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연산장치와 확률이라는 조합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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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4. 10.
디지털게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이 매체의 물적 기반인 컴퓨터의 시작이다. 빠르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설계된 이 전자장치는 애초에 암호해독이나 탄도 계산 같은 전쟁 기술을 보조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는데, 그런 도구로 사람들은 놀이하는 방법을 찾아내 즐기고 돈을 번다. 전쟁용 전자장비를 활용해 만든 놀이들의 상당수가 전쟁과 전투를 재현하려 든다는 점까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컴퓨터 – 디지털게임이라는 물적 기반과 콘텐츠 사이의 관계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는데, 난수random number다. 디지털 기술 기반의 컴퓨터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난수 생성이 불가능한 장치다. 요즘은 듀얼코어 이상에서 몇 가지 방법으로 난수를 만드는 법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주어진 데이터를 신속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기에서 외부 입력 없이 자체적으로 랜덤한 수를 뽑아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컴퓨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디지털게임이라는 매체에서 난수는 결정적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난수를 만들 수 없는 기계를 딛고 성립한 매체에서 난수가 필수요소에 가깝다는 점은 이 매체의 근본에 운과 확률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달리 정리해보면, 결국 운과 확률로 만들어지는 게임의 흐름을 보조하기 위해 일련의 전자 연산장비가 도구로 활용된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디지털게임이 무작위의 결과물들만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이른바 AAA급 게임에 이르면 영화의 작법을 따라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를 쭉 따라가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이런 영역에서 디지털 주사위는 정해진 결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우연을 만드는 정도로 역할을 줄여나가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가 이른바 ‘게임만의 독특한 재미’를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이 주사위의 힘이 개입한다. ‘테트리스’에서 다음 블록이 예측되는 순간, 이 게임은 상황대처가 아닌 암기력의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액션 게임 등에서 확률로 표기된 치명타가 일정 타격 수마다 반복될 때, ‘하스스톤’ 같은 카드게임 류에서 카드 덱이 랜덤이 아니라 순서를 지정할 수 있게 될 때 이들이 가진 재미는 사라진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주사위의 개입을 통해 다양해진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곧 플레이어의 플레이 행위가 된다. 실재하는 우주와 세계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가상공간 안에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통제된 환경 안에서 디지털게임은 무작위 확률을 통해 상황을 ‘흩뜨러뜨린다’. 그리고 이를 정렬하고 재구성하여 주어진 과제를 클리어할 수 있을 만큼의 정돈을 만들어내는 것이 확률 개념을 상대할 때의 플레이가 갖는 역할이다.
이 때 디지털 주사위가 만드는 확률의 역할은 ‘모르는 영역’의 창조다. 확률을 통해 표현되는 디지털게임의 규칙들은 모두 ‘모름’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테트리스에서 다음 블록이 무엇이 나올지, ‘다크 소울’에서 보스가 다음 순간에 어떤 패턴으로 공격해 들어올지에 대해 디지털 주사위는 각 순간별로 플레이어에게 다음 순간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을 연출한다. 디지털게임 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늘어난 엔트로피를 줄여나가는 것이 플레이의 목적이 된다.
온라인 네트워크가 보편화된 이후의 디지털게임에서는 이 엔트로피값의 증가에는 주사위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추가되는데, 바로 플레이어다. 싱글 플레이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맞상대하게 되는 대전형 멀티플레이의 순간에는 디지털 주사위가 제공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모름’이 덧붙는다. 상대가 어떤 패턴을 익숙하게 쓰는지, 선호하는 캐릭터나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온라인 익명 매치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이 때의 랜덤성은 아마도 매치메이킹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느 정도 게임 결과에 따라 매기는 랭킹에 의해 기대승률 50%를 맞추는 보정이 이뤄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멀티플레이에서 내가 누구와 게임하게 될 지는 ‘모름’의 영역이다. 이 랜덤한 매치메이킹의 효과는 랜덤을 애초부터 잘 만들 줄 모르는 디지털 연산장치의 확률 제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모든 모르는 영역을 파훼하고자 하는 플레이어의 힘은 멀티플레이 영역에 들어오면서 사실상 영원히 상대적인 극복의 굴레에 들어앉는다. CPU가 만들어내는 제한된 랜덤 상황은 결국 고정되어 있고, 이는 어떻게든 파훼된다. 수많은 게임 플레이 경험이 누적되며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계속 향상되지만, 소프트웨어의 난이도는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난이도 – 숙련도 경합에서 난이도의 제시가 상대방 플레이어라는 주사위보다 더한 경우의 수를 가진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끝없이 향상되는 두 사람의 숙련도 덕택에 이 경합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순환의 고리를 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 연산장치는 굳이 ‘모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일을 더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맞는다.
‘모름’이라는 엔트로피를 기준으로 정리해 본다면, 그래서 디지털 주사위는 사실 사람 혹은 사건이라는 실제로는 훨씬 더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매우 낮은 레벨에서 재현해 낼 뿐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랜덤을 만들 줄 모르는 기계는 다른 매체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현실의 일부를 프로그래밍된 가상공간 안에 일부 재현할 뿐이다. 다만 통제된 환경 안에서 펼쳐지는 아주 작은 수준의 경우의 수는 오히려 그 엔트로피를 충분히 낮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모름’이며,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이 ‘모름’에 도전할 가치가 충분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른바 ‘공략’이라고 불리는 많은 패러텍스트들이 플레이와 동떨어지지 않은 맥락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이 이유에서다. 게임 공략들은 게임 텍스트가 제시하는 ‘모름’의 상황에 펼쳐진 전장의 안개를 걷어내기 위한 활동의 결과물들이다. 어떤 이는 랜덤하게 떨어지는 아이템의 드랍률을 수집, 분석해 최종적인 아이템 루팅 테이블을 만들고 이를 확률로 정리해 정례화한다. 누군가는 주사위의 결과물에 다양한 수식적 치장을 가한 공격/방어의 메커니즘을 분석해 수식의 구조를 밝히고, 이를 통해 최적의 공략 루트를 도식화한다. 확률이라는 이름으로 온 사방에 분산된 채 높은 엔트로피를 지니고 있던 게임의 주사위가 만들어낸 세계는 공략이라는 정리된 장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정리된다.
같은 맥락은 디지털 주사위가 아닌 사람과의 플레이에서도 나타난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랜덤 매칭이 갖던 높은 엔트로피는 op.gg 와 같은 전적 사이트를 통해 체계적으로 나의 상대나 아군이 어떤 전적과 승률을 가지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한 데이터로 가공되며 해소된다. 게임 텍스트 내부에서의 플레이와는 별개로, 확률이 만들어내는 ‘모름’의 영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는 텍스트 밖에서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줄어든다.
결국, 디지털게임이 만들어내는 재미도 요약해 보면 1,000피스 퍼즐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완성된 그림을 무질서한 1천개의 조각으로 쪼갠 뒤, 이를 다시 맞추는 일에 재미라는 의미를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확률 기계가 제한적으로 생성해 낸 수많은 경우의 수 사이를 헤매며 다시금 이를 정리하고픈 욕망에 휩싸인다. 게임 텍스트 안에서는 클리어와 엔딩 도달이라는 결과로, 게임 텍스트 밖에서는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연산장치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의 데이터 엔트로피가 분명 정리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흥분하며 또 도전한다.
설령 이 기계가 근본적으로 랜덤값을 만들기 어려운 장치라 해도, 마치 화투장 48개를 가지고 흩어놓은 뒤 다시 맞추는 패 떼기 놀이와 같이,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은 엔트로피 놀이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윤상의 노래 ‘달리기’에서처럼,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흥분하며 게임에 달려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