‘개발자의 낭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게임의 평판에도 부정적인 평가를 가져오게 된다면 개발자는 뒤늦게 조치를 취하기도 하는데, 탈것을 유료 재화나 DLC로 추가 업데이트 하거나 불필요한 소요 시간을 단축하는 버튼 등의 시스템을 추가한다. 물론 현실성을 강조해서 나타난 비효율적 플레이는 개발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에 의해 추구될 수도 있다. 탈 것이 있음에도 타지 않는 플레이어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필자의 경우 <용과 같이 8>에서 캐릭터를 빠르게 먼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는 택시라는 수단이 있었음에도 잘 이용하지 않았다. 평소 일본 요코하마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선뜻 실현할 수 없었는데, 게임 속 배경인 요코하마의 거리 풍경이 너무 잘 표현되어있었기 때문에 굳이 도보를 통해 걸어가면서 여행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덕분에 플레이타임은 게임 공략에서 제시하는 수준보다 훨씬 초과하였지만, 주변 경관을 즐기기 위해 느릿느릿 도보를 선택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비효율적인 선택이 오히려 더 가치있는 플레이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의 가치가 달라서 만들어진 (상대적인) ‘비효율’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비효율의 사례는 플레이어의 삶 전반에 깔린 태도이자 시간에 대한 문제다. 게임을 즐기는 부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공략을 보면서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부류와 공략 따윈 신경쓰지 않고 스스로 헤매고 깨닫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부류다. 두 타입의 플레이어 모두 각자의 만족감을 추구한다. 공략을 보지 않는 플레이어는 고행길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데에서 성취감을 얻는다. 반면 공략을 보는 타입의 플레이어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 없이 게임을 최적의 루트로 클리어 한다는 데에서 만족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플레이어의 태도는 각자의 시간의 가치가 달라서 나눠진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스카이: 빛의 아이들>이라는 게임을 할 때의 일이었다. 게임에는 양초라는 상징적인 아이템이 있다. 이 양초는 스킬이나 캐릭터 커스텀 등을 구입할 때 사용되는 주요 재화로, 게임의 맵 전체에 걸쳐 분포 되어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맵을 탐험하면서 양초를 수집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게임은 맵을 탐험하는 것이 주 콘텐츠였기 때문에 양초란 사실 수집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재화이기도 했다. 나는 한 플레이어와의 대화 중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게임 커뮤니티에서 읽은 양초 획득 공략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길, 전체 맵에는 총 00개의 양초가 분포되어 있고, 양초 위치를 외워서 최단 거리로 이동하면 이 게임은 하루 XX분만 해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양초 위치가 표시된 맵 지도는 커뮤니티에 다 나와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 뒤에 이어진 내 대답은 크게 부응하진 못했다. “아, 그렇구나. 고마워. 근데 왜 그래야 하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플레이어와 그렇지 않는 플레이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타당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 그 플레이어는 “하루 중 게임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 XX분밖에 안된다”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소위 ‘효율충’이 되어버린 데에는 배경이 있음을 설명했다. 하루에 30분밖에 게임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만을 추구해서 하루종일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사람과 동등한 성취를 얻도록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다. 효율/비효율은 플레이어의 다양성의 문제 효율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플레이 방식일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공에 관심 없는 것이나 열등하거나 패배적인, 혹은 의도에서 벗어난 부적응적인 태도라고 보긴 힘들다. <월든>에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속도를 발견했듯이, 무엇이 게임에서 ‘성공'인지 각자가 내리는 정의가 다를 뿐이며 플레이어 각각에게 존재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비효율적인 게임 플레이는 게임이 단순한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닌 복합적인 경험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게임을 어떻게 접근하고 경험하는지를 드러낸다. 효율을 추구하는 플레이어들은 빠른 진행과 최적의 결과를 위해 게임 내의 모든 선택을 계산하지만,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탐험과 발견, 그리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중요시한다. 이는 마치 소로가 숲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찾았듯이,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Tags: 제노바첸, 효율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 Back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08 GG Vol. 22. 10. 10.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한국에서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조금 해본 것이 내 보드게임 경험의 전부였지만 게임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동료 중에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료의 초대로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을 해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의아했다. 기술적인 최첨단을 달리는 상품인 비디오 게임을 제작하고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굳이 보드게임을 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보드게임을 하다보니 왜 일부 사람들이 보드게임이야 말로 정말로 궁극적인 게임의 형태라고 부르는 지 알 것도 같았다. 웨이트니 유로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을 알아갈 정도가 되자 보드게임에 관련된 문화적 요소들이 의외로 대중문화에도 많이 침투해있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즐겁게 본 미국 드라마 중 하나인 ‘커뮤니티’에서 Dungeons & Dragons (D&D)을 하는 멤버들을 아주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났다. 미국에 사는 동안은 보드게임이 항상 내 곁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리서치를 하게 됐다. 코로나가 이끈 성장 한국에도 잠시 보드게임 카페 등의 유행이 분 적이 있지만 말그대로 잠시 유행에 지나지 않았고 이후에는 주로 매니아들의 취미로 여겨졌다. 물론 미국도 보드게임이 대중화되서 누구나 즐기는 취미라고는 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미국에서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을 받을 정도의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리서치기관 스태티스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보드게임은 2023년까지 120억 달러의 시장규모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 환율로 17조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보드게임은 미국에서 코로나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장이기도 하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성장세가 꾸준하긴 했지만 2019년에 한해에만 무려 4000개가 넘는 보드게임이 쏟아진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 업계의 팽창은 누구라도 주목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유는 우리가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양식있는 시민의 행동으로 불리던 나날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종류에 따라서는 8시간도 후딱 가버리는 보드게임은 당연히 아주 좋은 선택지였다. 보드게임이 또 하나 빛을 발하는 시장은 크라우드 펀딩이다. 보통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하면 아이디어 상품이나 전자제품을 쉽게 떠올리지만 보드게임은 크라우드 펀딩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테고리다. 북미에서 가장 큰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큰 돈을 모은 킥스타터 프로젝트 순위를 살펴보면 이 중 네개가 보드게임이다. 역대 순위에서 6위를 기록하고 보드 게임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Kingdom Death는 무려 12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끌어모았다. 14위에는 보드게임을 위한 테이블이 8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펀딩 받으며 자리 했으니 전체 순위의 13 이 보드게임 관련임 셈. 펀딩의 규모가 아닌 아닌 프로젝트의 갯수로 봐도 놀랍다. 2021년 킥스타터를 통해서 펀딩을 시도해서 목표치를 달성한 보드게임은 3500개가 넘는다. 뉴미디어에서 보드게임 물론 세상의 모든 문화상품들이 그렇듯이 뉴미디어에서 노출이 시장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특히나 유튜브에서 보드게임과 관련한 여러 채널들은 크게 성장을 해왔다. 대표적으로는 배우 윌 휘튼이 진행하고 있는 ‘테이블탑’이라는 유튜브 컨텐츠는 여러 셀러브러티들을 초청해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5년 이상 에피소드에 따라서는 300만 조횟수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인기다. 빅뱅 이론과 스타 트랙에 출연하는 등 서브 컬쳐계에서 인기있는 작품마다 역할을 해온 윌 휘튼의 대표작이 테이틀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미 오래 전부터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소셜미디어 플랫폼 틱톡에서도 보드게임에 관련한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온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컨텐츠는 ‘샌드위치를 위한 주사위 던지기’(Roll for Sandwich)다. 룰은 간단하다. 가장 대표적인 보드게임 중 하나이자 가장 열광적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는 게임 D&D에서 사용되는 주사위를 가지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이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을 다채롭게 준비한다. 그리고 이런 재료들에 번호를 붙여서 종이 위에 쓴다. 예를 들면 식빵은 1번, 베이글은 2번과 같은 식이다. 주사위를 던지고 나온 번호대로 재료를 가져온다.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들은 맛이나 서로 간의 궁합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주사위가 정해주는 우연에 따라서 결정된다. 너무나 간단한 포맷이지만 20면체 주사위를 굴려서 소스를 결정할 때는 나도 모르게 제발 다른 내용물과 어울리는 소스가 나오길 간절히 빌게 된다. 작가가 본업이지만 D&D 매니아인 틱톡커 제이크 포웰스가 영상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올해 4월 말. 그가 14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으고 2500만회가 넘는 좋아요를 받기까지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드게임이라는 소재가 플랫폼에 따라서 전혀 다른 컨텐츠와 융합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증거다. 다양성이라는 과제 상업적인 성공을 제외하고 현재 보드게임업계에서 제일 유의미하게 논의가 되고 있는 주제는 도대체 왜 보드게임은 백인남성의 전유물이냐는 내부적인 질문이다. 보드게임 전문 사이트 보드게임 긱에 올라온 게임 중 상위 400위에 오른 게임을 대상으로 201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게임 디자이너 중 92.6%가 백인 남성이었다. 유색인종 남성은 4.1%였고 백인 여성은 2.7%였다. 유색인종 여성 게임 디자이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캐나다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타냐 포부다는 보드게임 시장이 상정하고 있는 타깃 자체가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 백인 남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보드게임의 표지에서도 보인다. 보드게임 표지에 나온 인물 중 남자는 52.7%에 달했고 여성이 나온 경우는 동물이나 외계인보다 적은 19.2%였다. 인종으로 오면 이 문제는 더 도드라진다. 표지에 백인이 나온 경우는 60.2%였고 비백인이 나온 경우는 11.7%에 불과했다. 산업적인 이유로 특정한 성별이나 인종을 타깃으로 해서 상품을 만드는 것 자체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보드게임 산업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서 성장동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만드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이성애자 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드게임 커뮤니티는 다양성을 받아드리고 있다. 보드게임 커뮤니티를 통해서 그가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중 74.9%가 백인이었고 20.4%는 유색인종이었다. 여전히 백인이 압도적인 비율이지만 게임 디자이너의 90% 이상이 백인 남성임을 고려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성별로 가면 더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설문에 답한 사람 중 50% 이상이 본인을 여성이라고 답했다. 커뮤니티의 경우 여성이 더 많지만 제작자는 남성인 상황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이 게임을 제작하는 쪽에서 필요한 때다. 흔히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부르짖는 이유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 특별히 윤리적이고 신념에 가득차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상업적인 이유가 더 크다. 단순하게 영화업계만 봐도 다양성은 돈이 된다. 블랙 팬서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것이 너무나 명징한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이란 키워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전반에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 보드게임 업계 또한 더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다양성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뉴미디어의 발전과 맞물려서 폭발적 성장을 기록해온 그들은 이제 본인들의 커뮤니티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나성인) 홍영훈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 Back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12 GG Vol. 23. 6. 10.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One may well ask: ‘are artworks not synonymous with inculcating aesthetic experiences?’ The answer to this can only be ‘of course’ yet the qualification here is that we have to be precise about the kinds of ‘experiences’ in question. If we expect computer games to be able to convey complex states of interiority encountered by a protagonist grappling with a gamut of emotions, then we would potentially be comparing the game to works of literature and philosophy (and judging it as such). The orientation that I suggest is, moving away from preoccupations of artistic status towards scrutinizing experience can potentially shift our attention away from pining for the acceptance of computer games into the fold of high culture – a dubious aim at best – to focusing on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is aim of deepening aims to have us become more attentive to our experiences and to then demand games that push the boundaries of existing experiences. ‘Aesthetics’ and ‘experience’ Computer games are multimedial works. In this respect, we might call them Gesamstkunstwerks (total works of art) made through collaborations of skilled individuals that go beyond the confines of a single medium. When we play them, we can focus on the experience as a whole or attune ourselves more narrowly to, for example, the visual representations, the animation, the level design, the dialogue, the musical score, etc. The notion of ‘experience’ that I have mentioned can be brought out via existing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aesthetics’ (or the ‘aesthetic’), which is a polyvalent one. Western aesthetics has generally demarcated aísthēsis (perception from the senses as well as discernment through them) from noesis (purely intellectual apprehension or the application of reason). ‘Aesthetics’ is often taken expansively to encompass the overlapping concepts of: ‘sensation’, or what presents itself to our sensory experiences in general; ‘perception’, where the activity of the viewer is crucial to the mode in which the object is apprehended or perceived; and ‘judgment’, in which aesthetic judgments are characterized by their not being mediated by the application of concepts or reason. ‘Game aesthetics’ may be taken to connote a degree of distinctiveness to computer games, digital games, or videogames. It can be tak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how it feels to play a game’; playing games can be said to yield particular kinds of experiences or perceptions through the senses, which can be studied with an aesthetic focus. The philosopher John Dewey consistently made the case for seeing continuity between so-called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Dewey thought that what was to be avoided was the human creature divided against itself, which happens when our capacities (emotional, intellectual, sensory) are not be allowed to work naturally in conjunction with one another but are instead compartmentalized or separated from each other. This occurs as soon as we think about the realm of ‘art’ as separate from the sphere of ‘life’. It happens as soon as we assume that aesthetic experiences are only to be had when we enter into the designated space of the art gallery or the opera house (and not outside of them). To do this is to leave behind all our other experiences to languish as non-aesthetic, or even to assume that they are merely ‘instrumental’ – geared towards and reducible to a direct end like earning a wage, cleaning the house, keeping fit, having a conversation with friends, and that there is nothing else to them. The potential richness of improving our immediate experiences, of integrating aesthetic experiences into individuals’ vital interests and lives would therefore be missed. This is not to put the blame at the feet of artists or curators or critics; it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not works in the art world that are not contributing to the deepening of our experience – there certainly are. Yet it is also the case that there are real financial interests in play that want to keep the art world as separate. Preserving its power of categorical consecration, its ability to bestow the symbolic status of ‘this is art’, is to keep the current ordering of the world. Built into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are many key assumptions. These assumptions are arguably hostile to our developing fine-grained attentiveness to the actual experiences of gameplay. The first assumption concerns how the concept of ‘art’ is deployed with the supposition that either some works are ‘art’ or they are not. This is a binary categorization that can stifle further questioning. Secondly, there is the invocation of ‘computer games’ as a single category, which does little to help us parse the very different sorts of gameplay available even within a single genre. Finally, there is the assumption that computer games are like (most) other artworks in that they are identifiable objects or works. In this framing, the value is thought to reside more in the expression of artistic insights into the work by the developer and less in the process of what the player brought to the gameplay in order to enliven the experienc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for them. When players report that a game like Dark Souls (2011, FromSoftware) helped them to battle depression, it is the psychological state (together with the dedication) that the player brought with them that, in a concatenation of player and game via a lengthy process, produced an experiential transformation in the player. Critics applying aesthetic criteria The film critic Roger Ebert caused controversy when, in 2005, he claimed that video games, which, by their nature require player choices, could not attain the stature of art, since serious art like film and literature all require authorial control. Although he later stated that it was foolish to deny that all games could not ever be art even in principle, his position arguably concretized a perspective that is held by many – that computer games are juvenile, unsophisticated, geared towards immediate gratification, saturated with bombastic visual effects, quantified so as to preclude ambiguity, pandering to vulgar emotions. I am less interested here in dissecting Ebert’s arguments or in mounting counter-arguments (others have already done this) than in pointing out the nature of the claim itself. It is a claim that in order for games to seriously contend for the status of art, they must become like other accepted art forms. For some, this is so uncontroversial as to go without saying. Even for some philosophers of computer games, it has been a difficult position to escape. Grant Tavinor is a philosopher of the arts. His writings have largely focused on the ontological issue of whether computer games can be deemed to be art. He has consistently held that this can be answered in the affirmative but has always severely qualified it so that only a subset of video games are properly considered art. His approach has been to turn to existing definitions of art – to analyse the extent to which computer games do or do not satisfy their conditions – yet to do so without championing any single theory. This is accomplished by taking the ‘cluster theory’ approach which posits a list of aesthetic properties; a computer game is deemed to be a work of art if it instantiates a sufficient number of these attributes. In his 2009 book, The Art of Videogames, Tavinor cites on page 177 the cluster definition given by aesthetician Berys Gaut, which had stated that the following properties counts toward something’s being a work of art (and the absence of which counts against its being art): (1) possessing positive aesthetic properties, such as being beautiful, graceful, or elegant (properties which ground a capacity to give sensuous pleasure); (2) being expressive of emotion; (3) being intellectually challenging (i.e., questioning received views and modes of thought); (4) being formally complex and coherent; (5) having a capacity to convey complex meanings; (6) exhibiting an individual point of view; (7) being an exercise of creative imagination (being original); (8) being an artifact or performance which is the product of a high degree of skill; (9) belonging to an established artistic form (music, painting, film, etc.); and (10) being the product of an intention to make a work of art. Tavinor emphasises that Gaut is not necessarily committed to these ten conditions in their particularity, only that they are the kind of conditions that should make up a successful cluster account of art. Clearly, Tavinor appears to share the view that such existing cluster theories are broadly correct in their articulation of such conditions, even if they reserve the right for themselves to make revisions on finer points. The application of this approach leads him to preclude games that have been recognized as classics, such as Space Invaders (1978, Taito) and 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from artistic status. This is because they only have very partial overlap with the cluster theory. About Red Dead Redemption, Tavinor says the following in a chapter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 (p.60): Red Dead Redemption is frequently and justly held up as a high point of recent game art, but even in this game the drama and narrative is a rather derivative and often ham-fisted approximation of the Western genre; treated as a film, it is firmly B grade. It is an unexceptionable statemen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found in video games are often of poor quality. Moreo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single instance where these aspects reach the heights of refinement they do in the confirmed arts. In other words, Red Dead Redemption appears to be judged primarily with regard to its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These elements can be more easily accommodated in cluster theories than may be the case with the feel or the rhythm of the gameplay experience as a product of its ‘interactivity’ (or some other framing of its distinctive qualities). Thus, although Tavinor believes that computer games should be treated, as a form of art, on their own terms, and not simply seen as derivative forms of pre-existing types, the reality of his applying a cluster theory amounts exactly to applying a list of qualities that come from extant theories of art. As such, these qualities were formulated in a cultural and historical milieu in which the candidacy of computer games as art, or even as capable of fostering experiences worthy of aesthetic consideration, were not genuinely entertained. Tavinor’s philosophical methodology determined the result. Are artists who work with games interested in gameplay? It is not just existing philosophical frameworks that have had a hard time with making sense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The art world has tended to exhibit computer games by presenting them in the neutral context of a historical overview, which sidesteps the issue of the qualities of their gameplay. The first UK exhibition to show games was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2002. 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lso took a historical approach in 2012 with The Art of Video Games, featuring games from Combat (1977) to LittleBigPlanet 2 (2011). Alternatively, other strategies include foregrounding commonly understood aspects of games such as the playable avatar, the premise of inhabiting a virtual world, or the representational aspects of games. The American artist Cory Arcangel is known for his conceptual focus on the visual aspects of computer games. His works rank amongst the most widely known ‘game-related art’, having been exhibited at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Whitney Museum and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 Chicago. One of Arcangel’s most celebrated pieces is his Super Mario Clouds, a video installation of the 1983 game Super Mario Bros. modded so as to be stripped of everything except the cyan sky and white 8-bit clouds game clouds drifting across it. There is no Mario, no koopa troopas, no goombas. Gameplay has been exorcised in favour of visual contemplation. In a similar vein, Arcangel’s 2011 exhibition at the Barbican called Beat the Champ, an installation that featured fourteen bowling games (from the 1970s to the 2000s) in chronological order, precluded gameplay( https://www.barbican.org.uk/whats-on/2011/event/cory-arcangel-beat-the-champ) . As the viewer walks through the space, the sounds that the encounter are not ones of bowling ball striking pins but the whir of ‘gutter balls’ as each of the games has been programmed by Arcangel so that the bowler does not score a single point. Thus, the gallery goer encounters the kind of authorial control lauded by Ebert. They are confronted with the audio-visual dimensions of failure in bowling games, designed to elicit a series of subsequent reflections. But when se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it is a determined failure that is shorn from social and gaming context that would give failure meaning. The presence of the consoles themselves at the exhibition – the gameplay on show are not mere recordings – further underscores your inability to play the games themselves. This is an inability to experience the tensions and anxieties involved in the gameplay, the dance of fingers on buttons, the acclimatization to gaming rhythms, the inevitable frustrations, and the judgment of which game might offer the most compelling gameplay and why this may be so.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artwork here is what Arcangel did with the games and how he displayed them. As with Super Mario Clouds, the claim to art lies in the conceptual and the visual aspects of the display – a language familiar to the art world. It is most certainly not the games themselves. The embodied challenges of the gameplay as an experience also do not feature.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Robbie Cooper’s installation Immersion (2008), on the other hand, does take gameplay as a point of interest. It documented the embodied reactions of users of digital media across the world( https://www.scienceandmediamuseum.org.uk/what-was-on/robbie-cooper-immersion) . A prominent component of this consists of children playing computer games. The high-definition video capture of the players’ faces (the camera is in the position of the screen so the players seems to look directly at u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can peer into the moment-by-moment mental states of the players. Although we cannot see the changing displays, we are able to draw correspondences between the sounds emanating from the game and the players’ facial expression and bodily postures. One girl is playing the fighting game Tekken 5: Dark Resurrection(2005, Namco). There are sounds accompanying the special effects as blows connect, as well as the grunts and yowls of the characters. We can piece together the unfolding action, since anyone who has played Tekken will remember which moves trigger which sounds. We see Cooper’s subjects’ bodily, emotional, and cognitive sense-making in process, how the action has been enacted by the player and how it then affects the player in the machinic loop between player and game that is gameplay. Yet while Cooper is able to bring our attention to the complexity of the players’ experiences in question here and how they are bound up with their bodily being in the world, he is not able to shed any further light on them. He holds up a mirror but does not comment.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Indie game makers have pushed our gaming experiences by challenging existing gaming conventions, by having us see what has been normalized within genres as accepted practice by players and developers to fit a model of ‘good gameplay’. Thus, they offer their commentaries on what has gone stale in the status quo of game design and what else we might have instead, what alternatives experiences are possible. Of course, larger developers have also done this; my contribution here is not to attempt a history of such innovations. There are innumerable indie examples to draw from here, and they have all been discussed at length by others elsewhere so I will keep this very short. Undertale (2015, Toby Fox) forced us to confront our own assumptions around the RPG genre by underscoring that what we thought was the only way in any situation might not in fact be the only one (and may indeed not be the only way for gameplay to occur); Braid (2008, Number None) opened up avenues for considerations of time-based mechanics, for thinking about causation that has influenced many other games; The 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 riffed on choice and freedom through the limits of replayability in order to question how freedom in games might ultimately be rather limited;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 tested the player’s relationship with themselves – whether they were able to ‘get over it’ or whether they were entrapped to exact unforgiving expectations on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ir own egos or self-identification as ‘hardcore gamers’. These and other games have provoked reflection on the gameplay experience. My point, however, is certainly not that we should await such thoughtful offerings and to pin all expectations of claims to artistic status and aesthetic experience on them. A deepening of the gameplay experience The Deweyan project called for an integration of art and life, which is something that is only possible when we are able to, as a community, bring the attention that we might reserve for art to everyday life. This is no small challenge. In this essay, I have been talking about the gameplay ‘experience’ and the need to deepen it. The best way to do this is for every individual to direct their attention to their own gaming experiences and to hone their ability to do so. This would be in keeping with the Deweyan idea of fostering a community of human beings that do not have their capacities divided into compartments corresponding to social norms. I can attempt to sketch out some general aspects of gameplay experience which are shared across a range of games, acknowledging that these descriptive generalizations are only pale shadows of the specific experiences that individuals actually have under specific circumstances: there is the joy in seeing our gradual skill-development as we internalize the game mechanics and come to act and respond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that we have inferred, which are also principles that we adapt over time; there is the strategic appraisal of different choices and the speculation over their possible outcomes; there is the strain in the exercise of memory in which pieces of information are selectively recalled or forgotten as they become relevant or obsolete; there is the intelligent but non-conscious focusing of attention to some moving stimuli and not others, a keeping track of the complex and ever-shifting landscape of moving opportunities and threats; there is an appreciation for the ebb and flow of the gameplay, for periods of rest and moments of being on the brink of loss or victory; there is a keenly honed spatial and temporal awareness applicable to specific contexts such as certain levels, where the action of a split-second condenses some possibilities and severs others; and finally, there is the pleasure in the ability to act automatically, intuitively, masterfully, in serene moments where control is both relinquished and yet exercised. It is the case that we can often be amnesiac with respect to our gameplay experiences. We play the game, relegating the experience to that of mere ‘fun’ in our own head, and then learn to forget about it afterwards. This is because we have not attempted to apply the aesthetic perspective to what we do not think is ‘art’. Alternatively, we might think about gaming only as a form of training to get better or of beating a challenge, measuring value by our progress in this respect. Instead, we might take time to mull over the contours and textures of our gameplay experiences, considering how they unfolded, how they are developing, how they might have been different, and what about them succeeded or failed to captivate us (and why). The demands of gameplay can of course make such reflections, in the moment of play, difficult. With greater proficiency in the game this becomes easier over time. Such accomplishment (both in the game and in attending to our experience) takes practice. As the philosopher of habit, Clare Carlisle has remarked, our attentiveness to thoughts, physical sensations and emotional responses can catch habit in the act and can lead to the cultivation of a connoisseurial sensitivity. Through this practice, we might come to a more refined understanding of the aesthetic value of gameplay experiences, in their complexity, and thus a deepening of our experience that will cascade into a greater appreciation of what games can potentially offer.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Feng Zhu Dr Feng Zhu is Lecturer in Games and Virtual Environments in the Department of Digital Humanities, King’s College London. He is interested in computer gameplay as a site from which to explore the intersection of power, subjectivity, and play. His research focuses on computer games and how we habituate ourselves through gameplay. In particular, it concerns forms of gameplay as longitudinal self-fashioning that may inculcate ambivalent forms of reflexivity and attention, some of which may be read in terms of an aesthetics of existence.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모든이에게 게임을! 국립재활원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인터뷰

    그 중에서도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자립생활지원기술연구팀은 보조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2020년부터 노인·장애인 보조기기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경제적 가치 부문과 사회적 가치 부문으로 나뉜다. 전자가 개인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해외 보조기기를 국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라면, 후자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 수요를 공모를 통해 파악하여 수요자와 함께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이다. < Back 모든이에게 게임을! 국립재활원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인터뷰 04 GG Vol. 22. 2. 10. 필자는 약 반 년의 기간 동안 “그레이 게이머 연구”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50대에서 70대를 망라하는 노인 게이머들의 게임 경험을 청취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60대 할머니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들었던 이야기였다. 평소 둔하고 무딘 손가락 때문에 애니팡 같은 쓰리매치 게임을 할 수 없었던 그 분은 펜슬이 달린 갤럭시 노트로 핸드폰을 바꾸면서 펜으로 꼭꼭 집어가며 원래는 할 수 없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즐거워하셨다. 이 일화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노년 게이머는 게임이 싫어서, 또는 게임의 재미를 몰라서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게임을 하는데 있어 자신의 신체에 잘 맞는 도구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 주목하여 모두가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위해 게임 보조기기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번 지면에서는 “누구나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슬로건 아래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게임 보조기기를 개발한 국립재활원의 보조기기 개발팀을 소개하고 프로젝트에 대해 나눈 대담을 소개할 예정이다. Q: 국립재활원과 보조기기 개발팀의 역할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일반 병원이 사고를 당한 환자들의 치료에 중점을 둔다면, 보건복지부 국립재활원은 사고에서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보조기기는 필수이다. 그 중에서도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자립생활지원기술연구팀은 보조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2020년부터 노인·장애인 보조기기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경제적 가치 부문과 사회적 가치 부문으로 나뉜다. 전자가 개인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해외 보조기기를 국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라면, 후자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 수요를 공모를 통해 파악하여 수요자와 함께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이다. * 노인·장애인과 함께 보조기기를 개발하는 국립재활원 열린제작실 전경 Q: 기존에도 재활을 위해 게임이 사용되는 사례가 있지 않았나? 그러한 “재활 게임”과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재활 게임은 재활 과정 자체를 좀 더 쉽게 거쳐갈 수 있게 고안된 기능성 게임이다. 재활을 위해서는 같은 동작을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한다. 이 과정을 좀 덜 지루하게 해낼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재활 게임이다. 반면,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는 장애인들이 게임 플레이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즉 ‘레저’의 의미에서의 게임을 위해 보조기기를 개발하였다. * 보조장비를 만들기 위해 열린제작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도구들. Q: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과 성과를 소개해달라.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는 2020년 말 뇌병변장애인(장애가 심한 뇌성마비)의 어머님 다섯 분이 “장애인도 게임할 수 있나요?” 라는 신청을 함께 해 주셔서 시작하였다. 그 이후 자조모임의 형태로 뇌병변장애인과 가족,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게임보조기기를 개발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회의, 워크숍과 사용성평가 등을 진행하면서 각 신청인에게 적합한 형태의 보조기기를 개발, 개조하였다. 특히 모임에서 집중하였던 것은 조작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기존의 게임과 컨트롤러는 뇌병변장애인이 사용하기에 지나치게 복잡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적합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는데 집중하였다. 간단한 조작으로도 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가진 독자적 컨트롤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물론 개발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호자나 활동지원사들이 그에 맞는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분들부터 게임 플레이에 익숙해져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의 성과를 취합한 결과 게임접근성 보조기기 12종(개발 10종, 개조 2종)을 개발하였고, 활용 매뉴얼 책자 ’누구나 게임을 할 수 있다’를 발간하였다. 책자는 추후 pdf파일 형식으로 무료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게임을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성취감을 얻고 간접경험을 얻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게임플레이가 장애인의 사회 복귀와 적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발견이자 수확이 아닐까. * 장애인의 기능수준을 고려하여 다양한 조이스틱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조작을 할 수 있는 게임 컨트롤러. 출처: 국립재활원 공식 유튜브 *게임 컨트롤러의 실물. Q: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게임 접근성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이유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앞서 사업 성과에서 소개했듯, 장애인들에게 있어 게임은 성취감을 주고 간접경험을 제공받으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장애인이 한 명의 인격체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 게임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굉장히 크다. 게임을 하다 보면 컴퓨터를 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직업 훈련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또 영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등, 게임으로 쌓이기 시작한 성취의 감각은 연이어 쌓여나가 삶에 대한 의지로 형태가 변한다. 또한 게임 접근성의 문제는 노년 게이머 문제 와도 결부되어 있다. 지금의 젊은 게이머들 또한 나이가 들 것이다. 노화에 따른 반응속도의 저하와 시력 저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에 대비하여 게임을 조작하는 플레이어가 처한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상상하고 그것을 지원할 방법을 찾아낼 상상력과 기술이 지금부터라도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Q: 게임 접근성을 위해 국내 게임 개발사 및 퍼블리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해외 사례를 참고했다. 놀랍게도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장애 형태를 지닌 사람들도 각자에 맞는 게임 보조기기를 통해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에 맞춰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장애인 게임과 관련된 연구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와 ‘로지텍의 Adaptive gaming kit (어댑티브 게이밍 키트)’, ‘Nintendo의 Flex Controller’ 등의 연구 인프라와 그 결과물이 사회에 잘 자리 잡혀 있었다.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 주로 콘솔 게임이 연구 대상이 된 것 또한 이러한 해외의 상황,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장애인 게이밍에 대한 국내 게임 산업의 무관심과 맞닿아 있다. 플레이어의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 해외 콘솔 게임과 다르게 (닌텐도 Wii의 경우, 영유아의 게임 플레이를 위한 접근성 설정을 지원한다) 국내 게임은 주로 PC게임과 스마트폰 게임으로 양분되어 있고, 어느 쪽도 이 게임들의 경험에 맞는 컨트롤러나 소프트웨어 차원의 접근성 지원은 전무했다. 프로젝트 참여자들 또한 국내 게임에 대한 반응이 더욱 좋았던 만큼, 국내 게임 제작사와 퍼블리셔들은 먼저 장애인 게이머와 노년 게이머 또한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게임에 잘 맞는 인터페이스가 게임 플레이의 경험을 더욱 높여주는 만큼 보다 다양한 게이머들이 처한 조건을 상상하고 구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Q: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이후 후속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어떤 연구가 가능할 것인가? 이전 질문과 이어서, PC게임이나 스마트폰 게임에 이식할 장애인용 컨트롤러를 개발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내 게임과 연계하여 진행한다면 더욱 뜻깊을 것이다. 더하여 이번에 진행된 프로젝트는 뇌병변장애인들만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분류하는 장애의 기준은 15가지나 된다. 다른 장애유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접근성과 컨트롤러 연구가 더 진행되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이번에 진행되었던 게임보조기기들이 상용제품으로 나와, 사용자들이 쉽게 구매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 보조기기연구개발팀은 게임보조기기 외에도 노인과 장애인의 여가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보조기기를 개발하고 있다. 사진은 다양한 그림도구를 휠체어에 부착하는 그림그리기 보조기기. * 입술로 움직이고 바람을 불면서 컴퓨터를 제어할 수 있는 입술마우스. 상용제품이 높은 가격으로 접근이 쉽지 않아 저비용 제작이 가능한 키트화에 성공했다. 시력이 나쁜 사람이 일상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 안경을 쓰는 것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라면, 장애인들이 보다 즐겁고 편안하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여러 보조기기를 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놓인 신체적 조건이 다르며,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일상을 위해 일정 정도 보조기기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지극히 모호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게이머 또한 각자 다른 신체적 조건 아래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깊이 고려한 게임이 설계되고 시장에 나왔을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진정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에서 소통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운 인디음악 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예술사회학 연구와 (공연)사진 촬영에 매진중이다. 라캉 정신분석 철학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영번역을 맡았다.

  •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 Back 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05 GG Vol. 22. 4. 10. 평등한 게임이라는 환상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이유로 게임에 접근조차 어려운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극 빈곤층 등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많은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어린 고수들에게 게임의 도道를 사사 받은 풋내기 성인들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어쨌거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은 오늘날 게임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재능하나로 돌파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지는 따져볼 일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을 배반하는 데이터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령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NBA(전미농구협회)를 가난한 흑인들이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는 반대다. NBA는 점차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이 가난한 선수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규칙을 지키는 등의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 ‘게임을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는 무시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을 놔두는 것은 책임방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런 개입들은 필연적으로 게임을 더 돈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Pay to win이라는, 돈을 많이 낼수록 강해지고 승리하는 게임들의 승승장구와, 하나의 게임을 잡다하게 쪼개서 팔아치우는 부분유료화의 전면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자녀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프로게이머 학원에 보내주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계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인성’논란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문제들은 앞선 예처럼 교육과 양육환경의 문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프로스포츠들에 비하면 아직은 덜 체계화 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만약 e-sports가 진짜로 다른 인기 스포츠들만큼의 위상을 획득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경쟁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티어로 알 수도 없고, 반영되지도 않는다. 엄마가 모욕이 된 세계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렇듯이, 게임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무차별적 모욕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평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욕이 진짜로 ‘무차별적’인지는 살펴봐야 한다. 박서련의 단편 소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2)은 동명의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무용을 전공할 뻔하고, 외국계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은 중산층 가정주부인 ‘당신’3)의 이야기를 다룬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게임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부모인 당신은 고민 끝에 게임과외를 떠올린다. 최초로 찾아온 것은 명문대를 다니며 챌린저 티어인 남자 대학생이다. 그는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나무라며 부모라도 아이가 하는 게임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을 가르쳐 주겠다던 그는 그걸 빌미로 손을 잡고 가슴에 팔꿈치를 갖다 대며 성추행을 한다. 이제 어리지로 순진하지도 않은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고, 단호하게 그를 내쫓는다. 불쾌감을 뒤로하고 새롭게 만난 과외선생은 다이아 티어의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이다. 당신은 그에게 여성적 매력이 없음을 안도하며 아이의 과외선생으로 낙점하지만, 그는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선생의 등쌀에 떠밀리듯 당신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재능이 있었다. 당신은 승리를 쌓아가며 오랜만에 온전한 성취감을 맛본다. 순식간에 아이의 티어인 브론즈를 넘어 골드에 진입한 당신은, 때마침 아이의 라이벌이 아이와 전교회장 출마를 두고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은 불신하는 아이를 이겨 실력을 입증하고, 아이의 라이벌을 게임으로 불러내 보기 좋게 압살해버린다. 하지만 사실 게임을 그다지 잘 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라이벌은 패배에 승복하지 않고 아이의 계정에 접속해 있는 당신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알게 된다. 게임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욕설로 받아들여지고, 당신이 엄마라고 타이핑할 때마다 ‘XX’가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아이의 라이벌은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너희 엄마를 외치지만, 게임은 엄마인 당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이긴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패배감을 맛본다. 게임, 엄마, 여성 이 소설은 여성과 게임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례들을 엮어 한편의 악몽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악몽은 엄마의 것이다. 소설 속의 ‘당신’은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엄마이고, 자녀 양육에 관한 최신의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중산층이다. 훈육과 금지보다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고, 과도한 애정관계를 형성해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소위 깨인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은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은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고,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의존적이고 버릇없게 자라고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는 미숙한 어른임에도, 자신이 아이를 빈틈없이 케어하고 있다는 허위의 자족감에 빠져 있다. 따라서 소설은 엄마인 당신을 온전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빠져있는 함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심지어 공모하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게임문화에서 엄마의 표준적인 모습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는 존재이지만, 소설 속의 당신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의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조망하고 싶어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게임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지든 방임이든 개입이든 간에 게임은 엄마들에게 불안의 영역이다. 그것이 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나 연구들은 온전한 논의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말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마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게임에 맞서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역할들을 엄마가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양육과 돌봄이라는 문제가 엄마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일’로 여겨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삶이 평가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학업성적이나, 일의 성과 같은 것에 비해 양육은 지극히 평가가 어렵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 정도가 성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잘못이 되고야 만다.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양육의 책임을 모든 가족과 사회에 실질적으로 분산하고, 엄마들에게 합당한 사회적 인정과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마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운다. 직장에서는 자기만 조직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밖에서는 이기적인 ‘맘충’이고, 가족들에게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엄마이자 아내다. 게임에 대한 ‘엄마’들의 적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신의 의무는 아무것도 줄어든 것이 없는데, 남편과 자녀가 시간과 돈을 게임이라는 잘 알지도 못할 것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의 악몽은 여자에 대한 것이다. 게임에서 가장 심한의 모욕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형이다. 게임을 못한 것이 남자일지라도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엄마와 전국의 아무 상관없는 ‘혜지’들이고, 평생을 모쏠로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남자친구 따라서’ 게임을 시작한 줏대 없는 게이머 취급을 당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남자게이머들이 여자게이머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여긴다. 엄마, 선생님, 여가부(!)처럼 여자는 게임을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게이머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저도 그 여성은 나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며, 게임을 ‘가르쳐’줘야할 존재일 것이라는 가정이 붙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실력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에 휩싸이고, 폄훼당하기 일쑤다. 자신이 그 여성게이머보다 게임을 못하더라도, 게임실력을 의심하고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남성게이머들이 넘쳐난다. 게임문화의 공식적인 입장은 ‘게임만 잘하면 되지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이지만, 이것으로는 게임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딜루트는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서 많은 게임커뮤니티의 주류담론들이 모두를 동등한 게이머로만 대해야 하며, 친목질을 방지하고 성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드러내선 안 되는 성별은 오직 ‘여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지칭하고, 여성 게이머 이슈에서는 입을 모아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그런 것에 문제를 제기할 때 만 “남자건 여자건 그냥 각자 게임을 하면 그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4) 최근 몇 년간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게임업계의 성차별, 남성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아시아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흐름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게이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책임 있는 단위들이 하다못해 말이라도 차별에 대한 반대를 뚜렷하게 표하는데 반해, 한국과 아시아는 모든 것을 소비자-게이머들의 뜻이라며 회피하기에 바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일부 남성게이머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앞장서서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오늘날의 게임문화는 엄마에게도 여성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이렇게 특정한 남성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새로움도 품을 수 없음을, 그래서 결국에는 고립되고 도태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당신’은 게임을 통해 그간 얻지 못했던 승리감을 맛본다. 그가 현실에서 다뤄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고, 끝나지도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짧은 시간동안 승리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당신은 패배 역시 기뻤을지 모른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조차 없는 세상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판정을 내려주고, 심지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게임은 이미 현실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로 침식되어 있었고, 게임은 그를 “XX”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임의 세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 할 수 없고,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협곡에서도 똑같은 기울기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게임에서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지겨워진다. 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 기어코 현실의 가장 나쁜 것들을 끌고 들어오고야 마는가? 왜 누군가를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리는 것에서 음침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게임하는 것 대신에 진짜게이머와 가짜게이머를 구분하는 의미 없는 언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게임은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더 약탈적인 비즈니스모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지와 무시, 독성을 가득 머금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커뮤니티문화. 이 흐름들을 멈출 수 없다면, 게임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우리와 닮은 ‘게임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기 전에 게임을 되찾자. 이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1)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더 퀘스트, 2018.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3) 당신은 이름이 아닌 2인칭 대명사이다. 4)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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