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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 Back [논문세미나] 디지털게임에 나타나는 알레아의 세 층위 17 GG Vol. 24. 4. 10. 1. 들어가며 어린 시절 자주 했던 놀이들을 생각해 보면 그 결과가 상당 부분 운에 좌우되지 않았나 싶다. 가위바위보에서 손을 내고 희비를 오가게 되는 순간이나 공기놀이하다가 손을 삐끗하는 찰나 등, 노력만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때가 간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놀이들은 결과를 종잡을 수 없는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단순한 놀이의 형태를 넘어, 내기나 겨루기와 같은,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놀이에 대한 속성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다. 이 중 하위징아는 오늘날 놀이와 유희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로 인식되며, 카이와는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보다 유형화해 계승한 인물로 언급된다. 이번 논문 세미나는 후자의 인물, 카이와가 명명한 개념에서 출발한다. 카이와의 놀이는 대체로 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inx)로 분류된다. 이 네 가지 항목은 각각 경쟁, 우연(운), 모방, 현기증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경쟁의 아곤은 축구나 권투 등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놀이를 말한다. 알레아는 사다리 게임, 제비뽑기로 설명할 수 있고 미미크리는 역할극을, 일링크스는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돈 뒤 느껴지는 혼란스러움이나 흥분감으로 예를 들 수 있겠다. 이 네 가지 외에도 루두스(Ludus)와 파이디아(Paidia)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운,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다. 연구자인 임해량, 이동은은 알레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 세 층위로 나누고, 그를 <하스스톤>의 일부 상황과 연결해 바라본다. 연구자들은 놀이가 가지는 우연성이 사행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이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측면을 발굴해 내고자 한다. 즉 이 연구는 알레아를 새로이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2. 카이와와 알레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놀이는 다소 복합적인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이 우연성과 연결되었을 때 도박이나 사행성 관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게임에서 마주하게 되는 우연성은 곧장 도박과 통하게 되는가? 어느 정도 우연성을 의지하게 되는 게임은 사행성에 연관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개념은 결국 룰렛 머신 부류의 게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에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레아는 규칙을 통해 승패를 겨루지만 놀이하는 자가 그 과정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놀이를 일컫는다. 알레아의 승패는 오로지 우연을 통해 갈리는 것이 특징이며 그 즐거움의 본질이란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을 통해 서로의 운명을 겨루는 데 있다.”(66쪽)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란 특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겨루기로 했을 때, 그 승부에서 발생한 운만으로도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연이 선사하는 위험과 기회는 공정하게 분배”(66쪽)된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알레아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는 카이와를 의존해 왔기에 상당히 저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알레아는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역할로 거듭나기 힘들다. 특히 카이와는 알레아와 아곤을 모순적이면서도 결속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알레아가 아곤보다는 보조적이라고 보았다(Caillois, 1967/2018). 이런 카이와의 주장은 사람에 따라 운의 힘이 달라지는, 어떠한 모순에 주목하면서 나타난다. 자수성가한 이에게는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운이 날 때부터 권력자였던 사람에게는 부인 받게 되는 게 그 예다. 한 마디로 카이와는 운과 우연이 노력을 배제시키는 경향이 있고,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을 환상에 빠트린다고 본 것이다. 3. 알레아-우연이 가지는 의미 연구자들은 카이와의 의견에서 한층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들은 카이와가 우연의 비창조적인 부분에만 주목했으며, 우연을 다층적으로 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이를테면 우연은 고대 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 ‘운명’과 ‘천운’을 비롯해, ‘천체’, ‘정의’, ‘징벌’, ‘미신’, ‘요행’, ‘행운’, ‘불행’, ‘행복’, ‘신’, ‘섭리’, ‘계시’, ‘기회’, ‘미래’, ‘가능’, ‘희망’, ‘기대’, ‘역설’, ‘반전’, ‘돌발’, ‘돌출’, ‘변수’ 등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화된 것이다(최성철, 2016). 가령 ‘운명’ 속 우연은 본래 신의 의지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였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의심할 수 없고 그저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우연과 함께하는 ‘운명’은 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인간을 신에게 속박하는 요소였다. 그러나 우연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을 불러오는 ‘자유’의 의미도 띠게 되었다. 한 마디로 진리(운명)를 거스르는 상징에서 언젠가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우연은 ‘운명’과 ‘자유’라는, 다소 상반된 두 개념에 깃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카이와가 이야기한 알레아는 운명과 자유 중 어떤 부분에 더 가까웠을까? 연구자들은 두 개념 모두 그렇다고 설명한다. 카이와가 서술한 우연이 부정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데에서 ‘운명’이 나타나지만, 결국 알레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점에서 ‘자유’도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과 경쟁을 의미하는 아곤이 ‘자유’라는 개념에 훨씬 근접할 수 있겠으나, 연구자들은 알레아를 아곤으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운명’을 곧 ‘통제’로 단정해 온 이제까지의 알레아 논의를 ‘자유’가 공존하는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알레아를 세 층위로 나누면서 드러난다. 4. 알레아의 세 층위와 <하스스톤> 1) 주술적 알레아 연구자들은 알레아의 세 층위를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세 층위를 <하스스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로 설명한다. 여기서 첫째로 주술적 알레아란 ‘주술’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어떠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존버(존나 버티기)’라는 말을 간단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술적 알레아는 신에 대한 의구심을 죄악시했던 중세 기독교 인식(최성철, 2016)을 계승해, 승리를 위한 노력이나 적극성을 생략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주술적 알레아의 핵심을 맹신과 더불어 “어떠한 개연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비이성적 즐거움”(70쪽)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주술적 알레아의 힘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약해졌다고 언급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 이성적 가치관은 현대인들을 변화시켰고, 이들이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놀이하는 일도 적어지게 된 것이 이유다. 이에 연구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주술적 알레아는 사라졌지만, 알레아 그 자체에 잠재된 주술성이 플레이어에 따라 발현될 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스스톤>은 주술적 알레아를 발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게임이다. 연구자들은 ‘무작위 효과 카드’를 사례로 드는데, 이 카드들은 범용성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다만 이 중 일부는 역전의 열쇠로써 사용된다. 여기서 연구자들이 지목한 카드는 ‘난투’다. 난투 카드는 ‘무작위 하수인 하나를 제외한 모든 하수인을 처치’하는 효과가 있어서 승기를 다시 잡기 위해 애용되곤 한다. 연구자들이 주술적 알레아와 난투 카드를 함께 이야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난투 카드를 통해 승리할 수 있길 바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주술적 알레아는 역전을 바라는 이들로부터 재현된다. 2) 시스템적 알레아 자본주의 체제가 성장하게 된 17세기는 화폐 사용이 활발해지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격변했던 때다. 투기, 도박 등이 대중적 공간에 나타나기도 한 이 시기는 알레아의 상업화도 함께 이루어졌다(Reith, 2006). 이후 19세기에 활성화된 카지노는 알레아의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카지노에 설계된 교묘한 시스템이 사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자신이 ‘놀이’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곳의 알레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침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시스템화 되어있다. 이런 시스템적 알레아는 ‘우연이 선사하는 절대적 평등’이 아닌, 플레이어와 사업주 간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한다. 현대 디지털 게임에서 나타나는 시스템적 알레아의 대표적인 예로는 랜덤박스가 있다. <하스스톤>은 카드 팩이 곧 랜덤박스다. 연구자들은 이 랜덤 카드 팩이 카지노의 수익 창출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고 분석한다. 철저히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에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은 낮고, 플레이어에게는 ‘놀이’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랜덤 카드 팩은 개선된 성능의 아이템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돼서, 승률이 중요한 플레이어는 특히나 끊어내기 어렵다. 언급한 것처럼 랜덤박스는 여타 게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가 속속들이 침투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레아가 사행성과 도박만을 뜻한다는 오해로도 이어진다. 3) 영웅적 알레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투쟁하는 영웅적 알레아는 고대 시절부터 ‘내기’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다. 내기는 특히 17~19세기의 기득권 사회에서 잘 이용됐는데, 이는 내기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던 탓이 크다. 내기(betting)가 가치 부여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박(gambling)과 달리 뛰어난 판단과 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19세기에 발표된 쥘 베른의 소설,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설명한다. 해당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내기는 선택(guessing)과 증명(proving)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 선택과 증명은 극복해 내기만 하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기능한다. 이걸로 짐작할 수 있는 영웅적 알레아의 핵심은 ‘자유의지를 기반 삼아, 운명에 저항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가?’다. <하스스톤>에서 영웅적 알레아가 잘 드러나는 건 모험모드다. 이 모드는 한 번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로그라이크 형식을 띠는데, 플레이어가 각각의 난이도와 도전 방식을 ‘선택’하고 이를 클리어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해 낼 수 있다. 이런 영웅적 알레아는 단순히 승리하거나 클리어하는 걸 넘어,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가치에 중심을 둔다. 5. 나가며 물그릇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게임을 하고, 랜덤박스에 지른 큰 금액을 재밌었으니 됐다며 합리화하고, 어려운 게임을 클리어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가 향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대부분의 게이머라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술적 알레아, 시스템적 알레아, 영웅적 알레아에 대한 내용은 개념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대 디지털 게임에 알레아가 형성될 자유도가 존재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몰입해 있을 때는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게임은 정해진 설정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이는 시스템적 알레아에서 언급된 카지노의 체계와 동일하다. 반면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본래 무엇 하나 정해진 것이 없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운을 걸면서 나타난 개념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임 공간 안에서, 주술적 알레아와 영웅적 알레아는 결국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게임에는 제작자들의 계산과 기술이 개입되어 있는데, 두 알레아의 가치를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느냐는 소리다. 물론 연구자들도 두 알레아를 한정된 사례에만 적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게임이 애초 만들어진 세계, 자본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맹점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락실 기기에 코인을 추가하는 행위나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캐릭터 육성 등에도 시스템적 알레아의 흔적은 남는다. 그러면 게임 안의 알레아들은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본문에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관람적 알레아라는 개념을 결론부에 언급한다. 관람적 알레아는 게임 스트리밍이나 e스포츠 방송을 관람할 때 발현된다. 이 알레아는 타인을 매개로 하기에 상당히 간접적이다. 즉 게임을 즐기면서도 시스템적 알레아에 귀속될 확률이 낮다. 이러한 측면에서 관람적 알레아를 주목할 필요성을 함께 제시하고 싶다. 연구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우연성에 관한 논의는 상당히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와 알레아에 대해 더 많은 토론이 오가면 사행성이나 도박 담론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한 ‘우연놀이’ 또한 논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Caillois, R. (1967). Les jeux et les hommes. 이상률 (역) (2018). <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Reith, G. (2005). The Age of Chane: Gambling in Western Culture. New York: Routledge 최성철 (2016). <역사와 우연>. 서울: 도서출판 길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문화연구자) 박다흰 융합예술과 문화연구를 공부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관해 관심 갖고 있습니다. ​ ​

  •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 Back 온라인 시대에서 ‘PC방’이 살아가는 법 08 GG Vol. 22. 10. 10. 게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과 함께한 놀이 문화로 통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오락이 가능한 값비싼 콘솔기기로 시작해, PC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가정 내 기초 게임 환경 구축이 가능해졌고, 지금에 와서는 거리와 관계없이 편하게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는 시대가 열렸다. * 우리가 접하는 '게임'의 모습은 계속 달라져왔다. 이런 게임의 변천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특히 국내에 한정해서 본다면 ‘PC방’은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다. 이르게 본다면 그 태동이 이루어진 1990년대부터, 가장 활발했던 2000년대까지, 한국 게이머에게 있어서 PC방은 누구나 한번쯤 거쳐간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게이머라면, 누구나 ‘PC방’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수많은 게이머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것은, 사실상 게임 트렌드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게임사들이 자사 게임의 인기를 확인하기 위해 PC방 순위를 확인했으며, 프로모션 역시 가장 먼저 PC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PC방은 여전히 존재는 하지만, 그 위세가 이전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는 온라인 시대가 대두되면서 단순히 PC방이 쇠락한 것일까? 아니면 오프라인상에서 게임을 즐기는 문화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이번 칼럼을 통해, 지금 PC방이 점한 위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PC방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곁에 ‘PC방’은 나름 오랜 시간 함께해왔다. 물론, 그 시작점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인터넷 카페’처럼 게임을 제공하기 위한 공간보다는 PC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국내에 한정해서는 이 PC방은 그야말로 게임 하나만을 위한 시설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점이 PC방의 ‘황금기’로 통하는 2000년대 초다. 수많은 사람들이 PC방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를 형성한 시점으로, 이 시점에 이미 주요 가정에는 PC 보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별다른 방해 없이 친구들과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점과 다양한 PC방 혜택 제공 등이 맞물리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이 시절의 분위기란… 아마 PC방이라는 단어를 듣고 친구들과 컵라면과 오다리를 먹으면서 게임을 즐기던 모습이 떠오른다면, 분명 이 당시에 PC방을 진하게 체험해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는 만큼, PC방에 대한 학부모 사이 경각심도 상당했다. 애당초 아직 게임을 즐기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동시에 PC방도 아직 간접 흡연 같은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에 점차 여러 규제들이 적용되던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때 축적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나중에 PC방이 크게 달라진 후에도 걸림돌처럼 작용하기도 했다. 황금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PC방은 e스포츠와 같은 게임 문화를 등에 업고 인기 시설로 군림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분위기마저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PC방의 쇠퇴에 대해서는 매번 업계에서도 다양한 주장이 나오지만, 가장 많이 꼽는 것이 바로 ‘필요성’의 감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게임을 위해 가정 내 고사양 PC를 구매하는 일이 일반화됐으며, 게임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면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많이 사라졌다. 아울러,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디스코드’와 ‘스카이프’ 같은 음성 채팅 프로그램이 떠오르면서 오프라인 모임을 고집할 이유마저도 없어졌다. 사실 그간 게임을 하면서 부족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마당에, 게이머들 입장에서 더 이상 PC방을 선택할 이유들이 많이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 손님들의 게임 환경이 PC방을 뛰어넘은 셈이다. 이런 부분을 PC방 업계에서도 큰 위기로 인지하고, 이후에 크게 변한 모습이 우리가 현재 접하는 PC방 모습에 해당한다. 그저 게임 하나만을 보고 가던 시설은 복합 놀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상태며, 더 많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시설의 청결함과 다채로운 서비스를 내세우고 있다. 새롭게 달라진 PC방은 게임을 즐기는 손님의 편의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높은 고사양 PC와 주변기기는 기본이고, 보다 넓어진 좌석, 스마트폰 충전기 완비, 수준 높은 먹거리 판매, 그리고 특정 손님들 취향을 겨냥한 커플석, 단체석, 스트리머석 같은 좌석들도 존재한다. * PC방도 젊은 손님을 잡기 위해,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를 서비스의 발전을 반증하는 것처럼, 현 PC방의 매출에서 먹거리 매출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일부 PC방은 준수한 먹거리의 맛과 24시간 영업을 강점으로 내걸고, 배달앱까지 진출한 상태다. 주변 매장과의 경쟁이 점화될 수 있는 요금을 건드리는 대신에, 대부분 다른 서비스에서 활로를 찾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다양한 업체와의 협력도 지금의 PC방을 논하는데 있어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드웨어 브랜드, e스포츠 구단과 협력하여 이에 특화된 PC방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금 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손님을 만족시키고, 단골로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아끼지 않고 있다. * 먹거리도, 볼거리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금의 PC방이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가 자주 접했던 동네 PC방 시절과는 크게 다르다. 오히려 그 형태는 하나의 기업체에 가까운 편이며, 보다 철저하고 확실한 기획을 바탕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 마무리 단계가 아닌 한창에 해당한다. 늘어난 선택지 속 ‘PC방’의 입지 위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지금의 PC방은 이전보다 훨씬 시설 면에서, 서비스 면에서 앞선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손님이 늘어나는 일만 남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좋은 시설이 해답은 아니다. 일단 소위 ‘황금기’로 통하던 시절과 지금 현재의 게임 문화 차이를 비교해보자. 일단 앞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과거에는 사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애당초 집에서 게임을 즐기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값비싼 콘솔은 아예 논외였다. 그런 의미에서, PC방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편한 마음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임을 위해 최적화된 PC 사양, 남들 눈치는 크게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 아울러 일부 게임의 월 정액제를 대신하는 가맹 PC방만의 혜택도 있어서 그야말로 게임을 위한 아지트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근처 PC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가까운 친구를 만날 확률이 높을 정도로, PC방은 만남의 장으로써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자연히 친구들이 많이 가는 PC방은 집결의 장소가 됐고, 이런 부분에서는 한 시절을 풍미한 다른 오프라인 게임 문화 ‘오락실’의 입지를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게임은 이제 가장 보편적인 놀이 문화로 자리잡았으며, 이를 위한 고사양 PC도 집에 대부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굳이 PC가 아니더라 모바일, 콘솔과 같은 다른 플랫폼 선택지도 다양하게 준비된 상태다. 이런 시점에 PC방으로 향하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손님 연령대의 변화다. 지난 2021년에 공개된 엔미디어플랫폼 통계에 따르면, 여전히 PC방 이용자 수는 고등학생(17세~20세)과 대학생(21세~25세)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매출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초년생(26세~30세)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태다. 더욱이 이들의 이용 요금이 먹거리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PC방을 진득하게 이용하는 손님 태반이 연령대가 높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 엔디미어플랫폼 PC방 이용 유저 평균 사용 금액(시간) 현장 의견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전과 달리 연령대가 높은 손님들이 예전처럼 단골로 자리잡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PC방 업주들은 결국 과거 PC방을 경험해본 세대들이 PC방을 주로 이용하는 것이고, 보다 다양한 것을 접하고 있는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PC방이 오프라인 게임 문화로써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그 말처럼, 지금의 세대들에게는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려있다. 오프라인 게임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굳이 장소가 PC방으로 한정되지 않고, e스포츠 대회 관람, 게임 행사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게 꼭 PC방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PC방이 더 이상 ‘필요’에 의해 가는 장소가 아닌 시점에, 현 PC방 업계가 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품기 위해 다변화의 과정을 겪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대로, 지금 국내 게이머들 입장에서 오프라인상으로 게임을 즐기는데 있어서,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전과 같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된 시기도 아니거니와, 게임을 즐기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시기도 아니기에 사실상 이전처럼 PC방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는 힘든 상태다. 어떤 의미로, 우리가 기억하던 PC방에서 함께 놀면서, 그야말로 랜파티가 수시로 일어나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제 정말 ‘추억’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 PC방이 아니더라도, 오프라인 문화는 번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프라인 게임 문화가 이전에 비해 쇠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게임이 대표적인 취미로 자리잡으면서, 달리 PC방이 아니더라도 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e스포츠 대회, 코스프레, 오프라인 행사, 팝업스토어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아울러, PC방도 이런 분위기에 밀려나지 않고, 그 나름대로 지속 발전해나가면서 게임을 즐기기 위한 건전한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그대로 이전과 같지는 않다고 보는 시선들도 있지만, 그만큼 이러한 PC방을 즐기는 방식이 계속 변화하는 시점이기에 아직 온전히 바뀐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 마찬가지로 PC방도 그에 걸맞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온라인 시대에 접어들면서 게임업계에서는 PC방과 같은 오프라인 문화를 이제는 쇠퇴했다고 보고 다소 외면하는 시선도 있지만,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이 산재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게임을 즐기는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한다.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PNN 취재 기자) 이찬중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즐기는 것과 더불어, 지금의 PC방 모습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 ​

  • [공모전] 오디오 로그의 문학적 요소와 방법론

    < Back [공모전] 오디오 로그의 문학적 요소와 방법론 13 GG Vol. 23. 8. 10. 1993년 [시스템 쇼크]라는 비디오 게임이 발매되었다. 호러 성향의 던전 크롤러와 FPS 액션 간의 결합한 이 게임은 여러 지점에서 게임 서사 전달 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바로 ‘오디오 로그’ 칭하는 음성 기록물이었다.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오디오 로그는 기본적으로 필드 내 아이템으로 배치되어 있다. 오디오 로그가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이전에 있었던 사건을 회고하는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플레이어가 오디오 로그를 읽기 시작하면 화면 좌측 아래엔 오디오 로그를 남긴 주인의 이미지가 뜨고, 중앙 아래에는 내용 텍스트가 뜬다. 스피커에서는 주인이 내용을 낭독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 도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시스템 쇼크]는 소통이 가능한 NPC를 제거하고, 괴물들로만 게임 내 공간을 채웠다. 그렇기에 오디오 로그의 존재는, 플레이어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그러나 일방적인) 목소리며 동시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인 셈이다. 이런 접근은 서사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기존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비선형적인 ‘텔링’이기도 했다. 그 점에서 [시스템 쇼크]는 현재진행형으로 사건을 진술하는 목소리를 사후적인 시점에서 접하게 하는 스토리텔링과 공간 연출을 개척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스템 쇼크]의 오디오 로그 개념이 시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진 않다. [시스템 쇼크] 제작자 중 한 명이었던 오스틴 그로스먼에 따르면, 오디오 로그라는 디자인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시인 에드거 리 매스터즈의 [스푼리버 시선집]이라고 한다. 1) 윤석임의 [소도시(小都市) 삶의 우울한 초상(肖像) :에드거 리 매스터즈의 『스푼리버 시선집』 논문] 2) 에 따르면 [스푼리버 시선집]은 “스푼리버라는 가상의 마을을 창조하고 그 마을의 묘지에 묻힌 250여 명의 죽은 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내용의 연작 시집이다. 매스터즈는 자유시 묘비문 형식과 극적 독백을 이용하여 그곳에서 발생한 다양한 부패상, 실망감, 수많은 실패 경험, 위선과 정신적 타락을 예시하는 숨겨진 비밀들을 드러”낸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에드거 리 매스터즈가 [스푼리버 시선집]을 쓰게 된 계기로는 자연주의적 통찰력과 사실주의적 묘사로 당대 미국 소도시의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마을로부터의 반항” 운동을 주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연하겠지만 비디오 게임의 오디오 로그가 이런 매스터즈의 구체적인 소도시 ‘낭만주의’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그로스먼이 주목했던 지점은 묘비문이라는 사후적인 기록 형식과 극적 독백을 통한 비밀고백이라는 형식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로스먼 역시 자기 아이디어 역시 “사람들의 일련의 짧은 연설을 종합해, 한 장소의 역사를 알려준다”로 정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스템 쇼크]에서 인간 NPC가 6개월이라는 시간 속에 전부 사망했기 때문에-쇼단이나 에드워드 디에고 같은 현재 시점으로 살아있는 반동 캐릭터의 오디오 로그도 있기는 하다.-작중 등장하는 대다수의 오디오 로그는 시청각적으로 확장된 묘비와 유언과도 같다. 다만 이 묘비는 한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장소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오디오 로그 주인의 최후 행적을 보여준다. 오디오 로그의 텍스트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그로스먼과 각본진은 [스푼리버 시선집]의 문학적 요소로 호명된 ‘극적 독백’을 변용해 도입한다. ‘극적 독백’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자신의 시를 통해 완성한, 시적 화자를 활용한 문학 기법이다. 이 기법에서 화자는 시인이 아닌 극 중 등장인물로 등장하여 중대한 순간에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시 전체를 이야기한다. 화자는 시 속에서 다른 사람들 혹은 청자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시를 읽는 독자는 화자의 말(문장)을 통해서만 다른 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알게 되거나 실마리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화자가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단어나 문장을 통해 (일종의 통제원리) 화자의 기질과 성격을 알게 된다. 극적 독백 개념을 활용해 [시스템 쇼크] 내 오디오 로그의 형식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시스템 쇼크] 속 오디오 로그 대다수는 쇼단의 습격과 시타델의 붕괴라는 위급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화자로 삼는다. 그들은 눈앞에 없는 가상의 청자를 상대로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감정,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하거나,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다. 이런 발언들 속에서 청자인 플레이어는, 화자가 녹음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선택한 단어와 문장 (즉 통제원리) 속에서 성격과 녹음되고 있을 당시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다. 다만 문학적 효과를 노리는 시의 극적 독백 개념과 달리, 그로스먼이 고안한 오디오 로그는 좀 더 실용적이고 구체적으로 목적으로 극적 독백을 활용한다. 사후 시점 고백을 기본으로 느슨하게 구성된 소도시 공동체의 면면을 보여주는 [스푼 리버 시선집]과 달리 오디오 로그는 생전 고백을 기본으로 거대한 사건 속에서 개인이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 보여준다. 즉 [스푼 리버 시선집]의 극적 독백은, 실재하는 공동체와 그 속에 속한 개인이라는 관계를 다룬다면 오디오 로그의 극적 독백은 플레이어가 진행하는 거시적인 서사와 미시적인 (작은 단위의 서브 플롯들로 구성된) NPC의 서사 간의 관계와 파급을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여기다 게임 플레이를 풀어나가는 힌트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몇몇 오디오 로그는 퍼즐 풀이에 대한 단서나 답, 적이나 보스에 대한 대처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디오 로그는 특정 상황에 대한 진술이나 특정한 무언가에 대한 안내서처럼 텍스트를 구성하기에, 주인공이 아닌 살아있는 다른 인물이 발견했더라도 어색하지 않게 청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시스템 쇼크]가 굳이 1인칭 과묵한 주인공을 택한 이유도 플레이어를 청자로 삼아 오디오 로그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텍스트가 기본 매개체인 시와 달리, 오디오 로그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향을 기본 매개체로 하고 있다. 텍스트 없이도 오디오 로그는 성립할 수 있지만, 오디오가 없으면 오디오 로그는 성립할 수 없다. 그렇기에 오디오 로그가 빌린 화술에서 녹음된 목소리 질감은 화자의 어휘 다음으로 청자가 알아차릴 수 있는, 또 다른 무의식적인 통제원리 요소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시스템 쇼크]의 피해자가 남기는 오디오 로그와 쇼단 같은 악당이 남기는 오디오 로그에서, 화자의 목소리 (연기)는 현격히 차이를 보인다. 피해자 대다수의 오디오 로그에서 목소리는 슬픔과 분노, 체념의 감정과 질감이 일관되게 담겨 있다. 반대로 악당 화자의 오디오 로그는 이들에 비해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제일 흥미로운 예시가 본작의 AI 악당 쇼단일 것이다. 이 캐릭터의 목소리와 화자로서 오디오 로그는 일반적인 피해자 화자와는 명백히 다르다. 악당으로서 본색을 드러내기 전인 극 초반부까지는 쇼단은 일반적인 AI 목소리의 무기질성을 ‘흉내’ 낸다. 플레이어가 메디컬 레벨에서 나왔을 때 쇼단은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처럼 배경이 되는 시타델의 각 층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때 플레이어는 오프닝 컷신에서 쇼단의 윤리 모듈이 제거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뮤턴트를 처리하고 나온 상태라, 쇼단의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색을 드러내고 난 뒤, 쇼단은 무기질성을 완전히 버리고 차가운 비인간성과 위압적인 오만함을 섞어서 성격과 개성을 드러낸다. 쇼단의 오디오 로그 내용 역시, 자신의 ‘자칭 신’에 기반한 오만함을 과시하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종종 쇼단은 자신의 청자를 휘하의 적이나 주인공 등으로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게임의 진행이나 향후 전개에 대한 힌트를 주기도 한다. 오디오 로그만의 또 다른 개성으로는 비선형적인 접근성이 있다. 시집은 기본적으로 서적 구성을 띄고 있으며 서적은 저자가 의도한 내용대로 선형적으로 읽어나가게 된다. 반대로 오디오 로그의 배치는 플레이어가 비선형적으로 접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층에서 발견한 오디오 로그가 2층에서 발견한 같은 화자의 오디오 로그보다 후에 녹음된 것일 수도 있다. 또 같은 레벨에 A와 B, C라는 오디오 로그가 있으면 진행 방식에 따라 A-B-C 식으로 획득할 수 있지만, 진행에 따라서는 C-B-A 또는 B-A-C 순으로도 획득할 수 있다. 물론 비일관성으로만 흐르면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용이나 획득 순서에서도 어느 정도 선형성을 유지하긴 하지만, 오디오 로그의 구성이나 접하는 방식이 무조건 선형적이지 않다는 점은 서적이나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게임만이 가능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비선형적인 구성 때문에, 오디오 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르는 제작자가 설계한 높은 자유도의 세계를 플레이어가 창발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게임 장르를 일컫는, 이머시브 심이다. 언급한 [시스템 쇼크]도 이 장르에 속해 있고, 이 장르의 대표작인 [바이오쇼크]는 오디오 로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퍼트린 게임으로 손꼽힌다. 왜 세계와의 접촉과 활용을 중시하는 이머시브 심 장르는, 오디오 로그를 적극적으로 택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머시브 심을 설명하는 ‘환경적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유명 이머시브 심 게임인 [디스아너드]를 제작한 하비 스미스는 환경적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을 제창한 바 있다. ‘환경적 스토리텔링’은 이머시브 심 장르의 핵심적인 어법 중 하나이라 할 수 있는데, 컷신이나 이벤트가 아닌, 게임 내에 있는 배경이나 환경을 통해 게임 속 상황과 서사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연출을 의미한다. 이때 스토리텔링을 하는 ‘환경’은 기본적으로 ‘이미지’ 중심이다. 무너진 건물, 처형당한 시체, 특정한 이념을 설파하는 현수막이나 포스터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환경은 기본적으로 시선의 주체가 아닌 객체이다. 이렇게만 시선의 객체로만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이머시브 심이 내세우는 환경/공간과의 창발적 활용이 어려워진다. 우에다 후미토의 게임들처럼 아예 환경에서 설명과 활용을 모두 배제하는 방법도 있으나, 플레이어 대다수는 이렇게 배제하는 것을 방법을 모호하고 불친절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비디오 게임, 특히 이머시브 심 게임은 환경 이미지를 방해하지 않을 적절한 ‘설명’이 요구된다. 오디오 로그는, 그 점에서 합리적인 비용으로 설명을 제공해줄 도구다. 이는 텍스트 로그나 비디오 로그랑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텍스트 로그는 자원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가장 적게 들지만 매우 단순한 형태와 상호 작용으로 인해 자칫하면 지루해질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비디오 로그 같은 경우,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과도해지면 환경적 스토리텔링을 해칠 정도로 설명적으로 될 수 있다. 여기다 로그를 구성하는 영상을 게임 내 이벤트 컷 신이나, 영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텍스트나 오디오 로그에 비해 많은 품이 든다. 오디오 로그는 이 둘의 중간 지점에서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텍스트와 오디오, 화자를 드러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적당한 자원을 소비하면서도 풍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오디오 로그는 음향 영역에서 서사 전달의 채널을 다채롭게 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디오 로그는, 작위성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듯이 고백해 녹음 장치라는 물질적 증거이자 아이템으로 남겨놓는, NPC 화자들의 존재는 플롯 이해과 진행을 위한 고백이라는 인위성에 빠지기 쉽다. 그렇기에 오디오 로그 디자인이 성공하려면 정보 전달에 있어서 특정한 요구 조건을 충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녹음의 작위성을 억제하도록 화자의 녹음 시점을 조율해야 한다. 두 번째로 화자가 고백하려는 사실과 증언에 관한 당위성과 개연성을, 화자의 배경과 설정을 통해 청자가 납득해야 한다. [시스템 쇼크]의 후속작 [시스템 쇼크 2]의 오디오 로그를 활용한 중요 반전은 그 점에서 설득력 있고 창의적인 오디오 로그 구성을 통한 비디오 게임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디오 로그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지시하는 연구원 재니스 플리토가 사실은 쇼단이었다는 반전인데, 이 반전을 위해 제작진은 오디오 로그의 텍스트/목소리가 전달하는 태도와 내용, 시점에서 화자의 정체와 신빙성에 대한 섬세한 복선을 깔아두고, 게임 내 이벤트와의 연계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쇼단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한 이 반전은 [바이오쇼크]나 [데드 스페이스] 같은 게임들에서도 차용될 정도로, 유명한 반전이기도 하다. 오디오 로그는 앞으로도 비디오 게임에서 적극적으로 차용될 디자인이다. 죽거나 여기 없는 NPC들을 화자로 삼아 극적 독백으로 거시적인 상황에 얽힌 미시적인 감정과 정보를 서술하며, 이를 비선형적으로 구성해 환경적 스토리텔링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 디자이너가 플레이어의 이해에 필요하다고 여겨 배치하는 작위성이 잘 드러날 수도 있기에, 서사 속 상황과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필요한 도구기도 하다. 오디오 로그의 창의적인 활용 역시 오디오 로그의 문학적인 요소 및 구성, 게임 내 배치 및 거시적인 서사와의 연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1) https://web.archive.org/web/20110720003321/http://gambit.mit.edu/updates/2011/02/looking_glass_studios_intervie.php 2) 윤석임. (2014). 소도시(小都市) 삶의 우울한 초상(肖像) :에드거 리 매스터즈의 『스푼리버 시선집』. 국제언어문학, 30, 447-466.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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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 Back 전자오락, 게이머, 인터페이스의 공진화 02 GG Vol. 21. 8.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기술문화연구자) 전은기 문화인류학과 문화연구를 전공하고, 현재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과 한양대학교글로벌다문화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

  •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 Back 그들만의 게임 바깥에서 서성거리기 : 다크소울3과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 (장려상) 07 GG Vol. 22. 8. 10. 1. 암호 설정 fromgall, 그곳의 ‘전통’ 다크소울3은 나의 첫 패키지 게임이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고딕 건물이 빛바랜 색감과 얽혀드는 게임 속 광경이 매력적이었고,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스팀 게임이라는 걸 구매해 봤다. 무턱대고 시작한 게임은 참 까다로웠다. 알고 보니 다크소울은 어려운 난이도로 이름이 높은 타이틀이었다. 이 게임의 디자인은 다양한 함정이나 어려운 전투를 활용해 플레이어에게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부각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고 화면에 떠오르는 'You Died' 문구는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다. 튜토리얼 보스인 '군다'를 9번의 시도 끝에 잡았을 때,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지고 말았다. 동시에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내달렸다. 거듭된 죽음 끝에 쟁취해낸 승리는 퍽 달콤했다. 그렇게 맵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는데, 공략을 봐도 내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러던 와중 '프롬 소프트웨어 갤러리(이하 : 프롬갤)'라는 사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프롬 소프트웨어 사가 발매한 다크소울3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은 fromgall이라는 통일된 서버 비밀번호를 설정해 까다로운 보스나 맵을 협력해줬고, ‘복지’와 같은 이름으로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에게 각종 템을 지원했다. 별도의 가입 절차 없이 익명으로도 글을 업로드할 수 있다는 갤러리의 특성은 이제 막 게임이라는 걸 시작한 당시의 나에게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눈팅 끝에 익명으로 도움 요청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 댓글은 바로 달렸다. “그었음.” 나는 프롬갤의 게시글을 훑으며 게임 관련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기도 하고, 타인의 기묘한 플레이를 보며 즐거움을 얻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특정한 게시글은 어떤 순간에서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분리감을 느끼게 했다. 프롬갤의 '전통'이었다. ‘어떤 한 집단에서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행위’라는 전통의 사전적 의미를 환기하듯, 다양한 사람이 게임 내에서 유사한 행위를 수행하고 그것을 인증하는 형식으로 게시글을 작성했다. 많은 갤러들은 이에 긍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긴 수명을 유지했다. 이 특정한 게시글은 일정한 포맷을 갖고 있다. 그 골자는 이러하다. 요르시카라는 이름의 NPC가 있다. 이 NPC는 '암월의 검'이라는 계약을 주관한다. 플레이어는 그와 계약을 맺고 특정 아이템을 모아 바쳐 보상을 얻는다. 아이템을 얻는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지난한 노가다를 요한다. 모든 노가다를 마쳐 보상을 다 얻은 플레이어는 요르시카를 (창의적으로) 죽인다. 2.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1) 프롬갤에 게시된 글을 바탕으로 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통 포맷을 한 번 살펴보자.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는 글은 프롬갤의 전통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드뎌(드디어) 끝났다’는 부사와 동사를 통해 작성자가 요르시카와 계약-서약자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작성자는 NPC의 이름 뒤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욕설 ‘시발’을 변용한 ‘야발년’을 결합하여 이 인물에게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캡쳐된 게임 화면에서 작성자의 캐릭터는 ‘탐욕의 낙인’이라는 머리 장비를 장착하고 있다. 이는 캐릭터의 발견력 스탯을 올려주는 장비로, 아이템 노가다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상자를 뒤집어 쓴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캐릭터의 모습은 그 자체로 노가다 행위를 증빙해준다. 다크소울3에서 발견력 스탯을 증가시키는 장비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므로 공물 노가다에 뛰어든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외관은 전형적인 구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스크린샷 속 캐릭터의 모습은 작성자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된다. 작성자는 이제 막 암월의 검 노가다를 끝냈다. 공물 아이템 30개를 모아왔을 때 요르시카가 이를 보상과 교환하며 출력하는 특수 대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왼쪽 하단의 UI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장착하고 있는 장비를 보여주는데, 윗칸은 주문 아이템이 할당된 자리이다. ‘암월의 빛의 검’이라고 적힌 흰 글씨는 스크린샷 속에서 캐릭터가 대검에 인챈트하고 있는 기적의 이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적은 암월의 검 계약의 최종 보상이다. 작성자는 대사를 확인했으며, 노가다의 보상을 획득했다. 따라서 프롬갤의 전통이란 곧 게임 내 성취를 인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요르시카라는 NPC가 인게임에서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인벤토리에 기입되는) 인센티브를 모두 취득했다. 이제 다른 동기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와의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 이에 그는 요르시카로부터 받아낸 기적을 살해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요르시카 어금니 꽉 깨물어라..’는 문장은 막 행할 폭력을 예고한다. 그는 자기 캐릭터가 암월의 빛의 검 기적을 대검에 바르는 순간적인 모션을 포착함으로써 역동성을 강화하며 이미지를 끝맺는다. 한편으로 NPC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죽였는지는 글의 매력을 판가름하는 요소가 된다. 이 글에서 인용한 게시글의 작성자는 오른손에 로스릭 기사의 대검으로 요르시카를 가격하려 한다. 그런데 UI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검의 이미지 우측 상단에 빨간 X자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작성자의 캐릭터가 대검 아이템을 장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스탯을 갖지 않았다는 알림이자 경고다. 요구치를 충족하지 않은 장비는 제 성능을 낼 수 없으며 미진한 피해를 준다. ‘일부러 데미지 낮춰서 더 때릴꺼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당신’이라는 타 갤러의 댓글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성자의 행위에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타인이 내러티브를 붙여 해석해줌으로써 작성자의 게시글은 전통의 계보에 안착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즉 전통이란 프롬갤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축적된 일정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발화 형식이라고 바라볼 수 있다. 3. 게임에서의 죽음 문제 여기서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살해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율이 게임 플레이를 두고 “플레이어가 게임 내부의 규칙과 상호작용 하면서 그 자신의 목표, 레퍼토리, 선호를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듯, 게임은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플레이어의 상호작용과 몰입을 강화하기 위한 요소로써 죽음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죽음은 지속해오던 모든 상태 일체로부터 정지되는 것이며,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영원한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 속 죽음은 플레이어가 규칙을 이해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특히나 RPG 게임과 같은 장르에서는 길을 막는 적을 제거하면서 특정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게임 메커닉으로 차용해 왔다. 플레이어가 경험한 죽음은 내부 규칙을 이해할 단초가 되며, 피드백을 거쳐 적을 성공적으로 살해할 경우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역량을 높인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바로 이 지점에서 플레이어 개인의 폭력성·사회성에 대한 우려와 만나기도 한다. 화면 속이지만 누군가를 찌르고, 때리고, 살해하는 행위는 규범과 법률 속에서 자란 교양 시민과는 반대 선상에 놓인 행위로 이해된다. 게리 영은 이를 STA(Symbolic Taboo Activity)로 설명한다. 이는 가상에서는 가능한 행위이나 현실에서는 법과 도덕에 의해 금지되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2) . 그러나 플레이어의 행동 범주를 설정하는 절대적인 배경으로 게임의 규칙이 존재한다.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는 일련의 규칙이 있는 이상 이를 개인의 비도덕성 문제로 환원하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3) . 실제로 요르시카를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인 '요르시카의 성령'은 강력한 살해 동기로 작동한다. 이렇게 바라보았을 때 단순히 요르시카를 죽이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플레이어 개인이 그 게임 세계 내부에 시선을 두고 플레이를 수행하고 완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생활과 분리된 그 고유의 질서를 갖는다는 ‘매직 서클’의 의미를 환기한다. 4. 여기 ‘나쁜 남자’가 있다 프롬갤 전통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커뮤니티에 전시하여 공유하는 과정에 있다. 전시는 게임 밖의 세계에 위치한 청중을 동반한다. 독특한 플레이는 화제성을 갖기 마련이다.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의 인터페이스는 경우에는 ‘추천’을 받아 ‘개념글’로 올라가는 구조를 통해 화제성을 수치화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위해 원칙과 같이 보편적인 범주로 규정된 것 이상으로 발휘된 폭력이 심저에서 불쾌감을 자극할 때, 게시글 아래에 달린 경악성의 댓글은 그가 수행한 괴멸적인 플레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즐길 수 있다. 니스는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즐거움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4) 이 ‘나쁜 남자’와 같이 규범을 위협하는 존재에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 데서 즐거움은 증폭된다. 전시는 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할수록 좋다. 그러한 목적성을 갖고 특정한 라인을 따라 행위를 수행하게 되면 갤러들은 익숙한 내용에 익숙한 반응과 익숙한 호의를 내비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플레이가 따라가야 할 일종의 포맷이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형성된 게시판 내의 놀이 형식에 맞추어 나의 플레이를 만드는, 게임의 매직 서클 내외부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프롬갤이라는 공동체 내의 동력이 게임 내 플레이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에서 작성자는 NPC를 폭행하기 위해 대검을 선택했다. 대검이라는 무기 종은 프롬갤 내부에서 특정한 상징성을 갖는데, ‘상남자’라면 마땅히 들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무기로 플레이하는지에 따라 ‘게이’와 ‘진짜 남자’를 구분하는 발화를 프롬갤 내에서 목격할 수 있다. 게이와 상남자의 구분을 통해 프롬갤이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남성성에 대한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직검과 방패의 조합을 의미하는 ‘직방’은 이상적인 남성성을 갖추지 못한 ‘게이’와 동의어로 활용되는데, 이는 구르기를 통해 공격을 피하는 대신 방패로 막아내는 게 남자답지 못한 행위로 여겨지는 탓이다. 대검을 들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 방패를 들지 않고서 자신의 체격을 훨씬 상회 하는 무기를 든 캐릭터는 그 자체로 공세적인 인상을 준다. 그는 비열하게 방패 뒤로 숨지 않는 ‘진정한 사나이’나 다름없다. 이는 수잔 제퍼드가 레이건 시대의 할리우드 남성 재현을 설명하기 위해 표현한 ‘하드 바디’를 떠올리게 한다. “지치지 않는, 근육질의, 무적의 남성 육체”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프롬갤은 “자신의 뜻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강화된 몸”을 꿈꾼다. 5) 그러는 한편 암월의 검 계약은 플레이어를 노가다로 인도하며, 그는 희박한 확률이 그저 터지기만을 바라면서 주체성을 상실한다. 플레이어는 무력한 확률 앞에서 억울함을 환기한다. 프롬갤의 갤러들은 이를 남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치환하여 요르시카를 정복함으로써 주체성을 되찾으려 한다. 게시글 작성자의 캐릭터는 대검을 들 수 없는 스탯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화하기 힘든 장비를 들기를 고수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프롬갤이라는 집단 내부에서 설정된 남성성의 환상을 입고서 요르시카를 살해한 셈이다. 5. 밈 앞에서 웃지 못할 때 이길호는 디시인사이드에서 발생하는 게시물이 끝없이 분화하고 변형되는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산물은 하나의 갤러리 안에서 생산된다. 그것은 갤러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과적으로는 어느 특정 갤러의 결과물로 도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생산물의 소스는 명백히 다른 갤러에게 제공받았다. 그것은 여러 갤러들의 손을 거치면서 변형을 맞는다. 최종적으로 하나의 갤러가 일종의 ‘완성본’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 순간 새로운 변형의 힘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완성’이다.” 6) 이러한 갤러리 내 생산물의 분화 과정은 밈의 발생과 활용 방식을 닮아있다. 본래 밈이란 리처드 도킨스가 특정한 문화 요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문화 유전자의 개념이나 온라인 생활에서는 달리 통용된다. 주로 밈이란 “특정한 이미지, 영상, 대사나 어휘 등이 유행하면서 퍼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7) 밈의 재미가 “공동의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이에 밈이 호응을 얻은 것은 “개인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8) 밈이 생산되는 환경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와 유사해 보인다. 갤러들은 모여든 게시판에서 해당 주제를 갖고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친목질을 배제한다는 엄격한 수평 관계를 유지하며 그저 한 개인으로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디시인사이드의 게임 게시판이 유머러스한 공간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게임 플레이라는 공감대를 나누는 과정에서 타 갤러와 동질감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머란 곧 집단 내부에서 통용되는 규율이나 사고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프롬갤의 요르시카 살해 전통에서 유머를 느낀다면 그것은 어째서인가? 또 유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이라는 밈에서 유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프롬 갤러들이 발화하는 여성 혐오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들 공동체 내부에서 승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르시카를 살해하는 게시글은 2016년 다크소울3이 발매된 이래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주 개념글로 올라갔다. 2022년 프롬 소프트웨어의 신작인 엘든링이 출시된 이래, 엘든링의 열기를 즐기는 지금의 시점에서 요르시카를 죽이는 전통은 이제 개념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롬갤의 전통을 전통으로 만들어낸 동원을 상실하지 않은 이상, 새로운 전통이 태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밈이 될 정도로 화제성을 가진 플레이가 아직 전시되지 않았을 뿐이다. 나쁜 남자가 되기 위해 안달 난 프롬갤 앞에서, 나는 그저 서성거리고 있다. 1) 권천. “[일반] 똥3)요르시카 야발련아 드뎌끝났다.” 2021.11.28.등록. 2022.06.02.접속. 프롬소프트웨어 마이너 갤러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fromsoftware&no=2383063&page=1 2)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589. 3) 미구엘 시카트. 김겸섭 역. 컴퓨터 게임의 윤리(n.p.: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4) Young, G. (2019). Enacting immorality within gamespace: Where should we draw the line, and why? In A. Attrill-Smith, C. Fullwood, M. Keep, & D. J. Kuss (Eds.), The Oxford handbook of cyberpsychology (pp. 588–608). Oxford University Press. pp. 600. 5) 수잔 제퍼드. 이형식 역. 하드 바디(n.p.:동문선, 2002) 6) 이길호. 우리는 디씨. (2012). 이매진: 서울. 82쪽. 7) 정지우. “무엇이 밈이 되는가”. 민음사. 릿터(32). 14쪽. 8) 이자연. “밈 검열, 그게 진짜이긴 해?”. 민음사. 릿터(32). 30쪽.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

  • How far can the ‘economics of crowdfunding’ go?: The comparative case of <Starfield> and <Baldur’s Gate 3>

    < Back How far can the ‘economics of crowdfunding’ go?: The comparative case of and 16 GG Vol. 24. 2. 10. You can see the Korean version of this article at this URL: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0f0eb392-efdb-48bc-96d5-044351c3f618 If we were to choose two of the most talked-about RPG games in 2023, many would agree to pick (Bethesda Game Studios, 2023) and (Larian Studios, 2023). It appears that gamers generally favor over due to disappointing elements in its game design, despite it still managing to achieve good sales records thanks to the developers’ publicity. The game seems to have demonstrated the limitations of the so-called Bethesda-style RPG games, whereas was praised for its rich interactivity and engaging role-playing elements. Some claim that this Belgium-made game has made a new mark in the RPG genre, listing it as one of the most critically acclaimed RPGs of 2023 alongside The Legend of Zelda: Tears of the Kingdom (Nintendo, 2023). However, this article is not going to address the games themselves but rather the economic discourse of the gaming industry surrounding the production of these titles. First, the high-budget AAA games industry that sustains itself through the 'conventional (form of) capital'. Second, the contrasting mid- to low-budget games based on 'crowdfunding economics' (e.g., Kickstarter and Early Access). Looking at various gaming communities on the internet, it appears that many Korean gamers are actively comparing with other AAA games, including , while labeling them as if they were developed in a similar game production process. To be more specific, while gamers praise for its creativity and rich details, they also, in contrast, criticize and other AAA games for lacking something despite being developed in a similar environment. The criticism is about the negligence of craftsmanship of AAA game developers – such as those in – for not being able to deliver richly crafted games despite having a similar amount of resources. One could argue that such criticism is coming from gamers' expectations for good quality games and the failure of anticipation that the game they've highly expected 'could have been better'. And I'm not completely against that argument. Instead, what I would argue is the binary labeling and comparing of these two game titles that is far from reality. Aside from the fact that both and belong to the similar game genre and received wide public attention upon their release, the two games only have marginal similarities when it comes to how they were developed. Their game design elements are also vastly different, and you cannot just do a direct 1:1 comparison with each other. While is a mass-produced product built with an efficient and stable production direction backed by large investment capitals, is closer to a craft product targeting a much niche target audience grounded from crowd-sourced funding. Of course, I'm not here to discuss the superiority or inferiority between manufactured mass-products and crafted products. What is a more important factor here to discuss is the possible impact that crowdfunding economy, backed by a niche target audience, has on the games that we get to play. can be regarded as a typical AAA game with a strong tendency to create a massive product with concentrated large-scale capital investment. In a number of interviews, Todd Howard, the director of Bethesda Game Studio, highlighted as their well-established studio’s first new IP in 25 years. The studio's mass-scale promotions worldwide, including game trailers and demo showcases in various game shows, clearly demonstrated the massive scale of Microsoft’s capital resources. It also showed what product value has to Bethesda Game Studio, Zenimax Media, and Microsoft, which clearly would have excited the investors on Wall Street. At the same time, the developer was extremely cautious about disclosing its information throughout the production process. We can speculate this from Todd Howard's interview at the Develop: Brighton conference 2020, in which he mentioned that the team "(would) like to do it as much as possible when we can really be able to show it – to show what the final product looks like and feels like, closer to the release" instead of stringing the gamers' "fatigue of wanting something." To put this another way, this demonstrates 's closed production environment with lesser public feedback. And this is not just 's story: as we may all know, the majority of AAA games do not disclose their development process to the public, and the process of receiving feedback is limited to internal QA or public trials and demos, keeping its exclusiveness and prestigiousness from its fans. This further engages the gamers closer to the game’s release date, amplifying their curiosity and expectations of the game – to the point they will gladly open up their wallet and purchase the game. On the other hand, such AAA game’s one-sided strategy also imposes its own risk; to gamers’ misled expectations to disappointment. Gamers’ critical comments towards followed by the game’s release indicate that Bethesda’s internal predictions (perhaps their developers, or executives and shareholders) did not align with their target audiences’ expectations. The game just did not meet people’s expectations towards a well-made game combining space exploration filled with rich and detailed in-game interactive elements – on how they expect Bethesda Game Studio's own unique and long-established RPG design style. Instead, Bethesda appears to have taken more of a simplistic approach with fewer rich and detailed in-game elements as a payback for going big. Perhaps creating a fully immersive virtual space world was impossible in their AAA game production system. We can see this from one of the game’s primary and yet controversial features of space exploration, where the developers have made a vast scale of fully functioning virtual space but with procedural generation of planetary terrain and simplification of spaceship take-off and landing processes, which resulted in limiting the player’s ability to actually explore and do things in the in-game world. Unfortunately, what could have been a valid strategy from the company’s standpoint was not the game design direction that Bethesda’s long-time fans have hoped for. This gap between expectations versus the delivered product, amplified by the company’s recent business strategy, backfired into gamer’s satire and ridiculed remarks towards the game and its developers. is not Bethesda Game Studio's first and only failure. The company has once received strong criticism when they initially released (Bethesda Game Studios, 2018) without being able to deliver its promised immersive open-world game experience. It had underperforming online gaming systems that failed to synergize with the existing Bethesda Game Studio’s unique RPG style, which was clearly a mismanagement of its business strategy. Sure, has better quality than as the studio was able to spend more time in production, which allowed developers to put a significant amount of effort into launching the game. But nevertheless, the case of exposes how a one-sided and efficiency-hungry AAA game production pipeline can further solidify the gap between gamers’ (and the market’s) expectations. It also shows the fundamental downside of this rigid pipeline game production model. Perhaps now is the time, upon learning from , when Bethesda Game Studio should consider a fundamental shift in its pipeline. < Baldur’s Gate 3 > , on the other hand, is a game that was developed simultaneously as the developers share the development process. The game was available for early access for three years until the game’s official release and frequently disclosed its production process to Baldur’s Gate series fans. Such strategy resembles the lively production cycle of crowdfunding economics, despite the game was not directly funded by crowdfunding channels (e.g., Kickstarter). (Because Larian Studio has never adopted the crowdfunding method to finance their games since their successful (Larian Studios, 2014).) Already in the beta testing phase, gamers were able to deliver their feedback for the game to the developers via the game’s official community on the internet. The developers also disclosed their progress upon such feedback and change through community updates, which wouldn’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trust of the developers in their games’ community. Larian Studio has also implemented the abundant openness and freedom of TRPG as much as possible into the game during its three years of early access. I don’t need to delve into further details of ’s high degree of freedom, as it has been widely acclaimed in numerous game reviews and demo play videos on the internet. What is important to mention here, though, is the fact that was produced in a way to accommodate as many demands coming from its fans. I consider this consensus-building with the fans to be what eventually leads the game to an overwhelmingly positive response upon its release. This is obviously not an easy direction for the company, which makes the development story of so much more interesting. While the game design that guarantees maximum openness and freedom to gamers does sound appealing to players, it also adds complexity to the game for those who create it. Also accommodating every demand could just end up making the game that is too complex for people to even play. Being a top-down RPG (with the possibility for gamers to adjust the camera angle), unlike other mainstream CRPGs like , is not also the most favorable choice from the perspective of large capital investors. also needed to provide a vast-scale world setting, story, and significantly more cut scenes than any other of Larian Studio's previous works. So we can imagine increased the level of complexity in its production that its prequels. As such, Bethesda Game Studio and Larian Studio developed their games with clearly different directives. In addition to that, they have different pathways in history of their businesses. Bethesda Game Studio, as shown in their solid pipeline process, is a company rooted in the conventional forms of game production studio systems in the 1990s. The company gradually scaled up with mergers and acquisitions backed by large-scale capital investments – like those in large-scale software sectors. During this time, in the early to mid-1990s, when Bethesda started as an RPG production studio, the online game community was immature. It didn’t have its own logic of ‘economy’ per se, with only a handful of alternative publishing channels available at the time. Such as shareware or small game retail stores. Due to the technical limitations of the internet environment at the time, the shareware phenomenon did not grow significantly, rather only regarded as a sort of pre-showcase method to share parts of the game to lure gamers to purchase the ‘full version’. At that time, only small-scale game developers, such as hobbyists, were able to receive direct feedback from their potential gamers for games in development. Such direct feedback mostly relied on an immediate network and thus clearly was not possible for mass-scale game production. Furthermore, the growth of Bethesda Game Studio was driven by its CEO, Robert Altman, who formerly worked at Zenimax Media and had expertise in company management and finances. Fast forward to today, we also cannot separate Bethesda Game Studio from the influence of large corporations, such as Microsoft, and investment firms on Wall Street. On the contrary, Larian Studio is a company established without a pre-existing business entity and therefore operates without existing company management or shareholder’s interest. As Jason Schreier, an American game journalist, mentioned in his article in Bloomberg, Larian Studios is a private company with its majority shareholder privately owned by Swen Vincke, Larian’s chief executive officer, alongside his wife. This allows Larian Studio to take its initiatives without trying to meet Wall Street’s expectations. However, Schreier also pointed out that such a company structure also comes with “full of risks”. As a matter of fact, Larian Studio struggled after the company failed to retrieve its share of profit from their moderate success of (Larian Studio, 2002), the first of the Divinity game series. The company had to run with only three individuals at some point while working on its sequel, (Larian Studio, 2004). Despite this risk in finances, Larian continued to operate in a private company structure maintaining its focus on a specific game genre, even after the success of (Larian Studio, 2014). For me, this resembles Nihon Falcom, one of the mid-size Japanese game studios that is consistently producing its own unique style of JRPGs. But of course, the main difference is that Nihon Falcom is now a public company, while Larian Studio leveraged its pivotal growth from crowdfunding economics. So what aspects of crowdfunding economics benefited the studio’s growth? Larian Studio’s supporters were comprised of people who gathered through word of mouth, fan-based, a niche group of enthusiasts. They were different from the AAA fan base, those that are often loyal to past franchises and rooting for their past glory’s comeback. In contrast, Larian Studio’s early Divinity series reached moderate success in the sense that it did not draw a solid fan base like in those massive-scale game corporations. Their recorded a positive response in the mid-2010s when various crowdfunding projects emerged all across the game development scene – with the rise of the Kickstarter platform. However, even the studio’s Kickstarter project did not draw much attention, even less spotlighted than the Kickstarter projects from the former-Interplay Entertainment veterans – the publisher of Baldur’s Gates franchise since the late 1990s. Nevertheless, made a success by satisfying the fans of classic RPGs, managing to establish the studio’s first fan base after sourcing its finances partially through crowdfunding. What is interesting here is that, unlike other successful Kickstarter game projects, including the projects from the industry-acclaimed AAA game industry veterans, the team of had not many track records to present at that time. But perhaps this allowed Larian developers to go more boldly – instead of following a safe track. Ironically to say, they didn’t have much – nothing much to lose, therefore were able to leverage greatly from this new trend of crowdfunding economics. Now, is a product developed after Larian Studio’s growth in scale since its boost from the crowdfunding economics. The game involved an estimated 200 people in development, without counting the workforce in their newly established overseas branches. Size-wise, the studio is nothing like their early days of . As journalist Schreier and the industry veteran Xavier Nelson Jr., pointed out, perhaps the production of was a lucky move in the first place – as Schreier said in his article on Bloomberg, “most other video-game developers are either part of publicly traded companies or too small to make games as ambitious as .” Established game companies like Bethesda Game Studio may be able to deploy larger manpower and greater capital investment, but wouldn’t have been able to mediate the risk of developing a game with complex rules, turn-based combat system, with countless branching paths that require countless resources on content that may go mostly unappreciated. It is even remarkable that Wizards of the Coast, the publisher of “Dungeons & Dragons”, allowed Larian Studio to go with three years of early access of as it might have risked the reputation of its brand with an unfinished game. It is also a drastic contrast with the early access of that was done primarily for just refining and supplementing a near-to-complete game. In comparison, 's early access was recklessly long and was disclosing its production process to the potential players. Of course, there were traces of some promised coming-soon contents being deleted upon the game’s release as if the early access schedule could not be extended indefinitely. But still, the trust and openness of Wizards of the Coast towards Larian Studio of letting them to continue with 3-years long early access is surely an interesting element to look into. The success of ’s open game production, rooted in crowdfunding economics, is perhaps the most intriguing phenomenon that we’ve come across in the world of games in the year 2023. Those who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early access of were either niche, too old-fashioned, or outside the mainstream target audiences – at least, that’s how it has been seen by cool-headed market analysts in large investment capital firms. But such a niche and active fan base is not just limited to the classic RPG genre. There are numerous devoted communities in point-and-click adventures, hyper FPS, 2D platformers, dinosaur simulators, and so on. On top of that, with the growth of ESD (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 early access, and crowdfunding since the 2000s, the world’s indie game market is more robust than ever before. This enables a scalable fandom market, which was once neglected by the logic of large capital, can now unite and establish alternative means of the games market. And this is not just an isolated case of – there are other cases like by Frontier Dev. demonstrates that fans are no longer remaining as passive consumers. It shows the impact of crowdfunding economics on the indie game scene, where niche fans' trust and devotion towards the game (i.e., towards the game that they would like to play) actually becomes powerful enough to affect the mainstream market. This contrasts with , the mass-scale production backed by large investments with a veteran production team but decided to go a safer and proven pathway towards revenue. It could be that gamers are getting fed up with the industry giant’s overemphasis on satisfying their shareholders' interest to maximize revenue and minimize risk. What backers of crowdfunding economics are doing to the game developers somewhat resembles how aristocrats during the Renaissance era used to order custom-made handicrafts from artists and craftsmen – backing the creators to make the game that fits their specific taste. While the Renaissance aristocratic patrons were a tool for monopolizing arts and crafts with their power of class and wealth, the contemporary patronage of games is more like a collective action of anonymous consumers. Here, their primary aim is to regain their access to niche crafts (of games) that were once alienated from the mainstream capital market. Of course, nothing is perfect. There’s also a downside to crowdfunding economics – that it's not always a happy ending, and the development of was perhaps a rare experiment and one-of-a-kind incident that will be remembered in the history of the game industry. It is also yet unknown whether Larian Studios will continue onward with this experiment in their future projects. Vincke has already commented in his interview with Bloomberg that he doesn't want to spend another six years working on one game and was unsure about what Larian Studios' next game is going to be. It could be that their next project may not follow the exact pathway of , and the moment may be remembered as one lucky happy moment. But nevertheless, the success of showed the world how far crowdfunding economics could go; the economics of people’s crowdfunded desire, of wanting to see the product they want to consume. For that, it was indeed the most remarkable incident in games of 2023. That’s not to say all gaming industry to follow the same path as – which is impossible – but the story certainly could inspire future innovators to come.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Doctoral researcher at Aalto University, Finland) Solip Park Born and raised in Korea and now in Finland, Solip’s current research interest focused on immigrant and expatriates in the video game industry and game development cultures around the world. She is also the author and artist of "Game Expats Story" comic series. www.parksolip.com (비평가) 이이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전문사 졸업 후 영화•게임 비평 기고 활동중. 어드벤처 게임 좋아함. (antistar23@gmail.com )

  • [공모전]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 Back [공모전] 최종장과 변방_비디오 게임 속 공간적 한계의 실감 13 GG Vol. 23. 8. 10. 1. 게임 세계의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것은 어린이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무료 플래시 게임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디오 게임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의 나는 커비와 똑 닮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플래시 게임에 빠져 있었다. 정식 게임판의 커비보다 이 안광 없는 가짜 “커비”와 먼저 면을 익혔다. 그때의 기준으로도 비춰봐도 결코 흥미진진한 게임은 아니었다. 이 “커비”도 정식 게임판의 커비처럼 적을 빨아들이거나 뱉으면서 납작한 2차원 세계를 전진해나갔다. 숨을 참으면 둥둥 뜰 줄도 알았다. 다만 이 “커비” 게임의 어떠한 장애물도 시간을 바쳐 극복할 가치가 없었다. 몬스터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의무라도 지키듯이 듬성듬성 떨어져 돌아다니며 내외했다. 모아봐야 아무런 효능이 없는 별들이 잘도 모였다. 탈출해야 하는 구덩이는 얕았고, 점프해 올라타야 하는 발판은 낮았다. 분량은 짧았다. 조물주는 이 세계를 완성하지 않고서 소피를 보러 떠난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나버리고서, 무언가를 미완으로 남겨두고 떠나왔다는 사실조차 영영 잊어버린 것이다. 십분 이상 잡고 있을 가치가 없는 조잡하고 공허한 게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혹되었다. "커비"는 무성의하게 마지막 발판에 도착해 승리의 깃발을 올린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발판이 사라지고 발판 없는 바다가 이어졌다. "커비"는 이 바다 위로 날아갈 수 있었다. 키만 주의해서 누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날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콜럼버스라고 상상하는 어린이 제국주의자는 이 바다에 매혹되었다. 언젠가 그 넓디넓은 바다를 횡단하고, 인내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히든 스테이지를 발견하리라 믿었다. 그렇게 수 시간 동안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키를 눌렀다. 숨을 참으며 둥둥 떠다니는 커비를 지켜보았다. 영원에 육박하는 시간이 더 지났다. 영원은 그 채도 높은 평면의 바다, 수면에 닿으면 바로 숨이 넘어가는 지옥의 바다, 파도 한 번 치지 않는 적막의 바다가 무한히 반복되는 병풍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분통을 터뜨렸고, 사기극에 휘말렸다고 믿었으며, 땅이 꺼지는 허무로 괴로워했다.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의 실존이란 무엇인지 자문하고 또 자문하고, 시대의 진리가 될 답변을 거의 얻을 뻔했다... 2. 게임 세계의 종점, 그것은 사실 신대륙일 필요도 없었다. 최소한 세계 끝자락의 상어라도, 상어의 지느러미라도, 이마를 찧어야 하는 벽이라도 발견하면 족했다. 더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전진의 여지는 필연적인 근거를 갖고 생성된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제는 추억이 된 커비 플래시 게임을 제작한 익명의 인물은 진행을 가로막는 벽이나 끝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아바타의 공간적 이동의 여지를 마련한 게임에 있어서, 플레이어는 단순히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출발선에서 시작해 결승선에 달하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은 제작자의 의도와 게임 장르의 오락적 규약의 다발들 사이의 교류를 통해서 그려지는 필연적 배치에 의한 것이다. 플레이어는 이 필연적 배치 안에서 자신이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조우를 강제당하기를 원한다. 정확히는 예상한 범위 내에서 예상치 못한 조우를 강제당하기를 원한다. 스테이지로 나뉜 플랫포머 게임에서, 그 최후의 대단원이 되어 줄 조우는 마지막 스테이지에 일어날 것으로 흔히 기대된다. 측면의 얼굴만 보여주는 수줍음 많은 플레이어의 아바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한다. 하나의 스테이지는 다른 스테이지로 향하기 위해 돌파해야 하는 이차원적 통로면서, 그 돌파를 방해하는 물리적 저항이기도 하다. 공중에 떠 있는 발판은 점프를 지시한다. 밧줄은 위로 올라가기를 지시한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발판은 타이밍에 맞는 점프를 지시한다. 구덩이 속 뾰족뾰족한 가시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점프를 지시한다. 스테이지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플레이어가 아바타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추상들의 구문이기도 하다. 게임의 공간적 끝, 게임의 마지막 행위, 게임의 마지막 무대(stage)를 보고자 하는 소망은 그러므로 중첩되고, 혼재되며,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다. 플랫포머 게임에서 최후의 공간, 최후의 조우에 대한 소망은 더불어 충족된다. 가령 <슈퍼 마리오Super Mario> 시리즈는 쿠파와 같은 강대한 보스와 대결하고 납치된 피치 공주를 구조하는 스테이지를 항상 대단원의 스테이지로 삼는 전통을 갖고 있다. 반면 <슈퍼 마리오> 의 안티테제이고자 하는 게임 <브레이드Braid>는 플레이어가 마지막 스테이지에 이르러서야 여태까지의 여정과 전진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도록 무대를 배치한다. 주인공이 공주를 구하고자 달려온 게 아니라, 그 주인공으로부터 달아나는 공주를 쫓고 있었다는 진실 말이다. 스테이지 게임 저변에 깔린, 명쾌하고 명료하며 직선적인 이야기는 한편으로 스테이지 간의 근원적인 단절을 숨기고, 좌우로 길게 봉합된 스테이지의 연쇄를 통과하며 전진하고 있단 환상을 유지한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의 변용인 게임 <돈룩백Don’t Look Back>은 공간적 연속성이란 환상을 선형의 이야기가 지탱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말 없고 추상적인 픽셀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케르베로스와 하데스를 상대하고, 붉은 용암을 뛰어넘으며, 에우리디케의 혼을 만나 함께 무사히 지하 세계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주인공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대안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이 아니라, 묘지를 떠난 적조차 없는 자기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한다. 스테이지 구조의 수미상관은 이 아바타가 전진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구원되지 않고 단지 썩어갈 뿐이란 사실로부터 달아나고 있었음을 표명한다. 묘지를 애초에 떠난 적조차 없다는 진실은 스테이지 게임의 불안정한 틈새를 벌려 보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며 플레이어는 이전 스테이지와 이후 스테이지를 지나친다. 그 통로의 연속성은 시간적 선후 관계와 공간적 연결을 혼동하는 결과물로서만 담보될 수 있다. 이 연속성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지, 혹은 순식간에 믿음직스럽지 못해질 수 있는지를 전진과 회귀의 구조를 통해 <돈룩백>은 보여준다. <돈룩백> 시작 화면 플랫 포머 게임들은 이처럼 이차원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전진에 대한 비평을 게임 내적인 논리에서 마련한다. 그 비평은 특히 게임이 제공하는 최후의 조우와 최후의 공간을 중첩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유의 완결된 형식미를 갖춘다. 그러므로 가짜 커비 게임에서, 게임의 끝을 아직 마주하지 않았다는 감각이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했고, 그 끝이 한참 전부터 반복 재생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형식미가 부재하며 의미화되지 않는 전진과 그 전진의 최종 국면이란 게임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어 보였다. 3. 게임 세계의 종점으로 향하는 선로가 증식한다. 무료 플래시 게임을 섭렵한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더 좋은 사양의 콘솔 기기, 게임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공간, 대형 제작사의 게임을 구매할 돈 등을 통해 얻은 접근성으로, 나는 소위 "오픈 월드Open-World" 게임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게임의 종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은 "오픈 월드" 게임의 진화로 인해 더욱 복잡다단하게 변화한다. “자유롭게 배회하는Free-Roaming” 게임이라고도 불리는 “오픈 월드”는 형식미가 부재하며 의미화되지 않는 무한한 전진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오픈 월드”는 게임의 3차원적인 종점에 해당하는 경계 지대를 필연적으로 탐색할 필요는 없도록 공간을 구조화한다. 우선, “오픈 월드"는 게임 디자인 차원에서 엄밀히 정의된 개념이기보다는 사용자들이 특정 게임 경험을 유형화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임을 밝혀야겠다. 게임 기술의 발전과 컴퓨터 사양에 크게 의존하는 ”오픈 월드“는 게임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어떤 오픈 월드는 거짓 오픈 월드고, 어떤 오픈 월드는 진정한 오픈 월드란 식의 판정을 벌이는 토론은 포럼에서 아주 흔히 보이고, 이는 오픈 월드가 게임을 분류하는 항목인 동시에 가치의 척도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사용자들은 근 10년 이내에 발매된 동시대의 오픈 월드 게임을 말하며 함께 GTA, 젤다의 전설, 위쳐 3,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폴아웃 3 이후의 폴아웃 시리즈 등을 떠올린다. 내러티브를 가진 ”오픈 월드“로서 잘 알려진 이 대형 게임들에 대한 대체적 진술로서 ”오픈 월드“를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용자들은 이동 제약의 제거를 기대하고, 이동 제약의 제거를 실감할 수 있도록, 오픈 월드 게임은 제작 단계에서 복수의 진로, 단 하나의 선택지가 아닌 선택지의 다발을 염두에 두게 된다. 오픈 월드 게임은 더불어 영영 멀어지는 지평선이 있는 광대한 풍경으로 플레이어를 초대한다. 1인칭 카메라를 통해 플레이어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로 화하며, 3인칭 카메라의 경우, 지평선 앞에 자리한,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아바타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 카메라는 360도로 돌아갈 수 있는 경우가 잦지만, 원근법상 현실적인 축적과 눈높이를 갖고서 게임 세계에 떨어진 플레이어의 아바타를 비춰야 한다. 플레이어는 지도를 켜거나 미니맵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실시간 위치를 식별한다. 또한, “오픈 월드”는 게임 스테이지(stage)에 의한 분단과 로딩을 최대한 제거하고자 한다. 그리고 변형의 가능성으로부터 닫혀 있는 방해물이었던 오브젝트(object)는 되도록 플레이어의 조작을 통해 이동 혹은 변형 가능한 원자재로서 나타나야 한다. 더불어 게임의 내러티브와 여러 가지 목표들은 플레이어가 직선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저마다의 진로를 개발해내고, 방사선과 같이 뻗쳐 나가는 확산적인 배회를 장려한다. <위쳐 3>의 전체 맵 스테이지 게임의 형식미는 방해물을 뛰어넘으면서 돌파해 가야 하는 진로이자 그 진로에 대한 저항력으로서 공간을 추상화한다. 그러므로 더는 전진할 수 없는 최후의 공간은 여정의 결말이 펼쳐지는 대단원의 무대와 동일시된다. 반면 “오픈 월드”에서, 맵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지역은 끝자락이라는 이유만으로 최후의 조우가 벌어지는 공간적 배경으로 배치될 필연성을 갖지는 않는다. 경향적으로 “오픈 월드”의 주요 이벤트는 전체 지도의 중심부에 밀집되어 있다. 게임의 여러 사건과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지점을 표시하는 지도의 마크가 얼마나 밀집되어 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경향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심부는 플레이어가 게임의 중반 즈음에 진입하고, 그 이후 가장 자주 드나들게 되는 곳이며, 사방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공간적 한계에서 오는 이질감을 가장 옅게 느끼는 장소이다. <위처 3>의 “노비그라드”나 <폴아웃 4>의 “다이아몬드 시티”에서 그러하듯이, 중심부는 자주 동시대인의 지리적 현실성에 대한 감각에 반응하여 상공업이 활발한 도시, 문명의 중심부, 서로에게 이방인인 자들이 모이고 자본이 축적되는 메트로폴리스로 나타난다. 사건과 갈등과 정치가 중심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연을 지닌 NPC들을 마주친다. 축적해놓은 재물과 귀중품을 팔 상가를 찾을 수도 있다. 중심부는 게임의 엔딩을 보고자 하는 플레이어는 한 번은 반드시 발을 디뎌야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을 갖는 게임이 무한히 확장되며 무한한 자유를 갖고서 배회하고, 무한히 다양한 사건과 조우할 수 있는 공간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배회”도 복수의 다발을 가진 플레이어의 진로도 지향될지언정 결국에는 제한될 운명이다. 지도의 어느 경계에 이르러 플레이어는 한 발자국도 더 뻗어 나아갈 수 없는 종막에 도달한다. 경계 너머는 로딩되지 않는다. 경계 너머가 애당초 만들어진 바 없으며, 그러므로 두 영역을 나누는 경계조차 애초에 존재한 바 없기 때문이다. 경계 대신 항시 존재해왔던 건 벽이다.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영상 작업 <평행 1~4> 연작이 우스꽝스럽고 집요한 충돌을 통해 보여주듯이, 그래픽은 플레이어가 렌더링의 끝을 표지하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게 아니라, 산맥, 강줄기, 절벽과 같은 자연적 지형지물에 의해 진행이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그 주장만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가는 일은 실패하고 만다. 파로키의 <평행> 연작만을 보면 오픈 월드에 있어 경계 너머란 현실성을 자처하는 게임 세계의 가상성과 허위를 폭로하는 시각적 신기루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신기루는 그 착시의 효과가 존속되어야만 하는 신기루다. 오픈 월드가 자청하는 현실주의의 설득력이 지탱되기 위하여 공간은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계속해서 연장되어야 한다. 이곳이 곧 끝이지만, 게임 내적으로 이곳이 곧 끝이라고 선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설. 경계 부근은 열린 세계의 닫힌 지역이라는 점에서 오픈 월드의 모순이 격화되는 장소다. 그리고 그 모순을 요철 없이 매끄럽게 만들기 위하여, 게임은 시각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다양한 전략을 활용한다. 오픈 월드 게임은 활발하게 변방, 오지, 무인지대에 대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자주 변방은 천연자원의 제공처로서 나타난다. 오픈 월드 맵의 주변부는 상대적으로 NPC의 인적이 드물며, 사건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황무지, 야생지, 원시림인 경우가 잦다. 자연물은 투명한 벽을 가리는 시각적인 눈속임의 기능으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오픈 월드의 경계지에 도달한 플레이어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게임은 진귀한 광물 자원과 희귀한 동물 가죽을 찾는 등의 보상을 준비해둔다. 손상되지 않은 천연자원을 제공하는 변방을 그리는 가장 대표적인 게임 공간으로서,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북서쪽 산맥 부근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로키 산맥을 본뜬 이 산맥은 되짚어 돌아갈 수 없는 서부 개척 시대와의 단절을 가파르게 물리적으로 표시하며 경외감을 일으킨다. 두꺼운 옷을 인벤토리에 챙기지 않으면 동상을 입게 되는 이 산맥 부근은 희귀한 알비노 물소와 백마가 서성거리며, 가죽이 손상되지 않아 가치가 높은 야생 동물들이 뛰노는 곳이기도 하다. 아트 디렉터 아론 갈버트는 한 인터뷰에서 램브란트와 같은 목가 화가에 덧붙여서 알버트 비어슈타트Albert Bierstadt와 같은 19세기 미국 풍경 화가로부터 <레드 데드 리뎀션 2>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다.1) 램브란트만큼 잘 알려져 있진 않은 알버트 비어슈타트는 미국의 자연을 발명하고자 하는 국가주의적 수요에 발맞춰서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서부의 야생지를 그리며 명성을 얻은 자연주의 화가다. 그에 대한 당대의 논평 하나는 그의 풍경화를 “숭고한 자연의 형태와 무례한 야만인의 삶”을 담아낸 “순수히 미국의 풍경”이었노라고 상찬한다. 변방이 만들어진 제국의 자연으로서, 제국의 문명이 결국에 극복하고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서 재현되거나 혹은 해석되어 온 역사는 길고 강고하다. 그것은 변방을 변방으로 여기지 않으며 살아온 선주민의 역사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강고해져 왔다. 자연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으로서 널리 알려진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풍경과 알버트 비어슈타트의 연결 고리는 형식 없는 자연이란 언제나 이미 형식으로서 현현함을 한 번 더 상기시킨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목가적 풍경과 대조적으로, <사이버펑크 2077> 세계의 최남단 변방은 동시대의 갱신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를 반영하듯이 메트로폴리스가 토해낸 폐기물이 마천루만큼 드높게 쌓여가는 매립지로 상상된다. 최북단 변방은 가동을 멈춘 유정으로, 주인공의 인격에 빌붙어 사는 전직 로커이자 테러리스트 귀신인 조니의 시체가 유기된 곳이다. 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 없는 논평일 때가 잦은 사이버 펑크 세계관에서, 변방은 중심부 도시의 폐기물이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부표로서 매여 있는 토성의 고리이며, 과거의 산업 폐기물과 과거의 저항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폐기되는 곳이다. 또한 모두의 발길이 닿지는 않는 맵의 주변부는 그 게임의 서사적 필연성 외부를 맴도는 존재들을 끌어들여 플레이어를 위한 의외의 조우를 성기게 마련한다. <위쳐 3>은 <레드 데드 리뎀션 2>와 달리 비옥한 자연이 아니라 전란으로 황폐해진 늪지대 벨렌을 의미심장한 변방으로서 제시한다. <위쳐 3>의 세계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걸쳐있는 유럽 생활사와 민속 신앙 속 이물들이 동위에서 뒤얽힌 세계다. “노맨즈랜드”라는 별칭을 가진 벨렌은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전의 게롤트가 초중반에 머물며 능력치를 올린 뒤 떠나는 출발점과 같은 장소다. 탈영병을 린치하는 것이 이 동네 오락의 전부고, 돼지와 사람이 뒤엉켜 자는 오두막 몇 개가 비스듬하게 기대선 게 마을의 전부다. 흙길은 가축 오물과 노상 방뇨한 오줌이 끊기지를 않는 장마 속에서 고여 매일 뻘과 다름없는 상태다. NPC에게 말을 걸어도 욕설을 하거나 가래침을 뱉을 뿐이다. 주인공 게롤트는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며 중세 대학 도시, 부농들의 과수원과 농장, 르네상스 극단과 범죄 조직이 들끓는 대도시와 같은 흥미진진한 공간들을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불쾌한 사람들과 불쾌한 공기만 넘치는 벨렌은 돌아갈 이유가 크게 없는 장소이자 변경지대가 된다. 푼돈을 받고서 역사보다 오래되고, 미신적으로 숭배받는 괴물들을 처단하고 다니는 걸 업 삼은 게롤트는 빈곤한 밭과 아이에 매여 돼지와 엉켜 잘 도리뿐인 NPC와 달리 자유로운 이동의 특권을 가지고, 괴수의 미신적인 힘을 조소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의 압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무적의 게롤트도 상대하지 못하는 여성 괴물들이 벨렌의 가장 가난한 경계 지대에서, 늪 지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군림한다. 운명의 여신처럼 세 자매인 그들을 게롤트는 스토리 상으로도 퀘스트로도 결코 완전히 죽이거나 이기지는 못한다. 거듭해서 성장하며 거듭해서 정복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특권이 닿는 영토 너머에서 그들은 존재한다. 게롤트는 잊혀진 세 자매의 영토로 돌아와서 그가 비웃던 미신적인 힘에 사로잡히기를 자처한 것처럼 죽은 자의 유품을 구한다.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무익한 싸움을 하고서 덫에 걸린 개처럼 무명의 죽음을 맞는다. 벨렌은 최악의 결말, 최악의 상실을 할당받은 변방, 중세인들 사이에서 근대인과 같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남성 주체이고자 했던 게롤트의 의외의 악몽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변방은 자주 지배적인 현실주의를 반영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현실주의와의 분절을 도리어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데스스트랜딩>의 타르 강을 떠올려 보자. <데스스트랜딩> 세계에서는 죽은 자가 “BT”로 불리는 반물질 유령으로 변모하기 때문에 시체가 시한장치가 달린 핵탄두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살육은 편리한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비살상으로 주어지지만, 어쩌다 사람을 죽이게 되면 언제나 트럭에 시체를 켜켜이 쌓는 동작을 진행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폐기하기 위해 달려 가야 한다. 소각로로, 혹은 타르로 가득한 호수와 강으로. <데스스트랜딩> 최북단 변방은 시체를 한 구 한 구 다시 옮겨서 소각해야 하는 소각로보다 편리하게 수장시킬 수 있는 폐기처다. 플레이어는 거대한 타르 강에 시체를 밀어 넣기 위하여 그곳을 찾게 된다. 그 강은 투명한 벽과 달리, 그 무엇도 가라앉은 뒤로 떠오를 수 없고 다가서는 무엇이든 먹어치우고자 하는, 입이 달린 경계로서 숨 쉰다. 시체는 느릿느릿하게 타르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경계는 벽이라기보다는 현세에 현신한 테티스 강과 같다. 강은 그러나 탐욕스럽거나 두렵기보다는 모든 더러운 육체와 녹슨 폐기물(두 가지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을 삼킬 수 있는 자애로운 구순으로서 상호작용한다. 오픈 월드의 변방은 공간의 차등화와 분절화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논평인 동시에, 현실주의에 반하는 새로운 지리학을 체현하는 픽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다. 오픈 월드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하는 변방은 도리어 서사적 필연성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그 “열린 세계”의 정체성을 축약해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1 )Gies, Arthur. “The Painted World of Red Dead Redemption 2.” Polygon, 26 Oct. 2018, www.polygon.com/red-dead-redemption/2018/10/26/18024982/red-dead-redemption-2-art-inspiration-landscape-paintings.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작가) 성훈 문학을 전공했다. 게임과 만화를 좋아한다. 특히 테리 카바나, 코지마 프로덕션, 옵시디언의 게임과 이치카와 하루코, 이시구로 마사카즈, 하기오 모토의 만화를 좋아한다. 인터랙티브 VR 작업 <원룸바벨>에 내러티브 디자이너로서 참여했다. 뚜이부치란 필명으로도 활동한다. ​ ​

  • ‘인디게임’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 Back ‘인디게임’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02 GG Vol. 21. 8. 10. * 인터뷰는 반지하게임즈 본사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포털 사이트에 인디게임을 검색하면, 도트 그래픽의 레트로 게임 풍 이미지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은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와 개발자의 열정 등으로 부족한 자금력을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와 같은 기표들은 인디게임의 다양성을 포괄하기에 부족하다. 이에 오늘날에도 인디게임이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인디게임인지에 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인디게임의 범주에 관해서는 여러 행위자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바, 모두를 만족시킬 온전한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념적인 개념어의 범주와 상관없이 지금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며 인디게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하게임즈’의 이유원 대표를 만나 그가 정체화하고 있는 인디게임은 어떤 개념이며 지향점은 무엇인지 살피고자 한다. 2021년 9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이 직접 반지하게임즈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편집장: ‘반지하게임즈’의 그동안 출시작들을 보면 우리가 주류에서 이야기하는 디지털 게임의 유산을 가져다 쓰기보다는 오프라인이나 레트로 게임의 영향이 훨씬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어떤 게임 경험이 지금의 ‘반지하게임즈’를 만들었다고 보시나요? 이유원 대표: 물론 저도 어릴 적부터 많은 게임을 했지만, 제가 게임을 오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게임 기획에 있어 제가 영향을 받은 경험들은 게임을 즐겼던 당시보다 좀 나중 이야기인 것 같아요. 나중 돼서 자유로운 창작물이 올라오는 공간에 오래 있기도 했고 보드게임을 접한 것도 되게 큰 영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제가 만드는 게임 스타일이 그래픽이나 물리 엔진 이런 것들이 들어가서 시너지를 내고 이런 거보다는 규칙이나 이야기 위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다양한 테마나 규칙이 있는 게 대부분 보드게임 쪽에서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편집장: 그러면 게임을 만드실 때 현실에서도 어떤 현상이 어떤 규칙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시나요? 이유원 대표: 그렇죠. 저희 기획자들이 그런 점에서는 코드가 비슷한데 일상생활을 하다가 “이거 게임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게임처럼 보이는 규칙을 찾으려 하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출발하게 된 것들이 몇 개 있었죠. 〈중고로운 평화나라〉도 그렇고 〈허언증 소개팅!〉도 그렇고. 게임이 될만한 규칙을 현실에서 많이 찾는 것 같아요. 편집장: 게임에 있어서 규칙은 굉장히 중요하죠. 그런데 어떤 게임이 나오면 사람들의 평가에서는 제일 먼저 그래픽 이야기가 나오고, 사운드가 나오고 그러잖아요. 만약에 기회가 되고 자본이 된다면은 어떤 쪽에 좀 힘을 줄 의향이 있으세요? 이유원 대표: 그냥 스타일의 문제인데요. 제가 지금 만든 게임들이 막 자본에 쪼들려서 이런 거밖에 못 만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만약에 100억을 갖고 만든다 해도 화려한 그래픽보다는 ‘이게 어떤 게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규칙을 갖고서 기획을 시작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MMORPG를 만든다고 하면 그 안에 핵심 규칙이 뭐냐, 이걸로 차별성을 두지는 않잖아요. 〈리니지M〉이나 〈트릭스터M〉이 어떤 규칙이 다른가보다는 메타피쳐나 콘텐츠 정도에서 테마의 차이가 있는 건데, 만약 제가 만든다면 좀 핵심적인 걸 넣고 싶어할 것 같아요. 이게 왜 게임이 되는지를 모두에게 딱 일견에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것. 다만 이건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가 아니고 요즘 게임이 워낙 다양하고 산업도 크니까 그냥 스타일이 여러 개인 것 같아요. 저는 좀 더 규칙이 강조된 거를 재미있어 하고 그걸 만드는 걸 좋아해요. 실제로 유저들도 규칙이나 아이디어가 재미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특히 인디 쪽에는 더 계시고요. 편집장: 그런데 사실 규칙에다가 어떤 이야기를 입힌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게임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규칙과 스토리가 상충할 때, 뭐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유원 대표: 저는 규칙이 항상 앞선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 모순을 해결하는 건 결국 경험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좋아했는데, 〈와우〉를 하면서 재미있던 경험을 문장으로 치환하면 구체적인 수치나 공격력 같은 것들과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복잡한 수치나 그래픽이나 충돌 감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재미있던 경험을 텍스트로 치환하는 것. 그러면 내가 재미있던 스토리를 규칙으로 만들 수 있는거죠. 편집장: 그런데 규칙을 만든다고 해도 게이머나 수용자가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나요? 가령, ‘내가 이렇게 규칙을 만들면 재미있어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게임 기획자로서 독자나 수용자에게 닿기 어려운 부분들은 있으신가요? 이유원 대표: 그건 분명히 어려운 지점이죠. 그런데 그 지점에 있어서는 제가 밑바닥에서 게임을 만들었던 경험이 좋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커뮤니티에서 공유되고 그런 상호작용이 있으니까 수용자 입장에서 창작자를 경험할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만약에 말씀하신 것처럼 의도했던 인터렉션이 아닌 게 나오면은 오히려 저는 되게 기쁠 것 같아요. 버그나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니라면요. 왜냐하면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가 완전히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유저랑 인터렉션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보니, 그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어쩌면 게임 외적으로 에피소드를 만들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요. 편집장: 인터렉션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반지하게임즈’는 유튜브도 하고 DC 갤러리로도 활발하게 소통을 하고 계시잖아요? 유저와의 소통 같은 것들이 회사 주요 정책 결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편인가요? 이유원 대표: 사실 절대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동기부여의 측면이 있죠. 유저들의 피드백을 통해 기획 방향을 잡는 것도 큰 부분이고요. 유저분들과의 상호작용을 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인디 게임 개발사로서 유저랑 친화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고요. 두 번째는 제 스스로도 좋은 피드백을 받고 좋은 말 듣는 것에서 오는 에너지가 되게 커요. 그래서 인터렉션을 계속 신경 쓰는 것 같아요. 편집장: 그동안 나온 게임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반지하게임즈’는 다들 인디 게임으로 분류를 하고 있죠. 대표님도 스스로 인디 게임으로 정체화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인디 게임이란 건 뭘까요? 이유원 대표: 만들고 싶은 거를 만드는 게 인디 아닐까 싶긴 해요. 〈프로젝트 좀보이드〉 나 〈림월드〉를 보면 느낌이 오잖아요? ‘아! 이거 창작자가 진짜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내가 돈 벌려고 만든 거야’ 혹은 ‘내가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도 물론 인디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이 인디게임이지 않을까 싶어요. 편집장: 요즘 대형 게임사가 산하 스튜디오를 만들기도 하고 투자도 많이 하잖아요. 이제는 그런 곳에 있는 인디 게임 스튜디오도 많이 있지요. 그래서 인디게임의 기준이라는 답이 없는 질문에 또 하나의 갈등이 생긴 것 같아요. 어려운 질문이지만, ‘큰 펀딩을 받아서 나오는 게임이 인디게임이냐?’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유원 대표: 저는 규모나 상업성이랑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저도 당연히 돈이 좋고 돈이 많으면 지금 제가 〈서울 2033〉에서 하고 싶은 것을 10배 속도로 더 빨리 할 수 있겠죠. 그치만 그게 다예요. 돈이 많이 생겨도 이런 느낌으로 생각을 할 것 같지, 돈이 있으니까 이걸로 돈을 더 크게 불릴 수 있으면 좋겠다거나 게임을 머신처럼 생각하거나 그렇게 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디의 기준에서 상업성이나 규모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편집장: 다른 인디 게임 스튜디오들은 보통 대형 게임 개발사에서 몇 년 일을 하다가 나오거나 혹은 게임 아카데미 같은 데서 제작법을 먼저 배워서 나온 사람들이 만드는데 ‘반지하게임즈’를 보면 그렇지 않잖아요? 그것은 어떤 차이를 만드나요? 이유원 대표: 네 그렇죠. 저희가 개발 스택이 충분하지 않을 때부터 게임 출시를 하고 그랬으니까 차이가 많아요. 예를 들어 저는 플래시를 만드는데 언어를 다 이해하는 게 아니고 그냥 만드는 방법을 부딪치며 배우다 보니 어떤 식으로 버릇이 들었냐면. 제가 어떤 코드를 인터넷에서 찾거나 발견을 했어요. 그럼 ‘내가 이걸로 무슨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약간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순서가 바뀐 거죠. 만약 개발 역량이 충분했으면은 오히려 너무 방대한 세상에서 뭐를 만들지 고민했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저희는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하다 보니 게임을 제안하기도 쉽고 시작부터 재미있었죠. 편집장: 그런 특수성에서 오는 어드벤티지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유원 대표: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일단 만드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동기부여가 잘 되고, 자기가 원하는 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그리고 유저 만족도도 웬만하면 더 높겠죠.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 중에 재미있는 거니까 유저들에게도 권할 수 있는 것이구요. 물론 이것은 확률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디 게임을 보호해 주고 그런 분위기도 역할을 하겠지만요. 그래도 ‘10개 출시해서 9개는 플러스고 한 개 마이너스니까 얘네는 쳐내고’하는 식의 운영이 아니다 보니 재미있게 만들 수 있고 재미있는 것을 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편집장: 이런 ‘반지하게임즈’의 정체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혹은 회사가 커지면서 희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 지점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유원 대표: 네. 일단 조직이랑 매출 규모라는 두 가지 측면 중에서 일단 매출 규모는 사실 항상 걱정을 하긴 해요. ‘우리가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서 사람들도 좋아하고 팬층이 있는 것도 좋은데, 여기서 어떻게 매출을 발생시키지? 그렇다고 NC가 될 수 있을까? (웃음)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실 우리의 아이덴티티나 브랜드 가치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다 알고 있어서 크게 걱정은 안 돼요. 우리가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다 공감하고 있어서요. 그리고 조직의 측면에서는 저희가 지금 팀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규모가 커져도 한 프로젝트에 100명 200명 되는 기성 게임사처럼 되는 건 아닐 거고요. 많아도 5명 이렇게 해서 팀을 여러 개 늘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저희가 지금까지는 팀에 여러 명이 중복으로 들어가 있으니까 되게 버겁긴 했는데 이제 좀 개발자들 채용을 하면서 팀 두 개가 그나마 안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됐어요. 여기에서 원래는 bm이나 기획을 다 제가 했었는데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라 생각이 들어서, 오너십이나 자기 창작물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 기획자 역할을 각 팀에서 하게끔 바꿨어요. 그래서 요즘 고민인 것은 자기 창작물에 애정이 있는 기획자를 뽑는 거예요. 편집장: 그러면 그런 가정을 한번 해보죠. 정말 대박이 나서 회사가 커졌어요. 외부 펀딩이 시작되면서 경영진의 철학이 변할 수 있는데, 이런 걱정은 안 되세요? 이유원 대표: 걱정이 되긴 하는데요.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 회사는 철학을 바꿔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웃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이 “야! 너 마음 독하게 먹으면 돈 벌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아요. 독하게 먹는다고 어떻게 벌어요? 우리 능력에? bm에 대한 노하우가 특화된 것도 아니고 광고를 때려 박는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보니까 하던 대로 그냥 재미있는 거 만들어서 적당히 돈 버는 것 말고는 돈 벌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걱정이 안 되는 그런 게 있고요. 그리고 그것도 있긴 해요. 펀딩은 되게 큰 일이고 당연히 이해관계가 늘어나는 거니까 신중해야겠죠. 투자나 펀딩 같은 것은 결혼하는 것과 같아서 모든 면을 그냥 다 이야기 하고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자.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고 있어서 지금까지도 펀딩이 잘 안 되고 있죠. (웃음) 그런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투자 받아가지고 갑자기 우리가 엄청 커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사람 만나서 파트너십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 게임에 몰입하다보면 광고영상이 기다려진다. 특히 후원자 버전을 구매하고 개발자에게 총을 쏘다보면(?) 개발자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사꾼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진다. 편집장: 과금 이야기를 해보면 ‘반지하게임즈’의 피드백에서 과금에 대한 칭찬이 많아요. 그걸 느끼세요? 이유원 대표: 네. 힘들긴 한데 사실 가이드라인이기도 해요. 우리 유저가 팬층이고 이걸 진짜 브랜드 이미지로 확보 하려면 우리 어떤 스텝으로 과금을 바꿔야 될까 약간 이런 게 항상 과제로 있는 거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죠. 그런데 인디게임 기획자면 bm 만드는 걸 좀 싫어하지 않나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제가 아직 몰라서 그런 건지 재미있는 영역이라고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게임을 보면서 되게 현실 같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사실 bm은 이미 가장 현실에 맞닿아 있는 게임 속 피처잖아요? 그래서 이거를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게임 속에서 돈 쓰는 게 재미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상점에서 이것도 골라보고 장바구니에 담고 이런 것처럼. 그래서 이것도 되게 잘하면 잘할 수 있는 영역이겠다 싶더라고요. 편집장: 지금 한국 게임들이 욕을 제일 많이 먹는 게 결제 구조잖아요. 그거랑은 다른 bm을 계속 만들어 가시는 입장에서 한국 bm의 미래는 어떨 것 같습니까? 이유원 대표: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은 지금 ‘가챠’ 같은 게 가장 핫하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그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원초적인 도박 심리 같은 게 있을 수 있고요. ‘가챠’에 대항마로 ‘배틀패스’ 같은 게 언급되지만 사실 그것도 원초적인 거잖아요. 동기 부여 성취 역학 같은 거죠. 그것도 원초적인 본능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bm은 완성형을 향해 점점 성장하고 변화하는 개념이 아닌 것 같아요. 게임을 만들 때 기획하는 것처럼 원초적인 지점들을 잘 결합해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저희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거는 ‘가챠’나 ‘배틀패스’처럼 게임에서 느끼는 성취나 도박 등의 역학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 같아요. 다만 어떤 방향으로 고민하냐가 다른 것이겠죠. 다른 데에서 bm을 만든다고 하면 ‘가격을 어떻게 할지’ 등의 고민을 하겠지만 저희 게임에서는 ‘이거 사는 경험이 재미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런 거니까요. 게임 기획이랑 저는 연장선이라고 봐요. 편집장: 본인이 만든 작품에 대해서 문화 콘텐츠라고 스스로 평가한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서울 2033〉은 어떤 의미였을 것 같아요? 이유원 대표: 기말고사보다 어려운데요? (웃음) 우리 사회에서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게임을 만들 때, 먼저 스크립트를 짜죠. 보통 메시지도 없고. 쓰고 싶은 대로 피상적으로 쓰는데요. 나중에 같이 일하는 작가분들이나 아니면 유저분들이 다른 작가분들의 글들 사이에서 제 글을 가리키며 ‘이거 이유원이 쓴 거죠?’라고 물어봐요. 그러면 너무 신기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아는지 물어보니까 이유원식 글의 특징이 있대요. 블랙 코미디랑 풍자 좋아하고, 엄청 날 선 것처럼 파격적이고 가차 없이 죽이고 그러지만 그 안에 휴머니즘이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 감성이 오롯이 창작물에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인터렉션을 하면서 공감을 받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의미이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편집장: 인터뷰를 통해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재미라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게임의 재미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유원 대표: 재미가 왜 재미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저는 그 결과를 많이 볼 수 있었던 포지션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만든 게임이지만 난 잘 모르겠는데 애들은 재미있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거 되게 신기한 이상한 경우잖아요. 그럼 왜 재밌지? 그런 결과들을 모아서 보면은 재미의 원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걸 제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원리는 너무나도 쉽고 단순한 것들, 가령 도박일 수도 있고 성취감일 수도 있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죠. 기획자가 할 일은 이 부품을 어떻게 조합해서 내 테마와 어울리게 하느냐를 고민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물론 부품을 더 찾아나갈 수도 있겠죠. ‘게임들을 만들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런 거에서는 재미를 느끼네’ 이렇게 알 수도 있고요. 다만 결국 게임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이런 재미의 요소들이 더 잘 버무려진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드는 것이 기획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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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s View] 트리플 A, 거대한 만큼 희미한 개념을 헤치며

    < Back [Editor's View] 트리플 A, 거대한 만큼 희미한 개념을 헤치며 10 GG Vol. 23. 2. 10. 안녕하세요,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입니다. GG의 호수가 오늘로 두자릿수에 진입했습니다. 격월로 나가는 호로 10회니 벌써 20개월을 지나왔다는 이야기겠지요. 매 호마다 GG는 오늘날 게임문화담론의 주요한 테마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그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기획을 실어왔습니다. 때로는 기술에, 때로는 문화에 초점을 맞추며 지난 10호는 한국 게임문화담론을 이루는 여러 기초적인 요소들을 탐색해온 바 있습니다. 이번 10호의 메인 테마는 트리플A 입니다. 사실상 게임문화담론을 이야기할 때 늘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마도 트리플A일 것입니다. 대규모 개발사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른바 대작게임이라는 점에서 트리플A는 한편으로 영화의 블록버스터와도 닮은 꼴이고, 같은 대규모 개발을 거친 게임이라 할지라도 또 한편으로는 대형 온라인 기반 게임들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무엇입니다. 그러나 이런 트리플 A는 사실 아주 명백한 규정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산업에서 바라보는 트리플A와 게이머들이 이야기하는 트리플A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화나 다른 산업에서 이야기하는 블록버스터나 플래그십과도 같으면서 또 다릅니다. 이 오묘한 개념을 우리는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기보다는 그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북미와 중국을 위시한 해외의 필자들이 전하는 현지의 트리플 A 이야기, 국내 연구자들이 살펴본 트리플A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 게임문화담론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트리플A라는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GG의 고민이 기사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이야기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10호를 준비했습니다. 10호에는 새로운 연재도 선보입니다. ‘논문세미나’라는 이름의 새 연재는 게임연구 분야에서 새롭게 등장한 여러 연구논문들을 보다 알기 쉽게 조망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게임연구자들이 새로운 논문을 보다 읽기 쉬운 형태로 가공하여 소개하는 코너로, 게임연구에 관심있으신 많은 분들의 관심을 기다립니다. 이번 10호에도 GG는 게임과 게임문화에 관한 많은 고민들을 담았습니다. 팬데믹이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격리의 대안으로만 여겨졌던 디지털게임은 다시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문화콘텐츠로서의 의미로 주목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고민의 앞줄에서 GG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드림.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엘든 링: 황금 나무가 솟은 정원

    < Back 엘든 링: 황금 나무가 솟은 정원 10 GG Vol. 23. 2. 10. 조지 R. 마틴을 협업자로 병기한 첫 트레일러가 공개되며 기대를 모았던 〈엘든 링〉은 메타크리틱 97점을 기록하며 출발했다. 2022년 11월 15일을 기준으로 1,700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화제 되었고, 2022년의 최다 GOTY수상작으로 꼽혔다. 1) 〈엘든 링〉이 매끄럽게 GOTY의 궤도에 안착했는지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GOTY로 꼽은 언론들은 그에 호의적으로 일단락하는 듯하다. 디지털트렌드는 “프롬 소프트웨어의 어려운 게임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며 탐험할 수 있다”며 2) , 폴리곤은 “섬세한 게임 디자인이 별도의 첨언 없이도 즐거운 탐험을 경험하게 해준다”고 3) 서술한다. 한편 이러한 코멘트는 〈엘든 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토론을 환기한다. 이전 작과 매우 흡사한 스타일로 출시된 〈엘든 링〉에게 과연 신작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대표적일 것이다. 조지 R. 마틴이 골격을 짰다는 〈엘든 링〉의 설정은 〈다크 소울〉 시리즈나 〈블러드본〉과 확연히 다르지만, 그러한 작품들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태껏 스튜디오가 쌓아 올린 역량을 총합하여 게임을 제작했다는 디렉터 인터뷰는 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4) 조언이나 혈흔과 같은 온라인 플레이 요소부터 시작해, 게임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메커닉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도처에 치명적인 함정을 배치하고 죽으면 여태껏 모은 자원을 잃는다는 페널티를 부과하며, 맵 탐색의 종착지에 보스전을 지정”하는 기획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원리의 타락, 등장인물의 유산과 역사” 등의 요소와 맞물리며 특유의 효과를 자아낸다. 〈데몬즈 소울〉에서 유래한 스타일은 ‘소울본’ 게임의 문법을 확정한 것처럼 보인다. 5) 기존 다크 소울 시리즈는 엄격한 구성을 취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정된 공간 내에 밀집한 함정을 파훼하며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플레이어에게 주어진다. 무사히 다음 세이브 지점으로 도달하는 과정에서 숱한 죽음을 겪으며 일종의 모범 답안을 찾아 나가야 하는 셈이다. 맵의 특정한 요소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조율하며 일정한 질서를 형성한다. 잠긴 문과 같은 장치는 별도의 동선을 요구하며, 위험한 구간을 생략할 수 있게 해주는 숏컷은 맵의 구조를 상기시킨다. 반면에 〈엘든 링〉은 단선적인 길을 우회할 수 있는 선택지를 여러 갈래로 제공한다. 그러나 〈엘든 링〉이 오픈 월드라는 사실은 이전 작과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부각한다. 오픈 월드는 열려 있다는 의미의 ‘오픈(open)’과 게임 공간을 의미하는 ‘월드(world)’의 합성어로, 플레이 과정에 있어 고정된 순서가 존재하지 않아 공간 이동에 대한 제한이 없는 게임의 형식을 일컫는 용어다. 6) 초반에 배치된 보스인 트리 가드는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에서 보스전을 치르는 때는 맵 탐색을 완수했을 때이다. 보스전을 무사히 클리어하면 세이브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으며, 다음 맵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림그레이브 초입에 튀어나온 트리 가드의 존재는 난데없다는 인상을 안긴다. 더불어 트리 가드를 처치하면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인 황금 할버드는 까다로울 만큼 높은 근력 수치를 요구한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가 실제로 활용하기까지 시차가 발생한다. 따라서 트리 가드 보스전에서 승리의 보상은 서버에 저장되지 않는 플레이어 고유의 경험을 강조하며, 정서 패턴을 구축한다. 설령 보스를 쓰러뜨리지 않더라도 엘레의 교회에서 세이브 포인트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전 작에서 학습한 메커닉과 배치되기도 한다. 물론 〈엘든 링〉에서 등장하는 모든 보스가 트리 가드처럼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프롬 소프트웨어는 기존의 문법을 연장하여 보스를 활용한다. 림그레이브에서 호수의 리에니에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접목의 고드릭이 놓여 있고, 도읍 로데일에 들어서려면 최소한 두 명의 데미갓을 제패해야 한다. 동선을 제한하는 조건을 둠으로써 플레이어의 행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시기에 따라 제한된 정보를 제공하여 광범위한 정보나 상황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유도하는 활성 제약이기도 하다. 7) 그러나 다양한 우회로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조건은 이전만큼의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 플레이어는 반드시 고드릭 보스전을 거치지 않더라도 스톰 빌 성벽의 외곽을 통해 호수의 리에니에로 진출할 수 있으며, 아예 림그레이브 남부에서 함정 포탈을 타고서 도읍 로데일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NPC들은 우회로의 존재를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이는 단선의 우회라는 방식을 학습하게 하며, 우회로의 존재는 필드가 품은 넓은 역량을 상상하게끔 유도한다. 그 외에도 간편해진 시스템은 그 자체로 풍부한 선택지를 확보한다. 〈엘든 링〉에서는 지도를 통해 축복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기동성이 뛰어난 영마를 쉽게 소환하고 해제하여 공간을 용이하게 정복한다. 위의 언론들에서 일컫던 ‘다양한 전술’에 기여하는 셈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도’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게이머들이 오픈 월드라는 수사에 기대하는 가치를 고려해보았을 때 〈엘든 링〉이 이를 충족하는지 확언하기는 조금 어렵다. (비록 자유도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된 바 없이 맥락마다 다른 의미를 갖지만) 놀이는 본질적으로 교란이며, 무언가의 정상적 상태를 교란하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기대는 근본적이다. 마인 크래프트와 같은 샌드박스 형 게임이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는 그가 선택한 행위에 관해서 게임이 유의미한 피드백을 되돌려 주기를 원한다. 유원지로서 기대되는 오픈 월드는 다양한 행위를 수행하는 포괄적인 장이다. 그렇게 플레이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충하게끔 해준다. 그러나 〈엘든 링〉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다지 넓지 않다. 플레이어가 게임에 개입하는 방식이 비/적대로 간소화되기 때문이다. 대면하는 거의 모든 것은 전투 가능한 상태이다. 언제든 죽음으로 정복될 여지를 가진다. 접촉 메커니즘은 적대와 평화를 가르는 한 번의 칼질로 규명된다. 그런 점에서 〈엘든 링〉에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포함해 게임 세계에 놓인 구조물이 단순하다는 지적 역시 유효하다. NPC들은 원자화된 개인의 이합집산에 불과하며, 대사의 자막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이는 “실존적 복잡성에서 잠시 피난하여 적절한 행위를 산출하는 행위적 유형을 체득하게 한다”는 티 응우옌의 게임에 관한 정의를 떠올리게 한다. 8) 최종 보스전은 〈엘든 링〉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구현한다. 라다곤의 육체는 녹아내려 한 자루의 칼로 빚어진다. 뒤이어 등장한 엘데의 짐승은 생명체라기보다 관념에 가까워 보이며, 이를 무엇인가로 확정해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스전이라는 형태를 통해 플레이어의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때리고 구르고 피하는 일련의 행위로 그를 해석한다. 세계성을 구축하려는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그 스스로 인식하는 범위 이상으로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길 바란다, 〈엘든 링〉의 메커니즘은 그러한 역량을 소거할 위험을 안긴다. 다크 소울 1에서는 게임 플레이의 장과 주변의 플레이 불가능한 공간을 흩뜨리는 방식으로 공간감을 높였다. 9) 플레이어는 숏컷을 뚫고, 현재 상호작용 불가능한 문 너머에서 반짝이는 아이템을 보며 공간에 관한 상상을 확장할 수 있다. 그 배후로 늘어진 배경 이미지는 비록 탐험 불가능한 영역일지라도 공간에 대한 경험을 통합해준다. 대신에 〈엘든 링〉은 풍경을 활용함으로써 플레이어가 탐구할 여백을 확보한다. NME는 〈엘든 링〉을 GOTY로 선정하며 풍경의 매력을 언급한다. 10) 확실히 풍경은 섬세한 오브젝트나 아름다운 색채 등을 통해 심미적 경험을 안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NME는 스톰 빌 성, 레아 루카리아와 같은 레거시 던전의 전체 윤곽이 포괄되는 시야로 이를 언급하고 있다. 공기원근법은 이전 작에 비해 약화하여 멀리 떨어진 대상을 눈앞으로 가져온다. 그렇게 풍경은 단순히 보고 읽는 배경이 아니라 실제로 플레이어가 횡단하며 상호작용하는 주된 장이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다가오며, 경험을 정교하게 부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11) 〈엘든 링〉에서 튜토리얼을 마치면 어두운 지하에서 승강기를 타고 올라와 림그레이브에 들어서게 된다. 위로 상승하는 동선은 널찍이 펼쳐진 바깥의 필드 중앙에 우뚝 선 황금 나무와 일치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나무는 틈새의 땅에서 살아가는 한갓 미물과 대비를 이룬다. 나무 아래 나열된 신수탑은 한눈에 포착된다. 주요 보스를 격파하고 방문하는 장소인 신수탑은 앞으로 진행할 여정을 집약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게 풍경은 플레이어가 사건을 겪고 맥락을 형성하게 될,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 한편 필드에 늘어선 폐허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며 플레이어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부연한다. H. 루에젠과 푹스는 폐허의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언리얼 엔진 5 공개 영상을 독해한다. 그에 따르면 포토리얼리즘의 사실적 구현이 몰두하는 주요한 부분은 어떻게 더 사실적으로 몰락과 폐허를 그려낼 것인가의 문제다. 12) 폐허는 과거에 존재했던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면서 동시에 그 단절을 드러낸다. 유적석이나 신전석과 같은 재료는 한때 거기에 파편이 아닌 총체가 남아 있음을 주지시킨다. 설령 소멸이나 죽음이라 할지라도. 13) 이 때 게임이 플레이어의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감상은 경외심과 공포를 함께 아우르는 낭만주의적 정서인 숭고와 닮았다. 지각과 감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표상하면서 숭고는 생겨난다. 벨라는 게임에서 “닫힌 가능성의 광대한 공간을 드러냄으로써” 유희적 숭고가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14) 이는 로어에서도 유사하게 발견 가능하다. 아이템 로어는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황금시대를 부분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엘든 링〉에서는 몹이나 지역에 관한 이해를 도와줄 별도의 코덱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도감이나 백과사전 따위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상과 관련한 이야깃거리는 장비 아이템의 설명란에 짤막하게 붙어 있을 따름이다. 수많은 아이템에 산개된 정보를 일일이 재조합해야 한다. NPC의 대사나 비석과 같이 특정한 국면에서 상호작용 가능한 정보는 플레이어가 별도로 스크린샷을 찍어두어야만 저장할 수 있다. 불친절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사실상 정보의 폐허이기도 하다.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 특유의 불분명한 스토리텔링은 그러한 로어를 짜 맞춰 ‘프롬뇌’를 굴리며 이야기를 추론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활성화했다. 부재하려는 것을 되살리려는 고고학적 시도인 셈이다. 고고학자 빌 팔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Archaeology Tube가 Video Game Archaeology 카테고리를 통해 프롬 소프트웨어 게임을 그러한 시선으로 다루는 게 대표적이다. 15) 수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는 〈엘든 링〉은 미스터리의 탐구를 종용하는 듯하다. 게임에서는 지도 후면을 통해 지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지상의 이미지가 겹치며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저는 그 자체로 비밀을 품은 땅이다. 추레한 몰골의 고드윈이나 드넓게 펼쳐진 붉은 부패의 늪은 미스터리의 탐구를 흥미롭게 만든다. 이처럼 〈엘든 링〉은 가지 않은 장소에 대한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유지되는 플레이 동기를 지속한다. 그 세계는 적대의 원리에 의해 고독하고 적의에 차 있으나 동시에 그 특유의 부동성으로 기억과 경험을 수용해준다.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도달한다. 완성한 지도에서 더 이상 가지 않은 장소는 없으며, 무한한 탐험을 약속하던 세계는 더 이상 광야가 아니다. 그때 〈엘든 링〉은 그림 같은 정원에 가까워진다. 자연물과 폐허를 포함한 정원은 “열정적인 기억, 회한, 달콤한 멜랑콜리를 더 잘 자극할 목적으로 새로이 부재를 만들어낸다.” 16) 설령 엔딩이 일종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에도, 플레이어들은 불완전한 총체성을 해소할 길 없이 꿈꾸며 정원을 헤맨다. 1) Statistia, “Lifetime unit sales generated by Elden Ring worldwide as of November 2022”,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1300663/elden-ring-sales-worldwide/ 2) Mike Mahardy and Polygon Staff, “The 50 best video games of 2022”, 2022.12.06., https://www.polygon.com/what-to-play/22956981/best-games-2022-list 3) Giovanni Colantonio and Tomas Franzese, “The 10 best video games of 2022”, 2022.12.05., https://www.digitaltrends.com/gaming/best-video-games-2022-top-10/ 4) “Elden Ring is based on a culmination of everything we've done with the Dark Souls series and with our games thus far.” Will Nelson, “‘Elden Ring’ is the “culmination” of FromSoftware’s games says Miyazaki“, 2021.12.30., https://www.gamesradar.com/elden-ring-fromsoftware-hidetaka-miyazaki-interview/ 참고. 5) Florence Smith Nicholas and Michael Cook, The Dark Souls of Archaeology: Recording Elden Ring. 2022. In Proceedings of the 17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Foundations of Digital Games.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1p. 6) 김정선, 오픈월드 게임의 레벨디자인 및 시스템 요소 연구 :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을 중심으로, 2019 한국게임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2019, vol.20(3), 300쪽. 7) 윗글, 301쪽. 8)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22), 86쪽. 9) Daniel Vella, No mastery without mystery: Dark Souls and the ludic sublime, Game Studies, 2015. vol.15(1). 10) “Best Bit: The way Elden Ring uses stunning vistas to show your objectives: Stormveil looming over Limgrave, the reveal of Liurnia and Raya Lucaria afterwards, the descent to Siofra River, the dragon in Leyndell…”, NME, “The 20 best games of 2022”, 2022.12.06., https://www.nme.com/features/gaming-features/the-20-best-games-of-2022-3360445 11) Paul Martin, The pastoral and the sublime in Elder Scrolls IV: Oblivion, Game Studies, 2011, vol.11(3). 12) Eduardo H Luersen, Mathias Fuchs, Ruins of Excess: Computer Games Images and the Rendering of Technological Obsolescence, Games and Culture, 2021. vol. 16(8), 1091p. 13) 장 스타로뱅스키, 자유의 발명/이성의 상징, 이충훈 역, 파주: 문학동네, (2018) 202쪽. 14) Daniel Vella, No mastery without mystery: Dark Souls and the ludic sublime, Game Studies, 2015. vol.15(1) 15) Archaeology Tube, An Archaeologist Plays Elden Ring (FIRST IMPRESSIONS), 2022.02.27., https://www.youtube.com/watch?v=Imtkh8B3U2Q 16) . 장 스타로뱅스키, 224쪽.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연구자) 김규리 자기 소개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데스티니2를 오래 즐겨왔고, 다음 작인 마라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게임이 주는 재미와 낯선 경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보려 고민하고 있습니다. ​ ​

  •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 Back [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06 GG Vol. 22. 6. 10. ! Widget Didn’t Load Check your internet and refresh this page. If that doesn’t work, contact us. Tags: ​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Facebook X (Twitter) Copy link Previous Next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이경혁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 ​

  •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 Back 게임이 대체 왜 예술이 되어야 할까?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들 12 GG Vol. 23. 6. 10. *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2. 괄호에 숫자로 페이지만 표시한 것은 모두 상기 책의 인용이다.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에 대한 미학이자 윤리학이다. 그는 우리가 게임을 단지 이기기 위해서만 플레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한된 행위성(agency)의 조건을 게임 플레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는 분투형 플레이(striving play)가 가능하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에 있다. 우리는 게임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규칙과 환경, 그리고 행위성이라는 형식 안에서 머리 싸매는 고투(struggle)를 즐기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기도 한다. 응우옌은 이 책에서 이렇게 분투하는 플레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해 나간다. 사람들은 결국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회의론자들의 반박들을 논파하면서 어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방법론으로 게임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이다. * 『게임: 행위성의 예술』 표지 이미지 응우옌의 논의는 게임 담론 내부의 논쟁뿐만 아니라 철학과 미학, 예술학 등 게임과 연결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장까지 면밀히 검토하면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것을 통해 게임을 행위성의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예술로서 게임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책 전반에 깔려있는 철학자 특유의 논법은 (그가 베트남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철학/미학 담론 안에서만 대부분 작동하는데, 이는 내재적인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의문을 가지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 논하겠지만 이토록 정교한 논의를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이 책은 차라리 게임의 존재론이거나 게임을 통해서 삶을 대하는 방법을 돌아보는 윤리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게임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까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또한 응우옌이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인터페이스 장치 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고 즐기는 디지털 비디오 게임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 등산, 술자리 게임, 나아가 사랑까지 포괄하면서 삶 그 자체까지 나아간다. 앞서 말을 꺼냈듯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핵심이다. (분투형 플레이는 응우옌이 고안한 개념이 아니라, 버나드 슈츠의 개념을 가져와 확장하는 것에 가깝다. 책의 초반부의 대부분은 슈츠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분투형 플레이의 회의론자들, 특히 성취형 플레이를 옹호하는 입장을 논파해 나가는 내용이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무조건 이기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때로는 심지어 이겨버리는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76) 게임이 쉬워져서 난이도를 보다 어렵게 조정하는 상황이나 애인과 보드게임을 하는 상황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헨리 시지웍의 ‘쾌락주의의 역설’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설명한다. 쾌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면 오히려 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를 비우려고 하면 절대로 머리를 비울 수 없다. 오직 다른 목표에 헌신해야만 그러한 쾌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요가는 특정한 자세를 취하는 육체적인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통해서 손을 뻗어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영적 효과에 가닿으려는 행위성의 형식이다. 학부 시절 즐기던 술자리 게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술자리 게임에서 기를 쓰고 이기려고만 한다면 그 게임은 아무런 재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술자리 게임을 통해 술을 마시고 얼큰하게 취해 바보 같은 행동을 하면서 서로 웃고 친해지는 것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진짜 목적이다. 〈트위스터〉 같은 게임을 통해서도 분투형 플레이의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제한된 행위성을 통해서 결국 넘어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일부러 넘어지면 재미가 없어진다. 진짜로 실패하여 넘어졌을 경우에만 재미가 생긴다. 진심으로 게임이 제안하는 어떤 동작을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경우에만 진짜 실패가 되어 모두가 크게 웃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성공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성공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이렇게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goal)와 목적(purpose)이 어긋나 있다. 일상 생활에서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을 취한다면,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수단을 취하기 위해서 결과를 추구한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러면서도 일시적인 목표에 제대로 몰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게임 속 목적에 완전히 몰입해야만, 목표는 추구될 수 있다. 게임의 과정을 즐기려면 일시적으로 승리에 대한 관심을 철저하게 장착해야한다. 누군가 게임에 진지하게 몰입하지 못한다면 그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금방 재미를 잃고 만다. 이것이 분투형 플레이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응우옌은 게임과 사랑을 비교하기도 한다. 사랑의 경우 목표에 대한 진심 어린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도구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그릇된 나르시시즘이다. 심할 경우 스토커가 되어버린다. 게임에서 분투형 플레이는 게임 속 목표에 그토록 진정성 있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가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형식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부루마블〉을 할 때, 게임 속 씨앗은행 화폐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던 게임이 끝나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종이가 되어버린다. 누군가 부루마블 속 화폐를 계속 소중하게 여겨서 게임이 끝난 뒤에도 마차 상자 안에 넣지 못하고 지니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만해도 살짝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논할 때, 오늘날 온라인 게임들의 화폐가 실제 세계의 화폐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빼놓으면 안 될 것이다. (응우옌의 책에서 이러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간과되어 있다.) 한국 맥락에서 〈리니지〉 작업장 같은 사례를 떠올린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게임과 노동의 구분이 사라지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분투형 플레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게임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게임은 특정한 방식으로 형식화된 환경과 행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임 속 목표들은 현실과 달리 굉장히 명료하다. 현실에서는 그토록 뚜렷할 수 없는 것들이 게임에서는 목적론적으로 명백한 것으로 재구성된다. 수치화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기도 한다. 삶을 그 자체로 게임처럼 생각하는 것은 삶의 목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제를 낳는다.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다시 돌아와, 분투형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목표들에 일시적으로 헌신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 분투형 플레이에서는 목표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변덕스러움이 요구된다. 기존의 행위성 관련 논의들은 행위자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분투형 플레이는 행위성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불일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100) 행위성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긴 시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을 장착할 수 있는 인간 행위성의 유동적인 역량과 자율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분투이다.(98) 그렇기에 게임 속 목표가 일회용이라는 점은 게임이 허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라는 매체가 행위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형식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측면이 된다.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는 게임의 목표와 규칙, 그리고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제약 체계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환경 등을 고안한다. 게임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실천적 행위성, 그리고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을 통해 특정한 실천적 경험을 조형해 내는 것이다. 이런 형식화의 차원에서 게임을 예술적 매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게임 디자이너의 매체는 행위성이다. 하나의 표어로 만들어 보자면, 게임은 행위성의 예술이다.”(35) 예술은 특정한 형식을 가지고 미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응우옌은 마크 로스코의 회화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그것이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 미적 경험을 증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은 플레이어가 맞설 실천적 환경과 플레이어가 취할 일시적 행위성을 형식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특정한 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의 아름다움은 행위가 형식화된 제약 속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게 제한되는 조건이 여기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게임 디자이너의 형식이기도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경기에서 페이커의 플레이가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움직임의 절대적인 형태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엄밀한 규칙의 체계 안에서 게임의 목표와 관련된 엄청난 행위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문제는 제한된 행위성의 형식 안에서 성공만이 예술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행위성을 제한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나 부조화에서도 예술성을 드러난다. 키보드의 QWOP 버튼만을 이용해 다리의 관절을 제각각 조정하여 달리기를 해야하는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일부러 조작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형식 안에서 제대로 한번 달려보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그 게임의 중요한 형식이 되는 것이다. * 베네트 포디(Bennett Foddy)가 2008년에 만든 게임 〈QWOP〉. 출처: https://www.foddy.net/2010/10/qwop/ 게임은 이렇게 특정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위의 형식으로서 예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타당하고, 오늘날 게임과 예술을 둘러싼 논쟁적인 담론에서도 중요한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응우옌의 논의를 딛고서 다시, 게임이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예술이라는 범주와 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필요하다.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면서 음악이나 회화 같은 예술의 매체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모더니즘적 장르 구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게임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영역을, 예술을 통해서 게임이라는 영역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이나 영화 같은 매체가 예술에 편입되면서 발생했던 과거의 논쟁들을 변증법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한편으로 이 책에는 니콜라 부리요나 권미원 같이 미술계에서는 낯익은 필자들도 등장한다. 응우옌은 사회적 관계나 공동체에 관련된 예술 형식을 논하는 관점을 게임에 적용하며 니콜라 부리요의 논의를 빌려온다. “예술은 특수한 사회성을 생산하는 공간이다.”라는 니콜라 부리오의 말을 빌려와 게임도 바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282) 니콜라 부리오는 『관계의 미학』에서 관계를 다루는 예술 작업들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이례적이고 특수한 관계적 상황을 창출한다며 옹호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가 ‘작은 유토피아’를 창출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양한 차원의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그러한 관계가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적대(antagonism)를 은폐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클레어 비숍의 논의는 굉장히 유효한 비판이다. 물론, 응우옌이 책에서 언급하는 게임이 모두 니콜라 부리오식 관계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행위와 관계를 통해서 적대를 감각할 수 있는 사례들에 대한 언급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렌다 로메로가 2009년에 만든 보드게임 〈기차〉에서 플레이어들은 기차를 운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나중에 그 기차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는 나치의 기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브렌다 로메로(Brenda Romero)가 2009년에 만든 게임 〈기차(Train)〉. 출처: http://brenda.games/train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에는 저자성의 문제도 있다. (보통 한명의) 예술가가 정해진 미적 형식을 인준하고 통제하는 전통적인 저자성은 굉장히 근대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관념이다. 응우옌의 논의에는 게임을 전형적인 예술의 개념틀에서 비추어 보기 위해 게임 디자이너를 전통적인 예술의 저자로 상정하는 문제가 전반에 깔려있다. 응우옌은 12쪽 각주 2번에서 게임 디자이너가 복수의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짚으면서도 논의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한명인 것처럼 상정할 것이라고 쓰는데, 오히려 게임의 저자가 한명일 수 없다는 점을 중요하게 짚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성의 문제는 단지 게임을 제작하는 관점에서만 중요한 논의가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저자성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해 생각해야한다. 반갑게도 응우옌은 책의 후반부에 게임의 아름다움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다. “(미적 책임이란) 게임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사이에 복합적으로, 예술가와 관객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배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책임이 주로 플레이어에게 있고 다른 경우에는 디자이너에게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책임은 복합적인 협업의 형태를 띤다. 이 경우, 게임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행위성을 통해서’ 그들이 의도한 미적 효과의 상당수를 성취하고, 그 최종 결과는 디자이너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미적으로 귀속된다.”(253) 이러한 언급은 이 책에서 게임의 미적 역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성을 발생시키는 플레이어의 역능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만들어 놓은 행위성의 제약을 위반하거나 허점을 찾아내는 플레이어들이 있다. 주어진 역량을 의심하고, 게임 자체를 전유해 버리는 플레이어들. 자크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을 비틀어 ‘해방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역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해방된 플레이어들은 단지 주어진 행위성을 가지고 노는 정도가 아니라, 게임을 아예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게임에서 서로를 죽이지 않고 함께 산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는 플레이어들을 떠올린다. 바로 이런 곳에서 미학(감각)의 정치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는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것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게임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사유할 틈을 만들어 낸다. 응우옌의 논의를 이러한 관점과 함께 밀어붙여 볼 수도 있다. 그가 게임과 게임 플레이의 자율성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게임의 플레이어는 다른 사람이 고안한 제한된 행위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행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되고 형식화된 행위성이 그곳에 있다는 점이다. 게임은 형식화된 행위성들의 다발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게임을 통해서 다양한 행위성들의 라이브러리를 탐험하게 된다. 혹은, 서로 다른 게임들을 플레이하면서 여러 가지 행위성들을 넘나들 수 있게 된다. 게임이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그것이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특유의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에 예술적이다.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는) 우리에게 여러 행위성을 넘나들고, 완전히 상충하는 여러 유형을 오갈 것을 요구한다.”(341) 심지어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행위성 사이의 상충되는 태도를 종합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런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명료하게 조직화된 가치들 사이를 오가며 가치에 대한 어렵고 세심한 질문을 던질 것을 주문받는다. 응우옌이 보기에 게임은 이런 방식으로 명료성과 유혹의 쾌를 폐기한 뒤, 가치를 대하는 세밀함을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 “게임의 구조는 우리의 자율성 전체를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방식으로 강화할 수 있다.”(125)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특정한 방식의 행위성에 순응하도록 만들지만, 우리는 그런 게임을 통해서 행위성 자체에 대해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성이 제한적으로 형식화되어 있기에 해방적으로 전유할 가능성도 열린다. 응우옌은 우리가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통해 특정한 실천적 틀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명료한 목표를 고수하지 않을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딘가에 푹 빠졌다가 또 빠져나오고, 깊게 몰입했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는 방법을 게임을 통해서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이라는 형식화된 행위성을 통해서 행위의 역량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게임이라는 가장 목적론적인 체제를 통해서 세계가 목적론적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을 다시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내는 일이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라는 책을 통해서 게임을 예술로 규정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1) 이러한 논의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C. 티 응우옌의 또 다른 논고 「예술은 게임이다: 왜 중요한 건 (예술과의) 고투인가」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글에서 응우옌은 예술 감상 또한 고투의 과정이라고 쓴다. 예술 감상은 결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술 감상에 목표(goal)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술품 앞에서 가이드북이나 미술사 교과서만 읽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술을 감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삶이 예술작품으로써 결말이 열려 있는, 끝나지 않는 대화가 되기를 바라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논변으로써 끝나버릴 무언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옮긴이 이동휘의 블로그: http://economic-writings.xyz/text/textblocks1/art_is_a_game.html Tags: 행위성, 응우옌, 행위성의예술, 북리뷰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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