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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 Back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06 GG Vol. 22. 6. 10. 1. 그들은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좌) 와 〈킬 빌〉(우).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정갈하게 무릎 꿇은 다이묘와 쇼군이 차를 마시며 명예와 무사도를 논한다. 일본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는 다다미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와 복면을 두른 닌자가 밀서를 교환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갈대밭에서 두 명의 검객이 우아하게 일본도를 맞부딪치고, 가문의 복수를 마친 사무라이가 함박눈을 맞으며 할복한다. 일본 대중문화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장면들이다. 한국인들이 ‘왜색’ 이라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 세계의 대중들은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서방의 창작자들은 멋진 일본도, 이국적인 현악기 음악, 하이쿠와 다도, 명예와 바람의 길에 푹 빠졌다. 문화평론가들은 이를 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와 문화산업의 융성에 힘입은 대중문화 와패니즘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문화연구자들은 전도된 시각성 속에서 문화제국주의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평과는 상관없이 사무라이와 닌자는 오늘날에도 끝없이 재생산된다. 일본도를 든 여고생, 사이보그 닌자, 기모노를 입은 접대용 안드로이드 등등. 이러한 재현물들 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표상과 설정만 가져와서 치장하는 키치(kitsch)이거나, 서구 재현체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지역 또는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재현 양식을 상품화하거나, 굴절된 시선 속에서 전유하는 것은 마냥 좋거나(상업적 성공이란 관점에서) 혹은 나쁜(제국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것일까? 일본문화에 대한 터부가 강한 한국에서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문화, 경제, 정치 전 영역에 걸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문화가 잔학무도하고 끔찍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무라이는 신성한 바람의 길을 걷는 존재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양민들을 학살하는 존재이고, 게이샤와 기모노는 문란한 일본식 성문화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수탈했던 서구인들은 한술 더 떠 일본의 극악성을 숭상하고 상업화하는데, 이들에게는 아무리 입이 닳도록 참견해도 쇠귀에 경 읽기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하루 빨리 위대한 대한민국의 문화 영토를 세계 곳곳에 건설해 ‘왜색’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대안이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재현양식을 국민-국가의 틀거리로 협소하게 규정해,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주류 문화(서구의 시선)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으로 치장하는 등의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데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국민-국가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문화적 관습이나 재현이 민족성이나 혈통 등 고정불변한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는(부르디외가 ‘아비투스’ 라고 규정한) 접근을 지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경이 아니라 접경이 있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동하는 기호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국민-국가, 와패니즘, 오리엔탈리즘보다 더 큰 심급이 여기에 도사린다. 즉 지구(global)와 지역(local), 보편(universal)과 토착(vernacular) 사이를 편류하는 지정학적 미학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2. 보편과 토착의 변증법, 그리고 게이밍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전 지구적으로 평평하게 된 문화산업의 지배 하 상품처럼 찍어내는 대중문화의 보편성을 발견했다.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지구 어느 지역에서라도 수월히 팔릴 수 있고 또 이를 균질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재현, 내러티브)가 전제되어야 한다. 패스트푸드가 그 보편적인 맛 때문에 뉴욕에서나 상파울루에서나 똑같이 잘 팔리듯이, 문화상품 또한 그러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문법과 체계가 준비되어야 했고, ‘장르’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안되었다. 장르는 즐길 거리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하나의 문화적 테일러리즘으로 출발했다. ‘중간계’에 심취한 이들은 중간계를 변용한(혹은 이름과 설정만 바뀐) 또 다른 판타지를 찾는다. 셜록 홈즈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에르큘 포와로와 파일로 반스가 등장하는 다른 추리물을 소비하고, 〈스타워즈〉의 장엄한 우주 서사시는 〈듄〉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전 지구의 문화소비 시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자본은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으리만치 촘촘한 포획망,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정확히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상상력이 쉽게 파악해낼 수 없는 문화생산의 권력과 통제망”인 지정학을 형성한다. * 지정학은 특정하게 축적된 ‘익숙함’의 소비 감각을 상업문화 재현체계 전반에 편재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힘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예술-상업문화 간 첨예한 마찰은 지정학의 매끄럽고 평평한 톱니바퀴들을 마모시키고, 불규칙하지만 미학적인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보편성의 공고한 지구적 벨트가 곳곳에서 작동을 멈추고, 차이를 드러내며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 즉 토착적인 것(The Vernacular)이 부상해 새로운 힘-관계를 형성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서부 활극 속에서 사무라이 활극이 나타나고, 갱스터물의 범람 가운데 스타일을 추구하는 필름누아르가 발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단지 지역 특산물이나 여행지의 이국적인 음식을 즐기고자하는 취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힘 관계들을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스타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던 프랑스 누벨바그는 68혁명의 탈영토화의 물결 위에서 다양한 실험적 기법들(핸드헬드, 소외효과, 소비에트 몽타주, 즉흥연기 스토리보드 없는 촬영)을 개발했으며, 영화에 실존주의 철학을 결합시켰다. 뉴 저먼 시네마는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요청되는 가운데 누벨바그와 브레히트의 서사극를 접목한 문명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은 중심부 국가 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토착성을 만들어내며 미학과 래디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향을 띤다. 나아가, 장르 문법을 역으로 전유해 지역 공동체의 정치적·계급적 모순들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이 분야에서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꼽힐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여기고, 또 가장 궁금한 것은 ‘게이밍에서 지정학에 반대하는 미학이 가능한가?’이다. 이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 보다 더 광범위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협의의 질문으로 소구시킨다면, 그렇다, 게이밍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롭게 등장한 언리얼 엔진5, 유니티 디지털 휴먼, GPT-3 기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Dall-E 2 등의 기술은 형식으로서의 재현 경계(시네마, 애니메이션, 게임, 포토리얼리즘)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명은 더 많은, 균질화된 재현의 생산에 봉사하고자 개발되고 있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르가 문화적 층위에서의 지정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면, 상기의 신기술은 컴퓨터적 층위에서의 기술적 지정학을 위한 평탄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페이퍼, 플리즈〉, 〈스펙 옵스: 더 라인〉 같은 작품들은 게임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을 생성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방대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술형식이나 정치를 촉발하는 행위성 이전에, 전 지구적으로 평평한 문화재현 체계의 인력에 무의식적으로 부딪치는 척력과 결부해 있기 때문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지역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 사회구조와 닿아있는 토착성을 반 지정학으로 발전시킨 것과 반대로, 컴퓨터의 언어는 공용 언어였기 때문에 기존의 장르적 보편성과 쉽사리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인도인도, 유럽인도 베이직과 C++언어를 공용 언어로 사용한다. 초창기 전자 게임인 〈스페이스 워!〉가 일본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갤러가〉 등 거의 동일한 형태로 출현했음을 상기하자. 초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게이밍의 작은 역사는 가장 보편적이고 평평한 것들만을 골라서 한정된 비트의 시공간에 구현해내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토착성은 게임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며, 이안 보고스트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는 컴퓨터 언어(즉 보편 기술언어)로 현상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 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임 속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를 유도하는 절차적 수사학의 개념만으로는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을 찾아내는 데 불충분하다. 미국식 RPG(자유도)와 일본식 RPG(캐릭터와 선형성)의 차이를 규명하는 정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지정학에 대항하는 힘을 주조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3. 공통적인 것들의 은하계,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세계 시네마에 엄청난 내파를 불러일으킨 이후, 지역 장본인인 일본과 서구의 창작자들은 무수히 많은 사무라이들을 재생산해 왔다. 〈황야의 7인〉 같은 서부영화가 사무라이 결투를 참조해 새로운 서부극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와패니즘과 오리엔탈리즘은 제외하도록 하자). 게임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천주〉, 〈귀무자〉, 〈인왕〉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구에서는 〈쉐도우 택틱스〉, 〈세키로〉 같은 게임들이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사무라이와 에도시대라는 토착성을 재구성해냈다. 〈쉐도우 택틱스〉가 치밀한 퍼즐풀이 설계 기믹 속에 사무라이와 닌자, 게이샤의 스테레오타입을 녹여낸다면, 〈세키로〉는 극한의 조작술을 요구하는 게임 매커닉에 사무라이 결투의 긴장감을 조화시켰다. 가장 최신의 결과물 중 하나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몽골군의 쓰시마 침략에 맞서 싸우는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게임은 매우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토착성을 소환하는데, 다양한 게임의 조형적 요소들과 기존 재팬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한 미학적 장치들을 조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캐릭터의 등 뒤를 조작 시점으로 채택하는 게임들이 필수적으로 도입한 미니맵(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한) 대신, 버튼을 누르면 바람이 불어 목적지를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조작해 피리를 연주할 수 있는데, 이 순간 게임 속 날씨가 바뀐다. 또한 특정한 장소에 가면 플레이어는 주어진 문구들을 조합해 하이쿠를 창작할 수 있는데, 시점을 옮겨가며 특정 풍경 사물에 위치해 있는 시구들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시감을 정해 시를 쓰는 방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매커닉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많은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하던 토착성의 기법들을 게임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결투를 시작하면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린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토착적 힘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군중의 움직임을 화면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헐리우드가 매끄러운 카메라워크로 평평하게 화면을 흘려보내는 상업영화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강력한 단자로 작용했고, 유수의 상업영화 감독들(스필버그, 피터 잭슨, 조지 루카스) 및 작가주의(스탠리 큐브릭, 타르코프스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의 강력한 설득력은 화끈한 칼싸움, 이국적인 복장이나 전통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 위에 위상학적으로 배치된 군중들, 사건에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환경과 날씨 및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과 긴장을 고도로 은유하는 전개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히 접한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의 칼싸움은 매우 둔탁하거나 정적이다(좌, 〈하리키리〉). 또한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무쌍이나 멋과는 거리가 멀며(우, 〈7인의 사무라이〉),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채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위로부터의 혁명, 군국주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전히 유예된 일본의 봉건적인 사회 모순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표현된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이러한 토착성의 미학 요소들을 디지털 게임의 보편화된 기술적 작동 인자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를 꾀하며, 시네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정학에 저항한다. 이를 기점으로 사무라이와 일본도는 더 이상 일본의 전통 문화도, 일본적인 것도 아닌, 보편적이면서 낯선 공통의 것으로 전화한다. 구로사와 스타일로 배치된 치밀한 공간과 화면,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비쳐지는 광원 효과는 단순히 게임의 그래픽을 치장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들은 쓰시마의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 있건 아름다운 경관의 포토제닉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왜색’에 반감이 깊은 한국의 플레이어들마저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미려한 토착 구상 앞에서 국민-국가의 감각을 관대히 걷어내게 된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이 탈식민적 저항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무라이물’이 지닌 토착성의 반-지정학이 세계 공용의 언어가 되어, ‘공통적인 것(The Common)’ 들로 이뤄진 하나의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문화계는 이러한 공통계를 낯설게 여기고 협소한 국민-국가 문화의 틀에 사로잡혀 사무라이와 고양이, 교복 여고생과 일본도의 혼성모방만을 도돌이표처럼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보편타당하고 지구적인 지정학에 토착성으로 부딪친다면, 게이밍은 이미 공고해진 문화산업의 보편성 속에서 ‘공통적인 것’들을 찾아내 평평한 세계를 다시 구형으로 입체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사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게임은 극히 일부의 가능성 또는 이행적인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매커닉과 인터페이스-상호작용 환경구성은 사무라이, 닌자, 에도시대 같은 지역적 재현 요소들보다 더욱 보편성이 큰 만큼 공통적인 것이 되기도 쉽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계급적 알레고리를 게임 내 공간·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매커닉에 결합시키는 시도는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라는 게이밍의 미적 목표에 더욱 용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코소보 전쟁을 알레고리로 하여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형성하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대만의 전체주의와 정치탄압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2차원적 평면구상 안에서 회상하는 〈반교: 디텐션〉, 그리고 이를 다시 다른 지역(제주 4.3사건)의 정치적 사건과 결합시키는 〈동백이야기〉는 어떨까? 이들 게임은 횡스크롤 방식으로 탐색하는 시공간에 지구적인 참극들이 상업적 보편성이 아닌 공통계 안에서 연대될 수 있고, 촘촘하고 광범위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게이밍의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창작자들과 플레이어들이 함께 경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민족-국가나 지역의 지엽성을 뛰어넘어 대항적인 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경로들을 발견한다. 어쩌면 게이밍의에서 이미 지역적 경계들은 이미 접경화 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 더 넘어서기 힘든 장벽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기는 하다. 언리얼과 유니티로 대동단결된 재현 생산 체계에서 토착적인 것들의 맹아들은 점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문학과 시네마에서 찾을 수 있던 여행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 ‘공통화’의 미덕이 어떻게 대중미학으로 나아며, 또 지정학을 전복하는 힘으로 발로되는가를 관찰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전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 Back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06 GG Vol. 22. 6. 10. 1. 숏폼 콘텐츠와 연쇄적 소비 바야흐로 짧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평균적으로 50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TV 드라마는 15분 내외의 웹드라마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유튜브에는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채널을 중심으로 3-4분 정도로 짧은 콩트들이 유행하고 있다. 게임 역시 짧게는 수십 시간, 길게는 몇 백 시간의 플레이 시간을 요하는 PC나 콘솔 게임보다는 1회 플레이 시간이 짧은 모바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모빌리티를 무기로 하는 각종 플랫폼들이 기존의 하드웨어를 대체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72초TV’가 상영시간을 채널명으로 전면화 하여 인기를 끈 것은 숏폼 콘텐츠(Short form contents)의 승리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바일 시대 초압축 드라마의 표본을 제시한 ‘72초 TV’의 한 장면 이러한 숏폼 콘텐츠가 고전적인 다른 고전적인 콘텐츠보다 주목받는 것은 이의 주 소비층이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시간을 부족한 이들에게 짧은 콘텐츠는 부족한 여가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된다. 등하교길이나 화장실에 들르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몇 분만 할애하면 게임 한 판과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숏폼 콘텐츠는 금세기의 여가 문화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의 대부분이 SNS나 유튜브 등의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 된다는 점에서 구매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잘 먹히는 콘텐츠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핵심적인 서사를 바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에는 전후 맥락이 생략되어도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룬다. 짧은 콘텐츠 재생시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서사를 갖춘 숏폼 콘텐츠들은 긴 설명이나 전후 관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를 본론부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너덜트 채널의 첫 에피소드인 “당근마켓 남편들”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중고거래 현장을 비춘다. 이 영상에서 공감대는 이미 해당 마켓들 통해 거래를 해본 기혼 남성들의 일상적 공감을 양분으로 삼아 전후의 맥락을 제거하고 거래 현장만 집중하여 짧은 상영 시간에 맞게 콘텐츠를 압축할 수 있게 해준다. *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짧은 플레이 시간을 바탕으로 연쇄적인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숏폼 콘텐츠를 멍하게 반복적으로 여러 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게임의 경우도 한 번 플레이하는 시간이 짧을 뿐이지 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못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캐주얼 레볼루션(Casual Revolution)〉에서 캐주얼 게이머들이 게임을 캐주얼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하드코어하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실제 사용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예스퍼 율, 이정엽 역, 『캐주얼 게임: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의 재창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콘텐츠의 연쇄적 소비가 트래픽을 불러일으켜 광고 수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하 BM)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플랫폼은 어떤 특정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고양된 감정으로 사이트를 떠나는 현상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콘텐츠 소비가 끝났을 때 다음 콘텐츠를 이어 보고 싶은 감정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 이는 게임으로 환원하면 짧은 플레이를 무수히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비슷한 메커닉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지루함을 유발하여 접속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여기에 캐릭터 성장 시스템과 BM을 연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는 것이다. 2. 숏폼 게임의 메커닉 축소과정과 비즈니스 모델 물론 처음부터 숏폼 형태의 게임과 BM이 초창기부터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PC나 콘솔 게임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처음으로 전환되던 시점에는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이용한 복잡한 컨트롤을 손가락을 이용한 터치로 단순하게 바꾸는 UI 차원의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 때 통상적인 게임 장르는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환경에 따라 게임 메커닉을 약간씩 변형하면서 이식된다. 예를 들어 PC 게임 플랫폼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가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같은 AOS 장르로 이식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숏폼으로 변화하게 된다. 〈클래시 로얄(Clash Royale)〉은 통상적으로 CCG(Collectible Card Game)이나 RTS(Real-time Strategy ) 장르로 분류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의 메커닉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를 숏폼으로 축소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장 유명한 맵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를 비교하면 크게 3갈래로 갈려진 지도가 〈클래시 로얄〉에서는 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한 경로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아군과 적군의 미니언들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고, 챔피언만 플레이어가 컨트롤 할 수 있지만, 〈클래시 로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캐릭터의 처음 시작하는 위치만 지정할 수 있으며, 그 캐릭터의 개별 전투는 모두 AI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그 오브 레전드〉는 특별히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존재하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1회당 3-4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클래시 로얄〉은 처음 3분의 타임 어택과 추가 1분 30초의 타임 어택을 포함해 최대 1판이 4분 30초를 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클래시 로얄〉은 PC에서 사용되던 플레이어에 의한 복잡한 컨트롤을 최대한 줄이고, AI에 의한 자동전투를 극대화시키면서 플레이 타임을 거의 1/10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시 로얄〉에서 더욱 강조된 부분은 각 캐릭터의 성장을 ‘카드 강화 시스템’을 통해 극대화 시켰다는 점이다. CCG 장르의 카드 강화 메커닉을 활용하여 자신의 카드가 성장하는 느낌을 부여하면, 그 카드의 효용을 실험해보고 싶어 다시 플레이를 시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덱이 8장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성장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클래시 로얄〉의 BM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클래시 로얄〉은 현질을 통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요소를 제한하여 게임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구현한 좋은 예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성공 이후 RTS의 AI 전투 시스템은 축소하고 카드 강화의 BM만 극대화 한 게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 이 때에도 RTS적인 요소들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일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치형 이나 CCG로 불리는 현질 유도 게임은 현재에도 무수히 양산되고 있지만, 문제는 앞선 사례들에서 적절히 제한되었던 현질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한 요소들은 차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BM의 전면화와 미학의 소외 물론 콘텐츠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긴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도 장편과 단편의 미학이 다르며, 단편은 장편이 구현하기 어려운 단일 플롯의 직접성과 단도직입적인 풍자 등을 통해 독립적인 미학을 쌓아왔던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애초부터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도 짧은 플레이 시간 내에 추구할 수 있는 한 판의 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 타임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풍성한 서사, 전후의 맥락, 컷신, 텍스트, 맵의 디테일, 전략적 요소 뒤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고전적인 재미요소를 제거하고 BM만 남겨놓아도 플레이어가 잔존한다는 사실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확인된 이상 게임 회사들은 굳이 어렵게 게임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모바일 게임의 소프트 런칭 시스템(특정 국가 하나 정도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시범적으로 출시하는 방식으로, 게임 회사들은 이를 통해 특정 메커닉의 잔존율(retention)을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잔존율 낮은 메커닉이나 BM은 도태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은 특정 메커닉과 BM의 잔존율을 아주 쉽게 테스트 할 수 있게 해주어, 노골적인 BM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 내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설정만 해놓으면 해당 퀘스트가 다 클리어된다거나, 별다른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사냥과 전투가 시작되는 게임들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치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와 몰입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이 게임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익성을 위해 깎여나간 게임의 숏폼화는 결국 BM와 노골적인 결제 모듈만 남기고 게임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 게임 플레이어 모두에게 1억이 지급되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최근의 게임 광고들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확률형 아이템을 지급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리 만무하다. 물론 이러한 방치형 게임들을 유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한 학생이나 직장인이 성장의 재미만 누리게 하는 게임으로 일정 가치를 지닌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 Back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04 GG Vol. 22. 2. 10.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나아가 우르과이 출신 게임 개발자로서 그는 상업적인 게임과 실험적인 게임들을 넘나들면서 독창적인 게임들을 개발하기도 했다.『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이라는 학위논문을 쓰기도 한 그의 관심은 게임을 통해 억압과 폭력, 차별, 전쟁과 같은 사회의 현실 문제와 씨름하는 게임들을 만들어 왔다. 프라스카가 제안하고 실천한 ‘시리어스 게임 serious games’, ‘뉴스게이밍 newsgaming’, ‘교육적 게임 educational games’, ‘다큐게이밍 docugaming’ 같은 프로젝트들은 상업적 성공을 향한 오락 일변도의 주류 게임을 넘어 게임의 사회적 효용성과 실천적 잠재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게임이 교육과 사회적 인식이라는 목적을 강조하다 보면 재미라는 게임의 핵심 요인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날이 다양해져온 게임의 장르와 콘텐츠, 그리고 게임 테크놀로지와 게이밍 환경의 꾸준한 진화 속에서 프라스카의 제안과 실험은 일정한 시의성을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게임을 만들고 누구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의 민주화’에 값하는 ‘놀이 정보계’(ludic infosphere)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게임생태계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토론하고, 나아가 사회 인식과 공감의 상승을 시도하는 프라스카의 꿈은 ‘몽상’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게임들만이 주로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현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미 있는 문제작들이 발표되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인식’의 균형을 향해 아직 나아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시리어스 게임’, ‘임팩트 게임’의 초기 제안자라 할 만한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에듀테인먼트와 시사 게임 프로젝트 프라스카의 게임 철학은 “비디오게임이 반드시 오락적일 필요는 없다”는 다분히 논쟁적인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은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다. 프라스카 역시 게임의 오락성과 재미를 중시하고 그가 만든 게임들 역시 재미적 요소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그의 게임인 는 1천 300만 카피를 팔 수 있었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은 세계적인 독일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이며 실천가였던 브레히트(B. Brecht)와 그를 계승한 실험적 연출가 보알(Augusto Boal)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재미라는 것이 주류 대중문화와 오락산업의 관행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와 오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굳이 시끌벅적한 스펙터클 속에 순간적 쾌감이 아닌 주변 현실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가운데서도 재미와 오락을 찾을 수 있음을 모색하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배움의 재미’ 혹은 ‘깨달음의 재미’는 프라스카에게도 이론적ㆍ실천적 화두였던 셈이다. 프라스카에 따르면 비디오게임은 원래 비오락적인 용도로 탄생했다. 군사훈련을 위해 도입된 각종 시뮬레이터들이나 명시적으로 교육적 목표를 표방하는 게임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에듀테인먼트’(Digital Edutainment)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교육용 게임들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에듀테인먼트’는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를 결합해서 만든 신조어로서 학생들의 참여와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바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능해진 학습자의 능동적 상호작용과 참여 가능성은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까지 여겨졌다. 곤잘로 프라스카 역시 학습 플랫폼으로서 디지털 미디어가 갖는 요소들을 인정하며 이러한 장점들을 비디오게임의 사회적 기능전환에 유용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대체로 오늘날에도- 비디오게임의 교육적 활용이 순전히 수학이나 과학, 어학 교육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프라스카의 관심은 유저들이 상호 토론과 공감을 통해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비디오게임의 디자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비디오게임의 모델은 다음과 같은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의 구상에 기반한 게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3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더욱 복잡한 사회적 비평을 계발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시뮬레이션의 문화적 파급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이 모든 시뮬레이션들을 일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는 있다. 이는 모델 고유의 가정들에 대한 플레이어의 도전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시뮬레이션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은 시뮬레이션을 의식-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시뮬레이션은 비디오게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말처럼 그의 실험이 이루어지던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게임들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혐의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괴물이나 몬스터, 트롤들 일색이거나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일상인들과 거리가 먼 캐릭터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심시티〉나 〈심즈〉 등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들의 등장하고 멜로, 역사물, 갱스터 등의 장르들로 게임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상황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임들 다수는 현실의 문제나 모순들을 회피하고 ‘디즈니랜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라스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게임 연구자들에 의해 게임에 대한 무비판적 동일시를 의미하는 ‘에이전시’(agency)와 ‘몰입’(immersion)이 게임의 바람직한 효과들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주체가 게임 규칙과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의 창조야말로 게임 개발자의의 미덕이라고 보는 사이 인종/젠더/민족(국민)/종교 등의 차별 의제들은 살며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주류 게임들이 상업적 성공에 꽂혀 현실의 억압과 차별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미지 재현과 플레잉 규칙을 통해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고착화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게임의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게임 대상들과 게임 규칙에 담긴 차별과 억압에 대한 무감각 혹은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우리는 비디오게임의 플레이가 연극이나 영화의 감상과 분명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와 비디오게임 캐릭터 사이의 거리는 다른 예술의 수용자-캐릭터 사이보다 훨씬 더 밀접하다. 프라스카의 지적처럼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라라 크로프트가 혹 신장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마리오가 편집증 증세를 지닌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나 게임상의 괴물들은 모두 수단이고 커서일 뿐이다. 게임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평면적 캐릭터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그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가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슈퍼맨, 스파이더맨, 제임스 본드 등의 영웅이고 싶지만 게임의 경우 그런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 우리가 바로 그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게임에서 마리오는 영웅이 아니다. 내가 바로 영웅이고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자유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임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행위를 위한 커서가 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를 게임의 영웅 혹은 신으로 자각한다. 게임의 자유도와 상호작용성에 따른 게임의 몰입은 게임 이면의 규칙에 묻어나는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자연화’(neutralization)하기 쉽게 만든다. 프라스카는 주류 컴퓨터게임들의 이러한 한계들을 비판하면서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탐색하게끔 허용하는 캐릭터 중심의 비디오게임, 더 나아가 게임의 행동 규칙을 플레이어 스스로 변경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을 구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또 보알이 연극을 통해 실험했던 것을 컴퓨터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관건은 “재미 경험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적 이슈들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강화하는 비디오게임”의 개발이다. 이러한 인식은 〈9ㆍ12〉나 〈마드리드 Madrid〉와 같은 프라스카 본인의 게임의 개발로도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작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게임 창작이 어려운 이들이 기존의 게임들을 비판적으로 ‘재매개’하여 자기 이야기를 만들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고전 게임들을 활용할 경우 유저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참여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야 게임 창작 도구나 제작 엔진의 수준이나 직관성이 크게 향상되고 ‘로블록스’나 ‘디토랜드’ 등과 같은 양질의 플랫폼이 발표되어 프라스카의 실험 제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무척 커졌다. 프라스카의 실험은 일종의 게임 모드(mod)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수준도 비약적으로 향상되기도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주체들의 의지와 인식에 달린 셈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게임들이 드문드문 인디 게임씬에서 발표되는 중이다. 게임 유저의 게임 모딩이나 창작의 환경이 지금보다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심즈〉를 이용하여 프라스카가 상상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 프라스카의 ‘억압받는자들의 비디오게임’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억압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이 그랬듯이 프라스카의 게임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들에 대해 ‘쟁점들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알의 연극 실험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으로서 비판적 사유와 논쟁을 위한 포럼(forum)의 역할만으로도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모든 게임들은 늘 제한적이고 이념적으로 편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게임들은 개발자들도 예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플레이될 수도 있다. 프라스카는 문학이나 영화 못지않게 게임들도 훌륭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세리 터클의 주장에 동의한다. 터클에 따르면 게임과 시뮬레이션들에 있어 “시뮬레이션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이해는 정치권력의 핵심 요소이다. 시뮬레이션들에 강요된 왜곡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욱 직접적인 경제적ㆍ정치적 피드백과 새로운 종류의 재현, 더욱 많은 정보의 채널들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다.” 프라스카는 이 정도로 게임 사용자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대안적인 게임 창작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개발자들이 한데 힘을 모으고 실천적인 사례들을 창안하고 확산시켜 나갈 것을 촉구한다. 이처럼 프라스카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보알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연극’ 이념과 테크닉들을 비디오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관객-배우’가 직접 경험한 억압적 상황을 무대에서 소개하고 그에 대해 배우와 동료 관객들이 참여하여 대안적 해결책들을 연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게임들을 디자인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기존 게임의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에 도전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당시로서는 주류 게임을 이용하여 그 게임의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최근에야 소극적이나마 플레이어들 스스로 개작한 모드 게임들을 공유하고 플레이하는 일이 낯설지는 않다. 〈로블록스〉를 통해 게임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직접 구매하여 플레이하며 동료 플레이어들 상호 간에 소통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프라스카는 대략 20여년 전의 기술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난해해 보이는 실험들을 제안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그의 작업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 프라스카의 첫 실험은 게임 역사상 매우 성공했고 중요한 게임이었던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즈〉를 기능전환하는 것이었다. 〈심시티〉의 개발자이기도 한 윌 라이트는 〈심즈〉에서 일상의 삶과 생활을 시뮬레이트함으로써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심(Sim)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만들어 삶을 살며 주변을 관찰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원래 윌라이트는 이 게임의 아이디어를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책『패턴 랭귀지』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건축이 인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256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라고 한다. 윌 라이트는 비디오게임을 통해 이러한 다양한 패턴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다. 〈심즈〉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인간관계가 어떻게 상호반응하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디자인한 ‘심’들을 통해 인생을 계획하고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동일시에 가까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심즈〉인 것이다. 플레이어가 ‘스킨 Skin’ 기능을 통해 직접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 벽지나 바닥재 등의 재료들로 집을 꾸미고 가족의 삶을 설계하는 일은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중 단연 즐거운 것은 각종 게임 정보, 각 플레이어들의 캐릭터들과 심들의 삶 등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유저 커뮤니티가 있어 게임을 사회적 활동으로 승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커뮤니티 기능은 게임에 쉽게 싫증나지 않게 해주고 인간사의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회사가 계속해서 확장 팩을 내놓으면서 게임 세계와 행동 영역을 확장해나간 것도 게임의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프라스카가 〈심즈〉를 시뮬레이션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의 게임 변형, 즉 ‘모드’(mod, modification)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영상이나 그 경험물들을 게임의 일부로 수용하고 그것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신선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심즈〉의 발표 당시 이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프라스카는 〈심즈〉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기능에 주목한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영웅이나 스타, 혹은 자신들처럼 보이도록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를 구상한다. 물론 프라스카의 출발점은 원작 〈심즈〉의 규칙과 메커닉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이다. 이 게임은 가족의 삶과 인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게임 산업에서 분명한 약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소비주의적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플레이어들의 소유가 늘면 늘수록 친구가 늘어나는 식의 규칙을 내장하고 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이 게임은 도시 근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뮬레이트하면서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백인중상층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들의 겉모습만을 바꿀 수 있는 자유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게임 개발자의 설정이나 규칙, 이미지 재현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프라스카가 게임 규칙의 전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심즈〉가 비판적 사유의 촉진을 위한 실험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들이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접근을 허락하도록 충분히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캐릭터의 겉모습을 바꾸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도전과 변형을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자질구레한 규칙들을 변형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것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중에 발매된 〈심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캐릭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들에는 게임 혹은 게임을 만든 개발자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규칙에 대한 변경을 실험하도록 하는 것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의 목적이다. 우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양 skins’ 다운로드 기능에 추가로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 디자인과 이에 대한 플레이어 상호 공유 시스템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존의 심즈는 6가지의 행동 스타일 혹은 인물 성향에 따라서만 게임을 진행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게임의 현실감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동료 플레이어들이 어떤 플레이어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해 그들 각각의 대안들을 디자인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플레이어들 서로 서로에게 더욱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의 개선을 요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디자인 툴’을 제공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보알의 연극 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이다. 즉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해 해답이 될 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훌륭한 논쟁과 토론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심즈〉에 대한 기능전환이 비디오게임 자체의 위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최대의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보다 더 많은 변형의 자유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프라스카가 아그네스(Agnes)라는 가상의 소녀를 통해 소개하는 사례를 통해 그의 생각을 구체화해보자. 아그네스 Agnes는 지금 한 동안 〈심즈〉를 플레이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 게임의 규칙과 기본 메커니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 관계가 보다 현실적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 교환 Character Exchange’ 사이트로 가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검색한다. 그녀는 흥미 있어 보이는 한 캐릭터를 발견한다. 이것은 ‘데이브의 알콜 중독 어머니 버전 0.9 Dave's Alcholic Mother version 0.9’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그 게임을 설계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일로 보내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 피곤하다. 여전히 그녀는 저녁을 조리할 것이고 약간의 청소도 할 것이다. 그녀의 가혹한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머니는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신다. 그녀는 아이들과 애완동물 때문에 매우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를 시험해볼 생각을 하고 그녀가 이전에 플레이해왔던 집 안으로 그 캐릭터를 다운로드한다. 이 가정은 부부와 세 아이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운로드 이후 어머니는 ‘데이브의 알콜중독 어머니 버전 0.9’로 대체된다. 이 캐릭터는 흥미롭다. 한동안 그 캐릭터를 가지고 플레이하고 난 후 아그네스는 그 캐릭터가 어느 정도의 피로에 도달하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마시면 마실수록 가족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가 꽤 잘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가 동의할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음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 캐릭터의 배경은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덧붙여 이 캐릭터의 직업은 형편없다. 그리고 일들을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알콜 중독 어머니’는 거실의 작은 바에서 계속해서 퍼마신다. 아그네스의 생각에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은 빈약한 교육을 받았고 형편없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그네스는 일반적으로 알콜 중독자는 집 주위에 술병을 감추지 공개적으로 마시려 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캐릭터 교환’ 사이트로 가서 다른 알콜 중독 어머니를 찾아본다. 그녀는 유망해 보이는 ‘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2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를 발견한다. 그것을 실험한 후 그녀는 이 캐릭터의 행동이 그녀가 그것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적합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엄마가 감리교도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버전의 디자이너가 고집한 이유에 매료된다. 그 사실은 엄마의 알콜 중독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캐릭터 디자이너의 웹 페이지를 체크하고, 이 캐릭터가 감리교도였던 어떤 실제 인물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것임을 말해주는 짧은 내러티브를 발견한다. 아그네스는 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알콜 중독의 행동 부분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감리교도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의 코드를 변경하기 위해 ‘에디터 editor’ 기능을 이용하고 종교와 관련된 언급들을 삭제한다. 그녀는 또한 몇몇 작은 디테일들을 추가한다. 가령 엄마가 어떤 브랜드의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후 그녀는 그것을 ‘아그네스의 알콜 중독 어머니 1.0-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0에 의거함 Agnes' Alcholic Mother 1.o-Based on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탑재하고, 주요 행동 규칙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몇 주 후 아그네스는 알콜 중독 어머니의 플레이에 약간 싫증을 느끼고 그녀에게 약간 더 많은 개성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가 생태론자 ecologist가 되면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그네스는 ‘피터의 급진 그린피스 활동가 버전 9.1 Peter's Radical Greenpeace activist version 9.1’을 다운로드한다. 그녀는 자신의 알콜 중독 어머니에 약간의 부수적인 변형들과 더불어 피터 버전의 코드를 편집하고 그것을 카피하고 짜깁기한다. 이제 어머니는 식물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고 술에 취했을 때도 고양이를 차거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후 아그네스는 스스로 설계한 게임을 사이트에 탑재한다. 이 게임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의 비평과 토론이 이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탑재한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그네스나 다른 동료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변형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게임에 대해 크고 작은 규칙들을 변경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과정은 보알의 ‘포럼연극’(forum theatre)처럼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한 참여자들 각자의 생각들을 피력하는 가운데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공감과 협력의 과정이다. 이는 전설적인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워〉의 완성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품을 팔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과 그의 MIT 동료 해커들을 떠올리게 한다. 플레이어들은 크고 작은 정치적ㆍ사회적 억압들을 반영한 새로운 게임들을 디자인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게임에 비판적인 자기 의견을 반영하여 규칙이나 설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군가의 게임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그레이드 버전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나 합의 도출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생각들을 담아 스스로 만들고 보탠 게임들로 어떤 문제들을 공유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가며 인식의 확장과 상승을 경험하는 것이 프라스카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이러한 창작 플랫폼을 ‘메타 시뮬레이션’(meta-simu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참여와 소통을 도와주는 게임 창작 시스템을 가리킨다. 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의 행동을 디자인해라’라는 기능이 윌라이트의 〈심즈〉 원작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다만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는 것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심즈〉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행동 폭 역시 무척 제한적인데, 그들 캐릭터는 ‘단정’, ‘사교적’, ‘활동적’, ‘쾌활’, ‘섬세한’이라는 주어진 성격 안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복잡한 결들과 인간관계의 다층적 갈등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프라스카가 보기에도 〈심즈〉는 다른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자유도에도 불구하고 규칙의 제한에 갇혀 있는 게임이고, 부자가 더 많은 친구를 갖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있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개발자가 마련해둔 규칙과 행동 패턴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에 딴지를 걸 수 없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심즈〉에 캐릭터의 부분적인 변경 이외에 게임 규칙 혹은 행동 규칙의 변경의 자유를 플레이어에게 허용하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PMO’ 프로젝트: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의 또 하나의 사례로 프라스카는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기’(Play my Oppression, PMO)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보알의 연극 테크닉인 ‘이미지 연극’(Image Theatre)에 바탕을 둔 실험이다. 이미지 연극에서 ‘관객-배우’들은 본인들의 억압적 상황이나 차별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몸 혹은 간단한 소품들을 ‘빚고’ ‘조각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해 볼 것을 요청받는다. 이 실험에서 ‘관객-배우’들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몸만을 이용하여 어떤 ‘이미지’를 조각해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미지를 수정하는 ‘이미지 연극’의 작업은 ‘몸으로 하는 포럼연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의 목표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행위와 몸짓들을 통해 억압과 차별이 재생산되고 있고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수준에서 우리의 편향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다른 인종, 종교, 젠더, 국적 등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은 몸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보알의 ‘이미지 연극’을 통해 참여자들은 뿌리 깊은 차별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구조와 제도 및 권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몸을 통해 체험하고 사유한다. 프라스카는 보알의 실험을 통해 처음 한 사람이 몸을 통해 제시한 자신의 ‘억압 이미지’에 대해 참여자들이 서로 그 이미지를 수정하며 일종의 ‘대안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상호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참여자들 스스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점에 주목한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PMO’ 비디오게임은 몸이 아니라 마우스와 자판, 조이스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그는 연극에서의 몸이 아니더라도 비디오게임의 특별한 기능을 활용하면 보알의 퍼포먼스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시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물론 ‘포토앨범’ 기능이 게임 규칙의 설계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고 플레이어 자신의 선형적인 내레이션의 창작만 허용한다. 이 기능을 이용하여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들을 활용하여 그것에 설명을 달고 자기만의 ‘가족앨범’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재구성한 이 앨범은 인터넷에 마련된 사이트에 올릴 수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능을 자기만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심즈〉를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는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게임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요한 장면을 캡쳐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임으로써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심즈〉의 디자이너 윌 라이트가 소개한 포토 앨범 중에는 폭력 남편과 살던 여성의 동생이 올린 글이 있었다. 인터넷 심즈 사이트에 올라온 이 콘텐츠에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언니가 폭력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경위, 남편이 더욱 폭력적으로 되어가면서 파경에 이르게 된 사연 등을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물론 허구적일 수도 있는 이 스토리는 무척 현실감이 있는 것이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활발한 토론의 계기를 제공했다. 윌 라이트는 게임의 토론 유발과 공감대 형성 과정에 주목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스토리텔링 구성 기능을 강화하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의 이행을 위해서는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이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화나 영화 같은 정적인 내러티브 시퀀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즉 게임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즈〉의 원래 ‘포토앨범’ 기능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완결적’ 사건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가 작성한 스토리는 고정된 것이고 닫힌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에 의한 이야기 변경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스토리를 경험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에 대해 댓글만 올릴 뿐 상황 자체의 변경을 통한 대안 제시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폭력남편’ 이야기를 올린 플레이어의 진짜 의도가 또 다른(‘대안적인’) 게임의 창조였다는 가정하에서 일종의 기능전환을 시도한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다른 행동 모델들을 실험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인간 관계들과 물질적 상황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상호토론을 통해 인간과 현실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인식의 강화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프라스카의 기대이다.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즉 ‘PMO’의 실행을 위해서는 우선 한 참여자가 직접 겪거나 경험한 개인적 문제와 고민을 모델화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 이후 다른 참여자들은 그것을 플레이해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들은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게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에 대한 플레이와 토론, 수정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사회ㆍ정치적 대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물론 플레이어들 스스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참여를 위한 다양한 툴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그리고 비교적 쉽게 게임을 변경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방편들이 주어지고 있다. 프라스카 역시 앞으로 컴퓨터게임이 더욱 대중화될수록 ‘시뮬레이션의 처리능력'(simulation literacy) 역시 더욱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오늘날의 시뮬레이션 창작 환경은 프라스카의 기대와 상상 그 이상으로 진화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곤잘로 프라스카가 제시한 사례를 통해 ‘PMO’의 과정을 구체화해보자. 프라스카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부모나 주변에 ‘커밍아웃’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터(Peter)라는 주인공을 가정하여 샘플 시나리오를 짠다. 일단 게임 커뮤니티에서 피터의 시나리오가 승인되고 나면 그는 이 문제를 토론하려고 하는 방에 게임을 만들어 놓는다. 프라스카는 이를 ‘옵 게임’(op-games, oppressive games), 즉 억압을 시뮬레이션 해놓은 게임으로 부른다. 이 게임에는 피터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복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문제들이 재현되어 있다. ‘옵-게임들’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보알의 연극처럼 성소수자 피터가 겪을 수 있을 문제들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터의 경우에도 부모에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들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고전 게임의 레벨 디자인처럼 말이다. 여기서 피터는 자신이 대결해야 할 세 가지 과제, 혹은 꼭 극복해야 할 세 개의 난제를 비디오게임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각각의 게임에 〈모욕〉, 〈나는 누구인가?〉, 〈사회〉라는 제목을 달아주었다. 〈모욕〉은 이상한 놈 취급을 당하는 주인공 피터가 주변 사람들, 특히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집단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는지를 보여준다. 피터는 우선 이 문제의 시뮬레이션에 적당한 고전 비디오게임을 선택한다. 피터는 손수 제작한 그래픽을 업로드하거나 이전에 누군가 제작해놓은 것을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의 기능 향상을 위해 몇몇 기능들을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 고전 게임들에 기반하여 다양한 모드들을 창조해보고 그중 피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유용한 것들을 선별하여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능성들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고 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에게는 피터의 버전을 더욱 정교하게 개선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프라스카의 피터는 다음과 같은 일러스트로서 자신의 첫 번째 게임을 표현한다. 이 일러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피터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게임 모딩의 템플릿으로 선택했는데 외계인의 우주선 그래픽을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학생들의 모습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원작 게임에서와는 달리 피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발사할 수 없다. 피터가 지금 겪고 있는 곤란은 동료학생들의 집단 이지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처럼 행동을 통해 사태를 해결해버린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 게임을 즐기면 그만일 뿐 그 이상의 토론과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는 이 시뮬레이션에 첨부해 놓은 ‘디자인 노트’에 이러한 사정을 밝혀 놓았고,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은 집단 토론과 참여를 통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몇몇 플레이어들은 피터의 게임을 수정하여 다른 버전의 게임을 디자인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 그림은 플레이어들이 제안한 또 다른 해결책을 보여주는 게임 그래픽들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이 주제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할 수 있는 예술작품(가령 노래나 시)을 창조하고 반 아이들과 이를 공유함으로써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다보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플레이어는 귀를 막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주변 학생들의 모욕스러운 공격들을 무시해버리라고 제안한다. 피터의 게임들에 대한 이러한 변형은 무척 간단한 것이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변형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다중 선택’(multiple-choice) 매뉴얼을 활용함으로써 원작 게임의 모든 그래픽을 변경할 수 있고 자신의 사진이나 UCC 그래픽들을 업로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탑재된 게임들을 매개로 오고 가는 다양한 의견들은 개인적 수준의 소박한 해결책부터 동성애나 소수자, 왕따 문제 등에 대한 사회ㆍ정치적 구조 분석과 원인 진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스카는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사회적 인식이 상승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게임의 다음 모형은 대전게임의 고전 〈스트리트 파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피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여 게임을 디자인해 놓았다. 그는 거울에 반사된 자기를 볼 때마다 ‘괴물’을 본다. 내면의 성적 성향과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적 시선이 충돌하는 가운데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디자인 노트’에 피터는 이러한 일이 가끔 일어나는 일이며 그때마다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라는 분열적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 게임에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 두 정체성’이 계속해서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일이 전부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피터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쟁점이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게임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답보다는 좋은 대화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법이니 말이다. 마지막 게임인 〈사회〉의 실물 모형은 〈테트리스〉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 커플을 짝지을 수 있다. 만일 플레이어가 소녀-소년 커플로 짝을 지우면 그 커플은 계속 재생산되거나 복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도 어떤 커플이 가장 이상적인 커플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역시 게임의 목표는 엔딩을 맛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게임들은 모두 ‘열린 게임’이고 이는 참여자들의 토론과 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성적 취향이라는 것이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들을 토론할 것이고, 모든 커플의 차이는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세 게임이 모두 온라인에 탑재되고 난 후 모든 참여자들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운데 다양한 참여를 할 수 있다. 그저 게임만 플레이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게임 소감부터 피터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결책들을 댓글의 형태로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떤 참여자들은 피터의 세 게임들에 자극을 받아 게임을 모딩함으로써 수정된 버전의 게임을 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팩맨〉에 기반하여 다른 플레이어(일명 ‘캐시’)가 디자인한 대안적 게임이다. 물론 ‘포럼’은 피터의 게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이 토론의 대상으로 추가되면서 더욱 많은 크고 작은 토론들이 가능할 것이다. 캐시(Cathy)라는 여성은 〈사이먼이 말하기를〉이라는 게임을 이용하여 몬스터 게임을 디자인한다. 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1등 따라하기〉 놀이처럼 말이다. 플레이어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그 이미지는 서서히 변할 것이다. 캐시는 예전에 피터와 동일한 경험을 했었고 스스로 감내하고 맞서야 했던 수많은 차별적 상황들을 게임에 담아놓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 그녀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를 자기 게임의 테마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결국 게임의 플레이와 토론 과정을 통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의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의 방안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코로나 19의 상황을 거치며 우리의 삶이 무척이나 각박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중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종, 젠더, 민족,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소수자들이 그들이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은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치며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억압과 차별의 철폐를 향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최근의 경우처럼 퇴행적인 ‘갈라치기’의 흐름이 강고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 사회도 결국에는 동료 시민들과 ‘같이 살며 같이 즐기는’ 공환(共歡, conviviality)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래는 그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무개’들의 협력은 억압과 차별 없는 미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게임에 앞서 문학과 연극, 영화, 만화 등은 소수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감싸 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은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를 공감과 인식의 장으로 초대하며 연대의 매개자가 되어줄 것인가? 아직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도 그랬던 것처럼 게임 역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주제로 즐기며 배우는 기회들을 보다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미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보알의 연극에 영감을 받은 곤잘로 프라스카는 비디오게임 역시 억압적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보알의 연극 테크닉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연기자가 되게 함으로써 개인적ㆍ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해결책들을 표현하게 한다. 물론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이상적 결론’이 아니다. 프라스카의 목표는 주류 비디오게임들의 당연시되는 규범들을 해체하고 게임을 사회적 의제(agenda)에 대한 토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사태들을 게임에 담아내고 그 게임을 같이 플레이하며 토론하고 숙의하며 저마다의 대안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라스카의 게임 프로젝트는 구체적 실천의 필수적 전 단계인 반성과 인식의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적ㆍ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현실 인식의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게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주류 게임산업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프라스카의 비전들은 ‘몽상’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게임 창작 환경, 게임의 플레이를 넘어 ‘보기’와 ‘만들기’로 확장되고 있는 ‘게임하기’의 실천들은 게임의 다양성 환경 구축에 유리한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 게임과 ‘다른’ 게임들에 대한 수요도 있다. 필요한 것은 게임 사용자들의 의지이며 전환적 사고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게임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과 향유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김겸섭 독일공연예술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공연예술과 문화연구 관련 공부와 함께 공연 및 축제 연출과 기획일을 하였다. 이후 공연학 공부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디지털게임 연구를 시작하였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컴퓨터게임의 윤리』를 번역하였고 『모두를 위한 놀이 디지털게임의 재발견』,『노동사회에서 구상하는 놀이의 윤리』를 썼다. 지금은 독일공연예술과 문화콘텐츠 관련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선오

    김선오 김선오 영문학을 전공하고 중세 로맨스에서 여성의 사랑이 재현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꾸준히 플레이해 왔지만, 특히 중학생 때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프랜차이즈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삶의 궤적이 전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비디오게임, 영화, 드라마 등 동시대 미디어가 역사, 역사적 배경, 그리고 역사와 개인(특히 여성)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Read More 버튼 읽기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최선주

    최선주 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하데스 Hades〉는 혹평이 거의 없는 좋은 게임의 정석 같은 게임이다. 2020년 하반기 최고작으로 뽑히며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TGA) 올해의 게임 노미네이트, 각본상, 인디 게임상, 액션 게임상을 수상했고, 메타크리틱 게임 리뷰에서 93점의 높은 점수를, 현재 스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SF 문학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니, 국내의 한 게임 비평지에서는 “하데스는 깔 게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렇게 길게 수상 목록과 긍정적인 평가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하데스〉가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 8

    GG Vol. 8 온라인이 보편화되면서 게임 또한 계정 생성과 로그인을 통해서 접근가능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서버로부터 분리되어 작동하는 오프라인 게임 시대로부터 진화해 온 현대의 게임에서 오프라인 게임은 어떤 유산을 남겼고 어떻게 역사에 남을 것인가? BIC 2022 탐방기 9월 1일부터 9월 4일 까지 부산역 근처 부산항 국제전시 컨벤션센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게임 행사가 열렸다.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발이다. 올해로 8번째를 맞은 이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2020년 은 완전 비대면으로, 2021년엔 사전선정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할수 있게 한정적으로 열렸다. 코로나가 완저히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점진적으로 해제되면서 3년만에 완전 오프라인으로 열린 셈이다. Read More Editor's View: 오프라인은 어떤 의미인가? GG 8호가 주목한 주제는 ‘오프라인 게임’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의 게임들은 온라인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지만, 게임의 역사를 돌아보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오프라인 기기 기반의 플레이들이 만들어 온 맥락이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Read More [북리뷰] 피, 땀, 리셋 - 리셋 버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비디오 게임을 개발하며 살아간다는 것 비디오 게임 제작은 어렵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규모의 수많은 게임들이 기획되고, 제작되지만 실제 완성되는 것은 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다. 게임이 제작 도중 엎어지는 이유는 수 없이 많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제작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구현해 봤더니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와서 더 이상 개선을 할 수 없어 개발 중단을 선언하게 되는 경우도 매우 많다. 2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경험과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를 바탕으로 감히 멋대로 주장하건데, 개발을 시작한 비디오 게임이 단지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비율만 따져도 아마도 고작 10% 미만에 불과할 것이다. Read More [인터뷰] e스포츠의 현장감은 어디서 오는가: 라이엇게임즈 함영승 PD 그런데 따지고 보면 뭔가 이상하다. ‘현장 중계를 가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말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아쉽다는 의미인데, 게임의 배경은 이미 온라인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면 e스포츠에서 현장감은 무엇을 의미할까?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소환사의 협곡’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인데, 대체 팬들은 어떠한 지점에서 현장감을 느끼는 것일까? 전통적인 스포츠에서 이야기하는 현장감과 e스포츠의 현장감은 그 성질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이번 호에서는 MBC에서 전통 스포츠를 중계하다가 지금은 LCK 중계를 하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함영승 PD를 만나고 왔다. Read More ‘대항해시대 오리진’, 멀티플레이의 계층화와 사이버 농노들 비동기 멀티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시류에서 도드라진 방식이다. 모바일, 그리고 무선 네트워크라는 아직 태동기에 불안정성이 남아있던 플랫폼들은 참여자들이 동시에 접속하지 않으면서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체계를 필요로 했고, 이것은 비동기 멀티플레이라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현재 이 방식은 비단 모바일 플랫폼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특유의 선택적 연결성 덕분에 많은 게임에서 채용되곤 한다. Read More ‘아카트로닉스’라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이라는 것이 있다. 호기심의 방은 말 그대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진귀하고 이국적인 것들, 때로는 괴이한 것들로 가득찬 공간이었다. 주로 16-17세기 영국에서 개인 컬렉터들에 의해 만들어진 호기심의 방은 박물관의 기원 중 하나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 공간이 단순히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수집 공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보여졌다. 당대에 가치있던 고미술품이나 유물, 또는 명망있는 화가의 작품이 아니었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상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Read More 〈포켓몬 고〉는 당신의 시공간에 침투한다 〈포켓몬 고〉는 2016년 글로벌 출시된 증강 현실 모바일 게임이다. 증강 현실이란 더해진 현실이라는 뜻이니, 현실 위에 정보 레이어가 한 겹 더해졌다는 의미다. 일반적인 지리 데이터 위에 포켓몬스터 데이터를 덧씌워보니 게임이 탄생했다. 출시 초기 〈포켓몬 고〉는 플레이어의 GPS를 추적하여 구글 맵 위에 포켓몬들을 등장시키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만 보여주던 포켓몬스터 트레이너의 삶을 살아보도록 선보였다. Read More 북미의 보드게임: 원조국가의 또다른 면모들 십수년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낯설던 단어는 비디오 게임이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자라온 나에게는 ‘게임’이라고 하면 컴퓨터나 콘솔을 이용해서 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달랐다. 테이블탑 혹은 보드 게임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매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내가 아는 게임은 반드시 비디오 게임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걸 알게됐다. Read More 사파의 탄생과 몰락 아케이드에서 가동 중인 대전 격투 게임을 가정으로 온라인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최초의 시기는 94년 말 미국에 출시된 메가드라이브 용 X-Band로, 당시로서는 강력한 2,400bps 전송속도의 모뎀을 통해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 2 같은 게임들을 미지의 상대와 가정에서 대전이 가능했다. 그러나 콘솔 능력의 한계로 아케이드 게임 자체를 그대로 옮길 수 없던 시기였으니, 진정한 의미의 (열화 없는) 아케이드 게임을 온전히 집에서 즐기는 환경은 사실상 14.4kbps의 모뎀을 새턴에 연결하여 즐길 수 있었던 96년에 발매된 버추어 파이터 리믹스가 최초라 할 수 있다. Read More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Read More 온라인 시대의 살아있는 화석, 보드게임 이야기 1938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가 알려진 실러캔스라는 어류 개체가 있다. 실러캔스는 약 3억 7천 5백만년 전 지구상에 출현하여, 약 7천 5백만년 전 절멸했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러캔스는 살아있었다. Read More 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Read More 우리의 UX를 찾아서: 오락실 코옵을 추억하다 그 시절 같은 학교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었다. 무슨 게임을 하든 가장 마지막 코스는 <갈스패닉 S2>로 플레이하기로 한 것이었다. <갈스패닉>이란 쉽게 말해 땅따먹기 게임으로 상하좌우에 대각선까지 8방향으로 기체를 조작해 구역을 확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갈스패닉>에서는 땅을 따먹으면 그 구역에는 ‘갈’이 등장했고, 특정 퍼센테이지를 완수하면 온전한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 인기 요인은 일러스트였다. Read More 캣스모폴리틱스(Catsmopolitics): 고양이와 기계가 자본세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 인종차별, 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장기화된 실업, 투기와 불평등, 전쟁과 극우정치가 만연한 오늘날 유일하게 아무에게도 미움 받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고양이일 것이다. 좌파도 우파도, 남성도 여성도, 베이비부머도 청년도, 무슬림도 카톨릭도 고양이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기꺼이 골목길에 사료와 물그릇을 갖다놓으며, 고양이와의 사랑스런 일상을 촬영해 공유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Read More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Read More 혼자-서 오롯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은 : 싱글 플레이에 던지는 물음 오래전 어느 PC게임 잡지의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칼럼에서 글쓴이는 재미있게 플레이하던 게임을 끝내는 것이 아쉬워 엔딩을 앞두고 진행을 멈춘 채 머뭇거린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칼럼의 핵심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음에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머뭇거림’의 정취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Read More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서다솜

    서다솜 서다솜 큐레이터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종종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주로 게임을 한다. 큐레이터 게임 동호회 'Mods'의 멤버다. Read More 버튼 읽기 모험은 그곳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의 모험에 대하여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험가가 된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나가며 때로는 자신 안의 영웅적 면모를 깨워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산재된 난제를 해결하는 모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며 게임을, 모험을 이어왔다. 게임과 모험은 그 궤적을 함께하며 게임을 경험하는 친숙한 방법론을 구축해왔다. 게임의 역사 자체가 일종의 모험기처럼 계속해서 쓰여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 글은 ‘게임’이라는 오래된 모험기를 다른 방향에서 펼쳐 본다. 거꾸로 펼친 모험기는 모험의 바깥에서 주인공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

  •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 Back [북리뷰] 게임콘솔 2.0: 현대 게임기의 계보와 궤적을, 사진으로 읽다 11 GG Vol. 23. 4. 10. 한 남자의 자원봉사에서 시작된 ‘디지털 박물관’ 에반 아모스(Evan Amos)라는, (북미 게임기 시장 대붕괴 시기로 유명한) 1983년에 태어난 한 미국인 남자가 있다. 어린 시절을 비디오 게임을 벗 삼아 왔기에 게임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2000년대 중반쯤 위키백과를 뒤적거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 문서에 실린 고전 게임기들의 사진 퀄리티가 너무 조악했다 는 점이었다. 지금의 웹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당시 웹 문서들의 사진자료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초기이기도 해서 개인이 형편 되는 대로 찍어 자가 제공한 사진들 일색이었으므로, 그때 눈으로 봐도 거개가 저해상도 저퀄이기 일쑤였다. 물론 하드웨어 제작사가 말끔하게 찍은 공식 사진자료가 있기는 하나, 당연히 제작사에 저작권이 있는데다 언론사 등에나 한정적으로 제공되기에, 공공자료로 개방되어 인용용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퀄리티 사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건 내가 기여할 수 있겠다’라는 점에 눈뜬 아모스는, 독학으로 사진기술을 배운 후 자신의 Wii를 피사체로 삼아 DSLR과 전문장비로 깔끔하게 고화질 사진을 찍어 2010년 8월 28일 영어 위키백과에 공공재(public domain) 형태로 공개 했다. 그의 첫 ‘기여’였다. 이 ‘무료봉사’는 점점 가속도가 붙어, 온라인 중고장터에 공고를 내기도 하고 사설 수집가들에게서 기기를 제공받기도 하고 뜻있는 사람의 기부까지도 받아가며 일종의 ‘사회활동’으로까지 발전해, 2015년이 되자 위키백과 산하의 디지털 자료 아카이브 사이트인 위키미디어 공용 에 자신의 사진이 모인 대규모 저장소인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 을 만들기에 이른다. 현재 영어판을 포함한 각국 위키백과의 고전 게임기·컴퓨터 본체 사진은 거의 전부가 이 아모스의 자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심지어 모든 사진의 라이선스가 공공재라 마음껏 갖다 써도 문제없다. 서양권 및 일본에 공식 발매된 어지간한 게임기·컴퓨터라면, 여기에서 아모스가 찍은 인쇄물 퀄리티의 초고화질 사진자료(유명 기기라면 내부구조와 기판 사진까지 있다)를 손쉽게 다운로드받아 상용·비상용을 막론하고 자유롭게 가공하거나 인용·사용할 수 있다. 고전 게임기나 컴퓨터에 관련된 정보글이나 기사, 책 등을 (특히 직업적으로) 만들어온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 아마도 직간접적으로 아모스의 사진자료 신세를 졌을 것이다. 심지어는 아모스의 이름조차 여태껏 몰랐더라도. 10년 이상에 걸쳐 구축된 아모스의 귀중한 사진 라이브러리는 이제 전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출판사·저작자·웹사이트 등에서 절찬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필자 역시 다년간 비디오 게임 관련 기사·특집·컬럼 등을 저작하는 과정에서 ‘기기 사진이 필요할’ 때마다 방문하여 애용해 왔다. 이 계열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저작물에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인용하거나 가져다쓸 수 있는 사진자료 라이브러리가 존재한다 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아모스에게는 오랫동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느낌을 항상 갖는다. 그 ‘디지털 박물관’의 공식(?) 도록 지난 12월 29일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임 콘솔 2.0 : 사진으로 보는 가정용 게임기의 역사」는 이 아모스가 자신이 그간 찍어온 사진들을 소재로 삼아 2018년 북미에서 첫 출간한, 말하자면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의 공식 도록 에 가까운 느낌의 책이다(‘2.0’이 붙은 이유는, 기기 및 내용을 증보하여 2021년 재출간한 개정판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모스는 사진가 겸 비디오 게임 아키비스트로 활동하면서 2013년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을 열어 1,018명의 투자자와 $17,493의 자금을 모아 신규 기기들(덕분에 일본 게임기·PC 상당수가 추가될 수 있었다)을 확충했는데, 「게임 콘솔」은 그 크라우드펀딩 덕분에 탄생한 결과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진자료집에 그치지 않고 ‘1970년대 초창기부터 현 시점(2021년 기준)에 이르기까지,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하드웨어 사진 중심으로 훑는 가벼운 역사서’처럼 꾸민 것이 이 책의 최대 특징으로서, 기기마다 기본적인 발매시기, 하드웨어 사양, 간단한 소개글, 발매 당시의 의의와 시대상황 등을 정리해 깔끔한 사진과 함께 넣었고, 중요한 기기의 경우 분해하여 내부 기판 및 구조까지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972년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부터 2020년의 Xbox Series S/X와 플레이스테이션 5에 이르기까지 근 40년 9세대에 걸친 하드웨어 발전사의 온퍼레이드로서, 패미컴이나 메가 드라이브처럼 충분히 유명한 기기들뿐만 아니라 페어차일드 채널 F나 벡트렉스처럼 북미 비디오 게임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여야 알까 말까한 마이너한 게임기까지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다. 말미에는 일종의 부록으로서, 지금 시대에 고전 게임을 즐기는 데 있어 발생하는 애로사항 및 대처법에 대한 간단한 안내와, 지면·자료 관계성 등의 문제로 누락됐지만 언급할 가치가 있는 마이너 기종ㆍ파생기종들에 대한 사진 및 소개문도 실려 있다. 꾸준히 개정판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며 기본적으로는 사진 위주의 도록 컨셉이고 방향성 자체도 워낙 확고하고 유니크한 책인지라 장점과 의의가 압도적이고, 고전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에게 일독을 추천할 만한 훌륭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가정용 게임기의 역사’라는 부제부터가,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을 잘 압축해낸 문장인 셈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일단 (미국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한계이겠으나) 서술의 중점이 결국 미국 및 영미권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게임 콘솔의 역사에서 미국만큼이나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하드웨어 및 그 사회상·사정이라, 영미권 중심의 서술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점이다(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라 서양 저자가 쓴 일본 게임 역사서나, 반대로 일본 저자가 쓴 서양 게임 역사서에서 흔히 보이는 빈틈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 등 비영미권의 하드웨어 중 누락된 것이 제법 있어(예를 들어, MSX는 일본은 물론 유럽권에서도 수많은 기종이 발매되었으나 책에는 단 한 기종만 수록했다) 아쉬움을 더한다. 또한, 비디오 게임의 역사에서 ‘게임기’만큼이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컴퓨터’ 쪽의 누락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도 아쉽다. 코모도어 64나 ZX 스펙트럼처럼 서양권 8비트 컴퓨터 계보 초기의 인기 기종들이 실려 있긴 하나 비중이 크지는 않으며, 애플 Ⅱ나 IBM PC처럼 빼놓고 지나가면 안될 법한 기종의 누락도 있다. 저자의 서문에는 ‘책 내의 세대 구분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컴퓨터를 포함시키기 어려웠다’라는 대목이 있고, 바나모 온라인 게임 박물관의 라이브러리 내에서도 레트로 컴퓨터 쪽은 상대적으로 구색이 불충분한 편이라, 이쪽은 고전 컴퓨터 쪽을 다루는 별도의 책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일단 책 제목이 ‘게임 콘솔’이기도 하니까). 소소하게는 영미권 외 국가의 오리지널 기종들의 빈자리가 큰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예를 들어 한국 오리지널 기종의 경우 이 책에서는 유이하게 GP32와 삼성 엑스티바(‘누온’ 제하로 실려 있다)가 들어가 있다. 모두 북미에 시판된 적이 있는 기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의의만큼이나 한계점도 큰 책이라는 점은 짚어두지 않을 수 없겠으나, 고전 컴퓨터·게임기를 다루는 외서가 예나 지금이나 한국어판으로 원활히 번역 소개되는 경우가 드문 현실을 고려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정식 발간은 큰 의미가 있다. 아모스의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원하며, 혹시 후일의 「게임 콘솔」 개정판에 한국의 오리지널 하드웨어가 추가될 수 있다면 전 세계의 애호가들에게도 새로운 발견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져본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월간 GAMER'Z 수석기자) 조기현 ‘국민학교’ 때 친구 집에서 금성 FC-150과 패미컴을 처음 접했고, APPLE II+ 호환기종으로 컴퓨터에 입문했다. 중·고교 시절을 16비트 PC 게이머로 보낸 후 플레이스테이션을 접하며 가정용 게임기 유저로 전향, 게임으로 영어와 일본어 독해법을 익혔다. 이후 2002년부터 현재까지 (주)게임문화의 월간 GAMER'Z 수석기자로 재직중이다. 8~90년대 한국 게임 초창기의 궤적을 텍스트로 복각해보고 싶어 한다. 저서로는 〈한국 게임의 역사〉·〈우리가 사랑한 한국 PC 게임〉(모두 공저), 감수로는 〈페르시아의 왕자 : 개발일지〉와 〈여신전생 페르소나 3·4 공식설정자료집〉 등이 있으며, 2019년부터 레트로 게임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해설하는 무크집 〈퍼펙트 카탈로그〉 시리즈 연작의 한국어판을 번역·감수하고 있다. 최신간은 〈패미컴 퍼펙트 카탈로그〉와 〈세가 초기 게임기+겜보이 퍼펙트 카탈로그〉(근간 예정)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민호

    김민호 김민호 데카르트의 『정념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데리다 사유의 전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매체나 문화에 대한 철학적 비평에 관심을 두고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리듬 게임, 가장 빈곤해서 가장 자유로운(우수상) 거듭 말하자면 리듬 게임은 빈곤한 장르다. 그러나 그 빈곤함은 게임 일반에 공통된 특정한 요소를 급진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세공된 빈곤함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조차도 우리는 상대와 ‘동시’에 손을 내밀어야 하고, “안 내면 술래”다. 동궤에서 리듬 게임은 유한하고 폐쇄적인 장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유한성과 폐쇄성 덕분에 우리는 극도의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Kim Gyuri

    Kim Gyuri Kim Gyuri A researcher studying at Sungkyunkwan University, Department of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with the focus on immersive gameplay prompt from pre-existing canon versus unexpected encounterments. She is a long-time player of Bungie’s and excited for reboot. Read More 버튼 읽기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 [인터뷰] 창간 2주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

    < Back [인터뷰] 창간 2주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 <게임제너레이션> 이경혁 편집장 인터뷰 13 GG Vol. 23. 8. 10. 글을 쓴다는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세부적으로는 글의 양식과 성격에 따라 글의 목적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글은 소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통이란 필자의 ‘쓰기’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읽기’와 함께 구성된다. 2년 전, <게임제너레이션>(이하 GG)은 “선언을 넘어선, 실천으로서의 게임문화”를 외치며 창간했고, 설령 독자가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 믿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독자층이 만들어지며, 우리는 함께 다양한 게임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독자들과 여러 필진이 함께 만들고 있는 게임 담론은 지금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읽고 쓰는 행위는 게임문화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이 되고 있는가? 창간 2주년을 맞아, GG의 이경혁 편집장과 평소에는 담지 못했던 웹진 자체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왔다. GG가 만들어졌던 배경이나, GG를 만드는 당시 상상했던 독자층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더욱 고민하게 할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Q: 평소에는 함께 인터뷰 질문을 드리는 입장이었는데, 이렇게 편집장님께 질문을 하는 상황이 신선하네요. 독자분들도 비슷한 감상이실 것 같은데, 먼저 편집장님을 잘 모르시는 독자분들께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경혁 편집장: 2016년에 첫 단행본이 나왔고 2015년부터 게임 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게임 이야기를 하면서 밥 벌어 먹고산 지 8, 9년 차 되는 전업 게임 평론가입니다. 지금은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이 제일 큰 직함이네요. Q: 오늘은 저희 GG에 관한 질문들을 드리고 싶은데요. 기억하시겠지만, 첫 회차 ‘에디터의 글’에서 “웹진보다는 무겁게, 학술지보다는 가볍게”라는 문장을 일종의 슬로건처럼 말씀하셨어요. 이런 문장으로 GG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경혁 편집장: 저는 일반 회사를 다니다가 게임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일반인들도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아카데미에서는 이미 나온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죠. 역으로 생각하면 아카데미의 잘못도 있는 것이, 맨날 학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것이 자기들 안에서만 돌고 사회에 전혀 영향력을 못 주고 있다는 거예요. 물론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게임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영향력을 우리가 간파하면서 어떻게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들은 세상에 전혀 유통되지 않고 있어요. 세상은 게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전부 똑같은 이야기만 하거든요. “한국 게임 다 망해라!”, “확률형 아이템 나쁘다!”, “중독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너무 가볍고, 반복적일 뿐, 발전적인 논의가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게임 담론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데, 전문성과 대중성이 서로 붙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 사회에 이 둘을 접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전문성과 대중성을 어떻게 붙이지?’를 고민했을 때, 저는 아직까지 글이 효과적인 매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유튜브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웃음) 저도 밥 먹고, 책 읽고, 게임하고 사실 시간이 없어요. 나오는 게임을 다 할 수도 없고 나오는 현상을 다 이해할 수도 없으니,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또 전문가를 키우는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만들게 되었어요. Q: 그런데 사실 그런 사명감을 가지셨어도, 실제로 이렇게 웹진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인력도 필요하고, 재화도 필요하지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지금 GG는 크래프톤의 후원으로 게임문화재단이 만들고 있는데요. 어떻게 <배틀그라운드>를 만든 크래프톤이나 게임업계들이 모여 중독 치유 사업을 하는 게임문화재단과 같은 마음을 모으셨고,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마음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저는 원래부터 이런 걸 하고 싶어 했어요. “어떻게든 게임문화 담론을 만들어서 올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주변에 많이 떠들고 다녔죠. 그런데 어느 날 대학원 지도 교수님이 밤에 전화를 주신 거예요. 지금 바로 나와봐야 할 것 같다고. 근데 저희 교수님이 전혀 그런 분이 아니시거든요. 사적으로 부른다거나 일절 그러시는 분이 아닌데, 의아해하면서 나가봤더니, 크래프톤 담당자께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냐고 물어본 거죠. 이야. 세상에 이런 기회가 있다니! (웃음) 그래서 그걸 매개할 수 있는 곳으로 게임 문화 재단과 함께 하면서 게임문화를 다루는 웹진을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이게 절대 제가 잘나서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다른 영역도) 항상 그런 것 같아요. 뭔가가 떠오르는 건 누군가가 혼자 유니크한 발상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에 그 생각에 대한 니즈(요구)가 떠오르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저는 GG도 제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가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요구들이 딱 엮이는 특정한 순간이 있고, 저는 그 결과물이 게임제너레이션이라고 생각해요. Q: 하필 그 시기에 크래프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지점이 신기하네요. 이경혁 편집장: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먹으면 여기저기 많이 말하고 다녀야 해요. (웃음) 저는 ‘저 이런 것(게임문화 담론을 만드는 플랫폼) 하고 싶다’, ‘이런 것 필요하다’고 많이 떠들고 다녔거든요. 저희 지도 교수님도 저에게 그 이야기를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들으셨기 때문에, 그 순간에 제가 생각난 것이 아닐까요? (웃음) 자기 계발서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닌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해요. Q: 그럼 처음에 GG를 기획하셨을 때, 당시에 예상하셨던 독자층은 어땠나요? 이경혁 편집장: 독자층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소수일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많은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게임은 재밌으면 그만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보지도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가지고 심각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괜히 진지하게 무게 잡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래도 뭐가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소수일 수밖에 없어요. 영화도 처음에 그랬으니까요. 실제로 영화도 비평의 흐름을 타고, 씬을 통해 표현되는 사회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웹진의 독자층 역시 소수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크래프톤 담당자한테 이 사업의 의미를 설명할 때도 그 얘기를 했어요. “독자는 우리가 만들거고, 이 독자를 만들어내며 숫자를 늘리는 것이야말로 이 사업의 핵심이다.” 저는 지금도 그게 맞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고민이 되기도 해요. 너무 뻑뻑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고,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남들이 다 한 이야기를 하자니 그건 의미가 없고. 그래서 그 고민이 아까 그 슬로건에 나오는 거죠. 웹진보다는 무겁게, 학술지보다는 가볍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교집합의 독자들한테 깃발을 흔드는 거죠. “여기 우리가 있다! 와서 우리와 함께 하자.” 물론, GG를 공론장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영향력이 크진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크래프톤도 그걸 알고 있기에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4, 5년 지나서 뭔가 쌓였을 때, 누군가가 게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동안 우리가 쌓아놓은 것들이 일종의 레퍼런스로 기능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목적이 있어요. Q: 말씀하셨던 맥락에서 학술지와 웹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면 GG가 지향하는 글쓰기 방식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GG는 최대한 필자의 글을 건드리지 않아요. 설령 문법이 이상하더라도 이렇게 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하면 문법을 지키는 게 대체로 가독성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되니까 우리가 문법을 지키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법을 희생하면서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걸 최대한 살리고자 하는 게 제 입장입니다. 누군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편집장이라고 깎아낸다는 것은 옳지 못할뿐더러, ‘제가 글쓴이의 생각을 얼마나 알고 있기에 손을 대는가’라는 생각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과 GG에 나가는 글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Q: 그러면 편집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경혁 편집장: 좋은 글이라는 것을 게임 쪽으로 한정을 한다면, 저는 인사이트라고 생각을 해요. 오늘날 같은 미디어 시대에는 누구나 다 한마디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이미 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제 물리적으로도 환경 낭비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죠. 같은 게임을 했더라도, 아직 미처 닿지 않은 생각들을 끌어낼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문학이 아닌 이상에야 독자들이 “우와”라고 반응하는 글들은 문장이 유려해서가 아닐 거예요. 글을 통해 우리가 다루는 것은 ‘생각’이니,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중요하니까, GG에서 글을 청탁할 때도 주제를 잡은 뒤에 해당 주제에 대해서 당신의 ‘생각’을 들려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과 GG의 글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것은, 단순히 모든 글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측면이 아니라, 인사이트라는 것이 쓰는 사람으로부터만 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 입장에서 좋은 글이어도 독자를 이해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세상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GG는 오히려 이 부분을 컨트롤하지 않으려 해요. 각주가 수십 개 달린 뻑뻑한 글이어도, 게임을 통해서 사회에 단면을 드러내는 한 문장이면 또 누군가는 “우와”하면서 따라 읽을 수도 있고, 반대도 될 수 있지요. 결국 필력을 넘어서는 매력을 만들어낸 건 인사이트일 겁니다. Q: 말씀해 주신 지점처럼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 GG의 목적일 것인데, 이를 제공하기 위해서 매 회차에 어떤 주제들을 어떤 과정으로 정해가는지, GG의 아이디어 선정 과정과 절차를 독자분들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저희가 2개월에 한 번 나오니, 보통 2개월마다 기획 회의가 있어요. 5명의 편집 위원이 있고, 이번 회차에는 어떤 주제를 다루면 좋을지 논의합니다. 그렇게 대주제를 잡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일반 웹진들과의 가장 큰 차이죠. 저희는 대주제를 가지고 상당히 다양하게 논의를 해요. 주제들을 우선순위도 뽑아가면서, ‘너무 큰 주제다’ 싶으면 6개월짜리 기획을 하기도 하고, 어떤 주제는 지금 상황에서 신속하게 다루어야겠다 싶어서 빠르게 주제를 정하기도 하고. 저희가 매번 트렌디한 걸 다루진 않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이 주제는 중요한데 언제 다루지?’ 하다가 나중에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그렇게 대주제를 잡으면, 그다음엔 필자를 찾아요. 이 주제에 대해서 잘 이야기할 수 있는 필자는 누가 있을까? 결국 좋은 글은 좋은 필자에서 나오니까요. 다만, 이 과정이 또 어렵죠. 한국에 게임 관련된 글들이 많이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추리를 하기도 해요. 어떤 필자는 어떤 분야에서 공부를 했고, 어느 곳에서 이런 글을 썼으며, 어디에 나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이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연락처를 구해서 전화해보는 거죠. 어떤 경우에는 추리가 안 들어맞아서 연락을 드렸는데 전혀 관심 없다고 하시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딱 알맞은 관심사를 가지고 계시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글을 받아서 마지막 2주간 편집을 하고 완성이 되는 구조예요. 다만, 처음에는 100% 이 과정을 거쳤는데, 지금은 고정 코너들이 생겼어요. 특히, 최근에 공을 들이고 있는 논문 세미나는 어떻게 보면 GG를 시작했던 지향점과 가장 부합하는 코너거든요. 재미없고 유통이 안 되는 논문 중에 유의미한 이야기를 가져다가 말랑말랑하게 가공을 해서 재배포를 하는 작업이잖아요? 그런 지점이 의미가 큰 것 같아요. 여기(GG)는 그래도 게임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오시기 때문에 그런 글들이 더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보는 거죠. Q: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무리 좋은 지향점이 있어도, 10회차 넘게 2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 텐데, 매번 새로운 주제를 잡고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는 과정에서의 고충은 없으신가요? 이경혁 편집장: 고충이야 많죠. (웃음) 그리고 사실 저는 돈을 많이 못 받아요. 그런데 저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과정이 쉬워져도 문제예요. 이 과정이 쉬워지면 아마 공장제 웹진이 될 거예요. 그럴듯한 이슈 하나 세워서 대충 있어 보이는 말들로 포장해버리면, 사실 웹진의 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그 변화를 파악하지, 양적 평가로는 그냥 이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면 GG가 의미를 잃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작업이 계속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저는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도 연구의 일환이라고 보거든요. 그 과정이 쉬워지면 저는 연구를 안 하는 거죠. Q: 게임 비평에 대한 질문들도 조금 깊게 여쭤보고 싶은데요. GG가 이번에 제2회 게임비평공모전을 열었잖아요? 그런데 게임 비평에 대한 꿈이 있으신 분들 중에는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더 게임을 많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더 많은 게임을 해서 모든 게임의 재미들을 그래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좋은 게임 비평이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이경혁 편집장: 일단 모든 게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게임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새로 나오는 게임을 다 해볼 수가 없어요. 인간의 24시간은 결국 한정돼 있거든요. 오히려 역으로 조심해야 하는 건, 게임만 하고 다른 활동이나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런 경우에 저는 생각보다 많은 게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아까도 말씀드렸던 인사이트가 나오지 않는 것이죠. 남들이 안 하는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남들이 많이 안 하는 데는 또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결국 어떤 새로운 것이 왜 유의미한지 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 글을 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게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공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하다못해 게임을 하고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좋은 비평을 위해선) 타인과 생각을 교류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게임을 하고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이에 대해서 다들 동의하는지 아니면 나만 그런지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친구랑 같이 말을 섞어봐야 해요. 그리고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두 번째로 결국 게임은 인간과 사회를 다루거든요. 그래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게임만 해서는 좋은 비평이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을 해요. 그냥 레퍼런스를 넓히고, 더 많이 알아야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세상을 계속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이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죠. Q: 그러면 결국 “게임 비평은 게임의 재미를 다루는 것이다”는 분들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게임의 재미’나 ‘모든 콘텐츠를 관통하는 유니버셜한 재미’ 같은 개념은 게임 비평이 다룰 수 없을뿐더러 애초에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겠네요. 이경혁 편집장: 많은 사람들은 “게임은 재밌어야지”, “게임의 본질은 재미지”라고 이야기하지만, 재미없는 매체가 뭔지 생각해볼까요? 다큐멘터리는 재미가 없나요? 뉴스는 재미가 없나요? 그렇게만 이야기하기는 너무 어렵죠.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교류하는 모든 미디어는 그 재미가 다른 유형의 재미일 수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다 재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게임이라는 미디어의 본질만 재미라고 이야기하면, 게임에 대한 이해의 폭을 굉장히 한정시켜요. 게임 역시 다양한 사용방식이 존재할 수 있거든요. 시리어스 게임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게임을 통해 특정한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하거나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하는 경우들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들은 본질을 놓친 것인가? 이처럼 재미만이 게임의 본질이라고 얘기할 경우에는 다룰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소거하는 것 같아요. 영화의 본질도 처음에는 재미였죠. 그런데 요즘은 재밌는 영화만 나오지 않잖아요? 세상 어려운 이야기들도 많이 하죠.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을 버리지 말자는 거예요. Q: 마무리하기 전에, 최근에 편집장님의 학창 시절이 지구 오락실에 나오면서 지인들 사이에서는 이슈가 됐었는데요. 그런 맥락에서 저희가 인터뷰를 위해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독자분께서 ‘어릴 적부터 누구 닮았다고 이야기 듣는지’ 질문을 했었잖아요? 물론, 편집장님께서 “이걸 답변해 드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셨지만, (특별히)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누구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이경혁 편집장: 아... 이 이야기하면 무조건 악플만 달릴텐데... 나는 진짜 대학교 때 애들이 디카프리오 닮았다고 그랬거든요. (한숨) 진짜 억울한 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요즘은 오히려 친구들이 화를 내면서 인정하는 분위기예요. 그러니까 디카프리오가 살이 찌고 나서... 그런데 이 이야기를 꼭 담아야겠나요? 굳이? Q: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웃음) *‘지구오락실2’에 나온 학창시절의 편집장과 디카프리오 근황, 온게임넷 ‘우리 아이 게임 사용 설명서’에 나온 최근 편집장>(편집장님. 비밀로 해드리겠다는 약속... 지키지 않아 죄송합니다^^) Q: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이경혁 편집장: GG를 보시는 분들은 한국 게임에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고 공감하시는 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GG는 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여러 편집 위원들과 기획을 같이 하고, 많은 필진이 있으며,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단과 크래프톤이 함께 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저희와 대의가 같다면 사실 독자분들께도 함께 공유해주시고 게임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협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이력서 취미란에 게임을 못 쓰던 시절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함께 여기까지 온 거예요. GG보다 라이트한 시도들은 많잖아요. 사실 게임 유튜브도 어마어마하고, 그쪽도 게임문화를 이야기할 때 저변을 굉장히 넓혔지요. GG는 어찌 보면 이러한 방향성에서 그중 조금 뻑뻑한 한 부분을 맡고 있고 그래서 더 유들유들해지지도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뻑뻑한 걸 해야 하는 게 맞죠. 그렇다고 더 뻑뻑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저 아무도 안 하니까, 저희는 이런 것을 하는 정체성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글을 알아주시고, 그런 걸 같이 봐주시는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 공유해달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저희 글들을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GG의 가능성이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스폰서를 이해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되어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스폰서십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GG의 글 값은 결코 싸지 않습니다. 이건 필자분들이 아실 거예요. 그걸 만들 수 있게 해주는 힘에는 여러분의 트래픽이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고, 감사드립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1회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 Back 제1회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발표 07 GG Vol. 22. 8. 10. 안녕하십니까, 게임제너레이션입니다.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수상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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