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과 B급의 차이, 끊임없이 저항하고 결국은 차지하는

작성날짜 : 2022-04-03

1. Intro 


우리는 어떤 대상을 구매하거나 이용할 때 등급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획득하고자 하는 대상에 등급을 매기는 순간,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떤 기준을 통해 이 대상이 우월하거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거나, 어떤 영역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가끔 B급, 다시 말해 A급이 아닌 ‘것’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어 생각한다. 딱 집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B급은 ‘A급이 아닌 무언가’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B급을 인지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하는 것은 A급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A는 늘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B를 보고나서야 A가 A임을,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보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2. 아주 사적인 게임의 역사


난 어렸을 때 남동생이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80년대생인 내가 PC게임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집에서 하나뿐인 컴퓨터를 차지한 건 남동생이었다. 그 전까지 거실에 한 대 뿐인 텔레비전에 연결해 플레이할 수 있었던 일본산 콘솔 게임기기도 늘 남동생의 차지였다. 당시 컴퓨터 두 대를 들이기엔 기기 값이 너무 비쌌다. 하나를 사면 누군가가 차지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컴퓨터’의 영역에서 A급은 아마도 남동생이었던 것 같다. 자주 갔던 오락실에서도 플레이는 남동생이, 나는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주로 했다. 난 어쩌면 게이머의 영역에서 B급을 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국내에서 게임 잡지가 발간되었고 남동생은 열심히 그 잡지를 구독했다. 그 덕에 나도 게임 잡지를 함께 읽게 됐다. 종종 게임 잡지에서는 새로 출시된 PC 게임을 소개하면서 베타 버전을 부록으로 넣어주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불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건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었다. 당시 RPG 게임이나 어드벤처, FPS가 주류였던 PC 게임 내에서 캐릭터를 기르는 장르가(육성 시뮬레이션) 있다는 걸 그 당시 처음 알았다.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프린세스 메이커〉는 내가 처음으로 서점에 가서 게임CD를 구입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 가이낙스사에서 1991년에 제작했던 이 게임은 악마의 침입으로부터 왕국을 구한 용사가 마리아라는 고아 소녀를 키우고 그의 장래를 설계해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제목처럼 용사는 마리아의 아버지로 그를 프린세스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육성시뮬레이션 장르를 크게 대중화 시켰던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은 당시 게임은 남성만의 놀이 문화라는 인식을 깨고 많은 여성층을 확보하여 게임 플레이에 있어 젠더 편향성을 무너뜨리는 계기로 작동했다. 한동안 육성 시뮬레이션 장르 게임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십대 후반을 기점으로 게임하기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PC방이 생기고, 온라인 게임이 흥행하기 시작하고, 게임채널이 생겨 이스포츠가 활성화되던 그때. 당시 수험생이었던 내가 게임을 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온라인 게임에서 기본이 되는 ‘팀 플레이’가 나는 불편했다. 내가 게임 플레이를 못해서 파티원에게 받을 비난도 싫었고, 상대적으로 끊임없이 익명의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플레이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질 않았다. 


그러나 이십대가 됐고,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점차 게임 플랫폼이 컴퓨터에서 개별 모바일로 옮겨가게 되면서 나는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게 됐다. 부담없이 싱글 플레이가 가능한 모바일 게임을 지속하다보니, 예전에 했던 PC 게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어이쿠 왕자님〉이라는 게임 소개글을 읽게 됐다. 〈어이쿠 왕자님〉은 한 인디게임 제작팀이 자체적으로 개발해낸 PC게임이었는데,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모토로 시작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2007년에 제작하고 발매되었던 이 게임은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포맷을 패러디한 BL(Boys Love1))장르 게임이다. 


BL장르는 근본적으로 비주류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첫째, (주로) 여성이 생산하고 (대다수의) 여성이 소비하는, 생태계 특성상 젠더 편향적이다. 둘째, BL장르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취향의 것으로 특정된다. 대부분 BL장르 소비자들이 여성으로 상정되지만, 그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고 ‘동인’이나 ‘비공개 커뮤니티’방식으로 자신의 취향을 숨긴 채 활동해 온 역사가 이를 반증한다. 실제로 BL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취향에 대해 확고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성인이 되어서도 이를 드러내면서 소비하지 않는 경향들을 보인다.


BL장르는 원본이라 할지라도 2차 생산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BL장르가 주류 콘텐츠가 아니었던(혹은 될 수 없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인데, 주류의 다음이나 맞은편, 다시 말해 이성애 젠더 질서에 맞서는 방식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의미화 과정에 있어 이용자들이 직접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주류적인 특성이 현대로 오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콘텐츠 소비 방식이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에서, 롱테일 전략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흐름으로 분석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당시 나는 내가 키우는 딸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이상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이쿠 왕자님〉에는 고정된 젠더 정체성인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선택적 주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거하게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말해 〈프린세스 메이커〉는 보편의 게이머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여전히 게임의 역사에서 그 보편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닫게 됐던 것이다. 



3. B급의 힘


B급은 A급의 반대항에 서 있기 때문에, 주류문화에 매달리지 않는다. 동시에 B급은 반문화적인 성격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B급이 사회가 정한 A급인 주류에 반하는 것이라면, B급은 주류로 표현되는 지배적인 권력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효과에 대해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한 거대 자본의 영향 아래에서는 창작의 자유와 다양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B급은 꾸준히 주류게임의 맞은편에 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의미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푸코가 지적했듯, 권력이 존재하는 곳에 저항이 있다. A급과 B급은 양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A가 존재하기 때문에 B가 존재하는, 권력의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B급은 A급을 긍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B급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존재한다. B급으로 불리면서도 끊임없이 생산을 지속하는 요인이 바로 여기 있다. B급이 가진 힘은 주류문화의 위계화나 독점화, 권력화에서 탈주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하는 동안 강요되거나 권력으로 작동했던 무언가를 벗어나 〈어이쿠 왕자님〉을 플레이하게 되면서 느꼈던 해방감, 혹은 카타르시스는 결국 B급이라는 패러디의 형태로 드러났던 정체성을 긍정하면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A와 B의 존재는 위계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권력의 줄다리기를 하는 셈이다. B급에서 자주 나타나는 패러디라는 양상을 살펴보면 더욱 그러하다. 패러디는 원본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 규범과 일탈, 그리고 주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가 패러디를 통해 수면위로 떠오른다. 특히 사회가 이상이라고 상정한 것을 모방하고 비트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결과적으로 권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을 사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 기법 중 하나인 스핀오프는 기존의 중심이 되었던 원작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창작한다. B급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저항하고, 그 가운데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낸다. 낯설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B급의 시각은 A급을 다시 보게하고 권력이 어떤식으로 작동하는지 주체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긴다. 게임의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콘텐츠에 비해 경험의 몰입도가 높다. 그러니 우리는 B급에서 재미를 찾고 새로운 경험을 하길 욕망하는 것이다. A급과 다른 무엇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길 바라면서. 



1)  남성동성애-서사를 일컫는 용어. 실제 동성애자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으며, 남성동성애에 대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장르라 볼 수 있다. 




  

장민지(경남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조교수)




덕후 진화론(덕후는 정신적/육체적/기술적으로 진화한다)을 믿는 팬-미디어 연구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영상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박사논문〈유동하는 세계에서 거주하는 삶 : 20~30대 여성청년 이주민들의 집의 의미와 장소화 과정〉으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 학회 학술상, 2016년 〈비인간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환상〉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 한국방송평론상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