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로맨스가 진짜 사랑은 아니지만 중요해, CRPG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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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2. 10.
게임에 연애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임이 미연시인건 아니며, 혹여 장르 불문 연애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사이드 콘텐츠 취급을 받곤 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어떤 게임을 설명할 때 “야, 이 게임에서는 섹스도 가능해!!” 라고 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임인지 저절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듯, ‘연애’ 는 사람들을 흥분케하는 콘텐츠였다.
* 뭐 이것도 로맨스라면 로맨스일까?
그리고 언젠가부터 RPG 들, 특히 좀더 TRPG 원류의 감성을 추구하는 CRPG들에서는 로맨스 옵션이 거의 필수적으로 여겨지게 됐다. 특정 연애 루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다투는 정실(?) 논쟁은 커뮤니티에서는 일상이다. 어쩌다 이랬을까. 세계를 구하고 악을 무찌르라고 있는 게임에서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애만 하게 된걸까.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런 게임에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건 ‘모험’ 의 연장선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과거 RPG 명가 바이오웨어의 게임들이 CRPG 시류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비록 그들이 이 형태를 취한 최초는 아니라도), ‘발더스 게이트 2’ 이래로 로맨스 옵션에서도 하나의 메인스트림이 형성된다. 그건 바로 기용 가능한 동료들과 지속적인 대화와 동료 퀘스트 같은 사이드 콘텐츠를 통해서 연대를 형성하고, 그렇게 깊어진 연대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이처럼 CRPG 의 연애, 로맨스 옵션이 기존의 미연시와 다소 다른 결을 띄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동료 시스템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CRPG 의 로맨스란 어디까지나 핵심은 동료 퀘스트라는 매우 명확하고 달성 여부가 확실하게 가름나는 콘텐츠이며, 여기에 양쪽이 연애가 가능한 지향일 경우 연애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를 띄고 있다. 미연시의 연애는 오직 연애를 위해서 일종의 루트 공략, 엔딩 공략 게임의 느낌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비중과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CRPG 의 토대가 TRPG 라는 점을 생각해볼 만 하다. 기존에 현실에서 펼쳐지던 TRPG 는 동료가 진짜 사람이며, 대체로 이미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은 현실의 관계처럼 끈끈했고, 상호 간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최근 멀티플레이어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CRPG 는 모두 오프라인 게임이었고, 플레이어 캐릭터 외에 함께하는 동료들은 인공지능 AI 이제 스크립트 더미였고, TRPG 수준의 상호작용의 활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렇게 게임을 함께하게 되는 동료 캐릭터를 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실적으로 느끼고, 플레이어와 더 연대를 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동료 퀘스트를 위시한 컴패니언 시스템 일체라고 할 수 있다. 즉, 혼자서 게임을 하지만 외롭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간적인 상호작용’ 을 플레이어 캐릭터와 동료 캐릭터 사이에 넣는다면, 그 흐름이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최종판인 연애로 흘러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의 CRPG 들은 이런 부분의 배려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서양 시장에서의 시류는 바이오웨어를 필두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바이오웨어는 CRPG 메이커 중에서 이러한 동료와의 유대, 그리고 연애 등 상호작용을 본격적으로 이끈 공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히 함께 싸우는 전투원1 에서 벗어나 동료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고, 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다보면 자연스레 친밀해지고, 그러다 이제 서로 성적 지향도 맞는다면 연애도 하는… 그런 흐름이었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는 이러한 동료 시스템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그리고 가장 대중화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바로 동료로서 원하는 캐릭터와 연애 대상으로서 원하는 캐릭터가 다를 경우엔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이 결합하고 이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 문제였는데, 바로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과 전투 캐릭터로서의 성능, 두가지 요소에 기인했다.
CRPG의 연애 시스템은 세이브로드 신공과 함께라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다. 하지만 단 한가지, 성적 지향에 따라 가능/불가능으로 나뉘는 케이스는 절대적인 벽이었다. 현대적인 로맨스 옵션이 들어간 첫 CRPG 라고 할 수 있는 ‘발더스 게이트 2’ 는 주인공이 스토리상 고정된 인물이었고, 성별 또한 남성으로 고정이었으니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동료 시스템과 연애 시스템을 널리 퍼트린 ‘매스 이펙트’ 시리즈와 동시기의 ‘드래곤 에이지’ 로 가면서, 동성 연애 지향을 가진 동료들이 추가되며 이러한 경향이 생겨났다.
이렇게 로맨스 옵션에 성적 지향이 추가된 건 게임이 보다 더 많은 취향과 환경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게임 내에서 표현하기 위한 흐름에 따른 일이었다. 플레이어가 직접 캐릭터가 되어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건 RPG에선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고, 그러려면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가 성별을 비롯해 각 플레이어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야 했다. 이에 따라 동료들, 연애 대상들이 각 지향과 취향에 맞게 분배되는건 당연한 일.
재미있는 일은 플레이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좋아하는 캐릭터의 성적 지향이 맞지 않을 때 벌어지는데, 자신이 게임 초기에 선택한 성별과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특정 대상과 연애를 할 수 없게되고, 이는 게임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캐릭터 생성부터 특정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다는걸 의미했다.
아무튼 이러한 현상 덕분에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원하는 로맨스 대상이 아무래도 훨씬 머릿수가 많은 이성애자들을 위한 연애 대상이 아닐 경우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는 ‘사이버펑크 2077’ 의 주디 알바레즈다. 주디 알바레즈는 주인공 V의 핵심 조력자이자 이 게임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대외적으로 게임을 어필하는데 동원되어 온 일종의 얼굴마담이자 상징이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이 캐릭터와 연애를 하려고 달려들 건 분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개발진은 한 번 비튼다. 주디 알바레즈는 동성애자 캐릭터이고, 남성 V를 위한 이성애자 파트너는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를 모르고 습관처럼 남성 V로 게임을 시작한, 남성 이성애자 플레이어들은 주디 알바레즈가 동성애자이며, 한참 게임을 진행한 자신의 캐릭터로는 주디와 프렌드존을 넘지 못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여기서 그런 플레이어들이 취한 행동은 크게 두가지. 커뮤니티에 원성을 쏟아내거나 여성 V로 새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성적 지향으로 연애 대상을 나누는건 바이오웨어가 먼저였다. 동료 시스템과 이를 뒷받침하는 로열티 퀘스트, 그리고 동료와의 연애 선택지라는 요소를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시킨 게임이기도 했던 ‘매스 이펙트’ 시리즈는 1편에서는 모든 연애 대상이 이성애자였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존재했다. 그건 아사리라는 종족적인 특성을 빌려, 리아라 트소니를 양성애자로 설정한 것. 이성애자 여성 애슐리, 이성애자 남성 케이든에 양성애자 리아라가 존재하는 로맨스 옵션이었다. 이는 아무래도 ‘선택’ 을 집어넣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셰퍼드의 성별을 어떻게 고르더라도 결국 연애할 수 있는 대상이 한명이라면, 호불호를 떠나서 내가 연애할 대상을 선택한다는 느낌을 줄 수 없었고, 대상을 선택하는건 로맨스 옵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리즈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고, 또 가장 대표적인 혁신작이었던 ‘매스 이펙트 2’ 는 동료 시스템을 훨씬 크게 키움과 동시에 로맨스 옵션도 방대하게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직 이성애자만이 등장한다. 한 성별 당 3명의 연애 대상을 부여받았는데, 2007년 게임인 전작에서 양성애자를 등장시켰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후퇴(?)였다.
그리고 3편은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 좀더 다양해졌다. 각 성별마다 한명씩 동성애자 연애 대상이 추가됐고, 1편의 연애 대상인 3명이 다시 들어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조건이 좀 있기는 하나 한 성별당 4명의 이성애자, 1명의 동성애자, 1명의 양성애자 연애 대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성토를 받았던 게임은 바이오웨어의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 이었다. 다른 게임에 비하면 동료의 수가 무척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를 성적 지향, 종족별로 배분하다보니 플레이어 캐릭터의 조건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연애 대상이 너무나 적었던 것. 심지어 전투원이 아닌 동행 캐릭터들도 연애 대상으로 넣었음에도 이랬는데, 그런 캐릭터들은 또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탓에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이 상황을 보자면, 플레이어들이 CRPG 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플레이어 캐릭터에 이입하고 동시에 다른 등장인물에 얼마나 몰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으로는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각 캐릭터의 성적 지향을 설정하는데에 있어서 굉장한 고민을 떠안게 됐다. 어떤 연애 대상을 설계할 것인가? 어떤 성적 지향에 어떤 캐릭터를 배치할 것인가? 이는 단순히 고민을 떠나서 특정 성적 지향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키는, 어쩌면 차별 또는 편견으로 비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했다. 세상에, 그냥 게임 캐릭터와 연애를 하고 싶은 것 뿐인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써야 한다니!
그러나, 여기서 ‘발더스 게이트 3’ 는 재미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모든 동료를 연애 대상으로, 동시에 모든 연애 대상 동료를 양성 모두 연애 가능으로 만든 것. 너무나 간단한, 어쩌면 무성의한 해법처럼 보이기까지 해서 맥이 풀리지만 오히려 한편으로는 아! 왜 다들 그 생각을 못했지? 하고 감탄할 법한 해법이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지 않았는데도, 오직 캐릭터 생성 단계만 지나도 접근 할 수 없는 콘텐츠가 생기는 셈이었던 이전의 이성애자-동성애자 중심의 로맨스 옵션이, 그냥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를 양성애자, 혹은 연애 대상으로 만든다는 기가막힌 해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 이 방법을 쓰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이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 동료가 과연 진정한 로맨스 옵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게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실제로 기존의 바이오웨어 게임들처럼 이성애자/동성애자/양성애자가 모두 존재하는 RPG에서는 양성애자 캐릭터들은 보통 인기가 가장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발더스 게이트 3’ 에서는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 마련인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이들 캐릭터가 양성애자라는 건 전혀 지적받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게일 같은 캐릭터가 보여주는 양성애자로서의 면모, 그리고 쉬운 로맨스는 일종의 밈화되어 혐오의 대상보다는 유머의 대상으로 더 가깝게 여겨지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 3’ 의 로맨스 옵션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유를 생각하다보면, 기존 게임들의 로맨스 옵션은 일종의 스테레오타이핑으로 만들어진 대상이었고, 성적 지향이 진정한 정체성 표현보다는 ‘제한’ 으로서 받아들여진 면이 더 컸다는걸 깨닫게 된다. 기본적으로 각각의 캐릭터가 성적 지향에 맞추어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이핑 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성적 지향에 따른 제한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들을 만날 때 감정 선을 정리하고 진짜 캐릭터 대 캐릭터로서 교감하기 보다는 게임 콘텐츠로서의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오히려 모든 캐릭터가 성별과 상관없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일종의 게임적 허용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고리타분한 성적 지향에 따른 분배와 이런저런 고려는 치우고, 그냥 넌 이 동료가 가장 마음에 들어? 그럼 얘랑 끝까지 가봐. 라는 간단하고 쉬운 게임적 허용으로 게임 내 로맨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
즉, 바이오웨어식 로맨스의 한계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에 맞추어 각 캐릭터를 너무 세분화하고, 카테고리로서 분화시켜 배치한 점에서 왔다. 그 순간부터 오히려 플레이어들은 캐릭터 그 자체보다는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인가를 생각한다. 어쩌면 현실의 연애의 어려움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내가 좋다고 되는건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발더스 게이트 3’ 의 동료들은 모두가 연애가 가능하고, 특정 성별 지향을 대외적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들을 양성애자라고 하는 것도 연애 가능성이라는 콘텐츠 기능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이지,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양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지도 않는다(그래서 앞서 ‘양성애자’ 라는 표현이 아니라 ‘연애 가능’ 이라고 했다). 그러니 좀 더 정확하게는 로맨스 옵션에 성별의 제한이 없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현실이라면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건 ‘게임’ 이니까.
즉, 오히려 게임의 애정과 연애를 적당히 게임이라는 선 안에 두고 그 안에서 게임적 편의성을 취한 결과, 플레이어들이 가장 만족하는 로맨스 옵션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다. 바이오웨어는 오히려 로맨스 옵션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지나치게 현실의 연애를 고려했던건 아닐까? 어디까지나 우리가 게임 상에서 이루고 싶었던 건 지고한 순애가 아니라, 일종의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인정받는 증표였던건 아닐까?
즉, 여러 과정을 거쳐서 변화해오기는 했지만 CRPG 에서의 로맨스란 말그대로 게임을 하면서 외롭지 않기 위해 탄생했고, 이것이 플레이어가 어떠한 ‘인정’ 을 받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스크립트 덩어리와의 연애가 현실에서 동료와의 상호작용 만큼 깊고 무한하지는 않더라도, ‘함께 모험한 동료’ 와 또 하나의 사적인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건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