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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과 게임: 편견이라는 경계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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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2. 10.

반지하게임즈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하여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생기고 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하지 못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도 게임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사실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늘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평범한 시각장애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시각장애인들이 더 폭넓게 게임을 즐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역시 한 게이머의 입장으로 말해 보고자 한다. 


인간이 오감 중 시각에 의존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해서는 다른 장애 영역에 비해서도 그 논의가 더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90년대부터 시각장애인들도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 중반에는 컴퓨터가 지금보다 훨씬 고가의 물건이었고, 컴퓨터의 기본적인 사용법부터 따로 강사 선생님에게 배웠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화면에 출력되는 내용을 읽어 주는 기능을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운영 체제에 따라 그 이름과 기능은 달라져 왔지만 기본 틀은 같다.


다시 컴퓨터를 배우던 초등학교 당시로 돌아와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고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가르쳐 주신 간단한 게임이 내 인생 첫 게임이었다.


90년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했던 게임들을 생각해 보면 음성을 들으며 할 수 있는 기억력 테스트 게임이나 숫자를 맞춰서 판정하는 야구 게임, 청기 백기 게임 같은 것들이었다. 그 외에 PC 통신을 다룰 줄 알던 사람들은 현재의 MMORPG 게임의 원형 중 하나가 되는 텍스트 머드 게임을 즐기기도 했는데,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비시각장애인들이 화려한 그래픽과 더 다양한 기능이 지원되는 다른 게임으로 떠나간 뒤에도 시각장애인들은 여전히 머드 게임을 활발히 즐기고 있다.


그 외에도 체스나 윷놀이, 트럼프 등 보드 게임이나 카드 게임을 PC로 이식한 게임들을 즐기기도 했는데, 오히려 윈도우즈 운영체제가 보편화되고, 모바일로 환경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게임을 시각장애인들이 즐기기에는 더더욱 어려워진 것이 안타깝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애플에서 자사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낭독 기능인 보이스오버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하면서 시각장애인들도 스마트 시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모바일 게임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거의 없었다. 2010년대 이후에 시각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오디오 게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소리를 듣고 적의 위치를 파악해 물리치는 대전 액션 게임이나 RPG부터 TCG 게임, 퍼즐 게임, 리듬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등 그 장르도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게임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외국 제작사에서 만드는 게임들이라 영어 정도만 지원할 뿐이라 플레이를 하다 보면 게임을 하고 있는지 듣기 평가를 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게다가 시각장애인, 그 중에서도 PC 및 모바일에 익숙한 일부 사람들을 고객층으로 하다 보니 시장 규모가 작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게임들은 대부분 소규모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디오 게임 외에 즐길 수 있는 게임들을 돌아보아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텍스트 위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웹게임이나 일부 모바일 게임인데 이마저도 대부분 영어 게임들이다. 번역기 돌린 수준이라도 한국어 지원을 해 주는 게임마저도 드문 실정이다.


사실상 2022년 현재 한국어로 시각장애인이 제대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현재 서버가 살아 있는 텍스트 머드 게임들을 합쳐 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적으니까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오디오 게임 등은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일까? 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현재 장애인들은 게임보다도 당장의 생존에 더 밀접한 생존권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 접근성 관련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2021년도에 국회에서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하태경 의원 "게임법에 장애인 접근성 향상 넣고 가이드라인 개발하자“ - 디스이즈게임 https://m.thisisgame.com/webzine/nboard/4/?n=123269)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문제가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냐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은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게다가 최근 떠오르고 있는 메타버스 또한 게임의 방식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은 이미 생활의 문제가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또한 다양한 게임들을 거쳐 오며 시각장애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줄타기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앞서 시각장애인이 한국어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고 언급했는데, 거기서 ‘정식으로’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면 그 개수는 더더욱 줄어들게 된다.


정식으로 플레이를 할 수 없어 개인 개발자가 개발하는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활용하여 플레이하거나, 우연히 어느 정도 플레이는 가능하지만 일부 기능은 화면 낭독 기능으로 제대로 접근조차 되지 않아 현금 결제를 하고도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되는 오디오 게임들 중에서도 다른 유명 게임의 게임 방식 등을 거의 그대로 베껴 오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라도 명성만 들어 보았던 유명 게임을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게 게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강한 유혹이다. 또한 일부 게임의 비인가 접근성 모드를 플레이하다 보면 제작사 차원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에 대한 논의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적절한 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 강제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로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게임 업계의 인식이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플레이 가능한 게임이 극단적으로 적은 이유는 물론 기술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게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과 함께 뒤따라야 할 것은 인식의 변화이다.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소수이지만 그런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반지하게임즈에서 제작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서울 2033〉의 예를 들고 싶다. 〈서울 2033〉은 출시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일부 용감한 시각장애인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레이를 시도해 본 결과 관리해야 할 중요한 수치를 읽어 주지 않아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기본적인 플레이 자체는 가능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앱스토어에 리뷰를 남겼는데 제작사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주셔서 지금까지도 접근성 관련 업데이트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지하게임즈의 다른 텍스트 게임에도 아이폰의 보이스오버와 안드로이드의 토크백 접근성이 반영되고 있다.


사운드도 없고, 글도 많은데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는 모바일 인디게임서울2033 - 스브스뉴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30699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 관련 개발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2033〉은 텍스트 기반으로 선택지를 고르면 그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방식의 게임이다. 즉, 복잡한 조작이 필요 없다. 개발 엔진도 일반적인 게임 엔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보이스오버로 어설프게나마 플레이가 가능해 개발사에 건의라도 해 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건의에 응답해 준 것은 결국 개발사의 의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반지하게임즈에서 시각장애인이 무슨 게임이냐며 무시했다면 지속적인 시각장애인 유저들의 플레이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나 또한 공모전에 참여해 스토리 작가로 활동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서울 2033〉의 보이스오버 접근성은 완벽하지 않고,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종종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련 건의를 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모습을 꾸준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유저들 사이에서 〈서울 2033〉은 여전히 활발하게 플레이되고 있다.


* 〈서울 2033〉에 적용된 보이스오버 접근성 시연 영상.

또 한 가지 사례로 XYRALITY에서 개발한 모바일 게임 〈성주와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주와 기사〉는 예전에 유명했던 웹게임인 〈부족전쟁〉과 비슷한 방식의 게임으로 자신의 성채를 키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평정해 나가는 게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유저들과 동맹을 맺기도 하며 경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방식의 게임은 지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니 시각장애인이 플레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재 나의 위치를 중심으로 거리를 제시하고, 좌표 개념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플레이가 가능하다.


〈성주와 기사〉의 사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서울 2033〉과 같이 소설과 비슷한 형식의 스토리 중심 게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게임들도 발상을 조금만 전환한다면 충분히 시각장애인들도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좌표 기능을 도입하고, 주요 지점이나 NPC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임의 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이 게임은 방식이 간단해 보이는데 버튼에 보이스오버로 접근만 되어도 플레이가 가능할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한두 번 들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플레이를 상정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동원되는 온갖 꼼수들을 보고 있자면 편견을 깨고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기술 발전이 언제나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실제로 장애인들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 시대보다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만 하더라도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너무나 빠른 기술 발전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약자들을 도태시키기도 한다. 무인 키오스크 앞에서 난감해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화려한 그래픽이 게임에 도입되기 이전, 텍스트 머드 게임이 주류이던 시절에 시각장애인 게이머들이 오히려 다른 비시각장애인 게이머들과 공감대를 더 많이 형성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비싼 슈퍼 컴퓨터 한 대보다 도로의 턱 높이를 낮추는 것이 휠체어를 탄 사람의 활동에는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서울 2033〉이나 〈성주와 기사〉 같은 사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는 명확하다. 시각장애인, 나아가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그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장애인의 각종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서는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 투자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편견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게임 속 세계에는 편견도 제약도 없다. 어떤 역경이라도 게임의 규칙 안에서는 넘어설 수 있는 난관일 뿐이다.


지난 1년 동안 아주 조금이지만 게임을 만드는 현장을 엿보면서 게임을 만든다는 일은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과 게임. 지금 당장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지지만, 게임을 만드는 분들의 열정과 아이디어가 모인다면 언젠가 그 두 단어의 조합도 자연스러워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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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게임즈 스토리 작가)

게임에 관심이 많은 시각장애인입니다. 현재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하는 동시에 반지하게임즈의 게임 스토리 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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