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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규리

    김규리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버튼 읽기 [논문세미나] Horror Video Games and the “Active-Passive” Debate 호러 비디오 게임과 “능-수동” 토론 /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 에이단 로이즐러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위의 작품들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루돌로지적 행위성을 강조하는 이분법으로는 위 작품들이 발휘하는 특유의 효과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모든 호러 게임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의 원리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버튼 읽기 ‘K-의 거짓’ : 으로 바라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을 향한 갈망 이라는 이례적인 작품의 사례는 그 플레이 경험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인식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대항 담론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준점에 부합함과 부합하지 않음으로 나뉘며 게이머 커뮤니티의 ‘진정성’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버튼 읽기 “진보가 게임을 망친다?” <데스티니2>의 부침을 따라서 흔히 재난에 “‘별 혹은 행성의 불길한 국면’이라는 첫 번째 정의와 ‘갑작스럽거나 커다란 불행’이라는 두 번째 정의가 함께 관계”해 왔을 때, 일반적으로 <데스티니2>에서 묘사되는 재난은 전자의 의미를 조명하는 쪽에 가깝다. 버튼 읽기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버튼 읽기 엘든 링: 황금 나무가 솟은 정원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도달한다. 완성한 지도에서 더 이상 가지 않은 장소는 없으며, 무한한 탐험을 약속하던 세계는 더 이상 광야가 아니다. 그때 〈엘든 링〉은 그림 같은 정원에 가까워진다. 자연물과 폐허를 포함한 정원은 “열정적인 기억, 회한, 달콤한 멜랑콜리를 더 잘 자극할 목적으로 새로이 부재를 만들어낸다.”16) 설령 엔딩이 일종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플레이어들은 불완전한 총체성을 해소할 길 없이 꿈꾸며 정원을 헤맨다.

  • [북리뷰] 스테이지를 전환하자는 제안, 〈모럴컴뱃〉

    < Back [북리뷰] 스테이지를 전환하자는 제안, 〈모럴컴뱃〉 02 GG Vol. 21. 8. 10. 2018년 3월, 미국 백악관은 유튜브 공식 계정에 “Violence in Video Games”라는 제목의 영상을 게시했다. 게임의 잔혹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모은 1분 28초 길이의 이 영상은 게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게임의 폭력성을 강조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으로만 영상을 구성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 그러하다 보니 성인만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영상을 연령 제한을 두지 않고 전체 공개로 등록한 것이다(후자는 문제가 제기된 후 링크를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고 성인만 재생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비영리단체인 Games for Change는 “#GameOn - 88 Seconds of Video Games”라는 제목의 영상을 유튜브 공식 계정에 게시했다. 게임의 아름답고 장대한 장면을 백악관 영상의 길이만큼 보여준 이 영상은 게임에는 다채로운 장면이 있다는 응답과 더불어 게임을 만들고 즐기는 게임제작자와 게이머에게 품위 있는 격려를 보냈다고 평가받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얼핏 보면 게임의 폭력성을 주제로 논박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 후로 별다른 논의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게임의 유해성을 주제로 한 논쟁은 ‘늘 있으면서 때로 두드러지는’ 것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백악관이 게임의 폭력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연이어 발생한 학교 내 총기 난사 사건과 관련해 느슨한 총기 규제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백악관은 총기 사고의 원인을 느슨한 총기 규제 대신 ‘폭력적인 게임’으로 돌리기 위해 이 영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Games for Change의 영상에 굳이 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게임의 폭력성 논쟁의 핵심, ‘도덕적 공황’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심층적으로 탐색한 〈모럴컴뱃〉이 만일 이 사건보다 늦게 발간되었다면 저자들은 분명 이에 관한 내용을 책에 포함했을 것이다. 이 책에 담은 저자들의 논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잔혹하고 폭력적인 장면을 강조해 폭력적인 게임이 현실에서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암시하는 영상과 그 편향적인 메시지를 백악관이 특정한 의도를 위해 강조하는 과정이 저자들이 제시한 개념인 ‘도덕적 공황(Moral Panic)’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이나 활동에 대한 공포가 그것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가하는 위협에 비해 과도해지는 현상(41쪽)”인 ‘도덕적 공황’은 새로운 트렌드에 공포를 느끼는 사회의 유력인사, 그러한 공포가 유해하다고 강조하는 미디어와 정치가, 공포의 유해성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작성한 연구자가 공포를 반복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든다(53쪽). 이 개념을 통해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논쟁이 왜 끝이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게임의 유해성에 관한 논쟁에서 제시되었던 논의의 조각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볼 수 있다. 게임에 관한 도덕적 공황의 핵심은 게임이 유해하다고 ‘믿는’ 것이다(저자들은 이에 대해 ‘착각상관’(Illusory Correlation)이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같은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믿음은 토론으로 좌우되기 어렵다.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논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게임이 유해하다고 믿는 이들이 게임이 유해하다는 주장과 근거에만 눈과 귀를 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함께 믿는 사람이 줄어들어 약해질 때 비로소 바뀔 수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이 줄어든다는 것이지, 게임이 유용하다는 믿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염려와 의심이라는 발단 그렇다면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은 어떻게 약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은 논쟁의 해소 가능성과 더불어 게임을 즐기고 누리는 문화의 확산과도 연관된다.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이 약해진 토대 위에서 게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묻고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믿음’을 다른 표현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은 게임에 대한 편견에서 촉발된다. 그 편견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염려와 의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 염려와 의심은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으로 이어지지만, 대상을 충분히 이해할 때 해소된다. 그런 점에서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은 게임에 대한 염려와 의심이 도덕적 공황을 통해 주관적 확신으로 공고화된 결과이다. 믿음의 결과에만 집중하면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논쟁이 해소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염려와 의심이라는 발단에 집중한다면 다른 가능성을 기약할 수 있다. 이러한 염려와 의심이 믿음으로 공고화하는 과정에 미치는 요인에 대해 저자들은 3가지를 제시한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공포, 세대 차이, 그리고 정치화된 연구이다. 먼저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매체가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가깝다. 만화도 그랬고 TV도 그랬다. 게임과 마찬가지로 만화와 TV에 대한 두려움 역시 유해성을 중심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다(그리고 게임과 마찬가지로 제기된 문제는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잦아든다. 미디어를 두고 벌어지는 도덕적 공황은 시간이 해결해주듯(89쪽), 만화와 TV에 이어 게임도 ‘그다음 차례’(250쪽)가 되어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살펴볼 만한 의문 세대 차이는 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응과 연관된다. 저자들은 이를 ‘골디락스 효과’(the Goldilocks Effect)라 부른다. 골디락스 효과는 각 세대가 자신들이 주로 활용하는 미디어가 적당하여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앞선 세대는 고루하기 짝이 없고 다음 세대는 통제 불능이라고 생각한다는 태도로 모든 세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60쪽). 이는 게임의 유해성을 주로 제기하는 기성세대가 게임에 대한 이해가 낮은 이유와도 연결된다. 게임을 잘 이용하지 않으니 게임을 잘 이용하는 사람만큼 모르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게임에 대해 염려와 의심을 제기하는 건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앞서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공포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게임 다음의 매체가 무엇이 될지 모른다. 게임과 연결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만일 게임과 다른 매체가 등장하고 새로운 세대가 그것을 즐긴다면, 현재 게임을 잘 아는 세대 역시 그에 대해 염려와 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그래도 게임은 지금의 만화와 TV처럼 나름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게임에 대한 염려와 의심은 ‘살펴볼 만한 의문’(220쪽)이다. 그런데 이러한 염려와 의심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반박만을 해온 것은 아닌지, 대화 대신 대결을 선택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질문이 유해성 여부만을 묻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에 대해 유해성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 그러한 질문은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살피면서 게임의 유해성을 파악한다면, 염려와 의심을 해소하고 게임에 대한 이해 위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시도되었던 ‘게임제목묻기운동’은 가치 있는 시도로 주목할 만하다. 게임의 유해성을 지적하는 주장에 대해 ‘어떤 게임이 그러한지’, ‘어떤 유해성이 있는지’ 묻자고 제안하는 이 운동은 반박에 반박으로 맞서는 대립을 거듭하는 게임의 유해성 논쟁에서 새로운 물꼬를 트고자 하는 시도였다. 게임의 유해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단체가 이 물음에 응답하지는 않았으나, 이 물음에 어떠한 답이 돌아온다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럴컴뱃, 누구 대 누구의? 저자들이 도덕적 공황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제시한 ‘정치화된 연구’(55쪽)는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염려와 의심이 그러하다고 믿는 근거로 작용한다. 결과를 과도하게 일반화하거나 잘못 추론한 연구(71쪽)는 폭력적인 게임이 실제로 현실에서 폭력을 일으키게 만든다는 염려와 의심이 맞는다고 생각하게 했다. 연구 결과는 사회 유력인사, 미디어와 정치인 등을 통해 확대되고 그 결과 연구자는 명성과 연구 재원을 확보한다. 그런데 특정한 목적을 위해 편향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연구 윤리에 어긋난다. 미국 연구윤리국은 연구 윤리의 출발점으로 정직성, 정확성, 효율성, 객관성을 꼽는데, 근거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게임과 현실의 폭력적인 행위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결론 맺는 연구들은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부당한 편견을 피하는 객관성을 특히 어긴 것이다. 게임이 유해할지도 모른다는 ‘살펴볼 만한 의문’을 두고 도덕적 공황의 구조 위에서 사회 유력인사, 정치가, 미디어, 연구자 누구도 살펴보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에게 이 가장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할 의무가 있었을까? 저자들은 기존에 이루어진 연구들이 어떠한 점에서 객관적으로 충분하지 않은지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이 책의 제목을 통해 어쩌면 이 지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역자도 밝혔듯(251쪽) 이 정도를 밝힌 것만으로도 굉장한 용기로 봐야 할 것이다). 저자들은 ‘폭력적 게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처음 이루어졌던 시기와 비교해 최근 게임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리라 생각하는 학자와 의사의 비율이 낮다는 것을 제시한다(243쪽). 그런 점에서 책의 제목인 ‘모럴컴뱃’의 여러 중의적인 의미 중에서도 저자들은 책에서 ‘반-비디오게임 제국’과 ‘반란군 연합’으로 비유한 것처럼(83쪽) 게임의 유해성을 연구하는 시니어 연구자와 주니어 연구자 간의 전쟁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쟁이 게임에 대한 낮은 이해와 편견(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연구자에게도 게임에 대한 염려와 의심이 있었을 것이다)에서만 촉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게임이 유용하다는 믿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를 적용하면, 젊은 연구자들이 과거와 비교해 게임이 유해하다고 덜 생각한다고 해서 게임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게임에 대한 연구가 확인한 것은 ‘비디오게임 플레이에 효능만 있는 것도, 유해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정도’(222쪽)이기 때문이다. 감정과 신체적 측면에서 게임이 유용한 효과를 제공한다는 결과가 확인된 사례가 있긴 하다. 그런데 현재는 이를 일반화하기보다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행된 폭력적 매체 효과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게임의 폭력성이 지닌 위험을 믿는 연구자가 줄어든 것처럼(243쪽) 게임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연구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단계인 것이다. 연구 윤리를 준수하면서! 필요한 질문들 윤리는 연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 유력인사와 미디어 그리고 정치가에게도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윤리가 있다. ‘폭력적 게임’을 둘러싼 도덕적 공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게임의 유해성 대신 다른 질문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게임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게임 리터러시’라는 용어로 최근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게임보다 앞선 미디어를 통해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확인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이를 뒤늦게 적용하게 된 셈이다. 만일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좀 더 일찍 다루고 있었더라면 게임이 인간의 공격성을 부추긴다는 것을 확인하겠다고 많은 사람이 한창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PC방의 전원을 내리는 실험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이 폭력적인 내용이 공격성의 증가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강제로 중단되면서 느끼는 짜증’(204쪽)일 뿐임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저자들은 게임의 유해성을 다룬 연구의 불충분한 근거를 지적하는 것 못지않게 현실에서 폭력적 행위가 발생하기 어려운, 하여 더더욱 게임과 연관 짓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접근은 그동안 게임의 유해성에 대한 논쟁에서 정작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를 주목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게임을 통해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한 게이머가 현실에서 게임과 똑같은 폭력을 재현하고 싶어 할 것이라는 ‘믿음’은 얼마나 인간을 불신하는 것인가! 따라서 게임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은 게임을 이용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인간은 게임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인간이 게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떠한 것인지, 그러한 즐거움은 게임 이전의 미디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게임이 유해하다는 믿음 속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그 믿음이 사라진 데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다르다. 질문의 목적지가 살펴볼 만한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 대한 이해와 호기심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논쟁을 넘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임의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게임의 폭력성이 ‘존재한다-그렇지 않다’를 벗어나면 할 수 있는 질문은 너무나 많다. 먼저 게임의 상호작용성을 꼽을 수 있다. 게임 이전의 매체와 게임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인 상호작용성은 게임의 정체성과도 연관된다. 게이머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특징을 게임에 대한 이해가 낮은 세대는 특히 궁금해할 것이다. 게임이 아닌 다른 매체에도 상호작용성이 적용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게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게임에 대해 정말 살펴야 할 의문들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다. 저자들도 제시했듯 게임에서의 경험은 게임 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임에서 형성되는 이용자 간의 관계는 게임 밖의 경험으로도 이어진다. 이는 게이머가 게임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더는 현실과 단절된 것이 아님을 뜻한다.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논쟁이 게임이 제공하는 ‘안전하게 과장된’(35쪽) 경험을 단단히 잘못 이해한 것에 불과한 것을 확인했다면, 차별과 혐오와 같은 현실의 문제가 게임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새로운 과제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컨트롤러를 집어들고 게임을 계속 즐기면서’(246쪽) 게임에 대해 계속 대화하는 것이다. 〈모럴컴뱃〉은 게임에 대한 대화를 하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310개에 달하는 각주는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연구와 부정적인 연구를 포함하면서 게임에 관한 주요한 사건에 관한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이 책의 자료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호기심이 찾는 여정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사회학자) 강지웅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게이머즈〉를 비롯한 여러 게임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했다. 저서로 〈게임과 문화연구〉(공저), 〈한국 게임의 역사〉(공저)가 있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서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게임이 삶의 수많은 순간을 어루만지는, 우리와 동행하는 문화임을 믿는다.

  •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 Back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17 GG Vol. 24. 4. 10. 방치형 RPG 비판 1)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2)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타비카에루’는 방치형 게임의 ‘이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시장은 ‘AFK 아레나(剑与远征)’, ‘마법거울의 전설(魔镜物语)’, ‘아이린 시편(爱琳诗篇)’ 등 ‘맵밀기(推图)’ 3) 를 큰 축으로 하여 수집, 육성, 트래킹, 턴제 자동전투 등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결합한 중국산 방치형RPG게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의 시청각적 외관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로직은 일관성이 있다. 심지어 게임의 전투나 스토리 전개는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거나 구동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자동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유형의 수익을 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따금 게임 속 개체를 클릭하기만 하면 게임을 최대한 즐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스킨을 교체한다’ 4) 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의를 끌지 못하던 미니게임에서 대중화된 게임 장르로 변모한 이 질적 변화는 게임 역사의 자연적인 진화에 그치지 않으며,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고 있다. ‘게임’이란 ‘현실’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문예적인 표상이며, 현실과 대응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미디어적인 특성상, 게임성을 커버할 만큼 스토리성이 강한 서사적 게임을 제외하면, 오늘날 RPG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의 ‘거대 서사’ 5) 형식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명료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宽)가 말했듯 ‘거대한 게임’ 6) 의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투영할 뿐이다. 이에 따라 우노 츠네히로는 21세기 들어 RPG 등 방치형 게임 장르가 전후 일본의 서브컬처 속 ‘고질라 명제(ゴジラの命題) 7) ’, 즉 허구——객관적 현실이 아님——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주관적 현실을 게임을 통해 써내려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게임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각 구조에서 주관적인 사회 현실을 추출하고, 이미지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객관적 현실을 발화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이 동시대에 대해 갖는 사명은 자역주의적 방식으로 객관적 현실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닐 것이다. 플레이 방식 등 신체적 감각에 호소하는 혁신적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은 ‘고질라 명제’를 따라 현대 중국의 주관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방치형RPG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1. 자동화, 수동성, 자아의 구조 방치형RPG에 대한 산발적 논의에서 저우쓰위(周思妤)는 이런 게임의 핵심 특징은 “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는 것” 8) , 즉 플레이어가 최대한 플레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플레이 방식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반역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촉각 매체 9) 이며, 그 매개적 특수성은 플레이어가 게임 장치와 빈번하고 밀접한 물리적 상호작용(즉, ‘플레이’)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통해 ‘입력 부족과 출력 과잉’ 10) 이라는 비대칭적 장력 속에서 플레이어의 신체적 경험 이상의 정신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역시 플레이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게임의 시간(즉, ‘제3시간’)을 진정한 게임 내러티브의 시간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11) 한마디로 말해, 게임을 체험하는 정확한 자세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플레이 방식은 이와 반대인데, 최대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원리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역설적인 플레이 방법론을 구축한다. 이런 방법론은 어떻게 성립될까? 게임 과정의 자동화를 통해서다. 하지만 낮은 수준의 자동화 12) 는 모든 게임의 초석이기 때문에 게임의 자동화를 되풀이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거듭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 내 임의의 위치를 클릭하면 아바타(avatar)가 자동으로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게임 설계가 실패하게 된다. 방치형RPG의 특수성은 자동화가 게임 프로그램의 국부적 자동 연산 및 실행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게임의 전반적인 작동 논리를 가리킨다는 것에 있다. 가령 ‘AFK 아레나’는 플레이어가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를 확인하고 추출해야 하는 경우에조차 다양한 자원 혜택을 제공한다. 이는, 표면상 방치형RPG가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이지만, 총체적 자동화(이하 ‘자동화’)의 게임 로직이 이러한 조작을 인체공학적으로 편안한 정도에 맞게 압축하고, 플레이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기존의 많은 게임들에서 노동력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방치형RPG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자동화된 스크립트 프로그램——모태는 반[反]플레이(counter-play)의 특징을 지닌 전자동 게임 ‘프로그레스 퀘스트(Progress Quest)’——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들의 방치형RPG 개입은 이런 게임들이 여전히 일반적 의미의 게임 '촉매'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법성을 제공하고, 게임 배급사들이 게임 내 소비 행위(이하 ‘현질’) 13) 를 유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물론 자동화된 게임 로직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에 참여하지만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방치형RPG 플레이의 감수성은 능동적인 탐색, 구성 또는 초극이 아니라 항상 수동적이게 된다. 한마디로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먹이를 주고, 플레이어는 편안하게 입을 벌리고 게임 시스템의 아낌없는 선물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 경험은 방치형 RPG의 대립자 14) 가 어긋나게 놓인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흔히 게임은 “실패의 예술” 15) 로 여겨지는데, 이는 게이머의 진로를 가로막는 다양한 대립자들, 플레이어의 기본 임무인 눈앞의 끝없는 대립자에 반복적으로 도전해 결국 게임을 클리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격투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ストリートファイターベガ)’를 할 때에는 마지막 상대인 베가(ベガ)를 이길 때까지 상대에게 한 번씩 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방치형RPG에도 이런 대립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엘피스 전기M: 스피릿 각성(斗罗大陆:武魂觉醒)’에서 ‘시련의 경계’에 도전했다가 전력 부족으로 패배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게임의 차이점은 대립하는 쌍방(즉, 플레이어와 게임)이 만났을 때 서로 어긋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즉, 방치형RPG의 자동화 논리로 인해 막을 수 없는 플레이어는 실제 높은 차원에 배치되고 반대쪽은 낮은 위치에 배치된다. 비록 낮은 단계의 대립자는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전진 속도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자동 전진하는 플레이어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좌절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배칭형RPG와 일반 게임의 기본 차이점은 전자가 이론적으로 반대편을 이길 수 없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근본적인 ’게임불감증(卡关;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프로세스)’으로 인한 부정적 감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이하 ‘방치형 플레이어’)가 게임 속 대립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개조할 필요가 없다. 시간함수가 증가해 낮은 단계의 대립자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현질로 이를 집어삼켜 소비주의의 쾌감과 만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가 반대편에 부딪혔을 때 '절대적 부정'을 느끼지 않고, 기껏해야 연속적인 플레이 경험이 끊기는 등 짧은 불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게임에서 현질을 하지 않는 대가일 뿐이다. 절대적 부정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인 액션 포지션이 할당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결 자체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방치형RPG는 “실패의 예술”의 반명제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서는 대결하는 쌍방의 움직임과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플레이어는 정해진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플레이어는 역동적인 게임 내 역사적 여정을 구축하는 것에 참여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게임 체험은 자기자신과 게임 프로그램 간 상호작용에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끝없이 공허한 순환 생성에 빠뜨릴 뿐이다. 따라서 방치형RPG는 기존 게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게임들에도 다양한 전투의 순간이 가득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여정은 다른 게임처럼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총력투쟁의 형태로 깊이 있게 추진되지 않는다. 비록 게임의 수치는 끊임없이 증식하고 비대해지지만(hypertrophy), 게임의 여정은 오히려 미리 설정된 알고리즘의 무성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가깝다. 단적으로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유저들의 플레이 경험은 영원히 정체된 윤회 상태로 굳어져 ‘역사’는 끝난다. ‘역사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방치형RPG를 외형상 적개심으로 가득 찬 용담호혈(龍潭虎穴) 16) 을 날조할 뿐, 실제로는 한없이 순한 수치의 비경 속에 있다. 따라서 게이머들에게 철저하고 고통스러운 투쟁(清算)의 도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자신의 안전구역으로 퇴행(regression)하라고 유도하고, 보상이란 형태의 게임 시스템이 주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다리고 즐기게 함을 뜻한다. 또한 방치형RPG의 긍정적 체험은 독특한데, 그것은 전통 비디오 게임에서 이중 부정의 간접 형태가 아니라(가령 코나미 게임 ‘콘트라’는 끊임없이 적을 죽이고 게임 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효화한다), 오히려 게임의 알고리즘에 의해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통쾌함의 형태로 아낌없이 주어진다. 예컨대 ‘AFK 아레나’의 플레이어는 ‘키보드에서 손을 빼’ 17) 직접적으로 120분의 AFK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방치형 플레이어는 진정한 게임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부정적 능력만이 진정으로 게이머의 주체적 위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주는 긍정적 경험만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은 추상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개성이 없는 게임의 종속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와 게임의 대립 구도에서 플레이어의 주체성을 논하는 게 아니다. 게임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플레이어와 자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는 몹을 향한 공격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힘겨루기를 구성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쾌락 구조에서 자신을 능동적인(향락적인) 행동 주체로 만든다. 이 행동의 주체는 사고와 신체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만 게임에서 승리(예를 들어, 게임 중의 상대를 이기는 것)할 수 있고, 게임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앞서 언급한 이중 부정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게임 시스템의 포획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을 게임 쾌락을 즐기는 능동적 행동 주체로 만들 수 없고, 자아에 대한 최후의 절제를 포기하고 게임 시스템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방치형 플레이어는 게임의 호의를 행복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체적인 자기결정 구조를 상실한다. 그/그녀(플레이어)는 게임과 쾌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뿐,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방치형RPG의 무대에서 서서히 펼쳐지고 있음을 사실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다. 2. 부성의 절대권력 방치형RPG는 게임의 역설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게임 장르처럼) 부정적 매체 18) (혹은 죽음의 매체)가 아니라, 긍정적 매체(혹은 삶의 매체)이다. 게이머들은 주로 게임 속에서 AFK 19) 형식으로 자동으로 생성되는 대량의 자원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앉아서 즐긴다. 게이머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이 게임은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다른 이념적 전략을 사용하는데, 경계에 있는 상처를 달래는 진혼곡을 부드럽게 읊조리며 ‘알고리즘 모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적 환각을 만들어낸다. 알고리즘 모성의 무조건적인 보살핌 아래 플레이어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 보상 등 위로의 형태로 긍정적 경험을 즐길 수 있으며, ‘수동적 자동 만족’에 기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 모성은 플레이어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행복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으로 인해 크게 붕괴되었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된다. 여기서 알고리즘적 모성은 플레이어에게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유토피아를 열어준다. 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에 의해 크게 붕괴된다. 하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것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되게 한다. 이처럼 방치형RPG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의 모성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모성은 게임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며, 이를 논의하기 전에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졌다는 근거, 즉 게임의 주권적 힘(sovereign power)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게임 내 절대권력은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절대적 관할권을 의미하며, 그 물질적 기반은 절차상의 출처(procedural authorship) 20) 이다. 그것의 관찰 가능한 형태(동시에 극치의 형태)는 곧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생사여탈 권한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부정적 매체이기 때문에, 게임의 절대권력은 게이머들에게 주로 ‘죽음’의 관상을 보여주며, ‘죽음’(즉, 철저한 부정)의 의제를 지향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핵심 관심사는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피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새로운 예술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학문적 출발점이 됐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와 요시다 히로시(吉田寬) 등 일본 학자들은 ‘죽음’을 주제로 ‘게임 리얼리즘(ゲームのリアリズム)’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21) 물론 게임 내 모든 죽음을 절대권력의 소행으로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 운영(system operation)과 단위 운영(system operation)에 대한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의 주장 22) 은 절대권력은 완전하고 선형적이며 정상적인 시스템 운영에서 나타나며 단위 운영의 절대권력은 분리되고(discrete) 불연속적이며 역동적인 단위 및 그 관계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スーパーマリオブラザーズ)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사망/낙하”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시스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게임 시스템/규칙에 해당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리오 형제가 굼바(クリボー)와 같은 적을 건드려서 죽으면 플레이어는 단일 작전으로 인식한다. 절대권력의 관할권은 유닛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타자를 이길 수 없다는 우발적 경험이 항상 플레이어의 필연적인 절대권력 인식보다 우선한다. 물론 때때로 시스템 작동과 장치 작동이 임계점까지 당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RPG 게임은 스토리상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게임 플레이어가 상대 캐릭터에게 패배하도록 강제하지만, 게임 스토리는 종료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이러한 캐릭터와 절대권력의 일시적 중첩 상태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종종 게임이 예외상태(또는 플레이어가 ‘무적’ 상태에 진입했음을 뜻함)에 있음을 나타낸다. 절대권력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경우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게임 배경에 숨겨져 있다. 플레이어와 능동적으로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막 통과하려고 할 때, 즉 게임 보스 23) 의 형태를 취하고 플레이어의 경로를 차단할 때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절대권력은 언제나 ‘제3자의 심급’ 24) 이란 위치에 놓이게 되며, ‘통제와 자유’ 25) 라는 게임의 절차적 변증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끝판왕을 물리치는 것뿐이다. 푸코와 아감본의 표현 26) 을 빌리자면, 절대권력은 형식적으로 고대 가부장적 권력(patria potestas)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모두 플레이어가 아바타 보스를 찾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권한만 갖는 ‘부친 살해’(弑父)의 구조 27) 로 이뤄져 있다. 현실의 외부(동시에 게임의 내부)에 취약하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현실을 구축해야만 ‘부친 살해’ 게임을 통해 끝없는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미지’의 결말에 갇히게 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이 상황이 흔들렸다. 최근 성공한 인기 게임 장르의 중요한 특징은 게임 속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전면에 등장해 플레이어의 ‘아버지 살해’ 수단과 감각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슈팅(逃殺, 도살) 28) 게임은 ‘축권(縮圈)’ 메커니즘을 절대권력의 화신으로 삼아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사이에 배제적으로 삽입된 도살 관계를 구축한다. 절대권력은 “칼을 든” 죽음 정치의 살벌한 모습으로 게임 전면에 내세워 게이머들을 수색하고, 프로그램화된 레토릭(procedural rhetoric) 29) 의 형태로 게이머들에게 부정적인 칙령을 내린다. 게이머들은 그 권위를 존중하되 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절대권력은 강력하게 감지되고-떠다니며-편재되는 방식으로 게이머들에게 능동적으로 배출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의 형상이다. 즉, 죽이거나 도전받지 않으며, 오직 당신의 복종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모습의 절대권력은 동시대 게임 역사의 상상력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관문 마지막마다 숨어 있어 죽여야 하는 특정 보스(그들은 게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메타 스토리와 스토리의 임계점에 있다)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죽일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반복된다. 이 때문에 게이머가 보스의 위치를 파악해 죽임으로써 게임 시스템/사회 현실을 초극하는 상징적 질서는 무력화된다. 따라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서사층 내에서 자동 증식하는 게이머들 사이의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의 싸움에 갇히고, 게임의 메타서사층에 존재하는 게이머와 게임 시스템 간 ‘거대한 이야기’는 돌파하지 못해 비정치적이고 퇴화하는 순환 구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이다. (상호텍스트화된) 게임의 세계를 뒤흔드는 통섭적인 기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화되고 만연해진 부권적 절대권력의 칙령에 게이머들이 끊임없이 에피소드 간 ‘생사’의 윤회에 뛰어오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쟁(즉, 상호경쟁)으로는 총체적 게임/현실 딜레마를 벗어날 해결책과 초월적 쾌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영원히 공전하는 챗바퀴처럼 “지금-여기”에서 종결될 뿐이다. 3. ‘모성적 디스토피아’ 방치형RPG 역시 이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에 휩싸여 탄생한 게임 장르다. 절대권력은 늘 전면에 나서지만 상징 질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람을 살게 하는 부성적 절대권력이 아니라, 권력기술로 하여금 직접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모성적인 빛을 발하는 권력기술로, 그것의 상징물은 죽음의 ‘검’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모태’다.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절대권력에 관한 논의를 갱신해야, 비로소 방치형RPG라는 새로운 게임 장르와 그 은유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푸코와 아감벤은 모두 절대권력의 전형적인 특권 중 하나가 생살여탈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푸코의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들과 아감벤의 수용소에 갇힌 호모사케르는 형벌을 단지 형벌받는 환경——죽음의 위협 속에 던져진다는 뜻——에서 절대권력이 그들에게 휘두르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두려워 하고 있을 뿐이다. 방치형RPG는 완전히 반대다. 그것은 게이머를 긍정적 경험이 생산되고 흐르는 모태(즉, ‘긍정사회’) 30) 에 두고, 그들이 갈망하는 다양한 성장 자원을 자동으로 제공한다. 그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위협도 가하지 않고, 다만 그/그녀를 정성껏 보살피고 만족시켜 줄 뿐이다. 태아들은 부정적인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태내에서 오는 긍정적 경험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방치형RPG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타카하시 루미코(高桥留美子) 31) 식 부권 억압(부정성 체험)이 없는 ‘낙원’, 즉 “물질만 있을 뿐 스토리텔링 32) 은 없”는 욕망의 공간을 만든다. 이 낙원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체험은 모두 제거되고, 게이머는 게임에서 실질적인 실패를 겪지 않는다. 기껏해야 욕구 충족의 지연을 직면할 뿐이다. 가령 ‘마법거울의 전설’의 게이머들은 중심 스토리의 자동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아닌 휴식 중이던 자의식이 ‘실패'라는 우발적 사건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는 걸 경험한다. [자의식이] 활성화되면 그들은 두뇌를 조금 사용해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1) 기존 캐릭터와 소품의 구성 체계를 최적화해 시행착오를 겪고 확실한 자동 전투에 재투자한다; 2) 전쟁 전력을 즉시 높이고 자동 전투를 충족하기 위해 현질을 한다. 3) 현질 충동이 없다면 잠시 서브 스토리로 주의를 돌리고, 시간이 흘러 전투력이 자동으로 증가하면 메인 퀘스트에 계속 도전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게이머는 게임 프로그램의 대립자를 위해 배척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를 경험한 취약한 순간에 모성의 절대권력에 안겨 그것과 조화 및 동일화되면서 재기한 후의 필연적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헤겔식]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면, 방치형RPG에서는 긍정적 경험치가 끊임없이 자동 증가하기 때문에 게임 시스템에 대한 순종은 합리적 플레이 태도가 된다. [이 상황에서] 노예인 게이머는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므로, 자비로운 주인 편에 서서 더 유순해지고 일방적 상황에 순종적으로 빠져든다. 이 일방향적이고 사유하지 않는(thoughtless) 게이머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게임의 '좋은' 사실만 무분별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방치형RPG의 부정성과 비판성, 초월성, 그리고 절대권력은 결코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매직사이클(magic cycle) 33) 이 부여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게임의 쾌락과 현실에 대한 욕구가 자동 충족되는 방식으로 즐긴다. 분명히도 방치형RPG는 절대권력에 대한 게이머의 경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게이머에게 반역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는 게임이 직면하게 되는 안티게임의 메커니즘을 근절할 뿐만 아니라, 게이머의 안티게임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소모했기 때문이다. 게이머의 모든 욕구를 부드럽게 충족시켜주는 방치형RPG는 게이머와 게임 간의 적대 관계를 시간함수에 따른 희소성과 만족감이라는 비적대적 공식으로 전환해버린다. 그렇기에 게이머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언제 실현될지, 어떻게 하면 그 실현을 가속화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된다. 이는 게이머가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착을 형성하고도 다른 게임처럼 안티게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방치형 RPG의 장점이다. 누가 자신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장난기 많은(게임) 어머니를 원망하고 반항하겠는가? 그러나 방치형RPG라고 해서 앞서 말한 잔혹한 슈팅게임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사회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상반된 게임 해결법일 뿐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네이쥐안’ 사회——장기간의 고성장 이후 GDP 성장률이 실질적인 둔화기로 접어든 사회경제적 상황——의 가부장적 절대권력(즉, 슈팅게임)에 맞서 강경한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더라도, 그리고 네이쥐안이 마땅히 벗어나고 비판해야 할 잘못된 사회 상태라고 믿더라도, '게이머'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결단력' 34) 을 갖고 잔인한 '사회/게임'(즉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탈출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를 말할 수 있는 사회적/심리적 공간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모성의 우산을 씌워주며, 긍정적인 게임 체험 쪽으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얘야, 넌 정말 대단해! 멋져! 내가 해결해줄게...” 다시 말해,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이머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게이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35) 게임/사회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폐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노 츠네히로의 말처럼 이것은 모성의 유토피아보다는 모성의 디스토피아(母性のディストピア)일 수 있다. 후자는 우노 츠네히로가 아즈마 히로키의 미연시 게임 장르에 대한 비평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서 발전한 독특한 서브컬쳐의 상상력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국가를 국가의 ‘아버지’로 의인화하며, 국민의 성숙은 그들이 국가 안에서 가부장제적 아버지 36) 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드래곤 퀘스트(ドラゴンクエスト)’와 ‘젤다의 전설(ゼルダの伝說)’ 등 일본의 국민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이 공주를 구하는 서사는 얼핏 보면 사랑 이야기지만, 게이머가 공주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성숙(즉, 주인공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을 이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패전국 일본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은 승전국 미국에 의해 실추된 일본 아버지가 아니라, 태내부터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섬의 어머니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표면적인 게임 내용만 보면 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공주를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층적인 문예 심리를 살펴보면 게이머가 공주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성숙을 깨달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출된 공주는 대문자 어머니가 되고, 게임을 클리어한 게이머는 아버지가 되지만, 대문자 어머니에 의지해 성숙해지는 왜소한 아버지다. 모성적 디스토피아는 대문자 어머니가 왜소한 아버지를 키운다는 전후 일본의 상상력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노 츠네히로는 모성적 디스토피아가 전후 일본에 한정된 특수한 상상력에서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인 현대 사회의 상상력으로 진화했다며 그것의 설명 37) 을 확장해왔다. 인터넷 사회는 자녀(즉, 인터넷 사용자)를 정보 고치(즉, 태아)에 던져 넣고 모든 소음을 제거한 후,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모든 정보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로 계속 제공하는 사회이다. 그것은 모성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기 망상을 부풀린다. 이 같은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성의 디스토피아'는 발전된 개념이다. 우노 츠네히로의 연구 시야에는 중국 사회나 방치형RPG가 있지 않지만, 모성의 디스토피아의 통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게임을 유토피아가 아닌 모성의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점이다. 첫째로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모성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형RPG에서 모성적 폭력은 배제된 폭력이다. 그것은 게이머를 태아 속에 완전히 가두고, 온정적으로 그를 위해 태아 내의 모든 실질적 대립을 배제한다. 동시에 그것은 게이머의 성장을 촉진하는 부정성과 이질성도 배제한다. 이로 인해 그들을 편안한 자기 망상 속에 끊임없이 팽창시키도록 이끈다. 둘째, 일체화의 폭력, 즉 상술한 배제성으로 인해 게이머는 대립자(가령 방치형RPG의 다양한 몹)에게서 어떤 공고화된 타자성(Andersheit)이나 낯섦(Fremdheit)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통합(Gleichschaltung)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성적 폭력은 결국 긍정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폭력은 게이머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배척하지 않고 흡수한다. 과보호하는 방식으로 약화시키고 마비시켜 결국 게이머를 포획한다. 현실과 정반대인 알고리즘의 모성애에 취한 플레이어는 더욱 유순해지고 ‘투지’를 잃게 된다. 한마디로 모성폭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자아의 궁극적 성숙을 회피하고 어머니의 자궁에 사는 형태로 순수한 자기 망상의 삶을 살게 한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현실의 고민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소마(soma)를 만든다. 그러나 이 약물은 단순한 쾌감 논리가 아닌 복잡한 보상 메커니즘에 호소하며, 직접적인 욕구 충족 회로가 아닌 현실의 영역에서 게이머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이는 방치형RPG가 일종의 왜곡된 게임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게이머들이 실재계의 상처받은 경험(예를 들어 현실이 허락했음에도 실현되지 않는 개인의 성공)에 다시 끌려들어가는 단순한 쾌감구조가 아니라, 게임은 세계를 상징하는 심벌로 자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 뱃속에서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을 꾸고 있는 플레이어는 여전히 현실의 맥락에 던져진 육체를 갖고 있지만, 현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21세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계를 통한 철저한 사회적 성숙을 새삼 갈망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방치형RPG는 게임 내에서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갓스 커넥션은 레벨링, 랭킹, 전투 목록, 길드 전쟁과 같은 사회적 경쟁의 원리를 모방한 게임 내 메커니즘을 설정한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방치형RPG가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게임 안에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갓니스 커넥트(Goddess Connect)’는 게임 내에서 등급, 순위, 차트, 길드전 등 사회적 경쟁원리를 모방한 메커니즘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의 모성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높은 가부장제적 권력을 실제 게임에서 소환하는 게 아니다. ‘오래된 게임 세계’의 상징적 질서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하며, 게이머에게 그들의 실재계 외상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효율적으로 자신을 자위할 수 있도록 한다. 우노 츠네히로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적 모성(즉, 대문자 어머니)을 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레이어를 방치형RPG로 끌어들이는 인프라가 되며, 나아가 ‘깨어 있는’ 플레이어가 현실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모성적 디스토피아의 논리에서 왜소한 아버지를 소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방치형RPG의 꿈 만들기 기능을 강화하고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4. 게임 자본가의 환상 알고리즘의 모성적 위안 아래에서 플레이어는 방치형RPG를 플레이할 때 항상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다른 게임에서처럼 과로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계획(프로젝트)과 전반적인 컨트롤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영역에 있는 한, “근육과 뼈를 다치지 않고”(즉, 가급적 플레이하지 않으며) 가끔씩 명령을 내려 게임의 자동 수익과 최고의 경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완벽한 자아에 대한 신화를 허구화하고, 그러한 자아에 대한 플레이어의 상상과 경험을 충족시키는 꿈나라와 같은 현실 미러링 게임이다. 유희 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비판적 틀을 통해 이러한 게임들을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도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playbour)——이러한 유형의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를 조작하도록 유도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손쉬운 조작과 자동 증식 혜택은 기존 게임과는 다른 ‘게임 관리자’라는 아이덴티티 이미지를 심어줬다. 루도자본주의의 비판적 틀 안에서 이러한 게임을 계속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로 이해할 수 있지만 - 결국 이러한 게임은 플레이어를 운영하도록 초대한다 - 과도한 노력과 수익의 자동 생성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 비해 '게임 매니저'라는 상상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운영의 과도한 용이성과 수익의 자동 증식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비교하여 '블루칼라'가 아닌 '블루칼라' 플레이어인 '게임 매니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이들은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인식하게 됐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게임 관리자는 기업가적 주체의 자기 망상이지만, 지난 10년간 국내 주류 게임에 존재했던 자기 망상(예: 멀티플레이 온라인 전략게임의 ‘경제인’과 슈팅게임의 ‘성인’)과는 다르다. 게이머는 한편으로 ‘기업’, 즉 게이머 사이에 존재하는 잔인한 외부 경쟁에 노출되지 않고, 일체의 외부적인 기업 위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보호받는다. 대신 게이머는 조직의 내부 업무로 편안하게 돌아가 보람 있는 게임 자산 관리(예: 카드 뽑기, 카드 조합, 캐릭터 업그레이드 등)를 즐기고 조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는 높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38) 다른 한편 보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관리자의 이미지에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자동화된 게임 로직 덕분에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의 끝없는 자기 착취 39) 를 자동화된 ‘알고리즘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 플레이어는 성가신 게임 조작, 전투 전략, 팀워크 및 기타 사소한 퀴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직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끌며, 자동으로 배가되는 자원을 받고, ‘게임 자본가’에 속하는 행복한 즐거움을 누릴 준비를 하면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콘텐츠 외적인 부분까지 보면 게임 관리자는 게임 인터페이스 내의 가상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게임과 현실의 상호관계를 관리한다. 방치형RPG의 자동화된 플레이는 플레이어를 게임 시간에 따른 현실의 혼잡함에서 사실상 해방시켜 게임 작업과 현실 업무를 함께 실현하고, 게임 시간을 현실 시스템에 완전하고 매끄럽게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 히어로즈(Idle Heroes)’의 많은 게이머들은 직장에서 '낚시'를 하는 동안 게임을 켜고 게임 콘텐츠를 빠르게 관리한 후, 자동으로 게임이 계속되게 한다. 방치형RPG의 인기는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비합리성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에 대한 은유적인 자기 참조가 된다. 게임 관리자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방치형RPG를 둘러싼 역설, 즉 방치형RPG의 기본 논리가 놀이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이 플레이하라"에서 "플레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라"로 역설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플레이하라"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실제 21세기(즉, 중국에서 그래픽 네트워크 게임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이후) 들어 그것[게이머의 정체성]은 게임 노동자에서 게임 관리자로 변모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자신을 게임 내 자산 소유자로 간주하고,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처럼 '제스처'와 '지시'를 통해 '알고리즘 노동자'가 자신의 명령을 자동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대신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한다. 이러한 게임 경험은 현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부유층에게만 허락된 '성공한 사람' 40) 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방치형RPG의 매니지먼트는 위선적이다. 관리 경로는 이미 정의되어 있고, 게임 프로그램은 플레이어가 실제로 무수히 많은 전략/전술 아이디어에 두뇌를 동원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게임 알고리즘과 연산에 많은 부담을 주고 게임 디자인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가끔씩 자동 조종으로 실행되는 사업을 점검하고 게임의 정해진 경로를 따르도록 초대될 뿐, 게임의 내부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삼국지(三国志) 시리즈’와 같은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과 비교하면 이러한 장르의 게임은 관리 측면에서 위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지’에서는 플레이어가 도시의 내정을 관리해야 하며,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잘못된 관리로 인해 컴퓨터 상대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방치형RPG에선 그런 걱정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 알고리즘 모성은 게임의 모든 상대를 다운그레이드하여 플레이어가 잘못된 관리의 결과를 겪을 필요가 없고, 자산 관리의 자동 증식만 즐길 수 있다. 즉, 방치형RPG의 관리자는 매니지먼트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수반되는 '관리자의 상상력'은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려는 플레이어의 실제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 아즈마 히로키가 분석한 미연시 게임과 같은 정체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의 압도적인 무력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며 41) , 이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는 간절히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부족한 무언가임이 분명하다. 상술한 관리자적 상상의 위선은 또한 "사고"의 정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일반적으로 산술적인 텍스트 42) 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고하는 것은 “복잡한 사고의 탐구 활동”이 아닌 플레이어가 알고리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단순한 ‘계산’으로 축소된다. 가령 게임 내에서 가장 높은 전투력을 달성하기 위해 캐릭터를 조합하는 방법을 계산한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자동화 로직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관리의 만족'이라는 원칙에 따라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방치형RPG의 본질적 매력은 플레이어가 과도한 게임 플레이 노동을 피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거의 제로 비용으로 높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성의 폭력이 다시 폭력화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게임 개발자와 운영자는 수익을 내기 위해 플레이어를 게임에서 '이탈'시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방치형RPG가 제공하는 긍정적 경험에 계속 몰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잠시 게임을 떠나 알고리즘 모성의 다음 자동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 위로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위로의 간격은 절대적으로 연장된다. 이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형태의 폭력이며,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것에 의존한다. 알고리즘 모성의 편안함에 빠져 있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긍정적인 경험에서 갑자기 철수하는 것은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비부정적 부정성은 게임 전반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보다 더 고통스럽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아니라, '얻었지만 또 잃었다'는 상실감을 지향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트라우마 위에 소금을 한 움큼 더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 결론 한마디로 방치형RPG게임은 한병철이 말한 ‘권태사회’ 43) 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권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플레이어를 비관적인 자기착취 사회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그들은 게임에서 자신을 다른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경쟁하는 순수하게 효율화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인기를 구가하는 MMO슈팅게임 게이머들과 달리, 이(방치형RPG) 게이머들은 ‘공포’가 아닌 편안한 ‘퇴화’의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참여(어쩌면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하고, 게임에서의 다양한 경쟁 메커니즘과 그 이면의 사회적 상상력을 즐긴다(jouissance). 44) 다른 한편에서 이 ‘기계적 육체로서의’ 게이머는 정신적인 소모로 인한 자아 붕괴를 피하기 위해 방치형RPG 같은 자동/수동형 플레이 방식으로 알고리즘 모성에게 자신을 양보하는 걸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게이머는 자신을 관리자로 상상하고 새로운 자아실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아실천이 직면한 것은 매우 판이하면서도 현실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긍정적 경험을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며, 모성적 광휘를 발하는 절대권력(즉, 모성적 디스토피아)이다. 이 모성적 절대권력은 한편으론 게이머의 실재적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에게 도망칠 수 없는 모성 폭력을 가한다. 나아가 게임 자본주의와 공조해 게이머를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의 위협에 노출시킨다. 이를 통해 방치형RPG는 겉으론 무한히 부드러운 수치 선경이 되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비디오 게임 세대 45) 가 은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릉도원이 아니며며, 여전히 초극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자동으로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라는 게임의 시대에 우리는 진정으로 초월적인 게임 장르를 모색해야 한다. 1) 본문은 중국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와 상하이 철학사회과학기금 청년 프로젝트인 '융미디어 맥락에서 e스포츠 이미지 구축 및 가치 혁신 연구'의 결과물로, <문예연구 文艺研究>지 2023년 10호에 발표됐다. 2) 영어권에서는 클리커 게임(clicker games) 또는 성장 게임(incremental games)으로 불린다. 3) ‘推图(퉤이투)’에서 ‘图(투)’는 게임 속 ‘맵’을 의미하고, ‘퉤이’는 게임의 주요한 줄거리를 ‘클리어’하는 걸 뜻한다. 즉 ‘맵밀기’는 플레이어가 줄거리를 클리어하기 위해 두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4) 여기서 '스킨 교체'는 게임의 핵심 플레이방식을 바꾸지 않고 시청각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게임을 새로운 게임으로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5) 오츠카 에이지, 『物語消費論:ビックリマンの神話学(이야기 소비론)』, 新曜社, 1989년, 10~24페이지. 오츠카 에이지는 서브컬처의 설정과 세계관을 거대한 이야기(大きな物語)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大きな物語'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중국어로의 번역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저우즈창(周志强)은 이 개념을 서양의 'big story' 이론을 차용하기보다는 'grand narrative'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저우즈창, 『游戏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게임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중 이질성의 순간")』, 南京社会科学, 3호, 2023년 참조). 이 논문에서는 저우즈창의 관점을 채택했다. 6) 일본 서브컬처 연구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오츠카 에이지의 '거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비이야기(大きな非物語)'로 발전시켰고, 우노 츠네히로는 후자를 '거대 게임(大游戏)'으로 확장시켰다. '거대한 비이야기'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 뒤에 존재하는 스토리텔링이 없는 거대한 정보 모음(즉, '데이터베이스')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動動化するポストモダン: 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Shogun, 2001, 62쪽을 참조하라. “반면 '거대 게임'은 거대한 비이야기의 정적 구조 속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상호작용하는 동적 구조를 강조한다” (우노 츠네히로, 『마터니티のディストピアⅠContact』, 하야카와쇼텐, 2019년, 112쪽). 7)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의 디스토피아: 접촉편)』,83페이지 8) 저우쓰위, 리용(李勇), 《“让游戏自己玩”:방치형 게임与超级自我(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라: 방치형 게임과 초자아)》,《南京社会科学(난징사회과학)》, 2023년, 제3기. 9) 中島誠一『触覚メディア——TV ゲームに学べ!次世代メディア成功の鍵はここにあった(촉각 미디어--TV 게임에 배우라! 차세대 미디어 성공의 열쇠는 여기에 있었다)』(株式会社インプレス주식회사 임프레스,1999年)145페이지. 10) ‘입력 결핍’이란 게임 플레이 행위가 게임 화면 외부에서 게임 입력 장치를 조작하는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고 그 상징적 의미가 빈곤한 것을 말한다. ‘과잉 산출’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게임 화면 내에서 상징적 의미의 구체적 확장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는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여 삼국지 게임 속 조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조조를 통해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그녀는 단순히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고 있을 뿐이다. 마츠모토 켄타로 『ゲームのなームのなかで、人はいかにして「曹操」になるのか: 「體験の創出装置」として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 (마츠모토 켄타로, 왕이란, 편역, 『일중문화토라 ナショナルコミュニケション: コンテンツ・メディア・歴歴歴歴部・社会』ナナニーシヤ 출판, 2021) 107페이지를 참조하라. 11) 저우즈창, 상동 12)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처린(车琳) 옮김, 贵州人民出版社(구이저우인민출판사), 2020년판, 32쪽. 13) [역주] 원문의 ‘커진(氪金)’은 직역하면 ‘크림톤'과 ‘돈'을 뜻하지만, 중국 온라인 게임에서는 현질을 가리킨다. 14) [역주] 원문의 ‘对立面’(대립면/대립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모순의 통일(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을 가리킨다. 15) Jesper Juul, 《失败的艺术:探索电子游戏中的挫败感(실패의 기술: 비디오 게임에서의 좌절 탐구)》,杨子杵、杨建明 옮김, 베이징이공대학출판사, 2019년판, 130페이지. 16 ) [역주] 고사성어 용담호혈은 ‘지세가 매우 험준한 곳’을 뜻한다. 17 ) [역주] 원문의 ‘쾌속괘기(快速挂机)’는 ‘AFK(away from keyboard)’를 지칭한다. 18 ) 姜宇辉(장위후이), 《数字仙境或冷酷尽头:重思电子游戏的时间性(디지털 원더랜드 또는 콜드 엔드: 비디오 게임의 시간성에 대한 재고)》,《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19 ) 플레이어가 조작하지 않아도 프로그램 스크립트가 자동으로 실행되는 게임을 가리킨다. 20 ) Janet H. Murray(자넷 H. 머레이,), 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햄릿: 사이버 공간에서 내러티브의 미래),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Singapore: The Free Press, 1997, p. 143. 21 ) 요시다 히로시, 《游戏中的死亡意味着什么?——再访“游戏现实主义”问题(게임에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게임 리얼리즘' 문제 재조명")》,《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선집)》,邓剑编译(덩지안 편역),上海书店出版社(상하이서점출판사), 2020년판, 237~273쪽. 22 ) Ian Bogost, Unit Operations: An Approach to Videogame Criticism,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6, pp. 3-4. 23 ) 보스는 반드시 특정 캐릭터일 필요는 없으며, 캐릭터가 아닌 상태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게임 패스 목표를 설정하는 시뮬레이션 건설 게임도 게임 보스로 해석할 수 있다. 24 ) '타자의 계층'이라는 개념은 오사와 마사유키가 '초월적 타자'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하며 제안한 개념이다. 오사와 마사유키, "오타쿠 이론: 광신주의, 타자성, 정체성", 덩 지안 편저,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 비평 에세이 선별, 상하이 서점 출판사, 2020년판, 79-116쪽 참조. 오사와는 게임 오타쿠를 포함한 오타쿠의 주체성을 논할 때 지젝의 논지를 인용하여 "개인으로서의 신체를 자기 정체성 있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 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자와는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를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타자와는 달리 우연적인 '내적 타자'와 상징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타자와는 달리 필연적인 '초월적 타자'로 구분한다.". 인간의 자기 동일화 과정에서 내적 타자는 모방 가능한 이미지로 기능하고, 초월적 타자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추상적 규범으로 등장하며(예: 푸코의 감옥 속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 대한 전경, 오사와 마사유키의 『[増補補][増补], 『허구 시대의 열매』(치쿠마쇼보, 2009, 223-224) 참조) 서로 전제하고 있다. 1-3쪽), 상호 배타적인 전제다. 초기 비디오 게임의 버그가 타자 대리현상의 증상이라는 오사와의 관찰에 착안하여, 최고 권력은 게임 보스를 대리인, 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 타자'(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제3자')로 등장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임에서 최고의 권력은 보스로 대표되며, 즉 게임의 전체 영역을 통제하는 '초월적 타자'로서(즉, '제3자의 위계'로 기능하는), 플레이어는 보스를 죽임으로써만 게임의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5 ) 요시다 히로시, 「規則と自由の弁証法としてのゲーム——〈ルールの牢獄〉でいかに自由が可能か?(규칙과 자유의 변증법으로서의 게임--〈규칙의 감옥〉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立命館言語文化研究(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 26권 제26호, 19-27쪽. 26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 제1권 - 인식의 의지』, 셰비핑 옮김, 상하이인민출판사, 2016년판, 113쪽; 아감벤, 『호모사케르: 벌거벗은 삶』, 중앙편집번역출판사, 2016년판, 126쪽. 27 ) 게임 디자인 초기에는 유명한 게임인 제비우스나 후크처럼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반복 게임이 많았다. 이러한 게임에서도 각 레벨이 끝날 무렵에는 흔히 '미니 보스'로 알려진 캐릭터가 해당 레벨의 '아버지'로 등장하곤 했다. 28 ) 서클 수축은 탈출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도망치는 플레이어가 결국 정면으로 맞붙게 될 때까지 게임의 위험 구역이 안전 구역을 계속 집어삼키는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29 )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0, pp. 1-64. 30 ) 한병철, 《권태사회》, 吴琼(우총)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 1~14페이지. 31 )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후쿠신 키드(うる星やつら)>에 등장하는 모성 공간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 "ゼロ年代の想像力 야근 시대의 상상력"(하야카와 쇼텐, 2011), 242-252쪽 참조. 32 ) 우노 츠네히로, 『若い読者のためのサブカルチャー論講義録(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아사히신문출판사, 2018년, 91쪽. 일본어 ‘物语’는 ‘故事(이야기)’라는 뜻이다. 33 ) Johan H.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London, Bost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80, p. 10. 34 ) '결단주의'는 우노 츠네히로가 2000년대 초반 일본 서브컬처 작품의 문학적 상상력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을 유지할 수 없으며,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즉, 히가시 히로키가 말하는 '빅 스토리'를 공유할 충분한 압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한다는 전제에서 포스트모던적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즉, 히가시 히로키가 큰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부족하다), 여전히 자신이 믿는 가치를 선택한다(즉,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작은 이야기를 거부하여 미야다이 신지가 '섬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같은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형성한다). 한 마디로 결정론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가치 상대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로, 결정의 내용과 이유보다 결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노 츠네히로, "초과근무 시대의 상상력", 185쪽 참조. 35 ) 우노 츠네히로, 『遅いインターネット(느린 인터넷)』, 幻冬舎, 2023年, 178페이지. 36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5페이지 37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18페이지 38 ) 그렇다고 해서 기업/플레이어 간 경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에서는 랭크전, 길드전 등 경쟁 메커니즘이 여전히 소셜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게임의 자동화된 설계로 인해 경쟁의 실패가 외부화되어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에 존재하는 자동화된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임에서의 실패로 인해 심리적으로 파산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도 발생하지 않는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게임/비즈니스 경쟁 과정에서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놓인다. 39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宋娀(송송)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판, 23페이지. 40 ) 王晓明(왕샤오밍), 《半张脸的神话 반쪽 얼굴의 신화》,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3年版,第27—33页。 41 ) 아즈마 히로키, 《萌的本事,止于无能性——以〈AIR〉为中心 모에의 역량, 무능에서 멈추다 - AIR를 중심으로》,덩지엔 편역, 《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 문선》,214페이지. 42 ) 산술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달리 알고리즘에 의해 내러티브와 경험이 주도되는 텍스트를 말하며, 배경의 숫자 연산이 전경의 게임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내러티브 기법이다. 43 ) 한병철, <권태사회>, 53~61페이지 44 ) Sean Homer, Jacques Laca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p. 89. 45 ) 蓝江(란장), 《宁芙化身体与异托邦:电子游戏世代的存在哲学(몸과 헤테로토피아의 님피: 비디오 게임 세대의 실존 철학)》,《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학자) 덩 젠 , 邓剑 쑤저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부교수. 디지털게임 문화연구를 주 관심사로 다루며, 〈澎湃新闻〉에서 게임에 관한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 Back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19 GG Vol. 24. 8. 10. 2024년 2월, 허뤄스튜디오(Heluo Studio, 河洛工作室)의 신작 게임 <고룡풍운록>(古龙风云录)이 발매됐다. 허뤄의 전작인 <하락군협전>(河洛群侠传), <협지도>(侠之道), <천외무림>(天外武林) 등과 비슷한 무협 게임이다. 전작들과 다른 점은 무협 추리게임이라는 점이다. 협객들은 무림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조사에 나섰고, 그 수사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고 이를 풀어나간다. 액션어드벤처나 일본식 롤플레잉 등 명성 높은 장르들에 비해 무협 추리게임의 파급력은 아직 더 커져야 한다. 하지만 이 장르 역시 지난 수년의 개발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출시된 바 있다. 예를 들어 <고룡풍운록> 시리즈 이전부터 논리적 사슬이 뚜렷하고, 낱낱이 파헤치는데 집중하는 <묵영협종 墨影侠踪> , 방탈출에 특화돼 있는 <협은행록: 딜레마 의혹>(侠隐行录:困境疑云, Wuxia archive: Crisis escape) , 증거 제시를 강조하는 <천명기어>(天命奇御, Fate Seeker) 시리즈 등이 있었다.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고룡풍운록> 사건의 제재 선택과 추리 메커니즘 <역전재판> 시리즈, <단간론파(弹丸论破)> 시리즈 등 전통적인 추리게임에서는 추리과정에서 오답을 내린 횟수가 너무 많거나 키포인트에서 오답을 내리면 플레이어가 패배의 결말에 접어들게 되면서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반해 <고룡풍운록>의 추리는 다르다. 예를 들어 <고룡풍운록> 1장 에피소드 ‘싱화촌(杏花村)’에서 강남 주씨 가문의 집사는 자신의 하인이 살해됐다는 점과 그 옆에 무림 인사의 시신 한 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현장에는 ‘초류향(楚留香)’이라는 무림인사가 돌아다닌다. 무협소설가 고룡(古龍) [1] 의 작품에 정통한 사람들은 초류향이 풍류괴수(风流盗帅)로서 항상 협객과 의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왔다는 것, 절대로 재물에 눈이 먼 도둑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초류향전기>(楚留香传奇) 시리즈를 읽지 않았거나 추리물의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기를 바란다면 초류향이 살인을 통해 보물을 빼앗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추리 시스템은 <고룡풍운록>의 중요한 요소지만, 게임의 핵심은 아니다. 추리에 실패해도 극의 서사는 계속된다. 초류향은 직접 주씨 가문 집사를 공격하고, 그의 몸에서 증거물을 찾아내 진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강호는 결국 무공 승부로 문제를 해결했으니, 설령 추리에 성공하더라도 상대방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4장에서 주인공은 강별학(江别鹤)의 모략을 모두 들춰내지만, 그를 단죄하지 못한다. 폭로 직후 증거물에 불을 지르고 목격자와 주인공의 추리에 공감하는 무림인사들을 암살할 계획을 미리 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반칙으로 인해 주인공 역시 칼과 주먹으로 ‘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추리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추리 보상으로 진실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과 NPC가 자신의 동반자가 된다. 예를 들어 강남의 주씨 집사 사건에서 진실을 감추고 추리하면 캐릭터의 속성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아이템 ‘지혜의 열매(智慧果)’ 2개를, 일부만 추리하면 '지혜의 열매' 1개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만약 너무 많은 단서를 놓치거나 초류향이 돈의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항저우의 ‘멸문(灭門)의혹 사건’에서 ‘악랄한 방법으로 사자를 죽여 항저우를 도모하려 한’ 음모를 밝혀내면 삼향(三湘; 후난의 옛 별칭)의 맹주 ‘철무쌍(鐵無雙)’이 주인공 팀으로 합류해 주인공들이 대장을 맡고 있는 ‘인의장(仁義庄)’의 실력을 끌어올리게 된다. * 음모가 들통나자 강별학은 증거물을 불태우고 주인공 일행을 불태우려 한다. 사실과 논리를 뛰어넘는 무공의 중요성은 <고룡풍운록>이 턴제 롤플레잉 게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배경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추리게임에서 추리는 사법기관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야기가 일어나는 역사적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루는 사법기관과 추리하는 장소가 다르다. <벚꽃재결>(樱花裁决)에서는 마치부교(町奉行)와 신센구미(新选组)가 에도의 부교소(奉行所)에서 일이 벌어졌고, <역전재판>(逆转裁判)에서는 나루호도 류이치(成步堂龙一), 오도로키 호스케(王泥喜法介)가 일본 법원에서 변론이 이뤄졌다. 또, <양쯔강의 살인>(山河旅探)에서는 심중평(沈仲平)이 청나라 말기 관아 안에서 추리했으며, <고바야시 마사유키(小林正雪) : 비밀의 방의 복수> 시리즈에서는 경찰인 고바야시 마사유키가 현장 수사에서 용의자와 대치한다. 그러나 <고룡풍운록>의 추리 과정에서 관아는 배경일 뿐이다.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항저우 멸문의혹 사건’에서 ‘강남 협객’ 강별학과 ‘애재여명(愛才如命)’ 철무쌍은 각자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고, 당사자든 방관자든 관청의 개입을 요청하려 하지 않는다. 가공의 역사를 선호하는 김용과 달리 <고룡풍운록>은 구체적인 역사 속의 왕조와 실제 역사 속 인물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이야기가 발생하는 시간을 종종 모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봉무구천>(陆小凤传奇之凤舞九天) 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丰臣秀吉) 일본 태정대신이 등장하고, <창공신검>(苍空神劍)에는 강희황제(康熙皇帝)가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그 시기를 고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풍운제일도>(风云第一刀) 주인공 이심환(李寻欢)은 ‘꽃을 탐내는 이씨’로 불린다. 이를 근거로 미뤄볼 때 그는 과거제도가 있던 시대, 즉 수나라에서 청나라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자세한 상황은 고증이 어렵다. 따라서 철도나 전신과 같이 분명 근대에 존재했던 사물이 아닌 한, 이야기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요소들은 특정 기술이 발명됐는지, 혹은 특정한 기물과 재료가 중국에 도입됐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활용할 수 있다. 무협 추리물의 발전 과정 무협 추리의 역사는 명청시대 ‘공안소설(公案小说)’과 원나라 잡극(元杂剧) 중 ‘공안희(公案戏)’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용도공안>(龙图公案)은 포증(包拯)이란 인물이 “재물을 탐내 살인하고, 세력에 기대 사람들을 능멸한 절도 및 사기 등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제사공안>(诸司公案)은 법의학 지식을 이용해 시체를 부검한 사안에 대한 이야기다. <염명공안>(廉明公案)은 판관의 관료 신분과 권력의식을 강조하고, 이들이 지극히 미세한 것까지 빈틈없이 살펴 절도와 살인, 혼인 등 사건들을 판결하는 이야기다. 공안소설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데, 추리 및 사건 해결류만이 아니라, 사건·재판·형량에 관한 갈래들이 있을 정도다. <홍루몽>의 경우 “가련(贾琏)은 직위가 박탈되고 면죄부를 받아 석방됐다”고 적혀 있다. 공문 장르 작품들의 특징은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강도나 토비 때문이거나, 탐관오리 때문이거나,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살인, 방화나 그밖에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일이 번지면서 청렴한 관리가 공정하게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상형공안>(详刑公案), <율조공안>(律条公案), <명경공안>(明镜公案), <신명공안>(神明公案), <상정공안>(详情公案) 등 대부분이 이와 같다. “모든 작품들은 스토리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심리와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안건을 판결하는 관원들의 세련됨을 높이 평가한다.” [2] 공안소설과 공안희를 바탕으로 관료 중심의 서사를 돌파한 고룡의 작품은 협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협추리라는 장르를 빛냈다. 협객 자체가 사건을 수사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사에서 한 수 아래일 때도 있는 게 당연하다. <육소봉전기의 봉무구천>에서 주인공 육소봉(陆小凤)은 목도인(木道人)의 계략에 걸려 석안(石雁)의 자금관(紫金冠) [3] 을 얻는 데 이용된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할 의무는 없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건을 수사한 협객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게다가 협객들은 비록 주먹을 보탤 친구가 있지만, 자신의 무공으로 도전과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관방은 공식적인 폭력기관처럼 수배령을 내리고, 해적 문서를 발부해 인해전술을 통해 범죄 용의자와 겨룰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추리물에 스릴과 심금을 울리는 색채를 더 하게 된다. 20세기 후반 고룡은 결코 무협 추리물의 기수가 아니었다. 김용의 <설산비호>(雪山飞狐)나, 윈루이안(温瑞安)의 <4대명포>(四大名捕) 시리즈 등 다른 무협 작가들도 관련된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고룡은 그의 작품의 문학성과 영화화 각색의 전파력 덕분에 이 장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작가가 됐다. 무협 추리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육소봉전기> 시리즈와 <초류향전기> 시리즈다. 두 시리즈는 수준이 다르고, 심지어 그 중 일부 대목에서는 제3자 대필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무협소설 독자들의 공통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명검풍류>(名剑风流), <대기영웅전>(大旗英雄传), <혈앵무>(血鹦鹉)에도 무협추리 요소가 포함돼 있다. <고룡풍운록>은 전작에 비해 현대적인 증거 수집과 추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두아원>(窦娥冤) 에서 판결을 맡은 태수 도올(桃杌)은 증거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심지어 모든 증인을 찾아가 증언을 듣지도 않은 채 판결을 내리는 등 경솔하게 행동한다. 고룡의 작품에서 협객은 직관과 우연의 일치에 의존하는데, <육소봉전설의 금붕왕조>(陆小凤传奇之金鹏王朝)에서는 곽천청(霍天青)과 청풍도인(青枫道人)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진술이나 부검 없이 진행한다. 이익을 거둔 자들에게 동기가 있으리라는 판단과 범인의 자백을 근거로 삼을 뿐이다. <고룡풍운록>에서 사건은 인적 증거와 물적 증거를 모두 갖추고 있다. ‘양란풍운기(扬澜风云起)’ 사건에서는 소낭자(娘子), 라오리, 괴이한 낭중(郎中), 대장장이, 샤오리, 미치광이, 마을 주민, 검은옷을 입은 소녀 등 8명의 증인을 조사하여 10년 전 사건에 대한 추리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각 증인이 보는 사건의 진상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모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플레이어가 두 개의 관련 단서를 조합한다고 해도 확실한 관점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두세 가지 가능한 설명 중 적절한 추론을 선택하여 여러 추론이 공통된 결론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 조사 탐방 후 강별학(江别鹤) ‘멸문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모습 <고룡풍운록> 개발의 득과 실 그동안 많은 추리게임들, <역전재판> 시리즈나 <양쯔강의 살인>은 모두 핵 앤 슬래시(hack and slash) 게임의 생명치와 유사한 카운터를 화면에 표시했다. 만약 플레이어의 추리에도 불구하고 목격자, 검사, 피고인을 타격시키는 허점이 없다면 ‘생명치'가 손실된다. 게임 스토리에서 이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추리가 엉뚱하거나 허를 찌르는 것으로 해석되고, 다른 사람들은 플레이어 캐릭터에 대한 인내심을 잃는다. 판사나 심리를 책임지는 그밖의 담당자가 인내심을 소진해버리면 플레이어 캐릭터는 다시 추리하더라도 자기 판단을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현 사건의 잠정적 추론은 최종 결론과 판결의 근거로 확정된다. 이 규칙의 설계는 실생활에는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몰입도 측면에서 볼 때, 게임 속 추리에서는 플레이어가 궁거법(Proof by exhaustion) [4] 을 활용해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한다. <고룡풍운록>과 달리 단서를 조합해 추리하는 과정은 주인공의 사고과정과 같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증인·증거를 조합하더라도 여론의 추궁을 받지는 않는다. 즉, 플레이어는 궁거법을 활용해 관련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얼마든지 클릭해볼 수 있다. 본작의 가장 복잡한 단서인 지령장(地灵庄) ‘멸문 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단서가 제대로 수집되면 10분도 채 안 돼 궁거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시도됐던 단서의 조합은 아이콘 밝기가 변화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아직 열거한 적 없는 게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룡풍운록>에서 추리의 주된 어려움은 단서를 어떻게 사용해 허점을 찾고 진실을 파헤치느냐가 아니라, 단서를 어떻게 수집하느냐에 있다. <역전재판>처럼 관심이 많고 추리만 주목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법정 밖 어딘가로 가는 것은 증인·증거물을 모으기 위함이다. 따라서 필요한 수집이 완료되면 이야기는 바로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고룡풍운록>은 그렇지 않다. 가령 ‘악인골 소마성 사건’, ‘강남 주씨 가문 집사 사건’에서 초반부 수수께끼의 단서 수집 범위는 한 장면에 한정돼 있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멸문 의혹 사건’과 같은 후반부 수수께끼에서는 조사 범위가 항주성 전체로 변경된다. 이 도시에서는 줄거리 말고도 <육소봉전기의 은갈고리 노름방>(陆小凤传奇之银钩赌坊) 속 은갈고리 노름방, <육소봉전기의 자수대도>(陆小凤传奇之绣花大盗)의 침술가 설씨, <절대쌍교>(绝代双骄)의 헌원삼광(轩辕三光) [5] , <7종 무기>(七种武器)의 ‘장생검(长生剑)’ 백옥경(白玉京), 지령장 입구의 ‘사자 퀴즈’,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특수 계란 수집’ 등 다양한 미션들이 있다. 이 서브 서사들의 미션·수집·전투 역시 강호의 일부였다. 미션에 대한 힌트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하는 NPC와 위치에서 모든 단서들을 수집하고 완벽한 추론을 도출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다. 다른 무협 추리게임들과 비교해 <고룡풍운록>이 만들어내는 판타지 세계는 <묵영협종>이나 <천명기어> 같은 오리지널의 세계관이 아니라, 고룡 작가가 쓴 여러 편의 작품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세계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것은 게임 원작과 원작 소설 캐릭터 및 줄거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게임의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고룡풍운록>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룡의 소설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속았다고 항의하게 만들 것이다. 반면 게임의 대부분이 원작 내용이고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적다면, 원작을 읽으면 그만이지 왜 돈을 주고 게임을 사야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을 피하기 어렵다. * 배후세력은 동경(东景)으로 돌아가 자신의 음모를 이야기한다. <고룡풍운록>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추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사건을 다른 갈래로 끌고 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백리장청(百里长青)이란 인물의 ‘오견정기양(五犬旌旗扬)’ 사건과 철무쌍의 ‘멸문 의혹 사건’이 있다. 고룡이 쓴 <7종 무기의 패왕총>(七种武器之霸王枪)에서 정희(丁喜)는 ‘신권소제갈(神拳小诸葛)’ 등정후(邓定侯)를 설득해 '복성고조(福星高照)'를 동경으로 돌려놓으려는 음모를 파헤치고, 백리장청을 구한다. 반면 게임에서는 이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뉜다. 플레이어가 정희를 믿기로 택할 경우 이야기는 원작과 동일하게 전개된다. 만약 플레이어가 패왕총의 전사 왕성란(王盛兰)을 믿으면, 동경으로 돌아가는 음모에 걸려들게 되고, 대보탑(大宝塔)에서 백리장청과 싸우게 된다. 결국 동경으로 돌아가는 걸 꺾을 수 있지만, 백리장청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 이렇게 되면 원작 소설을 읽은 플레이어는 원작에서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고,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물건을 운반해 훔치거나 신분을 위조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단서 추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고룡풍운록>의 무협 추리가 이채롭기는 하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점 중 하나는 고룡의 원작 소설 속 추리를 계승하거나 따르는 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게임의 오리지널 캐릭터는 많지 않다. 주인공 진우(辰雨)를 제외한 십여 명의 컨트롤 가능한 캐릭터들은 모두 고룡 원작 소설 속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원작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화려하지 못하다. 사실 고룡은 이미 많은 인물들의 포인트를 보여줄 수 있는 시범을 보였으니, 이대로만 구현하면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심환, 강소어(江小鱼)의 서사가 꽤 온전하다는 것 외에 다른 많은 캐릭터들은 아쉽다. 게임 속에서 설아(雪儿)가 땅굴을 파내는 데 도움을 주는 시퀀스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 얽힌 서사의 핵심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상관인 단봉(丹凤)과 비연(飞燕)의 의심이나 천금문(天禽门)과 호휴(霍休)의 계략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육소봉전의 금붕왕조> 서사를 읽어보지 못한 플레이어들에게 이 서브 서사는 뜬금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초류향전기> 시퀀스에서는 미모의 여사친 소용용(苏蓉蓉), 이홍수(李红袖), 송아(宋甜儿)는 물론이고, “기러기와 나비는 두 날개로 날고, 꽃향기는 세상을 가득 채운다”의 희빙안(姬冰雁)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룡풍운록>의 또 다른 단점은 추리 요소가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하긴 하지만 게임 메커니즘의 혁신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내용상에서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인의장의 ‘진우’는 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진 협객일 뿐, ‘강남 협객’ 강별학과는 비교도 안 되고, 나약하고 평범한 전형으로 여겨져 온 ‘흥운장주(兴云庄主)’ 용소운(龙啸云) 역시 강호에서의 위상이 훨씬 높다. 그러나 각 문파의 제자들이 단서를 물었을 때, 금품을 요구하지도 않고, 임무를 부여하거나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직접 진을 치지도 않는다. 그저 무기를 쓰거나 권법을 나누는 모습은 너무 얌전해 보인다. 진상이 드러난 후 : 무협 추리게임의 윤리관 무협 추리의 선구자 고룡의 소설은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관헌을 다루더라도 강호 인사들의 시각으로 전시되는 경우가 많다. 강호 사람들의 생각은 관청이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자수대도> 속 여섯 문명은 금구령(金九龄)을 잡을 때, 강도 사건을 당했을 때, 재빠르게 체포하고 단서를 구하지 않는다. 현상금 고지서나 체포영장을 발부하지도 않는다. 고과대사(苦瓜大师)의 방에 가서 육소봉에게 사건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육소봉전기의 결전전후>(陆小凤传奇之决战前后)에서 자금성의 몇몇 고수들은 수천 명의 금군(禁军)을 소집하지만 결국 육소봉이 엽고성(叶孤城)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비록 이후의 무협 추리물이 반드시 이러한 설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겠지만, 고룡 소설의 캐릭터와 인물은 의심할 여지 없이 21세기 무협 추리물의 정신적 계몽이다. 추리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협 추리 게임은 미세한 단서를 보고 그 발전 방향이나 문제의 본질을 인식해, 낱낱이 파헤치는 사안 탐색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증인 신문과 증거물 조사, 시신 검안 등을 통해 진실을 탐구한다. 하지만 고룡의 무협소설 세계가 지닌 독특한 윤리관을 감안할 때, 진실을 파헤친 뒤에는 대처방식이 제각각이다. 진실에 대한 태도 역시 ‘무협’이 앞서며, 묘당이 아닌 강호의 방식으로 진실을 찾아낸다. 이런 점은 <용투공안>(龙图公案) 등 명청시기의 공안소설 작품들과 크게 다르다. 이런 윤리관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매직서클(魔环, Magic circle)’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매직서클 이론은 네덜란드 역사학자이자 게임연구의 창시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는 게임이 판타지 세계와 현실세계 간의 의식적인 개념의 경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킨다. 게임의 규칙이 제한하는, 마치 마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서는 일상 생활의 익숙한 규칙과 현실이 일시정지되고, 대신 게임의 규칙과 허구의 현실이 등장한다. 이 공간에서 플레이어의 행동은 게임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게임이 어떻게 현실에서 고유한 환경을 조성하는지 강조하고,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고유한 규칙과 내러티브를 탐색하고 시도하고 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자유롭고 의미 있는 활동임을 보여준다. 무협 추리 게임의 서사, 캐릭터, 룰은 이러한 매직서클을 만든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변화하는 정세, 정의를 위해 싸우는 숭고한 무협세계에 진입해 검과 그림자가 빛나는 협객의 세계에서 색다른 놀이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무영협종>의 핵심은 ‘정치’에 있다. 무협 추리의 독보적인 존재인 <묵영협종>은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것은 물론이고, 주인공 자신도 무공을 할 줄 모른다. 주인공이 위치한 ‘임연각(临渊阁)’ 에피소드에서 첫 사건은 강호문파와 조정 간의 분쟁이다. 진실을 밝히면 수많은 살상이 이뤄지고, 진실을 숨기려 하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이후 여섯 문파와 금의위(錦衣衛)가 연이어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사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피신하는 것 역시 정치인들의 도구로 쓰이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결말은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의 봉기와 관련된 여러 분쟁들이다. 진실을 말하더라도, 쟁투하는 쌍방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조정은 사람을 죽이고 입을 막을 수 있고 협객은 판결장을 공격할 수 있다. 진정한 정의는 법정에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천명기어>의 핵심은 ‘용서’다.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악당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든 어쩔 수 없었다거나 자기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핵심 빌런 마니교(摩尼教)의 주요 두목 ‘마니구사(摩尼九使)’다. 게임 속 여러 악당들은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악을 버리고 선행을 택한다. 예를 들어 궐창매(阙苍鹰)는 점창파(点苍派)에서 대협 양인호(粱人昊)의 사제였다. 그는 사부가 자신의 선배 양인호를 편애한다고 오해한 나머지 마교에 가담하게 되고, 한때 자신의 사매이기도 했던 주인공의 숙모를 살해한다. 해피엔딩에서 그는 자신이 스승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사부는 줄곧 그를 보살펴왔고, 그를 의발(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바리때)의 후예로 삼고 싶어 한다. 결국 궐참매는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고치고, 다시 위험을 극복해 어려움을 구제하는 길로 들어섰다. 또, 상관인 홍령(虹伶), 호소방(虎啸帮)의 방주로서 소림사(少林寺) 스토리에 이어 주인공의 여사친 형약앵(刑若樱)을 모략한다. 게임의 DLC 버전 <복호미종>(伏虎迷踪)에서 플레이어는 옛 하인의 편지 수수께끼에 남겨진 메시지를 통해 그녀가 멸문당해 어쩔 수 없이 금단(金丹)을 입고 수련한 뒤,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미쳐버려 강자에게 도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에게 피맺힌 원한을 따지기보다 그녀와 자주 겨루어 다시는 강호에서 말썽을 피우지 않게 한다. <고룡풍운록>의 핵심은 ‘의리’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드러나는데, 우선 재수사의 동기는 ‘의리’이며, 두번째로 의기에 부합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셋째, 진상규명 이후의 처리 방식은 ‘의리’에 있다. 동기의 관점에서 보면 인의장 장주 심천군(沈天君)이 마교에서 길러낸 소년 자객 진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든 내러티브 역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원동력은 진우가 당시 심천군이 왜 회안봉(回雁峰)에 실종됐는지, 나아가 회안봉에 대한 소문이 셀 수 없이 많은 협객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굳이 조사하지 않더라도 진우와 인의장 책임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심천군은 떠나기 전에 진우에게 손을 쓰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고, 강호의 도의를 위해 연회를 열어 강호 사람들을 불러 이 해묵은 사건을 조사한다. 과정을 통해 보면 협객의 수사기법은 대의명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항저우 멸문 의혹 사건’에서 진상을 추리하려면 ‘도사’ 초류향이 관련 증인에 대한 몸수색을 해야 한다. 현대의 사건 처리 방식대로 공무를 수행하는 경찰(이야기상에서는 아전이나 포졸)이 처리하도록 한다면, 증인들은 자신이 의심 대상이 됐음을 알게 할 것이다. 경공(轻功)으로 도주하면 사건이 죄에 대한 추궁 없이 종결되거나 미해결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혹은 그들이 강렬한 외공내경(外功内劲)을 믿고 증거를 인멸하여 증거를 대조할 수 없게 할 수도 있다. 사건 결과를 통해 이런 도적 행위는 진상을 밝히고 멸문 의혹 사건의 진범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협세계에서 친구 간 의리의 우선순위는 사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 진우는 임선아(林仙儿)가 쾌활왕좌(快活王座) 아래의 주색잡기 4인 중 ‘색사(色使)’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심환과 아비(阿飞) 간 의리를 위해 그녀의 죄를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임선아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고치라고 호통친다. 백비비(白飞飞)가 겉으로 드러나는 의지할 곳 없는 여자가 아닌 유령궁주(幽灵宫主)임을 알게 된 후, 그녀와 심랑(沈浪)의 관계를 고려해 주인공 대오로 합류시킬 수 있게 된다. 비록 운몽선자(云梦仙子)가 주인공 대오에게 ‘천운오화면(天云五花绵)’이라는 기괴한 독약을 쓰지만, 그녀를 격퇴한 후에는 그녀가 대오 멤버 왕영화(王怜花)의 어머니라는 것을 고려해 용서받게 된다. 쾌활왕좌 수하 ‘재사' 금무망(金无望)은 종종 납치하겠다는 협박으로 돈을 벌지만, 주인공 대오에 합류해 안봉(雁峰)으로 돌아가는 진실을 찾게 될 때, 과거의 죄악은 묻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의리가 구하하는 행동이 반드시 합법적이거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다정검객 무정검>(多情剑客无情剑)에서 이심환은 용소운과의 의리를 위해 자신의 연인 임시음(林诗音)을 용소운에게 넘겨주고, 거액의 재산을 헌납하고 스스로 관외로 떠난다. 그러나 이 작전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심환·임시음·용소운(龙啸云)·용소운(龙小云) 등 네 사람을 수년간 괴롭힌다. 하지만 의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윤리관 덕분에 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전해져 <고룡풍운록>에 재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룡풍운록>의 가치관이 ‘의리’를 핵심으로 삼은 것은 무협 작품의 정신적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협객의 행동 패턴은 당대 사회 질서와 종종 모순된다. 무협이란 집단은 통치기관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현했다. 따라서 무협작품에는 통치기관의 이미지가 흐릿하거나, 등장하더라도 지배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에서 장무기(張無忌)는 명교(明敎)의 영웅들을 규합해 만안사(万安寺)로 가서 6대 정파를 구출한다.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에서 곽정(郭靖)은 칭기즈칸의 아들 툴루이칸의 의형제였지만, 문제 해결은 주로 항룡십팔장(降龙十八掌), 구음진경(九阴真经), 공명권(空明拳) 등에 의존했지, 행군 작전이나 성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소오강호>(笑傲江湖)에서 유정풍(劉正風)은 삼품참장(三品參將)이 되어 금분(金盆)의 손을 씻으려 하지만 조정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주되게 묘사하는 것은 강호의 이야기다. <고룡풍운록>에서도 이와 같다. 강호의 전설에 의하면 쾌활왕좌 휘하의 색사가 여성들을 노략질했을 때, 강호의 반응은 흥운장주 용소운(龙啸云)이 조정의(赵正义), 강별학, 상관 금홍 등 고수들로 하여금 진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관청이 나서지 못하거나 작은 도움만 줄 수 있는 상황에서 의협심을 펼치려는 사람이 있느냐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룡풍운록>으로 시작되는 영웅 연회에 이심환, 심랑, 육소봉, 초류향이 오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협객은 절차적 정의와 결과적 정의 중 결과적 정의를 우선시한다.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무협 작품에서는 통상 악인들은 벌을 받고, 선은 악을 이긴다. 좋은 사람은 횡포하고 악인을 물리쳐 선량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묵은 억울함을 벗어나게 된다. 수완은 그 다음 문제다. <절대쌍교>에서 강소어는 비약에 의지해 진실을 말하고,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공손녹악(公孙绿萼)’은 ‘양과(杨过)’를 위해 ‘절정단(绝情丹)’을 훔친다. <천룡팔부>(天龙八部)에서 ‘허죽(虚竹)’은 어둠의 기술 ‘생사부(生死符)’로 정춘추(丁春秋)를 제압한다. 따라서 이 무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룡풍운록>은 ‘회안봉의 재연을 막다’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기선을 잡기 위해 서둘러 무림 인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막고 어떤 방법으로든 장보도(藏宝图)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있는 보물지도 외에도 수수께끼를 풀고 상인을 찾아 사들이고, 다른 협객들을 직접 빼앗는 방식으로 장보도를 얻을 수 있다. 아미산(峨眉山)에 도착하면 무림 인사들에게 하산하자고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과 공갈, 뇌물 매수, 주먹질, 발길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개방(丐帮)의 서브 서사 ‘옥면요금신의 구원’(玉面瑶琴神救援)에서 주인공 일행은 귀신 행세를 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금불환(金不换)의 음모를 무너뜨린다. 즉, 의협심이라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수단이 떳떳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또, 재판과 판결 집행에 있어서도 무협추리는 다른 추리와는 사뭇 다른 수단이 있다. 무협 세계는 세 가지 이유에서 불안정하다. 첫째, 때때로 성문법이나 판례법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중시한다. 가령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강남칠괴(江南七怪)’ 중 몇몇 스승들이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십(十)’을 보면 황약사(黄药师)가 손을 쓴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고룡의 <절대쌍교>에서 철무쌍은 ‘멸문 의혹 사건’으로 강별학 부자에게 화를 전가당하게 되고, 한을 품고 죽게 된다. 강소어는 강별학의 계략을 알아차리지만, 강호의 신분차이가 워낙 커 악인골 출신임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경공을 펴 달아난다. 둘째, 공안극과 공안소설의 줄거리와 달리 무협작품은 진실이 밝혀지지만 증거가 없어 당사자의 진술에 의존하게 되거나, 이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을 범죄 용의자로 직접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금붕왕조>에서 사휴일(霍休一)은 청풍관(青风观)을 불태우면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육소봉전기의 유령산장>(陆小凤传奇之幽灵山庄)에서 목도인은 죽은 척하여 몸을 빼낸다. 이로 인해 그 자신 말고는 그가 범행에 찌든 ‘늙은 칼자루(老刀把子)’라는 사실을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 셋째, 전통적인 추리물에서는 단서 찾기와 수수께끼 풀기, 진상규명이 관건이다. 그 때문에 폭력은 자유자재로 등장한다. 아서 코난 도일의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에서 보헤미안 왕은 도둑을 보내 아이린 애들러의 집을 수색해 짐을 바꿔치기한다. 그녀가 가는 길을 막고 강탈하기도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는 허클리 폴로가 범인의 범행 사실을 밝히자 범인은 바로 죄를 인정하고 자살한다. 하지만 무협 세계에서는 추리 외에도 무공을 겨뤄야 한다. 가령 초류향은 수모음희(水母阴姬)나 석관음(石观音)과 대적해야 하고, 육소봉(陆小凤)은 금구령이나 비구니 무화(无花), 박쥐공자(蝙蝠公子) 원수운(原随云) 등과 싸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기투합한 친구들은 전투에선 사람도 많고 세력도 큰 효과를 일으키면서 여론에서도 대의명분을 차지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무협 추리 게임은 세 개의 원류가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 무협 소재의 롤플레잉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무협 추리 작품의 문학적 전통이며, 세 번째는 근대 이래 무협 소설이 만들어온 독특한 가치관이다. <고룡풍운록>의 탄생 역시 이와 같다. 허루어 스튜디오(河洛工作室) 이전의 <협지도>(侠之道)나 <협객풍운전>을 비롯해 <선검기협전>(仙剑奇侠传), <검협정연>(剑侠情缘) 등 롤플레잉 게임들은 <고룡풍운록>의 기본적인 모험 업그레이드 프레임을 마련했다. 무협 추리물의 전통을 답습해 협객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명민한 무공과 눈썰미로 낱낱이 파헤치고 탐험한다. 고룡과 같이 유명 작가가 인구에 회자하는 무협소설은 검의 빛과 그림자, 은혜와 원한, 의리가 넘치는 낭만적인 무협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안에 담긴 의리지상주의적 가치관은 <고룡풍운록>의 캐릭터 형성과 줄거리 배치를 관통한다. 이 세 가지가 종합된 <고룡풍운록>은 독보적인 무협 추리물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도시 지도에서 대화를 나누며, 탐색과 전투를 통해 단서를 찾고 진실을 파헤친 뒤, 적을 격파하고, 심판과 집행을 통해 정의를 관철시킨다. 이런 융합의 과정에서 이뤄진 일부 설정은 다듬어야 하는 점들이 있지만, 원작에 대한 진지한 사고와 추리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 추리 게임과 다른 게임 시스템의 크로스오버는 매우 정교하다. 이는 많은 게이머들에게 수십 시간에 걸친 회상의 게임 경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래 무협 추리 게임 제작에 있어 매우 참고할 만한 모델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류동후이(刘东辉), 「’공안극’과 ‘공안소설’의 사법적 글쓰기에서 나타난 사회의식」(公案戏”“公案小说”的法事书写体现的社会意识), 『문학연구(文学研究)』, 2023. 9. 위샹더우(余象斗), 『诸司公案』, 베이징췬중출판사(群众出版社), 1999. 왕이원(王一雯), 「명청시대 공안소설 내러티브 변천의 이론적 의의」(明清公案小说故事流变的伦理意义), 『네이장사범대학학보(内江师范学院学报)』, 2023. 차오쉐친(曹雪芹) 저, 청웨이위안(程伟元)·가오어(高鹗) 정리, 「중국예술연구원 홍루몽 연구소(中国艺术研究院红楼梦研究所)가 교정한 “홍루몽”」,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学出版社), 2022. 스창위(石昌渝), 「명청시대 공안소설: 유형과 원류」(明代公案小说:类型与源流), 『문학유산(文学遗产)』, 2006. [1] [역주] 대만 국적의 중화권 무협소설가. 고룡은 필명으로, 본명은 숑야오화(熊耀華)이다. 김용(金庸), 양우생(梁羽生)과 함께 신파무협소설의 거장으로 꼽힌다. [2] 스창위(石昌渝), 「명청시대 공안소설: 유형과 원류」(明代公案小说:类型与源流), 문학유산(文学遗产), 2006. [3] [역주] 보라색 금관. 고대 중국에서 남성 무사들이 머리를 묶는 데 사용했던 화려한 장식. 흔히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며, 주로 왕자나 젊은 장군이 착용한다. [4] [역주] 어떤 조건을 토대로 답변의 대략적인 범위를 결정하고, 이 범위 내에서 모든 상황이 검증될 때까지 가능한 모든 상황을 하나씩 검증하는 추론 방식 [5] [역주] <절대쌍교>에 등장하는 악인 캐릭터. 악인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강제로 도박을 시키는 기행을 하는것 말고는 딱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악인이 아닌 사람들과 내기를 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어느 정도 의리를 지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원) 펑텐샤오 彭天笑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박해인

    박해인 박해인 게임에서 삶의 영감을 탐색하는 게이머. 게임의 의도와 컨셉을 전달하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많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자아와 투쟁하던 이야기로 세상을 구하게 만드는 방법 - 헬블레이드 2: 세누아의 전설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은 때로 놀라울 만큼 쉽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천재나, 비현실적인 실력을 가진 전사를 만들 수도 있다. 어떤 문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곤란함은 그들의 비범함 앞에서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버튼 읽기 [공모전] 모순된 세계의 충돌을 '다시' 그릴 때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미지를 좇는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고, 누군가에게는 믿음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논리나 통용되는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지수

    김지수 김지수 문화와 지식, 공간과 학술 장 등 다양한 영역을 공부합니다. 게임의 역사와 게이머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Read More 버튼 읽기 [인터뷰] 게임연구학회의 새로운 도전, DiGRA-K 윤태진 학회장 024년 3월, 세계 최대 게임 연구 단체인 '디그라(DiGRA; Digital Games Research Association)'의 한국지회(디그라 한국학회)가 설립되었다. 디그라 한국학회는 영미권과 유럽, 남미 등에 이어 18번째로 설립된 지회로서, 게임 연구의 학제적 접근과 현장과의 연결성을 지향하고 후속세대 지원, 국제교류 및 협력연구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분과를 뛰어넘는 학술교류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국내 게임 연구 분야에 있어, 다양한 업계 현장과 학계를 포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학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튼 읽기 [인터뷰] 디지털게임 다양성/접근성 가이드북 제작, 스마일게이트 D&I실 이경진 실장 "이런 사람도 게이머고 저런 사람도 게이머고, 아직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게이머가 될 수 있다라고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우리가 대중 문화로서의 게임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에버랜드에서도 ‘게임문화축제’라고 해서 게임 IP를 가지고 행사를 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게임이 굉장히 대중적인 매체가 되어서 놀이공원에 아이들하고 함께 가서 즐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된 거잖아요. 그렇다면 게이머라고 했을 때도 게이머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는 게 앞으로 수익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마인드셋이라고 생각해요." 버튼 읽기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버튼 읽기 [인터뷰] 공동연구처럼 돌아가는 스피드런의 세계, 스피드런 유튜버 천제누구 생산을 위해 기획된 방법론인 효율은 오늘날 디지털 게임에서 주요한 플레이 방법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효율적인 플레이를 위한 전략이 동원되고, 최고의 효율을 달성하는 것이 플레이의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효율적 플레이의 정점에, 최단시간 내 게임 클리어를 목적으로 하는 스피드런(speedrun)이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신주형

    신주형 신주형 주로 시리어스 게임과 시리어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소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리츠메이칸대학 게임 연구 센터 (RCGS)의 게임 아카이빙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북리뷰]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서 출발하여 게이머, 게임 캐릭터, 게임 산업 관련 종사자 앞에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과 불편함, 그리고 이런 문제들이 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이런 사례가 있고 그래서 나쁘다’는 식의 단편적인 나열이 아니라 앞서 밝힌 문제들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과연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여성을 그린, 여성에 의한 게임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버튼 읽기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 Back 보편과 토착의 긴장 속에 도사리는 지정학적 미학: 〈7인의 사무라이〉에서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 이르기까지 06 GG Vol. 22. 6. 10. 1. 그들은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좌) 와 〈킬 빌〉(우). 〈라스트 사무라이〉가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 와패니즘의 대명사인 반면, 〈킬 빌〉은 오리엔탈리즘을 전유하는 대중주의다. 무사도와 신성한 사무라이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상당 부분은 뉴질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고, 〈킬 빌〉은 이소룡과 사무라이를 섞고 중국계 미국인 배우 루시 리우에게 기모노를 입혀 대문자 오리엔탈(The Oriental)을 혼성모방한다. 정갈하게 무릎 꿇은 다이묘와 쇼군이 차를 마시며 명예와 무사도를 논한다. 일본 전통 음악이 흘러나오는 다다미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와 복면을 두른 닌자가 밀서를 교환한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갈대밭에서 두 명의 검객이 우아하게 일본도를 맞부딪치고, 가문의 복수를 마친 사무라이가 함박눈을 맞으며 할복한다. 일본 대중문화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법한 장면들이다. 한국인들이 ‘왜색’ 이라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 세계의 대중들은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한다. 지난 수십 년간 서방의 창작자들은 멋진 일본도, 이국적인 현악기 음악, 하이쿠와 다도, 명예와 바람의 길에 푹 빠졌다. 문화평론가들은 이를 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와 문화산업의 융성에 힘입은 대중문화 와패니즘이라 규정하기도 하고, 문화연구자들은 전도된 시각성 속에서 문화제국주의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평과는 상관없이 사무라이와 닌자는 오늘날에도 끝없이 재생산된다. 일본도를 든 여고생, 사이보그 닌자, 기모노를 입은 접대용 안드로이드 등등. 이러한 재현물들 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표상과 설정만 가져와서 치장하는 키치(kitsch)이거나, 서구 재현체계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미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오리엔탈리즘인 경우가 많다. 어떤 지역 또는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재현 양식을 상품화하거나, 굴절된 시선 속에서 전유하는 것은 마냥 좋거나(상업적 성공이란 관점에서) 혹은 나쁜(제국주의의 본질을 은폐하는)것일까? 일본문화에 대한 터부가 강한 한국에서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문화, 경제, 정치 전 영역에 걸친 식민지 경험을 통해 사무라이로 대표되는 일본문화가 잔학무도하고 끔찍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무라이는 신성한 바람의 길을 걷는 존재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러 양민들을 학살하는 존재이고, 게이샤와 기모노는 문란한 일본식 성문화를 암시하는 상징물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수탈했던 서구인들은 한술 더 떠 일본의 극악성을 숭상하고 상업화하는데, 이들에게는 아무리 입이 닳도록 참견해도 쇠귀에 경 읽기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하루 빨리 위대한 대한민국의 문화 영토를 세계 곳곳에 건설해 ‘왜색’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대안이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재현양식을 국민-국가의 틀거리로 협소하게 규정해, 문화적 민족주의 또는 주류 문화(서구의 시선)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으로 치장하는 등의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데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국민-국가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한 문화적 관습이나 재현이 민족성이나 혈통 등 고정불변한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과정 속에서 구성된다는(부르디외가 ‘아비투스’ 라고 규정한) 접근을 지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경이 아니라 접경이 있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동하는 기호계가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왜 사무라이와 닌자를 사랑하는가? 국민-국가, 와패니즘, 오리엔탈리즘보다 더 큰 심급이 여기에 도사린다. 즉 지구(global)와 지역(local), 보편(universal)과 토착(vernacular) 사이를 편류하는 지정학적 미학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2. 보편과 토착의 변증법, 그리고 게이밍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계몽의 변증법』에서 전 지구적으로 평평하게 된 문화산업의 지배 하 상품처럼 찍어내는 대중문화의 보편성을 발견했다. 상품으로서의 대중문화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지구 어느 지역에서라도 수월히 팔릴 수 있고 또 이를 균질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재현, 내러티브)가 전제되어야 한다. 패스트푸드가 그 보편적인 맛 때문에 뉴욕에서나 상파울루에서나 똑같이 잘 팔리듯이, 문화상품 또한 그러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문법과 체계가 준비되어야 했고, ‘장르’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안되었다. 장르는 즐길 거리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하나의 문화적 테일러리즘으로 출발했다. ‘중간계’에 심취한 이들은 중간계를 변용한(혹은 이름과 설정만 바뀐) 또 다른 판타지를 찾는다. 셜록 홈즈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에르큘 포와로와 파일로 반스가 등장하는 다른 추리물을 소비하고, 〈스타워즈〉의 장엄한 우주 서사시는 〈듄〉에서 새롭게 변주된다. 전 지구의 문화소비 시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자본은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으리만치 촘촘한 포획망,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정확히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상상력이 쉽게 파악해낼 수 없는 문화생산의 권력과 통제망”인 지정학을 형성한다. * 지정학은 특정하게 축적된 ‘익숙함’의 소비 감각을 상업문화 재현체계 전반에 편재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힘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예술-상업문화 간 첨예한 마찰은 지정학의 매끄럽고 평평한 톱니바퀴들을 마모시키고, 불규칙하지만 미학적인 불협화음을 연출한다. 보편성의 공고한 지구적 벨트가 곳곳에서 작동을 멈추고, 차이를 드러내며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 즉 토착적인 것(The Vernacular)이 부상해 새로운 힘-관계를 형성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서부 활극 속에서 사무라이 활극이 나타나고, 갱스터물의 범람 가운데 스타일을 추구하는 필름누아르가 발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단지 지역 특산물이나 여행지의 이국적인 음식을 즐기고자하는 취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힘 관계들을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스타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던 프랑스 누벨바그는 68혁명의 탈영토화의 물결 위에서 다양한 실험적 기법들(핸드헬드, 소외효과, 소비에트 몽타주, 즉흥연기 스토리보드 없는 촬영)을 개발했으며, 영화에 실존주의 철학을 결합시켰다. 뉴 저먼 시네마는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요청되는 가운데 누벨바그와 브레히트의 서사극를 접목한 문명 비판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들은 중심부 국가 뿐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토착성을 만들어내며 미학과 래디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경향을 띤다. 나아가, 장르 문법을 역으로 전유해 지역 공동체의 정치적·계급적 모순들을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이 분야에서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는 봉준호 감독이 꼽힐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여기고, 또 가장 궁금한 것은 ‘게이밍에서 지정학에 반대하는 미학이 가능한가?’이다. 이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 보다 더 광범위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협의의 질문으로 소구시킨다면, 그렇다, 게이밍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새롭게 등장한 언리얼 엔진5, 유니티 디지털 휴먼, GPT-3 기반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Dall-E 2 등의 기술은 형식으로서의 재현 경계(시네마, 애니메이션, 게임, 포토리얼리즘)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발명은 더 많은, 균질화된 재현의 생산에 봉사하고자 개발되고 있는 것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르가 문화적 층위에서의 지정학을 위해 고안되었다면, 상기의 신기술은 컴퓨터적 층위에서의 기술적 지정학을 위한 평탄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게임이 정치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페이퍼, 플리즈〉, 〈스펙 옵스: 더 라인〉 같은 작품들은 게임이 특정한 방식으로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정학에 반대하는 힘을 생성하는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방대하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예술형식이나 정치를 촉발하는 행위성 이전에, 전 지구적으로 평평한 문화재현 체계의 인력에 무의식적으로 부딪치는 척력과 결부해 있기 때문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지역의 독특한 언어와 풍습, 사회구조와 닿아있는 토착성을 반 지정학으로 발전시킨 것과 반대로, 컴퓨터의 언어는 공용 언어였기 때문에 기존의 장르적 보편성과 쉽사리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인도인도, 유럽인도 베이직과 C++언어를 공용 언어로 사용한다. 초창기 전자 게임인 〈스페이스 워!〉가 일본에서 〈스페이스 인베이더〉, 〈갤러가〉 등 거의 동일한 형태로 출현했음을 상기하자. 초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게이밍의 작은 역사는 가장 보편적이고 평평한 것들만을 골라서 한정된 비트의 시공간에 구현해내는 과정이었다. 요컨대 토착성은 게임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며, 이안 보고스트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는 컴퓨터 언어(즉 보편 기술언어)로 현상된 ‘절차적 수사학(procedural rhetoric)’ 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임 속 플레이어의 조형행위를 유도하는 절차적 수사학의 개념만으로는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을 찾아내는 데 불충분하다. 미국식 RPG(자유도)와 일본식 RPG(캐릭터와 선형성)의 차이를 규명하는 정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게임이 어떤 방식으로 지정학에 대항하는 힘을 주조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3. 공통적인 것들의 은하계, 게이밍의 지정학적 미학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세계 시네마에 엄청난 내파를 불러일으킨 이후, 지역 장본인인 일본과 서구의 창작자들은 무수히 많은 사무라이들을 재생산해 왔다. 〈황야의 7인〉 같은 서부영화가 사무라이 결투를 참조해 새로운 서부극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와패니즘과 오리엔탈리즘은 제외하도록 하자). 게임에서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본에서는 〈천주〉, 〈귀무자〉, 〈인왕〉 시리즈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구에서는 〈쉐도우 택틱스〉, 〈세키로〉 같은 게임들이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사무라이와 에도시대라는 토착성을 재구성해냈다. 〈쉐도우 택틱스〉가 치밀한 퍼즐풀이 설계 기믹 속에 사무라이와 닌자, 게이샤의 스테레오타입을 녹여낸다면, 〈세키로〉는 극한의 조작술을 요구하는 게임 매커닉에 사무라이 결투의 긴장감을 조화시켰다. 가장 최신의 결과물 중 하나인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몽골군의 쓰시마 침략에 맞서 싸우는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게임은 매우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토착성을 소환하는데, 다양한 게임의 조형적 요소들과 기존 재팬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한 미학적 장치들을 조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캐릭터의 등 뒤를 조작 시점으로 채택하는 게임들이 필수적으로 도입한 미니맵(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한) 대신, 버튼을 누르면 바람이 불어 목적지를 알려준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을 조작해 피리를 연주할 수 있는데, 이 순간 게임 속 날씨가 바뀐다. 또한 특정한 장소에 가면 플레이어는 주어진 문구들을 조합해 하이쿠를 창작할 수 있는데, 시점을 옮겨가며 특정 풍경 사물에 위치해 있는 시구들을 선택하여 자신만의 시감을 정해 시를 쓰는 방식이다. 이러한 독특한 매커닉들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많은 사무라이 시네마가 추구하던 토착성의 기법들을 게임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이 결투를 시작하면 바람이 불고, 갈대가 흔들린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창문을 열면, 눈이 내리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토착적 힘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군중의 움직임을 화면 안에서 기하학적으로 배치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헐리우드가 매끄러운 카메라워크로 평평하게 화면을 흘려보내는 상업영화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강력한 단자로 작용했고, 유수의 상업영화 감독들(스필버그, 피터 잭슨, 조지 루카스) 및 작가주의(스탠리 큐브릭, 타르코프스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구로사와 아키라를 위시한 일본 사무라이 시네마의 강력한 설득력은 화끈한 칼싸움, 이국적인 복장이나 전통문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산 위에 위상학적으로 배치된 군중들, 사건에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환경과 날씨 및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과 긴장을 고도로 은유하는 전개가 핵심이다. 우리가 익히 접한 것과 달리 사무라이들의 칼싸움은 매우 둔탁하거나 정적이다(좌, 〈하리키리〉). 또한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무쌍이나 멋과는 거리가 멀며(우, 〈7인의 사무라이〉),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채 굴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위로부터의 혁명, 군국주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여전히 유예된 일본의 봉건적인 사회 모순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표현된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이러한 토착성의 미학 요소들을 디지털 게임의 보편화된 기술적 작동 인자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를 꾀하며, 시네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정학에 저항한다. 이를 기점으로 사무라이와 일본도는 더 이상 일본의 전통 문화도, 일본적인 것도 아닌, 보편적이면서 낯선 공통의 것으로 전화한다. 구로사와 스타일로 배치된 치밀한 공간과 화면,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비쳐지는 광원 효과는 단순히 게임의 그래픽을 치장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어들은 쓰시마의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 있건 아름다운 경관의 포토제닉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왜색’에 반감이 깊은 한국의 플레이어들마저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미려한 토착 구상 앞에서 국민-국가의 감각을 관대히 걷어내게 된다. 이는 한국의 대중들이 탈식민적 저항을 멈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무라이물’이 지닌 토착성의 반-지정학이 세계 공용의 언어가 되어, ‘공통적인 것(The Common)’ 들로 이뤄진 하나의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의 문화계는 이러한 공통계를 낯설게 여기고 협소한 국민-국가 문화의 틀에 사로잡혀 사무라이와 고양이, 교복 여고생과 일본도의 혼성모방만을 도돌이표처럼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네마와 문학이 보편타당하고 지구적인 지정학에 토착성으로 부딪친다면, 게이밍은 이미 공고해진 문화산업의 보편성 속에서 ‘공통적인 것’들을 찾아내 평평한 세계를 다시 구형으로 입체화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사실 〈고스트 오브 쓰시마〉 같은 게임은 극히 일부의 가능성 또는 이행적인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매커닉과 인터페이스-상호작용 환경구성은 사무라이, 닌자, 에도시대 같은 지역적 재현 요소들보다 더욱 보편성이 큰 만큼 공통적인 것이 되기도 쉽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계급적 알레고리를 게임 내 공간·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매커닉에 결합시키는 시도는 보편적인 것들의 공통화라는 게이밍의 미적 목표에 더욱 용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코소보 전쟁을 알레고리로 하여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형성하는 〈디스 워 오브 마인〉, 대만의 전체주의와 정치탄압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2차원적 평면구상 안에서 회상하는 〈반교: 디텐션〉, 그리고 이를 다시 다른 지역(제주 4.3사건)의 정치적 사건과 결합시키는 〈동백이야기〉는 어떨까? 이들 게임은 횡스크롤 방식으로 탐색하는 시공간에 지구적인 참극들이 상업적 보편성이 아닌 공통계 안에서 연대될 수 있고, 촘촘하고 광범위한 문화산업의 그물망에 구멍을 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게이밍의 문화적-기술적 공통계를 창작자들과 플레이어들이 함께 경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민족-국가나 지역의 지엽성을 뛰어넘어 대항적인 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경로들을 발견한다. 어쩌면 게이밍의에서 이미 지역적 경계들은 이미 접경화 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앞으로 더 넘어서기 힘든 장벽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기는 하다. 언리얼과 유니티로 대동단결된 재현 생산 체계에서 토착적인 것들의 맹아들은 점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기존의 문학과 시네마에서 찾을 수 있던 여행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 ‘공통화’의 미덕이 어떻게 대중미학으로 나아며, 또 지정학을 전복하는 힘으로 발로되는가를 관찰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전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디지털 문화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신현우 문화연구자, 문화평론가이며 기술비판이론과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게이밍, 인공지능, 플랫폼, 블록체인을 둘러싼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서울과기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한다.

  •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 Back 숏폼 콘텐츠 유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06 GG Vol. 22. 6. 10. 1. 숏폼 콘텐츠와 연쇄적 소비 바야흐로 짧은 콘텐츠가 유행하는 시대이다. 평균적으로 50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TV 드라마는 15분 내외의 웹드라마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으며, 유튜브에는 ‘너덜트’나 ‘숏박스’ 같은 채널을 중심으로 3-4분 정도로 짧은 콩트들이 유행하고 있다. 게임 역시 짧게는 수십 시간, 길게는 몇 백 시간의 플레이 시간을 요하는 PC나 콘솔 게임보다는 1회 플레이 시간이 짧은 모바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모빌리티를 무기로 하는 각종 플랫폼들이 기존의 하드웨어를 대체한 2000년대 후반 이후 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72초TV’가 상영시간을 채널명으로 전면화 하여 인기를 끈 것은 숏폼 콘텐츠(Short form contents)의 승리를 상징하는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 모바일 시대 초압축 드라마의 표본을 제시한 ‘72초 TV’의 한 장면 이러한 숏폼 콘텐츠가 고전적인 다른 고전적인 콘텐츠보다 주목받는 것은 이의 주 소비층이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유행에 민감하고 시간을 부족한 이들에게 짧은 콘텐츠는 부족한 여가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스낵 컬쳐(snack culture)가 된다. 등하교길이나 화장실에 들르는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몇 분만 할애하면 게임 한 판과 동영상을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숏폼 콘텐츠는 금세기의 여가 문화의 틈새를 파고 들었다. 이러한 숏폼 콘텐츠의 대부분이 SNS나 유튜브 등의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서비스 된다는 점에서 구매력이 부족한 젊은 세대들에게 잘 먹히는 콘텐츠가 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핵심적인 서사를 바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숏폼 콘텐츠에는 전후 맥락이 생략되어도 상관없는 내용들이 주종을 이룬다. 짧은 콘텐츠 재생시간 속에서 완전하지 못한 서사를 갖춘 숏폼 콘텐츠들은 긴 설명이나 전후 관계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를 본론부터 진행하는 방식을 취한다. 너덜트 채널의 첫 에피소드인 “당근마켓 남편들”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중고거래 현장을 비춘다. 이 영상에서 공감대는 이미 해당 마켓들 통해 거래를 해본 기혼 남성들의 일상적 공감을 양분으로 삼아 전후의 맥락을 제거하고 거래 현장만 집중하여 짧은 상영 시간에 맞게 콘텐츠를 압축할 수 있게 해준다. * 너덜트의 〈당근마켓 남편들〉 일반적으로 숏폼 콘텐츠는 짧은 플레이 시간을 바탕으로 연쇄적인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숏폼 콘텐츠를 멍하게 반복적으로 여러 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게임의 경우도 한 번 플레이하는 시간이 짧을 뿐이지 이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하드코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못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게임학자 예스퍼 율(Jesper Juul)은 〈캐주얼 레볼루션(Casual Revolution)〉에서 캐주얼 게이머들이 게임을 캐주얼하게 소비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여 하드코어하게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사실을 실제 사용자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예스퍼 율, 이정엽 역, 『캐주얼 게임: 비디오 게임과 플레이어의 재창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콘텐츠의 연쇄적 소비가 트래픽을 불러일으켜 광고 수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하 BM)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유저들이 사이트에 오래 머무를수록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플랫폼은 어떤 특정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고양된 감정으로 사이트를 떠나는 현상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콘텐츠 소비가 끝났을 때 다음 콘텐츠를 이어 보고 싶은 감정을 계속 유발해야 한다. 이는 게임으로 환원하면 짧은 플레이를 무수히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비슷한 메커닉의 반복적인 플레이는 지루함을 유발하여 접속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여기에 캐릭터 성장 시스템과 BM을 연계시키는 방식이 사용되는 것이다. 2. 숏폼 게임의 메커닉 축소과정과 비즈니스 모델 물론 처음부터 숏폼 형태의 게임과 BM이 초창기부터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PC나 콘솔 게임이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처음으로 전환되던 시점에는 키보드나 컨트롤러를 이용한 복잡한 컨트롤을 손가락을 이용한 터치로 단순하게 바꾸는 UI 차원의 시도가 먼저 이루어졌다. 이 때 통상적인 게임 장르는 그대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환경에 따라 게임 메커닉을 약간씩 변형하면서 이식된다. 예를 들어 PC 게임 플랫폼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가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같은 AOS 장르로 이식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숏폼으로 변화하게 된다. 〈클래시 로얄(Clash Royale)〉은 통상적으로 CCG(Collectible Card Game)이나 RTS(Real-time Strategy ) 장르로 분류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의 메커닉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를 숏폼으로 축소한 게임이라 볼 수 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가장 유명한 맵 “소환사의 협곡” 지도와 〈클래시 로얄〉의 지도를 비교하면 크게 3갈래로 갈려진 지도가 〈클래시 로얄〉에서는 2개의 다리를 중심으로 한 경로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아군과 적군의 미니언들은 AI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고, 챔피언만 플레이어가 컨트롤 할 수 있지만, 〈클래시 로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캐릭터의 처음 시작하는 위치만 지정할 수 있으며, 그 캐릭터의 개별 전투는 모두 AI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리그 오브 레전드〉는 특별히 정해진 플레이 타임이 존재하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1회당 3-40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지만, 〈클래시 로얄〉은 처음 3분의 타임 어택과 추가 1분 30초의 타임 어택을 포함해 최대 1판이 4분 30초를 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말해 〈클래시 로얄〉은 PC에서 사용되던 플레이어에 의한 복잡한 컨트롤을 최대한 줄이고, AI에 의한 자동전투를 극대화시키면서 플레이 타임을 거의 1/10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시 로얄〉에서 더욱 강조된 부분은 각 캐릭터의 성장을 ‘카드 강화 시스템’을 통해 극대화 시켰다는 점이다. CCG 장르의 카드 강화 메커닉을 활용하여 자신의 카드가 성장하는 느낌을 부여하면, 그 카드의 효용을 실험해보고 싶어 다시 플레이를 시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의 덱이 8장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성장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클래시 로얄〉의 BM은 그다지 노골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클래시 로얄〉은 현질을 통해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요소를 제한하여 게임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구현한 좋은 예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성공 이후 RTS의 AI 전투 시스템은 축소하고 카드 강화의 BM만 극대화 한 게임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다. 실제 이 때에도 RTS적인 요소들이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동일한 장르로 분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방치형 이나 CCG로 불리는 현질 유도 게임은 현재에도 무수히 양산되고 있지만, 문제는 앞선 사례들에서 적절히 제한되었던 현질의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한 적절한 제한 요소들은 차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BM의 전면화와 미학의 소외 물론 콘텐츠의 길이가 짧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열등하다고 간주하긴 어렵다. 소설과 영화에서도 장편과 단편의 미학이 다르며, 단편은 장편이 구현하기 어려운 단일 플롯의 직접성과 단도직입적인 풍자 등을 통해 독립적인 미학을 쌓아왔던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애초부터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도 짧은 플레이 시간 내에 추구할 수 있는 한 판의 쾌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플레이 타임을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풍성한 서사, 전후의 맥락, 컷신, 텍스트, 맵의 디테일, 전략적 요소 뒤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 과정에서 앞서 말한 고전적인 재미요소를 제거하고 BM만 남겨놓아도 플레이어가 잔존한다는 사실이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확인된 이상 게임 회사들은 굳이 어렵게 게임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모바일 게임의 소프트 런칭 시스템(특정 국가 하나 정도만을 대상으로 게임을 시범적으로 출시하는 방식으로, 게임 회사들은 이를 통해 특정 메커닉의 잔존율(retention)을 실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잔존율 낮은 메커닉이나 BM은 도태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은 특정 메커닉과 BM의 잔존율을 아주 쉽게 테스트 할 수 있게 해주어, 노골적인 BM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 내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설정만 해놓으면 해당 퀘스트가 다 클리어된다거나, 별다른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바로 사냥과 전투가 시작되는 게임들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치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식적 요소와 몰입을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던 것이 게임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미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익성을 위해 깎여나간 게임의 숏폼화는 결국 BM와 노골적인 결제 모듈만 남기고 게임을 앙상하게 만들어버렸다. * 게임 플레이어 모두에게 1억이 지급되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최근의 게임 광고들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금액의 확률형 아이템을 지급한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리 만무하다. 물론 이러한 방치형 게임들을 유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시간이 부족한 학생이나 직장인이 성장의 재미만 누리게 하는 게임으로 일정 가치를 지닌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현실 추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BM을 긍정해 나가면서 한국 게임 시장은 더욱 노골적으로 메타버스, P2E, NFT 등 현행 법률로 합법화되기 어려운 영역까지 허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게임 회사들은 플레이의 외부적 요소로 취급되던 현금과 결제, 캐릭터의 성장 요소를 더욱 외재화하여 환금성을 부추기게 된다면, 이는 한국 게임업계가 그동안 트라우마로 안고 있었던 “바다 이야기” 사태로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 Back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04 GG Vol. 22. 2. 10.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나아가 우르과이 출신 게임 개발자로서 그는 상업적인 게임과 실험적인 게임들을 넘나들면서 독창적인 게임들을 개발하기도 했다.『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이라는 학위논문을 쓰기도 한 그의 관심은 게임을 통해 억압과 폭력, 차별, 전쟁과 같은 사회의 현실 문제와 씨름하는 게임들을 만들어 왔다. 프라스카가 제안하고 실천한 ‘시리어스 게임 serious games’, ‘뉴스게이밍 newsgaming’, ‘교육적 게임 educational games’, ‘다큐게이밍 docugaming’ 같은 프로젝트들은 상업적 성공을 향한 오락 일변도의 주류 게임을 넘어 게임의 사회적 효용성과 실천적 잠재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게임이 교육과 사회적 인식이라는 목적을 강조하다 보면 재미라는 게임의 핵심 요인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날이 다양해져온 게임의 장르와 콘텐츠, 그리고 게임 테크놀로지와 게이밍 환경의 꾸준한 진화 속에서 프라스카의 제안과 실험은 일정한 시의성을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게임을 만들고 누구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의 민주화’에 값하는 ‘놀이 정보계’(ludic infosphere)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게임생태계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토론하고, 나아가 사회 인식과 공감의 상승을 시도하는 프라스카의 꿈은 ‘몽상’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게임들만이 주로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현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미 있는 문제작들이 발표되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인식’의 균형을 향해 아직 나아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시리어스 게임’, ‘임팩트 게임’의 초기 제안자라 할 만한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에듀테인먼트와 시사 게임 프로젝트 프라스카의 게임 철학은 “비디오게임이 반드시 오락적일 필요는 없다”는 다분히 논쟁적인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은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다. 프라스카 역시 게임의 오락성과 재미를 중시하고 그가 만든 게임들 역시 재미적 요소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그의 게임인 는 1천 300만 카피를 팔 수 있었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은 세계적인 독일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이며 실천가였던 브레히트(B. Brecht)와 그를 계승한 실험적 연출가 보알(Augusto Boal)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재미라는 것이 주류 대중문화와 오락산업의 관행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와 오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굳이 시끌벅적한 스펙터클 속에 순간적 쾌감이 아닌 주변 현실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가운데서도 재미와 오락을 찾을 수 있음을 모색하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배움의 재미’ 혹은 ‘깨달음의 재미’는 프라스카에게도 이론적ㆍ실천적 화두였던 셈이다. 프라스카에 따르면 비디오게임은 원래 비오락적인 용도로 탄생했다. 군사훈련을 위해 도입된 각종 시뮬레이터들이나 명시적으로 교육적 목표를 표방하는 게임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에듀테인먼트’(Digital Edutainment)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교육용 게임들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에듀테인먼트’는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를 결합해서 만든 신조어로서 학생들의 참여와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바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능해진 학습자의 능동적 상호작용과 참여 가능성은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까지 여겨졌다. 곤잘로 프라스카 역시 학습 플랫폼으로서 디지털 미디어가 갖는 요소들을 인정하며 이러한 장점들을 비디오게임의 사회적 기능전환에 유용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대체로 오늘날에도- 비디오게임의 교육적 활용이 순전히 수학이나 과학, 어학 교육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프라스카의 관심은 유저들이 상호 토론과 공감을 통해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비디오게임의 디자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비디오게임의 모델은 다음과 같은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의 구상에 기반한 게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3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더욱 복잡한 사회적 비평을 계발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시뮬레이션의 문화적 파급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이 모든 시뮬레이션들을 일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는 있다. 이는 모델 고유의 가정들에 대한 플레이어의 도전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시뮬레이션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은 시뮬레이션을 의식-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시뮬레이션은 비디오게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말처럼 그의 실험이 이루어지던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게임들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혐의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괴물이나 몬스터, 트롤들 일색이거나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일상인들과 거리가 먼 캐릭터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심시티〉나 〈심즈〉 등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들의 등장하고 멜로, 역사물, 갱스터 등의 장르들로 게임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상황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임들 다수는 현실의 문제나 모순들을 회피하고 ‘디즈니랜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라스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게임 연구자들에 의해 게임에 대한 무비판적 동일시를 의미하는 ‘에이전시’(agency)와 ‘몰입’(immersion)이 게임의 바람직한 효과들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주체가 게임 규칙과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의 창조야말로 게임 개발자의의 미덕이라고 보는 사이 인종/젠더/민족(국민)/종교 등의 차별 의제들은 살며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주류 게임들이 상업적 성공에 꽂혀 현실의 억압과 차별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미지 재현과 플레잉 규칙을 통해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고착화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게임의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게임 대상들과 게임 규칙에 담긴 차별과 억압에 대한 무감각 혹은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우리는 비디오게임의 플레이가 연극이나 영화의 감상과 분명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와 비디오게임 캐릭터 사이의 거리는 다른 예술의 수용자-캐릭터 사이보다 훨씬 더 밀접하다. 프라스카의 지적처럼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라라 크로프트가 혹 신장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마리오가 편집증 증세를 지닌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나 게임상의 괴물들은 모두 수단이고 커서일 뿐이다. 게임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평면적 캐릭터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그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가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슈퍼맨, 스파이더맨, 제임스 본드 등의 영웅이고 싶지만 게임의 경우 그런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 우리가 바로 그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게임에서 마리오는 영웅이 아니다. 내가 바로 영웅이고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자유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임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행위를 위한 커서가 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를 게임의 영웅 혹은 신으로 자각한다. 게임의 자유도와 상호작용성에 따른 게임의 몰입은 게임 이면의 규칙에 묻어나는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자연화’(neutralization)하기 쉽게 만든다. 프라스카는 주류 컴퓨터게임들의 이러한 한계들을 비판하면서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탐색하게끔 허용하는 캐릭터 중심의 비디오게임, 더 나아가 게임의 행동 규칙을 플레이어 스스로 변경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을 구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또 보알이 연극을 통해 실험했던 것을 컴퓨터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관건은 “재미 경험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적 이슈들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강화하는 비디오게임”의 개발이다. 이러한 인식은 〈9ㆍ12〉나 〈마드리드 Madrid〉와 같은 프라스카 본인의 게임의 개발로도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작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게임 창작이 어려운 이들이 기존의 게임들을 비판적으로 ‘재매개’하여 자기 이야기를 만들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고전 게임들을 활용할 경우 유저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참여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야 게임 창작 도구나 제작 엔진의 수준이나 직관성이 크게 향상되고 ‘로블록스’나 ‘디토랜드’ 등과 같은 양질의 플랫폼이 발표되어 프라스카의 실험 제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무척 커졌다. 프라스카의 실험은 일종의 게임 모드(mod)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수준도 비약적으로 향상되기도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주체들의 의지와 인식에 달린 셈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게임들이 드문드문 인디 게임씬에서 발표되는 중이다. 게임 유저의 게임 모딩이나 창작의 환경이 지금보다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심즈〉를 이용하여 프라스카가 상상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 프라스카의 ‘억압받는자들의 비디오게임’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억압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이 그랬듯이 프라스카의 게임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들에 대해 ‘쟁점들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알의 연극 실험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으로서 비판적 사유와 논쟁을 위한 포럼(forum)의 역할만으로도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모든 게임들은 늘 제한적이고 이념적으로 편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게임들은 개발자들도 예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플레이될 수도 있다. 프라스카는 문학이나 영화 못지않게 게임들도 훌륭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세리 터클의 주장에 동의한다. 터클에 따르면 게임과 시뮬레이션들에 있어 “시뮬레이션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이해는 정치권력의 핵심 요소이다. 시뮬레이션들에 강요된 왜곡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욱 직접적인 경제적ㆍ정치적 피드백과 새로운 종류의 재현, 더욱 많은 정보의 채널들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다.” 프라스카는 이 정도로 게임 사용자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대안적인 게임 창작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개발자들이 한데 힘을 모으고 실천적인 사례들을 창안하고 확산시켜 나갈 것을 촉구한다. 이처럼 프라스카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보알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연극’ 이념과 테크닉들을 비디오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관객-배우’가 직접 경험한 억압적 상황을 무대에서 소개하고 그에 대해 배우와 동료 관객들이 참여하여 대안적 해결책들을 연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게임들을 디자인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기존 게임의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에 도전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당시로서는 주류 게임을 이용하여 그 게임의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최근에야 소극적이나마 플레이어들 스스로 개작한 모드 게임들을 공유하고 플레이하는 일이 낯설지는 않다. 〈로블록스〉를 통해 게임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직접 구매하여 플레이하며 동료 플레이어들 상호 간에 소통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프라스카는 대략 20여년 전의 기술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난해해 보이는 실험들을 제안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그의 작업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 프라스카의 첫 실험은 게임 역사상 매우 성공했고 중요한 게임이었던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즈〉를 기능전환하는 것이었다. 〈심시티〉의 개발자이기도 한 윌 라이트는 〈심즈〉에서 일상의 삶과 생활을 시뮬레이트함으로써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심(Sim)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만들어 삶을 살며 주변을 관찰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원래 윌라이트는 이 게임의 아이디어를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책『패턴 랭귀지』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건축이 인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256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라고 한다. 윌 라이트는 비디오게임을 통해 이러한 다양한 패턴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다. 〈심즈〉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인간관계가 어떻게 상호반응하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디자인한 ‘심’들을 통해 인생을 계획하고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동일시에 가까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심즈〉인 것이다. 플레이어가 ‘스킨 Skin’ 기능을 통해 직접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 벽지나 바닥재 등의 재료들로 집을 꾸미고 가족의 삶을 설계하는 일은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중 단연 즐거운 것은 각종 게임 정보, 각 플레이어들의 캐릭터들과 심들의 삶 등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유저 커뮤니티가 있어 게임을 사회적 활동으로 승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커뮤니티 기능은 게임에 쉽게 싫증나지 않게 해주고 인간사의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회사가 계속해서 확장 팩을 내놓으면서 게임 세계와 행동 영역을 확장해나간 것도 게임의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프라스카가 〈심즈〉를 시뮬레이션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의 게임 변형, 즉 ‘모드’(mod, modification)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영상이나 그 경험물들을 게임의 일부로 수용하고 그것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신선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심즈〉의 발표 당시 이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프라스카는 〈심즈〉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기능에 주목한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영웅이나 스타, 혹은 자신들처럼 보이도록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를 구상한다. 물론 프라스카의 출발점은 원작 〈심즈〉의 규칙과 메커닉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이다. 이 게임은 가족의 삶과 인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게임 산업에서 분명한 약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소비주의적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플레이어들의 소유가 늘면 늘수록 친구가 늘어나는 식의 규칙을 내장하고 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이 게임은 도시 근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뮬레이트하면서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백인중상층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들의 겉모습만을 바꿀 수 있는 자유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게임 개발자의 설정이나 규칙, 이미지 재현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프라스카가 게임 규칙의 전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심즈〉가 비판적 사유의 촉진을 위한 실험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들이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접근을 허락하도록 충분히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캐릭터의 겉모습을 바꾸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도전과 변형을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자질구레한 규칙들을 변형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것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중에 발매된 〈심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캐릭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들에는 게임 혹은 게임을 만든 개발자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규칙에 대한 변경을 실험하도록 하는 것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의 목적이다. 우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양 skins’ 다운로드 기능에 추가로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 디자인과 이에 대한 플레이어 상호 공유 시스템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존의 심즈는 6가지의 행동 스타일 혹은 인물 성향에 따라서만 게임을 진행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게임의 현실감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동료 플레이어들이 어떤 플레이어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해 그들 각각의 대안들을 디자인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플레이어들 서로 서로에게 더욱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의 개선을 요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디자인 툴’을 제공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보알의 연극 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이다. 즉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해 해답이 될 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훌륭한 논쟁과 토론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심즈〉에 대한 기능전환이 비디오게임 자체의 위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최대의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보다 더 많은 변형의 자유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프라스카가 아그네스(Agnes)라는 가상의 소녀를 통해 소개하는 사례를 통해 그의 생각을 구체화해보자. 아그네스 Agnes는 지금 한 동안 〈심즈〉를 플레이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 게임의 규칙과 기본 메커니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 관계가 보다 현실적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 교환 Character Exchange’ 사이트로 가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검색한다. 그녀는 흥미 있어 보이는 한 캐릭터를 발견한다. 이것은 ‘데이브의 알콜 중독 어머니 버전 0.9 Dave's Alcholic Mother version 0.9’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그 게임을 설계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일로 보내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 피곤하다. 여전히 그녀는 저녁을 조리할 것이고 약간의 청소도 할 것이다. 그녀의 가혹한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머니는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신다. 그녀는 아이들과 애완동물 때문에 매우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를 시험해볼 생각을 하고 그녀가 이전에 플레이해왔던 집 안으로 그 캐릭터를 다운로드한다. 이 가정은 부부와 세 아이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운로드 이후 어머니는 ‘데이브의 알콜중독 어머니 버전 0.9’로 대체된다. 이 캐릭터는 흥미롭다. 한동안 그 캐릭터를 가지고 플레이하고 난 후 아그네스는 그 캐릭터가 어느 정도의 피로에 도달하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마시면 마실수록 가족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가 꽤 잘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가 동의할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음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 캐릭터의 배경은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덧붙여 이 캐릭터의 직업은 형편없다. 그리고 일들을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알콜 중독 어머니’는 거실의 작은 바에서 계속해서 퍼마신다. 아그네스의 생각에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은 빈약한 교육을 받았고 형편없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그네스는 일반적으로 알콜 중독자는 집 주위에 술병을 감추지 공개적으로 마시려 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캐릭터 교환’ 사이트로 가서 다른 알콜 중독 어머니를 찾아본다. 그녀는 유망해 보이는 ‘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2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를 발견한다. 그것을 실험한 후 그녀는 이 캐릭터의 행동이 그녀가 그것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적합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엄마가 감리교도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버전의 디자이너가 고집한 이유에 매료된다. 그 사실은 엄마의 알콜 중독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캐릭터 디자이너의 웹 페이지를 체크하고, 이 캐릭터가 감리교도였던 어떤 실제 인물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것임을 말해주는 짧은 내러티브를 발견한다. 아그네스는 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알콜 중독의 행동 부분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감리교도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의 코드를 변경하기 위해 ‘에디터 editor’ 기능을 이용하고 종교와 관련된 언급들을 삭제한다. 그녀는 또한 몇몇 작은 디테일들을 추가한다. 가령 엄마가 어떤 브랜드의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후 그녀는 그것을 ‘아그네스의 알콜 중독 어머니 1.0-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0에 의거함 Agnes' Alcholic Mother 1.o-Based on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탑재하고, 주요 행동 규칙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몇 주 후 아그네스는 알콜 중독 어머니의 플레이에 약간 싫증을 느끼고 그녀에게 약간 더 많은 개성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가 생태론자 ecologist가 되면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그네스는 ‘피터의 급진 그린피스 활동가 버전 9.1 Peter's Radical Greenpeace activist version 9.1’을 다운로드한다. 그녀는 자신의 알콜 중독 어머니에 약간의 부수적인 변형들과 더불어 피터 버전의 코드를 편집하고 그것을 카피하고 짜깁기한다. 이제 어머니는 식물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고 술에 취했을 때도 고양이를 차거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후 아그네스는 스스로 설계한 게임을 사이트에 탑재한다. 이 게임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의 비평과 토론이 이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탑재한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그네스나 다른 동료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변형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게임에 대해 크고 작은 규칙들을 변경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과정은 보알의 ‘포럼연극’(forum theatre)처럼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한 참여자들 각자의 생각들을 피력하는 가운데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공감과 협력의 과정이다. 이는 전설적인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워〉의 완성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품을 팔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과 그의 MIT 동료 해커들을 떠올리게 한다. 플레이어들은 크고 작은 정치적ㆍ사회적 억압들을 반영한 새로운 게임들을 디자인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게임에 비판적인 자기 의견을 반영하여 규칙이나 설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군가의 게임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그레이드 버전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나 합의 도출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생각들을 담아 스스로 만들고 보탠 게임들로 어떤 문제들을 공유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가며 인식의 확장과 상승을 경험하는 것이 프라스카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이러한 창작 플랫폼을 ‘메타 시뮬레이션’(meta-simu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참여와 소통을 도와주는 게임 창작 시스템을 가리킨다. 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의 행동을 디자인해라’라는 기능이 윌라이트의 〈심즈〉 원작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다만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는 것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심즈〉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행동 폭 역시 무척 제한적인데, 그들 캐릭터는 ‘단정’, ‘사교적’, ‘활동적’, ‘쾌활’, ‘섬세한’이라는 주어진 성격 안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복잡한 결들과 인간관계의 다층적 갈등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프라스카가 보기에도 〈심즈〉는 다른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자유도에도 불구하고 규칙의 제한에 갇혀 있는 게임이고, 부자가 더 많은 친구를 갖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있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개발자가 마련해둔 규칙과 행동 패턴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에 딴지를 걸 수 없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심즈〉에 캐릭터의 부분적인 변경 이외에 게임 규칙 혹은 행동 규칙의 변경의 자유를 플레이어에게 허용하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PMO’ 프로젝트: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의 또 하나의 사례로 프라스카는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기’(Play my Oppression, PMO)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보알의 연극 테크닉인 ‘이미지 연극’(Image Theatre)에 바탕을 둔 실험이다. 이미지 연극에서 ‘관객-배우’들은 본인들의 억압적 상황이나 차별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몸 혹은 간단한 소품들을 ‘빚고’ ‘조각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해 볼 것을 요청받는다. 이 실험에서 ‘관객-배우’들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몸만을 이용하여 어떤 ‘이미지’를 조각해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미지를 수정하는 ‘이미지 연극’의 작업은 ‘몸으로 하는 포럼연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의 목표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행위와 몸짓들을 통해 억압과 차별이 재생산되고 있고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수준에서 우리의 편향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다른 인종, 종교, 젠더, 국적 등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은 몸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보알의 ‘이미지 연극’을 통해 참여자들은 뿌리 깊은 차별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구조와 제도 및 권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몸을 통해 체험하고 사유한다. 프라스카는 보알의 실험을 통해 처음 한 사람이 몸을 통해 제시한 자신의 ‘억압 이미지’에 대해 참여자들이 서로 그 이미지를 수정하며 일종의 ‘대안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상호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참여자들 스스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점에 주목한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PMO’ 비디오게임은 몸이 아니라 마우스와 자판, 조이스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그는 연극에서의 몸이 아니더라도 비디오게임의 특별한 기능을 활용하면 보알의 퍼포먼스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시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물론 ‘포토앨범’ 기능이 게임 규칙의 설계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고 플레이어 자신의 선형적인 내레이션의 창작만 허용한다. 이 기능을 이용하여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들을 활용하여 그것에 설명을 달고 자기만의 ‘가족앨범’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재구성한 이 앨범은 인터넷에 마련된 사이트에 올릴 수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능을 자기만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심즈〉를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는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게임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요한 장면을 캡쳐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임으로써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심즈〉의 디자이너 윌 라이트가 소개한 포토 앨범 중에는 폭력 남편과 살던 여성의 동생이 올린 글이 있었다. 인터넷 심즈 사이트에 올라온 이 콘텐츠에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언니가 폭력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경위, 남편이 더욱 폭력적으로 되어가면서 파경에 이르게 된 사연 등을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물론 허구적일 수도 있는 이 스토리는 무척 현실감이 있는 것이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활발한 토론의 계기를 제공했다. 윌 라이트는 게임의 토론 유발과 공감대 형성 과정에 주목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스토리텔링 구성 기능을 강화하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의 이행을 위해서는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이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화나 영화 같은 정적인 내러티브 시퀀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즉 게임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즈〉의 원래 ‘포토앨범’ 기능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완결적’ 사건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가 작성한 스토리는 고정된 것이고 닫힌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에 의한 이야기 변경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스토리를 경험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에 대해 댓글만 올릴 뿐 상황 자체의 변경을 통한 대안 제시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폭력남편’ 이야기를 올린 플레이어의 진짜 의도가 또 다른(‘대안적인’) 게임의 창조였다는 가정하에서 일종의 기능전환을 시도한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다른 행동 모델들을 실험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인간 관계들과 물질적 상황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상호토론을 통해 인간과 현실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인식의 강화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프라스카의 기대이다.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즉 ‘PMO’의 실행을 위해서는 우선 한 참여자가 직접 겪거나 경험한 개인적 문제와 고민을 모델화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 이후 다른 참여자들은 그것을 플레이해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들은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게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에 대한 플레이와 토론, 수정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사회ㆍ정치적 대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물론 플레이어들 스스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참여를 위한 다양한 툴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그리고 비교적 쉽게 게임을 변경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방편들이 주어지고 있다. 프라스카 역시 앞으로 컴퓨터게임이 더욱 대중화될수록 ‘시뮬레이션의 처리능력'(simulation literacy) 역시 더욱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오늘날의 시뮬레이션 창작 환경은 프라스카의 기대와 상상 그 이상으로 진화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곤잘로 프라스카가 제시한 사례를 통해 ‘PMO’의 과정을 구체화해보자. 프라스카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부모나 주변에 ‘커밍아웃’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터(Peter)라는 주인공을 가정하여 샘플 시나리오를 짠다. 일단 게임 커뮤니티에서 피터의 시나리오가 승인되고 나면 그는 이 문제를 토론하려고 하는 방에 게임을 만들어 놓는다. 프라스카는 이를 ‘옵 게임’(op-games, oppressive games), 즉 억압을 시뮬레이션 해놓은 게임으로 부른다. 이 게임에는 피터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복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문제들이 재현되어 있다. ‘옵-게임들’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보알의 연극처럼 성소수자 피터가 겪을 수 있을 문제들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터의 경우에도 부모에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들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고전 게임의 레벨 디자인처럼 말이다. 여기서 피터는 자신이 대결해야 할 세 가지 과제, 혹은 꼭 극복해야 할 세 개의 난제를 비디오게임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각각의 게임에 〈모욕〉, 〈나는 누구인가?〉, 〈사회〉라는 제목을 달아주었다. 〈모욕〉은 이상한 놈 취급을 당하는 주인공 피터가 주변 사람들, 특히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집단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는지를 보여준다. 피터는 우선 이 문제의 시뮬레이션에 적당한 고전 비디오게임을 선택한다. 피터는 손수 제작한 그래픽을 업로드하거나 이전에 누군가 제작해놓은 것을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의 기능 향상을 위해 몇몇 기능들을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 고전 게임들에 기반하여 다양한 모드들을 창조해보고 그중 피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유용한 것들을 선별하여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능성들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고 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에게는 피터의 버전을 더욱 정교하게 개선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프라스카의 피터는 다음과 같은 일러스트로서 자신의 첫 번째 게임을 표현한다. 이 일러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피터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게임 모딩의 템플릿으로 선택했는데 외계인의 우주선 그래픽을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학생들의 모습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원작 게임에서와는 달리 피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발사할 수 없다. 피터가 지금 겪고 있는 곤란은 동료학생들의 집단 이지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처럼 행동을 통해 사태를 해결해버린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 게임을 즐기면 그만일 뿐 그 이상의 토론과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는 이 시뮬레이션에 첨부해 놓은 ‘디자인 노트’에 이러한 사정을 밝혀 놓았고,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은 집단 토론과 참여를 통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몇몇 플레이어들은 피터의 게임을 수정하여 다른 버전의 게임을 디자인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 그림은 플레이어들이 제안한 또 다른 해결책을 보여주는 게임 그래픽들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이 주제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할 수 있는 예술작품(가령 노래나 시)을 창조하고 반 아이들과 이를 공유함으로써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다보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플레이어는 귀를 막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주변 학생들의 모욕스러운 공격들을 무시해버리라고 제안한다. 피터의 게임들에 대한 이러한 변형은 무척 간단한 것이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변형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다중 선택’(multiple-choice) 매뉴얼을 활용함으로써 원작 게임의 모든 그래픽을 변경할 수 있고 자신의 사진이나 UCC 그래픽들을 업로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탑재된 게임들을 매개로 오고 가는 다양한 의견들은 개인적 수준의 소박한 해결책부터 동성애나 소수자, 왕따 문제 등에 대한 사회ㆍ정치적 구조 분석과 원인 진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스카는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사회적 인식이 상승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게임의 다음 모형은 대전게임의 고전 〈스트리트 파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피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여 게임을 디자인해 놓았다. 그는 거울에 반사된 자기를 볼 때마다 ‘괴물’을 본다. 내면의 성적 성향과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적 시선이 충돌하는 가운데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디자인 노트’에 피터는 이러한 일이 가끔 일어나는 일이며 그때마다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라는 분열적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 게임에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 두 정체성’이 계속해서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일이 전부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피터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쟁점이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게임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답보다는 좋은 대화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법이니 말이다. 마지막 게임인 〈사회〉의 실물 모형은 〈테트리스〉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 커플을 짝지을 수 있다. 만일 플레이어가 소녀-소년 커플로 짝을 지우면 그 커플은 계속 재생산되거나 복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도 어떤 커플이 가장 이상적인 커플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역시 게임의 목표는 엔딩을 맛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게임들은 모두 ‘열린 게임’이고 이는 참여자들의 토론과 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성적 취향이라는 것이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들을 토론할 것이고, 모든 커플의 차이는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세 게임이 모두 온라인에 탑재되고 난 후 모든 참여자들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운데 다양한 참여를 할 수 있다. 그저 게임만 플레이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게임 소감부터 피터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결책들을 댓글의 형태로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떤 참여자들은 피터의 세 게임들에 자극을 받아 게임을 모딩함으로써 수정된 버전의 게임을 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팩맨〉에 기반하여 다른 플레이어(일명 ‘캐시’)가 디자인한 대안적 게임이다. 물론 ‘포럼’은 피터의 게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이 토론의 대상으로 추가되면서 더욱 많은 크고 작은 토론들이 가능할 것이다. 캐시(Cathy)라는 여성은 〈사이먼이 말하기를〉이라는 게임을 이용하여 몬스터 게임을 디자인한다. 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1등 따라하기〉 놀이처럼 말이다. 플레이어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그 이미지는 서서히 변할 것이다. 캐시는 예전에 피터와 동일한 경험을 했었고 스스로 감내하고 맞서야 했던 수많은 차별적 상황들을 게임에 담아놓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 그녀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를 자기 게임의 테마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결국 게임의 플레이와 토론 과정을 통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의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의 방안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코로나 19의 상황을 거치며 우리의 삶이 무척이나 각박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중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종, 젠더, 민족,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소수자들이 그들이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은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치며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억압과 차별의 철폐를 향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최근의 경우처럼 퇴행적인 ‘갈라치기’의 흐름이 강고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 사회도 결국에는 동료 시민들과 ‘같이 살며 같이 즐기는’ 공환(共歡, conviviality)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래는 그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무개’들의 협력은 억압과 차별 없는 미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게임에 앞서 문학과 연극, 영화, 만화 등은 소수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감싸 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은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를 공감과 인식의 장으로 초대하며 연대의 매개자가 되어줄 것인가? 아직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도 그랬던 것처럼 게임 역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주제로 즐기며 배우는 기회들을 보다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미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보알의 연극에 영감을 받은 곤잘로 프라스카는 비디오게임 역시 억압적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보알의 연극 테크닉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연기자가 되게 함으로써 개인적ㆍ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해결책들을 표현하게 한다. 물론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이상적 결론’이 아니다. 프라스카의 목표는 주류 비디오게임들의 당연시되는 규범들을 해체하고 게임을 사회적 의제(agenda)에 대한 토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사태들을 게임에 담아내고 그 게임을 같이 플레이하며 토론하고 숙의하며 저마다의 대안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라스카의 게임 프로젝트는 구체적 실천의 필수적 전 단계인 반성과 인식의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적ㆍ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현실 인식의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게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주류 게임산업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프라스카의 비전들은 ‘몽상’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게임 창작 환경, 게임의 플레이를 넘어 ‘보기’와 ‘만들기’로 확장되고 있는 ‘게임하기’의 실천들은 게임의 다양성 환경 구축에 유리한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 게임과 ‘다른’ 게임들에 대한 수요도 있다. 필요한 것은 게임 사용자들의 의지이며 전환적 사고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게임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과 향유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김겸섭 독일공연예술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공연예술과 문화연구 관련 공부와 함께 공연 및 축제 연출과 기획일을 하였다. 이후 공연학 공부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디지털게임 연구를 시작하였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컴퓨터게임의 윤리』를 번역하였고 『모두를 위한 놀이 디지털게임의 재발견』,『노동사회에서 구상하는 놀이의 윤리』를 썼다. 지금은 독일공연예술과 문화콘텐츠 관련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선오

    김선오 김선오 영문학을 전공하고 중세 로맨스에서 여성의 사랑이 재현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게임은 오랫동안 꾸준히 플레이해 왔지만, 특히 중학생 때 코에이의 대항해시대 프랜차이즈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삶의 궤적이 전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비디오게임, 영화, 드라마 등 동시대 미디어가 역사, 역사적 배경, 그리고 역사와 개인(특히 여성)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Read More 버튼 읽기 아서 왕의 죽음: 〈레드 데드 리뎀션 2〉, 기사 로맨스, 종말과 지연의 이중주(장려상) 락스타 게임즈의 웨스턴 RPG 〈레드 데드 리뎀션 2〉(이하 〈레데리2〉)는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주인공 아서 모건을 아서 왕에 빗댄다. 이들이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끝물의 무법자를 별안간 중세 원탁의 기사에 견준다면, 에필로그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잭의 독서는 여태 플레이한 내용을 또 한 편씩의 기사 로맨스로 요약한다1).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다루는 장르로 통용되는 로맨스(romance)는 본디 서양 중세에 등장한 서사 문학 양식이자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기사 개인의 모험과 탐색, 사회적 규범과 폭력적 충동 사이의 긴장, 숙녀와의 사랑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최선주

    최선주 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Read More 버튼 읽기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하데스 Hades〉는 혹평이 거의 없는 좋은 게임의 정석 같은 게임이다. 2020년 하반기 최고작으로 뽑히며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 TGA) 올해의 게임 노미네이트, 각본상, 인디 게임상, 액션 게임상을 수상했고, 메타크리틱 게임 리뷰에서 93점의 높은 점수를, 현재 스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SF 문학상인 네뷸러상과 휴고상까지 수상하니, 국내의 한 게임 비평지에서는 “하데스는 깔 게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렇게 길게 수상 목록과 긍정적인 평가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하데스〉가 보편적으로 잘 만든 게임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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