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X장르의 강자 패러독스 인터랙티브가 구축한 대전략의 길
21
GG Vol.
24. 12. 10.
확장이 아닌 제약이 효과적일 때, 4X/대전략은 재미있어진다
개인적으로 4X/대전략 게이머가 되는 일에는 하나의 허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문명’ 시리즈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4X, 대전략 게임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느냐다. 애초에 일반적으로는 4X 라는 명칭도 무슨 소리인지를 잘 모른다.
4X/대전략 게임을 좀 다르게 설명해보자면, 일종의 인류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저런, 그저 특징의 나열일 뿐인 장르명(Exploration / Expansion / Exploitation / Extermination)이 되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조차, 4X를 대전략 게임과 한데 묶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어쨌건 4X 게임의 플레이 동기는 대부분 어떤 집단을 운영하는데에서 시작하며, 집단 간의 갈등에서부터 심화된 플레이가 피어난다. 당연히 그동안 인류사에서 있어왔던 갈등을 모사하게 되며, 사회 그 자체를 구현하는데 의의를 두기도 한다.
그러나 4X 게임의 태생적인 딜레마는, 결국 현실의 사회 구조를 비롯한 실제 세상의 시스템을 게임상에 구현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형태가 ‘현실’ 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게임의 각 부가 정말로 현실만큼 치밀하게 구현된다면 최종의 형태는 현실 그대로의 시뮬레이션이 된다는 아주 간단한 귀납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4X은 오히려 현실성의 단계를 떨어트리지 않으면 독자적인 차별화가 불가능해진다는 모순에 도달한다. 물론 그 최종의 형태에 도달하기까지 무한정의 개발 자원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4X 라는 장르 이름이 내포하듯 모든 것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한적으로, 단지 그것을 대단위 시뮬레이션으로 스케일을 키운 것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수많은 4X 게임들은 저마다 특화된 구현 요소, 또는 테마, 또는 소재를 가지는 방식으로 발달해왔다. 분명 경제, 정치, 전쟁 같은 여러 요소를 동시에 포괄해야하는 게임임에도 어떤 게임은 경제, 어떤 게임은 전쟁 이런식으로 특화된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이다. 현실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개발 자원의 문제와 함께 이러한 각각의 특색화만이 ‘문명’ 이라는 성전이 존재하는 시장에 자신의 게임을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중 재미있는 사례는,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라는 4X 계의 거성이 자신들의 4X 게임 라인업을 구축한 방식이다. 다른 시뮬레이션들이 점점 더 전체적인 스케일을 확대하고 시뮬레이션의 깊이를 늘리며 전형적인 팽창의 형태로 발전할 때, 이들의 게임들은 오히려 스케일을 낮추고, 제한적인 묘사를 활용해 4X의 다른 발전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시대별로 정렬하기, 그리고 각각의 주제로 정렬하기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시리즈는 기본적으로는 각각의 역사적 시대 배경으로 나뉜다. 중세를 다룬 ‘크루세이더 킹즈’ 부터 근대를 다룬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와 ‘빅토리아’,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다룬 ‘하츠 오브 아이언’ 이 촘촘하게 시대를 따라가며, 여기서 로마 시대를 다룬 ‘임페라토르: 롬’, 먼 미래 SF를 다룬 ‘스텔라리스’ 가 있다.
이 덕분에 다른 4X 게임과 비교하여 특기할만한 점은 게임 플레이에 시간적 제한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각각 시작 년도와 종료 년도가 서기로 구분되며, ‘크루세이더 킹즈’ 가 시작되는 11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1945년 까지의 시기를 4개의 게임이 나누어 활용한다고 보면 된다.
* 모아보니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게임들이다
그리고 시대를 넘어 이들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각각의 타이틀 시리즈가 핵심 테마, 작동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각각의 시리즈 모두가 경제, 외교, 문화, 정치, 전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구현 정도는 매우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하츠 오브 아이언’ 은 당연하게도 전쟁을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하여 전투의 디테일이 깊으며, 이를 위해 따라오는 경제, 외교, 정치 등이 다음 순위로 구현되어 있다. 하지만 ‘빅토리아’ 는 경제, 문화 중심의 게임으로서 전쟁, 전투가 상당히 간략화되어 있고,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워 상대를 경제적으로 굴복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는 근대의 태동 답게 외교가 핵심이고, 경제가 그 다음 순위로 따라온다. ‘크루세이더 킹즈’ 는 중세 특유의 가문 단위 정치에 핵심을 둔 게임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껏 조여진 플레이 메카닉은 저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물론 4개의 시리즈는 같은 엔진을 공유하기 때문에 플레이 측면에서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자신의 핵심 메커니즘 만큼은 독자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하츠 오브 아이언’ 은 병기 생산, 연구, 보급, 부대 편성부터 운용까지 전쟁의 모든 부분이 디테일하게 구현되어 있으며 개별 부대를 컨트롤하여 작전 목표를 달성케 한다. 하지만 다른 시리즈에서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그저 병력의 생산과 대단위 컨트롤만이 가능하다. 반대로 ‘빅토리아’ 는 경제 중시 게임 답게 물자를 생산하고, 경제권역을 만들어 수출입품을 통해 상대의 경제를 장악하며 각종 외교 수단으로 이를 보조하는데, 다른 게임에서는 구현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처럼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게임 시리즈는 시대 별로, 또 주제 별로 정렬되어 있으며, 각각의 게임이 조명하지 않는 요소, 콘텐츠는 아예 삭제되어 있거나 매우 간략하게 묘사/구성되어 있다. 이는 어찌보면 4X 라는 장르적 이상론에서 거리가 멀어진, 모반적인 기획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계 없는 구현은 4X의 이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감한 포기가 일종의 타협으로 느껴질 수 있듯, 4X 라는 이상론을 내려놓고 ‘우리는 이것만 세밀하게 묘사할거야’ 라고 하는 셈이니.
하지만 그 이상론을 살짝 내려놓았을 때의 얻어지는 이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크게 두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바로 접근성과 게임을 통한 현실의 심화적 모사다.
먼저 이런 비유를 들고 싶다. 제공자의 관점에서 파인 다이닝에서 요리를 코스로 내놓는 이유, 또 새로운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전의 요리와 모든 집기류를 정리하고 치워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물론 모든 요리를 한 번에 내오면 식는다, 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결국 핵심은 어느 새 요리가 나온 시점에 오직 그 요리만이 집중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4X 게임들은 바로 이런 파인다이닝 코스와 동일한 효과를 낸다. 즉, 핵심적인 영역이 아닌 다른 부분들이 배제됨으로서 플레이어의 집중력은 한 곳으로 모이게 되며, 이는 4X 의 게임의 고질적인 약점, 즉, 방대한 만큼 플레이 자체가 산만하게 된다는 약점을 다른 식으로, 그리고 개발비용을 절감하면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한 번 각 시대별 작품의 심화 요소를 살펴보면 그 요소(전쟁, 무역, 경제, 상속, 탐험, 개척)가 당시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압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다루는 ‘하츠 오브 아이언’ 이 전쟁 중심의 게임이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고, 한창 식민지 개척과 열강의 산업화가 한창이던 ‘빅토리아’ 의 시기가 무역과 경제적 갈등을 다루는 것도 당시 시대의 핵심을 보여주며, 초기 근대화 시기, 대항해시대 무렵 서구 중심의 개척과 확장, 무역 전쟁이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의 중심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정도로 끝났던 간략한 인류사의 시대적 키워드와 맞아 떨어지고, 그 핵심 요소를 열쇠로 하여 당시의 시대를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진주만 습격, 루거오차오 사건,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이 게임 상에서도 벌어지며, 단순히 이름만 알고 지나갔던 이 일들이 왜 벌어졌는지, 어떠한 맥락에서-또 어떠한 효과를 위해, 각각의 열강들이 벌인 일인지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어찌보면 굉장히 훌륭한 역사교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플레이 메카닉을 습득하고 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게 중요한 게임 장르 특성상, 각 게임 요소의 학습 중요성이 차등적이라는건 매우 중요하다. 어떤 팩션을 고르던 자원 관리, 개발, 무역, 군대 생산과 전투 등 모든 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습득이 필요한 ‘문명’ 시리즈와는 달리,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들은 지극히 난이도가 낮은 팩션도 존재하고, 각 시대적 핵심 기믹을 조금씩 익히면서 게임에 적응하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게임을 고르기 훨씬 쉬워진다는 이점도 존재한다. 4X 게임들은 그 특유의 방대함 때문에 구입 전 게임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은 두가지 기준으로 일단 게임을 분류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적 시대, 그리고 좋아하는 관리/플레이 요소로 게임을 좀더 나누어 볼 수 있고, 그게 핵심적인 선택 기준이 되어준다.
그리고 이 덕분에, 우리는 각 시대를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 무제한적인 외적 확장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
4X 게임의 역사를 훑어보면, 모든 것을 구현하여 하나의 게임 안에 최대한 많은 피처를 우겨넣는 방향성과 시작부터 제약을 걸어두고 그 제약 내에서 디테일의 밀도를 높이는 방향성을 각각의 게임이 취사선택하며 발전해왔다. 전자는 ‘문명’ 이나 ‘마스터 오브 오리온’ 이 대표적이며, 후자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들과 ‘슈퍼파워’ 같은 게임들로 대표된다.
이러한 패러독스 인터렉티브 게임들의 특색은 일방적으로 다른 게임에 비해 낫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요소다. 전체 그림을 최대 해상도로 세밀하게 그릴 수 없다면 중요한 부분만 세밀하게, 나머지는 다소 뭉개는 선택을 했고, 이 때문에 당연히 한계도 존재한다. 그걸 알고있는지,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마치 자신들이 소위 ‘모든걸 담은’ 게임을 못만들어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듯이, 은하 스케일의 아주 정석적인 4X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스텔라리스’ 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단순히 무제한적인 확장, 마치 게임 내적 플레이처럼 계속해서 게임의 스케일이 커지고 모든 부분의 묘사가 세밀해지는 것만이 4X, 대전략 게임의 발전 양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찍이 ‘슈퍼파워’ 같은 시리즈가 증명했듯, 이 장르에서는 일종의 제한적 플레이, 또는 핵심의 첨예화도 매우 주요한 강점이 될 수 있다.
4X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플레이 목적성 부여, 그리고 어떻게 해야 게임을 잘하는 것인지 플레이 개선의 방향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게임에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대전략류 게임의 시작은 10시간, 20시간, 길게는 50시간이나 100시간 이후부터라고 말하곤 한다. 일리 있는 말이고 하나의 장르적 요소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나, 그게 과연 무조건적으로 옳은 디자인인지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속에서 패러독스 인터렉티브는 각각의 게임을 통해, 서로 다른 역사적 관점으로 해당 시대를 풀어내면서 자칫 모두 똑같을 수 있는 게임 시리즈를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게임으로 승화시켰다. 모두가 같은 엔진으로 같은 구동 방식을 가진 게임들임을 고려하면, 이 자체는 기획적 차별화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게임 제공 방식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거나 옳다는 건 아니지만(DLC로 게임을 완성하는 방식 같은 것), 때로는 마치 장르의 기본을 모반하는 듯한 발상의 전환이 장르가 부딪힌 벽, 또는 한계를 넘는 타개책이 될 수도 있다. 본래 모든 발전의 역사란 정-반-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이들이 반인지 정인지는 더 나중의 4X/대전략 게임들이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