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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 Back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08 GG Vol. 22. 10. 10.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10%의 게임 중 단 1% 만이 이른바 성공한 게임의 반열에 들어간다 - 개인 창작이나 인디 게임을 제외하고도 그렇다는 가정이다. 「피, 땀, 리셋」 (원제: Press Reset: Ruin and Recovery in the Video Game Industry)는 바늘구멍 같은 확률을 뚫고 성공한 게임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황망하게 망한 게임 개발 스튜디오와 이후에 남은 개발자들의 운명 을 다룬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게임 제작 스튜디오는 세상에 빛을 보지도 못한 38 스튜디오(38 Studios)의 프로젝트 코페르니쿠스(Project Copernicus)부터, 에픽 미키(Epic Mickey)나, 데드 스페이스(Dead Space) 시리즈 처럼 상업, 비평 양쪽의 매우 준수한 성적을 낸 작품을 만든 스튜디오에 관한 사례부터, 다수의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 수상을 이뤄내고 1,10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한 바이오 쇼크 인피니트(Bioshock Infinite)를 만들고도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스튜디오, 이레셔널 게임즈(Irrational Games)의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처음 다뤄지는 비디오 게임 디자인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워렌 스펙터(Warren Spector)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산업의 이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는 속편 제작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성공한 작품을 완성해냈고 모 회사인 디즈니 인터렉티브 스튜디오(Disney Interactive Studios)의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성과를 인정 받는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 산업의 미래를 잘못 예단한 여타 비전문적인 경영진에 의해 결국 자신의 스튜디오를 폐쇄당한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던 2013년의 전후는 모바일 게임의 중흥으로 인해 비디오 게임 콘솔(Video Game Console) 플랫폼 산업은 급격히 쇠퇴할 것이라는 여러 경제 분석가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시기였다. 워렌 스펙터의 정션 포인트 스튜디오(Junction Point Studios)는 콘솔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스튜디오였고, 모바일 게임 산업으로 전환을 결정한 경영진은 “가망이 없는 콘솔 게임 시장을 노리고 게임을 만드는 스튜디오”에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후 콘솔 게임 시장은 모바일 게임 시장과 함께 여전히 큰 폭으로 성장 중이다. 그의 사례는 비디오 게임 업계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비디오 게임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기업이 야심차게 비디오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성과가 나오기 직전에 사업을 철수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고, 게임 제작 스튜디오로 성장한 몇몇 국내 스튜디오들은 과거 이와 비슷한 악명 높은 허들 시스템으로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이와 관련한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이른바 “사업상의 결정”으로 인해 회사에서 성실히 근무하던 개발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후의 에피소드들은 아무리 비디오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좀 체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디렉터 한 명이 퇴사했을 뿐임에도 그의 밑에서 같이 게임을 만들어낸 훌륭한 팀을 단번에 박살내 버려버린 이야기(이레셔널 게임즈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매번 전작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지만, 경영진이 목표로 하는 “전 보다 매우 뛰어난 성공”을 거두지 못해 결국 버려진 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비서럴 게임즈 -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 마치 제조 공장의 조립 라인처럼 개발자들을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 옮기다 개발 역량과 좋은 조직 문화를 모두 소진하고 자연스럽게 소멸된 스튜디오(2K 마린 - 더 뷰로: 기밀 해제된 엑스컴)에 대한 이야기는 그나마 순한 맛에 해당한다. 매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커트 실링(Curt Schilling) 개인 재력과, 주 정부의 투자 약속을 바탕으로 비디오 게임 산업 불모지인 지역에 스튜디오와 대규모 개발 인력을 이전한 38 스튜디오. 그리고 38 스튜디오의 자회사 빅 휴즈 게임즈(Big Huge Games)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도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여기에 희망과 게임 개발의 꿈을 걸었던 개발자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게임 개발자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스튜디오의 폐쇄 이후 하루 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개발자들의 운명은 매우 끔찍했다. 이주 지원 명목으로 회사가 받은 거액 대출은 개발자 개인이 값아가야 할 몫으로 남아버렸는데, 해당 지역에서는 다시 취업할 수 있는 비디오 게임 회사가 없다. 겨우겨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지역에 일자리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정리해고의 공포를 안고 일을 해야만 한다. 실제로 빅 휴즈 게임즈의 개발자들은 이후 에픽 게임즈(Epic Games)의 새로운 스튜디오에 합류했지만, 에픽은 고작 8개월만에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이 스튜디오를 폐쇄해 버린다. 한번도 극복하기 힘든 일을 일년 사이에 두번이나 겪게 된 개발자들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차마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 책은 이해할 수 없는 스튜디오 폐쇄와, 이로 인해 재기 불능의 피해를 입고 업계를 영원히 떠나버린 개발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생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듯, 여기에도 살아남는데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인디 게임 개발로 진로를 바꿔 인생의 벼랑 끝에서 겨우 빠져나온 이야기. 북미에 비해 노동권 및 복지에 대한 보장이 잘 되어 있는 유럽으로 이주해 안정적인 개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개발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다. 이 책의 서문에는 션 맥러플린(Sean McLaughlin)이라는 개발자의 인터뷰가 나온다. “그리고 저는 이제 책상에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아요.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의 짐만 가져다 두죠.” 이 이야기에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다면, 당신은 이미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게임 개발자이거나 산전수전 다 겪고 뛰쳐나온 옛 종사자일 것이다 - 나 또한 여러 업체들을 옮겨 다니면서 개인 짐을 많이 가져다 두지 않는다. 가장 최근의 퇴사에서는 오직 백팩 하나 분량의 짐만 가볍게 챙겼을 뿐이다. 크런치로 불리우는 강도 높은 근무 환경. 프로젝트에 따라 얼마든지 직장을 잃어버리기 수월한, 다른 산업과 비교되는 노동 유연성은 국내의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피, 땀, 리셋」에서 나오는 예시처럼 하루 아침에 스튜디오가 폐쇄되고 직장을 잃어버리는 사례에 개발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이에 대한 응답을 받는 사례가 점차 나오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성과는 아니다. 다른 산업계에서 이어진 뿌리깊은 노동 운동은 2000년대 초 IT 노조의 출범과 이후 2013년 게임개발자연대 등의 단체에서 비디오 게임 산업 종사자들에 대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게임 업계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게임 개발자들 스스로도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8년부터 넥슨, 스마일게이트, 웹젠 등의 대형 게임 회사들에 개별 노조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오히려 북미의 비디오 게임 산업 보다 더 빠르게 발전하는 모양새이다. 미국의 경우 2022년이 되어서야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on Blizzard)의 자회사인 레이븐 소프트웨어(Raven Software)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는 미국 내 상장 비디오 게임 업체 중 최초의 일이다. 혹자는 이러한 일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게임이 망했으면, 당연히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피, 땀, 리셋」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거의 대부분 “성공했으나 망한” 경우이고, 실패 역시 개발자가 아닌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 결정”에 기인한 경우가 절대 다수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개발진에게 잘못된 판단에 기반한 결정을 강요한 경영진들은 개인적인 큰 손실을 입거나, 여타 개발자처럼 빚에 허덕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결과를 두고 “게임이 망했으니 책임을 지라”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혹은 얼마나 불평등한 이야기인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피, 땀, 리셋」 같은 책이 세상에 소개되면서, 비디오 게임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알리고, 이를 통해 끔찍한 게임 개발 노동 환경에 대한 문제가 느리지만 점차 개선되고 있다. 비디오 게임 제작은 충분히 어렵다. 그리고 그 성공은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게임을 만드는 것 이외의 문제로 힘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 개발자) 임현호 과거의 게임 개발 영웅들의 모험담을 쫓으며 게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임 개발자. 매우 긴 기간 동안 대표, 기획자, 인디 게임 개발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의 여러 타이틀을 달고 살았으나 게이머이자 게임 개발자로 불리길 희망하는 소시민.

  • 프레임의 너머를 위한 프레이밍 : 「The Star Named EOS 별을 향한 여정」

    C. 티 응위옌은 ‘게임은 여러 행위성 형식을 저장하고 주고받기 위한 하나의 매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게임이란 하나의 도전적 고투를 통해 일시적 몰입을 발생시키는 기입적 매체이며, 그 기입의 중심에는 특정한 행위agency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티 응위옌이 다루는 ‘게임’이라는 범주는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행위’의 범주를 조금 복잡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 Back 프레임의 너머를 위한 프레이밍 : 「The Star Named EOS 별을 향한 여정」 22 GG Vol. 25. 2. 10. C. 티 응위옌은 ‘게임은 여러 행위성 형식을 저장하고 주고받기 위한 하나의 매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게임이란 하나의 도전적 고투를 통해 일시적 몰입을 발생시키는 기입적 매체이며, 그 기입의 중심에는 특정한 행위agency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티 응위옌이 다루는 ‘게임’이라는 범주는 비디오 게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 ‘행위’의 범주를 조금 복잡하게 바라볼 필요는 있다. 요컨대 프라스카의 주장대로 비디오 게임은 현실에 대한 해석체를 매개로 하는 2차성을 지닌다. 따라서 ‘현실’의 게임 [1] 과 달리, 비디오 게임에서의 행위는 어느 정도 중첩된 경향을 가진다. 이를테면 스포츠인 ‘양궁’에서 활을 쏘는 것은 물리적인 행위일테지만, 「마리오와 소닉 올림픽」 시리즈의 양궁에서는 게임적 메커니즘을 위해 해석된 행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듯 비디오 게임이 저장하는 ‘행위’는 2차적 매개의 결과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거리감을 전제할 때, ‘창작의 행위들’은 대개 게임 메커니즘에 안치시키기에 곤란한 경향을 지닌다. 말하자면 2차적 매개가 가지는 표현의 유사성을 발생시킬 수는 있겠으나, 원본과의 괴리를 지우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파이널 판타지 6」에 등장하는 캐릭터 ‘리름’의 ‘그리다’ [2] 의 작동 원리는 ‘싸우다’와 별 차이가 없다. 그저 전투 중 해당 이름을 가진 커맨드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싸우다’가 그 원본성에 해당하는 공격적 행동과 상당히 밀접하다고 느끼는 데에 반해 ‘그리다’에서는 그러한 작동이 정지한다. 물론 이 커맨드의 목적이 적을 공격한다는, 즉 그림 그리기의 본래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영향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QTE의 방식으로 그래피티를 그리는 「젯 셋 라디오」의 경우는 어떠한가? 물론 앞선 리름의 사례보다야 조금 더 ‘그림을 그리는’ 감각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몇 번의 간단한 조작을 통해 복잡한 결과물이 순식간에 생성되는 이 현상이 현실의 복잡한 ‘그리기’로 즉각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런 면은 흥미로운데, 본 게임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버튼을 눌러 점프 후 난간을 타고 그라이딩’ 역시도 현실에 비해 꽤나 단조로운 조작을 요하나 그래피티 그리기 만큼이나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창작 행위’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근원적 인식이 작동한다. 창작의 행위에는 창작자의 자의적 목적성과 행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기를 휘두르거나 점프해 난간을 타고드는 행위들과는 다른 층위를 이룬다. 예를 들어, 무기를 휘두르는 행위는 명백한 목적(적들을 쓰러뜨림)과 행위의 효율성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버튼을 눌러 해당 행위가 작동할 때, 우리는 그것이 더 의도적이고 자유로울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는다. 그에 반해 창작의 행위에는 창작자(를 조작하는 나)의 자의적 목적성과 그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더 넓은 범주의 자유가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정된 무브셋moveset으로 재현된 ‘그리기’는 우리의 현실과 지나치게 거리가 있다. 원본의 감각을 시뮬레이트하기에는 너무 먼 곳에 위치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엔 딜레마가 있다. 비디오 게임이 창작자의 자의적 목적성과 행위의 자유를 담지하는 경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메커니즘과 분리되어 작용되곤 한다. 즉, 루두스rudus가 아니라 파이디아paidea의 형국을 띄는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는 게임 「파스파투」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플레이어는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지만, ‘무엇을 그렸나’가 게임의 진행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 게임에서 복잡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규칙이 규정하는 목적과 무관하다. 이는 플레이어의 자의적 목적을 위한 행위로 명백히 파이디아적이다. 무엇을 그려도 상관없다면 이것은 그저 창작의 툴로 전용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는 자유로운 건축(또는 조형)을 지원하는 「마인 크래프트」 역시 마찬가지다. 1x1x1의 입방체를 이용해 효율적인 보관 체계만을 이루던, 실제 사이즈의 건담을 만들던, 프로그래밍을 통해 작동하는 계산기를 만들던 그것은 게임이 제공하는 목적 지향의 수행과는 무관하다.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에서 걸어다니는 거대로봇을 만들 수야 있겠지만, RTS에서 건물 배치를 ‘예쁘게’ 배치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모두 게임의 목적과 크게 조응하지 않는 그저 플레이어의 자의적 욕망에 의한 생산물일 뿐이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게임이라는 툴로 만들어진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창작물이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특히 내러티브 비디오 게임에서 창작의 행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복잡한 세팅을 전제한다. 플레이어는 의도와 행위에 어느정도 자의성을 가지고 있되, 그 결과물 중 특별한 형태가 목적을 위해 선별되어야 한다. 루카스 아츠의 「룸」이나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에서의 연주 메커니즘 또는 「포켓몬 스냅」 시리즈의 촬영 메커니즘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물론 이들 역시 고정적인 대상, 특정한 마법의 주문이나 피사체로 수렴되어 버리는 만큼 기능적인 인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 「룸」은 특별한 음계의 조합을 통해 마법을 시전한다.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 「The Star Named EOS 별을 쫓는 여정」은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Silver Lining Studio의 전작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이하 BTF)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창작 행위를 서사 추동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에 더해, 방탈출의 메커니즘을 이러한 창작을 위한 중간 단계로 제시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의 디렉터 윌슨 옌Wilson Yen은 PocketGamers.biz와의 인터뷰에서 본 게임의 특징 중 하나를 ‘페인팅 메커니즘’을 든다. [3] 그만큼 ‘그리기’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플레이어는 특정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 그림을 완성해야 하나, 챕터의 시작 시에는 물감의 종류가 부족한 상태다. 물감의 수색이 방탈출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지며, 이 과정에 마주하 시각적 정보들이 서사의 빈 부분을 보충하는 식이다. 퍼즐을 풀고 물감을 획득하면 캔버스에 앉아 물감을 직접 발라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여기서 이 게임의 특징이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이미 스케치가 되어 있는 캔버스에 물감을 직접 찍어 ‘발라야’하는 것이다. PC라면 마우스 포인터로, 콘솔이라면 아날로그 스틱으로, 모바일이라면 터치를 이용해 내부에 색을 채워넣어야 한다. 「BTF」는 이 ‘칠하기’의 과정을 적극적인 태도로 다룬다. 즉 퍼즐이 완료되고 물감이 수집되는 순간에 자동으로(또는 컷씬을 통해) 완성되거나, 포인트 앤 클릭이나 QTE 같은 매개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직접, 규정된 만큼의 면을, 자신의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명확한 선택은 「BTF」라는 게임의 서사를 온건히 체감하기 위해선 ‘창작의 행위’ 역시 감각적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리기의 행위’는 게임 디자이너가 의식적으로 배치한 중요한 메커니즘인 것이다. 「BTF」는 ‘창작의 행위’를 그 감각의 핵심에 둔다 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퍼즐을 거치고, 스케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캔버스에 포인터를 세심히 점점 채워나간다. 이 과정은 퍼즐을 해결하며 마주했던 방의 풍경들, 사진이나 그림 또는 텍스트 정보들을 다시금 상기하고 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게임의 ‘프레임 뒤에Behind the Frame’있는 진실을 탐구할 수 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이 그러한 진실의 편린과 맞닿아 하나의 서사적 세트를 이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흥미로워야 할 과정에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다. 이 ‘창작의 행위’는 시뮬레이트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쉽게 말해 「BTF」의 페인팅 메커니즘은 그저 ‘색을 찍어 바르는’ 것에 국한된다. 특정한 위치에 올바른 색을 적당히 발라만 놓으면 ‘완성된’ 그림으로 즉시 치환된다. 플레이어는 명암이나 텍스쳐를 위해 물감을 덧대 바를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제시된 면을 가득 채울 필요도 없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그린 그림’과 ‘서사의 추동을 위해 필요한 그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그저 후자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흉내내기’에 가깝다. * 「Behind the Frame :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플레이어의 불완전한 그리기를 완벽한 그리기로 순식간에 바꿔친다. 이 불일치는 「BTF」가 요구하는 과정상의 몰입을 일정량 끊어버린다. 내가 ‘적당히’ 바른 물감이 그럴싸한 그림으로 변화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게임이 제시하는 서사적 추동으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내가 그린 그림’이 진실의 편린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미리 그려둔 그림’이 진실의 편린으로 제시된다. 플레이어인 자신은 필요의 과정으로 그것을 (적당히 닮은 정도로) 제시한 것 뿐이다. 물론 비디오 게임의 서사가 모두 경험적 몰입의 과정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작동을 위해 삽입된 페인팅 메커니즘이 그 목적을 배신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The Star Named EOS : 별을 쫓는 여정」 「The Star Named EOS : 별을 쫓는 여정」(이하 EOS)에서 창작의 행위는 그림 그리기가 아닌 사진찍기다. 이런 메커니즘의 선택 대해 프로듀서인 웨이첸 린의 인터뷰가 있다.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의) 게임 프로듀서 제레미(창)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진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된 사진을 받는 순간이 ‘추억’과 ‘인화’를 연결시켜 주었다는 말을 따라, 우리 프로젝트 테마의 중심도 사진이 되었습니다.[Silver Lining Studio] game producer Jeremy [Chang] was deeply influenced by her grandfather during her childhood, sparking a strong interest in photography. (...) The moment of developing film and receiving the printed photos connected 'memories' with 'photographic prints' for her, becoming the theme of our project centered around photography.” [4] 사실상 창작의 행위가 추억과 연결된다는 지점에서 전작인 「BTF」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서사의 형태나 퍼즐의 경향을 제외하면 「EOS」는 「BTF」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저 물감 찾기가 사진의 피사체 찾기로 변경된 것 뿐인데, 어차피 ‘창작물의 완성을 위한 재료 수색’이라는 사실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EOS」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진을 직접 찍도록 만드는 것은 「BTF」에서의 ‘그리기’와 동일한 목적-퍼즐의 과정에서 획득한 서사의 편린들을 묶어 하나의 진실로 재구성하기 위해 부여되는 여유의 시간-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 「The Star Named EOS : 별을 쫓는 여정」에서 플레이어는 어머니의 행적을 쫓으며 어머니의 사진과 유사한 대상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간에는 다른 체감이 존재한다. 「EOS」의 ‘사진 찍기’ 역시 그 자체로 기억의 원본은 되지 않는다. 이 게임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 자체가 원본이 되기 보다는 이미 원본으로 제시되는 ‘어머니의 사진’의 재현물이다. 주인공은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어머니가 찍은 사진과 ‘거의 유사한’ 사진을 찍으려 한다. 따라서 결과물은 원본이 되는 ‘어머니의 사진’과 그 재현물인 ‘주인공(과 플레이어)의 사진’으로 양분된다. 그럼에도 이 체감은 전적으로 「BTF」의 그것과는 달리 작동하는데, 「EOS」에서는 주인공과 플레이어의 재현물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핵심은 분리가 발생하는 위치다. 「BTF」에서는 플레이어의 그림과 주인공의 그림이 분리되며, 따라서 게임의 내부에 존치되는 것은 주인공의 그림으로 한정된다. 플레이어의 그림은 게임의 내부에 머무르지 않는 일시적인 환영이자 ‘흉내’였을 뿐이다. 그에 반해 「EOS」의 사진은 게임의 내부에 머무르며 그것이 ‘재현’의 위치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장치가 된다. 특히 「EOS」의 ‘앨범’은 이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플레이어는 챕터의 클리어를 위한 사진이 뿐만 아니라 스테이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게임 내부의 앨범에 남는다. 이를 통해 진행을 위한 정확한 재현물과 플레이어의 자의적/자유로운 창작물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것이 「EOS」는 「BTF」가 머뭇거렸던 지점을 뛰어넘도록 돕는다. 이 선택을 통해 창작의 행위를 게임의 메커니즘과 조금 더 확고히 조응시키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 플레이어는 자유로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 결과물은 온건히 앨범에 남는다. 부자유의 가능성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의 이 두 게임의 목적은 서사의 내부로 플레이어를 끌어들여 ‘자신의 현실처럼’ 체험시키는 것이다 [5] . 이 때 창작의 행위는 서사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인식하기 위한 핵심적 행위로 작동한다. 이러한 전제를 위해 게임 메커니즘은 플레이어/캐릭터 간 행위가 분리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창작의 행위’가 내러티브 비디오 게임의 내부에서 온건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 자신의 ‘창작 행위’가 서사의 추동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의적이고 자유로운 창작 행위가 반복할 수 있다면 ‘창작의 행위’에 대한 체감의 정도는 증가한다. 흥미로운 것은 「BTF」와 「EOS」 간의 결과적인 차이를 유발한 것은 그 자유로움이 아니라 제약이라는 점에 있다. 결국 「EOS」가 「BTF」의 한계를 돌파한 결정적 요인은 ‘회화’의 방식을 ‘사진’의 방식으로 전환한 부분에 있다. 이 때 플레이어의 조작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것’을 산출할 수 있는 그리기의 행위는 오히려 내적 추동을 위한 ‘정확한 상’으로부터 상당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이끌기 쉽다. 「BTF」는 이러한 미끄러짐을 ‘자동적 원본 제시’라는 방식으로 돌파하려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분리라는 한계지점을 낳은 셈이다. 「EOS」가 채택한 사진이라는 방식은 (게임이 재현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회화의 행위성에 비해 가능성의 폭은 적을지라도, 그것이 필요로 하는 최종적인 상에는 언제나 근접한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비디오 게임이 서사 추동의 메커니즘으로 담지할 수 있는 창작의 행위는 이러한 고리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루두스의 게임은 ’완전히 개방된’ 자유로운 창작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논의를 언제나의 그 테마, 비디오 게임에서의 자유라는 것과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한 자유가 그럴싸한 아름다움을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제시된 한계가 ‘통합적인 상으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주는가? 완전한 창작의 행위를 담지하는 루두스는 기술적 한계지점인가, 아니면 불필요의 영역인가? 실버 라이닝 스튜디오의 게임들은 어쩌면 의도치 않게 이러한 질문의 대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 이를테면 스포츠, 도박, 테이블 게임 등. [2] 「파이널 판타지 6」의 캐릭터 중 하나인 ‘리름’의 특수 커맨드. 전투 중 적 캐릭터의 모습을 그려서 해당 캐릭터가 가진 능력을 하나 발동시킬 수 있다. [3] “비하인드 더 프레임의 독특한 두 가지 요소는 페인팅 메커니즘과 2D 360도 파노라마입니다. 전자를 통해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모든 작품을 직접 칠하게 됩니다.Two things we found that make Behind the Frame unique are the painting mechanism and the 2D 360-degree panorama. In the former, we let the players paint whatever the main character paints.” ( https://www.pocketgamer.biz/importance-storytelling-silver-lining-studio/ ) [4] gameradar.com ‘The Star Named EOS is a beautiful, deliberate puzzle game where most everything is "a meaningful clue"’ ( https://www.gamesradar.com/games/puzzle/the-star-named-eos-is-a-beautiful-deliberate-puzzle-game-where-most-everything-is-a-meaningful-clue/ ) [5] 실제로 윌슨 옌은 그러한 목적이 있다는 의미의 이야기를 한 바가 있다. “이 모든 결정은 플레이어가 마치 스토리를 체험하는 것처럼 몰입감 있는 게임 경험을 제공하려는 매우 단순한 이유에 기반했습니다.We made all these decisions based on a very simple reason, to provide an even more immersive gaming experience as if the players live the story.” ( https://www.pocketgamer.biz/importance-storytelling-silver-lining-studio/ )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필권 정필권 농부이자 제빵사이자 바리스타. 현재는 게임 기자로 글을 쓴 지 8년차 입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다키스트 던전>을 <다키스트 던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발진이 어째서 전작과 후속작의 틀을 바꾸고자 했는지. 어떤 요소들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아야만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무엇이 다키스트 던전을 각별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버튼 읽기 매너리즘을 넘어서는 전통의 긍지: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잘 짜인 레벨 디자인. 플랫포밍의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시리즈는 1985년 첫 작품이 등장한 이후에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40년 정도의 시간을 거치며 시리즈는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인 플레이 양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달리고. 뛰고. 밟으면서 코스를 돌파한다는 핵심적인 요소다. 버튼 읽기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서-퀘이크 리마스터 최근 다수의 리마스터 타이틀이 얼굴을 비추고 있다. 과거 발매되었던 게임의 비주얼이나 시스템을 조정해 다시금 선보이는 리마스터 / 리메이크들이 예다. ROM 혹은 디스크 등의 형태를 넘어서 디지털로 복각되고 라이브 서비스를 진행하는 MMORPG 또한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과거의 빌드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사례도 여럿이다. 버튼 읽기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버튼 읽기 하이파이러시: 같은 뿌리의 리듬과 액션 사이에서 리듬은 사전적 정의에서 ‘일정한 박자나 규칙에 따라 장단과 강약이 반복될 때의 규칙적인 음의 흐름’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에 있다. 박자에 따라서 음이 일정하게 반복될 때. 음의 덩어리를 리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게임에서 리듬 게임이라 부르는 장르 자체는 연주하는 행위. 혹은 건반을 정확한 타이밍에 수행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리듬 그 자체보다는 음악 연주를 모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므로 날아오는 노트를 처리하는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이다 요르겐센

    이다 요르겐센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IT 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에서 게임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젠더 재현, 게임 문화, 매체로서의 게임 등과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서던 덴마크 대학(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에서 박사후 과정 중에 있다. 이다 요르겐센 이다 요르겐센 이다 요르겐센은 덴마크의 코펜하겐 IT 대학(IT University of Copenhagen)에서 게임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젠더 재현, 게임 문화, 매체로서의 게임 등과 관련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서던 덴마크 대학(the 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에서 박사후 과정 중에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보다 책임감 있는 재현을 실천하는 게임을 향해 어떤 매체에 대한 담론은 해당 매체가 겨냥하는 수용자 또는 이용자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에는 어떤 의도들이 담겨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를 드러낸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관련 공공 담론에 있어 오랫동안 게임은 - 거칠게 말해 - 번쩍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오락에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십대 소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왔다. 버튼 읽기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의 게임 구독 서비스 스태디아는 실패했고, 엑스박스 게임패스는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많은 게임팬들로부터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가운데, 유럽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서비스가 미래 시장성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오늘날 게임 시장에서 하드코어 게이머는 소수다. 유럽에서 게임은 나이를 뛰어넘어 매우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있는 활동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60세 연령대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많은 수가 아마도 휴대폰으로 무료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그친다 할지라도, 따라서 현 시점에 클라우드 게임이 그리 매력적인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독 기반 게임의 부상은 그리 먼 시점의 일이 아닐 수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단위안, 但愿 단위안, 但愿 쓰촨사범대학(四川师范大学) 문학원 문예미학 박사. Read More 버튼 읽기 <바이페즈(双相)>와 게임의 신체화 2022년 11월 중순, 랩시드(西山居SEED实验室, 시산쥐SEED실험실)에서 인큐베이팅한 중국산 공익게임 <바이페즈>가 정식 출시됨으로써, 국내 최초 게임 형식으로 양극성 장애[역주: 조울증]를 다룬 게임이 됐다.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 정신질환인 양극성 장애는 전 세계에 약 6천만 명의 환자가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장준수

    시너지 없는 '토목공학'과 '국어국문학' 스킬트리를 타고 근데 이제 2차 전직을 '영상 제작'으로 선택해버린...혼종 (똥망캐까진 아무튼 아님). 게임 방송국 OGN 포함, 10년간의 방송국 PD생활을 거치고 이제는 퇴사 후 프리랜서 PD로 인생 '가챠'와 '덱빌딩' 사이에서 서커스 중. 장준수 장준수 시너지 없는 '토목공학'과 '국어국문학' 스킬트리를 타고 근데 이제 2차 전직을 '영상 제작'으로 선택해버린...혼종 (똥망캐까진 아무튼 아님). 게임 방송국 OGN 포함, 10년간의 방송국 PD생활을 거치고 이제는 퇴사 후 프리랜서 PD로 인생 '가챠'와 '덱빌딩' 사이에서 서커스 중. Read More 버튼 읽기 영상의 환상이 사라진 지금, 숙제를 남긴 2023년의 두 유비식 오픈 월드 2023년에 선보였던 대표적인 유비식 오픈 월드 게임인 <호그와트 레거시>와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 모두, 다음 시리즈에서는 게임의 시스템과 세계관이 서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잘 융합된 충격적인 작품으로 돌아오길 응원해 본다.

  •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칫 우리는 게임과 게이밍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을 고정된 무언가로 잠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이 대상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다양한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이머라고 부르는 집단은 결코 과거의 그들이 고정되지 않은 채 새로 들어오는 이와 나가는 이로 진폭을 만들며, 그 개개인 또한 시간과 환경의 변화 속에 각자의 이유로 변해간다. < Back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은 어디로 갔을까 14 GG Vol. 23. 10. 10. 한때 대한민국을 휘어잡던, ‘한국인의 민속놀이’라는 별칭이 너무도 잘 어울렸던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다른 의미로서의 민속놀이가 되었다. 모든 한국인이 할 줄 안다고 생각하기에 붙었던 민속놀이라는 이름은 이제 ‘틀딱들이나 하는 게임’이라는 의미로 변해가는 중이다. 새롭게 태어나 온라인게임에 진입하는 청소년들은 더 이상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지 않고, 혹시라도 중년들이 ‘라떼는 말이야~’로 ‘스타크래프트’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또 한켠에서 ‘스타크래프트’는 여전히 성업중이다. 출시된 지 20여 년이 지난 게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타크래프트’는 여전히 PC방 점유율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적지 않은 유튜버들의 콘텐츠 기반이 된다. 심지어는 공식리그 종료 후 다양한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자체적인 리그가 자생할 정도니 그 생명력은 명실상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게임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흘러간 옛 게임이 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로부터는 계속 플레이되는, ‘스타크래프트’의 오늘이 보여주는 독특한 모습은 과거 ‘스타크래프트’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90-00년대 기준 2-30대가 중년이 되면서 겪게 된 변화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지상파 TV 프로그램에서 ‘스타크래프트’ 성대모사를 해도 전국민이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사실상 모든 젊은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 엮여 있었던 어떤 시기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한국 게임 역사 속에서 가장 대중적인 게임이었을 영광의 순간을 만들었던, 그 많던 스타크래프트 플레이어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게임과학연구원 게임과사람 센터는 2023년 중년 게이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와 같은 질문을 마주했다. 2020년대 기준으로 중년이 된 약 30여명의 게이머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듣게 된, 그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떠나게 된 이유를 정리해 본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 오래된 게임이라서와 같은 당연한 이야기 이상으로 우리를 둘러싼 게이밍 환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라이트게이머는 로컬 플레이를 즐겼고, 그 로컬이 붕괴되어 떠났다 우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들을 간단히 짚고 지나가보자. 당연히도 당시 10대, 20대였던 플레이어들은 신체적 노화와 여가시간의 변화를 맞이하며 ‘스타크래프트’로부터 떠났다. 사실상 ‘스타크래프트’의 왕좌를 물려받았다고 평가받는 ‘리그 오브 레전드’로 왕년의 게이머들이 넘어가지 못한 이유도 대체로 여기에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끝난 것 같고, 다른 게임은 뭐가 있나 보는데 새롭게 등장한 게임은 ‘스타크래프트’보다 복잡해 보이고, 멀티플레이 대전에서 딱히 이기기도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한 중년들은 아예 온라인 대전 게임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신체 노화(이는 실제로 생물학적 노화보다는 ‘나는 늙었다’라는 자기인지가 더 중요한 개념으로 쓰인다) 속에서도 ‘스타크래프트’라는 콘텐츠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은 조금 색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일명 ‘컴까기’로의 전향이다. "스타의 최대 장점은 1대 7 pc 게임이 된다는 거예요. 혼자서 게임을 하기 좋죠. 치트키 써가면서 신나게 두들겨 패고 막 그런 것들이 되잖아요. 진짜 스트레스 해소인데, 규칙이랑 하는 법은 다 아니까요. (중략) 스타는 단축키가 몇 개 없어서 그나마 쉬워요." (C01) 인터뷰대상자 C01은 가볍게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게이머였다. 중년이 된 이후에도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지만, 과거만큼의 연습시간도 동체시력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배틀넷 대전을 포기했다. 그는 집 PC에 설치된 ‘스타크래프트’로 1:7 AI대전(일명 컴까기)을 즐기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멀티에서 승패를 가리는 대전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적당히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방식으로서의 ‘컴까기’는 그에게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배우는 수고로움까지도 회피할 수 있는 적절한 여가로 남는다. C01의 인터뷰가 중요한 것은 그가 ‘스타크래프트’ 마니아로 분류되는 게이머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2000년대 ‘스타크래프트’ 붐을 형성한 인구의 대다수는 라이트 게이머였다. 커뮤니티에 모여 전략을 연구하고 e스포츠 중계를 챙겨보며 빌드를 연구하고 수련하는 하드코어 이용자보다 대중적 붐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는 라이트게이머들의 머릿수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니아들은 여전히 유튜브와 배틀넷에 남지만, 이들은 한 번의 열풍이 지나가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나간 이유는 그들이 ‘스타크래프트’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 콘텐츠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친구들이랑 다같이 몰려다니는 재미였죠. 혼자 있으면 굳이 pc방에 가진 않았을 것 같아요." (C08) "스타를 하더라도 과거만큼 당연히 열심히 하지는 않는 것 같고 가끔씩 물어보면 그래서 같이 만나서 게임을 하기가 쉽지는 사실은 않은 것 같아요 ." (C06) 라이트게이머의 ‘스타크래프트’는 게임 그 자체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교류의 수단으로서가 더 강했다. 배틀넷에서 익명의 상대와 1:1로 실력을 겨루기보다 이들의 플레이는 주로 다같이 모여 PC방에 가서 2:2, 3:3의 대전을 벌이는 형태였다. 간혹 모인 친구들의 숫자가 홀수가 나오면 함께 팀을 짜서 배틀넷에 들어가거나, 이른바 ‘깍두기’를 껴주는 방식으로 플레이가 진행되었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온라인 멀티플레이라고 부르는 방식과는 구분된다 . ‘로컬 플레이’라고 이름붙여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기능을 사용하지만, 라이트게이머들의 플레이는 가급적 오프라인에서 이미 관계가 형성된 이들과 함께 즐기는 형태로 귀결되었다. 이들은 익명의 상대와 승부를 벌이는 것 자체에는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부담스러움을 느꼈고, 승패와 무관하게 함께 게임하고 노는 일을 중시했다. 올해 초에 국내에 번역된 C. T. 응우옌의 <행위성의 예술>에는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응우옌은 플레이를 그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성취형 플레이와 분투형 플레이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면, 성취형 플레이란 게임이 텍스트 안에서 제시하는 규칙으로서의 목표가 플레이어의 목적과 일치하는 경우이고, 분투형 플레이는 그 목표와 목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다. 배틀넷 기반의 온라인 익명 매치 멀티플레이가 성취형 플레이라면, PC방을 중심으로 오프라인 지인들끼리 모여 벌이는 ‘스타크래프트’ 대결은 분투형 플레이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 붐의 중심을 이뤘던 라이트게이머들은 자신들이 ‘스타크래프트’를 떠난 이유로 더 이상 게임을 같이 할 사람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게임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적지 않은 이들이 배틀넷 상에 존재하지만, 애초에 배틀넷 익명 대전이 아닌 로컬 플레이를 즐겼던 이들에게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게임하던 로컬 커뮤니티 – 학교, 동네, 회사 등 – 가 해체되면서 더 이상 게임을 같이 할 사람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스타크래프트’ 라이트게이머들은 결국 나이가 들면서 생활하는 커뮤니티가 변화하며 ‘스타크래프트’를 왕년의 놀이로 추억하게 된 것이다. PC는 점점 더 보편 디바이스가 아닌 환경으로 가고 있다 2000년대의 라이트게이머들이 떠난 자리는 새롭게 자라난 세대가 채우면 될 일이다 .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로컬 플레이는 ‘리그 오브 레전드’가 차지했으니 ‘스타크래프트’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여기에 더해 새롭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스타크래프트’는 다소 먼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PC라는 ‘스타크래프트’ 구동 플랫폼의 위상이 맞은 변화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리그 오브 레전드’도 곧 맞이하게 될 변화일 것이다. “집에 PC가 있으면 집에서도 (스타를)하죠. 밤에 집에서 혼자 배틀넷 들어가서도 멀티 했어요.” (C03) “이것도 사실은 좀 불법 영역이긴 한데... 군대 내의 공식 PC방 말고도 업무용 PC에 스타를 깔아서 다른 사무실하고 연결해서 플레이하기도 했었어요.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C06) ‘스타크래프트’는 기본적으로 PC에서 구동되는 게임이다. PC기반의 RTS게임은 키보드 + 마우스라는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고, ‘스타크래프트’의 조작은 실제로 마우스 없이는 플레이가 매우 어려운 형태로 디자인되어 있다. 초심자가 새로운 게임 하나를 배우기 위해서는 의외로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대한 적응이 중요하다. 처음 3차원 공간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은 전후좌우로의 이동감각조차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스틱을 사용해 복잡한 커맨드를 넣는 대전격투 게임은 그 숙련도 자체가 문제가 되어 뉴비 유입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기능한다. ‘스타크래프트’의 키보드 + 마우스 컨트롤은 언뜻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가 키보드 + 마우스라는 인터페이스가 보편화된 시대라는 전제 안에서 성립하는 이야기다. 지금의 중년 세대는 1990년대에 이른바 ‘PC 교육 의무화 정책’을 거치면서 어린 시절부터 PC를 다루는 법을 익혔고, 각 가정에는 일종의 필수 가전제품처럼 PC가 한 대씩 놓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20년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이 구비하는 PC의 비율은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2009, 2003)의 ‘인터넷이용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한국 가정의 PC 보유율은 80.9%였으나, 2022년에는 56.2%로 10여년 사이 30%p 이상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PC 외의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디지털 디바이스 전반을 포괄하는 ‘컴퓨터 보유율’이 2022년 기준 81.0%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바일 디바이스의 대중화 이후 가정에서의 데스크탑 PC 보유율이 크게 저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집에 들어오면 발가락으로 PC 전원버튼부터 누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PC생활의 시대는 저물어가는 중이다. PC의 키보드와 마우스로 처리하던 많은 일들은 이제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통해 훨씬 더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다. 가정 및 개인용 디지털 디바이스로서의 PC가 태블릿, 스마트폰에 자리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키보드 + 마우스라는 기본 인터페이스의 보편성은 점차 소실되어가기 시작했다. "일단은 지금 pc는 사용을 할 수가 없죠. 그런 고사양 노트북도 지금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왜냐하면 지금 주로 문서 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러고 이제 애들이 있으니까 컴퓨터나 이런 걸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은 주로 하는 거는 피시방에 가거나 아니면은 핸드폰이나 태블릿으로 주로 하니까. 가능하면 이제 모바일 기기에 다가 넣고 하려고 하고 있어요." (A03) 인터뷰에 응한 많은 중년 라이트게이머들에게 PC기반 게임은 이제 상대적으로 하드코어한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었다. 각종 컴퓨터 쇼핑몰에 가보면 볼 수 있는, 게이밍 PC라고 이름붙은 PC의 가격이 사무용보다 훨씬 비싸게 나오는 장면이 이를 증명한다. 게임용 PC는 어느 정도 게임에 관심과 의지가 있는 이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비용을 치르면서 구매하는 무엇이 되었고, 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친구들과 함께 적당히 즐기고는 싶은 수준의 라이트 게이머들은 PC보다는 다른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작동하는 게임으로 중심을 옮기게 된 것이다. PC로 로컬플레이 하던 이들이 모바일 온라인 시대를 맞이하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문화현상이 등장하는 것보다 퇴보하는 것의 원인을 찾는 일은 훨씬 어렵고 쉽게 일반화할 수 없다.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떨어지고 체력이 예전같지 않은 문제부터 경제생활에 종사하며 여가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가장 일반적이라면, 이 연구과정에서 나는 그만큼의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라이트게이머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을 더 많은 이유들을 마주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라이트게이머들이 지적한 두 가지 이유, 로컬플레이의 소멸과 PC환경의 퇴조라는 두 지점은 단지 ‘스타크래프트’ 시절에만 머무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게임과 게이머의 변화까지를 아우르는 무엇이라는 점이었다. 자칫 우리는 게임과 게이밍을 생각할 때 그 대상을 고정된 무언가로 잠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이 대상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다양한 변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게이머라고 부르는 집단은 결코 과거의 그들이 고정되지 않은 채 새로 들어오는 이와 나가는 이로 진폭을 만들며, 그 개개인 또한 시간과 환경의 변화 속에 각자의 이유로 변해간다. 사람의 변화도 그러할진대, PC라는,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당연했던 어떤 기기가 다음 세대 혹은 PC게임에 딱히 열정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이제 매우 어색한 기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한다면 우리는 게이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만 한번 더 짚어내는 데 그치고 만다. Tags: 스타크래프트, 중년, 중년게이머, PC, 로컬플레이, 응우옌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Frights, Fears, and Fallout: Layers of Horror in Popular Gaming

    In my personal gaming history I have two distinct memories of fear. The first time I was truly scared while playing a game was during the first Resident Evil in what has become a notorious scene from the game. Though at the time Resident Evil felt more like a slower action game than a horror game, there was one key moment when the player walks down a hallway when suddenly one dog, then another bursts through the windows from the outside causing fright, disorientation, and panic. This is an example of a pretty standard jump scare in games (and other media), and though it did frighten me at that moment, I didn’t carry any greater fear of those dogs and what they represented beyond a slightly heightened anxiety while I walked the halls of Spencer Mansion. < Back Frights, Fears, and Fallout: Layers of Horror in Popular Gaming 19 GG Vol. 24. 8. 10. Introduction - What Kind of Fear? In my personal gaming history I have two distinct memories of fear. The first time I was truly scared while playing a game was during the first Resident Evil in what has become a notorious scene from the game. [1] Though at the time Resident Evil felt more like a slower action game than a horror game, there was one key moment when the player walks down a hallway when suddenly one dog, then another bursts through the windows from the outside causing fright, disorientation, and panic. This is an example of a pretty standard jump scare in games (and other media), and though it did frighten me at that moment, I didn’t carry any greater fear of those dogs and what they represented beyond a slightly heightened anxiety while I walked the halls of Spencer Mansion. The second - and more persistent - memory I have of being scared in games comes from the early hours of Fallout 3 . [2] While wandering the capital wasteland the player can stumble upon the Super-Duper Mart, a dark and gloomy grocery store that has been taken over by post-apocalyptic raiders. * Raiders Inside the Super-Duper Mart - Fallout 3 Unlike the dogs from Resident Evil, the threat is known, expected, and mostly visible as the player can see some of the raiders. The raiders are silhouetted - moving in and out of the shadows as a green-tinted fluorescence faintly lights up the ransacked aisles of this former grocery store. Faintly in the distance the ceiling stocks a different kind of meat: bodies. Human remains are draped from the ceiling by chains as an indication of what fate awaits the player if they are discovered here. Because I arrived here early in the game I had only a few resources and lacked the power to fight out of the situation, but I felt I needed what the raiders had if I was to make it out in the post-apocalyptic wasteland of Fallout 3 . As I snuck about the store trying to loot what I could without confrontation, my heart rate went up over the many minutes it took to work my way through the store, and when I heard footsteps or saw a raider around the corner that I didn’t anticipate I would feel a slight moment of panic. When it was all said and done there wasn’t a single jump scare in the Super-Duper Mart, but I left that sequence of Fallout 3 with a persistent memory of fear that sticks with me to this day. These two examples of my earliest scares in games show us that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fear and horror that we can respond to in different ways. Throughout this article we look at how jump scares and sudden frights compare to our everyday fears and the longform terror that certain approaches to storytelling, game mechanics, environment, and atmosphere can produce. Sudden Frights Sudden frights, better known as “jumpscares,” populate many horror games. When we play horror games, we know what we’re signing up for - an experience riddled with tension and anxiety and moments of shock and horror. Players excitedly opt in to having the pants scared off of them. There is a certain enjoyment derived from being scared in the way of sudden frights. From haunted houses in amusement parks to horror films, the anticipation of what frights are to come becomes part of the entertainment. To discuss what makes things go bump in the night, we’ll take a closer look at the some of the game design in Outlast [3] and Amnesia: The Dark Descent [4] and how they afford sudden frights for players. Spoilers ahead for both games. Outlast is a first-person survival horror game. You play as journalistic investigator Miles Upshur, who goes to Mount Massive Asylum after receiving a tip that there are some shady dealings and situations happening at the institute. Equipped with a camcorder, Miles explores the asylum discovering everyone is either a) dead, b) clinically unwell, or c) clinically unwell murderers. He comes across “Father Martin,” a self-proclaimed acolyte to “the Walrider,” which is revealed to be a nanomachinic phantasm controlled by one of the patients locked away in the very depths of the institute. Similar to Outlast , Amnesia is also a first-person survival horror game, but with more sophisticated puzzle elements. The game starts with the player waking in a stone room of a castle, no recollection of who they are except that they are called Daniel. They are directed by letters written from past Daniel to kill a man called Alexander who is residing within the depths of the castle. There is a lurking threat of a “Shadow” enclosing in on the castle to kill Daniel, as well as horribly disfigured monsters that stalk each of the castle’s areas. What is stand-out for these two games, and many other horror games like them, is the use of the unknown as a device for generating fear in players. We fear that which we do not, or cannot know. In Amnesia this takes shape in the literal lack of knowledge as a result of Daniel’s self-inflicted amnesia, and in Outlast it is the context of Miles as an investigative journalist - the player inhabits the roles of two relatively clueless protagonists traversing unfamiliar grounds. This is also reflected in the environmental design of these two games. Both the castle in Amnesia and the asylum in Outlast include maze-like corridors and shadowy corners to keep the player guessing what might be around the corner or lurking in the darkness. Haahr explored the variety of ways that horror games modify a player’s vision to contribute to feelings of fear and unease: obscuration (shadows and mist), distortion (warping the player’s vision), and mediation (viewing the world through a secondary lens - like the camera in Outlast ) are found in both games [5] . Even the use of a first-person perspective in both games restricts the player’s field of view, emphasizing the feeling of catching a glimpse of something in the corner of your eye. Or, the “peeking” mechanic in Outlast , where Miles can quickly glimpse around a corner can suddenly have the player confronted by an enemy who spots him. Fear as an affect mounts in the anticipation of an attack from something we do not know [6] . With this modification of vision, tension is built over time, all with the purpose of breaking it. * Corridors in Amnesia: The Dark Descent[7] Compared to environmental design, audio design in these games help to offer players insight into what might be just out of sight. While the ambient sound of creaking wood and whistling wind might set the player on edge, certain sounds can signify an enemy or threat is nearby. In Amnesia , the groaning of the Monsters signal their proximity to Daniel, and in Outlast the jingling of chains, or heavier footsteps signal the bosses of certain areas hunting Miles. Though these audio cues offer instructions to the player, these enemies are still “audible but unseen” [8] - they are unknown to the player visually, adding to their frightening nature. The exposure of the enemy to the player after hearing them trail them for some time adds to the jumpscare feeling when they are finally spotted. In contrast to ambient sounds, when being chased, the audio ramps up immediately from ambient to intense music and heavy breathing as the player attempts to evade the threat. This scenario typically emerges when the player is spotted however, so while there is of course fear and panic in the sudden chase, they are somewhat emotionally prepared for the pursuit. However, when (from seemingly thin air) an enemy appears behind the player - who has been diligently surveying their shadowed surroundings and listening for audio cues - the jumpscare is a resounding success. An unpredictable appearance after having all the tools to know when and where a threat is reveals to the player just how powerless they are [9] . Powerlessness is an important element in generating sudden frights. At the opening of both games the player is instructed that they can only run, hide, or die. There is no option to fight the threats pursuing them. It is a total subversion of the typical power fantasy videogames offer. The player is not a gallant fighter equipped with magic and strength, they are just some guy trying to escape a hellish space. When an adversary suddenly appears there is no defending yourself - they are a palpable threat. Additionally, resource management, a mechanic taken from the genre defining Resident Evil , adds to this powerless player feeling. In Amnesia and Outlast the resources are related to keeping the area around brighter: tinderboxes and oil in Amnesia , and batteries for the camera in Outlast . In Amnesia , being exposed to dark areas drains your sanity until you die, whereas in Outlast the camera’s night vision allows you to see enemies more clearly. Without this night vision feature, moving through the asylum is significantly more treacherous. Players (unless they know the locations of all the resources) are typically on the precipice of not having enough resources throughout the game - this scarcity threatens their survival. Sometimes players might have to expose themselves to frights in order to reach areas with more resources, as some rooms may be in closer range to enemies paths. The toss up between gaining resources and risking being caught vs. fleeing the area entirely and guaranteeing safety is the strategic decision players must make throughout the survival horror experience. * Nightvision with the camera in Outlast [10] . Even guaranteeing safety is trepidatious in sudden fright games. Resident Evil had safe rooms where the player could save the game. Amnesia and Outlast have no such mechanic. However, in Outlast there are certain story moments and cutscenes that show Miles progressing with the game’s objectives: find a key, get to the security room, etc. Players are led to believe in the early game that these cutscenes showing success in moving to the next step in escaping emulate the videogame “checkpoint” moment, a moment of respite from the tension, but one of the first major jumpscares happens right as Miles reaches the security console and is grabbed by Father Martin and injected with an anesthetic - putting him to sleep and trapping him deeper in the asylum. Like powerlessness, the not-so-safe-checkpoint is a subversion of expectations in how videogames typically go and contributes to sudden frights. A final tangential note on sudden frights comes from beyond the two discussed games and looks to player deaths in games. In games like Alien [11] and Tomb Raider [12] the ways that Ripley and Lara Croft die can be attributed to sudden frights. There is a gratuitous gore that takes place in all the creative sequences in Ripley getting caught by the Xenomorph, or Lara missing a grab in a quick-time event that surprises the player, expecting initially a fall to her death or a fade to black. The variety of these death sequences means until the player has seen all the animations, they preempt their failure with bated breath to see which horrible way they’ve caused Ripley or Lara to die this time. Sudden frights are an anticipation of fear, the enjoyment we derive from being spooked, and the pay off for well-designed gameplay experiences. We scream, laugh it off, knowing it can’t really hurt us, and continue playing, awaiting the next jumpscare on the horizon. There’s a reason horror games with sudden frights propelled many early YouTubers’ careers - frights are enjoyable, memorable, and it is fun to watch someone else get scared alongside you. Sudden frights rely on the standards and expectations of the horror game genre to do what it does successfully. Persistent Motivating Fears While describing the role our emotions play relative to the actions we are compelled to take while playing videogames, Nele Van De Mosselaer writes about the experiences of Charles, a fictional videogame player. Charles represents a common type of occurrence in videogames, as he confronts a slime in a horror game: “He is shocked when a green slime monster suddenly comes creeping towards him on screen. Charles shrieks in terror and hurriedly moves the control stick on his controller to run away from the slime. After seeing that it is much faster than he is, he fears for his life, turns around and starts pounding the monster with his fists. The monster moans in pain, but manages to kill him.” [13] Van De Mosselaer notes Charles' motivation to take these particular actions in the game. First running and then attempting to kill the slime “...seemed at least partly inspired by his fear for the fictional monster: it was his fear that made him hurriedly move his control stick away from the monster and start mashing his attack button when the monster came too close. Imagine a less anxious Charles who doesn’t fear the slime monster, but rather feels anger towards the creature because it already killed him three times before. It is likely that this Charles would not be similarly motivated to use his control stick to run away from the monster, but would rather move the stick towards the monster and start pressing his attack button more deliberately.” [14] We could extrapolate from Van De Mosselaer’s example that even the slightest fears play a strong role in motivating the ways we play across various genres and game mechanics. Beyond the pure affective reaction to a fright that triggers a startle response, fear compels a great deal of our gameplay actions and our metagaming decisions in contemporary game design. In a horror game the enemy being a horrific zombie instead of an unremarkable adversary can potentially change the fight response into a flight response, but what is fear’s role when we take conventional notions of horror out of the equation? Humans have a range of phobias (the dark, spiders, ghosts) that are played up within horror and horror-adjacent genres, but we also harbor many everyday fears (will I lose my job, will my partner leave me, I don’t want to become ill, etc) that also drive our everyday actions. Let’s think about the play pattern of some popular gacha games with limited time events like the HoYoverse games, or persistent games like Lost Ark [15] or World of Warcraft [16] that encourage you to play every day to grind for in-game currency. FOMO, or the “ Fear of Missing Out” is a key driving force in these kinds of gaming models. The idea that a player may miss a limited opportunity or may fall behind other players is a legitimate fear in these kinds of games, and compels players to play compulsively. Often these games are more associated with addictive play patterns, but the fear of dropping to lower social status within the playerbase is an equally motivating drive for players to play often and take action even if it is less bombastic than Slenderman or a zombie. It is also extremely common for character death in games to be a fail state for the player. On one hand we could say that this taps into the quite pervasive human fear of death, but players mostly know that death in a game and death in real life don’t have the same stakes. Still, dying in a game does tap into our pre-established associations with loss and the drive to avoid it. Games can turn this dial up or down by making that loss more or less permanent. In games like the Diablo or Fire Emblem series for example, players can opt to make ‘hardcore’ characters or choose ‘permadeath’ when beginning the game. This is where a single character death in game means that a character is lost forever without the ability to retry or start from a checkpoint. These kinds of playstyles are popular and add a level of tension and excitement to these games, and they do so precisely because the fear of loss and even fictional death can create new emotional stakes for every decision a player makes about their characters. Nuclear Anxiety and Lingering Terror In Brian Massumi’s opening chapter to The Politics of Everyday Fear , the names of high-profile accident victims like Buddy Holly and James Dean, famous disasters like Chernobyl and Bhopal, and infamous diseases like Tuberculosis and AIDS are prominently displayed throughout the chapter in large bold font. [17] The shared connection between these words is their symbolic power to evoke a range of persistent fears and anxieties from within us. Not only can they put memories of tragic and horrifying events from the past into our minds, but they also impress possible horrors of the future upon us: Future horrors that we’ve come to anticipate because of our knowledge of the past. That frightened anticipation is better known as terror, and within that terror we experience anxiety because of the possibility that those future horrors may do us harm. [18] Returning to my first examples of Resident Evil and Fallout 3 , I can better explain why the raiders of the Super-Duper Mart stuck with me compared to the shock of Resident Evil ’s dog jump scare. Compared to the dogs, the persistent symbolism of what the raiders represent in the post-apocalyptic American landscape of the wasteland has been consistently evoked since that first encounter. At first this happened throughout Fallout 3 , but I encountered that feeling again and again throughout the franchise, as one of the persistent themes of the Fallout series is the depths to which desperate people can go. Nestled within larger fears that the series draws upon - such as the still-looming specter of nuclear conflict and those associated fears [19] - is a much simpler and small-scale possibility that the people around us may turn to violence and that I, and those that I love, may suffer the horror that follows because pieces of our societies are becoming less and less sustainable. David Peckham channels the work of the neuroscientist Joseph LeDoux, who contends that “anxiety ‘is the price we pay for our ability to imagine the future.” [20] A franchise like Fallout helps us imagine one of those possible futures, and it does so by drawing on historical and emergent fears that exist within our world. Rather than simply evoking the panic response through a jump scare like Resident Evil ’s dogs, trying to stealth through the Super-Duper Mart became a walk through many layers of fear that only grew over time. Horror, terror, panic, and anxiety were bundled together in a complete package of fear. The atmosphere of the room and the hanging bodies produced horror and anticipatory terror that I would be caught with dire consequences for my character. I experienced slight panic that I would be discovered as I heard footsteps or thought I was discovered. Ultimately, and most importantly, the implications of the raiders within the world of Fallout and how it represents a horrific possibility for our own world has compelled me to carry that memory beyond the boundaries of the game itself as a lingering idea of what it is possible for us and our world to become. Games have the possibility to immerse us in horrific situations more than any other medium, but immersion alone isn’t enough to produce meaningful and powerful horror. True horror comes not just from our reactions to sudden sounds and horrific creatures, but from the heightened state of those startling moments alongside dire implications for our world and our existence within it. If a game can use a scare to evoke this kind of looming threat - no matter how far off it may seem - that is when we become truly afraid. Sudden frights come from the unexpected, whether the source is mundane or supernatural. In contrast, persistent fear and anxiety arises from the ‘what ifs?’. In Fallout ’s case, it’s the ‘what if?’ of the all-too-real breakdown of society. There’s an enjoyment and comfort you can derive from being spooked by something you know isn’t real, but what is more unsettling to consider than the perils of our own possibilities? [1] Capcom, 1996. [2] Bethesda Softworks, 2008. [3] Red Barrels, 2013. [4] Frictional Games, 2010. [5] Mads Haahr, ‘Playing with Vision: Sight and Seeing as Narrative and Game Mechanics in Survival Horror’, in Interactive Storytelling, ed. Rebecca Rouse, Hartmut Koenitz, and Mads Haahr (Cham: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18), 193–205, https://doi.org/10.1007/978-3-030-04028-4_20 . [6] Sara Ahmed, ‘The Affective Politics of Fear’, in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TED KINGDOM: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62–81, http://ebookcentral.proquest.com/lib/concordia-ebooks/detail.action?docID=1767554 . [7] Amnesia: The Dark Descent Full HD 1080p/60fps GTX1070 Longplay Walkthrough Gameplay No Commentary, 2016, https://www.youtube.com/watch?v=hyUf3Ctx-Ck . [8] Rebecca Roberts, ‘Fear of the Unknown: Music and Sound Design in Psychological Horror Games’, in Music In Video Games (Routledge, 2014). [9] Tanya Krzywinska, ‘Hands-on Horror’, Spectator 22, no. 2 (2002): 12–23. [10] OUTLAST | Full HD 1080p/60fps Longplay Walkthrough Gameplay No Commentary,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zZNfd04GO-U . [11] Creative Assembly, 2014. [12] Crystal Dynamics, 2013. [13] Nele Van De Mosselaer, “How Can We be Moved to Shoot Zombies? A Paradox of Fictional Emotions and Actions in Interactive Fiction.” Journal of Literary Theory 12(2), 2018: 286. [14] Ibid., 286-287. [15] Smilegate, 2019. [16] Blizzard Entertainment, 2004. [17] Brian Massumi. “Everywhere You Want to Be: Introduction to Fear.” The Politics of Everyday Fea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3-38. [18] Joseph LeDoux. Anxious: Using the Brain to Understand and Treat Fear and Anxiety. New York: Penguin Books, 2015. [19] Ryan Scheiding. “War Never Changes? Creating an American Victimology in Fallout 4.” Representing Conflicts in Games: Antagonism, Rivalry, and Competition. Edited by Björn Sjöblom, Jonas Linderoth, and Anders Frank. London: Routledge, 2023; 135-152. [20] Joseph LeDoux, Lecture, New York State Writers Institute 2016. Cited in David Peckham, Fear: An Alternative History of the World. London: Profile Books, 2023, 7.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Game Researcher) Cortney Blamey Courtney is a Communication PhD student and game designer at Concordia University, Montreal, Canada. Her doctoral research concentrates on the process of meaning-making in games tackling serious themes and exploring this relationship between player and designer in her own critical game design process. Her previous research unpacked Blizzard’s approach to community moderation in Overwatch by investigating both developer and community inputs on forums. She is a member of the mLab, a space dedicated to developing innovative methods for studying games and game players and TAG (Technoculture Arts and Games).

  • 게임제너레이션::필자::Mạnh Toàn Hồ

    Centre for Interdisciplinary Social Research, Phenikaa University, Ha Noi, Viet Nam Mạnh Toàn Hồ Mạnh Toàn Hồ Centre for Interdisciplinary Social Research, Phenikaa University, Ha Noi, Viet Nam Read More 버튼 읽기 Of green gaming and beyond Since 2020, customers buying a new iPhone no longer have a charger included in the box. According to Apple, this omission was aimed at reducing packaging waste as well as e-waste. The company explained that this move means it has to consume fewer raw materials for each iPhone sold, and it also allows for a smaller retail box, which means 70 percent more units can fit on a single shipping pallet, thereby reducing carbon emissions (Calma, 2020).

  • 기억의 조작술: 사건의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기로서 인디게임

    장르는 게이밍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 중 하나다. 디지털게임의 매커닉과 외형은 무궁무진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TV쇼와 마찬가지로 어떤 약속된 경로들이나 재현의 양태가 축적되고 있음다. 컨벤션(convention)은 창작자와 텍스트, 그리고 수용자 사이에 형성되는 하나의 묵시적인 관습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반복적으로 읽히는 과정에서 공통의 컨벤션을 체화한다. 장르가 계약을 통해 창작자-수용자 모두 텍스트의 진행 과정을 사전에 공식화한다면, 컨벤션은 비공식적으로 모두가 따르는 불문율이다. 장르는 헌법처럼 작동하지만 컨벤션은 그 안의 관습법 혹은 윤리처럼 흐른다. 장르는 끌어당기는 반면, 컨벤션은 대류한다. 장르는 포뮬러(정형화된 공식)와 컨벤션을 만들고, 스타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를 생산한다.  < Back 기억의 조작술: 사건의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기로서 인디게임 11 GG Vol. 23. 4. 10. 게이밍의 컨벤션 장르는 게이밍에서 오랜 논쟁의 주제 중 하나다. 디지털게임의 매커닉과 외형은 무궁무진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TV쇼와 마찬가지로 어떤 약속된 경로들이나 재현의 양태가 축적되고 있음다. 컨벤션(convention)은 창작자와 텍스트, 그리고 수용자 사이에 형성되는 하나의 묵시적인 관습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반복적으로 읽히는 과정에서 공통의 컨벤션을 체화한다. 장르가 계약을 통해 창작자-수용자 모두 텍스트의 진행 과정을 사전에 공식화한다면, 컨벤션은 비공식적으로 모두가 따르는 불문율이다. 장르는 헌법처럼 작동하지만 컨벤션은 그 안의 관습법 혹은 윤리처럼 흐른다. 장르는 끌어당기는 반면, 컨벤션은 대류한다. 장르는 포뮬러(정형화된 공식)와 컨벤션을 만들고, 스타일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를 생산한다. 이러한 과정은 추리물에서 특히 투명하게 나타난다. 화려하고 어두운 대도시, 연쇄 살인사건과 무능한 경찰, 괴팍한 성격에 방대한 지식과 촉을 가진 탐정, 사건의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구조의 모순과 지적 유희는 관객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긴장을 선사한다. 트렌치코트와 모자를 쓴 인물들의 하드보일드한 묘사와 혈흔이 낭자하는 폭력은 복잡함이 아니라 스타일로서, 이는 느긋하게 목적지까지 타고 가는 교통수단처럼 느끼게 만든다. 망설이며 입고 나온 옷이 튀지 않고 길거리 군중의 패션에 녹아듦을 느낄 때 우리는 안도한다. 사람들은 이 탑승 경험에서 특별한 것들을 기대하게 되는데, 그 집합적인 요구들 속에서 컨벤션이 나온다. 영화와 TV쇼는 모두 편안한 컨벤션을 만들기 위해 공식화된 장치들을 사용한다. 필름누아르 영화에서 총격전이나 살인 장면, 로맨스물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 등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속촬영 연출 등이 대표적인 예다. * 좌측부터 윈스턴 처칠, 필립 말로(빅슬립), 닉 발렌타인(폴아웃4), 릭 데커드(2019블레이드러너). 컨벤션은 무수한 스테레오타입과 스타일들 사이의 점들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지만 공유된 관습의 선분들이다. 검은 양복에 톰슨 기관총을 든 남자가 나타났을 때,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우리는 그 뒤에 일어날 사건들을 기시감처럼 느낀다. 기관총 난사 장면은 교차 편집이나 고속촬영으로 연출되거나, 담배 연기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 권총이 무심히 발사될 것이다. 그렇다면 게이밍에서 컨벤션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까? 기존의 루돌로지(ludology)의 논의들은 디지털게임을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지부터 의심했다. 이는 서사가 게이밍의 토대가 아니라는 단호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테트리스나 팩맨 같은 게임에서 어떤 서사를 읽을 수 없으며, 때때로 방대한 서사를 갖춘 게임에서도 종종 서사가 부재한 플레이 행위성이 출현한다. 올셋(Espen Aarseth)이 지적하듯이 게이밍은 해석이 아니라 탐색이 근간이 되는 실천이다. 이는 플레이의 행위성이 서사와 플롯의 시학을 읽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공간을 탐험하고, 오브젝트를 만지면서 변화시키는 조형행위에 훨씬 기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게이밍에서는 컨벤션이 포뮬라에 앞서고, 조작이 문법에 우선한다. 인터페이스, 매커닉, 조작 디자인이 생각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로들을 만들 뿐 아니라 행위성을 창조함으로써 게이밍을 생산한다. 영화나 TV쇼에서 장르가 형성되는 순간은 포뮬러가 우선한다. 탐정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마주하는 공권력 사각지대와 현실의 모순, 카우보이가 방랑 중에 들린 마을에서 악당들을 혼내준 뒤 석양 너머로 떠나는 구조(포뮬러)는 광활한 황야의 풍광, 12시 정각 고독한 두 남자의 권총결투, 질주하는 열차 위에서의 아찔한 몸싸움, 톰슨 기관총을 난사하는 갱스터들의 폭력(컨벤션) 등을 자아낸다. 반면 게임에서는 이 도식이 변주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시간 전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공통의 플레이 암묵지가 있고, 플레이를 만들기 위한 요소들(자원, 생산, 유닛)을 덧붙이고, 그 위에 두 진영 간의 전쟁이라던가 외계인-지구인 간의 투쟁 같은 구조가 덧씌워진다. 똑같은 어드벤처 게임이라도 그것이 정지된 평면의 포인트앤클릭으로 이루어지는지 1인칭의 시점에서 공간을 탐험하는 방식인지에 따라 상반된 포뮬러가 형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에는 정형화된 항로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디아나 존스〉나 〈원숭이섬의 비밀〉은 포인트앤클릭 어드벤처의 대명사이지만, 〈검은방〉 시리즈처럼 하드보일드하고 어두운 미스터리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횡스크롤 슈터는 〈던전앤 드래곤〉 이나 〈황금도끼〉, 〈너구리〉, 〈소닉〉, 〈록맨〉 같은 호쾌하고 캐주얼한 스테이지클리어 게임이이나 캐슬바니아 게임에 최적화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반교: 디텐션〉처럼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거나, 〈림보〉가 보여주듯 그로테스크한 기억의 알레고리 공간이 되기도 한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화끈한 전쟁의 스펙터클을 선사하지만, 〈스펙옵스: 더 라인〉은 전쟁의 스펙터클을 해체해 전쟁의 모순을 재조립한다. 요컨대 게이밍에서 장르와 컨벤션의 관계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상부구조가 토대에 협상을 제안하는 관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역사화, 기억의 조작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도로 노동 집약적이고 창의의 분업이라는 성격을 띠는 문화산업 자장에서 장르는 익숙한 산책로가 되기도 하지만 종종 뻔한 보물찾기가 되기도 한다. 게이밍은 이런 난점이 특히 두드러지는 분야일 것이다. 수많은 1인칭 슈터 게임, 롤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 다양하게 획일적인 난립 가운데서 어떤 환멸을 느낀다. 체육관에 가서 매일 똑같은 무게로, 똑같은 회수로 정해진 세트만큼 운동하면서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아주 균질적인 작용 반작용이 유희감각을 소구시킨다. 이 지난한 컨벤션의 루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다양한 시도들이 지금까지 있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나는 게이밍의 핵심을 절차적 수사학이나 에르고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조작술’로 보기를, 그리고 확고하기 짝이 없는 컨벤션으로부터 벗어나는 경로로서 ‘인디’의 이념을 다르게 전유하기를 제안한다. 보고스트(Ian Bogost)가 정의하듯 게이밍은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에 크게 기대고 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인터페이스와 컨트롤러에 연동시킨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게임속의 공간·오브젝트를 조작한다. 플레이어는 탐색하고, 탐험할 뿐 아니라 조형하면서 스케일된 게임 시공간의 점들에 선을 연결해 나간다. 이 프로세스는 과정 추론적이고, 로지컬한 사고를 동반하며, 다분히 공학적이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이기 이전에 행위성(혹은 텍스트)을 출력하는 무형의 기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풋이 있고, 아웃풋이 있으며 반드시 피드백을 동반한다. 따라서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게임 내 디자인과 조응하는 과정들, 이를 설계하는 방식을 절차적 수사학이라 부른다. 절차적 수사학은 영화에서 몽타주, 소설에서 서술기법과 같은 위상으로 게임만의 독특하게 담화 요소이기도 하다. * 〈소닉〉(좌상), 〈더블드래곤〉(우상), 〈반교:디텐션〉(좌하), 〈림보〉(우하). 인디 게임의 래디컬한 상상력은 사건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기억의 시간들을 재배치하고자 하는 어셈블리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동일한 매커닉, 축적된 컨벤션을 전유하면서 기억을 조작하고, 나아가 자율적인 역사 인식의 계기들을 생성하는 ‘기억의 조작술’은 게임이 존재론적 한계(에르고딕 또는 절차적 수사학이라 여겨지던)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이고 실천적인 행위성의 순간과 조우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절차적’ 혹은 ‘에르고딕’ 이라는 수사는 다분히 결정론적으로 들린다. 디지털게임이 컴퓨터와 알고리즘의 산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계량적인 측면만 그 본질로 정의될 이유는 없다. 역사의 지형은 언제나 불연속적이고 위상학적이다. 마르크스의 오랜 전통이 가르쳐주듯이, 역사는 물질대사의 과정이지 추상이나 관념의 구성물이 아니다. 아주 촘촘히 수학적으로 짜여진 사고야말로 번번히 이데올로기라는 기만적 재현계를 만들어왔음을 우리는 안다. 사회진화론이 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우생학이라는 결과물을 만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게이밍이 우리 두뇌의 어떤 로지컬한 뉴런들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로직이 어떤 역사를 상상하게끔 만드느냐다. 우리는 파블로프의 개나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디지털 게임이 데이터 처리의 절차들로 이뤄졌다고 해서 역사를 떠올리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무의지적 기억의 의미를 비선형적인 의식 흐름 속에서 발견하는 과정과 연동된다. 절차적 수사학 또는 에르고딕의 개념은 게임이라는 유희공간 안에서 사건을 다루는 기술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산업적 컨벤션으로 벗어나기 위해 사건 너머의 숭고를 다루는 조작술을 필요로 한다. * 〈언폴디드: 동백이야기〉(좌), 〈페치카〉(우) 즉 사건은 역사가 될 필요가 있는데, 이 과정을 나는 ‘인디’ 의 개념으로부터 재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건의 연속에서 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사건의 배치 속에서 어떤 역사를 획득하는 것이다. 대만의 반세기 철권통치기를 응시하는 〈반교:디텐션〉, 독립운동가들의 고난과 투쟁을 그리는 〈페치카〉, 제주 4.3 대량학살의 파편들을 퍼즐풀이로 재구성하는 〈언폴디드: 동백이야기〉 등은 대문자 역사를 그린다. 좌우의 공간이동만이 허용되는 이들 게임의 공간을 탐색하면서 플레이어는 지금까지 알았던 과거가 2차원적인 평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물을 조작하고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스테이지들이 바뀌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인물들의 상념과 의식을 가로지르며 우리는 2차원에 강탈당한 에피스테메의 복잡성을 되돌려 받는다. 여기서 역사는 반드시 대문자 역사일 필요는 없다. 역사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지만 가끔 섬광처럼 떠오르는 얼굴들 속에서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것은 집합적인 기억일 수도, 개인의 소중한 일상일 수도 있다. 대문자와 소문자 역사 사이에서 기억의 조작술은 파편적인 무의지적 기억들을 별자리로 만든다. 개인적인 것은 한편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하여금 참여하고, 스스로의 로직 속에서 퍼즐풀이를 하도록 기억의 조작술을 고무하는 것이다. 기억의 조작술은 한계지워진 게임의 절차들과 에르고딕에서 벗어나 역사의 위상학적인 시공간으로 행위자를 승급시킨다. 기억의 조작술은 공허하고 선형적인 컨벤션의 진형을 해체하고 우리를 역사의 물질 대사로 초대하는 게이밍의 강력한 전략이 된다. 우리는 인디 게임의 탈주적이고 실험적인 상상력 속에서 이를 발굴하고, 하나의 숭고로 기록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 잊혀진 과거의 기억들을 재조립하고, 지양된 현재를 환대하는 기억의 조작술. 〈A Memoir Blue〉(좌)는 대사나 이야기 대신 마임과 음악으로만 어머니와의 추억을 연출하며, 〈Lieve Oma〉(우)는 할머니와 함께 숲을 걸으며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만 게임이 진행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the personal)들이 가장 역사적인 것(the historical)”이다. 방법이자 프레임워크로서의 ‘인디펜던트’ 대다수 게임의 천편일률적인 컨벤션은 사건을 단지 흘러갈 뿐인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하며, 그 가운데 불구화된 행위성을 주조한다. 플레이어는 관성적으로 게임을 조작하고 예측 가능한 결말을 본 뒤 그것을 잊어버린다. 사건의 끝은 망각이다. ‘인디’ 는 사건들을 재배치해 우리의 기억을 오래 지속되는 미래로 인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나는 인디 게임을 비상업적, 소규모 개발이라는 유형학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이자 프레임워크로 보기를 주장한다. 인디펜던트는 단순히 아마추어리즘이나 1인 개발, 크라우드펀딩 등으로만 정의될 수 없다. 대규모 자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심급을 포함해 창작의 인습으로부터도 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스팀, 에픽게임즈 등 메이저 게임 플랫폼들과 대형 개발사들이 인디게임 개발과 판매를 지원하면서 게이밍 생태계에서 인디의 개념은 기술적으로 변해버린 감이 있다. 공고한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반문화 정신, 문화 창조의 자율성과 현실 변혁을 촉구하는 메시지, 상업적 관습을 깨트리는 형식파괴 및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 작가주의는 역사의 어느지점에서나 인디펜던트의 덕목이었다. 불행히도 게이밍은 여전히 산업적 이해와 인디 사이의 어느 과도기적 지점에 있다. 물론 경제적 요인은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접근성이 뛰어난 유니티와 언리얼엔진, 오픈소스 제작환경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게임 개발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의 상태를 본다면 아직 인디게임이 까이에 뒤 시네마나 펑크, 미학적 대중주의라는 특이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현재 인디게임의 환경은 사실상 산업예비군이나 스타트업, 혹은 포트폴리오 연습의 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매년 관성적으로 열리는 인디 게임 전시나 비평은 개발자들로 하여금 산업의 컨벤션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동조되도록 강요한다. 이 틀을 깨야만 할 때다. ‘인디펜던트’는 자본의 출구전략이나 편리하게 부르는 콜택시가 아니다. 한정된 자원 속에서 경로와 로직 사이에 발걸음들을 만들어내는 인디의 급진적인 노력들을 사려 깊게 관찰하고, 그것들이 온연히 발휘될 수 있도록 고무할 필요가 있다. ‘인디펜던트’는 하나의 이념이고, 망설이는 조작 가운데 기억이 역사가 되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다른 삶의 잠재태를 건져 올려 인기척으로 소묘한다. 발터 벤야민이 적었듯이, “인식의 진보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한다.” 인디 게임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을 세계를 인식하는 한 프리즘으로서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 Back 합리적 트릭스터: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숙련화 게임 18 GG Vol. 24. 6. 10. 게임에 몰입한 플레이어에게 수지타산이나 합리성만큼 낯선 단어는 없을 것이다. 게임 플레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용한 생산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주변으로부터 ‘공부를 그렇게 했어봐라’ 는 말을 듣는 이유는 게임이 기본적으로 인생에서 효율적인 시간에 해당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인간의 노동은 삶의 여러 토대를 제공하지만, 게임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지언정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도 가장 합목적적인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합리적인 행위가 곧 게임 플레이인 것이다. 열역학 법칙으로 보면, 게임은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부문에 해당한다. 이처럼 모순적인 게임플레이의 위상은 ‘어떤 게임을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를 만들 때 설계자는 물리학적 효율성에 온 힘을 기울이면 된다. 에너지 효율, 내구성 등이 우선이고 감성의 영역인 디자인은 그 다음에 온다. 그런데 게임의 설계자들은 이 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게이밍에서 절대적 효율성, 절대적 감성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두 행성 간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라그랑주점을 포착하듯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에서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고, ‘설계적 효율성’ 과 ‘플레이의 효율성’은 복잡계의 영역으로 간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고도 노동 집약적인 산업과 밀접해 있기 때문에 특히 트리플A 게임은 이 라그랑주점을 찾는 노하우를 생산의 표준으로 만들고자 한다. 반면 플레이어들은 이 안정적인 균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점으로부터 벗어나 예상치 못한 궤도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영화나 방송 산업이 장르 문법이나 컨벤션을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게임플레이 자체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도 설계자도 틀에 박힌 수학적 질서도를 사랑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편으로는 혐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유비소프트와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이다.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로 유명한 유비소프트는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글로벌 퍼블리셔다.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대다수의 게임들은 아주 비슷한 플랫포머 구간을 가지고 있는데, 게임 속 메인 진행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치는 사이드 스토리를 수행하면서 플레이 시간을 늘리고 게이머로 하여금 나머지 공간을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파트다.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 실감나는 전투 등으로 치장된 메인스토리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반드시 ‘유비식 오픈월드’를 마주하게 된다. 이 구간은 제작하기 쉽다. 심지어는 자사에서 같은 엔진으로 개발한 다른 게임의 프리셋과 소스, 레벨링 노하우를 가져다 쓸 수도 있다. 유비소프트에 ‘게임 제작의 테일러리즘’이라는 웃지못할 라벨이 붙여진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어들과의 치열한 라그랑주점 찾기를 2순위로 미뤄두고 도입한 개발 프로세스의 균질화가 게임의 매커닉과 플랫폼구간에서 노골적으로 현상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유비식 오픈월드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플랫포머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한숨을 쉬며 1년차 예비군이 훈련장에 와서 으레 하듯이 뻔하고 관습적인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간다. 똑같은 농담, 비슷한 목표와 성취, 하찮은 심부름, 좀 더 원활한 다음 페이즈 진행을 위한 아이템 수집 등…이 때부터 플레이를 지배하는 것은 치열함이 아니라 관성이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관성에 익숙한 존재다. 관성도 플레이의 중요한 요소다. 똑같은 던전에 들어가서 수십 번씩, 땅 짚고 헤엄치듯 한 손으로 클리어해나가는 플레이어들, 스피드런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것을 관음증처럼 지켜보는 게임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한 네트워크 속에서 게임플레이의 암묵지는 결국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은 악성이 된다는 이야기다. <어쌔씬 크리드> 에서도, <와치독> 에서도, <디비전> 에서도, <고스트리콘>에서도 똑같은 감각으로 비슷한 사이드퀘스트 구간을 헤매다 보면 설계자도 플레이어들도 반발하게 된다. 엔씨소프트의 게임들은 유비소프트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있다. 유비소프트가 개발 층위에서의 테일러리즘을 도입했다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면, 엔씨소프트는 플레이 층위에서 포드주의를 도입했다가 과소소비라는 파국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비슷한 사이드퀘스트와 아이템 수집 등으로 이뤄진 유비식 오픈월드는 적당히 플레이하면서 넘기면 된다. 그런데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은 여기에 비즈니스 모델까지 더했다. 플레이어들을 처음부터 ‘린저씨’로 호명하고, 그들이 게임 설치에 앞서 두둑한 현금부터 준비할 것을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관습적인 플레이가 뭔지를 먼저 끼워넣는 식이다. 패키지 관광객들을 싣고 하루에 수십 군데를 투어하지만, 그 장소들은 모두 협약을 맺은 곳이거나 쇼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들이다. 한국의 특성은 이렇게 성공한 한 선구적인 사례들을 후발 주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카피한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리니지 라이크’의 모든 게임들에서 ‘유비식 오픈월드’와 같은 ‘한국식 과금 구간’을 본다. 심지어는 플레이타임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현금결제 창이 뜰지도 플레이어들은 예측하게 된다. 엔씨를 포함해 그간 한국 게임사들이 ‘생산한’ 게임들은 이 문법을 따라 포드주의적 자동화까지 도입, 방치형 게임이나 자동사냥으로까지 진화했다. 이 게임들은 게임플레이의 관성과 새로움 사이의 경합, 개발자와 플레이어간의 합리적 두뇌게임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교환의 법칙으로 환원한다. 레벨업도, 좌충우돌도, 글리치도 어뷰징도 없는 세계 – 얼마나 매끄러운가? 그러나 이런 식의 포드주의는 필연적으로 ‘탈숙련화’를 야기한다. 노동의 탈숙련화가 아니라 개발의 탈숙련화, 플레이의 탈숙련화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엔진을 실험하지 못해 뒤처지고, 플레이어들은 다른 게이밍의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된다. 포드주의가 야기한 문제, ‘탈숙련화’는 자본주의의 역설이자 자동화의 고질병이다. 포드사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어셈블리 라인에 완전 자동화 결합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시적으로 매출은 엄청나게 증대됐다. 대량의 노동자들은 해고되거나 회사를 떠났고, 공장에 남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동화 기기 옆에서 빗질이나 허드렛일 따위를 하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탈숙련화가 진행되자, 역설적이게도 미국 전체 노동자의 삶이 위기에 빠졌다. 여기엔 두 가지가 있다. 포드 공장에 도입된 모델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 다른 제조업 부문에서도 우후죽순 도입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거나 비숙련 단순직종으로 이동,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고 재고가 증가하는 역설이다. 숙련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생산 현장에서 공유되던 암묵지 노하우들도 사라졌고, 결국 미국의 완전자동화 산업은 일본의 반자동화 산업에 헤게모니를 내주게 되었다. 포드주의는 야심찬 자동화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자들의 삶이 불안정해질 뿐 아니라 공산품들의 품질도 떨어지는 결과를 야기했다. 유비나 엔씨의 제국이 조금씩 몰락하는 가운데, 게임 설계자들은 ‘탈숙련화’가 게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을 이제는 상기해야 한다. 경제적이고 수학적인 효율성은 게이밍에서 다각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플레이어는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광기어린 사람들이고, 설계자들은 정교한 건축술을 구사하지만 동시에 베토벤의 영감으로 창조하기도 하는 입법자들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글리치를 찾거나, 최단시간 레벨업 경로, 보스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세팅을 찾아내고자 하지만 그 과정 자체는 능동적면서 복잡한 시행착오가 동반되어야 재미를 느낀다. <세키로>나 <다크 소울> 시리즈에 몰입한 사람들은 왜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가락 관절염을 느끼며 한 보스를 붙잡고 소리를 질러댈까? 역사에 문외한인 <문명>의 플레이어는 왜 17세기에 스텔스기를 완성하는 세종대왕과 몇날 며칠 자웅을 겨루는가? 자학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향한 복잡성의 과정, 게이밍의 역학적 질서도와 복잡성이 교차하는‘에르고딕(ergodic)’에 탑승한 승객이어서이다. 그들은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게임패드를 집어 던져가며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보스를 클리어한 다음, 이를 깨기 위해 동원한 다양한 전략과 방법, 세팅, 꼼수까지 자랑스럽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랑할 것이다. 이렇게 공유되고 축적되는 숙련 비법은 모든 플레이어들에 의해 재즈 스탠다드 음악 연주처럼 변주될 것이고, 개발자들도 이를 참고할 것이다. ‘숙련화’ 된 플레이어와 개발자들에 의해 긍정적 피드백(positive feedback) 루프가 완성된다. 게이밍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와 개발자 모두를 놀라게 하며 희열에 차게 만들고, 새로운 매커닉과 창의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탈숙련화가 아니라 숙련화, 소외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유비식 플랫포머 승객’ 이나 ‘린저씨’들과 그들을 고객으로만 호명하는 개발사들에는 그런 피드백 루프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유비소프트와 엔씨 및 이들의 ‘탈숙련화’ 모델을 참조로 하는 모든 게임개발사들은 비즈니스 모델이나 제작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숙련된 플레이어들로부터 숙련된 플레이를 확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잘 활성화된 게임은 당연히 <마인크래프트>다. 플레이어가 설계자가 되고, 설계자가 자신이 창조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노하우는 오픈소스 환경에서, 커뮤니티에서 공유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전문가집단과 협업을 하거나 공동 프로젝트까지 한다. 숙련화된 설계자와 플레이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가 ‘합리적 트릭스터’ 다. 우리는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최근 열광하는 숙련화 게임의 두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는 <스텔라 블레이드> 같은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 서사와 미장센으로 뉴트로로 돌아오는 방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긴 하지만 생성AI를 활용한 게이밍의 등장이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산업 부문에서나 게이밍에서나 완전히 화려하게 자동화된 기술진보가 아니라 결국 합리적 효율성과 주체적 효능감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들, ‘합리적 트릭스터’들이 길을 여는 것을 본다. ‘트릭스터’의 감각을 상실한 게임의 설계자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체스를 두지 못한다. 트릭스터는 질서를 가장한 혼돈을 창출하기 좋아하는 악당이고, 꾀를 내어 난제들을 교묘히 해결하는 것을 좋아하는 현자다. 게이밍은 수많은 트릭스터들이 머리를 맞대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속일까, 황금율을 어떻게 파괴할까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라그랑주점을 찾아나가는 장이다. 문학이나 시네마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만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시네마의 관객은 종종 맥거핀을 찾아내고 실망하거나 핍진하지 못한 연출에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게이밍에서 좋은 설계자들은 재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기만할지를 숙고한다. 플레이어들은 설계자의 주권을 깨트리는데서 희열을 느낀다. 게이밍은 플레이어와 설계자 사이의 탈숙련화 게임이 아닌 숙련화 게임을 통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8비트 게임의 등장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게이밍 경험은 유비식 오픈월드나 한국형 과금 게임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Tags: 오픈월드, 트릭스터, 포디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3)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 Back 〈디스코 엘리시움〉 하나의 세계에서 태동하는 모순, 적대, 역설의 게임(장려상) 07 GG Vol. 22. 8. 10. 하나의 세계라는 조건 속의 여정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디스코 엘리시움〉의 등장인물 〈디스코 엘리시움〉은 반세기 전 한때 공산주의 혁명의 파도가 엄습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 혁명으로 풍비박산이 난 상태인 가상 국가 레바숄과 그 한 구역인 마르티네즈를 주 배경으로 한다. 탄광에서 일하며 벽화 페인트와 미술에 심취한 공산주의자 스컬 신디와 대기업 와일드 파인 사의 대사이자 초자유주의자인 조이스, 해리의 동료 킴 키츠라기를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인종주의자 운전수와 미확인파시스트 개리, 왕정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노인과 마조프주의자로 연합군에 저항했던 탈영병, 밀매 혐의를 받으면서도 항만 노동조합 대표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현실 권력을 움켜쥔 에브라트 등의 사민주의자, 클럽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 이곳은 화해 불가능한 NPC들, 성원들이 살아가며 서로에 필연적으로 적대, 모순, 역설 등을 낳을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한 세계의 구성원들이지만 동시에 결코 엮일 수 없으며,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초토화된 곳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놓인 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육성해나가는 방식(능력치, 생각 캐비닛, 장비)에서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피상적인 혹은 구체적인 사상과 이념을 가졌든, 아니면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냥 플레이하든 게임 진행에 문제는 없다. 인물들과의 상호작용과 주사위 판정에 따라 선택지와 이념 루트들이 부분적으로 변화하며, 게임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은 맞다. 분명 〈디스코 엘리시움〉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 내 모든 활동은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접촉하고, 대면하고, 공유하게 되는 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플레이어는 전지적인 능력으로 세계를 뒤흔들고, 변형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곧 레바숄이라는 하나의 황폐한 세계를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서 해리의 자아와 의식, 그리고 이를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주관적인 의도가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반영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인공이 본인으로 다시 서는 과정에서 탐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플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분실한 신분증을 찾기 전까지 자신의 이름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 드 부아다. 주정뱅이 해리는 새로운 동료 킴 키츠라기와 함께 살인 사건을 조사해나감과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NPC들에 접근하여 소통하거나 교감하며 세계를 탐색해나간다. 하지만 해리 또한 세계의 조건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인물이 전혀 아니다. 해리는 RCM 소속의 경찰로 권위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그 자신이 몸담은 RCM은 혁명 이후 연합 정부에 의해 국제 영역의 치안을 복구하고자 조직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중립을 자처하고 있으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단지 설립이 허락된 조직에 불과한, RCM의 경찰이라는 조건을 해리와 플레이어는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나간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선택이 반영되는 결과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세계로부터, 인물로부터 독립된 각각의 가능 세계들을 앞세우려 드는 멀티 유니버스, 멀티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동원되는 평행세계, 대체역사, 가상현실 같은 개념들 또한 성립하지 못한다. 여기에 독립된 각자의 다원적 세계들이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디스코 엘리시움〉은 결과에 도달하는 선택의 과정들에 활로를 열어젖힘으로써 게임을 통해 정식화된 공통의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에서 선택지를 통하여 과정과 분기가 결정됨에도 그것이 세계를 뒤바꾸는 성공이나 실패의 특정한 루트를 창출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일각에서는 네 개의 이데올로기를 가리키는 선택지를 골라서 특정 이념을 체화한 인물로 만들어도, 결국 같은 화면을 공유하며 세계의 결과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어 게임의 자유도를 비판하곤 한다. 그것은 적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던함과 포스트모던함, 표층과 심층의 이야기의 공존 “만약 새로운 정치 예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실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근원적 대상으로서의 다국적 자본이라는 세계 공간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을 돌파하여 이 세계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적·집단적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행동하고 위치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하고, 현재 우리의 공간적·사회적 혼란에 의해 중화되어버린 투쟁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형식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것의 소명은 사회적이고 공간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적인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창안하고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앞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떤 사상과 이념을 택하든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분명히 동시대 유행하는 어떤 RPG, 오픈월드 게임들의 방향과는 확연히 다른, 이전 세기의 전유물 같은 인상을 준다. 플레이어들이 종종 문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한 문학평론가의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1) 이라는 말은 그것을 대변하는 의견일 것이다. * 도덕주의자 퀘스트에 등장하는 연합 군함 아처 먼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무결자로 불리는 '돌로레스 데이'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뤄지는 이 인물은 무결자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도덕주의자들(=인문주의자)의 상징이며, 통치 시기에는 엘리시움에 있는 여러 이솔라를 발견했다. 레바숄 또한 이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돌로레스 데이에 대한 숭배는 단순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종의 법칙으로 여겨졌으며, RCM의 법규도 돌로레스 데이 시절에 만들어진 법에 기반을 둔다. 돌로레스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경호원에게 총에 맞고 죽고, 돌로레스 데이의 시절이 돌연 막을 내린 이후 더는 이러한 세계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시움은, 레바숄은, 사회를 어떻게 질서화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실패하고 이러한 구상 자체가 외부 세력에 의해 짓눌려버린 곳이다. 그것은 곧 이성, 합리, 질서 등을 내세운 근대가 좌초된 것이기도 하다. * 교회 안의 클럽 반면 서브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이전의 시스템이 더는 기능 하지 못하는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듯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다. 이들은 최신의 아노딕 댄스 뮤직을 구현하는 행위에 전념한다. 훼손당한 돌로레스 데이의 벽 조각상이 안치되어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클럽을 만든다. 진중한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들은 너무나 '소프트코어'한 세상을 '하드코어'하게 바꿔야 한다고 하거나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무엇이든 거대한 이념과 사상들은 다 나쁘고 가치판단에는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대뜸 돌로레스 데이를 대량학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렌즈로 '오타쿠'와 현대 일본의 정신구조에 대한 분석하면서 이 개념을 축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게임을 하는 것'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점을 탐구한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의 세계를 트리형, 데이터베이스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근대의 트리형은 우리의 의식에 비치는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반해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을 ’이야기하기‘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형사가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는 표층과 기억을 잃은 자가 인물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다시 나아가는 심층의 이야기로서, 그리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감각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지나간 근대를 재료로 삼는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 해리 또한 근대를 지나온 인물이다. 해리는 근대의 산물이라 여겨지는 인간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수정 능력을 통하여 세계와 마주하며 자신을 다시 찾아가며, 게임의 세계관도 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무엇으로, 어떤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사고해나가는 해리나 자신을 다소 철학적인 항만 노동자로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투쟁하는가‘식의 거시적인 담론을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이라고 말하는 마냐나 같은 인물은 이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아노딕 댄스 뮤직의 아이들에게는 이는 관심사도 아니다. “거대한 이야기와는 철저히 단절한 새로운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히로키식의 설명을 빌리자면, 트리형 세계 속에 작품의 심층적인 이념, 사회구조, 세계관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은 해리일 것이다. 반면 아노딕 뮤직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던 이야기구조, 데이터베이스형 모델을 추구하며, 근대의 커다란 이야기들이 실종된 채로 당장 본인들이 추구하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대한 파편적인 데이터베이스들로 자신들만의 세계와 이야기를 마음대로 만들어간다.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서브 퀘스트를 수락하고 진행하게 되면, 해리는 아노딕 댄스 뮤직에 맞춰 교회에서 춤사위를 벌인다. 한때의 찬란했던 신세대의 음악이라 불리던 디스코의 시절은 어느덧 저물고, 빈사 상태가 되었다. 해리는 새로운 세대의 아노딕 댄스 하드코어 음악을, ’돌로레스 데이‘의 조각상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저 옛 찬란했던 20세기의 근대적 이상을 복원하는 것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를 찬미하는 게임인가. 모던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포스트모던을 부정하고, 아노딕 댄스 뮤직을 선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에 조소하고 한탄하는 게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과거 기획의 실패, 우울, 좌절, 절멸, 절망, 패퇴, 패배주의,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내내 게임의 정서를 지배하는 듯한 종반부에는 극적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인술린데 대벌레와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한 도라, 그리고 탈영병 같은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해리(플레이어)는 탈영병을 마주하기 직전 꿈에서 자신의 오랜 결핍의 대상이었던 옛 연인이자 돌로레스 데이로 형상화된 도라를 마주하고, 이후 인술린데 대벌레를 만나 그 옛 연인을 이제는 잊고 극복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인다. 종반부에 예상치 못한 범인으로 대면하게 되는 탈영병 노인은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이다. 탈영병 노인과 해리는 완전히 상반되는 궤적을 지닌다. 게임의 시작에서 해리는 연인 도라와의 결별을 중심으로 세상에 대해 환멸과 회의로 얼룩진 나머지 모든 권총으로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모색했던 자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게임의 시작에서 모든 것에 절망하고 세계와 단절한 채로 자신을 고립시킨 해리가 개인으로 자유로워진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된 자생적 의식과 실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추방되기를 기꺼이 자처했던 해리가 다시 세계와 마주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그는 근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도라 혹은 이를 형상화한 돌로레스 데이를 떠나보내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모순적 세계의 성공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디스코 엘리시움〉의 리드 작가 헬렌 힌드페레(Helen Hindpere)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시기에서 자란 기이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바숄이 마치 10년 전의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2) .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러한 경험들의 잔향이 당연히도 짙게 배어있다. 하지만 이는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련의 몰락 이후의 시기를 직접 겪은 이들이 게임을 매개로 하여 그것의 실상에 관해 증언하는 역사물이 아니다. 가상적 공간을 주 무대로 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실존적 무게로 다가오는 정치적 실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역사를 그 자체로 재현하거나 규명하는 것을 자처하면서 이를 훈고학적으로 늘어놓으며 일련의 무용담, 음모론, 교훈극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미학적 구성물로 승화하는 셈이다. 이로부터 한 예술비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동구와 서구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면서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서구 좌파들이 가지는 어떤 멜랑콜리나 채무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역사 이후의 시간이란 ‘최적의 사회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미 완수된 시대이며, 지금 중요한 것은 ‘앞서 일어난 혁명의 성과’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현세적 실천이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다. 역자 김수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코뮤니스트 후기〉라는 책을 소련을 회고하는 역사 에세이가 아닌, 철학적 성격의 사고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미학적 구성물에 가깝게 구성한다. “만약 공산주의를 언어라는 매체로 사회를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약속하는 것은 목가라기보다는 자기모순 속에 놓인 삶, 최대치의 내적 분열과 긴장의 상황이다”라고 말하며, 자기모순을 숨기지 않은 채로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체제를 거론한다. 그것은 대립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첨예화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내재한 모순과 분열, 적대를 숨기지 않고 그 모순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둘러싼 대립을 첨예화하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어쩌면 그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도 같다. RPG 캐릭터의 육성 방법으로 어느덧 암묵적으로 필수 사항이 된듯한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자리를 방대한 텍스트와 온갖 갈등, 모순, 역설, 적대로 얼룩진 세계관으로 채우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두에게 어필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따분하거나 거북하거나 섬뜩할 수도, 혹은 고양되거나 짜릿하거나 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며 우뚝 선 ZA/UM의 개발자들은 이제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나갈 예술이라고 밝히는 데에 이르렀다. “타인의 기억에 남고 싶다면, 체계적으로 반감을 사야 합니다. 반감을 살 준비가 되었다면, 정말로 역사적인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적절하지 않을까. 게임 개발사 하나 제대로 없던 에스토니아라는 동구권의 한 국가에서, 소설가 출신으로 실패를 경험한 로버트 쿠르비츠 등을 위시하여 게임과는 전혀 상관없던 이들에게 말이다. 1) (인하영, 2021) 문학평론가, 「게임이 되는 소설, 소설이 되는 게임」, 『경향신문』, 2021.10.28https:// 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10280300115 2) 〈Masterclass: Helen Hindpere Talks About Writing Disco Elysium: The Final Cut〉, https://youtu.be/Xf_hU7IW5qs 3) 보리스 그로이스, 〈예술 작품이 된다는 것(Becoming the Artwork)〉, 2020, 부산현대미술관 《동시대-미술-비즈니스 :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질서들(Contemporary-Art-Business: The New Orders of Contemporary Art)》 https://youtu.be/W9Uu13m5JxI 참고문헌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최형익 옮김, 비르투(VIRTU), 2012.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2007).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마성열 편역, 책읽는오두막, 2013)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ACT! 편집위원) 김서율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전반에 관심을 두고 종종 글을 끄적이거나 기고해왔다. 현재는 구로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일한다. 어느샌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연구자와 활동가, 이론과 실천 사이에 단절된 통로를 고민하며 길을 모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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