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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의 거짓’ : <P의 거짓>으로 바라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을 향한 갈망

    < Back ‘K-의 거짓’ : 으로 바라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을 향한 갈망 15 GG Vol. 23. 12. 10. “난 바다 건너 아침의 나라 출신이야. 어떤 곳인지는 묻지 마. 그곳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은 벨 에포크 시기의 가상 도시 크라트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등장하는 NPC 유제니는 거의 유일한 동양인 소녀다. 유제니는 그의 고향을 ‘아침의 나라’라고 직접 밝힌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줄곧 서구에 해설되던 1800년대의 조선을 인용하는 셈이다. 기술자로서의 열정을 감추지 않는 유제니는 작중에서 주인공의 장비를 강화하고 수리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주인공이 여정을 진행하며 크라트라는 세계의 상을 완성해가는 동안, 유제니는 그 한 축이 된다. 그리하여 시계태엽과 기계장치로 맞물린 크라트의 테크놀로지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동시에 아침의 나라는 아득한 온정의 저편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설정은 콘솔 게임 세계로의 진출을 열망하며 발현된 국내의 이야기 구도를 유비적으로 환기한다. , 자랑스러운 ‘국산 트리플 A’ 은 국내 게임사인 네오위즈 산하의 라운드8 스튜디오에서 개발되었다. 온라인이 아닌 싱글 플레이 게임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스탠드 얼론 게임으로 분류된다. 장르는 일본의 개발사 프롬 소프트웨어에서 유래한 소울라이크다. 이는 한정된 자원을 활용해 전투를 치르고, 맵을 탐색하고 보스와 전투를 벌이는 것을 주축으로 한다. 일반적인 한국 게임이 ‘리니지라이크’로 요약되는 온라인과 모바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소울라이크 팬이라면 만족"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 은 ‘국산 트리플 A 게임’으로 자부심을 담아 호명된다. 국산이라는 호명 뒤로는 그간 한국 게임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 된다. 2022년 기준으로 게임 이용자가 74.4%에 달할 정도로 게임을 향유하는 사람은 많고 1) , 문화예술진흥법의 대상으로 편성되었지만 정작 문화로서의 위상을 뒷받침할 만한 자국 게임이 부족하다는 절박함이 크게 자리한다. 수용자의 불만은 생산자들의 요구와도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수익성 등의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했다면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최지원 디렉터의 인터뷰 멘트 2) 는 자신을 개발자와 수용자 모두를 아우르는 재미-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의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와중에 한국 게임계가 주력하던 온라인 분야에서도 중국의 선두가 이어지며 위기의식이 짙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뉴스 빅데이터 수집 및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에서 을 서치해보면 ‘MMORPG’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과 같이 반대 항으로 설정된 장르가 함께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출시된 은 한국 디지털 게임의 역사에서 특수한 좌표를 설정한 작품으로 위치 지어진다. 우선 콘솔 게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도 성공적인 판매를 거두었다는 측면이 강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10월 17일 기준으로 은 글로벌 누적 판매 100만 장을 달성함으로써 상업성을 입증했다. 판매의 90% 이상이 해외 시장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침체된 한국 게임 시장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한 것으로 기대되기도 한다. 특히나 코로나 특수가 끝나며 전체 게임 이용자의 비율이 현저히 줄어든 시점이다 3) . 콘솔 게임은 드물게 이용률 증가를 경험한 영역으로 부각되었다. 이에 의 성공 경험에 비추어 포화된 모바일 게임 시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가 제시되기도 한다. 4) 그러는 한편, 다른 측면에서는 작품성에 관한 논의가 검토된다. 일반적으로 게임전문지가 기존의 소울라이크 게임과 문법을 인용하며 게임의 작품성을 평가한다. 즉 이 이미 형성된 문법으로서의 소울라이크를 얼마나 충실히 좇는지가 주로 서술된다. 그 안에서 게임의 독자성을 부각하는 요소로는 “최적화”와 “그래픽”이 꼽힌다 5) . “세계적인 개발사들도 PC 구동 환경 마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시대에, 독보적으로 완벽한 최적화를 구현해 놀라움을 샀다” 6) , “시원한 타격감, 독특한 세계관, 사실적인 그래픽 등도 호평을 받았다”와 같은 기술이 대표적이다. 7) <폭스 레인저>와 으로 보는 스탠드 얼론 게임의 과거와 현재 이처럼 을 둘러싼 기사들을 읽다 보면, 이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지, 그와 관련해 당시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불쑥 궁금증이 든다. 한국 게임의 역사를 죽 훑었을 때, 스탠드 얼론 패키지 게임의 시원은 1992년에 발매된 <폭스 레인저>에 닿는다. 이 작품은 소프트 액션 사에서 개발되었다.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발매된 최초의 PC 패키지 게임으로 거론된다. 소프트 액션은 “PC 통신망을 통해 한 스테이지만 플레이할 수 있는 공개용 버전을 배포하는 마케팅 기법을 구사”하고, “‘고급 기술’이 구현되었다는 것에 맞춰” 게임을 홍보했다 8) . 이와 같은 지점은 정식 출시 이전에 데모판을 공개함으로써 플레이어를 유치하고 게임의 최적화 수준을 주요한 홍보 지점으로 세운 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당시의 언론 보도는 외국산 게임에 잠식된 한국을 위기로 진단한다. “일본·미국산이 90%이상을 차지하는 전자게임시장”이라는 문구를 통해 게임 선진국으로 어떤 나라가 상정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은 게임의 개발과 게임 향유 문화의 측면에서 모범상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는 사뭇 비장하게 강조된다. 수출주도 경제를 추구하는 기조, 그리고 다가오는 정보화 시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필요는 인기 작품 <폭스 레인저>를 개발한 남상규를 “컴퓨터 산업 전사”로 일컫기도 한다 9) . 인터뷰에서 그는 “한글도 모르는 어린이들이 일본 가나 글자를 독해하며 게임에 몰두하는 현실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바라보며 “어떤 소프트웨어보다도 게임 소프트웨어의 국적을 찾는 일이 급하다”고 모종의 사명감을 드러낸다 10) . 이때 게임에서 언어는 ‘우리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남상규의 인터뷰를 염두에 두고서 2023년에 발매된 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이 게임이 별도의 한국어 음성 없이 영어만 녹음한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게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작중 인물인 소피아는 주인공에게 닿길 바라며 말을 건네고, 그리하여 “Can you hear me?”는 그를 어둠으로부터 깨워낸다. 이는 이 글로벌 게임 체인에 깊이 가닿고자 하는 열망과 겹쳐 보인다. 실제로 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파트너십을 체결하여 게임 패스에 입점했으며, 초국적 기업이 견인하는 거대 콘솔 플랫폼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서 경합하는 접두사 ‘K-’가 구현된다. 이 접두사는 한국을 환기하면서도 “국가 지리적 범주를 넘어” “원산지가 외국인 콘텐츠를 전유한 사례”로서 복잡한 의미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11) . 즉 은 소울라이크라는 같은 장르를 즐겨 온 전 세계 게이머에게 호소한다. 그러는 동시에 국내의 게이머들에게는 양질의 게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다. 그 결과 게임 문화장에서 선진국으로 간주해온 국가와 상호 동등한 주체로 서고 싶다는 국내 게이머들의 기대가 충족된다. 이 같은 점은 을 리뷰하는 매체들에서 드러난다. 독특하게도 몇몇 기사들은 이전에 소울라이크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이 없으며 이 첫 소울라이크 게임이라는 점을 밝히고 시작한다. “처음 플레이해보는 기자에게도 P의 거짓은 그야말로 ‘신세계’”와 같은 문장에서 “소울라이크 초심자가 즐겨본 P의 거짓은 ‘지인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입문용 소울라이크 타이틀’”로 이어지는 흐름은 사뭇 모순적으로도 들린다 12) . 그러나 여기서 발생하는 결절점을 ‘초대 받음’의 감각으로 읽는다면 어떨까. 은 소울라이크로 상정된 글로벌 콘솔 게임 시장과 한국인 게이머 사이에 놓인 매개물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게임’에 가닿고자 하는 열망 소울라이크 게임에 ‘초대 받음’으로써 느끼는 기대나 흥분이 작품이 제공하는 경험에서 비된다. 한편으로 ‘초대’는 안과 밖의 구분을 상정한다. 그렇다면 어디가 글로벌 콘솔 게임의 내부고 외부일까? 따라서 소울라이크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경험한 긍정적인 기분이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해진다. 미아 콘살보는 <애니팡>과 같은 캐주얼한 소셜 게임이 유행하던 시기, 기존의 게임 개발자 및 커뮤니티가 이를 두고서 ‘진정한 게임’이 아니라며 적대하던 현상에 주목한다. 이에 ‘진정한 게임’과 ‘그렇지 못한 게임’을 가르는 기준이 어떻게 활성화되는지 제시한다. 첫 번째는 과거에 어떤 ‘적통’ 게임을 만들었는지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게임의 메커닉이다. 손가락 터치 몇 번 만으로 간편하게 수행되는 모바일 게임은 키보드·마우스 및 게임 패드와 같이 복잡하고 정교한 조작으로 구동하는 게임에 비해 일견 하찮게 느껴진다. 그 결과 모바일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닿게 된다. 이러한 기준들을 적용하여 만들어지는 상상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진정한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을 구분하는 룰을 영속화한다. 그러한 열망은 왜 한국에서 게임과 친숙한 이들이 에 환호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3) . 물론 첫 번째 기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의 위상은 다소 애매해진다. 한국 게임사는 일반적으로 온라인 게임을 중심으로 성장을 구가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MMORPG 중심으로의 전환을 거치며 “아케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 위주의 세계 게임 시장의 표준적인 흐름과 뚜렷이 구별되며 철저하게 온라인 게임에 편향된 성장”을 이뤘다. 을 개발한 네오위즈의 경우 <맞고>와 같이 소셜 카지노게임이 매출이 가장 높은 비중으로 실적을 견인해왔다. 즉 ‘진정한 게임’과 거리가 먼 게임을 서비스 해 왔던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다시금 콘솔 게임의 주축이 되고 있다. 그들이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어 게임 문화를 제고하기를 바라는 갈망은 “게임 강국 한국에서는 왜 GOTY수상작이 안 나오는 걸까?”와 같은 IT 기사의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유추된다 14) . ‘게임 강국’이라는 말에서 전제되는 것은 온라인과 모바일을 바탕으로 수익성을 매끄럽게 구현한 한국의 거대 게임 산업 맥락이다. 물론 배틀 그라운드가 고티를 탄 사례가 있지만, 이 기사에서 비교항으로 설정되어 거론되는 작품은 ‘위쳐 시리즈’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와 같은 스탠드 얼론 게임이다. 그 같은 논리 설정은 온라인이 ‘진정한 게임’과 일정 부분의 거리가 있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을 ‘진정한 게임’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항은 소울라이크라는 장르에서 강하게 유래한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어가 성장한다’는 구현함으로써 직관적인 호소력을 지닌다. 이는 많은 모바일 게임이 간단한 터치로 수행되며, 성장의 감각이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에 축적되는 것과 대비된다. 플레이어의 성장은 그 신체나 인지에 귀속됨으로써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 복잡하고 정교한 메커닉을 신체적으로 습득하고 구현한다는 ‘진정한 게이머’ 판타지가 충족된다. 여태껏 게임 담론의 역사는 크게 규제 담론과 산업 담론으로 요약되었다. 중독의 대상이자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해 오락물로서의 게임, 그리고 해외 수출을 견인하는 자랑스러운 국력으로서의 상품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게임 중독 담론에 위기감을 느낀 게임사들이 ‘한국 게임의 사망’을 부르짖으며 ‘게임은 문화’라는 선언을 방어적으로 되풀이하기도 했다. “오래되고 어색한 슬로건” 15) 이지만 동시에 문화가 품은 넓은 의미에 기대어 역량을 발굴할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게임이용의 문화사를 발굴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이라는 이례적인 작품의 사례는 그 플레이 경험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인식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으로는 대항 담론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준점에 부합함과 부합하지 않음으로 나뉘며 게이머 커뮤니티의 ‘진정성’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1) 한국콘텐츠진흥원, 「2022년 전체 게임 이용률」, 『2022 대한민국게임백서』, 2023, 6쪽. 2) 이시영, 네오위즈 'P의 거짓', "기괴하지만 아름다워야한다", 고집스러운 철학 녹여내다, 2021.11.30.등록, 게임조선,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2855993&memberNo=12478036 3) 한국콘텐츠진흥원, 2023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2023.10.19. 4) 조충희, 네오위즈 'P의 거짓' 성공, 내년 쏟아지는 콘솔 게임에 대한 기대와 우려, 2023.10.22. 비즈니스 포스트, https://www.businesspost.co.kr/BP?command=article_view&num=330565 5) 김승주, [리뷰] "진실 혹은 거짓" P의 거짓은 재미있나요?, 디스이즈게임, 2023.09.14.등록.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16/?n=176290#:~:text=%EC%B4%9D%ED%8F%89%ED%95%98%EC%9E%90%EB%A9%B4%20%3CP%EC%9D%98%20%EA%B1%B0%EC%A7%93,%EC%9D%98%20%EA%B1%B0%EC%A7%93%3E%EC%9D%80%20%EA%B2%B8%EC%86%90%ED%95%A9%EB%8B%88%EB%8B%A4 . 6) 길용찬, 프롬도 이건 배워야 한다, 'P의 거짓' 업계 최장점 2가지, 2023.10.19.등록, 게임플, https://www.gamepl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7420 7) 피노키오 마법 통했다...네오위즈 ‘P의 거짓’ 콘솔 3관왕 비결은, 2022.08.31.등록, 뉴시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20830_0001996358 8) 남영. "1990년대 한국 PC 게임 산업: PC 게임 개발자들의 도전과 응전." 한국과학사학회지 39, no. 1 (2017): 33-63. 9) 박종성, 新世代(신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3) SW의 승부사들, 1993.04.16.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0) 김명환, "우리말로 게임" 국산개발 활기, 1993.01.15. 조선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1) 박소정. "확장하고 경합하는 K :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 본 K 담론에 대한 분석." 한국언론학보 66, no. 4 (2022): 146-147, 10.20879/kjjcs.2022.66.4.005 12) 차종관, 못 깨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요…‘P의 거짓’ 해봤더니 2023.09.27.등록, 쿠키뉴스,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309260243 13) Mia Consalvo·Christopher A. Paul, "Facebook Games Were Evil", Real Games: What's Legitimate and What's Not in Contemporary Videogames, 2019:The MIT Press. 14) 김혜지, 게임 강국 한국에서는 왜 GOTY수상작이 안 나오는 걸까?, 2020.05.15.등록, 앱스토리, https://news.appstory.co.kr/report13261 15) 최태섭,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한겨레출판: 2021, 18쪽.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

  •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 Back 한국 게임비평의 궤적과 방향 01 GG Vol. 21. 6. 10. 1. 세계와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 세계 최초의 게임잡지는 1981년 영국에서 발간된 <컴퓨터와 비디오게임(Computer & Video Games: CVG)>이다. 2004년부터 온라인으로만 발행되다, 2015년에는 온라인사이트까지 폐쇄하고, ( www.gamesradar.com )로 리디렉션됐다. Gamesradar+는 여전히 기대작이나 신작 리뷰, 업계동향뿐 아니라 알찬 내용의 작품비평을 제공해 주고 있다. * 〈CVG〉(왼쪽)와 〈Gamesradar+〉(오른쪽) 한국에서 게임잡지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990년대 초반이다. 1980년대 PC 보급시기와 맞물려 닌텐도(Nintendo)의 ‘패미콤(Famicom)’을 국산화한 ‘현대 컴보이’가 소개됐다. 이후 세가(Sega)의 16비트 ‘메가 드라이브(Mega Drive)’를 삼성전자가 국내버전으로 바꾼 ‘수퍼 겜보이’가 발매되고, 콘솔게임에 대한 관심 급증이 게임전문잡지의 탄생을 추동했다. * <게임월드> 창간호 한국 최초의 게임잡지는 1990년 8월에 발간된 <게임월드>로 알려져 있다(조기현, 2012, 58쪽). 이어 <게임뉴스>(1991), <겜통>(1992), <게임챔프>(1992), <게임정보>(1993) 등이 발간되면서 게임잡지들의 각축전이 시작됐다. 당시 플레이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보는 신작소개나 발매일정, 공략이었지만, 게임잡지는 게임의 긍정적 면모나 문화적 성격을 부각하는 기사를 싣는 등 게임 인식전환에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을 분석할 필자를 모집해 그들의 글을 싣거나(1992년 <게임월드>, 1993년 <게임정보> 등), 미국이나 일본 게임저널의 기사를 번역하거나(1994년 <게임채널> 등), 게임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글들을 연재(1996년 박병호의 <경향신문> 연재, 1999년 박상우의 <시네21> 연재 등)하는 등, 유사비평 혹은 비평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이뤄진 것 역시 특기할 부분이다. 2. 번들 CD에 집중했던 PC게임 잡지들 1990년대 중반부터 PC게임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대부분의 게임잡지들도 PC게임에 집중했다. 당시 잡지들의 대표적 특징으로 번들(bundle) CD 제공을 들 수 있다. 초기 번들 CD는 시류지난 게임의 재고털이를 위해 제공된 것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호응을 얻고 산업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게임잡지의 판매부수를 결정하는 주된 변수로 자리매김했다. 경쟁심화 속에서 잡지사들은 고전 명작게임 위주로 제공하던 번들 CD에 조금씩 최신작을 담게 됐다. 1980년대 게임잡지들이 차별화된 게임정보와 공략을 내세워 고정 독자층을 확보·유지했다면, 1990년대 게임잡지들은 번들 CD로 독자층을 나눠 먹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신작을 유치하기 위한 잡지사들의 과도한 경쟁은 번들 CD 구매비용의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잡지사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후 PC게임 복사가 확산되고, 네트워크 환경발달과 함께 온라인게임이 태동하면서 PC게임 시장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동시에 게임잡지에도 시련이 찾아왔다(김득렬, 2012. 1. 4.). 3.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종이잡지에서 웹진으로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10년간 이어온 게임잡지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비디오게임 및 PC게임 산업과 함께 쇠퇴했다. 게임잡지는 힘을 잃어 갔지만 게임 산업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게 되는데, 온라인게임의 인기가 그것이다. 게임잡지들도 이에 편승해 온라인 기반 게임관련 잡지들로 변모해 갔다. 그러나 전문적인 게임비평보다는 상대적으로 다소 가벼운 비평, 게임 자체와 공략에 대한 정보제공, 부록 중심이었던 게임잡지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자리를 내주면서 대부분 폐간됐다. 인터넷의 발달은 기존 출판잡지에 좌절과 시련을 부여했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오히려 정보 공유와 전달을 가속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게임정보를 걸러내 원하는 것만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보다 전문적인 접근에 대한 수요도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이는 방대한 게임정보를 체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채널을 찾는 계기로 작용했고, 게임웹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김득렬, 2012. 1. 4). 2021년 6월 기준 오프라인을 통해 발간되고 있는 게임전문지로는 <게이머즈(Gamer’z)>가 유일하다. 물론 온라인상으로는 <인벤>, <게임메카>, <디스이즈게임>, <포모스>, <게임조선>, <게임포커스>, <데일리게임>, <게임어바웃>, <게임동아>, <경향게임스>, <더게임스> 등 많은 게임웹진이 존재한다. 하지만 <게이머즈>뿐 아니라 다른 웹진들도 여전히 전문적인 비평보다는 리뷰와 공략 중심의 정보제공에 치중하고 있다. 4. 게임비평 확산을 위한 여러 시도들 오히려 게임의 안과 밖을 보다 꼼꼼히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게임전문지가 아닌 다른 공간을 통해 더 활발히 이뤄져 왔다. 물론 그조차도 전문성과 안정성을 가진 것이라 보긴 어렵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시도가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문, 영화 잡지나 기타 대중문화 잡지, 컴퓨터 잡지 등이 게임비평에 종종 지면을 할애하긴 했지만, 단편적인 기획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민간재단인 게임문화재단에서 2012년 3월부터 월간지 <게임컬처(Game Culture)>를 발간, 업계나 학계 등에서 활동하는 편집진들을 활용해 양질의 게임 관련기사와 비평을 게재했으나, 201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수순을 밟았다. 한편, 게임비평의 궤적을 살핌에 있어 ‘게임비평공모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게임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관심을 증대시켜 문화적·학술적 가치를 제고한다는 취지 아래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 NHN(주), 더게임스가 공동 주관하여 2008년부터 ‘게임비평상’을 제정했다. 전경란(2013)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게임비평공모전에서 가작 이상의 상을 받은 30편의 비평들을 분석, 비평들이 게임의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 영역 및 접근방식은 제한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게임의 내용과 형식적 특징, 즉 게임 플레이에서부터 게임 구조, 게임 세계 등을 중심으로 고루 비평을 행한 반면, 기존의 문화 장르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한 탓에 제반 게임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공모전은 아마추어 게임비평가들을 발굴하고 게임비평 저변을 확대한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2012년 제5회를 끝으로 더 이상 개최되지 않고 있다. * 제1회 게임 비평상 공모전 포스터 비평가들의 단행본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박상우의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2000)>과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2005)>, 이상우의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2012)>, 이경혁의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들의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2017)>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경유해 게임이 우리 일상과 사회·문화에서 갖는 의미를 비교적 새롭게, 다각도로 포착했다는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상호참조 없이 본격 비평서임을 자처하며 게임인문학에 대한 다분히 기초적인 논의(특히, 내러톨로지나 루돌로지와의 연관 속에서)를 유사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 이후 보다 발전적이면서 지속적인 작업으로 연결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 (왼쪽부터) 박상우, 이상우, 이경혁, 인문합협동조합의 게임비평서 현재진행형이라 아직 그 성과를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게임비평에 대한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있다. 이경혁은 2014년 11월 미디어 비평지 <미디어스>에 게임비평 ‘Play the Game’의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온라인신문, 게임사 블로그, 잡지 그리고 <국방일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고 있다. 개별 게임 텍스트에서부터 한국 게임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과 e스포츠(e-Sports), 게임산업, 플레이/어, 게임을 둘러싼 부정적인 담론, 그리고 게임 텍스트에 담긴 사회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논의범위 또한 넓다. 2021년 6월 기준 비슷하게 활동하는 비평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보일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5. 게임비평의 문제점 한국 게임비평의 외재적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게임에 대한 강한 규제와 부정적 담론 확산으로 산업이 위축됨에 따라 게임비평이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도 척박해졌다. 강한 규제와 부정담론은 게임을 ‘나쁜 것’,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둘째, 게임전문지가 다수 존재함에도 전문적인 비평을 행하고 있지 못하다. 해외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영국의 ( www.pcgamer.com )나 미국의 <컴퓨터 게이밍 월드(Computer Gaming World)>( computergamingworld.com )과 같은 게임전문지는 단순한 리뷰나 공략보다 심층적인 정보나 비평을 제공한다. 게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뤄지는 웹진 <코타쿠(Kotaku, kotaku.com )>, 개발자와 연구자들이 게임 제작취지와 게임에 대한 비평, 연구결과 등을 게재하는 <가마수트라(gamasutra)>( www.gamasutra.com )등도 전문적인 게임비평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물론 국내외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플레이어의 성향, 게임에 대한 비평토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게임전문지들이 보이는 리뷰나 공략에의 지나친 집중은 전문지들이 주된 광고주인 게임 퍼블리셔나 게임사들의 홍보매체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게 만든다. 내재적 측면의 문제점으로는 게임만이 가진 텍스트적 특징으로 인한 비평의 어려움을 꼽을 수 있다. 기호와 서사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장르와 유사한 것 같지만, 게임은 독특한 향유구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향유구조가 텍스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임은 사전에 모두 제작된 상태로 향유자에게 제공되는 다른 문화장르와 달리 플레이어가 그것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텍스트인 채로 남는다. 플레이어는 불완전한 게임 텍스트에 참여해 게임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이며, 플레이어의 참여는 곧 완전한 텍스트로서의 게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필요조건이다. 때문에 게임에서는 창작주체와 수용주체의 구분이 애매해진다. 게임 텍스트는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이 단순히 알고리즘의 구현물이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스토리 및 허구적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서사 환경을 지님을 의미한다(강신규, 2016). 따라서 게임비평은 텍스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어떤 경험이 제공되는지, 경험이 이뤄지고 나면 다음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등까지를 논의 범위에 포함(김연희, 2012. 12. 12)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은 플랫폼별·장르별로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비평하는 데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이 요구된다. 다른 문화장르들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게임은 ‘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전문가나 수준급의 플레이어라 해도 접해 보지 않은 게임을 비평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임은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가진 향유자들이 너무 많은 문화 장르이기도 하다. 게임을 하려면 대체로 같이 즐길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크게는 장르나 플랫폼, 작게는 개별 타이틀에 따라 향유 공동체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험 제공’이라는 특성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보를 공유하고 평가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요컨대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사람의 플레이나 관련 정보를 ‘접하고’ 그것을 다시 게임‘하는’ 데 활용한다(강신규·채희상, 2011). 직접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정보와 경험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정보와 경험 바깥에 위치하거나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지 못한 게임비평 주체가 그것을 온전히 읽어 내기 어려운 이유다. 6. 게임비평의 조건들 ‘게임비평’이란 게임의 가치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 때 ‘비평’은 기존의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의 비평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각 비평이 그런 것처럼, 게임비평 역시 다른 비평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비평의 대상과 조건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게임비평의 조건을 살피기 위해서는 비평 일반조건과 게임의 변별적 특성을 반영한 조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 비평의 조건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평대상의 형질변화와 비평에 요구되는 역할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것이다. 비평하는 사람에 따라 비평조건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 가능한 지점들을 모색하는 일은 가능할 듯하다. 1) 비평의 일반조건 기본적으로 비평은 비평주체(비평가), 비평대상(넓은 의미의 작품), 창작주체(제작자/창작자/작가), 수용주체(향유자/수용자/독자)라는 네 요소를 필요로 한다. 창작주체에게는 창작에 피드백을 주는 반응으로 작용하고, 수용주체에는 수용 선택여부나 수용방법 등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주체는 비평을 통해 비평대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볼 기회를 얻는다. 비평주체/대상, 창작/수용주체가 비평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이라면, 비평의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비평은 감상문 수준을 넘어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비평가에 대한 공인절차고 요구된다. 셋째, 전문학술지, 일간지, 잡지, 웹진 등 비평이 발표될 매체가 필요하다. 매체는 비평활동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신뢰할만한 것이어야 한다(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세 조건은 각각 비평의 전문성, 안정성, 지속성과 관련된다. 이를 종합했을 때, 비평이란 ‘비평주체가 신뢰할 만한 매체를 발표공간으로 삼아, 비평대상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한 뒤 평가를 내리는 전문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비평의 힘은, 대상이 지닌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열어주는 수준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사회적 함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게임비평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주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게임이 보일 수 있는 비전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그것을 통해 일상의 변화와 시대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비평은 비평대상의 성취를 읽어내고, 그런 읽기를 통한 생생한 인식을 사회로 확산하는 작업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전제들이 요구된다. 먼저, 게임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을 위한 비판적 풍토를 조성한다. 다음으로, 게임과 게임비평을 지지하고 체계화한다. 마지막으로, 개인 혹은 사회의 게임 향유경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적 도구·해석·평가를 제공한다. 2) 변화의 고리와 게임비평 하지만 비평의 일반조건은 게임비평이 당면한 상황과는 꽤 거리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 게임비평은 느슨하게 형성돼 있고, 기존의 예술·문화장르에서처럼 고정된 형태로 제도화돼 있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은 대상이 무엇이 됐든 본질적으로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게임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게임비평이라면, 그것은 게임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출렁거리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게임 개념도 계속 재구성된다. 메타버스(metaverse) 시대 게임은 온라인게임 태동 이전 게임과 다를 수밖에 없다. 기존 예술이나 문화장르에 비해 접근성이 높고 폐쇄성이 강한 게임문화의 경우,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비평이 형성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개별 게임의 향유가 향유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된다는 점도 게임비평의 제도적 형성을 어렵게 하는 큰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게임비평은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너무 많은 곳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화된 비평이 미미할 뿐, 제도 바깥의 비평열기는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제도화된 비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게임비평은 그야말로 ‘넘쳐난다’. 블로그,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게임비평을 자처하는 작업들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다양한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통해 게임 향유경험이 축적되고 그로 인한 일정 수준의 커뮤니티가 형성됨으로써 플레이어들은 이제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됐다. 이는 플레이어들을 준 비평가로 만드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을 골고루 만족시킬 만한 고유의 비평체계가 이뤄지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적극적인 향유=비평을 통해 비평의 저변이 넓어졌다거나 비평이 민주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은 게임비평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그 정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 예술·문화 장르의 비평 장(場)이 이미 제도화된 전문적 비평영역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아마추어 비평영역 사이의 갈등과 연대가 교차하는 역동적 공간이 되고 있다면, 제도화된 비평영역의 부재로 인해 가뜩이나 분명하지 않았던 게임비평의 정체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게임비평의 조건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연결된다. 기존의 비평개념으로는 작금의 현상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전문적인 비평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게임담론의 생산주체가 되는 일, 그리고 게임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능동성을 발휘하는 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제도화돼 있지 않다면 그 자체로 가능성이 될 수는 없을까? 비평의 민주화를 통해 제도권 내 비평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낯선 상상력을 발굴할 여지가 열리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화되지 않은 비평의 장에서 쏟아지는, 이른바 ‘중심 없는 주변부’의 비평들을 규정하는 조건이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비평의 장 자체를 흔드는 변화 속에서 비평과 비평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새로운 조건 마련을 통해 비평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임 향유자는 수동적으로 비평을 소비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을 통해 능동적으로 비평을 생산·배포·공유하는 새로운 비평주체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비평을 행하는 온라인 공간 역시 해당 공간에 들어오는 비평독자들이 비평을 읽고 소감을 밝히는 새로운 비평의 장이자 역동적인 비평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남은 것은 그들의 비평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비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냐의 문제다. 하지만 애초에 ‘고급/좋은’ 비평과 ‘저급/나쁜’ 비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 비평이 추구해온 것처럼 고급독자만을 위한 전문적 의미의 비평만이 비평은 아니다. 게임의 특성, 그리고 그 향유자를 감안한다면 전통적 비평개념의 수정 혹은 확장은 필연적이다. 그 명확한 기준과 범위를 제시하는 일은 더 이상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지니며, 비평주체와 독자 간 갈등과 연대 속에서 성립한다. 물론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비평 고유의 목적과 역할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면 비평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강신규, 2016). 7.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그렇다면, 게임비평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첫째, 독창적인 이론과 방법론의 발굴이다. 게임비평만을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게임이 처한 현실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 맥락에 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비평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비평대상이 다르면 비평의 언어도 달라져야 한다. 게임이 가진 고유속성에의 천착을 통하 스스로의 정체와 역할을 구성했을 때, 비로소 게임비평의 변별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 비평, 마르크스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 신비평, 독자반응 비평, 구조주의 비평, 해체 비평, 신역사주의와 문화 비평, 레즈비언·게이·퀴어 비평 등 텍스트를 풍성하고도 심도 깊게 살필 수 있는 기존의 비평이론과 방법론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게임의 미학 안에서 통합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다. 게임 플랫폼이나 장르에 따라 비평을 세분화·전문화함으로써 전체 비평의 틀을 다지는 일도 고려해볼 만하다. 매체전환(media transformation)과 미디어믹스(media mix)가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비평의 양식이나 형식을 발굴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둘째, 비평의 역할 재/정립이다. 흔히 발견되는 비평의 자의식 부재, 해설이나 주례사 비평으로의 쏠림은 비평의 역할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비평은 비평대상을 흡수하거나 투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선과 함께 배출하거나 반사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평의 주된 역할은 ‘먹음’이 아니라 ‘되먹임’이다. 비평주체와 대상 사이에 이뤄지는 되먹임의 반복을 통해 비평을 둘러싼 주체가 공진화(coevolution)하는 것이 비평의 효과다. 하지만 게임비평의 역할은 여기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정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해독에서, 장 내 주요 행위자들이 직면한 문제들, 그리고 해당 장에 제기되는 도전과 응전의 방향성들을 보다 긴 호흡으로 치밀하게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향후 게임비평이 창작주체와 수용주체가 형성하는 문화의 변화를 탐구하는 동시에, 기민하게 변화하는 텍스트들의 정립상과 사회적 활용, 그리고 산업으로서 게임이 당면하고 있는 변화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구체적인 전망과 대비책을 마련하고, 이를 두껍게 읽어내는 역량까지 배양해야 함을 시사한다. 비평이 이차적인 글쓰기로서의 지위에 만족하는 한, 비평이 비평대상을 이끌어가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비평은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화되지 않은 현실에까지도(물론 게임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게임비평의 역할은, 비평으로서 타개해나가야 할 문제와 게임적 사회와 삶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는 것이다. 셋째, 제도권/비제도권을 막론하고 이제 비평논의에 대해 있어 요구되는 것은 ‘총체적’ 통합의 불가능성 혹은 불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비평과 비평 아닌 것, 비평공간과 비평공간 아닌 곳, 비평가와 비평가 아닌 사람 사이를 구분하는 선은 수명을 다했다. 전문가 수준의 향유자, 전문가에게 없는 경험치를 지닌 향유자, 어디서나 격전이 벌어지는 비평공간, 기존의 정형화된 비평을 넘어서는 비평이 넘쳐난다. 더 이상 서로를 구분하는 선 자체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임비평이 나아갈 방향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강신규, 2021). 하지만 문제는 게임비평에 잘 된 비평과 그렇지 못한 비평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게임비평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은, 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잘된 비평을 쓸 줄 모른다는 말이다. 비평을 할 바에야 잘 된 비평을 쓰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그런 비평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잘 된 비평을 쓰려고 하는 욕망은 내내 문제가 된다. 하나의 창조적 작업임에도 창조하는 즐거움보다 결과만 탐하게 되어, 남의 것을 모방하게 되고, 얻어들은 지식을 체계없이 나열하게 되고, 허황되게 꾸미게 되는 것이다. 나만의 게임경험과 그 경험과정에서 얻게 된 지식들이 잘된 비평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비평이 잘된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먼저 나름의 체계와 전문성을 갖춰야만 한다. 다른 비평에 대한 필요이상의 냉소함도 지양할 필요가 있다. 비평의 총체적 통합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비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어디서든, 그리고 그게 누구든) 타인의 비평을 주의 깊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관점이 지닌 타당성을 물으면서, 타인과 자신의 비평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려는 노력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저서 <서브컬처 비평(2021)>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참고문헌 강신규 (2016). 하위문화 비평의 궤적과 방향: 만화·애니메이션·게임비평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85호, 128~158. 강신규 (2021). <서브컬처 비평>. 커뮤니케이션북스. 강신규·채희상 (2011). 문화적 수행으로서의 e스포츠 팬덤에 관한 연구: 팬 심층인터뷰 분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18호, 5~39쪽. 김득렬 (2012. 1. 4). 게임잡지 연대기 2부–게임잡지 몰락에서 웹진탄생까지. <게임메카>. URL: http://www.gamemeca.com/feature/view.php?gid=125137 김봉석·박정숙·박기수·한상정 (2015. 5. 8). [좌담회] 우리 만화 비평을 말한다: 만화 담론의 현재와 비평의 길찾기. <크리틱엠>. URL: http://criticm.com/?p=734 김연희 (2012. 12. 12). 게임의 러브레터, 게임비평. <사이언스타임즈>. URL: http://www.sciencetimes.co.kr/?p=110623&post_type=news&news-tag= 박상우 (2000). <게임, 세계를 혁명하는 힘>. 씨엔씨미디어. 박상우 (2005). <게임이 말을 걸어올 때>. 루비박스. 이경혁 (2016).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 로고폴리스. 이상우 (2012).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자음과모음. 인문학협동조합 (2017). <81년생 마리오: 추억의 게임은 어떻게 세상물정의 공부가 되었나?>. 요다. 조기현 (2012). 해외 게임기의 한국 상륙. 윤형섭·강지웅·박수영·오영욱·전홍식·조기현. <한국 게임의 역사> (52∼63쪽). 북코리아. 전경란 (2013). 게임비평에 대한 연구: 게임비평 텍스트의 메타분석적 접근.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13권 3호, 19~30쪽. <미디어스> ‘Play the Game’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31) (computergamingworld.com) (www.gamasutra.com) (www.gamesradar.com) (kotaku.com) (www.pcgamer.com)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편집위원) 강신규 게임, 방송, 만화, 팬덤 등 미디어/문화에 대해 연구한다. 저서로 〈서브컬처 비평〉(2020), 〈아이피, 모든 이야기의 시작〉(2021, 공저), 〈서드 라이프: 기술혁명 시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2020, 공저), 〈게임의 이론: 놀이에서 디지털게임까지〉(2019, 공저) 등이, 논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소비하는 팬덤: 아이돌 팬 플랫폼과 팬덤의 재구성’(2022), ‘‘현질’은 어떻게 플레이가 되는가: 핵납금 게임 플레이어 심층인터뷰를 중심으로’(2022, 공저), ‘게임화하는 방송: 생산자적 텍스트에서 플레이어적 텍스트로’(2019) 등이 있다. ​ ​

  •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 Back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12 GG Vol. 23. 6. 10. *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2. 괄호에 숫자로 페이지만 표시한 것은 모두 상기 책의 인용이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응우옌은 이 책에서 이렇게 분투하는 플레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회의론자들의 반박들을 논파하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방법론으로 게임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 『게임: 행위성의 예술』 표지 이미지 응우옌의 논의는 게임 담론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예술학 등 게임과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장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것을 통해 게임을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예술로서 게임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책 전반에 깔려있는 철학자 특유의 논법은 (그가 베트남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철학/미학 담론 안에서만 대부분 작동하는데, 이는 내재적인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 논하겠지만 이토록 정교한 논의를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이 책은 차라리 게임의 존재론이거나 게임을 통해서 삶을 대하는 방법을 돌아보는 윤리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게임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까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또한 응우옌이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인터페이스 장치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고 즐기는 디지털 비디오 게임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 등산, 술자리 게임, 나아가 사랑까지 포괄하면서 삶 그 자체까지 나아간다. 앞서 말을 꺼냈듯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핵심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응우옌이 고안한 개념이 아니라, 버나드 슈츠의 개념을 가져와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 책의 초반부의 대부분은 슈츠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분투형 플레이의 회의론자들, 특히 성취형 플레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논파해 나가는 내용이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무조건 이기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때로는 심지어 이겨버리는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76) 게임이 쉬워져서 난이도를 보다 어렵게 조정하는 상황이나 애인과 보드게임을 하는 상황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헨리 시지웍의 ‘쾌락주의의 역설’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설명한다. 쾌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려고 하면 절대로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오직 다른 목표에 헌신해야만 그러한 쾌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요가는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육체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손을 뻗어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영적 효과에 가닿으려는 행위성의 형식이다. 학부 시절 즐기던 술자리 게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술자리 게임에서 기를 쓰고 이기려고만 한다면 그 게임은 아무런 재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술자리 게임을 통해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서로 웃고 친해지는 것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진짜 목적이다. 〈트위스터〉 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분투형 플레이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제한된 행위성을 통해서 결국 넘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일부러 넘어지면 재미가 없어진다. 진짜로 실패하여 넘어졌을 경우에만 재미가 생긴다. 진심으로 게임이 제안하는 어떤 동작을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경우에만 진짜 실패가 되어 모두가 크게 웃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성공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성공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이렇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goal)와 목적(purpose)이 어긋나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을 취한다면,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수단을 취하기 위해서 결과를 추구한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서도 일시적인 목표에 제대로 몰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게임 속 목적에 완전히 몰입해야만, 목표는 추구될 수 있다. 게임의 과정을 즐기려면 일시적으로 승리에 대한 관심을 철저하게 장착해야한다. 누군가 게임에 진지하게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금방 재미를 잃고 만다. 이것이 분투형 플레이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응우옌은 게임과 사랑을 비교하기도 한다. 사랑의 경우 목표에 대한 진심 어린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도구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나르시시즘이다. 심할 경우 스토커가 되어버린다. 게임에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 속 목표에 그토록 진정성 있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형식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부루마블〉을 할 때, 게임 속 씨앗은행 화폐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던 게임이 끝나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종이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부루마블 속 화폐를 계속 소중하게 여겨서 게임이 끝난 뒤에도 마차 상자 안에 넣지 못하고 지니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해도 살짝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논할 때, 오늘날 온라인 게임들의 화폐가 실제 세계의 화폐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응우옌의 책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간과되어 있다.) 한국 맥락에서 〈리니지〉 작업장 같은 사례를 떠올린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게임과 노동의 구분이 사라지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게임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게임은 특정한 방식으로 형식화된 환경과 행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임 속 목표들은 현실과 달리 굉장히 명료하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뚜렷할 수 없는 것들이 게임에서는 목적론적으로 명백한 것으로 재구성된다. 수치화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기도 한다. 삶을 그 자체로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은 삶의 목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제를 낳는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다시 돌아와, 분투형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목표들에 일시적으로 헌신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변덕스러움이 요구된다. 기존의 행위성 관련 논의들은 행위자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분투형 플레이는 행위성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불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100) 행위성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긴 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을 장착할 수 있는 인간 행위성의 유동적인 역량과 자율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분투이다.(98) 그렇기에 게임 속 목표가 일회용이라는 점은 게임이 허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라는 매체가 행위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식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측면이 된다.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게임의 목표와 규칙,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제약 체계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환경 등을 고안한다. 게임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을 통해 특정한 실천적 경험을 조형해 내는 것이다. 이런 형식화의 차원에서 게임을 예술적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임 디자이너의 매체는 행위성이다. 하나의 표어로 만들어 보자면,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이다.”(35) 예술은 특정한 형식을 가지고 미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응우옌은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 미적 경험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과 플레이어가 취할 일시적 행위성을 형식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특정한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의 아름다움은 행위가 형식화된 제약 속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게 제한되는 조건이 여기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게임 디자이너의 형식이기도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에서 페이커의 플레이가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움직임의 절대적인 형태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엄밀한 규칙의 체계 안에서 게임의 목표와 관련된 엄청난 행위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문제는 제한된 행위성의 형식 안에서 성공만이 예술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위성을 제한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나 부조화에서도 예술성을 드러난다. 키보드의 QWOP 버튼만을 이용해 다리의 관절을 제각각 조정하여 달리기를 해야하는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일부러 조작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형식 안에서 제대로 한번 달려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그 게임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베네트 포디(Bennett Foddy)가 2008년에 만든 게임 〈QWOP〉. 출처: https://www.foddy.net/2010/10/qwop/ 게임은 이렇게 특정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위의 형식으로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타당하고, 오늘날 게임과 예술을 둘러싼 논쟁적인 담론에서도 중요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응우옌의 논의를 딛고서 다시, 게임이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범주와 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필요하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면서 음악이나 회화 같은 예술의 매체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모더니즘적 장르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게임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영역을, 예술을 통해서 게임이라는 영역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가 예술에 편입되면서 발생했던 과거의 논쟁들을 변증법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한편으로 이 책에는 니콜라 부리요나 권미원 같이 미술계에서는 낯익은 필자들도 등장한다. 응우옌은 사회적 관계나 공동체에 관련된 예술 형식을 논하는 관점을 게임에 적용하며 니콜라 부리요의 논의를 빌려온다. “예술은 특수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공간이다.”라는 니콜라 부리오의 말을 빌려와 게임도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282)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의 미학』에서 관계를 다루는 예술 작업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이례적이고 특수한 관계적 상황을 창출한다며 옹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작은 유토피아’를 창출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양한 차원의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그러한 관계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클레어 비숍의 논의는 굉장히 유효한 비판이다. 물론, 응우옌이 책에서 언급하는 게임이 모두 니콜라 부리오식 관계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행위와 관계를 통해서 적대를 감각할 수 있는 사례들에 대한 언급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렌다 로메로가 2009년에 만든 보드게임 〈기차〉에서 플레이어들은 기차를 운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나중에 그 기차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나치의 기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브렌다 로메로(Brenda Romero)가 2009년에 만든 게임 〈기차(Train)〉. 출처: http://brenda.games/train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에는 저자성의 문제도 있다. (보통 한명의) 예술가가 정해진 미적 형식을 인준하고 통제하는 전통적인 저자성은 굉장히 근대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관념이다. 응우옌의 논의에는 게임을 전형적인 예술의 개념틀에서 비추어 보기 위해 게임 디자이너를 전통적인 예술의 저자로 상정하는 문제가 전반에 깔려있다. 응우옌은 12쪽 각주 2번에서 게임 디자이너가 복수의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짚으면서도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한명인 것처럼 상정할 것이라고 쓰는데, 오히려 게임의 저자가 한명일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성의 문제는 단지 게임을 제작하는 관점에서만 중요한 논의가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저자성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해 생각해야한다. 반갑게도 응우옌은 책의 후반부에 게임의 아름다움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미적 책임이란) 게임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에 복합적으로, 예술가와 관객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책임이 주로 플레이어에게 있고 다른 경우에는 디자이너에게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책임은 복합적인 협업의 형태를 띤다. 이 경우,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253) 이러한 언급은 이 책에서 게임의 미적 역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성을 발생시키는 플레이어의 역능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행위성의 제약을 위반하거나 허점을 찾아내는 플레이어들이 있다. 주어진 역량을 의심하고, 게임 자체를 전유해 버리는 플레이어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비틀어 ‘해방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역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해방된 플레이어들은 단지 주어진 행위성을 가지고 노는 정도가 아니라, 게임을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게임에서 서로를 죽이지 않고 함께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는 플레이어들을 떠올린다. 바로 이런 곳에서 미학(감각)의 정치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사유할 틈을 만들어 낸다. 응우옌의 논의를 이러한 관점과 함께 밀어붙여 볼 수도 있다. 그가 게임과 게임 플레이의 자율성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이 고안한 제한된 행위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되고 형식화된 행위성이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게임은 형식화된 행위성들의 다발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게임을 통해서 다양한 행위성들의 라이브러리를 탐험하게 된다. 혹은, 서로 다른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여러 가지 행위성들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그것이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적이다.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우리에게 여러 행위성을 넘나들고, 완전히 상충하는 여러 유형을 오갈 것을 요구한다.”(341) 심지어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의 상충되는 태도를 종합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명료하게 조직화된 가치들 사이를 오가며 가치에 대한 어렵고 세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주문받는다. 응우옌이 보기에 게임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성과 유혹의 쾌를 폐기한 뒤, 가치를 대하는 세밀함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게임의 구조는 우리의 자율성 전체를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다.”(125)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특정한 방식의 행위성에 순응하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그런 게임을 통해서 행위성 자체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성이 제한적으로 형식화되어 있기에 해방적으로 전유할 가능성도 열린다. 응우옌은 우리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특정한 실천적 틀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명료한 목표를 고수하지 않을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딘가에 푹 빠졌다가 또 빠져나오고, 깊게 몰입했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는 방법을 게임을 통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형식화된 행위성을 통해서 행위의 역량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게임이라는 가장 목적론적인 체제를 통해서 세계가 목적론적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다시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내는 일이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책을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1) 이러한 논의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C. 티 응우옌의 또 다른 논고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응우옌은 예술 감상 또한 고투의 과정이라고 쓴다. 예술 감상은 결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 감상에 목표(goal)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술품 앞에서 가이드북이나 미술사 교과서만 읽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술을 감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삶이 예술작품으로써 결말이 열려 있는, 끝나지 않는 대화가 되기를 바라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변으로써 끝나버릴 무언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옮긴이 이동휘의 블로그: http://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Tags: 행위성, 응우옌, 행위성의예술, 북리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권태현 글을 쓰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예술계에서 활동하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7000eichen@gmail.com ) ​ ​

  •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 Back [인터뷰] 게임 전시가 줄 수 있는 사회적 담론의 균열 : <게임 사회> 기획자 홍이지 학예연구사 인터뷰 12 GG Vol. 23. 6. 10. 게임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2년 10월에 방영했던 EBS 다큐멘터리 <게임에 진심인 편>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다큐멘터리 3부에서는 ‘근데 이제 예술을 곁들인’이라는 제목으로, ‘게임을 예술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담론들을 다루었다. 비단, <게임에 진심인 편>뿐만 아니라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어디로 둘 것인지에 관한 질문들은 훨씬 이전부터, 다양한 경로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담론의 두께만큼 다양한 관점이 혼재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게임과 예술의 경계를 구획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구태의연하다는 인식까지 존재한다. 그런데 실제로 게임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엄숙한 미술관, 그것도 한국 미술계에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3년 5월 12일부터 9월 10일까지 게임을 주제로 한 <게임 사회> 전시를 연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국에서 게임의 문화적 지위가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로의 게임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는지, 게임으로의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은 무엇인지 등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이에 해당 전시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했던 편집장은 <게임 사회>를 기획한 홍이지 학예연구사와 만나 게임과 예술의 관계를 더 깊게 고찰하고자 하였다. 다만, 전반적인 전시에 관한 소개는 국립현대미술관 콘텐츠( https://www.youtube.com/watch?v=_mZEphegRDc) 에도 잘 나와 있기에, 인터뷰에서는 게임을 전시하는 것의 의의와 한계, 또 앞으로의 가능성들을 사유하고자 하였다. 이경혁 편집장: 안녕하세요. 학예연구사님.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릴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대학에서는 조각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이제 전시 기획을 전공을 한 뒤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지 3년 되었습니다. 홍이지라고 합니다. 이경혁 편집장: 전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전시에 대한 반응들이 뜨겁더라구요. 인터넷에서도 많은 여론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게임 관계자들과 미술 관계자들이 이번 전시를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를 것 같은데, 현장에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비단 미술계와 게임계로 나뉘는 것뿐 아니라, 게임계 안에서도 게이머가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 업계에 계시는 분이 보는 전시가 다르고, 게임을 콘텐츠로 기획하시는 기획자분이 보는 관점도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저희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은 것이 저는 재밌어요. 이 전시 하나만으로도 저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대화를 할 때마다 너무 흥미로워요. 이경혁 편집장: 사실 게임 전시라는 것이 리터러시의 문제가 있죠. 전시에서 애초에 게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알아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요. 사실은 일반적인 미술관도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상황인데, 미술 전문가로서 게임에 관한 전시가 다른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다른 특이점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실 처음 기획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이 전시의 기획 의도를 한 방향으로 읽으시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각자의 리터러시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더욱 피드백이 궁금한 전시이기도 했어요. 일반적으로는 미술관에서 전시를 올려도 피드백은 거의 없거든요. 개인의 호불호나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 정도는 있지만, 전시 전반의 경험에 관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전시는 오픈한 지 일주일 됐는데도 피드백이 너무 적극적이어서 굉장히 놀라워요. 그게 게임 전시의 특이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이전에 우리 미술관에서 비슷하게 피드백을 받았던 전시는 ‘개를 위한 미술관’ 전시였어요. 강아지들이 들어왔을 때,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모종의 엄숙주의나 결계가 해제되면서 이 공간을 다르게 점유하고 경험했을 때 확실히 훨씬 더 적극적인 피드백이 있었던 것 같고, 또 그거를 염두하고 만들었던 전시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코로나 때, 저희 미술관이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았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얼마나 장소가 좋아요? 위치도 훌륭하고. 코로나 때 병상이 없을 때에도 여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거든요. 저희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미술관이 기능을 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미술관에 대한 경험과 이용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죠. 이번 기획도 이런 맥락에서 기획한 지점이 있어요. 다만, 피드백 중에는 기획자가 누구이며, 얼마나 게임을 해봤는지 묻는 질문들도 있어요. (웃음) 물론, 제가 게임을 하기는 하지만, 모든 게임을 섭렵하고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에요. 그러나 외부 기획자가 미술관에 와서 하는 전시와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공공성을 주제로 해서 만드는 전시는 분명히 접근이 되게 다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 층위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공공미술로의 기획이 가질 수 있는 특수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무래도 디지털 게임 전시도 있다보니 기계들이 많잖아요? 그 지점에서도 공공미술에서의 의의나 어려움들이 만들어질 것 같은데, 기계들은 괜찮나요? 잘 돌아가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괜찮아요. 저희가 우려했던 것보다 그래도 안정화는 빨리 됐고,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전시되고 있어요. 저희 오픈하고 그다음 날 단체 관람객이 900명이었거든요. 그때가 진짜 위기였긴 했어요. 관람객분들이 개별로 혹은 두 세분씩 오실 때는 미술관의 분위기나 문법을 인지하고 오세요. 그런데 900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오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기계들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이 전시의 기획의도 이면에 있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미디어 아트 작품이 굉장히 많던데,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들은 어떻게 되나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사라져요. 실체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요. 처음부터 저희가 작품들을 파일 형태로 받았는데, 어차피 전시가 끝나면 파일을 바로 폐기하고 그걸 사진을 찍어서, 소장품 대여처에 보내줘야 돼요. 김희천 작가님의 작품에 쓰인 큰 LED 이런 거는 패널도 그냥 다 해체해 버리는 거예요. 렌트기 때문에. 저희는 자산 취득을 할 수가 없어서 장비가 비싸도 렌트를 해야 돼요. 이 현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면. 이경혁 편집장: 그러면 아카이빙을 한다 해도 사실상 ‘전시의 재현’이라는 건 불가능한 형태군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이경혁 편집장: 음. 게임 매체가 원래 그렇긴 하죠. 게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원래 애초부터 재연이 불가능한 거니까요. 그래도 파일을 가지고 계신거면, 나중에 오페라처럼 다른 무대에서 다른 연출로 재현할 수는 있는 거겠네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네. 그런데 그것도 조금 문제가 있긴 해요. 제가 이번에 MoMA(Museum of Modern Art: 미국의 유명 근현대 미술관)랑 스미스소니언(미국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주는 박물관)에서 각각 작품을 빌렸는데, 최종 협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1년 가까이 걸렸거든요. 애초에 MoMA와 스미스소니언이 2010년 초반에 게임을 소장하기로 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이랑 문법이 많이 달랐던 거죠. 지금의 관점에서 당시 계약서는 명확한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에 체결된 거였거든요. 게다가 당시의 판단으로는 (게임 관련 전시물을) 어디까지 소장해야 되는지에 관한 연구가 너무 미비했기 때문에, 누구의 권한을 어디까지 일임받아서 관리할지에 대한 부분도 각각 다 달랐던 거죠. 어떤 게임사는 ‘전시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떤 곳은 ‘전권을 다 준다’ 대중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너무 달라졌고, 또 담당자들도 다 바뀌어서 판단을 유보했기 때문에, 저희가 이번에 전시할 때에는 MoMA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MoMA의 모든 리스트를 보면서 게임 회사들에게 다시 또 허락을 받았어요. 그때 어떤 게임사는 알아보고 연락 준다고 하고 두 달, 여름 휴가라고 한 달, 어떤 곳은 ‘우리가 MoMA랑 계약을 했다고요?’ 하는 곳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MoMA가 2010년에 전시를 하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전시를 안 했기 때문에, 저작권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컨디션이 많이 바뀐 거예요. 그 사이에 데이터 파일도 굉장히 압축이 많이 되고, 전시물을 상영하는 방식도 달라졌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재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에요. 이경혁 편집장: 한편으로 MoMA에서 전시된 작품들도 실제 상용 작품들이고, 사실은 직접 컨택을 해서 전시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그런데 MoMA와 계약한 작품들을 빌려왔던 의도가 따로 있으셨을지 궁금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도 그 지점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게임을 미술사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지점이었어요.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그러니까 89년 인터넷이 발달한 이후를 디지털 미술사로 정립을 하고 있는 와중인데, 이 디지털 미술사의 맥락에서 게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미술사에서는 게임을 거의 다루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가 연구하고 있던 맥락 안에 게임을 긴급하고 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MoMA의 사례가 주효했어요. 애초에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으신 분들에게도 ‘MoMA도 게임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 설득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이경혁 편집장: 그렇다면 역사적 맥락 외에도 ‘미술 전시로서의 게임’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물론 있지만, 그걸 구현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요. 단순한 체험으로 제공되는 것 외에, 저희가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미디어 작품처럼 뭔가 감상의 여지가 생기고, 이걸 통해서 특정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러기에는 미술관에서의 공간이 한정적이고, 너무 찰나인 거죠. 경험의 시간 자체가.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사실 이번 전시 중에서 특히 심시티 같은 경우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죠. 결국, 전시장의 한계라는 것은 공연 공간에서, 줄을 서서 공연 기기를 잠깐 대여하는 방식에서부터 나올 것 같은데요. 오락실 게임은 이런 논리가 가능하겠지만, 심시티나 마인 크래프트가 공적 공간에 올라왔을 때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연 외에도 미술 작품과는 다르게 게임은 일반적으로 협업해서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도 있지 않니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MoMA도 게임 전시는 항상 디자인 분과에서만 하는데, 시연이 어렵다는 점과 크레딧의 문제가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게임 전시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지점도 있고, 아직은 예술로서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한 관점의 차이들도 큰 것 같아요. 저희가 빌릴 때도 게임사의 반응에 따라서 그 게임사가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거든요. 가령, 제노바 첸(Sky : 빛의 아이들, Flower, Journey 제작자)은 확실히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희가 뭔가를 요구했을 때, 모든 걸 조건 없이, 질문을 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전부 제공해줬는데요. 확실히 게임이 예술로 보여줄 수 있는 자리라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희가 지금 헤일로 2600을 보여주고 있는데, 스미스소니언 미술관을 통해 에드 프라이즈(Ed Fries, 헤일로 2600 개발자)의 연락을 받았어요. 저희는 모든 전시품을 똑같은 컨디션으로, 너무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는 방향에서, 관람객들에게 중립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에드 프라이즈는 자신의 작업이 아트이기 때문에, 전시할 때 게임이 이용되었던 당시의 CRT 모니터로 바꿔 달라는 연락이 온 거예요. “접근성 확장을 위해서 전시에 버튼과 조이스틱을 쓴 것은 알겠지만, 내 작업은 이미 종결된 그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다시 번역된 상태로 제공이 되는 형태는 반대한다.” 그런 거죠. 이런 지점에서는 게임과 전시에 대해서 고민들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하다가 지금은 백남준 류의 비디오 아트가 미술계에 자리가 생겼잖아요? 게임도 그런 게 가능할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게임이) 이미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만큼 자리 잡혔다고 생각해요. 싱글 채널 비디오 아트에서 옛날에는 작가가 선형적인 타임라인 안에서 촬영을 해서 편집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CGI가 안 들어가는 작업을 찾기가 힘든데, 그 CGI 작업 자체가 유니티 아니면 언리얼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이미 게임의 문법으로 영상 언어를 만들고 있고, 그 과정에서 메타버스나 NFT를 경험해 본 작가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게임의 작법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잘 만들지에 있어 기술력에 대한 갈구가 큰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작가들도 고민하는 게, 그런 기술력을 써서 작업을 만들면 1, 2년 사이에 빠르게 낡아버린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는거죠. 이제는 딱 보면 ‘이거는 심즈 미감, 이거는 플레이스테이션 1 미감, 이거는 언리얼 엔진 5 미감’ 이런 걸 바로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금방 낡아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김희천 작가가 개발을 할 때도 큰 화면에 굉장히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는 풀레이스테이션 1 미감에 로우 폴리곤을 써서, 시간대를 흐트러뜨리고 싶은 의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77220)에서 언급한 예시 중에 라라 크로프트가 있었는데요. 옛날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에는 게이머들 각자의 라라가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라라. 그런데 기술이 발달해서 실사화가 되니까 모두가 실망했다는 거죠. 자기의 라라가 아니라서. 그런 상상의 여지를 열어두고 게임을 하던 그 시기가 현대 미술과도 닿아있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고 체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딱 그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요. 이경혁 편집장: 확실히 게임계에서는 그런 기술적 맥락들이 중요하죠. 사실 초창기 레트로 게임들은 지금처럼 폴리곤 방식으로 안 만들고, 도트로 이제 디자인을 했잖아요. 근데 도트디자인에서는 박모라고 하죠? CRT 특유의 번짐을 포함해서 디자인을 한 게 있었죠. 그런 미감들은 시대적인 맥락에서 감상되고, 이해되는 지점들이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슈퍼 마리오 무비>는 다양하게 감상될 것 같은데, 이전 게이머들에게는 그 화면이 익숙하거든요. 게임팩을 처음 꽂았을 때, 뭔가 지직거리면서 나오는, 그래서 다시 훅훅 불고 게임팩을 꽂는 익숙한 화면인데, 그 경험이 없거나 그 시절을 안 겪은 요즘 게이머들은 무슨 화면인지 모르는 거죠. 그런건 도록에 아무리 써도 잘 알 수가 없죠.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 지점이 현대 미술과 게임의 접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가 브로셔에 쓴 글이 있어요. 게임을 하는 것과 현대 미술을 감상하는 과정이 되게 비슷하다고 써놓은 게 있거든요. 저는 실제로 그랬던 것이, 제가 게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미술계에 계신 많은 분들은 제임을 잘 모르시거든요. 그런데 반대로 외부에서 ‘저 미술관에서 일해요’라고 하면 ‘저는 현대 미술은 하나도 모르겠어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죠. 이렇게 서로 문법이 다르고, 시간을 들여서 익히지 않으면 온전히 즐길 수 없는 두 대상을 공공미술관에서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에 ‘접근성’을 무게감 있게 다룬 것도 연장선 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경혁 편집장: 말씀해주신 접근성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이번 작업을 하시면서 접근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게임계의 바깥에 계신 입장에서 게임 접근성의 현재를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희가 전시를 기획할 때, 컨트롤러를 이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Xbox Adaptive Controller (Xbox 접근성 컨트롤러: 국립재활원의 ‘같이 게임! 가치게임’ 프로젝트에서도 소개되었던, 장애인의 게임 접근을 돕기 위한 컨트롤러)로 전시할 수 있는 게임이 거의 없는 거예요. 특히 국내 게임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지스타가 열렸을 때, 넥슨에서 ‘카트라이더: 드리프트’가 나오니까 그거를 이 컨트롤러로 쓸 수 있게 기술적으로 검토를 해달라는 이야기가 국립재활원에서 있었고, 국립재활원 연구에 참여했던 가족들에게도 ‘단 하나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국내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서 마지막에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넣은 지점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엑스박스 컨트롤러는 국내에서 팔지도 않고,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죠. 그리고 우리나라 게임 시장에서 게임에 대한 (장애인과 여러 소수자의) 접근성을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는 많이 있었지만, 여전히 게임은 산업으로 분류되고 게임에 대한 평가도 이용자가 얼마인지 등 가시적인 숫자로 평가되기 때문에,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떨어지는 거예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 지점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전시 이후에도 게임의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더 잘 드러날 수 있는 전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사실 미술관과 접근성은 게임보다 먼저 논의들을 거쳤잖아요? 이제는 미술관이, ‘한국에서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가장 접근성이 높은 공간’ 중 하나로 꼽히는데, 거기에서 접근성에 관한 논의가 부족한 ‘게임’이 이야기된다는 지점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더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런데 저는 매일 내려가서 Xbox Adaptive Controller를 쓰시는 분들을 보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금방 익숙하게 잘하세요. 저희 딸이 11살인데, 저희 딸한테 마인 크래프트를 이 컨트롤러로도 시켜봤는데,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서 하긴 하더라고요. 확실히 접근성에 관한 논의들은 실제로 경험해보면서 느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그렇죠. 어떤 컨트롤러에 익숙한지에 대한 문제를 확장하면 장애인 접근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맥락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접근성 관련 논의가 비단 장애인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보편성에 관한 논의이고, 오히려 메이저를 향해 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지요. 그래서 이러한 고민들을 손쉽게 ‘돈 안되는’, ‘착한 일’로 인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맞아요. 사람들이 접근성을 자꾸 소수자의 문제라고 쉽게 인식하지만, 크게 보면 사실 키오스크의 사례도 같은 맥락이죠. 만약 키오스크에서 에러가 떴을 때, 핸드폰을 많이 쓰는 세대는 직관적으로 초기 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해력이 있는데, 그게 전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문해력이 없는 사람도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죠. *김희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현장 이경혁 편집장: 앞서 게임계의 다양한 반응과 그 지점에서 공공미술로의 특수성 같은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미술계의 반응은 좀 어떤가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미술계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긴 한데요. 먼저 제가 예전에 <유령팔>이라는 전시를 했던 걸 많이들 아시니까, 연장선에서 봐주시는 분들은 포스트 디지털 미술사 맥락에서 읽어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임 전시를 해서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들은 새로운 세대가 (미술계로) 진입해서, 경험이 확장되는 것을 의미있다고 봐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이경혁 편집장: 게임과 미술이라는 콜라보가 참 쉽지 않은 영역이었는데, 이후에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갈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좀 해야 할 시기 같아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래서 미술 쪽에 비평하시는 분들 중에선 게임의 미감과 질감이 다음 세대의 미디어 아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왜냐하면 언리얼 풍이나 유니티 풍의 미감이나 마감이 단순히 작업물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 방식이나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주잖아요. 재미있는 사례로, 최근에는 실제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온 것을 느끼는데요. 저는 실제 전시 장소에서 물리적인 양감과 구조를 이해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설치하는데, 어떤 작가분들은 실제 전시장에 와서도 사진을 찍은 다음, 사진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보는 것이 낫지 않나?’고 했더니, 자기는 핸드폰 스크린으로 보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다고 말하는 거죠. 이처럼 프로그램이나 기술이나 게임의 문법이 여러 변화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논의들이 게임이라는 매체를 시각적인 대상으로 볼 때 한정되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보면 게임의 또 다른 정체성이자 특징인 규칙, 그리고 그 규칙과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감정의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아요. 미술이 게임의 방법론을 가져간다면 사실 이 고민이 필요할 것 같은데, 전시라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영역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홍이지 학예연구사: 좋은 예시가 김희천 작가 작업인 것 같아요. 김희천 작가 작업은 앞 부분에서 유니티로 만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게임의 아바타 같은 사람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는데, 이후 실제 인물이 연기를 하는 파트가 끝나면 전시장에 구현된 35대의 CCTV가 이미지를 수집하고, 수집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변환되어서 출력되는 파트가 있거든요. 실제 게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건 이 부분이죠. 우리는 보통 앞부분을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뒷부분을 게임으로 보지 않는데, 작가님에게는 이 부분이 게임인 거고, 내러티브가 있는 기존의 미디어 작품의 문법으로 해석했을 때 실시간 반영이 작품에 즉흥적으로 개입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전의 영상 작품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경혁 편집장: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게임의 문법 쪽으로 가지를 뻗어간다면, 어차피 집에서도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전시장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웃음) 홍이지 학예연구사: 그렇죠. (웃음) 다만, 전시장이 어떤 풍경을 만들었는지가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실제적으로 어떤 콘텐츠가 상영되는 지보다, 사람들의 행동 양식, 반응, 상호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는 것이 유효한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시장에 와서 보는 미디어 작업이 어떤 경험의 차이를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온당하게 다뤄야 할 내용에 대해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사회적 주제에 대해서 모두가 드나드는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굳어질 수 있는 사회 문법에 균열을 줄 수 있어요. 그런 균열을 만드는 공간이 미술관인 것 같아요. 이경혁 편집장: 맞습니다. 게임 자체로는 이미 예술을 하고 있어요. 다만, 그중에 전시될 수 있는 방식이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모든 게임이 미술관을 가야하는 것도 아니며,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홍이지 학예연구사: 저는 81년생인데, 어렸을 때 게임을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여자애가 무슨 게임이야? 오락실에 가 있는 오빠나 빨리 데려와서 저녁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든요. 그래서 오빠를 데리러 가면, 오빠는 친구들이랑 ‘스트리트 파이터’ 하고 있고, 오빠가 저한테 200원 주면 테트리스하고, 보글보글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것처럼 저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접했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 남성적 문화라는 점에서 게임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적 경험을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도 게임에 몰입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런 경험들 때문에 이런 전시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유령팔>도, 85년 이후 세대들이 포스트 미디엄을 다루고 있는 특성과 달라진 창작 환경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기획했어요. 물리적인 감각이나 스케일 감이나 물질에 대한 감각을 인지하는 세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현대미술에도 그런 맥락에서 게임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의 전시도 이런 고민들을 담는 지점에서 세대적 경험에 균열을 만들어갈 것 같습니다. Tags: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전시, 미술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미디어문화연구자) 서도원 재미있는 삶을 살고자 문화를 공부합니다. 게임, 종교, 영화 등 폭넓은 문화 영역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 ​

  •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없다

    < Back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없다 18 GG Vol. 24. 6. 10. 도발적인 제목을 들고 왔지만, 놀랍게도 필자는 어린이가 아니다. 더 놀랍게도 필자는 아직 2세가 없다. 당사자성이 없는 사람이 어린이와 게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게임제너레이션(GG) 편집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가정에 어린이가 있는 필자를 새로 구해보시는 게 어떠냐'라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편집장은 '어린이가 없는 입장이 보다 객관적'이라고 답했다. GG 편집진의 고약한 취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필자는 과거에 어린이였던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유명한 PC방의 초글링 출신이다. <카트라이더>가 국민게임이던 시절, '놀토'만 되면 기자는 같은 반 친구들과 PC방으로 달려갔다. 매캐한 담배 연기 속에서 시프트(드리프트) 버튼을 열심히 눌렀던 기억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PC방에는 <리니지>라든가 <뮤> 같은 게임이 인기가 있었지만, <메이플스토리>, <큐플레이>, <마비노기> 등등 어린이들이 즐길 만한 게임도 대단히 많았다. 개중에는 FPS나 '성인풍' MMORPG로 월반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모두가 <카트라이더>를 플레이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 한때 <카트라이더>는 명실상부 국민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인기의 중심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카트라이더>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당대 단순 영화 잡지를 넘어 문화비평지의 기능을 수행하던 주간지 <씨네 21>은 "국민 배우 안성기에 국민 간식 떡볶이에 국민 여동생 문근영까지, 조금이라도 인기 있는 상품에는 ‘국민’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며 "요즈음 국민 게임 칭호는 <카트라이더>에 돌아간 모양"이라고 썼다. [1] 그리고 그 인기의 비결을 "유아적 놀이 경험"이라고 분석했다. 이 "유아적 놀이 경험"이란, 만화적 캐릭터들을 통해 기존의 레이싱게임보다 간편한 게임플레이를 담은 것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꾸준히 이 게임과 닌텐도 <마리오카트>와의 유사성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당대 이용자들에게 <마리오카트>와 <카트라이더>를 둘러싼 시비는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어린이 시절의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카트라이더>는 최고 동시접속자 20만 명, PC방 점유율 1위, 출시 1년 만의 등록회원 1,000만 명의 금자탑을 쌓으며 넥슨의 역사를 썼다. <카트라이더>는 2023년 출시 18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고, 후속작 <카트라이더: 드리프트>을 출시됐다. 하지만 새 게임은 국민게임이었던 전작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넥슨의 창업자인 고 김정주 회장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스스로 돈을 싸 들고 와서 한참 줄 서서 기다리며 디즈니 콘텐츠를 즐긴다"며 "디즈니가 부러운 건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2] 넥슨의 방향성을 아이들과 부모를 "쥐어짜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넥슨이 2000년대 초중반 서비스했던 게임들은 실로 그런 면모를 보이고 있었고, 그 선두에는 <카트라이더>가 있었다. 이 쯤에 <카트라이더>의 옆자리에 설 게임은 단연 <메이플스토리>겠지만, 이 게임이 겪은 풍파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글에서는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넥슨은 현재 <메이플스토리>의 블록체인게임 버전을 연구개발 중이다. [3] 아무튼 국민OO의 시절은 지났다. 국민OO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국민OO가 먹히던 시절에 그 지위를 획득한 이들에게 한정된다. 2020년대의 국민MC는 아직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 사람이다. 이렇게 취향의 파편화가 세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사는지 알기 어렵다. 새로운 국민배우, 국민간식, 국민여동생은 없다. 할머니는 빠니보틀과 곽튜브를 모르고, 손자는 종편방송에 쏟아지는 트로트 예능을 모른다. 독자 여러분께도 퀴즈 하나. 이 중에 혹시 '흔남'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혹시 구글링을 시도하려고 했나? 흔한남매는 구독자 277만 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이다. 요즘 어린이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흔남의 존재를 모르는 초등학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전 세대를 아우르는 '매스'미디어는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정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는 시대는 지났다. 더구나 인구절벽으로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콘텐츠가 어떤 것이 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어린이와 함께 살고 있거나, 어린이와 교류하지 않는 이상 어린이의 취향을 진단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필자에겐 조카가 있다. 조카를 '취재'한 결과, 필자와 조카 사이에 그나마 말이 통했던 것은 <포켓몬스터> 정도였다. 조카가 '1세대 포켓몬'을 알고 있다고 대답할 때, 필자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그 외의 콘텐츠로 조카들과 대화를 시도해보았을 때 필자는 좌절했다. 한 번 시도해보라. "삼촌 <신비아파트> 옛날 건데요", "<뽀로로>는 애들(네 녀석도 애면서!)이나 보는 건데요"와 같은 답변을 들을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을 찾는 일은 더 어렵다. 가장 참고할 만한 데이터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 '2023 아동청소년 게임행동 종합 실태조사'다. 아동청소년의 65.2%는 이미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가장 많이 하는 게임은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와 같은 샌드박스 게임(23.7%)으로 나타났다. 그 뒤는 <브롤스타즈>, <발로란트>, <서든어택>과 같은 슈팅게임(23.5%)이 차지했다. [4] * 청소년이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 장르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샌드박스 게임은 정의 그대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세계를 창조하는 모래상자와 같다. 매달 1억 5천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접속하는 <로블록스>는 플랫폼이다. 즉, 그 플랫폼에 접속해 직접 관찰하지 않으면, 무엇이 인기를 끌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유튜브를 들여다 보지 않으면 요즘 뜨는 '인급동'(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린이들은 <로블록스> 플랫폼 안에서 이 게임 저 게임을 탐험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로블록스>가 곧 게임과 같을 수 있다. 참고로 조카의 날카로운 분석에 의하면 <로블록스> 안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은 <입양하세요!>다. 본인은 <입양하세요!>에 '애들'이 너무 많아서 슈팅경쟁 게임 <머더>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을 옆에서 같이 들은 조카의 친권자는 <머더>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고, 필자는 대뜸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심판관이 되었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서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답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즐기는 게임에 <서든어택>이 이름을 올린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들은 더이상 TV나 잡지로부터 게임에 대한 정보를 얻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구독 중인 인플루언서가 특정 게임을 플레이하고, 학교 같은 내집단에서 두루 공감대를 얻었을 때 그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관찰된다. 재미만 있어 보인다면, 2005년에 나온 FPS도 서슴없이 즐기는 것이다. 필자의 유일한 취재원인 조카는 15세 미만이기 때문에 <서든어택>을 즐길 수 없었다. 주변에서도 <서든어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꼭 그 게임을 플레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뿐 아니라 각 게임 포털은 2차 인증 과정을 강화했기 때문에 예전에 필자가 그러했듯이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로 게임을 즐기는 것이 쉽지 않아진 모양이다.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10대 남성의 44%, 여성의 13%가 게임을 가장 즐겨하는 취미로 꼽았다. [5] 어린이들은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있지만, 그 자리에 한국 신작 게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인용한 표의 예시에 올라온 한국 게임 신작은 3년 전에 나온 <쿠키런 킹덤> 뿐이다. 고객의 모수 자체가 줄어드는 만큼 어린이 취향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 되는 듯하다. 임원을 설득하기 좋은 기획은 '10대들이 즐기는 게임'보다는 '40대 직장인들이 즐기는 게임'일 것이다. 한때 게임은 '어린이들이나' 즐기는 매체로 여겨졌다. 오락실에나 PC방에나 어린이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찾아보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게 됐다. 애초에 그들의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케이드와 PC방 산업의 규모가 줄어들었을 수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가보자. 앱스토어의 게임 - 어린이 탭으로 가면 인기 차트의 1위는 <유튜브 키즈>가 차지하고 있다. 2위는 색칠놀이 게임 <퀴버>, 3위는 샌드박스 게임 <토카보카 월드>, 4위와 5위는 <밴드 키즈>와 <아이들나라>이다. 온전한 의미의 게임은 2번과 3번이고, 4번은 학교 모임, 5번은 '학습'을 위한 앱이다. 구글 플레이스토어 '키즈' 란의 '삶이 풍성해지는 게임' 코너에서도 <유투브 키즈>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 양대 마켓의 상위 차트는 보호자가 어린이로 하여금 건전하고 학습적인 콘텐츠를 학습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듯하다. 정작 어린이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로블록스>가 순위에는 빠져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로블록스>는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공하고 있지만, 그 안의 게임들은 비슷한 또래의 창작자들이 직접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가정의 달의 그믐에 생각한다. 어린이를 위한 게임은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걸까? * 5월 31일 앱스토어 게임 분야의 ‘어린이’ 코너 인기 순위. 게임이 거의 없다. [1] 박상우, 「<카트라이더>는 어떻게 국민 게임이 되었나」, 씨네21, 2005.09.16. [2] 김재훈, 신기주, 「플레이: 게임 키드들이 모여 글로벌 기업을 만들기까지, 넥슨 사람들 이야기」, 민음사, 2015.12.7. [3] 김재석, 「넥슨이 그리는 블록체인 메이플스토리의 꿈」, 디스이즈게임, 2024.03.23. [4] 「2023 아동청소년 게임행동 종합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24.03.05. [5] 「한국인이 좋아하는 50가지 [문화편]」, 한국갤럽, 2024.05.22. Tags: 게임이용자, 유소년, PC방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자) 김재석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 ​

  •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 Back [UX를찾아서] 오버워치에는 미니맵이 없다 05 GG Vol. 22. 4. 10. 미니맵은 게임에서 주로 사용되는 UI(User Interface)중 하나로, 게임의 상단이나 하단 구석에 항상 압축적이고 간략하게 표시되는 작은 지도를 말한다. 특히 MMO(Massively Multiplayer Online) 게임이나 FPS(First Person Shooter) 장르에서 게이머의 시야는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미니맵이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확장된 버전의 전체 지도는 특정 버튼을 눌렀을 때 보이는 토글(toggle) 화면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미니맵은 대부분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Head Up Display)로서 화면에 상시 표시된다. 게이머는 미니맵을 통해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 환경과 사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게임에는 크게 두 가지의 공간 감각이 동원된다. 아바타의 신체를 경유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얻는 감각을 지각된 공간감각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전체적인 게임 세계 속 스스로의 위치와 관계를 파악함으로서 얻게 되는 인지된 공간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니맵은 그러한 두 차원의 공간감을 통합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미니맵은 게이머가 게임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주며 게임의 그래픽이나 서사가 미처 채워 넣지 못한 공간감을 보조해 준다. 나아가 공간을 사회적 행위의 결과물로서 구성된 것으로 본다면, 게임 환경을 그려내는 3D 그래픽이나 프로그래밍 된 물리법칙과 마찬가지로 미니맵 또한 게임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 글에서는 게임 속 미니맵이 무엇을 그려내고 재현하는지 보다는 미니맵이라는 비유를 통해 조망하는 시점과 가시성이 어떤 위계 관계를 만들어내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는 게임 내에 구현되는 공간을 넘어, 게임을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서열체계와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적 맥락을 생각해보도록 한다. 다만, 이 글이 이론이나 구체적인 분석을 포함하기 보다는 관련된 역사와 사건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미니맵”과 같은 글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미니맵의 작은 역사 * 〈Rally X〉(1980) 우측의 미니맵(위)과 〈Defender〉(1981)(아래) 상단의 미니맵. 미니맵의 초기 형태는 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니맵은, 지금과 비교해서 굉장히 단순한 그래픽을 사용했던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들, 가령 〈Rally X〉(1980)이나 〈Defender〉(1981) 같은 게임들에서도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아케이드 게임에서는 주로 단조롭고 비슷한 지형지물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미니맵은 지도의 역할보다는 근처의 적들을 보고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레이더 기능을 하는 것에 가까웠다. 미니맵이 조금 더 ‘지도’와 유사한 형태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에 발매된 〈젤다의 전설〉에서 부터이다. 화면 좌측 상단의 회색 사각형은 젤다의 전설이 배경이 되는 하이랄의 전체 지형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안의 초록색 점은 현재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구역이 전체 지형 중에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오늘날 다양한 정보와 기능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미니맵과는 달리, 당시의 미니맵은 플레이어의 위치 외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았으며 상호작용도 전무한 수준이었다. 1986년작 젤다의 전설에서 미니맵의 그래픽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동하더라도 플레이어가 화면에 표시되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초록색 점은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젤다의 전설〉(1986). 왼쪽 상단의 회색 사각형이 미니맵의 역할을 한다. * 〈젤다의 전설〉(1986)의 전체 맵. 이것이 미니맵에서 회색 영역으로 표시된다. 〈슈퍼 메트로이드〉(1994)에서는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해 플레이어가 탐험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플레이어가 이미 탐색한 지역을 붉은색으로 표시해주는 기능을 도입한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직 탐색하지 않은 미지의 지역을 가리거나 까맣게 남겨두어 정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전장의 안개(fog of war)는 1977년 작 〈엠파이어(empire)〉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지만, 이를 미니맵에 도입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평가받았다. * 〈슈퍼 메트로이드〉(1994). 우측 상단 미니맵에 플레이어가 지나온 지역이 붉은색으로 표시된다. * ‘전장의 안개’를 처음 도입한 〈엠파이어〉(1977). 이런 ‘전장의 안개’는 다른 게이머와 대적하는 멀티 플레이어 RTS(Real-Time Strategy) 장르 게임에서 자주 이용되는 게임 메커니즘이다. 아군 유닛을 전장의 안개가 낀 지역에 정찰 보내 시야를 확보하고 적군의 위치와 진입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이 같은 게임들에서 필수 전략으로 여겨진다. 일부 악의적인 유저들은 불공정한 방식으로 승리하기 위해 전장의 안개를 없애주는 불법 프로그램(맵핵; map hack)을 사용하기도 한다. * 아군이 정찰하지 않은 지역의 정보가 ‘전장의 안개’로 차단되는 〈스타크래프트〉(1998). 왼쪽 하단이 미니맵이다. 이런 ‘전장의 안개’가 적용된 미니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적인 지도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의 지도 제작은 식민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고 자주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과 타 민족과의 전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마치 RTS 대전 게임에서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미지의 검은 땅을 정찰하고, 적군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도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축소하고 기호화 시켜 표현한 재현물이라면, 그러한 지도를 재현한 미니맵은 게임 공간의 재현, 그리고 지도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재현에 대한 재현이 된다. 2000년대 이후 MMO, RPG, 오픈 월드 어드벤처 등 다양한 장르의 게임에서 미니맵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게 되었다. 도로, 몬스터, 적군, 친구, 퀘스트 가능 여부, 상점과 여관 등 건물들, 목적지까지의 거리, 방위 등 많은 정보들이 기호와 아이콘으로 표시되어 플레이어에게 제공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는, 화면의 한 구석을 차지하던 이런 미니맵이 유명 트리플-에이 게임 시리즈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7년, 한 코타쿠(Kotaku) 기자는 “지난 15년 동안 부상한 대악마, 비디오 게임 미니맵의 지배가 마침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2017년부터 줄줄이 발매된 〈어쌔신 크리드(assassin’s Creed)〉, 〈호라이즌 제로 던(Horizon Zero Dawn)〉, 〈파 크라이(Far Cry) 5〉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거나 그 자리를 작은 나침반이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 어쌔신 크리드의 디렉터 진 게스돈(Jean Guesd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미니맵에서 하나의 아이콘에서 다른 아이콘으로 이동하는 이러한 방식을 깨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쏟은 노력과 자원 때문에 우리는 플레이어가 주변 풍경을 바라볼 수 있기를 정말로 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니맵을 나침반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 나침반은 여전히 힌트와 정보를 제공하지만, 당신 역시 세계에 참여하고 더욱 관여해야 합니다.”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미니맵이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고 조잡한 아이콘과 목적지를 가르키는 화살표만 따라가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처음 게임에 미니맵이 도입되었을 때, 게이머들에게는 비디오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일종의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게임이 등장하고 40-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미 베테랑 탐험가가가 된 게이머들에게 미니맵은 오히려 세계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걸리적거리는 요소가 된 것이다. * 〈GTA 3〉 왼쪽 하단에 위치한 동그란 미니맵. 내려다보는 자와 그러지 못하는 자 FPS 장르 게임들인 〈배틀그라운드(PlayerUnkown’s Battlegrounds〉(2017)와 〈포트나이트(Fortnite)〉에는 미니맵이 있지만, 〈오버워치(Overwatch)〉(2016)에는 미니맵이 없다. 2016년, 〈오버워치〉의 치프 디자이너 제프 카플란(Jeff Kaplan)은 왜 〈오버워치〉에 미니맵을 추가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초보 유저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앞으로도 미니맵을 도입할 생각이 없다고 답한 바 있다. 미니맵을 제공했을 때, FPS 장르에 익숙한 고수 유저들과 초보 유저들 간의 실력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지기 때문에 초보 유저들을 배려하기 위해 미니맵을 제공하지 않도록 선택했다는 것이다. 전장의 안개를 구현하는 RTS 장르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전 게임들에서는 정보 싸움이 승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다만 〈오버워치〉에서는 적의 위치나 진입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UI가 구현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고지대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운용하는 캐릭터 조합과 전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지대를 선점했을 때 적군에 비해 공격할 수 있는 각도가 잘 나온다거나 후방 유닛을 공격하기가 쉬워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야를 확보해 진입경로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오버워치〉에서는 이러한 고지대를 선점할 수 있는 점프기나 z축 이동기가 있는 유닛들을 선택하는 전략이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오버워치〉에서도 미니맵과 유사한 화면을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오버워치〉의 프로 레벨 경기를 시청하는 것이다. 공식 〈오버워치〉 리그는 게임 리그 시청자들에게 게임의 상황을 최대한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의 화면을 제공한다. 그러한 시점 중 하나가 바로 이 탑-다운(Top-down) 시점이다. 이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 옆에 띄워주는 화면은 아니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미니맵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진영과, 유닛들의 진입 경로와 대치 구도를 아이콘을 통해 설명하는 화면이라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 〈오버워치〉 리그의 탑-다운 뷰. * 〈오버워치〉 리그의 중계 화면. 뿐만 아니라 과거 〈오버워치〉 리그의 공식 중계 사이트였던 트위치(Twitch)에서는 〈오버워치〉 리그 올-액세스 패스(Overwatch League All-Access Pass)를 구매하는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시점과 각도로 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준 바 있다. 이는 시청자들에게 엄청난 스펙타클을 제공해주었다. 경기가 중계되고 있는 메인 화면과 더불어,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몸에 그대로 들어가 마치 그의 몸에 빙의한 듯한 시점으로 경기를 시청할 수도 있었고, 위에서 본 탑-다운 시점과 같이 위에서 모든 유닛들을 내려다볼 수도 있었다. 정작 게임을 플레이하는 선수들의 캐릭터는 게임 내 중력법칙에 묶여 게임 속 땅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했던 반면 (물론 특정 기술을 사용해 잠시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는 있다) 게임을 시청하는 사람과 중계진은 자유롭게 떠다니며 선수-캐릭터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시점에 대한 일종의 공간적인 비유로서, 프로 선수와 시청자 간의 높고 낮은 위치 설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오버워치〉 리그를 플레이하는 프로 선수 안에서도 고지대를 선점한 플레이어와 그렇지 못한 플레이어가 있는 것처럼,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선수와 리그 경기를 시청하는 시청자 사이에는 가시성의 격차가 존재한다. 〈오버워치〉의 플레이어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높은 지대로 올라가야한다. 하지만 아무리 고지대를 선점하더라도 선수는 관객이 볼 수 있는 광경을 볼 수 없다. 반면 관객은 선수의 시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야와 정보의 불균형함은 제레미 벤담이 제안하고, 미셸 푸코가 근대적인 공간의 전형으로서 비평했던 파놉티콘의 구조를 연상시킨다. 미셸 푸코는 학교, 병원, 군대와 같은 공간들도 본질적으로는 파놉티콘 구조를 띄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감시 체계는 그러한 시설 안의 재소자들(학생, 환자, 군인들)을 유순하게 길들인다고 보았다. 파놉티콘 구조는 오늘날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정보의 세계에도 편재한다. 빅 테크 회사들이 이용자의 성별, 나이, 위치, 검색 기록과 시청 기록 등 갖가지 정보를 수집해 맞춤 광고를 내놓는다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버워치〉와 같은 대전 게임에서 미니맵이 사라지는 것은, 앞서 제프 카플란이 말했듯,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소수의 고수가 정보를 독식하는 것을 견제하고 게임이 극단적으로 서열화 되는 것에 맞서는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여전히 이스포츠의 관객에게는 선수가 볼 수 없는 것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는 마치 신과 같은 눈이 부여된다. 물론 이러한 시선의 위계가 게임 리그를 시청하는 재미의 큰 부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모든 것을 조망하는 절대적인 관찰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김지윤 연세대학교에서 언론홍보영상학과 인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게임을 하다가 게임의 신체적 퍼포먼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게임 연구를 시작했다. 여성 게이머의 게임 플레이 경험을 분석한 석사학위 논문을 써서 2020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우수 학위논문상을 받았다. 현재 미국 시카고대학 영화·미디어학과 (Cinema and Media Studies) 박사 과정에서 게임문화를 전공하고 있다. ​ ​

  •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 Back 곤잘로 프라스카, 공감과 공환의 매체를 꿈꾸다 04 GG Vol. 22. 2. 10. 앞으로 소개할 곤잘로 프라스카(Gonzalo Frasaca)는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게임 개발자이며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게임 규칙과 놀이 행위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론’(ludology)의 주요 이론가이다. 게임을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보며 서사로서의 게임 연구를 고수한 ‘서사론’(narratology)에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놀이냐 서사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 논쟁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지만 프라스카는 게임 연구에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나아가 우르과이 출신 게임 개발자로서 그는 상업적인 게임과 실험적인 게임들을 넘나들면서 독창적인 게임들을 개발하기도 했다.『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이라는 학위논문을 쓰기도 한 그의 관심은 게임을 통해 억압과 폭력, 차별, 전쟁과 같은 사회의 현실 문제와 씨름하는 게임들을 만들어 왔다. 프라스카가 제안하고 실천한 ‘시리어스 게임 serious games’, ‘뉴스게이밍 newsgaming’, ‘교육적 게임 educational games’, ‘다큐게이밍 docugaming’ 같은 프로젝트들은 상업적 성공을 향한 오락 일변도의 주류 게임을 넘어 게임의 사회적 효용성과 실천적 잠재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게임이 교육과 사회적 인식이라는 목적을 강조하다 보면 재미라는 게임의 핵심 요인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날이 다양해져온 게임의 장르와 콘텐츠, 그리고 게임 테크놀로지와 게이밍 환경의 꾸준한 진화 속에서 프라스카의 제안과 실험은 일정한 시의성을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게임을 만들고 누구나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의 민주화’에 값하는 ‘놀이 정보계’(ludic infosphere)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게임생태계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토론하고, 나아가 사회 인식과 공감의 상승을 시도하는 프라스카의 꿈은 ‘몽상’만이 아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게임들만이 주로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현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의미 있는 문제작들이 발표되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인식’의 균형을 향해 아직 나아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시리어스 게임’, ‘임팩트 게임’의 초기 제안자라 할 만한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정치적 에듀테인먼트와 시사 게임 프로젝트 프라스카의 게임 철학은 “비디오게임이 반드시 오락적일 필요는 없다”는 다분히 논쟁적인 선언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이러한 진술은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이다. 프라스카 역시 게임의 오락성과 재미를 중시하고 그가 만든 게임들 역시 재미적 요소를 강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그의 게임인 는 1천 300만 카피를 팔 수 있었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프라스카의 게임관과 실험은 세계적인 독일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이며 실천가였던 브레히트(B. Brecht)와 그를 계승한 실험적 연출가 보알(Augusto Boal)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재미라는 것이 주류 대중문화와 오락산업의 관행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와 오락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굳이 시끌벅적한 스펙터클 속에 순간적 쾌감이 아닌 주변 현실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가운데서도 재미와 오락을 찾을 수 있음을 모색하는 것이다. 브레히트가 말하는 ‘배움의 재미’ 혹은 ‘깨달음의 재미’는 프라스카에게도 이론적ㆍ실천적 화두였던 셈이다. 프라스카에 따르면 비디오게임은 원래 비오락적인 용도로 탄생했다. 군사훈련을 위해 도입된 각종 시뮬레이터들이나 명시적으로 교육적 목표를 표방하는 게임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디지털 에듀테인먼트’(Digital Edutainment)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교육용 게임들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에듀테인먼트’는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를 결합해서 만든 신조어로서 학생들의 참여와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이나 수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바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능해진 학습자의 능동적 상호작용과 참여 가능성은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까지 여겨졌다. 곤잘로 프라스카 역시 학습 플랫폼으로서 디지털 미디어가 갖는 요소들을 인정하며 이러한 장점들을 비디오게임의 사회적 기능전환에 유용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대체로 오늘날에도- 비디오게임의 교육적 활용이 순전히 수학이나 과학, 어학 교육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프라스카의 관심은 유저들이 상호 토론과 공감을 통해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비디오게임의 디자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이상적인 비디오게임의 모델은 다음과 같은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의 구상에 기반한 게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3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더욱 복잡한 사회적 비평을 계발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시뮬레이션의 문화적 파급력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이 모든 시뮬레이션들을 일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는 있다. 이는 모델 고유의 가정들에 대한 플레이어의 도전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시뮬레이션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평은 시뮬레이션을 의식-상승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서 시뮬레이션은 비디오게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말처럼 그의 실험이 이루어지던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게임들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혐의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못하다. 이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괴물이나 몬스터, 트롤들 일색이거나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일상인들과 거리가 먼 캐릭터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심시티〉나 〈심즈〉 등 현실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들의 등장하고 멜로, 역사물, 갱스터 등의 장르들로 게임의 소재와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상황이 많이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임들 다수는 현실의 문제나 모순들을 회피하고 ‘디즈니랜드 같은 방식’으로 삶을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라스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게임 연구자들에 의해 게임에 대한 무비판적 동일시를 의미하는 ‘에이전시’(agency)와 ‘몰입’(immersion)이 게임의 바람직한 효과들로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플레이어-주체가 게임 규칙과 그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의 창조야말로 게임 개발자의의 미덕이라고 보는 사이 인종/젠더/민족(국민)/종교 등의 차별 의제들은 살며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주류 게임들이 상업적 성공에 꽂혀 현실의 억압과 차별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미지 재현과 플레잉 규칙을 통해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고착화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게임의 판타지적 설정이 아니라 게임 대상들과 게임 규칙에 담긴 차별과 억압에 대한 무감각 혹은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이다. 우리는 비디오게임의 플레이가 연극이나 영화의 감상과 분명 다른 경험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와 비디오게임 캐릭터 사이의 거리는 다른 예술의 수용자-캐릭터 사이보다 훨씬 더 밀접하다. 프라스카의 지적처럼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라라 크로프트가 혹 신장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마리오가 편집증 증세를 지닌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나 게임상의 괴물들은 모두 수단이고 커서일 뿐이다. 게임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평면적 캐릭터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그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가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슈퍼맨, 스파이더맨, 제임스 본드 등의 영웅이고 싶지만 게임의 경우 그런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게임에서 우리가 바로 그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게임에서 마리오는 영웅이 아니다. 내가 바로 영웅이고 마리오는 하나의 커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에게 자유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게임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행위를 위한 커서가 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를 게임의 영웅 혹은 신으로 자각한다. 게임의 자유도와 상호작용성에 따른 게임의 몰입은 게임 이면의 규칙에 묻어나는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를 ‘자연화’(neutralization)하기 쉽게 만든다. 프라스카는 주류 컴퓨터게임들의 이러한 한계들을 비판하면서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탐색하게끔 허용하는 캐릭터 중심의 비디오게임, 더 나아가 게임의 행동 규칙을 플레이어 스스로 변경할 수 있는 컴퓨터게임을 구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아우구스또 보알이 연극을 통해 실험했던 것을 컴퓨터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에서 관건은 “재미 경험을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적 이슈들과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강화하는 비디오게임”의 개발이다. 이러한 인식은 〈9ㆍ12〉나 〈마드리드 Madrid〉와 같은 프라스카 본인의 게임의 개발로도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의 작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게임 창작이 어려운 이들이 기존의 게임들을 비판적으로 ‘재매개’하여 자기 이야기를 만들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고전 게임들을 활용할 경우 유저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참여와 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야 게임 창작 도구나 제작 엔진의 수준이나 직관성이 크게 향상되고 ‘로블록스’나 ‘디토랜드’ 등과 같은 양질의 플랫폼이 발표되어 프라스카의 실험 제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무척 커졌다. 프라스카의 실험은 일종의 게임 모드(mod)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수준도 비약적으로 향상되기도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주체들의 의지와 인식에 달린 셈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게임들이 드문드문 인디 게임씬에서 발표되는 중이다. 게임 유저의 게임 모딩이나 창작의 환경이 지금보다 원활하지 않았던 시절 〈심즈〉를 이용하여 프라스카가 상상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 프라스카의 ‘억압받는자들의 비디오게임’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억압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억압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이 그랬듯이 프라스카의 게임은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들에 대해 ‘쟁점들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알의 연극 실험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으로서 비판적 사유와 논쟁을 위한 포럼(forum)의 역할만으로도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모든 게임들은 늘 제한적이고 이념적으로 편향적일 수 있다. 그리고 게임들은 개발자들도 예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플레이될 수도 있다. 프라스카는 문학이나 영화 못지않게 게임들도 훌륭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세리 터클의 주장에 동의한다. 터클에 따르면 게임과 시뮬레이션들에 있어 “시뮬레이션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이해는 정치권력의 핵심 요소이다. 시뮬레이션들에 강요된 왜곡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더욱 직접적인 경제적ㆍ정치적 피드백과 새로운 종류의 재현, 더욱 많은 정보의 채널들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다.” 프라스카는 이 정도로 게임 사용자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대안적인 게임 창작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개발자들이 한데 힘을 모으고 실천적인 사례들을 창안하고 확산시켜 나갈 것을 촉구한다. 이처럼 프라스카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은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보알의 ‘억압당하는 자들의 연극’ 이념과 테크닉들을 비디오게임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관객-배우’가 직접 경험한 억압적 상황을 무대에서 소개하고 그에 대해 배우와 동료 관객들이 참여하여 대안적 해결책들을 연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게임들을 디자인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기존 게임의 이데올로기적 가정들에 도전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당시로서는 주류 게임을 이용하여 그 게임의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최근에야 소극적이나마 플레이어들 스스로 개작한 모드 게임들을 공유하고 플레이하는 일이 낯설지는 않다. 〈로블록스〉를 통해 게임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직접 구매하여 플레이하며 동료 플레이어들 상호 간에 소통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프라스카는 대략 20여년 전의 기술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난해해 보이는 실험들을 제안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그의 작업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 프라스카의 첫 실험은 게임 역사상 매우 성공했고 중요한 게임이었던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즈〉를 기능전환하는 것이었다. 〈심시티〉의 개발자이기도 한 윌 라이트는 〈심즈〉에서 일상의 삶과 생활을 시뮬레이트함으로써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도록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심(Sim)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만들어 삶을 살며 주변을 관찰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원래 윌라이트는 이 게임의 아이디어를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책『패턴 랭귀지』로부터 얻었다고 한다. 이것은 건축이 인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256가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이라고 한다. 윌 라이트는 비디오게임을 통해 이러한 다양한 패턴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활을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을 만든 것이다. 〈심즈〉에서 우리는 인간관계나 가족관계, 혹은 인간관계가 어떻게 상호반응하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다.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디자인한 ‘심’들을 통해 인생을 계획하고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나간다.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동일시에 가까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심즈〉인 것이다. 플레이어가 ‘스킨 Skin’ 기능을 통해 직접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 벽지나 바닥재 등의 재료들로 집을 꾸미고 가족의 삶을 설계하는 일은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그중 단연 즐거운 것은 각종 게임 정보, 각 플레이어들의 캐릭터들과 심들의 삶 등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는 유저 커뮤니티가 있어 게임을 사회적 활동으로 승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커뮤니티 기능은 게임에 쉽게 싫증나지 않게 해주고 인간사의 여러 우발적인 사건들을 통해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회사가 계속해서 확장 팩을 내놓으면서 게임 세계와 행동 영역을 확장해나간 것도 게임의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프라스카가 〈심즈〉를 시뮬레이션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이 게임이 플레이어의 게임 변형, 즉 ‘모드’(mod, modification)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플레이 영상이나 그 경험물들을 게임의 일부로 수용하고 그것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신선하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심즈〉의 발표 당시 이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프라스카는 〈심즈〉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기능에 주목한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선호하는 영웅이나 스타, 혹은 자신들처럼 보이도록 캐릭터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를 구상한다. 물론 프라스카의 출발점은 원작 〈심즈〉의 규칙과 메커닉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이다. 이 게임은 가족의 삶과 인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게임 산업에서 분명한 약진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소비주의적 원리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플레이어들의 소유가 늘면 늘수록 친구가 늘어나는 식의 규칙을 내장하고 있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목된다. 이 게임은 도시 근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시뮬레이트하면서 전형적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즉 백인중상층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캐릭터들의 겉모습만을 바꿀 수 있는 자유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게임 개발자의 설정이나 규칙, 이미지 재현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프라스카가 게임 규칙의 전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심즈〉가 비판적 사유의 촉진을 위한 실험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서는 게임 규칙들이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접근을 허락하도록 충분히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캐릭터의 겉모습을 바꾸는 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가설들에 대한 도전과 변형을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자질구레한 규칙들을 변형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것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중에 발매된 〈심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캐릭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들에는 게임 혹은 게임을 만든 개발자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규칙에 대한 변경을 실험하도록 하는 것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의 목적이다. 우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외양 skins’ 다운로드 기능에 추가로 다양한 개성의 캐릭터 디자인과 이에 대한 플레이어 상호 공유 시스템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존의 심즈는 6가지의 행동 스타일 혹은 인물 성향에 따라서만 게임을 진행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게임의 현실감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동료 플레이어들이 어떤 플레이어가 디자인한 캐릭터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해 그들 각각의 대안들을 디자인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플레이어들 서로 서로에게 더욱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의 개선을 요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디자인 툴’을 제공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심즈〉는 보알의 연극 처럼 ‘과정 속의 작업’(work-in-progress)이다. 즉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해 해답이 될 만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훌륭한 논쟁과 토론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심즈〉에 대한 기능전환이 비디오게임 자체의 위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다만 최대의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해 기존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보다 더 많은 변형의 자유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프라스카가 아그네스(Agnes)라는 가상의 소녀를 통해 소개하는 사례를 통해 그의 생각을 구체화해보자. 아그네스 Agnes는 지금 한 동안 〈심즈〉를 플레이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 게임의 규칙과 기본 메커니즘을 알고 있고 그것을 즐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 관계가 보다 현실적이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 교환 Character Exchange’ 사이트로 가서 다양한 캐릭터들을 검색한다. 그녀는 흥미 있어 보이는 한 캐릭터를 발견한다. 이것은 ‘데이브의 알콜 중독 어머니 버전 0.9 Dave's Alcholic Mother version 0.9’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그 게임을 설계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어머니는 많은 시간을 일로 보내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 피곤하다. 여전히 그녀는 저녁을 조리할 것이고 약간의 청소도 할 것이다. 그녀의 가혹한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 어머니는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신다. 그녀는 아이들과 애완동물 때문에 매우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를 시험해볼 생각을 하고 그녀가 이전에 플레이해왔던 집 안으로 그 캐릭터를 다운로드한다. 이 가정은 부부와 세 아이들 그리고 고양이 한 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다운로드 이후 어머니는 ‘데이브의 알콜중독 어머니 버전 0.9’로 대체된다. 이 캐릭터는 흥미롭다. 한동안 그 캐릭터를 가지고 플레이하고 난 후 아그네스는 그 캐릭터가 어느 정도의 피로에 도달하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마시면 마실수록 가족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아그네스는 이 캐릭터가 꽤 잘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가 동의할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음을 느낀다. 이를테면 이 캐릭터의 배경은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덧붙여 이 캐릭터의 직업은 형편없다. 그리고 일들을 더 나쁘게 만들기 위해 ‘알콜 중독 어머니’는 거실의 작은 바에서 계속해서 퍼마신다. 아그네스의 생각에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은 빈약한 교육을 받았고 형편없는 직업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그네스는 일반적으로 알콜 중독자는 집 주위에 술병을 감추지 공개적으로 마시려 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캐릭터 교환’ 사이트로 가서 다른 알콜 중독 어머니를 찾아본다. 그녀는 유망해 보이는 ‘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2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를 발견한다. 그것을 실험한 후 그녀는 이 캐릭터의 행동이 그녀가 그것에 대해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적합함을 깨닫는다. 그녀는 엄마가 감리교도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버전의 디자이너가 고집한 이유에 매료된다. 그 사실은 엄마의 알콜 중독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캐릭터 디자이너의 웹 페이지를 체크하고, 이 캐릭터가 감리교도였던 어떤 실제 인물의 실제 이야기에 근거해서 만들어 진 것임을 말해주는 짧은 내러티브를 발견한다. 아그네스는 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알콜 중독의 행동 부분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감리교도 부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캐릭터의 코드를 변경하기 위해 ‘에디터 editor’ 기능을 이용하고 종교와 관련된 언급들을 삭제한다. 그녀는 또한 몇몇 작은 디테일들을 추가한다. 가령 엄마가 어떤 브랜드의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 후 그녀는 그것을 ‘아그네스의 알콜 중독 어머니 1.0-도로시의 알콜 중독 감리교도 어머니 버전 3.0에 의거함 Agnes' Alcholic Mother 1.o-Based on Dorothy's Alcholic Methodist Mother version 3.2’이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탑재하고, 주요 행동 규칙에 대한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몇 주 후 아그네스는 알콜 중독 어머니의 플레이에 약간 싫증을 느끼고 그녀에게 약간 더 많은 개성을 부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가 생태론자 ecologist가 되면 더욱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그네스는 ‘피터의 급진 그린피스 활동가 버전 9.1 Peter's Radical Greenpeace activist version 9.1’을 다운로드한다. 그녀는 자신의 알콜 중독 어머니에 약간의 부수적인 변형들과 더불어 피터 버전의 코드를 편집하고 그것을 카피하고 짜깁기한다. 이제 어머니는 식물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고 술에 취했을 때도 고양이를 차거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여러 차례 변형을 거친 후 아그네스는 스스로 설계한 게임을 사이트에 탑재한다. 이 게임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의 비평과 토론이 이어지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게임을 제작하고 탑재한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그네스나 다른 동료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변형 작업을 반복할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의 게임에 대해 크고 작은 규칙들을 변경하고 보태고 토론하는 과정은 보알의 ‘포럼연극’(forum theatre)처럼 어떤 억압적 상황에 대한 참여자들 각자의 생각들을 피력하는 가운데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는 공감과 협력의 과정이다. 이는 전설적인 비디오게임 〈스페이스 워〉의 완성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품을 팔던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과 그의 MIT 동료 해커들을 떠올리게 한다. 플레이어들은 크고 작은 정치적ㆍ사회적 억압들을 반영한 새로운 게임들을 디자인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게임에 비판적인 자기 의견을 반영하여 규칙이나 설정을 변경할 수도 있다. 어느 누군가의 게임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업그레이드 버전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나 합의 도출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각자의 생각들을 담아 스스로 만들고 보탠 게임들로 어떤 문제들을 공유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가며 인식의 확장과 상승을 경험하는 것이 프라스카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프라스카는 이러한 창작 플랫폼을 ‘메타 시뮬레이션’(meta-simul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다양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참여와 소통을 도와주는 게임 창작 시스템을 가리킨다. 하지만 사실은 ‘너 자신의 행동을 디자인해라’라는 기능이 윌라이트의 〈심즈〉 원작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다만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징하는 것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심즈〉에서는 플레이어들의 행동 폭 역시 무척 제한적인데, 그들 캐릭터는 ‘단정’, ‘사교적’, ‘활동적’, ‘쾌활’, ‘섬세한’이라는 주어진 성격 안에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복잡한 결들과 인간관계의 다층적 갈등들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프라스카가 보기에도 〈심즈〉는 다른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자유도에도 불구하고 규칙의 제한에 갇혀 있는 게임이고, 부자가 더 많은 친구를 갖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어 있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게임 개발자가 마련해둔 규칙과 행동 패턴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에 딴지를 걸 수 없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심즈〉에 캐릭터의 부분적인 변경 이외에 게임 규칙 혹은 행동 규칙의 변경의 자유를 플레이어에게 허용하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PMO’ 프로젝트: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억압받는 자들의 비디오게임’의 또 하나의 사례로 프라스카는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기’(Play my Oppression, PMO)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 역시 보알의 연극 테크닉인 ‘이미지 연극’(Image Theatre)에 바탕을 둔 실험이다. 이미지 연극에서 ‘관객-배우’들은 본인들의 억압적 상황이나 차별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몸 혹은 간단한 소품들을 ‘빚고’ ‘조각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해 볼 것을 요청받는다. 이 실험에서 ‘관객-배우’들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몸만을 이용하여 어떤 ‘이미지’를 조각해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미지를 수정하는 ‘이미지 연극’의 작업은 ‘몸으로 하는 포럼연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극의 목표는 우리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행위와 몸짓들을 통해 억압과 차별이 재생산되고 있고 가장 기본적인 육체적 수준에서 우리의 편향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다른 인종, 종교, 젠더, 국적 등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은 몸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보알의 ‘이미지 연극’을 통해 참여자들은 뿌리 깊은 차별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회구조와 제도 및 권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몸을 통해 체험하고 사유한다. 프라스카는 보알의 실험을 통해 처음 한 사람이 몸을 통해 제시한 자신의 ‘억압 이미지’에 대해 참여자들이 서로 그 이미지를 수정하며 일종의 ‘대안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 상호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참여자들 스스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나가는 점에 주목한다. 프라스카의 말처럼 ‘PMO’ 비디오게임은 몸이 아니라 마우스와 자판, 조이스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그는 연극에서의 몸이 아니더라도 비디오게임의 특별한 기능을 활용하면 보알의 퍼포먼스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다시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물론 ‘포토앨범’ 기능이 게임 규칙의 설계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고 플레이어 자신의 선형적인 내레이션의 창작만 허용한다. 이 기능을 이용하여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들을 활용하여 그것에 설명을 달고 자기만의 ‘가족앨범’을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재구성한 이 앨범은 인터넷에 마련된 사이트에 올릴 수 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능을 자기만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물론 〈심즈〉를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는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게임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주요한 장면을 캡쳐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임으로써 자기만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심즈〉의 디자이너 윌 라이트가 소개한 포토 앨범 중에는 폭력 남편과 살던 여성의 동생이 올린 글이 있었다. 인터넷 심즈 사이트에 올라온 이 콘텐츠에는 언니와 동생의 관계, 언니가 폭력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경위, 남편이 더욱 폭력적으로 되어가면서 파경에 이르게 된 사연 등을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물론 허구적일 수도 있는 이 스토리는 무척 현실감이 있는 것이었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활발한 토론의 계기를 제공했다. 윌 라이트는 게임의 토론 유발과 공감대 형성 과정에 주목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스토리텔링 구성 기능을 강화하기도 한 바 있다. 하지만 프라스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의 이행을 위해서는 〈심즈〉의 ‘포토앨범’ 기능이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화나 영화 같은 정적인 내러티브 시퀀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즉 게임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즈〉의 원래 ‘포토앨범’ 기능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완결적’ 사건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가 작성한 스토리는 고정된 것이고 닫힌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에 의한 이야기 변경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스토리를 경험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에 대해 댓글만 올릴 뿐 상황 자체의 변경을 통한 대안 제시로까지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프라스카는 ‘폭력남편’ 이야기를 올린 플레이어의 진짜 의도가 또 다른(‘대안적인’) 게임의 창조였다는 가정하에서 일종의 기능전환을 시도한다.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다른 행동 모델들을 실험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인간 관계들과 물질적 상황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상호토론을 통해 인간과 현실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자신들이 직면해 있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반성과 사회적 인식의 강화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프라스카의 기대이다. ‘나의 억압을 플레이하라’, 즉 ‘PMO’의 실행을 위해서는 우선 한 참여자가 직접 겪거나 경험한 개인적 문제와 고민을 모델화한 게임을 창조할 수 있다. 이후 다른 참여자들은 그것을 플레이해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심지어 어떤 플레이어들은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 입장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게임을 창조할 수도 있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에 대한 플레이와 토론, 수정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사회ㆍ정치적 대화의 차원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다. 물론 플레이어들 스스로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많은 게임들이 플레이어의 참여를 위한 다양한 툴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그리고 비교적 쉽게 게임을 변경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방편들이 주어지고 있다. 프라스카 역시 앞으로 컴퓨터게임이 더욱 대중화될수록 ‘시뮬레이션의 처리능력'(simulation literacy) 역시 더욱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오늘날의 시뮬레이션 창작 환경은 프라스카의 기대와 상상 그 이상으로 진화를 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곤잘로 프라스카가 제시한 사례를 통해 ‘PMO’의 과정을 구체화해보자. 프라스카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부모나 주변에 ‘커밍아웃’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터(Peter)라는 주인공을 가정하여 샘플 시나리오를 짠다. 일단 게임 커뮤니티에서 피터의 시나리오가 승인되고 나면 그는 이 문제를 토론하려고 하는 방에 게임을 만들어 놓는다. 프라스카는 이를 ‘옵 게임’(op-games, oppressive games), 즉 억압을 시뮬레이션 해놓은 게임으로 부른다. 이 게임에는 피터의 주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복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문제들이 재현되어 있다. ‘옵-게임들’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보알의 연극처럼 성소수자 피터가 겪을 수 있을 문제들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피터의 경우에도 부모에게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들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고전 게임의 레벨 디자인처럼 말이다. 여기서 피터는 자신이 대결해야 할 세 가지 과제, 혹은 꼭 극복해야 할 세 개의 난제를 비디오게임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각각의 게임에 〈모욕〉, 〈나는 누구인가?〉, 〈사회〉라는 제목을 달아주었다. 〈모욕〉은 이상한 놈 취급을 당하는 주인공 피터가 주변 사람들, 특히 학교 친구들에게 어떻게 집단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는지를 보여준다. 피터는 우선 이 문제의 시뮬레이션에 적당한 고전 비디오게임을 선택한다. 피터는 손수 제작한 그래픽을 업로드하거나 이전에 누군가 제작해놓은 것을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디오게임의 기능 향상을 위해 몇몇 기능들을 추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일단 고전 게임들에 기반하여 다양한 모드들을 창조해보고 그중 피터의 사건을 재현하는 데 유용한 것들을 선별하여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능성들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고 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에게는 피터의 버전을 더욱 정교하게 개선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프라스카의 피터는 다음과 같은 일러스트로서 자신의 첫 번째 게임을 표현한다. 이 일러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피터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게임 모딩의 템플릿으로 선택했는데 외계인의 우주선 그래픽을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 학생들의 모습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원작 게임에서와는 달리 피터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발사할 수 없다. 피터가 지금 겪고 있는 곤란은 동료학생들의 집단 이지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처럼 행동을 통해 사태를 해결해버린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저 이 게임을 즐기면 그만일 뿐 그 이상의 토론과 작업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는 이 시뮬레이션에 첨부해 놓은 ‘디자인 노트’에 이러한 사정을 밝혀 놓았고,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플레이어들은 집단 토론과 참여를 통해 사태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몇몇 플레이어들은 피터의 게임을 수정하여 다른 버전의 게임을 디자인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 그림은 플레이어들이 제안한 또 다른 해결책을 보여주는 게임 그래픽들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이 주제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할 수 있는 예술작품(가령 노래나 시)을 창조하고 반 아이들과 이를 공유함으로써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다보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플레이어는 귀를 막고 있는 캐릭터를 통해 주변 학생들의 모욕스러운 공격들을 무시해버리라고 제안한다. 피터의 게임들에 대한 이러한 변형은 무척 간단한 것이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변형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다중 선택’(multiple-choice) 매뉴얼을 활용함으로써 원작 게임의 모든 그래픽을 변경할 수 있고 자신의 사진이나 UCC 그래픽들을 업로드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탑재된 게임들을 매개로 오고 가는 다양한 의견들은 개인적 수준의 소박한 해결책부터 동성애나 소수자, 왕따 문제 등에 대한 사회ㆍ정치적 구조 분석과 원인 진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스카는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플레이어들의 사회적 인식이 상승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게임의 다음 모형은 대전게임의 고전 〈스트리트 파이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피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여 게임을 디자인해 놓았다. 그는 거울에 반사된 자기를 볼 때마다 ‘괴물’을 본다. 내면의 성적 성향과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적 시선이 충돌하는 가운데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 기괴한 ‘괴물’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디자인 노트’에 피터는 이러한 일이 가끔 일어나는 일이며 그때마다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라는 분열적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 게임에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 두 정체성’이 계속해서 치고 박는 싸움을 벌이는 일이 전부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피터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쟁점이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게임들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답보다는 좋은 대화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법이니 말이다. 마지막 게임인 〈사회〉의 실물 모형은 〈테트리스〉를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 커플을 짝지을 수 있다. 만일 플레이어가 소녀-소년 커플로 짝을 지우면 그 커플은 계속 재생산되거나 복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도 어떤 커플이 가장 이상적인 커플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플레이어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역시 게임의 목표는 엔딩을 맛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게임들은 모두 ‘열린 게임’이고 이는 참여자들의 토론과 참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플레이어는 성적 취향이라는 것이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들을 토론할 것이고, 모든 커플의 차이는 그저 차이에 불과한 것일 뿐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정상가족’이라는 사회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단 세 게임이 모두 온라인에 탑재되고 난 후 모든 참여자들은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가운데 다양한 참여를 할 수 있다. 그저 게임만 플레이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게임 소감부터 피터의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해결책들을 댓글의 형태로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떤 참여자들은 피터의 세 게임들에 자극을 받아 게임을 모딩함으로써 수정된 버전의 게임을 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그림은 〈팩맨〉에 기반하여 다른 플레이어(일명 ‘캐시’)가 디자인한 대안적 게임이다. 물론 ‘포럼’은 피터의 게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겠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게임들이 토론의 대상으로 추가되면서 더욱 많은 크고 작은 토론들이 가능할 것이다. 캐시(Cathy)라는 여성은 〈사이먼이 말하기를〉이라는 게임을 이용하여 몬스터 게임을 디자인한다. 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1등 따라하기〉 놀이처럼 말이다. 플레이어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그 이미지는 서서히 변할 것이다. 캐시는 예전에 피터와 동일한 경험을 했었고 스스로 감내하고 맞서야 했던 수많은 차별적 상황들을 게임에 담아놓았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 그녀는 친구의 도움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를 자기 게임의 테마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결국 게임의 플레이와 토론 과정을 통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연대의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의 방안들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코로나 19의 상황을 거치며 우리의 삶이 무척이나 각박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중의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종, 젠더, 민족,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소수자들이 그들이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은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치며 사적인 이익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는 억압과 차별의 철폐를 향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최근의 경우처럼 퇴행적인 ‘갈라치기’의 흐름이 강고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 사회도 결국에는 동료 시민들과 ‘같이 살며 같이 즐기는’ 공환(共歡, conviviality)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미래는 그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 공동체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무개’들의 협력은 억압과 차별 없는 미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게임에 앞서 문학과 연극, 영화, 만화 등은 소수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감싸 안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상호작용’의 매체인 게임은 더욱 효과적으로 우리를 공감과 인식의 장으로 초대하며 연대의 매개자가 되어줄 것인가? 아직은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다른 매체들도 그랬던 것처럼 게임 역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주제로 즐기며 배우는 기회들을 보다 많이 제공할 것이다. 이미 의미 있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보알의 연극에 영감을 받은 곤잘로 프라스카는 비디오게임 역시 억압적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보알의 연극 테크닉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연기자가 되게 함으로써 개인적ㆍ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과 해결책들을 표현하게 한다. 물론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이상적 결론’이 아니다. 프라스카의 목표는 주류 비디오게임들의 당연시되는 규범들을 해체하고 게임을 사회적 의제(agenda)에 대한 토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들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사태들을 게임에 담아내고 그 게임을 같이 플레이하며 토론하고 숙의하며 저마다의 대안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라스카의 게임 프로젝트는 구체적 실천의 필수적 전 단계인 반성과 인식의 과정을 의미한다. 개인적ㆍ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현실 인식의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게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주류 게임산업이 주도하는 현실에서 프라스카의 비전들은 ‘몽상’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게임 창작 환경, 게임의 플레이를 넘어 ‘보기’와 ‘만들기’로 확장되고 있는 ‘게임하기’의 실천들은 게임의 다양성 환경 구축에 유리한 기회를 조성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주류 게임과 ‘다른’ 게임들에 대한 수요도 있다. 필요한 것은 게임 사용자들의 의지이며 전환적 사고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게임의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과 향유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김겸섭 독일공연예술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공연예술과 문화연구 관련 공부와 함께 공연 및 축제 연출과 기획일을 하였다. 이후 공연학 공부를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디지털게임 연구를 시작하였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디오게임』,『컴퓨터게임의 윤리』를 번역하였고 『모두를 위한 놀이 디지털게임의 재발견』,『노동사회에서 구상하는 놀이의 윤리』를 썼다. 지금은 독일공연예술과 문화콘텐츠 관련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 ​

  •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 Back 방치형RPG 비판 - 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17 GG Vol. 24. 4. 10. 방치형 RPG 비판 1) 2010년대에 ‘방치’는 많은 비디오게임(이하 ‘게임’)의 핵심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자리잡았고, 심지어 새로운 장르인 ‘방치형 게임(idle game)’까지 형성했다. 2)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게임 매체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모바일 게임의 성장을 추동했는데, 가령 캐주얼 모바일 게임인 ‘타비카에루(旅かえる)’는 5년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방치형 게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타비카에루’는 방치형 게임의 ‘이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시장은 ‘AFK 아레나(剑与远征)’, ‘마법거울의 전설(魔镜物语)’, ‘아이린 시편(爱琳诗篇)’ 등 ‘맵밀기(推图)’ 3) 를 큰 축으로 하여 수집, 육성, 트래킹, 턴제 자동전투 등 다양한 플레이 방식을 결합한 중국산 방치형RPG게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게임들의 시청각적 외관은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로직은 일관성이 있다. 심지어 게임의 전투나 스토리 전개는 알고리즘에 의해 생성되거나 구동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에서 자동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유형의 수익을 취하고 관리하기 위해 이따금 게임 속 개체를 클릭하기만 하면 게임을 최대한 즐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서로 ‘스킨을 교체한다’ 4) 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주의를 끌지 못하던 미니게임에서 대중화된 게임 장르로 변모한 이 질적 변화는 게임 역사의 자연적인 진화에 그치지 않으며,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가 되고 있다. ‘게임’이란 ‘현실’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현실의 문예적인 표상이며, 현실과 대응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장르의 미디어적인 특성상, 게임성을 커버할 만큼 스토리성이 강한 서사적 게임을 제외하면, 오늘날 RPG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오츠카 에이지(大冢英志)의 ‘거대 서사’ 5) 형식을 통해 객관적 현실을 명료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宽)가 말했듯 ‘거대한 게임’ 6) 의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투영할 뿐이다. 이에 따라 우노 츠네히로는 21세기 들어 RPG 등 방치형 게임 장르가 전후 일본의 서브컬처 속 ‘고질라 명제(ゴジラの命題) 7) ’, 즉 허구——객관적 현실이 아님——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주관적 현실을 게임을 통해 써내려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와 연관된다. 여기서 상상력은 게임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각 구조에서 주관적인 사회 현실을 추출하고, 이미지화하는 능력을 뜻한다. 객관적 현실을 발화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오늘날, 게임이라는 새로운 예술이 동시대에 대해 갖는 사명은 자역주의적 방식으로 객관적 현실을 직접 드러내는 게 아닐 것이다. 플레이 방식 등 신체적 감각에 호소하는 혁신적 형태로 주관적 현실을 구성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은 ‘고질라 명제’를 따라 현대 중국의 주관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로서 방치형RPG게임의 사회적 상상력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1. 자동화, 수동성, 자아의 구조 방치형RPG에 대한 산발적 논의에서 저우쓰위(周思妤)는 이런 게임의 핵심 특징은 “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는 것” 8) , 즉 플레이어가 최대한 플레이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플레이 방식은 게임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반역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촉각 매체 9) 이며, 그 매개적 특수성은 플레이어가 게임 장치와 빈번하고 밀접한 물리적 상호작용(즉, ‘플레이’)을 수행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통해 ‘입력 부족과 출력 과잉’ 10) 이라는 비대칭적 장력 속에서 플레이어의 신체적 경험 이상의 정신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우즈창(周志强) 역시 플레이어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게임의 시간(즉, ‘제3시간’)을 진정한 게임 내러티브의 시간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11) 한마디로 말해, 게임을 체험하는 정확한 자세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것에 있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플레이 방식은 이와 반대인데, 최대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 원리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역설적인 플레이 방법론을 구축한다. 이런 방법론은 어떻게 성립될까? 게임 과정의 자동화를 통해서다. 하지만 낮은 수준의 자동화 12) 는 모든 게임의 초석이기 때문에 게임의 자동화를 되풀이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거듭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플레이어가 인터페이스 내 임의의 위치를 클릭하면 아바타(avatar)가 자동으로 그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게임 설계가 실패하게 된다. 방치형RPG의 특수성은 자동화가 게임 프로그램의 국부적 자동 연산 및 실행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게임의 전반적인 작동 논리를 가리킨다는 것에 있다. 가령 ‘AFK 아레나’는 플레이어가 클릭하는 방식으로 이를 확인하고 추출해야 하는 경우에조차 다양한 자원 혜택을 제공한다. 이는, 표면상 방치형RPG가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이지만, 총체적 자동화(이하 ‘자동화’)의 게임 로직이 이러한 조작을 인체공학적으로 편안한 정도에 맞게 압축하고, 플레이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기존의 많은 게임들에서 노동력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방치형RPG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자동화된 스크립트 프로그램——모태는 반[反]플레이(counter-play)의 특징을 지닌 전자동 게임 ‘프로그레스 퀘스트(Progress Quest)’——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들의 방치형RPG 개입은 이런 게임들이 여전히 일반적 의미의 게임 '촉매'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합법성을 제공하고, 게임 배급사들이 게임 내 소비 행위(이하 ‘현질’) 13) 를 유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물론 자동화된 게임 로직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즉, 플레이어는 게임에 참여하지만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방치형RPG 플레이의 감수성은 능동적인 탐색, 구성 또는 초극이 아니라 항상 수동적이게 된다. 한마디로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먹이를 주고, 플레이어는 편안하게 입을 벌리고 게임 시스템의 아낌없는 선물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이 경험은 방치형 RPG의 대립자 14) 가 어긋나게 놓인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흔히 게임은 “실패의 예술” 15) 로 여겨지는데, 이는 게이머의 진로를 가로막는 다양한 대립자들, 플레이어의 기본 임무인 눈앞의 끝없는 대립자에 반복적으로 도전해 결국 게임을 클리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격투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ストリートファイターベガ)’를 할 때에는 마지막 상대인 베가(ベガ)를 이길 때까지 상대에게 한 번씩 패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방치형RPG에도 이런 대립이 있는데, 예를 들어 ‘엘피스 전기M: 스피릿 각성(斗罗大陆:武魂觉醒)’에서 ‘시련의 경계’에 도전했다가 전력 부족으로 패배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게임의 차이점은 대립하는 쌍방(즉, 플레이어와 게임)이 만났을 때 서로 어긋나는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즉, 방치형RPG의 자동화 논리로 인해 막을 수 없는 플레이어는 실제 높은 차원에 배치되고 반대쪽은 낮은 위치에 배치된다. 비록 낮은 단계의 대립자는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전진 속도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자동 전진하는 플레이어를 근본적으로 막거나 좌절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배칭형RPG와 일반 게임의 기본 차이점은 전자가 이론적으로 반대편을 이길 수 없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이머가 근본적인 ’게임불감증(卡关; 게임을 진행할 수 없는 프로세스)’으로 인한 부정적 감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이하 ‘방치형 플레이어’)가 게임 속 대립자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고통스럽게 개조할 필요가 없다. 시간함수가 증가해 낮은 단계의 대립자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현질로 이를 집어삼켜 소비주의의 쾌감과 만능성을 경험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가 반대편에 부딪혔을 때 '절대적 부정'을 느끼지 않고, 기껏해야 연속적인 플레이 경험이 끊기는 등 짧은 불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게임에서 현질을 하지 않는 대가일 뿐이다. 절대적 부정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플레이어에게 적대적인 액션 포지션이 할당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결 자체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방치형RPG는 “실패의 예술”의 반명제가 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게임에서는 대결하는 쌍방의 움직임과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플레이어는 정해진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플레이어는 역동적인 게임 내 역사적 여정을 구축하는 것에 참여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게임 체험은 자기자신과 게임 프로그램 간 상호작용에서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끝없이 공허한 순환 생성에 빠뜨릴 뿐이다. 따라서 방치형RPG는 기존 게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게임들에도 다양한 전투의 순간이 가득하지만, 그것의 역사적 여정은 다른 게임처럼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총력투쟁의 형태로 깊이 있게 추진되지 않는다. 비록 게임의 수치는 끊임없이 증식하고 비대해지지만(hypertrophy), 게임의 여정은 오히려 미리 설정된 알고리즘의 무성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가깝다. 단적으로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만, 유저들의 플레이 경험은 영원히 정체된 윤회 상태로 굳어져 ‘역사’는 끝난다. ‘역사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방치형RPG를 외형상 적개심으로 가득 찬 용담호혈(龍潭虎穴) 16) 을 날조할 뿐, 실제로는 한없이 순한 수치의 비경 속에 있다. 따라서 게이머들에게 철저하고 고통스러운 투쟁(清算)의 도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자신의 안전구역으로 퇴행(regression)하라고 유도하고, 보상이란 형태의 게임 시스템이 주는 긍정적인 경험을 기다리고 즐기게 함을 뜻한다. 또한 방치형RPG의 긍정적 체험은 독특한데, 그것은 전통 비디오 게임에서 이중 부정의 간접 형태가 아니라(가령 코나미 게임 ‘콘트라’는 끊임없이 적을 죽이고 게임 내 모든 부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효화한다), 오히려 게임의 알고리즘에 의해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통쾌함의 형태로 아낌없이 주어진다. 예컨대 ‘AFK 아레나’의 플레이어는 ‘키보드에서 손을 빼’ 17) 직접적으로 120분의 AFK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방치형 플레이어는 진정한 게임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부정적 능력만이 진정으로 게이머의 주체적 위치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주는 긍정적 경험만을 받아들이는 게이머들은 추상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개성이 없는 게임의 종속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와 게임의 대립 구도에서 플레이어의 주체성을 논하는 게 아니다. 게임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플레이어와 자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는 몹을 향한 공격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힘겨루기를 구성한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게임의 쾌락 구조에서 자신을 능동적인(향락적인) 행동 주체로 만든다. 이 행동의 주체는 사고와 신체의 측면에서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야만 게임에서 승리(예를 들어, 게임 중의 상대를 이기는 것)할 수 있고, 게임의 쾌락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앞서 언급한 이중 부정 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게임 시스템의 포획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을 게임 쾌락을 즐기는 능동적 행동 주체로 만들 수 없고, 자아에 대한 최후의 절제를 포기하고 게임 시스템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함으로써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방치형 플레이어는 게임의 호의를 행복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체적인 자기결정 구조를 상실한다. 그/그녀(플레이어)는 게임과 쾌감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뿐,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방치형RPG의 무대에서 서서히 펼쳐지고 있음을 사실을 불현듯 발견하게 된다. 2. 부성의 절대권력 방치형RPG는 게임의 역설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게임 장르처럼) 부정적 매체 18) (혹은 죽음의 매체)가 아니라, 긍정적 매체(혹은 삶의 매체)이다. 게이머들은 주로 게임 속에서 AFK 19) 형식으로 자동으로 생성되는 대량의 자원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앉아서 즐긴다. 게이머들에게 항상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이 게임은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다른 이념적 전략을 사용하는데, 경계에 있는 상처를 달래는 진혼곡을 부드럽게 읊조리며 ‘알고리즘 모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치유적 환각을 만들어낸다. 알고리즘 모성의 무조건적인 보살핌 아래 플레이어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 보상 등 위로의 형태로 긍정적 경험을 즐길 수 있으며, ‘수동적 자동 만족’에 기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 모성은 플레이어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행복한 유토피아처럼 보인다.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으로 인해 크게 붕괴되었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들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된다. 여기서 알고리즘적 모성은 플레이어에게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유토피아를 열어준다. 이 의심스러운 유토피아에서 플레이어의 욕망과 쾌감 사이의 장력은 긍정적인 경험의 자동 증식에 의해 크게 붕괴된다. 하지만 쾌감의 대량 증식은 여전히 플레이어에게 알고리즘의 모성과 그것이 구축한 세계의 선의에 사로잡혀 매혹되게 한다. 이처럼 방치형RPG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알고리즘의 모성을 이해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모성은 게임 역사에서 새로운 현상이며, 이를 논의하기 전에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가졌다는 근거, 즉 게임의 주권적 힘(sovereign power)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게임 내 절대권력은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절대적 관할권을 의미하며, 그 물질적 기반은 절차상의 출처(procedural authorship) 20) 이다. 그것의 관찰 가능한 형태(동시에 극치의 형태)는 곧 게임 시스템이 플레이어에 대한 생사여탈 권한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부정적 매체이기 때문에, 게임의 절대권력은 게이머들에게 주로 ‘죽음’의 관상을 보여주며, ‘죽음’(즉, 철저한 부정)의 의제를 지향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핵심 관심사는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피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새로운 예술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학문적 출발점이 됐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와 요시다 히로시(吉田寬) 등 일본 학자들은 ‘죽음’을 주제로 ‘게임 리얼리즘(ゲームのリアリズム)’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도 했다. 21) 물론 게임 내 모든 죽음을 절대권력의 소행으로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시스템 운영(system operation)과 단위 운영(system operation)에 대한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의 주장 22) 은 절대권력은 완전하고 선형적이며 정상적인 시스템 운영에서 나타나며 단위 운영의 절대권력은 분리되고(discrete) 불연속적이며 역동적인 단위 및 그 관계에 의해 가려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슈퍼마리오 브라더스’(スーパーマリオブラザーズ)를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사망/낙하”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시스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게임 시스템/규칙에 해당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리오 형제가 굼바(クリボー)와 같은 적을 건드려서 죽으면 플레이어는 단일 작전으로 인식한다. 절대권력의 관할권은 유닛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타자를 이길 수 없다는 우발적 경험이 항상 플레이어의 필연적인 절대권력 인식보다 우선한다. 물론 때때로 시스템 작동과 장치 작동이 임계점까지 당겨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RPG 게임은 스토리상의 필요에 의해 갑자기 게임 플레이어가 상대 캐릭터에게 패배하도록 강제하지만, 게임 스토리는 종료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이러한 캐릭터와 절대권력의 일시적 중첩 상태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현상은 종종 게임이 예외상태(또는 플레이어가 ‘무적’ 상태에 진입했음을 뜻함)에 있음을 나타낸다. 절대권력은 플레이어의 게임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마리오가 땅의 갈라진 틈에 빠지는 경우처럼) 항상 수동적이고 게임 배경에 숨겨져 있다. 플레이어와 능동적으로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막 통과하려고 할 때, 즉 게임 보스 23) 의 형태를 취하고 플레이어의 경로를 차단할 때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절대권력은 언제나 ‘제3자의 심급’ 24) 이란 위치에 놓이게 되며, ‘통제와 자유’ 25) 라는 게임의 절차적 변증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끝판왕을 물리치는 것뿐이다. 푸코와 아감본의 표현 26) 을 빌리자면, 절대권력은 형식적으로 고대 가부장적 권력(patria potestas)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모두 플레이어가 아바타 보스를 찾아 죽일 수 있는 최고의 권한만 갖는 ‘부친 살해’(弑父)의 구조 27) 로 이뤄져 있다. 현실의 외부(동시에 게임의 내부)에 취약하지만 완전히 환상적인 현실을 구축해야만 ‘부친 살해’ 게임을 통해 끝없는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미지’의 결말에 갇히게 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이 상황이 흔들렸다. 최근 성공한 인기 게임 장르의 중요한 특징은 게임 속 절대권력이 끊임없이 전면에 등장해 플레이어의 ‘아버지 살해’ 수단과 감각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슈팅(逃殺, 도살) 28) 게임은 ‘축권(縮圈)’ 메커니즘을 절대권력의 화신으로 삼아 플레이어와 게임 시스템 사이에 배제적으로 삽입된 도살 관계를 구축한다. 절대권력은 “칼을 든” 죽음 정치의 살벌한 모습으로 게임 전면에 내세워 게이머들을 수색하고, 프로그램화된 레토릭(procedural rhetoric) 29) 의 형태로 게이머들에게 부정적인 칙령을 내린다. 게이머들은 그 권위를 존중하되 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절대권력은 강력하게 감지되고-떠다니며-편재되는 방식으로 게이머들에게 능동적으로 배출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의 형상이다. 즉, 죽이거나 도전받지 않으며, 오직 당신의 복종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모습의 절대권력은 동시대 게임 역사의 상상력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전환을 지향한다. 그러니까 관문 마지막마다 숨어 있어 죽여야 하는 특정 보스(그들은 게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메타 스토리와 스토리의 임계점에 있다)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죽일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반복된다. 이 때문에 게이머가 보스의 위치를 파악해 죽임으로써 게임 시스템/사회 현실을 초극하는 상징적 질서는 무력화된다. 따라서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게임의 서사층 내에서 자동 증식하는 게이머들 사이의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의 싸움에 갇히고, 게임의 메타서사층에 존재하는 게이머와 게임 시스템 간 ‘거대한 이야기’는 돌파하지 못해 비정치적이고 퇴화하는 순환 구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이다. (상호텍스트화된) 게임의 세계를 뒤흔드는 통섭적인 기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추상화되고 만연해진 부권적 절대권력의 칙령에 게이머들이 끊임없이 에피소드 간 ‘생사’의 윤회에 뛰어오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경쟁(즉, 상호경쟁)으로는 총체적 게임/현실 딜레마를 벗어날 해결책과 초월적 쾌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영원히 공전하는 챗바퀴처럼 “지금-여기”에서 종결될 뿐이다. 3. ‘모성적 디스토피아’ 방치형RPG 역시 이 비관적인 사회적 상상력에 휩싸여 탄생한 게임 장르다. 절대권력은 늘 전면에 나서지만 상징 질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람을 살게 하는 부성적 절대권력이 아니라, 권력기술로 하여금 직접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모성적인 빛을 발하는 권력기술로, 그것의 상징물은 죽음의 ‘검’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모태’다. 이는 곧 앞서 언급한 절대권력에 관한 논의를 갱신해야, 비로소 방치형RPG라는 새로운 게임 장르와 그 은유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푸코와 아감벤은 모두 절대권력의 전형적인 특권 중 하나가 생살여탈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푸코의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들과 아감벤의 수용소에 갇힌 호모사케르는 형벌을 단지 형벌받는 환경——죽음의 위협 속에 던져진다는 뜻——에서 절대권력이 그들에게 휘두르는 다모클레스의 칼을 두려워 하고 있을 뿐이다. 방치형RPG는 완전히 반대다. 그것은 게이머를 긍정적 경험이 생산되고 흐르는 모태(즉, ‘긍정사회’) 30) 에 두고, 그들이 갈망하는 다양한 성장 자원을 자동으로 제공한다. 그들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위협도 가하지 않고, 다만 그/그녀를 정성껏 보살피고 만족시켜 줄 뿐이다. 태아들은 부정적인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태내에서 오는 긍정적 경험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방치형RPG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타카하시 루미코(高桥留美子) 31) 식 부권 억압(부정성 체험)이 없는 ‘낙원’, 즉 “물질만 있을 뿐 스토리텔링 32) 은 없”는 욕망의 공간을 만든다. 이 낙원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체험은 모두 제거되고, 게이머는 게임에서 실질적인 실패를 겪지 않는다. 기껏해야 욕구 충족의 지연을 직면할 뿐이다. 가령 ‘마법거울의 전설’의 게이머들은 중심 스토리의 자동 전투에 패배한 후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아닌 휴식 중이던 자의식이 ‘실패'라는 우발적 사건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는 걸 경험한다. [자의식이] 활성화되면 그들은 두뇌를 조금 사용해 다음을 선택해야 한다. 1) 기존 캐릭터와 소품의 구성 체계를 최적화해 시행착오를 겪고 확실한 자동 전투에 재투자한다; 2) 전쟁 전력을 즉시 높이고 자동 전투를 충족하기 위해 현질을 한다. 3) 현질 충동이 없다면 잠시 서브 스토리로 주의를 돌리고, 시간이 흘러 전투력이 자동으로 증가하면 메인 퀘스트에 계속 도전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게이머는 게임 프로그램의 대립자를 위해 배척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배를 경험한 취약한 순간에 모성의 절대권력에 안겨 그것과 조화 및 동일화되면서 재기한 후의 필연적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헤겔식]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이해하면, 방치형RPG에서는 긍정적 경험치가 끊임없이 자동 증가하기 때문에 게임 시스템에 대한 순종은 합리적 플레이 태도가 된다. [이 상황에서] 노예인 게이머는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므로, 자비로운 주인 편에 서서 더 유순해지고 일방적 상황에 순종적으로 빠져든다. 이 일방향적이고 사유하지 않는(thoughtless) 게이머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게임의 '좋은' 사실만 무분별하게 경험한다. 따라서 방치형RPG의 부정성과 비판성, 초월성, 그리고 절대권력은 결코 확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매직사이클(magic cycle) 33) 이 부여한 반은 자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게임의 쾌락과 현실에 대한 욕구가 자동 충족되는 방식으로 즐긴다. 분명히도 방치형RPG는 절대권력에 대한 게이머의 경계가 완전히 해제되어 게이머에게 반역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는 게임이 직면하게 되는 안티게임의 메커니즘을 근절할 뿐만 아니라, 게이머의 안티게임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소모했기 때문이다. 게이머의 모든 욕구를 부드럽게 충족시켜주는 방치형RPG는 게이머와 게임 간의 적대 관계를 시간함수에 따른 희소성과 만족감이라는 비적대적 공식으로 전환해버린다. 그렇기에 게이머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언제 실현될지, 어떻게 하면 그 실현을 가속화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된다. 이는 게이머가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착을 형성하고도 다른 게임처럼 안티게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방치형 RPG의 장점이다. 누가 자신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장난기 많은(게임) 어머니를 원망하고 반항하겠는가? 그러나 방치형RPG라고 해서 앞서 말한 잔혹한 슈팅게임의 안티테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동일한 사회적 상상력이 지배하는 상반된 게임 해결법일 뿐이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네이쥐안’ 사회——장기간의 고성장 이후 GDP 성장률이 실질적인 둔화기로 접어든 사회경제적 상황——의 가부장적 절대권력(즉, 슈팅게임)에 맞서 강경한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더라도, 그리고 네이쥐안이 마땅히 벗어나고 비판해야 할 잘못된 사회 상태라고 믿더라도, '게이머'는 개인의 생존을 위해 '결단력' 34) 을 갖고 잔인한 '사회/게임'(즉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탈출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를 말할 수 있는 사회적/심리적 공간이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치형RPG 속 절대권력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모성의 우산을 씌워주며, 긍정적인 게임 체험 쪽으로 끊임없이 속삭인다. “얘야, 넌 정말 대단해! 멋져! 내가 해결해줄게...” 다시 말해,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이머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게이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35) 게임/사회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폐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노 츠네히로의 말처럼 이것은 모성의 유토피아보다는 모성의 디스토피아(母性のディストピア)일 수 있다. 후자는 우노 츠네히로가 아즈마 히로키의 미연시 게임 장르에 대한 비평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서 발전한 독특한 서브컬쳐의 상상력을 설명한다. 그는 근대국가를 국가의 ‘아버지’로 의인화하며, 국민의 성숙은 그들이 국가 안에서 가부장제적 아버지 36) 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드래곤 퀘스트(ドラゴンクエスト)’와 ‘젤다의 전설(ゼルダの伝說)’ 등 일본의 국민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들이 공주를 구하는 서사는 얼핏 보면 사랑 이야기지만, 게이머가 공주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성숙(즉, 주인공에서 아버지가 되는 것)을 이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패전국 일본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은 승전국 미국에 의해 실추된 일본 아버지가 아니라, 태내부터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섬의 어머니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표면적인 게임 내용만 보면 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공주를 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층적인 문예 심리를 살펴보면 게이머가 공주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신의 성숙을 깨달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출된 공주는 대문자 어머니가 되고, 게임을 클리어한 게이머는 아버지가 되지만, 대문자 어머니에 의지해 성숙해지는 왜소한 아버지다. 모성적 디스토피아는 대문자 어머니가 왜소한 아버지를 키운다는 전후 일본의 상상력이다. 지난 10년 동안 우노 츠네히로는 모성적 디스토피아가 전후 일본에 한정된 특수한 상상력에서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한 보편적인 현대 사회의 상상력으로 진화했다며 그것의 설명 37) 을 확장해왔다. 인터넷 사회는 자녀(즉, 인터넷 사용자)를 정보 고치(즉, 태아)에 던져 넣고 모든 소음을 제거한 후,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모든 정보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로 계속 제공하는 사회이다. 그것은 모성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기 망상을 부풀린다. 이 같은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성의 디스토피아'는 발전된 개념이다. 우노 츠네히로의 연구 시야에는 중국 사회나 방치형RPG가 있지 않지만, 모성의 디스토피아의 통치 논리를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런 게임을 유토피아가 아닌 모성의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느냐는 점이다. 첫째로는 우노 츠네히로의 이른바 ‘모성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형RPG에서 모성적 폭력은 배제된 폭력이다. 그것은 게이머를 태아 속에 완전히 가두고, 온정적으로 그를 위해 태아 내의 모든 실질적 대립을 배제한다. 동시에 그것은 게이머의 성장을 촉진하는 부정성과 이질성도 배제한다. 이로 인해 그들을 편안한 자기 망상 속에 끊임없이 팽창시키도록 이끈다. 둘째, 일체화의 폭력, 즉 상술한 배제성으로 인해 게이머는 대립자(가령 방치형RPG의 다양한 몹)에게서 어떤 공고화된 타자성(Andersheit)이나 낯섦(Fremdheit)도 느끼지 않는다. 게임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통합(Gleichschaltung)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성적 폭력은 결국 긍정적인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런 폭력은 게이머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배척하지 않고 흡수한다. 과보호하는 방식으로 약화시키고 마비시켜 결국 게이머를 포획한다. 현실과 정반대인 알고리즘의 모성애에 취한 플레이어는 더욱 유순해지고 ‘투지’를 잃게 된다. 한마디로 모성폭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자아의 궁극적 성숙을 회피하고 어머니의 자궁에 사는 형태로 순수한 자기 망상의 삶을 살게 한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현실의 고민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소마(soma)를 만든다. 그러나 이 약물은 단순한 쾌감 논리가 아닌 복잡한 보상 메커니즘에 호소하며, 직접적인 욕구 충족 회로가 아닌 현실의 영역에서 게이머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이는 방치형RPG가 일종의 왜곡된 게임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게이머들이 실재계의 상처받은 경험(예를 들어 현실이 허락했음에도 실현되지 않는 개인의 성공)에 다시 끌려들어가는 단순한 쾌감구조가 아니라, 게임은 세계를 상징하는 심벌로 자신을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치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 뱃속에서 반은 깨어 있고 반은 꿈을 꾸고 있는 플레이어는 여전히 현실의 맥락에 던져진 육체를 갖고 있지만, 현실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게이머는 게임이라는 21세기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계를 통한 철저한 사회적 성숙을 새삼 갈망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방치형RPG는 게임 내에서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재구성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갓스 커넥션은 레벨링, 랭킹, 전투 목록, 길드 전쟁과 같은 사회적 경쟁의 원리를 모방한 게임 내 메커니즘을 설정한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방치형RPG가 현실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게임 안에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갓니스 커넥트(Goddess Connect)’는 게임 내에서 등급, 순위, 차트, 길드전 등 사회적 경쟁원리를 모방한 메커니즘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의 모성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높은 가부장제적 권력을 실제 게임에서 소환하는 게 아니다. ‘오래된 게임 세계’의 상징적 질서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하며, 게이머에게 그들의 실재계 외상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효율적으로 자신을 자위할 수 있도록 한다. 우노 츠네히로의 논지로 돌아가 보자. 이러한 메커니즘은 알고리즘적 모성(즉, 대문자 어머니)을 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플레이어를 방치형RPG로 끌어들이는 인프라가 되며, 나아가 ‘깨어 있는’ 플레이어가 현실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모성적 디스토피아의 논리에서 왜소한 아버지를 소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방치형RPG의 꿈 만들기 기능을 강화하고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4. 게임 자본가의 환상 알고리즘의 모성적 위안 아래에서 플레이어는 방치형RPG를 플레이할 때 항상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다른 게임에서처럼 과로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의 계획(프로젝트)과 전반적인 컨트롤을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영역에 있는 한, “근육과 뼈를 다치지 않고”(즉, 가급적 플레이하지 않으며) 가끔씩 명령을 내려 게임의 자동 수익과 최고의 경험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치형RPG는 완벽한 자아에 대한 신화를 허구화하고, 그러한 자아에 대한 플레이어의 상상과 경험을 충족시키는 꿈나라와 같은 현실 미러링 게임이다. 유희 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비판적 틀을 통해 이러한 게임들을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도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playbour)——이러한 유형의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를 조작하도록 유도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손쉬운 조작과 자동 증식 혜택은 기존 게임과는 다른 ‘게임 관리자’라는 아이덴티티 이미지를 심어줬다. 루도자본주의의 비판적 틀 안에서 이러한 게임을 계속 살펴보면, 방치형 플레이어는 여전히 운영 수준에서 플레이버로 이해할 수 있지만 - 결국 이러한 게임은 플레이어를 운영하도록 초대한다 - 과도한 노력과 수익의 자동 생성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 비해 '게임 매니저'라는 상상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운영의 과도한 용이성과 수익의 자동 증식은 이전 게임과는 다른 정체성, 즉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비교하여 '블루칼라'가 아닌 '블루칼라' 플레이어인 '게임 매니저'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이들은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인식하게 됐다. 다른 유형의 게임에서 게임 콘텐츠를 제작하는 '블루칼라' 플레이어와 달리, 단순히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화이트칼라' 또는 '골드칼라' 플레이어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게임 관리자는 기업가적 주체의 자기 망상이지만, 지난 10년간 국내 주류 게임에 존재했던 자기 망상(예: 멀티플레이 온라인 전략게임의 ‘경제인’과 슈팅게임의 ‘성인’)과는 다르다. 게이머는 한편으로 ‘기업’, 즉 게이머 사이에 존재하는 잔인한 외부 경쟁에 노출되지 않고, 일체의 외부적인 기업 위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보호받는다. 대신 게이머는 조직의 내부 업무로 편안하게 돌아가 보람 있는 게임 자산 관리(예: 카드 뽑기, 카드 조합, 캐릭터 업그레이드 등)를 즐기고 조직의 모든 것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는 높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38) 다른 한편 보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관리자의 이미지에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자동화된 게임 로직 덕분에 방치형RPG는 플레이어의 끝없는 자기 착취 39) 를 자동화된 ‘알고리즘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다. 플레이어는 성가신 게임 조작, 전투 전략, 팀워크 및 기타 사소한 퀴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직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끌며, 자동으로 배가되는 자원을 받고, ‘게임 자본가’에 속하는 행복한 즐거움을 누릴 준비를 하면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게임 콘텐츠 외적인 부분까지 보면 게임 관리자는 게임 인터페이스 내의 가상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게임과 현실의 상호관계를 관리한다. 방치형RPG의 자동화된 플레이는 플레이어를 게임 시간에 따른 현실의 혼잡함에서 사실상 해방시켜 게임 작업과 현실 업무를 함께 실현하고, 게임 시간을 현실 시스템에 완전하고 매끄럽게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 히어로즈(Idle Heroes)’의 많은 게이머들은 직장에서 '낚시'를 하는 동안 게임을 켜고 게임 콘텐츠를 빠르게 관리한 후, 자동으로 게임이 계속되게 한다. 방치형RPG의 인기는 한편으로는 현실 세계의 비합리성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에 대한 은유적인 자기 참조가 된다. 게임 관리자라는 상상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방치형RPG를 둘러싼 역설, 즉 방치형RPG의 기본 논리가 놀이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이 플레이하라"에서 "플레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라"로 역설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적게 플레이하라"는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실제 21세기(즉, 중국에서 그래픽 네트워크 게임이 공식적으로 탄생한 이후) 들어 그것[게이머의 정체성]은 게임 노동자에서 게임 관리자로 변모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자신을 게임 내 자산 소유자로 간주하고,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처럼 '제스처'와 '지시'를 통해 '알고리즘 노동자'가 자신의 명령을 자동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기 착취를 위해 '미친 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으며, 대신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한다. 이러한 게임 경험은 현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새로운 부유층에게만 허락된 '성공한 사람' 40) 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방치형RPG의 매니지먼트는 위선적이다. 관리 경로는 이미 정의되어 있고, 게임 프로그램은 플레이어가 실제로 무수히 많은 전략/전술 아이디어에 두뇌를 동원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게임 알고리즘과 연산에 많은 부담을 주고 게임 디자인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가끔씩 자동 조종으로 실행되는 사업을 점검하고 게임의 정해진 경로를 따르도록 초대될 뿐, 게임의 내부 운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삼국지(三国志) 시리즈’와 같은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과 비교하면 이러한 장르의 게임은 관리 측면에서 위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지’에서는 플레이어가 도시의 내정을 관리해야 하며,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이를 수행하지 않으면 잘못된 관리로 인해 컴퓨터 상대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방치형RPG에선 그런 걱정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 알고리즘 모성은 게임의 모든 상대를 다운그레이드하여 플레이어가 잘못된 관리의 결과를 겪을 필요가 없고, 자산 관리의 자동 증식만 즐길 수 있다. 즉, 방치형RPG의 관리자는 매니지먼트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으며, 이에 수반되는 '관리자의 상상력'은 자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려는 플레이어의 실제 욕망을 효과적으로 채워준다. 아즈마 히로키가 분석한 미연시 게임과 같은 정체성에 대한 상상은 현실의 압도적인 무력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며 41) , 이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는 간절히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항상 부족한 무언가임이 분명하다. 상술한 관리자적 상상의 위선은 또한 "사고"의 정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방치형RPG는 일반적으로 산술적인 텍스트 42) 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고하는 것은 “복잡한 사고의 탐구 활동”이 아닌 플레이어가 알고리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단순한 ‘계산’으로 축소된다. 가령 게임 내에서 가장 높은 전투력을 달성하기 위해 캐릭터를 조합하는 방법을 계산한다던지 말이다. 하지만 방치형RPG의 자동화 로직으로 인해 플레이어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릴 필요 없이 '관리의 만족'이라는 원칙에 따라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할 수 있다. 방치형RPG의 본질적 매력은 플레이어가 과도한 게임 플레이 노동을 피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거의 제로 비용으로 높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모성의 폭력이 다시 폭력화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게임 개발자와 운영자는 수익을 내기 위해 플레이어를 게임에서 '이탈'시켜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방치형RPG가 제공하는 긍정적 경험에 계속 몰입하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잠시 게임을 떠나 알고리즘 모성의 다음 자동 위로를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 위로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위로의 간격은 절대적으로 연장된다. 이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형태의 폭력이며,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것에 의존한다. 알고리즘 모성의 편안함에 빠져 있는 방치형 플레이어에게, 방해받지 않고 즐기는 긍정적인 경험에서 갑자기 철수하는 것은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비부정적 부정성은 게임 전반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보다 더 고통스럽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결핍감이 아니라, '얻었지만 또 잃었다'는 상실감을 지향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트라우마 위에 소금을 한 움큼 더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 결론 한마디로 방치형RPG게임은 한병철이 말한 ‘권태사회’ 43) 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권태’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플레이어를 비관적인 자기착취 사회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그들은 게임에서 자신을 다른 플레이어와 적극적으로 경쟁하는 순수하게 효율화된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인기를 구가하는 MMO슈팅게임 게이머들과 달리, 이(방치형RPG) 게이머들은 ‘공포’가 아닌 편안한 ‘퇴화’의 상태에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참여(어쩌면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하고, 게임에서의 다양한 경쟁 메커니즘과 그 이면의 사회적 상상력을 즐긴다(jouissance). 44) 다른 한편에서 이 ‘기계적 육체로서의’ 게이머는 정신적인 소모로 인한 자아 붕괴를 피하기 위해 방치형RPG 같은 자동/수동형 플레이 방식으로 알고리즘 모성에게 자신을 양보하는 걸 선택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게이머는 자신을 관리자로 상상하고 새로운 자아실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아실천이 직면한 것은 매우 판이하면서도 현실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긍정적 경험을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며, 모성적 광휘를 발하는 절대권력(즉, 모성적 디스토피아)이다. 이 모성적 절대권력은 한편으론 게이머의 실재적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에게 도망칠 수 없는 모성 폭력을 가한다. 나아가 게임 자본주의와 공조해 게이머를 부정적이지 않은 부정성의 위협에 노출시킨다. 이를 통해 방치형RPG는 겉으론 무한히 부드러운 수치 선경이 되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비디오 게임 세대 45) 가 은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릉도원이 아니며며, 여전히 초극적인 사회적 상상력을 자동으로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라는 게임의 시대에 우리는 진정으로 초월적인 게임 장르를 모색해야 한다. 1) 본문은 중국 국가사회과학기금의 주요 프로젝트인 '가상현실 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와 상하이 철학사회과학기금 청년 프로젝트인 '융미디어 맥락에서 e스포츠 이미지 구축 및 가치 혁신 연구'의 결과물로, <문예연구 文艺研究>지 2023년 10호에 발표됐다. 2) 영어권에서는 클리커 게임(clicker games) 또는 성장 게임(incremental games)으로 불린다. 3) ‘推图(퉤이투)’에서 ‘图(투)’는 게임 속 ‘맵’을 의미하고, ‘퉤이’는 게임의 주요한 줄거리를 ‘클리어’하는 걸 뜻한다. 즉 ‘맵밀기’는 플레이어가 줄거리를 클리어하기 위해 두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음을 가리킨다. 4) 여기서 '스킨 교체'는 게임의 핵심 플레이방식을 바꾸지 않고 시청각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게임을 새로운 게임으로 포장하는 것을 말한다. 5) 오츠카 에이지, 『物語消費論:ビックリマンの神話学(이야기 소비론)』, 新曜社, 1989년, 10~24페이지. 오츠카 에이지는 서브컬처의 설정과 세계관을 거대한 이야기(大きな物語)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 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大きな物語'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중국어로의 번역은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저우즈창(周志强)은 이 개념을 서양의 'big story' 이론을 차용하기보다는 'grand narrative'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저우즈창, 『游戏现实主义:“第三时间”与多异性时刻(게임 리얼리즘: 제3의 시간"과 다중 이질성의 순간")』, 南京社会科学, 3호, 2023년 참조). 이 논문에서는 저우즈창의 관점을 채택했다. 6) 일본 서브컬처 연구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오츠카 에이지의 '거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비이야기(大きな非物語)'로 발전시켰고, 우노 츠네히로는 후자를 '거대 게임(大游戏)'으로 확장시켰다. '거대한 비이야기'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小さな物語) 뒤에 존재하는 스토리텔링이 없는 거대한 정보 모음(즉, '데이터베이스')을 의미한다. 아즈마 히로키, “動動化するポストモダン: オタクから見た日本社会”, Shogun, 2001, 62쪽을 참조하라. “반면 '거대 게임'은 거대한 비이야기의 정적 구조 속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상호작용하는 동적 구조를 강조한다” (우노 츠네히로, 『마터니티のディストピアⅠContact』, 하야카와쇼텐, 2019년, 112쪽). 7)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의 디스토피아: 접촉편)』,83페이지 8) 저우쓰위, 리용(李勇), 《“让游戏自己玩”:방치형 게임与超级自我(게임 스스로 플레이하게 하라: 방치형 게임과 초자아)》,《南京社会科学(난징사회과학)》, 2023년, 제3기. 9) 中島誠一『触覚メディア——TV ゲームに学べ!次世代メディア成功の鍵はここにあった(촉각 미디어--TV 게임에 배우라! 차세대 미디어 성공의 열쇠는 여기에 있었다)』(株式会社インプレス주식회사 임프레스,1999年)145페이지. 10) ‘입력 결핍’이란 게임 플레이 행위가 게임 화면 외부에서 게임 입력 장치를 조작하는 물리적 행위에 불과하고 그 상징적 의미가 빈곤한 것을 말한다. ‘과잉 산출’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통해 게임 화면 내에서 상징적 의미의 구체적 확장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는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여 삼국지 게임 속 조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조조를 통해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사실 그/그녀는 단순히 게임의 입력 장치를 조작하고 있을 뿐이다. 마츠모토 켄타로 『ゲームのなームのなかで、人はいかにして「曹操」になるのか: 「體験の創出装置」としてのコンピュータゲーム」 (마츠모토 켄타로, 왕이란, 편역, 『일중문화토라 ナショナルコミュニケション: コンテンツ・メディア・歴歴歴歴部・社会』ナナニーシヤ 출판, 2021) 107페이지를 참조하라. 11) 저우즈창, 상동 12)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처린(车琳) 옮김, 贵州人民出版社(구이저우인민출판사), 2020년판, 32쪽. 13) [역주] 원문의 ‘커진(氪金)’은 직역하면 ‘크림톤'과 ‘돈'을 뜻하지만, 중국 온라인 게임에서는 현질을 가리킨다. 14) [역주] 원문의 ‘对立面’(대립면/대립자)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모순의 통일(상호의존과 상호투쟁)을 가리킨다. 15) Jesper Juul, 《失败的艺术:探索电子游戏中的挫败感(실패의 기술: 비디오 게임에서의 좌절 탐구)》,杨子杵、杨建明 옮김, 베이징이공대학출판사, 2019년판, 130페이지. 16 ) [역주] 고사성어 용담호혈은 ‘지세가 매우 험준한 곳’을 뜻한다. 17 ) [역주] 원문의 ‘쾌속괘기(快速挂机)’는 ‘AFK(away from keyboard)’를 지칭한다. 18 ) 姜宇辉(장위후이), 《数字仙境或冷酷尽头:重思电子游戏的时间性(디지털 원더랜드 또는 콜드 엔드: 비디오 게임의 시간성에 대한 재고)》,《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19 ) 플레이어가 조작하지 않아도 프로그램 스크립트가 자동으로 실행되는 게임을 가리킨다. 20 ) Janet H. Murray(자넷 H. 머레이,), Hamlet on the Holodeck: The Future of Narrative in Cyberspace(햄릿: 사이버 공간에서 내러티브의 미래), New York, London, Toronto, Sydney, Singapore: The Free Press, 1997, p. 143. 21 ) 요시다 히로시, 《游戏中的死亡意味着什么?——再访“游戏现实主义”问题(게임에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게임 리얼리즘' 문제 재조명")》,《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선집)》,邓剑编译(덩지안 편역),上海书店出版社(상하이서점출판사), 2020년판, 237~273쪽. 22 ) Ian Bogost, Unit Operations: An Approach to Videogame Criticism,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6, pp. 3-4. 23 ) 보스는 반드시 특정 캐릭터일 필요는 없으며, 캐릭터가 아닌 상태로 설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게임 패스 목표를 설정하는 시뮬레이션 건설 게임도 게임 보스로 해석할 수 있다. 24 ) '타자의 계층'이라는 개념은 오사와 마사유키가 '초월적 타자'라고 부르는 것을 언급하며 제안한 개념이다. 오사와 마사유키, "오타쿠 이론: 광신주의, 타자성, 정체성", 덩 지안 편저,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 비평 에세이 선별, 상하이 서점 출판사, 2020년판, 79-116쪽 참조. 오사와는 게임 오타쿠를 포함한 오타쿠의 주체성을 논할 때 지젝의 논지를 인용하여 "개인으로서의 신체를 자기 정체성 있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 개인의 자아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자와는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를 상상력의 영역에 있는 타자와는 달리 우연적인 '내적 타자'와 상징의 영역에 있는 거대한 타자와는 달리 필연적인 '초월적 타자'로 구분한다.". 인간의 자기 동일화 과정에서 내적 타자는 모방 가능한 이미지로 기능하고, 초월적 타자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추상적 규범으로 등장하며(예: 푸코의 감옥 속 보이지 않는 감시자에 대한 전경, 오사와 마사유키의 『[増補補][増补], 『허구 시대의 열매』(치쿠마쇼보, 2009, 223-224) 참조) 서로 전제하고 있다. 1-3쪽), 상호 배타적인 전제다. 초기 비디오 게임의 버그가 타자 대리현상의 증상이라는 오사와의 관찰에 착안하여, 최고 권력은 게임 보스를 대리인, 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 타자'(즉,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제3자')로 등장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임에서 최고의 권력은 보스로 대표되며, 즉 게임의 전체 영역을 통제하는 '초월적 타자'로서(즉, '제3자의 위계'로 기능하는), 플레이어는 보스를 죽임으로써만 게임의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5 ) 요시다 히로시, 「規則と自由の弁証法としてのゲーム——〈ルールの牢獄〉でいかに自由が可能か?(규칙과 자유의 변증법으로서의 게임--〈규칙의 감옥〉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立命館言語文化研究(리츠메이칸 언어문화연구)』, 26권 제26호, 19-27쪽. 26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 제1권 - 인식의 의지』, 셰비핑 옮김, 상하이인민출판사, 2016년판, 113쪽; 아감벤, 『호모사케르: 벌거벗은 삶』, 중앙편집번역출판사, 2016년판, 126쪽. 27 ) 게임 디자인 초기에는 유명한 게임인 제비우스나 후크처럼 '끝'이라는 개념이 없는 반복 게임이 많았다. 이러한 게임에서도 각 레벨이 끝날 무렵에는 흔히 '미니 보스'로 알려진 캐릭터가 해당 레벨의 '아버지'로 등장하곤 했다. 28 ) 서클 수축은 탈출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도망치는 플레이어가 결국 정면으로 맞붙게 될 때까지 게임의 위험 구역이 안전 구역을 계속 집어삼키는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29 ) Ian Bogost, Persuasive Games: The Expressive Power of Videogame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0, pp. 1-64. 30 ) 한병철, 《권태사회》, 吴琼(우총)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 1~14페이지. 31 )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후쿠신 키드(うる星やつら)>에 등장하는 모성 공간을 가리킨다. 우노 츠네히로, "ゼロ年代の想像力 야근 시대의 상상력"(하야카와 쇼텐, 2011), 242-252쪽 참조. 32 ) 우노 츠네히로, 『若い読者のためのサブカルチャー論講義録(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아사히신문출판사, 2018년, 91쪽. 일본어 ‘物语’는 ‘故事(이야기)’라는 뜻이다. 33 ) Johan H.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Element in Culture, London, Bost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80, p. 10. 34 ) '결단주의'는 우노 츠네히로가 2000년대 초반 일본 서브컬처 작품의 문학적 상상력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제안한 개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치관을 유지할 수 없으며,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즉, 히가시 히로키가 말하는 '빅 스토리'를 공유할 충분한 압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하거나 선택한다는 전제에서 포스트모던적 상황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특정 가치에 "근본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지만(즉, 히가시 히로키가 큰 이야기를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부족하다), 여전히 자신이 믿는 가치를 선택한다(즉,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작은 이야기를 거부하여 미야다이 신지가 '섬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같은 작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형성한다). 한 마디로 결정론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가치 상대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로, 결정의 내용과 이유보다 결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노 츠네히로, "초과근무 시대의 상상력", 185쪽 참조. 35 ) 우노 츠네히로, 『遅いインターネット(느린 인터넷)』, 幻冬舎, 2023年, 178페이지. 36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5페이지 37 ) 우노 츠네히로, 『母性のディストピアⅠ接触篇(모성 디스토피아 Ⅰ 접촉편)』, 早川書房, 2019年, 318페이지 38 ) 그렇다고 해서 기업/플레이어 간 경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에서는 랭크전, 길드전 등 경쟁 메커니즘이 여전히 소셜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게임의 자동화된 설계로 인해 경쟁의 실패가 외부화되어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플레이어는 실패를 '나' 자체가 아닌 '나' 외부에 존재하는 자동화된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게임에서의 실패로 인해 심리적으로 파산하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정서적 경험도 발생하지 않는다. 요컨대, 플레이어는 게임/비즈니스 경쟁 과정에서 상당히 안전한 위치에 놓인다. 39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宋娀(송송) 역, 中信出版社(중신출판사), 2019년판, 23페이지. 40 ) 王晓明(왕샤오밍), 《半张脸的神话 반쪽 얼굴의 신화》,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3年版,第27—33页。 41 ) 아즈마 히로키, 《萌的本事,止于无能性——以〈AIR〉为中心 모에의 역량, 무능에서 멈추다 - AIR를 중심으로》,덩지엔 편역, 《探寻游戏王国里的宝藏:日本游戏批评文选 게임 왕국의 보물 탐험: 일본 게임비평 문선》,214페이지. 42 ) 산술 텍스트는 문학적 텍스트와 달리 알고리즘에 의해 내러티브와 경험이 주도되는 텍스트를 말하며, 배경의 숫자 연산이 전경의 게임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것이 기본적인 내러티브 기법이다. 43 ) 한병철, <권태사회>, 53~61페이지 44 ) Sean Homer, Jacques Laca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5, pp. 89. 45 ) 蓝江(란장), 《宁芙化身体与异托邦:电子游戏世代的存在哲学(몸과 헤테로토피아의 님피: 비디오 게임 세대의 실존 철학)》,《文艺研究(문예연구)》, 2021년 제8기.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학자) 덩 젠 , 邓剑 쑤저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부교수. 디지털게임 문화연구를 주 관심사로 다루며, 〈澎湃新闻〉에서 게임에 관한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활동가, 작가) 홍명교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 USA in Fallout, USA today

    < Back USA in Fallout, USA today 14 GG Vol. 23. 10. 10. We once thought that the era of Donald Trump had come to an end, but it appears it hasn't. While Trump may have lost the election, his supporters' enthusiasm remains robust. What fuels this enduring energy? Moreover, is the driving force behind Trump's rise aligned with traditional 'American' values or does it run counter to them? It's worth recalling that Trump's campaign slogan was 'Make America Great Again'. Yet, years later, when President Joe Biden won the election after a vigorous anti-Trump campaign, he declared his presidential message as 'America is back.' So, which vision truly represents 'America' – Trump's or Biden's? The Fallout game series also raises questions about 'what is the USA', although it's unclear whether this was the developers' precise intention. Let's consider the New California Republic (NCR) as an example, the epicentre of the Fallout world. NCR is a nation rebuilt by the power of its people from the ashes of destruction and appears to serves as a metaphor for how Americans perceive their nation's founding narrative – the USA that was built by the people, on the lands that European settlers deemed as 'uninhabited'. Furthermore, NCR represents a highly advanced civilisation with a touch of snobbism and expansionism, yet an attempt to avoid excessive conflicts with the outside world. This mirrors the historical fact that the USA, while aspiring to become a global power/player, maintained an isolationist foreign policy for a significant period before World War II. The protagonists in the Fallout series are typically residents of the vaults . For instance, in Fallout 1 and Fallout 2 , the protagonists have close ties to and support the NCR or its preceeding entities. These protagonists emerge from the vault that preserves remnants of the 'old world' and in the game, for the first time, encounter the 'new world' outside in a state of ruin. This reminds me of historical events when the European settlers from the 'civilised' world initially set foot in the 'barbaric' new world in ruin, seeking to establish colonies. As its name suggests, the New California Republic (NCR) establishes itself in the west, pushing into the wasteland, which notably evokes memories of the 'Western frontier'. America's westward expansion was driven by heightened nationalism under the leadership of Andrew Jackson and, in the process, resulted in significant conflicts and the destruction of native peoples and their cultures. This parallels the situations that gamers encounter through the various factions' conflict for control of the Hoover Dam in Fallout: New Vegas . Caesar’s Legion, an antagonistic faction in Fallout: New Vegas , consistently asserts authoritarian control over its territory. This reflects how colonist might have appeared from the perspective of indigenous people during the westward expansion. Historical accounts reveal that Native Americans resisted this expansion by forming alliances with or receiving military support from, British or French troops stationed in the region. In the context of the modern-day United States, Caesar’s Legion seems to draw inspiration from extremist groups like the Islamic State (IS) – also known as 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 However, it's a well-known fact that modern Islamic extremists have their roots in military groups formed during the Cold War, in response to the imperialistic expansion of both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This parallel is mirrored in the game Fallout , where Caesar, the leader of Caesar’s Legion, was formerly associated with the 'Followers of the Apocalypse', a humanitarian and intellectual medical group. In a way, Caesar’s Legion can be seen as an anti-civilisational phenomenon born out of the frustrations with a failing civilisation. When players confront Caesar’s Legion in the game, they are also confronted with the historical ironies that the USA faces in its own history. The Enclave, a villainous group that appears in both Fallout 2 and Fallout 3 , serves as a significant element prompting questions about the ‘truly American'. To settlers, the Enclave represents an 'old world' power aiming to dominate the wasteland by controlling knowledge and employing force, with their actual power centre concealed in a distant location. This scenario bears resemblance to how historical Great Britain might have been perceived by the colonists in America across the Atlantic before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Interestingly, the vault residents, despite sharing similar cultural and societal norms, opt to coexist with the wasteland and resist the Enclave. This mirrors the stance of the colonial intellectual class that led the War of Independence against Britain. Yet, there’s one crucial factor that I must point out. Historically, the dominant conflict within American political society during westward expansion revolved around the clash between the ‘old world’ and the ‘new world’, with the old world associated with power, knowledge, and the clerical system. For instance, America's evangelical church, which gained popularity during the Great Awakening, found itself in conflict with the established colonial clergy and intellectual elite. The evangelical doctrine of the time, which permitted ordinary worshipers to serve as preachers, obviously challenged the traditional churches of the 'old world'. From the evangelical perspective, these established churches were perceived as mere institutions that monopolised knowledge, power, and divinity. Coming from this historical trace, Richard Hofstadter once noted that American anti-intellectualism can trace its roots to a deep-seated antipathy toward knowledge and power, creating a point of convergence between anti-intellectualism and democracy. Within this context, we can interpret the vault residents as symbolic representations of colonial elites who have a favourable disposition towards the wasteland but can never truly become a part of the wasteland. This dynamic helps explain the ambivalent feelings that Fallout players have towards the Brotherhood of Steel (Brotherhood), another faction aiming to monopolise intellectual and military resources in the post-apocalyptic new worl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wasteland's inhabitants, the Brotherhood appears as nothing more than elite exploiters who make oaths of 'good faith', reminiscent of how settler communities may have perceived colonial intellectuals and clergy that misuse power. This narrative framework forces the players, empathising with the vault residents, to feel both sympathetic and rebellious against the Brotherhood. Fallout 4 sought to encapsulate these recurrent historical themes within the USA more condensedly and comprehensively. The game leveraged the spatial characteristics of the game’s New England region as a narrative instrument to reincarnate the early US history. The game's protagonist, who retains memories of the era preceding the Great War (translator's note: a fictional conflict in the Fallout series, posited to have occurred between the USA and China, culminating in a nuclear apocalypse), also serves as a bridge for players to engage with the game's narrative and the history. In Fallout 4 , players can construct and establish settlements, akin to the initial settlers who migrated to the American continent. Here, the Commonwealth Minutemen, one of the in-game factions that the protagonist first encounters in the game, play a pivotal role in bridging the historical context. Within this framework, the history of the US is portrayed as having begun sometime when patriots organised a militia for the nation’s independence. It is this thematic backdrop that explains the game design elements of small-scale city-building simulations in Fallout 4 . Moreover, in Fallout 4 , the Institute (translator’s note: one of the factions in Fallout 4) appears to allude to a period in history marked by the confluence of anti-intellectualism and anti-communism, known as McCarthyism in the US. The game's aesthetics are notably influenced by the country's post-war culture of the 1950s – the very essence of the Fallout universe aesthetics – which vividly encapsulates the era of McCarthyism. US scholars have attributed that rise of McCarthyism in the US to a series of political events, including the Soviet Union's successful nuclear test, China's expansion of communism, and the stalemate situation of the Korean War. These incidents compelled Americans to perceive a formidable ‘outside threats’ beyond their reach, subsequently prompting the US populace to embrace McCarthyism as a means of countering this perceived menace from within. In essence, McCarthyism aligns with a recurring historical pattern in the US, characterised by public apprehension in the face of power struggles, conflicts between old-world and new-world elites, and tensions involving intellectuals. This explains the in-game characters' reactions to the Institute in Fallout 4 . For example, we can observe the hostile responses of Fallout 4 characters toward "synths", the artificial humanoids produced by the Institute. They exhibit a deep-seated fear of synths, often calling them the 'boogeyman', and engage in witch hunts to locate and expose these synths. This behaviour fundamentally mirrors the way McCarthyism indiscriminately labelled intellectuals, government officials, and artists as 'communists' without any substantiated rationale. Another intriguing aspect of the story is the presence of a counteracting faction in the game, an underground movement that defines synths as oppressed beings and strives to liberate sentient synths from their creators. This faction, known as The Railroad, strikingly resembles a historical phenomenon, a covert network called the Underground Railroad, which aided the escape of black slaves from the South to free states in the North. By contextualising the game's narrative within the historical backdrop of the US, the synths first mirror the unjustly accused victims who were branded as 'communists' during McCarthyism. Simultaneously, they symbolise the oppressed history of ethnic minorities facing racial discrimination. The plot takes an intriguing turn as it becomes clear that the Institute's objective, mobilising synths, was ultimately aimed at the reconstruction of the world. It's worth revisiting that the Institute bears resemblances to communism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McCarthyism. Throughout history communism underwent significant trial and error, resulting in substantial civilian casualties. However, even if one is compelled to acknowledge that communism represented an effort to address prevailing issues, the question arises: What might occur if the US were to embrace certain elements of communist ideology in the present day? Or, what if the US society were to recognise the social and economic value of immigrants (the synths) as an essential component for global stability? Furthermore, these same questions can be posed from an entirely opposite perspective, considering the metaphorical resemblance of synths to both 'communists' and 'slaves'. For instance, if we were to perceive the rise of Trumpism and the Bush administration's invasion of Iraq as attempts to resolve inherent prevailing issues in America, and strive for a better world, where do we go from there? Fallout: New Vegas and Fallout 4 give players multiple decision-making scenarios in this ‘where do we go from there?’ situation. Players can either opt to align themselves with a particular faction introduced in the storyline, aiming to undermine or annihilate their adversaries, or they can forge their own group. The commonly perceived 'true ending' of the game unfolds when the protagonist embarks on a journey, envisioning a new future shaped by human hands. Nevertheless, whether this path truly represents the best choice among the available options remains a matter of uncertainty. But regardless of the option the player decides to choose, the game's outcome often serves as a reflection of certain episodes from US history, as previously discussed. The ongoing political struggle in the US, exemplified by the conflict between the Trump and Biden administrations, therefore, can be seen as another iteration of the US’s historical pattern. Biden brings Trump, and Trump brings Biden – a cycle of perpetual conflict. The fictional world of Fallout emerges as a consequence of ‘resetting’ these recurring conflicts followed by the massive destruction. Yet, the humanity still hurtling down to the path of self-destruction through warfare. However, even within what may appear to be an endless cycle, one can choose to explore uncharted territories, akin to the Yes Men in Fallout: New Vegas or the Commonwealth Minutemen in Fallout 4 . Just as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once emerged, all these elements contribute to the complex tapestry of the US as what it is. Perhaps it is the reminiscent of Fallout 's timeless slogan, "War never changes". Tags: fallout3, projectpurity, GECK, fukushima, radioactive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Columnist Minha Kim Kim is known for his activities as a critical expert on current affairs in various press media. But he is also an active gamer who never let go of games. Some of his publications includes 『a cynical society』, 『Otaku Loved Lenin』, as well as a co-author of 『Now, Here, Far-Rightism』, 『right-wing discontent』, 『Twitter, that 140-character egalitarianism』. His latest publication is 『Democracy where you vote because you don't like that side』.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 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 Back 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18 GG Vol. 24. 6. 10.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 하느라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이어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장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청년, 청소년들은 ‘가정-내-관리자’로부터 고함을 동반한 힐난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고통을 수반한 손길까지 언제든 주어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각계각층에 포진한 ‘관리자’들은 게임과 게이머를 향해 다양한 비판과 충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중에서도 빈출하기로 손꼽히는 것은 ‘게임은 쓸데없다.’라는 비판일 것이다. ‘게임을 한다고 밥이 나오는가, 쌀이 나오는가?’ 먹고 사는 일의 엄혹함을 환기하고 게임의 불필요함을 꼬집는 이러한 말 앞에서 게이머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게임에서 대체 어떠한 실용성, 생산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게임보다는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라는, 그리고 현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삶을 꾸리라는 세간의 충고에 게이머가 반론을 제기하기란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임과 게이머에 대한 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게임이 실용성, 생산성, 효율성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은, 게이머의 비일관적 행태를 지적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를테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 왜 정작 게임 내에선 가능한 효율적인 행위를 하고자 애쓰는가?’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게이머들은 게임 내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행위를 수행하고자 분투한다. 그것은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지향에서 확인된다. 이를테면, 레이싱 게임의 플레이어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 최적의 속도로 코너링 등을 수행하고자 한다. 최적화된 동선, 순서, 계획의 수립과 그것의 효율적 수행은 ‘타임 어택’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는 게임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이와 유사하게 <문명>과 같은 턴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등의 불가사의를 AI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 턴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스타 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자원의 수집과 유닛의 사용에 있어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행동했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유닛 사용의 차원에서는, 소위 ‘마이크로 컨트롤’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유닛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 생산성을 문자 그대로 극한까지 추구하는 방식이 확인되기도 한다. * 압도적인 생산력을 자랑하며 ‘물량 테란’, ‘괴물 테란’ 등으로 불렸던 최연성 선수 이처럼 실제로 게이머들은 실용성, 유용성, 생산성을 갖추지 못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정작 게임 내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행위,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 애쓴다. 게임의 불필요함과 게이머의 현실감각 부재에 개탄하는 ‘관리자’들은, 이러한 게이머들의 행태에서 ‘쓸모없는 일을 하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비일관성’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이다. 불필요한 게임의 불필요한 장애물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인가? 철학자 버나드 슈츠는 게임의 가치와 의의에 관해 성찰한 바 있다. 철학과 게임. ‘관리자’들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들 간의 불필요한 만남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슈츠는 그러한 시선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게임이 쓸모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맥락에선’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게임 플레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마리오를 조종하여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짐 레이너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캐리건을 구해내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소드코스트의 도시 발더스 게이트를 구하기 위해선 D&D 규칙에 따라 절대자(The Absolute)를 물리쳐야 하지만, D&D 룰을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며 게임 내 도시가 몰락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필요하다.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그만두고 게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불필요해지는 것들이다. 슈츠는 이처럼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목표, 규칙, 서사, 재현, 메시지 등의 차원에서 게임의 의미, 가치, 효용을 끌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이 실질적이거나 실용적인 의미를 갖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그가 게임에 대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최종 평결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게임 내 장애물이 굳이 극복될 필요가 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려 하는 플레이어의 고투, 분투에서 게임의 의의를 도출한다. 이러한 슈츠의 관점에 따르면, 게임이 부과하는 제약과 틀 내에서 플레이어가 더 효율적인 행위, 최선의 선택, 최적화된 경로를 추구하는 것은 비일관적인 행태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플레이어가 게임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 고투하는 데 게임의 의의가 있다는 관점은, 게임에서의 효율성의 추구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다. 플레이어가 게임 내 규칙과 제약 아래에서 최적화된 동선을 따르고, 효율적으로 유닛을 운용하고, 최선의 선택을 통해 AI를 앞지르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달성하게 되는 게임 내 목표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분투 행위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 슈츠의 생각이다. 게임의 목표, 장애물 등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분투와 고투 자체를 즐기려는 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임에 관한 슈츠의 이러한 정의가 게임 일반을 아우르는지에 관해서는 물론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이 시사하는 바는, 효율성이 곧 실용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실용적 가치, 생산적 가치를 찾기 어려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효율성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한 행위의 가치는 목표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가치는 효율적으로 수행되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 가치는 심지어 예술적인 것일 수 있다. 행위성의 예술과 효율성의 미학 C. 티 응우옌은 그의 저작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슈츠의 사유를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티 응우옌은 게임의 가치가 서사적 탁월성, 세계의 재현, 사회 비판적 기능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이라는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그런 차원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티 응우옌은 슈츠에 동의하며, 게임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분투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게임은 비록 쓸모없고 불필요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을지언정, 플레이어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매체로 게임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에서 게이머들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간을 미적으로 구성하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에서는 민첩한 반응과 상대 플레이어와의 심리전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문명>은 전략적 사고와 최적화된 선택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게임이다. 여기서 게임의 예술적 가능성이 발원한다고 응우옌은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자 행동할 때 그 행위 자체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리오넬 메시의 해트트릭 기록에도 감탄하지만,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유려한 움직임과 상대 선수를 기만하는 아름다운 동작을 되풀이하여 보곤 한다. FPS 게임에서 민첩한 반사신경과 정교한 조준으로 수적 열세마저 극복하는 플레이에는 환상적이라는 말을 붙인다. 체스 플레이어들은 허를 찌르는 그랜드마스터의 체스 말 운용에서 전율을 느낀다. 응우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성에서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과 행위성에서 예술적,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응우옌의 통찰은, 불필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하려는 게이머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효율성 역시 미적 감각을 환기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려한 드리블러의 발재간에도 환호하지만,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대를 제치는 축구선수의 우아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에도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한 효율성은 일종의 절제미를 환기한다. 효율성은 정합성과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자원과 에너지가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투입되었을 때, 그것은 정합성과 조화에서 비롯하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학자들은 딱딱한 계산 기계가 아니다. 수학적 난제를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풀이, 과정, 공식 앞에서 그들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흡사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컴의 면도날은 단지 이론적 검약성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를 명쾌하고도 효율적으로 풀어내는 설명은 미감을 자극한다. 효율적 행위는 미적 체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게이머들은 굳이 게임의 ‘쓸 데 있음’을 입증하고자 항변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게이머들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효율성은 실용성과 동의어가 아니며, 효율적인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행위성과 효율성이 담지할 수 있는 가치에는 미적, 예술적 가치가 포함된다. 게임의 행위성, 행위의 효율성, 그리고 오컴의 반짝이는 면도날은 이런 점에서 미학적 대상일 수 있다. Tags: 무용성, 아름다움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철학연구자) 최건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 ​

  • Pings, Parley, and Pictures - How Players Communicate

    < Back Pings, Parley, and Pictures - How Players Communicate 14 GG Vol. 23. 10. 10. Games are inherently social. In the wake of MUDs (Multi-User Dungeons) in the late 1970s to MMORPGs in the early 90s, playing games has been heralded as an opportunity to socialise and be social - antithetical to the usual “loner” gamer stereotype that is so pervasive in popular media. More recently, during the COVID-19 pandemic, games offered a pre-existing framework for keeping in touch and hanging out with friends when regions in Canada and the U.S. were facing mandatory lockdowns and curfews to stem the infection rates. Many turned to their headsets and keyboards to play games and catch up with friends when they could not see them face-to-face. However, a caveat to being a social space, is the potential for anti-social behaviours. This is not formed in the lack of socialising, a typical tenant of being anti-social, but rather in the deploying of modes of communication to have a different kind of social “fun”. So, how do players communicate in games? Not only how, but what do players communicate while playing? Games have encouraged socialisation through various communication channels, both inside and outside of the game world, as a way to organise, chat and, more often than not - to troll. The breadth of research into communicating in games parallels understanding and unpacking the age-old phrase of “toxicity”. Both authors of this article have studied different gaming communities ( Overwatch, DOTA2, World of Warcraft, Lost Ark, and MtG Arena ), to look at how and what they communicate. Text Chat and Talking Back The best place to start is text chat, the longest-standing way to communicate in games. A channel for conversation and information in MMORPGs like World of Warcraft , where players can recruit, sell, chat, and more. Historically, it was the only way to communicate in games, until the introduction of voice chat, and since that point, it is regarded as a more restrictive way to chat in games. 1) Text chat evolved in response to this. Players generated and built their own game-specific lexicon and abbreviations to make using text chat efficient once more for instantaneous conversations. A simple example of this can be found in League of Legends (Riot Games, 2009). When players load into their team screens, they typically head to the text chat to claim a “lane”, typing “mid”, “bot”, or “top” for top, middle, and bottom lane. A quick way to allocate yourself to a particular lane. A similar example of text chat being used to convey a message efficiently is in MMORPGs like Lost Ark when a world boss appears (a large enemy that appears on a particular schedule and needs multiple players to take down). In this case, a player might type that the world boss is “up” and what channel to join to fight it. Text chat can scale, from the micro to the macro, from one-to-one up to the entire server’s worth of players. This reach comes with consequences. Hate speech can be easily spread via text chat. Whether it is racist, sexist, or homophobic slurs, aimed at no one or everyone, they are regularly spotted in text chat. This problem has become so pervasive that many game companies have automated filters to block out hateful terms. The issue arises further when players get creative in how they write these words. Devin Connors, a community manager at Psyonix, discussed Rocket League’s language ban and chat filter system at GDC 2018 (Image 1). 2) The team initially had a list of 20 bannable words, which has since grown exponentially to include misspelling variants and swears or slurs found in other languages. * Image 1 - Devin Connors presenting the Rocket League Language Ban system at GDC 2018 (author screenshot) Blizzard manages poor sportsmanship displayed in text chat in a more tongue-in-cheek approach. When players type “GG EZ” at the end of a match in Overwatch , insinuating that the game was no challenge to beat the oppositional team, the acronym is swiftly corrected into one of many silly phrases (e.g. “ It's past my bedtime. Please don't tell my mommy.” Or “Gee whiz! That was fun. Good playing!”) . This is done as a way to de-escalate a micro-moment of toxicity without having to bring in the threat of a ban for behaving in poor taste. However, even seeing GG EZ replaced with messages like these, players will be aware of what was initially written, regardless of the appropriate veneer that was placed over it. Obviously, this type of behaviour is low on the threshold of toxicity compared to what the Rocket League team has to filter out, but is equally present in Overwatch matches. This all solely focuses on the use of just text in text chat, ignoring the considerable use of emoticons, emojis, and stickers that we use to communicate in our day-to-day texting, let alone during gameplay. Emotes and emoticons have been a staple of more complex communication systems in games, but they have become common as the sole method of inter-player communication in popular online card games like Legends of Runeterra (Riot Games, 2020), Magic: The Gathering Arena (Wizards of the Coast, 2018), and Marvel Snap (Nuverse, 2022). While Magic has text-based emotes, players are more likely to use any of the numerous animated stickers available in each of these games (Image 2). * Image 2 - A Collection of Emotes from Magic: The Gathering Arena - Authors’ Screenshot While it might first appear that limiting communication to a reasonably small set of phrases and animated images would limit player toxicity, this is not the case. Players are actually able to do quite a lot with very little - often going beyond what the intended function of these emotes might be. In Magic for example, one way to greet an opposing player at the start of a match is with an emote that depicts one of the game’s characters, Gisa, waving at you using the hand of a zombie (Image 3). While this purpose is a quirkier, possibly more fun alternative to the standard ‘hello’ emote, this emote can have other, more sinister uses. * Image 3 - Gisa Waves in Magic: The Gathering Arena - Author’s Screenshot Imagine a common scenario in a game of Magic : two players have been filling the board with creatures over several minutes, incrementally trying to beat the other. The game is a close one, with each player seeking to get just enough of an advantage with each new card played on the field. But then one of the players drops what is known as a ‘board wipe’ - a card that removes a massive number of cards from the battlefield that a player has spent an entire game establishing. And then the player who destroyed the board uses the Gisa emote, not to say hello, but to say “Goodbye to all your cards, and goodbye to all your fun.” This is but one way that players use these emotes. The important thing to take away from this example is that players develop their own use cases and interpretations of these emotes over time, and not all of them are positive and friendly, even if designers intend them to be. Some players will find a way to use them to troll players and these uses can pick up steam throughout a game community. It isn’t just the players acting alone here, however. One final point on these emotes is that they are often riffs on popular memes. For example, one Magic emote depicts the character Saheeli eating from a bowl of popcorn, inspired by the gif of Michael Jackson eating popcorn in a movie theater and other related images of popcorn ingestion (Image 4). * Image 4 - Saheeli the Emote and Michael Jackson Enjoying Popcorn. 3) The memes these emotes are inspired from often have the purpose of poking fun at something - particular rules and use cases that are often meant to turn a situation into a joke. The popcorn-eating Michael Jackson is often used when reading a lot of gossip in a forum thread, or when observing a social disaster or drama, for example. Emotes based on these meme formats come preloaded with meaning, not often positive, with only a player’s opponent as the possible audience for the message that the emote sends when it is used. While basing emotes off of memes creates a shared language between players that makes them more easily readable as artifacts of in-game communication, they also skew towards antagonism because of the way memes make a joke out of most situations. As often as the silliness of these emotes might defuse hostile or negative feelings during play, they are just as likely to produce them because of how they are used and their established associations. This is not an argument for or against emotes one way or another, but is instead meant to highlight that the culture of communication that games are nested within affects even the most limited forms of interplayer communication used in online games. Pinging to Point and Pout Sometimes, words and images just don’t cut it for conveying messages quickly during gameplay. Typically found in MOBAs like League of Legends or DOTA 2, “pinging” is where a player clicks on a map area, item, or character, and it lights up to notify other players. These pings can be signified with an exclamation point or question mark to draw the eye to the area. 4) These quick signifiers can be used for strategising, planning a route as a team, pointing out important items for teammates to collect, or as a warning system to avoid certain areas. 5) . An anecdotal example of the layers involved in pinging comes from one author’s experience playing DOTA 2 for the first time not with the AI but real fellow players. While playing one of their first matches, they noticed that another player was pinging the area around them. Only because someone familiar with the game was supervising was it made evident that this other player was trying to get their attention, flagging that they were making an incorrect choice, or they were in the wrong spot for that moment in play. More can be said about the lack of a tutorial preparing a new player for all the nuanced ways that players might communicate with you during a match, but that is down to community-constructed modes of communication, which is hard to cover within a game’s onboarding tutorial. Aggressive pinging, where a player will spam click the ping button, is often a signifier of frustration 6) for whatever another player is doing. It can also be a way to distract a player if a fellow teammate has opted to throw away the game and bother their teammates instead. A New Player in Voice Chat Moderation Voice chat is still a staple feature in many online games from first-person shooters, to multiplayer survival games, to large-scale group play in numerous MMORPGs. Voice communication affords players more opportunities for complex sequences of expression, which are often necessary for fast-paced online play. The catch is that the use of voice often produces in-game environments where players are able to say whatever they want to teammates and random players, which includes a substantial amount of toxicity 7) . Voice chat brought a more real-time way to communicate in games; a technological revolution in how players could coordinate and socialise. However, in doing so, voice chat removed a level of anonymity to players, exposing their identity (race, gender, sexuality) through what Kishonna Gray calls “linguistic profiling” 8) . Players are very quickly reminded of these intersections of their identities through hateful terms and treatment from other players in response to using their voice in voice chat. Compared to moderating text chat voice has been a difficult facet of online play to manage 9) , no doubt due to the amount of voice chat happening in games and the speed at which it occurs. It is no secret that players have requested some kind of integrated voice chat moderation, with some doing so since 2017 10) . Even though the moderating voice is a lofty task, one company, Modulate, is at the forefront of this endeavor. Modulate are the creators of ToxMod, a voice moderation technology designed to help game companies identify, triage, and proactively manage instances of toxicity that happen in the voice communications of their games. This past August, Modulate partnered with Activision to implement ToxMod in the upcoming Call of Duty: Modern Warfare III (Activision, 2023). In a conversation with Modulate COO Terry Chen, he expressed the importance of keeping in-game communication healthy: “Our overall intent is not only to protect people that are suffering from this marginalization, but also to make gaming and its spaces more fun. I think fun is at the forefront of what we do. [...] Voice chat, which has become more critically important in esports, especially for games like Valorant, where you need [voice chat] for a tactical advantage against the enemy opponents, there’s just this level of toxicity that makes it impossible to enjoy the game that you’re trying to love, and also improve.” To accomplish these goals, ToxMod uses machine learning technology to detect and rate toxicity, but ToxMod does not ban and punish users on its own. Instead, Terry views ToxMod as “a collaborator, kind of an additional player in the game that can listen and help out if necessary.” This is because the toxicity that ToxMod detects is flagged for moderators who have the job of making the final decision on what actions need to be taken against players, so ToxMod operates in partnership with developers and moderators to address the issue of toxic communication. To close this article, I asked Terry, as someone who is on the front lines of addressing toxicity, what more could be done by companies and players alike to work towards a solution? We’ve seen how toxicity is common across each of the in-game communication mechanisms we’ve explored, so what are we to do that isn’t being done? Terry offered two important solutions: 1) Listening to players from across a game’s player base rather than focusing on the needs of the most skilled or highest profile players as there is valuable feedback from more than the pros. In fact, most players are not playing at the highest skill levels and can provide a lot of valuable information about what is happening throughout the most densely populated segment or rank of a game. 2) To think about detecting and rewarding positivity. According to Terry, “The truest action would be implementing tools, whether it’s Modulate ToxMod, whether it’s something developed internally to detect bad behavior, but also reward positive behavior.” As players, developers, and researchers we find ourselves so confronted with the negative aspects of in-game communication that we take our eyes off the players who are setting good examples - and more work should go into refining and implementing systems that encourage more positive interaction - not just mechanically, but in the ways we communicate with one another in-game. On the other side of the avatar, we are real people after all. As we can see, there are two important facets to consider when discussing communication and social systems in games. The first is how to moderate them. It is a trepidatious task that requires people power, tech power, and clear guidelines to enact any form of governance in a social space. When introducing a competitive angle to gameplay (whether as an aspiring pro player or as a player who simply enjoys competing in the game space) - the stakes go up, and so there is more on the line for players to care about. In the same space, we have players who are just there for the vibes. To play with their friends, regardless of the outcome (though they would like to win). The second facet is “trolling” and toxicity via all these different modes of communication. Players will find ways to get creative with any system, to subvert it to their own wishes and enact toxicity however they see fit. Ultimately though, it goes back to the very start of this article; that games are inherently social. It is not the sole aim of most players to go online and be toxic, but rather to join into the collective and have a good time with others who enjoy the same play space. Turning to the future of communication in games, voice chat has more recently become somewhat fragmented with the success of Discord. Many players have shifted their voice communication from the dedicated game servers to their own personal, curated community Discord servers, where they hang out as a collective with friends instead of strangers in a game lobby. Though some game-specific Discord servers exist, they are less for communicating during play and more for marketing and building a community around the game. Virtual reality could yet revolutionise how players embody communication during play, though right now they are awkward half-bodied avatars with nausea-inducing equipment for some. There is potential on the horizon, and yet one thing is for certain - where there is a will, there is a way to subvert social spaces. *For more on modulate you can visit their website, https://www.modulate.ai/ . 1) 2) Wadley, G., Carter, M., & Gibbs, M. (2015). Voice in Virtual Worlds: The Design, Use, and Influence of Voice Chat in Online Play. Human–Computer Interaction, 30(3–4), 336–365. https://doi.org/10.1080/07370024.2014.987346 3) Saheeli image from draftsim.com. https://draftsim.com/mtg-arena-emotes/ (accessed September 24th, 2023). Michael Jackson image from knowyourmeme.com. https://knowyourmeme.com/memes/popcorn-gifs . 4) Leavitt, Alex, Brian C. Keegan, and Joshua Clark. ‘Ping to Win? Non-Verbal Communication and Team Performance in Competitive Online Multiplayer Games’. In Proceedings of the 2016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4337–50. CHI ’16. New York, NY, USA: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2016. https://doi.org/10.1145/2858036.2858132 5) Wuertz, Jason, Scott Bateman, and Anthony Tang. ‘Why Players Use Pings and Annotations in Dota 2’. In Proceedings of the 2017 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1978–2018. CHI ’17. New York, NY, USA: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2017. https://doi.org/10.1145/3025453.3025967 . 6) ibid. 7) Reid, Elizabeth, Regan L. Mandryk, Nicole A. Beres, Madison Klarkowski, and Julian Frommel. “‘Bad Vibrations’: Sensing Toxicity From In-Game Audio Features.” IEEE Transactions on Games 14, no 4 (2022): 558-568. 8) Gray, K. L. (2014). Chapter 3 - Deviant Acts: Racism and Sexism in Virtual Gaming Communities. In K. L. Gray (Ed.), Race, Gender, and Deviance in Xbox Live (pp. 35–46). Anderson Publishing, Ltd. https://doi.org/10.1016/B978-0-323-29649-6.00003-0 9) Märtens, Marcus, Siqi Shen, Alexandru Iosup and Fernando Kuipers. “Toxicity Detection in Multiplayer Online Games.” Proceedings of the 2015 International Workshop on Network and System Support for Games (NetGames). 03-04 December, 2015, Zagreb, Croatia, 1-6. 10) Blamey, Courtney. ‘One Tricks, Hero Picks, and Player Politics: Highlighting the Casual-Competitive Divide in the Overwatch Forums’. In Modes of Esports Engagement in Overwatch, edited by Maria Ruotsalainen, Maria Törhönen, and Veli-Matti Karhulahti, 31–47. Cham: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22. https://doi.org/10.1007/978-3-030-82767-0_3 . Tags: ping, voicechat, MTG, emote, toxicity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Game Researcher) Cortney Blamey Courtney is a Communication PhD student and game designer at Concordia University, Montreal, Canada. Her doctoral research concentrates on the process of meaning-making in games tackling serious themes and exploring this relationship between player and designer in her own critical game design process. Her previous research unpacked Blizzard’s approach to community moderation in Overwatch by investigating both developer and community inputs on forums. She is a member of the mLab, a space dedicated to developing innovative methods for studying games and game players and TAG (Technoculture Arts and Games). (Game Researcher) Marc Lajeunesse Marc is a PhD candidate in Concordia University's department of communication studies in Montreal, Canada. Marc’s research focuses on toxicity in online games. He is driven to understand toxic phenomena in order to help create more positive conditions within games with the ultimate hope that we can produce more equitable and joyful play experiences for more people. He has published on the Steam marketplace and DOTA 2, and is a co-author of the upcoming Microstreaming on Twitch (under contract with MIT Press).

  • [Editor's View]

    < Back [Editor's View] 13 GG Vol. 23. 8. 10. GG 13호는 1년만에 돌아온 게임비평공모전 수상작 특집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지만, 모든 글을 함께 읽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입니다. 첫 회 공모전과 달리 올해부터는 수상작 안에서 별도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최우수, 우수보다도 게임비평과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의 존재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 결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호 메인 테마에서 당선작 7편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편집장으로서는 나름의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 해에는 저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두 번째 해보니 공모전과 비평이라는 흐름 안에서 일련의 특징도 존재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오늘날의 공모전이 일련의 정례화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요즘은 공모전 홍보 전문 사이트와 커뮤니티가 있고,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모전 참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다만 그러다보니 GG의 게임비평공모전도 게임문화담론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분들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글이 투고되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련의 스펙 쌓기를 위한 스팸성 투고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공모전을 주최하는 입장에선 조금 씁쓸한 일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만을 비평으로 담고자 하는 글의 수가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게임비평에서 저는 어떤 특정한 양식만이 '진정한' 비평이 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 유의미한 비평의 주제가 된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평을 넓게 잡는다고 해도 고유한 관점과 그를 설명하기 위한 충분한 논거는 우리가 게임비평의 장을 넓히고 사람을 늘려가는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전제라고 생각합니다. 전업으로 글을 쓰고 말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갑자기 '각 잡고 글쓰기'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전에 지원해 주신 많은 분들의 원고를 보며 아직 제가 해야 할 일이 많고 많다는 사실을 체감합니다. GG는 내년에도 제3회 공모전을 진행하고, 공모전을 통해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계속 게임문화를 이야기해 나갈 것입니다.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서도 늘 GG가 가고자 하는 게임비평의 길에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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