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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 Back 탈출 없는 삶에서 의미를 만드는 게임적 방법 10 GG Vol. 23. 2.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획자) 최선주 선주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 『특이점의 예술』(2019) 등이 있다. ​ ​

  • [논문세미나] Horror Video Games and the “Active-Passive” Debate 호러 비디오 게임과 “능-수동” 토론 /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 에이단 로이즐러

    < Back [논문세미나] Horror Video Games and the “Active-Passive” Debate 호러 비디오 게임과 “능-수동” 토론 /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 에이단 로이즐러 19 GG Vol. 24. 8. 10. 시각문화 연구자인 버나드 페론은 2009년 『Horror Video Games: Essays on the Fusion of Fear and Play』라는 책을 출간한다. <바이오 하자드>나 <암네시아> 시리즈와 같은 호러 게임이 향유층을 탄탄히 다져가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학계에서는 호러 비디오 게임에 대한 논의가 소외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현장 종사자와 연구자를 아우르는 다양한 필자가 호러라는 장르와 게임의 접합에 관한 아이디어를 개진했다. 페론은 영화와 게임을 비교하며 생존 호러 게임이 어떻게 특유의 공포를 전달하는지 설명한다. 영화 관객은 화면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네스틱’ 주체다. 관객의 몸은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몸이 겪고 있는 황홀한 감각을 느끼고자 한다. 생존 호러 게임도 그와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공포를 전달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몸 역시 영화 관객과 마찬가지로 “화면 속 신체의 감정이나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한다 [1] . 그런데 게임의 경우에는 매체 고유의 ‘루돌로지적’ 메커니즘이 플레이어와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융합을 촉진한다는 것이 페론의 주장이다.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입력이 캐릭터의 표현으로 게임 내부 공간에 매핑되고, 그렇게 구현된 효과는 곧 플레이어의 의도, 지각, 행동이 융합된 결과물이다. 요컨대 플레이어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살아있는 몸’을 만듦으로써 공포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책의 다른 저자들 역시 유사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2009년에 출간된 책이 위 같은 방식으로 호러 게임을 설명한다면, 과연 1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선 어떤 방식의 해설이 가능할까? 또, 페론의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던 호러 게임은 주로 생존 호러에 치중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분명 <사일런트 힐>과 같은 게임들은 호러 게임의 대표격으로 인용되지만, ‘호러’를 보다 다양하게 구성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다루는 데이비드 크리스토퍼와 에이단 로이즐러의 글은 『Horror Video Games: Essays on the Fusion of Fear and Play』의 가정들을 해부한다. 그 가정이란 초기의 루돌로지가 취하던 순진한 이분법-능동적인 게임 플레이 vs. 수동적인 영화 관람-이다. 두 저자는 다양한 이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호러와 미디어가 결합하는 미묘한 방식을, 더 나아가 게임과 호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확장하고자 한다. (*논의에 앞서서 호러라는 주요 개념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논하는 호러 개념은 예술평론가인 노엘 캐럴의 정의를 잇는다. 노엘 캐럴은 호러가 “괴물이 등장하는 허구적 서사”로, “이때의 괴물은 그 잠재적인 위협과 불순함으로 감상자에게 공포감과 혐오감, 불안감이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적 반응(이 반응은 대개 괴물과 마주하는 작품의 중심인물이 드러내는 감정적 반응이기도 하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2] . 장르로서의 호러는 관객들이 호러라고 직관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일련의 미학적, 내러티브적 관습으로 구축된다. 시각적으로는 기괴하거나, 혐오스러운 체액이 떨어지는 등의 모습으로 구현되며, 내러티브적으로는 주인공들이 몸을 숨긴 안전지대를 서서히 좁히는 방식으로 장르 문법을 따르곤 한다. 두려움은 바로 그런 종류의 호러에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수용자의 심리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능동 대 수동’의 오류 화면 속의 인물이 좁고 캄캄한 공간에 떨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 화면이 영화라면 관객은 인물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며 불안한 감정을 공유할 것이다. 게임이라면 플레이어는 컨트롤러를 쥐고 캐릭터를 직접 조작할 것이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공감하며 더 깊은 동일시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즉 호러 영화를 시청하는 관객은 화면 내에서 벌어지는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호러의 효과를 경험하지만, 게임은 인물을 직접 조종하며 디제시스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호러에 몰입할 수 있다. 이것이 『Horror Video Games: Essays on the Fusion of Fear and Play』에서 다양한 저자들이 공유하는 전제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와 로이즐러는 이러한 방식의 가정이 ‘루돌로지적 불안(ludic anxiety)’을 드러낸다고 바라본다. 루돌로지적 불안이란 스카이 라렐 앤더슨이 정의한 개념이다. 앤더슨은 흔히 내러톨로지 vs. 루돌로지로 요약되던 게임학의 흐름이 어떤 궤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요약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게임학자들이 “게임과 다른 미디어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게임을 “프로세스, 시스템, 또는 행위에 의존하는 매체로 구성”하며, “게임의 특성에 대한 결론을 일반화”하려 했다. 루돌로지적 특질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게임학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디어의 특질이 다양한 설명을 압축해버릴 수도 있다 [3] . ‘어떻게 게임이 기술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에 담론의 초점이 쏠려버리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게임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라는 명제가 자연화된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어떤 매체가 더 ‘무서운지’ 겨루는 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크리스토퍼와 로이즐러는 아만다 코트의 『Gaming Sexism』를 든다. 코트는 자신의 책에서 게임 문화에 광범위하게 퍼진 남성 중심적 헤게모니를 분석하고 있지만, 정작 그 분석의 언어가 또 다른 헤게모니에 굴절되어 있다. 아케이드 게임 문화를 다룬 장에서 코트는 여성이 주로 남성을 응원하거나 관전하는 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설명함으로써 어떻게 여성들이 게임 플레이에서 소외되었는지 서술한다. 하지만 관전을 온전히 수동적이라고 구분 지을 수 있을까? “게임을 직접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나 즐거운 경험이라 하더라도, 남이 게임하는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충분히 흥미롭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일”로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4] 게임을 보는 사람 또한 플레이어의 긴장감과 흥분을 함께 공유하고, 놀이의 매직 서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와 로이즐러는 코트가 게임 플레이를 능동적이고 관전을 수동적인 것으로 나누어 관전의 메커니즘에 관해 유의미한 고찰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게임 플레이의 능동성을 핵심 주장으로 삼아 호러의 효과를 설명하려 경우, 곤혹스러운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암네시아>의 개발자 토마스 그립은 게임의 ‘재미’에 너무 몰두할 경우, 호러의 아우라가 파괴된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더 서퍼링>의 리처드 라우스 3세는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면 공포가 훨씬 더 강렬해진다고 말한다. 두 상반된 의견은 행위성을 호러와 직결하는 아이디어를 정밀하게 해부해야 할 필요성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장에서 저자들은 호러 미디어와 수용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를 정교화하고자 한다. 이는 각각 ‘참여의 호러(participation)’와 ‘전송의 호러(transportation)’다. 참여의 호러 이 장에서 다루는 ‘참여’는 자넷 머레이가 고안한 ‘에이전시(agency)’ 개념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에이전시란 “참여자가 의미 있는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고, 또 그 자신이 내린 결정과 선택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만족스러운 능력”을 의미한다 [5] . 플레이어와 생리적으로 연결된 캐릭터가 맞는 죽음은 이전에 그가 취했을 선택의 결과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해진다. 플레이어는 무언가 선택함으로써 주체성을 행사하고, 캐릭터의 죽음을 통해 주체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특히 호러 게임의 상황이라면 플레이어는 불안감이나 압박을 느끼며 주체성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공포를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전시가 두려움의 절대적인 기제는 아니다. 사실 호러 장르를 표방하는 다수의 게임이 시각적 요소에 더 의존한다. 저자들은 예시로 <마리오 게임>을 든다. 화면 속의 마리오는 데미지를 입기도 하고, 체력을 다 소진하면 죽음을 맞는다. 마리오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는 줄어드는 생명을 보며 게임 오버의 불안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오 게임>이 호러가 되기는 어렵다. 즉 호러가 되기 위해서는 괴물에게 쫓기는 등, 불안하고 기괴한 경험이 동반되는 맥락을 필요로 한다. 또한 플레이어가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호러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게임에 적응한다는 것은 게임이 유희적으로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고와 행동을 자동화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플레이어가 언제까지고 괴물과 어둠을 무서워할까? 더군다나 일반적으로 게임은 실패해도 괜찮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은 안전한 공간으로 체험된다. 이곳에서의 불쾌란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괴물에게 살해당하더라도 재시작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제공되는 무제한 ‘생명’ 같은 안전장치는 공포의 경험을 퇴색시킨다. 분명 플레이어는 게임에 성공적으로 적응했지만, 그 결과로 본래 호러가 성취하려던 효과는 상실한 셈이다. 결국 호러 게임의 가장 큰 한계는 게임 플레이의 메커니즘 그 자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많은 호러 게임 기획자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구적인 죽음이 불가능해지거나 무의미해지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캐릭터의 죽음이 절대적인 상실이나 단절로 그려지지만, 부활은 오히려 내러티브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특성과 대비된다. 이 지점에서 공감의 문제가 대두된다. 플레이어가 게임의 루돌로지적 목표에 매몰됨에 따라 화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공감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어떻게 자신이 조작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페트리 란코스키는 플레이어가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목표적 참여(goal-related engagement)’와 ‘공감적 참여(empathic engagement)’를 분류한다 [6] . 목표적 참여란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준, 근본적으로 플레이어 자신의 경험이다. 반면에 공감적 참여는 캐릭터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게임 디자이너들은 내러티브 상의 목표와 게임에서의 목표를 일치시켜 두 참여의 방식을 조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전술한 이야기는 그러한 조합이 까다롭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란코스키는 특히 플레이어가 의사를 결정하거나 전투를 벌이는 등 인지 능력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대한 공감이 어려워지며, 게임 플레이의 흐름은 전적으로 목표 중심적으로 배열된다고 설명한다. 이 맥락에서 플레이어가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감정적 동일시를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기에 공포를 더욱 크게 느낀다는 주장은 반박된다. 그러나 참여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호러를 이끌어낸다. 크리스토퍼와 로이즐러는 플레이어블 캐릭터 헤더 메이슨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일런트 힐 3>의 사례를 든다. 작중에서 플레이어-헤더는 악몽과 같은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괴물들을 죽이게 된다. 한 NPC는 헤더가 죽인 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자 헤더는 경악하는데, 그 반응을 본 NPC는 농담이라며 재빠르게 둘러댄다. NPC의 대사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과연 정당하게 괴물을 살해해온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헤더가 저지른 살인에 참여해온 플레이어는 이 순간 섬뜩함을 느낀다. 전송의 호러 원문에서 크리스토퍼와 로이즐러는 그린과 브록의 ‘전송(transportation)’ 개념을 빌려 호러가 미치는 심리적 영향을 해설하려 한다. 전송은 “내러티브의 설득적 효과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수용자들이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내러티브에 노출되면 전송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내러티브로 묘사된 세계로의 심리적 이동을 경험”한다고 하여, 몰입과 같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7] . 정의가 드러내듯, 전송의 호러는 심리적 영역에서 논의된다. 그런데 이 장에서 저자들은 화면 바깥의 현실에서 게임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전송을 묘사함으로써 호러 게임이 어떻게 특유의 효과를 자아내는지, 그리하여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례로 언급되는 게임은 2002년에 출시된 닌텐도의 <이터널 다크니스>와 2017년에 출시된 <두근두근 문예부!>다. <이터널 다크니스>는 정신력 수치(sanity meter)을 도입해 효과적으로 연출한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끈 바 있다. 이 게임에서는 정신력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40가지 효과와 이벤트를 겪을 수 있다. 저자는 가장 인상적인 효과로 게임 볼륨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소거 되는 현상을 꼽는다. 이러한 연출은 게임 소프트웨어가 스피커라는 외부 하드웨어로 뻗어 나가 간섭한 것처럼 느끼게 하여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작품을 경유하며 호러의 전송을 겪은 플레이어의 심리, 그리고 게임 속 화면에서 현실로 뻗어 나가는 전송이 일치하는 셈이다. 흔히 제4의 벽으로 요약되는 수용자와 텍스트 사이의 벽을 허무는 시도는 이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의도한 바를 성취한다. 정신력 수치 메커니즘은 이후 게임 개발자들이 루돌로지적 메커니즘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두근두근 문예부!>는 이런 종류의 심리적 공포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일컬어진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표방하며 출시된 이 게임은 남성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문예부 동아리에 들어가 다수의 소녀 캐릭터와 교분을 나누며 연애 대상을 공략하는 척한다. 그러나 작중의 인물 ’모니카‘는 게임 시스템에 접근해 미연시의 틀을 기괴하게 왜곡한다. 모니카가 게임 내 저장이나 설정과 같은 소프트웨어 권한을 통제하는 이상, 종내에 플레이어는 모니카의 파일을 삭제해 상황을 모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두근두근 문예부!>는 플레이어가 심리적으로 화면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고차원의 호러를 빚어내는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위의 작품들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루돌로지적 행위성을 강조하는 이분법으로는 위 작품들이 발휘하는 특유의 효과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모든 호러 게임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의 원리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참여의 호러와 전송의 호러를 나누어 살펴보긴 했으나, 두 속성을 배타적이라고 단언하기 역시 어렵다. 원문은 페론의 글을 보완해서 독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페론의 에세이는 생존 호러가 발하는 액션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쫓고 쫓기는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 컨트롤러의 키네틱은 액션의 에이전시를 반영한다. 하지만 비주얼 노벨인 <두근두근 문예부!>는 그와 같은 조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충분히 괴기스럽고 끔찍한 연출을 빚어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조합 가능한 호러의 원리를 적용해보며, 새롭게 놀라고 떨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 Bernard Perron(2009), 『Horror Video Games: Essays on the Fusion of Fear and Play』,, MIT Press, 124p. [2] 이해완(2017), 『노엘 캐럴』, 커뮤니케이션북스, 77쪽. [3] Sky LaRell Andersoon(2013), “Start, Select, Continue: The Ludic Anxiety in Video Game Scholarship”, The Review of Communication 13(4), 291p. [4] 강신규·원용진·채다희(2019). 메타/게임(meta/game)으로서의 ‘게임 보기’: 전자오락 구경부터 인터넷 게임방송 시청까지, 한국방송학보 33(1), 7쪽. [5] 자넷 머레이, 한용환·변지연 역(2001),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147쪽. [6] Petri Lankoski(2011), “Player Character Engagement in Computer Games”, Games and Culture 6(4), 291-311p. [7] 황유리·정세훈(2014),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의 설득적 효과: 애드무비(ad movie)를 중심으로, 광고학연구 25(6), 87쪽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

  • 게이머는 난민이 될 수 있는가? - <로스트아크> 대량이주 사태와 난민의 정체성

    < Back 게이머는 난민이 될 수 있는가? - <로스트아크> 대량이주 사태와 난민의 정체성 01 GG Vol. 21. 6. 10. 2021년은 한국 mmorpg 게이머들에게 대량이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메이플 스토리>나 <마비노기>의 경우, 아이템을 강화하는 세공도구 같은 유료아이템의 불투명한 확률 매커니즘이 문제였다. 랜덤이라고 표기되었지만 실은 옵션별 숨어있는 차등확률을 통해 랜덤확률에도 못미치는 효과를 보거나, 응당 적용되어야 할 옵션이 오류로 적용되지 않아 수년동안 0%의 확률로 실패한 뽑기를 유발한 것이 문제였다. 확률 매커니즘을 공개하고,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문제발견이 빨랐거나 유저들이 기망당했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유저들은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해 게임사에 시정과 해명을 요구해 개발사와 각각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답변이나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게이머들은 대체재가 될만한 게임으로 <로스트 아크>를 지목해 올해 3월 한달동안 대량이주를 이어갔다. 한편 <리니지M>의 유저들은 핵과금 유저와 중저과금 유저들의 경쟁구도를 만들어 과금을 부추기는 게임구조를 숨기고, 유저들간의 반목처럼 보이도록 일관한 개발사에 화가 나 있었다. 이들은 과거 <리니지2>의 혈맹 간 계급투쟁이었던 <바츠 해방전쟁>을 패러디 해 <개돼지해방전쟁>으로 자신들의 저항적 행동을 명명하고 항의성 차원에서 <로스트 아크>나 <검은 사막>으로 이주해 나갔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각기 메난민(메이플스토리 난민), 마난민(마비노기 난민) 등으로 불리우며 '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게임이주 운동은 제품향상이나 서비스개선을 요구하는 소비자운동의 연장선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민'이라는 명명에는 몇 가지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메난민, 마난민에 비해 린난민(리니지M)보다는 린저씨가 더 자주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리니지M 유저의 경우 난민이 겪을 고단함이나 소수자, 약자의 입장이 없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돈많은 침략자처럼 묘사되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리니지M의 게임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플레이를 숙련하기 앞서 상세한 전략을 세워 각종 아이템을 맞추고, 한정 아바타를 과감히 구입하는 플레이 습관으로 <로스트 아크>의 경제를 인플레이션 시킬 수 있다는 공포를 로아 유저들은 느꼈다고 한다. '난민'이라는 명명에는 다음과 같은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첫째, 이주자들은 그 스스로 하나의 가상적 종족성을 가진 존재로서, 새로운 게임환경에 적응을 해야 하는 고단함을 '난민'으로 표현하고 있다. 둘째, 이주자들이 본래 활동하던 게임공간을 가상의 고향땅으로 간주하고, 혹시라도 고향땅의 문제가 해결되면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난민'으로 지칭한다. 셋째, 이주 대상이 된 게임의 올드 유저들은 특정한 게임성으로 훈련된 뉴비들이 와서 자신들이 형성한 게임성을 오염시키고 변형할 지 모른다는 공포를 드러내는 단어로 '난민'이라는 명칭을 쓴다. 이 경우 '난민'은 멸칭에 가깝다. mmorpg의 게임공간은 단지 놀이적 재미만을 얻는 곳이 아니라 현실과는 또 다른 인격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곳으로 유저로 하여금 다른 어떤 장르보다 오랜 시간을 가상적 환경에서 보내며 사회적 관계를 이루도록 만든다. 그들이 특정 게임에서 형성한 게임적 습관은 제시된 게임룰을 개량하도록 개발사에 요구하고 유저들과 암묵적으로 합의해 얻은 사회적 결과다. 그들이 자신의 게임에 불만이 있다해도 바로 탈주할 수 없는 이유는, 게임공간이 여전히 유저들의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적 공간에서는 매일 같이 전쟁이 벌어지고, 강제될 수밖에 없는 협력의 업무들이 있다. 물론 이들은 재미를 위해 디자인되었고, 노력이 필요하다 한들 현실의 노동에 비하면 가볍게 즐길 만하다. 적게 노력하면서 손쉽게 소속감을 얻을 수 있다. 게이머가 자신의 자부심을 특정한 게임종족으로 표출하거나 게임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정체성의 불안과 연관을 맺는다. 현실 속의 모호함을 가상 속의 명확함으로 돌파하려는 것이다. 게임공간과 게이머의 관계는 단순한 상품과 소비자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운영체제 안드로이드에서 iOS로 이주했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반면 메난민, 마난민 등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난민'이라는 표현은 게임이라는 플랫폼이 오늘날 새로운 가상적 정체성을 발명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특정한 게임의 문화는 특정 집단의 민속적인 기록으로서 가치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인터넷과 게임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간이다. 가상 민족지학(virtual ethnography)은 인터넷 공간 속의 다양한 매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집단과 문화적 기록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뜻하는 신조어로 점차 그 실체가 입증되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3월말 도입된 <로스트 아크>의 염색시스템을 소위 마난민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존에 없는 새로운 플레이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바타의 신체와 의상의 색을 바꾸는 꾸미기 플레이를 <마비노기>시절부터 익혀왔는데, 그 수준이 일반적인 갈색이나 노란색의 구분이 아니라 선호하는 색을 다크초코(#29141A)와 바나나(#FFE062)로 세분화하고, 해당 색의 색상코드(HEX)까지 암기하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다. 당연히 마난민들의 아바타 꾸미기 실력은 장인급이었고, 이들은 황금비율의 색배합을 담은 문건과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어 지금까지의 <로스트 아크>에서는 보지 못한 캐릭터들을 게임 내 전시하였다. 이는 염색 시스템을 이용해 꾸미기 플레이로 빠져들 가능성을 열어준 적극적인 게이밍으로 평가받을만 하다. 이 점에서 '난민'은 단순히 유입된 신규유저가 아니라 적극적인 혼종 플레이의 유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기존에 <로스트 아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잠재적 플레이를 극대화시켜, 해당 게임의 게임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 게임의 게임성을 새로운 게임공간 안에 이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자신들도 온전히 과거의 플레이를 모두 구현할 수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변형 굴절되면서 <로스트 아크>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게임성을 변형시키면서 그 안으로 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현대인들이 단지 이동상의 초국적 경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이미 가상적인 초국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제멋대로 파편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김치를 먹으면서 유럽인의 정체성을 내재화하기도 하고, '한국적인'이라는 수식어는 점점 모호해져서 실상은 글로벌 코드에 가까운 보편성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이 임시적이라는 것을 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정체성이 중층으로 겹쳐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 게임 속 난민이 보여준 혼종적 플레이는 인터넷 공간이 가속화하고 권유하는 혼종적 정체성의 작은 판본이다. 무엇보다 디지털공간은 현실보다 매끄럽고 장애물이 적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재난이나 박해로 인한 강제적 이주의 의미가 강한 '난민'보다 본래적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라는 점에서 '디아스포라'를 강조해 새로운 조어를 선택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이른바 사이버 디아스포라(Cyber Diasporas)라는 개념이다. 사이버 디아스포라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없는 자들이 아니라 이 곳 저 곳을 매끄럽게 여행하며, 다종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혼용하는 존재들이다. 지난 3월 20일 공연한 다원예술작품 <에란겔: 다크투어>에서는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커스텀 게임을 이용해 게임공간을 기존 플레이 방식과 다르게 전유하는 실험을 했다. 사전에 신청한 일반관람객들을 에란겔 섬 세 곳(스쿨, 갓카, 밀타파워)을 지정해 모이게 하고, 그들이 그 안에서 다양한 형식의 게임비평을 듣게 해 교감하는 것이 전반부의 내용이었다. 그 중 스쿨에서 열린 권보연(게임씽킹 디자이너)-장병호(문화연구자)의 스크립트의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플레이어란 현실과 가상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플레이하고 접속하면서 자기존재를 증명해요. 나는 그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도 배틀그라운드가 전쟁게임이고 내가 살아남으려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놀이를 해야한다는 것은 알고 왔어요. 하지만 내가 동숲러 '뽀'로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러 선택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예요. 나는 이 곳 배틀그라운드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 와보고 싶었죠. 아름다운 자연, 멋진 건물, 신기한 아이템. 그리고 귀여운 춤도 마음껏 출 수 있다고요. 배틀그라운드에서는 총에 맞아 죽는 것만 빼면 내가 동물의 숲에서부터 좋아했던 것들을 다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어요." ‹에란겔: 다크 투어› #2.이주민(권보연)/삼선동 주민(장병호) (c)가상정거장) 연사들은 <동물의 숲>의 유저였지만 <배틀그라운드> 에란겔 섬에 자기 발로 왔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 곳의 룰을 이해하고 존중하지만 한편 다르게 사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들은 에란겔 섬을 마치 동물의 숲처럼 뛰어다니고, 탐색하는 게임공간으로 만들자고 제의한다. 이 뻔뻔함은 이들이 쫓겨온 난민보다는 자발적 디아스포라처럼 보이게 한다. 약간의 풍자적 유머를 담은 이 씬은 우리 시대의 게이머가 보다 더 적극적인 디아스포라로 전향되었을 때, 오히려 게임공간이 더 많은 가능성으로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21년 대한민국의 게임 난민들은 스스로 자신이 거주한 게임공간에 이의를 제기하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이주해 온 땅에 기꺼이 스며들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필자는 게이머가 게임성을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의 시작으로 이 사태가 기록되길 바래본다. 이러한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조금 더 공정하게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뮬레이션으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길어내는 공간이 게임이라면 이 공간에서부터 개길 수 있어야 한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오영진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다.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12.06~19)를 연출했다. ​ ​

  •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 Back 해제: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08 GG Vol. 22. 10. 10. 폴더와 디렉토리 기반으로 오프라인 PC에서 파일 관리를 하던 세대들은 요즘처럼 클라우드에 파일을 올려두는 방식을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오는 시대다. 바야흐로 온라인이 기본이 되는 시대. 과거에는 PC 한 대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네트워크로 파일을 옮기는 일을 부가적으로 생각하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정보의 존재위치 자체가 관계망 위에 놓이는 것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게임도 시대변화에 발맞추며 변화했다. 기기 한 대 안에서 모든 플레이를 처리하던 시절 만들어졌던 디지털게임들은 온라인이 기본이 된 시대를 맞이하며 싱글플레이 중심에서 네트워크 기반의 온라인 멀티플레이로 그 중심을 옮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지 싱글  멀티라는 간단한 명명으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만큼 넓은 진폭을 보여 왔다. 그러나 오프라인 시대는 온라인이 대세가 됐다고 갑자기 휙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지나간 듯한 한 시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다음 시대의 현상에 흔적을 남기며 지속적으로 공생한다. 이번 호, 그리고 이 글에서는 온라인이 기본이 된 시대에 여전히 의미를 남기고 있는 오프라인 시대의 게임들을 되짚어본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게임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몇 개의 기준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 기반에서 가상공간의 의미는 외적으로 변화했다 온라인 시대 들어 게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점은 게임 텍스트 안쪽보다는 오히려 바깥쪽, 특히 구매방식의 변화다. 오프라인 싱글플레이를 가능케 한 것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구매 혹은 대여해 텍스트가 제시하는 가상세계를 온전히 영유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오프라인 시절에는 게임 속 가상세계는 언제나 완성된 것이어야만 했고, 그 안에서 완결되는 무엇이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오늘날 온라인RPG 등에서 만나볼 수 있는 ‘미구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추가 DLC를 구매하거나 패치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공간은 상품 형태로 거래되는 게임소프트웨어 기반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프라인 기반 시절과는 사뭇 다른 가상세계를 낳았다. 이제 우리가 겪는 게임 속 시공간은 설령 그것이 멀티플레이가 없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고정된 텍스트 속의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마치 인쇄된 책과 같았던 오프라인 시절 클라이언트에서만 작동하던 가상세계는 그 실물공간을 서버라는 위치로 옮기면서 언제 어떤 이유로도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과거 ‘마그나 카르타’ 처럼 버그로 작동이 불가능한 세계 대신 언제든 패치로 되살아날 수 있는 세계의 등장이지만, 동시에 공식 서버가 사라지면 다시 옛날 책 꺼내들듯 쉽게 뽑아들기는 어려운 곳으로 게임 속 세계가 옮겨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싱글플레이는 이제 과거와 같지 않은 무엇이 되어간다 싱글플레이 게임은 공간과 시간을 대여하는 아케이드 시절을 벗어나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개인이 소유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콘솔, PC 시대로 접어들면서 세이브/로드를 기반으로 점차 긴 시간동안 스토리 진행을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수백 시간에 이르는 싱글플레이 스토리라인 진행 동안 이야기를 밀고나가는 것은 오로지 단일한 플레이어의 개입 뿐이었지만, 이러한 싱글플레이 진행은 온라인 시대를 맞으며 앞서 이야기한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오로지 나만의 이야기만으로는 남지 않는 형태가 되었다. ‘데스 스트랜딩’과 같은 비동기식 멀티플레이(이를 멀티플레이라고 부를지 싱글플레이라고 부를지가 애매하지만)는 온라인 시대의 싱글플레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플레이어는 분명 혼자 플레이하지만, 그 공간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영향력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한다. 설령 직접적인 변화를 게임 안에 구현하지 않는다 해도, 싱글플레이의 클리어 스코어를 전세계 단위로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변화는 싱글플레이의 과거와 오늘을 다르게 만들어낸다. * '데스 스트랜딩'은 싱글플레이 같지만 비동기방식을 통해 타인의 영향력을 게임 안에 당겨오면서 독특한 고립감을 연출해내며 오프라인 시대와는 다른 싱글플레이를 선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게임 텍스트 안쪽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온라인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는 완전한 스탠드얼론 싱글플레이라 하더라도 공략과 포인트들이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손쉽게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공략을 파악하고 최적경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갈 수 있는 시대의 싱글플레이와 제한된 정보상황에서 오직 플레이어의 경험만으로 뚫고나가야 하는 시대의 싱글플레이를 같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싱글플레이가 갖는 매력이 온라인 시대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온라인 멀티플레이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게임들은 혼자 세계 안을 휘저을 수 있는 싱글플레이를 꾸준히 모드이건 단독이건 가리지 않고 출시하고 있고, 멀티플레이만큼의 수익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 또한 이에 적잖은 호응을 보내고 있다. 싱글플레이에 타인의 기여 혹은 개입을 적절히 섞는 게임제작자들의 시도 또한 어디까지를 싱글플레이로 보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심스런 탐색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온라인 시대에도 여전히 싱글플레이의 의미가 죽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오프라인 코옵과 온라인 랜덤매칭은 다르다 아마도 플레이 면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온라인 시대 이후 코옵 분야일 것이다. 오프라인 시대의 코옵 플레이는 반드시 시공간을 같이 점유하는 둘 이상을 필요로 했음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콘솔 게임의 코옵은 모르는 사람과 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아케이드에서 또한 경쟁형 멀티플레이는 가능할지라도 모르는 사람과 코옵을 하는 것은 매우 생경한 일이었다. (혼자 ‘라이덴’을 플레이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동전을 넣고 2P를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게임을 할 수 있는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이른바 PVE라 불리는 새로운 방식이 주는 재미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바 있었다. 이른바 MMORPG의 레이드는 대규모의 인원이 합을 맞춰 공략을 풀어내는, 마치 잘 맞춘 매스게임과 같은 쾌감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타난 것은 이른바 트롤링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코옵이라는, 이름에 ‘협동’이 들어가는 어떤 플레이에 오프라인 기반의 지인 네트워크가 아닌 오로지 게임플레이만을 위한 새로운 관계 속 익명의 누군가가 함께 하게 된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잇 테익스 투’는 그러한 난감함을 잘 드러내준 게임이었다. 2인 코옵으로 반드시 풀어내야만 하는 이 게임은 온라인 매칭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모르는 사람과 플레이하는 것은 매우 난감한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아케이드/콘솔 시절의 코옵을 되살린 듯한 이 게임은 우리가 오늘날 겪는 온라인 멀티플레이라는 말에 사실은 ‘익명기반의 랜덤매칭 멀티플레이’라는 말이 가려져 있음을 드러냈다. 지인간에 가능한 코옵이 있고, 익명 매칭으로도 가능한 코옵이 있다는 구분은 생각처럼 우리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 '잇 테익스 투'로부터 우리는 오늘날의 멀티플레이가 사실은 랜덤매칭 기반의 익명 멀티플레이임을 깨닫는다. 온라인 시대의 오프라인 게임 정보의 물리적 위치기반이 바뀌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변화인지는 비단 게임이 아니어도 2000년대 전후를 살아온 많은 이들이 깨닫고 있을 것이다. 오롯이 가상공간 안의 것으로 여겨지는 게임도 다르지 않아서, 온라인 시대라는 이 변화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시작된 디지털게임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는 우리가 온라인을 100% 가상공간의 무엇으로만 생각해선 안된다는 포인트를 남겨주며, 과거 온라인 이전에 만들어진 어떤 형식이 온라인 시대에도 새로운 변화 속에 꾸준히 이어진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프라인 시절의 흔적과 유산을 온라인 시대에 찾는 것은 그저 ‘옛날엔 이랬지~’같은 회상이나 ‘라떼는 말이야~’에 그칠 일은 아니다. 반세기가 넘어가는 게임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의 변화가 일어난 변곡점으로서 우리는 온라인 시대의 대두를 이해해야 하며, 그 변화 속에서 무엇이 이어지고 무엇이 소멸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오프라인 시대의 게임을 온라인 시대에 다루는 일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 Back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01 GG Vol. 21. 6. 10.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애니센터 앞에서 불타는 만화. 1996년에는 정부가 만화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른바 ‘청보법 파동’이다.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만화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고, 1997년에는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됐다. 대회가 열린 1996년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 됐고, 2001년 국가 공식 기념일이 됐다. 2000년 여름에는 ‘둘리아빠’ 김수정 당시 만화가협회장의 주도로 청보법 파동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개최됐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가협회 회원과 함께 나서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장에는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연합,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있었다. [1] 2012년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독자와 작가들이 함께 싸웠다. 이 결과 세워진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서는 2018년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콘텐츠 분야 최초로 ‘차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자가진단표를 공개 [2] 하기도 했다. 대중과 호흡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에도 평단과 독자들이 웹툰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는 창작자와 향유자가 한 목소리를 내며 만화를 지켜낸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불량 콘텐츠였던 만화가 문화가 되어가는 장면이다. 현재, 2021년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교통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나 웹툰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의 만화는 이렇게 ‘문화’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게임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게임은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치고’, ‘폭력성을 추동해 범죄를 유발하고’, 심지어 ‘중독을 유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저 말들은 만화에도 똑같이 쓰였던 말이다.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문화다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보는 만화는 하위 문화로 여겨졌다. 불량하고, 어딘가 해로울 것 같고, 악당들이 유해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만화 화형식(?)이 거행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업체들이 앞장서서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승인된’ 만화만 발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무서운 것이 주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 미국 CCA의 승인 씰. 이런 주류의 시선이 탄압하는 역사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유구하다. 소설이, 신문이,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가장 막내(?)격 매체인 만화와 게임이 탄압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새로 등장한 매체에 느끼는 공포’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오명,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즐기는 사람들의 힘이 가장 컸다. 2000년 종로 거리에서, 2012년 온라인 게시판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만화는 천천히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만화계에선 여전히 플랫폼의 역할,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동성이야 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 〈판타스틱 4〉이슈 1. 우측 상단에 CCA 씰이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열망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문화는 빛을 발한다. 때로는 규제에 질문을 던지며 돌파구를 만들기도 하고, ‘판’ 밖의 돌팔매질에 창작자와 향유자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중심에는 콘텐츠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어떤 콘텐츠가 ‘문화’로 여겨진다는 건, 이런 과정을 거쳐 제공자와 향유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의미한다. 게임 역시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화와 게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만화는 그동안 개인 창작자가 주류였지만, 게임은 태생부터 기업이 개발하는 산업의 요소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CCA의 사전검열을 피해 피 대신 불꽃이, 살점 대신 바위가 튀는 <판타스틱 4>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는 시장이 사라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창작을 이어간 작가들이 웹툰의 씨앗을 틔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은 기업이 만들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만 존속할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액제를 넘어 ‘가챠’로 불리는 뽑기를 만났고, ‘P2W(Pay to Win)’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에도 익숙해지게 됐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 게이머들은 이 과정까지도 어느정도 이해했다. 게임의 태생과, 내가 즐기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건 단순히 게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게임이 주는 경험과 다른 유저와 협동-경쟁하며 느끼는 경험의 총합이다. 그동안 게임이 부당한 탄압을 받을 때 마다, 게이머들은 항상 게임 옆에 서서 비난을 받아냈고, 또 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지키기 위해서 게이머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게임은 문화다. 게이머에겐. 오늘날 게임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에겐 ‘게임은 문화’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의 청소년기는 스타리그가, 20대는 LCK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게임은 나 혼자서 즐기는 놀이를 넘어 함께 열광하는 문화였다. 게임을 만화처럼 불태우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시선은 느리지만 변하는 중이다. 게이머들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 게이머들은 창작자들, 즉 게임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리자드의 ‘님폰없’ 사태, 한국의 트럭시위 릴레이를 보면 전세계적인 추세로 보인다. * 밈이 된 '님폰없'. 이제 게이머들은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특히 대형 게임사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게이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이머들이 ‘더 강한 규제’를 외치는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있다. 만화는 발전 과정에서 ‘독자’의 힘으로 핍박을 이겨냈다. 미국은 ‘수퍼히어로’ 장르로, 한국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 화형식을 거쳐 MCU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엔 독자가 있었다. 최근 웹툰계에 대두되는 플랫폼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을 존중하고, 플랫폼을 찾는 이유가 작품임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결국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가 ‘즐기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문화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계의 2000년과 2012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내기 위해 50년 전 마블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문화 콘텐츠로서 게임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1] 손발을 잃고 할 말을 잃은 만화가들의 침묵시위, 중앙일보, 2000. 7. 23 https://news.joins.com/article/682613 [2] 웹툰자율규제 연령등급기준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www.kocca.kr/cop/bbs/view/B0000147/1836747.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At=&menuNo=201825&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_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categoryCOM062=&categoryCOM063=&categoryCOM208=&categoryInst=&morePage=&delCode=0&pageIndex=1#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만화평론가) 이재민 2013년부터 만화/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2019년 콘텐츠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부터 웹진 ‘웹툰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만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시장 저변의 많은 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합니다. 소설 <룬의 아이들>과 스타리그, LCK, 그리고 수많은 웹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 ​

  • 마블 스파이더맨 2, 코믹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하는 방법

    < Back 마블 스파이더맨 2, 코믹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하는 방법 15 GG Vol. 23. 12. 10. 요즈음의 콘텐츠는 독립적이지 않다 . 모든 콘텐츠는 유기적이고 , 서로 다른 매체 ,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가지를 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하더라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수많은 매체에서 저마다 다른 과실을 맺어내는 미디어 프랜차이즈는 모든 창작물이 지향하는 바가 되었다 .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수많은 프랜차이즈들도 여러 방면으로 확장을 시도해왔다 . 영화에서 시작해 이미 코믹스 , 소설 , 애니메이션이 계속 쏟아져 나온 ‘ 스타워즈 ’ 는 게임 쪽에서도 루카스아츠의 작품들을 위시해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 ‘ 헤일로 ’ 는 반대로 게임에서 영상물 , 소설 , 코믹스로 뻗어나간 사례다 . 이런 흐름은 슈퍼히어로 파생 작품들도 시작지점만 다를 뿐 유사하다 . 하지만 슈퍼히어로 창작물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 바로 캐넌 , 정사의 기준이 매우 느슨하다는 점이다 . 미국의 코믹스는 하나의 정사가 아니라 , 수많은 비사들의 집합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 제작사 , 제작자 쪽에서 캐넌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 코믹스는 개별 이슈가 서로 다른 설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의 공인된 정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수많은 비사 중에서 인기가 많고 , 가장 퀄리티가 좋은 것들이 선택을 받아 이어나가는 식의 구조를 띈다 . 때문에 유독 코믹스 기반의 파생 작품들은 독자적인 서사를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 코믹스의 감각을 그대로 이어가던 많은 창작물들이 혹평을 받고나서야 사람들은 ‘ 코믹스는 생각보다 대중적이지 않다 ’ 는 사실을 깨달았다 . 원작 코믹스 팬들의 기준으로 만들게 되면 , 지나치게 유치하거나 아무리 원작 설정이라지만 선을 넘는게 있었던 것 . 슈퍼히어로 기반의 최고의 프랜차이즈였던 MCU 가 최근 부진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 스칼렛 위치를 위시한 캐릭터들의 코스튬이 점점 원작을 닮아가고 , 설정만 믿고 배경서사를 생략하거나 , 인물 간의 관계를 대충 그리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 . 그러다보니 중심 서사도 재미가 없어지고 , 또는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 특히 멀티버스의 적극적인 채용은 그런 이른바 ‘ 뇌절 ’ 의 끝으로 가 , 모든 이슈와 관련 설정을 다른 차원의 이야기 , 그저 멀티버스라는 식으로 사건의 근원과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서 더더욱 성의없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했다 . * 스파이더 토템 , 마스터 위버 , 스파이더 마더 … 문자 그대로 우주로 뻗어나가는 설정 그렇다면 ‘ 마블 스파이더맨 2’ 게임은 어떨까 . 우선 , 스파이더맨은 원작 코믹스에서는 그야말로 뇌절 설정의 상징이다 .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 바로 그러한데 스파이더맨과 같은 거미류 슈퍼히어로의 숫자가 늘어다나보니 추가된 설정으로 , 그냥 유전자 변이 거미에게 물려 생긴 슈퍼히어로가 갑자기 우주적이고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 거기에 스파이더맨은 복식만 수십가지에 이르고 ,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스파이더 센스에 대한 묘사도 작품마다 제각각이곤 한다 .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 코믹스가 각 작가에 의해서 뇌절에 뇌절에 뇌절을 반복하여 마구잡이로 확장한 뒤에 , 이 중에 괜찮은 걸 타이인 이벤트로 정리하면서 채택하는 식으로 전체 흐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 그러니 기본적으로 굉장히 난잡하고 , 온갖 좋은 , 그리고 나쁜 설정이 난립하면서 그 안에서도 어떤 설정은 버려지고 어떤 건 정사로 채택된다 . 물론 코믹스 팬들에게는 이것이 재미요소였고 , 다른 것보다 훨씬 짦은 코믹스의 소비 사이클에서는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 그러나 , 게임이나 영화처럼 제작 기간이 길고 한 작품의 서사 단위가 긴 매체에서는 이런 방식을 채택할 수 없었다 . 때문에 게임이나 영화는 그 자체로 일종의 총집편처럼 , 작품이 어떤 설정을 채택하고 있고 ,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다 . 인섬니악의 비디오 게임 ‘ 마블 스파이더맨 ’ 시리즈는 그 정리의 시작을 빌런과 주인공 , 스파이더맨의 관계 정리에서부터 시작한다 . ‘ 스파이더맨 ’ 에게는 정말이지 수많은 빌런이 있다 . 단일 히어로로서는 가장 많은 빌런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 그와중에 극적인 서사를 위해서 스파이더맨이 어떤 빌런을 만나게 될지를 미리 정리해두는건 매우 중요했다 . 그래서 1 편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스파이더맨이 이미 히어로 활동을 한지 꽤 시간이 지났고 , 수많은 잡다한 빌런들을 이미 다 정리했다는 걸 단 번에 보여준다 . 스콜피온 , 라이노 , 벌쳐 같은 단일로서는 큰 비중을 가지기 어려운 빌런들은 이미 스파이더맨을 만나 싸웠고 , 감옥에 가있다 .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인 옥타비우스 박사가 서사의 중심으로 초반부터 등장한다 . 여기서 대강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 이 작품의 스파이더맨은 여러 잡다한 빌런들은 이미 다 처리했지만 , ‘ 닥터 옥토퍼스 ’ 나 ‘ 그린 고블린 ’ 은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 그리고 서사가 옥타비우스 박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상 ,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이 빌런과 대적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다른 설정들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 아직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인 마일즈 모랄레스는 피터 파커의 그 유명한 각성의 과정 , 본작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스킵한 그 과정을 대신 되풀이하고 보여주며 , 이 작품의 후반이나 또는 다음 작품에서 그가 두번째 스파이더맨이 될거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 히로인은 그웬 스테이시가 아니라 MJ 라는 것 , 이번 스파이더맨이 가진 기술적 역량들 , 그리고 멀티버스 따위는 없다는 것 , 그의 경제적 상태 등등 수많은걸 빠르게 정리한다 . 우리는 이미 ‘ 스파이더맨 ’ 이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다 . 이는 코믹스보다는 대중 서사인 영화의 덕택이 더 클 것이다 . 그래서 이미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부분은 게임에서는 빠르게 생략되거나 암시되며 , 그 이상의 부분들은 명시적으로 정리된다 . 그래서 모든 독자들 , 스파이더맨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코믹스팬부터 스파이더맨이라고는 영화 밖에 보지 않은 이들까지 모든 독자를 동일한 출발선에 위치시킨다 . 이는 이 게임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점 중에 정말 일부분이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다 . 그러나 , 서사가 이 게임에서 정말 중요한 위치이고 그 서사라는게 원작과 수많은 변형이 이미 있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즉 , 이 게임은 ‘ 무엇인가 ?’ 뿐만 아니라 ‘ 무엇이 아닌가 ?’ 도 동시에 이야기해야 한다 . 이 스파이더맨은 멀티버스도 아니고 , 등장하지 않을 빌런은 누구이며 , 우리가 아는 스파이더맨 서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같은걸 계속 전해야 한다 . ‘ 마블 스파이더맨 2’ 는 이런 부분이 더더욱 중요했다 . 2 편이 제대로 가속을 받아 서사를 진행시키려면 1 편에서의 이런 정지작업이 필수였고 , 그 다음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 그 때문에 2 편에서는 새로운 인물들 , 그리고 이전에 등장했지만 아직 서사적인 쓰임이 다하지 않은 인물들 ,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 전면에 나서야 하는 기존의 인물들 등 수많은 인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 오스본 부자가 전면에 나섰고 , 베놈이라는 새로운 빌런을 위해 필요한 부가 인물들도 등장한다 .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빌런들이 퇴장하기 시작한다 . 벌쳐 , 스콜피온 같은 부가 빌런들은 확정적인 죽음을 통해 서사에서 사라진다 . 이런 과정을 통해 , ‘ 이미 익숙한 이야기 ’ 인 스파이더맨은 ‘ 새로운 이야기 ’ 로서의 당위성을 얻게 된다 .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 간의 관계 , 설정 장치 , 서사의 흐름들을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어기면서 , 전체 총합은 크게 변하지 않음에도 굉장히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만들어 낸다 . * 어쩌면 이런 부분이 좀더 설득력을 줄 수도 있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에게 원작은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하지만 , 많은 경우에는 독이 된다 .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작과 파생작들은 대체로 차원 자체가 다른 ( 말그대로 과학적인 의미의 ‘ 차원 ’ 도 )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아무리 1 대 1 로 대응하여 옮기더라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고 , 또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1 대 1 이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결국 스핀오프나 파생작품들은 원전의 요소들을 취사선택할 수 밖에 없으며 , 이 취사선택이 어떻게 되느냐가 항상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 특히나 코믹스에서 온갖 설정을 쏟아내는 슈퍼히어로물은 이 문제가 더욱 심하다 . 간단하게는 코스튬의 재현에서부터 멀리가면 빌런의 선택 , 캐릭터에 걸친 부가 서사들의 선택까지 모든게 선택의 문제가 된다 . 가령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뇌절 그 자체인 설정들과 절대 빼놓아서는 안되는 설정들이 많이 있다 . 벤 삼촌의 죽음은 스파이더맨을 구성하는데 빠져서는 안되는 사건이다 . 반대로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나 , 많은 이들이 고평가하는 이슈인 ‘ 슈피리어 스파이더맨 ’( 닥터 오토퍼스의 정신이 스파이더맨의 육체에 깃들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 ) 의 경우에도 자칫하면 설정이 과한 ,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 ‘ 마블 스파이더맨 ’ 시리즈는 여기서 재미있는 선택을 한다 . 먼저 벤 삼촌의 죽음 같은 , 영웅을 형성하는 서사를 모두 본편에서 빼버렸다 . 설정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 이미 작품 상에서는 오래전 지나간 일이며 구체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되기보다는 플레이어 , 스파이더맨의 팬들이 ‘ 당연히 그런 사건이 있었겠지 ’ 라고 추측하고 넘어가게 만든다 . 대신에 이런 시련을 본편에서 겪는 건 2 대 스파이더맨인 마일즈 모랄레스다 . 이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건 항상 구태의연하고 지루할 위험이 있다 . 그게 비록 필수적인 부분이라 하더라도 , 서사를 정직하게 항상 모든 사건의 발단에서 시작하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 모든 서사는 시작부터 독자를 강력하게 흡인할 의무가 있으며 , 이야기의 시작지점은 이야기의 마무리와의 간극을 고려해 정해져야 한다 . 동시에 비극의 과정을 마일즈 모랄레스에게로 옮겨 , 플레이어들에게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2 대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본작에 녹이고 , 감정적인 이입을 만들어 낸다 .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은 , 원작의 설정을 차용하되 그 주도권은 확실하게 본작에 있고 , 원작의 설정을 가져오는데에 1 대 1 로 매칭하지 않고 적절히 변용한다는 점이다 . 이는 마치 기표와 기의의 상관관계 같다 . 예를 들어 ‘ 베놈 ’, ‘ 카니지 ’, ‘ 스크림 ’ 같은 주요한 이름들은 모두 등장하지만 , 그 기표 아래에 본질들은 원작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카니지의 정체인 클리터스 캐서디는 광신도 컬트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캐릭터성을 부여 받아 뉴욕 전체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이끌어 DLC 의 리딩 빌런이 될만한 포스를 풍긴다 . 반면에 스크림은 단편적인 등장이지만 MJ 의 속내를 피터 파커에게 비춰주고 , 둘의 화해와 결합을 더 단단하게 하는 기폭제로서 작용한다 . * 본작의 베놈은 그 정체가 코믹스와 다르지만 ,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심비오트를 활용하는데 있어 베놈 , 카니지 , 안티베놈 , 스크림을 넘어서서 2 세대니 뭐니하는 설정으로 양산되던 것들을 모두 쳐내고 유명한 심비오트까지만 딱 사용한 것도 적절한 원전의 채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 이렇게 원작 설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설정을 본작이 우위를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있다는 점 , 또한 설정에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매우 훌륭하다 . MCU 는 오히려 그런 설정 자체에 휘말려 , 수많은 등장인물을 그대로 등장시키면서 적절한 번안을 하지 못해 영화 내에서 캐릭터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 역력하다 . ‘ 이터널스 ’ 에서 청각장애인으로 번안하여 꽤 깊이있는 캐릭터를 보여준 마카리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크의 경우 , 원작에서는 지나치게 피터 파커에 의존하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던걸 의식하듯 마일즈 모랄레스와의 다른 접점을 가지고 등장한다 .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 중간에 등장한 헤일리의 주변인물과 동일하다면 ( 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 실크 , 신디 문도 원작과 다른 독자적인 캐릭터 서사의 길을 걷는 듯 보인다 . 이런 과정을 통해 , 우리가 그 탄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모두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가 또 한 번 새로운 이야기로서 매력을 품게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 무엇보다도 원전의 설정을 있는 그대로 모두 써야 한다는 강박 아래 미리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설정 덩어리가 아니라 , 쳐낼 것은 쳐내고 핵심만을 남김으로서 가지각색인 플레이어들의 사전 지식 정도와 무관하게 ( 물론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자체는 알고 있어야 하지만 )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는게 중요하다 .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 까지만 챙겨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들이다 . ‘ 마블 스파이더맨 2’ 의 서사는 단순히 본작 , 아니 조금 더 나가서 1 편에서 시작된게 아니다 .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수십년 동안 여러 차원을 통해 이어진 스파이더버스에 플레이어들을 중간 난입시켜야 하는 게임이다 . 동시에 이미 지난 수많은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겪은 이들에게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여야 했다 . 이 두가지를 모두 잡는건 성공보다 실패가 가까운 일이지만 , 인섬니악은 그걸 해냈고 , 그래서 올해 최고의 게임을 논하는데 한자리를 꿰차기 부족하지 않다 . ‘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 그건 방법론도 다양해서 이기도 하지만 , 무엇보다 제대로 된 독자를 설정하지 못하면 어떤 좋은 이야기라도 먹히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스티븐 킹은 이야기를 쓰기 전에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기를 당부했다 . 그리고 매번 그의 가상의 독자 역할을 맡아준건 그의 부인 , 태비사 킹이었다 . 비록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 어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 , 하는 고민은 좋은 이야기에서는 필수적인 고민이다 . 훌륭한 독자설정 , 그리고 이들을 휘어잡기 위한 폭넓으면서 절제된 이야기 . ‘ 마블 스파이더맨 2’ 은 올해 최고의 서사 중 하나다 .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

  • [Editor's view] 무용한 것들의 세계 속 효율을 생각하기

    < Back [Editor's view] 무용한 것들의 세계 속 효율을 생각하기 18 GG Vol. 24. 6. 10.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김희성(변요한 분)이 자주 하던 말을 떠올립니다. 나는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그런 것들.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들 중에 유용한 것이 삶을 지탱하는 기초라면, 무용한 것들은 그 기초를 딛고 삶을 좀더 풍요롭게 만들곤 합니다. 먹고 살 만 해지면 자아 실현을 돌아본다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삶은 모두에게 요원하지만 누구나 꿈꾸는 것이겠지요. 게임도 어찌보면 대단히 무용한 매체입니다. 우리가 이 매체를 붙잡고 있는 이유나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이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무용한, 그저 플레이하는 순간이 즐겁고 감동적이기에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오히려 게임이 뭔가에 유용하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이겠지요. 아이템 거래나 랜덤박스 같은 문제들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용한 게임 안에서도 우리는 유용성의 방법론인 효율을 생각합니다. 최적의 파밍 루트, 특정 구간 돌파를 위해 최소한의 시간과 자원을 들이는 방법을 우리는 연구하고 훈련합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의 유용성에 연관된 효율과는 다른 의미겠지요. 무용한 것에서 효율을 찾게 되는 이 아이러니는 무엇일까요? GG 18호는 바로 그 질문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같은 주제를 두고 필자들의 시선은 제각기의 방향으로 향합니다. 완전히 비효율적인 게임, 게임 안에서의 최적화, 현실의 물류와 게임의 물류... 그러나 찬찬히 이들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효율의 추구가 무엇인지 얼핏하게나마 감을 잡게 됩니다. 저도 김희성만큼이나 무용한 것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디지털게임을 이처럼 오래 붙잡고 있는 이유는 이 매체가 가진 특유의 무용함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용함을 글과 말로 다루는 일은 나름 우리 삶과 사회에 작게나마 유용성으로 남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번 호의 주제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무용하면서도 유용한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인터뷰] EBS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PD-자문위원의 코멘터리 대담

    < Back [인터뷰] EBS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PD-자문위원의 코멘터리 대담 09 GG Vol. 22. 12. 10. 지난 10월 10일, EBS에서 만든 게임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참조: https://youtu.be/5LWXpmdV_BU ) 일반적인 게임 다큐멘터리처럼 게임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하지 않고 게임의 본질과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트렌디한 연출에서부터 방송 직후 유튜브에 즉시 공개한 것까지, 제작과정과 유통과정 모두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공개된 유튜브의 댓글에는 ‘제작자가 게임에 진심’이라는 시청자들의 호평이 잇따랐다. 그러나 기존의 게임 다큐멘터리와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뒤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은 어땠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으며, 어떠한 관점으로 게임을 보고자 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이번 호에서는 박진우 PD와 자문위원 이경혁 편집장의 대담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Q. 마침 다큐멘터리의 PD와 자문위원을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 다큐멘터리에 관한 논의를 처음 시작하신 것은 언제인가요? 이경혁 자문위원: 제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한예종에서 열었던 크리티컬 플레이어 행사였어요. ‘게임 비평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주제의 행사에서 제가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끝나고 찾아오신 거예요. 게임 다큐를 만들고 싶다고. 그때 앉은 자리에서 2시간을 더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 굉장히 반가웠던 것이 ‘이제는 게임을 하던 세대가 제작자의 위치로 가는 순간이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다큐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웠어요. 그래서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그다음에는 서로 바빠서 잊고 있었어요. (웃음) 박진우 PD: 그렇죠. 서로 바빴죠. 이경혁 자문위원: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났는데 다시 또 연락이 와서 예산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다큐의 시작이라고 하면 5년 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다큐멘터리가 본격적으로 제작을 시작한 것은 3년 정도이지만, PD님은 예전부터 이 주제를 다루고 싶어하셨으니까, 마치 배추를 절이는 데 2년, 양념에서 묻히는 데 3년 같이 5년을 고민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진우 PD: 맞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었고, 대학 졸업할 때도 졸업 논문을 게임에 관해 썼거든요. 그러다 보니 뭔가 나름대로 파보고 이것저것 읽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관심이 생겼고, 이차적으로는 이러한 작업을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PD가 된 다음에도 ‘내가 어떤 프로그램을 할 것이냐’라고 했을 때 게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 과정에서 편집장님이 말씀하셨던 한예종 행사에 갔는데,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필드가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위안과 용기를 얻었어요. ‘이 정도의 콘텐츠가 있으면 다큐를 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사실 아이템만 가지고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거든요. 그게 2018년 겨울이었어요. Q. 5년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 과정에서 생각이 변하거나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박진우 PD: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조바심이 있었어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게임에 관한 감각을 잃어버리기 전에 게임 다큐멘터리를 두 개는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어린이 프로그램을 한 3, 4년 정도 제작했는데, 1년, 1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제 어릴 적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처럼 제가 게임을 엄청 좋아하고, 가장 열성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그 시절과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아서 더 빨리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게임의 주 소비층을 2030이라고 봤을 때, 이 문화에서 제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이 어떤 문화를 좋아하면 예전에는 100% 다 알았는데, 조금씩 모르는 것들이 생기면서 이걸 완전히 놓치기 전에 만들어야겠다고 서둘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나왔던 다큐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2년 후에 저라면 이런 방식과 이런 드립을 넣는 형태로 만들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드립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인터넷 상의 반응을 보면서 굉장히 ‘성공했구나’라는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있었어요. 박진우 PD: 어떤 씁쓸함이었을까요? 이경혁 자문위원: 유튜브에 댓글이 달리는 데, 이런 댓글인 거죠. ‘이 다큐가 훌륭한 이유는 밈을 잘 쓴 것이다, 이말년이 나왔다, 전용준이 나왔다.’ 그러나 이 다큐의 의미가 그거 하나는 아닌 거죠. 밈이 잘 사용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이 다큐의 핵심은 결국 게임의 본질에 관한 질문들인데, 이것이 주목받지 못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박진우 PD: 그렇죠. 그 부분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처음에 선생님과 함께 다큐 기획을 할 때도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고, 방송 나간 결과물을 보면서도 어렵다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말씀하신 타겟에 관한 문제예요. 시청자들의 게임 이해가 각기 다르고, 어떤 것을 원하는가 했을 때, 이런 부분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물론 다큐의 본질이 별로였으면, 밈에 대한 반응도 안 나왔겠죠. 그렇지만 저희가 2년 반 동안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거든요. 찍어놓은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리서치를 굉장히 길게 했어요. 그런 지점에서 오는 아쉬움이죠. 박진우 PD: 사실 내용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응이 많이 나왔던 것은 3부였거든요. 전체 기획의 측면에서 봤을 때, 1부가 기본적인 내용이라면 2부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3부가 일종의 심화편으로, 시청자들이 다큐프라임이나 다큐멘터리에 기대하는 정보량과 깊이는 3부의 온도였을 것 같아요. 다만, 제작과정에서 너무 심층적인 논의들은 의도적으로 많이 뺐어요. 핵심적인 내용만 남기고 많이 덜어내고자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게임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공중파 다큐멘터리라는 미디어는 일종의 공인 효과를 만들잖아요? 저희는 그런 지점에 더 초점을 맞추고자 했어요. 다들 느끼고 있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걸 언어화해서 공유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담론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잖으니까요. 그렇게 족적을 남김으로써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급적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밈이나 인터넷 문화를 많이 가져온 것도 이런 맥락이에요. 재밌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테니까요. *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다큐프라임-게임에 진심인 편’ 시청자 반응. 이경혁 자문위원: 그래서 그런 후속 효과도 굉장했죠. 계속 커뮤니티에 돌았고, 소위 말하는 ‘짤’로 ‘EBS가 이런 것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웃음)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게임을 하나의 매체로서 다루는 시금석’이라는 방향성은 확실히 기존 문법이랑 다른 지향점을 가지게 했는데요. 저희가 시작할 때부터 배제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했거든요. 처음에 저희가 기존 다큐들이 무엇을 다루었는지 쭉 훑었어요. 그러면서 게임 산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고 방향을 정했었죠. 다른 이야기지만, 어려움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것도 있을 것 같네요. 이전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들을 보니까 미국의 경우에는 비디오 게임 연구의 장이라는 것이 이미 있는 거죠. 거기서 자신들이 쌓아놓은 역사들이 있고, 대학의 전공도 있으며, 전문가들이 있어요. 그러면 다큐 제작진들이 누군가를 컨택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전문가가 없으니까 어려웠죠. 박진우 PD: 맞아요. 그게 되게 어려운 부분 중에 하나였습니다. 자료도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리서치에 동원될 수 있는 인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Q. 그러면 자료나 전문가를 구하기 어려운 문제가 다큐의 방향성을 바꾸셨던 지점도 있을까요? 이경혁 자문위원: 저는 기억나는 게, 초기에 기획했던 콘텐츠 중에는 백인의 인터뷰가 있었어요. 게임계의 100명을 선정해서 가장 좋았던 게임에 대한 인터뷰를 모으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했었죠. 박진우 PD: 저는 여전히 그 기획이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을 하고, 나중에라도 해보고 싶은데, 당시에 캔슬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었어요. 하나는 여태까지 나왔던 게임 중에서 최고의 걸작을 꼽는다고 하면, 걸작이라는 말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정해진 답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을 배제하기가 너무 쉬운 거예요. 결국, 작품론적 관점으로 질문이 흐르게 되죠. 저희 내부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때도 기껏해야 와우(WoW) 정도?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 두 가지 매체의 게임을 포기하게 되니까 세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나 있었고요. 두 번째로 다큐를 기획할 때는 판데믹 시국이었기 때문에, 해외로 못 나갔었거든요. 그래서 해외의 게임 관련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는 요인이 작용했어요. 물론 이 기획 과정에서 프린세스 메이커의 아카이 타카미씨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이번 다큐에 나오시긴 했지만요. Q. 두 분은 그 5년 사이에 어느 정도로 만나신 건가요? 박진우 PD: 처음에 만나 뵙고 그 이후로는 저도 이제 다른 프로그램 한참 제작을 하다가, 다큐프라임 기획안 공모가 떠서 올해는 게임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요. 정리를 하다 보니 한계가 있는 거예요. 이전에 정리해놓은 자료들 중에서는 유실된 것도 있고, 그 사이 지형이 많이 바뀌면서, 전문가 선생님의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경혁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흔쾌히 나와주셨어요. 이경혁 자문위원: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장소가 그렇게 멀지 않아서요. (웃음) 동네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했어요. 우연찮게 작가분도 근처에 사셔서, 초창기에는 거의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는 모임들을 꽤 자주 가졌던 것 같아요. 어떤 결론이 나기보다는 탐색을 엄청 많이 했었죠. 박진우 PD: 그래도 꽤 많은 가능성들을 펼쳐놓고 시뮬레이션을 돌렸어요. 그러다가 기획을 다듬어서 지금의 1, 2, 3부 형식을 잡기까지 한 1년 걸렸던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제작이라는 과정이 그런 것 같아요. 완성된 작품은 150분이지만, 할 이야기는 정말 많은데 제한된 150분 안에 무엇을 넣어야 우리의 목표에 들어갈 것인가 하고 훨씬 많은 시간을 고민했죠. 이런 식으로 걸러내는 과정들이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박진우 PD: 맞아요. 전체 50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서 내러티브가 전개되는데 필수 불가결하게 쓰이는 시간들이 있어요. 거기서 시간을 더 줄이면 몰입이 안 되거나, 캐릭터가 설명이 안 되거나, 상황이 인지가 안 되거나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구조 자체가 무너지는 거고, 구조가 무너지면 알맹이들은 더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죠. 게다가 내용적인 면에서도 깊게 다루거나 더 들어가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거든요. 그래서 진짜 핵심만 남기고 버리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이경혁 자문위원: 결국은 다 필요없고 재밌게 보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남겨줄게!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죠. (웃음) 박진우 PD: (웃음) 맞아요. 정확하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욕심으로는 약간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1부에서는 다큐 중에서 규칙이나 상호작용을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싶었었어요. 그치만 사실 동영상은 일방향 콘텐츠니까 상호작용을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나마 최대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느낌이라도 줄 수 있게 중간중간 퀴즈나 퀘스트 같은 것들을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짜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렸죠. 추가적으로 그런 어려움도 있었네요. 인터뷰이들을 어렵게 모셨는데, 제한된 시간에서는 모든 이야기를 담기가 어렵잖아요. 50분 다큐에 한 두 세문장 정도 나오실 수 있는데, 저희가 조사를 할 때에는 평균적으로 3시간 정도 인터뷰를 했거든요. 진짜 좋은 말씀이 많았는데, 그걸 다 못 담아내서 너무 아쉬워요. 다만, 저희가 그래도 최대한 모든 분들의 인터뷰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어요. 이번 작업에서 낭비가 거의 없었거든요. 인터뷰 등을 나갔던 모든 자료들을 다 썼고, 한두 컷이라도 담으려 했죠. 근데 딱 한 분 전반적인 톤과 약간 달라서 못 쓴 분이 있었어요. 방송 나가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녹여내려 고민했는데, 안 돼서 방송 전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Q. 말씀하신 것처럼 세 부가 사실 각기 다른 성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보니까 에피소드 별 비하인드도 다를 것 같은데요. 이경혁 자문위원: 맞아요. 저도 궁금했던 것이, 1부에서 인트로가 충격적이었잖아요? (웃음) 사람들이 말로만 하던 ‘고인의 생전 최고의 플레이를 보시겠습니다’를 직접 그려내니까. 그런데 해당 장면을 촬영하는 배우들은 자기가 뭘 찍는지 아나요? 예를 들어 목사님은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시는 걸까? 그런 점에서 저는 PD님이 어떻게 디렉팅을 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박진우 PD: 저희가 앞부분 대본을 드리고, 감추는 것은 없었어요.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를 했는데, 다만 밈에서 출발했던 것까지 정확하게 이해하신 분들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특히 어르신 출연자들도 있고 했었으니까. 한 30대 중후반쯤 되시는 남자 배우 분만 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디렉팅은 그런 거죠. ‘상상도 못했던 걸 봤다고 생각하고 놀래 달라’ 이경혁 자문위원: 아무래도 다 알고 연기하시긴 어렵겠죠. 아, 그 ‘전용준 게임’은 따로 외주 제작한 건가요? 박진우 PD: 네 맞아요. 따로 게임 개발하시는 분을 컨택해서 제작을 했죠. 저희 나름 그 게임 진짜 신경 많이 썼습니다. (웃음) 다큐멘터리가 그냥 한 편의 다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체험을 할 수 있는 다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의 확장선이었던 거죠. 영상이라는 일방향적인 매체의 한계를 벗어나보고 싶었고, 그 안에는 나름 많은 비밀과 다큐에서 나왔던 내용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장치들 등을 세밀하게 조정을 하고자 했습니다. 진짜 공을 많이 들였죠. * 다큐프라임의 ‘게임의 신’ 게임 출시 공지. 전용준 게임은 http://www.ebsgodofgame.com에서 바로 접속할 수 있다. 이경혁 자문위원: 이게 진짜 이스터에그가 많더라고요. 박진우 PD: 네. 그런 비밀을 감춰놓음으로써, '게임이 재미를 발생시키는 원리'를 직접 느껴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었거든요. 처음에 화면을 켜면 튜토리얼이 짧게 한 장으로 나오는데, 진짜 미니멀하게만 짜놨고, 어떻게 해야 고득점을 하는지, 고득점을 받으면 어떻게 집계가 돼서 뭘 하는지 이런 규칙은 일부러 다 감춰놨어요. 그걸 찾아내는 게 일종의 재미를 발생시킨다고 봤기 때문이죠. 이경혁 자문위원: 나도 그 의도를 보고 그게 게시판이 좀 올라오길 바랐어요. ‘이 게임 고득점 뽑는 법’ 뭐 그런 걸로요. 이런 게 어디에 글이 올라와야 재밌는 거니까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사람들이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아직도 액티브 되어 있죠? 박진우 PD: 네. 한 3년 정도 서버비를 내놨습니다. 제 사비로... (웃음)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3부 마지막에 가상의 미술관도 실제로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놨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공들인 것에 비해서 사람들이 많이 안 보셨더라고요. 이경혁 자문위원: 그것도 3년치 서버비를 넣어뒀나요? 사비로? 박진우 PD: 네 (웃음) (가상 미술관은 https://www.ebsgamedocu.co.kr 주소로 접속할 수 있다) 이경혁 자문위원: 그리고 1부에서는 ‘바람의 나라’가 메인이 되고, 송재경씨가 거울에 나오잖아요? 세 게임 중에서 맨 처음으로 바람의 나라를 배치한 이유가 있나요? 박진우 PD: 음. 아무래도 제 유년 시절의 일부분을 책임졌던 게임에 대한 리스펙이 크죠. 이경혁 자문위원: 그래서 저는 바람의 나라 세대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바람의 나라와 송재경씨가 가지는 의미가 또 특별하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지점에서 또 중요한 것이 거울에 관한 지점일 것 같은데요. 거울은 왜 쓰셨나요? 박진우 PD: 우선은 인터뷰 공간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어요. 인터뷰 샷이라는 게 사실 다양하게 보이지만, 한국에서 전문가들이 나온다고 했을 때 한정적이거든요. 사무실 혹은 집무실, 교수님 방 이런 공간이 가지고 있는 넓이나 장면이 너무 뻔하고, 각도도 제한적이어서 어쨌거나 좀 다르게 구성하고 싶다는 게 출발이었어요. 다만 저희가 전문가 선생님들을 직접 찾아 뵙고 촬영을 하는 형태니까, 인터뷰 샷에 통일감을 줄 수 있는 공통의 오브제가 하나 있어야 되겠다 싶었고요. 그게 게임에 대한 무언가면 더욱 좋겠죠. 다만 뻔하게 콘솔 패드나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등을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고민을 하다가 떠올린 게, 게임에 대한 메타포로서의 거울이었어요. 거울이 우리를 비추듯, 게임이 우리 자신을 반영하기도 하고, 거울에 우리를 투영하기도 하고... 일상에 함께하면서도 저 너머의 현실과 꼭 닮았지만 완전히 현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 그런게 게임이라고 봤기 때문에 거울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각의 프레임이라는게 시각적으로 활용하기도 좋았고요. 자막을 넣는다거나, 거울에 비친 인물에 게임의 일부를 합성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쓰기에 좋았죠. 아울러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사각 프레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경혁 선생님이 쓰신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라는 책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네요. 매체로서 게임을 바라본다는 차원에서 더더욱 그렇네요. 이경혁 자문위원: 무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2부의 세팅이 또 굉장히 재밌잖아요. 제가 볼 때에는 온스테이지 공간의 느낌이 들던데, 어떤 기획이었나요? 박진우 PD: 온스테이지와 같은 공간이냐고 물어보시면, 완전히 같은 공간은 아니고요. 요새 호리존트(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음새 없이 만들어 놓은 세트 벽면)에 조명을 넣는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는 영상들이 되게 많아요. 아마 처음에는 공중파의 세트 규모를 소규모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따라가기는 힘들어서 차용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이제는 오히려 역으로 공중파에 영향을 많이 미치죠. 왜냐하면 그것들이 일종의 공통감이라는 걸 만들어내거든요. 예를 들면 90년대 영상들을 보면, 편집의 호흡이나 샷의 크기 이런 것들이 미묘하게 지금 되게 다르거든요. 이런 감각이 결국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감에 기반을 둔다고 하면, 유튜브 콘텐츠에서 나오는 배경들이 지금 공통감의 영역에 올라섰고, 그런 지점에서 온스테이지 같은 느낌을 좀 받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온스테이지의 팬입니다. 제가 예전에 뮤직박스라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거기에 음악 공연을 보여주는 구성이 있었거든요. 당시에 온스테이지를 많이 참고했고 훈련된 면들이 있지요. 이번 다큐에서는 최대한 심플하게 가면서도, 인상적인 비주얼을 만들고자 했고요. 거기도 이제 보면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가령, 집이라든지 음표라든지 이런 것들을 넣기로 했었어요. 사실 그 거울도 되게 비싼 겁니다. (웃음) 거의 한 100만 원 되는 거울인데, 인터뷰를 위해서 샀어요. 사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 말렸었고, 제가 귀가 얇은 편이라 웬만하면 사람들이 말리면 안 하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해야 한다고 우겨서 넣었어요. (웃음) 그래도 결과물을 보고 다들 만족해서 다행이에요. 이경혁 자문위원: 저는 2부 마지막에 4명 부감 잡는 장면에서 무대 세팅에 놀라움을 느꼈는데요. 아마 저만 그렇게 느끼진 않았을 것 같아요. * 위에서 찍었을 때, Game을 나타낸 무대효과. 이경혁 자문위원: 3부서는 예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결론을 명확하게 내리지는 않잖아요. 결론을 강하게 가져가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까요? 박진우 PD: 부담이 없었다고 하면 사실이 아니겠죠. 근데 그게 결론을 굳이 내리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어요. 물론, 강하게 이야기 해볼 수는 있었겠죠. 예를 들어, 다큐에 나왔던 표현을 좀 빌리자면 “게임의 상호작용이 예술이다”,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보면서 반대 의사를 가지신 분들의 말씀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저는 이 주제가 논리적으로 설득할 게 아니라, 그냥 다름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분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우리 다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면에서는 이루려고 했던 소기의 성과들을 조금 이뤘던 것 같아요. 이경혁 자문위원: 또 절묘하게도 화두를 던지는 엔딩이 더 의미가 있었던 모종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잖아요? 사실 우리가 논의할 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가 없었죠? 박진우 PD: 맞아요. 9월 7일에 ‘문화예술’의 범위에 게임을 추가하는 내용의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죠. 8월 초부터 뉴스에 ‘이번에 국회 본회의 통과가 유력하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 그걸 처음에 봤을 때는 약간 식은 땀이 흘렀죠. (웃음) 지금은 게임이 최소한 법적으로는 예술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걸 가정하고 이미 다 만들어 놨는데, 갑자기 그 안에 들어온다니요. 반갑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몇 년을 고민한 걸 엎을 수도 없고, 이거를 모른 체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어떡할까 하다가, 생각해보니 오히려 좋은 거예요. 이런 상황을 살리자. 그게 3부에서 다루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라는 게 먼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가 마주하고 있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라는 게 확 와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방송 말미에 자막으로 덧붙였습니다. 박진우 PD: 때가 다행히 잘 맞았죠. 그것도 방송 나가기 직전까지 몰랐던 게 국회 본회의에 법안이 통과되고 나면 그다음에 행정상의 절차라고 보통 얘기를 하는데, 그 이후에 행정부로 이관하고 공포하는 그 두 가지 단계가 남아 있더라고요. 물론 거기서 파기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한데, 그래도 확정이 되어야지 법적으로 효력을 갖는 거니까. 근데 그게 방송 3일 전인가 막 이랬거든요. 그래서 일단 다 써놓고 처리가 되었는지 계속 새로고침하고 그런 초조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Q. 마지막으로 이후에 하시고 싶은 작업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박진우 PD: 기획하고 있는 여러 가지 아이템 중 하나는 인디 게임 제작기거든요. 한 케이스로 쭉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여러 케이스를 같이 엮어서 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이외에도 게임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더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경혁 자문위원: 이번 다큐를 책으로 만들거나 하는 후속 작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진우 PD: 사실 지금의 3부작만으로는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아카데믹한 작업들이 진행된 경우가 조금 더 책으로 발간하기 적합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게임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더 탐닉하고 싶어요. 책을 만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게임 다큐를 하다 보면, 작업물들이 충분히 쌓인다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결국 게임 다큐로 좀 더 많은 걸 해보고 싶어요.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

  •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 Back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게임의 깃발을 꽂다 - Tonight we Riot 06 GG Vol. 22. 6. 10.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 미국 내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많은 지역. 마초이즘으로 대표되는 도시 텍사스. 텍사스는 맥시코와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에 기반하여, 미국의 역사 속에서도 특수하고 주체적인 성향을 갖는 장소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텍사스의 중심 오스틴. 이 곳에서 하나의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있는 장소를 생각하면 떠올리기 어려운. 붉은 물결이 나부끼는 인디 타이틀 ‘투나잇 위 라이엇(Tonight We Riot)’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메인 화면부터 적기.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투나잇 위 라이엇은 분명하게 위험한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극에 달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지극히 사회주의적-동시에 아나키즘적인-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혁명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자’는 동의하기 어려운 형태의 것으로 게임이 자리할 수 있어서다. 따라서 게임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개발사가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와 전달 방식. 그리고 여러모로 문제작이 될 법한 이 게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독특한 개발사의 위험한 메시지를 담은 ‘투나잇 위 라이엇’이 현재 사회상에서 가질 수 있는 존재감을 말이다.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다 - PPU 512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왼쪽으로 매우 치우쳐진 게임을 만든 이들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무릇 창작물에는 만든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투나잇 위 라이엇’처럼 소재가 매우 명확한 게임이라면, 이와 같은 경향은 더 크기 마련이다. 어떤 인물들이기에 좌측 방향 지시등을 넣고 악셀을 끝까지 밟는 시도를 하게 되었는가. 배경에는 어떠한 요소가 있는 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게임이 만들어진 맥락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흥미로운 점은 ‘투나잇 위 라이엇’이 미국 개발자들 손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개발사인 픽셀 근로자 조합 512(PIxel Pushers Union 512, 이하 PPU512)는 미국 공화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위치하고 있다. 즉, 가장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띄는 장소에서 매우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은 게임을 만든 셈이 된다. 개발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노동조합(Union)’이다. 사무실 근로자를 뜻하는 속어 Pencil Pusher에서 영감을 받아 픽셀 근로자(Pixel Pusher)로 회사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을 표방하는 만큼, 이 회사에는 마땅한 소유자가 없다. 회사는 구성원인 노동자들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고 이익이 모든 구성원에게 수익과 책임이 균등하게 분배된다. 회사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특정 인물은 없으며, 모든 결정은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취합하여 결정한다. * 그러니까, 이런 친구들이다. ‘데드셀’로 성공 궤도에 오른 프랑스의 개발사 ‘모션트윈(Motion Twin)’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대표도 소유자도 없는 독특한 회사의 형태를 가진다. 기존과 다른 형태의, 소위 ‘좌파적’이라 정의할 수 있는 이러한 개발자들의 지향점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Wobblies, 워블리)와 지향점이 겹쳐 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매니저를 선출하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운영하거나, 구성원들이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워블리의 성향이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PPU 512와 같은 인디 개발사들의 성향은 아나키스트적 상향까지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구성원들의 직접행동, 연대와 노동자의 자주경영 등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해보면, 개발사의 성향 자체는 개인이 권력이나 통제로 억압되지 않고 공동체의 자치로 구성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원들의 노동운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PPU 512의 설립자이자 구성원 중 한 명인 테드 앤더슨(Ted Anderson)은 지난해 GDC2019에서 인디 개발사의 노동자 협동 모델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유럽의 게임 노동자 연합(Game Workers Unite)에 긍정적인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체성이 매우 확고한 개발조직인 셈. 이렇듯 PPU 512는 그 정체성이 매우 분명한 회사이자 조직이다. 개인의 자유와 결정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는 구성원과 공동체의 자율이 중요하게 다뤄지며, 직접적인 노동 운동과 행동 등을 통해서 사회를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PPU 512 구성원 전반의 가치관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급진적인. 그리고 핍박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라는 주제는 ‘투나잇 위 라이엇’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아주 직접적이고 포장이 없는 날것 그대로의 메시지가 말이다. 투박하게 게임으로 담아낸 소재 ‘투나잇 위 라이엇’은 인간성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담아낸다. 플레이어는 악덕 자본가가 지배한 디스토피아적 도시국가에서 한 명의 노동자이며, 붉은 깃발을 한 손에 들고 다른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자본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표다. 좌에서 우로 이동하며 등장하는 적들과 대치하고 노동자들을 제압하는 경찰과 자본 권력에서 해방을 노린다. 소재 자체는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에 수도 없이 있었던 것들이지만, 표현은 직설적으로 이루어진다. 게임 플레이의 기본적인 틀은 ‘군중 제어 액션’ 또는 피크민과 같은 AI액션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스테이지 끝까지 군중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도달해야 하고, 스테이지 진행 도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적들이 등장해 플레이어를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군중 속의 일원만을 조작하게 된다. 투나잇 위 라이엇에는 플레이어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적 캐릭터 또는 플레이어가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군중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명령을 내리는 커서의 역할도 없다. 어디까지나 깃발을 든 사람은 노동자의 일원이며, 사망 시에는 다른 노동자가 깃발을 들고 해방을 이끌어 나간다. 이는 메시지와 게임 플레이 시스템에서의 조화라고 볼 수 있다. PPU 512가 기반을 두는 지향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구성원인 노동자들의 자율과 선택이다. 그렇기에 게임은 영웅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 군중의 하나로 플레이어를 설정한다.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집단을 만들고 직접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어 나간다는 생각 그대로다. PPU 512가 개인의 주체적인 결정과 자유에 방점을 두는 것처럼, 게임 또한 개인이 집단으로 구성되고 목적을 달성하는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를 지휘하여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형태가 유사한 인디 게임 ‘시 솔트(Sea Salt)’와 비교해보면 투나잇 위 라이엇의 플레이는 조금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종하는 주체가 플레이어기는 하지만, 시 솔트처럼 부대를 하나의 묶음으로 보기 보다는 그 속에 개별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강조한다. 투나잇 위 라이엇에서 충원되는 유닛들은 전투에 소비되는 소모적인 자원보다, 보존하고 함께 목적에 도달하는 존재에 가깝다. 세밀한 움직임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을 피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 커서가 곧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인디 게임, '시 솔트' 흥미로운 것은 개발자 스스로가 "솔직하고 비현실적인 좌파적 게임(leftist game)"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음에도 파괴 행위에 대한 보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테이지의 목적은 자본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폭력들에는 마땅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경찰들의 피가 바닥에 얼룩져도, 살수차가 터져나가도 스테이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게임 내에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클리어 시, 살아남은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서 결정될 뿐이다. 게임 플레이 측면에서 투나잇 위 라이엇은 평이하게 구성된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다. 특징적이거나 놀라운 시스템, 플레이는 없지만, 적어도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딱히 모난 곳은 없다. 메시지가 분명한 게임임을 감안하고도 플레이 과정에서 과도한 불편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과 준수한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는 투나잇 위 라이엇의 게임 플레이가 메시지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PU 512는 이 부분에서 나름의 선을 지켰다. 자신들의 역할은 비현실적인 어디까지나 좌파적 게임을 구성하는 것에 있고, 담아낸 메시지와 비현실적 배경에서 어떤 것을 읽어낼지는 플레이어의 역할로 넘긴 셈이다. 등장하는 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만든 게임에서 ‘담아낸 메시지가 옳다’고 강요하는 방향보다는, 그저 생각해보는 계기로 구성하고 게임으로서의 플레이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플레이의 방식과 시스템에 집중할 수 있다. 더불어 개발자들의 의도와 메시지를 읽어내고자 한다면, 스스로 몇 가지 해석을 곁들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시선에 따라서는 파괴를 주제로 한 게임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억압 그리고 분노에 대하여 투나잇 위 라이엇의 게임 플레이는 너무도 확연하게 억압-자본에 의한 것이든, 권력에 의한 것이든. 혹은 극단적 자본에 의한 것이든-에 맞서는 저항을 그리고 있다. 억압이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일련의 과정은 적기와 피. 그리고 파괴와 폭력의 형태로 완성됐다.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Riot: Civil Unrest)’와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2017년 얼리 액세스로 출시된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는 ‘투나잇 위 라이엇’과 마찬가지로 투쟁이라는 다루고 접근한 바 있다.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을 게임의 배경으로 놓아두고 시위대와 공권력. 양 측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했다. 라이엇 : 시빌 언레스트의 지향점은 파괴가 아니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며, 양측의 관점이나 가치관을 살펴보고서 플레이어 스스로가 감정과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직설적이기 보다는 논란을 배제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택했다. * 양 쪽 모두를 플레이할 수 있던 '라이엇: 시빌 언레스트' 하지만 ‘투나잇 위 라이엇’은 다르다. 의도가 명백하게 정치적이고 게임이 보여주는 폭력은 강렬하다. 존재하는 모든 억압으로의 해방이 이루어져야만, 노동과 생각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 이를 두고 ‘너무 급진적이어서 불편하다’는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불가능하고 동시에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임에 구현한 저항의 형태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개발 구성원 또한 동시에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발 구성원의 지향점에 맞게 게임 전반을 구축하기는 했지만, 이외의 주변 환경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다양 복잡한 사회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서는 현재의 생활이 유지되기 어렵다. 당장 이들이 게임을 출시한 플랫폼들도 현재의 사회적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에는 이미 많은 사회주의적 요소들이 가미되어 발전해 나가고 있는 상태다. 복지, 노동, 기본권 등 정책적으로든 사회 규범적으로든 사회주의의 요소들은 이미 현실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폭력을 통해서 근본적인 갈등과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증명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PPU 512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적기와 피, 화염으로써 대표되는 노동 해방이 아니라, 분노에 대한 표현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가 어느 정도의 목적성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담아내고자 한 메시지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중심은 게임으로서의 표현에 확실하게 무게를 두고 있으며, 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매체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사회 복지나 안전망이 전무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한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극단적인 상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있을 수 없고 벌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이후의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역할에 가깝다. 속된 말로 "이렇게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빡쳐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 좀 해보자" 같은 느낌에 가깝다. * 이코노미스트가 분석했듯, 사회 불평등이 사회주의 열풍으로 이어진 점에서 표현의 방향이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정치성향을 아나코-생디칼리즘이라고 언급했던 노암 촘스키(Avram Noam Chomsky)의 발언과 ‘투나잇 위 라이엇’을 양 쪽에 놓고 생각해보자. 정치 성향에서 촘스키와 방향을 같이하는 PPU 512의 의도는 약간은 더 명확해진다. 촘스키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이 정치를 억압하고 조종하여 자본의 이익을 최대화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 노동자와 시민은 억압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여 자본과 정치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촘스키는 이 과정에서 해방의 방법론을 폭력이 아닌 대화와 소통으로 봤다.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촘스키는 모든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비판적 사고를 통한 교류와 도출되는 대안들로 억압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투나잇 위 라이엇’은 이러한 관점에서 소재가 될 수 있다. PPU 512 또한 이러한 점을 노린 것처럼 보인다. 테드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모든 사람이 평소에 행하는 크고 작은 활동들 모두가 그러하며, 크고 작든 간에 초라하거나 부정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이와 같은 정치적 측면의 역사와 현실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정치와 개인은 불가분한 관계이며, 그렇기에 이러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메시지를 담은 게임들로 현실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방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 GDC 2019에서 강연을 진행한 PPU 512의 테드 앤더슨 즉, PPU 512는 게임을 통해서 나름의 화두를 던진 셈이다. 결론을 내거나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시작으로 생각하고 고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최근 몇 년간 미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회주의적 화두-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는 버니 샌더스와 같은 인사를 포함한-를 보면, ‘투나잇 위 라이엇’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서 현실적 불합리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생각과 논의를 해보게 만드는 역할도 가능해 보인다. 투나잇 위 라이엇이 발매된 지 약 1년이 지난 2021년. PPU 512가 자리한 텍사스에 대한파 및 정전 사태가 발생하며, 이들의 시각은 한편으로는 명확하고 분명했던 우려와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자리했던 텍사스는 1845년 미국의 아래로 편입됐다. 보다 거대한 부를 낳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텍사스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을 시장에 흐름에 맡긴다는 선택을 내렸다. 지극히 독자적인 이들의 성향과 선택은 이후 텍사스를 미국 공화당이 꾸준히 강세를 보이는 주이자,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에 가까운 색체를 띄는 것으로 연결됐고 점차 시장은 극한으로 자유화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텍사스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자본이라는 깃발 아래, 삶을 영위하고 하나의 부품과 같이 살아간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지역적 성향은 각자의 삶이 불평등하고 극복할 수 없는 하나의 억압과 제한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었고. 필연적으로 안온한 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상황은 PPU 512가 적기를 나부끼게 만든 이유이자. 게임을 통해서 스스로의 열망을 표현하는 배경이 됐다. 실제로 게임의 완성 이후인 2021년 2월. 대한파 상황에서 자본이 일상의 평온함을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자본가와의 상황을 뒤집는 ‘투나잇 위 라이엇’은 텍사스라는 장소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자. 텍사스에서 조합을 만들었던 반골들의 감정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투나잇 위 라이엇’은 너무도 투박하게. 그리고 솔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순하게 바라보자면 그저 이룰 수 없는 폭력과 메시지만을 담은 게임이 될 것이란 것은 분명한 단점이다. 하지만 적어도 몇 부분에서는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려 노력하는 계기로는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실의 한계와 폐해를 담아낸 게임이 있듯이,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소재로 사회주의의 한계와 현실적 고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게임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이 "저항하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은 곧 저항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현실에 분노하고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한 다양한 창조와 저항이 현실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지는 않을까. 독특한 회사 구조와 발칙한 상상력을 소재로, 텍사스 한복판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PPU 512의 결과물은 최근 미국이 보여주고 있는 상황들. 사회적 배경에서 생각해 본다면, 나름의 의미를 갖출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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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 Back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04 GG Vol. 22. 2. 10. 시리아 난민을 다룬 시리어스 게임 〈 21Days 〉(2017)는 독일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 모하메드 쉐누가 자신의 가족들을 기다리며, 21일동안 노동과 교육, 외로움과 편견으로부터 견뎌내는 경험을 다루고 있다. 서울대 정보문화학 연합전공 수업 〈게임의 이해〉를 통해 만난 현유지, 고은비, 최우빈, 김진형, 이원석 등이 이정엽 교수의 코디네이팅을 받아 출시했다. 제작자들은 게임연구자 이안 보고스트의 시리어스 게임이론을 기초로 플레이어가 퀘스트 완료에 성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하도록 만듦으로써 난민의 현실을 드러내는 게임 디자인을 추구했다. 필자는 최근 압둘 와합과 〈21Days〉를 같이 플레이해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을 다룬 이야기가 드문 가운데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적 형식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은 시리아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시리아 내 한국 유학생들을 친구를 둔 인연으로 2009년에 처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고국의 민주화 시위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내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헬프 시리아’라는 단체를 만들며 시리아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난민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스토리텔링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나와 다른 자의 입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그들 또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야기라도 게임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특이성이 있을까? 당사자 입장을 가진 플레이어로서 압둘 와합이 느낀 바를 중심으로 기록해 보았다. 이는 컴퓨터 게임이라는 형식에 대해, 타자의 입장을 플레이한다는 윤리적 당위를 넘어서 그 입장을 어떻게 구조화하고 설계하는 것이 더 좋을 지 논평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몇 가지 비판적인 발언으로 시리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감에 따라 여권 갱신 등이 자유롭지 않아 활동에 제약이 생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귀화뿐이었다. 압둘 와합은 2020년 10월 한국에 귀화했다. * 교사 김혜진이 저술한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2021, 원더박스) 표지 - 게임 하기 앞서 Q: 압둘 와합은 게임을 즐겨했었나? A: 유년시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주로 경험해 보았다. 축구게임같은 스포츠 게임을 친구들과 했었다. 게임을 자주 하기에는 언제나 부모님의 잔소리가 많으셨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웃음) 요즘 사람들처럼 깊게 파고 든 적은 없었다. Q: 오늘 플레이할 게임은 조작이 어렵거나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저와 상의하면서 플레이하면 될 것 같다. A: 좋다. - 0Days 압둘 와합은 게임의 첫장면, 난민관리국에서 모하메드의 난민인정이 신속하게 이뤄지는 부분에서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 게임이 시작부터 가장 어려운 것을 해결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난민인정을 받기까지 신원조회부터 적응교육까지 여러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게임에서지만 가장 어려운 것을 시작부터 이루게 되어 기쁘네요.”라고 말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이같은 상황은 게임 디자인 안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그 동안 난민 소재의 시리어스 게임들이 주로 유럽지역 탈출루트 이동의 어려움이나 난민캠프에서 어려움을 극적으로 게임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21days〉는 그러한 고난이 끝나고도 발생하는 일상의 어려움을 시뮬레이션 하고자 했다. 그들이 한 사회에 들어와 겪는 노동의 고단함과 차별 또한 난민의 고통이지만 표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임 상에서 주인공 모하메드는 자신의 난민인정 이후 아내와 아들을 독일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 UN의 가족결합원칙 하에 난민인정을 받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제부터 플레이어는 이를 위해 브로커를 고용할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압둘 와합은 모하메드가 받아든 난민인정 증명서의 국적이 ‘RYSIA’인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것이 제작진의 오타인가 싶었지만 이 또한 의도된 것으로 실제하는 시리아 난민뿐 아니라 모든 난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특정 국가를 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게임적 의도는 게임이 끝난 후 제작자에게 문의하여 압둘 와합에게 알려주었다. - 1 Days 우리는 모하메드를 난민관리국이 소개해 준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공사장 반장에게 일에 대해 설명을 받는 데, 자막 곳곳에 ㅁㅁ표시로 구멍이 나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은 모하메드의 언어능력이 좋지 않아 독일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벽돌을 나르는 일 같은데, 대충 알아듣고 한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3시간 30분을 일하고 80시리를 받았다. 압둘 와합은 이 같은 게임적 표현이 재밌다고 평가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와 일할 때도 열심히 일하라는 것인지, 그만 두라는 것인지 알아듣기 어려워 고생한 경험이 떠올라요”라고 말했다. 모자란 언어능력이 신경쓰여 공사장 아래 위치한 어학원에 등록해 독일어를 공부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압둘 와합은 이 부분은 게임적인 연출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난민들은 어학교육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생활비를 보조받기에 자신이 개인적으로 등록하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언어학습은 〈21Days〉의 중요한 요소로 언어능력이 모자랄 때, 일을 맡지 못하거나 노동 시 급료가 깍이는 패널티가 있다. 심지어 어학원 등록비는 40시리로 비싸다. 벌면 족족 어학원비로 나가도록 디자인되어 있어 이 게임의 난이도에 영향을 끼친다. 필자는 지속적인 언어학습이 없을 때 외국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압둘 와합에게 주었다. 노동도 하고 공부도 했으니 우리는 모하메드에게 음식을 먹이기로 했다. 더 싼 맥도날드가 있었으나 그곳에는 돼지고기가 섞인 음식이 많아 실제로도 무슬림들은 꺼려 한다고 한다. 첫날이니 아랍 음식점으로 가서 케밥과 허머스, 페투쉬, 팔라펠 중 무엇을 먹을 지 골랐다. 압둘 와합은 웃으며 비싼 음식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비싼 순서가 팔라펠→페투쉬→허머스→케밥 순서가 아니라 케밥(고기)→페투쉬(샐러드)→허머스(병아리콩으로 만든 소스형 음식)→팔라펠(병아리콩으로 만든 고로케) 순이 대충 맞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게임상에서 케밥은 가성비가 좋은 음식이니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케밥을 먹어야 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 2Days 어제보다 떨어진 멘탈 지수가 신경쓰였다. 혹시 지도상에 보이는 모스크에 가서 기도를 하면 이 수치가 올라갈 수 있을 지 궁금했다. 모스크에 가는데, 교통비가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게임에서 이동은 곧 시간과 돈을 소모한다. 궁금하다고 아무 곳이나 가기보다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스크에 가니 같은 처지에 있는 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대화 도중 모하메드는 “그래도 이 나라만큼 난민들을 환영하는 나라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압둘 와합은 게임에서 언급하고 있는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난민들 입장에서는 정말 좋은 사람이며, 훌륭한 정치가라고 평가했다. 메르켈은 각종 난민문제로 지지율이 흔들리는 가운데 뚝심있게 난민유입 정책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니 멘탈 수치가 올랐다. 압둘 와합은 한국에 와서 고국이 어려움에 휩싸일 때,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내 계획은 무엇이고 그 진행과정대로 진행하고 있는 지, 나는 왜 무엇을 위해 고생해야 하나 같은 질문을 던지며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게임에서 모스크에 가서 기도하는 일이 멘탈점수를 높이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귀가하는 도중 숙소 앞에서 노래하는 버스커에게 팁을 주었다. 무려 10시리나 되었기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주었다. 혹시나 독일인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압둘 와합은 멘탈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고독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결정이 게임 상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지 기대하며 우리는 버스커 친구에게 돈을 주었다. 그는 시리아에 파병된 아들을 둔 자로 훗날 자신이 일하는 라이브 카페를 소개해 주었다. -3 Days 아내가 보내달라는 200시리를 보내야 하는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의 사치?를 반성하고 일을 열심히 하기로 했다. 배고픔 수치가 절반 이상 떨어져도 계속해서 오전 오후로 일하기로 했다. 공사장에 일이 없어 레스토랑에 취직해 설겆이를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학원은 다니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급해도 공부를 멈추면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앞에는 난민을 혐오하는 남자가 “ㅁㅁ나는 무슬림”이라고 모하메드에게 외쳤다. 굶어가면 모은 돈 중 200시리를 아내에게 송금했다. 배고픔 수치가 너무 떨어져 있어, 싫어도 맥도날드에 가서 핫도그를 먹고 이른 잠을 청했다. - 4 Days 아침부터 교통비가 없는 상황이 되어 모하메드는 40분이나 걸려 모스크에 가야 했다. 압둘 와합은 별 다른 현지인 커뮤니티에 가입하지 못하고 직장과 모스크 정도만을 가야하는 게임안의 상황이 너무 리얼하며 동시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유럽식 레스토랑이 선택지에 생겼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고 동시에 돼지고기가 든 음식이 많았다. 게임 상에서 먹을 수는 있었지만 플레이어인 압둘 와합은 선택하지 않았다. 공원에 들려 “우리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는 노인을 만났다. 압둘 와합은 자신이 만났던 어떤 한국 할아버지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결국엔 그 사회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외국인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물론 공원에는 모하메드에게 선의를 보이는 시민도 있었다. 다시 돈을 벌어야 하니 공사장까지 걸어가 노동을 했다. - 5 Days 아내의 편지가 도착했다. 가방을 도둑맞아서 송금한 돈을 다 잃어버렸다고 한다. 가족에게 3일안에 다시 200시리를 보내야 하게 되었다. 교통비가 없어 역시 또 공사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오전 오후 일을 했으니 아랍식당에 가는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배고픔이 조금 가시면서 멘탈도 약소하게 오르게 되었다. 버스커 친구가 일하는 카페 블루노트에 갔더니 입장료 25시리를 지불하라고 한다. 술과 음악을 즐기는 현지인들을 부러워 하며 친구의 노래를 들었다. 취객 중 하나가 이민자였는데, 그는 모하메드에게 “어허 독해져야 해”라고 충고했다. 순간 매우 한국적인 충고라서 압둘 와합과 나는 한참 웃었다. 압둘 와합은 아직 해금되지 않은 지역 중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문화원과 유원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장소를 모하메드가 다녀야 그 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유지하고 멘탈도 건강해진다는 논리였다. 실제 본인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하메드는 이제 숙소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버스커 친구와 이런 저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고향에 있던 부모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압둘 와합은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대개의 나이든 부모님들이 피난을 고사하고, 젋은 자식들부터 탈출시켰다고 말해 주었다. - 6 Days 아내에게 돈 독촉하는 편지가 왔다. 플레이어에게 긴장감을 주려는 게임 내 장치는 이해되지만 돈 이야기만 들어야 하는 모하메드의 상황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맥도날드로 가서 가장 싼 햄버거를 먹었다. 조금 먼 곳에 주유소 일자리가 해금되어 있어 세차 일을 했다. 압둘 와합은 독일의 난민 정책은 실제로는 난민에 대한 직업훈련코스가 정비되어 있어, 게임처럼 공사장과 식당, 주유소 같이 일용직만 전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독일 외 지역 대개의 난민들은 저런 악순환 고리 속에서 바보가 되어가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공원에서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역시 또 난민혐오적 발언을 한다. 모하메드는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한다. 압둘 와합은 이 상황이 모하메드의 심성이 착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언행이라고 해석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뭔가 한탕을 노리는 룸메이트를 만났다. - 7 Days 주유소에 일이 없어 공사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을 계속 했더니 멘탈과 배고픔이 계속 떨어졌다. 아내에게 돈을 송금해야 하기 때문에 모하메드에게 밥도 먹지 않고 일만 시켰다. 이른 오후에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잤다. - 8 Days 아내로부터 브로커를 고용하기 위해 250시리가 필요하다고 편지가 왔다. 압둘 와합과 나는 모하메드의 멘탈과 배고픔 수치의 관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빠르게 일만 시키기로 했다. 배고픔이 거의 바닥을 치니 캐릭터는 느려지고 멘탈 수치는 점점 감소되고 만다. 모하메드는 공원의 할아버지와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IS에 대해 욕하고 있기에, 우리도 그 IS를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답변했다. 압둘 와합에게 이 할아버지의 생각이 혹시 바뀔 수 있을까 질문해보았다. 압둘 와합은 자신의 경험으로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하메드는 이 날도 녹초가 되어 잠이 들었다. - 9 Days 아내는 기차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고 연락을 했다.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남자를 또 숙소 앞에서 만났다. 배고픔과 멘탈 수치가 바닥이 치는 가운데, 일할 의욕도 공부할 의욕도 잃어버렸다. 모스크에 가서 간신히 멘탈수치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바닥난 멘탈과 배고픔에 모하메드는 일할 의욕을 잃었다. 멘탈수치를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카페 블루노트에 가서 음악을 들었지만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숙소로 이른 귀가를 했다. 룸메이트는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뭔가 나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잠을 잤다. 아내가 말한 250시리를 모으지 못한 상황이다. - 10 Days 아내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아들 압둘이 아프다고 한다. 오늘까지 반드시 기차표를 살 돈을 보내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 일할 의욕이 사라져서 모스크에 갔다. 약간의 멘탈 회복이 되어 공사장에 갔으나 결국 작업명령을 못 알아들어 사고를 치게 되었다. 급료가 깎였다. 결국 아내에게 보낼 돈을 다 벌지 못하고 숙소에 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룸메이트가 3층 카심의 방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겼다. 주인 없는 방에 가서 룸메이트 메흐디의 지갑이 떨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훔칠까 말까 고민하다 훔쳤다. 이것만 훔치면 아내에게 돈을 보낼 수 있으니까. 아내에게 송금하고 돌아오니 메흐디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화가 나 있었다. - 11 Days 아내가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했다. 내일까지 다시 200시리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모하메드는 멘탈도 체력도 바닥이 나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 12 Days 도저히 방법이 없어 모하메드는 모스크에 갔다. 멘탈 수치가 조금 올랐지만 돈도 없고, 여전히 배고프다. 어학원을 다닌 지 오래되니 공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도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내에게 송금하지 못했다. - 13 Days 아내와 아들에게서 소식이 없다. 모하메드는 이제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배드엔딩을 보게 된 압둘 와합과 나는 매우 허탈한 마음이었다. 우리는 모하메드의 가족이 도착하기 까지 21일 중 겨우 13일을 버틴 것이었다. 이 게임을 더 나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1Days〉는 일반적인 세이브 로드 시스템이 없었다. 완전히 새로 시작하거나 지난 날 중 하나를 선택해 그 이후의 날짜는 되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재플레이가 가능했다. 다음날 터키로 실제 출국을 앞 둔 압둘 와합이 사정상 빠진 이후, 필자는 게임 4일차로 되돌아 가 플레이 해 보았다. 하지만 게임 상의 모하메드가 겪는 현실은 소매치기의 유혹과 범죄가담 등으로 더욱 더 암울해져 갔다. 노동조건은 가혹해지고 건강상태는 나빠지니 필연적으로 옳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과 상봉하는 날짜가 다가오지만 내용상으로 결코 좋은 엔딩이 아니었다. 이 게임은 성실한 노동자가 된 모하메드의 행복한 가족상봉은 애초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스팀에 진열된 이 게임에 대한 평가로 누군가 ‘순진한 프로파간다’라고 적어놓았는데 세상에 프로파간다를 이렇게 암울하게 재현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난민들의 입장을 미화시키기는 커녕, 그들의 행동이 필연적으로 어긋나도록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깔끔하게 클리어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하여금 실패시켜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 게임 플레이 후 소감 1회차 게임이 끝난 뒤 압둘 와합에게 아래와 같이 질문하였다. Q: 난민문제에 대한 게임적 접근법에 대한 본인의 의견은? A: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뉴스나 영화도 좋지만 게임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이성이 분명 있다고 본다. 5년 전에 한 시리아 출신인 압둘라 알 카람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직접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난민 포비아와 이슬람 포비아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그는 플레이어들에게 게임을 통해 시리아 사태를 경험시켜 난민들에 대한 선입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압둘라 알 카람의 게임 [〈 Path Out 〉(2017)]의 초반부 한 씬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 시리아인의 평범한 생활상을 경험하던 중 플레이어는 도시의 골목에서 낙타를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플레이어는 당연히 낙타를 향해 타기 위해 돌진한다. 그 때 프로그래머는 게임 화면에 실사화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시리아인들이 낙타를 타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며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일갈한다. 게임 플레이와 다큐적 표현, 가벼움과 진지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도 그 때부터 게임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게이머 세대에게 게임을 통해 세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 Q: 〈21Days〉는 의도적으로 배드엔딩만을 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A: 그렇다. 아마도 이 게임은 난민의 고난을 체험시켜 현실을 환기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게임을 통해서 직접 당사자가 되는 경험을 주는 이런 시뮬레이션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개발자 분들이 난민이 하나의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을 테마로 후속작을 따로 만들어주시도 좋을 것 같다. (웃음) 중간 중간 모하메드가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데 실은 이런 결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이 높은 자는 범죄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는 디자인도 멋지지 않을까? Q: 게임적인 구조 안에서 희생되는 현실의 디테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이러한 현실적인 요소들 하나 하나 다 신경쓰다 보면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임은 복잡한 현실에 대한 최대한 단순한 구조적 분석을 바탕으로 하기에 중요한 것은 게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Q: 만약 이 게임에 해피엔딩이 가능하려면 어떤 요소를 추가해 달라고 말하고 싶은가? A: 게임 안에 희망(hope)이라는 수치를 추가하고, 모하메드의 선택지에 여행과 놀기를 집어넣어 반영하고 싶다. 실제로 이러한 장소들은 난민으로서 내게 큰 도움이 된 적이 있다. 현지 독일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음) 난민이나 이주노동자가 그 사회에 잘 적응하는 방법은 그 곳을 즐겁게 느끼는 일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이 게임의 주인공처럼 일만 하는 사람은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사례를 자주 보았다. 일만 하다가 멘탈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다. - 재현에서 아쉬웠던 점 압둘 와합은 모하메드가 게임상에서 아내에게 돈을 송금할 때 ATM기를 사용하는데, 실제로는 그리 용이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갓 난민지위를 얻은 자가 유럽밖으로 돈을 보내는 일에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다. 차라리 모하메드쪽에서 브로커를 고용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게임 상에서 아내에게 메시지를 받을 때, 컴퓨터 메일로 받는데 실제로는 스마트폰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내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동하는 가운데 컴퓨터를 쓰는 행위보다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편이 기동성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난민들이 되도록 좋은 스마트폰을 갖고 있으려는 이유다. - 게임과 사회 게임 플레이가 반드시 퀘스트 수락과 클리어만으로 이루어질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현실의 부조리를 시뮬레이션해 보다 나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해 설계될 수 있다는 것을 〈21Days〉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게임체험을 내적 구조 안에 갇힌 유희가 아니라 현실 밖으로 질문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여길 때 게임은 사회와 또 다른 연결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게임의 개념을 무엇이든 접속 가능한 매개의 개념으로서 상상하면 게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재미의 회로와 현실의 회로 사이를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발명중이며, 이 발명품들로 게임의 역사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계보를 가질 것이다. 옳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다름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21Days〉를 응원한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오영진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다. 가상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의 장소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 〈에란겔: 다크투어〉(2021.03.20-21)와 학술대회 [SF와 지정학적 미학] 연계 메타버스 〈끝나지 않는 항해〉(2012.06~19)를 연출했다. ​ ​

  • <본토템>과 AI 애셋 시대로서의 2023년

    < Back <본토템>과 AI 애셋 시대로서의 2023년 15 GG Vol. 23. 12. 10. 0 2023년은 전 세계의 게이머들에게 충만했던 해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이제 게임 회사들은 예전처럼 끈질긴 집념으로 놀라운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주들의 단기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더 놀라운 착취적인 비지니스 모델을 고안할 뿐이라는 근래의 냉소주의를 정면으로 반박이라도 하듯이, 준수한 게임들이 줄을 이어 출시했다. 특히 고전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를 즐겁게 플레이했으며 라리안 스튜디오가 만든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시리즈의 열광적인 팬이기도 한 사람으로서, <발더스 게이트 3>의 대대적인 성공은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지면서도 (crpg장르의 인지도를 고려할 때) 여전히 잘 믿기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다룰 게임은 <발더스 게이트 3>나 고티GOTY 후보에 오를 만한 여타의 대작들이 아니다. 나는 두 명의 형제가 주축이 되어서 개발한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 게임 <스테이시스: 본 토템>(이하 본토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명작들이 숨 가쁘게 쏟아지는 이 시점에 굳이 이름도 생소한 인디 게임을 조명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의 홍대병은 차치하고라도) 이 게임은 뒤틀린 2023년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과 무서울 정도로 미세하게 공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토템은 연말 행사들에서 벌어지는 소위 ‘갓겜’ 경쟁과는 별개로 GOTY라는 타이틀에 가장 걸맞은 작품이다.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쳐는 대략 60년 정도 되는 디지털 게임의 짧은 역사 내에서도 꽤 큰 지분을 차지할 만큼 ‘근본 있는’ 장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참신한 게임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올해 출시한 본토템 역시 기존 장르의 문법을 더 유저 친화적으로 유려하게 다듬을지언정 이 ‘오래된’ 장르를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시키는 식의 혁신추구형(?) 게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전 포인트 앤 클릭 게임들의 악명 높았던 픽셀 헌팅 1) 까지는 아니더라도 본토템은 여전히 많은 횟수의 헛된 클릭질을 요구한다. 퍼즐은 대부분 논리적이지만 종종 뜻밖의 조합을 통해서 해결되며, 유비소프트의 게임들처럼 친절하게 플레이어들의 손을 잡아 주지도 않는다. 따라서 진행이 막혔다는 느낌이 들면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는 아이템들을 하나씩 클릭해 보거나 나의 캐릭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다시 한번 클릭해 보는 것이 이 바닥의 일상이다. 그럼 다시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도대체 이토록 고루한 장르의 최신작이 올해의 게임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 본토템은 세 명의 캐릭터가 같은 시간대에서 각기 다른 공간을 탐험하는 (가끔 서로 만나기도 하는) 일종의 병렬적인 진행 방식을 채택한다. 플레이어는 언제든 세 캐릭터 사이를 옮겨 다닐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구조 자체보다도 캐릭터들이 아이템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장르의 특성상 아이템을 분해하거나 재조립하는 과정은 퍼즐을 풀기 위한 핵심적인 고리이다. 그리고 이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아이템이 최대한 간단하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만약 논다이어제틱(nondiegetic) UI 2) 에 크게 의존하는 게임이라면 특정한 캐릭터의 인벤토리 창에서 다른 캐릭터의 인벤토리 창으로 아이템을 드래그해서 옮기는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본토템에서 아이템을 전달하는 모습은 언뜻 봐서는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템을 마우스 커서로 집어다가 보내고 싶은 캐릭터의 프로필 위에 떨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은 이러한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한 이유가 그 세계 내에 존재하는 기술인 QSD(Quantum Storage Device) 덕분이라는 지점을 (예를 들면, 캐릭터들의 대화를 통해서) 명확히 짚는다. 즉, 내가 아무런 딜레이 없이 어느 아이템을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캐릭터에게 보낼 수 있는 근거는 그저 게임의 인터페이스적 편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세계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월드 빌딩의 맥락에 있다. 이렇듯 본토템의 다이어제틱 UI는 (매우 논다이제틱하게 느껴지는) 게임 아이템의 공유 기능을 세계 내에서 내러티브적으로 정당화한다. 이와 같은 전면화의 효과는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확장하는 세계다. 특히 아이템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능력이 서로 다른 캐릭터들에게 각각 할당되며, 어떠한 아이템이 퍼즐에 어떤 식으로 기여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양자 전송 물류(?)의 기반 위에서야 비로소 각 캐릭터의 플롯은 서로 맞물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임 플레이의 ‘최종 심급’에는 공급망이 자리잡는다. 놀랍지 않게도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보다 몇백 년은 과거인 2023년의 지구를 돌이켜 봐도 공급망은 여전히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다. 오히려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에는 공급망이 중요하지 않았나? 혹은 2024년에는 갑자기 공급망 이슈가 사라지게 될까? 말하자면 어째서 2023년인가? 공급망과 같은 방대한 개념이 2023년이라는 특정한 연도와 겹치는 교집합은 예측 가능성의 붕괴로 인한 불확실성의 폭발과 그로 인한 공급망의 대전환기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계화 시대의 물류는 예측 가능한 흐름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최적화다. 공급망이 국경을 넘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엮인 상황에서 특정한 지점의 병목 현상은 예상치 못하게 큰 파급 효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턴시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자 전송 물류의 위엄 따라서 팬데믹이나 국가 간의 전쟁과 같은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이벤트들은 이러한 공급망의 가장 취약한 고리를 끊어낸다. 모두가 알다시피 2023년은 바로 그와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직후의 세계다. 팬데믹은 올해 초에야 비로소 종식됐으며,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거의 2년 가까이 늘어지고 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가자 지구에서의 끔찍한 전쟁이 더해졌다. 많은 전문가들은 세계화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리쇼어링reshoring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코노미스트의 다음과 같은 데이터 3) 가 환기하는 것처럼 탈세계화라는 강력한 지정학적 유인마저 이미 세계화의 논리에 따라 배치된 공급망을 쉽게 재편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관건은 앞으로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와는 독립적으로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공급망 자체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반)세계화로의 ‘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에야 이 특정한 자의식은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길 것이다. 본토템의 게임 플레이가 촉발하는 수행적인 반복이 공급망의 내면화로 다시 이어지는 흐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확히 2023년과 오버랩된다. 플레이어는 평소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QSD’ 공급망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게임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더 이상 퍼즐이 쉬이 풀리지 않을 때, 비로소 아이템들을 ‘무의미하게’ 옮겨 보는 절박한 시도를 통해서 역으로 공급망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즉, 사후적으로 게임의 시스템적인 근간을 재인식한다. 어쩌면 2023년은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절박한 시스템 재인식의 계기를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든 다시 도래할지 모를 긴 망각의 시간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2 고전 crpg와 어드벤쳐 게임에 대한 디테일한 리뷰로 명성이 높은 유튜브 채널 MandaloreGaming은 지난 9월 15일 본토템에 관한 리뷰 영상 4) 을 업로드한다. 게임이 출시된 지 석 달이 훌쩍 넘은 시점에 등장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리뷰에 별달리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다른 여러 게임 웹진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어드벤쳐 게임 매니아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 게임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난 이 게임을 사랑한다'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필자는 다른 리뷰어의 권위를 빌려서까지 본토템이 훌륭하다는 것을 강변하고 싶나’라는 생각에 긴가민가할 것이다. 그런데 문장은 계속된다. 그는 바로 이어서 “which is why the cheap AI stuff pains me so.”(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된 싸구려 AI 에셋들이 날 고통스럽게 한다)라고 말한다. 즉, 이 게임에는 미드저니와 같은 생성모델이 만들어 낸 에셋이 다수 사용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게임 출시 후 1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유일했다. 그리고 리뷰 영상이 올라간 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본토템의 개발자는 X(전 트위터)를 통해서 직접 Mandalore에게 게임 내의 AI 에셋들이 전부 ‘맞춤 제작한’ 에셋들로 교체되었음을 알렸다. 5) 이 일련의 사태에는 의문스러운 지점들이 많다. 이를테면 많은 수의 전문 리뷰어들과 하드코어 어드벤쳐 게임 매니아들이 같은 게임을 플레이했음에도, 어째서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저품질의 AI 에셋이 쓰였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또한 개발사는 (마치 이러한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떻게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 모든 에셋들을 교체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렇게 교체할 예정이었으면 굳이 그러한 ‘날림’ AI 에셋을 써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궁금증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생성모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디 게임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던 레딧의 글 6) 을 통해서 우리는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이 글이 특히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글쓴이의 의견보다도 그가 공개한 밸브 사의 답변을 통해 스팀이라는 글로벌 플랫폼이 AI 에셋에 취하는 입장을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7) 밸브의 스탠스는 신중하고 유보적이다. 앞선 레딧 글에 대한 파장으로 밸브와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유로게이머의 기사 8) 에 따르면, 밸브는 생성모델이 한창 발전 중인 테크놀로지며 그 과정에서 혁신적인 무언가가 나오리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성 모델을 훈련하기 위해 데이터로 활용된 과거 작품들의 저작권과 소유권 문제 9) , 그리고 생성모델이 만들어 낸 결과물의 저작권 문제 10) 로 인해서 AI 에셋이 포함된 게임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생성모델이 ‘상상한’ 새로운 넌센스 언어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우리는 본토템의 출시에 관해 몇 가지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나는 법적인 문제로 민감해진 밸브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본토템은 출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11) 이는 그들이 사용한 생성모델의 에셋들이 주로 게임 속에서 줍게 되는 PDA 기기 스크린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AI 에셋이 게임의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게임 플레이 과정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심리적인 작용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개별적인 이미지만을 본다면 그 어설픔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지만 정성스럽게 구현된 세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로 마주한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길 가능성이 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에셋을 잡아내야만 하는 동기가 확실했던 플랫폼의 감시망을 피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째서 출시 이후에도 한동안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수 제작한 에셋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 역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화제가 되었던 레딧의 글과 그에 기반한 유로게이머, 테크크런치의 기사로 인해 밸브의 입장이 확고하게 드러나게 된 것은 본토템 출시 이후 한 달 뒤의 일이다. 이미 출시한 게임이 다시 내려가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에셋 교체 작업은 곧바로 진행되어야 했다. 혹은 스팀에 거절당한 레딧 글쓴이의 경우처럼 개발 일정에 쫓겨서 일단 생성모델로 대충 만든 에셋을 끼워서 먼저 출시를 한 다음에 교체하자는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벌어질 일이 아닌가? 특정한 게임에 대해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내 대답은 ‘그럴 필요가 있다’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와 흡사한 양태의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밸브의 확고한 입장과 조만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생성모델 관련 저작권과 소유권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일체의 분쟁과 잡음을 피하고자 스팀의 가이드라인대로 AI 에셋 없이 게임을 개발하는 가능성이다. 이 방향은 이미 몇십 년을 걸어온 익숙한 길이라 많은 개발사들이 따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신 버전의 생성 모델 12) 을 사용하는 동시에 마감까지 완벽하게 함으로써 AI 에셋을 포함했다는 사실 자체를 최대한 숨길 가능성이다. 생성모델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 가능성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더 힘들 것이다. 문제는 게임을 보고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이 두 시나리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은 (만약 그러한 차이가 실제로 있다면) 그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 낼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가청 주파수 내의 소리만 녹음한 음원과 가청 주파수를 넘어선 소리까지도 전부 포함한 음원의 차이가 인간에게는 무의미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결국 어느 시나리오로 가든 본토템의 출시와 같은 일들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러므로 본토템의 출시와 관련한 이야기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투입되기 시작한 생성모델의 에셋들이 게임 출시와 함께 전환기 특유의 그 어설픈 마감을 노출하는 2023년 고유의 사건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마치 인류세Anthropocene의 시작을 플루토늄 원소의 전방위적 확산이라는 특정한 물질적인 조건으로 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AI 게임 개발 시대의 시작은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아이러니한 해프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1년 전보다 극적으로 향상된 생성모델이 ‘생성’하는 에셋들을 품에 안은 앞으로의 게임들은 퍼블리셔인 플랫폼들의 감시망과 해결되지 않는 법적인 애매함 속에서 더 감쪽같은 모습을 뽐내며 등장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의 눈으로 AI 에셋을 구별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을 지금 막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1) https://tvtropes.org/pmwiki/pmwiki.php/Main/PixelHunt 2) 다이어제틱 UI와 논다이어제틱 UI의 결정적인 차이는 특정한 게임의 세계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예를 들어, 미니맵은 대표적인 논다이어제틱 UI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를 제외하고는 게임 세계의 그 누구도 미니맵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3) The Economist Staff, “Don’t be fooled by America’s “new” supply chains” The Economist 2023.11.14. https://www.economist.com/graphic-detail/2023/11/14/dont-be-fooled-by-americas-new-supply-chains 4) MandaloreGaming, “STASIS: BONE TOTEM Review” YouTube 2023.09.15. https://www.youtube.com/watch?v=l1dyox71Y7o&t=451s 5) Mandalore, X(formerly Twitter) 2023.09.15. https://twitter.com/Lord_Mandalore/status/1702709191498932242 6) potterharry97, “Valve is not willing to publish games with AI generated content anymore” Reddit 2023.06.06. https://www.reddit.com/r/aigamedev/comments/142j3yt/valve_is_not_willing_to_publish_games_with_ai/ 7) 다른 모든 플랫폼과 마찬가지로 스팀 역시 앱(게임) 출시 이전에 스크리닝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이 언제나 명백하고 투명하지는 않으며, 규정 및 지침에도 생성모델에 관한 내용은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다만 생성모델이 ‘생성’한 에셋의 경우, 게시할 수 없는 콘텐츠의 5번 항목인 “소유권이 없거나 적절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콘텐츠”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https://partner.steamgames.com/doc/gettingstarted/onboarding?l=koreana 8) Victoria Kennedy, “Valve says AI-generated content policy goal is "not to discourage the use of it on Steam"” Eurogamer 2023.07.03. https://www.eurogamer.net/valve-says-ai-generated-content-policy-goal-is-not-to-discourage-the-use-of-it-on-steam 9) Kyle Wiggers, “The copyright issues around generative AI aren’t going away anytime soon” TechCrunch 2023.09.22. https://techcrunch.com/2023/09/21/the-copyright-issues-around-generative-ai-arent-going-away-anytime-soon/ 10) Blake Brittai, “AI-generated art cannot receive copyrights, US court says” Reuters 2023.08.22. https://www.reuters.com/legal/ai-generated-art-cannot-receive-copyrights-us-court-says-2023-08-21/ 11) 각주 7에 등장하는 레딧 글쓴이는 6월 6일에 올린 포스트에서 한 달 전에 자신이 제출한 게임이 스팀의 스크리닝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썼다. 바꿔 말하면 적어도 5월 초부터 밸브는 생성모델이 연루된 에셋을 검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본토템은 5월 31일에 출시했다. 12) 이미 최신 버전의 생성모델들은 기존의 문제점으로 자주 언급되었던 사람의 손가락 같은 부분을 말끔히 재현해 낸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웜뱃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 ​

  • 〈디아블로3〉는 왜 ‘똥3’, ‘수면제’가 되었는가?

    < Back 〈디아블로3〉는 왜 ‘똥3’, ‘수면제’가 되었는가? 05 GG Vol. 22. 4. 10. 이 글은 〈게임과 공포 서사를 통해 살펴본 언어화와 공포의 비대칭적 상관관계에 대한 비교연구: 〈디아블로3〉, 현대 괴담, 고전 원귀서사를 중심으로〉(비교문학 86, 2022.2.)라는 표제로 공개된 논문을 웹진 형식에 맞추어 적절하게 개고한 글이다. 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15374 ‘갓겜’의 전락 누구든 이 글의 제목이 표시하고 있는 의문에 현혹되어 본문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그의 추억 속에서 디아블로가 스타크래프트와 마찬가지로 ‘민속놀이’에 준하는 반열에 올려져 있음직하다. 1) 특정 게임을 민속놀이에 비유하는 표현은, 물론 오래도록 익숙해진 대상에 대한 게이머들의 애정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어느 로맨스도 항상 분홍빛으로만 채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애정은 옅어지고 힐난과 혐오의 감정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변하게 된 것은 ‘나’와 대상이거나 양자가 달라지면서 마땅히 뒤따른 관계의 양상이지 ‘사랑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 대명사가 된 ‘똥3’. Google을 이용하여 ‘똥3’를 표제어로 삼아 검색해보면 무려 3천만 건 이상의 〈디아블로3〉에 관한 페이지가 결과로 주어진다(2022년 3월 현재 기준). 여기서 검토 가능한 정보들 대다수가 ‘똥3’을 곧 〈디아블로3〉의 대명사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확인된다. 이 글이 일단 주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변이의 순간이다. 2012년, 〈디아블로3〉가 발매되었다. 시리즈의 전작과 신작 사이에 놓인 십여 년의 격차는 팬들의 기대를 더욱 부풀렸다. 출시 직후부터 〈디아블로3〉는 블리자드 사의 다른 작품과 비교했을 때도 유례없이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2) 그만큼 성공가도를 달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유저들 의 평가는 기존과 사뭇 달랐다. 일각에서는 “〈디아블로3〉를 하면 할수록 졸음이 쏟아진다”라고 호소했으며, 캐릭터가 죽었는데도 이미 유저는 태연히 잠든 사진들이 ‘유머 짤’로 퍼지기 시작했다. 한 웹진에서는 〈디아블로3〉를 비롯해 이른바 ‘수면제’라 불리는 게임들의 숙면 유도 효과를 검증하는 내용으로 아예 기사 한 꼭지를 채웠다. 3) 그 어떤 저예산의 아마추어 게임일지라도 지루함을 분명히 몰아내기만 한다면 이 점 하나만으로 그 게임은 자기의 탁월성을 증명한다. 기본 조건을 〈디아블로3〉가 어겼다고 여기는 일부 유저들은 게임 타이틀을 아예 ‘똥3’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은 〈디아블로3〉가 잠을 부른다는 평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감하였음을 방증하면서도, 일종의 전락이라 이르기 충분한 낙폭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상당한 기대감을 아우르면서 출시 직후까지 ‘갓겜’으로 불리던 상황이 어느새 ‘수면제’, ‘똥3’이라는 조롱 성격이 가득한 밈의 유행으로 대체된 것이다. * 죽었습니다. 4) 위 이미지들은 PC방에서 〈디아블로3〉 플레이 중에 잠들어버린 유저와 플레이 화면을 지켜보던 중에 잠들어 버린 고양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중 캐릭터의 사망 상태를 알리는 문장은 게임 자체에 대한 은유로도 쓰인다. 공포의 공백: 무섭지 않다 〈디아블로3〉는 왜 ‘똥’이 되었는가? 지루함과 잠은 결과이지 원인일 수 없다. 사람들은 몇 가지 요인들을 꼽아보기도 한다. 시스템적으로 전보다 단순해진 레벨링, 한정된 배경의 던전을 계속 전전하는 파밍, 이 과정의 반복이 지나친 나머지 화면 연출이 암만 화려하고 맵이 아무리 임의로 생성되더라도 그것들을 단조롭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유저의 인지 상태 등이 그것이다. 반복 속에서 차이가 희소해질수록 지루함이 찾아드는 법이다. 그러나 반복은 전작들에도 포함되어 있던 요소였고 더욱이 반복으로 인해 결국 잠들고 말았다는 평은 전작들에 대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해서 기억하도록 하자. 물론 예의 레벨링 및 파밍에서 일어난 어느 변화가 신작의 흥미를 한껏 줄여버린 원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만 고려할 때 쉽게 놓치고 마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이 시리즈가 공포 요소를 상당히 강조하는 게임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따라서 〈디아블로3〉가 전작에 비해 더 이상 플레이 중에 공포가 체험되지 않는다는 지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전히 있는 것들이 현재에는 달리 작동해서 가져온 결과에 대해 논하는 것보다, 있었던 것의 부재가 지금 가져온 결과에 대해 먼저 살피는 것이 사태의 중층성을 파헤치는 초석일 수 있다. 요컨대 1996년 마지막 날에 발매된 〈디아블로〉는 던전크롤링과 핵앤슬래시의 구현에 충실했다. 가공할 만한 몬스터, 과장된 유혈, 잔혹하게 도살된 인간들의 형상이 탐험 공간 곳곳에 비치되어 있어서 공포와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에도 알맞았다. 이를테면 특유의 외침과 함께 등장하는 부쳐(butcher)와의 첫 맞대결에서 압살당한 경험은 여전히 유저들 사이에서 소름 끼치게 충격적이었다고 회자될 정도다. 2000년에 발표된 〈디아블로2〉는 여전히 신비를 잃지 않은 초월자들의 등장과 암흑에 가까운 공간 연출 등으로 유저의 긴장을 적절히 고조시키고 공포감을 부풀리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문제는 3편에서 이런 장점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과연 공포를 몰아냈을까? 이 자리에서는 다소 생경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언어화’다. * 부쳐(도살자)와 그의 소굴(〈디아블로 1〉). 훼손된 시체가 즐비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ah, fresh meat!’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막강한 적에 압도되어버렸던 그 순간을 유저들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이미지출처: Steve Burke, “Most Memorable Moments of the Diablo Franchise.” Gamers Nexus, 2012.5.14. www.gamersnexus.net/gg/844-most-memorable-diablo-moments 공백의 공포: 호러 바쿠이 디아블로 시리즈가 후속편을 이어가면서 나타낸 변화의 방향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띤다. 바로 온갖 언설과 언어적 존재들이 서사의 빈자리에 들어서며 늘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은 ‘최하층에 다다라 거대한 악을 물리친다’라는 단순한 목적을 곧 서사의 골자로 삼았으며 게임 체험의 거개를 전투로 채웠다. 유저가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 등의 정보가 NPC들에 의해 거의 최소한으로 주어지고, 악마의 출처나 살육의 목적도 모두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그리고 디아블로라는, 게임 타이틀이 가리키는 악마 자신이며 최대 숙적인 그는 마지막에 쓰러질 때까지 그 이름을 제외하고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비언어적이다. 1편에 비하여 2편은 세계관을 확대하고 세부적인 요소까지 규정했다. 선택 가능한 영웅 캐릭터들이 추가되었고 다변화된 지역을 배경으로 디아블로를 비롯해 그 형제들이 등장한다. 악마는 사실 오래전부터 천사와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으며, 더 강한 무력을 얻어 이 같은 쟁투에서 승리를 취하고자 인간 세계에 혼란을 몰고 왔다는 전사(前史)도 제시되었다. 이렇게 더 많은 사건과 내화(內話)를 배치하여 서사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면서도 다른 초월자의 존재, 세계의 기원 등 해명되지 않은 것들을 여럿 남겨놓음으로써 다음 편을 기대하도록 안배하기도 했다. 3편에서는 이야기의 구체성을 더하고 볼륨을 키우는 이러한 경향성이 굳어진다. 더 많은 캐릭터와 지역, 더 장구한 역사와 아티팩트, 다원화된 세계들 간의 더 깊은 갈등, 더 교묘한 음모, 더 복잡한 사연들이 새롭게 엮이고 관계를 형성한다. 작중 인물의 발화와 대화는 물론, 책자나 일지로 가장된 독백뿐만 아니라 시네마틱 영상, 내레이션을 통해, 이 이야기-언어는 인물 표현과 서사 부분에서 풍부함과 상세함을 더한다. 작중 해설가나 다를 바 없던 역을 담당한 캐릭터 케인이 죽음으로 퇴장한 이후에도 설명과 다변의 과잉상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살육과 폭력을 과묵하게 자행하던 악마도, 그런 악마를 저지하기 위해 분주하던 천사도, 모두가 자기에 대해 말을 (그것도 많이!)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디아블로 세계관이 낱낱이 해명된다. 그런데 이렇게 추가된 언설들이 아무리 다양해지고 서로 교차하더라도 그것들 사이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설명이 없던 부분에는 이야기를, 말이 없던 존재에게는 육성을 부가하는 방식으로, 이전 작들이 남겨놓은 서사상의 공백을 모두 메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두려움을 제작진들이 해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블리자드 사의 이 같은 행위 양상을 가리킬 수 있는 오랜 표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호러 바쿠이’이다. 이 관용구는 언필칭 그대로 ‘공백(Vacui)에 대한 공포(Horror)’를 의미하며, 어떤 여백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모든 자리를 패턴으로 채우려고 하는 특정 시기의 예술 양식이나 기법을 지시하기도 한다. 문제는 빈자리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채움의 강박이 과도한 언어화를 낳았으며 정작 게임이 전달할 수 있는 공포 정서를 축출해버렸다는 데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선 이러한 현상이 게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여러 영역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일러두기로 한다. * 호러 바쿠이 혹은 채움의 강박. Jean Duvet, 〈The Fall of Babylon〉 이미지 출처: Mads Soegaard, “Horror Vacui: The Fear of Emptiness.” Interaction Design Foundation, 2020.9. interaction-design.org/literature/article/horror-vacui-the-fear-of-emptiness . 16세기에 활동한 뒤베의 판화는 도상의 모든 면을 특별하게 의도한 알레고리로서 의미를 갖추도록 만들고 있다. 언어화는 공포를 잠식한다 “공포는 총성(bang)이 아니라 그것의 예측(anticipation)에서만 일어난다”라고 진술한 것은 히치콕이었다. 공포의 감정은, 감각과 언어로서 인지되는 사태의 바깥에 인간의 상상력이 미쳤을 때라야 어떤 예기(豫期)와 함께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 어떤 규정성과 동질성 너머에 놓인 상상의 공간, 이 빈자리야말로 공포가 당당하게 차지하게 되는 자신만의 영토다. 이는 공포가 공백에서 발생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는 근본적으로 의미의 담지체로서 규정성을 발생시킨다. 어떤 사태를 포착한 단 한 장의 사진에 인과관계가 담긴 이야기를 덧붙이자 그것이 사태의 의미로 대체돼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경험한다. 또한 언어는 인간의 인식, 사고, 정서, 행동 등에 담긴 질서를 근본적으로 반영한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적 존재로 재현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이미 인간적 질서를 공유하고 그것에 동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언어화는 규정성을 부여하거나 이질적 거리를 단축함으로써(즉 동질성을 확보하게 함으로써) 빈자리를 채운다. 이러한 사실들은 〈디아블로3〉의 과잉된 언어화가 이미 잘 드러내주고 있기도 하다. 세계관, 전사(前史), 배경에 대한 다변들은 결국 게임 내 세계, 악마와 괴물, 천사에게서도 신비함을 탈각한다. 그들이 미지의 존재가 아니게 됨으로써 그들은 공포의 영역에서도 추방을 당한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구석을 찾아볼 수 없게 된 대상은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성가시거나 혹은 친근한 존재가 될 뿐이다. 경외와 두려움은 동근원적이다. 그리고 미지의 존재와 세계는 그 정체가 밝혀짐과 동시에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우리에게 친숙해지고 만다. “ 그래서 떨어졌습니다. 내 의지로.” (〈디아블로3〉). 대천사 티리엘은 스스로 날개를 찢고 지상으로 떨어진다. 이 하강은 초월적이고 비의적 존재에서 인간적이고 탈신비화된 존재로의 변신이기도 하다. 미지의 대상이 설명됨으로써 정체가 폭로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언어적 존재로 변하여 묘사될 때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이어진다. 악마와 천사들은 〈디아블로3〉에 이르러 무척이나 수다스러운 존재로 나타났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꺼리는지, 무엇을 의심하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그들은 말한다. 이와 동시에 악마와 천사는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게다가 악마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그 악마를 격퇴시키기 위해 진격하고 있는 유저 자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저가 공포를 느끼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공포에 떨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심지어 우리 자신이 유발하는 공포에 의해 떨고 있는 그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민속놀이’의 부흥을 기대하며 지루함이나 잠은 공포와 대척점에 서 있다. 어떤 것이 충분히 음산하고 무섭다면, 그것은 우리를 잠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공포를 다루는 많은 매체들이 ‘잠 못 드는 밤’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요인들도 물론 고려해야 할 테지만 ‘수면제’나 ‘똥3’이라는 밈에는 〈디아블로3〉의 과도한 언어화로 인해 공포를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반영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포는 공백과 짝을 이루어 실현되며, 언어화는 공백을 메움으로써 공포를 비워버린다. 이처럼 단순한 진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수많은 괴담이나 호러 영화를 두고 의식적으로 연결하여 공통된 특성을 골라내 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해원(解冤)을 모티프로 삼은 고전적인 귀신이야기는 어떠한가? 사람을 사로잡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귀는 그저 공포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 악귀가 어떤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지 스스로 호소하며 탄원하는 순간 우리의 두려움은 줄어들고 급기야 달아나버리기까지 한다.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나폴리탄 괴담류’들은 어떠한가? 그중 성공적인 것들은 이야기-언어로 공포가 둥지를 틀 수 있는 인지상의 공백을 만드는 기교를 구사한다. 즉 규정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 상대적인 빈틈을 절묘하게 주조하면서, 그 빈틈에 어떤 경악할만한 것이 있을지 우리가 예감하도록 하여 심리를 불안하게 자극하다가 서서히 스며드는 공포 한가운데로 우리를 포획하고 마는 것이다. 공포 구현에 있어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했던 여타의 매체나 작품들이 후속편에 이르러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둠〉은 호러 요소로 과거 큰 인기를 끌었고 세기를 넘어서도 리부트를 비롯하여 새로운 후속편들을 다수 이어갔다. 그러면서 서사의 연장ㆍ삽입, 세계관ㆍ인물ㆍ사물에 관한 설정과 관계망의 추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공포가 발원하는 자리인 공백을 그러한 설명과 규정성의 과잉이 잠식해버린 결과에 대해 이 자리에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편 지난 여름 〈디아블로2 레저렉션〉의 공개는 오랜 향수와 함께 신선한 열기를 불러왔다. 〈디아블로3〉가 출시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상황에서 시리즈 후속작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제작진이 네 번째 작품을 더욱 어둡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5) 이것이 인상적인 까닭은 3편에서 공포의 부재를 가져온 그들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작품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디아블로4〉가 그들의 계획대로 ‘갓겜’의 진면목을 이어가는 데 성공하려면 언어적 미니멀리즘은 불가결하다. 1) 특정 게임을 민속놀이로 일컫는 용례 가운데 하나는 다음 기사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삼대가 즐기는 한국 민속놀이 ‘스타크래프트’〉, 《게임톡》, 2019.1.29. gametoc.hankyu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0637; 리마스터 판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 2021년 여름 공개된 후 일대 선풍이 한동안 일어 디아블로 역시 민속놀이에 비유하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으나 대세를 이루지는 못했다. 2) 〈디아블로3〉는 출시 첫날 350만 장, 1주일 후 630만 장 판매량을 보였다. 발매가 이뤄진 2012년 한 해 동안의 글로벌 판매량은 약 1,200만 장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계측이 이뤄진 2013년 당시 기준으로만 보아도 전작 〈디아블로〉와 〈디아블로2〉를 합친 것을 압도한 수치였으며, 〈스타크래프트〉의 기록마저 넘어선 것이라고 한다. 〈'디아블로3' 1200만 장 판매, 확장팩 발표 없었다〉, 《머니투데이》, 2013.2.8. news.mt.co.kr/mtview.php?no=2013020814008169621 3) 〈한 판만 해도 꿀잠…최고의 수면제 게임은?〉, 《데일리게임》, 2016.11.2. game.dailyesports.com/view.php?ud=2016110117545981392_26 4) 이미지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은 웹페이지들이며, 오래전부터 이들 밈이 광범하게 유포되었기에 원출처를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작용 없는 완벽한 수면제〉(유머 게시판 사용자 콘텐츠), 《루리웹》, 2018.10.04. 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44/read/39367858, 〈죽었습니다〉(유머 게시판 사용자 콘텐츠); 《이토랜드》, 2019.9.12. etoland.co.kr/bbs/board.php?bo_table=etohumor02&wr_id=650119&mobile=1 5) Andy Chalk, “Blizzard is trying to make Diablo 4 characters look cool while keeping them ‘grounded in reality’.” PCGAMER, 2021.7.1. pcgamer.com/blizzard-is-trying-to-make-diablo-4-characters-look-cool-while-keeping-them-grounded-in-reality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장지영 한국어문학을 전공으로 삼아 주로 근대 비평과 문화사를 공부했으며 식민지 시기 및 해방기의 학술과 관련한 지성사 연구를 이어왔다. ‘게임보이’로서 지냈으나 게임을 잘/많이 하지/알지 못했음을 뒤늦게 안 게이머이다.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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