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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멍을 넘어, 소비자본주의 너머: 게임 〈리틀 인페르노〉 비평(우수상)

    < Back 불멍을 넘어, 소비자본주의 너머: 게임 〈리틀 인페르노〉 비평(우수상) 07 GG Vol. 22. 8. 10. 장르를 막론하고 게임에서 재미를 주는 가장 주요한 시스템 중 하나는 바로 자본의 재투자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튜토리얼에서 주어진 초기 자금을 가지고 물건을 구매하고 재판매하여 차익을 만들고, 그것을 더 큰 자본으로 불리는 경험은 게임에서 재미와 성취감을 고양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다. 여기 게임 〈리틀 인페르노 (Little Inferno)〉가 있다. 이 게임은 바로 이 과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게임의 구성이 끊임없는 재화의 소비와 재투자의 연속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며 그 밖에 플레이어가 누릴 수 있는 여타의 콘텐츠는 전무하다. 이러한 형태의 게임 플레이 경험은 자본의 투자가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내는 ‘클리커’류 게임과도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게임 〈리틀 인페르노〉는 투자한 자본으로 더 많은 자본을 벌어들인다는 쾌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돈이 더 많은 돈을 불러온다는, 어떻게 보면 현실의 자본주의 구조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 게임 시스템을 차용하는 게임 〈리틀 인페르노〉는, 동시에 그러한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지를 묻는다. 태워라! 애태워라! 그리고 다시 태워라! 게임의 배경이 되는 어느 도시는 끊임없이 퍼붓는 눈과 수천 개의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로 가득하다. 흰 눈과 검은 연기로 얼룩진 흑백의 도시는 흡사 산업혁명이 막 시작된 19세기 영국을 연상케 하지만, 정작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도시의 모습을 직접 보는 일은 없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맞은 편에 놓인 화덕을 바라보게 되며, 개인용 화덕인 ‘리틀 인페르노’의 구매를 축하한다는 ‘투모로우 코퍼레이션’ 회장의 축하 편지를 받게 된다. 회장은 ‘리틀 인페르노’에 물건을 태움으로써 플레이어가 바깥의 음산한 날씨로부터 차단되어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한다. 그러나 곧 그 편지는 바로 화덕으로 올려진 다음 플레이어가 일으킨 불꽃으로 태워져 동전 두어 닢을 뱉어낸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이어질 게임 플레이의 시작이다. 플레이어는 주어진 자금을 바탕으로 물건 카탈로그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액자, 토끼 인형, 누군가의 신용카드, 커피 컵, 상한 초밥, 접시 뿐만 아니라 작은 달과 행성, 심지어 태양까지- 구매한다. 그리고 그 잡동사니는 오로지 태워지기 위해 구매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구매한 물건은 배송이 끝나면 박스 형태로 화면 하단에 도착하게 되며, 플레이어는 포장을 풀고 물건을 화덕에 올려놓은 다음 불꽃을 만들어 물건이 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때 다 타고 난 물건은 처음 구매했을 때 지불했던 자금보다 더 많은 양의 동전을 남기며, 플레이어는 이 돈을 모아 다시 카탈로그를 살펴 새로운 물건을 구매한다. 게임 ‘리틀 인페르노’는 어떻게 보면 이처럼 단순한 게임 경험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임 〈리틀 인페르노〉는 물건을 태우는 경험 자체의 심미성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이를테면 옥수수를 태우면 팝콘이 되어 터져나온다던가, 은행 모형을 태우면 지폐가 마구 튀어오른다던가, 상한 초밥을 태우면 벌레떼가 날아오른다던가 하는 식으로 태우는 물건의 특성을 고려한 섬세한 애니메이션과 사운드 효과가 돋보인다. ‘불멍’의 즐거움과 안전하게 파괴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음에 빠져든 플레이어는 곧 카탈로그를 펼치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또 어떤 물건을 구매하여 태울지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 * 태우는 물건들마다 고유의 시각적, 청각적 효과가 있다. 게임플레이의 쾌락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요소는 구매한 물건이 바로 배송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게임 초반에는 배송까지 약 5초에서 10초가 걸리던 물건들이, 게임 중후반으로 넘어갈 수록 2분에서 5분까지도 기다려야 주문한 물건들을 받아볼 수 있다. 물건이 배송되길 기다리면서 태울 물건이 있다면 모르되, 게임을 해나갈수록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 물건 배송을 기다리며 텅 빈 화덕에 의미없는 불꽃만을 일으키며 초조해할 뿐이다. 보통 대기시간으로 인한 패널티라는 시스템은 모바일 게임에서 주로 차용된다. 마냥 기다리기엔 지루한 대기시간이라는 패널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광고 시청을 제공하고 대기시간을 없애주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혼자 플레이하는 콘솔 게임에 차용되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지점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일상적으로 하지 않던가? 물건을 주문하고 그 물건이 택배로 도착하기까지 며칠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비슷한 초조함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인고의 시간이 지나 물건이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물건을 받아본다는 쾌락은 비로소 극대화된다. * 본격 택배 기다리기 시뮬레이터 그런데 게임플레이가 제공하는 ‘불멍’과 ‘안전한 파괴’, 더 나아가 ‘구매행위’ 자체가 주는 쾌락은 어느 순간 의문으로 바뀐다. 이 의문은 카탈로그의 모든 아이템을 구매하고 불태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또 다른 상품 카탈로그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물건의 구매와 소비는 연쇄적이다. 이 굴레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 묻게 된다. 언제까지 불태우기 위해서만 물건을 사고 거기서 더 많은 돈을 얻어 다시 물건을 사는 짓을 반복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게임 초반부터 의미심장하게 제기된 ‘끝은 나게 되어있다 (There’s bound to be an end)’라는 대사에서 암시된다. 계속 사는(buy) 것으로 살아갈 (live) 수 없다 2005년작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등장하여 반짝 인기를 끌었던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는, 그것이 상품화된 양상과는 정 반대되는 메세지를 보내는 작품이다. 작중 주인공인 모모는 조개껍데기와 빛나는 돌 조각, 낡은 천으로 만들어진 텐트만 가지고도 어린이다운 제약없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누구보다 즐겁게 놀 줄 아는 소녀이다. 그런데 모모를 회유하기 위해 나선 악당인 ‘시간도둑’은 그런 초라한 장난감 대신 크고 화려한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 것을 제안한다. 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방식은 조개 껍데기를 갖고 노는 방식과는 다르다. 바비 인형을 제대로 갖고 놀기 위해서는 일상복과 파티용 드레스, 운동을 위한 테니스복을 사주어야 한다. 어느 순간 바비 인형과 그 모든 물건이 질린다면 바비 인형의 남자친구인 부비 보이가 있다. 부비 보이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만을 위한 향수와 신발, 갖은 옷들을 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는 구매와 질림의 연쇄 속에서 길들여진 어린이들은 특유의 상상력이 제약당한 채 모든 일에 지루함만을 느끼는 어른이 되고 만다. 게임 〈리틀 인페르노〉 역시 동화 〈모모〉가 사유한 인간의 소비주체화라는 문제의식을 같은 선상에서 공유한다. 그것은 게임 안에 삽입된 개인용 화덕 장난감 ‘리틀 인페르노’ 광고를 봐도 알 수 있다. ‘리틀 인페르노’ 광고는 끊임없이 사들인 장난감에 질린 아이들이 그 잡동사니를 불태우는 쾌락을, 그리고 다시 다른 물건들을 사들이는 쾌락을 제공한다는 것을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로 묘사한다. 검은 두 손은 얼어붙은 지구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입술을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어준다. 이에 안심한 아이들은 여지껏 사들였다 질려버린 장난감을 박스채 가져와 화덕 안에 던져넣는다. 이처럼 게임 안에서 ‘리틀 인페르노’ 화덕 장난감이 ‘어린이’들을 겨냥한 ‘개인용’ 장난감이라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를 통해 ‘리틀 인페르노’를 소유한 어린이들을 전인격적 주체가 아닌 소비주체로 호명한다. 동시에 자본을 투자해 더 많은 자본을 얻은 다음 그 잉여 자본을 (물건 구매를 통해) 재투자한다는 시스템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본가가 자본의 양을 불리는 방식이라 지적했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리틀 인페르노’를 소유한 어린이들은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서 구매를 위한 구매와 투자를 위한 투자라는 체제의 원칙을 자연스레 주입당하는 셈이기도 하다. * 구매에 이은 파괴에서 오는 쾌락 소비자본주의가 주조한 개인에게는 오로지 눈앞에 놓인 화덕과 구매할 물건이 실린 카탈로그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몇 년째 이유도 모른 채 지속되는 폭설을 경고하는 날씨 알림 편지도, 바로 옆집에서 말을 걸어오는 이웃의 편지도 화덕에 올라 불태워질 뿐이다. 플레이어로서는 구매와 파괴와 더 많은 구매라는 일련의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로 발생한 기후변화도 인지할 수 없을 뿐더러, 구매와 파괴라는 구조가 과연 맞는 것이냐는 질문을 해오는 이웃과도 연대는 커녕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변화는 자신의 화덕을 폭발시키고 만 이웃으로부터 먼저 찾아온다. ‘투모로우 코퍼레이션’의 회장은 이 사건을 그저 안전문제로 치부하고 말지만, 처음으로 방 안의 화덕에서 벗어나 바깥을 보게 된 이웃은 자신이 겪은 일은 사고가 아니었다며, 자신은 햇빛이 좋은 해변가에 있다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자신과 같이 화덕을 폭발시키고 밖으로 나오길 종용한다. 이웃과 같이 자신의 화덕도 폭발시킨 플레이어는 이웃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화덕에서 눈을 떼고 집 밖으로 나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사람들은 각자 집에 틀어박혀 수천 개의 굴뚝으로 검은 연기를 내보내는데 열중하느라 길거리는 텅 비어있다. 불태울 물건들을 배송하느라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단 한 명의 집배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 텅 빈 거리를 처음으로 나선 주인공 발걸음을 옮기던 주인공은 ‘리틀 인페르노’를 판매하는 회사인 ‘투모로우 코퍼레이션’에 도달하게 되고, ‘리틀 인페르노’를 기획하고 판매한 회장조차 ‘끝은 나게 되어있다 (There’s bound to be an end)’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로켓을 타고 지구를 떠난다. 2012년에 처음 출시된 이 게임은 약 10년 만에 현실이 된 전지구적 기후위기, 일론 머스크와 같은 세계적 부호와 ‘지구를 버리고 화성을 식민화하자’라는 구호까지 예견한다. 그리고 이 예견은 바로 ‘지속불가능한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마침내 플레이어는 열기구를 타고 다니며 기상정보를 전해주던 기상 캐스터를 만나게 된다. 기상 캐스터는 열기구를 태워줄 수 있다며, 원하는 만큼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한번 떠나기로 결정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게임은 기상 캐스터와 함께 열기구를 탄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란 무슨 뜻인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구매-투자-더 많은 돈-재투자라는 소비자본주의의 굴레를 한 번이라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일으키는 어마어마한 기후위기와 사람들간의 고립, 소외, 연대 불가능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다시는 물건을 불태우며 ‘불멍’과 ‘물건 구매’에서 안락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열기구를 탄 기상캐스터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이 서늘한 불꽃을 응시하라 물건을 태워서 종잣돈을 늘리고 새로운 물건을 해금한다. 그리고 일종의 업적이기도 한 특정 물건의 조합을 찾아 태우는 재미는 분명 게임으로서의 즐거움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주된 게임성을 경험하게 하는 시스템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회의하고 그 밖을 사유하기를 적극적으로 재촉한다. 이러한 점에서 게임 〈리틀 인페르노〉는 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세지가 게임적 시스템과 충돌한다. 넘어선다. 따라서 〈리틀 인페르노〉는 자신의 게임성을 뛰어넘는 일종의 메타성을 가진다. 이 게임은 자신의 게임성을 구성하는 시스템을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플레이어들을 이끎으로써 게임성과 반대되는 메세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눈을 가리고 당장의 쾌락에 매몰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이 게임은, 따라서 소비자본주의로 인한 기후위기가 닥친 현실 세계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당장 지구 곳곳에 산불, 가뭄과 식량난, 전염병이 창궐하는데도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이 영원하리라는 믿음이 지배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위화감을 한 번이라도 느꼈다면, 그런 당신에게 게임 〈리틀 인페르노〉를 추천한다. 물건을 태우는 불꽃을 바라보면서도 그 불꽃이 일기까지의 과정과 불꽃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떠올리며 서늘함을 느끼게 될테니 말이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연구자) 김지운 인디음악 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예술사회학 연구와 (공연)사진 촬영에 매진중이다. 라캉 정신분석 철학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영번역을 맡았다. ​ ​

  •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 Back 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16 GG Vol. 24. 2. 10. 게임에 연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임이 미연시인건 아니며 , 혹여 장르 불문 연애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이드 콘텐츠 취급을 받곤 한다 .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 야 ,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 ‘ 연애 ’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 뭐 이것도 로맨스라면 로맨스일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RPG 들 , 특히 좀더 TRPG 원류의 감성을 추구하는 CRPG 들에서는 로맨스 옵션이 거의 필수적으로 여겨지게 됐다 . 특정 연애 루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다투는 정실 (?) 논쟁은 커뮤니티에서는 일상이다 . 어쩌다 이랬을까 . 세계를 구하고 악을 무찌르라고 있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애만 하게 된걸까 .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런 게임에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건 ‘ 모험 ’ 의 연장선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 과거 RPG 명가 바이오웨어의 게임들이 CRPG 시류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 비록 그들이 이 형태를 취한 최초는 아니라도 ), ‘ 발더스 게이트 2’ 이래로 로맨스 옵션에서도 하나의 메인스트림이 형성된다 . 그건 바로 기용 가능한 동료들과 지속적인 대화와 동료 퀘스트 같은 사이드 콘텐츠를 통해서 연대를 형성하고 , 그렇게 깊어진 연대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 이처럼 CRPG 의 연애 , 로맨스 옵션이 기존의 미연시와 다소 다른 결을 띄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동료 시스템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 대체로 CRPG 의 로맨스란 어디까지나 핵심은 동료 퀘스트라는 매우 명확하고 달성 여부가 확실하게 가름나는 콘텐츠이며 , 여기에 양쪽이 연애가 가능한 지향일 경우 연애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 미연시의 연애는 오직 연애를 위해서 일종의 루트 공략 , 엔딩 공략 게임의 느낌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비중과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된 이유는 CRPG 의 토대가 TRPG 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 하다 . 기존에 현실에서 펼쳐지던 TRPG 는 동료가 진짜 사람이며 , 대체로 이미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현실의 관계처럼 끈끈했고 , 상호 간에 영향을 미쳤다 . 하지만 최근 멀티플레이어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CRPG 는 모두 오프라인 게임이었고 , 플레이어 캐릭터 외에 함께하는 동료들은 인공지능 AI 이제 스크립트 더미였고 , TRPG 수준의 상호작용의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 때문에 이렇게 게임을 함께하게 되는 동료 캐릭터를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실적으로 느끼고 , 플레이어와 더 연대를 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동료 퀘스트를 위시한 컴패니언 시스템 일체라고 할 수 있다 . 즉 , 혼자서 게임을 하지만 외롭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 그래서 그러한 ‘ 인간적인 상호작용 ’ 을 플레이어 캐릭터와 동료 캐릭터 사이에 넣는다면 , 그 흐름이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최종판인 연애로 흘러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초기의 CRPG 들은 이런 부분의 배려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 서양 시장에서의 시류는 바이오웨어를 필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바이오웨어는 CRPG 메이커 중에서 이러한 동료와의 유대 , 그리고 연애 등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이끈 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단순히 함께 싸우는 전투원 1 에서 벗어나 동료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고 , 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다보면 자연스레 친밀해지고 , 그러다 이제 서로 성적 지향도 맞는다면 연애도 하는 … 그런 흐름이었다 .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이러한 동료 시스템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 그리고 가장 대중화시킨 주인공이었다 .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 바로 동료로서 원하는 캐릭터와 연애 대상으로서 원하는 캐릭터가 다를 경우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이 결합하고 이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문제였는데 , 바로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과 전투 캐릭터로서의 성능 , 두가지 요소에 기인했다 . CRPG 의 연애 시스템은 세이브로드 신공과 함께라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다 . 하지만 단 한가지 , 성적 지향에 따라 가능 / 불가능으로 나뉘는 케이스는 절대적인 벽이었다 . 현대적인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 첫 CRPG 라고 할 수 있는 ‘ 발더스 게이트 2’ 는 주인공이 스토리상 고정된 인물이었고 , 성별 또한 남성으로 고정이었으니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 .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을 널리 퍼트린 ‘ 매스 이펙트 ’ 시리즈와 동시기의 ‘ 드래곤 에이지 ’ 로 가면서 , 동성 연애 지향을 가진 동료들이 추가되며 이러한 경향이 생겨났다 . 이렇게 로맨스 옵션에 성적 지향이 추가된 건 게임이 보다 더 많은 취향과 환경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게임 내에서 표현하기 위한 흐름에 따른 일이었다 .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건 RPG 에선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고 , 그러려면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가 성별을 비롯해 각 플레이어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야 했다 . 이에 따라 동료들 , 연애 대상들이 각 지향과 취향에 맞게 분배되는건 당연한 일 . 재미있는 일은 플레이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좋아하는 캐릭터의 성적 지향이 맞지 않을 때 벌어지는데 , 자신이 게임 초기에 선택한 성별과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특정 대상과 연애를 할 수 없게되고 , 이는 게임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캐릭터 생성부터 특정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다는걸 의미했다 . 아무튼 이러한 현상 덕분에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원하는 로맨스 대상이 아무래도 훨씬 머릿수가 많은 이성애자들을 위한 연애 대상이 아닐 경우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 대표적인 예시는 ‘ 사이버펑크 2077’ 의 주디 알바레즈다 . 주디 알바레즈는 주인공 V 의 핵심 조력자이자 이 게임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대외적으로 게임을 어필하는데 동원되어 온 일종의 얼굴마담이자 상징이었다 . 모든 플레이어들이 이 캐릭터와 연애를 하려고 달려들 건 분명했다 . 그런데 여기서 개발진은 한 번 비튼다 . 주디 알바레즈는 동성애자 캐릭터이고 , 남성 V 를 위한 이성애자 파트너는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 때문에 이를 모르고 습관처럼 남성 V 로 게임을 시작한 , 남성 이성애자 플레이어들은 주디 알바레즈가 동성애자이며 , 한참 게임을 진행한 자신의 캐릭터로는 주디와 프렌드존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 여기서 그런 플레이어들이 취한 행동은 크게 두가지 . 커뮤니티에 원성을 쏟아내거나 여성 V 로 새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 사실 이렇게 성적 지향으로 연애 대상을 나누는건 바이오웨어가 먼저였다 . 동료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로열티 퀘스트 , 그리고 동료와의 연애 선택지라는 요소를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시킨 게임이기도 했던 ‘ 매스 이펙트 ’ 시리즈는 1 편에서는 모든 연애 대상이 이성애자였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 그건 아사리라는 종족적인 특성을 빌려 , 리아라 트소니를 양성애자로 설정한 것 . 이성애자 여성 애슐리 , 이성애자 남성 케이든에 양성애자 리아라가 존재하는 로맨스 옵션이었다 . 이는 아무래도 ‘ 선택 ’ 을 집어넣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 셰퍼드의 성별을 어떻게 고르더라도 결국 연애할 수 있는 대상이 한명이라면 ,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연애할 대상을 선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없었고 , 대상을 선택하는건 로맨스 옵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시리즈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고 , 또 가장 대표적인 혁신작이었던 ‘ 매스 이펙트 2’ 는 동료 시스템을 훨씬 크게 키움과 동시에 로맨스 옵션도 방대하게 늘어났다 . 그런데 여기서는 오직 이성애자만이 등장한다 . 한 성별 당 3 명의 연애 대상을 부여받았는데 , 2007 년 게임인 전작에서 양성애자를 등장시켰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후퇴 (?) 였다 . 그리고 3 편은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 , 좀더 다양해졌다 . 각 성별마다 한명씩 동성애자 연애 대상이 추가됐고 , 1 편의 연애 대상인 3 명이 다시 들어왔다 .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조건이 좀 있기는 하나 한 성별당 4 명의 이성애자 , 1 명의 동성애자 , 1 명의 양성애자 연애 대상을 가지게 되었다 .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성토를 받았던 게임은 바이오웨어의 ‘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 ’ 이었다 . 다른 게임에 비하면 동료의 수가 무척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성적 지향 , 종족별로 배분하다보니 플레이어 캐릭터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연애 대상이 너무나 적었던 것 . 심지어 전투원이 아닌 동행 캐릭터들도 연애 대상으로 넣었음에도 이랬는데 , 그런 캐릭터들은 또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탓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이 상황을 보자면 , 플레이어들이 CRPG 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플레이어 캐릭터에 이입하고 동시에 다른 등장인물에 얼마나 몰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 한편으로는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을 설정하는데에 있어서 굉장한 고민을 떠안게 됐다 . 어떤 연애 대상을 설계할 것인가 ? 어떤 성적 지향에 어떤 캐릭터를 배치할 것인가 ? 이는 단순히 고민을 떠나서 특정 성적 지향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키는 , 어쩌면 차별 또는 편견으로 비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했다 . 세상에 , 그냥 게임 캐릭터와 연애를 하고 싶은 것 뿐인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써야 한다니 ! 그러나 , 여기서 ‘ 발더스 게이트 3’ 는 재미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 모든 동료를 연애 대상으로 , 동시에 모든 연애 대상 동료를 양성 모두 연애 가능으로 만든 것 . 너무나 간단한 , 어쩌면 무성의한 해법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맥이 풀리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아 ! 왜 다들 그 생각을 못했지 ? 하고 감탄할 법한 해법이었다 .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는데도 , 오직 캐릭터 생성 단계만 지나도 접근 할 수 없는 콘텐츠가 생기는 셈이었던 이전의 이성애자 - 동성애자 중심의 로맨스 옵션이 , 그냥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를 양성애자 , 혹은 연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기가막힌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 물론 , 이전에 이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 이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 동료가 과연 진정한 로맨스 옵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 이게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 실제로 기존의 바이오웨어 게임들처럼 이성애자 / 동성애자 / 양성애자가 모두 존재하는 RPG 에서는 양성애자 캐릭터들은 보통 인기가 가장 없는 편이었다 . 하지만 흥미롭게도 , ‘ 발더스 게이트 3’ 에서는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 마련인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이들 캐릭터가 양성애자라는 건 전혀 지적받지 않고 있다 . 오히려 게일 같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양성애자로서의 면모 , 그리고 쉬운 로맨스는 일종의 밈화되어 혐오의 대상보다는 유머의 대상으로 더 가깝게 여겨지고 있다 . ‘ 발더스 게이트 3’ 의 로맨스 옵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 기존 게임들의 로맨스 옵션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이핑으로 만들어진 대상이었고 , 성적 지향이 진정한 정체성 표현보다는 ‘ 제한 ’ 으로서 받아들여진 면이 더 컸다는걸 깨닫게 된다 . 기본적으로 각각의 캐릭터가 성적 지향에 맞추어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이핑 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 성적 지향에 따른 제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들을 만날 때 감정 선을 정리하고 진짜 캐릭터 대 캐릭터로서 교감하기 보다는 게임 콘텐츠로서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점에서 , 오히려 모든 캐릭터가 성별과 상관없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일종의 게임적 허용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고리타분한 성적 지향에 따른 분배와 이런저런 고려는 치우고 , 그냥 넌 이 동료가 가장 마음에 들어 ? 그럼 얘랑 끝까지 가봐 . 라는 간단하고 쉬운 게임적 허용으로 게임 내 로맨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 . 즉 , 바이오웨어식 로맨스의 한계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에 맞추어 각 캐릭터를 너무 세분화하고 , 카테고리로서 분화시켜 배치한 점에서 왔다 . 그 순간부터 오히려 플레이어들은 캐릭터 그 자체보다는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인가를 생각한다 . 어쩌면 현실의 연애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 그냥 내가 좋다고 되는건 아니지 않는가 . 하지만 ‘ 발더스 게이트 3’ 의 동료들은 모두가 연애가 가능하고 , 특정 성별 지향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 사실 이들을 양성애자라고 하는 것도 연애 가능성이라는 콘텐츠 기능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이지 ,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양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지도 않는다 ( 그래서 앞서 ‘ 양성애자 ’ 라는 표현이 아니라 ‘ 연애 가능 ’ 이라고 했다 ). 그러니 좀 더 정확하게는 로맨스 옵션에 성별의 제한이 없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 현실이라면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 이건 ‘ 게임 ’ 이니까 . 즉 , 오히려 게임의 애정과 연애를 적당히 게임이라는 선 안에 두고 그 안에서 게임적 편의성을 취한 결과 , 플레이어들이 가장 만족하는 로맨스 옵션이 만들어지게 된다 . 그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 바이오웨어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지나치게 현실의 연애를 고려했던건 아닐까 ? 어디까지나 우리가 게임 상에서 이루고 싶었던 건 지고한 순애가 아니라 , 일종의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인정받는 증표였던건 아닐까 ? 즉 ,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변화해오기는 했지만 CRPG 에서의 로맨스란 말그대로 게임을 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 탄생했고 , 이것이 플레이어가 어떠한 ‘ 인정 ’ 을 받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 비록 스크립트 덩어리와의 연애가 현실에서 동료와의 상호작용 만큼 깊고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 ‘ 함께 모험한 동료 ’ 와 또 하나의 사적인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건 마찬가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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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 Back 피카츄는 나와 함께 잠드는 것이 기대되는 모양입니다....-<포켓몬 GO>와 <포켓몬 슬립>의 현실 침투 작전 16 GG Vol. 24. 2. 10. 내 포켓몬이 부르니까 자러 가야지 2023년 7월 처음 출시된 포켓몬 컴퍼니의 새로운 모바일 게임 <포켓몬 슬립Pokémon Sleep>은 출시 2개월 만에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년을 돌파 1) 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장르를 내세우며 이 앱이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게임의 방식은 단순하다. 이용자가 자면, 게임은 이용자의 수면패턴을 분석하고 이에 맞는 포켓몬을 수집한다. 보다시피 이용자가 재미를 느낄 요소라고는 포켓몬밖에 없다. 즉 <포켓몬 슬립>의 흥행은 오로지 ‘포켓몬스터’라는 유명하고 사랑받는 주머니 괴물들의 매력 하나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 세계 엄청난 열풍을 일으킨 <포켓몬 GO>의 목표 또한 오로지 현실 공간을 무대로 다양한 포켓몬을 포획하는 것이었다. 포켓몬스터라는 IP는 성공적으로 게임 이용자에게 재미를 유도하고 두 게임을 ‘게임’이라고 인식시켰다. 일단 게임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자 두 게임은 IP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IP를 통해 흥행에 성공한 게임은 역으로 자신들의 현실과의 접합을 이용해 포켓몬스터 IP의 해상도를 높여갔다. <포켓몬 슬립>을 살펴보자. <포켓몬 슬립>이 이용자 수면 측정의 개연성으로 채택하는 것은 바로 포켓몬의 잠자는 모습 연구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이용자의 파트너 포켓몬은 잠자기 약속을 지키라며 이용자에게 알림을 띄운다. 이용자는 파트너 포켓몬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눈을 뜬 이용자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수면 습관을 가진 새로운 포켓몬들이다. 이를 반복하며 이용자는 포켓몬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성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용자는 자연스럽게 매일 밤 포켓몬과 함께 잠들고, 포켓몬과 눈 뜨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용자는 게임에게 지시받은 대로 매일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연구’하게 된다. 포켓몬 연구자가 된 이용자는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에 대해 현실의 생명체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포켓몬이라는 형상은 이용자 속에서 점점 구체화되며, 이용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그들과 가장 내밀한 일상을 공유하며 ‘현실을 함께 한다’는 감각을 전달받는다. 구체화된 형상과 실재하는 감각이 심상에서 결합하며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생명체는 현실 공간에서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포켓몬 컴퍼니의 이 같은 전략은 기존 팬들의 애착을 강화하고 모바일의 접근성을 이용해 새 이용자를 유치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이러한 전략은 포켓몬스터가 단순히 거대한 IP일뿐만 아니라 꾸준히 콘텐츠의 무한확장 및 구체화를 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포켓몬 컴퍼니는 대내외적으로 포켓몬이라는 생명체를 구체화시키고 그들과 이용자의 거리를 좁히는 방향으로 IP를 개발해왔다. 대표적인 사례인 <포켓몬 GO>는 그저 일부분이다. 현재 포켓몬 게임은 가장 기본이 되는 콘솔 게임이외에도 모바일 게임, 오프라인 카드게임, 아케이드 게임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서비스되고 있다. 어딜 가나 보이는 다양한 상품과의 콜라보 ‘굿즈’까지 포함할시 포켓몬은 체감상 비둘기보다도 자주 목격된다. 포켓몬이라는 허구의 생명체는 여러 매개를 통해 지금도 끈질기게 현실을 침범하고 있는 셈이다.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인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의 DLC에서는 이용자가 포켓몬을 씻기고, 먹이는 걸 넘어 포켓몬의 몸으로 행동하고 다른 이용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포켓몬 슬립>이 게임이냐? 앞선 일련의 전략들은 현실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AR 게임 <포켓몬 GO>의 엄청난 흥행과 현실의 생활 습관을 관리하는 <포켓몬 슬립>의 약진이라는 특수한 결과를 탄생시켰다. 왜 ‘특수한’ 결과일까? 평소 우리가 보아온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쉽게 답을 알 수 있다. 이 대대적인 IP 경쟁력 강화 작업은 포켓몬 컴퍼니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가령 <포켓몬 슬립>은 정말 ‘게임’인가? <듀오링고Duolingo>는 ‘게임하듯 재미있게’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습 앱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게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녹색 부엉이가 호들갑을 떨어도 <듀오링고>를 재미있기 때문에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포켓몬 슬립>은 <듀오링고>처럼 수면습관 개선이라는 명백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지만 게임으로 여겨진다. 물론 앞서 말했듯 포켓몬의 존재 덕분이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을 웬 수면측정 앱으로 이끌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란 게임이 아닌 분야에 게임적 요소를 적용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이 연로한 단어를 모셔온 이유는 이 단어가 근래에는 더 이상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이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지금, 게임적 메커니즘 또한 인간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매일 금융거래 앱에 들어가 출석체크를 하고 포인트를 받으며, 중고거래 앱에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며 자신의 레벨을 올린다. 이것은 달리 말해 이런 세상에서 게임이 ‘게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게임적 요소로 치장한 가지각색의 서비스보다 그들이 조금 더 게임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수의 게임에게 이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게임은 게임적 요소를 통해 이용자를 유혹해야만 하는 실용적인 목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명감이나 따내야할 사업 예산이 없는 이상 게임에 실용적인 목적을 넣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게임의 본질, 즉 재미에만 충실하면 당연히 게임은 금융거래 앱이나 중고거래 앱보다 재밌고 게임 같다. 그렇지 않은 게임도 물론 일부 있다. 그에 대해선 유감이다. 이런 현실에 반해 포켓몬 컴퍼니는 실용적인 목적을 역으로 자신들의 IP 강화에 이용하였다.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이번에는 훨씬 최신이지만 마찬가지로 근래 관심이 부쩍 시들어버린 단어를 가져와보겠다. 바로 한때 전 세계인을 3차원 가상공간으로 불러 모았던 메타버스(Metaverse)다. 코로나19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진 메타버스 열풍은 빠르게 퍼진 만큼 빠르게 식었다. 대면 활동이 제한되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이 가능하단 점은 한때 메타버스를 주목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게임과의 차별점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현재 남아있는 <로블록스Roblox>나 <제페토ZEPETO> 등의 메타버스 공간을 게임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 세계는 현실과 닮아있을지언정 현실 공간과 별개의 규범으로 운영되며, 이용자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그들이 즐거운 이유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메타버스로 통칭되는 게임의 현재 모습은 현실의 사회·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메타버스의 대다수 이용자가 어린 연령대라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블록스>의 로우 폴리곤 세상은 빈말로도 현실과 닮았다고 할 수 없다. 이용자들은 현실과 다른 다양한 세계를 넘나들며 체험하고 교류하는 것을 주요 즐거움으로 삼는다. <제페토>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에 <제페토>는 어쨌든 얼굴인식과 AR 기술을 활용한 메타버스로 소개되지만, <제페토>의 아바타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제페토>를 깊게 즐길수록 아바타가 점점 현실의 모습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달라진 아바타로 다양한 테마의 배경을 즐기는 것이 <제페토>의 핵심이다. 이 사실은 대부분의 AR 게임이 왜 흥행에 실패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즐거움을 원하는 게임 이용자는 대개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반면 포켓몬이 선사하는 이 모든 간접 체험에도 포켓몬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생명체다. 이용자들은 포켓몬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현실에서 보고 싶어 한다. 가상공간에서 굳이 현실의 일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현실의 일에 가상의 상상력이 끼어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AR 게임이 <포켓몬 GO>라는 사실은 AR 기술의 한계에도 포켓몬이 그들의 방대한 배경을 통해 이용자들을 감성적으로 매혹하고, 이를 믿어주고 싶은 이용자들이 넘어가준 것에 가깝다. ‘포켓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게임이 현실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현실에 첨가할 매력적인 가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다른 도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보통은 기술력으로 돌파구를 찾고, 그래서 돈이 많이 든다. 캐릭터는 좋은데 게임성은 별로? <포켓몬 슬립>은 강력하게 형성된 IP에 힘입어 성공한 ‘게임’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그 자체로 이용자들이 ‘포켓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모바일 게임의 규모를 무시할 수 없는 현재의 게임 지형에서 포켓몬 컴퍼니의 이러한 노력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포켓몬 슬립>의 사례는 매력적인 캐릭터 IP의 영향력이 단순히 뽑기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 수집 모바일 게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캐릭터 IP는 게임의 한 구성 요소를 넘어 독자적으로 재미와 아우라를 창출할 수 있는 요소로 등극하였다. 독자성을 가진 IP는 결코 베껴지지 않는단 점에서 그것을 보유한 회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남는다. 점진적으로 애착 관계를 형성한 이용자에게 캐릭터의 존재는 이미 현실이고, 이는 대체 불가능하다. 다만 캐릭터 IP가 게임 안에서 독자적으로 재미를 창출하는 지위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사실임과 동시에 아이러니한 논란을 동반한다. IP는 게임의 중대한 구성 요소로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재미를 담보하지만, 게임 이용자들이 ‘게임성’이라는 각자 다른 정의를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할 때 ‘캐릭터’의 존재는 흔히 논외이기 때문이다. ‘게임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대개 재미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지만 캐릭터를 보며 느끼는 재미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이용자들 사이에서 격한 ‘게임성’ 논란을 일으켰다. 같은 시기 같은 장르의 다른 게임에 비해 질 낮은 그래픽과 각종 버그 등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지적 또한 매 게임 시리즈마다 있어왔다.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 출시 초기에는 게임이 불가능할 정도의 다양한 버그가 문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용자들이 게임을 할 때 이 모든 요소는 종합적으로 고려되므로, 이런 식의 분리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게도 게임의 모든 요소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비한 기술력이나 불합리한 시스템은 게임 진행 및 몰입을 방해해 시리즈 자체의 호감을 하락시키며, 그것은 IP도 마찬가지다. ‘게임성’이라는 합의되지 않은 정의를 합의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미 이용자들의 게임 선택 기준에는 IP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포켓몬은 왜 우리의 수면을 책임지려 하나? 왜 포켓몬 컴퍼니는 ‘수면 엔터테인먼트’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조합으로 우리의 수면 습관을 관리하고 싶어 하며, 왜 이 수면 측정 앱은 흥행에 성공했는가? ‘포켓몬’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은 이용자가 키, 몸무게, 습성, 성격, 먹이와 서식지를 넘어 잠자는 모습까지 연구하게 만들며 구체화된 형상으로 머릿속에 안착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점차 거리를 좁히며 치밀하게 이용자의 현실 공간에 침투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포켓몬에 대한 애정이 게임을 플레이하게 만들고, 게임 플레이는 다시금 이용자의 애정을 강화시켰다. 게임에서 흔히 ‘현실’이라는 요소가 가상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구조를 통해 <포켓몬 슬립>이라는 독특한 ‘게임’은 목표를 달성했다. 이것은 현재 게임에서 IP라는 요소가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인 재미를 달성할 수 있는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동시에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IP가 어디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 포켓몬은 앞으로도 이용자들의 일상을 서슴없이 침략하고 더욱 친근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1) 디스이즈게임, 2023.10.20., 수면 게임 ‘포켓몬 슬립’ 전 세계 누적 수면 시간 10만 년 돌파, https://www.thisisgame.com/webzine/game/nboard/225/?n=179083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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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

    < Back [Editor's View] 무던히도 게임이 많았던 2023년을 마무리하며 15 GG Vol. 23. 12. 10. 2023년은 특히 작년인 2022년과 비교해 본다면 굵직하고 유의미한 게임들이 무더기로 쏟아진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면서 게임은 시들해지겠지 싶었지만 오히려 쏟아지는 게임 덕분에 누군가에겐 밖에 나가기가 힘든 한 해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워낙 대작들도 많았고, 작지만 의미가 묵직한 게임들도 많았습니다. 아마 올해 이루어질 여러 게임 어워드는 어느 해보다도 치열할 것이고, 비록 수상에 이르지 못하고 후보로만 머무르는 게임조차도 다른 해였다면 GOTY급의 위상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게임들이 2023년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GG는 그동안 GG를 거쳐간 여러 필자분들에게 당신들에게 있어 2023년을 기억할 만한 게임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었고, 그 답변을 글로 받아보았습니다. 이 중에는 올해 여러 어워드를 휩쓸 대중적인 게임도 있고, 혹은 정말 소수의 마니아들만 만져볼 법 했던 게임들도 있습니다. 게이머 개개인에게는 모두에게 각자의 GOTY가 있을 것이지만, 비좁은 지면에서 그 모든 걸 다루기는 어렵기에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2023년의 게임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습니다. 2021년 6월에 첫 선을 보였으니 이제 GG의 나이는 두돌 반, 곧 햇수로는 4년차를 맞이합니다. GG는 특정한 게임 타이틀을 두고 평점을 매기지는 않습니다만, 내년부터는 여건이 된다면 GG의 입장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GGG(Game Generation GOTY)를 손대볼 의향도 있습니다. 2023년 12월호는 그 작업의 얼리 억세스라고 봐주셔도 좋겠습니다. 2년 반동안 GG의 글들을 눈여겨 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년 2월, GG는 여전히 디지털게임과 우리라는 주제를 들고 변함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차분함과 평온함이 가득한 연말연시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레트로 시대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

    < Back 레트로 시대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 02 GG Vol. 21. 8. 10. 한국에서 게임의 역사는 길지 않다. 길다 짧다는 것이 주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길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은 한국 게임의 역사가 길지 않다고 한다. 다른 매체에 비하면 그 탄생이 늦어서 짧다. 미국, 일본보다도 짧은 편이다. 주변부의 다른 국가에 비하면 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게임의 역사를 몇 년으로 봐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가 한국 게임 역사의 시작이라고 하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1987년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 시행 시기와 함께 출시된 〈신검의 전설〉을 그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1983년 컴퓨터 보급과 컴퓨터 잡지의 발간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그에 앞서 아케이드용 전자 오락기들이 막 수입되고, 가정용 오락기들이 수출용으로 제작되던 때를 시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짧게 잡는다면 25년 정도가 될 것이다. 가장 길게 잡는다면 50년이 될 수 있는 이 역사는 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80년대 〈갤러그〉를 하던 오락실 어린이들이 지금은 성인이 되어 비슷한 연배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게임이란 매체가 다른 매체만큼 우리 사회에서 자리 잡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 안에서 문화로서의 게임의 위치가 산업적으로의 게임의 위치만큼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유로 여러 가지를 지목할 수 있겠지만 다른 매체처럼 충분한 평론 등이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임 평론이란 분야는 다른 매체만큼 활성화되어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국내에서 게임 평론은 존재하지 않으며 해외의 평론만을 수입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 평론이 필요하다고 하는 견해만큼이나 게임평론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많은 부분일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서 게임 평론 시도들은 일부 웹진의 기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일부 게임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꾸준히 평론을 지면에 생산하는 게임평론가는 매우 적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 게임 평론계는 의미 있게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25년 동안 한국 게임계는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렇다 보니 실제 게임평론을 생산하지 않는 자칭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최초의 게임평론가라고 이야기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도 벌어지고는 한다. 이런 점을 정리하려면 먼저 과거에 있었던 게임비평에의 시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게임잡지를 통해 나타난 초창기의 게임평론 시도들 한국에서 최초의 게임잡지를 꼽으라면 1990년에 창간된 〈게임월드〉일 것이다. 그 무렵 컴퓨터 게임을 복사해주거나 판매하는 소프트하우스 중심으로 동인지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 출판된 게임잡지는 〈게임월드〉가 가장 먼저였다. 이후 〈게임뉴스〉, 〈게임챔프〉, 〈게임정보〉 등 다양한 가정용 게임기를 다루는 게임잡지들이 출간되고 이후 컴퓨터 게임을 다루는 컴퓨터 게임 전문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잡지들은 국내에서 게임 문화가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끼쳤지만, 시기상 게임의 유입보다는 늦었다. 흔히 한국 게임개발 원년으로 다뤄지는 1987년보다 4년 이른 1983년 창간된 〈컴퓨터학습〉과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는 이미 컴퓨터와 게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각 컴퓨터 제작사별로 제공되는 게임들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 무렵의 게임에 대한 소개를 평론이나 공략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컴퓨터학습〉 1984년 1월부터 3월까지 3차례에 걸쳐 실린 〈제비우스 1,000만점 돌파의 비밀〉은 일본 컴퓨터 잡지에 있는 공략을 그대로 옮겼으나, 국내 최초의 게임공략으로 인지되며, 〈컴퓨터학습〉이 이후 게임을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제비우스〉 공략이 실린 컴퓨터학습 1984년 1월호와 2월호. 컴퓨터 전문 잡지들의 게임 필자들은 학생들이 주로 맡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부분 투고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게임 초기에 게임평론가로 활동했던 박병호는 학생 때 〈컴퓨터학습〉에 게임공략을 투고하여 잡지에 게재된 것을 인연으로 〈컴퓨터학습〉에 MSX 게임공략을 꾸준히 연재하였다. 상당히 많은 필자가 게임공략으로 활동하였으나 이 중 게임평론가로 활동을 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박병호는 이후 〈PC매니아〉 등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평론가로 활동하며 나중에 〈게임피아〉 등의 잡지와 〈경향신문〉에서 종합지 최초로 게임 관련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 〈컴퓨터학습〉 86년 3월호에 실린 〈헬기대작전〉의 공략. 〈헬기대작전〉은 윌라이트가 제작했던 〈번겔링만의 습격〉 MSX판의 국내 유통 제목이다. 1990년대 초 게임잡지들의 창간은 이러한 컴퓨터 잡지들의 게임 코너의 영향들을 받았다. 초기 게임잡지 중 특히 주요한 영향을 꼽은 잡지라면 〈게임월드〉, 〈게임챔프〉, 〈게임채널〉 등이 있으며, 게임잡지들은 대부분 창간과 함께 필자들을 모집하며 기술 중에 게임 평론을 요구하기도 했다. 93년 추가로 〈게임정보>를 창간한 미래시대는 "나도 게임평론가"라는 코너로 독자들의 게임에 대한 평가를 연재하기도 했다. * 〈게임정보〉에 실렸던 독자마당 '나도 게임 평론가' 코너. 93년에 창간된 〈게임챔프〉는 기자들을 명인으로 지칭하며 신작들을 모아 평가를 했다. 평론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평점과 함께 기자의 이름을 걸고 평가를 하는 시스템은 이후 창간되는 〈PC챔프〉-〈PC파워진〉으로도 이어져 기자의 이름과 함께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 업계를 평론하는 연재하는 지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게임챔프〉에 실린 명인의 게임평가. 초기의 게임잡지들이 일본의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게임 유통사였던 동서게임채널에서 발행한 〈게임채널〉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 유학을 계기로 게임산업에 진출하게 된 대표의 영향도 있겠다. 〈게임채널〉은 창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미국의 〈컴퓨터게이밍월드지〉의 칼럼이나 게임에 대한 평가를 국내에 소개했으며 바이라인과 함께 기자 사진이 같이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 게임 시장이 컴퓨터 게임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컴퓨터 게임 전문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존 게임잡지들의 부록으로 시작해서 자매지로 창간되는 경우부터 방송사에서 직접 창간하는 경우까지 다양한 잡지들이 창간되었으며 비디오 게임 잡지의 편집 형태가 일본 게임잡지를 따라가는 그것과 달리 좀 더 미국의 게임잡지에 가깝지만 고유한 형태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기자들의 이름을 걸고 게임 자체를 깊게 평가한다던가, 게임뿐만 아니라 업계나 문화 자체에 대한 칼럼을 기자의 이름을 건 코너 등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93년 12월 정보문화센터에서 주최한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는 여러 수상작이 나오며 실제 게임으로 발매되는 단계까지도 갔는데, 당시 인식으로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 수상자는 게임전문가라는 인식이 있어, 이 수상자들이 게임 칼럼니스트들로 활동하는 예도 있었다. 이 중에서도 이문영 씨의 경우 다양한 기고와 함께 게임피아에서 울티마 온라인 여행기 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 〈피씨파워진〉에 실렸던 기자들의 평론이나 칼럼들. 〈게임월드〉와 〈게임챔프〉가 시작한 가정용 게임 잡지들은 〈게임매거진〉, 〈게임라인〉 등 후속 잡지들이 출현하면서 좀 더 다양하게 바뀌었다. 모두 다른 잡지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가능한 일본의 최신 정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부분과 함께 깊이 콘텐츠를 만들려는 노력이 함께 했다. 〈게임매거진〉의 경우는 TRPG를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으며 〈게임라인〉은 좀 더 자신의 색이 강한 콘텐츠가 강점이었다. 이중 게임라인에서 연재했던 'B급 게임의 심오한 세계'는 게임에 대해 좀 더 깊게 접근하면서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 〈게임라인〉에 실린 B급 게임의 심오한 세계 코너. 게임잡지의 인기가 좋다 보니 그동안 〈게임채널〉이나 〈PC챔프〉에서 기사 협약을 통해 단신으로만 소개되던 〈컴퓨터게이밍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출간하던 잡지사인 정보시대에서 직접 라이선스를 가져와서 창간하는 예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게임잡지들의 과다한 경쟁으로 인해 길게 가지는 못하였다. 〈게이머즈〉를 발행하던 게임문화는 일본의 잡지 〈게임비평〉의 라이선스를 얻어 일본의 잡지 내용에 한국에서 제작한 원고를 추가하여 같은 이름으로 〈게임비평〉을 격월로 출간하였다. 일본의 〈게임비평〉처럼 광고를 전혀 받지 않아 독립적인 편집을 보장한다는 기조는 격월로 좀 더 깊은 주제의 이야기들이 실렸으며, 국내 실정에 대한 분석, 평론이나 당시 〈악튜러스〉를 개발했던 김학규가 〈악튜러스〉의 개발 철학과 다루는 주제에 대해 기고를 하는 등 인상적인 시도가 많았으나, 3년 정도 이어지고 휴간하였다. * 〈게임비평〉 표지. 한국에서 90년대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의 한 축이 잡지라면, 다른 한 축은 PC통신일 것이다. PC통신이 등장하기 전에는 게이머들의 교류는 각 지방 소프트하우스를 중심으로 매우 작게 일어났으며, 잡지에 기고하던 필자들 역시 이렇다 할만한 교류가 있지 않았다. KETEL이 등장하고 개오동이 등장하고서야 게이머들이 장소를 초월해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곳에서는 활발하게 이야기가 오갔는데, 이러한 PC통신 동호회의 특징이라면 게시판에 대한 강한 규칙이라 양식이나 내용을 구분할 수 있는 제목의 말머리 등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초반에는 게임의 공략 질문 친목 위주로 운영되었다. 처음엔 PC통신 서비스가 KETEL이 이름을 바꾼 하이텔뿐이었지만 이후 PC-Serve가 이름을 바꾼 천리안과 나우누리 등의 서비스가 늘어나고 게임을 다루는 동호회도 늘어났다. 이러한 동호회에서는 게임에 대한 소감, 평가에 대한 수요가 있어 한곳에 모아놓기 시작했으며 당시의 컴퓨터 자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된 게시판 숫자, 글, 자료실 용량으로 기존 게시판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90년대 후반에서는 동호회들마다 평론, 평가 게시판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다 보니 게임의 홍보에 게임평론가란 호칭과 함께 이름과 하이텔 아이디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 하이텔 시뮬동의 소개/평론 게시판.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들은 게임전문지뿐만 아니라 그 밖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게임평론가로 활동하던 박병호는 1996년부터 5개월에 걸쳐 경향신문에 "다시 보는 컴퓨터 게임"을 매주 연재하였으며, 이는 알려진 종합지에 연재된 최초의 게임칼럼이다. 1999년에는 문화연구로 게임에 접근한 박상우가 〈씨네21〉에 게임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무가지로 시작한 잡지 〈페이퍼〉에서도 “박정선의 게임스테이션”이란 제목으로 게임칼럼이 연재되었다. 2000년대 초 게임의 중심이 PC게임에서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고,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종이 잡지의 영향력이 줄어가면서 2010년에 이르러선 대부분의 게임 잡지들이 폐간하였다. 이후 게임비평 공모상 등의 시도와 함께 저술 활동을 한 게임평론가들이 등장하고 사라져왔다. 가끔 왜 한국에 게임 평론이 뿌리내리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주변과 여러 이야기를 나눠왔다. 그중 한 가지는 시장이 게임 평론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90년대에서 2010년에 이르러서 게임 평론에 대한 요구가 없었을까. 90년대 당시의 독자 코너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게임 평론을 찬양하고 한국의 게임 평론은 수준이 낮으니 노력해야 한다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각 게임잡지의 구인코너에서 요구하는 능력에 게임 평론은 빠지지 않으며, 1998년에 호서대학교에서 게임공학과가 개설되면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게임평론가와 매니저 양성이 목표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국내 게임 잡지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관에서 진행하는 행사나 지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역시 수요 덕분일 것이다. 2008년부터 진행된 게임비평 상이나 월간 〈게임문화〉지 같은 것은 기존의 게임잡지에서 시도되었던 평론의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하였으나, 재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시행사나 주관사의 의지 때문에 지속되지 못하고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 게임잡지, PC통신의 게임 평론의 특징이라면 그 특징이 외국의 것을 흉내를 내거나, 자신만의 이론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초기의 게임잡지들에서는 게임 평론보다도 게임음악 평론들이 먼저 등장하며, 초기 게임 평론 역시 평론이란 호칭을 단 원고는 고전 게임 평론 등을 먼저 살펴볼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일반적으로 다른 매체의 비평에서 사용되는 접근들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게임들과의 비교들이 평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평가를 작성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미성년자라는 점. 그리고 매체 중에서도 주로 게임을 접했다는 것 역시 당시 평론이 게임의 바깥을 다루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면서 이러한 평론 경험을 했던 학생들이 성장하여 계속 게임 평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시장이 너무 척박하였다. 앞서 게임 비평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이 금전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수요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다. 〈게임챔프〉에서 “명작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칼럼은 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1년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독자들에게 평론으로의 반응 역시 좋았다. 나중에 가서야 필자를 공개하였는데, 당시 막 창세기전을 출시한 소프트맥스의 최연규였다. 이처럼 게임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게임개발자를 겸업하거나, 게임지 기자, 필자로 일하는 상황이었다. 게임 평론을 할 수 있는 게임전문가들이 대부분 게임업계 내에서 게임 지식이 있는 사람 외에는 힘든 상황이었고, 게임 평론의 원고료만으로는 충분한 수입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씨게임잡지 등에서 소개되는 어떻게 하면 게임 필자가 될 수 있나요.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필자들은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다고 언급하며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매우 힘들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박상우 역시 2000년 피씨피워진에서 실린 게임평론가란 직업에 대한 인터뷰에서 영화평론가도 먹고살기 힘든데, 게임으로 돈을 벌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게임평론가와 하드코어 게이머의 관계 역시 평론이 계속되기 힘든 환경이라 지목된다.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평단과 하드코어 게이머의 골을 크게 부각해 이러한 거리감이 최근에 생겼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2000년 〈피씨파워진〉의 기자 칼럼에서 게임 평론 부진의 원인을 맹목적인 팬덤 문화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역시 20년 전에도 존재하는 전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에 나왔던 것처럼 게임 평론에 대한 반응은 자신의 게임 지식을 자랑하는 형태로 흐르거나, 자신의 느낌과 다르다며 “겜알못”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 평론을 지속하기 힘든 환경이다 보니 박병호의 경우는 1999년 미국 유학으로 더는 게임 평론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박상우 역시 일반 문화지와 게임전문지에서 집필활동을 하였으나 지면의 부족으로 지속되지 못하기도 했다. 평론가나 전문 필자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게임개발사로 직장을 옮기기도 했다.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러서도 지면과 인식의 부족으로 게임 평론 활동이 지속되는 경우는 찾기가 힘들다. 이렇다 보니 이러한 시도들이 대부분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게임평론가들은 대부분 앞선 평론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해외의 칼럼이나 다른 매체 평론의 방법론을 통해 혼자 고민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활동이 다른 평론가들에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 각 평론가가 저술한 평론의 숫자 역시 많지 않다 보니 각자의 개성을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존재를 알기조차 쉽지 않다. 2000년 박상우가 게임평론가란 직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게임은 산업이 아닌 문화"라고 이야기했다. 2021년에도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공허하게 외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1년 동안의 시도들이 쌓아나갈 수 있었다면 좀 덜 공허할 수 있었을까. 2000년의 평론에서 다루는 게임과 2021년에 평론을 다루는 게임은 다르다.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를 더 찾아보기 힘든 것은 2010년 이후의 게임들이 단발적인 작품이 아니라 대부분 서비스 형태의 게임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야기하기 더욱 힘들어진 영향도 존재할 것이다. 가정용 게임의 보급과 스팀 같은 서비스들이 일반적으로 늘어나면서 인디게임을 비롯한 싱글 플레이게임 운신의 폭이 늘어나, 이러한 게임에 대한 평론은 지금은 게임웹진 등에서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 게임에서 주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온라인게임에 대한 평론은 시도할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커뮤니티 중심으로 재편된 게임웹진의 온라인게임 사이트들은 이제 공략조차 기자가 작성하지 않고 이용자가 작성하는 상황에 이르러 전문가가 더는 전문성을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최근 5년간은 게임산업 바깥의 지면에서 게임평론들을 찾아보기 쉬워졌다. 케이블은 물론 공중파 라디오에서도 게임 전문 코너가 생겼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론들에서 지금 까지의 한국 게임에서 있었던 평론의 영향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2030년에 연구자나 산업관계자들이 "한국에 게임 평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확언할 수 있을까. “옛날에 게임잡지들이 있었고,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나 〈게임제너레이션〉 같은 시도가 있었다.” 정도만 언급될 수도 있다. 그조차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게임비평 잡지나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는 현재는 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게임비평〉 등의 과거 게임을 다루던 잡지들은 이제 레트로 게임 아이템이 되어 수집가들에 의해 비싸게 거래되는 것이 보통이고,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는 분명히 당시에는 pdf로 배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구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닌 인터넷의 자료들은 더욱더 쉽게 휘발된다. 한국엔 게임 비평에 대한 시도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있었다.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쌓는 데는 실패했다. 어떻게든 부스러기를 모으다 보면 계속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다. 게임 평론 문화를 탑처럼 이야기했다. 이것이 탑이고 재료를 쌓는 데 실패했다면 탑을 세우는 데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탑이 아니라 화학작용이라면 어떨까. 수많은 재료가 쌓여왔고 무언가 촉매로 인해 화학작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게임제너레이션-GG〉가 그것이길 희망해본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

  •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 Back 박물관/미술관 속의 게임들과 그 역사 12 GG Vol. 23. 6. 10. 최근 들어 미술관에 게임이 전시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와 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전시가 늘고 있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들은 단순히 그 오브제의 집합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작품들이 연계되어 만드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 그 작품의 의미는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이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재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볼 때 게임은 종래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이나 회화 등의 작품과 비교할 때 동적일뿐더러 상호작용적으로 작동된다.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로 무장한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동적인 행위성 덕분에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다소 수동적이었던 기존의 작품 관람 패턴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게임이 게임만을 소재로 한 박물관을 갖게 되고, 다른 미술관에서 당당하게 전시를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게임이 독자적인 박물관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인 편견을 넘어 미술관에 전시되게 된 역사를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최초의 게임들 * MoMI에서 최초로 박물관에 전시된 아케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이 본격적으로 산업의 태동을 맞이한 시점을 1972년 아타리의 〈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9년에 이르러서야 게임은 처음으로 박물관에 전시될 기회를 갖게 된다. 미국 뉴욕의 Museum of the Moving Image (MoMI)는 “Hot Circuits: A Video Arcade”라는 이름의 전시에서 아케이드 게임들을 전시했다. 이 박물관의 창립 이사였던 로셸 슬로빈(Rochelle Slovin)은 비디오 게임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고 물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컴퓨터 스페이스(1971)〉나 〈퐁(1972)〉 같은 초기 아케이드 게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아스테로이드〉, 〈스페이스 인베이더〉, 〈슈퍼 브레이크 아웃〉, 〈트론〉 등 14종의 아케이드 게임이 전시되었다. MoMI의 이 초기 전시들은 이 박물관이 수집하고 있는 ‘동영상(moving image)’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이상의 인터랙션을 안겨주었기에 이러한 게임들을 전시할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본질적으로 게임은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운 좋게 게임에 호의적인 큐레이터를 만나 전시하게 된 새로운 매체 정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위의 사진처럼 MoMI의 전시는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던 아케이드 게임을 그대로 수집하여 가져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집된 게임의 예술적인 특질을 추출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 해당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에게도 본인들이 예술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작가적 정체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로셸 슬로빈은 이러한 아케이드 게임들의 기술적인 특징이나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전시에 관한 에세이에서 “비디오 게임을 평가한다는 것은 TV과 영화, 그리고 현재의 뉴미디어를 지배하는 비디오-컴퓨터의 혼합 사이에서 구미디어와 뉴미디어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를 만드는 중요한 단계”라고 썼다.1) 그는 1989년의 전시 이후 20년이 지난 2009년의 시점에서 당시의 전시들이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처럼 하나의 트렌드나 유행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무언가의 시작”이었으며, “비디오 게임이 전 세대의 젊은 미국인들을 컴퓨터에 적응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진 기술적인 시각화가 다른 매체와 다른 비디오 게임 고유의 독자적인 미학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초기 비디오 게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게임이 컴퓨터의 사고방식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게임이 탄도학이나 군사 시뮬레이션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초기 형태의 컴퓨터와 칩은 힘과 벡터라는 순수한 수학만을 다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들이 비디오 게임으로 재현되었을 때, 여기에는 순수한 수학의 강한 흔적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의 독특한 순간이었다. 기술이 게임의 원동력이자 콘텐츠가 되었다. 이것은 내가 본 것처럼 기술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내용과 기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기 위한 의미였기 때문에 이것은 박물관에 유용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비디오 게임은 물리 법칙을 거의 감각적으로 시각화하고 느끼는 방식을 혁신 했다. 힘과 벡터 같은 물리적 법칙을 수학 공식을 통해 기술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의 비디오 게임은 박물관에 전시될만한 맥락을 처음으로 획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젋은 미국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을 게임이 적응시키고 있다는 사회적인 맥락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그는 주목했던 것이다. 이는 이 때를 즈음하여 게임이 단순히 아케이드만을 통해 소비되지 않고, 가정용 게임기나 개인용 컴퓨터를 통해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음에 착안하여, 초기의 아케이드 게임이 가질 희소성과 보존 가치에 주목했다. 이 때부터 MoMI는 초기 아케이드 게임뿐만 아니라 랄프 베어로부터 기증받은 인류 최초의 가정용 게임 콘솔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프로토타입 버전인 ‘브라운 박스’ 등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에도 MoMI의 주요 컬렉션을 이루고 있다. 미디어 아트 옆에 놓인 게임 MoMI의 이 전시 이후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비디오 게임의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는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1998년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위치한 워커 아트 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린 “Beyond Interface” 전시나 2000년 UC 얼바인 대학에서 열린 “Shift-Ctrl”전, 2001년 뉴욕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열린 “010101: Art for our Times”, 그리고 같은 2001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Bitstreams”전이 그것이다. 이 당시 전시의 특징은 게임을 독자적으로 전시하기보다 게임과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동일선 상에 놓고 병렬적인 차원에서 이들의 유사성을 더듬어 나가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휘트니 미술관 Bitstreams에 전시된 제레미 블레이크의 미디어 아트 Station to Station (2001)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이르면 게임은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나름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당시였다.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하여 e스포츠의 가능성이 시작되었고, 3D 그래픽 카드의 출시를 통해 게임의 시각적인 표현력도 우수해지던 때였다. 물론 막 시작된 3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아직 언캐니 밸리의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기 어렵던 때였지만, 도트나 벡터 그래픽을 바탕으로 한 2D 그래픽의 표현 수준은 슈퍼패미컴이나 PC엔진과 같은 4세대 가정용 콘솔에서 절정에 이르러 하나의 스타일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부터 몇몇 작가들은 컴퓨터 그래픽과 인터랙션을 하나의 표현 도구로 삼고 이를 통해 뉴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고 있었다. 이 당시 미술관에 전시된 게임은 독자적인 전시로 구성하기는 어렵지만, 디지털 아트라는 범주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그 맥락에 묻어가면서 전시 맥락을 획득한 경우라 볼 수 있다. 도구로서의 디지털은 쉬운 복제와 편집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존 작품의 권위를 쉽게 패러디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당시에 나왔던 리디아 와초프스카의 〈브레이크 아웃〉 패러디는 기존의 비디오 게임 매커닉을 패러디하여 디지털 아트가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Lidia Wachowska, Breakout Animation Steal, 2002. 문제는 이처럼 게임이 디지털 아트와 더불어서 미술관에 점차 전시되면서 ‘예술 게임(art game)’과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games as a art form)’이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술가나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게임적 요소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예술가적 자의식을 가지고 제작한 예술 게임과 상업적 게임 중 예술성이 뛰어난 게임인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2000년대 전후를 위시하여 지속적으로 미디어 아트 포맷 형태로 미술관에 숱하게 전시되었으나,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은 상업적 속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를 제작한 개발자의 예술적 자의식이 없거나 크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에 전시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맥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란 게임이 소비되는 사회적인 맥락에 있어서 흔히 게임의 본질적인 매체 효과로 간주되는 ‘재미’를 넘어 게임이 영감(inspiration)을 줄 수 있는 미학적 자질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석파정 서울미술관,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 (2019) 2019년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렸던 “안봐도사는데지장없는전시”는 게임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 중 여러 예술적 형식으로서의 게임을 전시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호주의 게임 개발사 Mountains에서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에서 퍼블리싱한 모바일 게임 〈플로렌스(Florence)〉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전시는 게임이 우리 사회 속에 어느새 미적 감각을 전달해줄 수 있는 주요 매체로 자리매김했음을 일깨워준다. 독자적인 게임 박물관을 향하여 필자 역시 2010년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린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전시를 기획하면서 게임을 미술관에 넣어보려 노력한 적이 있다. 놀공발전소와 함께 준비했던 이 전시에서 우리는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출시된 주요 게임 콘솔과 애플 II, MSX 등 한국에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개인용 컴퓨터들을 플레이 가능한 형태로 비치했고, 그 중 예술적으로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게임들을 게임 역사 순서대로 전시한 바 있다. 물론 이 때에도 게임만으로 미술관 전시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미술관 내외의 반감이 상당하여 상당수의 전시를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아트로 채워야 했었다. 때문에 필자는 전시 시작 입구 쪽에 백남준의 〈TV 촛불〉을 초를 켠 채로 세워놓았다. 백남준의 〈TV 촛불〉은 TV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게임이든 미디어아트이든 그 뿌리는 같으며, 이를 어떻게 채울지가 더 중요하다는 선불교 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나에게는 다가왔던 것이다. 이 작품의 선정은 미디어아트 없이는 게임만의 독자적인 미술관 전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일종의 소극적 저항이었던 셈이다. * 백남준, TV 촛불 이는 현재 제주도에 위치한 넥슨 컴퓨터 박물관이 오픈 수장고를 통해 선보이고 있는 방식과 유사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게임 콜렉션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위치한 The Strong Museum이나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Computerspielmuseum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오픈 수장고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 박물관들은 모두 전시된 게임 이상의 수많은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고, The Strong Museum만 게임업계나 학계 관계자들에게 폐가식 형태로 이를 공개하고 있다. The Strong Museum 내에 위치한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History of Electronic Games는 게임 그 자체를 수집, 보존, 전시하는 것을 넘어 실제 게임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최대한 존중하여 보관하고자 하는 곳이다. * 〈페르시아의 왕자〉 디렉터인 조던 메크너의 스토리보드와 모션 캡쳐 노트 필자가 이 박물관의 센터를 방문했을 때 놀런 부슈넬, 윌 라이트, 조던 메크너, 시드 마이어 등 유명 게임 개발자들의 다양한 게임 메커닉 스케치와 아타리 2600 등과 같은 올드 게임 콘솔의 디자인 설계도 등을 열람할 수 있었으며, 이를 분류하는 체계 역시 이미 규정이 확립되어 있었다. 게임을 보존해야 할 미디어로 간주하고 이를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이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The Strong Museum의 사례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해준다. 1) Rochelle Slovin, “Hot Circuits: Reflection on the first museum retrospective of the video arcade game”, 2009. http://www.movingimagesource.us/articles/hot-circuits-20090115 Tags: 아카이빙, 박물관, 전시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

  •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 Back GDC 2023 탐방기: 기술과 트렌드의 변화로부터 일어난 흐름들 11 GG Vol. 23. 4. 10. 길었던 팬데믹의 터널이 끝나고 게임쇼에도 봄이 돌아왔다. 물론 모든 게임쇼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발표되었던 E3 2023의 취소 소식은 게임 업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보스턴에서 3월 말에 열린 PAX EAST는 GDC 2023과 비슷한 시기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B2C 부분에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필자 역시 4년 만에 GDC를 찾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20년부터 2022년 GDC에 모두 등록했었다. 다만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작년은 패스를 등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GDC 2023에서는 기존에 제공하던 온라인 중계를 막대한 비용 문제로 거의 중단하고 오프라인 중심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식 홈페이지 통계상으로는 28,000여명의 업계 관계자가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는 작년 GDC 2022의 12,000명가량과 비교하면 2배 이상을 기록한 셈이다. 이는 팬데믹 이전 2019년의 GDC 참가자 29,000명에 거의 근접한 수치이다. 실제 참가한 개발자들 얼굴에서는 Covid-19의 영향을 느끼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참가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즐겁게 서로를 대면하면서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다만 처음 패스를 받는 과정에서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추가되어 예년보다 매우 긴 패스 수령 줄이 이어졌다. * GDC 2023 기간 중 패스를 수령하기 위해 늘어선 긴 줄 팬데믹 기간과 그 이후의 GDC는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팬데믹 기간 중에 게임업계에서 일어났던 AI, Web3(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등의 기술적인 변화와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GDC는 월요일과 화요일에 열리는 특정 주제 중심의 서밋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리는 메인 컨퍼런스로 양분되어 왔다. 그간 서밋은 인디게임, 내러티브, 게임 교육, 로컬라이제이션, 시리어스 게임, 스마트폰/태블릿 게임, 과금 제도, VR/AR 등 게임 디자인과 관련한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올해 GDC 2023 서밋은 내러티브나 인디게임, 게임 교육 같은 전통적인 서밋이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지만 많은 부분들이 기술 중심 서밋으로 대체되었다. AI, Web3, F2P, 퓨처 리얼리티(구 VR/AR), 온라인 게임 테크놀로지, 툴, 비주얼 이펙트 등 수많은 기술 중심 서밋들이 작년과 올해 새롭게 생겨났고, 이는 모두 팬데믹 이후 새롭게 부상한 게임 업계의 다양한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중 AI 서밋이 가장 많은 개발자들을 불러 모았으며, 자연어처리, 행동 패턴 설계 같이 AI의 전문 영역을 넘어 게임 배급과 유통 부문까지 AI의 영향력이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비해 한국 게임 개발자들이 GDC를 많이 방문했으며, 발표 횟수도 늘었다. 이번 GDC에서 가장 적극적인 포지셔닝을 보여준 한국 게임회사는 위메이드였다. 작년에도 위메이드의 장현국 대표는 발표를 진행했으며, 올해는 아예 메인 스폰서 자격으로 Web3 서밋 키노트 스피치를 담당했다. 작년 GDC에서 장현국 대표는 위믹스 생태계에 100종 이상의 게임이 온보딩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과적으로 말해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해까지 위믹스 플레이에는 25종의 게임이 각기 다른 토큰노믹스를 가진 채로 게임을 서비스 중이다. 아직 절반의 성공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GDC 엑스포 장에는 엄청난 크기의 위메이드 부스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메인 스폰서의 화려한 위용 뒤에 느껴지는 조급함을 감출 수는 없었던 것 같다. * GDC 2023 메인 스폰서로 이름을 올린 위메이드 최근 10여 년간 거의 매해 GDC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온라인으로 컨퍼런스에 참가해 온 필자는 한국 게임 개발자가 한국 게임회사 소속으로 비즈니스 모델이나 로컬라이제이션을 제외한 게임 디자인 영역에서 GDC 발표를 진행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2018년 〈PUBG〉의 사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말 스팀에 〈PUBG〉가 출시될 당시에는 한국 게임회사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운 비즈니스 모델로 PC 게임 플랫폼에서 판매 1위를 달성했다는 것이 정말 예외적인 사례로 취급받았던 시기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러한 사례가 자주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GDC에서 한국 게임사들의 발표가 거의 예외없이 게임 비즈니스 모델로 귀결되고, 게임 디자인이나 내러티브, 창의성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히 알려진 불편한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 GDC 2015에서 〈룸(Loom)〉에 관한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을 진행하고 있는 브라이언 모리아티(Brian Moriarty) 한편으로 올해 GDC에서 느끼게 된 또 하나의 변화는 전통적인 게임 디자인 분야의 위상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게임 업계 내에서 아이디어 발상과 메커닉 개발에 치중하는 컨셉 디자인의 분야가 점점 시스템 기획이나 레벨 디자인 등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도 한몫 할 것이다. IGF 파이널리스트에 올라온 소수의 창의적인 게임 일부를 제외하면 인디게임으로 엑스포에 전시된 상당수는 익숙한 장르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약간의 변주만을 거친 경우가 많았다. 컨퍼런스에서도 게임 디자이너들이 즐겨 찾았던 포스트모템(postmortem) 강연들이 대거 축소되어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2010년대 GDC에서는 최소 4-5회 정도의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 강연이 진행되었다. 올해에는 단 하나 반다이 남코 사의 CTO인 노부히코 모모이가 진행하는 〈다마고치〉의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컨퍼런스 1주일 정도를 남겨놓고 개발자의 개인 사정으로 취소되었다. 인디 게임 포스트모템도 서밋 기간 중 보통 4-5회, 메인 컨퍼런스 기간 중에 2-3회 정도 열리는 것이 관례였으나 올해에는 거의 열리지 않거나 기술 중심 세션으로 대체되었다. 때문에 정식 클래식 게임 포스트모템은 아니었지만 〈별의 커비〉 시리즈 30주년을 맞아 해당 시리즈의 여러 측면을 회고하는 “The Many Dimensions of Kirby” 강연이 반사적인 인기를 누렸다. HAL 연구소의 쿠마자키 신야와 카미야마 타츠야가 출연한 이 강연을 보기 위해 강연장을 몇 바퀴 돌 정도의 긴 줄이 늘어섰으며, 예정 시간을 30분 넘긴 이후에야 모두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커비 캐릭터의 비정형성과 공중 부양, 몬스터를 빨아들인 후 외양과 스킬이 변화하는 전통적인 메커닉의 고안 과정이 개발 과정에서 산출된 다양한 컨셉 아트와 함께 제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는 1인 개발자 제임스 와들(James Wardle)이 출연한 “‘Wordle’: One Year Later”의 포스트모템이 인기를 끈 강연이었다. 그는 이 게임을 뉴욕타임스에 매각하여 7자리 숫자의 달러 수익을 거두었지만, 수익을 위해 게임 개발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 〈별의 커비〉 30주년을 기념한 GDC 2023 강연 이런 몇몇 예외적인 사례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 디자인 강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GDC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점점 게임 개발이 분업화되어가고,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 광고를 통한 수익화가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게임 디자인이나 메커닉의 개선을 통한 컨셉 디자인의 영역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인디 게임 개발사들 역시 이제는 대형 퍼블리셔나 VC로부터의 투자 과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인디스러운 스타일만 유지한 채 인기 장르의 게임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내러티브와 비주얼만 바꾸어 기존 게임을 모방하는 케이스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점점 자기복제가 만연화 되어가도 이를 합리화하기에만 급급한 인디 게임 분야의 돌파구를 찾아보기 위해 방문했던 올해의 GDC였지만, 미국 인디 게임 씬에서도 뾰족한 해답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인디 게임 씬은 그간 외부에서 투입되는 자본의 단맛을 보면서 외연을 키워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AA급 게임과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인디 스타일 게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졌으며, 완성도가 높은 인디 게임들은 점점 스타일리시한 AA급 정도의 게임을 지향하고 있다. 올해 IGF를 심사하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 많은 심사위원들이 거칠면서도 날것을 보여주는 저예산 인디보다는 세련된 스타일의 AA급 인디게임을 더 높은 위치로 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올해 GDC는 여느 해보다 복잡한 심정을 안고 행사장을 떠나게 되었다. 이런 필자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맛있는 클램 차우더와 샤도네이 와인 한 잔 뿐이었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

  • 비디오게임과 기이한 유령들의 세계

    < Back 비디오게임과 기이한 유령들의 세계 19 GG Vol. 24. 8. 10.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다들 이것이 꽤나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령은 수많은 비디오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시리즈의 부끄부끄부터 「F.E.A.R.」 시리즈의 알마까지, 비디오게임에는 다양한 아이코닉한 유령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다만 질문은 단순히 ‘유령 캐릭터가 있느냐’로 한정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과연 ‘유령성’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가령, 「홈 스위트 홈」의 악령 ‘벨’과 「파피 플레이 타임」의 괴물 ‘허기우기’는 구분되는가? 이들이 각기 다른 개념의 존재로 인식되는가? 두 존재는 큰 틀에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둘 모두 플레이어 캐릭터를 인식하고, 추적하며, 접촉하면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말하자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유령은 대체로 물리적 존재인 괴물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가장 오래된 유령, 「팩맨」의 네 유령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바꿔말하면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그 탄생부터 ‘접촉’을 기반으로 하는 물리적 오브젝트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질문은 크게 우회해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은 괴물과 구분될 수 있는가? 또는 비디오게임은 유령성을 가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비디오게임에서의 유령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유령과 접촉의 모순적 메커니즘 유령이란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 지점, 접촉과 접촉 불가능성의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령이란 물질적corporeal이면서도 비실체적incorporeal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벽을 투과하고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때때로 물건을 건드리고 소리를 발생시킨다. 유령이란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물성을 초월한다. 앞서 말했듯 비디오게임의 유령이란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순적 개체들이다. 이 유령들은 언제나 플레이어 캐릭터를 향해 돌진하고, 그들과의 접촉을 위해 활동한다. 그들은 엄밀히 실존한다. 카메라로 악령을 퇴치하는 「령~제로~」 시리즈의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공격당하기 전에 쓰러뜨린다’이다. 여기서 악령의 공격이란 접촉의 메커니즘을 전제한다. 플레이어는 그들이 ‘접촉해오기 전’에 촬영이라는 비실체적 공격으로 쓰러뜨려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아이러니다. 여기서 물질성을 초월하는 존재는 악령이 아니라 (물질인) 카메라다. 「F.E.A.R.」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구조는 동일하다. 플레이어는 알마가 생성해낸 유령Ghost들을 총을 쏴 제거할 수 있다. 여기서도 차라리, 거리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총이 유령보다 훨씬 초월적이다. *「제로 : 월식의 가면」 비디오게임의 메커니즘은 (히트박스로 규정되는) 충돌을 전제한다. 결국 이 내부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은 게임적 구조를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있어 그런 조건은 전적으로 ‘글리치’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벽이라는 구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유령적이라기보다는 ‘벽뚫는 버그’를 연상시키며 따라서 불공정의 감각을 초래한다. 비디오게임에서의 물질성의 초월은 그 한계지점의 돌파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위력의 일방적인 우위성에서 온다. 「화이트 데이」의 공포의 핵심은 일방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수위에게서 나타난다. 오히려 물리적 한계지점을 뛰어넘는, 구조와 무관하게 천천히 접근해오는 머리 귀신은, 그 시청각적 특성을 통해 아찔함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머리 귀신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하지 못하기에 그다지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못한다. 차라리 그들이 공포스러운 것은 접촉을 통해 수위라는 물리적 주체를 불러들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머리 귀신조차 아찔한 감각과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접촉이라는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 따라서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전적으로 현존presence한다. 있는듯 하지만 없거나 또는 없는듯 하지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 존재를 가진다는 의미다. 이를 정확히 보여주는 게임이 바로 「파스모포비아」다. 이 게임은 다양한 방법론과 조건들로 어떠한 유령이 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말하자면 이 게임의 목적은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물론 유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편 명백히 오브젝트로써 그 공간에 ‘존재한다’. 게다가 이 게임의 팬덤은 유령이 가진 감각 패턴을 밝혀냈는데, 재미있게도 그 가시범위는 물체에 의해 일정량 차단될 수 있다. 심지어는 유령의 종류에 따라 이동속도나 가속도 여부까지 부여되어 있다. [1] 이 게임에서 유령은 투명invisible하지만 비실체적incorporeal이지는 않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 유령이 초월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철저히 일방적인 실체라는 정도일 것이다. *「파스모포비아」에서 유령의 감지 범위를 설명하는 이미지 (출처: 레딧) 데리다의 유령론으로부터 한편 유스티나 야닉Justyna Janik은 2019년의 에세이 《Ghosts of the Present Past: Spectrality in the Video Game Object》에서 비디오게임의 유령에 달리 접근한다. 야닉이 끌어들이는 것은 데리다의 유령론hauntology이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존재론ontology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유령론을 도입한다. 그의 정리에 있어 유령은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존재, 과거의 존재이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주는 그리고 미래까지 예시하는 존재다. 야닉은 특히 유령의 몰시간성anachronie [2] 을 중심으로 유령론의 적용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차용한다면, 비디오게임에는 오히려 유령을 탄생시킬만큼의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야닉은 이렇게 적는다. ‘게임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는 거의 동시에 제작되는 것 같다.It seems that the game world’s past, present, and future are produced almost simultaneously(...)’ [3] 즉 「F.E.A.R.」의 악령 캐릭터 알마는 유령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거는 어디까지나 게임 외적으로 설정되어진 과거에 불과하다. 알마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뛰어들고 마주친 그 순간에 형성된 현재 시제의 존재임이 분명하다. [4] 물론 야닉은 이러한 시간 형성의 동시성을 유령론의 몰시간성과 어느정도 동일시한다. 하지만 선형적 시간의 인과개념이 없다는 것은 압축할만한 시간의 원본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알마가 몰시간성의 존재인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과거조차 없는 존재다. 이것은 비디오게임의 유령 일반에서 반복되는 성질이다. 이 유령들에게 부여된 ‘유령이 된 배경’이라는 사건들은 (야닉이 규정한) 게임 세계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오직 허구적으로 구성된 이유에 불과하다. 결국 플레이어는 과거에 대한 증언, (「바이오쇼크」 등에서 볼 수 있는) 환영, 기록, 때로는 명백히 시각적인 컷씬 등을 통해 그들이 허구적 과거로부터 온 존재임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마주치는 그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함과 동시에 발생한 현재의 존재다. 만약 플레이어가 과거를 지시하는 허구적 기록들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영 현재라는 시간에 묶일 수 밖에 없다. [5] *「룸」에 등장하는 러스티의 유령 물론 게임 세계의 과거를 통해 생성되는 유령들도 존재한다. 루카스아츠의 「룸」에서 주인공 보빈은 대장장이들의 도시 ‘포지’에 들어가기 위해 포지의 소년 러스티와 모습을 뒤바꾼다. 보빈이 포지에서 활동하던 중, 직전 이벤트에서 보빈에 의해 꼬리에 불이 붙은 검은 용이 포지의 앞에 나타난다. 용은 보빈의 모습을 한 러스티를 발견하고는 잡아먹어 버린다. 나중에 포지에서 나온 보빈은 러스티의 뼈 위에 떠오른 유령과 만난다. 그리고 이 유령은 생전과 달리 분노에 찬 표정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이 장면은 당대 기술적 한계 때문에 썩 공포스럽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행동이 가져온 하나의 비극으로써 강렬히 각인된다. 물론 러스티의 안타까운 경험은 전적으로 스크립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티의 유령은 명백히 게임 세계의 인과가 만들어낸 존재이다. 조금 더 내밀한 유령은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마주하는 병사들의 유령이다. 보스 중 하나인 ‘더 소로우’는 주인공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죽음의 환영을 보여준다. 플레이어는 더 소로우를 따라 어두운 강을 거슬러 오르며 지금까지 자신이 죽인 모든 병사들의 유령과 마주친다. 병사들은 플레이어가 그들을 살해한 방식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른 원통함의 대사를 내뱉는다. 러스티의 유령이 결코 회피 불가능한 인과가 만들어낸 유령이라 한다면, 병사들의 유령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령들은 지난한 역사의 표출물이 아니라 단기적인 감각적 대상물로써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6] 이것은 야닉이 말한대로 비디오게임의 게임 세계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이 표출하는 게임 세계의 역사란 극도로 짧기에 무언가의 기표가 되기엔 지나치게 순간적인 셈이다. 그 정도의 역사는 그저 현재라는 시간에 귀속되어 버린다. 기이한 유령들 이렇듯 비디오게임의 유령이란 (1) 물성을 가진 실체의 존재이며 (2) 과거로부터 오지 않은 현재의 존재다. 따라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란,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괴물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크 피셔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제시한 기이함과 으스스함의 개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마크 피셔는 이렇게 적는다. “나는 기이한 것The weird이란 특정한 형태의 동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포함된다. 기이한 존재 혹은 대상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7] “으스스한 것The eerie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때에 여기 어째서 무언가 있는가? 무언가 있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가?” [8] 우리의 관점에서 기이함이란 괴물의 것이며 으스스함이란 유령의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어째선지 계속 기이한 것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비디오게임의 유령들은 움직여서는 안되지만 어째선지 움직이는 「프레디의 피자가게」의 인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어딘가 잘못된 존재들이지만(「슈퍼 마리오」의 부끄부끄는 다른 적들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가진다.) 철저히 존재감을 가진다(킹 부끄부끄의 존재감은 지나치다.).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왜 기이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가? 가장 쉬운 답이라면 비디오게임이 직관적 감각의 영역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디오게임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은 쉬이 존재할 수 없다. 그곳은 설령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 하더라도 그 데이터가 공간 내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곳이다. 결코 없어야 하는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 규정을 넓혀본다면 다른 결론과 마주할 수도 있다. 진정 없어야 하는데 존재하는 것, 있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비디오게임의 본질적 속성이지 않는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세계, 만져지지 않음에도 만져지는 디지털의 물성은 그 자체로 으스스한 것에 속한다. 즉, 비디오게임이 바로 으스스한 것이다. 그리고 비디오게임의 세계가 으스스한 세계라면, 그 내부에서 따로 으스스한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비디오게임의 내부에서는 모두가 유령이다. 그곳에서 따로 유령적인 것이 존재하는 지 묻는 것 자체가 곤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다가 사망했을 때, 혹은 「어몽어스」를 하다가 빠르게 처형당했을 때, 즉시 유령의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는다. 이 전환이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신묘한 영적 세계의 탐구 같은 것은 없다. 전의 존재와 후의 존재 사이에서 어떠한 상태의 전환이 발생한 것일 뿐이라면, 사망하기 전에도 유령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애초에 비디오게임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영적 세계다. 우리가 컨트롤러를 조작하지 않는다면, 그 껍데기(=플레이어 캐릭터)는 마치 영혼없는 골렘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플레이어 주체가 그들의 육체에 들어가는 영적 존재나 다름 없다. 적의 육체에 빙의해 싸우는 아케이드 게임 「판타즘」이나 다양한 물체에 빙의해 퍼즐을 풀어가는 「고스트 트릭」은 어떤 면에서 메타적 비디오게임처럼도 보인다. *「고스트 트릭」 결국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영적인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존재하는 오브젝트로 가득 차 있다. 활기찬 NPC들로 가득찬 오픈월드 게임의 도시를 보는 것은 허크 하비의 「영혼의 카니발」을 관람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유령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 곳에는 인간 육체를 통해 만들어진 유령은 없으며,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령이다. 여기서 특별히 더 유령으로 규정될 존재는 없다. 차라리 이곳, 비디오게임의 세계를 유령과 괴물의 세계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순간이동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단어 anachronie의 번역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역자인 진태원의 번역을 따른다. [3] Justyna Janik, 《Ghosts of the Present Past: Spectrality in the Video Game Object》,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Games, 2019, p9 [4] 야닉은 이 개념의 설명을 위해 게임의 세계를 두 개의 층위로 나눈다. 하나는 게임의 서사 부분을 결정하는 허구적 세계fictional world이며 또 하나는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접촉하는 게임 세계game world이다. ‘첫 번째 층위는 게임으로 표현되는 캐릭터, 사물, 장소, 사건의 디제이시스적 영역인 허구의 세계다. 두 번째 층위인 게임 세계는 비디오 게임 오브젝트의 물성에서 비롯된다.The first layer I will consider is the fictional world – the diegetic domain of characters, objects, places and events that is represented by the game. The second layer, the game world, emerges from the materiality of the video game object.’ (같은 책, p2) [5] 야닉은 허구적 세계와 게임 세계라는 두 층위의 긴장이 데리다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시간의 개념 뿐만 아니라 허구적 세계에서 의미론적인 효과가, 게임 세계에서 디지털 물성의 효과가 나타나 중간자적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닉이 서술하는 효과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허구적 세계의 층위가 긴장을 형성할 만큼 충분히 도드라지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디지털 물성을 감각하면서 의미론적 층위와 마주하지 못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며, 그 경우 과거는 없는 것과도 같다. [6] 「룸」에서 보빈은 러스티를 되살린다. 러스티의 유령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7]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픽, 2019, p20 [8] 같은 책, p15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평론가) 이선인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 ​

  • 북한 게임 리버스-엔지니어링하기: 지적 재산권, 소액결제, 그리고 검열을 중심으로

    < Back 북한 게임 리버스-엔지니어링하기: 지적 재산권, 소액결제, 그리고 검열을 중심으로 06 GG Vol. 22. 6. 10. ***편집자 주: 유사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북한은 아주 머나먼 곳이며, 특히 디지털게임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평양의 유일한 스팀 IP를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북한의 디지털게임에 대해 궁금해해야 합니다. 이 글은 게임연구 전문 저널인 gamestudies.org에 익명으로 게재된 북한의 게임에 관한 논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으며, gamestudies 관리자를 통해 원저자로부터 한글번역 허가를 구하여 게임제너레이션에 게재하였습니다. 참고문헌 등은 원문 사이트에서 보다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원문보기 링크: http://gamestudies.org/2201/articles/anonymous 초록: 이 글은 북한 게임 산업의 역사 및 그 불법복제 의존성에 대해 살펴본다. 오늘날 북한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비디오게임은 해외의 유명 게임을 개조한 것으로, 여기서는 리버스-엔지니어링 방법론을 통해 북한의 개조판 게임에 대한 분석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그와 같은 개조의 목적이 소액결제 같은 시스템을 북한의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들여오는 것, 그리고 콘텐츠의 민감한 요소들을 검열해서 민족주의적으로 또는 사회주의적으로 수정하는 것에 있음을 밝힐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불법복제 게임은 민족주의적이고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소비 진작과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들어가는 말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아케이드용 해적선 전투 게임기 앞에 놓인 전투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장치의 밑바닥에는 'No Step!'이라는 영어로 쓰여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다른 아케이드 게임기들도 살펴본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노동자들을 향해 'Do not step'과 'Caution' 등 게임기에 영어로 쓰여있는 지시문을 우리말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Han, 2020, p. 1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게임 산업보다는 자급자족식 민족주의와 주체사상 이데올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난 십여 년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휴대용 디지털 기기 보급이 증가하고(Yoon, 2020) 여가활동에 대한 공적인 지원이 더해지면서(Evans, 2018), 북한 도시 중상류층의 일상적인 여가로서 게임이 떠오르고 있다. 교육용 소프트웨어와 더불어 게임은 현재 북한 IT 유통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 . 완전히 국산으로 만들어진 게임도 몇몇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필자가 "현지화 수입(localized imports)"이라 부르는 방식 - 해외의 게임을 국가 승인 개발사가 북한의 디지털 환경에 적합하도록 다양한 수준에서 번역하고 개조하는 방식 - 을 거쳐 공급되고 있다. 이러한 개조는 엄밀히 말해 북한이 최근에 정립한 저작권법 위반이자 그 자신도 가입 되어있는 국제 저작권 협약 위반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는데, 저작권법은 반-제국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종종 불법복제가 장려되곤 하는 개발도상국에서 느슨하게 적용되어왔기 때문이다(Wang, 2003). 북한에서도 이와 같은 합리화 - 게임 내 외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검열해서 제거해야 할 필요성에서부터 지적재산권의 불공정성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에 이르는 - 가 확인되는 한편, 이와 같은 합리화는 저작권 보호를 위해 게임의 불법복제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굉장히 엄격한 기술 및 법 체계와 공존하고 있다. 북한 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소프트웨어는 국가의 "중앙 소프트웨어산업 지도 기관(Central Guidance Organ of Software Industry)"에 등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디지털 기기는 중앙기관에서 암호화 방식으로 승인을 받지 않은 경우 애플리케이션의 실행이 OS차원에서 금지 되어있다. 반면 저작권법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예상하기 힘든 모습을 보여주는데 2) , 즉 플레이어를 자본주의적 소비자로 "호명"해서 디지털 아이템에 돈을 쓰게 만드는 인-게임 결제 전략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북한의 게임산업에 대한 분석을 통해 기술적 인공물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적응성과 탄력성에 대한 연구를 제공할 것이다. 게임은, 여타의 기술적 인공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발현되는 맥락(Bijker, Hughes & Pinch, 1987)이나 수입되는 맥락(Choi, 2017)이 이데올로기적이고 경제적인 사회적 구성물이다. 그런데 만약 게임이 수입된 이데올로기적 환경이 그것이 원래 생산되었던 곳과 다르다면, 심지어 적대적이라면 어떻게 될까? 북한에서 게임은 리버스-엔지니어링(게임의 속성들을 이해하거나 변경, 또는 비활성화하기 위해 프로그램의 컴파일 바이너리를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그것이 원래 기원한 국가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의 도구가 된다. 다른 문화적 수입품들과 마찬가지로, 게임은 북한에서 문화적 침투를 통해 (특히 미국) 제국주의에 복종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Ra, 2005, Kim, 2009). 해외 기업의 국내 시장 침투나 북한 수입업자들의 로열티 지불 또한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아왔다(Hwang, 2017). 북한식 불법 복제는 외래 문화 요소를 제거하고, 자국의 프로파간다를 주입하고, 개조된 소프트웨어에 대해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그와 같은 제국주의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현지화 된 북한 버전일지라도 원본 게임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은 부분적으로 여전히 발견된다. 게임 내 소액결제 시스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소비가 지속적으로 유발되는 패턴은 북한의 사회적 기반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북한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 여러 거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게임을 비롯한 여러 문화 상품에 대한 이용권한(license) 시스템을 수용하여(Stallman, 1997)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전송되는 콘텐츠에 대한 감시와 통제에 활용하고 있다. 해적 행위(Piracy), 게임의 역사 그리고 리버스 엔지니어링 게임에 있어 해적 행위는 단순히 파일을 무허가로 복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보호장치를 "크래킹cracking"하는 것, 크로스-플랫폼 호환을 위한 에뮬레이션 제작, 속성을 바꾸거나 추가하여 게임을 "모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주의 행위자, 실천,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아우른다. 이와 같은 해적 행위는 상업용 비디오게임의 발전과 병행되어 왔으며, 업계(International Intellectuall Property Alliance, 2021)와 게임학 연구자들(Postigo, 2003; Kretzschmar & Stanfill, 2019)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아왔다. 게임 해적 행위에 대한 초기 연구들은 해적 행위자의 자유주의적인 혹은 반체제적인 에토스를 강조했다(McCandless, 1997; Tetzlaff, 2000; Goldman, 2005; Coleman, S., & Dyer-Witheford, 2007). "디지털 졸리 로저(역주: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로 해적 행위자들을 상징한다)들의 조용한 전복 행위"(Kline et al., 2003, p. 217)를 글로벌 자본주의나 초국가적 거대기업 또는 저작권을 통한 지적 공유재산의 불공정한 점유 등에 대해 저항하는 반체제적인 또는 반식민주의적 입장으로서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지하 네트워크와 불법적인 경제를 지나치게 낭만화(Nicoll, 2019)하고, 북미와 서구의 중산층 출신 남성 해적들이라는 특정한 소수 집단의 자기-특성화를 무비판적으로 반복해왔다는 비판(Wasiak, 2012)을 받았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 후반 체코슬로바키아(Švelch, 2018)와 폴란드(Wasiak, 2014)에서 저작권은 생소한 개념이었고, 그에 따라 그에 대한 이해도, 법적인 집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부 유럽의 공산당이 초기 비디오게임 시장에 대한 검열이나 규제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서 해적 행위는 그에 대항하는 기업이나 정부의 검열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남한(Nicoll, 2019; Jo, 2020)이나 홍콩(Ng, 2019), 또는 1990년대 중국(Liao, 2016)에서 그랬듯, 제한 없는 소프트웨어 복제행위는 은밀한 행위였다기 보다는, 정부의 간섭이 윤리적 차원에서 그치고 국제적인 저작권 협약이 강제되지 않는 일종의 (일상적) 규범에 가까운 행위였던 것이다. 학술 영역에 있어 이와 같은 변화는 해적 행위에 대한 연구를 기존에 한정되고 양극화된 것 - 범죄 행위 또는 반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인 저항으로 보는 - 으로부터 벗어나 이용자 중심적으로 게임의 역사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도록 이끌었다. 야로슬로프 스벨치(Švelch, 2018, p. 152)는 "국제적인 유통 인프라가 구축되기 전의 1980년대 그리고 이후 디지털 유통이 자리잡은 이후에도 주변부는 중심보다 거대했으며, 소형 컴퓨터들의 상당수는 해적판 게임의 실행에 활용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해적 행위의 일상성을 인정하는 것은 게임의 역사가 몇몇 소수의 거대 기업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게이머 커뮤니티와 공유의 네트워크, 창의적인 개조자들(modders), 그리고 모험적인 거래자들의 역사이기도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O'Donnell, 2013). 그 활용과 이용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전세계 게이머들이 외래의 테크놀로지와 콘텐츠를 전유하고 자국용으로 순화하는(domesticate) 방식을 강조함으로써 "주변부"를 실험과 혁신이 벌어지는 독특한 다수의 장소들로서 재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유(appropriation)에 대한 분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면서 현지화와 혼종화의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 게임의 현지화를 다뤘던 콘살보의 작업(Consalvo, 2016)은 일본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본 게임에 대한 언어·문화적 각색을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지만, 그 초점이 선진 시장 경제를 가진 국가들에 한정되어 있어 일본 게임이 문제가 되거나 금지되어 있는 국가에서 일본 게임에 깔린 정치적 담론과 전제가 어떻게 현지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1980년대 폴란드의 해커들이 사회주의적인 것보다 "서구적인" 것들을 선호했음을 기술했던 바시악(Wasiak, 2014)도 사회주의 경제 내 새롭게 부상했던 소비주체들에 대해 서구 유럽이 끼친 문화적 영향력이나 상업적인 행위의 확산이 지닌 함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 시장 내 해적판 일본 게임의 확산을 다뤘던 랴오(Liao, 2016)는 중국 정부의 "테크노-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기술하면서도 아시아권 내 일본 제국주의 문제나 중국에 시장의 논리가 유입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해적 행위를 통한 현지화의 그와 같은 과정이 기술적인(technological) 만큼이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적 행위를 저항 행위로 퉁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해적판 테크놀로지가 특정한 이데올로기 프레임 내에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항해서 작동하는 방식들을 다룬 최근의 연구들과 궤를 함께 한다. 예를 들어 남한의 게임 해적 행위가 "신식민주의" 내에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항해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다룬 니콜(Nicoll, 2019)의 작업 3) 이나 해적판 영화시장에 대한 분석(Lobato, 2012, pp. 74-74) - 해적 행위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인 동시에 "자유 기업 체제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읽힐 수 있다는 - 이 있다. 나는 북한 게임 산업의 해적 행위가 글로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많은 측면들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국가 검열을 통해 자본주의적 상징들을 제거하고 문화 보존이라는 명목 하에 외래적인 콘텐츠를 국내식으로 수정한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해적판) 게임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지적 재산 모델이 도입되고, 그 플레이어들을 소비주의적으로 충동질하며,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자 감시에 활용하는 것을 도모하고 있다. 북한 내에서 게임 해적 행위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 및 현대 미국 중심의 신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강력하게 진화된 민족주의로 나타나고 있다(Shin, 2006). 한편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개념 그 자체는 지속적으로 북한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제국주의적 독점"의 "차별적인 특성"의 사례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Hwang, 2017, p 62). 저작권 무시가 해외 자본에 대한 저항 행위가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모딩(modding)을 통한 복제 게임의 재전유는 종종 강렬한 민족주의적인 담론으로 가득 차 있는데, 때에 따라 반-일본 또는 반-미국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렇게 수복된 게임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무기로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인 입지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오래된 식민주의 관계를 극복하려는 탈식민국의 공식적인 노력은 종종 바로 그 관계를 다른 모습으로 재생산하고 고착화하는 것을 가장(disguise)하는데 그치곤 한다(Mbembe, 2011, p. 45). 마찬가지로, 탈식민화와 반-제국주의의 어휘들은 대중의 해방과 자주보다는, 권위주의 체제와 글로벌 기업들, 그리고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기업가들"의 경제·정치적 지배를 위해 활용되고 있다(Comaroff & Comaroff, 2009). 북한의 해적판 게임 산업은 글로벌 시장 논리에 대항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자국의 경제가 자본주의적으로 시장화되는 것을 고양시키고 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내부적인 종속을 도모한다. 이 글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집해 온 북한에서 판매 중인 불법복제 모바일 게임에 대해 맥락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와 같은 현상을 탐구한다. 게임의 외부적인 특성에 대한 관찰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기에, 필요한 경우 소스코드의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는 리버스-엔지니어링 방법론을 활용했다. 게임 역사에서 해적 행위가 주요 연구 주제였다면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해 어떤 방식의 해적 행위가 게임에 대해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주요 분석 방법이었을 것이지만, 아직까지 리버스-엔지니어링이 해적판 게임 연구, 나아가 보다 일반적인 게임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활용된 적은 없다 4) .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처럼, 이 방법론은 해적 행위에 의해 게임의 바이너리에 가해진 수정과 개조에 대한 명확한 맵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컴퓨터 코드상에서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북한의 게임 역사와 현재의 게임 생태계 북한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전자 및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다룬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였다. 북한이 최초로 생산한 디지털 컴퓨터는 1961년 국립과학원(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서 소련제 디자인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었다(Hŏ, 1961). 냉전 시기에는 불가리아나 폴란드, 루마니아 등 사회주의 국가와 일본, 프랑스, 서독 등 자본주의 국가 양쪽 모두로부터 컴퓨터를 수입했다(Berthelier, 2019). 하지만 이 컴퓨터들의 용도는 경제 계획의 수립이나 과학적 연구, 또는 산업적인 활용 등에 한정되었다(Orlowski, 1985). 당시 컴퓨터에 대한 접근은 매우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따라서 유희적 활용을 위한 여지는 거의 없었다. 북한에 최초로 소개된 게임은 범용 컴퓨터가 아니라 게임에 특화된 아케이드 장치에서 실행되는 게임이었다. 1980년 평양 호텔의 로비에 타이토의 아케이드용 〈스페이스 인베이더〉 게임기가 설치됐는데, 이는 2년 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평양 호텔처럼 이 게임도 외국방문객들만 접할 수 있었으며, 플레이하려면 100엔 동전을 투입해야 했다. 이후 남은 80년대 동안 다른 게임기는 수입되지 않았다. 1990년에 들어오면서 바뀌는 당의 정책 그리고 일본 아케이드 게임산업의 발전상은 북한의 첫 오락실 개장으로 이어진다. 그 전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은 10여년 간 이어져온 생산성 하락 극복을 위해 북한 경제를 "계산기화(computerize)"할 것을 주문했는데(Kim, 1995; Kim, 1990), 그에 따라 1987년 3차 7개년 계획 때부터 북한 산업의 디지털화 계획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디지털 지식층의 육성은 과학 교육을 강조하면서 어린 세대가 컴퓨터와 친숙해져야 함을 의미했다. 따라서 김일성이 1991년 북한 최초의 오락실 개장 - 평양 만경대 지역에 700평방미터 공간에 100여대의 오락기를 갖춘 - 을 지원했던 것은 "세계의 최신 과학 트렌드에 맞춰 능숙하게 현 시대의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다룰 줄 아는 자립적이고 다재다능한 젊은 혁명 인재의 양성"(Chosŏn Ilbo, 1991)이라는 목표에서 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이 새롭게 품기 시작한 디지털을 향한 야망이 북한에 게임이 도입된 유일한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락실의 게임기들 - 그 중 일부는 오늘날 평양에서도 여전히 작동 중이다 - 은 〈웨스턴건(Western Gun, Taito, 1975)〉이나 〈서브마린(Submarine, Bandai, 1978)〉 등의 1세대 게임으로, 이는 재일 한국인들로 구성된 "애국적 무역상(Patriotic traders)"이 보낸 것이었다(North Korean Central Communication Agency, 1992, p. 205). 1980년대 중반 하드웨어의 성능이 향상되고 신작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일본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기 시작한 게임기들이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재일 한국인 내 조직 - ‘청년’ - 을 통해 평양에 도입되었던 것이다(Ryang, 2016). 1990년대엔 더 많은 아케이드 게임기들이 평양의 놀이공원이나 상점, 식당 등에 도입됐는데(Kyunghyang Sinmun, 1992), 게임기 외부에 적힌 제목이나 기호들은 종종 한글로 번역되어 표기됐지만, 게임 화면에서는 원래 언어가 그대로 사용됐다. 한편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게임을 개조하거나 만드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의 주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는 조선콤퓨터센터와 평양정보센터를 들 수 있는데, 두 기업 모두 경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산업 구축 및 산업적 활용을 위해 1990년에 세워졌다. 주요 업무로는 레이더 신호 처리 시스템, 오피스 작업, CAD 소프트웨어, 전문가 시스템, 처리 자동화 등이 있다(Department of Defense, 1996; 1995). 이러한 전략적 영역들 가운데 딱히 게임 개발 작업을 수행한 분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인공지능(AI)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알렌 뉴웰이 언급했던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언제나 인공지능 분야에서 선호되는 영역"이었는데(Newell, Shaw & Simon, 1963, p. 37), 조선콤퓨터센터의 엔지니어들은 실제로 1990년대 후반 자신들의 인공지능 연구를 바탕으로 바둑 기반의 〈은별바둑(1997)〉과 한국 전통의 체스 게임(역주: 장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반의 〈평양체스(1997)〉라는 게임 두 편을 제작했다. 이 두 게임은 여러 국제 게임 AI 컨퍼런스에서 수상했으며 남한과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상업화되어 오늘날까지 판매 중에 있다 5) (Nam, 2002). * 평양정보센터가 2005년 상용화한 〈소년 장군〉 게임. 이어지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해외의 소비자를 겨냥한 게임을 개발했는데, 이는 북한의 여타 소프트웨어 산업 전략과 맞춘 것이었다. 컴퓨터가 많지 않은데다 내수 소비는 더 기대하기 어려운 북한의 상황에서 수출 시장은 외화 획득의 기회와 함께 좀 더 많은 수익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에 합작투자 연결망을 연 조선콤퓨터센터는 2002년 자사의 온라인 바둑 게임(〈My Baduk〉)을 상용화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남한의 사업가와 파트너십을 맺고 온라인 카지노(DK Lotto, DK Casino & Jupae)를 구축했다 6) . 포커와 슬롯머신, 블랙잭, 복권 등을 제공하는 이 카지노는 2005년 남한에서 도박 방지 입법화 관련 이슈가 불거지기 전까지 남한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Choe, 2004). 같은 해 평양정보센터는 싱가폴에 위치한 지사를 통해 〈소년 장군〉을 출시했는데([그림1]참조), 이 게임은 전세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모바일용 영어 게임으로, 원작은 일본과 중국의 침략자들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고려 시대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유명 만화/애니메이션 시리즈다. 2008년에 이르러 북한은 독일과 합작으로 만든 기업 노소텍(Nosotek)을 통해 플래시 및 모바일 게임을 외주 개발하기 시작한다(Williams, 2010; Campbell & Lim, 2010). 상업용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임들에는 북한의 문화 상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러나 2013년부터 북한의 지원을 받는 웹 포털 〈우리민족끼리〉에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플래시 게임([그림2])이 올라오면서 북한 이데올로기의 게임화(gamification)가 시작된다. 브라우저에서 플레이 가능한 이 시리즈는 조지 W.부시와 아베 신조를 파리로 등장시킨 일종의 두더지 잡기 게임과 남한의 보수적인 이명박 대통령을 패러디한 "이명쥐" 대통령에게 펀치를 날리는 게임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한글로만 만들어진 이 게임들이 겨냥한 것은, 웹에 접속할 기회가 거의 없는 북한의 주민들이라기 보다는, 남한의 주민들 그리고 세계에 퍼져있는 한국 이주민이라 할 수 있다. * 우리민족끼리 포털에 출시된 정치적 플래시게임들. 2010년대 들어와 북한의 휴대폰 이용자 수가 크게 증가한 가운데, 2013년부터 5.11 공장에서 중국 모델을 기반으로 한 내수용 안드로이드 휴대폰을 생산하기 시작한다(Political Reporting Team, 2013). 이러한 휴대폰은 개인용 PC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그에 따라 게임용 플랫폼으로서 휴대폰이 빠르게 부상한다. 모바일 게임이 대중화되고 많은 인기를 모으면서 이제는 공공연하게 게임 중독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방송이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Zwirko, 2021). 그러나 북한의 휴대폰들이 세계 여타의 폰들과 동일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북한의 모바일 게임은 인프라 구조의 한계 그리고 국가의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통제에 맞춰 독특한 생태계를 구축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DVD나 MP3 플레이어 같은 장치들이 보급되고 모든 유형의 미디어(해외의 콘텐츠 포함)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복제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북한 당국은 문화적 -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 생산에 대한 독점을 유지하면서 북한 주민들이 소비할 콘텐츠를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전통적인 감시와 통제 방식이 빠르게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보다 기술적인 솔루션을 도입하는데, 현재 북한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디지털 장치 내 OS에는 암호화 서명 기반의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어 비승인 프로그램의 설치와 장치 간 미디어 파일 공유가 금지되어 있다(Schiess, 2018). 즉 북한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 설치되는 게임은 검열을 통과한 뒤 국가 기관의 암호화 서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통제에 더해, 게임의 유통 또한 휴대폰 이용자들의 제한된 연결성에 맞춰져 있다. 북한에서 휴대폰 이용자들의 인터넷 접속은 드물지만 WiFi나 셀룰러 데이터를 통한 인트라넷 접속은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인트라넷을 사용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데이터 비용 등은 평균적인 소비자 입장에서 여전히 비싸며, 공공 WiFi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온라인 앱 스토어 같은 일반적인 유통 경로는 솔루션이 될 수 없다. 일부 특정한 앱의 경우 인트라넷 연결을 통해 라이센스나 인-게임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앱들은 우선 오프라인에서 설치되어야 하며, 일단 실행되면 그 이용자는 지불 기록 증명과 이용권한 파일만 처리되는 구매 과정 - 따라서 앱 전체를 다운로드 받는 비용을 피하는 - 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 - 국가적 통제와 연결성 - 에 대한 솔루션이 제공되는 곳은 "정보기술 교류실" 또는 "정보기술 봉사"라는 이름이 붙은 물리적 상점이다. 국가로부터 승인받은 앱의 유통 및 설치에 대한 허가를 받아 운영하면서 휴대폰이나 컴퓨터 수리 같은 서비스도 제공하는 이 상점들이 바로 북한의 주요 게임 제공업자다. 상점 벽에는 신작 포스터가 붙어있으며 소비자들은 카탈로그를 통해 여러 게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상점들은 평양 내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며, 그보다 드물긴 하지만 지방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 평양의 정보기술교류실(2018). 리버스-엔지니어링 된 게임을 리버스-엔지니어링하기: 방법론 북한의 상점에서 볼 수 있는 게임들은 전세계 여느 온라인 샵들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판매되고 있는 게임 대다수는 〈팜빌(Farmville)〉, 〈캔디크러쉬(Candy Crush)〉, 〈앵그리버드(Angry Birds)〉 같은 해외 게임들과 매우 유사한데, 그 이유는 그 게임들이 실제로 해외의 게임들이기 때문이다. 즉 북한측이 마치 북한산 게임인 것처럼 보이도록 해외의 게임들을 번역 및 개조하고 리패키징한 것이다. 예를 들어 〈피버 포 스피드(Fever for Speed, Agame, 2017)〉의 개조판 홍보 포스터를 보면, 제목이 〈만리차경주〉로 바뀌어 있고 7) 평양 컴퓨터스튜디오의 신제품인 것으로 홍보되고 있다. 또한 붉은색 공산당 스카프를 맨 어린이 캐릭터가 관객을 바라보는 모습의 배경에는 "우리의 힘, 우리의 기술, 우리의 자원"이라는 북한의 유명한 국가 슬로건이 적혀 있다. 오리지널 국산 게임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대부분은 교육용 게임이나 전통적인 아날로그 게임들(체스나 바둑, 체커 등)의 전자식 버전에 한정되어 있다. * 평양의 한 IT 상점에 걸려있는 〈피버 포 스피드 3D〉의 현지화된 개조판 게임 홍보 포스터. 지금부터는 이데올로기와 게임, 검열 간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평양에서 구매할 수 있는 현지화된 수입 게임 7편을 살펴볼 것이다. 북한이 접근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 그래서 현지 작업이나 데이터 수집을 더욱 어려운 - 국가이긴 하지만, 그 유명세는 상당히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다. 앙드레 슈미트(Schmid, 2021)가 "북한 연구는 결국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듯이, 남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유럽에는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아카이브와 자료들이 존재한다(상당 부분 디지털화 되어 온라인상에서 무료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북한에서의 현장조사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예를 들어 이 연구에 사용된 게임들은 여행 비자를 지닌 외국인들이라면 북한 내 어느 도시에서나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드웨어 구입은 좀 더 제한적이긴 하지만, 게임과 소프트웨어는 안드로이드 버전이 돌아가는 기기라면 어느 가게에서나 설치할 수 있다. 진짜로 어려운 일은 실제로 게임이 제작되는 과정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다. 정보가 대단히 부족하고, 게임 개발사 방문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개발사들이 자사의 게임 상당수가 해외에서 유래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 같은 도시에서 게임의 소비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자주 접할 수 있기에) 어렵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본 게임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시장 진입 전에 모든 게임들은 수정/개조 작업을 거치게 되어 있다. 게임의 원본과 북한의 개조 버전을 비교함으로써 어떤 요소들이 검열되는지, 어떤 개발사들이 지워지고 수정되고 또는 강조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이 글에서는 보다 알아채기 쉬운 외양상의 변화들부터 시작해서 게임 내 소스코드에 보다 깊숙이 내재된 수정/변화상을 살펴볼 것이다. 원본과 현지화 버전을 나란히 실행시키면서 화면상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을 확인하면, 게임 에셋이나 번역 또는 게임의 흐름 상의 변화들을 표면적으로 비교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나름의 가치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음에도, 이 방법은 두 게임 간 차이를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개조 버전의 어떤 속성이 (연구자가) 재현할 수 없는 특정한 조건 - 예컨대 북한의 인트라넷에 연결되어야 한다든가 - 에서만 활성화된다면, 그러한 부분은 간과되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림5]는 광흥 스튜디오가 만든 게임의 디컴파일 자바소스 코드의 조각들인데, 이는 게임의 이용권한 및 인-게임 아이템의 온라인 구매에 관한 것이자 통합권한관리 라이브러리다. 그러나 (북한의) 게임들은 그러한 속성의 일부만 사용하거나 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즉 코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게임의 권한체크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북한의 게임들은 결제를 위해 인트라넷과 QR코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에 더해 우리는 권한관리 라이브러리가 원본 게임 위에 덧입혀진 북한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코딩 스타일 상의 차이나 패키지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소프트웨어 프로텍션과 결제 모듈 같은 것들이 일반적임(새 게임을 쉽게 추가할 수 있도록 재사용 라이브러리가 생성되므로)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 활용된 이용권 프로텍션의 수준이나 강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게임 내 모든 단어가 한글로 굉장히 주의 깊게 번역된 것과는 달리, 변수나 함수, 클라이언트 서버 메시지 등의 이름을 짓는 데는 영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 이용권한 라이브러리의 코드 조각들. 이 앱은 해당 사이트 이용자의 남은 "포인트"를 확인하고 게임이나 인-게임 아이템 구매를 위해 http를 경유하여 인트라넷에 연결해준다. 따라서 스크린상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어떤 개조가 있었는지, 그 내부의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워크스루 방법론"(Light, Burgess & Duguay, 2016) 같은 기존의 분석 방법론은 바로 그와 같은 한계를 지닌다. 코드 기반 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물(relic)들 - 미사용된 속성이나 기능 또는 애셋들, 개발자 코멘트 등 - 뿐만 아니라 "후드 아래(under the hood)"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호하게 남겨둔 채 "앱의 스크린이나 속성 그리고 활동의 흐름"만을 기록하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저 인터페이스를 중심으로 앱을 분석함으로써 분석자가 놓칠 수 있는 사항들 - 예컨대 특정 속성을 활성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맞지 않았던 것인지 여부 같은 - 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비디오게임이라는 기술적 인공물의 "블랙박스"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소스 코드와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 게임 개발사들이 원본 게임의 원 바이너리를 활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디지털 포렌식 및 리버스-엔지니어링 기술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게임은 컴파일된 실행파일로서 유통되는데, 다시 말해 원본의 소스 코드가 기계어로 번역되어 데이터 파일이 포함된 애플리케이션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계어는 비트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 관찰자가 해석하기 어려운데, 이를 보다 인간 친화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로 원본의 소스 코드를 바꾸어주는 툴이 여럿 있다. 디컴파일러는 원본 개발자가 썼던 본래의 코드에 가깝게 실행 파일들을 추출하는 것을 가능케 해 준다. 하지만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가 쉽게 디컴파일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보다 낮은 수준의 어셈블리 언어로 기계어를 좀 더 쉽게 해독해주는 역어셈블러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북한에서도 게임 제작은 자바 프로그래밍언어로 코딩된 안드로이드 응용프로그램 패키지(APK), 유니티 게임 엔진으로 개발된 게임을 위한 라이브러리, 원래 C나 C++로 쓰여진 네이티브 코드 라이브러리 등 여느 모바일 게임들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Shim et al. 2018). 각 게임에 대한 분석을 위해 우선 압축 유틸리티를 사용해서 각 게임의 실행 파일, 라이브러리 파일, 에셋 파일을 애플리케이션 패키지로부터 추출했다. .obb나 .assetbundle 등 다른 파일 포맷으로 저장된 에셋인 경우 DevX의 유니티 언패커 툴을 사용했다. 그러고 나서 에셋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원본과 현지화된 게임을 종합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다. 어떤 경우 애플리케이션 내 제거되거나 교체된 에셋 파일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럴 땐 Java와 C# 코드용 디컴파일러를 써서(각각 Jad-X와 ndSPY) 코드에 접근했다. 디컴파일이 불가한 네이티브 코드 라이브러리는 NSA가 개발한 리버스-엔지니어링 툴인 기드라(Ghidra)를 사용해서 역어셈블 작업을 수행했다. 이 연구에서 수행한 분석 방법은 실제로 실행하지 않고도 애플리케이션을 제어하고 데이터 플로우를 재구축할 수 있는 정적 분석(static analysis)인데, 이는 특정한 실행 환경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프로그램의 모든 기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한 분석방법이다. 애플리케이션의 엔트리 포인트를 추적하고 나서는 "후드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게임이 로딩되면서 코드 상의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코드의 로직을 따랐다. 기술적으로 원본과 현지화 버전 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을 부분적으로 자동화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상당한 차이 및 작은 코드 뭉치들의 구조적인 변경으로 인해 기존의 솔루션에 의존하거나 새로운 실용적 솔루션을 개발해야 했다. 또한 사용자 인증 모듈 같이 관심이 있는 특정 속성들을 설치하고 디컴파일 및 역어셈블된 코드로부터 그 로직을 재구축하였다 8) . 정적 분석을 통해 비활성화되거나 활성화가 요구되는 흥미로운 속성들이 발견되었을 때는 일시적으로 그 실행파일들을 수정하여 최종 이용자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확인하였다. 연구 결과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이 5개 카테고리로 구분했다: "재전유" 카테고리에서는 용어 그대로 법적 소유권 및 저작권 표기가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살펴본 결과이고, "현지화"와 "이데올로기적 각색" 카테고리는 모두 게임의 외양을 해독하고 원본과 현지 버전의 애셋을 비교한 결과인데, 두 카테고리가 가끔 교차되는 지점이 없진 않지만, "현지화" 카테고리는 좀 더 문화적 번역에, "이데올로기적 각색"은 게임 내에 변형(transformation)되거나 추가 혹은 제거된 이데올로기적 콘텐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액결제"와 "게임 이용권한 및 프로텍션 모듈"은 대부분 디컴파일된 코드에 대한 해석으로, 이는 게임 바이너리에 새로운 결제 방식이 삽입된 방식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재전유: 북한 게임을 실행할 때 가장 먼저 화면에 뜨는 것은 북한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법에 따른 저작권 보호 메시지와 게임에 대한 크레딧을 소유한 개발사의 이름이다. 유저 인터페이스 상의 원본 게임 개발사나 퍼블리셔를 지칭하는 모든 언급은 전부 지워져 있지만, 바이너리상에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요소들이 남아있어 원래 타이틀을 확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원본 게임 개발사에 문의해보니 자사의 게임이 북한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업체는 하나도 없었다. 현지화: 북한에서는 유럽, 미국, 러시아, 호주, 남한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게임들이 출신이 모호한 상태로 유통되고 있다(중국산 게임 또한 있을 수 있겠지만 이번 연구에선 확인되지 않았다). 영어만 사용한 게임은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글 제공 게임일지라도 남한식 철자법과 표현, 폰트를 사용한 경우 번역을 거쳤다. 남한의 언어는 영어에서 차용한 단어가 많아 북한 이용자들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텍스트 말고도 과도하게 외래적이라 여겨지는 것들도 바뀌었다. 예를 들어 페더웨이트 게임즈(Featherweight Games)의 〈로데오 스탬피드(Rodeo Stampede, 2016)〉는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구정 등의 시즌에 맞춘 음악뿐 아니라 서부 아프리카와 라틴, 네팔 등지의 분위기가 섞인" 사운드 트랙을 제공하는데, 현지화 버전인 〈날으는 동물원(Pyongyang Morning Star Technical Development Center, 2018)〉에서는(역주: 원문에서는 〈Flying Zoo〉로 나와있으며 실제 북한에서 사용하는 한글 제목은 확인불가) 북한의 유명한 연주곡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수정은 단순히 소비자 취향에 맞춘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국가 혁명에 이바지하고 인민의 사고와 감정에 맞춘" 음악을 선호하는 공식 정책에 따른 것이다(Kim, 1991, p. 19). 원본과 현지화 버전 간 스프라이트 시트(sprite sheets) 비교는 [그림 6-1]과 [그림 6-2]를 통해 〈게임 오브 워리어즈(Game of Warriors, G-Station Studio, 2016; Kwanghung, 2018)〉 내 다양한 요소들의 다양한 수정과 변형 사례를 제시해보았다. 캐릭터 머리는 좀 더 아시아적인 얼굴의 2D 그래픽으로 바뀌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의 전통적인 장비를 쓰고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여기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캐릭터 중에는 한국의 전통 군사복을 입은 경우도 있었다). 바뀐 의상과 그림체는 북한의 SEK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만든 고려 시대 배경의 〈소년 장군〉 같은 인기 역사 만화/애니메이션과 유사하다. 영어 원본에는 "invading forces"로 표기된 적은 한국어 "오랑캐"로 바뀌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침략자였던 만주족을 멸시할 때 사용하는 명칭이다. 이처럼 의상의 변형을 통해 게임을 한국의 역사 내 재배치시키는 가운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 콘텐츠의 노골성에 대한 점잖은 정도(modesty)과 민감도(sensitivity)의 상이한 기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작 게임에서 말을 타고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바바리안 캐릭터의 드러난 맨살은 북한 버전에서 어두운 푸른색 셔츠로 덮였다. 이와 같은 커버업은 학교에서 배우고 주변에서 강제되는 행동 규칙인 "사회주의 도덕"에 맞춘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북한인들이 지녀야 할 매너나 예의범절 그리고 적절한 복장 등을 규율하는데, 북한에서는 군인, 나아가 남성들이 팔꿈치 윗부분이나 무릎 아래를 노출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한 복장으로 여겨진다. 게임에서 졌을 때 나타나는 해골 스프라이트의 경우 북한판에서는 두개골이 두 개의 칼 뒤에 숨겨지고 해골의 팔은 지워지는 등 덜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레드 몬스터의 두드러지는 이빨이나 뿔 달린 헬멧 등의)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바바리안 캐릭터의 벨트와 오른쪽 위에 위치한 헬멧 같은) 다른 곳에 나타난 두개골 또한 제거되거나 수정되었는데, 이는 그러한 모티브들이 일부 이용자들에게 부적절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 〈게임 오브 워리어즈〉 스프라이트의 원본 버전(왼쪽)과 현지화 버전(오른쪽). 이데올로기적 각색: 지금까지 살펴본 현지화 양상은 대개 게임을 현지 문화 등에 맞추는 것에 초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문화적 측면에는 언제나 정치적 차원이 동반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의 것들이 체계적으로 누락되고 북한의 언어로 재번역되는 이유는 단순히 상호이해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외래어를 다수 차용한 남한의 언어가 북한의 언어에 비해 열등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남한의 외래어 남용이 언어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외래 권력에 복종하는 것임을 반영한다는 것이다(Chong, 2019). 뿐만 아니라, 남한의 경우 영어 원어를 말 그대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북한의 번역은 훨씬 더 주의 깊게 콘텐츠에 접근한다. 예를 들어 〈게임 오브 워리어즈〉에서 플레이어는 팽창주의 정복자의 역할을 맡아 적의 도시를 "정복"한 후 그것을 "식민지"로 바꾼다[그림 7]. 남한은 역사적으로 식민지 문제에 민감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판에서 정복된 도시들은 해방된 마을과 성으로 표현된다. 원본에서 깃발의 문장들은 정복된 적 도시를 표현하지만 북한판에서 이는 "해방"과 "강점"으로 대체되는데, 이 두 용어는 직접적으로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북한의 전(前)지도자 김일성에 의한 해방을 의미한다. 북한식으로 현지화된 이 게임은 한국의 고대 역사를 참조한 동시에, 원본의 정복과 팽창의 로직을 북한의 역사 기술에 있어 가장 많이 반복되어온 - 외래 침략자들로부터 한국의 해방이라는 - 내러티브로 재구성되었다. * 원본 〈게임 오브 워리어즈〉의 도시 정복 튜토리얼 화면(왼쪽)과 북한판 화면(오른쪽). 북한판에서는 "마을 해방 --- 마을을 해방하였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얻으려면 성을 갱신하십시오"라고 쓰여있다. 몇몇 수정사항들이 북한의 민족주의나 주체사상을 반영하거나 강화한다면, 다른 것들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상징들을 중화(neutralize)시킨다. 북한판 게임에서 다양한 형태의 돈(지폐, 동전, 보물 등)이 변형되는 방식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림의 검 양쪽으로 쌓여있는 달러가 그려진 골드 코인은 북한판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으며, 게임 내에서 달러 코인은 금색 별로 대체되었다. 시리어슬리(Seriously)의 게임 〈베스트 프렌즈(Best Friends, 2014)〉의 북한 버전인 〈멍청한 달팽이(Kwanghung, 2018)〉의 경우(역주: 원문에는 〈Stupid Snail〉이라 표기되어있으며 실제 북한에서의 한글판 제목은 확인불가) 원본 게임에서 주류 통화로 사용되는 골드바(gold bar)가 노란 보석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시티 아일랜드 2(City Island 2, Sparkling Society, 2014)〉의 북한 버전의 경우, 골드바는 남았지만 게임 내 통화를 상징하는 미국 달러처럼 생긴 초록 지폐는 "유희 점수"를 의미하는 회색 종이로 대체되었다. 〈날으는 동물원〉의 경우 원본에서 Z에 두 개의 세로로 된 선이 관통한 모양의 코인이 북한판에서 삭제되었다. 이처럼 인-게임 통화의 재현 형태에 대해 일관된 처리 방식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 개발자들의 지속적인 수정과 변형 작업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 - 부와 돈 - 가 문제점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변형된 코인, 골드바, 지폐 등은 화폐로서의 기능을 유지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돈의 단위로서 자신들의 기능은 빼앗긴 것이다. 이처럼 통화 상징들이 중화된 가운데, 목표가 수익의 극대화에 있는 게임들은 그 로직을 유지했다. 〈날으는 동물원〉에서 게임의 목표는 여전히 희귀 동물을 포획해서 주인공의 동물원을 발전시키고 보다 많은 관객들을 유입시킴으로써 수입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으며, 〈시티 아일랜드 2〉의 경우 요령 있는 부동산 투자를 통한 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소액결제: 이처럼 돈에 대한 재현을 순화시키려는 노력은 북한판 게임의 인-게임 통화가 실제 돈으로 구매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역설적이다. 현지화된 게임에서 원본 게임에 딸린 광고나 구글 플레이 같은 결제 플랫폼 링크는 제거되는데, 여기서 인-앱 결제 방식은 제거되지 않고 남은 채 북한의 인프라에 맞도록 변형된다. 즉 북한 게임 산업의 행위자들에게 그 수익이 재배치되도록 수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한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게임의 소스코드를 확인하면 새로운 소액결제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있는지 알 수 있다. 대개 게임의 소액결제 시스템은 시리얼 넘버 시스템이나 암호화 키 파일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작동한다. 아이템 구매는 해당 아이템을 해제할 수 있는 시리얼 넘버와 게임에서 생성되어 - 오프라인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 텍스트 키나 QR코드를 교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텍스트 키 또는 QR 코드는 암호화 해시 함수(cryptographic hash function)를 이용자의 기기(모바일기기식별코드나 시간, OS 빌드의 식별자 등)의 다양한 식별자에 적용함으로써 생성된다. 이는 이용자들이 동일한 시리얼 넘버로 여러 기기에서 아이템을 해제하는 것을 방지해주며, 무엇보다도 시리얼 넘버를 제3자에게 증여하거나 재판매하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이 시스템은 최종 이용자가 자신이 구매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을 제한함으로써 (물리적 앱 상점이) 상품의 유통권 독점을 확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2차 시장을 통한 이용자 간의 수평적인 흐름이 아닌, 이용자로부터 유통사와 개발사로 흐르는 수익의 흐름에 대한 소유권을 확고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광흥 스튜디오가 유통 중인 게임에 대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작업을 통해, 이용자의 기기가 국가의 인트라넷에 연결되어 있을 경우 온라인 소액결제가 일부 게임에서 가능함을 확인했다. 결제는, 전자식 지불카드가 아니라, 이용자 계좌와 게임이 개발사의 인트라넷 사이트상에서 연결되어 구매한 사람의 계좌에서 포인트가 차감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짐작컨데 계좌상의 포인트는 전자식 결제로 또는 더욱 높은 확률로 오프라인 상점에서 현금으로 구매하게 되어있을 것이다. 오프라인에서의 구매와 마찬가지로, 공유나 재판매를 방지하기 위해 이용자의 계좌가 기기 고유의 식별자와 묶여있는 것이다. 게임 이용권한 및 프로텍션 모듈: 게임 내 소액결제 시스템과 더불어, 게임 그 자체의 결제도 오프라인 IT 상점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무단 복제와 유통을 방지하기 위해 게임들은 강력한 암호화 방식(4096 bits RSA)으로 보안된 라이선스 키 파일에 의존하고 있으며, 라이선스 시스템은 종종 (사용권 파일 체크를 우회하기 위한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나 바이너리 수정을 방지하는) 파일 무결성 검사나 (디컴파일 또는 디어셈블된 소스 코드를 해독 불가하게 만들어 바이너리에 대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방지하는) 코드 난독화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텍션 방식을 이용해서 추가적인 보안을 하기도 한다. 게임 프로텍션 모듈의 환경설정이나 강도는 개발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전부 불법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고도화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 국가가 승인한 스튜디오에 의한 해외 게임의 불법복제 뿐 아니라 - 스튜디오가 만든 현지화된 불법복제 게임에 대한 무단 불법복제가 그처럼 고도의 방지책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만연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북한 게임의 결제 및 라이선스 시스템 내에서, 물리적 앱 상점은 게임 개발자와 이용자가 상호작용하는 플랫폼으로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중간층(economic middle layer)는 흥미롭게도 디지털 앱 스토어와 비슷하게 - 생태계를 둘러싸는 울타리 쳐진 정원(walled garden)이나 유저 락-인(lock-in) 테크닉, 독점 유지, 그리고 게이트 키핑 전략을 통한 콘텐츠와 자본의 흐름 통제 등의 - "플랫폼 자본주의"(Srnicek, 2017)적 특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게임 개발사나 앱 상점들이 이용자 데이터 수집 및 게임을 통한 수익 창출을 하지 않고 인-앱 구매가 유일한 수익 원천이라는 점은 플랫폼 자본주의와 다른 부분이다. 디지털 기기들이 여전히 거대한 규모로 데이터를 수집하지만, 이는 전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작권, 감시, 그리고 소비 북한의 게임산업은 저작권에 대해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준다. 여러 국제 저작권 조약에 가입했고 세계 지식재산권 기구의 오랜 멤버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게임 개발사들은 해외 게임의 저작권을 무시하면서 리버스-엔지니어링을 수행하고 게임을 개조하면서 현지 시장에서 재판매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소비자에게는 자사의 게임들이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는 한편, 불법복제를 방지하고 지적 재산을 수익화하기 위한 복잡한 테크닉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이 게임 산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50여년 간의 북한 법학 학술저널과 경제학 저널을 살펴보면 지적 재산에 대한 경제적, 법적 담론들이 넘쳐난다 9) . 북한의 학자들은 저작권 보호가 보다 빈곤하고 기술적 발전이 떨어지는 국가들을 희생시켜 선진국의 부를 불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공정한 행위라고 오랫동안 주장해왔다(Hwang, 2017). 예를 들어 1980년대 말 남한이 국제 저작권 규제를 따르기로 한 결정은 "미 제국주의"가 남한의 "괴뢰 정권"을 통해 강제한 또 하나의 강탈 책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Chon, 1988, p. 82). 어떤 경제학자는 저작권, 특허, 지적 재산 연관 법률에 대해 "제2의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기술했는데,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다(An, 2005, pp. 139-140). 국제 저작권법 또한 강국들이 자국의 규율을 독립적인 해외 영토에 강제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국가의 주권을 위협한다며 비판한다(Chon, 1998; Chong, 2004; Lee, 2013).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저작권과 지적 재산에 대해 훨씬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지식 경제의 구축"과 보다 체계적인 입법의 추구가 필수라는 것이다(Kim, 2014). 이러한 변화는 저작권을 인정한 1998년의 개헌, 2001년 북한의 첫 저작권 법 및 2003년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보호법 추인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같은 해 북한은 베른 협약에 가입하기도 했다. 저작권 보호를 향한 이와 같은 갑작스러운 입법상 변화는, 일반적으로 1990년대 국가 경제의 붕괴를 경험한 뒤 재산권에 대한 법적 정의가 개정되면서 진행된 것이자 남한과 북한간 상호 화해를 추구하는 소위 햇볕 정책과 함께 강화된 것으로 생각된다(Shin, 2005). 이와 같은 새로운 접근은 북한 문화상품의 남한 내 상품화 증대 및 그에 따른 로열티 수익 증대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5년에는 북한의 소설을 출판한 남한의 출판사가 로열티 미지급으로 저작권 소유자들에게 피소되기도 했다(Lee, 2005). 하지만 이와 같은 두 개의 입장에 있어, 특히 국가적 이익과 주권을 우선시하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볼 때, 근본적인 모순은 없다. 북한 경제학자들과 법학자들은 지적재산권 법을 "입법적 식민화"라고 보았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의 주장(Stallman, 2006, p. 335)을 반복했으며, 그러한 비판은 부유한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국가들에 대해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은 그러한 비판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반대로, 보다 선진화된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북한의 권리 소유자들이 해외에서의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국가적 이익을 수호하고 있다. 보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북한의 - 국외에서보다 - 국내에서의 저작권 활용 양상이다. 선진국의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국의 저작권 권리를 해외에서 추구하는 것은, 경제 및 문화적 제국주의를 향한 저항이나 반항으로서 볼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북한 내 저작권 적용에 대해서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북한의 국내 저작권 시행은, 창작자에 대한 보상이라기 보다는, 통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컴퓨터 소프트웨어 보호법 통과는 국내외의 모든 소프트웨어를 국가 기관 - 중앙 소프트웨어산업 지도 기관 - 에 등록하는 것이 소프트웨어의 "과학성, 객관성, 적시성(timeliness)"을 확보하는 것이자 개발자의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보증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등록 과정은 해당 소프트웨어의 오리지널리티와 보안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의 국가 조직이 효과적으로 소프트웨어의 유통을 통제하고 "국가의 방식과 관습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작업물을 검열할 수 있는(Computer Software Protection Law, 2003, p. 6)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작권은 소프트웨어의 흐름을 감시하고 파일 공유를 방지하는데 사용되는 암호화 서명 체계를 뒷받침하는 법·제도적 장치가 되는 셈이다. 지적 재산의 보호가 대량 감시 및 디지털 기기를 통해 국가가 승인한 것 외 다른 콘텐츠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저작권은 노동 가치로부터 가격이 결정되는 경제 체제 하에서 인-게임 소액결제가 지닌 자본주의적 로직을 정당화하고 있다. 디지털 상품은 한계 생산 비용이 없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와 게임은 언제나 북한 경제학자들에게 문제적으로 인식되어왔다(Lee, 1998).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고정된 노동량과 연결시키는데 있어서의 그 어려움은 역으로 훨씬 유연한 가격 모델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임의 경우 이를 통해 소액 결제 기반의 수익화 시스템이 번성할 수 있었다. 이 수익화 시스템은 현지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문제가 있는 대상으로서 제거되는 대신, 북한 시장에 맞게 각색되었다. 이러한 측면은 북한의 문화적 환경 내에서 게임이 독특해지는 지점인데, 게임이 이용자를 (현지화된 특성이나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통해) 시민으로서 호명하면서 동시에 소비자로서도 호명하기 때문이다. 소비(consumerism)가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서 완전히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Betts, 2014; Gerth, 2020), 중앙 계획식 생산 및 사치나 불필요한 지출에 대한 멸시, 계층적 구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이상, 소비상품의 부족 등은 사회주의 내에서 소비를 드문 현상으로 만들었다(Stitzel, 2005; Tsipursky, 2016). 특히 북한의 경우 소비상품은 인민의 실질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것으로, 수익 창출을 위해 "인공적으로 구매 욕구를 촉진"하는 시도는 "물질적 문화의 삶을 망치는" 자본주의적 행태라는 비판을 받았다(Kim, 2015, p. 32). 소비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목적이 있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문청완은 소니(Sony) 등 자본주의 기업이 컴퓨터나 게임을 생산하는 것을 그 상품의 "실제적인 쓸모"와는 무관한 생산이라 보았다. 북한이었다면 동일한 상품(컴퓨터)이 교육이나 생산적인 활동을 관리한다는 목적을 표명하며 기획되었을 것이다(Mun, 2009). 이러한 형태의 소비를 보여주는 흔적들은 북한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Schmid, 2017), 예를 들어 국가 선전 포스터, 잡지, 상점 등은 상품과 소유의 미학을 활용하면서 소비자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상품을 꾸미고 전시하였다 10) . 이러한 형태의 소비는 일상적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국가의 사회주의식 생산 방식이 성취한 물질적 풍요를 보여주는데 활용되고 있다(Dobrenko, 2007, p. 282). 의심스러운 소비 또한 - 비공식적으로나마 - 흔했고, 희귀하거나 비싼 소비 상품들이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Choi, 1991). 하지만 이상의 기존 소비 양상과 게임의 소액결제 모델은 상당히 다르다. 주지하다시피 인-게임 구매는 지속적인 소비 패턴을 도모하고 플랫폼 자본주의의 지대 추구 시장을 유지하도록 진화해왔다(Nieborg, 2015; Almaguer, 2018; Joseph, 2021). 소액 결제 시스템의 이와 같은 수익 극대화 로직은 북한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데, "타임 랩스"나 잠긴 레벨, 구매해야 하는 보너스 등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유료화 장벽을 북한의 플레이어들이 돈을 써서 우회하는 방식이 장려되고 있다(Burroghs, 2014). 자본주의 세계의 플랫폼이 북한 소프트웨어 산업 중앙 지도 기관의 독점적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대체되었을 뿐인 것이다. 기존의 소비 양식은 언제나 물리적 자원의 결핍/부족이라는 현실 그리고 계획 경제를 통한 물질적 풍요와 공정한 배분에의 약속 사이에서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소액결제에서는 결핍/부족이 적용되지 않는다. 추가적인 저장소나 연산 작용 없는 아이템의 무한 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템들은 또한 이미 원본 게임에 코딩되어 있고, 해적판에서는 추가적인 개발이나 디자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이용자의 구매가 현지화 된 지불 시스템을 만든 노동에만 지불됨을 의미한다. 지불할 권리에다 지불하는 셈이다. 따라서 게임에 엮인 소비 형태는 목적이 있는 소비나 게임 개발에 투입된 노동으로부터 분리된다. 대신 그것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재정적 수익의 추출이다. 북한의 불법복제를 통한 해외 게임의 현지화는, 지정학적,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는 작고 빈곤한 후기-식민 국가의 관점에서 볼 때, 해외로부터의 영향을 제한하고 불공정한 지적 재산 규제에 저항하는 시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수익화에 기반한 소액결제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북한이 국가적으로 주장해온 가치에 반하는 소비주의적인 수익 추구 행위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과 같이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이러한 행위의 발생은 일종의 해방 신호로서 환영할만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수익화를 추구하는 게임의 부상이란 그 이용자와 생산자가 소련의 2차 경제를 연상시키는 "비사회주의적"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주체성의 증대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루딕(ludic) 경제는 전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 경제 체계가 단일한 주체에 의해 엄격한 감시 시스템 하에서 국가의 수익을 극대화하는데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 당국이 지적 재산 체제 및 그와 연관되는 수익화 시스템을 빠르게 수용해서 활용하는 양상을 보면, 그것이 대량 감시와 소비자 착취와 엮여있음을 알 수 있다. 수익 극대화, 자본 축적, 독점 등의 자본주의 경제 논리를 고스란히 반영한 메카닉을 지닌 채 기존의 수익화 시스템과 통합된 게임의 북한 내 인기는, 나아가 놀이(ludicity)의 문화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속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자유화된 시장의 경쟁적 속성에서부터 로빈후드(Robinhood)앱에서 나타난 게미피케이션화된 주식과 옵션 거래, 그리고 암호화폐 기반의 P2E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게임과 탈중앙화된 금융 간의 혼합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이미 게임과 유사한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Giddings and Harvey, 2018). 그렇다면 그러한 게임에 대한 북한 이용자들의 열정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놀이적인(ludic)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의 게미피케이션이 그러한 것을 - 북한의 검열 체계 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 좀 더 보편화하고 있는 것일까. 1) 2019년과 2020년에 평양에서 6군데 IT 상점에서 접했던 소프트웨어 카탈로그들을 비공식적으로 살펴본 것에 기반한 판단이다. 알렉 시글리의 기사(Sigley, 2019)를 참조할 것. 2) 여기서 사용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라는 용어는, 상품의 가격이 민간 주체에 의해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 평등을 표명하는 정치적 목표에 맞춰 (그러나 그러한 목표가 실현되거나 실질적으로 추구될 필요는 없는) 중앙 계획 당국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는 체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북한이나 소련, 중국을 위시한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행했던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마르크스 등 여러 학자들이 말했던 사회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나 생산 수단의 소유(및 국가가 노동자의 대리로서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 등)에 대한 문제 등은 논외로 배제한다. 또한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사회주의 국가 내의 특정 조직이나 기관에서 사용한 경우(예컨대 공산당이라든가 청년 공산당 조직 등)를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대중적인 정의는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중앙 계획 경제체제를 운영하는데 있어 나타나는 다양한 차이라든지 여러 문화적 요인들이 사회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끼친 영향 같은 것 등 다양한 입장들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아가 각 국의 경제체제가 거쳐온 역사적 변화과정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력을 지니지 못한데, 예컨대 김정은의 경제 정책은 조부인 김일성 시대의 정책과 상이하며, 둘 다 상이한 시점에 상이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 주권이나 소비, 사적 소유 등과 관련해서 북한 사회주의의 특성을 논할 때는 부가적으로 역사적 맥락과 사례를 제공할 것이다. 3) 니콜은 조영찬(Cho, 2016)의 논의를 빌어 남한에 비디오게임 및 야구가 유입된 것이 일본과 미국의 "신식민주의"에 따른 결과라고 기술한다. 문화 제국주의적인 요소(Mohammadi, 1995)들과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점령하다시피한 국내외 게임 시장을 통해 들어온 전(前)지배세력이자 경제적 제국주의 국가(즉 미국과 일본)의 게임들에 담긴 가치나 상징, 미학적 요소들이 결합되어있다는 것이다. 니콜은 나아가 불법복제로부터 성장한 한국의 게임산업이 국가적 - 그리고 민족주의적 - 상징으로 게임을 재전유함으로써 그 과정을 전복시키면서도 그러한 과정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한편 리버스-엔지니어링 분석은 학계 외의 게임 보존가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5) https://www.silverstar.co.jp/ 6) 해당 게임의 웹사이트는 www.mybaduk.com, www.dklotto.com, www.dkcasino.com, www.jupae.com을 통해 호스팅되었으며 지금도 the Internet Archive에서 접할 수 있다. 7) '리'란 동아시아권에서 400미터 정도되는 거리를 지칭하는 전통 단위다. 8) 사용된 방법론이나 툴에 대한 정보를 더 알고 싶다면, 다음의 링크를 통해 리버스-엔지니어링된 북한 게임들의 소스 코드 변경사항과 암호화 방식을 살펴볼 것: https://digitalnk.com/blog/2019/04/21/reverse-engineering-a-north-korean-sim-city-game/ 9) 여기에 해당하는 저널로는 〈경제연구〉, 〈정치법률연구〉, 〈김일성 종합 대학 학보〉가 있다. 10) 예를 들어 1970년대에 북한이 발행한 〈Korea Today〉 잡지(nos. 914(1972), 201(1973), 203(1973), 12(1974) 등)에 실린 백화점이나 산업박람회, 농산물박람회 사진을 보라.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불명 Anonymous ​ (게임연구자) 나보라 게임연구자입니다. 게임 플레이는 꽤 오래 전부터 해왔지만, 게임학을 접한 것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우연히 게임 수업을 수강하면서였습니다. 졸업 후에는 간간히 게임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나 저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게임의 역사>, <게임의 이론>, <81년생 마리오> 등에 참여했습니다.

  • [Editor's View] AAA의 반대편을 향한 탐색

    < Back [Editor's View] AAA의 반대편을 향한 탐색 05 GG Vol. 22. 4. 10. 게임의 세계에도 늘 웰메이드 작품만이 넘쳐나는 것은 아닙니다. 화려한 그래픽과 웅장한 스케일 대신 어딘가 엉망진창인 것 같은 게임들이 아마 타이틀 수로만 따진다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요. 그런 게임들이라고 묶어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효과들이 일어납니다. 소자본이지만 빛나는 아이디어로 무장해 게이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디 게임들의 존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또 게임 생태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축이죠. 하지만 소자본이지만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이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게임들을 주목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를 테면 B급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이 그러합니다. 특유의 감성을 아예 하나의 코드로 삼아 발전하는 B급 장르는 영화나 만화 등에서의 감성을 이어가며 게임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얹지만, 이른바 ‘똥겜’으로 불리는 그룹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저 못 만들었다고만 평가하기에는 그곳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메이저로도 불리지 않고 인디라는 이름과도 걸맞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B급, 혹은 ‘똥겜’이라 불리는 게임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B급과 똥겜의 정의는 모호합니다만, 적어도 웰메이드나 AAA의 반대편 어딘가쯤이라는 방향만큼은 명확해 보입니다. 개념을 정의하기보다는, 그 근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게임의 의미를 넓게 둘러볼 것입니다. B급 게임이 무엇인지, A급과는 무슨 차이일것인지를 검토하고, 심지어 한때 AAA의 대명사였던 한 게임에 ‘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과정도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똥겜’이란 말의 원조격일 일본의 ‘쿠소게’에 대해서는 실제 일본의 게임연구자가 가진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했습니다. Trends 섹션에서는 새롭게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는 차기 정부의 게임 관련 정책의 방향을 짚어보고, 최근 뜨겁게 상승하는 키워드인 NFT에 관한 엔지니어와 사회학자의 시선을 엮어보고자 했습니다. 더불어 북미 등의 서구권에서 한국 게임의 의미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로스트아크’와 같은 사례를 통해 질문해봅니다. 게임과 미니맵의 관계,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 관한 이야기, 게임을 다룬 소설과 미술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이번 호도 알차게 꾸몄습니다. 여러모로 신작들이 쏟아지는 4월, 게임 하기도 바쁜 시절이지만 GG를 찾아주시는 것도 잊지 말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 Back 물류는 게임 속에 어떻게 재현되는가 18 GG Vol. 24. 6. 10. 물류 전문기자로 살아온 것이 어언 10여년. 필자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물류는 어디에든 있다”이다. 물류(物類)란 그 단어가 품은 의미처럼 ‘만물의 이동’이다. 우리가 물류라고 굳이 인식하진 않겠지만,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오늘 입고 신은 옷가지와 신발, 식당에서 사용한 식기와 반찬 종지까지 모든 것에는 물류가 따라왔다. 그리고 물류는 많은 경우 효율을 목표한다. 역시나 인식하진 않았겠지만, 이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활 속 물류 효율을 높이고자 노력한 경험이 있다. 예컨대 늦잠으로 지각 위기에 처한 어느 날 지하철, 버스, 택시, 전동킥보드, 도보 등 각종 이동수단을 조합하여 회사까지 이동하는 최단경로, 최단시간을 구해본 기억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물류가 추구하는 ‘최적화’다. 혼자만 이동하는 것은 그나마 쉬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직장인들의 주거지부터 회사까지 특정 시간의 출근 이동을 ‘최단 시간’을 목표로 최적화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여기에 5000원 이하의 금액을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이 걸려있다면 어떨까. 갑작스러운 폭우와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겹쳐버렸다면 어떨까. 최단 시간을 산출하기 위해 고려할 변수는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개인의 경험으로 최적화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다. 흔히 우리는 화물을 나르는 택배기사, 창고 노동자의 집품과 포장 업무와 같이 눈에 보이는 단순 반복 노동만을 ‘물류’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각 기업 물류 관리자들이 하는 일은 노동집약적인 물적 이동(물론 이들도 급하면 단순 반복 노동 현장에 투입된다.)이 아니다. 각자의 제약조건 속에서 비용 절감이나 일정 % 이상의 당일 출고율과 같은 서비스 지표 달성을 목표로 모든 물류를 최적화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물류’는 가상 세계에도 존재할 수 있나 모든 이동의 맥락에 ‘물류’가 녹아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상 세계인 게임 속에서도 물류는 존재한다. 그리고 게임 속 물류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효율을 추구하고 있다. 예컨대 <마비노기>에서 이동수단인 ‘말’을 구매하여 탑승한다면, 말이 없을 때보다 빠른 속도로 필드를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와 동승자의 시간의 효율을 높일 수 있고, 그 자체로 과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말은 멋있으니까. 다른 예로 <디아블로>의 인벤토리와 창고는 그 자체로 최적화의 도구다. 한정된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추려서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니 말이다. 공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가치 없는 것은 과감히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남기는 선택의 연속을 강요받는데, 현실 세계의 물류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게임 속 물류가 추구하는 효율화의 방향은 현실 속 물류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꽤나 다르다. 그 이유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현실과 연동되지 않은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물류는 실체의 이동을 다루지만, 게임의 물류는 가상의 데이터 패킷의 이동을 다룬다. 따라서 게임 속에서 보관하거나 이동시킨 재화는 게임 안에 남아있을 뿐 현실의 가치로 연결되지 못한다. (메타버스 시대(?)가 왔다지만, 아직 가상의 물류를 완연하게 현실의 움직임으로 구현한 사례는 많지 않다. 산업용 디지털 트윈이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할 뿐.) 이러한 차이점으로 인해 게임 속 물류는 현실 속 물류가 추구하는 ‘비용 절감’이라던가 ‘생산성 향상’과 같은 목표를 추구하기 어렵다. 대신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인 ‘재미’에서 찾을 수 있다. 게임 속 물류 또한 플레이어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갖은 예외를 허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해도 과언 아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본다. 데스 스트랜딩과 유로트럭 : 재미가 ‘목적’인 경우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은 세간에 ‘택배 게임’이라 알려졌으며, 이는 어느 정도 틀린 말이 아니다. 초자연적인 재난으로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묵시록 세계관의 미래에서 ‘전설의 배달부’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이 겪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주 내용은 특정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다양한 물성의 화물을 가능한 빠르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운송하는 것이다. 물류학 교과서에 나오는 현실 물류의 목적인 3S(Speedy, Safety, Surely)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데스 스트랜딩>이 정말로 현실 세계 택배기사의 하루하루를 다룬 게임이었다면 재밌었을까. 여러 주거단지를 돌면서 하루에만 300여개에 달하는 박스를 묘기처럼 배송하는 현실 택배 업무를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한 게임을 한다면 처음에는 재밌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매일매일 똑같은 곳에서, 거의 동일한 업무로, 오랜 시간 반복되면 어떨까. 더군다나 현실 속 물류는 물량을 나른 만큼 ‘돈’이라도 주는데, 게임 속 물류는 실체적인 보상은 아무 것도 없다. 당연히 플레이어는 금방 싫증을 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진짜 화물운송 하는 시뮬레이션인데 ‘힐링 게임’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유로트럭 시뮬레이터>를 꺼내면서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건 진짜 현실 세계 화물운송 트럭커의 일상을 다룬 게임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로트럭 시뮬레이터>에서도 재미를 위한 많은 예외조건들이 설정돼있다. 먼저 유로트럭 플레이어들은 현실 세계 트럭커처럼 ‘삶’의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일거리를 선택할 수 있고, 심지어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유럽 도시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유랑을 떠나는 선택을 해도 괜찮다. 처음에는 트럭커로 시작할지언정, 성장 과정을 거치며 거대한 운송회사를 경영하는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또 사고에 대한 위협에서도 자유롭다. 장시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운전을 계속 하면, 화면이 블랙아웃 되는 졸음운전까지 구현된 <유로트럭 시뮬레이터>지만, 졸음운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심지어 고속도로에서 시속 150km로 달리다가 5중 추돌 사고가 나더라도 <유로트럭 시뮬레이터> 세계관에서는 그대로 업무 재개가 가능하다. 벌금과 수리비만 좀 차감될 뿐이다. 물론 어느 순간이 되면 운행 과정에서 차감된 예산으로 인해 파산을 걱정하는 단계가 올 수 있지만, 알게 뭐람. 다시 시작을 누르면 그만이다. <데스 스트랜딩>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건 ‘택배도’ 하는 게임이지, 택배만 하는 게임이 아니다. 처음에는 인편으로 배송 업무를 하다가 점차 바이크 등 운송수단을 활용할 수 있고 드론, 로봇 등 대신 물류를 시킬 수단들도 추가된다. 심지어 택배기사의 역할을 뛰어넘어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나 집라인 인프라를 설치하는 등 건설 시뮬레이션과 같은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게임 내 ‘물류 효율’을 높이는 수단이 되는데, 점점 택배왕이 돼가는 캐릭터를 보면서 MMORPG에서 레벨업을 하고 강해지는 내 캐릭터를 보는 것과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더군다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이후 택배를 할지 안 할지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플레이어의 의지다. 광활하게 펼쳐진 <데스 스트랜딩>의 오픈월드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재미를 준다. 묵시록 세계관의 북미 대륙을 유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그 와중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체험할 수 있다. 택배화물을 노리는 사이버펑크 도적단(뮬)과 초반에는 공격할 수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BT)들이 필드를 돌아다님은 물론이고, 피부에 직접 닿으면 급격하게 노화돼 죽음에까지 이르는 비(타임폴)가 내리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것들은 현실 물류에서는 당장 내일 물류 업무를 그만둬야 하는 대재앙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재미 요소다. 게임 시작 시점에는 대항할 수단조차 마땅치 않았던 적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소탕할 수 있는 대상이 되며, 더 나아가선 택배랑 상관없이 액션 게임처럼 게임을 즐기는 것도 플레이어의 자유가 된다. <올팜>과 <치킨 키우기> : 재미가 ‘수단’인 경우 앞서 설명했던 게임 속 물류가 그 자체로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되는 ‘재미’를 만드는 장치 중 하나로 기능했다면, 게임 속 물류를 재미와는 별개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례 또한 존재한다. 앞서 완연한 메타버스 따위는 없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게임 속 물류가 현실 가치와 일부나마 결합되는 사례들이 나타난다. 어느 순간 국내 이커머스 업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앱테크 게임(앱을 통해 재테크가 가능한 게임)’이라 불리는 이들이 대표적인 예다. 올웨이즈의 <올팜>을 시작으로, 컬리의 <마이컬리팜>, 오늘의집의 <오늘의 가든>, 두잇의 <치킨 키우기>, 11번가의 <11키티즈>, 이마트의 <이마트팜> 등 종류도 다양하다. 앱테크 게임은 하나 같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치킨이든 무언가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들을 목표한 수준까지 성장시킨다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현실 세계의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올팜>의 경우 나무를 다 키우면 고구마 등 현실 세계의 작물을 택배로 받을 수 있다. <치킨 키우기>에서 병아리를 다 키우면 교촌치킨 허니콤보 한 세트를 배달 주문할 수 있다. 게임에서의 노력이 진짜 현실 세계 물류와 연결돼 플레이어에게 ‘실물 상품’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앱테크 게임은 일반적인 게임과는 운영 목표가 다르다. 사실 게임이 재미를 추구하는 이유는, ‘재미’라는 가치가 수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게임이 재밌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구매하여 실질적인 판매 매출이 늘어난다. 게임을 무료 배포하더라도 게임 내 성장재화 및 꾸미기 아이템 매출과 연결시킬 수 있다. 즉 재미는 트래픽을 만들고, 트래픽은 게임사의 매출과 연결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앞서 예시로 언급한 앱테크 게임들은 모두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성장재화 또한 유료로 판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을 통해서 개발사가 얻는 수익은 0에 수렴한다. 오히려 목표를 달성한 플레이어에 대한 보상 지급으로 비용을 게임 운영사가 감당하기 때문에, ‘적자’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위기 요인이 된다. 이커머스 기업들이 이 공짜 게임들을 운영하는 이유를 일반적인 게임의 문법에서 찾으면 그야말로 답이 안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행처럼 앱테크 게임이 번지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앱테크 게임의 보상비용은 이커머스 기업들이 고객 획득을 위해 통상 투하하던 ‘마케팅 비용’을 대체한다. 인스타그램, 네이버, 카카오 등지에 광고하는 데 사용했던 비용을 자체 앱 서비스에 투하함으로 오히려 더 높은 고객의 가입 전환, 구매 전환 효과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앱테크 게임 플레이어는 성장 재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기업이 유도하는 다양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단순한 게임내 액션만으로 빠른 성장을 만드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친구를 커머스 앱에 초대하거나, 특정 상품 페이지를 몇 초 이상 보거나, 아니면 실제 상품을 구매하는 등의 미션을 게임 내 성장을 위해 자발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는 게임이 그 자체로 고객의 정량화된 행동을 유도하는 강력한 ‘퍼포먼스 마케팅’ 도구가 됐다는 걸 의미한다. 이커머스 기업은 이를 통해 쇼핑앱 방문과 체류 시간을 늘리고 실제 상품 판매량을 늘리거나, 여기 광고 등 판매자 대상 B2B 수익모델을 결합시켜서 게임 운영과 보상에 사용한 비용 이상의 매출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앱테크 게임에서 실물 보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물류’는 더 큰 목표인 매출 창출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 자체로 재미를 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보상을 지급받은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여기 물류가 따라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와 홍해 해적 :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면 정리하자면 게임 속 물류는 현실 속 물류와 마찬가지로 ‘효율’을 추구하나, 그 목적은 전혀 다르다. 먼저 게임 속 물류는 매출 증대를 위해 ‘재미’를 추구하지만, 현실 속 물류는 오히려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것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등 물류 수익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임 속 물류는 재미를 위해서 최대한 매일매일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다. 예컨대 <대항해시대>에서 플레이어의 미션을 가로막는 해적은 성장 재화를 모아 동료를 모으고, 선단을 강화하여 언젠가 무찌를 수 있는 대상이다. 심지어 게임의 핵심 콘텐츠인 무역은 내팽개치고, 플레이어 스스로가 해적이 돼서 전혀 다른 형태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해적은 어떠한가. 바로 지금 이집트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핵심 항로인 ‘홍해’를 지나는 민간 선박들에 예멘 반군의 미사일 공격이 날아오고 있다. 기업은 이러한 위기를 감수하고 기존 홍해 항로를 통과하거나, 위기를 회피하는 대신 훨씬 더 높은 비용을 감수하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를 택하는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받는다. <대항해시대>처럼 민간 물류회사가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반군을 토벌하거나, 역으로 해적왕이 되는 선택지로 가는 건 도저히 현실적이지 않다는 건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음으로 재미를 충성고객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앱테크 게임에 있어서도 현실 세계의 물류 효율과는 다른 맥락은 관측된다. 앱테크 게임에서 물류는 고객 행동을 유도하는 보상 장치다. 재미를 목적으로 게임을 하는데 겸사 실물 상품도 보상으로 주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용자들이 앱테크 게임을 플레이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물류는 ‘삶’의 문제이고, 같은 관점에서 앱테크 게임의 보상은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올팜>에서 고구마 한 박스를 선물 받으려면 몇 달 넘게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데, 이게 우리의 본업이라고 생각하면 과연 용납이 되나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현실 세계의 물류는 자유롭게 언제든 안하면 그만인 게임이 아니라, 당장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 나가야 하는 ‘일자리’인 것이다. 요컨대 게임 속 물류가 우리에게 재미있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것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재미는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자. 리세마라를 돌리면서 ID를 팔아먹는 유통업자들은 좋은 캐릭터를 얻기 위해 무의미하게 게임을 반복하면서 과연 즐거웠을까. 어쩌면 게임 속 물류의 즐거움은 그것이 물류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Tags: 유통, 최적화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커넥터스 대표) 엄지용 버티컬 콘텐츠로 아름답게 돈 벌기에 관심 많은 야생의 콘텐츠 잡부. 여러 버티컬 미디어에서 콘텐츠 창작자 및 커뮤니티 기획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2021년 9월부터 유통물류 콘텐츠 기반 비즈니스 멤버십이자 커뮤니티 ‘커넥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

  •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 Back <페르소나 3 리로드> 일본 정치와 함께 톺아보기 18 GG Vol. 24. 6. 10. <페르소나 3>는 <페르소나 시리즈> 전체로 보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신전생 시리즈>의 외전 격으로 개발된 시리즈의 핵심 정체성을 확립한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여신전생 시리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던전RPG를 표방하는데, 던전 탐색에 악마 소환 및 합체를 결합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시절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진 않지만, 게임의 핵심 축은 여전히 던전과 전투이다. 그런데 <페르소나3>는 여기에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과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커뮤 시스템’을 추가했다.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얼마나 발전시켜 놓았는지에 따라 악마 개념을 대신한 페르소나의 성능에 더해 일부 스토리 라인에도 영향을 주게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페르소나 3>에선 던전과 전투만큼이나 일상 파트에서의 스케쥴 관리가 중요해졌다. 방과 후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느냐가 던전-전투의 성과를 좌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는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우리가 현실에서도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게임 중에 ‘오늘은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할 때에는 단지 선택지를 고르는 것임에도 묘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반면 던전과 그 안에서의 전투는 그게 아무리 현실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결국 게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만일 게임이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할까’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디자인 되어 있다고 하면, 던전RPG로서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이 게임 고유의 요소인 던전-전투와 연계된다는 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페르소나 3>는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 게임과 현실을 잇는 가교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작인 <페르소나 4> 역시 기본적으로는 같은 형식이지만 일상의 재현에 보다 무게를 둔 느낌이다. 덕분에 고교 시절 친구들과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대리 체험하는 비중이 커졌다. 즐겁고도 그리운 느낌이 게임 전반을 지배한다. 3편에서 ‘타르타로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던 일직선 구조의 던전도 <페르소나 4>에서는 캐릭터별 특징에 맞는 던전이 스테이지별로 따로 구현되었는데, 이런 구조는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섀도’와 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페르소나’의 개념도 조금 달라졌는데, 3편에선 단순히 소질과 각성의 문제였다면 <페르소나 4>에선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마주하면서 얻게 되는 ‘인격의 갑옷’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각 등장 인물의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동료 캐릭터의 서사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다. <페르소나 5>는 3편과 4편을 합친 모양새다. 분위기는 4편의 아기자기함 보다는 3편의 염세에 가깝다. 그러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나 각각의 캐릭터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4편을 연상하게 된다. 던전 역시 일직선 구조의 ‘메멘토스’와 캐릭터의 내면과 연계된 ‘팰리스’가 병존하고 있다. 3편과 비교해 다소 간략화 된 느낌이었던 전투 파트는 5편에선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변수 역시 많아졌다. 섀도를 설득해 페르소나로 흡수하는 시스템은 심지어 3편 이전으로의 회귀다. 이런 점에서 보면 <페르소나 5>는 시리즈 전체를 종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관점을 스토리를 중심에 놓는 것으로 바꿔보면 더 흥미로운 대목이 드러난다. 사실 <페르소나 3>는 서사 구조만 놓고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볼만하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주기적으로 공격하는 대형 섀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싸움의 목적을 오인하게 하는 ‘흑막’, 주인공과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자신의 본래 목적 달성 여부를 고민하는 강적, 인류의 집단적 바람이 원인이 된 종말과 같은 요소들이 그렇다. 그런데 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다소 식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코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방영된 시기는 1995년 말에서 1996년 초까지다. <페르소나 3>는 2006년에 출시되었다. 이 10년의 간극에도 불구 <페르소나 3>는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걸 스토리를 중심에 놓고 평가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의 성공은 버블붕괴로 인한 사회적 혼란 및 이와 맞물린 비관주의의 확산과 떼어 놓고 평할 수 없다. 1990년대의 일본은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에서 혼란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자민당이 스캔들과 비리 등으로 정권을 잃었다가 사회당과의 연정 등을 통해 간신히 되찾으면서 55년 체제가 붕괴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경제적으로는 버블 붕괴로 인한 주요 금융회사의 도산이나 부동산 주가 폭락 등 자산시장의 경색이 문제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한신 아와지 대지진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이 작품을 향한 절대적 지지에는 이 모든 사태가 빚어낸 혼란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페르소나 3>가 나온 2006년의 상황은 1990년대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는 국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민당을 부숴버리겠다”는 구호와 함께 등장해 비교적 안정적 정치 기반을 구축하면서 ‘개혁’ 담론을 주도했는데, 이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개혁 조치를 이상화 해 밀어 붙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00년대 중반까지의 일본은 ‘버블붕괴’라는 폐허를 뒤로 하고 불안 속에서도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한다는 느낌으로 나름의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시점에, 일상의 평화에 젖어 오히려 종말을 바라는 인류, 이대로 세상의 종말을 평화롭게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더라도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시선에 비유한다면 ‘돌아보는 시선’이다. 분명 어떤 점에서는 나름의 진정성이 있는 것이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닥친 자신의 문제라는 절박함은 상대적으로 희박한 것이다. 이게 <페르소나 3>의 서사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류로 느껴지는 이유다. <페르소나 3>에 투영된 것이 지나간 것에 대한 ‘돌아보는 시선’이라면, <페르소나 4>는 ‘자신의 발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시선이 보는 세계는 지극히 개인화 되어 있다. 세계의 위기는 주인공이 잠시 살고 있는 이나바시라는 시골 마을에 국한된다. 본편에서 숙적은 주인공을 돌봐주는 삼촌의 직장 동료이다. 심지어 <페르소나 4> 최대의 반전은 주인공에게 최초의 시련을 부여하는 ‘흑막’이 기껏해야 동네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위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제 게임을 해보면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설정들에 현재성이 실려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페르소나 4>는 2008년 7월에 출시됐는데 시기적으로 3편의 출시일과(2006년 7월)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즉, <페르소나 4>는 3편과 동시대성을 공유하며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 3>과 <페르소나 4>는 비유하자면 같은 화자의 다른 이야기인 셈이다. 여기서 화자는 버블 붕괴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된 시점을 현재로 삼고 있다. 현재 시점에 비관주의가 득세했던 과거를 모사하며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게 <페르소나 3>, 과거를 뒤로 하고 눈 앞의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게 <페르소나 4>다. 따라서 <페르소나 3>가 세계의 종말을 주인공의 자기 희생을 통해 막는 얘기일지라도, 그건 근본적으로는 현재의 소중한 삶을 지키기 위한 제스처라는 해석을 피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페르소나 3>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나 나온 <페르소나 5>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크게 바뀌게 된다. <페르소나 5>는 3편이나 4편처럼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쓴 티가 역력하다. 예를 들면 <페르소나 5>에서의 ‘페르소나’는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는 ‘반역의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서 각성한다. 주인공들은 마음의 괴도단을 구성해 유력한 개인들을 개심시키는 것으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기득권에 의해 반격을 당하는 상황에 내몰리기 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그에 굴하지 않고, 그에 굴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세계가 왜곡된 원인인 세상의 질서 그 자체와 맞서는 데까지 전진한다. 이를 통해 확인하게 된 진실은 대중의 무세계성(worldlessness)에 기반한 욕망이 한데 모여 통제를 원하게 되었고, 그러한 의사를 대리하는 신을 자처하는 존재로부터 세계가 실제 통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성배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주인공들은 이 거짓된 신에 맞서 또 다른 반역을 일으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여기서 게임 제작진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3편과 4편에 비하면 선동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페르소나 5>에서 반복되는, 이전에서 없었던 이러한 코드는 어디서 나온 걸까? <페르소나 4>이후의 현실엔 크게 세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 2009년 자민당이 다시 한 번 정권을 잃고 민주당이 집권하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두 번째,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세 번째, 2012년 아베 신조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해 다시 자민당 집권기가 열렸다. 아베 신조 정권은 1차 집권기(2006년)에 달성하지 못한 과제를 뒤늦게라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는 인상을 남기며 이런 저런 우파 지향의 의제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이른바 안보법제 논란으로 국회 주변에 12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일본 사회 및 시민운동의 특성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당시 언론은 1960년 안보투쟁 이래의 55년만의 최대 규모 운동으로 이 사안을 다뤘다. 이것이 <페르소나 5> 발매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다들 반역을 외치는 <페르소나 5> 특유의 분위기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반영한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또다시 변화되었다. 아베 신조의 장기 집권은 더 이상 없다. 현재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아베 신조와 같은 강압적이고 일극지향적인 이미지를 갖지는 않는다. 지지율은 저조하지만 원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은 탄탄한 편이다. 일본 사회의 우향우는 지속되고 있지만 안보법제 폐지 투쟁 때와 같은 격렬한 반대 운동은 없다. 밖의 상황은 심상찮지만 적어도 일본 내의 분위기를 보면 당분간은 이러한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 같다. 바로 그러한 때에, 과거 그러한 시기를 ‘돌아보는 시선’으로 기억한 <페르소나 3>가 <페르소나 3 리로드>로 되돌아왔다. <페르소나 3 리로드>는 <페르소나 3>를 거의 그대로 현대에 되풀이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페르소나 5>의 혁명은 실패했고, 우리는 그 이전으로 뒷걸음질쳐 온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현 시대에 맞는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려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누구도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 시리즈>는 여전히 새 작품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게 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Tags: 일본, 정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시사평론가) 김민하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하지만 게임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게이머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냉소사회』,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이 있고,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최근작으로는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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