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결과

"" 검색 결과: 529개의 아이템

  • 규모의 문화상품 - 블록버스터 영화와 트리플A 게임

    < Back 규모의 문화상품 - 블록버스터 영화와 트리플A 게임 10 GG Vol. 23. 2. 10. 약간의 오해를 감수하고 말해보자면, 어느 순간부터 게임 시장은 트리플A 게임과 인디게임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는 트리플A 게임과 종종 비교되곤 하는 영화의 블록버스터 개념과도 차이를 보인다. 소위 상업영화라 불리는 범주 속에 블록버스터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업영화가 블록버스터는 아니다. 중저예산의 로맨스, 코미디, 호러 영화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영화들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등 비상업적 영역에 속해 있지 않다. 다만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어 제작, 유통, 홍보되는 영화가 아닌 작은 규모의 상업영화일 뿐이다. 게임은 그 반대의 위치에 놓인다. 영화는 소수의 블록버스터를 ‘텐트폴 영화’라 부르며 그에 속하지 않는 다수의 저예산 상업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으로 구성된 시장을 지닌다. 게임도 몇몇 트리플A 게임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스트레이〉(2022), 〈잇 테이크 투〉(2021)와 같은 인디게임들이 흥행을 기록하고 〈뱀파이어 서바이버즈〉(2022)처럼 유행을 선도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게임은 트리플A 게임이든 인디게임이든 상업성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비상업적 게임”이라는 어색한 어감의 단어조합은 극소수의 예술적 게임, 혹은 전시나 공공성을 위해 만들어진 몇몇 게임만이 속해 있을 뿐이다. 이는 게임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매체의 차이일까? 혹은 게임시장과 영화시장이 구성된 방식의 차이인 것일까? 게임이 ‘블록버스터 게임’이라는 말 대신 ‘트리플A 게임’이란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운동이자 사회운동으로 전유되었던 영화와 달리 게임은 태생부터 상업적인 것이었기 때문일까?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들에 관한 나름의 답안지를, 블록버스터와 트리플A 게임이라는 개념을 비교해가며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트리플A 게임 이상으로 수익을 내는 모바일 게임이라든가 트리플A 게임이라 불러도 무방한 스케일을 지닌 온라인 게임처럼, 트리플A 게임과 인디게임 사이에 속한 무수한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싱글 플레이 중심의 게임들을 중심으로 말하고자 한다. ∗ 〈죠스〉 포스터(왼쪽, 출처: IMDB)와 MCU 포스터(오른쪽, 출처: IMDB) 1. 블록버스터 영화와 트리플A 게임의 태동 영화에서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단어는 2차대전 시기 제작된 전쟁 영화 〈봄바디어〉(1943)의 홍보문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본래 “한 블록을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이기에, 종전과 함께 잠시 자취를 감춘다. 1950년대 TV 보급에 맞서 〈쿼바디스〉(1951), 〈십계〉(1956), 〈벤허〉(1959) 등 스펙터클을 강조한 대규모 서사극이 등장하며 다시 등장한 이 용어는,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대성공을 거두며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1970년대 당시의 블록버스터는 대자본이 투입된 영화라기보단 다수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월드와이드 4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둔 영화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죠스〉와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1977)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1981, 1984, 1989), 〈E.T.〉(1982), 〈백 투 더 퓨처〉 3부작(1985, 1989, 1990), 〈타이타닉〉(1997) 등 다수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생산하며 1980~90년대에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는 완전히 자리 잡게 된다. 동시에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었음에도 실패한 영화들 또한 블록버스터를 홍보문구로 사용하며, 대규모 성공을 거둔 영화에서 점차 대자본이 투입된 영화로 개념이 이동하게 된다. 〈트론: 새로운 시작〉(2010),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2012) 등 흥행에 실패한 블록버스터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체로 영화를 구현하는 데 많은 자본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 SF, 판타지, 전쟁, 슈퍼히어로 장르 등을 생산해낸다. 폭발, 대규모 전투 등이 포함된 액션 장면이 삽입될 수 있는 장르들이 주로 채택된다고 할 수 있다. 회수해야 할 금액이 큰 만큼 고어나 누드 등 선정적인 표현은 가급적 지양되며, 많은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물론 여러 반례(많은 관객이 해설을 요구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2021)처럼 수위 높은 신체훼손을 묘사하는 영화)도 존재하지만, 문자 그대로 소수의 사례에 속한다. 블록버스터라는 용어의 가장 정확한 예시로는 아무래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꼽을 수밖에 없다. 묘사를 위해 대자본을 요구하는 장르적 특성, 대다수의 관객이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는 수위, 지나치게 클리셰적이라 비판받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선형적인 서사 등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 〈파이널 판타지 VII〉 플레이 장면 (출처: 스팀 상품페이지) 트리플A 게임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후반 몇몇 게임 개발사에서 사용하며 등장하였다. AAA라는 용어는 채권 신용등급의 용어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리플A 게임의 시초로 꼽히는 게임은 스퀘어 에닉스 〈파이널 판타지 VII〉(1997)다. 시리즈 최초의 3D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놀라운 수준의 그래픽,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음악 등이 도입되었다. 그 중 영화처럼 연출된 FMV(혹은 컷씬)는,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1998)가 발매 전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공개하며 큰 호응을 이끌어냈던 것 등과 함께 떠올린다면 흥미로운 사례다. 트리플A 게임이 자신의 규모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비상호작용적인, 고쳐 말하자면 영화적인 장면들을 대거 투입하는 것은 지금의 트리플A 게임들과도 연결되는 특징이다. 이후 세가의 〈쉔무〉(1999) 등이 등장하였고, 〈둠〉(1993~)이나 〈툼레이더〉(1996~) 등 기존 히트작의 후속편이 트리플A 게임의 규모로 제작되며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슈퍼 마리오〉 (1985~)나 〈젤다의 전설〉 (1986~)처럼, 지금은 고전으로 자리잡은 시리즈의 후속편들 또한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 영화와 달리 트리플A 게임의 장르는 비교적 다양하다. 이는 게임 매체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스타크래프트〉나 〈시드 마이어의 문명〉(1991~)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부터 〈배틀필드〉(2002~)나 〈콜 오브 듀티〉 (2003~) 등의 FPS 슈팅 게임, 〈심즈〉 (2000~)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철권〉 등의 대전격투 게임, 〈포르자〉(2005~)와 같은 레이싱 게임, 〈피파〉(1993~)와 〈위닝 일레븐〉(1995~) 등의 스포츠 게임 등 무수한 장르가 트리플A 게임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 트리플A 게임을 말할 때 주축이 되는 것은 오픈월드다.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2011)과 〈GTA V〉(2013)가 비슷한 시기 대성공을 거두며 오픈월드를 트리플A 게임의 대표적인 장르로 만들었다. 2022년 한 해 공개된 트리플A 게임인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와 〈엘든 링〉은 처음부터 오픈월드를 표방했으며, 액션 어드벤처에 가깝게 분류되는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도 전작에 이어 부분적으로 오픈월드의 방식을 차용해온다. 선형적인 내러티브의 게임이지만,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2020)의 경우엔 몇몇 구간을 소규모 오픈월드처럼 구성하기도 하였다. 2023년 발매 예정인 트리플A 게임 중 〈호그와트 레거시〉,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 〈스타필드〉 등 또한 오픈월드를 표방하고 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트리플A 게임은 다양한 장르에서 제작되고 있으며 트리플A 게임=오픈월드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트리플A 게임이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장르가 오픈월드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하나 흥미로운 지점이라면, 트리플A 게임에서의 폭력 묘사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정반대의 방식을 택한다. 많은 트리플A 게임이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으로 발매되며,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부분보다도 수위 높은 고어와 유혈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크래프톤의 트리플A 게임 〈칼리스토 프로토콜〉(2022)와 같은 최근의 사례만 놓고 보아도, 고어 묘사 자체를 일종의 마케팅 요소로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화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가 직접 작품 속 폭력에 개입하기 때문에, 플레이 영상만 봤을 때는 얼핏 기존 블록버스터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위의 게임들도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을 받기도 한다. 이를테면 〈호라이즌〉 시리즈(2017~)처럼 비교적 가벼운 수위의 게임들도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이다. ∗ 〈아바타〉 포스터 (출처: IMDB) 2. 영화와 게임의 플래그십으로서 두 개념 블록버스터와 트리플A 게임은 제작에 투여되는 자본의 크기만큼이나 기술을 선도하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영화의 사례는 손쉽게 떠올려볼 수 있다. 〈트론〉(1982)이 처음 영화에 CGI를 도입한 이후 〈터미네이터 2〉(1992)의 T-1000과 〈쥬라기 공원〉(1993)의 공룡 등으로 이어지는 기술의 발전은 〈반지의 제왕〉 삼부작(2001~2003), 〈폴라 익스프레스〉(2004), 〈트랜스포머〉(2007) 등을 거치며 발전과 비판을 반복하여 받아왔다. 〈아바타〉(2009)는 그 정점에 있었으며, 속편 〈아바타: 물의 길〉(2022)은 그것을 다시금 증명하였다. 물론 〈아바타〉를 이야기할 때 3D를 빼놓을 수 없다. 〈아바타〉의 대성공은 3D 영화의 (일시적) 유행을 불러왔다. 물론 〈아바타〉 개봉 이전에도 3D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폴라 익스프레스〉도 3D로 개봉했었고, 〈아바타〉 직전에 개봉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2008)와 〈블러디 발렌타인〉(2009)도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52년 〈브와나 데블〉을 시작으로 1954년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까지 70여 편의 3D가 쏟아져 나왔던 시기도 있다. 〈아바타: 물의 길〉이 다시금 3D를 부흥시킬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블록버스터의 규모를 통해 가능해지는 기술의 도입은 어떤 기술적 유행을 만들어낸다. CGI의 발전이나 퍼포먼스 캡처처럼 유행을 넘어 상식이 된 기술의 경우들 또한 블록버스터가 지닌 규모를 통해 가능했다. 더 나아가 블록버스터에 투여된 자본과 기술은 시장의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일반관보다 높은 가격이 책정되는 3D 영화는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주도한 IMAX의 부흥이 특히 그러하다.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 IMAX 화면비 장면을 삽입하는 것은 관례가 되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일반관보다 1.5배에서 2배 가까운 가격이 책정되는 IMAX 상영관으로 관객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유인책이다. 물론 IMAX 상영관은 그 수가 적기 때문에 그것이 영화 한 편의 수익을 극적으로 바꿔 놓지는 못한다. 이는 IMAX를 포함해 돌비시네마, 4DX 등 여타 특별관도 마찬가지다. 다만 “IMAX 특별관 매진행렬!!”과 같은 홍보문구가 형성하는 시장장악력을 무시할 수 없다. 더불어 〈덩케르크〉(2016)나 〈놉〉(2022)의 경우처럼, 그것이 성공적이든 실패했든 종종 IMAX를 미학적 선택의 결과물로 내놓는 블록버스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포스터 (출처: 닌텐도 스토어) 트리플A 게임의 경우 조금 더 적극적인 유인책으로 활용된다. 트리플A 게임의 시초격인 〈파이널 판타지 VII〉은 5세대 콘솔 경쟁 속에서 플레이스테션을 완전히 자리잡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콘솔이 등장할 때마다 소위 레퍼런스 게임이라 불리는 고사양 게임들이 등장하여 기기성능을 뽐낸다. 2020년 플레이스테이션5의 런칭 타이틀로 출시된 〈마블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2020) 같은 경우는 기기의 새로운 기능을 소개하는 레퍼런스 게임으로 기능했다. 〈라쳇 앤 클랭크: 리프트 어파트〉(2021)처럼 기기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사양을 활용하는 독점타이틀 또한 마찬가지다. 혹은 닌텐도 스위치의 런칭 타이틀이었던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2017)이라든가 플레이스테이션5의 런칭 타이틀이자 기기 독점 타이틀인 〈데몬즈 소울〉 리메이크(2020)처럼, 기기의 판매를 유인하기 위해 기존 트리플A 게임 프랜차이즈의 후속작이나 리메이크를 독점 발매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트리플A 게임은 스스로의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첨단의 사양을 지닌 기기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기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트리플A 게임의 기술적 성취는 블록버스터의 것과 다소 방향성을 달리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바타〉의 3D나 〈인터스텔라〉(2014)의 IMAX는 작품의 내적인 성취를 위해 도입된 기술이지,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는 산업적 요구가 작품에 앞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바타〉 이후에 등장한 질 낮은 3D 블록버스터들과 마케팅을 위해 IMAX를 도입하는 영화들이 무수히 존재하지만, 산업적 유행에 휩쓸려 제작된 기획영화들을 선구자 격의 영화들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독점발매는 게임시장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영화시장에서도 종종 독점개봉작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작품들은 와이드릴리즈에 투여되는 비용부담을 절감하기 위한 중저예산 상업영화, 혹은 독립영화의 전략적 선택에 가깝다. 이는 게임 매체의 독특한 지위 때문이다. 다른 대중문화, 이를테면 문학, 만화, 음악, 영화와 같은 것들은 손 쉽게 복제가 가능하며 다양한 기기에 어렵지 않게 이식할 수 있다. 책처럼 문화상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완전히 동기화된 경우도 있고, 스트리밍 플랫폼의 도입으로 음악과 영화는 거의 모든 전자기기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게임은 하드웨어의 성능적인 부분을 요구한다. 특히나 고사양을 트리플A 게임의 경우가 그렇다. 비록 경험적 차원에서는 구별될지라도, 블록버스터 영화는 IMAX관에서 보든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으로 보든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다. 물론 엑스박스의 클라우드 게이밍처럼 빠른 인터넷 환경만 갖춰진다면 저사양의 기기에서도 트리플A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아직 음악과 영화의 스트리밍 시장만큼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사이버펑크 2077〉(2020) 발매 당시 많은 게이머가 PC사양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래픽카드를 구입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아직까지 트리플A 게임은 PC나 콘솔 등 ‘하드웨어’와 깊게 결부된 것으로 다뤄지고 있다. 때문에 블록버스터 영화가 3D나 IMAX의 플래그십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반면 트리플A 게임이 차세대 콘솔 혹은 최신의 그래픽카드를 시장에 도입하기 위한 플래그쉽으로 기능한다는 명제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전자가 참이라 가정한다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CGI 기술의 도입을 위해 〈쥬라기 공원〉을 만들었다던가, 크리스토퍼 놀란이 IMAX를 영화시장에 도입하기 위해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그들의 영화가 시장과 산업의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후적인 결과에 가깝다. 더불어 영화의 흥행은 영화의 개봉시점에서 1~2주 안에 결정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이버펑크 2077〉이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2022)와 지속적인 업데이트에 힘입어 뒤늦은 성공을 거두었거나,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뉴비’를 끌어 모으는 여러 트리플A 게임의 사례와는 다르다. 물론 트리플A 게임 또한 발매 시점에 구매가 몰리게 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영화업계에서 블록버스터에 대해 플래그십이라는 말 대신 ‘텐트폴 영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큰 흥행을 거둘 수 있는 프랜차이즈 영화, 화려한 멀티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를 대목 시즌에 개봉시켜 빠르게 큰 수입을 올리는, 블록버스터를 제작사와 배급사의 지지대처럼 활용하는 것은, 영화 한 편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수입의 대부분이 개봉 초기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의 경우 발매일로부터 수 년의 시간이 흐른 뒤라 해도 플래그십의 기능을 수행한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하기 위해서 닌텐도 스위치가 필요하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가 불러온 논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플래그십의 기능을 다 한 게임의 경우 다른 콘솔이나 PC를 통해 일종의 재발매를 거치기도 한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와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가 발매에 맞춰 전작을 PC로 발매한 것처럼 말이다. 트리플A 게임, 아니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수익을 낼 수 있는 기간이 영화 콘텐츠에 비해 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블록버스터가 단발적으로 수익을 내는 상품이라면, 트리플A 게임은 플랫폼(콘솔 같은 하드웨어부터 게임패스 같은 플랫폼 서비스까지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을 견인하는 장기적인 수입창출 상품이다. 이 지점에서 트리플A 게임이 굳이 ‘블록버스터 게임’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폭탄의 이름에서 따온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은 단발적으로 많은 수익을 거두는, 문자 그대로 박스오피스의 폭탄 같은 존재를 말한다. 앞서 적은 것처럼, 게임시장은 영화시장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트리플A 게임은 단기적으로 폭발적인 수익을 올리는 것보다 플랫폼의 장기적인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작동한다. ‘AAA’의 어원이 채권 신용등급에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트리플A 게임은 기기의 성능, 플랫폼의 지속가능성, 엔딩까지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시간적 비용 등을 모두 보장하고자 하는 단어처럼 다가온다. * 〈데스 스트랜딩〉 포스터 (출처: 에픽게임즈 스토어) 3. 영화적인 게임, 게임적인 영화, 각자의 재료가 되기까지 각각의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역할은 다르지만, 블록버스터와 트리플A 게임은 제작방식과 작품 내부의 차원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블록버스터에서 CGI와 모션 캡처의 발전은 그대로 트리플A 게임의 기술적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한 가지 부정적인 면모를 우선 짚고 넘어가자면, 블록버스터와 트리플A 게임 양측 모두에서 기술의 발달과 함께 크런치 모드에 관한 논란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트리플A 게임 개발사인 너티독은 〈언차티드 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2016) 발매 당시 처음으로 회사 내 크런치 문제가 논란이 되었으며, 이는 스튜디오의 최근작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발매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지적되었다. 〈더 위쳐〉 시리즈(2007~)와 〈사이버펑크 2077〉의 CDPR과 〈GTA〉 시리즈(1997~)의 락스타게임즈 또한 같은 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업계에서의 크런치 모드 논란은 최근에서야 터져 나왔다. 2022년 한 해에만 3편의 영화와 3편의 드라마를 내놓은 대표적인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그 대상이다. VFX를 맡았던 몇몇 이들이 작업 분량에 비해 적은 시간, 무수한 재작업 요구, 저임금 등의 상황을 폭로하며 크런치 모드가 비단 게임업계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렸다. 다만 크런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는 정도에서 지나가고자 한다. 영화에서 모션 캡처는 〈토탈 리콜〉(1990)에서 처음 도입되었고, 〈스타워즈: 보이지 않는 위험〉(1999)의 자자 빙크스와 〈반지의 제왕〉 삼부작의 골룸 캐릭터를 거쳐 〈아바타: 물의 길〉의 나비족까지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로 넘어오며 3D CGI 위주의 시장으로 변화한 게임업계 또한 모션 캡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비욘드: 투 소울즈〉(2013)이나 〈데스 스트랜딩〉(2019)처럼 모션 캡처를 통해 유명 영화배우가 게임에 대거 출연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혹은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처럼 모션 캡처로 말의 움직임을 게임 내에 구현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CGI의 발전에 따라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와 같은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포토-리얼리즘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려 했다. 〈라푼젤〉(2010)의 옷감 표현이나 〈굿 다이노〉(2015)의 자연물 표현, 〈겨울왕국 2〉(2019)의 눈을 구현하던 물리엔진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역으로 포토-리얼리즘한 CGI 이미지가 과거 〈폴라 익스프레스〉나 〈베오울프〉(2007)가 그랬던 것처럼 불쾌한 골짜기를 자극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포토-리얼리즘이 작품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다루어지며 최근의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은 다른 방식의 이미지를 선보이곤 한다. 코믹스의 표현을 구현해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 포토-리얼리즘적 현실과 대비되는 세계를 비교적 단순한 선들로 표현한 〈소울〉(2020), 유화풍의 그림체를 가져온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2022) 같은 사례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사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다른 경우라 할 수 있겠지만, 똑같이 실사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 게임에서 포토-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모습은 종종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킨다. 게임엔진이 그대로 영화에 사용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언리얼 엔진 4가 영화 및 영상업계 전반에서 사용되었고, 언리얼 엔진 5의 경우엔 〈매트릭스: 리저렉션〉(2021)과 콜라보한 데모 게임 〈매트릭스: 어웨이큰스〉(2021)를 9세대 콘솔로 공개하기도 했다.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의 2차 매체 부가영상을 보면 게임엔진이 영화의 프리 비주얼 등에서 활용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해당 영상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VR 헤드마운트를 쓰고 게임처럼 구현된 CGI 세트장에 접속하여 디렉팅을 진행한다. 굳이 기술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트리플A 게임은 처음부터 영화와 모종의 친연성을 지녔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파이널 판타지 VII〉의 FMV씬과 〈스타크래프트〉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처럼, 초기의 트리플A 게임은 자신들의 규모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영화적으로 연출된 장면들을 넣어 두었다. 이러한 방식은 더욱 강화된 방식으로 이어진다. 마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1996~)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 〈언차티드 4〉의 추격전은 QTE 방식의 조작을 택해 액션을 플레이하는 감각과 함께 관람한다는 감각을 함께 전달한다. 현재 실사 드라마로 방영중이기도 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2013)는 영화적인 플롯과 장면연출로 호평 받음과 동시에, 같은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지극히 게임적인 체험과 무수한 영화인이 출연하는 컷씬으로 양분된 〈데스 스트랜딩〉 같은 분열적인 사례도, 인터랙티브 드라마 장르를 채택하며 게이머의 여러 선택들로만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2018)처럼 영화와 게임의 경계선상에 있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FPS의 시점을 채택한 〈하드코어 헨리〉(2016), 여러 전쟁 게임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던 원테이크 영화 〈1917〉(2019), 인터랙티브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영화’로 분류되는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 등 게임적 요소라 불리는 것을 가져온 영화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관련한 논의는 필자의 이전 글 [영화와 게임의 스침]( http://www.critic-al.org/?p=5927)을 참고할 수 있다. *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 로고 애니메이션(https://www.youtube.com/watch?v=5qQssqOmBZw)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무수한 영화와 영화를 원작으로 삼은 무수한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최근 몇 년간 〈명탐정 피카츄〉(2019), 〈슈퍼 소닉〉(2020)과 〈슈퍼 소닉 2〉(2022), 〈모탈 컴뱃〉(2021), 〈레지던트 이블: 라쿤시티〉(2021) 〈언차티드〉(2022) 등을 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언차티드〉인데,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의 첫 장편영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영화 본편 상영 전 등장하는 프로덕션의 로고 영상을 보면 〈호라이즌 제로 던〉의 에일로이, 〈갓 오브 워〉의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조엘과 앨리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작의 실사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이 스튜디오는 현재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HBO와 손잡고 제작해 방영 중이며, 앞으로 〈고스트 오브 쓰시마〉, 〈그란 투리스모〉 등의 영화와 〈갓 오브 워〉, 〈호라이즌〉 등의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다. 하나의 IP가 여러 매체를 통해 소화되는 전략은 오랜 기간 보아왔던 것이지만, 트리플A 게임의 IP를 대거 보유한 퍼스트 파티가 직접 스튜디오를 차려 실사화를 진행하는 것은 첫 사례다. 게임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실패한다는 징크스가 있지만,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2016)과 〈언차티드〉, 〈슈퍼 소닉〉 등이 흥행에 성공하며 징크스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 영화들에 대한 평가는 별개이겠지만 말이다. 트리플A 게임의 블록버스터 영화화, 블록버스터 영화의 트리플A 게임화는 IP의 소유권 위주로 재편된 지금의 미디어 생태계에서 당연한 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게이머와 관객들은 이러한 상황에 싫증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미 플레이한, 관람한 이야기를 다른 매체로 이식할 뿐인 이 작품들에서 어떤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지금껏 이야기해온 영화와 게임의 친연성, 블록버스터 영화와 트리플A 게임이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곱씹으며 이 작품들을 다시 마주한다면 흥미로운 접점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1981~)에서 〈툼 레이더〉, 〈내셔널 트래져〉(2004), 〈언차티드〉로 이어지는 보물 사냥꾼의 계보를 그려본다든가, 〈소닉 더 헤지훅〉의 모션이 〈슈퍼 소닉〉에서 구현되는 방식에 관해 고민해보면서 말이다. 그러한 접점을 발견하는 것이 두 계열의 거대한 오락문화를 더욱 흥미롭고 다채로운 것으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비평가) 박동수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 Back 니체, 영원회귀, 아모르 파티, 그리고 ‘데스루프’ 03 GG Vol. 21. 12. 10. 김연자 말고, 니체의 ‘아모르 파티’ 수년 전,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가 인터넷에서 크게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 특유의 비트와 김연자의 보컬로 곡 자체도 훌륭하지만 가사도 그렇고 후렴의 막강한 뽕짝 비트가 절묘했다. 사실 일종의 유머로서 소비되기는 했지만, 트로트 답게 좀 쌉쌀한 맛도 있는 노래였다. * 막상 생각해보면 이 노래만큼 아모르 파티를 잘 설명한 것도 없는듯. 이미지 출처 - TV조선 유튜브 채널 그렇다면 바로 이 곡의 제목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말 자체는 라틴어이고, 대충 들으면 어디서 나온 유명한 경구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이 단어의 출처는 저 멀리 프로이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로 간다. “신은 죽었다.” 는 패기 넘치는 한마디를 꺼냈던 이 철학자는 그 말마따나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고자 몇가지 화두를 세상에 던졌다. 물론 여기서 니체 이론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분량도 모자라거니와 애초에 필자도 관련 전공 또는 심도 있게 연구한 사람도 아니다. 단지 더할 나위 없이 니체가 어울리는 어떤 게임을 위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니체가 제시한 개념 중 ‘아모르 파티’ 는 니체 사상에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이다. 풀어 쓰자면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이란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과는 정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살아가고 결정하는 운명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흥하거나 망하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자신의 운명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그를 긍정하라는 것. 이처럼 니체의 사상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것처럼, 현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추구하며, 인간 개인이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법론이 바로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라고 축약할 수 있다(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요약한 해석이다). 영원회귀란 파괴(실패, 좌절, 괴로움 등)와 생성(성공, 성취, 즐거움 등)의 동일한 과정을 무한 반복하여 마침내 긍정의 결론(내 운명-인생을 사랑-긍정하자)에 다다름으로서 마침내는 파괴의 과정 역시 긍정의 질(형식)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삶에 대한 긍정이란 이뤄낸 성과, 성공, 원초적인 즐거움과 쾌락 같은 너무나 당연한 긍정의 질을 말하는게 아니다. 삶에서 필연적으로 얻고 겪게 되는 좌절과 실패, 괴로움과 불쾌함까지도 긍정하고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이 과정이 바로 영원회귀이며, 그 결과 이르게 되는 것이 아모르 파티이고, 또는 이 둘은 서로의 원인이자 서로의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니체의 사상 전체를 상당히 짧고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큰 맥락은 같다. ‘영원회귀’ 라는 고통과 성취의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마침내 얻어낸 결실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긍정적인 여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자신의 운명의 결론을 긍정함으로서 그 과정도 값지고 긍정적인 질로 바꾸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인생의 자세가 바로 ‘아모르 파티’ 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자, 그럼 이제 〈데스루프〉 라는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게임의 기본 모델 ‘영원회귀’ 가 데스루프에서 특별한 이유 〈데스루프〉 는 그 이름에서부터 죽음으로 되풀이되는 루프를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흔히 ‘루프물’ 이라고 하는 장르 또는 특성은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많이 선보여졌다. 수십년 전 TV에서 특선 영화로 보던 ‘사랑의 블랙홀’ 이나 최근으로 보면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는 더더욱 많이 사용된 요소이기도 하다. * 데몬즈 소울 리메이크(Demon’s Souls, 2020). 이쪽 게임 디자인에선 워낙 유명한 소울 시리즈. 당연하게도 이는 게임에서도 흔히 활용되는 소재였다. 아니 오히려, 죽음과 부활로서 플레이어가 성장하는 논리는 플레이의 반복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게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 논리다. 여기서 나아가 아주 직접적인 ‘영원회귀’ 적인 과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게임들은 많다. 오래 전부터 그 예시로 들어왔던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을 위시한 ‘소울 시리즈’가 그 예다. 참고로 최근에는 한국에서 이름 자체가 ‘영원회귀’ 인 게임도 나왔다. * 이터널 리턴(Eternal Return, 2020). 여기는 이름부터 영원회귀다. 사실 게임 내용은 크게 상관… 없나? 그리고 사실은 ‘소울 시리즈’ 까지 가지 않더라도 게임은 근원적으로 그 구조에서 영원회귀를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계속해 같은 시도를 하며 죽으면서 경험을 쌓고 강해지고, 마침내 극복해내고 한 번의 성공을 만들어 냄으로서 그전까지의 실패가 모두 이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서 빛나게 되는 것. 그러나 〈데스루프〉 가 영원회귀 모델에서 독특한 점은 바로 플레이어의 성장 또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플레이어의 스킬 향상이나 명시적인 게임 내 각종 스테이터스, 기능의 향상이 아닌, 정보의 취득으로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보통 이러한 죽음(실패)과 부활(재도전),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게임들은 그 성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게임 내의 수치나 변화보다는 플레이어 자신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장 노골적인 예시인 〈다크 소울〉 시리즈의 경우 거듭되는 싸움을 통해 상대의 패턴을 파악하고, 나 자신의 로직, 나 자신의 조작이 가장 크게 성장에 관여한다. 물론 거기에 최적화된 도구를 다시 고르거나 필요한 만큼의 스테이터스를 향상시키고 돌아오는 등의 선택도 가능하지만, 플레이어 자신이 가장 큰 성장의 매개체라는 점은 〈다크 소울〉 이나 〈몬스터 헌터〉 같은 부류의 게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다. * 이 게임의 룰과 목표는 간단하다. 크게 세가지다. 1. 루프를 끊어라. 2. 하루 안에 8개의 타겟을 제거해라. 3. 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방법을 찾아내라. 그러나 〈데스루프〉 는 이러한 노골적인 영원회귀의 방법론을 취하면서도 몇몇 부분에서 좀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다. 게임은 하루의 루프가 반복되며, 하루는 4개의 시간대와 4개의 장소로 구분되고, 각 시간대 별 장소마다 얻을 수 있는 단서가 다르게 고정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얻을 수 없게 되는 정보가 생긴다. 때문에 죽거나 하루를 넘겨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놓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다른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고, 또 이것이 게임 내 퀘스트 로그의 변화로 직접 기록된다. 즉, 마치 탐정처럼 어떤 정보를 얻고 실마리에 접근하는 것이 성장이자 게임의 진척도를 상징한다. 플레이어의 자각이 바로 상승을 의미하며, 무력에 의한 극복이라기보다는 무수한 스무고개 끝에 정답을 찾아내는 식이므로 그 스무고개를 확인하기 위한 생성과 파괴가 반복되는 것이다. * 가지런히 정돈된 정보가 계속 쌓이고 중첩되면, 이러한 '정답' 이 나온다. 무엇보다 〈데스루프〉 가 보여주는 영원회귀 구조에서 다른 점은 바로 ‘죽음’ 을 보다 바른 성장을 위해 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게임에서 죽음이란 가급적 피해야만 하는, 어떤 심각한 패널티로서 존재한다. 어찌보면 징벌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스루프의 죽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또는 이미 지나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한 일종의 선택지로 기능한다. 마치 영화 ‘엣지 오브 투머로우’ 에서 주인공이 작전을 실행하다가 수틀리면 바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어 다시 하루를 시작하듯 말이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의미이며 패널티였던 죽음이 하나의 선택지이자 상승의 원동력이 되면서, 즉 게임 자체를 직접적으로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면서 보다 ‘아모르 파티에 가까운 파괴와 재생성으로 한걸음 다가간다. 이는 죽음과 재탄생의 과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 하는 부분에서의 차이도 크지만, 무엇보다 플레이어가 취하는 모든 행동이 계획적이고 플레이어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뜻한다. 예기치 못한 실패로 인해 맞이하는 죽음과 이를 잘근잘근 곱씹는 절치부심의 과정이 아닌, 거시적인 측면에서 세운 계획을 따라 하나하나 자신의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재생성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모두 계획대로야.” 또는 “이제는 이걸 하면 되겠군.” 하는 식으로, 플레이어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달라진다. * 죽이고 죽고 정보를 모으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선택과 확인의 연속.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통상적으로 부정적인 질을 지니며 실패의 상징인 ‘죽음’ 은 그 자체로 긍정의 질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이 게임이 가장 니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원회귀와 아모르 파티의 기본은 행위자의 주체성, 그리고 결과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통해 모든 과정마저 긍정해버리는 자세다. 즉, 이 게임의 플레이 로직 그 자체다. 긍정의 끝이 아닌, 긍정의 순환을 만드는 끝 게임의 결론은 마치 이런 해석을 부추기기라도 하는듯 크게 두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되어있다. 섬에 걸려있는 루프를 끝내고 수십년이 지난 세계로 나가거나, 아니면 루프를 유지하고 주인공과 줄리아나의 끝나지 않는 놀이를 계속하는 것. 여기서 대부분은 지금까지 목표로 해왔던 루프의 파괴를 선택하지만, 오히려 어떤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이게 끝인가? 정말로 이걸로 모든 지금까지의 과정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되었나? * 영원회귀적 관점을 떠나서도 너무나 훌륭한 게임이니 꼭. 그렇기 때문에 엔딩에 이르러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된다. 죽음과 탄생이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를 긍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줄리아나라는 존재 자체로 인해서 나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희가 된다면? 이런 가정은 지금까지 루프를 깨기 위해서 달려왔던 플레이어들에게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 선택은 어쩌면 궁극적으로 아모르 파티를 실현하는 방법이기도 한 셈이다. 지금까지 반복한 루프가 영원히 반복되고 또 되풀이 되겠지만, 더 이상 고통과 결론을 위한 감내의 과정이 아닌 그 자체가 유희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 이 황야마저도, ‘내 행위의 결과’ 이기에 긍정할 수 있다면? 〈데스루프〉 는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어떤 선형 구조의 게임들은, 모두 그 과정의 가치가 결과에 종속되어 있었다. 결국 영원회귀가 가지는 긍정성은 결과에 의해 보장된다. 그리고 그 결실을 얻은 과정은 다시금 플레이 할 가치를 빠르게 잃는다. 그러나 〈데스루프〉 는 그 결말에 이르러 진정으로 모든 과정을 긍정해버리면서 다시금 그 루프로 뛰어들게 만든다. 물론 플레이 메카닉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시 이 게임의 파괴와 생성을 플레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게임에서 퇴장한 후에도 이들이 계속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플레이한 과정보다 더 즐거운 유희가 될 거란 것도. 이 부분이 조금은 특별하다. 때문에 그동안의 역경을 모두 감내하고 오히려 루프 안에 갇히기를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몰락하는 자신을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의 정신에 부합하며, 이것이 오히려 진짜로 이 게임에 어울리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데스루프〉 는 좋은 게임이지만, 그 과정에 비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들은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면 어떤가.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이명규 게임 기자(2014~), 글쓴이(2006~), 게이머(1996~)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이이환

    이이환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Read More 버튼 읽기 ‘후원 경제’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중심으로 2023년 비디오 게임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RPG 게임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스타필드>와 <발더스 게이트 3>를 꼽을 것이다. 여론은 <발더스 게이트 3> 쪽이 우세다. <스타필드>는 전반적으로 나쁘진 않고 홍보에 힘입어 많은 판매량을 올렸지만, 게임 디자인에서 실망스러운 지점도 있어, 베데스다식 RPG 게임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을 받았다면 <발더스 게이트 3>는 풍부한 상호작용과 롤플레잉으로 RPG 장르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으며,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과 함께 올해의 게임으로 거론되고 있다. 버튼 읽기 [공모전] 오디오 로그의 문학적 요소와 방법론 1993년 [시스템 쇼크]라는 비디오 게임이 발매되었다. 호러 성향의 던전 크롤러와 FPS 액션 간의 결합한 이 게임은 여러 지점에서 게임 서사 전달 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바로 ‘오디오 로그’ 칭하는 음성 기록물이었다.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오디오 로그는 기본적으로 필드 내 아이템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디오 로그가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이전에 있었던 사건을 회고하는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플레이어가 오디오 로그를 읽기 시작하면 화면 좌측 아래엔 오디오 로그를 남긴 주인의 이미지가 뜨고, 중앙 아래에는 내용 텍스트가 뜬다. 스피커에서는 주인이 내용을 낭독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버튼 읽기 간접경험으로서의 보는게임 -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및 호러 게임 실황 플레이를 중심으로 보는 게임이란 무엇인가? 대다수는 'e-스포츠'와 '실황 플레이'를 예시로 들 것이고 실제로 이 두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두면서 보는 게임이라는 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다만 2021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서 기고된 이경혁의 『보는 게임과 Z세대』라는 글에서는 보는 게임의 역사에 대해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오락실에서 게임을 구경하는 것과 PC방 문화를 보는 게임의 기원을 삼은 것이다. 후자 같은 경우 PC방이라는 한국적인 현상임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보는 게임' 자체는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임을 염두에 두면 흥미로운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경혁의 글은 그 점에서 '보는 게임'이 관람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라는 오래된 인류의 유흥거리와 맞닿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 게임제너레이션::필자::이지용

    이지용 이지용 SF로 박사학위를 받고 SF평론을 비롯한 문화예술평론과 해당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를 빌미로 게임기를 구입하고, 만화를 사 모으며 온갖 OTT를 구독중이다. Read More 버튼 읽기 이렇게 흥미로운 스토리에 이렇게 진부한 요소들이- <승리의 여신: 니케>의 SF 세계관과 캐릭터 디자인의 충돌 〈승리의 여신: 니케〉(이하 〈니케〉)는 2022년 11월 시프트업에서 제작하고 레벨 인피니트에서 서비스하는 FPS/TPS 모바일 게임이다. 출시 전부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광고에서 이미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2019년 처음 트레일러가 발표되었을 당시 캐릭터들의 섹슈얼한 디자인과 가슴과 엉덩이의 모핑(morphing)이 과도하게 부각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화젯거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2022년 출시를 앞두고서도 미디어를 통한 광고에서도 이러한 요소들이 부각된 광고가 있었다.

  •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 Back 게임의 문화적 존재론: 천출(賤出), 기술적 총아, 참여문화 01 GG Vol. 21. 6. 10. 지금으로부터 십몇 년 전 이름을 대면 알법한 대기업 회장님 앞에서 ‘메타버스’란 키워드를 소재로 신사업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린든 랩이 만든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라는 가상 세계가 메타버스란 키워드로 주목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 같이 그 기획안을 준비하던 그 대기업의 부장은 우리 팀에 이런 주의를 자주 주었다. “회장님은 게임을 정말 싫어하세요. 자제분들에게도 절대 게임은 못하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신사업 기획에 우리 안이 절대 게임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게’자도 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은 아뿔싸! <세컨드 라이프> 같은 메타버스의 저작 툴의 개념과 그 당시 유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MMORPG를 결합한 형태였던 것이다. 그 프레젠테이션에서 게임의 메커닉과 같은 핵심 요소들은 회장님이 게임을 싫어하신 나머지 처음에는 ‘재미요소’라는 단어로, 그 뒤에는 영어 단어 ‘funness’로 대체되었다가 최종 본에는 아예 빠지게 되었다. 물론 겉은 메타버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사용자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게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소프트웨어를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은 매우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게임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cond Life〉. 메타버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하고는 싶지만 이러한 플랫폼의 서비스가 게임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은 게임과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으로는 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게임 혐오 심리에는 게임이 문화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인식이 잠재되어 있다. 게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일수록 게임에 대해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이러한 게임 포비아는 세대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근본 천출(賤出)의 문화로 간주해 왔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이어질 노동을 위한 휴식과 투자로 간주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그간 정치권과 미디어, 여성계, 종교계 등에서 주도했던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게임 중독 질병코드 등재 등의 여러 게임규제들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매체성을 기존 사회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과 미디어를 비롯한 주류 사회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해 두려워하는 부분이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교육과 노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강박을 그 이데올로기로 내세워왔다. [1] 따라서 자기 자식과 가족들을 그 교육과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늘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7-80년대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런 희생양이었다면, 게임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보편적인 대중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90년대 이후에는 게임에 대한 국가적인 규제와 미디어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백래시 현상의 기저를 살펴보면 게임이 다른 매체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아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전 국민의 게임 이용률은 70.5%에 달한다고 한다. [2] 그 중 10대의 게임 이용률은 91.5%에 달하며 20대 85.1%, 30대 74.0%, 40대 76.6%, 50대 56.8% 등으로 거의 전 연령대에 걸쳐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게임이 보여준 산업적인 성장과 양적 팽창은 다른 문화콘텐츠를 압도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의 크기는 매우 작아 보인다. 2019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 이용 장애의 질병코드 등록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국내에서도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반대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그 때 제기된 운동 중 하나가 주로 SNS를 배경으로 하여 ‘게임은 질병이 아닙니다. 게임은 문화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70% 이상이 여가 선용을 위해 플레이하는 게임이 대중문화 중 하나가 아닐 리가 없지만, 이러한 운동은 온라인에서 게임 사용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연매출 15조가 넘어가는 게임 업계의 산업적인 기여 대부분은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돈을 더 낸 사람이 게임에서 더 유리한 구조를 차지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시스템이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면서 그간 셧다운제, 쿨링오프제, 게임중독법 발의 등과 관련하여 항상 게임업계의 편이 되어주었던 사용자들의 성원이 이제는 게임 업계에 규제를 해달라는 청원으로 바뀌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업계와 학계 및 협단체를 중심으로 제기한 ‘게임은 문화다’ 운동의 저변에는 그간 사회로부터 근본 천출의 문화로 취급받아온 억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게임을 만드는 쪽에서 ‘게임은 문화다’라고 주장해버리면서 그간 일반적인 사회 통념상 게임은 문화적인 결격 형태에 해당해 왔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확률형 아이템과 강화형 시스템이라는 국내 게임업계의 원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한 자격지심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게임을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긍정적인 사례들이 대부분 해외의 사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게임 사용자들에게마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업계 자체의 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게임업계가 결연함만을 보여주는 대신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게임을 단순히 문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확률형 아이템 등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으면 사용자들의 시선은 지금보더 훨씬 더 우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돈대로 벌고 싶고 문화로 인정도 받고 싶은 모순된 2가지 감정이 착종되면서 “게임은 당연히 문화가 맞는데, 왜 주변에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임이 문제적인 매체가 된 것은 미구엘 시카트가 지적한 바대로 ‘게임이 행동을 유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 [3] 이다.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은 게임을 다른 매체와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하면서 연쇄적으로 게임 내의 다음 상황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해 플레이어가 참여할 시공간의 빈틈을 만들어 놓고 그 틈을 플레이어로 하여금 채우게 만든다.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게임 속의 시공간은 자신이 들어가서 채워 넣고 행동해야 할 무대가 된다. 이 때문에 게임은 사용자들에게 참여할 공간을 마련해주면서 지속적인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 냈다. *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한 장면. 또한 게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은 필수적으로 가치의 평가와 직결된다. 게임은 작품 내에서 사용자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을 촉구하는 주요한 설득적인 매체로 기능하게 된다. 최근 10년간 게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소셜 임팩트 게임(social impact games)의 창작이 급속도로 늘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셜 임팩트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늘 언급되듯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이나 <미싱(Missing)> 같은 해외 사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제주 4.3사건의 비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 <언폴디드> 시리즈, 시리아 난민의 독일 정착 문제를 시뮬레이션 한 <21 데이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를 조명한 <페치카> 같은 소셜 임팩트 게임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고 주요 인디게임 공모전에서 입상을 해왔다. 게임의 표현력이 정교해지고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를 설득하는 연출방식이 개발자들에게 공유되면서 이제 게임은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게임은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상세하게 파고들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게임’과 ‘게이밍(gaming)’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이밍’이란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게임 플레이 주변에 전유되는 다양한 활동들 즉, 유튜브나 트위치로 게임 방송보기, 게임 웹진에서 게임과 관련한 정보와 소감 나누기 활동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게임은 그 자체로 일정한 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이며, 게이밍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문화적인 행동 양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이밍이 보편적인 문화적 행동양식이 되기 전에는 이른바 오타쿠로 대표되는 하위문화(subculture)의 범주에서 주류 문화에 대한 대안형태로 존재했었지만, 지금과 같이 전 국민의 70% 이상이 게임하기 과정에 동참하는 상황에서 게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매체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오타쿠로 대표되던 소속감 높은 하위문화적인 정체성은 다소 느슨하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에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사용자들은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도입 이후 이러한 게임을 통한 사회적인 활동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일과 놀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유튜브와 트위치, 디스코드에 모여 다른 사용자의 플레이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자신만의 엔터테인먼트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마인크래프트와 로블록스 같은 샌드박스나 메타버스 플랫폼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서브 게임과 미션들로 가득하다. 최근의 게이밍 문화는 점점 혼자 플레이하는 스탠드 얼론(stand-alone) 게임에서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최근의 메타버스 붐이 다시 일어나면서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전뇌코일(電脳コイル)>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5-26년경 다이코쿠시라는 가상의 일본 소도시를 배경으로 이 도시로 전학 온 오코노기 유코와 아마사와 유코라는 두 여학생의 얽힌 인연을 다룬다. 2007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를 예견하듯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AR 안경이 작품 내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AR 안경을 쓰고 이루어지는 놀이와 장난스러운 일이 등장인물의 연애 관계를 넘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를 사용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부모들은 AR 안경을 압수해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주인공인 유코와 그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한 번 그 세계에 몸담아서 그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게임의 세계를 이미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 게임 이전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게임이 만들어 낸 달콤함과 고통 모두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전뇌코일〉의 한 장면.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린 우리는 다시 게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1] 이동연,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게임포비아』, 커뮤니케이션북스, 2021, p.78. [2] 문화체육관광부, 『2020 대한민국 게임백서』, 한국콘텐츠진흥원, 2020, pp.495-496.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p.6.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교수) 이정엽 순천향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게임 스토리텔링과 게임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인디게임 페스티벌인 부산인디커넥트페스티벌 창설을 주도하고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있는 인디게임 행사인 Independent Games Festival(IGF)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저서로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2003), 『디지털 게임, 상상력의 새로운 영토』(2005), 『인디게임』(2015), 『이야기, 트랜스포머가 되다』(공저, 2015), 『81년생 마리오』(공저, 2017), 『게임의 이론』(공저, 2019), 『게임은 게임이다: 게임X생태계』(공저, 2021) 등이 있다.

  • [게임과 예술] 로딩중인 세계의 권태와 노동에 관한 소고

    < Back [게임과 예술] 로딩중인 세계의 권태와 노동에 관한 소고 16 GG Vol. 24. 2. 10. 마법과 환상, 신과 영웅이 사라졌다. 과거의 인간은 신이나 영웅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만들어 그들의 통제 속에서 예정된 일을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 있으며, 미래는 나의 치열한 노력으로 구현되는 시간이 됐다. 삶의 방향키가 나에게 쥐어진 만큼, 오늘날 우리에게는 자유와 열정이 뒤따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스타 릴스, 유튜브 숏츠 등 자극과 도파민이 과잉 생산되는 환경에서 더 큰 쾌락만을 좇는 인물들에게 남는 것은 무기력이다. 과거 부모의 세대를 떠올려보면, 노동과 유희는 분리된 영역으로 자리했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퇴근 후 자기만의 취미를 갖거나, 게임을 즐기는 등 삶의 규칙과 질서를 세우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한편, 당대의 풍경에서 어느 정치인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공약은, 마지막 산업 시대형 구호로서 공허한 외침으로 느껴진다. 노동과 생산이 강제되는 오늘의 자본 사회에서 우리들의 유희와 놀이 능력을 지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글은 ‘번아웃 증후군’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오늘날,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생태를 살펴본다. 특히 지난겨울 시청각랩에서 진행된 상희 개인전 《Worlding…》(2023.12.10.-12.31)을 중심으로 노동과 실존적 사유로서 권태라는 감정을 이야기해 본다. 전시의 제목이자 작품의 이름인 〈Worlding…〉(2023)은 비동기 온라인 게임의 양식을 활용한 참여형 VR 작업이다. 실시간 게임과 달리 유저간의 상호작용 없이 혼자서 플레이 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때 비동기 온라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개별 플레이어들의 행위는 실시간이 아닐 뿐, 일정한 시차를 두고 흔적으로서 연결된다. 상희는 유희와 즐거움의 이미지로서 소비되던 게임의 형식을 빌려 디지털 산업 사회에서 노동하는 신체에 관한 감각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즉각적인 쾌락과 만족, 완전히 개인화된 세계에서 내면적 사유로서 ‘권태’가 가진 정서를 재조명한다. 게임 스테이지와 플레이하는 노동 〈Worlding…〉은 구체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출발한다. 관객/플레이어는 전임자에게 특정 과업을 인계받아 일을 시작한다. 임무는 늪지 위에 나타난 거인을 묻는 것. 늪지의 파수꾼이 되길 요청받은 관객은 낮 동안 사체가 된 거대한 육신을 흙으로 퍼붓고, 밤이 되면 처소로 돌아가 전임자가 남긴 일지를 읽는다. 플레이 타임의 대부분은 거인을 묻는 작업에 소요된다. 그러면, 다시 내일이 온다. 어제의 노동이 없었던 일처럼, 전날 묻어놓은 사체가 다시 벌거벗은 채 놓여있다. 마치 시시포스의 형별 같은 노동이 새롭게 반복된다. 앞서 언급했듯, 상희는 게임의 문법을 작업에 빌려왔는데, 그것은 작업의 서사를 스테이지화 하는 지점에서 알 수 있다. 통상 게임 공간은 플레이어의 경험을 구체화하는 수단으로서 의미가 확장된다. 서사는 스테이지 구축을 통해 전개되며 게임의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스테이지 단계를 따라 퀘스트를 달성한다. 반면, 하루를 단위로 분리되는 〈Worlding…〉의 스테이지에서는 ‘퀘스트’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오늘의 노동량을 채우세요.”라는 문구로 퀘스트를 쥐여주지만, 임무에 따른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이 스테이지를 건너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한다면 상희의 작업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장면의 무대를 마련하고, 보상 없는 퀘스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화면 속 컨트롤러의 이미지다. 상희는 컨트롤러를 두 개의 손으로 표상하면서, 하루하루 스테이지를 거칠수록 노화를 거치는 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점점 손은 거무죽죽한 껍데기로 변해간다. 두 개의 손은 거인을 매장하라는 ‘오늘의 노동량’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흙을 퍼붓는다. 두 손으로 컨트롤하지만, 아무것도 만질 수 없고 쥘 수 없는 이미지에 관한 공허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 무기력한 손의 반복적인 운동은 내일이면 파헤쳐질 거대한 몸집 위로 다시금 흙을 쌓아 올린다. 절대 끝나지 않는 매장이 디지털 구조망에 실체 없이 묶여버린 노동하는 몸을 상기시킨다. 끝을 기다리는 게임 크라우드 워킹, 플랫폼 노동, 나아가 인공지능 노동까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기술에 대한 유토피아적 전망이 활개 친다. 노동 해방이라는 이 듣기 좋은 기획은 미래 신기술이 고된 노동을 줄여주고 우리의 삶을 더 자유롭게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로 노동자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기술과 사회가 가속할수록, 시스템을 체화한 우리 역시 이전보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물리적으로 사무실을 벗어나도 업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술 발전에 따라 가상과 현실이 불가능해진 것처럼 일터와 일상 간의 경계 역시 허물어진다. 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적 방식에 따라 핵심부서를 제외한 간접부서를 사내 하도급, 파견근로, 아웃소싱으로 외주화하면서 노동자는 노동자 아닌 형태로 일의 네트워크에 붙들려 있다.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연결된다는 것. 이 말은 노동과 유희의 경계 없이 우리 몸이 항시 노동하는 상태로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가속화된 세계에서 느린 몸은 무자비하게 도태된다. 기술 시스템의 자동화, 자율화가 더 빨리 진행될수록 개개인의 무력화 역시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상희는 게임의 조건으로부터 노동의 수행적인 성질에 관여하고 있다. 실행이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고, 수행이 신체의 반복 훈련을 통해 사건을 발생시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면, 상희의 작업 속 노동하는 몸은 이미지의 실행으로써 당대 노동이 가진 수행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는 작업의 주요한 정서인 지루함과 ‘권태’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흔히 게임은 쾌락과 유희, 혹은 몰입과 중독의 차원에서 논의되곤 하지만, 작가는 권태를 말하기 위해 게임 형식을 빌려온다. 관객으로 하여금 게임이 서사화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 스스로 밟을 땅의 형세 만들기를 제안하면서 말이다. 아무도 정해주지 않은 ‘오늘의 노동량’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임의 타임라인. 컨트롤러를 쥔 물리적인 신체는 VR 공간의 움직임과 연동된 채 지루한 노동을 반복 플레이한다. 관객은 VR 게임에 매핑된 신체 이미지에 자기 몸을 맞춘다. 플레이 초반에는 몸의 불일치한 감각에 집중하지만, 하루하루 동일하게 디자인된 스테이지가 넘어갈수록 관객은 게임 속 신체와 연동하며 점차 뻐근해지는 팔과 어깨를 느낀다. 그렇게 플레이는 고통스럽게 지루해진다. 로딩 중인 세계에서 권태를 재발견하기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는 텅 빈 공간이다. 공동체적 질서, 삶의 방향성이 사라진 공터에서 권태에 쉽게 노출되곤 하는 것이다. 오늘날 혼자 놀고, 혼자 일하고, 혼자 먹는 사회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쾌락과 향유의 주체로 자리하게 되며, 가상의 풍경에 매혹된 채 스스로 고립되길 선택한다. 상희는 이런 오늘의 풍경을 가상의 공간에 옮겨두고 있다. 홀로 하는 외로운 노동, 언제 끝날지 모를 지루한 움직임, 타자가 부재한 세계관. 관객이 헤드셋을 벗어두고 떠나면, 늪지에는 새로운 관객, 즉 늪지의 새 파수꾼이 찾아올 것이다. 이들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전시 공간의 관객은 전임자의 과업을 이어 그의 노동 행위를 반복한다. 이때 작업에서 특기할 만한 지점은 플레이어가 HMD 헤드셋을 벗어두고 떠난 이후부터 발견할 수 있다. 긴 플레이 타임으로부터 해방되면, 관객은 지끈거리는 머리와 묵직한 어깨를 움직이며 헤드셋을 벗는다. 그리고 나면 VR 공간에서 축적한 개별 관객의 데이터가 종이 위로 출력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거인의 육체를 덮은 땅의 모양새에 따라 데이터가 지형도를 만든다. 고사양 그래픽과 함께 VR에서 구현된 땅이 2차원의 평면적 데이터로 공간에 쌓인다. 그와 동시에 전시 공간 아래 자리 잡은 지하실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전시에 참여한 모든 관객의 실행 데이터가 합산되어 지도의 형상으로 투사된다. 관객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이 서로 연동하는 방식으로써 또 다른 노동의 흔적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Worlding…〉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운 세계를 구축하면서 오롯이 흔적으로서 연결된 공동체를 감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권태의 가장 주된 증상은 시간을 시간 자체로 인식하는 것에 있다. 권태의 주체는 시간을 감각하는 자기 자신을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낯설게 의식한다. 그리고 이는 나와 당신을 구획하는 거리, 혹은 너와 나를 엮어내는 공동의 지형을 관찰하도록 제안한다. 모든 시간이 빈틈없이 꽉 차 버린 사회, 24시간 ‘온라인’으로 동기화된 몸으로부터 권태를 느낄 여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상희는 너무 많이 묶여있는 몸들을 ‘비동기화’하길 시도한다. 묻히지 않는 거인의 죽음, 어디서 왔는지 그 실체조차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권태와 고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컨대 상희는 재미의 왕국에서 세상의 사건 사고가 하나의 이미지, 또는 껍데기로 소비되는 장면을 포착하고, 분초를 다투는 오늘 사회의 시간에 무게를 싣는 방식으로 속도를 지연시킨다. 그렇게 로딩된 세계가 늘어뜨린 시간 속에서 권태의 자리를 마련하며 오직 홀로, 나를 대면할 실존적 사유를 요청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술비평) 이민주 이민주는 서양화와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글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꾸린다.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관계를 짚은 《동물성 루프》(공-원, 2019, 공동 기획),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미학성과 정치성을 조명한 《논캡션 인터뷰》(의외의조합, 2021, 기획), 연극의 형식을 빌어 전시의 사건성을 모색한 《#2》(두산갤러리, 2023, 공동 기획)를 기획했다. 이미지가 만드는 사건과 수행적 성질에 주목하며 비평적 글쓰기를 고민하고,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번역 관계를 연구한다.

  • 4

    GG Vol. 4 대중문화로서 게임 또한 오랫동안 소수자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최근 많은 게임제작자들이 토로하기 시작했고, 이제 게임은 다른 대중문화콘텐츠와 마찬가지로 소수자성을 향한 발디딤을 시작했다. 단순한 재현의 문제를 넘어 게임에서의 소수자 문제는 접근성까지를 고려하는 양방향성을 포함한다. GG는 소수자 문제 앞에 선 오늘날의 게임 이야기를 고찰하고자 한다. Towards more responsible representational practices in games How we talk about a medium reveals a lot about who we consider its target audience or user and what purposes we attribute to their engagement with the medium. The public discourse on digital games in both Europe and North America, have for many years been characterized by the idea, that digital games was, roughly speaking, for young, teenage boys, who spend hours upon hours painted by the luminescence of the computer screen and immersed in mindless entertainment. This was of course never true. Read More [Editor's View] 게임과 소수자, 소수자와 게임 그런 고민의 결과로 ‘GG’ 4호는 ‘소수자들의 게임’을 다뤄보고자 했습니다. 소수자라는 건 단지 숫자가 적은 집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류’가 아닌, 주류로부터 스스로가 아닌 ‘대상’으로 취급받는 많은 존재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게임은 그런 소수자와 얽히는 부분에서 아직까지 짧은 역사 때문인지 고민을 오래 해 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Read More [북리뷰] 『유령』: 소설이 탈북민과 게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하여 두 영상이 유튜브 이용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탈북자’가 가상의 ‘평양’이지만 ‘김일성 동상’을 향해 총을 쏜다. 이때 시청자들이 호응하는 것은 게임 플레이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동상을 보자마자 총을 쏘는 탈북자의 모습이다. Read More 〈폴아웃〉의 미국, 오늘날의 미국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 결과는 앞서 본 것처럼 미국 역사의 어떤 장면을 재현하는 것에 그칠 거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듯 보이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미국 역시도 길게 보면 동일한 미국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 바이든은 트럼프를 불러 들이고, 트럼프는 다시 바이든을 되살려 내며 끝도 없이 갈등한다. Read More 게임 디자이너, 수익모델의 변화 앞에서 결국 온라인 게임의 수익 모델이 부분유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분유료화로 뭉뚱그려 취급되는 과금 모델 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Read More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Read More 대안세계를 향한 미래고고학: 반문화의 문제계로서 〈사이버펑크2077〉 〈2077〉은 한계와 단점이 뚜렷한 게임이다. 수많은 구매자들이 비난했듯이 이 게임은 수 년간 홍보해온 수많은 시스템과 기능들을 대부분 폐기처분 했으며, 짜임새 있는 트리형 서사구조 구축에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어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실패했다. Read More 도시 밖도 자본의 바깥은 아니다 - 〈동물의 숲〉과 자본주의 ‘문명 6’에 등장하는 ‘쇼핑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업지구가 아닌 주거지역에 지을 수 있는 건물로 등장한다. 건물의 효과 또한 쇼핑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조금 다른데, 단순히 상업수익이 나는 곳이 아니라 거주민의 쾌적도와 지역의 관광을 크게 올려주는 효과가 핵심이다. 우리의 여가는 시스템 밖을 꿈꾸지만, 그 밖을 향하는 경로까지도 자본주의 시스템은 상품화한다. 설령 무인도에서의 고요한 삶을 꿈꾸더라도 그조차도 Inc. 가 붙은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숲〉의 설정은 애초에 그런 삶을 생각하며 게임 시스템에 접속하게 되는 시대에 대한 거친 스케치로도 읽힌다. Read More 모든이에게 게임을! 국립재활원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 인터뷰 그 중에서도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자립생활지원기술연구팀은 보조기기의 국산화를 위해 2020년부터 노인·장애인 보조기기연구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경제적 가치 부문과 사회적 가치 부문으로 나뉜다. 전자가 개인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비싼 해외 보조기기를 국내에서 연구개발하고 상용화하는 프로젝트라면, 후자는 장애인과 노인에게 꼭 필요한 보조기기 수요를 공모를 통해 파악하여 수요자와 함께 개발하고 오픈소스로 공유하는 프로젝트이다. Read More 미소녀 게임 속 에서의 여성 재현 문제 누구에게나 이상(理想)이 있다. 거창하게는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소소하게는 입고 싶은 옷이나 만나고 싶은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저마다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상 중에서도 특히나 사람에 대한 이상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고 구체화된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스타일이 세련된 사람, 지적인 사람, 활발한 사람, 나보다 키가 큰 사람, 나이가 적은 사람 등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물음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이것을 사람이 아닌 캐릭터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 보면 어떨까? Read More 보다 책임감 있는 재현을 실천하는 게임을 향해 어떤 매체에 대한 담론은 해당 매체가 겨냥하는 수용자 또는 이용자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매체와 맺는 관계에는 어떤 의도들이 담겨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를 드러낸다. 북미와 유럽의 게임 관련 공공 담론에 있어 오랫동안 게임은 - 거칠게 말해 - 번쩍이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수 있는 오락에 하릴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십대 소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인식되어왔다. Read More 소수자들의 게임에 대한 세 가지 소고 디지털게임은 한때 ‘소수자’들의 매체이기도 했다. 소수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적은 숫자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게임 초창기에 한국에서 게이머는 소수자에 가까웠다. 전자오락실은 불량한 이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낙인찍혔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엄연한 자영업장인 오락실에 학교 교사들이 들이닥쳐 ‘손님’인 학생 게이머들을 강제로 끌고나가는 영업방해 행위도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불량한 오락실과 게임 때문에 망가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이 부분은 아직도 유지되는 바 또한 있다) 게임은 눈치보면서 해야 하는, 말그대로 여가오락 문화 부문에서의 소수자 포지션이었다. Read More 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Read More 실패한 혁명의 잔여물로서의 디스코 음악:〈디스코 엘리시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상당부분 고난과 실패의 의미로 다가온다. 게임이 다룬 파리코뮌 혹은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 가깝게는 중동에서의 혁명과 홍콩의 우산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혁명들이 실패했고 민중들은 다시 고난의 상황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모든 역사 속 실패한 혁명의 잔해를 딛고 사는 사람들이며, 디스코라는 음악 또한 60년대의 실패가 낳은 아쉬움과 침잠의 흔적일 것이다.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굳이 실패한 혁명의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디스코라는 흘러간 장르를 꺼내붙이는 이유는 이 게임의 주제가 살인사건이 아닌 ‘실패한 혁명의 역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Read More 아케이드가 할 수 있는 미래의 역할 오락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아케이드 게임장은 1980~1990년대의 많은 게이머에게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점차 가정용 게임기와 PC가 보급되며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어가는 환경에서도, 집에서 절대 즐길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게임을 동전 하나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의미를 넘어 게임 환경의 선두를 달린다는 이미지마저 주는 곳임을 뜻했고, 실제 게임 산업의 선두를 달리는 분야가 아케이드 게임이기도 했다. Read More 압둘 와합과 〈21DAYS〉를 플레이하다 필자는 최근 압둘 와합과 〈21Days〉를 같이 플레이해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난민을 다룬 이야기가 드문 가운데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적 형식이라는 점이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은 시리아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활동을 하다 시리아 내 한국 유학생들을 친구를 둔 인연으로 2009년에 처음 한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고국의 민주화 시위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내전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헬프 시리아’라는 단체를 만들며 시리아 문제의 실상을 알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Read More 현황점검: 플랫폼 인앱결제의 오늘 카메라 앞에 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든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사람들 주머니에 통화도 되고, MP3 플레이어도 되고, 동영상 재생기도 되는 스마트폰이 담기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저들은 ‘그 작은 기계로 무슨 게임이냐’라는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 Read More

  • 현질의 탄생, 새로운 플레이의 탄생: 〈현질의 탄생〉 서평

    < Back 현질의 탄생, 새로운 플레이의 탄생: 〈현질의 탄생〉 서평 09 GG Vol. 22. 12. 10. 놀이란 본래 아무것도 (경제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디지털 게임(이하 ‘게임’)은 놀이라는 맥락에 디지털 기술이 덧붙으면서 탄생했다. 놀이와 디지털 기술의 접합으로 가상공간에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놀게끔 만든 것이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이 지닌 폭발적인 가능성에 주목한 산업자본의 개입으로 게임도 산업화된다. 이제는 일부 예술적 실험들을 제외하면 게임은 대부분 엔터테인먼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상품이자 서비스이다. 게임이 상품이자 서비스라는 말은,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일종의 대가를 지급해야 함을 의미한다. 게임을 개발하고 유통하는 데 크고작은 비용이 드는 만큼 플레이어들의 대가 지급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게임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플레이어들의 반응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광고를 보든,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든, 현금으로 결제를 하든 게임 플레이에 대해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게임사-게임-플레이어 간 경합의 영역이 된다. 이경혁의 신간 〈현질의 탄생〉은 그 영역 내 양상과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텍스트다. 책은 크게 2부로 구분된다. 각 부별 분량도 거의 비슷하다. 1부에서는 먼저 게임의 ‘결제사(史)’를 다룬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서 (하지만 가끔은 해외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게임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결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핀다. 결제는 게임 공간, 플레이어의 실력과 같은 ‘게임 밖’, 그리고 난이도, 장르와 문법, 플레이 타임과 같은 ‘게임 안’의 요소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 저자는 두 축을 구분틀로 삼는다. 한 축은 게임 플랫폼이다. 아케이드 게임에서부터 가정용 콘솔게임, PC 게임, 온라인 게임, 그리고 모바일 게임에 이르기까지 플랫폼의 등장시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다른 한 축은 결제와 관련된 요소들로, ‘대여-구매·소장-불법복제’, ‘물리적 매체 구매·소장-디지털 (소프트웨어) 다운로드-스트리밍’, ‘무료-정액결제-부분 유료결제’와 같이 여러 기준에 따라 본문에 따로 또 같이 등장한다. 이처럼 플랫폼의 축을 결제와 관련된 여러 축들과 교차시키며, 결제가 게임에서 갖는 의미들을 다양하게 논의하는 것이 1부의 대강이다. 2부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질 이야기가 시작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강한 반발을 사지만 한국 게임이 역대급 매출 및 이용자 수를 기록하고 있는 모순적이거나 양가적인 상황이, 현질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입을 뗀다. 현질은 일차적으로는 현금(現金)의 ‘현’과 접미사 ‘-질’의 합성어로, 게임 내 캐릭터, 아이템, 재화 등을 현금으로 사는 행위를 낮잡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는 특정 결제방식을 현질이라고 부를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이 결제가 실제 게임 플레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와 ‘그러한 결제가 사실상 강제되는가’임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경쟁하는 온라인 게임 안에서 부분유료결제를 통해 게임 내적인 승패나 우열의 관계에서 확실한 우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결제가 만드는 우위가 매우 확고하고 넘어서기 어려워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 영향력이 크다면, 그것이 현질’이라고 조작화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현질이 플레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결제방식은 현질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특정한 결제양식은 게임 내부의 변화, (저자가 문제적 상황으로 인식하는) 자동전투와 확률형 아이템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먼저, 자동전투의 배경에는 무한히 영속하는 게임시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정이 필수적으로 자리한다. 경쟁에서 게임 플레이를 자동으로 유지하는 행위는 그보다 훨씬 더 간편한 해결책인 경험치와 아이템을 유료로 구매하거나 부스트하는 현질과 선택적 상호관계를 이룬다. 또,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은 유용한 아이템이나 기능을 순수하게 구매할 수 없게 하고 오직 확률형 아이템으로만, 그것도 아주 낮은 확률로 뽑히도록 만듦으로써 플레이어가 많은 지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현질과 자동전투-확률형 아이템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지점이 이렇게 나타난다. 현질이 놀이로서의 게임 플레이에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라 치부하고 그것을 멀리하자고 말해버리면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현질을 유도하거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게임산업의 전략이 아주 은밀하면서도 치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이 알게 모르게 게임산업의 상업적 팽창과 지속에 복무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현질의 자장 속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이제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플레이 현장에서 게임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전통적 플레이에서 난이도와 숙련도 사이의 길항은 이제 게임 텍스트와 플레이어 사이의 독립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고난이도 상황에 대해 숙련도가 미치지 못하더라도, 현질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 이용자와 규칙이라는 전통적 플레이 상호작용은 그렇게 현질로 인해 계속 침범받는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러한 상황을 두고 현질에 기반한 플레이는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고 비난하지만, 저자는 현질의 시대 게임 플레이를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기보다는 새로운 플레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질 플레이를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현질에 매달리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전통적인 게임 내 플레이를, 게임 외적인 납금행위와 연결함으로써 플레이 개념 자체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 논의를 끌어가기 위해 ‘납금 플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납금 플레이란 ‘플레이어가 게임 규칙 안에 존재하는 아이템이나 경험치 등을 포함한 게임 내 수치와 상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상을 구매함으로써 플레이를 만드는 난이도-숙련도 길항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현실의 행위면서도 게임의 난이도와 숙련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지점을 납금 플레이로 새롭게 개념화함으로써 현질 대중화 이후 현실과 직접적인 교차점을 지닌 현실의 결제로 게임 이후의 플레이를 살펴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현질과 플레이 사이의 그 무엇들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친다. 지금의 게임 플레이가 더 이상 게임의 시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임 텍스트-플레이어 간 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납금 플레이 개념이 갖는 타당성과 확장성은 크다. 실제 산업자본의 욕망 하에서 비자율적으로 혹은 다분히 교섭적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전혀 즐겁지 않다면 게임을 지속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지속하는 플레이어들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시대적 당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질에 기인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플레이가 그냥 별일 아닌 것이라 해버리면, 그 말은 게임이 그 이상의 의미있는 경험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게임에의 참여가 플레이어에게 어떤 영향력이 있는 무언가라면, 그에 대한 이해는 진지한 것이어야 한다. 좋은 플레이와 나쁜 플레이, 바람직한 플레이와 바람직하지 못한 플레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플레이다. 게임을 하는 모두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게임 프레임과 현실세계의 프레임이 교차하는 제3의 공간에 거주한다. 그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그들만의 방법을 찾고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플레이어는 (만약 그가 정말 플레이어 빠져들고 있다면) 더 잘 플레이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도 돈을 쓰기 위해 플레이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플레이하기 위해 플레이한다. 본문의 흐름을 좇으며 써내려간 서평이지만, 앞에서 다루지 못한 〈현질의 탄생〉의 여러 미덕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대표적으로, 석사학위논문에 기반한 텍스트임에도 쉽게 잘 읽힌다. 저자가 연구자만이 아니라 비평가로서 (그것이 텍스트를 매개한 것이라고는 해도) 독자와의 만남을 늘 고민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이론을 정리하고 그에 기반해 논리를 쌓아가는 대신 이슈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면서 그 과정에서 슬쩍슬쩍 개념들을 내놓는 방식, 혼자 말을 꺼내는 대신 앞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등 논의방식도 꽤 독특하다. 전자오락실에서 숙련된 플레이어들의 대전을 함께 서서 지켜보던 (하지만 본인은 게임을 정말 잘 하지는 못하는) 동네 선배가 흘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달까. 다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방식으로 종합해 들려주는 선배. 마지막으로 책 제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게임 결제 전반을 둘러싼 환경과 결제의 역사, 그리고 그 결제‘들’이 갖는 의미를 폭넓게 다룬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이 ‘결제’의 탄생이 아니라 ‘현질’의 탄생이었을까? 저자도 92쪽에 이르러서야 “여기부터가 현질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라고 언급할 정도로 현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야 등장한다. 하지만 책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 게임의 결제사를 지나, 2부를 읽으면서 현질이 게임의 안과 밖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읽고나면, 그제서야 지금의 게임산업과 문화에서 현질의 탄생이 갖는 중요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질의 탄생〉은 결제도 아니고 현질도 아닌, 지금의 게임을 말하는 연구서이자 보고서이자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게임을 계속 해나가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펼쳐들어야 한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현황점검: 플랫폼 인앱결제의 오늘

    < Back 현황점검: 플랫폼 인앱결제의 오늘 04 GG Vol. 22. 2. 10. 카메라 앞에 선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든 것이 2007년의 일이다. 사람들 주머니에 통화도 되고, MP3 플레이어도 되고, 동영상 재생기도 되는 스마트폰이 담기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저들은 ‘그 작은 기계로 무슨 게임이냐’라는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 과일을 썰고(프루트 닌자), 새를 날리는(앵그리 버드) ‘스내커블’한 게임을 넘어서 스마트폰에는 수백 명 이상의 유저들이 모여 공성전을 펼치는 MMORPG와 <원신> 같은 3D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까지 플레이되고 있다. (물론 3-매치-퍼즐 등 캐주얼 게임은 아직도 유력한 모바일 게임 분야다) 플랫폼을 넘나드는 크로스플레이를 넘어, 클라우드 기술로 모바일에서 PC 게임을 구동시키겠다는 원대한 아이디어도 현실의 영역에 다가섰다. 조사 업체 뉴주(Newzoo)의 데이터를 보면, 전 세계 게임산업 내 소비자 지출은 1,803억 달러(약 213조 6,900억 원)를 기록했고, 그 가운데 모바일 게임 분야가 52%에 해당하는 932억 달러를 차지했다.1) 이밖에 ‘지난 10년간 모바일 게임 시장은 줄곧 우상향 그래프를 그려오고 있다’는 명제를 근거하는 분석은 곳곳에 널려있다. 이러한 시장 상황 속에서 엔씨소프트, 넷마블, 크래프톤 등 한국 게임사들도 모바일 게임 시장에 진출해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모바일 게임 시장에는 거대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스마트폰의 운영체제, 그리고 앱 마켓을 서비스 중인 구글과 애플이 매기고 있는 30%의 인앱결제 수수료가 과연 온당한 수준이냐는 것이다. 현재 게임을 비롯한 모바일 앱에서는 인앱결제가 사실상 강제 중이며 결제가 발생할 ‘때마다’ 30%의 이용 수수료가 부과되고 있다. 이 30%는 왜 부과하는 걸까? 왜 이 수수료가 너무하다는 까닭은 무엇일까? 누가 구글과 애플을 상대로 도전장을 내밀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옛날에는 혁신적이었던 30%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디지털 플랫폼 사업자가 30%의 수수료를 가져가기로 약속이 된 것은 언제일까? 애플은 2003년 음악 플랫폼 아이튠즈를 출시했다. 애플은 당시 음악사에게 앱스토어에 인앱결제를 필수적으로 적용하며, 중앙 통제적인 서버를 관리하고 보안 문제를 책임지는 비용으로 30%의 수수료를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 30%는 '우수리'를 뗀 금액으로 이해됐다. 그 무렵 애플은 99센트의 노래를 판매할 때마다 큰 음반사에 72센트, 독립 음반사에 62센트를 지급했다.2) 이러한 기조는 2008년 앱스토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3) 앱에 대한 개념도 희미하던 시절, 일정 부분의 수수료만 내면 전체 애플 이용자를 대상으로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소개할 수 있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졌다. 이전에는 결제가 이뤄질 때마다 카드사 별 대행 수수료나 통신사별 호스팅 비용이 발생했는데 모든 금액을 30%로 일원화해 책정한 것이다. 개발사는 통신사를 거치지 않고 애플을 통해서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초창기 애플이 내세운 인앱결제 의무 + 30% 정책은 비교적 합리적인 정책으로 평가됐다. 애플에 복귀해서 앱스토어의 얼개를 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가 30%의 수수료에 대해서 "우리는 (CP들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려는 게 아니라 아이폰을 더 많이 파는 것이 목표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4) 놀이터를 제공한 뒤 최소한의 관리 비용만 걷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자사 스마트폰을 더 많이 보급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30%는 구글플레이 스토어, 아마존 앱스토어, MS 스토어는 물론 엑스박스, 소니, 닌텐도, 스팀도 책정 중인 비율이다. 규모있는 콘텐츠 제공자(CP)들에게 30%의 수수료는 '국룰'이 아닌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ESD)의 '국제 표준'이었다. 향후 자신의 ESD에 더 많은 CP를 유치하기 위해서 연매출을 기준으로 영세한 규모의 회사들에겐 수수료를 15%나 20%로 깎아주었다. 거의 모든 ESD 사업자들이 생태계 관리를 위해서 수수료를 매기고 있다. * 플랫폼 사업자별 수수료 요율.5) 낮은 효능감, ‘갑질’... 수수료 30%는 적당한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CP들은 30%에 의문을 품었다. 비즈니스모델(BM)이 고도화되면서 30%씩 구글과 애플에 납부하는 것에 불만이 발생했던 것이다. 다이아와 루비 같은 인게임 재화에 대한 결제가 이뤄지는 순간마다 30%의 수수료를 물리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냐는 주장이다. 애플이 초기 30%를 설정할 때는 통신사마다 따로 진행되는 빌링 시스템에서 벗어나 애플 생태계를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앱을 알릴 수 있는 혁신이었지만, 시장이 성장세를 거쳐 안정세에 진입한 오늘날까지 플랫폼 사업자가 30%나 거둬가는 것은 무리라는 해석이다. 2020년 애플 앱스토어에는 2,800만 명의 개발자가 활동 중이고 등재된 앱은 180만 개에 이른다.6) 플랫폼 사업자들은 거대해진 생태계를 관리하는 데 30%의 수수료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역폭 처리, 거래 관리, 악성코드 식별에도 비용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앱결제가 '갑질'이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기업과 창작자들은 자신들이 제공한 앱을 통해서 생태계를 키운 구글과 애플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양대 기업에 반발하는 이들에게 '30%의 룰'은 인앱결제로 강제된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엔씨소프트 등이 가입된 한국인터넷기업협회(인기협)은 "앱 마켓의 독점이 콘텐츠 서비스의 독점으로 이어질 것이며 (구글, 애플은) 시장 지배적 지위를 악용해 앱 사업자와 이용자 모두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려 한다"고 날을 세우고 있다.7) 창작자들로 구성된 한국웹소설산업협회, 한국만화가협회, 한국웹툰작가협회도 인앱결제 수수료가 부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창작자들에게는 30%로 이루어지는 생태계에 대한 효능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목소리가 크다. 게임 개발사들에게도 수수료를 내고 있지만 앱 심사 지연, 서비스 중단 등에 관한 안내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구글과 애플이 몇몇 플레이어에게는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2018년, 넷플릭스는 앱스토어가 아닌 웹브라우저로 회원을 모객했다. 앱스토어의 정기구독 앱은 첫 번째 해에 30%, 두 번째 해에 15% 수수료를 떼어가는 데 이 돈을 내기 싫었던 넷플릭스는 우회책을 사용했다. 넷플릭스 앱에서는 신규 가입을 등록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양대 기업은 다른 곳에게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 이 방법을 사실상 용인해줬다. 에픽게임즈는 <포트나이트>에서 자체 빌링 옵션을 추가했다가 양대 스토어에서 퇴출된 적 있다. 엔진사, 게임사, 스토어 사업자 등 다종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에픽게임즈는 퇴출을 준비라도 한 듯 구글과 애플에게 “반 독점법 위반”이라며 고소장을 날렸고, 기나긴 법정 투쟁을 시작했다. 현재 에픽게임즈는 대표 팀 스위니를 중심으로 양대 산맥의 지위에 균열을 내고 있다. 스팀은 매출이 1,000만 달러(약 119억 원) 미만이면 30%, 1,000만 달러 이상은 금액에 따라 25%, 20% 순으로 수수료를 매긴다. 이들과 달리 에픽 스토어는 12%를 떼간다. 지난한 소송 투쟁을 통해서 에픽게임즈가 원스토어, 갤럭시스토어와 같이 써드 파티 스토어를 기획 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애플은 이같은 써드 파티 스토어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에픽게임즈는 인기 데이팅 앱 ‘틴더’의 매칭그룹과 함께 CAF(앱 공정성 연대)을 만들었다. 현재 CAF는 구글, 애플에 조직적으로 맞서고 있다. 한국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CAF 임원들은 코로나19 시국에도 한국을 찾아 국회 토론회, 인터뷰 등에 참석하며 한국의 ‘구글갑질방지법’을 높이 평가8)하며, 구글과 애플의 행위를 "자사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며 혁신이나 경쟁, 공정성을 위한 노력을 지향하는 회사는 아니다"라며 비판하고 있다. (‘데이팅 앱’의 존재는 뒤에서도 한 번 더 등장할 것이다.) 30%의 벽은 무너졌다 이미 영세 규모 기업에는 낮은 요율을 적용했던 플랫폼 사업자들, 에픽게임즈의 행보 등을 통해 구글, 애플이 고수하던 30%의 벽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구글와 애플은 여러 나라 규제 당국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구글과 애플을 감시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전기통신사업자 일부개정안, 이른바 ‘구글갑질방지법’에는 특정 결제방식 강제, 부당한 앱 심사 지연 및 삭제, 타 앱마켓 등록 방해 등을 할 수 없으며,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해당 업무를 담당케 했다. 방통위는 앱마켓 사업자의 의무 이행 실태를 점검하는 한편, 자료 제출과 시정을 '명령'할 수 있다. 법 체계에서 요구와 명령은 무게가 다르다. 아직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상당히 강력한 법안이 통과된 셈이다. 이 법 통과를 바라본 팀 스위니 대표는 “나는 한국인”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새 법이 통과되자 구글 한국 지사는 4%p 낮은 결제 수수료를 부과하는 외부 결제를 허용하기로 발표했다. 이 조치에 대해 국내 업계는 ‘꼼수’라는 비판을 내놓았다.9) 공개적인 액션을 취하는 구글에 비해 애플 한국 지사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연초 애플 코리아는 한국 법을 지키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서한을 방통위에 전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본 원고를 제출하는 지금까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애플코리아 서비스 최고 책임자 한수정은 새 법에 대한 구체적인 회의를 전개하던 시점,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논의에 참가하지 않았다.10)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한 총괄이 EA코리아 대표 등을 역임한 게임 업계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뿐 아니라 네덜란드 당국은 애플에게 틴더, 범블 등 데이팅 앱에서 인앱결제 외 써드파티 결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애플은 이에 따라서 지난 1월 14일부터 특정 애플리케이션에 외부 결제 시스템을 적용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애플에게 벌금을 물렸다. 제3자 결제를 도입하면서 일부 앱스토어 기능을 차단시키는 식으로 꼼수를 부렸다는 것이다. 개발자에게 외부 결제를 위한 별도 앱을 개발하도록 지시했으며, 외부 결제를 이용할 경우 애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애플은 제3자 결제 도입 후에도 수수료를 징수했는데, 네덜란드는 이것을 명령 위반으로 보고 신속하게 애플에게 벌금을 부과시켰다.11) 유럽의회는 빅 테크에 대한 규제·감시를 강화하는 디지털 시장법을 추진 중이며, 호주에서는 애플과 구글의 행위들이 반경쟁적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인도, 영국, 프랑스 당국이 양대 기업의 인앱결제 강제 등에 대해서 주시하고 있다.12) 결제 규모, 본사의 위치 등을 복합적으로 보았을 때 대마(大馬)는 미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10월, 미국 민주당이 주도하는 하원 반독점 위원회는 구글과 애플의 행동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해당 문건에는 "한때 기존 질서(Status Quo)에 도전했던 산만한 언더독 스타트업들은 이제 석유 부호나 철도 거물들의 시대에나 봤던 독점자(Monopolies)가 되어버렸다"라는 강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들 기업은 사회에 분명 혜택을 주었지만, 이제 대가를 치를 때가 됐다"며 "다른 회사들도 그들의 규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구도 있다.13) 강력한 어조의 보고서가 발간된 뒤, CAF는 미국 현지에서 결코 무시 못할 수준의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이와 별개로 에픽게임즈와 애플의 소송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이 사안에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2021년 9월 1심에서 재판부는 인앱결제 외 직접 구매로 연결할 수 있는 링크를 포함시키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10개의 쟁점 사안 중 1개에만 에픽게임즈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정된 1개의 쟁점은 이미 애플이 영세 규모 개발자들과 소송에서 합의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1심 재판부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고, 2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에 따라 새로운 국면이 마련될 것이다. 지난 1월 21일,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는 구글과 애플을 규제 대상으로 규정하고 이들 기업의 지배력 남용을 막는 법안을 16:6으로 통과시켰다. 자사 상품 우대를 규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인앱결제가 유튜브 등 자사 앱을 우대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으므로 이 법에 따라서는 금지의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법이 장기적으로 30%의 수수료에도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 법안은 곧 본회의에 올라갈 예정이다.14) 1) The Games Market and Beyond in 2021: The Year in Numbers (Newzoo, 21-12-22) 2) 2000년대 애플의 아이튠즈 수수료에 대한 뒷이야기는 <콘텐츠의 미래>(바라트 아난드 저)에 잘 정리되어있다. 3) How Apple’s 30% App Store Cut Became a Boon and a Headache (NYT, 20-08-14) 4) Apple’s Latest Opens a Developers’ Playground (NYT, 08-07-10) 5) Apple's App Store and Other Digital Marketplaces (Analysis Group, 20-07-22) 6) Apple, 세계 개발자 컨퍼런스(WWDC)를 전체 온라인 포맷으로 다시 가져오다 (Apple Newsroom, 21-03-30) 7) 구글 “네이버·카카오 웹툰 日 성공, 인앱 결제 덕분”... 인기협 “구글만 좋은 불공정 정책” (아주경제, 20-09-29) 8) [단독] "이러다 다 죽는다", 팀 스위니가 말하는 앱 생태계와 독점 (TIG, 21-11-18) 9) 구글, 4%p 수수료 낮춘 ‘꼼수’ 논란 여전…방통위는 ‘골머리’ (뉴스1, 22-01-12) 10) 인앱결제법 이행 논의 헛도는데…애플코리아 경영진은 '부재중' (연합뉴스, 21-11-24) 11) 네덜란드, 애플에 67억 벌금…"외부결제 허용 불충분" (ZDNet Korea, 22-01-25 )12) 美 앱공정성연대 "한국 구글갑질방지법 기념비적…강제화 중요" (연합뉴스, 21-11-15) 13) 미국 하원 반독점위원회 "구글·애플 마켓 수수료 30% 너무해 (TIG, 20-10-08) 14) 구글, 위치 추적 설정 꺼놔도 몰래 추적…미국 지자체 '줄소송' (경향신문, 22-01-25)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 Back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12 GG Vol. 23. 6. 10.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구획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구태의연하다는 인식까지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게임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숙한 미술관, 그것도 한국 미술계에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3년 5월 12일부터 9월 10일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게임 사회> 전시를 연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에서 게임의 문화적 지위가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로의 게임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게임으로의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은 무엇인지 등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이에 해당 전시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했던 편집장은 <게임 사회>를 기획한 홍이지 학예연구사와 만나 게임과 예술의 관계를 더 깊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다만, 전반적인 전시에 관한 소개는 국립현대미술관 콘텐츠( https://www.youtube.com/watch?v=_mZEphegRDc) 에도 잘 나와 있기에, 인터뷰에서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의 의의와 한계, 또 앞으로의 가능성들을 사유하고자 하였다. 이경혁 편집장: 안녕하세요. 학예연구사님.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이제 전시 기획을 전공을 한 뒤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지 3년 되었습니다. 홍이지라고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전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전시에 대한 반응들이 뜨겁더라구요. 인터넷에서도 많은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게임 관계자들과 미술 관계자들이 이번 전시를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비단 미술계와 게임계로 나뉘는 것뿐 아니라, 게임계 안에서도 게이머가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 업계에 계시는 분이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을 콘텐츠로 기획하시는 기획자분이 보는 관점도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은 것이 저는 재밌어요. 이 전시 하나만으로도 저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대화를 할 때마다 너무 흥미로워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 전시라는 것이 리터러시의 문제가 있죠. 전시에서 애초에 게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요. 사실은 일반적인 미술관도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상황인데, 미술 전문가로서 게임에 관한 전시가 다른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실 처음 기획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한 방향으로 읽으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의 리터러시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더욱 피드백이 궁금한 전시이기도 했어요. 일반적으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올려도 피드백은 거의 없거든요. 개인의 호불호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 정도는 있지만, 전시 전반의 경험에 관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전시는 오픈한 지 일주일 됐는데도 피드백이 너무 적극적이어서 굉장히 놀라워요. 그게 게임 전시의 특이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전에 우리 미술관에서 비슷하게 피드백을 받았던 전시는 ‘개를 위한 미술관’ 전시였어요. 강아지들이 들어왔을 때,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엄숙주의나 결계가 해제되면서 이 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경험했을 때 확실히 훨씬 더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던 것 같고, 또 그거를 염두하고 만들었던 전시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 저희 미술관이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았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얼마나 장소가 좋아요? 위치도 훌륭하고. 코로나 때 병상이 없을 때에도 여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거든요. 저희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미술관이 기능을 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관에 대한 경험과 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번 기획도 이런 맥락에서 기획한 지점이 있어요. 다만, 피드백 중에는 기획자가 누구이며, 얼마나 게임을 해봤는지 묻는 질문들도 있어요. (웃음) 물론, 제가 게임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게임을 섭렵하고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러나 외부 기획자가 미술관에 와서 하는 전시와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공공성을 주제로 해서 만드는 전시는 분명히 접근이 되게 다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층위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공공미술로의 기획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무래도 디지털 게임 전시도 있다보니 기계들이 많잖아요? 그 지점에서도 공공미술에서의 의의나 어려움들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기계들은 괜찮나요? 잘 돌아가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괜찮아요. 저희가 우려했던 것보다 그래도 안정화는 빨리 됐고,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전시되고 있어요. 저희 오픈하고 그다음 날 단체 관람객이 900명이었거든요. 그때가 진짜 위기였긴 했어요. 관람객분들이 개별로 혹은 두 세분씩 오실 때는 미술관의 분위기나 문법을 인지하고 오세요. 그런데 900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오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기계들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의 기획의도 이면에 있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디어 아트 작품이 굉장히 많던데,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들은 어떻게 되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라져요. 실체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요. 처음부터 저희가 작품들을 파일 형태로 받았는데,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파일을 바로 폐기하고 그걸 사진을 찍어서, 소장품 대여처에 보내줘야 돼요. 김희천 작가님의 작품에 쓰인 큰 LED 이런 거는 패널도 그냥 다 해체해 버리는 거예요. 렌트기 때문에. 저희는 자산 취득을 할 수가 없어서 장비가 비싸도 렌트를 해야 돼요. 이 현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아카이빙을 한다 해도 사실상 ‘전시의 재현’이라는 건 불가능한 형태군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이경혁 편집장: 음. 게임 매체가 원래 그렇긴 하죠. 게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원래 애초부터 재연이 불가능한 거니까요. 그래도 파일을 가지고 계신거면, 나중에 오페라처럼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연출로 재현할 수는 있는 거겠네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그런데 그것도 조금 문제가 있긴 해요. 제가 이번에 MoMA(Museum of Modern Art: 미국의 유명 근현대 미술관)랑 스미스소니언(미국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박물관)에서 각각 작품을 빌렸는데, 최종 협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1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애초에 MoMA와 스미스소니언이 2010년 초반에 게임을 소장하기로 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이랑 문법이 많이 달랐던 거죠.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계약서는 명확한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에 체결된 거였거든요. 게다가 당시의 판단으로는 (게임 관련 전시물을) 어디까지 소장해야 되는지에 관한 연구가 너무 미비했기 때문에, 누구의 권한을 어디까지 일임받아서 관리할지에 대한 부분도 각각 다 달랐던 거죠. 어떤 게임사는 ‘전시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떤 곳은 ‘전권을 다 준다’ 대중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너무 달라졌고, 또 담당자들도 다 바뀌어서 판단을 유보했기 때문에, 저희가 이번에 전시할 때에는 MoMA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MoMA의 모든 리스트를 보면서 게임 회사들에게 다시 또 허락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게임사는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하고 두 달, 여름 휴가라고 한 달, 어떤 곳은 ‘우리가 MoMA랑 계약을 했다고요?’ 하는 곳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MoMA가 2010년에 전시를 하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전시를 안 했기 때문에, 저작권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컨디션이 많이 바뀐 거예요. 그 사이에 데이터 파일도 굉장히 압축이 많이 되고, 전시물을 상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재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MoMA에서 전시된 작품들도 실제 상용 작품들이고, 사실은 직접 컨택을 해서 전시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런데 MoMA와 계약한 작품들을 빌려왔던 의도가 따로 있으셨을지 궁금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도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게임을 미술사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지점이었어요.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그러니까 89년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를 디지털 미술사로 정립을 하고 있는 와중인데, 이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게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게임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연구하고 있던 맥락 안에 게임을 긴급하고 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MoMA의 사례가 주효했어요. 애초에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에게도 ‘MoMA도 게임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설득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역사적 맥락 외에도 ‘미술 전시로서의 게임’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물론 있지만, 그걸 구현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단순한 체험으로 제공되는 것 외에, 저희가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미디어 작품처럼 뭔가 감상의 여지가 생기고, 이걸 통해서 특정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러기에는 미술관에서의 공간이 한정적이고, 너무 찰나인 거죠. 경험의 시간 자체가.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이번 전시 중에서 특히 심시티 같은 경우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죠. 결국, 전시장의 한계라는 것은 공연 공간에서, 줄을 서서 공연 기기를 잠깐 대여하는 방식에서부터 나올 것 같은데요. 오락실 게임은 이런 논리가 가능하겠지만, 심시티나 마인 크래프트가 공적 공간에 올라왔을 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연 외에도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게임은 일반적으로 협업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니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MoMA도 게임 전시는 항상 디자인 분과에서만 하는데, 시연이 어렵다는 점과 크레딧의 문제가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게임 전시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지점도 있고, 아직은 예술로서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관점의 차이들도 큰 것 같아요. 저희가 빌릴 때도 게임사의 반응에 따라서 그 게임사가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거든요. 가령, 제노바 첸(Sky : 빛의 아이들, Flower, Journey 제작자)은 확실히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뭔가를 요구했을 때, 모든 걸 조건 없이, 질문을 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전부 제공해줬는데요. 확실히 게임이 예술로 보여줄 수 있는 자리라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희가 지금 헤일로 2600을 보여주고 있는데,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통해 에드 프라이즈(Ed Fries, 헤일로 2600 개발자)의 연락을 받았어요. 저희는 모든 전시품을 똑같은 컨디션으로, 너무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방향에서, 관람객들에게 중립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에드 프라이즈는 자신의 작업이 아트이기 때문에, 전시할 때 게임이 이용되었던 당시의 CRT 모니터로 바꿔 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접근성 확장을 위해서 전시에 버튼과 조이스틱을 쓴 것은 알겠지만, 내 작업은 이미 종결된 그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시 번역된 상태로 제공이 되는 형태는 반대한다.” 그런 거죠. 이런 지점에서는 게임과 전시에 대해서 고민들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하다가 지금은 백남준 류의 비디오 아트가 미술계에 자리가 생겼잖아요? 게임도 그런 게 가능할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게임이) 이미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만큼 자리 잡혔다고 생각해요. 싱글 채널 비디오 아트에서 옛날에는 작가가 선형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촬영을 해서 편집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CGI가 안 들어가는 작업을 찾기가 힘든데, 그 CGI 작업 자체가 유니티 아니면 언리얼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이미 게임의 문법으로 영상 언어를 만들고 있고, 그 과정에서 메타버스나 NFT를 경험해 본 작가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게임의 작법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잘 만들지에 있어 기술력에 대한 갈구가 큰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작가들도 고민하는 게, 그런 기술력을 써서 작업을 만들면 1, 2년 사이에 빠르게 낡아버린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거죠. 이제는 딱 보면 ‘이거는 심즈 미감, 이거는 플레이스테이션 1 미감, 이거는 언리얼 엔진 5 미감’ 이런 걸 바로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금방 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김희천 작가가 개발을 할 때도 큰 화면에 굉장히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풀레이스테이션 1 미감에 로우 폴리곤을 써서, 시간대를 흐트러뜨리고 싶은 의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7220)에서 언급한 예시 중에 라라 크로프트가 있었는데요. 옛날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에는 게이머들 각자의 라라가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라라. 그런데 기술이 발달해서 실사화가 되니까 모두가 실망했다는 거죠. 자기의 라라가 아니라서. 그런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고 게임을 하던 그 시기가 현대 미술과도 닿아있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고 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딱 그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이경혁 편집장: 확실히 게임계에서는 그런 기술적 맥락들이 중요하죠. 사실 초창기 레트로 게임들은 지금처럼 폴리곤 방식으로 안 만들고, 도트로 이제 디자인을 했잖아요. 근데 도트디자인에서는 박모라고 하죠? CRT 특유의 번짐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한 게 있었죠. 그런 미감들은 시대적인 맥락에서 감상되고,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슈퍼 마리오 무비>는 다양하게 감상될 것 같은데, 이전 게이머들에게는 그 화면이 익숙하거든요. 게임팩을 처음 꽂았을 때, 뭔가 지직거리면서 나오는, 그래서 다시 훅훅 불고 게임팩을 꽂는 익숙한 화면인데, 그 경험이 없거나 그 시절을 안 겪은 요즘 게이머들은 무슨 화면인지 모르는 거죠. 그런건 도록에 아무리 써도 잘 알 수가 없죠.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 지점이 현대 미술과 게임의 접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가 브로셔에 쓴 글이 있어요. 게임을 하는 것과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과정이 되게 비슷하다고 써놓은 게 있거든요. 저는 실제로 그랬던 것이, 제가 게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미술계에 계신 많은 분들은 제임을 잘 모르시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외부에서 ‘저 미술관에서 일해요’라고 하면 ‘저는 현대 미술은 하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죠. 이렇게 서로 문법이 다르고, 시간을 들여서 익히지 않으면 온전히 즐길 수 없는 두 대상을 공공미술관에서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에 ‘접근성’을 무게감 있게 다룬 것도 연장선 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해주신 접근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번 작업을 하시면서 접근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게임계의 바깥에 계신 입장에서 게임 접근성의 현재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가 전시를 기획할 때, 컨트롤러를 이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 국립재활원의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도 소개되었던, 장애인의 게임 접근을 돕기 위한 컨트롤러)로 전시할 수 있는 게임이 거의 없는 거예요. 특히 국내 게임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지스타가 열렸을 때, 넥슨에서 ‘카트라이더: 드리프트’가 나오니까 그거를 이 컨트롤러로 쓸 수 있게 기술적으로 검토를 해달라는 이야기가 국립재활원에서 있었고, 국립재활원 연구에 참여했던 가족들에게도 ‘단 하나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국내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 마지막에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넣은 지점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엑스박스 컨트롤러는 국내에서 팔지도 않고,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죠. 그리고 우리나라 게임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장애인과 여러 소수자의) 접근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은 산업으로 분류되고 게임에 대한 평가도 이용자가 얼마인지 등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되기 때문에,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지점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전시 이후에도 게임의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전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사실 미술관과 접근성은 게임보다 먼저 논의들을 거쳤잖아요? 이제는 미술관이, ‘한국에서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높은 공간’ 중 하나로 꼽히는데, 거기에서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부족한 ‘게임’이 이야기된다는 지점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데 저는 매일 내려가서 Xbox Adaptive Controller를 쓰시는 분들을 보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금방 익숙하게 잘하세요. 저희 딸이 11살인데, 저희 딸한테 마인 크래프트를 이 컨트롤러로도 시켜봤는데,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하긴 하더라고요. 확실히 접근성에 관한 논의들은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느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어떤 컨트롤러에 익숙한지에 대한 문제를 확장하면 장애인 접근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접근성 관련 논의가 비단 장애인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보편성에 관한 논의이고, 오히려 메이저를 향해 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그래서 이러한 고민들을 손쉽게 ‘돈 안되는’, ‘착한 일’로 인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사람들이 접근성을 자꾸 소수자의 문제라고 쉽게 인식하지만, 크게 보면 사실 키오스크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죠. 만약 키오스크에서 에러가 떴을 때, 핸드폰을 많이 쓰는 세대는 직관적으로 초기 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해력이 있는데, 그게 전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문해력이 없는 사람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죠. *김희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현장 이경혁 편집장: 앞서 게임계의 다양한 반응과 그 지점에서 공공미술로의 특수성 같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미술계의 반응은 좀 어떤가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미술계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한데요. 먼저 제가 예전에 <유령팔>이라는 전시를 했던 걸 많이들 아시니까, 연장선에서 봐주시는 분들은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 맥락에서 읽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임 전시를 해서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대가 (미술계로) 진입해서, 경험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과 미술이라는 콜라보가 참 쉽지 않은 영역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좀 해야 할 시기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래서 미술 쪽에 비평하시는 분들 중에선 게임의 미감과 질감이 다음 세대의 미디어 아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왜냐하면 언리얼 풍이나 유니티 풍의 미감이나 마감이 단순히 작업물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 방식이나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주잖아요. 재미있는 사례로, 최근에는 실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 것을 느끼는데요. 저는 실제 전시 장소에서 물리적인 양감과 구조를 이해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설치하는데, 어떤 작가분들은 실제 전시장에 와서도 사진을 찍은 다음, 사진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보는 것이 낫지 않나?’고 했더니, 자기는 핸드폰 스크린으로 보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다고 말하는 거죠. 이처럼 프로그램이나 기술이나 게임의 문법이 여러 변화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논의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시각적인 대상으로 볼 때 한정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보면 게임의 또 다른 정체성이자 특징인 규칙, 그리고 그 규칙과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감정의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요. 미술이 게임의 방법론을 가져간다면 사실 이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전시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영역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좋은 예시가 김희천 작가 작업인 것 같아요. 김희천 작가 작업은 앞 부분에서 유니티로 만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게임의 아바타 같은 사람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는데, 이후 실제 인물이 연기를 하는 파트가 끝나면 전시장에 구현된 35대의 CCTV가 이미지를 수집하고, 수집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변환되어서 출력되는 파트가 있거든요. 실제 게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건 이 부분이죠. 우리는 보통 앞부분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뒷부분을 게임으로 보지 않는데, 작가님에게는 이 부분이 게임인 거고, 내러티브가 있는 기존의 미디어 작품의 문법으로 해석했을 때 실시간 반영이 작품에 즉흥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전의 영상 작품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게임의 문법 쪽으로 가지를 뻗어간다면, 어차피 집에서도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전시장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웃음)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웃음) 다만, 전시장이 어떤 풍경을 만들었는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상영되는 지보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 반응,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는 것이 유효한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시장에 와서 보는 미디어 작업이 어떤 경험의 차이를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온당하게 다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사회적 주제에 대해서 모두가 드나드는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굳어질 수 있는 사회 문법에 균열을 줄 수 있어요. 그런 균열을 만드는 공간이 미술관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맞습니다. 게임 자체로는 이미 예술을 하고 있어요. 다만, 그중에 전시될 수 있는 방식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모든 게임이 미술관을 가야하는 것도 아니며,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81년생인데, 어렸을 때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여자애가 무슨 게임이야? 오락실에 가 있는 오빠나 빨리 데려와서 저녁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오빠를 데리러 가면, 오빠는 친구들이랑 ‘스트리트 파이터’ 하고 있고, 오빠가 저한테 200원 주면 테트리스하고, 보글보글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것처럼 저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접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남성적 문화라는 점에서 게임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적 경험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도 게임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런 전시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유령팔>도, 85년 이후 세대들이 포스트 미디엄을 다루고 있는 특성과 달라진 창작 환경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기획했어요. 물리적인 감각이나 스케일 감이나 물질에 대한 감각을 인지하는 세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에도 그런 맥락에서 게임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의 전시도 이런 고민들을 담는 지점에서 세대적 경험에 균열을 만들어갈 것 같습니다.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 Back 노년게이머에에게 경외와 동료애를 - 그레이게이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하여 02 GG Vol. 21. 8. 10. 나이들면 게임하기 어려운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처음 들어와 국내에서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던, 아직 프로씬은 만들어지기 전이었던 그 시절 전국구 고수로 이름을 떨치던 사람 중에는 ‘황충아리’라는 게이머가 있었다. 챔피언 ‘아리’ 장인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아리장인’ 보다 그는 ‘황충아리’로 더 이름을 떨쳤는데, 이유는 그가 노장 게이머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노장 캐릭터로 유명한 황충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지만, 그의 당시 나이는 겨우 30대 중반이었다. 일반적인 사회문화에서라면 창창한 나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시원치 않을 30대 중반이 ‘황충’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게 되는 곳이 게임공간이다. 이는 편견이나 농담이 아니라 일정 부분 사실에 가깝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 선수가 갓 제대했을 즈음 이야기한 목표가 ‘30대에도 프로게이머로 살아남겠다’ 였고,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20대 중반만 지나도 신체적인 한계를 느낀다며 은퇴를 선언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보곤 한다. 이렇게 보면 게임이라는 매체는 확실히 젊은이들의 공간인 것 같다. 그러나 또 고개를 돌려 보면 꼭 피지컬만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심시티>를 하는 데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니 심지어 신체적인 반응능력이 정말 좋아야 하는 <철권> 의 영원한 황제 ‘무릎’ 배재민 선수는 2021년 기준으로 36세고, <스트리트 파이터>로 EVO 2003에서 전설적인 명경기를 만들어냈던 우메하라 다이고는 올해 나이로 마흔을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 게이머로 활동중이다. 격투 게임과 RTS 같은 장르 안에서의 피지컬 문제를 일일이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디지털게임이 상당부분 신체적인 능력치를 요구하는 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모든 게이머가 나이가 들었다고 게임으로부터 멀어진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그레이게이머의 두 가지 의미 전자오락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게임 문화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1970년대 말로부터 계산해보면 어느새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80년대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몇 시간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꼬마 아이들은 이제 중장년의 나이가 되었고, 20대에 담배연기 자욱한 오락실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갤러그>로 시간을 때우던 청년들은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 오락실에 앉아있던 20세 청년인 1960년생은 올해부터 60세를 넘기며 인구통계학적으로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반세기라는 시간의 흐름은 한동안 우리에게 일종의 고정관념이었던 어떤 부분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렸다. 노년 세대라면 그저 ‘하여간 요즘 것들은 게임 같은거나 하고’라고만 영원히 말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테트리스>와 <팩맨>, <갤러그>를 즐기던 오락실 세대가 노년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장년을 생각한다면 이 변화는 좀더 성큼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가 출시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빌드오더를 가르치는 부모와, 과거의 추억으로 <리니지>에서 혈맹 뛰던 이야기를 나누는 4-50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보는 시대를 맞았다. 그레이게이머greygamer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그렇게 게임과 함께 나이를 먹어 온, 좀더 경의를 붙여 표현하자면 ‘인류 최초의 디지털게임 세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세대를 담는다. 초창기 디지털게임의 역사를 문헌이 아니라 자신의 플레이로 겪은 노년 세대의 등장은 노년층을 이른바 ‘겜알못’으로 부를 수 있는 시기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단서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라는 구분이 더 이상 특정 연령, 특정 세대만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라 전연령대에 걸친 보편적인 경험이면서도 동시에 시대별로 그 양상을 매우 뚜렷한 차이로 갖게 되는 어떤 문화 전반을 통한 구분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흐름이다. 그레이게이머라는 말이 가진 첫 번째 의미가 이른바 레트로 세대를 가리키는 과거 경험을 향했다면, 두 번째 의미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모바일 시대가 열어낸 새로운 환경으로부터 보편화를 시작한 게임저변의 확장으로부터 만들어진 또다른 변화를 향한다. 지하철 안을 둘러보면 이제 쉽게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하고 있는 노년층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게임하는 노년의 배경은 반드시 유년기의 게임경험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뒤늦게 잡아보게 된, 이제는 시대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으로부터 손쉬운 게임으로의 접근성을 얻게 된 이들 또한 게이머의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두 번째 의미로서의 그레이게이머가 출현한다.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게임문화연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직접 심층인터뷰를 통해 만난 노년층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노년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정착하기 시작한 디지털게임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 바 있었다. 은퇴한 노년 여성이 주시청자를 이루는 평일 저녁의 지상파 텔레비전 일일연속극 시청은 이제 게임플레이와 섞이기 시작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TV는 귀로만 들으며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퍼즐 게임을 즐기곤 했다. 어차피 드라마의 진행은 큰 줄기를 벗어나지 않으니 귀로 상황만 들으며 게임에 집중하다가, 드라마에서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대부분의 드라마는 이런 순간에 시청자로 하여금 집중을 유도하기 위해 별도의 음악을 깔거나 배우의 대사톤이 높아지는 등의 포인트를 만들곤 한다) 비로소 눈을 스마트폰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레이게이머의 존재는 그래서 유년기의 경험을 가진 1세대 게이머로서, 동시대의 게이머로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유의미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존재는 그러나 현재의 게임담론 하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게이머들보다 더 치열하게 게임했을 그 세대는 정말 이제는 게임과 담쌓고 지내는 것일까?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니 당연히 게임을 모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제대로 된 판단인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게이머라는 집단을 너무 좁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년 게이밍에 대한 이해는 아직까지 부족하다 노년 게이머의 양적, 질적 증대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아직까지 잘 나타나지 않는 편이지만, 서구권에서는 2010년대부터 게이머 노년화에 관한 주목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게임은 젊은 사람들만의 매체라는, 그래서 노년층은 아예 거론되지 않는 고정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연구(Facer & Whitton, 2010), 실제로 늘어나고 있는 노년 게이머에 비해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 산업과 제도의 변화는 크게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Quandt & Grueninger, 2009)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또한 결국 서구권에서도 노년 게이머가 잘 조명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서구권 모두 상황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일부 연구들은 노년 게이밍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과도 유사한데, 이를테면 노년의 게임하는 이유를 치매예방과 같은 신체노화에 대한 기능적 대안으로만 바라보거나(Schutter & Brown), 자녀세대와의 교감만을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고 보거나(Pearce, Lee) 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들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이는 단지 비노년이 노년의 게이밍을 ‘두뇌 트레이닝’의 일환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년층 스스로도 ‘늙지 않으려면 고스톱이라도 쳐야지’라고 마음먹는 모습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런 기능주의적인 접근만이 실제로 노년층의 게임하는 이유를 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한국에서도 노년 게이밍에 대한 접근은 주로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치매예방을 위한 게임개발과 플레이,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게임과 같은 방식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게이머라는 큰 범주로부터 노년 게이머를 매우 타자화된 대상으로 분리시켜버리는 시선으로 굳어질 수 있는 우려를 내포한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의 반응속도를 낼 수 없어 <다크소울>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가 여전히 <저니>를 하고 있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클리어하고 감상에 젖어 있다면, 혹은 과거 동네 오락실에서 <갤러그> 하이스코어 1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굳이 우리는 특정 기능의 향상을 위해서만 게임을 만지는 사람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경의와 동료애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노년 게이머에의 이해를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이라는 매체는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수용양식을 넘어 반응이라는 행위를 요구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분명한 접근에의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다. 2012년에 <리그 오브 레전드>를 곧잘 하던 나는 이제는 방송경기의 리플레이를 봐도 한타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신체나이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런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임이 반드시 높은 반사신경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의미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이머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음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아니 다른 의미로라면 오히려 과거 레트로 게임 시절에는 동네 오락실을 휘어잡았을지도 모를, 왕년의 용사들에 대한 경의를 가져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플레이를 통해 완성되는 디지털게임의 경험은 단지 특정한 프로그램을 보존한다고 해서 후대에 그 경험이 온전하게 복원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여러 고전게임의 리마스터를 통해 겪은 바 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과 함께 그들의 게임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시절의 게임과 플레이어에 일련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 ‘치매예방 게임’을 하는 세대로 바라보는 것보다 오히려 노년 게이머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인종과 성별로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통해 누군가를 대상화하려는 어떤 흐름을 넘어서서 게이머로서의 동료애를 품을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레이게이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노년층 게이머에 대한 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될 변화들을 미리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게이머라면 함께 플레이할 노년 게이머를 이해해야 하고, 게임사라면 늘어나는 노년 게이머들에게 필요한 게임과 인터페이스를 고민해야 하며, 정부와 공공단체라면 변화하는 게임문화 향유층에 필요한 제도와 인프라를 생각해야 할 시기다. 최초의 레트로 게임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일 것이다. 디지털게임이 본격적으로 대중문화의 범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이 매체가 보편적인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 보편성에는 인종과 젠더, 계급과 장애유무 뿐 아니라 연령대라는 요소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보편 대중문화로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년 게이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 기네스북 공인 세계 최고령 비디오게임 유튜버 하마코 모리. 2019년 89세로 등재되었다. https://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457124-oldest-videogames-youtuber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19

    GG Vol. 19 호러는 디지털게임에서 무엇인가? 게임에서의 호러는 다른 매체의 호러와는 무엇이 같고 다른가? 게임이라는 놀이매체를 가지고 공포감을 다루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Read More Frights, Fears, and Fallout: Layers of Horror in Popular Gaming In my personal gaming history I have two distinct memories of fear. The first time I was truly scared while playing a game was during the first Resident Evil in what has become a notorious scene from the game. Though at the time Resident Evil felt more like a slower action game than a horror game, there was one key moment when the player walks down a hallway when suddenly one dog, then another bursts through the windows from the outside causing fright, disorientation, and panic. This is an example of a pretty standard jump scare in games (and other media), and though it did frighten me at that moment, I didn’t carry any greater fear of those dogs and what they represented beyond a slightly heightened anxiety while I walked the halls of Spencer Mansion. Read More Is this Lies of K?: “Lies of P” game discourse in the context of the South Korean game industry’s longing for a stand-alone game title “Lies of P” (Neowiz, 2023) takes place in Krat, a fictional city inspired by the Belle Époque period in Europe. One of the game’s NPCs (non-player characters), Eugénie, is portrayed as an outsider from a distant country east of Krat. She claims to come from the so-called ‘country of the morning,’ with a visual character design that resembles East Asian ethnic groups. Perhaps this character’s story was inspired by the Joseon Dynasty, a kingdom that existed on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14th to 19th century, which was typified as the “Land of Morning Calm” in the West around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loose translation of the country’s name in Chinese characters (朝鮮). Read More Playing with Shivering Bodies: Expectation, Exploration, Perception The dark hallway I walk through seems to be deserted. I can only hear my own steps and the eerie soundscape of the cranking metal pipes surrounding me, and can barely see what lays beyond the light of my flashlight. I’m afraid, as I don’t know if something is waiting in the shadows for me. As I enter the next room, I hear heavy breathing and as the light catches a mutilated body, in between the dead and living, I feel my stomach contract from disgust. Read More [Editor's View] 생존본능에서 장르에 이르기까지의 공포 공포는 흔히 생존본능에서 만들어졌다고들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보고 무서움을 느낍니다. 덕분에 살아남아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킨 인류는 실존하는 위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분리해내기에 이르렀고, 많은 예술을 통해 분리된 감정은 호러라는 장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Read More [논문세미나] Horror Video Games and the “Active-Passive” Debate 호러 비디오 게임과 “능-수동” 토론 /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 에이단 로이즐러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위의 작품들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루돌로지적 행위성을 강조하는 이분법으로는 위 작품들이 발휘하는 특유의 효과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모든 호러 게임을 루돌로지적 상호작용성의 원리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Read More [인터뷰] AI로 새로운 게임성을 만든다는 것: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의 이가빈 PD,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의 한규선 PD 크래프톤의 스튜디오 중 하나인 렐루게임즈는 딥러닝 기술을 게임과 접목시켜 새로운 경험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여러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음성 역할 시뮬레이터와 프리폼 채팅 어드벤처라는 독특한 게임 장르를 만들어냈다. 이번 호에서는 평단과 게임사의 관점뿐 아니라, 유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마법소녀 카와이 러블리 즈큥도큥 바큥부큥 루루핑>(이하<즈큥도큥>)의 이가빈 PD와 <언커버 더 스모킹 건>(이하<스모킹건>)의 한규선 PD를 만나, AI 기술의 가능성과 현시점에서의 한계를 짚어보고, 새로운 게임성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Read More [인터뷰] TRPG로 미술하기: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제작자 인터뷰 지난 6월과 7월, 전시장 ‘팩션’에서는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라는 게임의 형식과 관객 참여형 예술을 결합한 전시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 노스탤지어의 벌레들>이 열렸다. 전시장을 활용해 약 한시간 반 동안 진행되는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TRPG 게임 마스터가 되고 게임의 참여자인 관객들은 재난이 닥친 고향에 돌아왔다는 설정의 캐릭터가 되어 함께 이야기를 구성한다. Read More ‘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Read More 공포와 액션의 사이에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공포 게임의 공포는 반드시 옅어지고, 무뎌지고, 희석되고, 탈각된다. 바이오하자드/레지던트 이블이 9개의 넘버링과 3개의 외전과 3개의 리메이크, 그 외 다수의 서브 작품을 진행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태생적 모순을 피하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7편의 방향성을 2~4편의 리메이크작과 8편 또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긍정하고 활용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Read More 두려움, 공포 그리고 폴아웃: 게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공포의 양상 내가 지금까지 게임을 플레이해오면서 기억하고 있는 공포의 유형으로는 2가지가 있다. 게임을 하면서 처음으로 겁을 먹은 것은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의 악명 높은 장면을 플레이했을 때였다. 당시 <레지던트 이블>은 호러 게임이라기 보다는 속도가 느린 액션 게임쪽에 가까웠는데, 게임 내에서 복도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뒤이어 또 다른 한 마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려움과 혼란, 공포를 느꼈다. Read More 떨리는 몸으로 플레이하기: 기대, 탐험, 그리고 인식 텅 비어있는 것 같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간다. 내 발소리와 금속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끼익거리는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깨뜨린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너머의 어둠 속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음 방에 들어서자,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오고, 훼손된 사람의 신체가 불빛에 드러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그 모습에 나는 속이 메슥거린다. Read More 비디오게임과 기이한 유령들의 세계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다들 이것이 꽤나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령은 수많은 비디오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시리즈의 부끄부끄부터 「F.E.A.R.」 시리즈의 알마까지, 비디오게임에는 다양한 아이코닉한 유령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Read More 인간인듯 인간아닌 인간같은 너: 좀비의 과거와 오늘 좀비물은는 비단 디지털게임에서만 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앞선 매체들인 영화나 소설 등에서도 좀비는 매력적인 소재로 특히 호러물에서 자주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도 게임에서의 좀비 또한 앞선 매체들의 영향 아래 놓였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게임에 등장하는 좀비의 의미는 다른 매체의 의미를 포괄하면서도 동시에 게임 특유의 요소들로 인해 조금 더 두드러진다. 이 글에서는 좀비에 관한 긴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하고, 디지털게임에서의 좀비라는 보다 좁은 주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Read More 코스믹 호러의 게임적 변용 이토 준지풍의 그림체와 크툴루 세계관이 결합된 <공포의 세계>의 장점 역시 동일하다. 그로테스크하고 이질적으로 변화한 마을 구성원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경험이야말로 등대에 강림할 고대신보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일상의 궤도에서 이상 징후와 균열을 발견할 때 불안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Read More 플레이할 결심: 공포 게임을 못_잘_안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적 자기반성을 토대로 나는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포 게임이 무섭기 때문이다. 무서워하라고 만든 게임을 무서워해서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긴 한데 뭔가 아쉽긴 아쉽다. 바로 내가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공포 게임에도 명작이 참 많다. Read More 호러를 즐기는 보통의 방식 사실 호러 게임은 꽤 마이너한 장르에 속한다. 물론 좀비물의 성격을 차용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처럼 장르적 요소를 가져오거나,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처럼 본격적으로 호러 게임을 표방하는 AAA 게임이 없던 것은 아니다. Read Mor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