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ies But Goodies - 클래식 게임의 조건

작성날짜 : 2021-10-01

안타깝지만 게임은 나이에 우호적이지 않다. 생각보다 손이 늦게 움직일 때, 초점이 맞지 않아 어둠 속의 적을 보지 못할 때, 무엇보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적에 스릴보다 심장이 더 걱정되기 시작할 때, 게임은 더 이상 친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럴 땐 나도 모르게 신랄한 비평으로 게임을 탓하며 나이를 감춘다. 그래픽만 근사하고 코어가 약하다는 둥, 영혼 없는 모방작이라는 둥, 그 다음은 어김없이 화려한 '라떼'의 기억, 고통스럽지만 보람찼던 모험을 회상한다. 모눈종이에 매핑하던 순간들, 계단 반 칸에서 떨어져도 죽던 세상 허약한 주인공의 모험담, 늘 그렇듯 어디론가 납치된 여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쏟아부은 수 많은 시간들, 고독한 모험의 유일한 동반자 개 한 마리를 포기해야 하는 사악한 선택지로 인한 딜레마, 그리고 그 혹독한 시험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엔딩의 충만함까지. 잠깐의 플래시백으로 '라떼'의 영광을 찾아 여전히 생생한 기억 속 게임에 다시 한 번 말을 건넨다.   


그런데 과거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적 단계가 필요하다. RF 단자밖에 없는 콘솔 게임기를 RGB 단자 TV로, 나아가 hdmi 단자의 TV에까지 연결한다. 물론 권하고 싶지는 않다. 8bit 게임기를 대형 TV에 연결시켜 실시간 시력테스트를 하는 기분은 결코 유쾌한 플레이 경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과거의 유명한 게임들은 휴대용 게임기, 스팀이나 콘솔 온라인몰에서 리마스터 버전 등으로 출시된다. 내게는 심전도 검사와 같은 최신 게임을 포기하고, 이제야 ‘진짜’ 게임을 플레이한다. 하지만 1시간 남짓, 우리의 대화에 노이즈가 발생한다. 본질에 충실하다 보니 최신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편함이 눈에 거슬리고, 군더더기 없다 보니 뼈대만 있는 게임 구조와 단순한 스토리에 지루하고, 더 이상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도트 그래픽의 조악함이 걸림돌이 된다. 이쯤되면 우리가 하는 것이 대화일 수 있을까.


게임 잡지나 웹진에서 다룰 법한 '역사에 남을 100대 게임', '놓쳐서는 안될 고전 게임' 같은 특집도 약효는 일시적이다. 클래식 게임의 역사적 의미, 장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개인사적 경험담에 공감하면서도 적극적인 플레이 경험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클래식에 대한 존중이 게임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영화 잡지를 들춰도 비슷한 취지의 기사는 널려 있다. 문학이나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리스트를 꼼꼼히 적으며 영화들을 찾아보는 씨네필이나 클래식 음악 매니아는 흔하다. 문학에서는 고전 읽기가 일반 대학의 교양과목일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에 비해 공감과 행위의 괴리가 게임만큼 분명한 장르가 또 있을까. 물론 이러한 차이는 컨텐츠가 의존하는 기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원형적 기술은 가장 오래 전에 등장했지만 지금도 차이가 없는 반면, 파생되어 발전한 기술은 등장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 변화가 급격하다. 의존하는 기술이 변화함에 따라 컨텐츠 변화 속도도 상이하다. 소설은 수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지만, 영화는 몇 십년만에, 게임은 몇 년 만에 그 큰 변화를 겪는다. 결국 기술적 변화가 크면 클수록 컨텐츠의 라이프 사이클은 짧아진다. 


게임은 의존 기술과 변화에 있어 가장 격렬한 컨텐츠다. 당연히 게임에도 고전 혹은 클래식 게임이 존재한다. 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만한 게임들의 리스트는 쟁쟁하다.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다. 여전히 현역으로 자부하지만, 환호하는 관중은 없다. 이유는 많다. 최신 게임이 더 접근하기 편하고, 더 진화된 시스템의 경이가 있고, 황홀한 그래픽과 스토리의 스케일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클래식 게임은 게이머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으며, 지금도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지만, 더 이상 플레이를 통해 소통할 수 없는, 그저 우리 모두의 첫사랑일 따름이다. 한때 우리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바쳐 연모했으나, 이제 다시 만나 뭘 해볼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의 연인이다. 문학과 영화가 빛바랜 소설을 읽고, 흑백 영화를 보면서 클래식에 대해 바치는 실천적 존중이, 클래식 게임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플레이되지 않는 무용담은 공소한 '라떼의 영광'일 뿐일까. 



‘로그라이트’라는 명명(命名)


2017년 스팀에서 ‘앞서 해보기’로 처음 등장한 〈Dead Cells〉(Motion Twins)은 여러모로 화젯거리였다. 8bit나 16bit 시절을 떠올리는 도트 그래픽, 몇 개의 키로 가능한 플랫폼 액션의 경쾌함,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직관적이지만 진행할수록 매력적인 게임 시스템 등 클래식 게임 요소가 강한 동시에 최신 게임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스타일, 조작 그리고 편의성을 갖추고 있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OB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완벽한 클래식 게임의 플레이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게임에 입문한 NB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의 경험을 제공했다. 이런 특색 때문에 이런 류의 게임을 ‘레트로 게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레트로 게임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레트로 게임은 클래식 게임을 현대라는 거울에 비춘 하나의 상(象), 즉 존재할 수 없는 클래식 게임에 대한 회고적 경험을 거울을 통해 현전으로 구성한 상이다. 따라서 레트로 게임은 시간의 퇴화를 견딘 여전히 건재하는 영광이 아닌, 영광을 추억하는 이를 위한 아카이브이며, 과거에 머물던 영광의 부활이 아닌, 그 영광은 과거에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하는 레퍼런스 없는 시뮬라끄르다.  

〈Dead Cells〉. 이미지출처: 스팀 공식페이지.


물론 〈Dead Cells〉의 가치는 클래식 게임을 재현함으로써 그 위상을 확인 사살했다는 데에 있지만은 않다. 〈Dead Cells〉은 장르적으로 로그라이트(Roguelite)에 해당된다. 이러한 장르명은 21세기 초반까지 널리 사용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액션, RPG, 전략 등과는 현저히 이질적이다. 로그라이트 장르의 명명은 1980년 출시된 〈Rogue〉(Michael Toy & Glenn Wichman)에서 출발한다. 〈Rogue〉는 당시 유행한 던전 크롤러(dungeon crawler)를 기반으로 두 가지 놀라운 시스템을 시도했다. 플레이 캐릭터의 ‘영구적 죽음(permadeath)’과 시작할 때마다 달라지는 맵 시스템이 그것이다. 그로 인해 기존의 모눈종이 지도 제작 실력은 도움이 될 수 없었으며, 플레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캐릭터 사망에 대한 중압감은 가중되는 가혹한 시스템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캐릭터가 죽는 매 순간, 키보드와 함께 게이머의 영혼도 파괴되곤 했다. PTSD를 극복하려면 상당한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Rogue〉와 같은 스타일의 게임을 이후 '로그라이크(Roguelike)’라 불렀으며, 이후 캐릭터의 죽음과 함께 아이템이나 스테이터스를 완전히 압수하는 대신, 약소하지만 남겨주는 적선(積善)의 형태로 변화하면서, 'like' 대신 ‘lite’를 붙여 ‘로그라이트’라는 장르로 자리잡는다.  


그런데 '로그라이트’라는 장르명은 개발사의 마케팅 기믹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회학자 루만(Niklas Luhmann)은 조직 이론의 ‘느슨한 커플링’, ‘조여진 커플링’ 개념을 빌어 반-본질주의 미디어(media)/형식(form) 개념을 제시했다. 모래사장의 모래와 그 위를 걷는 이의 발자국처럼 루만의 미디어/형식은 ‘느슨함/조여짐’의 상대적 정도를 통해 규정된다. 모래사장에 있는 느슨한 모래들이 '미디어'라면, 그 위를 걸어 조금 단단하게 결합된 발자국이 '형식'이다. 다만 이 개념쌍은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느슨한 커플링' 앞에서는 '형식'이 되고, 더 '조여진 커플링' 앞에서는 '미디어'가 된다. 


루만의 미디어/형식 개념을 이제 문학과 게임에 적용해 보자. 문학과 『햄릿』, 게임과 〈Rogue〉. 문학과 게임을 문화콘텐츠로서 기여하는 '미디어'라 할 때, 개별 작품 『햄릿』과 〈Rogue〉는 각 미디어의 요소를 더 조여 커플링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햄릿』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직ㆍ간접소비되지만, 〈Rogue〉는 대개 -이 글에 인용되는 방식처럼- 간접소비될 따름이다. 즉, 게임기자들이 특집 기사를 쓰고, 평론가들이 클래식 게임의 화려한 영광에 열변을 토하지만, 영광의 게임을 애써 플레이하려는 이는 적다. 그래서 클래식 게임은 게임이라는 '미디어' 안에서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소비되지 않는 한 존재 의의는 없다. 

그렇다고 클래식 게임의 참패(慘敗)는 아니다. 대신 '로그라이크/라이트'가 있다. 〈Rogue〉는 더 이상 플레이되지 않지만, 그를 모태로 하는 '로그 같은' 혹은 '쉬운 로그'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OB와 NB는 기꺼이 그들을 소비한다. 게임이라는 모래사장에서 〈Rogue〉는 모래를 단단하게 해준 첫 발자국이라면, 이제 더 많은 게임들이 그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보태어 보다 단단한 발자국의 결합을 만든다. 결국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 형식으로서의 〈Rogue〉는 더 이상 소비되지 않음으로써 존재 의의를 상실했지만, 수많은 '로그라이크/라이트' 게임들이라는 '형식'과 새로운 쌍을 이루며 '미디어'로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왜 게임에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게임은 소프트웨어라는 '미디어'에 대해 '형식'인 만큼, 기능에 대한 창의성 대신, 코딩에 대한 원천 가치를 존중한다.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한 기능의 재현은 게임에서도 가능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커 문화라는 지평 위에서 게임은 저작권보다는 코드를 공유하고, 경쟁적으로 코드를 개선해서 양질의 게임을 만드는, 게임만의 독특한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태도를 지닌다. 그 결과 게임은 여전히 90퍼센트 이상의 레거시와 10퍼센트 안팎의 독창성 위에 존재한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개별작품이 또 다른 형식의 결합 요소를 수용할 때 잘하면 ‘오마주’ 잘못하면 ‘표절’이 되는 다른 미디어와 달리, 게임 미디어에서 레거시의 수용은 또 다른 명작의 시발점이 된다.  


그래서 게임은 다른 모든 미디어에 비해 자유롭다. 여전히 모든 어른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흡수하여 더 빨리 성장하려는 아이처럼 본능적이며 원초적이다. 모든 원초적인 것들은 경외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한때 생존경쟁에 밀려 아프리카 북단에서 쓸쓸히 멸종되었다는 네안데르탈인 대해 매료된 적이 있으나, 사실 그들은 멸종이 아닌, 호모 사피엔스와의 혼종 교배를 통해 여전히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결국 사라졌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는 네안데르탈인의 노스탤지어처럼, 다양한 언술 속에 재배치되는 작금의 클래식 게임은 '형식'이 아닌, '미디어'로서 새롭게 경험될 수 있다. 



기대와 커뮤니케이션


개별 게임이라는 '형식'은 기술 발전과 함께 빠르게 소비 영역에서 이탈한다. 소비되지 않는 게임은 대화의 소재가 되기 어렵고, 커뮤니케이션은 쉽게 중단된다. 루만의 이론에 따르면 커뮤니케이션은 자아와 타아가 마주해 발생하는 '이중 우발성(double contingency)' 위에서 구축된다. 자아는 타아가 어떻게 대응할 지 확정할 수 없는 우발성의 조건에서 발신하고, 타아 역시 이 발신이 지닌 가능한 의미의 확정 없이 수신한다. 양쪽에서 발생하는 우발성 속에서 각자에게 기대되던 피드백이 돌아올 때에만 커뮤니케이션은 성립한다. 이중 우발성이 만드는 가능성의 확장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능성의 확장에서 발생하는 복잡성에 대한 감축이다.  


개별 작품이라는 형식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역시 복잡성의 감축을 요구한다. 사회학자 파슨스(Talcott Parsons)에 따르면, 이중 우발성의 복잡성 감축은 공통의 경험과 지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Rogue〉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다면, 커뮤니케이션 성립은 수월하다. 하지만 만일 한쪽의 경험과 다른 한쪽의 간접 체험만으로 이뤄진다면, 커뮤니케이션에서 이 복잡성의 감축은 불충분하다. 경험자가 던진 경험의 감정들이 간접 체험자에게는 이해될 수 없으며, 간접 체험자의 표면적 기술(description)은 경험자에게는 공소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복잡성 감축을 위한 장치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타아의 대응을 완전한 우발성의 영역에 두지 않고, 비록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가능한 결정의 범위를 예상하는 것이다. 타아에 의한 피드백에 대한 자아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결정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정해진 범위 안에서 이뤄지길 기대한다. 많은 유사한 커뮤니케이션이 시도되고, 성립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가능성을 한정하는 의미에 대한 반복적 지시가 등장한다. 즉, 반복적 지시에 따른 감축을 통해 ‘상징’이 사용되고, 상징에 따른 일반화를 통해 자아와 타아 모두 가능성의 영역에 대해 ‘기대’를 통한 복잡성의 감축이 가능해진다.  


1994년부터 개발된 〈Ancient Domains of Mystery〉를 플레이한 게이머와 2006년 등장한 〈Dungeon Crawl–Stone Soup〉를 플레이한 게이머가 마주한 경우를 가정해 보자. 각기 상대 게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커뮤니케이션은 각자의 경험 위에서만 시도된다. 커뮤니케이션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복잡성을 줄여야 하기에 각기 상대의 발신과 수신에서의 탐색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 과정이 수월하지 않을 때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다. 만일 이들이 상대가 어떤 범위 내에서 발신 및 수신할 지를 한정하는 기대가 있다면, 복잡성의 감축을 위한 탐색 과정은 한결 단축된다. 이 역할을 하는 것, 즉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로 기능하는 ‘로그라이크’이다. 각자 상대의 경험이 ‘로그라이크’라는 범위 위에서 의미를 가질 것임을 기대하고 행위하기 때문에, 상대 게임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로그라이크’라는 명명이 가진 의미의 한정을 통해 수신/발신 과정에서 생산된 복잡성을 감축하고 형식인 게임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

 

〈Ancient Domains of Mystery〉(왼쪽)와 〈Dungeon Crawl–Stone Soup〉(오른쪽). 이미지출처: 게임 공식 홈페이지.


'형식'이 아닌, '미디어'로서 역할하는 클래식 게임의 존재 양상은, 이처럼 새로운 명명에 따른 기대를 통해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할 수 있도록 복잡성의 감축을 유도한다.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형성된 의미 시스템이 곧 게임 문화다. 문화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현현하고, 그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다양한 문화적 소재들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커뮤니케이션'될 때만 문화로서 의미가 정위(定位)된다. 따라서 우발성의 복잡성 감축을 유도하는 미디어로 존재 양식을 갖춘 클래식 게임은 게임문화의 유지와 확장에 기여하는 새로운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 


게임문화와 클래식 게임

지금까지 클래식 게임을 통해 '기대'가 커뮤니케이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았다. 물론 ‘기대’는 클래식 게임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클래식 게임이 게임에 대한 긍정적 값을 지닌 커뮤니케이션의 기대로 존재한다면, 역으로 부정적 값을 지닌 기대도 존재할 수 있다. 비호감 게임리뷰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형 양산게임’이라는 표현은 원래 사전적 의미에서는 '한국 게임개발사에서 대량생산된 게임'을 중립적으로 통칭할 뿐이지만, 커뮤니케이션에 작동하는 양상은 이와 달리 매우 부정적이다. 한국형 양산게임이 커뮤니케이션에 제공하는 '기대'는, 장르의 개성이나 세계관의 고유성은 없고, 비즈니스 모델만 강조된, 개발사의 수익률을 위해 고도의 사행성을 장착한 게임이다. 즉, 한국형 양산게임에 대한 '부정적 기대' 역시, 로그라이크의 '긍정적 기대’처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존재하는 우리 게임문화의 또 다른 양상을 규정한다. 


한국형 양산게임만이 아니다. 게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업장’이라는 표현이나 경험이라는 게임의 본원적 규정과 어울리지 않는 ‘자동전투’ 시스템, 그리고 온라인 게임을 매개 및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발견되는 차별적이고 공격적이며 상호혐오로 가득한 언술 등 이 모든 것은 부정적 값을 지닌 '기대'로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며, 그렇게 성립하는 커뮤니케이션 또한 우리 게임문화의 일면이다. 


게임문화는 단순히 세기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게임평론가의 극찬을 받는 소외된 걸작들,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몇 편의 인디게임을 통해 형성될 수는 없다.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과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기대’의 지형이 게임문화의 현 주소를 규정한다.  게임과 관련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게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원인이라 말하곤 한다. 게임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게임문화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게임문화는 오직 게임을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존재한다. 여기에는 긍정적 '기대'도 물론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정적 '기대', 심지어 독소(毒素)의 '기대' 또한 포함된다. 면피의 가능성이 존재의 양상을 바꿀 수는 없다. 변화는 오직 커뮤니케이션에서 복잡성의 감축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대'의 성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그래서 다시 클래식 게임이다. 그의 분투는 눈물겹다. 이 보다 더 순수할 수 없을 그 시대만이 줄 수 있는 순정의 게임 경험과 이를 통한 자수성가형 성취감을 제공한 클래식 게임은 게임 미디어의 '형식'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봉인되는 순간, 수 많은 아류작과 온전한 장르의 모태가 됨으로써 태를 바꾸어 '미디어'로 존재한다. 이렇게 미디어로 명명된 클래식 게임은 상징으로 일반화되고, 상징을 통해 제시된 '기대'는 클래식 게임 고유의 경험을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재현하고 확장한다. 폭넓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클래식 게임과 만나고, 긍정하고, 새롭게 다른 방식으로 욕망한다. 이렇게 클래식 게이머의 첫사랑은 라떼의 '추억팔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첫사랑이 되고, 게임의 원형적 경험으로서 게임문화의 일부가 된다. 화려한 영광의 수사로 치장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순간, 무대에서 퇴장만이 남은 순리에 따르는 대신, 클래식 게임은 '미디어'로서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형식'들을 이끌고, 독소의 '기대'와 싸우며 새로운 희망의 기대를 세상에 퍼뜨린다. 그렇다면 나도, 최종 보스까지는 아득하지만, 나이에 우호적이지 않은 게임세상에 사자후를 토하며 그 오랜 세월을 버틴 클래식 게이머의 노익장을 과시하련다. 


  

 


박상우(게임평론가)




몇몇 대학과 대학원에서 게임관련 강의를 했으며, 몇몇 잡지와 신문에 게임 관련 칼럼을 연재했고, 몇 권의 게임관련 책을 썼으나, 내가 산 책이 더 많다. 게임제작 및 퍼블리싱 관련 개발사 컨설팅을 하다가 막판에는 게임회사 대표직도 맡았고, 이제는 은퇴했다. 게임 평론가나 게임 전공 교수, 게임 컨설턴트나 게임회사 대표가 아닌 '게임을 참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