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결과
"" 검색 결과: 529개의 아이템
- 떨리는 몸으로 플레이하기: 기대, 탐험, 그리고 인식
< Back 떨리는 몸으로 플레이하기: 기대, 탐험, 그리고 인식 19 GG Vol. 24. 8. 10.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간다. 내 발소리와 금속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끼익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너머의 어둠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음 방에 들어서자,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훼손된 사람의 신체가 불빛에 드러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 모습에 나는 속이 메슥거린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시나리오는 유사한 형태로 여러 게임에서 발견된다.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는 초자연적인 시나리오에서 오는 긴장감, 보이지 않는 적에게 쫓기는 가상의 위협, 바디 호러(body horror) [1] 에서 오는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감정을 성공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디지털 게임은 종종 영화에서 익히 활용되던 서사적 동기를 차용해 그와 유사한 기대와 경험을 창출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게임의 특수한 성격, 구조, 상호작용, 분위기 그리고 가상 환경에서의 직접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은 ’공포 게임(horror game)’을 하나의 별개의 장르로 이해하게 한다. 고어(gore) [2] 함으로 가득 찬 전투게임부터 서사적 장치를 통해 심리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것까지 다양한 하위 범주를 포함하고 있어, 디지털 게임에서의 공포 경험을 개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디지털 게임에서의 ‘기대 형성’, ‘탐험과 호기심’, 그리고 ‘신체 인지’라는 디지털 게임에서 공포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인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감정과 호기심 공포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경험을 살펴보기 전에, 이 공포 게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아마도 거의 불가능한 시도일 테지만 말이다). 공포 게임이라는 장르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의 난점은 그것이 매우 다양한 하위 범주를 가지고 있고, 그 범주 간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Black Salt Games, 2023)나 (베데스다 소프트웍스, 2017)와 같은 게임들은 ‘호러’의 익숙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이 ‘공포 게임’ 장르에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온라인상에서의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공포 게임을 ‘무섭고 위협적이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분위기의 게임’이라는 매우 포괄적인 정의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호러 미디어(horror media)’ [3] 와 같이, 공포 게임은 현실 규범을 벗어날 수 있는 서사적 공간을 제공한다. 이들은 플레이어에게 긴장감, 불확실성, 혐오감, 충격 등의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를 목표한다. 플레이어들에게 공포 게임은 강렬한 자극을 느낄 기회로, 우리는 공포 게임을 통하여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고자 하고자 비정상적이고 끔찍하고 무서운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험한다. 한편, 서사만이 이러한 목표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 청각(음악, 효과음), 드물게 촉각 등 게임의 모든 감각적 요소는 플레이어의 강렬한 감정을 일깨우는 걸 목표로 설계된다. 그리고 특정 하위 장르에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요소를 통하여 공포 게임에 대한 초기의 간략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공포 게임은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기를 목표하며, 이는 우리의 자연적,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위협적이고 무서운 것에 대한 인식과 미지의 것에 대한 (무시무시한) 호기심을 가지고 플레이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경험에 기여하는 특정 측면에 대하여 더 깊이 탐구하고자 한다. 기대감을 관리하기: 참고와 기대 놀랍지 않게도, 공포 게임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포를 다루는 다른 미디어(특히 영화)와 그것이 수용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일반적인 범주와 일치한다. 공포 게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은 호러 미디어 일반과 이전에 경험한 다른 공포 게임에 의하여 사전에 조건 지어지는데, 게임 디자이너들은 여타 미디어를 통해 익숙해진 ‘공포스러운 요소’를 디자인에 사용함으로써 플레이어들이 참고할 만한 것들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안개로 뒤덮인 버려진 마을을 보는 순간 우리는 즉시 무서운 상황이 닥칠 것을 예상한다. 이는 우리가 동일한 모티프를 여러 공포영화나 소설, 그리고 공포 게임 장르의 선구적인 게임인 <사일런트 힐>(코나미, 1999-)에 걸쳐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댄 핀치백(Dan Pinchback)은 ‘호러 이미저리(horror imagery)’ [4] 를 다루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를 “참조에 의한 호러”(2009, p.81)로 설명한다. 저택, 지옥의 악마, 또는 언데드 등을 공포 미디어에서 익숙하게 마주하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를 즉각적으로 이전의 호러 경험과 연결 짓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게임은 핀치백이 “표현의 수준”(2009, p. 81)이라 언급한 것을 포괄한다. 표현의 수준이란 우리가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를 더하는 디자인적 요소를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주변 환경의 시각적 디자인, ‘비정상적’으로 인식되는 적과 NPC들, 게임의 공포를 다차원적인 감각 경험으로 만드는 음향 디자인이 포함된다. 이는 또한 자원 부족, 전설(lore)에 대한 숨겨진 단서, 적을 피하여 숨어야 하는 일, 그리고 ‘점프 스케어(jump scare)’ [5] 에 대한 기대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요소에 전적으로 기대어 ‘공포’를 디자인하는 것은 게임을 뻔하고 지루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를 선택적으로 잘 활용한다면 플레이어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플레이어의 기대가 반드시 맞아떨어질 필요는 없지만, 위와 같은 요소에 익숙해지는 건 우리가 공포 게임에서 원하고 기대하는 일에 영향을 준다. 핀치백이 호러 이미저리에서의 익숙한 패턴과 참조점을 바탕으로 "우리가 이미 그것이 무섭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를 공포스럽게 느낄 것”(2009, p. 81)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지의 환경을 탐험하기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문학이나 영화를 포함한 호러 미디어 전반에 적용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공포 게임에만 적용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다루어보고자 한다. 무서운 환경을 단순히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공포 게임을 플레이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탐험하고 있는 그 가상 세계를 알아가는 데에 흥미를 느낀다. 특히 생존 공포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놓인 환경 그 자체는 분명히 주어진 적보다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생존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점진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게임에서의 ‘일반적인 호기심(general curiosity)’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플레이어의 동기로부터 설명할 수 있지만, 그에 더 나아가 ‘병적인 호기심(morbid curiosity)’(Scrivner, 2021)은 역겹고 끔찍하며 파괴적인 것에 매료되어 게임 세계를 더 자세히 파고들고자 하는 몇몇 플레이어들의 욕구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디지털상에서의 공포 게임은 곧바로 이해할 수 없는 시나리오를 제공하여 플레이어의 탐구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하고 이러한 유형의 호기심을 장려하는데, 플레이어는 이렇게 친숙하지 않고, 알 수 없고, 위협적인 환경의 새로운 정보를 밝혀내야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영화와 같은 다른 공포 미디어의 서사 역시 점차 새로운 정보를 공개하고 수용자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직접 그 정보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목격할 뿐이다. 한편,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환경을 직접 탐험한다. 이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이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문서, 기록, 낙서, ‘이스터에그(easter egg)’ [6] 등 비디오 게임의 요소로 고려한다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모두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환경을 탐험하는 것을 독려한다. 게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플레이어의 탐험은 그가 무서움을 느끼는 것에 기여할 수 있으며, 이는 특히 실체화된 적을 활용하기보다는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게 하고 전반적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심리적인 공포 게임에서 더욱 그렇다. 이와 같은 탐험을 뒷받침하는 기술적인 디자인 측면은 <파스모포비아>(2020, Kinetic Games)나 <제로>(2001-, 테크모)와 같은 게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는 처음에 황량한 공간만이 펼쳐져 있을 뿐인데, 플레이어는 게임 안의 도구를 사용해야만 그를 둘러싼 초자연적인 힘을 엿볼 수 있으며, 결코 전체 상황을 완전히 통찰하거나 지속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특히 <파스모포비아>의 경우 플레이어는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유령 말고는 무엇이 나타날지 알지 못한 채 공간에 들어가서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나씩 밝혀내야 한다. 디지털 게임은 이상의 도구를 플레이어의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다. <소마>(2015, 프릭셔닐 게임즈)에서는 치명적인 몬스터가 접근하면 플레이어의 아바타에 시청각적인 경고(glitch)가 가해진다. 이 신호는 또한 컨트롤러의 진동을 통하여 플레이어가 위치한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되는데, 그를 통하여 플레이어는 상황을 보다 제어할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위협은 진동을 통하여 우리의 감각적 인식에 스며든다. 공간을 공포스럽게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감각 요소와 HUD(Heads-Up Display) [7] 를 통하여 플레이어에게 제공되는 정보의 양, 그리고 이것의 존재 여부와 관련이 있다. HUD는 탐색과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에 플레이어에게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제공해 준다. <데드 스페이스>(2008, EA)처럼 HUD를 다이제틱(diegetic) [8] 하게 만들면 가상 환경에 더 잘 몰입할 수 있고, 이를 제거하거나 줄인다면 플레이어는 나약하고 상황 통제력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실제로, 다른 게임 카테고리와 비교했을 때 공포 게임에서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는 HUD가 축소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림보>(2010, 플레이데드)를 예로 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이미 부분적으로 불분명한 게임의 플롯(polot)으로 인하여, 체력 바, 지도, 힌트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추가 정보 없이 2D 세계로 던져진다. 우리는 게임의 주인공 말고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때 탐험은 미지의 세계에 익숙해지고, 끔찍한 사건의 원인을 밝혀내거나, 처음에는 무적처럼 보였던 적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등 점진적으로 통제력을 되찾는 방법이 되어준다. 이전 단락에서도 암시되었듯이 여기서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주변 환경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놓인 환경과 안전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겁을 먹어야 한다. 체화된 인식 디지털 게임, 특히 공포 게임에 대한 경험은 정신적일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이기도 하다. 게임의 분위기, 행동, 서사는 플레이어의 신체적인 반응에 반영되는데, 우리는 점프 스케어에서 움찔하고, 극단적인 폭력을 목격할 때 몸이 수축하며, 적과 싸우거나 도망치려고 할 때 근육의 긴장을 느낀다. 우리는 가상 공간에서의 아바타의 경험을 신체적인 차원으로 연결하며, 플레이어의 몸은 신경 차원에서 가상의 몸이 경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따라서 게임 안에서의 이벤트는 인지적 또는 감정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신체를 통하여 경험되며, 이 물리적인 신체는 가상의 신체와 공감적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지금까지 소개된 공포 게임 경험에 관여하는 요소들은 한 데 모아 이해할 수 있다. 모두는 부분적으로 신체적 경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맥스 리나넨(Max Ryynänen, 2022)의 신체 영화 이론(somatic film theory)에 기반하여 공포 게임을 신체적인 미디어(somatic media)로 이해해 보면, 특정한 분위기나 물질적 요소들은 실제의 신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설계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다시 한번 영화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디지털 게임의 시청각적-촉각적 지각과 가상 신체를 통한 행동이(영화에서처럼 단순히 목격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현상을 강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하여 가상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칼리스토 프로토콜>(2022,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스튜디오)의 개발자인 글렌 스코필드(Glen Schofield)는 인터뷰에서 아바타의 신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가상 신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3인칭 시점이 아바타의 신체 지각에 중요한 요소임을 지적했다(Kim, 2020). 가상 몸의 경험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를 시각적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둠>(1993, 이드 소프트웨어)의 상징적인 상태 표시줄(status bar)이나 [9] <소마>에서 거울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인칭 시점에서는 캐릭터의 가상 신체에 대한 지각을 하기 어렵다. 신체적 지각(somatic perception)은 아바타의 몸 자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주변 환경과 그 안에서 목격된 것에도 적용된다. 이는 몸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게임에서 더욱 명확해 지는데, 플레이어는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크로넨버그적인 돌연변이(Cronenberg’ian mutants) [10] 나 <더 이블 위딘>(2014, 탱고 게임웍스)의 절단된 신체를 반드시 시각적으로 인지할 필요는 없으며, 사운드나 드물게 있는 불쾌한 진동으로도 비정상적이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지각하고 있는 것이 더 불쾌하고 혐오스러울수록, 우리의 신체 반응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플레이어의 친숙함이 경험의 강도에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말이다. 비정상적인 변형과 혐오스러운 행위를 목격할 때,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어느 정도 실제인 것처럼 반응한다. 우리는 몸이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무언가를 무섭고 혐오스러우며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디지털 게임의 경우 이러한 신호는 예상되는 것이며, 강렬하고 흥미진진한 플레이의 일환이다. 요약: 호러 미디어, 게임, 그리고 경험 요약하자면, 일반적으로 공포 게임과 호러 미디어는 실제의 위험 없이 강렬하고 끔찍하며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고자 하는 우리의 호기심에 호소한다. 공포 게임은 트랜스미디어적인 참조가 일어나는 그물망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영화, 문학, 설화 등의 공포 문화(horror culture)는 우리의 기대와 게임 플레이 경험을 조건 짓는다. 즉,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의 경험은 각 문화에서 무섭다고 인식되는 것, 우리가 읽은 문학 작품, 감상한 영화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런데도 공포 게임과 일반 미디어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특히 에이전시(agency) [11] 경험과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그러한데, 우리는 가상 환경에서의 대리자를 통하여 단순히 관찰자로 남지 않고 상호작용하고 탐험하면서 통제력을 얻거나 잃는 느낌을 동시에 경험한다. 여기서 소개된 대부분의 요소는 공포 게임의 세부적인 하위 카테고리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다소 광범위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신체적 반응의 양상을 살핀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포 게임의 일반적인 정의를 찾아낼 수 있다. 공포 게임은 무엇보다도 우리 몸이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반응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그러한 반응을 경험하기 위하여 플레이되는 게임이다. 참고문헌 Kim, M. (2020) The Callisto Protocol Wants to be The Scariest Next-Gen Horror Game Ever. Available at: https://nordic.ign.com/news/42235/the-callisto-project-wants-to-be-the-scariest-next-gen-horror-game-ever . Pinchbeck, D. (2009) ‘Shock, horror? First-person gaming, horror, and the art of ludic manipulation.’, in Horror video games: essays on the fusion of fear and play. Jefferson, NC: B. Perron, pp. 79–94. Ryynänen, M. (2022) Bodily Engagements with Film, Images, and Technology: Somavision. 1st edn. New York: Routledge. Available at: https://doi.org/10.4324/9781003248514 . Scrivner, C. (2021) ‘An Infectious Curiosity: Morbid Curiosity and Media Preferences during a Pandemic’, Evolutionary Studies in Imaginative Culture, 5(1), pp. 1–12. Available at: https://doi.org/10.26613/esic.5.1.206 . [1] 바디 호러(body horror는 사람의 신체를 기괴하게 변경시켜 공포감을 자극하는 장르를 의미한다. [2] 고어(gore)는 잔인함을 통하여 공포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르를 의미한다. [3] 호러 미디어(horror media)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일으키기를 목표하는 미디어 일반이다. 본고에서 저자는 주로 공포소설, 공포영화 등의 다른 미디어를 공포 게임과 대조하기 위하여 위의 용어를 사용한다. [4] 이미저리(imagery)는 상징을 통하여 만들어진 심상이나 다른 종류의 감각적 인상을 의미한다. 주로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심리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출처: Oregon State University (2019). What is Imagery? 링크: https://liberalarts.oregonstate.edu/wlf/what-imagery-definition-examples [5] 점프 스케어(jump scare)는 주로 수용자를 갑작스럽게 놀라게 하는 기법으로 공포영화나 공포 게임에서 자주 사용된다. [6] 비디오 게임문화에서 이스터에그는 마치 부활절 계란처럼 제작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메시지를 의미한다. [7] 비디오 게임에서 HUD는 상태(status)를 비롯한 정보를 플레이어에게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다. 출처: webopedia (2021). HUD – Heads Up Display. 링크: https://www.webopedia.com/definitions/hud/ [8] 다이제틱이란 인터페이스의 요소가 실제로 게임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가 예시로 든 <데드 스페이스>는 디이제틱 UI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출처: Game Developer (2010). Game UI Discoveries: What Players Want. 링크: https://www.gamedeveloper.com/design/game-ui-discoveries-what-players-want [9] <둠>의 상태 표시줄 중앙에는 게임 내 플레이어의 상황을 반영하는 캐릭터의 얼굴이 표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체력이 감소하면 얼굴에서 피가 난다. [10] 여기서 크로넨버그란 영화 감독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를 의미한다. 그는 잔혹함과 폭력성에 대한 묘사와 내세우는 변형·변신체들의 괴기스러운 형상으로 유명하며, 바디 호러 장르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11] 에이전시(agency)는 플레이어가 게임 내에서 의사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여 게임 세계와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개념에 자주 동반되는 에이전트(agent)는 일반적으로 게임 내에서 행동을 수행하는 주체를 뜻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아스카 메이어 핀란드 탐페레 대학교(Tampere University)의 게임연구소(Game Research Lab)와 핀란드 CoE(Centre of Excellence in Game Culture Studies)의 박사과정 연구원이다. 디지털 게임과 기술에서의 신체 인식, 아포칼립스 미디어를 연구하고 있다. (게임연구자) 이연우 함께하는 게임에 관심을 가지고 게임의 관계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게임으로 다함께 즐거워지길 바랍니다.
-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 Back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의 순간 12 GG Vol. 23. 6. 10. 게임적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이성(多异性) [1] 의 순간 游戏性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 [2] 리얼리즘의 탄생은 근대 이래 과학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다양성, 사회적 상호작용의 게임화는 리얼리즘과 과학주의 간 긴밀한 관계를 위협하고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것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게임적 리얼리즘(ゲーム的リアリズム)’ 이론은 그 안에 이론적 균열과 논리적 모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로하여금 리얼리즘 내러티브라는 문제와 침묵하는 독자를 자율적인 행위자로 바꾸는 게이머 문제를 사고하도록 해주었다. 디지털 게임 속에서 리얼리즘적인 스토리 시간과 내러티브적 시간이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읽는 시간 즉 ‘제3의 시간’, ‘노는’ 시간이 구해진 것이다. 실제 세계로부터의 신체적인 충동이 게임 행동의 핵심으로 전환되고, 리얼리즘 내러티브의 정신적 이끔이 게임적 리얼리즘의 감각적 이끔으로 대체된다. 행동을 주도하는 의미생성 방식이 그 핵심이 되는 것이다. 게이머는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됐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비디오게임의 디자인, 소비, 상벌,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파노라마적인 지식의 환각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게이머는 신체의 감각에 빠져 파노라마 지식 환각의 의미를 조각화, 껍데기화하는 것에 전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내러티브에서 게이머의 행동 중 어느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불안정한 ‘다이성’을 나타나게 된다. 이제 가상현실은 메타스페이스에 도달하였고, 이곳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게임적 방식’으로 개인의 일상 경험에 몰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은 이제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라, ‘리얼’이다. 즉, 인류의 지식에서 배제됐던 ‘게임’은 “자유의지”(Immanuel Kant), “심리상태의 경계”(Friedrich von Schiller), 혹은 “정력의 과잉”(Herbert Spencer)의 게임이 되고,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지적 경험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 “게임을 통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식”이 됐음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메타버스는 일상의 잉여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인류 일상의 이념을 변화시켰다. 세 가지 리얼리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角色独立)’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본 연구자 아즈마 히로키가 창안한 개념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개념의 정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이나 오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와의 대담을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세 가지 리얼리즘을 언급했다. 그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연구가 자연주의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두 가지 리얼리즘을 도출했다고 봤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 꼭 에밀 졸라(Émile Zola)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유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했던 순수문학의 한 형태로서 ‘사소설(私小說)’을 지칭한다. 오오츠카 에이지에 따르면 사소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적 발화 주체인 ‘나’를 갖고 있으며, ‘나’가 스토리의 논리와 구조에 따라 발화하는 소설이라고 언급한다. 한편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라이트노벨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나 캐릭터, 스토리, 플롯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발화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트노벨의) 작가는 캐릭터 자체에 얽매이는데, 오타쿠들이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속의 ‘2차원’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라이트노벨은 사소설이 한 명의 ‘나’로 소설을 통제한다는 의식을 바꿔버렸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오츠카 에이지의 두 가지 리얼리즘 구분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자연주의 리얼리즘이든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든 작금의 현실을 완전히 드러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즈마 히로키는 이 새로운 리얼리즘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르면서 세 가지 리얼리즘의 분류를 완성했다. 그렇다면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게임적 리얼리즘과 만화·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은 모두 ‘캐릭터’가 핵심이지만, 게임적 리얼리즘의 경우 캐릭터의 메타서사 기능(메타적 스토리성)에 기초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포인트는 여전히 “캐릭터 독립”이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故事)는 플롯(情节)이나 현실 때문에 설정되는 게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위해서 설정되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감동적인 순간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속 캐릭터의 삶과 상태를 느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사실 캐릭터가 게임적으로 존재함을 가리키며, 이는 게이머나 독자가 자유롭게 캐릭터를 이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메타서사’를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게임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곧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신체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를 제거하고, 게이머/독자를 텍스트의 일원으로 만드는 방식——게이머/독자의 캐릭터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캐릭터’ 독립의 관점으로부터 설정되는 게임적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측면을 망각하는데, 공교롭게도 ‘캐릭터 독립’은 독자가 읽고 소비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독자가 캐릭터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기 때문에 스토리 설정의 내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독자가 원하는대로 캐릭터를 위한 스토리를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침묵하는 독서인이 아니라 ‘게임을 열독하는’ “게이머”가 된다. 따라서 ‘캐릭터 독립’은 읽는 행위의 문제를 지향하는데, 독자들이 이와 같은 캐릭터 독립을 원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독립할 것이란 점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텍스트에서 독자의 의지는 얼마든지 이야기의 의지(그것이 존재한다면)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사람과 캐릭터가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며, 즉 독자(게이머)가 캐릭터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에서도 발생했지만, 가상현실 시대에는 더욱 전형적으로 변화했다. 가상현실 서사 [3] 에서는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들의 삶의 경계는 점차 통합되며, 이와 같은 인간과 머신의 공생은 새로운 캐릭터 의식을 낳았다. 근대 이후 과학적 진실에 대한 요구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내러티브 속 캐릭터의 ‘재생’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회의 요구가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을, 가상현실 시대에 인간과 가상 캐릭터의 일체화가 게임적 리얼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새로운 현실 경험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가상의 형식으로 실제의 신체적/정신적 경험을 창조하기 때문에 가상세계의 경험은 실제 생활 경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뿌리는 바로 ‘게이머’ 자체다. 게이머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의미를 잠재적으로 구성하고, 실제 텍스트 활용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텍스트 활용 과정을 게임적 리얼리즘의 핵심으로 만들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게임적 리얼리즘은 단순히 장르(genre)나 형식(style)이 아니라, 가상현실 자체를 지향하는데, 이때 ‘게임적 리얼리즘’은 가상현실의 철학 이념과 스토리텔링의 규칙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캐릭터 독립’이란 곧 읽는 행위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캐릭터 독립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독자가 이와 같은 독립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의 2차원적 내러티브에서 캐릭터가 꼭 이야기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이야기가 결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 즉 라이트노벨에서는 캐릭터의 성격이 플롯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은 사소설과는 다르다. 사소설이 작가 중심적이라면, 라이트노벨은 독자 중심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독자들의 활용(물론 완전히 자유로운 활용은 아니다)은 캐릭터에게 자율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며, 모든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중복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자신을 바꾼다. “제3의 시간” : 사람의 게임,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서 게이머로 나아가 게임적 리얼리즘은 캐릭터의 독립을 통해 그동안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독서 행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가상현실 시대의 비디오 게임 서사는 언제나 행동 주도로 이뤄지며, 인간과 캐릭터와의 간극이 가상현실 서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메타버스적 ‘게임형태’는 인류 생존의 선형적 역사를 폭발시켜 현재진행형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서사는 이야기 발생 시간과 서사가 차지하는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이것이 서사의 첫 번째 시간(이야기 시간)과 두 번째 시간(서사 시간)을 형성한다. 서사 시간은 문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이 작품에 나타나는 방식을 제어한다. 상대적으로 리얼리즘 텍스트는 스토리텔링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는 반면, 모더니즘 텍스트는 오히려 서사 시간과 균형을 맞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다니엘 벨(Daniel Bell) [4] 은 모더니즘의 특징은 현장성(거리의 소멸, eclipse of distance), 즉 독자로하여금 이야기꾼의 말버릇이나 말투가 독자에게 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전통 소설들은 대체로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의 조합이다. 하지만 전통 서사에서 읽는 시간——이를 ‘제3의 시간’이라고 하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사람들은 ‘제3의 시간’을 ‘제로 시간’ [5] 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반대로 게임적 리얼리즘은 ‘제3의 시간’을 위주로 하여 텍스트의 사용 활동(제1의 시간)과 텍스트의 서사 행동(제2의 시간)이 함께 새로운 ‘게임 행위’(제3의시간)를 구성한다. ‘제3의 시간’ 안에서 신체의 충동이 게임행위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게임적 리얼리즘의 ‘주인공’이 ‘캐릭터’에서 ‘플레이어’로 바뀐다. 서사자로부터 ‘서사’의 핵심적 지위는 플레이어의 ‘플레이’로 바뀌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세계의 사물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탐구하지 않으며, 실제 삶에서 사람들의 신체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세계의 사물 자체에 놓이게 된다.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독자의 존재는 텍스트 입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는 어떠한 이야기든 이상화된 암묵적 독자를 설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암시적 독자(Der implizierte Leser)’ [6] 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암시적 독자는 휴머니즘의 주체론적 환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읽는 과정을 탐색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해 “to be or to have”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 위에 ‘쓰기 가능한 텍스트(writerly text)’의 범주를 제시했다. 하지만 ‘쓰기 가능한 텍스트’는 텍스트 의미의 틈새를 통해 구축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읽기 행위에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읽기를 일종의 성적 활동으로 간주하고, 그것의 은밀성만 강조했을 뿐 텍스트 읽기 자체에 주체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미학과 독자반응이론, 버밍엄 학파의 암호에 대한 강조를 수용하는 것은 사실 “텍스트 의미의 실현”이나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태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며, 제3의 시간이 서사 측면에서 제1의 시간이나 제2의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독자, 관중 등은 ‘플레이어’와 같지 않다. 전자(독자)는 텍스트 뒤에만 나타날 수 있고, 후자(관중)는 텍스트 서사의 새로운 행동을 발현한다. 우리가 오직 게임적 리얼리즘 텍스트, 특히 비디오게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제3의 시간’은 완전히 구원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인류의 게임 발전은 세 가지 형태를 거쳤다. 최초는 낮에 사냥하고 밤에 사냥을 모방하는 ‘인간의 놀이’ 형태로 출현했다. 다음으로는 ‘놀이하는 인간’이 나타났는데, 프리드리히 폰 실러는 이를 두고 이질적 산업화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규율과 이질성에 저항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놀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 불규칙한 규율성, 자유의 상징(놀이 충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놀이’나 ‘놀이하는 인간’을 연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게임’, 즉 ‘플레이’를 핵심으로 하는 게임을 연구한다. 플레이란 텍스트를 즐기는 것이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곧 ‘제3의 시간’의 중심화를 형성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더 이상 텍스트 밖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서사적 행동 속의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전통 서사와 게임 서사는 매우 다르며, 후자는 전통 서사에 없는 ‘제3의 시간’ 서사를 만든다. 전통 서사는 독자들이 서사 시간을 통해 이야기 시간에 몰입하게 하고, 자신의 현실 시간을 잊게 한다. 따라서 전통 서사의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이야기의 폐쇄성을 형성하고, 일단 이야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독자의 읽는 시간은 껍데기가 된다. ‘독자’는 설정적인 캐릭터가 되고, 읽기란 개인의 생생한 삶의 경험을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말하자면 전통 서사는 텍스트의 독서자/사용자를 구조적으로 배척한다. 게임 서사는 이와 반대인데, 그것의 심오함은 ‘제3의 시간’이 이야기 시간을 빌어 서사 시간을 소멸시켜버린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완전히 현실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은 현실의 시간이 거대한 작용을 하도록 하는 것인데, 게임은 이야기 시간과 서사 시간이 끝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시작된다. 가상현실 시대,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더욱 풍부하고 생동감 있게 변화했다. 첫째, 그것은 서사가 단순한 인과적 사슬을 따라가게 하지 않고, 대신 이야기에 몰입한 ‘행동자’에게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적 상황을 느끼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시간적 논리를 공간적 논리로 대체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표현하고 표현되는 관계인 반면, 가상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이야기는 함께 행동하는 관계가 된다. 즉 사람들이 이야기를 구동하며, 이야기가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둘째, 플레이어가 위탁한 ‘아바타’의 함의는 은유가 아니며, 유일무이한 개인의 완전한 대표 그 자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이야기는 ‘과거의 시간’을 다루지 않으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이다. 플롯이 아니라 게임 캐릭터의 행동을 이끌어냄으로써 보다 넓은 상상력과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 인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 서사의 핵심은 게임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고 어떻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완성하느냐에 딸려 있다. 간단히 말해 오직 게임의 행동만이 독립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태도를 설정——즉, 놀이가 인간의 모든 것을 구성한다——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인물의 운명은 더 이상 미리 짜여지지 않고 ‘사건화’된다. 여기서 가상현실 서사는 개개인이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모두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침잠하는 사건이며, 영원히 ‘진행중’인 사건이란 점이 ‘제3의 시간’의 핵심이 된다. 그러니까 제3의 시간이란 영원히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정한 시간이다. 분명히도 ‘제3의 시간’은 우리가 게임의 철학적 함의를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게임은 인간의 이성적 생활의 ‘평안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끼워져 있는 의제이다. 게임이야말로 상징계와 상상계에 의해 완전히 정복될 수 없는 진실의 일부를 폭로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게임이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이래 인류의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과 자제, 자율, 자각을 둘러싼 초자아적인 욕망은 게임의 사회정치적 함의를 배양해왔다.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하는 사람’의 통제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주의 시대에 잠재된 ‘비인간화의 충동’, 즉 이질적인 노동규율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여기서 ‘비인간화’란 인간의 탈인간화가 아니라, 사회 내에서 규정되는 방식보다 자신의 신체적 경험을 따르는 ‘인간화’, 즉 ‘비사회적 인간화’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철학, 사회학, 인류학 연구 시야에서 ‘게임’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여전히 ‘면대면’의 인간 활동이며, 오늘날까지도 ‘게임’은 가상현실의 이야기 공간이다. 전통적 문화비평, 또는 미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게임은 ‘서사’의 어떤 도움으로 껍데기를 구축하는 쾌감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게임은 일종의 ‘서사’로서 이야기의 시간적 단서들을 수정하고, 플레이어들의 게임 활동 중 ‘사건적 행동’의 문을 열어준다. 문화연구에서 ‘게임’(아케이드, 휘파람 부는 소년, 해변의 서퍼 등)은 청년 저항성의 표징이지만, 게임의 주이상스(jouissance) [7] 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미련(결국 저항은 확실성을 내포한 행위이므로)이다.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저항이란 어디까지나 확정적인 행위인데, 게임은 소환되지 않은 신체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경험이다. ‘ 다이성’의 순간과 플레이어로서의 나 제3의 시간에서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일(과거)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정(현재진행)으로 바뀐다. 즉, 가상현실의 새로운 의미 표현의 물꼬를 튼 것(다의성, multi-paradox)이다. 이와 같은 다이성 속에서 ‘플레이어’가 함유하고 있는 뜻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메타버스로 대표되는 가상현실 시대에 게임적 리얼리즘의 ‘제3의 시간’은 다이성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다양한 가능성과 다양한 불가능성이 충돌의 순간을 교차하게 된다. ‘다이성’은 각종 모순과 역설의 동시발생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고정적 의미, 즉 역사적으로 안정적이고 통일적인 이해, 혹은 미리 결정된 플롯화 서사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고 심지어 보고 싶지 않은 일이 발생하거나, 일어나길 바라는 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전통 서사에서 이야기의 결말(이야기의 끝)과 엔딩(서사의 완료)은 따로 존재한다. 게다가 결과는 이미 일어났지만 엔딩이 여전히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엔딩과 결말의 분립은 독자의 ‘제3의 시간’을 ‘규칙화’, ‘권력화’, ‘질서화’하겠다는 전통 서사의 야망을 보여준다. 비디오 게임 서사와 전통적인 서사는 정반대인데, 게임 중의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교묘하게 접목되고 스토리텔링의 시간은 여기에서 보류된다. 따라서 많은 슈팅 게임들이 반전과 평화를 말하지만 서사 시간과 ‘제3의 시간’은 이야기 시간을 빼앗고 침잠하여,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제3의 시간’의 살육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엔딩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제3의 시간’의 반복적인 중첩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스토리에서 사망한 플레이어가 계속해서 플레이해야 게임의 의의가 진정으로 풀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Hearts of Iron IV)’는 “1936~49년 간 세계 어느 나라든 정치·경제·첩보·외교·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 기간의 판도를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은 플레이어들은 히틀러를 선택해 전 세계를 점령하는 걸 선택한다……. 확실히 그것은 서사 시간과 스토리텔링 시간이 ‘제3의 시간’을 규율하는 게 아니라, ‘제3의 시간’이 독보적 시간이 됐음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로 인해 플레이어의 선택권은 ‘제3의 시간’이 되며,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스토리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자신의 쾌락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 게임 스토리의 시간과 서사 시간 사이의 모든 의미는 ‘제3의 시간’을 활성화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플레이는 ‘제3의 시간’을 진정으로 텍스트 주도의 시간으로 만들고, 플레이어는 다이성의 주체, 즉 홑따옴표만 있는 “‘나”가 되는 것이다. 홑따옴표 ‘나는 처음엔 실제 사람이지만, 그 후에는 게임 속 캐릭터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나와 캐릭터’의 융합체이며, 이는 플레이어의 정의를 구성한다. 즉 ‘나는 ‘제3의 시간’을 게임 속으로 갖고 들어가, 모종의 캐릭터와 융합된다. 이것이 바로 ‘게임 텍스트’를 전통 서사 텍스트와 다르게 만드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서사 텍스트는 작품을 시작하는 첫 글자부터 끝맺는 마지막 글자까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책의 앞표지부터 마지막까지의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텍스트는 소위 ‘과학 텍스트(算学文本)’ 즉 기술적 인터페이스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 캐릭터 텍스트 즉 ‘나의 텍스트’라는 두 번째 측면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게임 텍스트는 게임 제작사가 생산해낸 일부이며, 플레이어와 더불어 플레이를 할 때 ‘제3의 시간’을 가지고 게임 속으로 들어가 캐릭터가 융합된 부분의 모음이다. 다시 말해 게임 텍스트는 동적 텍스트, 즉 플레이의 과정으로서의 텍스트인 것이다. 그럼 플레이어는 무엇일까? 내가 보기에 플레이어는 하나의 ‘잉여인(空余人)’ [8] 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진행 중에 역설적인 경험을 분출해냄으로써 일종의 ‘잉여인’의 얼굴을 보여준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벌거벗음(Nudities)>의 ‘페르소나 없는 정체성’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체가 순수하게 생물적인 비사회적 신분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각종 가면을 쓰고 인터넷상에서 제2, 제3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남아있는 부호로서의 신체인 플레이어 ‘나의 쾌락은 시비의 의의가 지배한다. 또 다른 텍스트를 맞닥뜨리면 ‘나는 곧 다른 얼굴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플레이어가 여전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하는 ‘이드(id)’, 즉 한 사람 마음 속 욕망의 쾌감을 깊숙이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스나이퍼 엘리트(Sniper Elit)>에서 모든 플레이어는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한데 게임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모르는 척하는 방식일 뿐이다. 살인은 게임을 방불케 하지만 저격하는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살인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플레이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현실의 국외자”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는 그 안에서 플레이의 가치를 점수나 장비, 등급을 통과해 창조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가치의 표지물이 무의미한 행동(플레이)의 내적 뒷받침일 뿐, 플레이어의 플레이는 그런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강렬한 ‘씽킹 프롬 씽커(Thinking from Thinker)’를 보여준다. 그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허무에 대항하는 것이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다음의 측면에서 철저하게 개조됐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캐릭터 독립으로부터 독자의 욕구가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환원적이고 규정적인 성질을 도출하고, 이를 통해 비디오 게이머들이 서사의 시간에 대항하는 이와 같은 행동을 ‘제3의 시간’이란 개념으로 보여줬다. 이 지점에서 플레이 행동은 해방됐으며, 게임적 리얼리즘은 일종의 불안정한 자아를 지향하고, 케릭터와 안정적 세계 사이에 항구적인 모순과 대립을 지향하게 됐다. 한 사람이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을 때, 그의 심리 상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 게임 속의 불안정한 ‘나로 변모할 수 있다. 그것은 살인의 쾌락, 돌격하는 용감함, 숨겨놓은 비열함, 죽은 동료들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기쁜, 그리고 전우를 구해냈다는 신성함 등을 아우른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다이성의 자아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강림해오는 것이다. 바깥 세계에는 안정성에 대한 갈망이 있지만, 게임의 ‘제3의 시간’은 불안정성에 대한 갈망으로 구축되어 게임의 현실적인 역설을 형성한다. 게임 규칙에 대한 준수와 세계의 결핍을 플레이할 가능성에 대한 싫증 역시 역설적이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순간’은 바로 ‘다이성’의 순간이다. 이 세계는 플레이할 만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규정된 동작을 따라야 하며, 이는 곧 ‘플레이’에 대한 주도적인 욕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게임은 플레이할 수 있고, 규정적인 것에 대한 파괴이며, 동시에 규정성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여러 역설들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게임적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현실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플레이어’의 얼굴은 ‘다이성’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것은 플레이어로서 규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다. 그것은 ‘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 분해하고, 이미지 차원에서 주변을 맴도는 것을 지향한다. 또한 그것은 물질적인 원칙을 게임의 정신 활동 속에 포함시킨다. ‘타자와 나’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주체의 안정적인 함의를 제거하여 게임적 리얼리즘 속에서 생명력있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시킨다. 플레이어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게임산업은 비로소 천편일률적 충돌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비인간/폐인’이라는 의식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현장에 내가 없는 척’ 가장하는 태도를 취해 가상현실 경험과 에고의 장벽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 세계의 파괴자로서 그것은 파괴력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역사적 현실세계의 유령으로써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떨어질 것 같은(摇摇欲坠) 등불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침묵하고 있지만, 게임은 시끄럽게 울리기도 한다. 게임 세계가 닫히는 순간 그것은 크게 소리를 낸다. *본문출처 : 《난징사회과학(南京社会科学)》 2023년 제3기에 실린 본문은 1만3천 자로 이를 축약하였음. [1] 역주 : 원문의 ‘多异性’은 저자가 창안한 학술 어휘로 보인다. 영어로 하면 multi-difference 정도의 뜻을 갖는데, 이러한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한국어 어휘가 없어 한자 독음 그대로 직역했다. [2] 国家社科基金重大项目“虚拟现实媒介叙事研究”(21&ZD327) [3] 역주 : 국내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개념을 소개하는 텍스트들은 ‘작은 이야기’와 ‘커다란 이야기(거대서사)’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각각 ‘故事’와 ‘叙事’로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원문의 故事는 ‘이야기’로, 叙事는 ‘서사’로 번역하였다. [4] 역주 : 다니엘 벨은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1960년)을 통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했고, 《탈산업사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Post-Industrial Society)》(1973년)를 통해 '제조업 경제'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로의 전환을 전망했다.(위키피디아 참고) [5] 역주 :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창안한 ‘ti con zero’를 지칭한다. 그의 단편소설집 <티 제로(ti con zero)>(1967) 속 단편들은 수학과 시적 상상력이 혼합된 시공간과 우주의 진화를 다룬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은 기존 이야기들의 시간중심 서사를 무너뜨리고, 공간 중심의 서사를 펼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되, 그 안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 내용을 담아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위키피디아, amazon.com 등 참고) [6] 역주 : 볼프강 이저는 독일의 문학 연구자이자 비평가로, 독자반응비평 이론을 연구했다. 이저에 따르면, 구조화된 행위로서의 독자의 역할은 독자가 텍스트 구조를 상상 속으로 수렴하게 하여 텍스트 구조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독자가 읽기 과정에 참여할 때 텍스트 구조가 연결되고 살아나며, 독자는 역사적 현실과 자신의 경험, 독자로서의 역할 수용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7] 역주 : 저자는 라캉 이론을 통해 게임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 및 언어상징 너머의 전복(顚覆) 충동이다. 주이상스는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이때 주체는 분열적 상황에 빠지고, 대타자를 파괴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8] 역주 : 원문의 空余(공여)는 ‘남아돌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空余人을 ‘잉여인’으로 번역했다. Tags: 번역 예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난카이대학 문학원 교수) 저우즈창, 周志强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황희
황희 황희 Read More 버튼 읽기 [축사] 창간을 축하합니다 이렇듯 게임이 단순한 놀이가 아닌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로서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게임의 가능성과 가치를 계속 공유하고 논의해야 합니다. 이번에 창간하는 ‘게임 제너레이션’이 게임의 역사, 게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게임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등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는 담론의 장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정부와 게임업계, 이용자들이 소통하는 대표 창구로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 비언어 커뮤니케이션과 트롤링
< Back 비언어 커뮤니케이션과 트롤링 14 GG Vol. 23. 10. 10. 게임과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게임하는 과정 내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행위다. 특히 갈수록 많은 게임들이 혼자서는 플레이하기 어려운 형태를 취하는 상황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롭고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한다. 플레이어들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 플레이를 통해 게임 시스템이 부여하거나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달성할 뿐 아니라, 언어 대화와 비언어 표현을 통해 흥미롭고 창의적인 상호작용을 경험한다. 이제 대부분의 멀티 플레이어 게임들에는 플레이어들 간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정보(내적) 인터페이스가 기본적으로 포함된다. 플레이어들은 그러한 인터페이스를 활용해 게임 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전술·전략을 세우며, 때로는 사적인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보다 원활하고 재미있는 게임 플레이, 그리고 새로운 게임 플레이 커뮤니티의 형성에 있어 (정보 인터페이스를 경유한) 플레이어(들) 간 커뮤니케이션은 필수적인 요소다.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은, 게임 플레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플레이어들 간에 이뤄지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꼭 게임 플레이를 원활하고 재미있게 만들거나, 새로운 커뮤니티의 형성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 비중의 커뮤니케이션이 그 반대의 상황을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조롱·모욕·비방하거나, 게임 플레이의 흐름을 막거나 뒤엎고 의미 없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질 때, 플레이어(들)은 모든 게임 내 정보 인터페이스를 활용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거나 괴롭히는 등 반사회적 행동의 여지를 남기는 데 전념한다. 반사회적 행동의 여지를 남기는 커뮤니케이션은 (일부 발화자에게는 재미나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줄지 모르나) 대개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대응을 하게 만들며, 때론 게임 바깥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현피, 고소 등)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멀티 플레이어 게임들은 시스템적으로 대비책을 마련해놓고 있다. 채팅창에 아예 욕설을 입력할 수 없게 하거나, 긍정적이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을 한 플레이어에 대한 다른 플레이어들의 신고가 누적되면 제재(채팅 금지, 접속 금지 등)를 가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물론 시스템으로 강제하는 법칙이 아니라 해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매너를 지키는 것은 일종의 약속된 규칙이다. 하지만 게임 내 많은 상황에서 특정 플레이어들은 참지 못한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고의로 긍정적이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을 남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언어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도 빈번하게 이뤄진다. 심지어 시스템적으로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게끔 설계된 게임, 그리고 조롱·모욕·비방을 위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위주의 게임에서조차 반사회적 행동의 여지를 남기는 커뮤니케이션은 행해진다. 어떤 상황에서든 플레이어들은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 방법은 상대에게 먹히고, 곧 게임 내에서 통용된다. 명시적인 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고 맥락적이다. 그렇기에 잘 발견되지 않고, 시스템적 제재도 덜 받거나 받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게임 내에서 통용되고 문법화된다는 것은, 그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언어 커뮤니케이션만큼이나 명시적인 트롤링(trolling) 기법이 됨을 의미한다. 트롤링이란 게임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불편하거나 화를 낼만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해서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행위를 말한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특히 그 중에서도 상대방을 조롱하거나 모욕하거나 비방하는 등 긍정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왜 그리고 언제 이뤄지는지, 트롤링과의 연관 속에서 발생하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게임 안과 밖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왜 그리고 언제 이뤄지는가 게임에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경우는 세 가지 정도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세 경우는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특정 상황에서 연결되거나 둘 이상의 유형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언어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이뤄지는 경우다. 많은 멀티 플레이어 게임들이 문자·음성 채팅과 같은 언어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짧은 감정 표현, 이모티콘 등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이 때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언어 커뮤니케이션까지는 필요 없거나 언어 커뮤니케이션만으로는 특정 감정이나 정보를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 주로 사용된다. 둘째,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어려운 경우다. 긴박한 상황이거나, 양손과 온 신경을 항상 써야 하는 상황에서 짧은 감정 표현, 인장, 스마트 핑(packet internet groper: ping)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보다는) 긴 메시지를 함축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끔 돕는다. FPS(first person shooter)나 AoS(aeon of strife) 같은 게임류, 그리고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의 레이드(raid)와 같은 특정 게임 상황에서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물론 이 때 게임 안에서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만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게임 바깥으로는 음성 채팅을 활용한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병행하는 일 또한 가능하다. 첫째 경우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언어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냄으로써 게임 커뮤니케이션 전반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라면, 둘째 경우는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빈 곳을 메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플레이어 간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경우다. 시스템적으로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데 특정 상황에 의해 하지 못하는 것과, 애초에 시스템적으로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막혀 있고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만이 허용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는 후자에 한한 이야기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구현하기 위한 작업과는 반대 축에서, 게임 디자이너들은 플레이어(들) 간 커뮤니케이션을 제한하기 위한 작업에도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노력은 대체로 플레이어 간에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거나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하게 하는 일이, 서사 진행에 방해가 되거나 플레이에 적합하지 않거나 플레이어(들) 기분에 악영향을 줄 확률이 높은 게임들을 위한 것이었다. 가령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에서 플레이어는 얼라이언스와 호드라는 적대적인 두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 캐릭터를 만들게 되는데, 각기 다른 진영 플레이어 간에는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제스처를 통해서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 디자인은 두 진영 사이에 서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데 효과적이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플레이어(들) 간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제한하는 게임을 할 때조차도, 플레이어들은 부정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한 방법을 찾아낸다. 대표적인 방법이 ‘감정 표현’을 활용하는 것이다. TCG(trading card game) <하스스톤(Hearth Stone)>에서 플레이어는 본인이 선택한 영웅을 클릭(PC로 플레이하는 경우)하거나 터치(모바일로 플레이하는 경우)함으로써 간단한 감정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그 자세한 메시지는 영웅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메시지는 ① 감사, ② 칭찬, ③ 인사, ④ 감탄, ⑤ 이런!, ⑥ 위협의 6가지 감정 표현을 담아낸다. 혹자는 그 메시지 자체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플레이어가 직접 입력하는 것이 아니며, 세부 내용을 고르거나 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클릭/터치 한 번으로 발화자가 기재하지 않은 메시지를, 그것도 특정 감정에 대한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스스톤>의 인스턴트 감정 표현은 한 단어로 적은 이모티콘이자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6개의 감정 표현에는 사실상 ‘⑥ 위협’ 정도를 제외하고는 부정적 메시지가 존재한다 보기 어렵다. 하지만 특정 맥락에서 플레이어는 6개 중 한 개 이상의 감정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을 조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 플레이어 턴에서 시간이 지연될 때 ‘③ 인사’를 연타하면, 그것은 상대에 대한 재촉을 나타낸다. 상대가 실수하거나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준 후 ‘① 감사’ 표현을 하는 일은 누가 봐도 조롱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전사 캐릭터 중 하나인 ‘정신 나간 천재 박사 붐(이하 ‘붐’)’은 반말은 기본이고 특유의 길면서도 도발적인 어휘(예를 들어, ① 감사: “고마워! 넌 마지막에 처리해줄게”)와 (심지어) 억양으로 인해 그 어떤 다른 캐릭터들보다도 상대 플레이어의 짜증을 유발한다. (앞선 두 번째 사례를 붐이 한다고 생각해보자...) AoS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이하 ‘LoL’)>에서도 챔피언들 감정 표현이 존재한다. 컨트롤(Ctrl) 버튼 1부터 4까지를 누름으로써 각각 농담, 도발, 춤, 웃음을 사용할 수 있다. 동작이 큰 챔피언은 감정 표현을 하지 않을 곳에서 감정 표현을 (연타)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소위 ‘인성질(게임 플레이에서 나쁜 매너를 보이는 행위)’을 할 수 있다. 게임이 안 풀리는 상대방을 향해 시끄럽게 웃어대거나 촐싹대는 움직임을 반복하는 행위는 상대 플레이어(들) 기분에 아주 큰 타격을 주기도 한다.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에서 시스템적으로 상대의 감정 표현을 차단할 수 있게끔 해놓기는 했다. ‘인장’을 통한 인성질도 빼놓을 수 없다. 인장은 게임 내 승패에 직접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상대 플레이어를 도발하고 조롱하는 데에는 유용하게 쓰인다. 라인전 시작 전 머리 위에 숙련도 인장을 띄우며 선전포고하는 것부터 시작해, 죽은 상대 챔피언 앞에서 인장을 연속으로 펼치는 행위, 심지어 e스포츠(e-Sports) 대회에서 상대 플레이어의 전 소속팀이나 승리 팀의 인장을 사용하는 행위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AoS 장르 게임들에서 자유 사용되는 ‘스마트 핑’을 반복적으로 날림으로써 특정의 긍정적이지 못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다. 스마트 핑이란 팀원에게 특정 메시지(공격, 수비, 경고, 지원 요청 등)와 관련된 신호를 보내 플레이를 원활하게 해주는 기능을 말한다. 핑을 날리면 모든 파티원들이 그 신호를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핑 남발을 막기 위한 회수 제한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Heroes of the Storm>에서는 플레이나 커뮤니케이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같은 편 플레이어(들)에게 반복적으로 핑을 찍음으로써, 해당 플레이어(들)의 부족한 실력이나 그(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플레이 방식을 바꿈으로써 같은 편이나 상대 편 플레이어(들)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일부러 대충 플레이하거나, (특히 턴제 게임에서) 천천히 플레이하거나, 진행 중인 게임을 중간에 종료하거나(물론 멀티 플레이어 게임에서 이 경우에는 대체로 시스템적 제재가 가해진다), (특히 RTS(real-time strategy)에서) 동일 진영을 공격하는 행위 등이, 굳이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 플레이어(들)을 자극하는 방법들이라 하겠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만 사용 가능한 게임들에서, 경기가 끝난 후 상대방에게 친구 요청을 보내 (상대방이 요청을 받으면) 본격적(?)인 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는 플레이어들도 있다. 그 밖에도 부정적 의미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며, 끝없이 새롭게 개발되고 통용된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과 트롤링, 그 의미 그렇다면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트롤링은 게임 안과 밖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첫째,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트롤링은 게임의 시스템적 디자인과 플레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이 어떻게 서로 얽히고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사례다. 멀티 플레이어 게임에서는 시스템적으로 허용되든 그렇지 않든,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대폭 제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친근하고 편안한 커뮤니케이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게임 디자이너들의 목표와는 노골적으로 배치된다. 메시지 내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떠나 생각해본다면,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새로운 맥락이나 용도로 바꿔 쓰는 일은 플레이 차원에서 게임 내 커뮤니케이션의 진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진화는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상대에게 부정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마려는 플레이어(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상대에게 받아들여지고 게임 내에서 통용되는지의 과정을 고찰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둘째, 부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보내는 플레이어와 그것을 받는 플레이어를 보다 입체적으로 상상할 필요가 있다. 맥락 바깥의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는 감정 표현이나 스마트 핑을 반복하는 행위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정 게임 내에서만 작동하는 관습과 코드에 익숙하지 않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언어 커뮤니케이션처럼 명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에 따라 특정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민감도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범위가 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보내는 플레이어의 의도도 다양하다. 어떤 플레이어(들)은 상대 플레이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 또 다른 플레이어(들)은 상대 플레이어(들)을 조롱·모욕·비방하는 데서 재미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플레이어는 극소수이거나, 아주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고, 플레이 과정에서 느낀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얼핏 언어 커뮤니케이션만큼 노골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특정 맥락에서는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할 수 없는 표현을 가능케 함으로써 더 큰 효과를 획득하게 될 수 있다. 플레이어(들)에 따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와 관련되는 의도와 수용도에 따라 보내는 메시지와 받는 메시지의 효과와 의미가 더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다. 마지막으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대 플레이어(들)을 조롱하거나 모욕하거나 비방하는 등 긍정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를 ‘트롤링’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재고가 요구된다. 글 말미에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 있겠다. 트롤링은 게임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불편하거나 화를 낼만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해서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행위를 총칭할 뿐이며, 그 범위가 당연히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부정적 커뮤니케이션을 보내는 플레이와 그것을 받는 플레이어 간 메시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은 차치하고)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언어 커뮤니케이션보다 모호한 만큼, 그 커뮤니케이션의 자장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 간 관습과 코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며, 기본적으로 중의적이다. 의도는 있을지언정, 그 반응은 의도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항상 반응을 의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발신하는 일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다. 게임에서의 트롤은 놀이로서의 플레이 진행을 방해하는 존재들인데,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언제나 게임 플레이를 게임 플레이 답지 않게 만든다고도 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트롤링으로 칭하는 일이 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칭해지든 그렇지 않든,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앞으로도 게임 내에서 죽 이어지거나 어쩌면 더욱 활발하게 가시화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 살펴본 류의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게임의 시스템적 디자인과 플레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호작용 사이의 충돌, 커뮤니케이션이 제한적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게임에서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역동성 혹은 진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이 낳는 메시지 의미에 관한 플레이어 간의 합의 또는 협상 문제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풍부한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풍부한 시스템적 설계나 정보 인터페이스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긍정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논의의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이는 긍정적인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나아가 언어 커뮤니케이션과의 조화 속에서 언제나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을, (게임이나 플레이어의 폭력성이나 가학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게임 시스템 활용의 하나이자, 전체 플레이의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하나의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플레이어(들)이 허용하는 적정선 하에서, 이런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게임 커뮤니케이션의 일부이자 플레이의 일부다. Tags: 하스스톤, 핑, 스마트핑, 트롤링,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별점·평점이라는 표면
< Back 별점·평점이라는 표면 20 GG Vol. 24. 10. 10. 별점의 역사를 짧게 훑어보자. 최초의 별점은 1820년경 영국의 마리아나 스타크가 펴낸 『유럽대륙 여행가이드』라 알려져 있고, 본격적으로 별점이 대중화된 것은 1920년대 시작된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을 통해서다 [1] . 국내에 경우 『조선일보』에 기고하던 영화평론가 정영일이 미국의 영화평론가 레너드 말틴이 매년 발간한 『레너드 말틴의 영화 가이드북 Leonard Maltin's Movie Guide 』의 별 4개 만점 시스템을 별 5개 만점 시스템으로 변경해 가져온 것이 처음으로 알려져 있으며 [2] , 1995년 『씨네21』의 창간과 함께 대중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포털사이트의 시대가 열리며 영화는 물론 음악, 문학, 만화 등 거의 모든 대중문화 영역에 별점 평가를 남기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플랫폼의 시대인 지금 음식점은 물론 배달, 과외, 중고거래, 택시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 별점 평가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악의적인 별점테러가 자영업자에게 큰 손해를 입히거나 창작자의 평판을 박살내는 등 일종의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별점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출발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상을 평가하거나 평가를 찾아보기 위한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의 영역에서 특히 공고하게 자리 잡은 별점 평가는 기자와 평론가들이 남기는 잡지와 신문의 공식적인 별점부터 (지금은 서비스 종료한) 네이버 영화와 다음 영화의 네티즌 평점, 왓챠피디아나 키노라이츠와 같은 관객 개인이 직접 평점과 짧은 평을 남길 수 있는 서비스로 이어진다. 해외의 경우에도 IMDB와 레터박스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다른 방식도 존재하는데, 단순한 호불호를 표기하는 것이다. 가령 레너드 말틴이 별점평가를 도입한 것과 비슷한 시기 대중적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알리던 로저 이버트는 ‘엄지 올리기/내리기(thumbs up/thumbs down)’ 평가방식을 도입했는데, 이와 같은 방식은 ‘썩음/신선함(rotten/fresh)’으로 호불호를 표기하고 참여한 이들의 평가 비중을 퍼센트화하여 공개하는 로튼토마토로 이어지며, 현재 CGV에서 사용하는 ‘골든에그’ 평가의 경우에도 이를 참조한 것이다. 별점 평가가 대상을 수치화하는 것에 비해 단순 호불호만을 표시하는 이러한 방식은 조금 더 환영받는다. 별점 평가가 별점테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넷플릭스에서 별점을 폐지하고 좋아요/싫어요 표기 체계로 변경한 바 있다. 혹은, 아예 메타크리틱에서처럼 각 사이트의 평점을 100점 만점 시스템으로 환산하여 조금 더 정교한 평점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게임 웹진의 글인데 영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 현재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 또한 사실 별점보단 단순 호불호 평가다. 스팀의 경우 긍정적/부정적 평가만 남길 수 있으며, 긍정적 평가가 80~100%는 매우 긍정적, 70~79%는 대체로 긍정적, 40~69%는 복합적, 20~39%는 대체로 부정적, 0~19%는 매우 부정적으로 구분되고, 리뷰가 500개 이상이면서 긍정적 평가가 95~100%일 경우 압도적으로 긍정적, 0~19%인 경우에는 압도적으로 부정적, 리뷰가 50개 미만이면서 80~100%는 긍정적, 0~19%는 부정적으로 표기하는 등 총 9개의 평가로 구별된다. 2017년 국내 런칭한 게임 전문 커뮤니티 플랫폼 ‘미니맵’의 경우 별 5개 평가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유저가 남긴 평가를 기준으로 취향과 성향에 맞는 게임을 추천해준다는 지점에서 영화 별점 플랫폼 왓챠피디아와 유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게임 부분에서 전문가들의 평점으로 채워지는 대표적인 매체는 메타크리틱일 것이다. 영화, 드라마, 음악, 게임 등의 분야에서 여러 웹진이 남긴 평점을 종합해 100점 만점으로 평균을 내는 메타크리틱은 대부분의 극찬(Universal acclaim, 90~100), 전반적인 호평(Generally favorable reviews, 75~89), 복합적이거나 보통(Mixed or average reviews, 50~74), 전반적인 혹평(Generally unfavorable reviews, 20~49), 압도적 저평가(Overwhelming dislike, 0~19)의 다섯 단계로 구별된다. 여러 전문가의 평가를 종합한다는 점에서 로튼토마토가 신뢰를 얻는 것처럼, 여러 평점을 종합한 결과라는 지점에서 유저들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특히 게임의 정식출시 전 미리 플레이해본 평론가와 기자들의 평점이 가장 먼저 공개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관심도가 높다. 이처럼 평점과 별점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대중 비평의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트리플A 게임의 메타크리틱 점수가 공개되는 날이면 소셜미디어와 게임 커뮤니티에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주요 게임의 대형 업데이트는 스팀 평가란의 변동을 통해 즉각적 반응으로 표기된다. 영화에서의 별점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수다거리 정도일 뿐 뉴스거리까진 되지 못하지만 [3] , 메타크리틱이나 스팀 평가의 공개와 변동은 게임언론의 기사로 다뤄지기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디스이즈게임은 지난 2월 출시된 <그랑블루 판타지 리링크>가 출시 당일 스팀에서 ‘복합적’ 평가를 기록한 것이 며칠 뒤 ‘매우 긍정적’으로 변한 것을 두고 “출시 초기의 악평을 극복한 모양새”라고 평가한다 [4] [5] . 게임메카는 지난 4월 <백영웅전>, 이번 8월 <검은 신화: 오공>이 각각 출시를 앞두고 공개된 메타크리틱 평점을 보도하며 평점과 리뷰 내용을 종합하여 게임을 평가한다 [6] . 물론 스팀의 평가는 출시 이후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가 남긴 평가이며 메타크리틱은 평론가와 기자 등 전문가로 구성된 이들이 남긴 평점의 종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두 평점 모두 게임의 퀄리티를 평가하는 주요한 지표로서 자리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점은 정말로 비평의 기능을 수행하는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의 사례처럼 유저와 전문가 사이의 견해 차이가 논란으로 비화된 사례는, 어떤 면에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전문가들이 남긴 평점이 비평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메타크리틱에서 현재 132명의 전문가에게 93점(100점 만점)을 받아 ‘메타크리틱 머스트-플레이’ 마크를 받은, 163,543명의 유저에서 5.8점(10점 만점)의 평점을 받아 ‘복합적 혹은 평균’을 받은 상반된 평가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비평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나아가 이것이 논란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평점이 비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오히려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질만한 것은 게임즈비트의 저널리스트 딘 타카하시가 <컵헤드>의 튜토리얼을 가까스로 통과하고 첫 스테이지마저 클리어하지 못하는 처참한 게임플레이 [7] 를 보여준 뒤 혹평하는 프리뷰 기사 [8] 를 작성했던 사건이다. 게임의 기본적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의 플레이는 많은 게이머로 하여금 ‘전문가’로서 활동하는 그의 전문성을 의심케 했다. 평점이 갖는 비평으로서의 기능 이전에 전문가로서 전문성을 갖지 못한 이들이 평점을 남긴다는 사실은 많은 게이머의 분노를 끌어냈다. 사실 전문성이란 것은 애매한 영역이며, 명확한 기준은 없다. 더군다나 게임 평론가가 되기 위해서 (게임제너레이션의 공모전 등이 있긴 하지만) 등단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게이머들은 그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을 요구한다. 마치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영화 별점을 매길 때 “비평적으로 할복자살할 마음의 준비” [9] 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종종 게임 평론가들이 남긴 평점은 그들의 모든 비평적 견해를 대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하지만 게임 평점을 남기는 일련의 전문가들이 겪는 고충은 단지 평점 혹은 별점이라는 표면만으로 환산되기 어렵다. 그것은 비평 행위라기엔 (정성일의 말이 드러내는 것처럼) 너무 가볍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은 2007년 영화 <디 워>와 관련해 영화비평과 관련한 논란이 벌어졌을 당시 대중비평(mass criticism)에 관한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비평에서 드러난 ‘대중’은 기존 평론가들이 제시하지 못한 참신하고 새로운 각도의 영화보기의 가능성에서부터 파워 블로거나 파워 트위터리안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에 의해 쉽게 의견이 조작될 수 있는 획일성까지, 또한 특정 영화인이나 비평가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악플에서도 드러나듯이 별다른 성찰이 없는 파시즘적인 양상까지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0] 프롬소프트웨어의 <엘든 링>이 출시됐을 당시 메타크리틱 97점이라는 평론가 점수가 논란이 됐었다. 게임 자체의 높은 난이도 속에서 평론가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온전한 평가를 내렸을지에 관한 의심과 평점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만들어낸 논란이었다. 이에 대해 유튜버 ‘중년게이머 김실장’이 남긴 말은 참고할만 하다. “(<엘든 링>이라는) 하나의 타이틀이고 똑같은 게임인데, 우리는 그 게임을 통해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까?” [11] 모든 문화예술 작품(혹은 상품)은 향유자의 경험을 전제로 삼는다. 다만 그 경험의 파생물로서 등장하는 비평이 비평으로서 승인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대상을 경험했다는 전제를 두어야 한다. 김실장의 말은 하나의 게임을 두고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딘 타카하시의 다소 극단적 사례처럼 플레이 실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선호하거나 더 잘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장르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마감의 문제로 평론가에게 부여된 게임플레이 시간의 제약이 문제일 수도 있다. <엘든 링>이나 <발더스 게이트 3>와 같이 볼륨이 큰 게임의 경우 하나의 게임을 전혀 다른 경험으로 받아들일 길이 게임 자체에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게임플레이 경험은 녹화되어 리플레이될 수 있을지언정 과학적으로 재연될 수는 없다. 그 경험은 한 편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만큼 동등한 경험이 되지 못한다. 게임 비평이 지닌 곤란함은 여기서 출발한다. A라는 게임의 고인물이 B 게임의 뉴비가 되기도 하고, 모든 게임을 훑어가며 플레이하는 라이트 유저와 하나의 게임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헤비유저 사이의 차이도 존재한다. 그 안에서 비평의 토대라할 수 있는 공통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은 꽤나 곤란하다. 누군가가 발견한 요소를 누군가는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여러 제약이 가져오는 탐색의 불가능은 게임 전체를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모두가 비평가의 태도로 게임을 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같은 지평 위에 서 있는가? 웹진과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별점과 평점은, 영화에서의 별점이 일종의 마케팅 효과를 지닌 것처럼, 게임 구매를 결정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줄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을 진지한 비평과 등치시키는 것은 경험의 차이, 혹은 평점이라는 표면 뒤에 있는 리뷰와 비평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것에 가깝다. 참고하되 그것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 우리는 미슐랭 3스타 식당에 가서 음식 맛이 없다고 할 수도, 이동진 평론가가 별 5개를 부여한 영화를 보고 지루함에 빠져 잠들 수도 있다. 경험이 상대적인 것처럼 비평 또한 상대적이다. 별점과 평점은 그 상대성의 표현일 뿐이다. [1] 김성태 (2021.05.24). ‘별점’의 함정, 무엇이 문제인가. <지디넷 코리아>. https://zdnet.co.kr/view/?no=20210524104310 [2] 한현우 (2009.03.31). [그것은 이렇습니다] Q: 영화나 뮤지컬에 '별(★)점'을 매기는 이유는?.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30/2009033002002.html [3] 물론 올해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박평식 평론가가 별점 4.5개를 준 것으로 크게 화제가 되며 기사까지 난 적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예외적 사건이다. 대부분의 영화기자/평론가의 별점은 보도자료나 포스터 디자인 등 마케팅의 하나로써 사용된다. [4] 김승주 (2024.02.06). '복합적'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스팀 평가 역주행한 게임. <디스이즈게임>. https://thisisgame.com/webzine/nboard/11/?page=3&n=184405 [5]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복합적’ 평가의 주된 이유는 출시 초기 발견된 버그 때문이었다. 버그나 최적화의 문제는 유저 평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평가기준이 된다. 다만 서로 다른 기술적 환경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 사이에서 그것은 정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나아가 그것은 비평과 얼마나 관련 있는가? 이것은 이 글에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또 다른 문제가 된다. [6] 이우민 (2024.04.22). 평작과 수작 사이, 백영웅전 메타크리틱 78점. <게임메카>.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48202 , 김미희 (2024.08.19). 분위기·전투 호평, 검은 신화: 오공 메타크리틱 82점. <게임메카>.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752250 [7] Cuphead Gamescom Demo: Dean's Shameful 26 Minutes Of Gameplay https://www.youtube.com/watch?v=848Y1Uu5Htk&embeds_referring_euri=https%3A%2F%2Fnamu.wiki%2F&source_ve_path=MjM4NTE [8] Dean Takahashi. (2017.08.24.). Cuphead hands-on: My 26 minutes of shame with an old-time cartoon game. GameBeat. https://venturebeat.com/games/cuphead-hands-on-my-26-minutes-of-shame-with-an-old-time-cartoon-game/ [9] 정성일, 허문영 (2010). [씨네산책2] 정성일과 허문영이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2). <씨네21>. 776호. [10] 심영섭 (2007). ‘대중비평(Mass Criticism) 시대’의 등장, 그리고 비평가와 대중의 거리(距離). http://fca.kr/ab-1068-4 [11] 엘든링에 대한 엇갈린 평가? 경험과 기대에 대한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LSndHMGBFMA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 펑텐샤오 彭天笑
펑텐샤오 彭天笑 펑텐샤오 彭天笑 Read More 버튼 읽기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 간접경험으로서의 보는게임 -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및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를 중심으로
< Back 간접경험으로서의 보는게임 -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및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를 중심으로 03 GG Vol. 21. 12. 10. 보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대다수는 'e-스포츠'와 '실황 플레이'를 예시로 들 것이고 실제로 이 두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두면서 보는 게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다만 2021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서 기고된 이경혁의 『보는 게임과 Z세대』라는 글에서는 보는 게임의 역사에 대해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구경하는 것과 PC방 문화를 보는 게임의 기원을 삼은 것이다. 후자 같은 경우 PC방이라는 한국적인 현상임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보는 게임' 자체는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임을 염두에 두면 흥미로운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경혁의 글은 그 점에서 '보는 게임'이 관람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라는 오래된 인류의 유흥거리와 맞닿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실제적인 태동을 짚어야 한다면, 인터넷 방송의 역사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방송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음악 라디오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 당시 영상 압축과 인터넷 환경은 영상을 촬영하고 재생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다가 2005년 유튜브, 아프리카TV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w플레이어나 다음팟TV 같은 사이트가 생기면서 영상 재생/공유 사이트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현 시점에서 대세라 할 수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이 등장하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했지만, 이런 영상 재생/공유 사이트가 활성화되면서 '보는 게임' 문화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윤현정의 논문 『MCN 게이밍 콘텐츠의 스토리텔링 연구』 및 논문에서 인용한 Smith, T. 외의 논문 『Live-streaming changes the (video) game』를 참조하자면 게임 영상 콘텐츠는 경쟁이 존재하는 ‘e-스포츠’ 유형과 빠른 정복을 도전하는 '스피드 러닝', 그리고 스트리머가 게임 플레이에 서사적 코멘터리를 덧붙이는 'Let's play'로 분류할 수 있다. (p.28) 이 중에서 주목할 분류는 'Let's Play'로 지칭되는, 게임 플레이에 서사적 코멘터리를 붙이는 실황 플레이 영상이다. 현재 '보는 게임' 영상 중에서 유저 창작이 활발한 영상도 실황 플레이 영상이다. 'e-스포츠'와 '스피드 러닝'은 특수한 기술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에 문턱이 높지만, 실황 플레이 영상은 비교적 문턱이 낮기 때문이다. 왜 실황 플레이 영상이 '보는 게임' 문화에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초창기 영상 사이트에서 실황 플레이 영상은, 실용적인 용도가 강했다. 그 이유를 찾으려면 게임 공략에 있어서 영상의 힘이 강력하며, 게임 커뮤니티 문화랑 밀접하게 발전해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되겠다. 실황 플레이 영상이 대두되기 전, 게임 공략은 글과 스크린 샷으로 설명하는 게 대다수였다. 영어 위키피디아 'Video game walkthrough' 항목에 따르면,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를 위한 게임 공략은 핫라인 통화를 통한 1대 1 전화 상담이나 텍스트 공유가 대다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꽤 오랫동안 게임 캡처, 특히 영상 캡처는 쉬운 일이 아니었고 특수 기기를 통해 게임 회사가 만든 공식 공략 영상이나 게임 언론 같은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게임 유저들은 제임스 롤프가 AVGN 33화 '닌텐도 파워' 편에서 회고했듯이 카메라를 플래시 쓰지 않고 위치도 TV에 맞춰야 하는 불편한 상황에서 화면을 촬영해야 했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을 디지털 스캔하고 인터넷 공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다수 게임 유저들은 전문가들이 만든 공식 공략집이나 잡지를 통해서만 게임 스크린샷이나 영상을 접할 수 있었다. 그나마 1996년 '캠퍼의 일기 Diary of a Camper'라는 〈퀘이크〉 리플레이 영상을 통해 머시니마 개념이 등장하면서 유저들끼리 게임 영상을 공유한다는 문화가 등장했지만, 이 역시 게임 내 리플레이 파일을 등록해 재생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런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지만 PC 게임은 물론이거니와 콘솔 게임에서 게임 스크린샷이나 영상을 공유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 파일로 유저들끼리 공유되는 공략 영상은 2005년 Something Awful라는 북미권 인터넷 코미디 포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PC를 활용한 비디오 캡처 난이도가 대폭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기점으로 고전 게임을 중심으로 비디오 영상이 제작되었다. 최초의 유저 게임 공략 영상 역시 같은 포럼에서 마이클 "슬로비프" 소이어가 제작한, 〈The Immortal〉이라는 1990년 DOS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니코니코 동화라는 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hacci 같은 초기 스트리머가 등장해 실황 플레이 영상을 올리면서, '보는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이런 '보는 게임' 문화 및 실황 플레이 영상이 폭발적으로 확장된 계기는, 2014년 PS4 셰어 버튼으로 시작한 콘솔 자체 공유 기능을 통해서였다. PS4 이전까지는 콘솔 게임은 기본적으로 영상 공유를 하기 쉽지 않았다. 콘솔 자체 캡처를 지원하지 않아서 캡처 보드를 필수로 했기 때문이다. PS4 셰어 버튼은 이런 캡처 보드 없이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 플레이를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XBOX와 닌텐도 스위치 역시 셰어 버튼 기능을 도입하면서 8세대 콘솔은 '보는 게임'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실황 플레이 영상이 발전하면서, 영상의 경향도 조금씩 달라져 갔다. 초기 실황 플레이 영상은 공략이라는 개념에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목소리가 없거나 플레이어 '목소리'가 게임의 상황을 반영해 코멘트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게임 플레이 영상 역시 편집이 많이 개입해, 실수나 늘어지는 분량을 잘라내 속도감 있게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화면에 뜬 실시간 채팅방도 그리 흔하지 않았기에 스트리머와 시청자 간의 소통은 댓글 란에서 사후적으로 이뤄지고, 밈보다는 영상 자체를 얘기하는 경향이 컸다. 그러다가 스트리밍 환경이 개선되자, 실시간으로 진행하면서 채팅으로 소통하는 부류의 실황 플레이 영상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런 실황을 진행하는 스트리머는 게임 플레이 그 자체보다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플레이어가 겪는 고충이나 유머를 즐기는 버라이어티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사후적인 게임 플레이가 아닌, 실시간 방송과 채팅을 통해 시청자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면 게임 플레이하는 경향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보는 게임' 현상에 따르는 실황 플레이 영상과 팬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실황 플레이 영상의 특성은, 스트리머라는 대리자를 통해 간접 체험이 이뤄진다는 점에 있다. 기본적으로 실황 플레이 영상은 스트리머가 플레이하는 영상을 시청하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게임 플레이를 하는 것은 스트리머기에 자연스럽게 시청자의 경험은 간접 경험이 된다. 그 점에서 스트리머의 존재는 매개체에 가깝다. 서사 역시 직접 경험보다는, 관람에 가까운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변모 때문에 게임에 대한 접근성 문턱 역시 낮춰지게 되었다. 또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스트리머의 개성이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같은 게임이더라도, 스트리머의 성향에 따라 영상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게임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스트리머 때문에 게임을 보는 부류도 있을 정도다. 스트리머의 방송 스타일은 개별차가 있긴 하지만, 게임 내용에 대한 반응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경향이 크다. 그렇기에 '보는 게임' 현상을 따라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 스트리머는, 다양한 게임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게임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실황 플레이 영상에서 인기를 얻는 게임은 어떤 부류일까? 스트리머의 트위치 방송 관련해 통계를 내는 사이트인 트위치 트래커에서 시청자 선호에 기반한 게임 인기 순위를 보면 https://twitchtracker.com/statistics/games ) 2021년 11월 기준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GTA 5〉, 〈카운터 스트라이크〉, 〈콜 오브 듀티〉, 〈에이펙스 레전드〉, 〈발로란트〉, 〈마인크래프트〉, 〈포트나이트〉,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가 상위권에 올라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기 순위 절반 정도는 메타데이터가 없는 미등록 상태이기에, 순위권에 들었다는 뜻은 고정 시청자를 확보했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이 중 주목해야할 게임은 〈GTA 5〉와 〈마인크래프트〉,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일 것이다. 이 두 게임은 언급한 게임들과 달리 E-스포츠라는 틀에 속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GTA 5〉와 〈마인크래프트〉는 오픈 월드 게임 장르이며, 플레이어의 창발적인 플레이가 방송의 주목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는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게임은 오픈 월드 게임이 아니라, 살인마와 생존자 간의 대결을 다루는 호러 멀티플레이 게임이다. 하지만 다른 멀티플레이 게임과 달리, E-스포츠형으로 실력을 겨루는 게임이 아닌, 생존 및 협력 플레이가 중심이 되고 있다. 사실 이 게임은 발매 초창기인 2016년에는 평단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으며 게임 시스템이나 밸런스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다. 전문가 평점 분포도를 보여주는 메타크리틱 및 오픈크리틱에서도 6-70대의 평균적인 평가를 받았다.〈GTA 5〉나 〈마인크래프트〉처럼 평단과 게임 유저에게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게임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발매 이후 트위치 평균 그래프 (2011.11 기준, https://twitchtracker.com/games/491487 ) 하지만 발매 후 5년이 지난 2021년 11월,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는 위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순위권에서 사라지지 않고 트위치 게임 채널 내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다. 그렇다면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는 어떻게 해서 스테디셀러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우선 공략이나 분석을 제외한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실황 플레이 영상은 긴박한 생존 대결보다는 생존/협력 플레이 도중 일어나는 유머러스한 촌극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런 영상들은 자막이나 채팅을 활용해 코믹한 예능 분위기를 강조하고, 공포 게임와 거리가 먼 썸네일로 시청자를 유도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팬덤에서 공유되고 있는 은어 및 별명은, 해당 게임의 팬덤이 어떻게 실황 플레이 영상을 소비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커뮤니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은어와 별명은 게임 내 상황과 캐릭터를 희화화 하는 용도로 인터넷 유행과 결합해 쓰이고 있다. 이런 희화화는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를 플레이하는 스트리머와 시청자들이 게임을 예능처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의 이런 경향은, 게임 서사의 간접 체험 및 경험 공유이라는 지점에서 생각할 만한 여지를 남긴다.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의 공식적인 장르는 생존 호러다. 게임 제작자의 의도와 게임 향유층의 방향이 다소 상충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충되는 상황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실황 플레이 영상에서 게임 플레이 나아가 서사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전반적인 실황 플레이 영상 트렌드를 분석해보면,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에서 호러 게임이 인기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퓨디파이 같은 유명 유튜버들이 인기를 얻은 계기 역시,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 같은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를 통해서였다. 또한 슈퍼매시브 게임의 PS4 〈언틸 던〉 같은 경우엔, 8세대 콘솔 초창기에 시네마틱 어드벤처 게임과 호러 장르의 조합으로 실황계에서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이런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 대다수는 게임의 질과 상관없이 스트리머가 얼마나 게임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크다. 호러 게임 하는 스트리머 대다수는 과장되게 놀라거나 반대로 무덤덤하게 딴죽을 거는 경향을 보이며, 시청자 반응 역시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사례처럼) '축제'처럼 즐기는 쪽에 가깝다. 깜짝 놀라는 장면에서 놀라는 코멘트조차 진심으로 두려워하기 보다는, '정말 놀랐다'는 식으로 공유에 가깝게 표출된다. 왜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 영상에서 축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일까? 이는 호러 영상물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화관에 가서 호러 영화를 보게 되면, 주변에 놀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무서워하게 되는게 아니구나'하는 공감대를 느끼고 동조하게 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두려움을 공유하면서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의 동조화를 파악해 관객과 상영 공간 자체를 '축제'화한 시도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5~60년대 미국 저예산 호러 영화 제작자로 유명했던 윌리엄 캐슬이 있다. 당시 미국은 심야 영화와 드라이브인 시어터를 통해,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체험하는 새로운 유형의 관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캐슬은 이런 관객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의 동조화와 유희적인 성향이 있다는 걸 간파했다. 캐슬은 영화는 물론이고 영화관에 장치를 도입해 유원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력했는데, 그 점에서 심야 영화와 드라이브인 시어터로 대표되는 컬트 영화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실황 플레이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이 만들어내는 반응과 캐슬이 추구했던 '유원지' 연출, 나아가 컬트 영화 문화랑 완전히 같다고는 보기 힘들다. 윌리엄 캐슬이 만든 영화는 유원지 구성 요소를 차용해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쪽에 가까웠고, 실황 플레이는 스트리머가 제시하는 플레이 영상을 통한 간접 체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체험과 유희화를 공유하고 만끽할 느슨한 '공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컬트 영화에겐 심야 상영이나 자동차 영화관 같은 공간이 있다면, 게임 실황 플레이 영상엔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채팅창이나 영상 댓글란이 있다. 물론 스트리머들에겐 좀 더 진지한 팬 사이트가 있긴 하지만 이런 채팅창이나 댓글란은 즉각적인 반응이 가능하기에, 유동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어떤 지점에서는 컬트 영화보다도 더욱 거리낌없는 구석도 있는데 이런 채팅창이나 댓글란은 기본적으로 '익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명 스트리머들의 실황 플레이 영상에서는 서사의 간접 체험과 경험 공유를 통해 만들어지는 컬트 내지는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전 격투 게임을 주로 하는 케인이라는 스트리머 팬들이 쓰는 밈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스트리머가 자주 쓰는 말이나 인터넷 유행어를 접목시켜 커뮤니티만의 고유한 하위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하위 문화는 위키백과나 케인 관련 커뮤니티에서 유통되어, 케인 팬들 간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또한 '보는 게임' 문화가 게임 문화의 문턱을 영화 감상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추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는 게임' 문화 도래 이전 게임 문화는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다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었고, 그 전제가 어느 정도 문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보는 게임' 문화, 정확히는 실황 플레이 영상은 이런 문턱을 낮추고 영상으로 제시되는 간접 체험만으로도 게임 요소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실제로 '보는 게임'과 실황 플레이 영상을 다룬 정서현과 박주현의 논문 『1인 미디어 게임방송 이용 동기 및 이용 특성에 관한 탐색적 연구: 인터넷 게임방송 이용자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에서도 실황 플레이를 보게 되는 계기로 게임 정보 획득, 대리만족, 단발적 재미 추구를 언급했다고 밝히고 있다. (p.23) 게임 정보 획득과 대리만족을 거치고 난 뒤, 채팅방에 있는 다른 시청자들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경험 공유를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보자면 '보는 게임' 시대에서 게임 서사는 직접 경험을 넘어서 간접 경험을 기반으로 소통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사를 체험하지만 체험에서 머물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게임 서사가 의도하는 방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서사가 유도하는 반응과 반대의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런 체험을 공유하고 밈이나 유머로 승화하면서 즐기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서사의 원래 의도에서 이탈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희화화와 축제적인 상황은 컬트 영화의 반응과 유사한데, 이런 유사성이 발생한 이유로는 느슨한 관람 공동체로써 공유할 만한 '공간'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컬트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모이는 관객과 특정 스트리머의 실황 플레이를 보기 위해 채팅방 및 댓글에 모이는 시청자는 느슨한 공동체적인 공간 속에서 경험, 나아가 유희와 코드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보는 게임' 문화의 대두는 현 시점에서 비디오 게임의 소비 양태의 다양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본 글은 그 중에서도 플레이나 서사를 즐기는 방식이 간접 경험에 기반하며, '댓글'이나 '채팅방'을 통해 같이 경험을 공유하고 축제화 된다는 지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현상은 컬트 영화 상영이나 심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현상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고유한 차별점을 두고 있다. 향후 '보는 게임' 문화와 서사 체험, 경험 공유 비평 및 연구에 있어서 시청자/수용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조 문헌 및 사이트 Video game walkthrough – Wikipedia 중 History 단락, https://en.wikipedia.org/wiki/Video_game_walkthrough AVGN 33화 '닌텐도 파워' 이경혁, 『보는 게임과 Z세대』, http://kofice.or.kr/b20industry/b20_industry_03_view.asp?seq=8042&page=1 (2021) 윤현정, 'MCN 게이밍 콘텐츠의 스토리텔링 연구' 및 Smith, T. 외의 논문 'Live-streaming changes the (video) game' (2016) 정서현과 박주현, 『1인 미디어 게임방송 이용 동기 및 이용 특성에 관한 탐색적 연구: 인터넷 게임방송 이용자 심층 인터뷰를 중심으로』 (2019) https://twitchtracker.com/statistics/games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최은경
최은경 최은경 현 한신대학교 이스포츠 융합 대학원 주임 & 평화교양대 영상콘텐츠 전공 교수. 영국 러프버러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전남과학대학교 e스포츠과 조교수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의 조건 : 게임은 스포츠 종목이 될 수 있는가? 예들 들어 ‘대통령배 전국 아마추어 이스포츠 대회’, ‘이스포츠 대학리그’, ‘동호인대회’, ‘전국장애학생e페스티벌’, ‘한중일 이스포츠대회’,‘세계이스포츠대회’의 공식 종목들이 궁극적으로 국내 게임 산업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 DejaVu Sans The NFT Games Dream – is it yet another tulip mania or path to our future?
< Back DejaVu Sans The NFT Games Dream – is it yet another tulip mania or path to our future? 15 GG Vol. 23. 12. 10. Are NFTs for now or for the future? Constraints can become stepping stones to innovation. The disproportionate market attention towards integrating blockchain technology into games is perhaps stemming from people’s desire to overcome the current constraints. Here, the idea of combining blockchains and games can be examined from two perspectives: First, exploring the intention behind advocating for this change, and second, discussing why such a change is deemed necessary at this time. Combining the findings from these two would allow us to acquire a comprehensive view of this matter and thus enable critical reflections on what the innovation could bring to our future. Notably,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ongoing discourse about integrating a blockchain into games is concentrating on optimistic views toward the future. Discussions about related topics like Play-to-Earn (P2E) and Non-Fungible Tokens (NFTs) are also revolving around on the view towards the future rather than present; on what could happen, and should happen according to the previous attempts. Here, we cannot get away from the feeling that something is not right – something is off. Of course, one could still argue that these messy attempts and discourse are stepping stones towards the next paradigm shift and that we must first prioritise broader and newer attempts rather than hindering innovation with over-verification. Coming from this context, this article aims to delve into the issue of NFTs in games, exploring both the social and technical contexts. First, we take a look at the context of non-fungibility and decentralisation and the game industry’s vision towards its future, along with its remaining technical challenges. From there we look more in-depth at where these endeavours might leave their mark on games. Contexts of Non-Fungibility In recent days in South Korea, the term Non-Fungible Tokens (NFTs) is most commonly used in discussions regarding virtual assets, emphasising their potential value deriving from unique ownership attribution over notions about their technological aspects. Meaning, rather than delving into the technical feasibility of obtaining this non-fungibility status, the discourse surrounding NFTs tends to focus more on how much value can be derived from those assets and how to leverage it. Under current South Korean law, it is not possible to introduce NFTs into games, including its live operation services. There are many restrictions and thus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would be needed before any NFT games can be fully in operation at a viable commercial level in this country. But the potential gain could be high: If NFT games can somehow reach the mainstream market, they could quickly become the most accessible medium for trading cryptocurrencies, using already existing in-game markets – without making much of an early investment in facilitating entirely new channels. Not to mention, South Korean game players are already accustomed to taking financial burden while playing games. Active players are more likely to become devoted fans of the game, and for them, paying to access the blockchain currency may be perceived as an acceptable range of costs. Here it’s worth closely looking at the case of the game “CryptoKitties” (Dapper Labs, 2017) a prime example of games and blockchain integration. The in-game transactions of “CryptoKitties” occur through trading with the virtual currency Ethereum, providing opportunities to trade more exotic digitally-generated cats at higher monetary values. So, what makes this game ‘fun’? Do players find it ‘fun’ when they successfully create exotic digital cats, or does the enjoyment come from engaging in monetary trading as the prices of digital cats might increase? While the game’s primary game design mechanic revolves around collecting and breeding cute digital cats, “CryptoKitties” trade mechanisms combined with real-world monetary values (i.e., currency that can be used even outside the game) make it hard for us to articulate what the particular design elements are that truly resonate with a feeling of ‘fun’ of players. Let’s consider a hypothetical situation where someone has successfully generated an exotic, high-valued cat in the game. If one considers acquiring a unique cat in the “CryptoKitties” through collecting and breeding as ‘fun’: Does that feeling stem from the self-satisfaction of acquiring a rare item (in this case, an exotic digital cat), or does that come from the optimistic expectations of being able to trade it for a higher amount of money? Perhaps it could be a bit of both. Even if the player has no intention of trading that digital cat, just having an expensive object may already give the person a prestigious and satisfying feeling. This somewhat resembles other game business models already common in some South Korean MMO games – and potentially online games from other regions. Then the question is, why NFTs? What makes incorporating NFTs into the game differerent from other conventional game design and business mechanics? In the next chapter, let’s examine the benefits of NFTs from the perspectives of game companies and gamers. Contrasting views towards Non-Fungibility At the current state, one of the primary issues is that game companies have yet to clearly define how the introduction of NFTs can make more ‘fun’ to the game, and what exact innovative changes they envision for their game’s live service. For example, the game “Nine Chronicles” (Planetarium, 2020) demonstrates the notion of decentralisation by going open-source as a blockchain game. But most blockchain game projects do not seem to provide a solid answer on why they need to choose blockchain technology in particular, and rather adopt blockchain first and then find its reasoning as they run. Furthermore, one of the most widely accepted business models among these blockchain-backed games is the pre-sales scheme, selling items early in advance, which is not entirely something new (from the consumer’s standpoint) but more of a replication of existing business models but with added blockchain hype. This inconsistency leads to worrying public views on game companies’ intentions regarding NFTs, which question the corporate vision as the attempt to introduce cryptocurrency into game services while evading state regulations. From the consumer’s standpoint, the company seems to be attempting to profit from the player-to-player item trades through NFTs. (Translator’s note: South Korean game law prevents game companies from directly facilitating player-to-player item trades if it involves purchasing or selling virtual items with real-world money, KRW. Instead, various third-party currency exchange agencies, apart from the game service providers, can mediate the exchange of virtual items with real money, subject to a certain amount of transaction fees.) Many blockchain game proposals from some major South Korean game companies aim to gain control over direct real-world item trade; Proposing to install virtual item trade through company-issued cryptocurrencies, which is a clear indication of the corporation’s attempt to evade government’s regulations. While game companies’ vision toward NFTs is still fixated on product value, for players, the future it presents has somewhat conflicting implications. Some players may view NFTs as a channel for game items as monetary investments, while others see them as collectibles that could last even after the termination of the game’s service. Considering that all online game services’ assets and efforts that gamers accumulate over time could vanish once the game service ends, without any reliable method to possess such intangible values made in games, NFTs can perhaps provide players a permanent ownership of the things that they have achieved in games. Here, NFTs can be interpreted as a token through which players could feel personally connected with the games that they love. Perhaps the NFTs could be perceived as a medium through which players can express their attachment towards the game — a non-fungible token that signifies their devotion as a fan of the game. For these individuals, NFTs are no longer just about the technical wonder but rather a tool for the meaning-making journey of their gameplay. For instance, online game players are aware that the online game service will eventually end. Despite knowing this potential future, they remain devoted to their current satisfactions with the game, accumulating virtual assets that may one day no longer be available. Perhaps NFTs can resolve this uncertainty (the risk) that players must endure, by becoming a proof of record of in-game items that can last indefinitely. A token with which they can enshrine their love towards the game that can safely be stored without the risk of losing it. Contexts of decentralisation What the blockchain currently guarantees in terms of non-fungibility is the data. While attempts to enhance technologies such as proof-of-work (PoW) and hardware storage capacities are in progress, uploading the entire game system to run on the blockchain is still challenging. Let’s consider a hypothetical scenario where the game system remains outside the blockchain, perhaps locally or internally within the game company’s server, while the game state (data) is kept on the blockchain. In this setup, even if the game company is no longer able to manage the game services — terminating its live operation — the records of the items still exist on the blockchain to prove who owns that particular item. However, without the game system to actually run or operate that specific item this is just a data record, which diminishes its non-fungibility – and thus, become basically worthless. While the game company could add more data, but this could significantly decrease the amount of data that can be stored in the blockchain, leading to higher costs. Higher production costs may result in slower updates , and keeping track of all gamers’ play data on the blockchain could burden computational power, potentially hindering seamless gameplay. Recent new methods proposed to improve blockchain usage (e.g., power consumption, transaction costs, and transaction times) contradict the goal of decentralisation for efficiency in proof delegation. Furthermore, most current blockchain transactions are mediated through trading platforms, which deviates from decentralisation in the first place. Another important note here is that if the game company intends to establish a genuinely centralised way to control its game service and trades, a blockchain is perhaps, unnecessary. As even with the conventional techniques already in use in current game technologies, the company could still choose and guarantee the value of their gamers’ data (and their item’s value) – and perhaps be able to do so more efficiently in terms of speed and cost than using a blockchain. Therefore, game corporations must truthfully reveal their intentions and reasoning for adding blockchains in games despite the corresponding complexity and cost risks. Without such justification, their proposals can only be seen, from the players’ standpoint, as a deceptive corporate manoeuvre – promising non-valuable values in an attempt to evade the law. What we find fascinating in attempts to decentralise games is not to facilitate a central server to operate and manage the game but rather to have it open by envisioning a pivotal shif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game companies and users – a relationship that has historically been one-sided and hierarchical. In decentralised games, the relationship between game companies and gamers can take on a more flat and open structure. This collective relationship could also influence how in-game interactions and business models are designed, potentially addressing or altering the stress on gameplay (as recently highlighted in South Korean gaming culture) caused by game designs that favour competition and a win-or-lose mentality. Finding somewhere in between What NFTs could bring to games? In this chapter, we explore intriguing attempts to mediate, compromise, negotiate, and introduce new models that could inspire further innovations. Technical enhancements could one day be able to solve blockchain-related issues. In particular, blockchain has been a significant concern because of its high power consumption due to proof-of-work (PoW). Therefore, newer technologies that do not rely on PoW are being introduced. While it is unlikely that existing blockchains already in operation will alter or adopt these new methods, it could potentially offer further future technical alternatives to issues related to non-fungibility and decentralisation that may arise. In contrast, the game corporations’ attempts to leverage blockchain technology to free themselves from laws and social responsibilities cannot be achieved solely through technical solutions. First, let’s acknowledge that the idea (or attempt) of connecting in-game currency with real-world currency without violating the law is not particularly new; perhaps there’s a good reason for that. The issue is more fundamentally interconnected with the world, and thus, no particular technology—let alone blockchain—can be a magic wand. We believe that even if the use of blockchain becomes more common than ever before, for instance in the banking system, the practices are likely to be somewhere between convention and innovation – a fusion of blockchain technology with the existing banking system. As such, the compatibility between virtual assets and real currency should be mediated, perhaps within the scope that satisfies the existing laws of our society. Implications could also involve using blockchain technology to enhance communication between game companies and players. One such inspiration is the game “EVE Online” and its annual event, ‘Eve Fan Fest,’ which any EVE Online player can sign up for and participate in. Among the many side events in Eve Fan Fest, one we would like to point out is the ‘Player Presentation,’ which offers a 40-minute presentation or a roundtable discussion to pre-registered players. The game operates a single shared universe (global region server) for players worldwide, eliciting user participation both in and outside gameplay: At the event, EVE Online players from various factions gather for discussions and negotiations regarding faction relationships and agreements. Perhaps we could use the blockchain to create and enable various forums like Eve Fan Fest, where South Korean game devs and players can join and engage together. Company representatives can listen to players’ opinions and reflect those ideas into the game’s service, enabling a feedback loop with real in-game implications. Such attempts can perhaps prevent potential conflicts or issues that may stagnate if the company solely dictates decision-making by dismissing the power of collecting intelligence from players. Instead, the blockchain could contribute to recording and tracing player’s ideas and opinions efficiently, supporting the enhancement of fairness and transparency in player communication and game company service decisions. In addition, if the game service continues for a long time, it can serve as an archive of accumulated communication between game developers and players. The blockchain may help regain the trust between South Korean players and game developers, which has reached a dangerously precarious state in recent years. Perhaps loot box probability disclosure, mandated by law in Korea from March 2024, can be verifiably realised by archiving all records of randomised items created in the game on the blockchain. Players may be able to further verify whether the game’s system is operating as the game company intends. At the time of writing, it seems evident that many in South Korean game companies and developers are concerned about what this new law could bring to the industry and how to even comply with this upcoming regulation. Perhaps with blockchain’s potential for transparency and decentralisation, the disclosure of loot box probabilities in South Korea is not far from reality. Of course, we cannot emphasise enough how a careful implementation of new technology, like blockchain, should be based on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real world and our real problems. Lastly, we again ask: So what do game companies hope to achieve through NFTs? Is the phenomenon of NFT games a futuristic indicator towards our near future, or are they just a mere reflection of the pending issues of our current reality? Attempts are being made to identify the nature of this phenomenon and clarify our understanding of the blockchain game discourse. Finding the right pathway cannot be achieved unless one can figure out one’s location, calculated based on observing the terrain relative to the starting point where one began one’s journey. As such, we must concentrate on navigating through our future discourse while carefully traversing our current and upcoming terrain of topics and never stop asking the very fundamental starting question: “What is fun in games—and can a game still be called a game when its purpose is something other than the pursuit of fun?”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게임개발자, 연구자) 오영욱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 Back 일본의 보는 게임: 같은 듯 다른 일본의 상황들 03 GG Vol. 21. 12. 10. 1. ‘보는 게임’에 대한 기억 필자는 어릴 적부터 그다지 게임에 소질이 없었던 탓에 점프를 하여 성벽을 오르거나 호랑이를 탄 채 불타는 링을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시도도 한 번 못 해본 채 늘 동일한 순간에서 몇 번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게이머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어린이는 자라서 주로 남들은 안 하는 게임만 ‘보는’ 어른이 되었다. 필자의 소위 ‘보는 게임’과 관련된 가장 오래되고 충격적인 경험은 전자오락실이 아니었다. 한번은 필자와 동생보다 몇 살 많았던 6학년짜리 엄마 친구 아들이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현란한 동작으로 버튼을 눌러 공격을 피하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놀라운 속도로 결승선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한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고수였다. 직접 하는 것만큼 긴장한 우리는 손에 땀을 쥔 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고수를 진심을 다해 응원했다. 두번째는 일본의 어느 복합 엔터테인먼트 체인점이었다. 최고 난이도의 곡을 북을 치는 속도, 절묘한 타이밍, 강약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플레이하던 고수는 퍼포먼스를 마치곤 구경하던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른 게임기를 향해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나갔다. 이렇게 직접 게임을 하지 않더라도 고수의 플레이는 보는 것을 넘어 게임 자체를 예술 작품을 감상 하듯 바라보게 되었고 마치 스포츠 경기를 관람 하듯 프로게이머의 경기를 즐기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 게임 방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직접 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즐기는 ‘보는 게임’ 이 게임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보는 게임’은 타인의 플레이를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실력도 키워 보겠다는 목적성을 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해본 적 없는 (혹은 할 생각이 없는) 게임이라도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으로 또 다른 재미를 느끼며 플레이어가 직접 하는 게임과는 별개로 ‘보는 게임’ 만의 즐거움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1) 최근 몇 년 사이에 일본에서도 게임 방송 2) 이나 e스포츠와 같은 ‘보는 게임’이 디지털 네이티브 3)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방치형 플레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감상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났으며 여배우 혼다 츠바사나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대형 유튜버 히카킨 (HIKAKIN) 4) 이 게임 채널을 개설하기도 하였고,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 방송을 주로 하는 샤루루(しゃるる) 와 같은 게임 전문 방송인도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게임 방송을 위한 전용 스트리밍 플랫폼을 전문으로 제공하는 OPENREC.tv나 Dozle(도즈루) 5) 와 같은 회사들도 주목받고 있다. e스포츠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져 플레이어 커뮤니티가 주최하는 이벤트 및 대회가 늘어나게 되었고 일본의 유명 연예 프로덕션인 요시모토 흥업(吉本興業)에서 e스포츠 팀을 창설하는 등 이전과 달리 다양한 기업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AbemaTV와 같은 케이블 방송 뿐 만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서도 e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일본의 ‘보는 게임’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게임 방송과 e스포츠를 중심으로 일본의 새로운 ‘보는 게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용한 인터뷰는 2021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총 10명의 2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 사이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반구조식 인터뷰를 통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중 일부 내용을 번역하여 인용하였다. 2. 새로운 세대의 전유물? 평소 인터넷 방송을 자주 보는 것은 주로 10~20대로 이전부터 인기가 있었던 〈회전 초밥집 전 메뉴 시켜서 클리어하기〉와 같은 ‘한번 해보았다(〇〇やってみた)’ 형식의 방송과 함께 게임 방송의 인기가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었다. 6) 이러한 영향인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 <코로코로믹스 (コロコロミック)>(小学館) 가 실시한 2019년 ‘관심 있는 직업 랭킹’에서 이전에는 순위에 들지 못했던 프로게이머와 게임 전문 방송인(주로 게임 유튜버)이 각각 2위, 3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7) 본인이 직접 플레이하지 않는 게임 관련 영상을 자주 찾아본다는 N은 ‘보는 게임’의 매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멋진 장면을 보거나 (드물기는 하지만) 게임 공략을 참고하려고 본다. 플레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개가 다양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중략]…전혀 다른 게임을 하는 친구들과도 좋아하는 게임 방송에 대한 정보는 공유할 수 있고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다" (N, 20대, 남, 대학생). 평소 e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자주 본다는 Z는 ‘보는 게임’의 재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에 대한 공략법도 알 수 있고, 야구나 축구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며 보는 것과 같은 재미가 있다" (Z, 20대, 남, 아르바이트). N과 Z에게 있어서 ‘보는 게임’은 ‘하는 게임’과는 분명히 다른 즐거움을 제공하는 게임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이다. 게임은 하지 않지만 게임 방송을 자주 본다는 W는 집에서 주로 방송을 틀어 놓고 운동을 하면서 보거나 듣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 (본인의 최애 (推し))이 (게임을 하면서) 보이는 반응도 재미있고 (성우이기 때문에 ) 해설하는 목소리도 좋아서 굳이 프로게이머와 같은 고 스킬이나 화려한 테크닉이 없어도 매우 재미있다" (W, 20대, 여, 회사원). "아르바이트 하면서도 (게임 방송을) BGM처럼 들었다. 주로 집에서는 틀어놓고 보면서 공부하면서 들으면서…청소하면서 보면서…들으면서… [중략]…해본 적 없어도 (공략 방법 등이) 새롭고 그 자체만으로 게임은 즐길 수 있다" (H, 20대, 여, 대학생). H의 부모님은 게임을 하면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고 쉽게 몰입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W와 H의 경우처럼 게임 방송과 같은 새로운 ‘보는 게임’에 익숙한 세대에게 ‘보는 게임’은 때때로 ‘라디오와 같은 듣는 게임’이기도 하며 때론 운동이나 청소 등과 같이 ‘다른 무엇인가를 동시에 하면서 하는 게임 (しながらゲー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게임 방송을 보는 것은 비단 젊은 세대 뿐만이 아니다. 일본 게임의 전성기를 ‘하는 게임’을 체험하면서 성장한 세대 중에도 게임 방송을 자주 보는 이들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30대의 K와 M, 40대의 C가 이에 해당한다. 어렸을 적부터 다가시야 (駄菓子屋) 8) 나 제과점 앞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는 K와 M은 비슷한 ‘보는 게임’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K는 다양한 플랫폼의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C는 평소 타인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 그냥 보면서 힐링이 되는 〈펭귄의 섬〉 과 같은 스마트폰 게임을 주로 하는데 동일한 맥락에서 게임 방송을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게임 방송을 본다는 M은 이렇게 말한다. "많이는 보지만 단순히 송신되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은 느낌? 이랄까…… 게임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보는 게임’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M, 30대, 남, 서비스직). 3. ‘보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보는 게임’ 문화는 이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까? 게임 문화를 주도해 왔으며 ‘하는 게임’에 익숙한 이들은 이처럼 게임 방송은 ‘보는 게임’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게임 방송이나 e스포츠와 같은 새롭게 등장한 ‘보는 게임’이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특히 Y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게임을 하지만 게임 방송은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게임을 하면 (게임 방송을 보는 것)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동영상을 볼 시간에 역시 직접 플레이하는 편이 몇 배는 더 즐겁다" (Y, 30대, 남, 대학원생). Y는 ‘보는 게임’을 어릴 적 친구 집에 놀러 가 게임을 할 때 서로의 순서를 기다리며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훈수를 두면서 게임을 보던 광경이라고 설명한다. 즉 ‘보는 게임’ 에서는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는 타인과 같은 플레이 경험과 공간,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플레이한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연결된 화면이나 채팅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거리가 존재하는 환경에서의 ‘보는 게임’은 게임을 완전히 체험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우며 플레이의 경험 자체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진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느 시기부터 ‘보는 게임’으로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며 I는 일본의 전자오락실인 게임 센터(ゲームセンター)에서의 ‘보는 게임’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게임 센터에서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이 능숙하게 플레이하는 것을 주변의 모두가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구경했던 적이 있다 … [중략]… 신입생과 이야기할 때 처음 해본 게임이 스마트폰 게임이고 게임 센터도 별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해서 세대 차이가 느껴져 충격을 받았다" (I, 30대, 남, 대학원생). 게임을 본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게임 방송이나 e스포츠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Y나 I가 경험한 것과 같은 ‘보는 게임’ 이 존재했다. 특히 닌텐도에서 1983년 발매한 〈패미컴(패밀리 컴퓨터: ファミリーコンピュータ)〉이 일본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게임은 가족과 함께, 남녀노소가 함께 즐기는 여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아케이드 게임 역시 이전부터 특유의 직접 몸을 움직여 ‘하는 게임’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아케이드 게임의 주된 플레이 공간인 게임 센터는 젊은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서로 교류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한국의 PC방과 같은 대표적인 게임 공간 (장소)으로 ‘보는 게임’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9) *레트로 분위기의 게임 센터 〈쟈리가니(ザリガニ)〉(왼쪽) 와 〈제로(ゼロ)〉 (오른쪽). (2016-11-24일본, 오사카 촬영). 친구의 플레이를 옆에서 지켜보며 ‘보는 게임’이 이루어지는 장소. 대부분의 게임 센터들이 위치상으로도 그렇지만 게임 센터 외부에 설치된 게임기가 많아 행인이나 주위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쉽게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보는 게임’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에 가깝다. 게임 센터에서 플레이하는 것은 이처럼 언제라도 ‘보는 게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멋진 플레이를 보는 것은 게임 방송을 통해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를 풍미한 게임의 고수 〈다카하시 명인(高橋名人)〉 10) 의 플레이를 보면서 박수를 보내며 열광하던 이들이 있었으며 격투 게임 대회에서는 친구들의 플레이를 구경하며 응원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게임 플레이에 익숙한 게임 문화에서 새로운 ‘보는 게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처음 접한 게임이 스마트폰 게임이며 보거나 듣는, 혹은 ‘무엇을 하면서 보는 게임’을 체험하며 성장한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보는 게임’은 TikTok이나 Instagram에 사진을 올리거나 ‘좋아요’와 같은 공감을 얻고 공감 하는 것과 동일한 함께 공유하는 경험일 수 있다. 게임 방송이 다루는 게임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격투 게임이나 슈팅 게임에서 높은 점수를 내거나 플레이어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방송도 있지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프로게이머가 아니더라도 또는 특별한 스킬이 없어도 게임을 하면서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방송이나 80년대 혹은 90년대의 매니악한 레트로 게임 (retro game) 플레이를 하는 게임 방송이 많다. 물론 감상할 수 있는 게임 방송도 인기가 있다. 예를 들자면 〈게임 산책(ゲームさんぽ)〉 11) 채널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채널에서는 다양한 게임들을 소개하고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전형적인 ‘보는 게임’ 콘텐츠이다. 그러나 타인이 플레이하는 것을 게임 테마와 관련된 전문가인 초대 손님들이 보면서 코멘트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마치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좌담회처럼 진행된다. 즉 ‘보는 게임을 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게임’을 재해석하고 평가하는 새로운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게임 방송에서 대신 도전해 주고 있기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 만큼 그 내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멋진 플레이를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는 N과 H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 있어서 게임 방송은 동료나 친구 혹은 그 구역의 고수가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이러한 게임 플레이를 통해 친근함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플레이 하는 것과 같이 동일시하기도 한다. 한편, 집에서 그리고 게임 센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게임을 했던 일본의 게임 문화를 주도해 온 30~40대의 세대들에게는 게임 방송을 ‘보는 게임’으로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4. ‘e스포츠는 뭐가 다르죠?’ 일본의 e스포츠 그렇다면 e스포츠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e스포츠라는 용어가 알려지게 된 것은 2015년 〈사단법인 일본 e스포츠협회 (JeSPA)〉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2018년 문부과학성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e스포츠 대회 개최나 프로게이머 팀의 출범이 잇따르며, 스폰서계약을 체결하려는 기업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공개된 KADOKAWA Game Linkage의 조사에서도 일본의 2019년 e스포츠 시장 규모가 이미 60억 엔을 넘어섰으며 코로나로 인한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의 e스포츠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본에서 e스포츠라는 용어가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각 게임 센터에서 개최하는 격투 게임 중심의 게임 대전 이벤트가 있었다. 하이스코어를 목적으로 하는 게이머 (고수) 12) 들이 존재했고 아케이드 게임의 전성기에 등장한 〈스트리트파이터II〉 13) 로 인해 플레이어가 서로 대전하는 게임 문화도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 디지털과 아날로그 할 것 없이 게임을 자주 한다는 T는 ‘보는 게임’으로의 e스포츠는 역시 익숙하지 않다며 e스포츠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e스포츠와 RTA(Real Time Attack)와 뭐가 다른가? 차이가 있다면 있겠지만 게임은 역시 하는 거다. 경기를 보는 것과 다르다. 보고 하고 보고 하고. 일본에서는 게임 콘텐츠도 PvP나 PvE나, Minecraft 등 서바이벌 적인 것 만이 인기있는 콘텐츠가 아니니까" (T, 30대, 남, 회사원).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e스포츠를 즐기는 인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T의 이야기처럼 경기를 관람하는 것은 바둑이나 장기 대회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e스포츠를 관람한다는 것은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또한 국제적인 e스포츠 대회에서 인기있는 종목들 중에는 일본에서는 그다지 인기 없는 장르의 게임도 많다. 한국에서는 이미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거액의 상금이 걸린 대규모 대회나 유명 기업들과 스폰서를 체결한 대회들이 개최되면서 프로게이머가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젊은 세대에게도 e스포츠라는 ‘보는 문화’는 친숙한 광경은 아니다. e스포츠는 일본에서 아직 ‘관람형’ 보다는 ‘하는’ 게임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가정용 콘솔 게임기가 많이 보급되어 상대적으로 PC게임이 주종목으로 채택되는 e스포츠의 시작이 늦어지게 되었지만 14) 2018년에는 기존의 e스포츠 3개 단체가 통합하여 〈일본 e스포츠 연합 (JeSU)〉이 발족하게 되었다. 15) 물론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e스포츠가 존재하지만,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와 연계한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일본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6) 한국에서는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이 e스포츠의 활성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일본에서는 중소도시의 현/구/시 도청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역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e스포츠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인프라가 준비되기도 전에 e스포츠의 지역 대회는 활성화되었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에 비해 인구감소 및 고령화에 따른 문제를 겪고 있는 중소도시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데 e스포츠가 지역 활성화 뿐만 아니라 노년층의 건강 증진을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e스포츠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17) 와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지역 경제를 부흥하고자 하는 목적도 가진다. 대표인 사례로 이바라키(茨城県)현에서는 e스포츠를 통해 지역 세대 간 격차를 줄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고등학생을 위한 e스포츠 대회나 e스포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아카데미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 최초의 47개의 도/부/현이 참가하는 이벤트〈도/부/현 대항e스포츠대회(全国都道府県対抗eスポーツ選手権2019IBARAKI)〉를 개최하였다. 또한 교토부(京都府)에서는 2019년 〈교토 e스포츠 서밋〉이 열렸고 2021년에는 지역 경제 부흥을 도모하는 〈KAMEOKA e-SPORTS PARTY〉를 가메오카 온천 지역에서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도/부/현 대항 e스포츠 대회(全国都道府県対抗eスポーツ選手権2019IBARAKI)〉의 앰배서더 Vtiber 이바라키 히요리 (茨ひより) (왼쪽) 18) 과 교토의 의 포스터 (오른쪽) 일본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교육 기관도 생겨나고 있다. 주로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중심으로 프로게이머 양성 학교가 설립되었고 대학에서는 e스포츠를 커리큘럼에 넣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19)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장수 인구가 많은 일본에서 노년층의 건강 관리를 위해서도 e스포츠가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액티브티협회〉에서는 ‘건강 게임 지도사’ 의 자격증 코스를 통한 교육 세미나와 노년층을 위한 e스포츠 이벤트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20) 이러한 e스포츠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국의 중소 도시에 e스포츠 시설과 팀이 생기면서 이웃 지역과의 대회 등을 개최하기 위한 시니어 e스포츠 팀도 나타나게 되었다. 21) * 평균 연령 65세 이상으로 구성된 시니어 e스포츠 팀 의 공식 홈페이지, https://matagi-snps.com/ (2021년 10월 06일 접속)(왼쪽) 과 건강 게임 지도사 양성 강좌 안내 전단지 (오른쪽) T가 언급한 것과 같이 일본에는 일반적인 e스포츠 대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RTA in Japan〉과 〈AFTER 6 LEAGUE〉가 있다. 사단법인 RTA에서는 운영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RTA in Japan〉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1년에 2번에 걸쳐 『RTA in Japan Summer』와 『RTA in Japan Winter』를 개최하고 있으며 일단 특정 게임을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해야 하므로 주로 〈천수의 사쿠나히메(天穂のサクナヒメ)〉나 〈별의 커비 64(星のカービィ64)〉,〈 슈퍼 마리오 64 DS(スーパーマリオ64DS)〉와 같은 게임이 다수 플레이 종목에 포함된다. 〈AFTER 6 LEAGUE〉는 대회 타이틀이 상징하는 것처럼 퇴근 후 (6시 이후) 플레이하는 회사원을 중심으로 하는 e스포츠 리그이며 뜨거운 반응을 얻어 2022년에 2번째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의 경우는 〈리그 오브 레전드〉나 와 같은 주로 국제적인 e스포츠 대회의 종목인 게임을 중심으로 덴츠 ( Dentsu.Inc ) 등의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대회이다. * 〈AFTER 6 LEAGUE〉의 공식 홈페이지, https://a6l.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지금까지는 국제 e스포츠 대회에서 널리 알려진 프로 게임 팀이나 프로게이머는 드물다. 22) 일본 국내의 e스포츠 대회는 상금 역시 매우 적은 수준인데 이것은 대회의 상금 규정이 〈경품 표시법(景品表示法)〉과 〈도박 관련 형법(賭博罪)〉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3) 따라서 일본의 e스포츠 대회에서는 국제 대회와 같은 많은 상금을 걸 수도 비싼 입장료를 받아 수익을 낼 수도 없는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도/부/현을 중심으로 경기 시설이 설치되고, 2018년부터는 공인 프로게이머를 위한 프로라이선스가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상금에 대한 규정도 변경되어 대규모의 e스포츠 대회가 진행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됨에 따라 e스포츠 활성화의 가능성이 늘어나게 되었다. 24) 그러나 아직까지는 단발성 이벤트화 되어 있는 e스포츠 대회, 열악한 관람 문화, 전문적인 프로게이머의 부족으로 인해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고 남아있는 과제는 많아 보인다. 5. ‘보는 게임’과 ‘~하면서 보는 게임’ 일본의 ‘보는 게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는 게임은 확실히 기존의 하는 게임과는 구별되는 현상이지만 완전한 새로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존재했다. 특히 가정용 콘솔과 함께 일본의 게임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아케이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임센터에서는 이러한 ‘보는 게임’은 흔하게 일어나는 광경이었다. 둘째, 새로운 ‘보는 게임’인 게임 방송과 e스포츠의 수용에서는 세대 간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가정용 콘솔과 아케이드 게임 중심의 게임 문화에서 성장하여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플레이 경험이 익숙한 이들에게 물리적 환경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느끼기 어려운 새로운 ‘보는 게임’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며 e스포츠 경우도 그러하다. 물론 일본 e스포츠의 출발점은 이전의 격투 게임 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현재와는 달리 플레이어 간의 팬 교류 행사나 오락실 홍보 이벤트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확장된 방식의 ‘보는 게임’인 게임 방송이나 세계적인 e스포츠의 흐름과는 다른 전개를 보이게 된 e스포츠와 관련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타인의 플레이를 보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수월하게 공유되지 못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셋째, 현재 일본에서 새로운 ‘보는 게임’을 경험할 수 있는 무대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는 것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전과 비교하여 이러한 ‘보는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따라서 타인의 플레이를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공유하면서 동시에 ‘보면서 들으면서~하면서’ 즐기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었고 기존의 게임문화와는 또 다른 게임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대에 따라 즐기는 게임의 장르나 플랫폼이 다르며 어디까지 ‘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달라질 것이다. ‘보는 게임’ 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게임 플레이를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교류하고 확장시켜 다시 새로운 즐거움을 공유해 나가는 방식이며 이처럼 게임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앞으로 ‘보는 게임’ 혹은 ‘~하는 게임 보는 게임’이 어떤 식으로 더욱더 변화될 것인지를 기대해본다. 1) 이경혁.『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 게이머, 게임을 말하다』. 로고폴리스. 2016. 2) 게임실황동화 (ゲーム実況動画) 혹은 줄여서 게임실황(ゲーム実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YouTube, Twitch 이외에도 니코니코 동화 (ニコニコ 動画) 사이트가 있다. 3) 디지털 디바이스로 가득한 환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성장한 이 세대에게 디지털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 방법을 제시한 마크 프렌스키 (2006)는 이들을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설명한다. Prensky, M. (2006). Don't bother me, Mom, I'm learning!: How computer and video games are preparing your kids for 21st century success and how you can help!. St. Paul: Paragon house. 4) 유튜브에서 게임 방송 콘텐츠가 인기를 얻게 되자 <히카킨 게임스>라는 채널을 개설하였다. PC 게임 뿐만 아니라 모바일 게임 등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한다. 5) 유명 유튜버 Dozle(ドズル)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로 주로 <마인크래프트> 관련 게임 방송 영상을 제공하고 있다. 6) Cross Marketing.『YouTubeの利用実態に関する調査』.2020. https://qr.paps.jp/W9uDU(2021년 10월 06일 접속) 7) <코로코로믹스온라인 (コロコロミックオンライン)>의 홈페이지, https://corocoro.jp/82218/ (2021년 10월 6일 접속)) 8) 옛날 문방구 (문구점)와 비슷한 형태로 가게 앞에 몇 대의 게임기가 설치되어 있거나 과자와 어린이들의 장난감 등을 주로 판매한다. 9) 加藤裕康.『ゲームセンター文化論メディア社会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 新泉社. 2011. 카토(加藤)(2011)는 게임을 ‘보면서 즐기는 문화’를 형성해온 게임 센터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메타적인 게임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게임 센터는 일본 특유의 게임 문화와 맞물려 있을 뿐 만 아니라 게임을 하거나 보는 행위 이외에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형성되는 장소로 게임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10) 패미컴 붐과 함께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게이머이며 특기는 1초에 16회이상의 연타였고 그의 35주년을 기념하여 2021년 <타카하시명인 탄생 35주년기념 앱 ~게임은 1일 1시간!~ (高橋名人35周年記念アプリ〜ゲームは1日1時間!〜)> 이 앱으로 출시되기도 하였다. 11) Livedoor사의 이 채널은 ‘다양한 관점에서의 게임 방송’을 컨셉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2021년 3월 20일 <모여라 동물의 숲> 편에서는 마을의 부엉이 박물관 설립을 테마로 설정했는데 국립미술관 큐레이터와 예술 전문가를 초대하여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 플레이 뿐 만 아니라 실제 게임 속 큐레이션 및 작품의 재현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다. 12) 게임의 최고 점수를 노리는 고수들을High Scorer (ハイスコアラー)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3) 1991년 등장한 이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전국 게임센터 대항 격투게임 대회 영상 등이 판매되기도 하였다. 14) 青山学院大学総合研究所研究ユニット「五輪eスポ」.『eスポーツ産業論』. 同友館. 2020. 15) 는 주로 e스포츠 대회의 보급, 프로라이선스의 발급 및 프로게이머의 육성을 지원하고 있다. 2020년 8월말 현재 전국적으로 25개의 지부가 생겨났다, 공식 홈페이지, https://jesu.or.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16) 筧誠一郎 .『e スポーツ地方創生~日本における発展のかたち~』.白夜書房. 2019. 17) e스포츠를 전망이 밝은 비즈니스 분야로 꼽히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적합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18) 공식 홈페이지, https://www.ibaraki-esports.com (2021년 10월 06일 접속) 19) 게이오 대학에서이라는 수업이 개설되었고 쿠마모토 산업대 중심으로 이 설립되었다. 20) 공식 홈페이지, http://www.jp-activity.jp (2021년 10월 06일 접속) 21) 아키타현(秋田県)에서 일본 최초의 시니어 e스포츠 프로 팀이 활동하고 있다. 팀명은 로 주로 포트나이트를 중심으로 플레이하는 팀이다. 22)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진 선수들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전문적인 프로게이머 선수가 부족하고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전업 프로게이머 전문 육성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겸업 선수들 중에는 게임 실력이 좋은 사람이 ‘어쩌다 보니 프로게이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는 경우도 있다. 23) 프로게이머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일반인’이 게임 플레이를 보여주고 고액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경품 관련 법률에 저촉되는 행위로 규정된다. 따라서 10만엔을 넘어가는 상금은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4) 그러나 일본 최초의 e스포츠 프로라이선스에는 국제 대회의 등록 종목인 <하스스톤>이나<리그 오브 레전드>,<스타크래프트 II>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리츠메이칸대학 기누가사 종합 연구 기구 전문 연구원) 신주형 주로 시리어스 게임과 시리어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소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리츠메이칸대학 게임 연구 센터 (RCGS)의 게임 아카이빙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 Back 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01 GG Vol. 21. 6. 10.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애니센터 앞에서 불타는 만화. 1996년에는 정부가 만화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른바 ‘청보법 파동’이다.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만화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고, 1997년에는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됐다. 대회가 열린 1996년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 됐고, 2001년 국가 공식 기념일이 됐다. 2000년 여름에는 ‘둘리아빠’ 김수정 당시 만화가협회장의 주도로 청보법 파동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개최됐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가협회 회원과 함께 나서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장에는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연합,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있었다. [1] 2012년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독자와 작가들이 함께 싸웠다. 이 결과 세워진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서는 2018년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콘텐츠 분야 최초로 ‘차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자가진단표를 공개 [2] 하기도 했다. 대중과 호흡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에도 평단과 독자들이 웹툰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는 창작자와 향유자가 한 목소리를 내며 만화를 지켜낸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불량 콘텐츠였던 만화가 문화가 되어가는 장면이다. 현재, 2021년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교통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나 웹툰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의 만화는 이렇게 ‘문화’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게임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게임은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치고’, ‘폭력성을 추동해 범죄를 유발하고’, 심지어 ‘중독을 유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저 말들은 만화에도 똑같이 쓰였던 말이다.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문화다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보는 만화는 하위 문화로 여겨졌다. 불량하고, 어딘가 해로울 것 같고, 악당들이 유해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만화 화형식(?)이 거행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업체들이 앞장서서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승인된’ 만화만 발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무서운 것이 주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 미국 CCA의 승인 씰. 이런 주류의 시선이 탄압하는 역사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유구하다. 소설이, 신문이,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가장 막내(?)격 매체인 만화와 게임이 탄압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새로 등장한 매체에 느끼는 공포’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오명,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즐기는 사람들의 힘이 가장 컸다. 2000년 종로 거리에서, 2012년 온라인 게시판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만화는 천천히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만화계에선 여전히 플랫폼의 역할,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동성이야 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 〈판타스틱 4〉이슈 1. 우측 상단에 CCA 씰이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열망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문화는 빛을 발한다. 때로는 규제에 질문을 던지며 돌파구를 만들기도 하고, ‘판’ 밖의 돌팔매질에 창작자와 향유자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중심에는 콘텐츠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어떤 콘텐츠가 ‘문화’로 여겨진다는 건, 이런 과정을 거쳐 제공자와 향유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의미한다. 게임 역시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화와 게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만화는 그동안 개인 창작자가 주류였지만, 게임은 태생부터 기업이 개발하는 산업의 요소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CCA의 사전검열을 피해 피 대신 불꽃이, 살점 대신 바위가 튀는 <판타스틱 4>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는 시장이 사라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창작을 이어간 작가들이 웹툰의 씨앗을 틔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은 기업이 만들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만 존속할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액제를 넘어 ‘가챠’로 불리는 뽑기를 만났고, ‘P2W(Pay to Win)’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에도 익숙해지게 됐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 게이머들은 이 과정까지도 어느정도 이해했다. 게임의 태생과, 내가 즐기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건 단순히 게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게임이 주는 경험과 다른 유저와 협동-경쟁하며 느끼는 경험의 총합이다. 그동안 게임이 부당한 탄압을 받을 때 마다, 게이머들은 항상 게임 옆에 서서 비난을 받아냈고, 또 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지키기 위해서 게이머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게임은 문화다. 게이머에겐. 오늘날 게임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에겐 ‘게임은 문화’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의 청소년기는 스타리그가, 20대는 LCK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게임은 나 혼자서 즐기는 놀이를 넘어 함께 열광하는 문화였다. 게임을 만화처럼 불태우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시선은 느리지만 변하는 중이다. 게이머들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 게이머들은 창작자들, 즉 게임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리자드의 ‘님폰없’ 사태, 한국의 트럭시위 릴레이를 보면 전세계적인 추세로 보인다. * 밈이 된 '님폰없'. 이제 게이머들은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특히 대형 게임사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게이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이머들이 ‘더 강한 규제’를 외치는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있다. 만화는 발전 과정에서 ‘독자’의 힘으로 핍박을 이겨냈다. 미국은 ‘수퍼히어로’ 장르로, 한국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 화형식을 거쳐 MCU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엔 독자가 있었다. 최근 웹툰계에 대두되는 플랫폼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을 존중하고, 플랫폼을 찾는 이유가 작품임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결국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가 ‘즐기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문화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계의 2000년과 2012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내기 위해 50년 전 마블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문화 콘텐츠로서 게임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1] 손발을 잃고 할 말을 잃은 만화가들의 침묵시위, 중앙일보, 2000. 7. 23 https://news.joins.com/article/682613 [2] 웹툰자율규제 연령등급기준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www.kocca.kr/cop/bbs/view/B0000147/1836747.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At=&menuNo=201825&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_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categoryCOM062=&categoryCOM063=&categoryCOM208=&categoryInst=&morePage=&delCode=0&pageIndex=1#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만화평론가) 이재민 2013년부터 만화/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2019년 콘텐츠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부터 웹진 ‘웹툰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만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시장 저변의 많은 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합니다. 소설 <룬의 아이들>과 스타리그, LCK, 그리고 수많은 웹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김병준
김병준 김병준 KAIST 디지털 인문사회과학센터 연구교수. 학부에서 문학을 사랑한 문학청년으로 국문학 공부했지만, 대학원에서는 자연어처리와 데이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대량의 데이터와 정량적인 방법론을 활용한 디지털 인문사회과학 연구를 주로 한다. 가장 좋아한 인생 게임은 워크래프트 3, 주종은 오크. 아쉽게도 요즘엔 직접 게임을 할 시간이 없다. Read More 버튼 읽기 게임 to 현실, 현실 to 게임: <게임의 사회학> 서평 〈게임 사회학〉은 저자 스스로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었다. 저자가 스스로 게이머들이 왜 이런 행동을 보였을지 이유를 추적하고 그 인과성을 검증하는 모델을 세우는 과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정량적인 연구라도 연구 문제를 설계하고 모델에 어떤 변수를 채택하고 분석 결과를 해석하는 일은 다시 사람의 몫이다. 전통적인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연구자들이 딥러닝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딥러닝 모델이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관계를 설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eXplainable AI) 필요성이 부각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XAI는 알고리즘이 왜 이런 결과를 내놓았는지 추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정량적인 연구와 정성적인 연구가 연결되는 지점이며, 앞으로 게임과 그 관련 데이터를 활용한 사회과학 연구가 가야할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