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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룡풍운록>을 통해 보는 무협추리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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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8. 10.

2024년 2월, 허뤄스튜디오(Heluo Studio, 河洛工作室)의 신작 게임 <고룡풍운록>(古龙风云录)이 발매됐다. 허뤄의 전작인 <하락군협전>(河洛群侠传), <협지도>(侠之道), <천외무림>(天外武林) 등과 비슷한 무협 게임이다. 전작들과 다른 점은 무협 추리게임이라는 점이다. 협객들은 무림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조사에 나섰고, 그 수사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고 이를 풀어나간다.


액션어드벤처나 일본식 롤플레잉 등 명성 높은 장르들에 비해 무협 추리게임의 파급력은 아직 더 커져야 한다. 하지만 이 장르 역시 지난 수년의 개발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출시된 바 있다. 예를 들어 <고룡풍운록> 시리즈 이전부터 논리적 사슬이 뚜렷하고, 낱낱이 파헤치는데 집중하는 <묵영협종 墨影侠踪>, 방탈출에 특화돼 있는 <협은행록: 딜레마 의혹>(侠隐行录:困境疑云, Wuxia archive: Crisis escape), 증거 제시를 강조하는 <천명기어>(天命奇御, Fate Seeker) 시리즈 등이 있었다.


<고룡풍운록>은 무협과 추리를 어떻게 결합시켰을까? 이 무협 추리 게임은 어떤 역사가 누적돼 탄생한 걸까? 어떻게 해서 과거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혁신할 수 있었는가? 이 글은 <고룡풍운록>의 내용, 역사적 맥락, 혁신적인 디자인 및 윤리 개념의 4가지 관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 게임의 핵심을 보여주고자 한다.

 


<고룡풍운록> 사건의 제재 선택과 추리 메커니즘


<역전재판> 시리즈, <단간론파(弹丸论破)> 시리즈 등 전통적인 추리게임에서는 추리과정에서 오답을 내린 횟수가 너무 많거나 키포인트에서 오답을 내리면 플레이어가 패배의 결말에 접어들게 되면서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반해 <고룡풍운록>의 추리는 다르다.


예를 들어 <고룡풍운록> 1장 에피소드 ‘싱화촌(杏花村)’에서 강남 주씨 가문의 집사는 자신의 하인이 살해됐다는 점과 그 옆에 무림 인사의 시신 한 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현장에는 ‘초류향(楚留香)’이라는 무림인사가 돌아다닌다. 무협소설가 고룡(古龍)[1]의 작품에 정통한 사람들은 초류향이 풍류괴수(风流盗帅)로서 항상 협객과 의리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왔다는 것, 절대로 재물에 눈이 먼 도둑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초류향전기>(楚留香传奇) 시리즈를 읽지 않았거나 추리물의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기를 바란다면 초류향이 살인을 통해 보물을 빼앗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추리 시스템은 <고룡풍운록>의 중요한 요소지만, 게임의 핵심은 아니다. 추리에 실패해도 극의 서사는 계속된다. 초류향은 직접 주씨 가문 집사를 공격하고, 그의 몸에서 증거물을 찾아내 진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강호는 결국 무공 승부로 문제를 해결했으니, 설령 추리에 성공하더라도 상대방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4장에서 주인공은 강별학(江别鹤)의 모략을 모두 들춰내지만, 그를 단죄하지 못한다. 폭로 직후 증거물에 불을 지르고 목격자와 주인공의 추리에 공감하는 무림인사들을 암살할 계획을 미리 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반칙으로 인해 주인공 역시 칼과 주먹으로 ‘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추리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에, 추리 보상으로 진실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과 NPC가 자신의 동반자가 된다. 예를 들어 강남의 주씨 집사 사건에서 진실을 감추고 추리하면 캐릭터의 속성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아이템 ‘지혜의 열매(智慧果)’ 2개를, 일부만 추리하면 '지혜의 열매' 1개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만약 너무 많은 단서를 놓치거나 초류향이 돈의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되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항저우의 ‘멸문(灭門)의혹 사건’에서 ‘악랄한 방법으로 사자를 죽여 항저우를 도모하려 한’ 음모를 밝혀내면 삼향(三湘; 후난의 옛 별칭)의 맹주 ‘철무쌍(鐵無雙)’이 주인공 팀으로 합류해 주인공들이 대장을 맡고 있는 ‘인의장(仁義庄)’의 실력을 끌어올리게 된다.


* 음모가 들통나자 강별학은 증거물을 불태우고 주인공 일행을 불태우려 한다.

 

사실과 논리를 뛰어넘는 무공의 중요성은 <고룡풍운록>이 턴제 롤플레잉 게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배경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추리게임에서 추리는 사법기관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야기가 일어나는 역사적 시기와 장소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루는 사법기관과 추리하는 장소가 다르다. <벚꽃재결>(樱花裁决)에서는 마치부교(町奉行)와 신센구미(新选组)가 에도의 부교소(奉行所)에서 일이 벌어졌고, <역전재판>(逆转裁判)에서는 나루호도 류이치(成步堂龙一), 오도로키 호스케(王泥喜法介)가 일본 법원에서 변론이 이뤄졌다. 또, <양쯔강의 살인>(山河旅探)에서는 심중평(沈仲平)이 청나라 말기 관아 안에서 추리했으며, <고바야시 마사유키(小林正雪) : 비밀의 방의 복수> 시리즈에서는 경찰인 고바야시 마사유키가 현장 수사에서 용의자와 대치한다. 그러나 <고룡풍운록>의 추리 과정에서 관아는 배경일 뿐이다. 단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이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항저우 멸문의혹 사건’에서 ‘강남 협객’ 강별학과 ‘애재여명(愛才如命)’ 철무쌍은 각자 자기 주장을 고집하며 옥신각신하고, 당사자든 방관자든 관청의 개입을 요청하려 하지 않는다.


가공의 역사를 선호하는 김용과 달리 <고룡풍운록>은 구체적인 역사 속의 왕조와 실제 역사 속 인물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이야기가 발생하는 시간을 종종 모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봉무구천>(陆小凤传奇之凤舞九天)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丰臣秀吉) 일본 태정대신이 등장하고, <창공신검>(苍空神劍)에는 강희황제(康熙皇帝)가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그 시기를 고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풍운제일도>(风云第一刀) 주인공 이심환(李寻欢)은 ‘꽃을 탐내는 이씨’로 불린다. 이를 근거로 미뤄볼 때 그는 과거제도가 있던 시대, 즉 수나라에서 청나라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자세한 상황은 고증이 어렵다. 따라서 철도나 전신과 같이 분명 근대에 존재했던 사물이 아닌 한, 이야기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요소들은 특정 기술이 발명됐는지, 혹은 특정한 기물과 재료가 중국에 도입됐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활용할 수 있다.

 


무협 추리물의 발전 과정


무협 추리의 역사는 명청시대 ‘공안소설(公案小说)’과 원나라 잡극(元杂剧) 중 ‘공안희(公案戏)’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용도공안>(龙图公案)은 포증(包拯)이란 인물이 “재물을 탐내 살인하고, 세력에 기대 사람들을 능멸한 절도 및 사기 등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제사공안>(诸司公案)은 법의학 지식을 이용해 시체를 부검한 사안에 대한 이야기다. <염명공안>(廉明公案)은 판관의 관료 신분과 권력의식을 강조하고, 이들이 지극히 미세한 것까지 빈틈없이 살펴 절도와 살인, 혼인 등 사건들을 판결하는 이야기다. 공안소설의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데, 추리 및 사건 해결류만이 아니라, 사건·재판·형량에 관한 갈래들이 있을 정도다. <홍루몽>의 경우 “가련(贾琏)은 직위가 박탈되고 면죄부를 받아 석방됐다”고 적혀 있다.


공문 장르 작품들의 특징은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은 강도나 토비 때문이거나, 탐관오리 때문이거나,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살인, 방화나 그밖에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일이 번지면서 청렴한 관리가 공정하게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상형공안>(详刑公案), <율조공안>(律条公案), <명경공안>(明镜公案), <신명공안>(神明公案), <상정공안>(详情公案) 등 대부분이 이와 같다. “모든 작품들은 스토리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심리와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안건을 판결하는 관원들의 세련됨을 높이 평가한다.”[2]


공안소설과 공안희를 바탕으로 관료 중심의 서사를 돌파한 고룡의 작품은 협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무협추리라는 장르를 빛냈다. 협객 자체가 사건을 수사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사에서 한 수 아래일 때도 있는 게 당연하다. <육소봉전기의 봉무구천>에서 주인공 육소봉(陆小凤)은 목도인(木道人)의 계략에 걸려 석안(石雁)의 자금관(紫金冠)[3]을 얻는 데 이용된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할 의무는 없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건을 수사한 협객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게다가 협객들은 비록 주먹을 보탤 친구가 있지만, 자신의 무공으로 도전과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관방은 공식적인 폭력기관처럼 수배령을 내리고, 해적 문서를 발부해 인해전술을 통해 범죄 용의자와 겨룰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추리물에 스릴과 심금을 울리는 색채를 더 하게 된다.


20세기 후반 고룡은 결코 무협 추리물의 기수가 아니었다. 김용의 <설산비호>(雪山飞狐)나, 윈루이안(温瑞安)의 <4대명포>(四大名捕) 시리즈 등 다른 무협 작가들도 관련된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고룡은 그의 작품의 문학성과 영화화 각색의 전파력 덕분에 이 장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작가가 됐다. 무협 추리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육소봉전기> 시리즈와 <초류향전기> 시리즈다. 두 시리즈는 수준이 다르고, 심지어 그 중 일부 대목에서는 제3자 대필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무협소설 독자들의 공통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명검풍류>(名剑风流), <대기영웅전>(大旗英雄传), <혈앵무>(血鹦鹉)에도 무협추리 요소가 포함돼 있다.


<고룡풍운록>은 전작에 비해 현대적인 증거 수집과 추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두아원>(窦娥冤)에서 판결을 맡은 태수 도올(桃杌)은 증거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심지어 모든 증인을 찾아가 증언을 듣지도 않은 채 판결을 내리는 등 경솔하게 행동한다. 고룡의 작품에서 협객은 직관과 우연의 일치에 의존하는데, <육소봉전설의 금붕왕조>(陆小凤传奇之金鹏王朝)에서는 곽천청(霍天青)과 청풍도인(青枫道人)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진술이나 부검 없이 진행한다. 이익을 거둔 자들에게 동기가 있으리라는 판단과 범인의 자백을 근거로 삼을 뿐이다. <고룡풍운록>에서 사건은 인적 증거와 물적 증거를 모두 갖추고 있다. ‘양란풍운기(扬澜风云起)’ 사건에서는 소낭자(娘子), 라오리, 괴이한 낭중(郎中), 대장장이, 샤오리, 미치광이, 마을 주민, 검은옷을 입은 소녀 등 8명의 증인을 조사하여 10년 전 사건에 대한 추리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각 증인이 보는 사건의 진상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모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플레이어가 두 개의 관련 단서를 조합한다고 해도 확실한 관점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두세 가지 가능한 설명 중 적절한 추론을 선택하여 여러 추론이 공통된 결론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 조사 탐방 후 강별학(江别鹤) ‘멸문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모습

 


<고룡풍운록> 개발의 득과 실


그동안 많은 추리게임들, <역전재판> 시리즈나 <양쯔강의 살인>은 모두 핵 앤 슬래시(hack and slash) 게임의 생명치와 유사한 카운터를 화면에 표시했다. 만약 플레이어의 추리에도 불구하고 목격자, 검사, 피고인을 타격시키는 허점이 없다면 ‘생명치'가 손실된다. 게임 스토리에서 이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추리가 엉뚱하거나 허를 찌르는 것으로 해석되고, 다른 사람들은 플레이어 캐릭터에 대한 인내심을 잃는다. 판사나 심리를 책임지는 그밖의 담당자가 인내심을 소진해버리면 플레이어 캐릭터는 다시 추리하더라도 자기 판단을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현 사건의 잠정적 추론은 최종 결론과 판결의 근거로 확정된다. 이 규칙의 설계는 실생활에는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몰입도 측면에서 볼 때, 게임 속 추리에서는 플레이어가 궁거법(Proof by exhaustion)[4]을 활용해 시행착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한다.


<고룡풍운록>과 달리 단서를 조합해 추리하는 과정은 주인공의 사고과정과 같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증인·증거를 조합하더라도 여론의 추궁을 받지는 않는다. 즉, 플레이어는 궁거법을 활용해 관련될 수 있는 모든 단서를 얼마든지 클릭해볼 수 있다. 본작의 가장 복잡한 단서인 지령장(地灵庄) ‘멸문 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단서가 제대로 수집되면 10분도 채 안 돼 궁거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시도됐던 단서의 조합은 아이콘 밝기가 변화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아직 열거한 적 없는 게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룡풍운록>에서 추리의 주된 어려움은 단서를 어떻게 사용해 허점을 찾고 진실을 파헤치느냐가 아니라, 단서를 어떻게 수집하느냐에 있다. <역전재판>처럼 관심이 많고 추리만 주목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법정 밖 어딘가로 가는 것은 증인·증거물을 모으기 위함이다. 따라서 필요한 수집이 완료되면 이야기는 바로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고룡풍운록>은 그렇지 않다. 가령 ‘악인골 소마성 사건’, ‘강남 주씨 가문 집사 사건’에서 초반부 수수께끼의 단서 수집 범위는 한 장면에 한정돼 있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멸문 의혹 사건’과 같은 후반부 수수께끼에서는 조사 범위가 항주성 전체로 변경된다. 이 도시에서는 줄거리 말고도 <육소봉전기의 은갈고리 노름방>(陆小凤传奇之银钩赌坊) 속 은갈고리 노름방, <육소봉전기의 자수대도>(陆小凤传奇之绣花大盗)의 침술가 설씨, <절대쌍교>(绝代双骄)의 헌원삼광(轩辕三光)[5], <7종 무기>(七种武器)의 ‘장생검(长生剑)’ 백옥경(白玉京), 지령장 입구의 ‘사자 퀴즈’,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특수 계란 수집’ 등 다양한 미션들이 있다. 이 서브 서사들의 미션·수집·전투 역시 강호의 일부였다. 미션에 대한 힌트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하는 NPC와 위치에서 모든 단서들을 수집하고 완벽한 추론을 도출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다.


다른 무협 추리게임들과 비교해 <고룡풍운록>이 만들어내는 판타지 세계는 <묵영협종>이나 <천명기어> 같은 오리지널의 세계관이 아니라, 고룡 작가가 쓴 여러 편의 작품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세계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것은 게임 원작과 원작 소설 캐릭터 및 줄거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게임의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면 <고룡풍운록>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룡의 소설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속았다고 항의하게 만들 것이다. 반면 게임의 대부분이 원작 내용이고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적다면, 원작을 읽으면 그만이지 왜 돈을 주고 게임을 사야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을 피하기 어렵다.


* 배후세력은 동경(东景)으로 돌아가 자신의 음모를 이야기한다.

 

<고룡풍운록>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추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사건을 다른 갈래로 끌고 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백리장청(百里长青)이란 인물의 ‘오견정기양(五犬旌旗扬)’ 사건과 철무쌍의 ‘멸문 의혹 사건’이 있다. 고룡이 쓴 <7종 무기의 패왕총>(七种武器之霸王枪)에서 정희(丁喜)는 ‘신권소제갈(神拳小诸葛)’ 등정후(邓定侯)를 설득해 '복성고조(福星高照)'를 동경으로 돌려놓으려는 음모를 파헤치고, 백리장청을 구한다. 반면 게임에서는 이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뉜다. 플레이어가 정희를 믿기로 택할 경우 이야기는 원작과 동일하게 전개된다. 만약 플레이어가 패왕총의 전사 왕성란(王盛兰)을 믿으면, 동경으로 돌아가는 음모에 걸려들게 되고, 대보탑(大宝塔)에서 백리장청과 싸우게 된다. 결국 동경으로 돌아가는 걸 꺾을 수 있지만, 백리장청은 함정에 빠져 죽는다. 이렇게 되면 원작 소설을 읽은 플레이어는 원작에서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고,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물건을 운반해 훔치거나 신분을 위조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단서 추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고룡풍운록>의 무협 추리가 이채롭기는 하지만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점 중 하나는 고룡의 원작 소설 속 추리를 계승하거나 따르는 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게임의 오리지널 캐릭터는 많지 않다. 주인공 진우(辰雨)를 제외한 십여 명의 컨트롤 가능한 캐릭터들은 모두 고룡 원작 소설 속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원작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화려하지 못하다. 사실 고룡은 이미 많은 인물들의 포인트를 보여줄 수 있는 시범을 보였으니, 이대로만 구현하면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심환, 강소어(江小鱼)의 서사가 꽤 온전하다는 것 외에 다른 많은 캐릭터들은 아쉽다. 게임 속에서 설아(雪儿)가 땅굴을 파내는 데 도움을 주는 시퀀스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 얽힌 서사의 핵심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상관인 단봉(丹凤)과 비연(飞燕)의 의심이나 천금문(天禽门)과 호휴(霍休)의 계략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육소봉전의 금붕왕조> 서사를 읽어보지 못한 플레이어들에게 이 서브 서사는 뜬금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초류향전기> 시퀀스에서는 미모의 여사친 소용용(苏蓉蓉), 이홍수(李红袖), 송아(宋甜儿)는 물론이고, “기러기와 나비는 두 날개로 날고, 꽃향기는 세상을 가득 채운다”의 희빙안(姬冰雁)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룡풍운록>의 또 다른 단점은 추리 요소가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하긴 하지만 게임 메커니즘의 혁신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내용상에서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인의장의 ‘진우’는 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진 협객일 뿐, ‘강남 협객’ 강별학과는 비교도 안 되고, 나약하고 평범한 전형으로 여겨져 온 ‘흥운장주(兴云庄主)’ 용소운(龙啸云) 역시 강호에서의 위상이 훨씬 높다. 그러나 각 문파의 제자들이 단서를 물었을 때, 금품을 요구하지도 않고, 임무를 부여하거나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직접 진을 치지도 않는다. 그저 무기를 쓰거나 권법을 나누는 모습은 너무 얌전해 보인다.


 

진상이 드러난 후 : 무협 추리게임의 윤리관


무협 추리의 선구자 고룡의 소설은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관헌을 다루더라도 강호 인사들의 시각으로 전시되는 경우가 많다. 강호 사람들의 생각은 관청이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자수대도> 속 여섯 문명은 금구령(金九龄)을 잡을 때, 강도 사건을 당했을 때, 재빠르게 체포하고 단서를 구하지 않는다. 현상금 고지서나 체포영장을 발부하지도 않는다. 고과대사(苦瓜大师)의 방에 가서 육소봉에게 사건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 뿐이다. <육소봉전기의 결전전후>(陆小凤传奇之决战前后)에서 자금성의 몇몇 고수들은 수천 명의 금군(禁军)을 소집하지만 결국 육소봉이 엽고성(叶孤城)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비록 이후의 무협 추리물이 반드시 이러한 설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겠지만, 고룡 소설의 캐릭터와 인물은 의심할 여지 없이 21세기 무협 추리물의 정신적 계몽이다.


추리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협 추리 게임은 미세한 단서를 보고 그 발전 방향이나 문제의 본질을 인식해, 낱낱이 파헤치는 사안 탐색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증인 신문과 증거물 조사, 시신 검안 등을 통해 진실을 탐구한다. 하지만 고룡의 무협소설 세계가 지닌 독특한 윤리관을 감안할 때, 진실을 파헤친 뒤에는 대처방식이 제각각이다. 진실에 대한 태도 역시 ‘무협’이 앞서며, 묘당이 아닌 강호의 방식으로 진실을 찾아낸다. 이런 점은 <용투공안>(龙图公案) 등 명청시기의 공안소설 작품들과 크게 다르다.


이런 윤리관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매직서클(魔环, Magic circle)’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매직서클 이론은 네덜란드 역사학자이자 게임연구의 창시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는 게임이 판타지 세계와 현실세계 간의 의식적인 개념의 경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킨다. 게임의 규칙이 제한하는, 마치 마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서는 일상 생활의 익숙한 규칙과 현실이 일시정지되고, 대신 게임의 규칙과 허구의 현실이 등장한다. 이 공간에서 플레이어의 행동은 게임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변화는 게임이 어떻게 현실에서 고유한 환경을 조성하는지 강조하고,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고유한 규칙과 내러티브를 탐색하고 시도하고 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자유롭고 의미 있는 활동임을 보여준다. 무협 추리 게임의 서사, 캐릭터, 룰은 이러한 매직서클을 만든다. 이는 플레이어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복잡하게 변화하는 정세, 정의를 위해 싸우는 숭고한 무협세계에 진입해 검과 그림자가 빛나는 협객의 세계에서 색다른 놀이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무영협종>의 핵심은 ‘정치’에 있다. 무협 추리의 독보적인 존재인 <묵영협종>은 전투 시스템이 부재한 것은 물론이고, 주인공 자신도 무공을 할 줄 모른다. 주인공이 위치한 ‘임연각(临渊阁)’ 에피소드에서 첫 사건은 강호문파와 조정 간의 분쟁이다. 진실을 밝히면 수많은 살상이 이뤄지고, 진실을 숨기려 하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다. 이후 여섯 문파와 금의위(錦衣衛)가 연이어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사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피신하는 것 역시 정치인들의 도구로 쓰이지 않으려는 속셈이다. 결말은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의 봉기와 관련된 여러 분쟁들이다. 진실을 말하더라도, 쟁투하는 쌍방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조정은 사람을 죽이고 입을 막을 수 있고 협객은 판결장을 공격할 수 있다. 진정한 정의는 법정에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


<천명기어>의 핵심은 ‘용서’다. 진실이 밝혀진 뒤에는 악당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든 어쩔 수 없었다거나 자기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핵심 빌런 마니교(摩尼教)의 주요 두목 ‘마니구사(摩尼九使)’다. 게임 속 여러 악당들은 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악을 버리고 선행을 택한다. 예를 들어 궐창매(阙苍鹰)는 점창파(点苍派)에서 대협 양인호(粱人昊)의 사제였다. 그는 사부가 자신의 선배 양인호를 편애한다고 오해한 나머지 마교에 가담하게 되고, 한때 자신의 사매이기도 했던 주인공의 숙모를 살해한다. 해피엔딩에서 그는 자신이 스승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사부는 줄곧 그를 보살펴왔고, 그를 의발(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바리때)의 후예로 삼고 싶어 한다. 결국 궐참매는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고치고, 다시 위험을 극복해 어려움을 구제하는 길로 들어섰다. 또, 상관인 홍령(虹伶), 호소방(虎啸帮)의 방주로서 소림사(少林寺) 스토리에 이어 주인공의 여사친 형약앵(刑若樱)을 모략한다. 게임의 DLC 버전 <복호미종>(伏虎迷踪)에서 플레이어는 옛 하인의 편지 수수께끼에 남겨진 메시지를 통해 그녀가 멸문당해 어쩔 수 없이 금단(金丹)을 입고 수련한 뒤,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미쳐버려 강자에게 도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에게 피맺힌 원한을 따지기보다 그녀와 자주 겨루어 다시는 강호에서 말썽을 피우지 않게 한다.


<고룡풍운록>의 핵심은 ‘의리’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드러나는데, 우선 재수사의 동기는 ‘의리’이며, 두번째로 의기에 부합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셋째, 진상규명 이후의 처리 방식은 ‘의리’에 있다.


동기의 관점에서 보면 인의장 장주 심천군(沈天君)이 마교에서 길러낸 소년 자객 진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든 내러티브 역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원동력은 진우가 당시 심천군이 왜 회안봉(回雁峰)에 실종됐는지, 나아가 회안봉에 대한 소문이 셀 수 없이 많은 협객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굳이 조사하지 않더라도 진우와 인의장 책임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심천군은 떠나기 전에 진우에게 손을 쓰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고, 강호의 도의를 위해 연회를 열어 강호 사람들을 불러 이 해묵은 사건을 조사한다.


과정을 통해 보면 협객의 수사기법은 대의명분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항저우 멸문 의혹 사건’에서 진상을 추리하려면 ‘도사’ 초류향이 관련 증인에 대한 몸수색을 해야 한다. 현대의 사건 처리 방식대로 공무를 수행하는 경찰(이야기상에서는 아전이나 포졸)이 처리하도록 한다면, 증인들은 자신이 의심 대상이 됐음을 알게 할 것이다. 경공(轻功)으로 도주하면 사건이 죄에 대한 추궁 없이 종결되거나 미해결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혹은 그들이 강렬한 외공내경(外功内劲)을 믿고 증거를 인멸하여 증거를 대조할 수 없게 할 수도 있다. 사건 결과를 통해 이런 도적 행위는 진상을 밝히고 멸문 의혹 사건의 진범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협세계에서 친구 간 의리의 우선순위는 사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 진우는 임선아(林仙儿)가 쾌활왕좌(快活王座) 아래의 주색잡기 4인 중 ‘색사(色使)’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심환과 아비(阿飞) 간 의리를 위해 그녀의 죄를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임선아에게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고치라고 호통친다. 백비비(白飞飞)가 겉으로 드러나는 의지할 곳 없는 여자가 아닌 유령궁주(幽灵宫主)임을 알게 된 후, 그녀와 심랑(沈浪)의 관계를 고려해 주인공 대오로 합류시킬 수 있게 된다. 비록 운몽선자(云梦仙子)가 주인공 대오에게 ‘천운오화면(天云五花绵)’이라는 기괴한 독약을 쓰지만, 그녀를 격퇴한 후에는 그녀가 대오 멤버 왕영화(王怜花)의 어머니라는 것을 고려해 용서받게 된다. 쾌활왕좌 수하 ‘재사' 금무망(金无望)은 종종 납치하겠다는 협박으로 돈을 벌지만, 주인공 대오에 합류해 안봉(雁峰)으로 돌아가는 진실을 찾게 될 때, 과거의 죄악은 묻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의리가 구하하는 행동이 반드시 합법적이거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다정검객 무정검>(多情剑客无情剑)에서 이심환은 용소운과의 의리를 위해 자신의 연인 임시음(林诗音)을 용소운에게 넘겨주고, 거액의 재산을 헌납하고 스스로 관외로 떠난다. 그러나 이 작전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심환·임시음·용소운(龙啸云)·용소운(龙小云) 등 네 사람을 수년간 괴롭힌다. 하지만 의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윤리관 덕분에 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전해져 <고룡풍운록>에 재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룡풍운록>의 가치관이 ‘의리’를 핵심으로 삼은 것은 무협 작품의 정신적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협객의 행동 패턴은 당대 사회 질서와 종종 모순된다. 무협이란 집단은 통치기관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출현했다. 따라서 무협작품에는 통치기관의 이미지가 흐릿하거나, 등장하더라도 지배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에서 장무기(張無忌)는 명교(明敎)의 영웅들을 규합해 만안사(万安寺)로 가서 6대 정파를 구출한다.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에서 곽정(郭靖)은 칭기즈칸의 아들 툴루이칸의 의형제였지만, 문제 해결은 주로 항룡십팔장(降龙十八掌), 구음진경(九阴真经), 공명권(空明拳) 등에 의존했지, 행군 작전이나 성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소오강호>(笑傲江湖)에서 유정풍(劉正風)은 삼품참장(三品參將)이 되어 금분(金盆)의 손을 씻으려 하지만 조정은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 주되게 묘사하는 것은 강호의 이야기다. <고룡풍운록>에서도 이와 같다. 강호의 전설에 의하면 쾌활왕좌 휘하의 색사가 여성들을 노략질했을 때, 강호의 반응은 흥운장주 용소운(龙啸云)이 조정의(赵正义), 강별학, 상관 금홍 등 고수들로 하여금 진을 쳐달라고 요청했다. 관청이 나서지 못하거나 작은 도움만 줄 수 있는 상황에서 의협심을 펼치려는 사람이 있느냐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룡풍운록>으로 시작되는 영웅 연회에 이심환, 심랑, 육소봉, 초류향이 오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협객은 절차적 정의와 결과적 정의 중 결과적 정의를 우선시한다.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무협 작품에서는 통상 악인들은 벌을 받고, 선은 악을 이긴다. 좋은 사람은 횡포하고 악인을 물리쳐 선량한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묵은 억울함을 벗어나게 된다. 수완은 그 다음 문제다. <절대쌍교>에서 강소어는 비약에 의지해 진실을 말하고,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공손녹악(公孙绿萼)’은 ‘양과(杨过)’를 위해 ‘절정단(绝情丹)’을 훔친다. <천룡팔부>(天龙八部)에서 ‘허죽(虚竹)’은 어둠의 기술 ‘생사부(生死符)’로 정춘추(丁春秋)를 제압한다. 따라서 이 무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룡풍운록>은 ‘회안봉의 재연을 막다’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기선을 잡기 위해 서둘러 무림 인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막고 어떤 방법으로든 장보도(藏宝图)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있는 보물지도 외에도 수수께끼를 풀고 상인을 찾아 사들이고, 다른 협객들을 직접 빼앗는 방식으로 장보도를 얻을 수 있다. 아미산(峨眉山)에 도착하면 무림 인사들에게 하산하자고 설득하기 위해 거짓말과 공갈, 뇌물 매수, 주먹질, 발길질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개방(丐帮)의 서브 서사 ‘옥면요금신의 구원’(玉面瑶琴神救援)에서 주인공 일행은 귀신 행세를 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금불환(金不换)의 음모를 무너뜨린다. 즉, 의협심이라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수단이 떳떳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또, 재판과 판결 집행에 있어서도 무협추리는 다른 추리와는 사뭇 다른 수단이 있다. 무협 세계는 세 가지 이유에서 불안정하다. 첫째, 때때로 성문법이나 판례법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중시한다. 가령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강남칠괴(江南七怪)’ 중 몇몇 스승들이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십(十)’을 보면 황약사(黄药师)가 손을 쓴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다. 고룡의 <절대쌍교>에서 철무쌍은 ‘멸문 의혹 사건’으로 강별학 부자에게 화를 전가당하게 되고, 한을 품고 죽게 된다. 강소어는 강별학의 계략을 알아차리지만, 강호의 신분차이가 워낙 커 악인골 출신임을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경공을 펴 달아난다. 둘째, 공안극과 공안소설의 줄거리와 달리 무협작품은 진실이 밝혀지지만 증거가 없어 당사자의 진술에 의존하게 되거나, 이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을 범죄 용의자로 직접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육소봉전기의 금붕왕조>에서 사휴일(霍休一)은 청풍관(青风观)을 불태우면서 증거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육소봉전기의 유령산장>(陆小凤传奇之幽灵山庄)에서 목도인은 죽은 척하여 몸을 빼낸다. 이로 인해 그 자신 말고는 그가 범행에 찌든 ‘늙은 칼자루(老刀把子)’라는 사실을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 셋째, 전통적인 추리물에서는 단서 찾기와 수수께끼 풀기, 진상규명이 관건이다. 그 때문에 폭력은 자유자재로 등장한다. 아서 코난 도일의 <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에서 보헤미안 왕은 도둑을 보내 아이린 애들러의 집을 수색해 짐을 바꿔치기한다. 그녀가 가는 길을 막고 강탈하기도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는 허클리 폴로가 범인의 범행 사실을 밝히자 범인은 바로 죄를 인정하고 자살한다. 하지만 무협 세계에서는 추리 외에도 무공을 겨뤄야 한다. 가령 초류향은 수모음희(水母阴姬)나 석관음(石观音)과 대적해야 하고, 육소봉(陆小凤)은 금구령이나 비구니 무화(无花), 박쥐공자(蝙蝠公子) 원수운(原随云) 등과 싸워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기투합한 친구들은 전투에선 사람도 많고 세력도 큰 효과를 일으키면서 여론에서도 대의명분을 차지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무협 추리 게임은 세 개의 원류가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 무협 소재의 롤플레잉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무협 추리 작품의 문학적 전통이며, 세 번째는 근대 이래 무협 소설이 만들어온 독특한 가치관이다. <고룡풍운록>의 탄생 역시 이와 같다. 허루어 스튜디오(河洛工作室) 이전의 <협지도>(侠之道)나 <협객풍운전>을 비롯해 <선검기협전>(仙剑奇侠传), <검협정연>(剑侠情缘) 등 롤플레잉 게임들은 <고룡풍운록>의 기본적인 모험 업그레이드 프레임을 마련했다. 무협 추리물의 전통을 답습해 협객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명민한 무공과 눈썰미로 낱낱이 파헤치고 탐험한다. 고룡과 같이 유명 작가가 인구에 회자하는 무협소설은 검의 빛과 그림자, 은혜와 원한, 의리가 넘치는 낭만적인 무협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안에 담긴 의리지상주의적 가치관은 <고룡풍운록>의 캐릭터 형성과 줄거리 배치를 관통한다.


이 세 가지가 종합된 <고룡풍운록>은 독보적인 무협 추리물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도시 지도에서 대화를 나누며, 탐색과 전투를 통해 단서를 찾고 진실을 파헤친 뒤, 적을 격파하고, 심판과 집행을 통해 정의를 관철시킨다. 이런 융합의 과정에서 이뤄진 일부 설정은 다듬어야 하는 점들이 있지만, 원작에 대한 진지한 사고와 추리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 추리 게임과 다른 게임 시스템의 크로스오버는 매우 정교하다. 이는 많은 게이머들에게 수십 시간에 걸친 회상의 게임 경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래 무협 추리 게임 제작에 있어 매우 참고할 만한 모델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류동후이(刘东辉), 「’공안극’과 ‘공안소설’의 사법적 글쓰기에서 나타난 사회의식」(公案戏”“公案小说”的法事书写体现的社会意识), 『문학연구(文学研究)』, 2023. 9.
위샹더우(余象斗), 『诸司公案』, 베이징췬중출판사(群众出版社), 1999.
왕이원(王一雯), 「명청시대 공안소설 내러티브 변천의 이론적 의의」(明清公案小说故事流变的伦理意义), 『네이장사범대학학보(内江师范学院学报)』, 2023.
차오쉐친(曹雪芹) 저, 청웨이위안(程伟元)·가오어(高鹗) 정리, 「중국예술연구원 홍루몽 연구소(中国艺术研究院红楼梦研究所)가 교정한 “홍루몽”」,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学出版社), 2022.
스창위(石昌渝), 「명청시대 공안소설: 유형과 원류」(明代公案小说:类型与源流), 『문학유산(文学遗产)』, 2006.

[1] [역주] 대만 국적의 중화권 무협소설가. 고룡은 필명으로, 본명은 숑야오화(熊耀華)이다. 김용(金庸), 양우생(梁羽生)과 함께 신파무협소설의 거장으로 꼽힌다.
[2] 스창위(石昌渝), 「명청시대 공안소설: 유형과 원류」(明代公案小说:类型与源流), 문학유산(文学遗产), 2006.
[3] [역주] 보라색 금관. 고대 중국에서 남성 무사들이 머리를 묶는 데 사용했던 화려한 장식. 흔히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며, 주로 왕자나 젊은 장군이 착용한다.
[4] [역주]  어떤 조건을 토대로 답변의 대략적인 범위를 결정하고, 이 범위 내에서 모든 상황이 검증될 때까지 가능한 모든 상황을 하나씩 검증하는 추론 방식
[5] [역주] <절대쌍교>에 등장하는 악인 캐릭터. 악인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강제로 도박을 시키는 기행을 하는것 말고는 딱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악인이 아닌 사람들과 내기를 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어느 정도 의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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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 작가)

활동가, 작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국제연대와 사회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를 썼고,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와 <아이폰을 위해 죽다>(공역)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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