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시간의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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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2. 10.
놀이로서의 디지털게임: 생존, 노동, 여가의 세 분류 안에서
디지털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즐거움을 찾기 위한 유희, 놀이로서의 게임 플레이 행위 안에 디지털게임 플레이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놀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행위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특정한 행위에 들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행위의 결과로서 무언가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산출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시 새겨보면, 결국 놀이를 정의하는 데 있어 전제되는 것은 놀이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놀이 행위에 투여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투여되는 것은 다름아닌 시간이다. 물리학적인 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인간의 24시간 일상이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가능성의 범주일 수도 있다. 생명유지를 위해 필수로 써야 하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시간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생산에 투여하는 노동시간이 아닌 제 3의 시간 사용으로 우리는 예술, 문화, 놀이와 같은 영역에 시간을 쓴다. 인간의 시간을 아주 크게 세 덩이로 나눈다면, 생존 – 노동 – 여가라는 세 가지 분류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매체와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상품으로 자리잡은 디지털게임
디지털게임 플레이를 포함한 놀이와 여가 전반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소비하지만, 기존의 놀이, 여가와 달리 디지털게임에서는 많은 경우 시간과 함께 돈을 써야 한다는 전제가 덧붙는다. 최초의 디지털게임을 이야기할 때 수많은 초창기 프로토타입 중에서도 <퐁>이 거론되는 이유는 이 게임이 본격적인 상업적 게임이고, 그 상업성을 딛고 생산과 유통 양 측면에서 유의미한 대중화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게임의 대중화는 디지털게임의 상업적 성공을 딛고서야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여러 놀이 중 시간과 돈을 함께 써야만 하는 것이 오직 디지털게임만의 특징은 아니며, 이는 상업성에 기반한 현대의 많은 대중문화들이 공통적으로 딛고 있는 전제다. 놀이문화 전체를 큰 역사적 범주에서 본다면, 시간을 쓴다는 공통전제 안에서 우리는 경제적 소비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놀이가 등장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적 여가의 시대를 놀이의 두 번째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돈과 시간을 함께 쓰는 자본주의 시대 놀이로서 디지털게임은 그러나 다른 대중문화의 놀이와 매체 자체의 특성을 통해 차별화되는데, 바로 돈과 시간이 독특하게 어우러지며 서로 등가교환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다. 구매나 대여를 통해 접하는 책이나 영화, 광고시청과 같은 간접적 방식의 돈/시간 소비를 활용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매체에서는 금액을 지불한 만큼의 향유시간을 구매한다고 볼 수 있는 패턴이 나타나지만, 디지털게임에서는 그와 더불어 경우에 따라서는 놀이시간 자체를 현금지불을 통해 대체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되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시절의 디지털게임: 숙련도와 현금의 교환관계
디지털게임에서의 시간/돈 소비는 초창기에는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과 유사한 맥락으로 나타났다. <퐁>은 공공장소에 설치된 게임기에 동전을 투입하고 일정한 플레이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는 공공 기기에 대해 일련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용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가깝게는 그 이전의 놀이기구들이었던 핀볼이나 주크박스와, 조금 더 멀고 넓게는 공공장소의 기기 대여라는 의미에서 영화 상영의 방식과 유사했다.
초창기 아케이드를 중심으로 시작된 디지털게임 문화는 한국의 경우 21세기 전까지 이어진 오락실 문화를 중심으로 디지털게임의 일반적인 소비방식을 돈과 시간을 결합해 사용하는 형태로 대중 및 소비자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런데 다른 매체와 달랐던 점은, 이러한 지불방식은 디지털게임에서는 소비자/이용자의 숙련도에 따라 1코인당 플레잉타임이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른바 가성비, 일정한 금액을 투여한 뒤 얼마만큼의 시간동안 기기를 점유해 플레이할 수 있느냐가 다른 매체와 달리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의해 좌우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 때 돈과 시간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게 결합했다. 기계에 코인을 넣는 일은 일정한 기회를 대여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기회의 시간은 숙련도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리고 숙련도를 키우는 길은 개인차를 떠나 더 많은 동전을 투입하여 실력을 쌓는 길이었다. 개인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오랫동안 기계를 점유할수록 1코인당 점유시간은 늘어나는 구조라는 것이다.
책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읽는다고 책값에 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물론 만화대여점 같은 경우 시간 단위로 이용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는 매체의 유통채널이라기보다는 공간대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니 예외로 두자) 게임의 경우에는 효율적인 플레이를 숙달할수록 1코인의 가치가 올라가는 구조였다. 게임에서 시간과 돈이 엮이는 독특한 형태는 이미 아케이드 시절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온라인시대의 현질은 시간과 돈을 맞교환하는 과정이다
1970년대 말부터 이뤄진 가정용 콘솔과 PC의 보급을 통해 디지털게임의 소비는 공공기기 대여에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직접 구매해 소유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게임기기를 개인이 소유하게 되면서부터는 다시금 다른 매체와 유사한 형태로 돈과 시간의 문제가 얽힌다. 한 번의 구매로 영원히 소유하는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더 이상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스탠드얼론 패키지라는 형태로 콘솔, PC를 중심으로 게임의 구매가 이루어지던 시절의 시간 / 돈 관계는 온라인게임으로 디지털게임의 중심이 옮겨오면서부터 다시금 큰 변화를 맞이한다. 소프트웨어가 서버상에 위치하게 되고, 사용자는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소프트웨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구매 혹은 대여하게 되면서 게임에서의 시간 / 돈 관계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가장 대표적인 시간 / 돈 관계의 변화는 아이템의 현금 구매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게임이 만든 가상공간 안에서만 도구적으로 유의미한 물질로서 인식되는 아이템은 대체로 게임 안에서의 플레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이 때의 플레이는 상당부분 시간의 소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력을 가진 검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들여야 하는 사냥, 혹은 레벨업에의 시간 소비가 필수적이다.
그런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구매 가능하게 만들 경우, 게임 플레이에 들어가는 시간은 현금으로 교환가능한 가치로서 다시금 의미지어진다. 기존에는 직접적 교환이 불가능했던 플레이 시간이 현금과 등가교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게임사가 직접 아이템 – 현금의 교환 창구를 만들기 전부터도 시작된 바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서버상에서 작동하는 온라인 MMORPG가 대세가 된 이후, 이용자들은 스스로 특정한 아이템을 현금을 대가로 거래하는 사례들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쌀먹’이라 불렸던, 게임 아이템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사례들은 게임에서의 시간 / 돈 관계가 변화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였다.
자동사냥과 아이템거래: 숙련도를 벗어난 새로운 유희적 시간의 의미
이후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 상호 교환이 가능해진 플레이시간과 현금의 관계는 보다 본격화되는데, 여기에는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라는 한계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발휘했다. 과거의 스틱, 키보드/마우스처럼 세밀한 컨트롤을 구사하기 어려워진 터치스크린 환경에서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과거만큼의 의미를 플레이 안에서 갖추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플레이의 결과물은 개인의 숙련도보다 한 플레이어가 얼마나 오랫동안의 시간을 사용해 서버에 접속해 활동했느냐의 질문에 가까워졌다.
이 변화의 끝에는 자동사냥이 서있다. 굳이 플레이를 ‘직접’ 하지 않아도, 단지 서버에 접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말해 플레이어가 자신의 숙련도를 활용해 개입하는 전통적 의미의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단지 서버에 접속한 시간만을 인증해주면 게임 플레이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속 플레이의 효율을 올려줄 수 있는 권한, 이를테면 자동사냥 효율 부스트라던가, 애초에 자동사냥 자체의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아이템들이 현금으로 구매가능한 대상이 되면서 게임플레이에서의 돈과 시간은 완벽히 상호 교환이 가능한 형태로 안착하기 시작했다.
탕진의 재미와 축적의 재미가 혼용되는 시대
온라인게임 시대가 만들어낸 이 변화는 놀이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전환을 만들어냈다. 노는 일이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놀이의 본질은 일종의 무용함, 생산의 시간에 맞선 시간 탕진의 즐거움에 가까웠지만,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그 무용함의 효용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정말 그 무용함은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내가 생산하지 않는 시간에 만들어냈던 즐거움, 난해한 퍼즐을 돌파하는 과정과 그 결과에서 얻을 수 있었던 희열과, 생산하지 않는 활동임에도 충분한 성취감을 만들어냈던 수많은 가상세계에서의 모험들은 정말 돈으로 사서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끝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다보면, 혹여 이 돈으로 산 즐거움은 과거 시간의 탕진을 통해 얻었던 즐거움과는 다른 무엇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올라온다. 오히려 이 즐거움은 탕진의 즐거움이 아니라, 축적의 즐거움이다. 서버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의 플레이 시간 기록이 현실의 재화와 교환가능한, 혹은 교환되지 않더라도 가상의 그 무언가가 축적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의 즐거움. 사실 우리가 눙쳐서 게임의 재미라고 부르는 효용의 순간은 적어도 시간이 돈과 교환되기 시작한 온라인게임 이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의 재미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