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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화 불량 커비의 사물 머금기

    커비는 왜 인간이 사물을 쓰던 방식과 다른 접근을 취할까? 커비가 사물과 상호 작용하게 된 배경에는 이번 〈디스커버리〉가 펼쳐지는 무대에 있다. 〈디스커버리〉에서 커비가 도착한 곳은 커비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충돌한 곳이다. 이제까지 커비의 모험이 주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별 모양의 행성 팝스타에서 이루어졌다면, 〈디스커버리〉에서 커비가 종횡무진하는 이 세계는 플레이어에게 어딘가 익숙하다. < Back 소화 불량 커비의 사물 머금기 06 GG Vol. 22. 6. 10. 신세계에서 발견한 물건을 베어 물면 커비가 변형! 다양한 액션으로 대모험! 1) * 커비의 다양한 머금기 변형 종류 〈별의 커비 디스커버리〉는 2022년 3월 25일 커비 시리즈의 30주년을 맞이하여 발매된 게임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커비를 소개한다. 횡스크롤 게임 플레이에서 벗어난 첫 번째 전방향 3D 액션 게임으로 큰 화제가 된 〈디스커버리〉는 출시 2주만에 210만 장이 판매되는 등 현 시점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다. 난이도를 고려하여 섬세하게 개발된 플레이 시점, 이전과는 차별화된 스테이지 디자인 등 여러 요소들이 이목을 끌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것은 이번 게임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커비의 머금기 변형이다. 영어로는 ‘마우스풀 모드(Mouthful Mode)’, 한국어로는 ‘머금기’라고 불리는 상호 작용은 커비가 사물을 빨아들이다 반 머금을 때 특정한 행동이 가능해지는 특수한 능력이다. * 물건을 반만 머금기 직전 자동차를 다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커비의 모습 게임은 평화롭게 자신의 행성을 산책하던 커비가 하늘에 난 구멍이 만든 푸른색의 폭풍에 휘말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포털을 통해 미지의 세계에 도착한 커비는 스테이지를 활보하다가 길 한가운데에 뒹굴고 있는 사물을 만나게 된다. 다른 것과 달리 반짝이는 이 사물은 커비의 접근을 유도한다. 사물 앞에서 커비는 관성적으로 자신이 늘 하던 빨아들이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한 입에 모두 삼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커비는 이내 반 정도를 뱉어낸다. 자동차, 꼬깔콘, 고리, 전구, 계단, 지게차 등을 만나며, 우주와 같은 자신의 위장 속에 사물을 삼키지 못한 커비의 입과 몸은 사물의 형태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안되어 특정한 능력을 보유하지 않는 사물을 머금으면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까? 불, 물, 칼, 폭탄 던지기와 같은 명확한 정체성이 없는 사물이 커비와 접촉하면 커비는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물과 커비가 맺는 특별한 관계가 생성된다. 이는 더 나아가 게임 내에 사물이 존재하는 양상에 대한 재고찰을 돕고 플레이어와 사물이 주체와 객체로 고착화되는 공식을 뒤집으면서 다른 상호 작용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머금기 변형이 등장한 배경에는 2D에서 3D로의 전환이 있다. 2020년, 닌텐도 스위치용으로 발매된 전작 〈커비 파이터즈 2〉만 해도 횡스크롤 스타일을 고수하였다. 개발진들은 2D 커비의 귀여운 특성을 살리면서도 이를 어떻게 3D 액션 플레이로 연계할 것인가 고민하였고, 이 과정에서 머금기 변형이 새로운 능력으로 등장하였다. 2) 다양한 것을 먹고 늘어났다 줄어드는 모습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기묘한 커비의 개성을 3D로 구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3D에서는 2D와 달리 상하좌우의 부피감을 인지할 수 있기에 넘어지기, 가속하기, 늘어나기, 사방으로 움직이기 등 다양한 방식의 움직임을 플레이 요소에 더하는 것이 장려되며, 이러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해 주는 장치로 사물이 사용된 것이다. 제작진의 의도와 다르게 머금기 변형은 단순히 3D 효과를 부각하는 것을 넘어 게임 내에서 사물의 위상을 바꾸었다. 사물은 커비의 능력을 경유하여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번역되고, 주변 환경을 연결하기도, 또 해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을 자세히 들여다보기에 앞서 짚어야 할 것은, 커비의 머금기 변형은 변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커비의 위장은 흔히 우주와 같이 무한하다고 알려져왔으나 이번 시리즈에서는 사물을 온전하게 흡수하지 못하며, 대상을 완전히 모방하고 변신하려는 커비의 시도는 실패한다. * 캡처 능력을 활용하여 굼바에 빙의한 마리오 〈디스커버리〉가 참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와 비교하면 변신과 변형의 차이가 더 명확해진다. 커비의 3D 월드는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로부터 스테이지 구성 혹은 시점 변화 등의 요소를 계승하였다. 머금기 또한 마리오의 ‘캡처’ 능력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물을 이용하여 퍼즐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캡처는 마리오가 자신의 모자인 캐피를 던져 특정한 대상에 맞추면 그 대상으로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 기술은 주로 적에 빙의했을 뿐 아니라 마리오가 본래 지니고 있던 고유한 특성에서 기인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또한 완전한 빙의로 인해 마리오스러운 플레이를 운용하는 것에 실패한다. 실제로 이 캡처 능력은 마리오의 캐릭터성을 중시 여기는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반면 커비의 머금기는 커비의 정체성과도 같은 흡입하기와 뱉기를 활용하면서도 더 나아간다. 사물을 ‘머금었다’라는 제약은 커비의 사물-되기를 방지한다. 사물을 머금은 커비는 커비도 사물도 아닌, 커비-사물 혹은 사물-커비의 중간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게 된다.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어 버린 커비의 상태는 커비 본래의 특성을 플레이어에게 이해시키면서도 오히려 역으로 플레이에 재미를 부여한다. 사물을 뱉고 나면 다시 탄력적으로 원래의 크기와 능력으로 돌아가는 커비를 통해 이 일시적인 결합은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강조한다. 커비의 번역은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커비는 처음 보는 사물을 낯선 방식으로 쓴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사물의 용도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고 커비만의 방식으로 사물들을 번역한다. 이는 더 나아가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쓰임을 익히게 하고 게임 내의 필수적인 요소로 이해하게 만든다. ‘플레이어 - 사물 - 커비’의 삼자관계는 플레이어가 커비를 조종하는 일방향적인 관계를 다각화한다. 커비는 왜 인간이 사물을 쓰던 방식과 다른 접근을 취할까? 커비가 사물과 상호 작용하게 된 배경에는 이번 〈디스커버리〉가 펼쳐지는 무대에 있다. 〈디스커버리〉에서 커비가 도착한 곳은 커비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충돌한 곳이다. 이제까지 커비의 모험이 주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별 모양의 행성 팝스타에서 이루어졌다면, 〈디스커버리〉에서 커비가 종횡무진하는 이 세계는 플레이어에게 어딘가 익숙하다. 커비가 마주치는 잔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인류 문명이 멸망한 뒤 자연이 울창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곳곳에는 허름한 쇼핑몰, 놀이 기구만 살아남은 놀이공원, 폐공장, 빈 도심 등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인류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동차, 토관, 자판기 등 여러 사물만이 남아 있다. 커비의 세계에는 부재한 사물들이다. 따라서 커비는 본래의 용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물을 조우하며,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빨아들이기를 통해 이용한다. 사물은 정해진 능력이 없고 목적에 따라 달리 사용되기 때문에 커비가 사물을 빨아들이면 능력을 복사하는 대신 사물의 일부 특성이 소환된다. 커비는 이를 자신의 쓰임새에 맞게 용도를 전환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머금기는 가속의 기능을 활용하여 막힌 곳을 뚫는 데에 사용하고, 삼각 머금기로는 파열된 수도관이나 금이 간 바닥에 구멍을 뚫고, 돔 머금기는 저수 탱크 열기, 로커 머금기는 버둥거려서 길 만들기, 고리 머금기는 풍력을 이용한 동력원으로 사용하거나 바람으로 적 날리기, 자판기 머금기는 캔을 뱉어 길을 뚫는다든지 적 물리치기, 계단 머금기는 옆 혹은 앞으로 넘어지기, 토관 머금기는 데굴데굴 구르기, 작업차 머금기는 높은 곳에 닿기, 아치 머금기는 글라이더로 변형하여 비행하기 등이 있다. * 간판에서 떨어진 철자 O를 고리로 머금기 위해 다가가는 커비 * 트래픽콘 외에도 삼각형 모양의 아이스크림 조각상 하단부도 삼각 머금기의 대상이다 본래 트래픽콘이 차량을 통제하거나 위험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과 달리, 커비는 이를 원뿔로 인식하고 금이 간 바닥이나 수도관을 터트려 길을 만든다. 또한 커비는 트래픽콘을 도움닫기 삼아 높은 지형물에 올라가기 위해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높게 점프하는 커비의 본래 능력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번역된 사물의 쓰임이다. 한편 고리 머금기의 경우에는 보다 다양한 사물로부터 비롯되는데 바닥에 떨어진 글자, 시계 또한 그 대상이 된다. 본래의 용도가 무엇이었든 커비는 고리 모양이라면 이를 머금어 바람을 불어 보트를 움직이거나 적을 날려버리며, 이러한 고리의 사용법은 커비의 내뱉는 능력에서 파생된다. 시계의 기능이나 철자 O로 읽는 것은 커비의 능력이나 필요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다. 마찬가지로 트래픽콘과 아이스크림 콘은 본래 사물의 목적, 기능과 관계없이 커비에게는 동일한 물체로 인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로 이해되었던 사물은 커비의 언어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지고 끝없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며 역할을 부여받는다. 번역은 다른 체계의 대상을 같게 만드는 동시에 차이를 형성하는 과정이며 네트워크를 건설한다. 3) 기존의 연결 고리를 끊고 다른 요소들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커비와 사물의 만남은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게임에서 사물로 변형된 커비가 도달할 수 있는 곳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디스커버리〉에는 커비가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목적 외에도, 더 좋은 설계도를 획득하거나 실종된 웨이들 디를 구하는 미션 등이 주어진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 장치들을 통과해야 하는데, 사물을 머금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길들이 여럿 있다. 사물을 머금을 때 비로소 위로 도달할 수 있고, 막혔던 길이 뚫리거나 숨겨졌던 길을 발견하는 등의 과정은 특정한 사물로 인해서 발생하는 네트워크를 가시화한다. 유니티의 매뉴얼에 따르면 게임 내 사물은 그 개체 자체로는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4) 사물은 게임에서 항상 몰입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사물과의 상호 작용성은 플레이어의 몰입을 이끄는 요소로 여겨졌다. 몰입을 더하기 위해 게임의 사물들은 주로 현실의 형태와 물리 엔진을 모사하는 방식으로 재현되어 왔다. 플레이어의 몰입과 관심을 계속해서 붙잡기 위해 최대한 우리 세계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직관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플레이어가 게임의 주요한 서사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위함도 있다. 따라서 게임 그래픽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여전히 고전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 〈디스커버리〉에서 사물의 문법을 번역하고 비틀어 상이한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중심으로 두고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고안하게 한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발견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고 360도 돌려 글귀를 읽는 방식과는 상이하다. 이를 테면 게임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물과의 상호작용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블랙박스(black-box)를 빗겨나갈 수 있게 해 준다. 블랙-박스는 사람들이 외부의 입-출력에만 의존하여 내부의 네트워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며 다종의 행위자들이 연루된 네트워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네트워크에 점점 무관심해지는 것을 일컫는다. 5) * 머금기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는 트래픽콘을 내려 찍는 감각으로 인식하게 된다 연결과 해체의 연속적인 과정을 통해 게임 내에서 사물은 단순히 퍼즐의 한 요소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전체이자 요소로 등장한다. 게임이 기묘하게 비트는 현실의 규칙들은 오히려 사물과의 관계를 재고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사용법을 익히도록 한다. 이처럼 사물의 관계 맺기 양식을 다양화하는 게임들은 플레이어의 몰입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이끈다. 특히 이번 커비 게임에서 사물의 지위는 단순히 부차적인 힌트나 아이템과 같은 보관의 용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머금어 창조적으로 이용하여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방식을 통해 재고찰된다. 계단이 높은 곳을 걸어서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옆으로 쓰러져 눕는 사물이 되었을 때 계단 끝의 모서리, 딱딱함, 둔탁함은 다른 감각으로 찾아온다. 트래픽콘을 통행 금지의 표식이 아닌 뒤집은 모서리가 내리찍을 지면과 연결하여 인식하게 된다. 소화 불량 상태를 벗어난 커비의 모습이 괜히 아쉬워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는 동료 멜트미러와의 대화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밝힙니다. 1) “Kirby Speical Ability” 『星のカービィ』公式ポータルサイト, https://www.kirby.jp/ability/special/mouthful-mode.html. 2022년 5월 30일 접속. 2) “개발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닌텐도, 2022년 3월 24일. https://www.nintendo.co.kr/interview/arzga/03.php 2022년 5월 29일 접속. 3) 브뤼노 라투르,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역 (서울: 이음, 2010), p. 25. 4) “Unity Manual: GameObjects”. Unity Documentation, 2021년 3월. https://docs.unity3d.com/Manual/GameObjects.html 2022년 5월 30일 접속. 5) 브뤼노 라투르, 『인간·사물·동맹』, 홍성욱 역 (서울: 이음, 2010), p. 24.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획자) 박유진 시각 문화의 경계 안과 밖에서 읽고, 쓰고, 상상한다. 다른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방법론에 관심이 많으며 플랫폼을 만들고 매개자로부터 배우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자 한다. 현재는 상상력을 통해 현실에 균열을 내는 실천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아레시보 Arecibo》를 기획했다. (@_ehpark)

  • [논문세미나] 평행하다가도 뒤엉키는 게임과 현실의 시간: "Introduction to Game Time". In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게임에 열중하다가 시계를 봤을 때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가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반대로 온라인 게임을 할 때면 많은 양의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몬스터가 다시 리젠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우두커니 한 자리에 서있는 그 순간은 몇 초밖에 되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지난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어떤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기 때문에 게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면이 있다. < Back [논문세미나] 평행하다가도 뒤엉키는 게임과 현실의 시간: "Introduction to Game Time". In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21 GG Vol. 24. 12. 10. 게임에 열중하다가 시계를 봤을 때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가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반대로 온라인 게임을 할 때면 많은 양의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몬스터가 다시 리젠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우두커니 한 자리에 서있는 그 순간은 몇 초밖에 되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지난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어떤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기 때문에 게임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흘러가는 면이 있다. 온라인 게임이 보편화된 지금, 공통의 시간을 다시금 다르게 쪼개는 것은 네트워크 환경이다. 네트워크가 원활하지 않는 사람의 게임 세계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흘러간다. 시차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캐릭터가 갑자기 몇 보 순간이동을 하기도 하고, 팀 플레이에 지장을 주거나 대화를 할 때 갑자기 뒷북을 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렇듯 현실 세계와 게임 세계의 시간이 서로 똑같이 흘러가지 않는데, 굉장히 흥미롭고 독특한 지점이다. 어떤 게임에서 두 세계의 시간은 평행하게 흘러가지만, 어떤 게임에서는 서로 뒤엉켜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과학과 철학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탐구의 대상이 되었듯 게임학에서도 시간을 본질적으로 개념화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게임 시간에 대한 소개 오늘 소개할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게임 시간에 대한 소개”(2004)로, 게임 시간의 개념화를 시도했던 초기 논의에 해당된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게임학이 막 학문의 한 분야로 정립되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그 당시는 게임이 소설 및 영화와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질문하기 바빴던 때였고, 이 글의 저자인 예스퍼 율은 다른 문화와 다르게 게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무엇일까 고심했다. 하여 독자적인 이론 구축의 시도로서 게임의 시간성에 대해 논의를 더했다. 게임의 시간성이란 수치화되거나 구조화된 시간만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경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포함한다. 특히 게임 저장이라는 기능은 한 시점을 고정하로 계속 회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매체에서 관찰되지 않는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다. 글의 전문은 예스퍼 율의 개인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 http://www.jesperjuul.net/text/timetoplay/ ) 게임 시간성의 기본 개념: 플레이 시간, 이벤트 시간, 매핑 저자에 따르면, 게임에서 시간은 두 가지 주요 차원으로 작동한다. 첫째는 플레이 시간(play time)으로, 플레이어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시간이다. 둘째는 이벤트 시간(event time)으로, 게임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서사적 또는 메커니즘적 시간이다. 게임 세계 안과 밖의 이 두 가지 시간. 이들의 관계는 게임 장르와 설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체스나 테트리스 같은 게임은,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에 몰입하기보다 규칙에 따른 게임 상태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이러한 게임을 ‘추상적 게임’이라고 부르는데, 추상적 게임에서 시간은 플레이어가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 시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게임를 한 수 한 수 두는 지금 이 순간이 시간성인 것이다. 반면 퀘이크3이나 언리얼 토너먼트(오늘날 게임으로 따지면 배틀그라운드 또는 발로란트)와 같은 실시간 FPS에서 플레이어가 발사 버튼을 누르면 즉시 총이 발사된다. 현실과 게임의 시간은 동기화되어 있고 마치 평행 세계처럼 작동한다. 앞서 언급한 개념을 가져오면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이 서로 1:1 매칭되는 것이다. 심시티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또 다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현실 플레이에서 몇 분 남짓한 시간이 게임에서 1년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이런 게임에서 시간의 속도를 조정하는 버튼을 빠르게 돌리면 더 빨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를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이 각각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고 볼 수 있고, 아니면 다른 단위의 척도로 작동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 간 매칭되는 현상을 매핑(mapping)이라고 부른다. 액션 게임에서는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이 1:1로 매핑되어 실시간으로 동일하게 작동하지만,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도를 선택함으로써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 간의 관계를 조정할 수 있다. 매핑되는 시간은 단순히 기술적인 동기화에 그치지 않고, 게임의 설정에 따라 중세 시대나 근미래 등 다양한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15세기를 배경으로 플레이어가 시간 속도를 가속해 이벤트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지금의 1분이 1400년대 배경의 10일이 될 수 있는 매핑의 개념은 게임의 경험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시간의 단절과 역행: 컷신, 레벨, 유물 게임에서 컷신이란, 이야기 설정을 설명하거나 미션을 제시하기 위해 중간에 재생되는 영상이다. 종종 미션을 완료했을 때 보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컷신이 재생되고 있을 때 플레이어는 작동을 멈추고 감상을 하게 되며, 그 사이에 서사는 진행되기 때문에 이벤트 시간은 흘러간다. 컷신은 플레이 시간에서 이벤트 시간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벤트 시간을 플레이어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며,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동안에도 서사를 전달함으로써 컷신은 게임 경험에 몰입감을 부여하면서도 플레이어에게 잠시 쉬어갈 틈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으며, 시간의 단절은 게임의 서사와 메커니즘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고도 볼 수 있다. 컷신과 함께 게임이란 매체의 독특한 특성인 게임의 레벨 구조는, 게임에서 시간의 흐름을 재편성한다.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이 일치하더라도, 레벨 전환 시점이나 로딩 중에는 두 시간이 모두 멈추게 된다. 때에 따라 로딩 시점을 컷신으로 대체하여 시간이 멈추는 느낌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하는데, 아케이드 게임 ‘펭고’는 레벨 사이의 전환을 컷신으로 매꾼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레벨을 완료하면 펭귄들이 춤을 추며 축하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시간의 흐름을 끊기지 않도록 했다. 저자는 레벨 구조가 소설이나 영화 같은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에는 없는 불연속적인 구조라고 하머, 어떻게 보면 스포츠의 라운드 개념과도 비슷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독특한 매체적 특징인 점을 어필한다. 아무래도 2000년대 초반은 아직 게임학이 성립이 안되었던 때라서 이런 지점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레벨은 게임 속에서 경험의 단위로 작용하며, 플레이어에게 새롭게 설정된 시간과 공간을 탐험하도록 독려한다. 그 외에도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특정 유물과 상호작용하기를 선택하여 시간을 이동하거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저자가 예로 드는 90년대 게임 <미스트>에서도 그랬듯, 최근의 게임 <오브라딘 호의 귀환>에서 플레이어는 타임머신 같은 장치를 사용해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방식은 과거라는 시간대를 플레이어가 직접 탐험하게 하면서, 시간의 흐름이 일차원적인 요소가 아니라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저자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턴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의 경우, 플레이 시간이 지속적으로 흘러가지만 턴을 종료하기 전까지 게임의 이벤트 시간은 중단되기 때문에 플레이 타임과 이벤트 시간 간의 단절이 발생하는 또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다. 게임 저장: 시간을 조작하는 행위 게임 저장 기능은 플레이어가 특정 순간으로 돌아가 이전의 실패를 극복하거나 게임 진행을 반복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게임 경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통제력을 부여한다. 플레이어는 이를 통해 플레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하거나 게임의 긴장감을 낮추고 난이도를 조정할 수 있다. 저자는 게임 저장을 게임의 시간성에 대한 중요한 설계 요소로 거론하면서, 이는 마치 ‘시간을 조작하는 행위’와 같다고 설명한다. 또한, 온라인 게임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 저장 기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버와 항시 소통하여 매 상태가 저장되는 케이스이고, 플레이어는 온라인 게임에서 저장된 것을 다시 로드하거나 하는 통제 가능성은 없다. 온라인 게임들은 시간을 되돌리는 옵션을 허용하지 않으며, 플레이어는 현재의 시간을 기반으로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대신, 게임 내에서 저장 가능한 것은 플레이어가 획득한 아이템뿐이다. 저자는 추가로, 저장을 반드시 시켜야만 하는 게임 디자인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면서 게임 디자이너 크리스 크로포드의 말을 인용한다. 크로포드는 정상적인 게임 디자인이라면 중간에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플레이어는 게임을 잘하든 못하든 끝까지 통과할 수 있어야 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플레이 도중에 죽음을 강요하고 ‘재장전’을 반복하게 만드는 게임은 디자인적으로 미흡하다는 것이다. 경험으로서의 시간: 죽은 시간, 몰입된 시간 마지막으로 저자는 플레이어가 게임의 시간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경험하는지를 논의한다. 그는 ‘죽은 시간’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분석하며,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의미 없이 기다리거나 반복 작업에 시간을 들이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게임에서 시간이란 단순히 플레이 시간과 이벤트 시간의 관계를 넘어서, 플레이어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에서도 중요하다. 이러한 시간은 게임의 맥락에서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에게는 종종 즐겁지 않은 경험으로 남는다. 몰입(flow)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이 게임 시간 경험의 중요한 측면을 설명한다고 주장하지만, 게임 시간의 복잡성을 완전히 포착하지는 못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몰입 상태란 플레이어가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몰입한 상태로, 몇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말한다. 이 경험은 플레이어의 능력과 게임 난이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발생하는데, 너무 어려운 게임은 좌절과 불안을 유발하고, 너무 쉬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죽은 시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물론, 플로우 개념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하더라도, 게임의 모든 시간 경험을 완벽히 정의할 수는 없다. 게임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죽은 시간을 설계해 몰입을 조율하거나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결국, 시간은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의 가장 본질적인 층위에서 작동하며, 그 주관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 시간 논의의 과거와 현재 문학에서 채트먼이 스토리 시간과 담화 시간을 나누며 서사구조를 설명했듯, 게임학이 한창 성립될 때 문학과 다른 논의를 펼치기 위해 저자 예스퍼 율은 이 글을 통해 게임 시간을 개념화했다. 게임의 시간성은 플레이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경험과 게임 설계의 메커니즘적 구조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현실과 평행하게 흘러가는 시간도 있고, 게임 속 독특한 방식으로 왜곡되거나 단절되는 시간도 있다. 이벤트 시간과 플레이 시간의 매핑, 저장 기능과 시간 조작, 죽은 시간과 훌쩍 지나가버리는 몰입된 시간 경험은 모두 게임의 시간성이 얼마나 유연하고 다양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예를 들 수 있는 장르들이 많이 출현한 상태에서, 저장이란 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과거 시간으로 회귀를 보여주는 ‘로그라이크’ 장르나, 게임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지 않고 항상 플레이되고 있는 모바일의 ‘방치형 게임’ 장르,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현실 시간과 똑같이 400일이 흘러야 게임이 진행되는 이나, 문학처럼 12분이라는 사건의 스토리 시간을 긴 시간으로 늘려 곱씹어보고 반복하는 게임 ,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퍼즐을 푸는 게임 의 내러티브 장치는 시간을 게임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활용한 사례로 논의를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이선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시각장애인에게 지하철역은 미로 던전이다 - <사운드스케이프> 제작사 오프비트 황재진 대표

    지난 11월 29일 개최된 ‘버닝비버 2024’는 인디게임 창작자들의 다양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열린 인디게임 컬처&페스티벌이다. 사흘간 총 83개의 인디게임 부스가 열리고 1만여 명의 관람객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는 <사운드스케이프>다. 시각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 이 게임은 전맹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구현한 탈출 게임으로, 게임의 독특한 시각화 방식과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로 인해 호평을 받았다. 그간 유사한 컨셉의 게임이 소수 있었지만 특히 대학생으로 구성된 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새롭다. < Back 시각장애인에게 지하철역은 미로 던전이다 - <사운드스케이프> 제작사 오프비트 황재진 대표 22 GG Vol. 25. 2. 10. 지난 11월 29일 개최된 ‘버닝비버 2024’는 인디게임 창작자들의 다양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열린 인디게임 컬처&페스티벌이다. 사흘간 총 83개의 인디게임 부스가 열리고 1만여 명의 관람객이 참여한 이 행사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 중 하나는 <사운드스케이프>다. 시각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 이 게임은 전맹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구현한 탈출 게임으로, 게임의 독특한 시각화 방식과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로 인해 호평을 받았다. 그간 유사한 컨셉의 게임이 소수 있었지만 특히 대학생으로 구성된 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새롭다. 이번 호에서는 <사운드스케이프>의 개발자이자 인디 게임 개발팀 ‘오프 비트’에서 활동하는 황재진 팀장을 만나, 게임의 제작 과정과 출시 계획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게임 씬의 젊은 게임 개발자 개인이 겪게 되는 다양한 궤적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조명해 보았다. -------------------------------------------------------------------------------- 이경혁 편집장: GG의 인터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안녕하세요, 현재 아주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과에 재학 중이고 ‘오프비트’라는 인디 게임 개발팀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황재진이라고 합니다. <플레이리스트>라는 리듬 게임을 시작으로 2023년부터 팀을 꾸려서 개발을 시작했고 2024년 여름부터는 <사운드스케이프>라는 게임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희가 처음 버닝 비버에서 서로 만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런 게임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굉장히 젊은 분들이 만드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사운드스케이프>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사운드스케이프>는 플레이어가 전맹 시각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지하철 내 점자블록 같은 장애인 편의 시설을 실제로 활용해 보면서, 지하철을 타러 가거나 역을 나오는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게임입니다. 게임 내 배경인 대한민국 지하철 역을 최대한 현실과 동일하게 만들었고, 편의시설들도 기능적으로 모두 구현해서 최대한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살리자는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을 위한 아이디어 기획 단계에서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이 이 생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고 봤거든요. 그래서 기획 단계에서 어떤 계기가 있어 이 아이템을 선택했는지 궁금합니다.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우선 제가 재미있게 했던 게임 중 <스캐너 솜브레>라는 게임이 있었어요. 지금 저희 게임에서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으면 점이 찍히며 소리가 시각화되는 시스템의 모티브가 된 게임입니다. <스캐너 솜브레>에는 라이다 스캐너라는 게 있는데 화면을 대고 클릭하면 그 공간에 점이 주르르 찍히거든요. 그런 식으로 공간을 파악해 가며 길을 찾는 걷기 시뮬레이션 공포 게임인데요. 처음 그 게임을 했을 때 이런 식으로도 게임의 비주얼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해서 그거를 유니티로 똑같이 구현해 봤거든요. 주변 지인들에게 한번 보여줘 봤더니 어느 선배가 이거 시각장애인이 체험하는 느낌 같다는 피드백을 줘서 염두에 두게 됐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니는 대학교의 학점 인정 프로그램을 활용해 이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는데, 기획을 위해 좀더 조사를 해 보니 생각보다 시각장애인 편의시설인 점자나 점자블록 상태가 좋지 않더라고요. 제 기억으로 점자블록 설치율은 50%였고 그 중에서도 제대로 설치된 적정 설치율은 45% 정도였어요. 이런 부분을 게임으로 녹여내면 일종의 소셜 임팩트를 줄 수 있겠다 싶어서 <사운드스케이프>의 초기 기획안이 만들어졌고, 그걸로 계속해서 개발을 해온 상태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실제로 <사운드스케이프>를 여러 대회에 출품을 좀 하셨잖아요, 저도 버닝 비버를 포함해 적어도 두 군데서 본 것 같은데 좋은 반응이 많았고 인터뷰도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반응들에 대한 느낌이 어떠셨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게임을 개발했을 때 첫째로 걱정이 되었던 부분은 소셜 임팩트 측면에서 저희가 생각한 ‘시각 장애인 체험’이라는 의도가 플레이어에게 확실히 전달될까였고, 둘째는 이 게임이 ‘게임’으로서 재미있을까 였어요. 버닝 비버는 저희가 큰 규모로는 처음 참여하는 전시회였는데 거기서 사람들 피드백도 받아보며 질문을 드렸거든요. 첫 번째 고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생각보다 게임의 의도가 아주 잘 전달된 것 같다고 느꼈어요. 두 번째 고민에 대해서는 반응이 두 부류로 갈렸던 것 같아요. 이 게임 자체가 비주얼적으로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다 보니까 새롭고 신기해서 재밌다는 분들도 있었고, 게임 자체가 재밌다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나름의 어느 정도 특색은 갖추고 있는 게임이 아닐까라고 저희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운드 스케이프>와 비슷한 컨셉 게임들이 있잖아요. 저는 반향정위를 응용한 VR 게임들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제작과정에서 <스캐너 솜브레>를 비롯해 다른 레퍼런스로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게임들이 더 있을까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첫 번째 레퍼런스가 <스캐너 솜브레> 였다면, 두 번째는 <다크 에코>라는 2D 게임인데 걸어 다니면 발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선 같은 게 퍼지다가 벽에 튕기며 공간이 파악되는 공포 게임이었어요. 발소리를 통해서 공간을 보여주는 거다 보니 소리 시각화 컨셉과 어느 정도 일치해서 레퍼런스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구요. 전체적으로 오픈월드 게임들도 봤는데, 시스템을 완전히 가져오지는 않았고 오픈월드가 플레이어를 유도하는 방식을 참고했어요. 예를 들어 <젤다의 전설>에서 빛을 밝게 만들어놔서 그쪽으로 플레이어가 가게 하거나, 게임을 시작하면 넓은 전경을 보여줘서 탐험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게 하는 등 심리적으로 유도하는 부분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사운드스케이프>도 점자 시스템이 플레이어 주변에 있으면 밝게 만들어서 플레이어를 유도하도록 구현했구요. 초기에는 튜토리얼도 만들어서 게임 내에 공간의 UI를 띄워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관심을 끌어 보려고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유도가 잘 안 되서 실패하긴 했지만요. 이경혁 편집장: 지하철 역을 게임 안 플레이 공간으로 만든다면 실제로도 지하철 역을 많이 가보셔야 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방문하셨던 곳이 어딘가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지하철 역을 선정할 때, 우리 스테이지로 만들기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서 네이버 지도 거리뷰와 교통공사 홈페이지의 편의시설 분포도를 확인했어요. 단계별로 스테이지가 점점 어려워지게 만들고 싶어서 스테이지 1은 나름 시각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구축된 역, 스테이지 2는 적당하고 애매한 상태, 스테이지 3은 좀더 열악한 곳으로 고르려 했어요. 자료 찾아보고 거리뷰에서 출구 쪽 주변 상황은 어떤지도 보면서 그때 거의 1호선부터 수인분당선까지 대부분의 역을 찾아봤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스테이지로 선정한 곳이 신분당선의 청계산입구 역이었어요. 교통공사 측에 촬영 허가를 받고 데이터 수집을 하면서 거의 네 번 넘게 방문을 했고요. 그 외에 수인분당선의 보정역과 매교역 등 추가적인 스테이지도 선정한 상태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실 어려운 스테이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역들이 있는데(웃음) 오래된 역들이 확실히 편의시설이 구축이 덜 돼 있는 느낌도 있고요. 역들을 다니시다 보면 시각장애인들에게 이 공간이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도 좀 받으실 것 같아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어떻게 보면 사람들마다 직업병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운드스케이프>를 계속 만들다 보니 지하철을 타면 여기는 점자블록이 왜 이렇게 생겼지, 아 여기는 점자블록 깔려 있고 점자랑 음성유도기도 있네 이런 식으로 계속 눈에 밟히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이건 저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역 내부는 시설이 잘 되어 있는데 역 외부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계산입구 역 같은 경우도 게임 내에서는 구현되지 않았지만 역 바깥으로 조금 걷다 보면 점자 블록이 끊기거든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역 내부까지는 교통공사의 관할이지만 밖은 아니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장 문제가 많았던 역은 인천 쪽 지하철역들이었어요. 저희가 대구나 부산 같은 곳까지는 가지 못하고 수도권 역만 조사한 것이긴 한데, 인천은 확실히 좀 오래된 것 같긴 하더라고요. 이경혁 편집장: 부천 출신으로서 공감합니다. 저는 되게 재밌는 게, 애초에 게임을 제작하실 때 뭔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만들려고 시작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까 스스로도 자꾸 그게 눈에 밟히게 되신 거잖아요. 혹시 <사운드스케이프>를 하면서 이 팀이 준비하고 있는 게임에 대한 방향이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좀 바뀌게 되신 걸까요? 아니면 여러 가지 제작 경험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일단 팀원 분들께서 각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게임에 치중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게임을 만들어 보며 느낀 건데, 사회적 메시지에 100% 치중하지 않더라도 이를 게임에 어느 정도 넣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예시로 게임 스토리에 사회적 풍자를 넣을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블랙 코미디처럼 연출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게임에 사회적 메시지를 한 스푼 넣는다는 느낌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국내에서는 그런 시도는 거의 인디 쪽에서만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혹시 국내 인디 게임 중에서 좀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작품이 있을까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제가 인디 씬에서 게임을 개발하겠다고 마음 먹는데 영향을 크게 준 게임들이 있어요. 대표적인 게 유명한 <스컬>입니다. 고등학교 입학 면접 전형날에 <스컬> 데모 플레이 영상을 봤는데 이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저희 게임과는 장르가 좀 멀고, 지금은 게임이 커져서 인디를 벗어난 것 같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인디 게임 중 하나에요. 그리고 <그리스>라는 스토리 형식의 퍼즐 게임이 있는데, 텍스트가 한 개도 없는데도 스토리가 전달되더라고요. 조작에 대한 튜토리얼 정도는 있지만 퍼즐 메카닉 설명도 없거든요. UI가 이렇게 없는데도 연출만으로도 게임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감명깊었어요. 또 좋아하는 게임이 <리듬 닥터>라는 리듬게임입니다. 크레딧이 나오는 스테이지가 있는데, 게임 크레딧까지 스토리에 전부 녹여버린다는 게 신기했어요. 보통 리듬게임이라 하면 위에서 노트가 내려와 치는 건데 실제로 리듬을 타야 하는 게임 시스템도 재미있고요. 이경혁 편집장: 이제 이야기가 슬슬 개발자 개인으로 향하고 있는데요, 2004년생이신데 게임 개발자 치고는 굉장히 젊은 나이이십니다. 언제 처음 게임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셨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제가 게임은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 해왔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PC방을 가게 됐어요. <리그 오브 레전드>랑 <오버워치> 두 개를 거의 몇 천 시간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 너무 질리는데 PC방에 있는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다른 게임들은 하고 싶지가 않은 거에요. 그때는 스팀의 존재를 아예 몰랐거든요. 그런 플랫폼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럼 이제 도대체 무슨 게임을 하지 하다가 그냥 내가 게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할 게임이 없었던 게 게임을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게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아보다가 SBS 같은 게임 학원을 알게 되서 직접 문의도 드렸어요. 나중에는 학교 다니면서 학원에 주말반으로 들어가서 유니티랑 게임 기획 과정을 배웠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게임 관련 진로를 잡으시는 데 집에서 반대가 있지는 않았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게임 학원 등록할 때만 해도 반대를 정말 많이 하셨어요.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잖아요. 보통 고등학교 졸업 뒤에 대학 가서 진로 찾아서 취업하는 게 수순일 것 같은데, 중학생 때부터 갑자기 아이가 게임 만들고 싶다고 하면 부모님 입장에서 당황하시는 게 당연했을 것 같아요. 게임 관련 진로를 잡으면서 고등학교도 특성화고를 선택하게 됐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중학생 때 성적이 나쁘진 않았어서 갑자기 특성화고를 가버린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엄청 반대했어요. 교장 선생님께서 따로 부르실 정도로….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죠(웃음). 이경혁 편집장: 고등학교도 특성화 고등학교로 가신 거군요. 게임 관련 분야로 가신 것이지요? 본인과 비슷한 입장의 학생들이 많았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제가 다녔던 곳에는 컴퓨터 게임 개발과와 e-스포츠 학과가 있었어요. 즉 게임을 하는 사람과 게임을 만드는 사람으로 나뉘어지는데, 게임을 만들려고 온 경우 제 기대와는 좀 다르게 게임 개발에 대한 큰 의지를 갖고 오진 않은 것 같았어요. 생각보다 예상과 많이 달라서 1학년 때는 무작정 애들을 모아서 게임을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무산이 됐어요. 그 이후부터는 적당히 팀 프로젝트 하면서 거의 원맨 팀으로 게임 만들고, 그런 식으로 게임 개발 공부하고 고등학교 나와서 대학 다니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제가 그쪽 커리큘럼을 잘 몰라서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지만, 사실 게임 개발하려면 수학적인 기반이 되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특성화고에서 그런 수학에 대한 강의가 좀 충분하게 제공이 되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다른 학교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희 학교는 사실 많이 부족했어요. 제가 들어올 때만 해도 커리큘럼은 1학년 때는 그냥 다양한 진로가 있다는 거를 보여주려고 자바스크립트나 웹 서버, C 프로그래밍,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밍 등등 이것저것 많이 해보는 식이었어요.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니티배우면서 개발에 들어가는데, 정말로 수학적으로 베이스가 되는 부분은 알려주지 않고 대부분 툴 쓰는 법이나 언어 기초 위주였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저한테 엔진 프로그래밍 쪽에 눈을 뜨게 해준 좋은 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그분께서 벡터 부분이라든지 행렬 연산 자원수 같이 게임에 필요한 수학들을 많이 알려주셨고 그 덕에 게임 개발에서 수학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서 공부를 했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주니어 개발자들이 기초 수학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는 상황이고 회사들 입장에서 신입을 뽑아 수학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커리큘럼에 대한 전면적 재개발이 필요하지 않냐는 얘기가 많아 한번 여쭤봤습니다. 특성화고를 나올 경우 그냥 취업하시는 분들도 있고, 대학에 가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대학을 선택한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디지털 관련 학과 소속이라고 하셨는데 세부전공에 게임이 있는 것이지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네, 대표적인 전공들이 영상이랑 게임 쪽이에요. 일단은 저희 고등학교는 다른 특성화고와 달리 대학 진학이 일반적인 케이스였고 취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 분위기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고등학생 때 배우면서 아직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었어요. 이대로 취업하면 회사 생활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기술을 갈고닦기는 어렵겠다 생각해서 좀 더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갔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오프비트’라는 팀에 대한 것으로 옮겨볼까 합니다. 오프비트를 구성하게 된 계기와 팀의 첫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오프비트는 지금은 저를 포함해 5명이 함께하고 있지만 2년 전 처음 결성했을 때는 2명으로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개강총회 자리에서 모션 그래픽이나 아트워크 영상을 정말 잘 만드는 친구를 만났는데, 게임에 이런 아트워크를 넣고 싶어서 제가 납치를 했어요(웃음). 그렇게 함께 만든 첫 작품이 <플레이리스트>라는 마우스로 플레이하는 리듬 게임이었어요. 이후에 그 친구가 생각보다 너무 유명해지고 바빠져서 그 작업은 마무리하고, <사운드스케이프> 기획안을 구성하고 팀원을 모아 지금에 이르게 됐어요. 팀원들도 같은 대학교의 비슷한 전공 사람들이에요. 이경혁 편집장: 아직 학교에 계시다 보니 어느 정도 팀이 유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오프비트 활동이 지금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상황은 전혀 아닐 것 같습니다. 작업 동력은 어떤 식으로 생겨나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지금 팀 활동에 대한 경제적 이득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저도 사람들과 개발을 하려면 이 동기를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꼈는데,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때는 그걸 잘 몰랐을 때라 충돌도 있었어요. 그때 이후로는 저희가 (오프비트 활동에 대해) 돈을 줄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개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내가 만든 게 실제로 게임에서 이렇게 동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일례로 3D 작업을 할 때는 3D 모델이 나오면 최대한 게임에 바로 적용시킬 수 있게 만들어서 바로 팀원에게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게끔 했구요. UI 디자인을 하시는 분이 가져오면 제가 최대한 애니메이션화하여 게임에 들어갈 수 있게 해서, 팀원이 자신이 만든 리소스 활용에 대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워크 플로우를 구성했어요. 그리고 물론 가장 큰 동력은 버닝 비버에 선정되어 출품한 거였어요. 저희가 다같이 가서 전시를 했는데 실제 사람들의 반응을 바로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팀원 분들이 제일 많이 동력을 얻었던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사운드스케이프>가 버닝 비버에 나간 뒤 여러 게임회사에서도 굉장히 관심이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전시회에서의 반응들이 여러 가지로 동기나 감흥을 주셨을 것 같은데, 한편으로 이런 커리어를 쌓아 게임사에 취업하는 진로 방향을 생각하신 적은 있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다들 창업을 하기 전에 취업은 꼭 해봐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시기도 해서 회사도 한번 들어가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업을 어떻게 하며 아트 부서랑 개발 부서가 있다면 협업이나 소통 같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그런 것들을 배우려면 회사에 들어가는게 맞다고 생각해서요. 일단 이 팀은 제가 곧 군대를 가기 때문에 추가적인 개발이 어려운 상황이고, 팀원 중에는 4학년에 올라가는 분들도 있다 보니 다들 취업을 생각하는 상황이에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사운드스케이프>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향후의 출시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듣고 싶습니다.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사운드스케이프>는 1월 31일자에 출시를 예정해두고 개발 중인 상황이에요. 원래는 얼리 억세스도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래도 복무기간인 1년 반 동안 소식이 사라지는 거라 일단은 정식 출시를 먼저 해 놓고 군입대를 할 계획에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스팀 플랫폼에 정식 출시하는 게 1순위이고요, 버닝 비버에 출품했으니 스토브 쪽도 연락이 올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별도의 퍼블리셔는 없고 개인 사업자 단위로 출시할 것 같아요. 1.99달러 정도의 싼 가격의 유료 패키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기존에는 오프비트가 동아리 같은 느낌으로 작업하다가 결국 출시라는 상황을 맞게 되면 ‘사업자’가 되는 것이고, 실제로 수익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새로운 고민 앞에 서시게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게임 제작이라는 커리어를 쌓는 과정에서 그 고민이 진짜 고민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그래서 지금도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아는 것이 없으니까 정말 고민이긴 합니다. 제가 배웠던 아카데미에서는 기획 관련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어도, 그런 운영이나 사업적인 부분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근데 막상 게임 제작을 해보면 이 사업적인 부분과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프비트도 지금까지는 동아리였다고 생각을 해요. 영업 수익이 0원이었고 전시회 가는 교통비나 전시회 준비비까지 포함하면 마이너스였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게임을 출시해서 어느 정도 수익을 내려면 진짜로 회사 의 영역까진 아니어도 팀의 영역으로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제작 과정에서 따로 클라우드 펀딩을 받거나 이런 것은 없었나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네, 일단 <사운드스케이프>는 시각장애인분들에 대한 인식에 도움을 주고 장애인 환경에 대한 개선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에요. 제가 게임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컨셉에 잡아먹히는 것인데요. 그래서 소셜 임팩트 차원에서 강조하는 목적의 게임이라면 우리는 어차피 돈 벌 생각 없으니까 전부 기부하자고 해서, 실제로 수익이 얼마나 발생할지 모르겠지만 이 게임을 통해 판매 수익이 나온다면 전액을 기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원래는 펀딩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텀블벅 쪽에 문의를 드렸더니 기부 목적의 펀딩은 안 된다고 하여 일단 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어쨌든 그걸로 지금 당장 돈을 벌겠다라는 입장은 아니신 거군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네, 저희로서는 이 게임을 만들고 출시해서 실제로 수익이 났다는 거에 좀 의의를 두고 싶은 그런 상황입니다. 이경혁 편집장: <사운드스케이프>를 출시할 경우 해외로도 나가게 될텐데요, 인터페이스도 전부 영어 버전으로 나가는 걸까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그렇습니다. 일단 출시일에는 한국어만 출시를 하고 입대가 2월 17일이니까 2주 안에 번역해서 업데이트할 계획에 있습니다. 고민이 많은 게, 원래는 영문 대응을 하고 싶었는데 가장 큰 문제가 시각장애인들의 음성유도기 문제였어요. 영문 버전으로 출력을 하면 한국 지하철인데 영문 TTS가 나오는 상황도 좀 이상한가 싶으면서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고증적인 측면에서도 고민이 됩니다. 저희가 그래도 나름 실제 지하철역을 동일하게 최대한 동일하게 구현한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지하철에서는 영어 TTS를 실제로는 이용하지 않으니까 컨셉과 안 맞지 않을까, 그냥 TTS에 영문 자막을 달까 등등의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쉽지 않겠지만, <사운드스케이프>의 컨셉은 오히려 해외에서 먹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 이번에 겪어보셨겠지만 국내는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외국은 좀 다르다 보니 커리어상으로도 굉장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이런저런 얘기를 쭉 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면, 처음부터 장애라는 사회적 메시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여러 결과로 나름의 파급력과 재미를 만드는 어떤 게임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여러모로 이 프로젝트가 나중에도 좀 생각이 많이 나게 되실 것 같은데요. <사운드스케이프>라는 게임 하나와, 이 게임을 만들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의 소통들, 그리고 실제로 물리적으로 떨어지는 소프트웨어의 빌드 등 여러 경험들이 묶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거잖아요. 이 덩어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어떠세요? 황재진 오프비트 팀장: 제가 아무래도 팀장이고 팀 활동의 거의 모든 일에 관여를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장단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일례로 3D 만들 때의 방향이나 디자인을 게임에 가져왔을 때, UI 아트 부분의 애니메이팅. 게임 기획, 프로그래밍에 다 제가 얽혀 있다보니 제가 없으면 팀이 안 굴러가고 게임이 안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해요. 비록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서 굉장히 좋게 생각하고 있고 다음부터는 조금 내 일을 덜자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입대를 통해서) 멈췄어요(웃음). 지금 정식 출시 버전에서는 총 4개 스테이지가 나오는데 원래는 버닝 비버 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어서 여러 개를 더 만들어볼까 했지만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너무 욕심을 내면 오히려 기획이 무산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이 조금은 아쉽더라도 딱 적절하게, 할 수 있는 만큼은 한 것 같습니다 저의 최종적인 목표는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든 창업을 해서 게임 회사를 만드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 같이 개발을 해왔는데 이 과정을 앞으로는 제가 창업을 할 때 정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실제로도 개발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정말 귀중한 경험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 Back 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17 GG Vol. 24. 4. 10.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 컴퓨터 – 디지털게임이라는 물적 기반과 콘텐츠 사이의 관계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는데 , 난수 random number 다 . 디지털 기술 기반의 컴퓨터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난수 생성이 불가능한 장치다 . 요즘은 듀얼코어 이상에서 몇 가지 방법으로 난수를 만드는 법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 애초에 주어진 데이터를 신속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기에서 외부 입력 없이 자체적으로 랜덤한 수를 뽑아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 하지만 그 컴퓨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에서 난수는 결정적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난수를 만들 수 없는 기계를 딛고 성립한 매체에서 난수가 필수요소에 가깝다는 점은 이 매체의 근본에 운과 확률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 달리 정리해보면 , 결국 운과 확률로 만들어지는 게임의 흐름을 보조하기 위해 일련의 전자 연산장비가 도구로 활용된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 모든 디지털게임이 무작위의 결과물들만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최근의 이른바 AAA 급 게임에 이르면 영화의 작법을 따라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를 쭉 따라가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 이런 영역에서 디지털 주사위는 정해진 결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우연을 만드는 정도로 역할을 줄여나가는 추세다 . 하지만 우리가 이른바 ‘ 게임만의 독특한 재미 ’ 를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이 주사위의 힘이 개입한다 . ‘ 테트리스 ’ 에서 다음 블록이 예측되는 순간 , 이 게임은 상황대처가 아닌 암기력의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 액션 게임 등에서 확률로 표기된 치명타가 일정 타격 수마다 반복될 때 , ‘ 하스스톤 ’ 같은 카드게임 류에서 카드 덱이 랜덤이 아니라 순서를 지정할 수 있게 될 때 이들이 가진 재미는 사라진다 . 이런 맥락에서라면 주사위의 개입을 통해 다양해진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곧 플레이어의 플레이 행위가 된다 . 실재하는 우주와 세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가상공간 안에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 적어도 통제된 환경 안에서 디지털게임은 무작위 확률을 통해 상황을 ‘ 흩뜨러뜨린다 ’. 그리고 이를 정렬하고 재구성하여 주어진 과제를 클리어할 수 있을 만큼의 정돈을 만들어내는 것이 확률 개념을 상대할 때의 플레이가 갖는 역할이다 . 이 때 디지털 주사위가 만드는 확률의 역할은 ‘ 모르는 영역 ’ 의 창조다 . 확률을 통해 표현되는 디지털게임의 규칙들은 모두 ‘ 모름 ’ 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 테트리스에서 다음 블록이 무엇이 나올지 , ‘ 다크 소울 ’ 에서 보스가 다음 순간에 어떤 패턴으로 공격해 들어올지에 대해 디지털 주사위는 각 순간별로 플레이어에게 다음 순간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을 연출한다 . 디지털게임 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 늘어난 엔트로피를 줄여나가는 것이 플레이의 목적이 된다 . 온라인 네트워크가 보편화된 이후의 디지털게임에서는 이 엔트로피값의 증가에는 주사위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추가되는데 , 바로 플레이어다 . 싱글 플레이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맞상대하게 되는 대전형 멀티플레이의 순간에는 디지털 주사위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 모름 ’ 이 덧붙는다 . 상대가 어떤 패턴을 익숙하게 쓰는지 , 선호하는 캐릭터나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온라인 익명 매치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 이 때의 랜덤성은 아마도 매치메이킹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 어느 정도 게임 결과에 따라 매기는 랭킹에 의해 기대승률 50% 를 맞추는 보정이 이뤄진다고는 하지만 , 여전히 멀티플레이에서 내가 누구와 게임하게 될 지는 ‘ 모름 ’ 의 영역이다 . 이 랜덤한 매치메이킹의 효과는 랜덤을 애초부터 잘 만들 줄 모르는 디지털 연산장치의 확률 제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 모든 모르는 영역을 파훼하고자 하는 플레이어의 힘은 멀티플레이 영역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영원히 상대적인 극복의 굴레에 들어앉는다 . CPU 가 만들어내는 제한된 랜덤 상황은 결국 고정되어 있고 , 이는 어떻게든 파훼된다 . 수많은 게임 플레이 경험이 누적되며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계속 향상되지만 , 소프트웨어의 난이도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난이도 – 숙련도 경합에서 난이도의 제시가 상대방 플레이어라는 주사위보다 더한 경우의 수를 가진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 끝없이 향상되는 두 사람의 숙련도 덕택에 이 경합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순환의 고리를 돌게 된다 .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연산장치는 굳이 ‘ 모름 ’ 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일을 더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맞는다 . ‘ 모름 ’ 이라는 엔트로피를 기준으로 정리해 본다면 , 그래서 디지털 주사위는 사실 사람 혹은 사건이라는 실제로는 훨씬 더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매우 낮은 레벨에서 재현해 낼 뿐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 랜덤을 만들 줄 모르는 기계는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현실의 일부를 프로그래밍된 가상공간 안에 일부 재현할 뿐이다 . 다만 통제된 환경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작은 수준의 경우의 수는 오히려 그 엔트로피를 충분히 낮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 모름 ’ 이며 ,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이 ‘ 모름 ’ 에 도전할 가치가 충분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이른바 ‘ 공략 ’ 이라고 불리는 많은 패러텍스트들이 플레이와 동떨어지지 않은 맥락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다 . 게임 공략들은 게임 텍스트가 제시하는 ‘ 모름 ’ 의 상황에 펼쳐진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한 활동의 결과물들이다 . 어떤 이는 랜덤하게 떨어지는 아이템의 드랍률을 수집 , 분석해 최종적인 아이템 루팅 테이블을 만들고 이를 확률로 정리해 정례화한다 . 누군가는 주사위의 결과물에 다양한 수식적 치장을 가한 공격 / 방어의 메커니즘을 분석해 수식의 구조를 밝히고 , 이를 통해 최적의 공략 루트를 도식화한다 .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방에 분산된 채 높은 엔트로피를 지니고 있던 게임의 주사위가 만들어낸 세계는 공략이라는 정리된 장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정리된다 . 같은 맥락은 디지털 주사위가 아닌 사람과의 플레이에서도 나타난다 . ‘ 리그 오브 레전드 ’ 의 랜덤 매칭이 갖던 높은 엔트로피는 op.gg 와 같은 전적 사이트를 통해 체계적으로 나의 상대나 아군이 어떤 전적과 승률을 가지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한 데이터로 가공되며 해소된다. 게임 텍스트 내부에서의 플레이와는 별개로 , 확률이 만들어내는 ‘ 모름 ’ 의 영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는 텍스트 밖에서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줄어든다 . 결국 , 디지털게임이 만들어내는 재미도 요약해 보면 1,000 피스 퍼즐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완성된 그림을 무질서한 1 천개의 조각으로 쪼갠 뒤 , 이를 다시 맞추는 일에 재미라는 의미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 우리는 확률 기계가 제한적으로 생성해 낸 수많은 경우의 수 사이를 헤매며 다시금 이를 정리하고픈 욕망에 휩싸인다 . 게임 텍스트 안에서는 클리어와 엔딩 도달이라는 결과로 , 게임 텍스트 밖에서는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연산장치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의 데이터 엔트로피가 분명 정리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흥분하며 또 도전한다 . 설령 이 기계가 근본적으로 랜덤값을 만들기 어려운 장치라 해도 , 마치 화투장 48 개를 가지고 흩어놓은 뒤 다시 맞추는 패 떼기 놀이와 같이 ,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은 엔트로피 놀이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 아니 , 오히려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윤상의 노래 ‘ 달리기 ’ 에서처럼 ,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흥분하며 게임에 달려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Editor's View] 시간 속의 게임, 게임 속의 시간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존재들이 살아온 시간의 시간의 누적을 기록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 누적 속에서 놀이는 사실 오랫동안 잉여시간 취급을 받아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 Back [Editor's View] 시간 속의 게임, 게임 속의 시간 21 GG Vol. 24. 12. 10. 좋으나 싫으나 우리는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존재들이 살아온 시간의 시간의 누적을 기록해 역사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 누적 속에서 놀이는 사실 오랫동안 잉여시간 취급을 받아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들어 놀이에 들어가는 많은 시간들은 더 이상 잉여에 머물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놀이는 그 자체로 돈이 드는 일이 되었고, 놀이를 만들어내는 기업은 상품으로서의 놀이를 팔아 이윤을 얻습니다. 생산의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21세기의 놀이이고, 아마도 그 대표적인 도구가 디지털게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간 속에서 게임은 이제 꽤나 공식적인 시간의 통제 안에 놓입니다. 게임하는 시간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모습들은 PC방과 온라인게임사의 정액제 요금, 셧다운제, 일정 시간동안 플레이하면 경고문이 뜨는 것과 같은 직접적 제도 뿐 아니라 게이머들 스스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내재적 규율로서도 작동합니다. 게임 시간은 어떤 이들에겐 생산의 잉여시간이 아니라 생산시간과 경합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죠. 시간 속의 게임만이 게임과 시간의 전부 또한 아닙니다. 우리는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시간도 목도합니다. 하드웨어의 한계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시간 지연, 누적된 플레이시간이 계량화되는 아이템이라는 개념의 발흥은 이제 게임과 시간이 대단히 복잡한 방식으로 얽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GG 21호는 게임과 시간이 얽히는 여러 모습들의 일부를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물리량으로서일 수도 있고, 다분히 철학적인 개념일 수도 있고, 혹은 산업화와 표준화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객관적 기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게임과 시간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디지털게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다시금 체감합니다. GG 21호가 발행되는 2024년 12월의 시간은 사회적으로는 좀더 급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빠르게 째깍거리는 엄혹한 시간을 빨리 벗어나 따뜻하고 행복한 연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 Back 북유럽 레트로: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 02 GG Vol. 21. 8. 10. - 편집자 주: 이 글은 해외에서 투고한 원고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에 병기하였습니다. 핀란드에서 컴퓨터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부터 였고 80년대부터는 상업화 되었으니 그 역사는 꽤 긴 편이다. 최초의 e스포츠 토너먼트 - 당시에는 “이스포츠”가 아니라 “핀란드 컴퓨터게임 챔피언십”이라 불렸다 - 가 1983년에 이미 개최되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게임플레이가 청소년들의 주요 여가활동으로 자리잡는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코모도어64(Commodore 64)로, 1980년대의 인기가 1990년대에도 이어지면서 그 이름이 사실상 핀란드의 게임세대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코모도어 64는 다른 유형의 디지털 플레이와 프로그래밍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관문과 같은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가 1997년 한국을 크게 덮쳤던 것처럼, 핀란드도 1990년에서 1993년 사이에 심각한 경제적 불황을 겪었다. 이후 컴퓨터와 고급 (가정용)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투자가 이어지는데, 노키아 휴대폰이 부상하는 게 바로 이 시기다. 가정용 컴퓨터 또한 널리 보급되었는데, 핀란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집에서 자신의 PC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지극히 낮은 인구 밀도 때문일 것이다(핀란드 인구는 5백만명이지만 지리적 크기는 한반도의 3배 이상이다). 이와 같은 문화적 맥락을 통해 알 수 있는 핀란드 레트로게임문화의 지역적 특색은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핀란드의 오랜 게임 개발의 역사 그리고 PC 중심적 플레이의 역사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지역 취미가들이 게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게임과 컴퓨터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지리적 특성상 공간적 구조가 상대적으로 넓은데, 이는 사람들이 과거의 테크놀로지를 수집, 저장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이와 같은 게임플레이의 기억에 대한 아카이빙과 수집, 그리고 (물리적, 가상적) 공유는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핵심적인 측면 중 하나다. 둘째, 핀란드의 컴퓨터게임 개발 및 플레이의 역사에 주된 영향을 끼친 플랫폼은 PC지만, 1990년대 및 2000년대 초반에 청소년기를 보낸 많은 사람들이 PC로 넘어가기 전(핀란드의 인구가 적기 때문에 PC 인터페이스는 결코 핀란드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그래서 PC를 사용하려면 먼저 영어에 능숙해져야 한다) 보다 어렸을 적에 콘솔을 소유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이래 거의 모든 콘솔들이 핀란드에 출시되었고, 오늘날 많은 성인들은 자신이 성장기에 플레이했던 콘솔을 가지고 레트로 게임을 즐기면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재현하기를 즐긴다. 셋째, 가정용 컴퓨터(와 콘솔)이 2000년대 초반 노키아의 모바일 테크놀로지 붐과 함께 갈수록 많은 인기를 모으면서, 핀란드의 아케이드 게임 문화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게임 아케이드는 핀란드의 도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오락 문화였지만 사람들이 가정 내 게임 인프라에 보다 많이 투자하고 옮겨가면서 아케이드 게임을 향한 관심이 떨어졌고 업계의 수익성은 크게 하락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아케이드 경험을 되살릴 수 있는 레트로 게임공간으로서 게임 아케이드를 방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돌이켜볼 때, 핀란드의 레트로 게임문화가 여러 시대를 횡단하며 등장했던 특정 콘솔들과 다양한 개인용 컴퓨터 등 넓은 범주를 아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레트로게임 집단과 기업가들, 심지어는 박물관마저도 레트로 게임과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다. 레트로 게이머를 다루는 특집기사들, 레트로 게임을 수용하면서 즐기는 집단이나 그것을 통해 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소셜미디어에서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다음은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 집단의 답변을 통해 그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먼저 템페레에 위치한 핀란드 게임박물관에서 일하는 니클라스 닐룬드(Niklas Nylund) 박사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이 박물관은 템페레시와 루프리키 매체 박물관(Media Museum Rupriikki), 사설 게임 박물관 펠리코네주니트(game collective Pelikonepeijoonit), 그리고 템페레 대학이 핀란드 게임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해 설립되었다. 2017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10만 유로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기부한 핀란드 게임열정가들에 힘 입어 게임 역사를 위한 공공의 아카이브 시설로 구축되었다. 이 곳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으로 지역주민과 방문객들 모두 게임문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닐룬드 박사에 따르면 핀란드 레트로게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개방성과 협업, 그리고 민주적 의사 결정에 있어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소규모 국가인 핀란드 특유의 대화하는 문화를 통해 상위 문화 유산 기관들이 처음부터 레트로 게이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했다는 것이다(레트로 게이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닐룬드는 게임 보존에 관심이 있는 단체들이 핀란드 게임박물관 설립과 같은 프로젝트와 “게임 보존을 위한 토론회”를 함께 한 경험이 긍정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두번째 응답은 투르쿠 대학 ANC(Academic Nintendo Club)의 회장인 이에로 피칼라(Eero Pihkala)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ANC는 1980년대의 콘솔부터 e스포츠에 이르는 다양한 레트로 게임 여가활동을 제공하는 단체다. 이러한 유형의 클럽은 - 학술적이든 비학술적이든 - 핀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콘솔이나 컴퓨터에서부터 특정 장르에 이르기까지 그 전문성과 형태에 있어 다양하다. ANC를 대표하는 피칼라는 “핀란드 레트로게임 문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서로 상이한 여러 세대들이 - 최신 AAA 게임 시장을 추종하는 대신 - 동등하게 게임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게임문화의 역사를 보존하고 그 역사 내의 다양성의 유산을 찬양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레트로 게임이 “유동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핀란드인들에게 있어서는 MS-DOS와 PC 기반의 게임 활동이 핵심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는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대개 일본산) 아케이드 게임의 수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헬싱키 소재의 아케이드 홀 스고이(Sugoi)의 소유주인 마르쿠스 아우티오(Markus Autio)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핀란드의 레트로게임 문화는 노스탤지어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청소년기에 접했던 게임을 다시 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러한 게임이 반드시 직접 플레이했던 것일 필요도 없다. 그저 쇼핑센터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보았던 게임에 대해 남은 인상일 뿐이어도 상관 없다. 또는 당시 비디오게임 잡지에서 읽었던 게임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레트로 게임문화에 있어 핵심은 어떤 식으로든 그 게임에 친근감을 느낌으로써 노스탤지어적인 흥미를 일으키는 것”이다. 동일한 연장선에서 노스탤지어적 아케이드들이 현재 핀란드의 도시 풍경에 되돌아오면서 취미가들을 위한 (종종 사교를 위한) 레트로 게임용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레트로 게임문화의 세 가지 특성에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독특한 특성을 추가할 수 있겠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핀란드에서는 PC용 DIY 게임(대개 MS-DOS용 게임) 만들기 붐이 일었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대개 블랙코메디 등 풍자적이고 패러디 같은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게임들은 대체로 비영리적이었고 그 개발자들도 대개 익명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셰어웨어식 유통은 디스크 교환이나 게시판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러한 활동들은 핀란드 게임 역사의 작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데, 레트로 게이머들이 그러한 게임들의 플레이를 실시간 방송으로 내보내거나 온라인 비디오를 만들어 소환하고 있다. 이러한 게임 가운데 다수는 의도적으로 도발적이거나 공격적인 콘텐츠를 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존재를 거부하는 것보다는 그와 같은 레트로 게임 활동을 알리는 것이 그 발생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것들이 후기의 문화적 발전에 끼친 영향 또한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Retrogaming in Finland Finland has a long and established history of computer game development, starting from the late 1970s and commercializing in the 1980s. The first esports tournament – which was not called “esport” at the time but “Finnish Computer Game Championships” – was held already in 1983, and gaming quickly evolved into one of the key leisure activities of adolescents by the early 1990s. The Commodore 64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is development, as its popularity in the 1980s and still in the 1990s became synonymous with the Finnish gaming generation as a gateway to other types of digital play and programming. Just as the Asian financial crisis hit Korea in 1997, Finland suffered a deep financial depression between 1990 and 1993, which was soon followed by further interest and investing in computers and high-class (home) technology, especially with the rise of Nokia mobile phones. Unlike in many other countries, home computers became standard household products across the population and people still play mostly at home with their own PCs – perhaps due to the scarce density of the population (Finland has only 5M people but is geographically more than three times larger than Korea). This cultural context has marked the Finnish retrogaming scene with local characteristics, which can be divided into three distinct domains. First, due to the long history of Finnish game making and PC driven play, a relatively large number of the local hobbyists are curious about game history and many people have personal game and computer collections. The geographic nature of Finland supports relatively spacious architecture, thus allowing people to store legacy technologies. This archiving, collecting, and sharing (physical and digital) gaming memories is one of the key aspects of Finnish retrogaming. Second, despite the PC having had a major impact on the history of Finnish computer game development and play, many adolescents of the 1990s and early 2000s had game consoles in their childhood years before moving to use PCs (PC interfaces were never translated to Finnish due to the small population so using one required fluent in English). Almost all international consoles have been released in Finland since the late 1980s and today many adults like to revisit their childhood by retrogaming with the consoles that formed a part of their childhood. Third, due to the increasing boom of home computers (and consoles) in the early 2000s with the Nokia mobile technology boom, the Finnish arcade gaming culture vanished almost entirely. Until the late 1990s, gaming arcades were still a common particle of Finnish cities and entertainment culture, but as people moved to invest (even) more on their home gaming infrastructures, the interest toward arcade games dropped and the business became unprofitable. Today, many people visit arcades as retro game spaces to relive former arcade experiences. Reflecting upon this historical background, retrogaming in Finland ranges from specific consoles to various personal computers across different decades. There are different active retrogaming groups, entrepreneurs and even museums set around retrogaming and hardware. It is not uncommon to stumble upon a news feature about retro gamers or various social media groups embracing or seeking to profit from retro games. Below, we elaborate on this history via three parties from whom we asked one simple question: What is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Our first response comes from PhD Niklas Nylund who works for the Finnish Game Museum in the city of Tampere. The Finnish Game Museum is a collaboration between the city of Tampere, Media Museum Rupriikki, game collective Pelikonepeijoonit and the University of Tampere set to represent Finnish gaming culture and how it has developed over the years. The Museum was opened in 2017 and was crowdfunded by Finnish gaming enthusiasts who donated 100,000€ to establish a public archive of game history. It is a meeting place for the past and the present, offering low-threshold participation in gaming culture for both locals and visitors. According to Nylund,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is its openness, collaboration, and respect for other people in democratic decision making. Finland is a small country, and its conversation culture is open to an extent that high cultural heritage institutions were from the start interested in having a dialogue with retro gamers and learning from them (and vice versa). Nylund adds that experiences have been positive with parties interested in preserving games through projects such as the Finnish game museum and having a shared “round table of game preserving.” Our second response is credited to Eero Pihkala, the president of Academic Nintendo Club (ANC) in Turku University. ANC is a hobby group offering free-time retrogaming activities around old and new games ranging from the 1980s consoles to retro esports. These kinds of clubs, academic and non-academic, are common in Finland and differ in format as well as specialization from specific consoles and computers to genre-based groups. According to Pihkala, representing ANC, “the most distinct feature of Finnish retrogaming is appreciating games equally from all different generations. That’s how we can preserve the history of gaming culture(s) and celebrate the legacy of diversity in it as opposed to chasing the latest trends in the AAA-market.” They also add that retrogaming is a “fluid concept,” but for the Finns the MS-DOS and PC-based gaming activities form its core. Finally, we talked to Markus Autio who is the owner of Sugoi, an arcade hall in Helsinki known for its collection of (primarily Japanese) arcade games from the 1990s to this day. In Autio’s view, “Finnish retrogaming is about nostalgia. People love to revisit games that they knew as kids or teens. And it doesn't even have to be a game they remember playing, but maybe something they just saw in some darkened corner of a mall, having left a lasting impression. Or maybe they read about it in a videogame magazine at the time. The key of this retrogaming is to be familiar with the game in one way or another, which sparks nostalgic interest.” Along these lines, nostalgic arcades are currently making a small comeback to the Finnish cityscapes and provide a space for (often social) retro game sessions for more and less active hobbyists. In addition to the above three domains of retrogaming, one more unique feature can be noted as an endnote. From the 1980s to late 1990s, a wave of DIY-games for the PCs (usually MS-DOS) emerged in Finland, often representing satiric and parodic themes with dark humor. These games were primarily nonprofit, and the designers were standardly left anonymous. Their shareware distribution occurred via traded disks and early bulletin board systems, ultimately forming a small piece of Finnish gaming history that retro gamers summon by playing them in live-streams and creating online videos of them. Many of these games include content that is intentionally provocative or hostile; however, instead of refusing to acknowledge their existence, informed retrogaming activities can help understanding their historical context of emergence and to shed further light on their influences on later cultural developments. Ville Malinen is a PhD Candidate at University of Jyväskylä. His research is focused o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F1 racing and motor esports. He has written several journalistic articles about gaming in Finnish magazines and newspapers, and is interested in the philosophical issues arising from simulation games. Veli-Matti Karhulahti is Senior Researcher at University of Jyväskylä and holds Adjunct Professorship in University of Turku. His research tackles gaming, play, and technology use in many ways, and he is the author of the book Esport Play: Anticipation, Attachment, and Addiction in Psycholudic Development (Bloomsbury, 2020).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유베스퀼라대학, 연구자) 벨리 마띠 카훌라티, Veli Matti-Kahulathi 유베스퀼라 대학교의 시니어 연구자이자 투르투 대학(University of Turku)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게임과 플레이,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최근 〈Esports Play: Anticipation, Attachment, and Addiction in Psycholudic Development(Bloomsbury, 2020〉 를 저술했다.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 Back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04 GG Vol. 22. 2. 10.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인간이 오감 중 시각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해서는 다른 장애 영역에 비해서도 그 논의가 더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90년대부터 시각장애인들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중반에는 컴퓨터가 지금보다 훨씬 고가의 물건이었고, 컴퓨터의 기본적인 사용법부터 따로 강사 선생님에게 배웠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화면에 출력되는 내용을 읽어 주는 기능을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운영 체제에 따라 그 이름과 기능은 달라져 왔지만 기본 틀은 같다. 다시 컴퓨터를 배우던 초등학교 당시로 돌아와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고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가르쳐 주신 간단한 게임이 내 인생 첫 게임이었다. 90년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했던 게임들을 생각해 보면 음성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기억력 테스트 게임이나 숫자를 맞춰서 판정하는 야구 게임, 청기 백기 게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외에 PC 통신을 다룰 줄 알던 사람들은 현재의 MMORPG 게임의 원형 중 하나가 되는 텍스트 머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는데,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비시각장애인들이 화려한 그래픽과 더 다양한 기능이 지원되는 다른 게임으로 떠나간 뒤에도 시각장애인들은 여전히 머드 게임을 활발히 즐기고 있다. 그 외에도 체스나 윷놀이, 트럼프 등 보드 게임이나 카드 게임을 PC로 이식한 게임들을 즐기기도 했는데, 오히려 윈도우즈 운영체제가 보편화되고, 모바일로 환경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게임을 시각장애인들이 즐기기에는 더더욱 어려워진 것이 안타깝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애플에서 자사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낭독 기능인 보이스오버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면서 시각장애인들도 스마트 시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모바일 게임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거의 없었다. 2010년대 이후에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오디오 게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소리를 듣고 적의 위치를 파악해 물리치는 대전 액션 게임이나 RPG부터 TCG 게임, 퍼즐 게임, 리듬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등 그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게임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외국 제작사에서 만드는 게임들이라 영어 정도만 지원할 뿐이라 플레이를 하다 보면 게임을 하고 있는지 듣기 평가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그 중에서도 PC 및 모바일에 익숙한 일부 사람들을 고객층으로 하다 보니 시장 규모가 작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임들은 대부분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디오 게임 외에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돌아보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텍스트 위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웹게임이나 일부 모바일 게임인데 이마저도 대부분 영어 게임들이다. 번역기 돌린 수준이라도 한국어 지원을 해 주는 게임마저도 드문 실정이다. 사실상 2022년 현재 한국어로 시각장애인이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현재 서버가 살아 있는 텍스트 머드 게임들을 합쳐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적으니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오디오 게임 등은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들은 게임보다도 당장의 생존에 더 밀접한 생존권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관련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2021년도에 국회에서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하태경 의원 "게임법에 장애인 접근성 향상 넣고 가이드라인 개발하자“ - 디스이즈게임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4/?n=123269 )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문제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게다가 최근 떠오르고 있는 메타버스 또한 게임의 방식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은 이미 생활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다양한 게임들을 거쳐 오며 시각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줄타기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앞서 시각장애인이 한국어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언급했는데, 거기서 ‘정식으로’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면 그 개수는 더더욱 줄어들게 된다. 정식으로 플레이를 할 수 없어 개인 개발자가 개발하는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활용하여 플레이하거나, 우연히 어느 정도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일부 기능은 화면 낭독 기능으로 제대로 접근조차 되지 않아 현금 결제를 하고도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는 오디오 게임들 중에서도 다른 유명 게임의 게임 방식 등을 거의 그대로 베껴 오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라도 명성만 들어 보았던 유명 게임을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게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강한 유혹이다. 또한 일부 게임의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플레이하다 보면 제작사 차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한 논의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적절한 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 강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게임 업계의 인식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물론 기술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게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뒤따라야 할 것은 인식의 변화이다.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소수이지만 그런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반지하게임즈에서 제작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서울 2033〉의 예를 들고 싶다. 〈서울 2033〉은 출시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일부 용감한 시각장애인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레이를 시도해 본 결과 관리해야 할 중요한 수치를 읽어 주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기본적인 플레이 자체는 가능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앱스토어에 리뷰를 남겼는데 제작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셔서 지금까지도 접근성 관련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지하게임즈의 다른 텍스트 게임에도 아이폰의 보이스오버와 안드로이드의 토크백 접근성이 반영되고 있다. 사운드도 없고, 글도 많은데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모바일 인디게임서울2033 - 스브스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30699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 관련 개발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2033〉은 텍스트 기반으로 선택지를 고르면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방식의 게임이다. 즉, 복잡한 조작이 필요 없다. 개발 엔진도 일반적인 게임 엔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보이스오버로 어설프게나마 플레이가 가능해 개발사에 건의라도 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건의에 응답해 준 것은 결국 개발사의 의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반지하게임즈에서 시각장애인이 무슨 게임이냐며 무시했다면 지속적인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플레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나 또한 공모전에 참여해 스토리 작가로 활동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은 완벽하지 않고,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종종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련 건의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꾸준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유저들 사이에서 〈서울 2033〉은 여전히 활발하게 플레이되고 있다. * 〈서울 2033〉에 적용된 보이스오버 접근성 시연 영상. 또 한 가지 사례로 XYRALITY에서 개발한 모바일 게임 〈성주와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주와 기사〉는 예전에 유명했던 웹게임인 〈부족전쟁〉과 비슷한 방식의 게임으로 자신의 성채를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평정해 나가는 게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저들과 동맹을 맺기도 하며 경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방식의 게임은 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 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거리를 제시하고, 좌표 개념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플레이가 가능하다. 〈성주와 기사〉의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2033〉과 같이 소설과 비슷한 형식의 스토리 중심 게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게임들도 발상을 조금만 전환한다면 충분히 시각장애인들도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좌표 기능을 도입하고, 주요 지점이나 NPC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임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 게임은 방식이 간단해 보이는데 버튼에 보이스오버로 접근만 되어도 플레이가 가능할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동원되는 온갖 꼼수들을 보고 있자면 편견을 깨고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기술 발전이 언제나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애인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 시대보다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너무나 빠른 기술 발전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약자들을 도태시키기도 한다. 무인 키오스크 앞에서 난감해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화려한 그래픽이 게임에 도입되기 이전, 텍스트 머드 게임이 주류이던 시절에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이 오히려 다른 비시각장애인 게이머들과 공감대를 더 많이 형성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슈퍼 컴퓨터 한 대보다 도로의 턱 높이를 낮추는 것이 휠체어를 탄 사람의 활동에는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 2033〉이나 〈성주와 기사〉 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는 명확하다. 시각장애인, 나아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그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장애인의 각종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 투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편견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 속 세계에는 편견도 제약도 없다. 어떤 역경이라도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넘어설 수 있는 난관일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아주 조금이지만 게임을 만드는 현장을 엿보면서 게임을 만든다는 일은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과 게임. 지금 당장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지지만, 게임을 만드는 분들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모인다면 언젠가 그 두 단어의 조합도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반지하게임즈 스토리 작가) 강신혜 게임에 관심이 많은 시각장애인입니다.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동시에 반지하게임즈의 게임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 게임과 시신경제 (Necronomics)

    시신경제 (Necronomics)는 아킬레 음벰베 (Achille Mbembe)의 시신정치 (Necropolitics)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다. 시신정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의 생명정치 (Biopolitics)가 권력이 생명의 영역을 지배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동시대의 현실은 죽음을 단지 생명권력 (Biopower)을 위한 수단으로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 Back 게임과 시신경제 (Necronomics) 22 GG Vol. 25. 2. 10. * <엘든 링>의 대표적 룬 노가다 장소 시신경제 (Necronomics)는 아킬레 음벰베 (Achille Mbembe)의 시신정치 (Necropolitics)에서 영감을 받은 개념이다. 시신정치는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의 생명정치 (Biopolitics)가 권력이 생명의 영역을 지배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지만 정작 동시대의 현실은 죽음을 단지 생명권력 (Biopower)을 위한 수단으로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1] . 즉, 생명정치의 관점에서라면 제도적 폭력이나 전쟁이 발생시키는 죽음은 결과적으로 생명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하는 장치여야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죽음으로 권력이 이양되었고 따라서 생명보다도 죽음 그 자체의 극대화가 목표라는 것이 시신정치의 전망이다 [2] . 시신경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생명이 가치를 띠고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곧 재화가 되는 체계에 주목한다. 즉, 살아있는 인간의 목숨보다 죽은 뒤 그 신체의 교환 가치가 더욱 높게 매겨지는 현실인 것이다. 게임 속에서 시신경제는 이미 가장 보편적인 체계 중 하나로 기용되고 있다. 적과의 전투를 주 플레이 내용으로 삼는 액션 게임에서 적의 죽음은 경험치뿐만 아니라 화폐의 축적에도 계산된다. 우리는 흔히 ‘노가다 (farming)’라는 어휘로 불리는, 획득 화폐의 극대화를 위한 적 살해의 최적 효율 전략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보통 적 살해 자체가 금전의 획득을 보장하지는 않고 시체의 인벤토리를 뒤져 적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금품을 노획하거나 장비를 장물로 팔아넘기는 행위를 통해 부차적으로 경제 활동을 일삼긴 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프롬소프트웨어 (FromSoftware)의 게임들과 같은 경우엔 추가적 노획 행위 없이도 죽음 그 자체가 화폐의 획득을 보장한다. <소울> 시리즈에서는 ‘소울’의 형태로, <엘든 링>에서는 ‘룬’의 형태로, <아머드 코어> 시리즈에서는 현상금의 형태로 보상이 들어온다. 특히 소울 (soul)은 말 그대로 영혼 그 자체로, <소울> 시리즈에선 플레이어가 죽인 자의 영혼을 재화로 획득하며 사용한다. <엘든 링>의 룬은 <소울> 시리즈의 보상 시스템을 그대로 계승함에 따라 조금 덜 직관적으로 되지만, 세계관 내 우주적 존재의 ‘축복’이라는 점에 따라 존재와 생명에 아주 핵심적인 요소를 살해 행위에서 얻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이다. <아머드 코어>에선 보상 금액의 형태보다 그것이 사용되는 방향이 시신경제에 접촉해 있는데, 현상금은 전부 주인공 파일럿 신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인 작중 기체 AC (Armored Core)의 부품들을 구매하고 강화하는 데에 투자된다. 특히 <아머드 코어 VI 루비콘의 화염>에서 주인공은 몸을 오로지 AC 탑승 및 조종에만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개조 받은 ‘강화인간’으로, 대신 그 외의 모든 신체 기능을 희생하는 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뇌가 익어버려’ 기체 바깥에선 제대로 된 생활이나 거동을 영위할 수 없다. 따라서 작중 주인공이 살해하는 적들은 현재 사실상 그의 진정한 신체라고 말할 수 있는 AC의 활동 역량을 확장하는 금액으로 환산되고, 종국에는 재수술을 받아 AC 바깥에서도 그 자체로 활동할 수 있는 몸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다. 게임 내에서 정확히 어떤 연유에서 이름도 없는 주인공 강화인간 ‘C4-621’이 그런 극단적인 수술을 받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지만, 결국 <아머드 코어 VI 루비콘의 화염> 내에서 플레이어가 임하는 모든 전투와 파괴, 살해의 용도는 저당 잡힌 주인공의 신체를 되찾기 위해 채무 를 상환 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신체를 저당 잡는 튜토리얼 채무는 시신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로 ‘죄와 벌’이라는 인간 법과 도덕 세계의 발생지이다. 니체는 독일어로 ‘죄 (Schuld)’가 ‘채무 (Schulden)’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죄에 대한 벌은 언제나 등가물 을 가정하고 죄인을 고통 스럽게 해서라도 실제로 배상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 극히 경제적인 법을 각인시키기 위한 기억술 의 원형으로 고문을 꼽는다 [3] .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달구어 찍어야 한다: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 만이 기억에 남는다. (중략)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가장 소름끼치는 희생과 저당, 가장 혐오스러운 신체 훼손, 모든 종교 의례 가운데 가장 잔인한 의식 형태 –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중략) 예를 들면 돌로 쳐 죽이는 형벌, 수레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 말뚝으로 꿰뚫어 죽이는 형벌, 말로 찢어발기거나 밟아 죽게 만드는 형벌, 범인을 기름이나 포도주로 삶는 형벌, 인기 있었던 살가죽 벗기는 형벌, 가슴에서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 그리고 또 범죄자에게 꿀을 발라 이글대는 태양 아래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놓아두는 형벌 등 고대 독일의 형벌을 생각해보라.” [4] 그러므로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규칙이라는 법을 전부 제대로 각인시켜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튜토리얼에서 가장 효율적인 예시로 시신경제가 등장하는 것 또한 우연은 아니리라. 2007년도 게임 <어쌔신 크리드>에선 주인공이 튜토리얼 이후 계급을 강등당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장비를 빼앗기는데, 어째선지 전투 및 이동 기술 등 각종 다양한 신체 능력마저 덩달아 잃어버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2016년작 <용과 같이: 극>의 튜토리얼에선 가장 강한 ‘도지마의 용’ 전투 스타일을 모두 갖고 시작하지만 정작 튜토리얼이 끝나고 난 뒤엔 주인공이 10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터라 해당 신체 기술들을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이 게임들에서 계급과 인연 등을 차차 되갚아가며 다시 찾아야만 한다. 플레이어 캐릭터인 주인공은 분명 이 모든 신체 역량들의 원래 소유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튜토리얼이 끝난 직후 어느새 몸의 기능들을 저당 잡힌 채무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캐릭터의 신체는 외적인 시각에선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기능들이 ‘죽은’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튜토리얼에서 해당 게임 중 플레이 가능한 능력의 최대치를 맛보게 해주고 얼마만큼의 액션과 재미가 가능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연출 전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레이어에게 주인공의 신체를 ‘죽여’ 앞으로 하나하나 갚아 나가야 하는 채무의 대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게임 내 규칙에 자연스럽게 복속시킬 것이란 점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죽은 신체의 교환 가치 *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 잘라 온 머리가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현상금을 깎는 다트리 소령 (Major Dhatri) 채무자는 자신이 되갚을 것이라는 약속에 신용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상환을 의무나 책임으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계약의 효력은 그가 상환하지 못할 경우 채권자에게 그가 그 외에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그 밖에 그의 권한에 있는 것을, 예를 들면 자신의 육체나 혹은 자신의 자유, 또는 자신의 생명 역시 저당 잡히는 것이다. 더구나 특히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채 액수에 적합해 보이는 크기만큼 그의 육체에서 살로 도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곳곳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해왔다.” [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채무자가 자신의 신체를 저당 잡힐 때 자기 자신 외에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있는 것이란 점이다. 즉, 니체의 채무법에서 채무자의 신체는 채무자 그 자신이 아니며 철저히 분리된다. 따라서 저당 잡힌 몸은 그 순간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닌 시체로서 죽은 물건이 된다. 시신경제에서 시체를 “돈벌이가 되는 물건”으로 만드는 건 죽음 그 자체이다 [6] . 즉, 단적으로 말해 시신경제는 장기매매라는 명백한 형태의 신체 부위 교환 형태를 굳이 띠지 않더라도 죽음 그 자체로 재화를 교환한다. 1755년 4월 24일 매사추세츠 영국령 식민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머릿가죽 하나당 70파운드의 현상금을 달았다 [7] . <폴아웃 3> (2008)에선 바로 매사추세츠에서 대략 683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수도 황무지에서 손가락 하나당 5에서 10병뚜껑으로, 귀 하나당 10에서 15병뚜껑으로 보상받는다. <폴아웃: 뉴 베가스> (2010)에선 매사추세츠에서 4348킬로미터 떨어진 모하비 황무지에서 머리 하나당 250병뚜껑을 보상받는다. 특히 <폴아웃: 뉴 베가스>의 머리는 해당 부위가 파손되었을 시 가격이 50병뚜껑으로 줄어든다. 단순히 죽음과 부위의 차원에 가격을 매기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신체의 보존도마저 산정하는 것이다. “채무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에서 채무의 상환량은 단순히 채무자가 입는 고통만이 아니라 채권자가 느끼는 쾌감까지 계산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고통을 보는 것은 쾌감을 준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더욱 쾌감을 준다.’” [8] 게임 속 시신경제는 게임 내에서 금전적 형태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을 때조차 신체의 죽음을 교환한다. 정확히는 오히려 게임 속 인물들의 신체에 아무런 부차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았을 때만 작동하는 시신경제가 있다. 바로 죽음과 웃음의 교환이다. 가장 잔인한 고어 액션 게임에서마저 적의 죽음은 플레이어가 구가하는 살해 행위에서 느낄 수 있는 역동적 쾌감 이상의 보상을 항상 제공한다. 최소한 얼마만큼 잔인하게 더 많은 적을 더 효율적으로 빠르게 죽였는지를 추산하여 점수나 등급으로라도 보여주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게 일반적으로 게임이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방법이지만 그마저도 없이 플레이어로 하여금 신체를 훼손시키도록 만드는 게임들이 바로 고어 코미디 게임들이다. 2008년 플래시 게임 <해피 휠스 (Happy Wheels)>부터 2019년 <피플 플레이그라운드 (People Playground)>, 2024년 <헬다이버즈 2>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래그돌 (Ragdoll) [9] 고어 게임들은 공통적으로 플레이어 캐릭터와 적의 구분 없이 그 어떤 죽음에도 고집스러우리만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경직된 래그돌 신체가 웃음을 자아내는 원리처럼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 이라는 희극의 기본 명제에 부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해당 캐릭터들의 신체에서 죽음이 응당 가져야만 할 의미마저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다 [10] . 심지어 적의 죽음에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의 죽음에 이렇다 할 페널티마저 크게 부여되지 않아, 죽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죽는 행위마저 권장된다. 따라서 모든 신체는 지킬 이유도 없고 언제든지 교체되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양陽의 가치도 음陰의 가치도 아무 의미도 없이 날아다니는 사지들, 육편들, 내장들은 피아의 구분도 없고 재화로서도, 그리고 당연히 인격으로서도 기능하지 않는다. 다만 그 ‘생명으로서 응당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이라는 성질이 래그돌 고어 게임들 속 죽음에서 발견되고 결국 죽음은 웃음이라는 쾌락과 교환되며 역시나 또 다시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행위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장르로서 시신경제: 과잉과 음의 미학 * <크루얼티 스쿼드>의 플레이 화면 지금까지 다룬 시신경제는 장르를 불문하고 게임이 신체를 기용하는 방식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등장했지만, 대주제이자 장르로서 이 개념에 투신하는 게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들도 세계관 전반을 시신경제가 감싸고 있고, <사이버펑크 2077> (2022)의 세계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편재한다. 우선 장기매매가 주 생계 수단인 ‘스캐빈저 (Scavengers)’라는 집단이 등장하고 <사이버펑크 2077>의 배경 ‘나이트 시티 (Night City)’ 사람들은 주인공과 NPC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아머드 코어> 시리즈에서 그러했듯이 ‘일을 하기 위한 몸을 사기 위해 일을 한다.’ 나이트 시티에선 강화인간의 수준을 넘어 모두의 일상적 신체 자체가 유기체보다는 무기물의 영역으로 대거 이동한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거진 인형人形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신경제를 작동시키는 잔인함, 잔인함을 보장하는 인격은 신체의 죽음에 유지된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2077>조차 주제이자 내용으로서만 시신경제를 다룰 뿐 매체적 차원에서는 시신경제를 딱히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려한 그래픽의 AAA게임의 정반대편에서 ‘최악’, ‘최흉’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고 감히 말해도 어폐가 없을 <크루얼티 스쿼드> (2021)의 경우에는 게임의 모든 면이 전적으로 시신경제를 말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와서 망막에다가 직접 형광펜을 칠하고 썩은 찰흙을 덕지덕지 바르는 듯한 고채도 고대비 저-폴리곤 (Low-Polygon)의 끔찍한 비주얼과 누군가가 사용 중인 화장실을 그대로 공사하는 중 장비가 망가진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듯한 극악스러운 음향은 처음 마주했을 시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게임을 일정 시간 이상 플레이하면 진짜로 시청각적으로 고통스럽기 시작하게 되는 것을 넘어 두통마저 느껴진다. 메뉴 버튼의 기괴한 아이콘들은 정확히 뭐가 뭐를 가리키는지 눌러보기 전까진 알 수 없다. 나아가 듣도 보도 못한 HUD 프레임이 존재하는데, 다시 말해 정말로 1인칭 화면의 테두리를 상시 뒤틀린 이미지가 덮고 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레임의 상부 가운데에는 게임의 제목인 ‘CRUELTY SQUAD’가 계속 떠 있다. HP는 바의 형태도 아니고 게이지의 형태도 아니고 알 수 없는 방울-뭉치-덩어리의 형태로 정말 불필요하게 크게 화면에 부유한 채 꿈틀거리며 그 위엔 마찬가지로 생명 (LIFE)이란 글자가 굳이 쓰여 있다. 총알과 탄창 개수를 가리키는 숫자 사이에는 어째선지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고 총알을 발사하거나 무기를 바꾸는 등의 행위를 할 때에 이 얼굴은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회전한다. 즉, 이 게임은 그래픽, 음향, UI를 불문하고 전력을 다해 실용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총을 장전할 때 R키와 같은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우스를 위아래로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는 기가 찰 지경이다. 문제는 이 흉물스럽고 황당한 디자인이 게임 속 극대화된 기업 자본주의 바이오펑크 디스토피아 사회의 끔찍한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면면과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디스토피아는 과장되어 있기는 해도 당장 아무 인터넷 플랫폼이나 들어가 봐도 맞닥뜨릴 수 있는 주식 및 자기 계발 신봉자들처럼 NPC들이 ‘CEO 마음가짐 (CEO Mindset)’을 중언부언 읊어대고 펀코팝 (Funko Pop)의 패러디 천코팝 (Chunkopop)이 등장하는 등 작금의 현실이 지배받고 있는 체제와 크게 다르지도 않으므로 게임 속 세계가 어느 지점까지 ‘있는 그대로’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 세계에 살며 해리되고 분열된 주인공의 정신 상태에 이러한 형태로 인식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이는 또한 현실에서도 개인들의 세계 인식 자체에 던질 수 있는 이미 고루한 실존적 질문이다. 구태여 인식과 세계의 현실을 분리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애초에 분리가 가능하지도 않을 만큼 이미 주인공은 정신뿐만 아니라 몸까지 철저히 뒤틀려 있다. 그의 두개골에는 총이 달려 있고 등에서는 가속을 위한 액체가 분비되며 내장은 밧줄처럼 사용된다. 그의 몸에는 살 위에 더 많은 살이, 내장 위에 더 많은 내장이 부착되어 있으며, 임계점을 넘은 생명 공학 그 자체가 구토하고 있다. 주인공은 회사 청산을 주 업무로 맡는 보안 업체 ‘크루얼티 스쿼드’의 청부업자로 <아머드 코어>, <사이버펑크 2077>의 연장선에서 번 돈으로 또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고 개조한 신체로 더 많은 돈을 번다. 죽음이 삶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죽음을 위해 매진된다. 게임을 켜면 짧게 지나가는 도입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삶에의 권위... (The Authority on life...)” 그리고 주인공의 수입원은 암살 의뢰의 보상이기도 하지만 임무 수행 중 암살 대상 외에 아무런 처벌도 손해도 없이 아주 자유롭게 죽일 수 있는 민간인들의 장기를 수확해 실시간으로 암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게임 내 실시간 시장에선 주식과 장기가 나란히 거래되며 노골적으로 시신이 경제의 부富라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말 그대로 시신경제에서 죽음이 최종적이며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표하기 위해 주인공은 고용주를 죽이고 신마저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생의 요람 (Crade of Life)’에 도달해 그 자신이 신이 되는 결말에선 조르주 바타유 (George Bataille)의 『저주받은 몫』을 직접 인용하며 도대체 그래서 시신경제는 왜 죽음을 추구하며 작동하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지구 표면에서 에너지의 작용들이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는 원칙상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 (부)를 수용한다. 이러한 과잉의 에너지는 어떤 체계 (예를 들어 어떤 유기체)의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체계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되면, 또는 에너지의 과잉이 그 성장에 전적으로 흡수될 수 없다면, 자발적이든 아니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든 아니면 파국적인 방식으로든, 필연적으로 그러한 과잉은 이득 없이 상실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11] 즉, <크루얼티 스쿼드>는 생의 과잉과 포화가 곧 죽음이라는 그 자체로서는 음의 가치를 경제의 방향타로 잡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시신 경제에서 부富와 부腐는 하나이다. 모든 사회가 아무런 의심 없이 성장을 테제로 삼고 있는 현실과 상승 지향의 영적 전파가 시신경제를 이 땅에 소환하는 의식의 제단이다. <크루얼티 스쿼드> 게임으로서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감으로써, 효율, 실용, 세련, 편안에 반대되는 음의 가치를 매체의 모든 자원을 다해 표현함으로써 시신경제의 현실을 고발한다. [1] Achille Mbembe. “Necropolitics.” Public Cultur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3), vol. 15, no. 1, pp. 11–12. [2] Ibid., pp. 39-40. [3]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서울: 책세상), 402~406쪽. [4] 위의 책, 400~401쪽. [5] 위의 책, 404쪽. [6]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서울: 이음, 2019), 50쪽. [7] Massachusetts. Acts and Resolves, Public and Private, of the Province of the Massachusetts Bay (Boston: Wright & Potter, 1869-1920), vol. 15, p. 308. [8]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407쪽. [9] 래그돌은 본래 헝겊 인형이라는 뜻으로 게임 속 물리 엔진 상에서 관절에 힘이 없이 축 늘어진 채 허우적허우적 휘둘리는 신체 모델들을 일컫는다. [10] 앙리 베르그송. 『웃음』 (파주: 도슨트, 2022) 37쪽. [11]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파주: 문학동네, 2022), 29~30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영이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How we talk about a medium reveals a lot about who we consider its target audience or user and what purposes we attribute to their engagement with the medium. The public discourse on digital games in both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for many years been characterized by the idea, that digital games was, roughly speaking, for young, teenage boys, who spend hours upon hours painted by the luminescence of the computer screen and immersed in mindless entertainment. This was of course never true. < Back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04 GG Vol. 22. 2. 10. - 이 글의 한글 번역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pageNum=1&match=id:88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How we talk about a medium reveals a lot about who we consider its target audience or user and what purposes we attribute to their engagement with the medium. The public discourse on digital games in both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for many years been characterized by the idea, that digital games was, roughly speaking, for young, teenage boys, who spend hours upon hours painted by the luminescence of the computer screen and immersed in mindless entertainment. This was of course never true. Recently, however, many people have begun questioning this stereotype gamer and exploring the diversity of people who actually play games. But who are these ‘other’ players then? They may be toddlers who play their first game on their parents’ smartphone, the retired woman immersed in a game of Wordfeud, the ‘granny gamer’ playing CS: Go with their grandchild. But they may also be gaymers socializing around a game of Fortnite, or the young mother playing on her Nintendo Switch while her baby sleeps next to her and so on. Critiquing the norms of game culture Digital games are of course not played by stereotypes but by actual players who experience the games they play in unique and individual ways. During the last 10 years, game journalists, cultural critics and scholars have discussed the issue of representation of gender, ethnicity, disability, age, and bodies and in mainstream games. Although these discussions took off with the greatest intensity in North America, they are now also gaining speed in a European context under the heading of norm critique. The discussions about representation in games are essentially about three things: First, how does games portray different identities or aspects of peoples’ identities, if at all. Second, what is the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people in the player base of different games. And third, how are marginalized people represented in the game industry and under what conditions are they working. These three things are often intertwined in public discourse. It is often assumed that if a game represents someone, e.g., women, in a negative way, female players will generally turn away from the games. It is also often assumed that better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people in the game industry will result in better portrayals of these people in the game. Although there is certainly some truth to this, game scholars have also pointed out, that reality is much more complex than that. Games addressing serious topics Several studies have revealed a long-lasting imbalance in the number of female game characters, their roles and function in the game, and found that in their visual appearance, female characters have typically been highly sexualized. An analysis of over 500 games released between 1983 -2014 shows, that the sexualization of the female body peaked in the late 90’s and have been declining since 2006. This decline may mark a slow change in the way that the overall game industry thinks about their own games and its ability to address and raise awareness of serious topics. When British game company Ninja Theory, for example, released their game Hellblade: Senua’s Sacrifice in 2017, creative director of the company, Tameem Antoniades, explained in an interview that they wanted the game to be more than just entertainment, as they tried to offer an experience of how it is to suffer from psychosis, that would feel true to player. Similarly, Forgotten, a Danish indie game demo released in 2018, aimed to represent what it feels like to suffer from Alzheimer disease. The game is currently under development by Autoscopia Interactive. The European indie game industry has also started considering how to tell stories from the perspectives of socially and economically marginalized people. Bury me, my love, developed by French game company The Pixel Hunt, tells the story of a Syrian refugee as she makes her way through Europe to Paris. When another British AAA-game company, Playground Games, released the fifth installment in their racing game series Forza Horizon in Autumn 2021, it reached the headlines of mainstream media, that the character creation module in the game allowed players to choose gender-neutral pronouns to their character, as well as fit their characters with prosthetic limbs. Although much debate focusses on the representation of game characters, inclusive game design is of course not limited to this specific issue. The emergence of the indie game industry also sees an increase of games that delivers experiences that go beyond the well-tested model of the AAA-industry and offers modes of play that catered to players who cannot afford sitting several hours fixed in front of a computer. This is particularly true in Denmark where the game industry is mostly comprised of small-scale, indie developers, except from a few bigger studios such as IO Interactive. *Forgotten is a short game that aims to convey the experience of how it is to live with Altzheimer’s disease. In the image, the faces of game characters are blurred to give a sense of memory loss and disorientation. Expanding the player base This slow change can in part be explained by the second issue –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It seems that the game industry is becoming increasingly willing to try to reach a new target audience and in different ways cater for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Research shows that there is no direct causal relation between the representation of marginalized identities in games, and the diversity of the player base, and that marginalized groups, such as LGBTQ-people, have played games despite negative portrayals of LGBTQ characters in the game. As even mainstream media have gained an interest in the problematic portrayals of marginalized people in games, it becomes increasingly difficult for game companies to continue to reproduce these negative stereotypes. On the other hand, this public discourse also serves as an incentive to the game industry to latch onto new target demographics with strong spending powers. However, negative portrayals of marginalized identities in games only account for half of the problem. Many marginalized groups still experience bullying, discrimination and abusive behavior when playing especially online games. Her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when it comes to the marginalization of players, the discourse in Europe primarily revolves around the experience of (young) female players. The conditions of other marginalized groups, such as various ethnicities, socially- and economically marginalized people, and so on, are still lacking in the public discussions. This means, that while game have begun to tackle the issue of how to respectfully convey the stories of these marginalized identities, the game industry, have still not grasped the potential of addressing these groups as players. Improving working conditions through unionizing The marginalization of people in the game industry have received considerable attention in the last couple of years. Although this issue already attracted attention ten years ago, when marginalized workers, and especially female workers, of the game industry began spreading stories of discrimination, sexism, and harassment under the hashtag #1ReasonWhy , these issues have made the headlines again the last couple of years, as toxic work culture, sexual misconduct and abusive behavior have been exposed in the European AAA-industry. In the context of North Europe, scandals of a similar magnitude have yet to be exposed, although media stories have documented some cases of abusive conduct. Trade unions appear as obvious institutions to tackle such issue and better the conditions for marginalized workers. But even though the Scandinavian countries generally have a strong tradition for unionizing, it should be noted that worker in the Scandinavian game industry are still not by large unionized. Therefore, while many discussions are ongoing in the public discourse about how games responsibly represent marginalized people and how to provide an inclusive culture for players falling outside the normative stereotype of the male gamer, the is still call for a change in the organization of the game industry.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Ida Jørgensen Holds a PhD in game studies from the IT University of Copenhagen, Denmark where her research revolved around gender representation, game culture and games as media. Today she works as a postdoctoral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 효율 같은 건 필요 없어: 느리고 답답하게 게임하기

    효율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플레이 방식일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공에 관심 없는 것이나 열등하거나 패배적인, 혹은 의도에서 벗어난 부적응적인 태도라고 보긴 힘들다. <월든>에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속도를 발견했듯이, 무엇이 게임에서 ‘성공'인지 각자가 내리는 정의가 다를 뿐이며 플레이어 각각에게 존재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비효율적인 게임 플레이는 게임이 단순한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닌 복합적인 경험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 Back 효율 같은 건 필요 없어: 느리고 답답하게 게임하기 18 GG Vol. 24. 6. 10. * 데이비드 소로의 원작 <월든>은 2017년 디지털게임으로 발매된 바 있다. 스팀 등을 통해 플레이할 수 있다. 월든에 대한 단상 <월든(Walden)>이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라는 인물이 되어 그의 삶을 체험한다. 소로는 1845년에 도시를 떠나 숲 속 외딴 오두막에서 몇 년간 거주했고, 그때 깨달은 점들을 책 <월든>으로 썼다. 책과 동명의 게임 <월든>에서 플레이어는 1845년의 소로가 되어 당시의 삶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소로처럼 사계절 내내 매일 나무에 망치를 두드려 집을 수리하고,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옷을 기우며, 열매를 따서 병에 저장하고, 나룻배에 올라 노를 저어 호수를 이동한다. 실제 소로가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해보면서 여정을 하다보면 어느새 소로가 남긴 책 한 권, 월든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월든>에서 소로가 도시와의 오랜 분리 생활 끝에 알게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과 게임에서 모두 언급되듯, 모든 사물에게는 각자 고유한 삶의 속도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되었다. 사과나무는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와 계절에 맞게 성숙할 필요가 없었고, 어디선가 북소리 장단이 들려온다면 발걸음을 맞추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듣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적, 시간, 가치판단 때문에 굳이 자신의 것을 바꿔야 할 필요가 없다는 <월든>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단지 소로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미덕으로 여기는 ‘효율’이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만의 선택과 속도로 게임을 즐기기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속성뿐 아니라, 많은 게임들이 효율성을 추구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플레이어들은 그에 맞춰 게임에서 최적의 선택을 찾아간다. 게임 문화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플레이는 많은 이들에게 이상적인 방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단순히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전개 방식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폭넓은 경험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일부 제작자들은 비효율을 강요하기도 한다. 효율 떨어지더라도 감수할만한 다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게임 <월든>의 철학을 게임 플레이에도 적용하면서, 게임 플레이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비효율의 사례와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효율성보다 더 우선되는 가치에는 어떤 것이 있는 지를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 게임 플레이의 다양성 또는 인간 플레이어의 다양성에 대해 짚어볼 것이다.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된 ‘비효율’ 게임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지를 찾는 과정은 마치 퍼즐을 푸는 것과도 같다. ‘A라는 상황에서 B라는 아이템을 선택하고 C라는 행동을 하면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해답을 얻기 위해 플레이어는 수많은 조합이나 계산을 해보거나 공략을 찾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퍼즐의 답을 찾아나간다. 하지만 어떤 플레이어들은 퍼즐의 해답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게임이 보장하는 정도(正道)를 무시하고 매우 비효율적인 방법을 고의적으로 행한다. 자신의 실력을 확인거나 과시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예를 들면 초보자의 무기를 가지고 보스 몬스터까지 격파하는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게임 <다크소울> 시리즈에서는 “SL1 Run”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이는 캐릭터의 레벨을 전혀 올리지 않고 소울 레벨 1로 게임의 끝까지 완주하는 챌린지를 뜻한다. 쉽게 말해 ‘노렙업 플레이’이다. 스트리밍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플레이는 극단적인 모습에 무모하다는 감상을 전달하다가도 동시에 경외감을 선사하는 모습이다. 공격력이 매우 약한 초심자의 무기로 강력한 보스를 격파하는 이러한 도전은 사실 굉장히 비효율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의도된 비효율적 플레이는 동시에 플레이어의 실력을 가장 쉽게 증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되기도 한다. 엄청난 시간의 플레이 타임이나 스피드런 기록의 수치가 의미하는 플레이어의 실력이 있듯, 알몸 상태의 막대기로 보스를 이기는 비효율적인 실황은 자신이 얼마나 실력자인지 알리고자 하는 플레이어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생긴 ‘비효율’ 승리나 성공이 아닌 다른 것에 게임 플레이의 목적이 있는 경우에도 비효율의 상황은 발생한다. 단순히 멋지다는 이유로 선택되는 무기, 장비, 스킬이 바로 그것이다. 어떠한 플레이어들은 능력적인 효과와는 상관 없이, 방어력이 비교적 낮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보인다는 이유로 그 옷을 선택하거나, 노출된 몸이 더 아름답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기도 한다. 또는 냉기 마법보다 화염 마법이 덜 효과적인 상황임에도 불길이 이글거리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더 강렬해보인다는 이유로 화염 마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취향의 문제에 캐릭터와의 관계로 비효율적인 선택이 배가되기도 한다. <포켓몬스터> 시리즈에서 플레이어는 포켓몬의 능력치를 따져 강력한 팀을 구성해 배틀을 진행해야 하지만, 자신과 게임 속에서 오랫동안 인연이 이어왔거나 더 귀엽다고 생각되는 포켓몬을 배정시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비효율적인 선택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하다. 수납력이 떨어지는 불편한 지갑이라도 누군가와의 추억이 담긴 선물이라면 기꺼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 스토리 전개를 위해 효율성을 과감히 포기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인간의 삶 자체를 시뮬레이션화한 게임 <심즈4>는 현실처럼 다양한 직업군을 제공한다. 플레이어가 만든 캐릭터 ‘심’이 성장해 성인이 되면 직업을 가질 수 있는데, 하루종일 글만 쓰는 작가부터 명망있는 사업가, 인스타 인플루언서까지 50개에 달하는 직업이 플레이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렇듯 각각 직업군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모두 다르고 근무시간, 출근 요일도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심즈4>에서 효율적인 플레이 방식은 캐릭터가 오랫동안 고소득 직장에서 능력을 쌓아 승진하고 부를 축적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심에게 극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주기 위해 비효율적인 결정을 내린다. 다른 직업과 비교했을 때 시급이 적은 바텐더나 화가를 시켜 힘겨운 삶에 살게 하고,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기 위해 승진 없이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낮은 보수의 직업을 이어나간다. 현실성을 강조해서 나타난 ‘비효율’ ‘탈것’이란 보통 게임에서 말, 자동차, 비행기처럼 캐릭터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도보로 먼 거리를 이용해야하는 상황에서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탈것은 게임에서 플레이의 효율을 증가시키는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플레이어의 시간을 아껴주는 편의성 콘텐츠로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반면 어떤 게임들은 일부러 탈것을 존재시키지 않는다. 개발자의 의도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 개발자들은 게임의 현실감을 증가시키고 싶은 의도에서 플레이어가 두 다리로 직접 걸어서 이동하도록 한다. 또는 탈것이 게임 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이동속도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탈것에게 기대하는 높은 속도의 이동이 아닌 실제로 그 수단이 현실에서 사용되는 시간의 그대로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현실성의 강조는 탈것뿐 아니라 게임 속 캐릭터의 생활 방식 자체에 적용될 수 있다. <레드 데드 리뎀션2>는 현실적인 연출을 묘사한 게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캐릭터가 직접 사냥하고, 가죽을 하나하나 벗기고, 요리를 하는 시간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다. 이러한 게임의 표현 방식은 일각에서는 현실성이 높아 몰입을 가져다준다는 평가 받기도 했지만 상당수의 플레이어의 시간을 잡아먹고 답답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플레이타임 대비 얻은 게임 속 자원의 형편 없음을 지적했다.( 게임제너레이션 11호 글 참조) 혹자는 이런 상황을 보고 개발자들이 ‘낭만’을 추구한 결과라고 표현한다. ‘낭만’은 상대적인 가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낭만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답답함 뿐인 부정적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소위 ‘개발자의 낭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게임의 평판에도 부정적인 평가를 가져오게 된다면 개발자는 뒤늦게 조치를 취하기도 하는데, 탈것을 유료 재화나 DLC로 추가 업데이트 하거나 불필요한 소요 시간을 단축하는 버튼 등의 시스템을 추가한다. 물론 현실성을 강조해서 나타난 비효율적 플레이는 개발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플레이어 자신에 의해 추구될 수도 있다. 탈 것이 있음에도 타지 않는 플레이어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필자의 경우 <용과 같이 8>에서 캐릭터를 빠르게 먼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는 택시라는 수단이 있었음에도 잘 이용하지 않았다. 평소 일본 요코하마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선뜻 실현할 수 없었는데, 게임 속 배경인 요코하마의 거리 풍경이 너무 잘 표현되어있었기 때문에 굳이 도보를 통해 걸어가면서 여행의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덕분에 플레이타임은 게임 공략에서 제시하는 수준보다 훨씬 초과하였지만, 주변 경관을 즐기기 위해 느릿느릿 도보를 선택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비효율적인 선택이 오히려 더 가치있는 플레이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의 가치가 달라서 만들어진 (상대적인) ‘비효율’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비효율의 사례는 플레이어의 삶 전반에 깔린 태도이자 시간에 대한 문제다. 게임을 즐기는 부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공략을 보면서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부류와 공략 따윈 신경쓰지 않고 스스로 헤매고 깨닫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부류다. 두 타입의 플레이어 모두 각자의 만족감을 추구한다. 공략을 보지 않는 플레이어는 고행길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데에서 성취감을 얻는다. 반면 공략을 보는 타입의 플레이어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 없이 게임을 최적의 루트로 클리어 한다는 데에서 만족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플레이어의 태도는 각자의 시간의 가치가 달라서 나눠진다고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스카이: 빛의 아이들>이라는 게임을 할 때의 일이었다. 게임에는 양초라는 상징적인 아이템이 있다. 이 양초는 스킬이나 캐릭터 커스텀 등을 구입할 때 사용되는 주요 재화로, 게임의 맵 전체에 걸쳐 분포 되어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맵을 탐험하면서 양초를 수집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게임은 맵을 탐험하는 것이 주 콘텐츠였기 때문에 양초란 사실 수집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재화이기도 했다. 나는 한 플레이어와의 대화 중 어떤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게임 커뮤니티에서 읽은 양초 획득 공략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가 말하길, 전체 맵에는 총 00개의 양초가 분포되어 있고, 양초 위치를 외워서 최단 거리로 이동하면 이 게임은 하루 XX분만 해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양초 위치가 표시된 맵 지도는 커뮤니티에 다 나와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 뒤에 이어진 내 대답은 크게 부응하진 못했다. “아, 그렇구나. 고마워. 근데 왜 그래야 하지?” 효율을 극대화하는 플레이어와 그렇지 않는 플레이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타당한 이유도 있었던 것이, 그 플레이어는 “하루 중 게임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 XX분밖에 안된다”라고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소위 ‘효율충’이 되어버린 데에는 배경이 있음을 설명했다. 하루에 30분밖에 게임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만을 추구해서 하루종일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사람과 동등한 성취를 얻도록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다. 효율/비효율은 플레이어의 다양성의 문제 효율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플레이 방식일 필요는 없다. 게임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공에 관심 없는 것이나 열등하거나 패배적인, 혹은 의도에서 벗어난 부적응적인 태도라고 보긴 힘들다. <월든>에서 소로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고유한 삶의 속도를 발견했듯이, 무엇이 게임에서 ‘성공'인지 각자가 내리는 정의가 다를 뿐이며 플레이어 각각에게 존재하는 삶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비효율적인 게임 플레이는 게임이 단순한 목표 달성의 도구가 아닌 복합적인 경험의 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게임을 어떻게 접근하고 경험하는지를 드러낸다. 효율을 추구하는 플레이어들은 빠른 진행과 최적의 결과를 위해 게임 내의 모든 선택을 계산하지만, 그렇지 않은 플레이어들은 탐험과 발견, 그리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중요시한다. 이는 마치 소로가 숲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찾았듯이,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찾는 과정과도 같다. Tags: 제노바첸, 효율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연구자) 보라무 사회적인 관점에서 게임을 연구합니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 결국 인간을 탐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 Back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08 GG Vol. 22. 10. 10.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한국에서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조금 해본 것이 내 보드게임 경험의 전부였지만 게임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동료 중에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료의 초대로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을 해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의아했다. 기술적인 최첨단을 달리는 상품인 비디오 게임을 제작하고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굳이 보드게임을 하다니. 뭔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조금씩 보드게임을 하다보니 왜 일부 사람들이 보드게임이야 말로 정말로 궁극적인 게임의 형태라고 부르는 지 알 것도 같았다. 웨이트니 유로니 하는 생소한 용어들을 알아갈 정도가 되자 보드게임에 관련된 문화적 요소들이 의외로 대중문화에도 많이 침투해있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즐겁게 본 미국 드라마 중 하나인 ‘커뮤니티’에서 Dungeons & Dragons (D&D)을 하는 멤버들을 아주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났다. 미국에 사는 동안은 보드게임이 항상 내 곁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리서치를 하게 됐다. 코로나가 이끈 성장 한국에도 잠시 보드게임 카페 등의 유행이 분 적이 있지만 말그대로 잠시 유행에 지나지 않았고 이후에는 주로 매니아들의 취미로 여겨졌다. 물론 미국도 보드게임이 대중화되서 누구나 즐기는 취미라고는 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미국에서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을 받을 정도의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리서치기관 스태티스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보드게임은 2023년까지 120억 달러의 시장규모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 환율로 17조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보드게임은 미국에서 코로나를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장이기도 하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성장세가 꾸준하긴 했지만 2019년에 한해에만 무려 4000개가 넘는 보드게임이 쏟아진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 업계의 팽창은 누구라도 주목할 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유는 우리가 따로 조사를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양식있는 시민의 행동으로 불리던 나날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고 종류에 따라서는 8시간도 후딱 가버리는 보드게임은 당연히 아주 좋은 선택지였다. 보드게임이 또 하나 빛을 발하는 시장은 크라우드 펀딩이다. 보통 크라우드 펀딩이라고 하면 아이디어 상품이나 전자제품을 쉽게 떠올리지만 보드게임은 크라우드 펀딩 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카테고리다. 북미에서 가장 큰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킥스타터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큰 돈을 모은 킥스타터 프로젝트 순위를 살펴보면 이 중 네개가 보드게임이다. 역대 순위에서 6위를 기록하고 보드 게임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Kingdom Death는 무려 12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끌어모았다. 14위에는 보드게임을 위한 테이블이 8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펀딩 받으며 자리 했으니 전체 순위의 13 이 보드게임 관련임 셈. 펀딩의 규모가 아닌 아닌 프로젝트의 갯수로 봐도 놀랍다. 2021년 킥스타터를 통해서 펀딩을 시도해서 목표치를 달성한 보드게임은 3500개가 넘는다. 뉴미디어에서 보드게임 물론 세상의 모든 문화상품들이 그렇듯이 뉴미디어에서 노출이 시장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특히나 유튜브에서 보드게임과 관련한 여러 채널들은 크게 성장을 해왔다. 대표적으로는 배우 윌 휘튼이 진행하고 있는 ‘테이블탑’이라는 유튜브 컨텐츠는 여러 셀러브러티들을 초청해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단순한 구성이지만 5년 이상 에피소드에 따라서는 300만 조횟수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인기다. 빅뱅 이론과 스타 트랙에 출연하는 등 서브 컬쳐계에서 인기있는 작품마다 역할을 해온 윌 휘튼의 대표작이 테이틀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미 오래 전부터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던 소셜미디어 플랫폼 틱톡에서도 보드게임에 관련한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온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컨텐츠는 ‘샌드위치를 위한 주사위 던지기’(Roll for Sandwich)다. 룰은 간단하다. 가장 대표적인 보드게임 중 하나이자 가장 열광적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는 게임 D&D에서 사용되는 주사위를 가지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이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을 다채롭게 준비한다. 그리고 이런 재료들에 번호를 붙여서 종이 위에 쓴다. 예를 들면 식빵은 1번, 베이글은 2번과 같은 식이다. 주사위를 던지고 나온 번호대로 재료를 가져온다. 샌드위치에 사용되는 모든 재료들은 맛이나 서로 간의 궁합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주사위가 정해주는 우연에 따라서 결정된다. 너무나 간단한 포맷이지만 20면체 주사위를 굴려서 소스를 결정할 때는 나도 모르게 제발 다른 내용물과 어울리는 소스가 나오길 간절히 빌게 된다. 작가가 본업이지만 D&D 매니아인 틱톡커 제이크 포웰스가 영상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올해 4월 말. 그가 140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모으고 2500만회가 넘는 좋아요를 받기까지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드게임이라는 소재가 플랫폼에 따라서 전혀 다른 컨텐츠와 융합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증거다. 다양성이라는 과제 상업적인 성공을 제외하고 현재 보드게임업계에서 제일 유의미하게 논의가 되고 있는 주제는 도대체 왜 보드게임은 백인남성의 전유물이냐는 내부적인 질문이다. 보드게임 전문 사이트 보드게임 긱에 올라온 게임 중 상위 400위에 오른 게임을 대상으로 2018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게임 디자이너 중 92.6%가 백인 남성이었다. 유색인종 남성은 4.1%였고 백인 여성은 2.7%였다. 유색인종 여성 게임 디자이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캐나다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타냐 포부다는 보드게임 시장이 상정하고 있는 타깃 자체가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산층 백인 남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보드게임의 표지에서도 보인다. 보드게임 표지에 나온 인물 중 남자는 52.7%에 달했고 여성이 나온 경우는 동물이나 외계인보다 적은 19.2%였다. 인종으로 오면 이 문제는 더 도드라진다. 표지에 백인이 나온 경우는 60.2%였고 비백인이 나온 경우는 11.7%에 불과했다. 산업적인 이유로 특정한 성별이나 인종을 타깃으로 해서 상품을 만드는 것 자체를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보드게임 산업이 이런 제약으로 인해서 성장동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만드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이성애자 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보드게임 커뮤니티는 다양성을 받아드리고 있다. 보드게임 커뮤니티를 통해서 그가 진행한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 중 74.9%가 백인이었고 20.4%는 유색인종이었다. 여전히 백인이 압도적인 비율이지만 게임 디자이너의 90% 이상이 백인 남성임을 고려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성별로 가면 더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 설문에 답한 사람 중 50% 이상이 본인을 여성이라고 답했다. 커뮤니티의 경우 여성이 더 많지만 제작자는 남성인 상황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이 게임을 제작하는 쪽에서 필요한 때다. 흔히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양성을 부르짖는 이유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 특별히 윤리적이고 신념에 가득차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상업적인 이유가 더 크다. 단순하게 영화업계만 봐도 다양성은 돈이 된다. 블랙 팬서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것이 너무나 명징한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이란 키워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전반에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다. 보드게임 업계 또한 더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다양성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뉴미디어의 발전과 맞물려서 폭발적 성장을 기록해온 그들은 이제 본인들의 커뮤니티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나성인) 홍영훈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 Back Computer games and art: the practice of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12 GG Vol. 23. 6. 10.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is not a productive one if there is the expectation that there can be a reasonable answer to it without some questioning of the question itself. I will explain why this is so and make the case that we would be better served by thinking about the ‘aesthetic experiences’ that playing computer games may foster as opposed to their categorization as art or as non-art. One may well ask: ‘are artworks not synonymous with inculcating aesthetic experiences?’ The answer to this can only be ‘of course’ yet the qualification here is that we have to be precise about the kinds of ‘experiences’ in question. If we expect computer games to be able to convey complex states of interiority encountered by a protagonist grappling with a gamut of emotions, then we would potentially be comparing the game to works of literature and philosophy (and judging it as such). The orientation that I suggest is, moving away from preoccupations of artistic status towards scrutinizing experience can potentially shift our attention away from pining for the acceptance of computer games into the fold of high culture – a dubious aim at best – to focusing on deepening our gameplay experiences. This aim of deepening aims to have us become more attentive to our experiences and to then demand games that push the boundaries of existing experiences. ‘Aesthetics’ and ‘experience’ Computer games are multimedial works. In this respect, we might call them Gesamstkunstwerks (total works of art) made through collaborations of skilled individuals that go beyond the confines of a single medium. When we play them, we can focus on the experience as a whole or attune ourselves more narrowly to, for example, the visual representations, the animation, the level design, the dialogue, the musical score, etc. The notion of ‘experience’ that I have mentioned can be brought out via existing understandings of the concept of ‘aesthetics’ (or the ‘aesthetic’), which is a polyvalent one. Western aesthetics has generally demarcated aísthēsis (perception from the senses as well as discernment through them) from noesis (purely intellectual apprehension or the application of reason). ‘Aesthetics’ is often taken expansively to encompass the overlapping concepts of: ‘sensation’, or what presents itself to our sensory experiences in general; ‘perception’, where the activity of the viewer is crucial to the mode in which the object is apprehended or perceived; and ‘judgment’, in which aesthetic judgments are characterized by their not being mediated by the application of concepts or reason. ‘Game aesthetics’ may be taken to connote a degree of distinctiveness to computer games, digital games, or videogames. It can be tak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how it feels to play a game’; playing games can be said to yield particular kinds of experiences or perceptions through the senses, which can be studied with an aesthetic focus. The philosopher John Dewey consistently made the case for seeing continuity between so-called ‘high’ culture and popular culture. Dewey thought that what was to be avoided was the human creature divided against itself, which happens when our capacities (emotional, intellectual, sensory) are not be allowed to work naturally in conjunction with one another but are instead compartmentalized or separated from each other. This occurs as soon as we think about the realm of ‘art’ as separate from the sphere of ‘life’. It happens as soon as we assume that aesthetic experiences are only to be had when we enter into the designated space of the art gallery or the opera house (and not outside of them). To do this is to leave behind all our other experiences to languish as non-aesthetic, or even to assume that they are merely ‘instrumental’ – geared towards and reducible to a direct end like earning a wage, cleaning the house, keeping fit, having a conversation with friends, and that there is nothing else to them. The potential richness of improving our immediate experiences, of integrating aesthetic experiences into individuals’ vital interests and lives would therefore be missed. This is not to put the blame at the feet of artists or curators or critics; it is not to say that there are not works in the art world that are not contributing to the deepening of our experience – there certainly are. Yet it is also the case that there are real financial interests in play that want to keep the art world as separate. Preserving its power of categorical consecration, its ability to bestow the symbolic status of ‘this is art’, is to keep the current ordering of the world. Built into the question ‘are computer games art?’ are many key assumptions. These assumptions are arguably hostile to our developing fine-grained attentiveness to the actual experiences of gameplay. The first assumption concerns how the concept of ‘art’ is deployed with the supposition that either some works are ‘art’ or they are not. This is a binary categorization that can stifle further questioning. Secondly, there is the invocation of ‘computer games’ as a single category, which does little to help us parse the very different sorts of gameplay available even within a single genre. Finally, there is the assumption that computer games are like (most) other artworks in that they are identifiable objects or works. In this framing, the value is thought to reside more in the expression of artistic insights into the work by the developer and less in the process of what the player brought to the gameplay in order to enliven the experience in the greatest possible way for them. When players report that a game like Dark Souls (2011, FromSoftware) helped them to battle depression, it is the psychological state (together with the dedication) that the player brought with them that, in a concatenation of player and game via a lengthy process, produced an experiential transformation in the player. Critics applying aesthetic criteria The film critic Roger Ebert caused controversy when, in 2005, he claimed that video games, which, by their nature require player choices, could not attain the stature of art, since serious art like film and literature all require authorial control. Although he later stated that it was foolish to deny that all games could not ever be art even in principle, his position arguably concretized a perspective that is held by many – that computer games are juvenile, unsophisticated, geared towards immediate gratification, saturated with bombastic visual effects, quantified so as to preclude ambiguity, pandering to vulgar emotions. I am less interested here in dissecting Ebert’s arguments or in mounting counter-arguments (others have already done this) than in pointing out the nature of the claim itself. It is a claim that in order for games to seriously contend for the status of art, they must become like other accepted art forms. For some, this is so uncontroversial as to go without saying. Even for some philosophers of computer games, it has been a difficult position to escape. Grant Tavinor is a philosopher of the arts. His writings have largely focused on the ontological issue of whether computer games can be deemed to be art. He has consistently held that this can be answered in the affirmative but has always severely qualified it so that only a subset of video games are properly considered art. His approach has been to turn to existing definitions of art – to analyse the extent to which computer games do or do not satisfy their conditions – yet to do so without championing any single theory. This is accomplished by taking the ‘cluster theory’ approach which posits a list of aesthetic properties; a computer game is deemed to be a work of art if it instantiates a sufficient number of these attributes. In his 2009 book, The Art of Videogames, Tavinor cites on page 177 the cluster definition given by aesthetician Berys Gaut, which had stated that the following properties counts toward something’s being a work of art (and the absence of which counts against its being art): (1) possessing positive aesthetic properties, such as being beautiful, graceful, or elegant (properties which ground a capacity to give sensuous pleasure); (2) being expressive of emotion; (3) being intellectually challenging (i.e., questioning received views and modes of thought); (4) being formally complex and coherent; (5) having a capacity to convey complex meanings; (6) exhibiting an individual point of view; (7) being an exercise of creative imagination (being original); (8) being an artifact or performance which is the product of a high degree of skill; (9) belonging to an established artistic form (music, painting, film, etc.); and (10) being the product of an intention to make a work of art. Tavinor emphasises that Gaut is not necessarily committed to these ten conditions in their particularity, only that they are the kind of conditions that should make up a successful cluster account of art. Clearly, Tavinor appears to share the view that such existing cluster theories are broadly correct in their articulation of such conditions, even if they reserve the right for themselves to make revisions on finer points. The application of this approach leads him to preclude games that have been recognized as classics, such as Space Invaders (1978, Taito) and Red Dead Redemption (2010, Rockstar San Diego), from artistic status. This is because they only have very partial overlap with the cluster theory. About Red Dead Redemption, Tavinor says the following in a chapter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Game Studies (p.60): Red Dead Redemption is frequently and justly held up as a high point of recent game art, but even in this game the drama and narrative is a rather derivative and often ham-fisted approximation of the Western genre; treated as a film, it is firmly B grade. It is an unexceptionable statement that the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found in video games are often of poor quality. Moreover, it is difficult to find a single instance where these aspects reach the heights of refinement they do in the confirmed arts. In other words, Red Dead Redemption appears to be judged primarily with regard to its ‘narrative, characterization, acting, and writing’. These elements can be more easily accommodated in cluster theories than may be the case with the feel or the rhythm of the gameplay experience as a product of its ‘interactivity’ (or some other framing of its distinctive qualities). Thus, although Tavinor believes that computer games should be treated, as a form of art, on their own terms, and not simply seen as derivative forms of pre-existing types, the reality of his applying a cluster theory amounts exactly to applying a list of qualities that come from extant theories of art. As such, these qualities were formulated in a cultural and historical milieu in which the candidacy of computer games as art, or even as capable of fostering experiences worthy of aesthetic consideration, were not genuinely entertained. Tavinor’s philosophical methodology determined the result. Are artists who work with games interested in gameplay? It is not just existing philosophical frameworks that have had a hard time with making sense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The art world has tended to exhibit computer games by presenting them in the neutral context of a historical overview, which sidesteps the issue of the qualities of their gameplay. The first UK exhibition to show games was Game On: the History and Culture of Video Games at the Barbican Art Gallery in 2002. The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also took a historical approach in 2012 with The Art of Video Games, featuring games from Combat (1977) to LittleBigPlanet 2 (2011). Alternatively, other strategies include foregrounding commonly understood aspects of games such as the playable avatar, the premise of inhabiting a virtual world, or the representational aspects of games. The American artist Cory Arcangel is known for his conceptual focus on the visual aspects of computer games. His works rank amongst the most widely known ‘game-related art’, having been exhibited at the Museum of Modern Art, the Whitney Museum and the Museum of Contemporary Art – Chicago. One of Arcangel’s most celebrated pieces is his Super Mario Clouds, a video installation of the 1983 game Super Mario Bros. modded so as to be stripped of everything except the cyan sky and white 8-bit clouds game clouds drifting across it. There is no Mario, no koopa troopas, no goombas. Gameplay has been exorcised in favour of visual contemplation. In a similar vein, Arcangel’s 2011 exhibition at the Barbican called Beat the Champ, an installation that featured fourteen bowling games (from the 1970s to the 2000s) in chronological order, precluded gameplay( https://www.barbican.org.uk/whats-on/2011/event/cory-arcangel-beat-the-champ) . As the viewer walks through the space, the sounds that the encounter are not ones of bowling ball striking pins but the whir of ‘gutter balls’ as each of the games has been programmed by Arcangel so that the bowler does not score a single point. Thus, the gallery goer encounters the kind of authorial control lauded by Ebert. They are confronted with the audio-visual dimensions of failure in bowling games, designed to elicit a series of subsequent reflections. But when seen in terms of the experience of gameplay, it is a determined failure that is shorn from social and gaming context that would give failure meaning. The presence of the consoles themselves at the exhibition – the gameplay on show are not mere recordings – further underscores your inability to play the games themselves. This is an inability to experience the tensions and anxieties involved in the gameplay, the dance of fingers on buttons, the acclimatization to gaming rhythms, the inevitable frustrations, and the judgment of which game might offer the most compelling gameplay and why this may be so.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 artwork here is what Arcangel did with the games and how he displayed them. As with Super Mario Clouds, the claim to art lies in the conceptual and the visual aspects of the display – a language familiar to the art world. It is most certainly not the games themselves. The embodied challenges of the gameplay as an experience also do not feature. * Image from: https://coryarcangel.com/shows/beat-the-champ Robbie Cooper’s installation Immersion (2008), on the other hand, does take gameplay as a point of interest. It documented the embodied reactions of users of digital media across the world( https://www.scienceandmediamuseum.org.uk/what-was-on/robbie-cooper-immersion) . A prominent component of this consists of children playing computer games. The high-definition video capture of the players’ faces (the camera is in the position of the screen so the players seems to look directly at us) gives us the impression that we can peer into the moment-by-moment mental states of the players. Although we cannot see the changing displays, we are able to draw correspondences between the sounds emanating from the game and the players’ facial expression and bodily postures. One girl is playing the fighting game Tekken 5: Dark Resurrection(2005, Namco). There are sounds accompanying the special effects as blows connect, as well as the grunts and yowls of the characters. We can piece together the unfolding action, since anyone who has played Tekken will remember which moves trigger which sounds. We see Cooper’s subjects’ bodily, emotional, and cognitive sense-making in process, how the action has been enacted by the player and how it then affects the player in the machinic loop between player and game that is gameplay. Yet while Cooper is able to bring our attention to the complexity of the players’ experiences in question here and how they are bound up with their bodily being in the world, he is not able to shed any further light on them. He holds up a mirror but does not comment. * Image from: https://robbiecooper.com/project/immersion Indie game makers have pushed our gaming experiences by challenging existing gaming conventions, by having us see what has been normalized within genres as accepted practice by players and developers to fit a model of ‘good gameplay’. Thus, they offer their commentaries on what has gone stale in the status quo of game design and what else we might have instead, what alternatives experiences are possible. Of course, larger developers have also done this; my contribution here is not to attempt a history of such innovations. There are innumerable indie examples to draw from here, and they have all been discussed at length by others elsewhere so I will keep this very short. Undertale (2015, Toby Fox) forced us to confront our own assumptions around the RPG genre by underscoring that what we thought was the only way in any situation might not in fact be the only one (and may indeed not be the only way for gameplay to occur); Braid (2008, Number None) opened up avenues for considerations of time-based mechanics, for thinking about causation that has influenced many other games; The Stanley Parable (2013, Galactic Cafe) riffed on choice and freedom through the limits of replayability in order to question how freedom in games might ultimately be rather limited; Getting Over It With Bennett Foddy (2017, Bennett Foddy) tested the player’s relationship with themselves – whether they were able to ‘get over it’ or whether they were entrapped to exact unforgiving expectations on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ir own egos or self-identification as ‘hardcore gamers’. These and other games have provoked reflection on the gameplay experience. My point, however, is certainly not that we should await such thoughtful offerings and to pin all expectations of claims to artistic status and aesthetic experience on them. A deepening of the gameplay experience The Deweyan project called for an integration of art and life, which is something that is only possible when we are able to, as a community, bring the attention that we might reserve for art to everyday life. This is no small challenge. In this essay, I have been talking about the gameplay ‘experience’ and the need to deepen it. The best way to do this is for every individual to direct their attention to their own gaming experiences and to hone their ability to do so. This would be in keeping with the Deweyan idea of fostering a community of human beings that do not have their capacities divided into compartments corresponding to social norms. I can attempt to sketch out some general aspects of gameplay experience which are shared across a range of games, acknowledging that these descriptive generalizations are only pale shadows of the specific experiences that individuals actually have under specific circumstances: there is the joy in seeing our gradual skill-development as we internalize the game mechanics and come to act and respond in accordance with principles that we have inferred, which are also principles that we adapt over time; there is the strategic appraisal of different choices and the speculation over their possible outcomes; there is the strain in the exercise of memory in which pieces of information are selectively recalled or forgotten as they become relevant or obsolete; there is the intelligent but non-conscious focusing of attention to some moving stimuli and not others, a keeping track of the complex and ever-shifting landscape of moving opportunities and threats; there is an appreciation for the ebb and flow of the gameplay, for periods of rest and moments of being on the brink of loss or victory; there is a keenly honed spatial and temporal awareness applicable to specific contexts such as certain levels, where the action of a split-second condenses some possibilities and severs others; and finally, there is the pleasure in the ability to act automatically, intuitively, masterfully, in serene moments where control is both relinquished and yet exercised. It is the case that we can often be amnesiac with respect to our gameplay experiences. We play the game, relegating the experience to that of mere ‘fun’ in our own head, and then learn to forget about it afterwards. This is because we have not attempted to apply the aesthetic perspective to what we do not think is ‘art’. Alternatively, we might think about gaming only as a form of training to get better or of beating a challenge, measuring value by our progress in this respect. Instead, we might take time to mull over the contours and textures of our gameplay experiences, considering how they unfolded, how they are developing, how they might have been different, and what about them succeeded or failed to captivate us (and why). The demands of gameplay can of course make such reflections, in the moment of play, difficult. With greater proficiency in the game this becomes easier over time. Such accomplishment (both in the game and in attending to our experience) takes practice. As the philosopher of habit, Clare Carlisle has remarked, our attentiveness to thoughts, physical sensations and emotional responses can catch habit in the act and can lead to the cultivation of a connoisseurial sensitivity. Through this practice, we might come to a more refined understanding of the aesthetic value of gameplay experiences, in their complexity, and thus a deepening of our experience that will cascade into a greater appreciation of what games can potentially offer. Tags: english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Feng Zhu Dr Feng Zhu is Lecturer in Games and Virtual Environments in the Department of Digital Humanities, King’s College London. He is interested in computer gameplay as a site from which to explore the intersection of power, subjectivity, and play. His research focuses on computer games and how we habituate ourselves through gameplay. In particular, it concerns forms of gameplay as longitudinal self-fashioning that may inculcate ambivalent forms of reflexivity and attention, some of which may be read in terms of an aesthetics of existence. (Game Researcher) Bora Na I'm a game researcher. I've been playing games for a long time, but I happened to take a game class at Yonsei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Communication. After graduation, I sometimes do research or writing activities focusing on game history and culture. I participated in , ,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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