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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Back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01 GG Vol. 21. 6. 10. 시작하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실로 익숙한 흐름의 대화였다. 게임을 ‘중독’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 악마화하거나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우리 엄마가 나의 오빠를 키우던 때에도 구사한 문법이니 말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만 오빠와 달리 나는 디지털 게임을 즐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쥬니어 네이버’ 세대답게 나 역시 ‘슈 게임’을 하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조금 더 머리가 큰 뒤로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피카츄 배구’나 ‘보글보글’, ‘테트리스’, ‘카트라이더’ 등을 하며 점심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게임을 즐겨 하지 않던 나조차도 추억 저편에 게임이 있을 정도라면,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유년시절은 온통 게임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게임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뿐인가.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의 레드 카펫 위에서 한국영화를 알리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K팝을 알릴 때, 모니터 너머의 가상 세계에는 이미 ‘한국 vs 비한국’이라는 대결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한국 게임문화의 위상은 최정점에 놓여있던지 오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는 게임도 엄연한 취미이자 하나의 문화로 봐 줄 법도 한데, 여전히 게임은 하찮고 저급한, 그래서 ‘문화’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우선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 때문일 테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교체가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편견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뿌리 깊게 남아있고, 그로 인해 게임은 문화가 아닌 잠깐의 일탈이나 못된 유흥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뿐일까? 세상만사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게임이 문화영역에서 제 몫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또한 외부적 편견 탓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 밖의 다른 요인도 있을 것이며, 나는 그것을 ‘비평’으로 지목할 셈이다. ‘게임비평’? 사실 게임이 맥락적인 조건 속에서 주조되는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자 실천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타의 문화예술처럼 비평이 따라붙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게임비평은 여전히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타 영역의 비평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은 탓이며 비평의 무능과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이 글이 쓰인 배경이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계급투쟁의 영토로서 영화/비평 문화비평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것은 단연 미술비평과 문학비평이다. 초기에는 양자 모두 작품의 고유한 특징과 미학적 가치를 규명함으로써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작품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 또는 ‘문학사’와 함께 발맞춰 전개되었지만, 근대 전환기에 이르러 예술이 인간 이성의 지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자 비평은 역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이 되자 비평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예술 시장의 확대와 부르주아 계층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단순히 작가와 문화 향유자 사이를 중개하던 비평가의 역할이 특권 집단의 배타적인 취향을 형성하는 역할로 변모한 까닭이다. 특히나 미술과 문학은 일찍이 상류층의 취미이자 고급예술의 대표적 형태로서 문화사에 기입되어 왔기에 비평이 제 스스로 그것의 차별성과 우월성을 강조하여 대중문화와의 구별짓기를 수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으며, 이때부터 비평은 문화예술의 지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반면 영화와 영화비평의 관계는 위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진화·발전을 이룩해왔는데, 영화는 근대의 산물이기에 태초부터 고도화된 자본 및 기술, 매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 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도 신문과 잡지는 1895년 12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 발명과 영화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조푸앵(Mise au point)>(1897)이나 <르파시나퇴르(Le Fascinateur)>(1903)와 같은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근대 영화비평의 초석이 마련되었는데, 달리 말해 영화는 미술이나 문학과 달리 탄생부터 그것에 대한 글쓰기와 함께한 셈이다. [1]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발명 초기, 영화가 ‘미래가 없는 발명’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사실주의 등 온갖 종류의 장르 및 스타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자기 식대로 소화했고 제작과 평론, 관람을 한데 모으는 비옥한 토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대중매체로서 영화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점차 영화 산업에도 활기가 돌고 영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 칼럼을 고정으로 싣지 않는 주간지가 없을 정도로 영화 비평은 몸집을 부풀렸고 정기 간행물 형태의 전문 영화 잡지 역시 앞다퉈 창간됐다. [2] 그리고 이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비평에 참여하면서 그 수준도 현저하게 끌어올려졌는데 알렉상드르 아스트뤽(Alexandre Astruc),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장 조르주 오리올(Jean George Auriol), 로제 레나르트(Roger Leenhardt), 자크 도니올-발크로즈(Jacques Doniol‐Valcroze) 등은 철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영화 미학을 심도 깊게 탐구하고, 비평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이하 <카이에>)와 <포지티프(Positif)> 역시 이러한 지적 계보 속에서 탄생했다. [3] 이렇게만 보면 영화/비평은 나름대로 순탄하게 독자적인 예술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문 영화비평이 등장한 초기만 하더라도 영화는 연극이나 문학의 빈곤한 확장으로 여겨졌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는 제국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적 매체라는 편견이 빠르게 확산됐다. 게다가 전쟁 이후 맹렬한 기세로 성장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해, 영화가 미술이나 문학과 같이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만의 미학적인 속성과 가치를 규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말소시켜야 했고, 그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저속한 유희거리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역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초창기 영화이론가 리초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 선언한 이후 영화비평은 영화가 고유한 내적 세계와 미학적 가치를 지닌 예술의 한 형태이며, 그에 대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모든 행위는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지성의 작용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아스트륔의 ‘카메라 만년필론(camera-stylo)’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스트뤽는 1948년 <레크랑 프랑세(L'Écran française)>의 지면을 빌어 영화감독은 화가나 작가에 비견되는 예술가로,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기자재는 소설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만년필과 같다고 썼다. [4] <레크랑 프랑세>의 또 다른 필자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역시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종의 의식이자 실천적 행위라고 말하며 ‘사유-이미지(Images-pensée)’를 주창했고, 영화비평의 전성기인 ‘황색 시대’ [5] 를 견인한 앙드레 바쟁 또한 카메라의 힘이 현실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역설하며 영화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6] 이렇듯 영화가 ‘근(현)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의 역할은 실로 막대했다. 비평이 촉발시킨 영화 미학에 관한 물음과 논쟁은 당대 많은 부르주아-엘리트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이 영화의 인식 개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하며 명실상부한 ‘예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한 의미의 시네필 문화를 수호하던 비평계가 누벨바그 운동에 직면하며 폭넓은 지적 조류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그간의 비평은 의식적으로 비정치성을 강조해왔는데, 이는 영화-이미지 이면에 놓인 감독(작가)의 천재성과 영화의 특수성을 세간에 드러냄으로써 영화와 비평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으려는 기획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마련한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작품 세계로서의 미장센에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서 이념적 해석이나 정치적 성향은 필요치 않다.” [7] 만약 “이를 강요한다면 영화의 시각적 구성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편향된 ‘읽기’를 필연적으로 야기할 것” [8] 이며, 이는 결국 영화를 도구적으로만 참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대교체로 인해 젊은 감독들은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적 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비평도 변혁을 요구받았는데, 비평 역시 세계의 일부라면 모종의 투쟁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누벨바그의 거장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다. 그는 영화 안에는 언제나 미지의 상태로 남겨진 의미와 기능, 형식들이 존재하기에 자기 자신에게로 닫혀서는 안 되며, 이 미완성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힘이기에 영화는 결코 고립된 채 이해될 수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리베트 이전의 비평이 작품의 내적 탐구를 통해 영화를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다면, 리베트 시대의 비평은 작품의 안과 밖을 잇는 시도를 통해 영화의 이론적 정립과 과학적 글쓰기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리베트는 <카이에>를 이끄는 동안 영화의 의미 확장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인류학과 문학 이론, 라캉의 정신분석학,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지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 리베트와 함께 <카이에>를 이끌던 필진들 역시 블랑쇼,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융 등을 인용하면서 철학과 영화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 영화를 다르게 사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방법 등을 강구했다. 이제 비평은 근대인의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영화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이 자극하는 무의식과 불안에 초점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영화의 목표가 “사람들로 하여금 둥지 밖으로 나오도록 신화를 깨부수는 것” [9] 으로 변모함에 따라 비평이 중요하게 포착해야 할 것 또한 작품이 높인 맥락, 즉 영화가 탄생한 환경적인 조건이나 현실 세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것의 표현 방식 등으로 이동하게 된 셈이다. [10] 그리고 몇 년 뒤 영화/비평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회고처럼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그에 관해 쓸 수 없게 만들었다. 68혁명의 주창자들이 이끈 정치경제학적 변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프랑스 사회 내 모든 가치가 의문시되었고 영화 역시 황색 시대에 구축된 제도와 관습, 원칙, 규율 등이 1968년 이후의 상황을 다루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전 시네필리아에 대한 거부가 만연해지자 영화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사유 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요구 담론의 지속적인 형성 및 축적은 ‘영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열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 한국영화/비평 그렇다면 한국영화는 어떨까? 한국영화사에 비평 집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지만 이때의 평론은 서구의 초기 영화비평처럼 일간지나 잡지 등지에서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정도였으며, 보다 선명한 문제의식을 지닌 비평가 집단이 출현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5.16의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한국영화비평가협회’에 10여명의 문학평론가를 영입하며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새롭게 출범한 것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하나의 비평적 공동체로 묶어준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새로운 ‘세대성’이었다. 해방직후의 비평은 ‘민족영화 건설’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1950년대 전후 비평 역시 ‘한국영화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어받았지만, 이 새로운 비평 집단은 영화의 문학성(서사성)이나 외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미지-언어에 대한 자의식을 강조하고 내적 세계를 포착함으로써 영화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강조했다. “리얼리즘을 초극해야 한다” [11] 는 한국영화의 암묵적인 전제는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영화는 본디 기록의 매체이니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거나 머물러서는 안되며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리얼리즘은 한국영화의 절대적 명령이 아닌 하나의 선택적 가치에 불과하며, 영화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라는 오브제가 아니라 그 오브제를 다루는 영상-이미지이다. [12] 이러한 흐름만 놓고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이 걸어온 길 역시 서구의 궤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근대 도시의 통속적이고 저속한 볼거리로 여겨지거나, 인접한 예술의 하위호환 버전으로 간주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각되다가 대대적인 세대 교체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매체적, 미학적 특성을 규명하며 종국에는 예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한국영화는 언제나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한 세계영화문화의 공통된 목표였다면, 다른 하나는 문화 열강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민족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무엇보다 식민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벗어던지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힘의 획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한국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풀어 말하자면 50년대 한국영화는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식민지적 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를 대안으로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세우는 테크놀로지나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며 거리두기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 60~70년대의 한국영화비평은 기술과 예술을 엄격히 구별하고 전자보다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기술적 낙후성에 대한 불안과 좌절로부터 비롯된 의식적 부인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물적 토대를 감안했을 때 할리우드가 선보이는 기술과 기교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졸렬한 기술-자본이 만들어낸 말초적 쾌락이라 호명하며 예술성의 고양을 주창한 것이다. [1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의 기술력을 논할 때는 다소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가령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가 등장하자 비평단은 이를 한국영화의 획기적인 진전이라 상찬하고, 국산 시네마스코프가 제작되었을 때는 한국영화를 해외영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위대한 업적이라 호평했다. [14] 이것이 너무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진다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장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그에 대한 평단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했는데 당시 물밀듯 밀려 들어온 해외 문화로 인해 자국 문화의 위기설이 나돌았고, 이때 전 지구적 자본의 풍랑에 맞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이끌 대표 주자로서 부상한 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 민족주의적 서사를 채택하며 처음 등장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막대한 자본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등에 업고 인기몰이를 했는데, 이에 대한 비평 역시 60~7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영화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에 대거 유입된 해외 스펙터클 영화에 대해서는 자국의 영화를 말살시키는 ‘위협’의 딱지를 붙였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해외 문물로부터 국가·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지켜낼 문화예술의 지위를, 더 나아가 IMF 외환 위기와 구제 금융을 겪으며 좌절한 한국사회를 다시 일으킬 산업분야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15] 해외영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자본에 대한 한국영화/비평의 이중적인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는 외래 문화로 출발했으나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기술은 근대성의 상징이자 욕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영화/비평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모순, 또는 지정학적 특수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6]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한국영화/비평의 과제는 서구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의 영화/비평은 영화에 근대 문화예술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철학적 사유와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외래 문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까닭이다. 이렇듯 한국영화/비평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대중문화)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열강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저항과 해방을 꾀한, 이른바 ‘권력투쟁의 이중 전선’이라 할 수 있다. 맺고 새로 시작하며: 현대 문화예술로서의 게임을 위하여 긴 우회로를 거쳤으니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글을 시작하며 나는 게임이 현대의 일상문화와 한국의 문화산업 한복판에 놓여 있음에도 대체 어떤 이유로 여전히 천대를 받고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비평 문화의 비활성화를 언급했었는데, 이 글의 목적이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통한 비평의 각성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고 명쾌한 설명일 테다. 즉 게임비평의 소극적인 태도, 나태함, 약간의 무기력함과 무능함 등의 논리적인 귀결은 게임문화 전반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길게 서술했듯 영화 역시 고전 미학의 권위에 짓눌려 꽤나 오랫동안 문화예술계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비평의 공이 컸다. 특히나 한국영화의 경우 서구 문화의 계급투쟁 계보를 이으면서도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이중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국게임문화에 주는 시사점이 많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주는 교훈을 통해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영화 비평은 수십 년 전부터 ‘위기설’이 감돌 정도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몸체를 부풀리는 OTT 플랫폼으로 인해 영화 관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담론장 형성과 지식-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아마추어 비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문 비평의 지나친 엘리트주의나 미학주의는 대중예술로서 출현한 영화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권 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부르주아적 성향을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이는 영화를 미학적 탐구와 학문적 고찰의 대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주관비평에서 객관비평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던 과거의 비평적 요구가 절대화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였다. 기실 비평적 주체는 늘 제3자로서 중립적인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지워진 비평 주체의 주관성은 역설적으로 비평가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비평 행위는 단순히 제3자로서 사실을 기록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매개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동시적이며,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 쓰고, 읽고, 말하고, 듣고, 보는 주체는 오늘의 시간을 지나쳐가는 주체와 겹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평의 전문성을 보장한답시고 현실과 유리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자신들만의 리그에서나 통할법한 논리를 내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핵심적 역할이 세계와 텍스트 사이에 오솔길을 놓고 장 안팎의 행위자들을 이을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 새롭게 마련된 비평-플랫폼의 책임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마주침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데에 있다. 지적 자본을 내세운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신랄한 목소리, 열정 자본으로 무장한 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유쾌한 분위기, 문화 자본으로 다듬어진 섬세한 감수성과 고아한 취향, 현장의 목격자 및 관찰자들의 순수한 호기심과 앎에 대한 열망 등이 뒤섞일 때, 그래서 저마다 활발하게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담론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게임은 비로소 현대 대중문화예술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 새로운 비평-플랫폼이 서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게임문화가 현대 대중문화의 치열한 계급전쟁에서 권력을 탈환하고 개별 학문의 지위를 차지하여 대학의 문턱을 넘는 날이 오기를, 한평 남짓한 책상 앞에서 펼치는 우아한 지적 활동이자 역동적인 취미로서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그리하여 현질까지 해가며 기를 쓰고 게임을 한 우리 귀염둥이의 노력이 사춘기 소년의 한심한 일탈이 아닌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게임 제너레이션〉의 건투를 빈다. [1]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390쪽. [2] 에밀리 비커턴, 정용준·이수원 역,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비평의 길을 열다』. 이앤비플러스, 2013, 31-33쪽. [3] 박희태, 「프랑스 영화비평의 현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47, 프랑스문화예술학회, 2014, [4] http://www.newwavefilm.com/about/camera-stylo-astruc.shtml [5] <카이에>는 노란 겨자색 표지에 커다란 흑백사진을 실은 30페이지짜리의 잡지로 1950년대 파리에서 가장 ‘우아한’ 잡지로 여겨지곤 했는데, 특히 별다른 헤드라인 스틸 사진을 사용하여 표지를 구성한 것은 <카이에>가 영화 미학에 큰 비중을 두겠다는 다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6]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51-52쪽. [7]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8]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65쪽. [9] Rivette, Cahiers 204, September 1968. [10] 에밀리 비커턴, 앞의 책, 85-90쪽. [11] 이영일, 『영화예술』, 1965년 4월호, 24-29쪽. [12] 문재철, 「60년대 중반 영화비평담론의 새로움」, 『영화연구』 41, 한국영화학회, 2009, 61-79쪽. [13]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2쪽. [14]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3쪽. [15] 이 시기가 한국영화 담론의 황금기였다는 사실을 추가로 덧붙일 필요가 있는데, 비약적인 기술 발전과 해외 문화 유입으로 인해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자 대중문화론이 지식인 사회에서 각광 받기 시작했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의 영화는 이전과 달리 영상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담론을 구성하고, 인문사회과학과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해갔는데, 그 결과 한국사회에서도 영화가 엄연한 분과학문으로 인정받아 영화아카데미 설립 및 운영, 전문 예술대학의 건립, 종합대학의 영화학과 설치 등과 같은 다양한 결실을 맺었다. [16] 문재철, 「한국 영화비평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연구」, 『영화연구』 37, 한국영화학회, 2008, 135-136쪽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 죄책감 3부작의 죄책감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한국의 게임개발자 somi는 자신의 작품 중 ‘레플리카’, ‘리갈 던전’, ‘더 웨이크’ 세 작품을 묶어 스스로 ‘죄책감 삼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일련의 시리즈로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 작품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일련의 의도가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somi는 자신의 게임을 통해 스스로 밝혔듯이 일련의 메시지를 게임이라는 매체의 방법론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하나의 시리즈로 명명된 그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 의도와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는다. < Back 죄책감 3부작의 죄책감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12 GG Vol. 23. 6. 14. 한국의 게임개발자 somi는 자신의 작품 중 ‘레플리카’, ‘리갈 던전’, ‘더 웨이크’ 세 작품을 묶어 스스로 ‘죄책감 삼부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일련의 시리즈로 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 작품에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일련의 의도가 들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somi는 자신의 게임을 통해 스스로 밝혔듯이 일련의 메시지를 게임이라는 매체의 방법론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하나의 시리즈로 명명된 그의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 의도와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얻는다. 죄책감이라는,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세 작품을 묶어낸 키워드는 무엇을 어떻게 가리키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다. 3부작 중 가장 먼저 출시된 ‘레플리카’는 포스트모템에서 작가가 직접 밝힌 바로는 2017년의 탄핵정국 속에 게임 디자인의 방향이 바뀐 경우다. 본래 타인의 신분을 훔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소설에서 모티프를 가져오려 시작했던 게임기획은 탄핵정국을 맞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 작가의 입장에 따라 국가기관에 의해 테러범으로 몰린 두 학생이 서로 분리된 감옥에서 상대방의 스마트폰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레플리카’의 기본 구조는 스마트폰 인터페이스를 활용한다.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경우에 따라서는 신체 그 이상으로 자아를 대변하는 기기다. 타인의 스마트폰을 열어 가며 보게 되는 정보는 그래서 진실로 여겨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조차도 조작될 수 있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레플리카’는 정보를 담고 있는 스마트폰의 내부를 추적해 나가며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향해 나가는 구조를 취한다. ‘레플리카’에서의 죄책감은 포스트모템에서 작가가 언급한 것과는 별개로 게임 안에서도 그려지는데, 스마트폰을 통해 진상을 알게 된 플레이어가 자신의 생존과 석방을 위한 선택을 마주하는 순간에서다. 시놉티콘 체계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고 때로는 자신을 위해 정보와 진실을 조작하는 현장에 대한 고발이 게임제작자가 현실에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는 죄책감의 발로였다면, 제작자가 만든 상황 속의 게이머 혹은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선택하고 맞이하는 여러 결과들은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형태로서의 체험 가능한 죄책감이다. ‘레플리카’의 죄책감은 이렇게 작가로서의 입장과 플레이어로성 입장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둘 모두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형식은 두 번째 작품 ‘리갈 던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뤄진다. ‘리갈 던전’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실제 행위가 형사법이라는 체계 안에서 범죄로 재구성되는 과정을 경찰의 조서작성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한 게임이었다. 전작에서 스마트폰 인터페이스를 다루며 감춰진 정보를 파헤쳐야 했던 플레이어는 ‘리갈 던전’에서는 좀더 정답이 없어 보이는 경찰 심문 조서를 꾸며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리갈 던전’의 조서 작성은 실재하는 행위를 법의 테두리 안에 넣는 과정을 다루면서 현실의 행위와 법적 관점 안에서의 행위가 달라지는 과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차이는 특히 조서를 작성하여 실제로 범죄유무를 결정하는 경찰이라는 존재가 사실 객관적이기 어렵다는 상황을 포함함으로써 죄책감의 문제에 도달한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실적이 점수화하는 경찰조직의 문제를 마주하며, 연말이 다가올수록 실적을 채워야 하는 위기상황은 점점 고조된다. 범죄를 구성하는 일의 결과가 결국 자신의 성과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조서 작성을 업무로 둔 경찰관으로서의 플레이어에게 일련의 죄책감을 경험케 만든다. 3부작의 마지막임을 천명한 ‘더 웨이크’에서는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의 죄책감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는 죄책감의 의미에 더 무게를 둔다.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주인공은 암호화된 자신의 일기장을 꺼내 해독하여 들춰보며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는지를 반추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족과 맺었던 외면적인 관계와 내면적인 마음 사이에 벌어진 차이만큼의 죄책감을 겪게 된다. ‘더 웨이크’ 또한 다른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가리워진 진실을 향해 퍼즐을 풀어가는 과정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겪게 만들고, 결론적으로 그 과정 속에서 마주하는 사실들로 하여금 플레이어에게 일련의 죄책감을 전달하는 구조를 유지한다. 죄책감 3부작을 이야기함에 있어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마지막 3부작의 아쉬움이다. 앞선 두 작품과 달리 3부작은 다소 이질적인데, 이는 단지 게임이 다루는 주제가 내면의 문제에 국한되어서가 아니라 게임이 활용하는 퍼즐의 방식이 주제와 동떨어져 따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다. ‘레플리카’는 이제는 신체를 능가하는 주체가 되어버린 타인의 스마트폰이라는 환경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기본적인 스마트폰 비밀번호를 풀어가는 것부터 시작해 담겨진 정보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진실 탐구의 여정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리갈 던전’이 ‘던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려냈던 장면 또한 법과 현실이라는 두 존재가 서로 마주치며 현실이 법의 구멍에 맞추어 깎여나가는 순간을 조서작성이라는 방식으로 연출함으로써 성과제 기반의 관료제라는 주제와 객관적인 듯 보이지만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경찰에 의한 조서작성이라는 방식이 같은 방향을 지향할 수 있었다. ‘더 웨이크’에서는 그러나 퍼즐과 주제가 분리되어버린다. 에니그마를 연상시키는 치환암호 체계는 다른 두 작품과 달리 굳이 일기장이 그래야 할 강한 설득력을 제공하지 못하며, 퍼즐을 푸는 방식 자체만으로는 ‘레플리카’나 ‘리갈 던전’처럼 어떤 대상을 그려내지 못하고 만다. 3부작을 이야기함에 있어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아쉬움을 접어두고 다시 돌아본다면 이 3부작이 다루는 죄책감이 드러나는 방식에서의 공통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바로 진실이라는 대상이다. 세 작품 모두 현재로서는 베일에 싸인 어떤 진실이라는 대상을 향해 플레이어를 움직이게끔 하지만, 그 진실로 가는 길로서의 퍼즐은 내가 도달한 진실을 믿게 만들기보다는 진실이 숨겨지고 조작되는 현실 자체를 반추하게 만든다. 친구의 스마트폰을 해킹해 자신과 친구가 왜 공권력에 의해 갇혀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 자체에 ‘레플리카’의 중심이 자리한다. 실제로 엔딩은 경우에 따라서는 영원이 갇힐 수도, 혹은 혁명적인 결론을 향할 수도 있지만, 어느 방향을 타더라도 문제없는 플레이가 된다는 것은 이 게임을 통해 전달되는 죄책감이 어떤 고정된 결론을 다루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리갈 던전’에서도 이른바 진엔딩이라 할 루트는 존재하지만, 굳이 게임이 제시한 서사를 따라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과 기반의 관료제가 어떻게 사회적 행위를 범죄로 재구성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며, 이를 이해하는 순간부터의 플레이에서 죄책감이 발현되는 구조다. ‘더 웨이크’는 다른 두 작품과 달리 암호화된 일기장 자체는 그 해독과정 자체만으로 의미있는 연출이 되기보다는 일련의 장치로만 활용되면서 다른 두 작품과 다른, 제시되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주제 연출을 선보였다. 이 때의 죄책감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제 진실인지 아닌지와 무관하다. 죄책감은 그저 반추하는 일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현실을 지금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이 현실이 나타나기까지 어떤 메커니즘이 그 배경과 맥락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살피는 과정의 결과물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죄책감 3부작의 죄책감이다. 서두에 이야기한 바 대로, 작가로서의 somi가 존재하는 현실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책망하며 게임을 만들었던 그 의도 그대로가 어찌보면 게임의 규칙을 통해 다시 발현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Tags: 소미, somi, 레플리카, 리갈던전, 더웨이크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 Back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07 GG Vol. 22. 8. 10. 가장 빈곤한 게임 장르로서의 리듬 게임 본고에서 우리는 〈비트매니아beatmania〉, 〈이지투디제이EZ2DJ〉를 필두로 해서 〈디모Deemo〉, 〈사이터스Cytus〉까지 이르는 리듬 게임을 게임 일반의 극한이 되는 형태로서, 정확히는 가장 빈곤한 게임의 형태로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우리는 숱한 리듬 게임들을 하나하나 비평할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리듬 게임 전반에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다른 장르라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일 이와 같은 장르 일반에 대한 비평은 리듬 게임 장르 특유의 빈곤함에 의거해서 가능해진다. 리듬 게임이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빈곤한 장르라면 어떤 의미에서인가? ‘악보’에 맞추어 대응하는 ‘키’를 입력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이 단순한 장르에서는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다. ‘타이밍’이 이 장르의 본질을 규정하며, 그 외의 모든 요소들, 예컨대 서사라든지 경험치라든지 하는 요소들은 이 장르에 대해 부수적이거나 장식적이다. 그런 요소들은 물론 몰입감을 더해주지만, 리듬 게임이 선사하는 쾌감에 불가결하진 않다. 리듬 게임이 이처럼 빈곤하리만치 단순한 장르라면 과연 거기에 새삼 비평할 만한 가치나 분석할 만한 구석이 있을까? 세계universe 자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다가오고 있는 광활한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에 하필이면 리듬 게임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퇴행적이고 고루하게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즉시 제기될 법한 의문이다. 리듬 게임에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ゼルダの伝説 ブレスオブザワイルド〉처럼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나 〈레드 데드 리뎀션Red Dead Redemption〉 시리즈처럼 다른 세계의 안으로 들어가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처럼 내러티브narrative를 비틀어 플레이어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각성하도록 유도하는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듬 게임이 현실에서는 드문 어떤 체험을 환상의 형태로 제공하는 것조차 아니다. 리듬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플레이’라는 용어가 리듬 게임만큼 꼭 들어맞는 장르도 또 없을 것이다. 그 용어가 ‘연주’를 뜻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런 연유로 리듬 게임은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종종 이 냉소는 리듬 게임을 하고 놀 거라면 차라리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을 직접 연주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물음의 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리듬 게임인 〈락스미스Rock Smith〉로 기타를 익혀서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악보는 전혀 읽지 못하고 스케일scale 같은 개념도 알지 못하는 기타리스트 세대가 등장해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기타를 배운 세대를 당황케 만든 바 있다. 그러므로 저 냉소적 물음에 진리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보면 저 냉소는 리듬 게임이야말로 게임 플레이의 원초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현생現生을 살지 않고 게임을 하는가? 이런 의문은 현실보다 더 풍부하고 강렬한 체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제공하는 게임의 경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왜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고 굳이 그 열화판처럼 보이는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일까? 현실이 게임보다 더 풍요로울 때조차도, 게임이 현실보다 더 빈곤할 때조차도 우리가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게임의 빈곤함을 단순히 현실에 비한 게임의 부족함이나 미진함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빈곤함이야말로 게임을 더욱 게임답게 만드는 속성이라고 간주하여야 한다. 리듬 게임에 고유한 유한성의 쾌감 악기 연주와 리듬 게임 플레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빈곤함과 결부된 소진 가능성이다.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실제 음악의 ‘악보’는 우리에게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한다. 무음無音의 음악인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33초〉조차도 그렇다. 그래서 하나의 곡을 두고도 그토록 다양한 연주와 변주가 등장하고 그토록 다양한 커버cover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음악의 경우 악보는 소진 불가능한 객체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악보’는 그렇지 않다. 리듬 게임의 최종적인 목표는 다름 아니라 악보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있으며, 거기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리듬 게임 장르를 두고 통용되는 유명한 경구 “빛이 나는 곳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이 가는 곳에서 빛이 난다”는 악보가 플레이어에 의해 완전히 학습되었음을, 따라서 완전히 소진되었음을 뜻한다. 관건은 이런 소진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식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서 리듬 게임은 빈곤하다고 말했다. 즉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에게는 선택의 자유나 운신의 폭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화면을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세 번째 손가락으로 누를지, 아니면 발판을 오른발로 밟을지 왼발로 밟을지 정도를 결정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징검다리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게 리듬 게임의 제일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다. 이는 리듬 게임을 깨기 위한 왕도가 게임이라는 ‘타자’에게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는 데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타자의 ‘리듬’에 자기의 ‘리듬’을 동기화시키는 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리듬 게임이라는 타자는 무한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유한한 타자다. 즉 이론적으로 리듬 게임의 플레이어는 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퍼펙트’한 판정으로 관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쾌락이다.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및 다른 물건들과, 즉 타자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협상하면서 그 리듬에 나를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적 타자들의 리듬이란 무척 변덕스러운 것이고, 실제의 악보 사례가 보여주듯 심지어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변덕스러움, 자유로움, 무한함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맞추고 동기화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사둔 요거트가 상하기 전에 챙겨 먹어야 하고 방금 받은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식기를 기다려야 하며 지하철역에 가득 들어찬 인파와 발걸음을 맞춰야 하고 오늘도 이어지는 상사의 일장연설에 적절한 ‘리듬’으로 맞장구를 쳐야 한다. 요컨대 이 현실 세계의 리듬은 나의 리듬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줄곧 나보다 느리거나 빠르다. 이와 달리 리듬 게임은 이런 리듬의 괴리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타자와의 무결한 동기화가 가능하다는 일체감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이런 일체감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에 가까울 수 있지만, 결코 타자에 대해 폭력적인 전능감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왜냐하면 이 동기화는 타자의 리듬을 나의 리듬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는커녕 정반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리듬 게임에서는 오히려 내 쪽이 타자의 리듬에 굴복해야 한다. 곡曲을 소진시키고 ‘클리어’하기 위해서 나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를 완전히 소화했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쾌감, 타자와 완전히 동기화됐다는 쾌감은 오로지 게임에서만 적법하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생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문화 영역에서도 무척 희귀하고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기까지 하다. 예컨대 영화, 소설, 회화, 음악 등의 경우, 내가 그 작품을 완벽히 이해했고 그것과 완벽히 동기화되었다고, 그리고 그런 내가 보기에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을 소진시킨다면 아주 난폭하고 비윤리적인 짓일 것이다. 내가 어떤 대상의 진리와 전모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단언은 해당 대상을 두고 무한히 전개될 수 있을 풍요로운 대화의 가능성 전체를 미리 차단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리듬 게임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유한한 차폐가, 즉 ‘풀 콤보 퍼펙트 플레이’가 합법적인 목표로 제시된다. 해석의 자유나 변주의 가능성 같은 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한’하고 ‘폐쇄’적인 타자의 악보에 나의 리듬을 녹여 넣음으로써 완전한 동기화를 달성해야 한다. 리듬 게임의 독특한 자유로움 물론 개방성 자체를 모사하는 것을 재미의 근거로 삼는 게임들이 있어서, 유한한 폐쇄성에 의해 가능해지는 완전한 동기화로부터 쾌감을 추출해 내는 리듬 게임과 대척을 이룬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의 게임 중 상당수는, 특히 장대한 서사와 드넓은 ‘오픈 월드open world’를 주요한 무기로 삼고 있는 게임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다채로운 체험들을 가능케 만드는 데서 존재 가치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레이어에게 마치 무한히 자유로운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가상假想을 선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스탠리 패러블〉은 다름 아니라 무한한 자유라는 가상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이념적’ 풍자로서 성립한다. 내레이터narrator가 플레이어의 행동을 미리 앞질러 말함으로써 결국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내레이터의 지시대로 게임을 진행해서도 곤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곤란하다는 이율배반을 체험하게 된다.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내레이터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심지어는 버그처럼 생각되는 요소가 눈에 띄어 이용하면 그것조차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내레이터가 응수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결과적으로 자유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렇게 순조로운 내러티브라는 관념을 고장내고 게임 내부의 세계(“월드”)에 ‘자유롭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 리듬 게임은 자유를 모사하기 위해 제작된 게임들에 대한 ‘물리적’ 논박으로서 〈스탠리 패러블〉을 보충한다. 오픈 월드 게임들에 대한 리뷰가 게임 내부의 세계 안에서 어디까지 용인되고 어디부터 금지되는지 실험해보는 과정을 필히 거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핵심적 재미가 무엇에 의해 산출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게임이라는 대상을 향유하는 태세가 기본적으로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탐사하고 소진시켜 보는 데 있음 역시 보여준다. 리듬 게임의 경우에 소진되어야 할 것이 악보라면 오픈 월드 게임의 경우에는 세계 자체일 뿐이다. 동일 선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많은 수의 게임이 리듬 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처럼, 혹은 적어도 리듬 게임이 게임의 어떤 본질적 면모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예컨대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는 〈슈퍼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의 타임 어택(-최단 시간에 게임을 클리어해서 엔딩을 보는 플레이) 영상들에서 고수들은 〈슈퍼마리오〉를 마치 리듬 게임처럼 플레이하는데, 이때 횡스크롤로 진행되는 〈슈퍼마리오〉의 스테이지는 〈비트매니아〉의 악보와 아주 유사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스테이지의 설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슈퍼마리오〉 고수는 악보를 외운 〈비트매니아〉 고수와 다를 바 없다. 둘은 모두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을 완전히 소진시킨 이들이다. 리듬 게임의 경구를 비틀어 인용하자면, ‘거북이가 오기 때문에 마리오가 점프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오가 점프한 자리에 거북이가 오는 것’이다. 비단 〈슈퍼마리오〉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한 부류부터 복잡한 부류까지 모든 게임에는 타자와의 동기화를 통한 소진이 전부인 국면, 즉 리듬 게임을 닮는 국면이 존재하며, 이는 게임의 재미 일반을 설명하는 건 아닐지라도 오로지 게임에서만 합법적으로 수용되는 쾌감이라는 점에서 게임 특유의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타자의 리듬에 나의 리듬을 완벽히 동기화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실제의 타자와는 장단을 맞출 수 없다. 타자에게 나를 한 끗의 오차도 없이 딱 맞췄다는 감각,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었다는 감각은 곧 나를 가장 굳건하게 속박하고 있는 ‘자기’가 소산消散되는 감각으로, 게임 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리듬 게임은 빈곤하고 유한하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독특한 자유로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이 자유로움을 맛보게 만든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파리8대학교 LLCP 박사과정) 김민호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리다 사유의 전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매체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다.

  •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Back e스포츠의 미래를 위하여 - 젠지글로벌아카데미 백현민 디렉터 03 GG Vol. 21. 12. 10. 오늘날의 게임 생태는 많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e스포츠는 ‘보는 게임’으로의 전환이 가장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다. e스포츠의 시청자층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직접 게임을 하지 않지만 중계를 챙겨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실제로 2012년에 1억 3000만이었던 세계 e스포츠 시청 규모는 2023년에 6억 4,600만 명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있어 우려도 존재한다. 급변하는 게임 환경 속에서 e스포츠 시장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속 빈 강정이 되지 않을지에 관한 우려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려처럼 게임 생태는 급변할 수 있음에도, 다음 세대를 바라보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얼핏 보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게임과 교육을 접목시키려 한다. 심지어 게임 교육기관이 미국 대안학교로 인증을 받고, 유수의 대학들과도 연계했다. 이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어떤 상(想)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젠지 글로벌 아카데미(GGA, 이하 GGA)의 백현민(Joseph Baek) 디렉터를 편집장이 만나고 왔다. 편집장: 기본적으로 아카데미가 가지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백현민 디렉터: 저희의 비전은 저희 학생들이 e스포츠 내에서 성공적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성공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각기 다른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편집장: 그러면 그 비전 속에서 학생들의 일과나, 한 학기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등 아카데미의 실제 운영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먼저 젠지 엘리트 e스포츠 아카데미(GEEA)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GEEA는 국제학교로서 학업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엘리트 학교에서 하루 4시간 고등 교육에 해당하는 수업을 받고 그다음에 저희 건물로 넘어와서 e스포츠 관련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때, 수업들은 블록 스케줄 식으로 운영이 돼 월, 수 / 화, 목을 나누어 각기 다른 수업을 하고, 금요일은 선택 과목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e스포츠에 관련해 제공하는 교육은 게임 이론 즉, 영상을 보면서 게임에 대해 배우는 부분도 있고, 스크림을 통해서 팀플레이를 배우는 부분도 있고, 금요일 선택 과목 같은 경우에는 e스포츠의 역사나 e스포츠 업계에 관하여 배우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교육적 관점에서 저희 GEEA의 특별한 지점은 단순히 게임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개별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가르친다는 부분입니다. 많은 학부모님이 저희한테, “자녀가 예전에는 잠도 안 자고, 밥도 제때 안 먹었고 게임을 했는데, GEEA 수업을 듣고 나서는 새벽 1시에도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는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이처럼 학업이나 일상적인 부분에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데, 저희는 이런 학업적인 성장이 그들의 게임 플레이에도 반영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들의 평균 티어가 다이아 3이었을 때, 평균 티어가 다이아 1인 다른 학원과의 스크림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희 학생들이 피지컬 쪽에서 떨어지더라도 팀플레이로 부족한 부분들을 메꾸었기 때문입니다. 편집장: 결국 게임 플레이라는 것이 그냥 ‘논다’는 의미로만 묶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학업도, 게임도 일종의 사회 활동이고 이런 활동을 통해 게임 플레이에서도 기존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고 계시는 거지요? 백현민 디렉터: 네. 맞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반으로 저희의 두 번째 주요 프로그램인 GGA 온라인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GGA는 온라인 학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GGA 온라인은 개개인의 역량에 맞춘 굉장히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로 선수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경우에 ‘이번 플레이가 좋았다’, ‘안 좋았다’는 식의 단순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희 코치님들 같은 경우에는 ‘이 순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팀원의 플레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지’ 등 세부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학생의 게임 실력뿐 아니라 소통하는 방법 등 인간적인 영역에서의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저희 학생들끼리도 ‘우리는 어떤 전략을 갖고 있었지?’ ‘그 전략이 왜 성공했지?’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소통을 합니다. 이러한 초점은 많은 학생들이 더 빠른 속도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편집장: 요즘에는 사설이나 과외 형태로 개인 강습을 받는 학원이나 프로그램이 많은데, GGA 같은 경우에는 그냥 게임을 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저도 그 부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최고의 선수가 단순히 게임 실력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게임을 통해서 인간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학생들은 더 높은 티어의 선수들과 스크림을 해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점수나 티어 등에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었을 때 학원을 운영했었는데 다른 학원들을 보면 굉장히 대표적인 한국 스타일, 그러니까 시험 점수를 올리는 것을 강조하고, 시험을 볼 때 필요한 전략이나 노하우, 팁들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시험 점수는 올라가겠지만, 시험 점수 이외에는 얻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학생들에게는 내용을 이해하고 이 내용이 왜 중요한지 강조하곤 합니다. 그리고 GGA에서도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성장을 함으로써 티어가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 선수들 같은 경우에 한동안 인성 문제로 굉장히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e스포츠 플레이에 대한 교육을 받는 데 인성에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가 되고 있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미국에서는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이 ‘소프트 스킬’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에서 필요한 전문적 지식이나 능력이라기보다 팀워크나 리더십, 소통, 적응력 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을 소프트 스킬이라고 하는데, 하버드 조사에 따르면 직업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의 85%가 소프트 스킬이라고 합니다. 저도 많은 프로 선수들이 과거 인성 문제로 논란이 되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아직도 e스포츠의 평판이 안 좋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다음 세대의 선수들의 인격을 육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부분은 다음 세대 선수들이 좋은 쪽으로 업계를 대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세대에 투자함으로써 e스포츠 업계가 장기적으로 성공적인 미래를 가질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에 게시된 GEEA의 수업 사진 편집장: 아카데미의 첫 번째 사업이 일종의 대안 교육의 형태이면서 한국에서는 생소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생소함이 같이 있는데 첫 번째는 게임을 가지고 교육을 한다는 생소함. 두 번째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스포츠와 교육을 병행한다는 생소함입니다.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는 교육과의 병행을 목표로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 교육이 정말 성과가 있을지 실제로도 학부모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으실 텐데 주로 어떻게 답변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네. 학부모님들이 그런 걱정을 많이 하세요. 특히 한국에서는 학업과 스포츠를 병행한다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오히려 전통적인 스포츠보다 e스포츠가 학업과 병행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통적인 스포츠는 신체적인 부분에 많이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 e스포츠는 기술적이고 전략적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서 그런 부분들이 인간적인 성장 혹은 학업적인 성장을 많이 유도해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학생 중에서는 학교에서 성적이 굉장히 안 좋거나 학교를 자퇴한 학생들이 있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학교를 간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런 e스포츠의 특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한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한테 처음 왔을 때 실력이 그렇게 특출나지는 않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거치고 현재 오버워치 팀 서울 다이너스티의 선수로 등록이 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런 성공 사례들을 기반으로 전에는 학교에서 성적을 잘 못 내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성적을 잘 내는 학생들도 저희 프로그램과 함께함으로써 자신의 미래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 많이 오고 있습니다. 편집장: 대안학교 이야기가 나왔는데, 젠지 아카데미는 대안학교로의 기능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백현민 디렉터: 먼저 GEEA는 공식적으로도 대안학교로 인정을 받고 있고요. GGA 온라인의 경우, 대안학교는 아니지만 결국은 GEEA와 같은 결과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GGA 역시 e스포츠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있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외국으로 유학 가거나 한국 내에서 대학교를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편집장: 고등학교를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게임의 특성상 경쟁을 하다 보니까 지거나 도태된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은데, 혹시 그런 지점들에 대한 관리가 별도로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물론 학생들이 경쟁에 대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코치들이야말로 그런 부분을 케어해 주시기에 가장 적합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코치들은 전부 프로 경험이 있거나 업계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일해온 분들이기에 게임 내에서의 승패와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코치진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을 잘 케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안학교라는 게 남들과 다른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에는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한다고 해서 좋은 직업이나 좋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스포츠라는 색다른 길을 감으로써 더 성장을 하고 더 성공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집장: 많은 학생들이 프로 게이머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립니다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도달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당연히 많은 청소년이 좌절감을 느낄 것인데,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좌절감을 걷어내고 또 다른 길을 제시해 주셔야 하잖아요. 이에 어떤 길들을 주로 제시하시는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진출해서 본인도 만족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례가 있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둘 다 한꺼번에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은 학생들이 저희 GGA를 찾아오는 이유는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부분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학생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GGA가 자동으로 프로 게이머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꿈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점입니다. 다만, 조금 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꿈을 좇게끔 도와주는 것인데, 프로 선수가 된다는 꿈 하나만 너무 좁은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프로 선수가 되기를 실패했을 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너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학생들이 좀 넓은 시야를 갖고 다양한 가능성을 바라보게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학에 진학한 친구를 사례로 말씀드리자면 그 친구 같은 경우에는 프로 선수가 꿈이었지만 나이나 기타 상황의 문제로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고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새로운 꿈으로 삼았지만 그것도 잘 안 됐습니다. 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국의 캔터키 대학에 40%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캔터키 대학에서 e스포츠 관련 부분에 대해 리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학생 같은 경우에는 저희 젠지 재단에서 후원을 받고 젠지와 인턴십 경험까지 하면서 꿈을 확장시킨 사례입니다. 프로 선수라는 원래 꿈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저희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대안이나 다른 커리어를 제공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장: 한국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일 것 같은데요. 홈페이지에 지금 나와 있는 소개를 보면 미국 대학으로의 진출 케이스들이 많은데 현실적으로 한국 학부모들은 아카데미 출신이 한국 대학에 특례 입학 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백현민 디렉터: 네. 저희도 한국 대학과 파트너십을 맺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아직도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는 게임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보거나 애들이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혹은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많습니다. 이에 저희는 e스포츠를 보는 시선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스포츠와 게임 업계는 전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미래에 성장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e스포츠라는 업계가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려면 이런 시선을 바꿔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의 대학들이 시선을 바꿀 수 있게끔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희 졸업생 한 명이 이번에 한성대학교에서 20% 장학금을 받고 진학하게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한성대학교는 ‘리그 오브 레전드’ 관련 신설 학과를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졸업생은 아니지만 GGA 학원을 경험한 학생도 비슷한 목표를 달성한 학생이 있습니다. 편집장: e스포츠는 굉장히 큰 산업이죠.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우려, 즉 하나의 게임, 하나의 장르가 영원할 수 없다는 리스크도 분명히 있습니다. 만약 한 장르가 쇠퇴했을 때, 그 길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막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실지 묻고 싶습니다. 백현민 디렉터: 네. 말씀하시는 부분도 분명히 우려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같은 사례가 있다시피 게임 종목이 갑자기 퇴보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일단 다양한 종목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보다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 자체라기보다 게임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학생들이 성장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새로운 게임, 새로운 종목들이 나오면 그것을 통해서 또 미래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데 노력하려고 합니다. 편집장: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서 게임이, 그리고 e스포츠가 어떤 식으로 인식되면 좋겠다라는 꿈이 있으실까요? 백현민 디렉터: 중요한 것은 게임과 e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뀔지에 관한 것일 것 같습니다. e스포츠를 사랑하고 e스포츠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업계가 더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사회적으로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선수들이나 코치, 매니저 등 e스포츠라는 환경 자체는 만들어져 있었지만,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거나 체계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선을 바꾸고 e스포츠라는 업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들이 필요한데, 이 리더들은 e스포츠에 대해서 열정만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분야에 대한 전문가여야 합니다. 그 분야가 마케팅이 될 수도 있고, 영업이나 스폰서십이 될 수도 있고 교육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분들이 많아지면서 e스포츠가 성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e스포츠 배경이 아니라 교육 배경을 가지고 있고 저희 CEO님 같은 경우에도 메이저리그 야구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e스포츠를 사랑하면서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업계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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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제너레이션::필자::徐佳(서가)

    徐佳(서가) 徐佳(서가) Read More 버튼 읽기 혼례-귀신-사랑 : <종이혼례복> 시리즈와 ‘중국식 공포’의 유행 최근 중국 내 추리 게임에는 ‘중국식 공포’가 유행하고 있다. <페이퍼돌스>(纸人; 리치컬쳐, 2019)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回门; 핀치게임즈, 2021)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의 오래된 저택에 들어가 결혼과 장례, 장례용 종이인형, 풍수 등 민속을 바탕으로 스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 게임 디자이너, 수익모델의 변화 앞에서

    결국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부분유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유료화로 뭉뚱그려 취급되는 과금 모델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 Back 게임 디자이너, 수익모델의 변화 앞에서 04 GG Vol. 22. 2. 10. 어떤 게임 디자이너의 시작 때는 바야흐로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투탑이 한국 게임 시장을 견인하던 시기. 인터넷의 대중화와 더불어 두 게임이 워낙 잘나가고 있을 때이므로, 한국의 다른 게임 개발사들도 이 둘을 벤치마크하여 기회를 엿보곤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대다수 개발사들은 단품으로 팔 때에만 매출이 발생할 뿐 이후에는 별도의 비용을 받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서비스를 유지해줘야하는 RTS, 즉 스타크래프트보다는 리니지처럼 월정액제를 통해 꾸준히 매출을 올릴 수 있는 mmorpg를 대체로 선호했고, 나 또한 그런 mmorpg를 서비스 중인 회사들 중 하나에 게임 디자이너 (게임 기획자)로 입사했다. 오래 하는 게임 만들기 당연하지만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도 서로 바라는게 매우 다르다. 각자 다른 취향의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다양한 시도들을 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은 유지해야만 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자주 찾고 오래 플레이하도록 만들 것’ . 온라인 게임 이전 세대의 단품 게임들은 대체로 멋지고 훌륭한, 강력하고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얼마나 오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업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때의 게임은 한 번 팔면 그걸로 끝이니 플레이 타임과 매출의 관계는 데면데면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은 다르다. 사람들이 게임에 더 오랜 기간 머물수록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과금모델이 단품 판매가 아닌 월정액제이기 때문에. 한달 만에 모든걸 경험하고 돌아보지 않아도 될 게임을 만든다면 1개월치 월정액 밖에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몇 개월, 몇 년을 플레이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재밌는걸 만들자’라는 기본 위에, ‘오래 플레이하게 한다’라는 요소가 중요하게 고려된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mmorpg들은 수십 시간에서 수백 시간, 때로 수천 시간까지도 플레이하는걸 전제로 한다. 가능하다면 평생 게임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그렇다면 일종의 ‘가성비’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가격 대 성능비. 여기서 가격이란 ‘개발에 소요되는 비용’이다. 성능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오랜기간 게임을 플레이하느냐’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얼마나 적은 비용을 들여 만든 컨텐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을 플레이하게 만들었는가?” 이것이 월정액제 시대에 만들어지던 게임에 대해 주어지던 가장 중요한 질문들 중 하나이다. 그렇게, ‘주어진 시간과 비용 내에 만들어진 컨텐츠로 최대의 플레이타임’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채택된 방법은 게임에 단순 반복적 플레이, 즉 ‘노가다’를 많이 넣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러 지루한 컨텐츠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같은 컨텐츠를 만들더라도 언제나 ‘가능한한 오래 플레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캐릭터의 게임과 플레이어의 게임 이게 가능한 이유는 mmorpg가 플레이어의 게임이기보다는 캐릭터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아주 큰 범주에서 두 가지로 나눠보자면, 플레이어의 실력이 좋아서 승리하는 게임과 캐릭터에 쏟은 시간이 더 많아서 승리하는 게임으로 나눌 수 있다. 편의상 전자를 플레이어의 게임, 후자를 캐릭터의 게임이라고 하겠다. 플레이어 게임에서 소위 말하는 ‘재능충’은 10시간의 플레이만으로도 남들에 비해 월등한 솜씨를 자랑하게 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100시간을 플레이해도 아주 조금 발전하는데 크치고 만다. 그러나 캐릭터의 게임에서는 노력의 효율이 대체로 모두에게 비슷하다. 같은 시간을 플레이한다고 할 때, 남들은 50레벨까지 키웠는데 혼자만 100레벨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게임이 무 자르듯 플레이어의 게임과 캐릭터의 게임으로 깔끔하게 나뉘는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부분의 게임들은 플레이어의 게임과 캐릭터의 게임 중간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두드러지게 플레이어 게임의 비중이 매우 높은 장르가 있는데 대전격투 게임, FPS, RTS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캐릭터 게임의 비중이 아주 높은 대표적인 장르가 mmorpg이다. 플레이어의 게임은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보상이 된다. 나의 실력이 이정도나 대단해! 또는 이 어려운걸 해냈어! 라는 기쁨이 게임을 더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캐릭터의 게임은 그렇지 않다. 캐릭터의 게임에서 주어지는 장애물들의 난이도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그리고 장애물을 극복하면 게임 내에서 아이템, 경험치 등 뭔가가 주어진다. 아이템과 경험치에 부여된 일련의 ‘숫자’들은 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그렇게 아이템과 경험치를 모아 점점 더 강해진다. 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라는 기분이 캐릭터 게임을 지속하게 하는 주된 동기부여 장치이다. 플레이어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 본인이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캐릭터의 게임은 시간을 들여 과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 주어지는 보상을 통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면 된다. 캐릭터 게임의 대표적 장르인 mmorpg에서, 플레이어는 ‘강해졌다’라는 느낌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게임 내에서 ‘보상’의 형태를 통해 제공된다. 단순반복 플레이가 지루하다면 플레이어가 캐릭터의 게임을 지속해야 할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노가다의 끝부분에 배치된 보상 때문이다. 다소 지루한 플레이를 일정정도 마치고 나면 얻게될 보상. 그 보상을 통해 내 캐릭터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감. 이런 메커니즘이 가장 많이 쓰인 장르들 중 하나가 mmorpg이다. 앞서 말한대로,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매출의 관계는 결국 mmorpg 만들기를 ‘얼마나 노가다를 더 잘 만드느냐’의 문제로 바꾸었다. 더 잘 만들어진 노가다란 대체로 플레이어가 게임이 지겨워 떠나가기 직전까지 단순반복 플레이를 시켜 시간을 끌다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멋지고 근사한 보상을 획득케함으로써 다시 게임을 지속할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것이다. 노가다가 낳은 현질 그리고 부분유료화 보상은 좋다. 그건 명백한 동기부여장치이다. 하지만 노가다는 싫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노가다를 피할 방법을 찾아냈다. ‘돈을 주고 남에게 시키는 것’이다. 획득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걸리는 아이템이 있다면? 그걸 이미 얻은 누군가에게 돈 – 즉 현금 – 을 주고 구입하면 된다. 캐릭터를 성장시키는게 어렵다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내 캐릭터를 대신 플레이하여 레벨을 올리게 한다. (부주副主. 캐릭터의 본래 주인인 본주本主 에 대비되는, 대신 키워주는 이들을 일컫던 당시의 용어) 게임 내 화폐가 더 많이 필요한데 플레이를 통해 얻을 시간이 없거나 귀찮다면 마찬가지로 현금 거래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mmorpg는 ‘캐릭터의 게임’ 속성이 매우 강한 게임이고, 그렇기에 시간을 투자한만큼 강해진다. 이 시간의 대부분이 단순 반복적 플레이, 즉 노가다로 채워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강해지고 싶지만 노가다를 하고 싶지는 않다면? 사려는게 아이템이든 캐릭터이든, 돈을 주고 구입하면 된다. 당시 mmorpg에서는 지금과는 달리 모든 아이템은 거래 가능한 것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다양한 게임에서 유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특히 mmorpg에서 이러한 거래는 광범하게 일어났다. 인기가 높은 게임일수록 현질 – 아이템을 현금거래를 통해 매매하는 것 – 의 빈도와 비중이 높았다. 게임 속의 아이템 또는 고레벨 캐릭터와 현금을 서로 거래하기 위해 아이템 베이를 위시한 아이템 거래 전문 사이트까지 생겨났고 한동안 상당한 성업을 이루기도 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의 활황은 게임 개발사들에게는 꽤 배아픈 일이었다. 내가 만들고 서비스하는 게임의 아이템과 재화와 캐릭터가 다른 서비스 (아이템 거래 서비스)를 통해 거래되면서 높은 중개수수료를 먹고 있다니? 심지어 개발사에게 아무런 라이선스나 로열티에 대한 합의도 없이? 물론 ‘배가 아팠다’라고 하면 너무 저속해보이니까 회사 입장에서는 점잖게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음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해야겠지만. 바로 이 ‘새로운 사업 기회’는 결국 mmorpg들이 월정액제 중심에서 부분유료화 중심으로 옮겨가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들인 시간 대비 캐릭터의 성장은 모두에게 같아야 한다’라는 유저들의 믿음으로 인해 부분유료화에 대한 저항이 매우 강했으나, 수년간에 걸친 인식 변화를 통해 지금은 ‘월정액제만으로 서비스되는 mmorpg’는 찾아보기 어려울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한편, 한국 캐주얼 게임은 또 다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캐주얼 게임’이라는 용어에 대해 잠시 부연하고자 한다. 명확한 조어는 아닐지언정 당시 한국 게임 시장에서 ‘mmorpg가 아닌 장르의 게임들’은 모두 ‘캐주얼 게임’으로 통칭되곤 했다.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전혀 캐주얼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는데, 적절한 단어라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들지 않지만 어쨌건 그것이 널리 쓰이는 용어였으므로, 이 글에서도 ‘캐주얼 게임’이라는 것은 ‘mmorpg가 아닌 다른 장르의 게임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겠다. mmorpg가 한국 게임 시장에서 탄탄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걸 꾸준히 유지하는동안에도, 소위 ‘국민 게임’이라 불리우는 게임들은 mmorpg가 아니었다. BnB나 카트라이더, 포트리스 블루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게임들은 모두 mmorpg와 선명히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 mmorpg가 ‘캐릭터의 게임’인데 비해 이들 게임은 모두 ‘플레이어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이런 게임들은 월정액제 도입이 어렵다. 흔히 말하는대로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에 투자한 시간은 게임 내의 캐릭터나 캐릭터가 장비한 아이템 등의 형태로 남는다. 그것은 이후에 다시 그 게임에 접속할 경우 내가 여전히 강력한 위치에 있을 것임을 보장해준다. 심지어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내다 팔아서 현금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캐주얼 게임은 플레이어의 실력에 의존하는 게임이고 그렇기에 지금 내가 고수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졌더라도 이후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이 장르에서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게임 내의 그 무엇도 아닌 내 실력을 높이는 것이다. 결국 게임 내에 남는건 없는 셈이다. mmorpg에서 승리하기 위해 내 캐릭터가 필요하다면 그걸 이용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은 기꺼이 월정액을 지불한다. 하지만 캐주얼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게임 내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실력이다. 그렇다면 월정액을 지불할 이유도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이기에 게임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 등은 분명 게임을 지속하게 하는 동기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금을 유도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재미있었다’만으로 게임이 유저들의 결제를 이끌어내기엔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퀴즈퀴즈 초기의 월정액제 도입 실패 사례이다. 퀴즈퀴즈는 1999년 오픈 베타 테스트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바 있다. 초기 베타 테스트 기간이 어느정도 지나 상용화를 시도할 즈음이 되어 넥슨은 퀴즈퀴즈에 월정액제를 도입했다. 가격은 월 16,500원으로 당시 다른 게임들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그때는 게임 = 월정액제가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이 결정이 현명한 것이지는 못했을지언정 당시 관점에서 얼토당토 않은 수준의 이상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월정액제 퀴즈퀴즈는 게이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는다. 놀란 넥슨이 곧바로 가격을 인하했음에도 상황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던 퀴즈퀴즈의 인기를 반전시킨 것은 게임 본편을 무료 플레이로 전환하되 부분유료화의 초창기 모델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부분유료화 도입 이후 퀴즈퀴즈는 상용화 이전에 보이던 인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mmorpg는 월정액제, 캐주얼 게임은 부분유료화” 구도가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면 결국은 …? 지금까지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캐릭터 게임에서 요구하는 긴 플레이 타임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단순 반복적 플레이를 수반하게되고, 이를 우회하려는 유저들의 니즈는 초기의 반발을 딛고 부분유료화로의 전환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플레이어 게임에서는 어차피 월정액제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부분유료화가 태어났으며,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이 수익 모델은 시장에 환대받으며 안착했다. 그렇다면 결국 온라인 게임은, 캐릭터 게임이건 플레이어 게임이건 관계없이 어차피 나중엔 부분유료화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게이머로서의 나는 월정액제를 선호하는 편이다. 부분유료화가 요구하는 다양한 상품들을 살펴보고 내게 맞는 상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필요할 때마다 잦은 빈도로 이것저것 결제한 다음에도 남들보다 내가 뭔가 손해본게 아닐까? 같은 돈을 게임에 써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걸 고민하고 가끔 후회하는게 피곤하다.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런 측면에서 월마다 자동결제 해두고 컨텐츠에만 집중하면 되는 월정액제가 내게 맞다고 느낀다. 게임의 가장 코어한 부분까지 가서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핵심 컨텐츠까지 맛보기 위해 필요한 비용 또한 부담된다. 월정액제 게임에서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건 월정액 요금이 전부였다. 부분유료화 게임에서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아무리 적어도 월 수십만원인 경우가 보통이며, 많게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이 필요한 경우조차 있다. 하지만 어쨌건 게임 디자이너이자 게임 개발자로서 나는, ‘서비스 형태의 게임이 대체로 부분유료화로 쏠리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은 생각을 거쳐 꽤 납득하게 되었다. 잘 모르면서 어떻게든 만들던 월정액제 게임 시대 게임 개발 경험 상에서 월정액제 게임과 부분유료화 게임은 다른 점들이 꽤 있다. 월정액제 게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고 살펴보게 되는건 동시 접속자수이다. 특히 mmorpg는 동기화 플레이가 필수적이고, 그렇기에 동시 접속자수는 매우 중요한 지표로 취급된다. 그럼 다른 수치들은? 아쉽게도 월정액제 게임을 서비스하던 시기에는 그러한, 지표에 의해 유저의 행동을 살피는 일은 흔치 않았다. 왜냐면 … 그게 가능하다는걸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함께 게임을 만들던 이들은 대체로 단품으로 구성된 게임을 즐기며 성장한 이들이다. 한 번 구입해서 엔딩을 볼 때까지 플레이하는 형태의 게임들. 계속해서 서비스되는 형태의 게임에 대해 만드는 입장에서도 처음인 것들이 많았다. 아울러 이 시기는 인터넷 문화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기에, 지금처럼 서비스측에서 여러 유저 지표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교차해서 살피는 일들 자체가 아직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게임의 형태 자체도 지표를 뽑아 분석하기에 까다로운 지점들이 많았다. 전술했듯 이 시기의 게임들은 많은 경우 단순반복 플레이로 메워져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알게된 다른 이들과 때로는 우호적인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곤 했으며 그 자체가 게임이 제공하는 컨텐츠의 일부로 여겨질 때이다. ‘커뮤니티는 온라인 게임 서비스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금과옥조로 여겨지긴 했지만, 그래서 그걸 자극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어떤 일들이 가능한지를 게임 플레이에서 알수 있는 숫자만 가지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임팩트를 던졌던 게임인 World of warcraft가 나오면서 mmorpg를 컨텐츠로 채워넣는다는 개념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플레이어들은 노가다를 하면서 다른 이들과 교류를 즐기던 시절에서 벗어나 게임이 제공하는 여러 피쳐들을 플레이하게 되었으며, 이런 일종의 정형화된 플레이 패턴이 정립되면서 비로소 ‘분석하기에 좋은 행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의 mmorpg 게임들이 널따란 운동장에 축구공 몇 개 던져놓고 ‘재밌게들 노세요’하는 편이었다면, 와우는 운동장을 미끄럼틀, 시소, 그네, 정글짐, 철봉 등 다양한 놀이기구로 채워놓고 ‘뭐 하고 노실래요?’하는 식이다. 뭔가 좀 알게 된 부분유료화 게임 시대 그리고 대략 2010년 정도를 기점으로 모바일 게임 이슈가 PC 온라인 게임을 앞서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때 이후로 나온 게임들은 대부분이 와우가 제시했던 ‘컨텐츠로 가득한 놀이공간’의 개념을 따른다. 나는 와우의 임팩트가 던진 충격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게 새로 개발되는 게임에 보편화된 시점을 그 즈음으로 보고 있다. 이전 세대의 게임들에 비어 있는 공간이 많고 그 공간을 ‘커뮤니티 활동’이라 통칭되는 유저간의 상호작용이 메워주는 모양새였다면, 와우 이후에 나온 게임들은 플레이어들이 다른 플레이어에 주목하기보다는 게임 자체에 좀더 시선을 주길 원했고, 그 과정은 다양한 경로의 플레이 경로를 만들어냈고, 그 모든 플레이 경로에서 플레이어들이 하는 일들은 수치로 환산되어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운동장에 축구공과 함께 놓여진 이들이 누군가는 축구공과 관계없이 혼자 담벼락 옆에 서있을 뿐이고 또 누구는 축구는 안하고 스탠드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그 중 일부는 축구공으로 축구는 안하고 발야구를 하고 있을 때, 다들 왜 그러는지를 짐작하는건 얼추 가능하겠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놀이기구로 채워진 운동장에서 그네가 시소보다 유저가 머무르는 시간이 32%가량 길다거나, 어딘가에는 줄이 너무 길어 불편함을 겪고 있다거나, 정글짐에서 유난히 부상자 발생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취해야 할 조치가 좀더 분명해진다. 이를 게임에 대입하면, 대부분의 퀘스트를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잘 수행하고 있지만 327번 퀘스트에서 유독 퀘스트 포기 확률이 15%를 넘는다면? 이 퀘스트에 뭔가 문제가 있으므로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37레벨까지 모든 클래스의 레벨업 속도가 일정하지만 37레벨 이후부터 마법사의 성장 속도가 유난히 느려진다면? 37레벨 직후의 퀘스트나 던전 플레이에 마법사를 어렵게하는 뭔가가 있으므로 찾아서 고쳐야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조치하기 위해 다양한 지표들이 개발되어 쓰인다. Organic user와 non-organic user, UV/NRU/ARU, DAU/WAU/MAU, PU/NPU/PUR, Retention Rate과 Bounce Rate, ARPPU 등등. 이들은 말하자면 게임 개발의 도구이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모호해서 분석하기 난해했던 여러 측면들을 자세히 뜯어보기 위한, 우리가 만든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되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한 도구. 어차피 게임 개발 게임 디자이너를 포함하여 게임 개발자들은 원래가 다양한 제약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그게 동시 접속자수라는 지표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여러 현상들이었다면, 부분유료화 시대에는 게임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가급적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분석 도구들이 더욱 정교해졌다. 월정액제 시대에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더 오래 머무르도록 해야한다는 제약 아래에서 일했고, 지금은 더 많은 상품을 팔면 좋다는 제약 아래에서 일한다. 둘은 언뜻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결국 매출이라는 같은 목표에 다름아니다. 이왕 제약이 주어진다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정교한 도구와 방법을 쓸 수 있는 쪽이 더 좋다. 한때는 모바일 게임들이 다들 너무 엇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내 가설은 이러했다. 먼저 수익 모델은 고정된다. 가장 검증된 모델만을 쓰는게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익 모델이 안정을 추구하면, 수익 모델에 엮인 게임 디자인도 거기에 호응해야만 한다. 둘은 너무 긴밀하게 엮여있어서 따로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임 디자인에 변화를 줄 여지가 적어지면, 게임 자체가 다른 게임들과 엇비슷한 것만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러 모바일 게임들을 직접 플레이해보면 모두 조금씩 다른 구석을 가지고 알고 있다는걸 알게 된다. 장르 내에서 플레이 패턴이 상당히 비슷한건 부인할 수 없겠지만, 원래가 ‘장르’라는건 비슷한 핵심 요소를 공유하는 것들끼리 모아둔 것을 칭하는 말이다. 월정액제 mmorpg들을 만들던 시기 게시판에 모여든 유저들이 입을 모아 ‘요새 mmorpg들은 어차피 다 천편일률적이지 않나요?’하는 의견이 큰 호응을 얻었던 것도 기억한다. 난 그 ‘천편일률적’이라 불리우는 게임들 중 하나를 만들면서 같은 장르 내의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후의 수익 모델에 기대하는 것 결국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부분유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유료화로 뭉뚱그려 취급되는 과금 모델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기초적인 치장 아이템으로부터 게임 진행에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경험치 획득 효율 향상 효과 상품까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기간제 아이템이 한때는 높은 매출을 올리는 상품이었던 것도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최근에 이 분야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아마도 확률형 아이템일 것이다. 그러나 확률형 아이템조차 적절한 선에서 형성된 소위 ‘천장’과 공들여 만든 캐릭터가 연계하여 컨텐츠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그 대상을 구입하게 하는 게임이 있는가하면, 더 우월한 효과를 갖기 위해 컴플리트 가챠를 완성해야하는 형태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다름이 눈에 들어온다. 전자의 경우 자신이 구입한 컨텐츠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지만, 후자는 다른 이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부분유료화 상품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나가겠지만, 가능하다면 ‘구입한 후에 후회하지 않는’ 방향을 지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이머, 디자이너) 김주용 30+년차 게이머, 20+년차 게임 디자이너. 게이밍 컬쳐 전반에 걸쳐 관심이 많습니다. 요새는 스탠드 얼론으로 게임을 시작한 오래된 세대와 멀티 플레이가 디폴트인 요즘 세대 사이의 게임을 대하는 관점 차이에 관심이 많습니다. 종종 기고나 강연에 나서기도 합니다.

  •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Back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 이노 겐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1997)에서 생각할 것들 03 GG Vol. 21. 12. 10. 비디오 게임에서 소리의 영역은 어떤 역사에 맞닿아 있을까? 영화가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등의 온갖 예술사를 흡수하며 갱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도 직계와 방계를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영향 관계가 존재한다. 그 속에서 게임의 소리는 어떤 가능성의 영역이었을까? *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飯野賢治)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1997)를 발표하며,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실험을 감행했다. 전설적인 게임 크리에이터 이노 겐지(飯野賢治)가 1997년 세가 새턴으로 출시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 リアルサウンド 〜風のリグレット」는 그래픽 없이 오직 소리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다. 조작 방식은 단순하다. 스토리 분기점마다 차임벨이 울리고 진행이 정지된다. 선택 사항은 컨트롤러의 방향 버튼을 눌러 정한다 1) . 각본은 무코다 구니코상 수상 작가이자 TV드라마 「도쿄 러브 스토리 東京ラブストーリー」(1991)의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맡았다. 2) 실종된 첫사랑 여성을 찾아 나선 대학 졸업반 남성의 이야기다. 서정적인 연애 서사에 추리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그런데 대사 분량이 일반 영화의 3배에 달해서, 게임의 드라마 부분만 재편집해서 도쿄 FM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 사카모토 유지(坂元裕二)가 직접 밝히기 전까지는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각본가는 이노 겐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노 겐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사카모토 유지는 그를 추모하며 블로그에 각본을 공개했다. 최초의 각본은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여행 중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비범함은 게이머의 신체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빛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걸까? 게임을 즐길 수 없는 몸이란 대체 무엇일까?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설명서를 포함했다. 당시로서는 워낙 낯설고 파격적인 시도였던 터라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선지자처럼 등장한 게임이었다. 게임 업계에서 장애인을 위한 게임 접근성(Game Accessibility)의 실질적인 조치가 이뤄진 것은, 이노 겐지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0년대의 일이었다. 3) 이노 겐지의 실험 이후로 청각 중심적인 게임 개발에 나선 후대의 작가들에게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게임은 시장의 우세종(優勢種)에서 밀려난 로우 테크 미디어와 낡은 예술의 재발견이기도 했다. 라디오 드라마 또는 오디오 북을 비디오 게임 기술에 접목한다는 것은, 신구(新舊) 미디어 테크놀로지 역사에 교차점을 찍는 시도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 가능한 발상법이다. 무엇을 과거로부터 귀환시켜 현재와 만나게 할 것인가? 그 만남이 해봤던 일의 진부한 반복이 되지 않도록 정해야 할 n-1의 제약 조건은 무엇일까? 4) 이노 겐지가 제거한 특권적 하나와 중심은 ‘시각’이었다. 소비 대중과 시장 논리가 최첨단 기술과 최신 유행에 집중되는 사이에,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된 기술과 이에 기반한 작품들은 차례로 위축,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대량 생산과 소비의 영역 안에 충분히 카운팅되는 소비자의 신체성이 정상 표준으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소수자는 소외와 배제의 장벽 바깥으로 떠밀려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 과정에서도 모든 이가 수월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체장애 유무만이 아니라, 적응을 강요받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맞닥뜨렸을 때의 낯섦, 불안, 불쾌 역시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시장과 자본이 연일 메타버스에 환호하며, 일상을 한층 더 철저한 디지털 세계로 몰아넣고 있을 때, 어떤 이는 1990년대의 미디어 환경이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자신에게 딱 좋았다고 불평한다. 이들의 세계가 과연 시대의 대세로부터 유리된 갈라파고스일까? 한 시대의 풍경과 삶의 방식에는 다채로운 차이들이 촘촘히 채워져야 한다.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삼성과 애플폰이 개입되고, 구글과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플랫폼을 들락거리며 배달 음식 앱을 두들겨 끼니를 이어가는 생활이 지난 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복고 취향을 옹호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서 가능했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실험해볼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다. 자본과 시장 질서에 떠밀려 굴레가 정해진 가두리를 옮겨 다닐 뿐인 양식 물고기 신세가 대중 소비자의 실체다. 소비자는 주인으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것들의 한정된 목록 안에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심신으로 훈육된다. 심신 장애의 기준 역시 대량 생산과 소비의 굴레에 최적화된 신체로 정해져 있다. *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21년을 기준으로 누적 출하량이 1억 1,590만 대에 달하는 플레이스테이션은 구닥다리 라디오보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한 상품일까? 지금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기반의 장치들은 지나치게 시각 중심적이며, 하드웨어로부터 감지되는 촉각은 아날로그 시대의 라디오와 비교해 황폐하기 그지없다. 미니멀리즘을 신봉한 스티브 잡스 류의 디지털리스트들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획일화로 아날로그 기계들이 이룩한 풍요로운 감각의 제국을 파괴했다. 시청각에 의존할 수 없는 이들은 하드웨어의 몸체에서 발산되는 촉각, 후각, 미각 신호를 감응해 자신만의 테크노스케이프를 구성한다. 기업이 제공하는 사용자 매뉴얼에선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시그널로 직조된 세계다. 이 세계에선 시청각의 우위에 소외당하는 쓸데없는 감각의 노이즈 같은 건 없다. 라디오로부터 독자적인 우주를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이 기계를 어디까지 재발명, 재발견할 수 있을까? 게임기가 라디오의 실종된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게임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트렌드가 되었을 때, 이노 겐지는 게임기의 라디오 되기, 라디오의 게임기 되기의 혼종 실험을 감행했다. 비디오 게임은 그래픽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강렬한 시각 연출을 앞세워 흥행을 이어왔다. 게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뜬 채로 유지하는 일이란, 게임의 시각성에 매혹되는 과정이면서, 게임의 미디어 환경이 게이머의 신체에 명령하는 감각 배치에 순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청각 반응이 과활성화될 때 상대적으로 무뎌지는 신체가 있다. 정반대도 가능하다. 평소 비활성화된 신체와 인지 능력을 깨울 방법으로도 게임은 유용하다. 그래서 게임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게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디어의 역사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의 역사에 맞닿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최초의 라디오 야구 중계는 1921년 미국 피츠버그의 KDKA 방송이었고, 같은 해에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 실험이 라디오에서 시도됐다. 5) * 소리로 상상력과 몰입을 극대화하는 게임성은 라디오 드라마와 라디오 야구 중계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두 분야 모두 192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지금의 감각에선 라디오 경기 중계쯤은 새로울 게 없는 고전적인 방송 방식이지만, 1920년대에는 최첨단 미디어 체험이었다. 청취자들은 야구 경기를 직접 관람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몰입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이 시기의 상상력이란 디지털 기기에 일상을 잠식당한 지금 시대의 상상력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을 것이다. 대중이 뭘 상상하든 수익성 있는 사업만 된다면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야 방송국에 협조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기에 접어들면서 경기 관람객 수가 급감하자 1939년까지 라디오 방송 중계를 전면 금지했다. 이런 일은 미디어의 역사마다 수도 없이 반복됐다. * 출판인이자 SF 작가이며, 열렬한 아마츄어 라디오 애호가였던 휴고 건즈백이 1919년에 창간한 .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아마츄어 라디오 통신을 금지시키자, 건즈백은 지면을 활용해 금지 해제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건즈백의 출판사는 1929년 파산한다. 이후 이 잡지는 BA Mackinnon과 Ziff-Davis Publishing으로 소유권이 이전됐고 1971년까지 발행됐다. 무선 통신망이 국가의 통제 아래 본격적인 관리를 받기 전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 기술은 일방향적인 방송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의 송수신이 자유로운 쌍방향 방식이었다. 수많은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독자적인 라디오 클럽을 운영할 수 있었다. 19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만 15만 개에 이르는 무면허 아마추어 무선국이 존재했다. 6) 그들이 사용하는 라디오는 군용 VHF 통신 장비와 구조적으로 같았다. 1920년대에 대중화된 라디오는 여기서 송신 기능을 없애버린 것이다. 아마추어 무선 활동도 면허제가 도입되면서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안으로 통제됐다. 그 후 불과 10년도 안 되는 동안에 대중은 라디오 장치의 일방향성을 당연한 특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청취자의 상상계에서 아마추어 라디오국의 활력이 증발하고 야구장까지 자취를 감췄던 이력이다. 1930년대가 되면 세계 각국에서 라디오는 국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미디어 실천가이기도 했던 브레히트는 1932년에 발표한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라디오 : 라디오의 기능에 관한 연설 Der Rundfunk als Kommunikationsapparat : Rede über die Funktion des Rundfunks」에서, 이 장치가 본래 양방향적인 의사소통 도구였음을 상기시켰다. 7) 그리고 오늘날의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의 쌍방향 통신이 자유분방하게 이뤄지는 라디오 담론 네트워크를 구상했다. 191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라디오 클럽의 유산이 국가와 자본에 포획되어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다면 텔레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미디어 상상력을 통해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낯설게 다시 관찰할 수 있다. 방송을 듣기만 하는 몸에서 방송하는 몸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의 저편을 향해 말하기 위해서, 공들여 이야깃거리를 준비하고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하는 하루란 무엇일까? 오늘날의 게임 문화에서 이런 수행성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게임은 다양한 스케일과 채널을 갖춘 커뮤니케이션 장이면서, 쌍방향 방송이자 2차 창작(MOD)의 무대로 완연히 자리 잡았다. 8)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게임이 (지난 시대 사람들이 영화가 그럴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문학과 회화, 연극, 음악, 로우 테크와 하이 테크, 구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새롭게 배치(n-1)하는 미디어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 RAC7이 2015년에 발표한 「Dark Echo」는 청각이 중심이 되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대의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과 비교해볼 만한 작품이다. 비록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이노 겐지는 호러 버전의 청각 게임을 「리얼 사운드」의 후속작으로 발표하려 했다. 대상보다는 상황에 집중하게 되는 청각의 특징을 살리려면 연애물보다는 호러가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 사운드- 바람의 리그렛」의 방법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흔히 문명화되지 않은 감각으로 취급되는 후각, 촉각이 증폭될 수 있도록 세가 새턴을 다른 장치에 뒤섞어 해킹해볼 수도 있겠다. 라디오에서 제거된 쌍방향 통신성을 복원하고, 참가자들이 변주된 이야기를 주고받는 네트워크 구축 역시 가능하다. 쉽게 접속하고 검색되며 파편화된 정보가 얄팍하게 소비되는 일이 만연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애써 특권과 중심에서 돌아 나와 무한히 변신하려는 게임 실험을 기대해본다. 1) 久遠馨, 『Dの食卓はなぜ伝説のゲームになったのか?―次世代に遺したいゲームプランニングの基本』, 秀和システム, 2014, pp.30-32. 2) 각본 전문은 사카모토 유지의 블로그(https://han.gl/BCZsK)에 공개되어 있다. 3) Ian Hamilton, 「A history of game accessibility guidelines」, 『gamedeveloper.com』, 2021.6.17. (https://han.gl/VZFVo) 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p.47. 5) Eldon L. Ham, 『Broadcasting Baseball: A History of the National Pastime on Radio and Television』, McFarland, 2011, pp.40-42. 6) 요시미 순야, 『소리의 자본주의』,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5, pp.234-250. 안드레아스 뵌 · 안드레아스 자이들러, 『매체의 역사 읽기』, 이상훈 · 황승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 pp.203-212. 7) 김성기, 「미디어 유토피아의 계보 :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에서 플루서의 ‘텔레마틱론’으로」, 『한국방송학보』 29권 4호, 한국방송학회, 2015, 5-32쪽. 8) 닉 다이어 위데포드, 그릭 드 퓨터, 『제국의 게임』, 남청수 옮김, 갈무리, 2015, pp.428-43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임태훈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문학사의 접점, SF 문화와 사운드스케이프 예술을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기계비평들』,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가 있고, 대표 저서로 『검색되지 않을 자유』, 『우애의 미디올로지』 등이 있다.

  •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 Back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07 GG Vol. 22. 8. 10. 아서: 우리 집안은 영국인도 아니었다고. 숀: 아무렴, 아서왕이시여! 미키: 좋은 이름이에요. 강한 이름입죠. 왕 같은 이름! 저만의 왕 같은 분이세요, 아서 씨. 존: 서부 모험 얘기가 재밌나 보지? 잭: 이젠 별로요. 기사 얘길 읽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원탁의 기사들요. 존: 거기 왕 이름이 뭐더라? 잭: 아서 왕도 있고, 랜슬롯 경이랑, 귀네비어 왕비랑, 잔뜩 더 있어요. 존: 그 이름… 잭: 좀 맘에 들어요. 존: 그거 알아? 아빠도 그래.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 1) .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본디 〈레데리2〉가 장르적 상상력을 빚진 할리우드 웨스턴 시네마의 원형적 트로프가 중세 기사 로맨스와 공유하는 바가 많다는 점, 나아가 웨스턴 장르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가 중세 유럽 봉건제와 흔히 비교되는 에도 시대 사회 구조를 모티프 삼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인유 자체는 그리 새삼스러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레데리2〉의 기사 로맨스 인유는 단지 두 장르의 표면적 유사성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사 로맨스 장르를 참조점 삼아 〈레데리2〉는 내러티브는 물론 오픈월드까지 아우르는 고유한 주제의식을 구축한다. 자기기만의 루도내러티브 협박, 갈취, 폭행, 재물절도, 가축절도, 침입, 강도, 강간, 밀렵, 살인미수, 탈옥 2회. 이는 〈레데리2〉에서 자행 가능한 범죄를 열거한 것이 아니다(이 게임이 제공하는 범죄-유희의 목록에 성폭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영국 중세 말, 로맨스 『아서 왕의 죽음』을 집필한 기사 토마스 말로리 경의 화려한 범죄 경력이다. 아서 왕 전설을 집대성하며 그처럼 고귀한 기사도의 공동체를 그려낸 장본인이 정작 “기사도라기보다 모범적인 깡패질의 기록”(Cooper x)에 수렴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말로리의 독자들을 꾸준히 당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명예로운 신념이 이끄는 삶에 대한 선망과 직업범죄자로서의 삶의 이력을 한 사람 안에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어쩌면 〈레데리2〉의 플레이어야말로 말로리의 자아분열적 모순을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지 앞의 질문이 무법자 아서 모건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요약하는 문장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레데리2〉가 자기기만이 얼마나 강력하게 자기모순을 지탱하는 기제인지, 나아가 자기성찰이 과연, 어떻게, 얼마나 가능한지 묻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 아서의 일기. “매번 끝이 없다. 현상금사냥꾼. 핑커튼. 법집행인. 가는 곳마다 문명이 더 늘어선다. 어쩌면 앞으론 이게 다일지도 모른다. 차차 알게 되겠지. 이곳이 슬슬 기분나쁘다. 서부의 탁 트인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나마 남아있는 땅으로라도. 하지만 그곳마저도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다.” 손글씨에 드로잉을 곁들인 일기는 이 과묵한 무법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밀한 창구이자, 플레이어의 정서가 주인공 및 게임의 내러티브와 호응하도록 조율하는 가이드로 기능한다. 1899년. 오프닝에서부터 〈레데리2〉는 한 시대의 끝을 배경으로 삼겠다 선언한다. 〈레데리2〉의 세계는 문명 대 야생이라는 오래된 신화적 내러티브의 시공간이다. 선형적 흐름으로 표상되는 근대 ‘역사의 진보’와 함께 백인 문명은 기어이 서부의 야성을 길들였다. 제도적 권력보다 개인의 물리적 폭력이 훨씬 선명한 실체를 지니던 서부의 경계적 공간에서 활개 쳤던 무법자들은 이제 국가권력·자본주의·물리적 폭력의 결합체인 미연방 및 핑커튼 요원들에게 뒤쫓기는 처지다. 아서가 20년을 충성한 반 더 린드 갱은 낯선 풍경들 사이에 갇혀 이리저리 내몰리며 몰락의 수순을 걷고, 시나리오 후반부터 급격히 쇠약해지는 아서의 병든 육신은 플레이 경험을 세계의 풍경과 동기화시킨다. 역사의 흐름과 인간 문명의 발전을 ‘황금시대’로부터의 점진적 쇠퇴로 인식하는 중세 역사관처럼, 〈레데리2〉의 게임 세계는 새 시대의 도래를 기념하기보다 이전 시대의 종말을 애도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무법자의 존재론으로 거듭난다. 우리 시대는 다 지나갔으며 세상이 더는 우릴 원치 않는다는 아서의 한탄은 무법자들의 좌절감과 위기의식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레데리2〉 재현의 철학의 대변자이기도 한 동시대 사상가 에블린 밀러가 문명 대 야생의 신화적 구도를 구세계 문명의 퇴폐와 신세계 자연의 순수로 변주하고 후자로의 회귀를 주장한다면, 밀러를 정신적 지주로 삼는 더치 반 더 린드의 리더십은 이를 다시 문명 대 무법자의 구도로 전유함으로써 범죄에 반체제적 투쟁이라는 대의를 덧씌운다. 더치와 아서는 무법자가 현재에서 미래로 돌이킬 수 없이 나아가는 근대 역사의 선형적 시간성과 불화하는 존재라는 핵심적 인식을 공유한다. 더치가 설파하는 사회 개혁이나 원시의 지상낙원 타히티로의 도피라는 비전은 아서의 향수와 마찬가지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좋았던 과거’를 향한다. 하지만 무법자들의 세계관은 역사적 현실에 시대착오와 자기기만이 뒤섞여 만들어진 왜곡의 결과물이다. 그들 마음속의 더 조화롭고 더 단순했던 과거, 생계형 강력범죄자가 환영받았던 과거는 존재한 적 없다. 따지고 보면 문명 대 야생의 이분법에서 무법자가 야생의 영역에 속하며 문명과 적대해 왔노라는 단순명쾌한 환원부터가 환상이다. 그들은 스스로도 문명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서부 개척 시대 백인 문명 경계의 최전선이지, 야생이나 자연의 일부였던 적은 없다. 인간 제도가 없는 타히티(식민주의적 환상이다)로의 탈출을 꿈꾸지만, 텐트에서 축음기로 오페라를 감상하고, 대도시에서 목격한 세련된 삶에 매혹을 숨기지 못하는 더치의 모순처럼. 인지왜곡을 바탕으로 무법자들은 시대착오를 반복한다. 익숙한 방식 이외에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할 다른 방법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금을 기대하고 전차역 금고를 턴다거나(물론 푼돈밖에 없다) 석유 재벌 콘월을 살해하는(시스템화된 자본주의는 가령 적대 갱의 리더를 죽이면 전체가 와해되는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식의 행동은 집단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과오는 막연한 위기의식과 그럴듯한 수사를 갖췄을 뿐, (게이머에게는 『호모 루덴스』로 더 유명할)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에서 조명한, 중세 말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등지 기사들의 시대착오적인 “기사도적 환상”이나(92), 리 패터슨이 초서를 통해 진단한, 중세 후기 영국 기사계급의 “자기인식의 실패”(230)에서 비롯한 정체성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급변하는 역사적 풍경에 맞서 만들어낸 자기기만적 세계관의 폐쇄회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까닭이다. 추억보정이란 이름의 인지왜곡을 걷어내고 나면 과거의 실체는 어떤 모습일까? 갱이 돌이킬 수 없이 와해되는 순간에야 아서와 존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더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는가? 기실 이는 아서를 대체해 다음 세대 주인공이 될 존 마스턴이 꾸준히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존: 가끔은 세상이 우리가 기억하던 그런 모습이었던 적이 있긴 했는지 모르겠어. 우리들이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들이었던 적이 있긴 했는지. 아서: 내가 그랬지, 그렇게 땅굴 파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마스턴. 그런 생각 아무 도움 안 돼. 이동 중 발생하는 이 대화는 무법자들의 세계관과 자기인식이 어딘가 뒤틀려 있음을 일찍부터 암시하는 중요한 실마리지만, 플레이어가 목표 지점까지 너무 빨리 도착하면 대사를 출력할 시간이 부족해 생략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충직한 아서처럼, 당장의 임무 완수를 최우선 삼는 플레이어는 무법자들의 인지왜곡을 회의하거나 성찰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아서가 묵살했던 존의 질문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아서의 결핵이 밝혀지는 시퀀스에서, 오직 명예 수치를 높게 쌓은 아서에게만, 보이스오버로 되돌아온다. 아서의 자기성찰은 오직 그를 조종하는 플레이어가 반복적인 선행을 통해 아서 내면에 선한 마음이 있으며, 그가 명예와 범죄 사이에서 자기분열적 모순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노라는 루도내러티브를 구성할 때라야만 가능해진다. 그렇게 죽음을 앞두고서야 아서는 선한 신념에 이끌리면서도 범죄를 일삼는 자기모순을 지탱해 온 것이 다름 아닌 스스로의 기만이었으며, 끝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 것이 바로 그 자기기만이었음을 깨닫는다. 반면 명예 수치가 낮은 아서에게 자기성찰의 기회는 없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은 악인에 가까운 아서의 뇌리를 죽는 순간까지 스치지 않는다. 또다른 ‘아서 왕의 죽음’으로서〈레데리2〉는 자기인식의 실패가 이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체험 가능한 서사로 구현한다. 종국에는 〈레데리2〉의 철학을 대변해 온 에블린 밀러도 같은 운명을 맞는다. 서구 문명의 병폐를 비판하는 내내 스스로 그 일부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밀러의 최후를 목도한 뒤 존은 일기에 적는다. 그 많은 학식도 가엾은 밀러 씨를 “자기 스스로 생각했던 것만큼”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진 못했노라고. 궁극적으로 이는 〈레데리2〉 자신조차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과오다. 〈레데리2〉는 무법자들을 역사적 몰락의 풍경에 깊이 연루된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이들을 오히려 탈역사화하는 모순을 범한다. 에스더 라이트는 〈레데리2〉가 서부의 역사를 곧 서구 근대 문명 진보의 역사로 표상하는 전통을 성찰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종국에는 서구·백인·남성 중심 진보의 서부 역사관을 재생산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Rockstar Games,” “Women out of Date”). 이 재생산 과정에서 게임은 번번이 반 더 린드 갱이나 ‘옛 서부’의 과거를 상징적 인간 역사 이전의 상태로 표상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결국 〈레데리2〉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무법자들이 범하던 과거의 편집이라는 오류를 좀더 교묘한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레데리2〉에서 성찰은 가능하지만, 오직 최후의 순간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 필연적인 완성이자 종말의 순간을 지연하는 것이 〈레데리2〉의 전략이다. 지연하는 오픈월드, 팽창하는 게임 오픈월드 시스템을 빼놓고 〈레데리2〉를 제대로 논의하기는 불가능하다. 세기전환기 미국 땅을 방대하고, 치밀하며, 상호작용 가능한 공간으로 구현한 〈레데리2〉의 게임 세계는 발매 이래 꾸준히 찬사의 대상이었고, 아직까지 번번이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이는 게임을 둘러싼 불평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레데리2〉의 오픈월드가 동시대 게임 테크놀로지로 구현 가능한 플레이어 자유도와 비선형적 게임 경험의 지평을 확장하는 반면, 상술한 메인 시나리오는 극단적으로 선형적인 플레이 경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레데리2〉에서 시나리오 미션과 오픈월드 상호작용, 선형성/비선형성 간 괴리와 불협화음은 전례 없이 극대화된다. 로맨스의 오랜 관심사이기도 했던 이 긴장을 〈레데리2〉는 오직 디지털게임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주제화한다. 서사의 비집약성과 비선형성은 문학 양식이자 장르로서 로맨스를 특징짓는 요소다. 로맨스는 결말을 향해 내달리기보다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며, 우연한 조우를 통해 모험의 원래 목적과 상관없는 곁가지로 빠지기를 반복한다. 로맨스의 이러한 성격은 서사의 필연적 선형성에 저항하는 충동으로 해석되곤 한다. 패트리샤 파커는 로맨스가 불가피한 결말을 끝없이 지연하는 팽창의 양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고(4, 63), 리 패터슨은 로맨스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적 의식을 억누르는 힘을 지닌 장르라고 해석한다(107). 기사 로맨스의 주인공인 편력기사(knight errant)의 errant는 모험의 방랑을 뜻하지만, 인식적·도덕적 탈선을 뜻하는 error에서 파생된 말이기도 하다. 로맨스의 팽창하는 모험은 이야기를 지연하고, 필연적인 종말과 완성의 순간을 유예하며, 선형적 시간성에 저항하며 서사적·물리적·도덕적 방황 자체의 즐거움에 주목하는 일이다. 이는 〈레데리2〉가 역사에 뒤쫓기는 무법자 아서 모건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통해 구현하는 바이기도 하다. * “실패: 잘못된 말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일단 시나리오 미션에 진입하면, 시시각각 개입하는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간 온갖 기상천외한 사유로 게임오버를 당하기 십상이다. 〈레데리2〉의 시나리오는 선형적 시간성에 관한 자의식적 루도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증기기관차처럼 내달리는 근대 선형적 역사의 흐름을 구시대의 무법자는 거스를 수 없다. 〈레데리2〉가 전작 〈레드 데드 리뎀션〉(이하 〈레데리1〉)의 프리퀄임을 고려하면, 예정된 종말의 미래로 치닫는 〈레데리2〉의 시간의 흐름은 더더욱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다가온다. 아서나 플레이어는 한 시대의 끝을, 갱의 분열과 몰락을, 아서 자신의 죽음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시나리오 미션이 구성하는 게임플레이의 선형성 역시 플레이어 행위자성의 감각을 저해한다. 시나리오 미션 내내 플레이어는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개입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정확히 특정 지점으로 이동해 정확히 특정 행동을 수행하라는 지령은 종종 강제적인 조작 매뉴얼에 가까워지고, 여기서 이탈해 비선형적 플레이를 추구하는 시도는 게임오버로 차단된다. 결국 이 손쓸 수 없는 몰락의 이야기를 진행하며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자유란 기껏해야 번번이 돌아오는 전투 구간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상을 자행할지 정도뿐인데, 이는 아서가 시대의 변화 앞에 좌절감을 느끼며 폭력적 충동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주체를 좌절시키는 (역사와 게임 시스템의) 선형적 힘이야말로 〈레데리2〉의 서사와 플레이경험이 동기화되는 지점이다. 반면 〈레데리2〉의 비선형적 오픈월드 시스템은 이 선형적 시간성에 저항하는 지연과 팽창의 경험을 극대화한다. 오픈월드는 게임플레이를 시나리오로부터 이탈시키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틈을 비집고 팽창시킴으로써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지연한다.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두 세계는 암묵적으로 전혀 다른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시나리오 미션에서 반 더 린드 갱의 몰락이 조밀한 인과관계 속에서 긴박하게 진행되는 반면, 오픈월드에서는 밤낮이 수없이 바뀌며 아서의 수염이 자라고 체중이 변할지언정 갱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선형적 플레이를 조작 단위로 강제하던 시스템 인터페이스의 개입이 몰입적 플레이를 강조하는 오픈월드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이다. 오픈월드의 전례 없는 규모와 디테일, 높은 상호작용성은 물리적 플레이타임은 물론, 시나리오에서 좌절되었던 행위자성의 감각마저 팽창시킨다. 실패·도피·배신의 드라마의 구심점인 갱 캠프를 떠나 플레이어는 드넓은 자연을 탐험하며 수백 종의 동물들을 관찰하고 사냥하거나, 길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행인과 상호작용하거나, 마을에 들어가 목욕과 이발을 한 뒤 포커를 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갱의 명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비선형적 활동에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오픈월드는 자유로운 자기실현의 감각을 통해 플레이어를 끝없이 붙들어 놓는다(비약적으로 불어나는 플레이타임이 암시하듯 이 행위자성 감각의 팽창이야말로 게임플레이의 즐거움의 요체인지도 모른다). 〈레데리2〉 오픈월드의 비선형적 플레이경험은 선형적 역사의 시간에 맞서 종말의 미래를 끝없이 유예하는 지연의 시간성을 구성한다. 결핵으로 소진되어 가는 아서의 생명조차 선형적 시간이 지배하는 시나리오 미션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영원하다. 역사 바깥에, 비선형적 편력의 세계에 머무는 한 아서 왕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기기만일 것이다. 서부의 가을, 또는 “끝없는 여름” 〈레데리2〉는 개인을 좌절시키는 역사의 흐름과 그것을 뿌리치려는 개인의 충동 간 긴장을 게임화한다. 이는 아서의 죽음 이후 에필로그와 포스트게임의 플레이어 캐릭터로 거듭나는 존 마스턴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에필로그에서 존은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직한 삶을 일구고, 옛 배신자에게 복수함으로써 과거에 매듭을 짓는다. 엔딩크레딧 시퀀스는 〈레데리2〉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레데리1〉을 예고한다. 마침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존과 애비게일의 결혼식 장면과 정부 요원들이 그의 자취를 추적해 오는 장면이 교차하고, 그 위로 게임 클리어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업적 이름은 “끝없는 여름”이다. 크레딧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마침내 시나리오 미션의 제약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포스트게임 오픈월드를 존과 플레이어는 영원히 누빌 수 있다. 〈레데리2〉의 결말로부터 〈레데리1〉의 오프닝으로 향하는 이 거역 불가능한 선형적 시간 한가운데서, 머지않아 또다시 찾아올 폭력과 죽음의 미래는 끝없는 여름의 정지된 시간 속에 언제까지고 유예된다. 하지만 이는 다가올 미래를 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한다. 머지않아 불청객이 방문할 것이고, 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던 순간 자기 손으로 일군 농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결국 〈레데리2〉의 존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착오에 빠진다. 그는 무법자였던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개인의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복수를 통해 되찾은 돈으로 은행빚을 청산하고 자기 소유 농장을 유유자적 경영함으로써 동시대 사회라는 역사로부터의 자유를 얻는다. 포스트게임 오픈월드의 영원한 여름의 시간 속에서 선형적 시간은 힘을 잃고, 무한한 활동의 자유 속에 행위의 인과는 의미를 상실한다. 물론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로부터 4년 뒤, 〈레데리1〉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 엔딩크레딧 시퀀스 위로 뜨는 에필로그 클리어 업적 달성 메시지, “트로피 획득! 끝없는 여름”. 하지만 이 여름이 어떻게 끝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개인이라는 (미국적인) 꿈이 얼마나 큰 착각이며 자기기만이었는지 무자비하게 폭로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결국 존 마스턴은 다시금 세상이 자기가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운명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을을 가리키고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한 서부의 여름은 영원할 것이므로. 그렇게 아서 왕의 죽음 뒤에도 존과 플레이어는 다시 한번 종말을 지연하고 인식적 과오 속에서 즐거움이 팽창하는 ‘로맨틱한’ 편력을 계속한다. 끝없는, 여름이었다. 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참고문헌 Cooper, Helen. Introduction. Le Morte Darthur: The Winchester Manuscript, by Sir Thomas Malory, edited by Cooper, Oxford UP, 2008, pp. vii-xxx. Huizinga, Johan. Autumntide of the Middle Ages: A Study of Forms of Life and Thought of the Fourteenth and Fifteenth Centuries in France and the Low Countries. Translated by Diane Webb, edited by Anton van der Lem and Graeme Small, Leiden UP, 2020. Parker, Patricia A. Inescapable Romance: Studies in the Poetics of a Mode. 1979. Princeton UP, 2015. Patterson, Lee. Chaucer and the Subject of History. U of Wisconsin P, 1991. Red Dead Redemption 2. Rockstar Games, 2018. Wright, Esther. “Rockstar Games, Red Dead Redemption, and Narratives of ‘Progress.’” European Journal of American Studies, vol. 16, no. 3, 2021, pp. 1-19. ---. “Women Out of Date.” Bullet Points Monthly, December 2018, https://bulletpointsmonthly.com/2018/11/12/women-out-of-date/. Accessed 11 June 2022.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선오 영문학을 전공하고 중세 로맨스에서 여성의 사랑이 재현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꾸준히 플레이해 왔지만, 특히 중학생 때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프랜차이즈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삶의 궤적이 전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비디오게임, 영화, 드라마 등 동시대 미디어가 역사, 역사적 배경, 그리고 역사와 개인(특히 여성)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한송희 한송희 자기소개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편의상 “영화연구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스스로는 영화를 매개로 세계를 탐구하는 문화연구자로 정체화하고 있다. 주로 재현, 표상, 담론의 정치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무한히 확장하고 분할되다 중첩되기도 하는 세상의 모든 경계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나와 나 아닌 것, 안과 밖, 이곳과 저곳, 우리와 저들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하면 더 무르고 희미하게 만들어 느슨한 연결을 가능케 할까, 가 최근의 가장 큰 관심사다.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문화/비평에 대한 작은 바람 -권력투쟁을 위한 비평의 역할과 책임에 관하여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이 꽤나 발칙한 사고를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요 귀여운 녀석이 게임에 미쳐 부모님 몰래 수십만 원어치의 현질을 했고, 그걸 들켜 죗값을 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우리 엄마는 비슷한 일을 이미 여러 번 겪은 바, 대수롭지 않게 ‘애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라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이모는 ‘이노무 시키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발을 동동거렸다.

  •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어린 시절을 비디오 게임을 벗 삼아 왔기에 게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2000년대 중반쯤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 문서에 실린 고전 게임기들의 사진 퀄리티가 너무 조악했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웹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 웹 문서들의 사진자료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초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형편 되는 대로 찍어 자가 제공한 사진들 일색이었으므로, 그때 눈으로 봐도 거개가 저해상도 저퀄이기 일쑤였다. 물론 하드웨어 제작사가 말끔하게 찍은 공식 사진자료가 있기는 하나, 당연히 제작사에 저작권이 있는데다 언론사 등에나 한정적으로 제공되기에, 공공자료로 개방되어 인용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퀄리티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Back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11 GG Vol. 23. 4. 10. 한 남자의 자원봉사에서 시작된 ‘디지털 박물관’ 에반 아모스(Evan Amos)라는, (북미 게임기 시장 대붕괴 시기로 유명한) 1983년에 태어난 한 미국인 남자가 있다. 어린 시절을 비디오 게임을 벗 삼아 왔기에 게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2000년대 중반쯤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 문서에 실린 고전 게임기들의 사진 퀄리티가 너무 조악했다 는 점이었다. 지금의 웹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 웹 문서들의 사진자료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초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형편 되는 대로 찍어 자가 제공한 사진들 일색이었으므로, 그때 눈으로 봐도 거개가 저해상도 저퀄이기 일쑤였다. 물론 하드웨어 제작사가 말끔하게 찍은 공식 사진자료가 있기는 하나, 당연히 제작사에 저작권이 있는데다 언론사 등에나 한정적으로 제공되기에, 공공자료로 개방되어 인용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퀄리티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건 내가 기여할 수 있겠다’라는 점에 눈뜬 아모스는, 독학으로 사진기술을 배운 후 자신의 Wii를 피사체로 삼아 DSLR과 전문장비로 깔끔하게 고화질 사진을 찍어 2010년 8월 28일 영어 위키백과에 공공재(public domain) 형태로 공개 했다. 그의 첫 ‘기여’였다. 이 ‘무료봉사’는 점점 가속도가 붙어, 온라인 중고장터에 공고를 내기도 하고 사설 수집가들에게서 기기를 제공받기도 하고 뜻있는 사람의 기부까지도 받아가며 일종의 ‘사회활동’으로까지 발전해, 2015년이 되자 위키백과 산하의 디지털 자료 아카이브 사이트인 위키미디어 공용 에 자신의 사진이 모인 대규모 저장소인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 을 만들기에 이른다. 현재 영어판을 포함한 각국 위키백과의 고전 게임기·컴퓨터 본체 사진은 거의 전부가 이 아모스의 자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심지어 모든 사진의 라이선스가 공공재라 마음껏 갖다 써도 문제없다. 서양권 및 일본에 공식 발매된 어지간한 게임기·컴퓨터라면, 여기에서 아모스가 찍은 인쇄물 퀄리티의 초고화질 사진자료(유명 기기라면 내부구조와 기판 사진까지 있다)를 손쉽게 다운로드받아 상용·비상용을 막론하고 자유롭게 가공하거나 인용·사용할 수 있다. 고전 게임기나 컴퓨터에 관련된 정보글이나 기사, 책 등을 (특히 직업적으로) 만들어온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 아마도 직간접적으로 아모스의 사진자료 신세를 졌을 것이다. 심지어는 아모스의 이름조차 여태껏 몰랐더라도. 10년 이상에 걸쳐 구축된 아모스의 귀중한 사진 라이브러리는 이제 전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출판사·저작자·웹사이트 등에서 절찬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필자 역시 다년간 비디오 게임 관련 기사·특집·컬럼 등을 저작하는 과정에서 ‘기기 사진이 필요할’ 때마다 방문하여 애용해 왔다. 이 계열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저작물에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인용하거나 가져다쓸 수 있는 사진자료 라이브러리가 존재한다 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아모스에게는 오랫동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느낌을 항상 갖는다. 그 ‘디지털 박물관’의 공식(?) 도록 지난 12월 29일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임 콘솔 2.0 : 사진으로 보는 가정용 게임기의 역사」는 이 아모스가 자신이 그간 찍어온 사진들을 소재로 삼아 2018년 북미에서 첫 출간한, 말하자면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의 공식 도록 에 가까운 느낌의 책이다(‘2.0’이 붙은 이유는, 기기 및 내용을 증보하여 2021년 재출간한 개정판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모스는 사진가 겸 비디오 게임 아키비스트로 활동하면서 2013년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을 열어 1,018명의 투자자와 $17,493의 자금을 모아 신규 기기들(덕분에 일본 게임기·PC 상당수가 추가될 수 있었다)을 확충했는데, 「게임 콘솔」은 그 크라우드펀딩 덕분에 탄생한 결과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진자료집에 그치지 않고 ‘1970년대 초창기부터 현 시점(2021년 기준)에 이르기까지,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하드웨어 사진 중심으로 훑는 가벼운 역사서’처럼 꾸민 것이 이 책의 최대 특징으로서, 기기마다 기본적인 발매시기, 하드웨어 사양, 간단한 소개글, 발매 당시의 의의와 시대상황 등을 정리해 깔끔한 사진과 함께 넣었고, 중요한 기기의 경우 분해하여 내부 기판 및 구조까지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972년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부터 2020년의 Xbox Series S/X와 플레이스테이션 5에 이르기까지 근 40년 9세대에 걸친 하드웨어 발전사의 온퍼레이드로서, 패미컴이나 메가 드라이브처럼 충분히 유명한 기기들뿐만 아니라 페어차일드 채널 F나 벡트렉스처럼 북미 비디오 게임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여야 알까 말까한 마이너한 게임기까지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다. 말미에는 일종의 부록으로서, 지금 시대에 고전 게임을 즐기는 데 있어 발생하는 애로사항 및 대처법에 대한 간단한 안내와, 지면·자료 관계성 등의 문제로 누락됐지만 언급할 가치가 있는 마이너 기종ㆍ파생기종들에 대한 사진 및 소개문도 실려 있다. 꾸준히 개정판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며 기본적으로는 사진 위주의 도록 컨셉이고 방향성 자체도 워낙 확고하고 유니크한 책인지라 장점과 의의가 압도적이고, 고전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추천할 만한 훌륭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가정용 게임기의 역사’라는 부제부터가,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을 잘 압축해낸 문장인 셈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일단 (미국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이겠으나) 서술의 중점이 결국 미국 및 영미권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게임 콘솔의 역사에서 미국만큼이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하드웨어 및 그 사회상·사정이라, 영미권 중심의 서술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점이다(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라 서양 저자가 쓴 일본 게임 역사서나, 반대로 일본 저자가 쓴 서양 게임 역사서에서 흔히 보이는 빈틈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 등 비영미권의 하드웨어 중 누락된 것이 제법 있어(예를 들어, MSX는 일본은 물론 유럽권에서도 수많은 기종이 발매되었으나 책에는 단 한 기종만 수록했다) 아쉬움을 더한다. 또한,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게임기’만큼이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컴퓨터’ 쪽의 누락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아쉽다. 코모도어 64나 ZX 스펙트럼처럼 서양권 8비트 컴퓨터 계보 초기의 인기 기종들이 실려 있긴 하나 비중이 크지는 않으며, 애플 Ⅱ나 IBM PC처럼 빼놓고 지나가면 안될 법한 기종의 누락도 있다. 저자의 서문에는 ‘책 내의 세대 구분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컴퓨터를 포함시키기 어려웠다’라는 대목이 있고,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의 라이브러리 내에서도 레트로 컴퓨터 쪽은 상대적으로 구색이 불충분한 편이라, 이쪽은 고전 컴퓨터 쪽을 다루는 별도의 책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일단 책 제목이 ‘게임 콘솔’이기도 하니까). 소소하게는 영미권 외 국가의 오리지널 기종들의 빈자리가 큰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예를 들어 한국 오리지널 기종의 경우 이 책에서는 유이하게 GP32와 삼성 엑스티바(‘누온’ 제하로 실려 있다)가 들어가 있다. 모두 북미에 시판된 적이 있는 기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의의만큼이나 한계점도 큰 책이라는 점은 짚어두지 않을 수 없겠으나, 고전 컴퓨터·게임기를 다루는 외서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어판으로 원활히 번역 소개되는 경우가 드문 현실을 고려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정식 발간은 큰 의미가 있다. 아모스의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혹시 후일의 「게임 콘솔」 개정판에 한국의 오리지널 하드웨어가 추가될 수 있다면 전 세계의 애호가들에게도 새로운 발견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월간 GAMER'Z 수석기자) 조기현 ‘국민학교’ 때 친구 집에서 금성 FC-150과 패미컴을 처음 접했고, APPLE II+ 호환기종으로 컴퓨터에 입문했다. 중·고교 시절을 16비트 PC 게이머로 보낸 후 플레이스테이션을 접하며 가정용 게임기 유저로 전향, 게임으로 영어와 일본어 독해법을 익혔다. 이후 2002년부터 현재까지 (주)게임문화의 월간 GAMER'Z 수석기자로 재직중이다. 8~90년대 한국 게임 초창기의 궤적을 텍스트로 복각해보고 싶어 한다. 저서로는 〈한국 게임의 역사〉·〈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모두 공저), 감수로는 〈페르시아의 왕자 : 개발일지〉와 〈여신전생 페르소나 3·4 공식설정자료집〉 등이 있으며, 2019년부터 레트로 게임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해설하는 무크집 〈퍼펙트 카탈로그〉 시리즈 연작의 한국어판을 번역·감수하고 있다. 최신간은 〈패미컴 퍼펙트 카탈로그〉와 〈세가 초기 게임기+겜보이 퍼펙트 카탈로그〉(근간 예정)다.

  •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 Back 개척, 애정, 확장성: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 그리고 제다이 서바이버 16 GG Vol. 24. 2. 10. 우리는 넘쳐나는 콘텐츠의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살며 다양한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 ) 와 마주하고 있다 . 그 중에서 ‘Star Wars Jedi: Fallen Order’ 그리고 ‘Star Wars Jedi: Survivor’ 라는 게임 작품으로 IP 확장성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 컨텐츠 IP 우선 , IP 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위해 정의를 하고 가려 한다 . 다들 저작권을 가지고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정확히 그 개념이 무엇인지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호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IP, 우리말로 지식재산이란 것은 무형적인 자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여 창작된 무형적인 것으로 이익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 그 중에서 오늘 계속 언급할 IP 는 콘텐츠 IP 이다 . 하나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다양한 부가 사업을 가능하게 하며 , 오늘날에 영화 , 애니메이션 그리고 웹툰 , 만화 , 게임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 Star Wars 세계관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위 구절로 항상 시작하는 스타워즈는 루카스 필름이 제작한 미국의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영화 시리즈로 조지 루카스 감독이 감독 , 각본을 맡아 1977 년에 개봉한 첫번째 작품인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부터 다양한 영화 , 애니메이션 , 드라마 , 소설 등 여러 매체로 뻗어 나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과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 스타워즈는 들어봤지만 세계관을 모를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세계관 설명과 뒤에 게임 얘기를 위해 알아야 할 내용 정도만 얘기하고 가겠다 . 우선 간단하게 은하 공화국이 존재하고 은하계의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들이 있다 . 하지만 은하 공화국에 분열의 움직임이 보이고 시스 ( 제다이와 같이 포스라는 힘을 쓰지만 악한 쪽 ) 의 움직임과 “ 오더 66” 에 공화국이 몰락하고 사악한 은하제국이 들어섰으며 이에 저항하는 반란군과 은하 제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위에서 간단하게 설명한 것에서 “ 오더 66” 는 제다이 폴른 오더를 시작할 때도 알고 가면 좋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만 조금 더 설명하겠다 . 우선 위에서 은하 공화국의 분열의 움직임을 말했었는데 은하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한 분리주의자들은 공화국이 크지 않은 군사 조직을 가지고 있는 점을 노려 비밀리에 대규모 드로이드 군대를 제작하고 공화국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독립을 얻으려고 하였다 . 이러한 상황에서 은하 공화국 최고 수상 ( 은하 공화국의 국가원수 , 총리 위치 ) 인 쉬브 팰퍼틴이 공화국 앞으로 주문해 놓은 대규모 클론 트루퍼 군대를 발견하게 되고 , 급한 상황 해결을 위해 이 군대를 사용한다 . Excute Order 66. - 다스 시디어스 - 공화국의 가장 큰 군대로 채용된 클론 트루퍼들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였지만 이후 팰퍼틴에게 제다이들을 즉각 사살하라는 내용을 받아 은하계 곳곳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제다이와 파다완 ( 제다이 수련생 ) 들은 함께 싸운 전우들인 클론 트루퍼들에게 배신당해 사살당한다 . 그 외에 위치가 알려져 있던 제다이들도 사살당하고 마는 슬픈 서사이자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넘어가는 스타워즈의 큰 사건이다 . Star Wars IP 확장 1970 년대에 스타워즈가 등장하게 되면서 콘텐츠 IP 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단순히 영화가 성공한 것만 아니라 스타워즈 콘텐츠 IP 를 문구 , 장난감과 같은 MD 상품 영역 확대와 영화 속 복장을 똑같이 코스튬 플레이하여 일상 , 문화에 크게 녹아 들었고 , 이런 사유로 스타워즈라는 콘텐츠 IP 의 사업영역과 부가가치가 크게 올랐다 . 스타워즈는 자신이 보유한 IP 를 직접 게임으로 개발한 기업 중 한 사례로도 꼽힌다 . 바로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루카스 아츠이며 , 디즈니에 인수되기 이전까지 30 여 종이 넘는 스타워즈 IP 기반 게임을 개발하였다 . IP 라이선스 홀더가 직접 게임을 개발한 만큼 , 루카스 아츠의 스타워즈 게임은 IP 가 가진 특징이 잘 드러나며 , 영화 속 장면을 게임화 한 ‘ 스타워즈 레이서 ’ 와 비행 시뮬레이션 같은 현실감이 있던 ‘X-wing 시리즈 ’ 그리고 호평을 받았던 RPG 게임인 ‘ 스타워즈 : 구 공화국의 기사단 ’ 은 현재 리메이크 작품까지 개발 중이라고 한다 . 요즘 스타워즈 IP 의 확장을 얘기하자면 디즈니 인수 이후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 70 년대에 나온 스타워즈는 30~40 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다가 디즈니에 인수되었고 , 그 이후 스타워즈의 스카이워커 사가의 세번째 시리즈인 시퀄 3 부작을 망쳐 최악의 평가를 받았지만 스핀오프 영화인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 같은 경우에는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못 보던 부분을 보여주어 신선함과 첫번째 스핀 오프임에도 성공을 거둬 ‘ 한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 나 후에 성공하는 ‘ 만달로리안 ’ 과 같은 스타워즈 앤솔로지의 발판이 되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또 , TV 시리즈로 제작된 스핀오프 작품인 ‘ 만달로리안 ’ 은 시퀄로 온갖 악평을 받았던 디즈니의 스타워즈를 다시 일으킬 만큼 큰 영향력을 가져왔고 새로운 캐릭터들의 매력적인 서사가 인상깊다 . Star Wars Jedi: Fallen Order 위에도 여러가지 부분으로 스타워즈 IP 확장을 설명했지만 스타워즈의 IP 확장은 말하기엔 길 정도로 너무나 많다 . 그 중 우리는 EA 의 스타워즈 게임에서 Respawn Entertainment 가 개발한 스타워즈 제다이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는 2019 년도말에 나온 작품으로 스토리는 위에서 말한 오더 66 이후 살아남은 옛 제다이 파다완 ( 수련생 ) ‘ 칼 케스티스 ’ 의 이야기를 다룬다 . ‘ 칼 ’ 은 브라카라는 행성에 숨어 고철 처리부로 몇 년 동안 조용히 지내다 제국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지만 ‘ 시어 준다 ’ 와 ‘ 그리즈 드리터스 ’ 덕분에 살아남게 된다 . 그들을 따라 보가노 행성에 가 고대 회랑의 비밀을 밝히러 가다 ‘BD-1’ 이라는 드로이드를 만나 동행해 회랑 안에서 마스터 ‘ 에노 코르도바 ’ 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 ‘ 에노 코르도바 ’ 는 제다이 오더가 몰락하는 환영을 미리 보고 포스 센서티브 아이들 ( 포스를 가진 아이들 ) 의 목록을 복사해 담은 홀로크론을 두었다 하며 , 이를 알게 된 ‘ 칼 ’ 과 ‘ 시어 일행 ’ 이 홀로크론을 찾고 제다이 오더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진행되는 스토리이다 . 우선 게임은 홀로크론을 찾기 위해 ‘ 칼 케스티스 ’ 가 되어 다양한 행성에 가 탐험하는 스타워즈 배경의 액션 어드벤쳐 게임이다 . 타이탄폴 같은 명작을 만들어낸 Respawn Entertainment 인 만큼 자신들이 가진 재미 요소가 잘 담겨져 있다 . 훌륭한 그래픽과 맵 디자인에 벽 타기나 그래플 등 기존 리스폰에서 볼 수 있던 친숙한 요소와 광선검을 통한 전투는 단순한 공격키 연타가 아닌 소울 시리즈의 전투 방식을 참고하였는지 상대의 공격 패턴에 맞게 패링을 하고 공격하는 컨트롤이 필요한 부분이다 . 소울 시리즈라 하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제다이 폴른 오더는 소울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전투가 더 캐주얼한 방식이며 , 난이도 조절도 플레이어에 맞게 적절히 설정할 수 있다 . 또한 스타워즈 세계관에서도 모호한 포스를 간단하게 전투와 스토리를 진행하는 퍼즐에 적절히 녹여낸 점도 칭찬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스토리의 서사구조도 깔끔하다 . 컷신이 지루하게 길지도 않으며 , 맵을 탐사하면서 포커싱되는 장면 , 과거 회상 장면에 스타워즈 특유의 사운드트랙이 어우러져 더욱더 연출과 스토리를 아름답게 해준다 .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스타워즈를 모르는 사람이 하더라도 진입장벽 없이 할 수 있도록 게임의 매력과 스타워즈 세계관이 들어있고 , 기존 팬덤에게도 큰 선물 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 Star Wars Jedi: Survivor 우선 다른 리뷰나 비평에서도 말이 많이 나온 최적화에 대한 얘기는 아래서 짧게 얘기만 하겠다 . Respawn Entertainment 가 최적화 부분에 매우 실망스럽게 낸 것은 맞지만 이미 다른 곳에서 많이 언급된 내용이고 본 비평은 게임에 대해서 얘기도 하지만 결국 IP 에 대한 개척 , 애정 , 확장성을 주제로 잡기 때문에 이를 중점적으로 말하기 위해서이다 .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에 없던 칼 케스티스 같은 인물이나 스타워즈 IP 를 개척하였고 이를 추가적으로 더 확장시키려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 . 각 행성들의 오픈월드로 하여 볼륨은 커지고 넓은 맵에 각각 있는 npc 들은 칼과 이전 작처럼 얘기를 나누는 기능 말고도 서브 퀘스트를 주기도 하고 대화를 할수록 npc 에 대한 정보도 도감에 기록된다 . 생물도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이 아닌 ‘ 칼 ’ 이 포스로 길들여 타고 다닐 수 있는 생물도 있으며 광활하고 멋진 퀄리티의 오픈월드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며 탐사할 수 있다 . 넓어진 맵에 따라서 길 찾기 시스템도 개선한 것이 보이고 오픈월드인 만큼 수집 요소도 많지만 강제되지 않고 주요 목표만을 따라 빠르게 진행하는 방향과 수집품이나 이곳저곳 탐사를 하면서 천천히 진행하는 방향 둘 다 상관없다 . 탐사를 하는데 풀 게 되는 퍼즐은 행성마다 작용하는 기믹과 컨셉의 차별화를 두려한 점이 보인다 . 성장할 요소도 많이 늘었다 . 퍽이라는 상황에 맞게 명상 지점에서 일정 개수를 선택하여 선택한 종류의 퍽에 대한 패시브를 제공받는 것과 기존에 한가지 줄기에서 뻗어 나가 스킬 트리를 찍던 제다이 폴른 오더와 다르게 스킬 포인트는 공유하지만 각 파트별로 스킬 트리를 찍게 되어 있다 . 생존 관련 스킬 , 광선검 관련 스킬 , 포스 관련 스킬로 크게 나뉘며 광선검 스킬 트리는 또 그 중에서 광선검 스탠스별로 스킬 트리가 있다 . 전투에서 쓰는 광선검 스탠스는 기존에 보여준 싱글 블레이드 , 더블 블레이드를 넘어서 전작에서는 스킬로만 등장했던 듀얼 윌드가 아예 스탠스로 등장한다 . 또 , 아예 새롭게 나온 전투 방식으로는 한쪽에서 광선이 나오고 바로 그 밑에 양쪽으로 짧게 광선이 나와 크로스가드를 갖춘 검과 같은 모양으로 사용하는 크로스 가드 스탠스를 포함해 아예 광선검과 함께 블래스터 ( 광선총 ) 도 쏠 수 있다 . 스토리에 대한 부분도 전작에서 5 년이 지난 시점으로 잡고 주연 캐릭터들의 변화가 잘 표현되어 있다 . 5 년동안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이러한 위치에서 이렇게 활동하였다가 이해된다 . 기존 주연 캐릭터의 개성을 살린 부분 말고도 새로운 캐릭터도 매력적이게 디자인되었다 .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인 ‘ 데이건 게라 ’ 는 고 공화국 시대라는 은하공하국 이전 시대의 제다이로 스토리를 보다 보면 그가 타락하는 과정과 이유를 보고 공감할 수 있다 . 이처럼 다양한 게임 요소와 매력이 가득하며 전작보다 스토리와 즐길 부분이 너무나 많다 . 게임을 하면서 불편한 점을 꼽자면 키보드 , 마우스로 플레이하는데 회피 키가 Tap 키로 되어 있어 불편했던 점 말고는 정말 없다 . 이는 키 설정만 바꾸면 해결된다 . 정말 얘기가 많이 나온 문제인 최적화만 잘 했다면 최다 G.O.T.Y 정도의 많은 시상을 받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다 . 게임 자체만 놓고 보자면 정말 명작이라 평가한다 . 수많은 IP들과 매력 우리는 문화 예술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IP 들이 꽃피었고 지금도 피어나고 있다 . 그리고 ,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수많은 IP 들에 빠지는 방식은 세계관 , 캐릭터 그리고 확장성이라고 본다 . 우선 영화 , 게임 , 드라마 , 애니메이션 등에는 다양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있다 . 우리가 오늘 중점적으로 본 스타워즈도 커다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 세계관의 매력은 단지 크고 작음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이 되야 매력적인 세계관이라 생각된다 . 스타워즈는 다양한 생물체와 역사 , 기술이 있으며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유명한 광선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다 했을 때 원리 , 제작방식 , 종류 , 색상이 다른 이유 등 다양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 이는 제작사가 알려준 여러 정보를 가공해서 다른 사람이 올린 정보를 또다른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2 차 소비하는 구조라 볼 수 있다 . 이렇게 깊이 있는 세계관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이 생긴 사람들에게 앞선 예시로 빠져들게 한다 . 세계관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그 다음은 세계관 속 캐릭터를 들어볼 수 있겠다 . 스타워즈의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다스베이더는 “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 “ 왜 다크사이드로 빠지는 선택을 하였는가 ” 같은 물음으로 그 캐릭터를 알아가면 이제 앞선 것이 합쳐져 “ 캐릭터가 이러한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 “ 스토리에서 만나지 않았던 이들이 만난다면 어떠한 시너지를 일으킬까 ” 같은 사고로 이어지며 이는 다양한 2 차창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확장성인데 사실 앞서 세계관과 캐릭터를 말하면서 말한 부분에서도 확장성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앞서 말했던 세계관 정립 2 차소비와 캐릭터 이해에 따른 2 차창작이며 , 소비자나 팬 입장이 아닌 제작 쪽으로 얘기하자면 앞서 말한 Respawn Entertainment 의 스타워즈 시리즈인 제다이 폴른 오더와 제다이 서바이버 모두 좋은 IP 확장 사례라 말할 수 있다 . 그들은 스타워즈 세계관에 없던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내 새로운 서사시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짜임새 있게 작동해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을 알고 있던 사람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였고 새롭게 스타워즈를 Respawn 의 게임으로 즐기는 사람도 스타워즈 세계관을 게임을 하면서 이해하게 구성하였다 . 기존 스타워즈 팬이든 새롭게 접해본 사람이든 칼 케스티스나 BD-1 또는 그리즈 , 시어까지 새로운 인물들이 어떠한 성격과 과거를 가졌고 , 서로가 어떠한 도움을 주는 지 우리가 칼이라는 주인공으로 여정을 이어나가며 함께 성장하고 공감하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되어있다 . 스타워즈라는 거대 IP 이자 세계관을 새로 개척해 나간 것이다 . 위 과정이 개척이었다면 이번 제다이 서바이버에서는 확장을 보여준다 . 성장한 주인공과 변화한 일행이 어떠한 일을 하는 지 , 특히 칼 케스티스가 이번작을 시작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우리가 이번 여정에서 어떠한 방향을 가지고 나아가는 지를 바로 이해하고 같이 생각한다 . 또 , 스타워즈 세계관에서 알려져 있지만 팬덤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고공화국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시간은 뒤로 갔지만 앞선 시대의 스타워즈의 생소한 설정도 이번 스토리와 모험에 잘 담겨진 모습을 보여준다 . 기존에 없거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을 확실히 확장한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 디지털 게임이 IP 확장에서의 위치와 가지고 있는 것 디지털 게임은 여러가지 문화 예술과 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영화 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 그냥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콘텐츠적으로 소설에서 영화가 미치고 영화에서 소설이 미치는 상호보완성처럼 영화 산업이 새롭게 만들어낸 확장성과 상호보완성을 게임이라는 문화예술이자 산업이 이에 대해 또다른 영향력을 가진다 . 우선 앞서 말한 소설과 영화로 예시를 들어 말해보자면 소설과 영화 , 서로 가진 강점이 다르다 . 영화는 우선 정보가 소설처럼 상상할 필요없이 시각적 , 청각적으로 접근해온다 . 기존에 소설이 있든 대본이 있든 이것을 배우들의 대사나 몸짓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대중들에게 친숙하다 . 우리가 말로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이해가 잘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 다만 이 부분은 단점도 있는 것이 배우가 해당 캐릭터와 맞지 않는다 거나 연기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 또한 슬픈 장면에 슬픈 노래가 깔리는 효과처럼 분위기를 더욱 몰입하고 영화 ost 를 들었을 때 해당 장면이 떠오르는 것처럼 청각적으로도 영향을 준다 . 반대로 이제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 소설은 시각적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 간단하게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가 아니기 때문 .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에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상상하게 해준다 . 또한 책은 텍스트로 모든 것을 담아야 하다 보니 묘사가 상세하다 . 심리에 대한 것을 영화는 배우의 연기만을 보고 이해해야 한다면 소설에는 그대로 적혀 있다 . 이는 시각적이지는 않지만 직관적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것 . 또한 요즘은 ott 가 많기 때문에 돌려볼 수도 있긴 하지만 영화관에서 본다 했을 때 시간에 따라가야 하지만 책은 이해가 안 된다 거나 놓친 문장이 있다면 다시 앞으로 가 읽으면서 각자의 템포에 맞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진다 . 이렇게 각자의 강점이 있고 , 단점도 있으며 소설에서 영화가 되기도 하고 영화가 소설로 나오는 사례 등 서로를 보완하면서 확장시켜준다 . 다시 게임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보면 게임도 이러한 위치에서 또 다른 보완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게임의 가장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 상호작용 ’ 인데 퍼즐을 풀 때 포스로 물체를 당기고 미는 방식도 있고 그냥 캐릭터한데 말을 걸었을 때 , 해당 캐릭터가 대답을 하는 방식도 상호작용이라 할 수 있다 . 이는 간단하지만 영화와 소설과는 다르게 내가 직접 말을 걸어서 이 캐릭터가 대답을 해주고 직접 알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맵 탐사도 같다 . 우리는 이 모르는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 아니라 그 행성의 사는 생물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 , 메아리로 포스 안에 남아있는 것을 감지하는 ‘ 칼 ’ 의 능력으로 이전에 해당 메아리에 있던 사건을 알아볼 수 있다 . 이는 플레이어가 직접 행하는 과정으로 또 다른 몰입을 준다 .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 루크 스카이워커가 제국에 맞서 싸워 은하계에 평화를 가져왔다 .” 같은 진술이지만 게임에서는 “ 나 ” 가 사용될 수 있다 . “ 내가 스타워즈 제다이 시리즈에서 칼 케스티스가 되어 남은 제다이를 찾아 학살하고 다니는 인퀴지터와 싸워 이겼다 .“ 또는 “ 나는 험난한 행성인 다쏘미르를 탐사하였다 .” 와 같은 자연스러운 진술이 게임에서는 가능하다 . 이러한 차별성과 강점이 소설 , 영화 등과 비슷하지만 다른 위치를 가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 게임은 여러 요소가 합쳐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디지털 게임만이 개척할 수 있는 방향성과 매력이 있는 것이다 . 이렇게 IP 가 개척되고 , 우리가 IP 에 애정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며 , IP 가 다양하게 확장되는 것에 대해 얘기해보았다 . 이번에 얘기한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와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를 플레이해보며 , 스타워즈라는 새로운 문화에 발을 내딛는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 당신이 크리에이터라면 새로운 IP 를 개척하는 데에 영감을 얻을 지도 모르며 , 소비자로서 새롭게 접한 IP 에 애정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며 , 어떤 방식이든 당신의 세상에 또 하나의 큰 확장이 될 것이다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대학생) 이규연 어릴 적 프로그래밍을 배운 후, 여러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게임 기획자(Game designer)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며 게임업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음과 동시에 게임 관련 전시, 축제, 대회(E-Sport)를 즐겨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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