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워싱>: 노스탤지어가 흐물거릴 때
21
GG Vol.
24. 12. 10.
-이 글에는 <마우스워싱>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노스탤지어적 로우 폴리곤
역사학자인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는 저서인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에서 다양한 시대와 형태의 노스탤지어를 소개한다. 디즈니의 영화 리부트나 N64와 같은 1990년대의 미디어가 2020년대에 각광받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널드포스터는 세대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2020년대 초반에 성년이 된 사람들이 1990년대에 태어났으며, 이 시기는 또한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라는 설명이다[1].
실제로 itch.io와 같은 인디 플랫폼에 제출된 로우 폴리곤 기반의 게임들, N64나 PS1을 키워드로 게임의 제작자와 향유자는 노스탤지어를 적잖이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들 90년대생이 유년기에 향유하던 게임의 추억을 현재로 데려오고자 하는 시도로써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양식의 게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으로는 제작에서의 이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호러 인디 게임 컴필레이션 <Haunted PS1>을 엮은 브레오간 해케트는 90년대의 저해상도 3D로 게임을 제작하는 동기로 접근성을 언급한다. “텍스처에 4K 해상도가 필요하지 않고 캐릭터 모델이 수천 개가 아닌 수십 개의 폴리곤으로 계산될 때 솔로 크리에이터가 3D로 전환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2]. 그렇게 빚어낸 이미지는 AAA 게임과 직관적인 차이를 구획하고, <Abandoned_64>와 같은 작품이 드러내듯 아예 스스로를 실패작으로, 인디한 것으로 천명하며 등장하기도 한다[3].
무엇보다도 이런 종류의 기하학적인 신체와 저해상도 텍스처가 지속적으로 향유되는 데에는 특유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3D로의 이행은 명백히 기술적 한계에 직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평면적이면서도 블록 같은 질감은 투박하지만 분명 구체적인 신체성을 지닌 무엇이다. 그 위에 기입된 엉성한 텍스쳐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므로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며 불안을 자아낸다. “때때로 게임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이러한 그래픽은 따라서 호러 장르와 밀접하게 얽히게 된다.
이렇게 레트로 호러 게임이 향유되는 동기를 살펴봤을 때, 지난 9월에 출시된 심리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마우스워싱Mouthwashing>은 설명에 모범적으로 들어맞는 사례처럼 읽힌다. 롱 올간Wrong Organ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스웨덴 게임 개발 교육 기관에서 만나 팀을 이뤘다. 거기서 그들은 전작인 <하우 피쉬 이즈 메이드How Fish is Made>를 완성했고, 확장팩에서 후속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우스워싱>의 핵심 인물인 ‘컬리’는 이 게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그가 운행하던 우주선 ‘툴파르’ 호는 천체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게 되는데, 폭발은 컬리의 전신을 강타하며 흔적을 아로새겼다. 작중에서 컬리는 사지와 눈꺼풀을 잃고 극심한 화상으로 인해 신음한다. 게임의 1인칭의 카메라는 플레이어블 아바타와 플레이어의 시점을 융합시키며 가상의 신체로부터 비롯되는 감각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격통이 화면 너머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지는 않기에 끔찍한 몸에 접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특별한 감각을 일깨우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공포는 가상의 육신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결합에서 파생된다. 어떤 퀘스트는 컬리의 살을 자르고 섭취할 것을 종용한다. 딱딱한 플라스틱 덩어리나 다름없어 보이는 저화질의 벌건 살은 가상의 신체가 언제든 인접한 다른 환경으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을 자극한다.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21세기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모든 것이 나오기 전의 마지막 시기”를 향유한다는 게이머 노스탤지어에 관한 설명은 “추억 소환 섹션”에 놓여 있는 대상에 한정한다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4]. <마우스워싱>은 로우 폴리곤이라는 장치가 범연히 1990년대적인 것의 부흥이라고 설명한 바와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적으로 구현된 미디어적 참조는 현재적으로 “풍부한 시청각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5]. <마우스워싱>이 엮어내는 영상 소스(뤼미에르 형제의 <유쾌한 해골>부터 1950년대 반공주의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인 <Make Mine Freedom>을 거쳐 가글액의 광고 화면으로 이어진다)는 로우 폴리곤이 표방하는 1990년대 게임 하드웨어 이전의 시기까지 소급해 가며 현재화를 시도한다.
주권성에 대한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로 상상되는 과거는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노스탤지어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시간에 속한 순간들”에서 촉발되는데, 결국 “현재 우리가 보유한 가치나 윤리, 자기감에 더욱 부합하게끔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6].
이 지점에서 90년대와 지금 사이의 연속성을 되짚어보게 된다. <마우스워싱>의 내러티브가 디디고 있는 역사적 토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다. 80~90년대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구현된 신자유주의는 “사사화privatiation와 개인의 책임”을 핵심으로 한다. “부와 의사 결정이 대중과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정책 결정 기구에서,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 가는 것이다[7].
그 결과 구조 조정과 노동유연화, 고용 불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풍경이 삶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마우스워싱> 속 툴파르 호는 마지막으로 남은 유인 우주 화물 서비스를 전문 기업인 포니 익스프레스의 소속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 속에서 승무원들이 화물을 운반하는 와중에 툴파르 호가 소행성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부함장인 ‘지미’는 구조가 올 때까지 다른 동료들을 책임지고 건사하고자 한다.
한편 비선형적으로 이어지는 게임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사고의 전후를 퍼즐처럼 재구성하도록 요청한다. 작중에서 상기의 영상 콜라주는 한 장의 메일을 트리거삼아 재생된다. 그 메일이란, 본사는 이번 배송을 완료한 후에 툴파르 호의 인원이 전원 해고될 것이며 포니 익스프레스의 서비스가 무인 체제로 전환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컬리가 함장의 자격으로 그 메일을 수신하는 장면은 잠시 중지되고, 구시대의 애니메이션들이 흘러나오며 경제적 주체로서의 가장과 같은 자본주의의 유익한 삶을 역설한다. 이미지의 잡동사니가 멎은 자리에는 끄트머리가 꺾여버린 사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다리는 컬리가 지미와 나누었던 대화를 환기하는 요소다.
컬리 : ...최근 이런 생각을 좀 해 봤어. 이걸로 충분한 건가? 지금까지 잘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도 되나?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으로 말이야.
지미 :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컬리 : 내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거야. 안 좋지는 않아. 하지만... 아주 무서운 일이지. 이런 생각이 들어. “이게 내 최선인가?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
지미 : 이 사다리의 꼭대기에 올랐는데... 애초에 잘못된 사다리를 오른 건 아닐까 생각하신다는 거죠.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한참 위까지 올라가셨잖아요. ...전 아직도 그 사다리를 끝없이 오르고 있는데 말이죠.
『잔인한 낙관』을 저술한 로런 벌랜트는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좋은 삶’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애착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 우리는 소진되거나 마모되면서도, 더 좋은 삶이라는 환상에 애착을 품는다.“잔인한 낙관은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대상에 애착심을 유지하는 상태”이며 또한 “우리에게 ‘좋은 삶’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에 대한 정동적 애착심 속에 기거하면서 ‘좋은 삶’을 살펴보게 하는 자극제”이기도 하다[8].
위의 대사에서 컬리는 지금껏 유지해 왔던 삶의 형식이 어느 정도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황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벌랜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마모된 주체인 그는 ‘좋은 장거리 화물선 함장’이 주는 낙관이 불능에 처했음을 미묘한 어휘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허무감을 공유받는 지미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다리의 ‘한참 위’에 있기에 가능한 토로라고 일축한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임시 함장이 된 지미는 지속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되뇌며, 부상으로 불능 상태가 된 컬리를 대신하려 한다.
지미는 선원들의 안위와 툴파르 호의 위기를 책임지려 한다. 더 나아가서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함으로써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지미는 생존 물품을 찾아보기 위해 운송 창고 개방을 결단한다. 창고를 개방할 수 있는 열쇠는 함장만이 소지 가능하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휘두른 주권은 곧 미끄러진다. 영상의 콜라주로 이어진 시퀀스가 종료되면 마침내 플레이어는 창고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물은 생존에는 하등 쓸모없는 가글액에 불과하다. 이 가글액은 포니 익스프레스가 직접 생산하지 않은 물건일뿐더러 1950년대의 애니메이션과 병치된 광고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목전으로 닥친 자동화와 무인화의 미래를 절대 극복해 주지 못할 물건이다.
자본주의적 체인 안에서 상품이 개별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세세하게 분할되어 실체는 추상적인 절차로 파편화되고 프로세스는 우연적인 집합에 불과할 때, 블랙 박스 속 물건을 통해 주권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지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 함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주권성이란 객관적 상태라고 오인된 환상”으로 “개인적, 제도적 자기 정당화의 수행성을 열망하는 입장이며, 그 입장이 안전과 능률성을 제공한다는 환상과의 관계 속에서 통제권을 갖는다는 정동적 느낌”이다[9].
일반적으로 법에서는 주체를 행위하고 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이는 범박한 의미에서의 게임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상호작용 하는 미디어로 정의된다는 지점을 환기한다. 지미의 행위를 견인하는 동기는 플레이어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로우 폴리곤 아바타를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이유와도 일치한다. 툴파르 호와 승무원을 건사하는 것이다.
<마우스워싱>의 게임 플레이는 정해진 루트를 따라 나가는 일방적인 워킹 시뮬레이터식 진행에 가깝다. 이 같은 구성은 전권을 휘두르는 주권성으로부터 비껴 나간다. 사고 당시를 재연하는 프롤로그는 이어질 전개의 메타포다. 소행성이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가운데,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경고문이 주어지지만 플레이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왼쪽으로 꺾는 일뿐이다. 여기서 주권성은 실패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에 발휘된다. 그렇게 지미는 툴파르 호를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고, 플레이어는 지미의 ‘업보’를 책임지지 못한다. 1인칭 카메라를 활용한 시점 트릭은 여태껏 플레이어가 불완전한 책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렇게 플레이어는 시점으로부터 미끄러져 나가며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마우스워싱>은 노스탤지어적 장치를 활용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짤막한 역사적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있다.
잔인한 낙관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은 <마우스워싱>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싶다. 모든 관계가 파탄 난 상황 속에서 지미는 부상당한 컬리를 수면 장치에 밀어 넣는다. 비록 컬리는 망가진 신체와 고통으로 잠 못 드는 신세임에도 일단 수십 년간 냉동 수면 상태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구조되리라는 일방적인 기대에 내걸린다. 훗날 컬리가 어색하게 눈을 떴을 때, 그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1]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손성화 역. 『노스탤지어, 어느 위험한 감정의 연대기』. 서울: 어크로스. 2024. 273쪽.
[2] Natalie Clayton, “The horror games harking back to the PSone era”, 2019.10.31.등록, 2024.11.05.접속, WhyNowGaming,
[3] 이 게임은 닌텐도 64를 위한 게임을 “야심넘치게 개발하다가 프로젝트를 폐기할 위기”에 놓인 일련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https://l4ndo.itch.io/abandoned-64
[4]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273쪽.
[5] Natalie Clayton, 위의 글.
[6] 애그니스 아널드포스터. 15쪽.
[7] 리사 두건. 한우리·홍보람 역. 『평등의 몰락-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가』. 현실문화. 2017. 57쪽.
[8] 로런 벌랜트. 윤조원·박미선 역. 『잔인한 낙관』. 서울: 후마니타스. 2024. 48·55쪽.
[9] 로런 벌랜트. 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