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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고통과 피로는 어떻게 사회적 재현이 되어왔는가?: 게임의 스트레스 재현과 스토리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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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2. 10.

게임과 고통을 비평할 때 빠지지 않는 레퍼런스들이 몇가지 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과 같은 책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레퍼런스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비평하는 것 역시 필요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역사는 뿌리깊고 도도하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무엇보다 비평으로 매만지기 어려운 수준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며,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없이 레퍼런스만을 빌려 주장을 펼치는 일은 인문학과 게임 비평을 풍성하게 만들기는커녕 비평의 빈곤을 야기할 수 있고, 심각한 경우 비평과 현상의 간극을 벌리는 맹아를 심는 일이 될 수 있다. 더불어 고통과 피로는 대중적으로 익숙하지만, 그 맥락과 역사는 중요도에 비해 상세하게 조명된 사례가 극히 적다. 조금 더 지면을 할해하고, 주장을 돌고 늘어뜨리더라도 인류를 훝어온 고통과 피로의 역사를 간단하게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외재인(外在因)에 내재인(內在因)으로,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의 역사


 오랜 시간 인류는 고통과 피로를 외재적 요인에 의한 감정 변화로 믿어왔다. 물론, 그 믿음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동양(최소한 한글)에서 말하는 고통의 경우, 먹는 것으로 인한 감정의 변화를 배경으로 두었다고 여겨진다. 국립국어원 표준대국어사전은 고통을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으로 정의한다. 이때 의미의 중추를 이루는 ‘괴롭다’는 ‘고(苦)+롭다’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苦(쓸 고)는 풀 초(艹) 부수를 사용하는 한자로, ‘(맛이) 쓰다’ ‘괴롭다’ 뿐만 아니라 ‘쓴맛’ ‘씀바귀’와 같이 먹는 것과 직접 연결되는 묘사를 뜻으로 가지고 있다. 즉, 고통의 괴로움은 무엇을 먹을 때 느끼는 쓴맛을 바탕에 둔 단어라 할 수 있다. 피로의 경우에도 외재적 요인을 변화의 원인으로 본다. 疲‘지칠 피’와 勞‘일할 노’가 합쳐진 피로는 ‘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를 의미한다. 疲(지칠 피)의 부수가 질병을 의미하는 병질 염(疒)을 부수로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병들 때까지 일한 상태’라는 점에서 ①[지칠 때까지 일한 상태] ②[지칠 때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태] 정도로 여길 수 있다.


 서양에서도 고통의 원인이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믿어왔으며, 이를 언어화해왔다. 결과된 사건으로 인한 고통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Pain의 경우, ‘처벌 또는 범죄로 인한 고통 또는 손실’ 혹은 ‘신체적 또는 신체적 고통, 지속적이고 강하게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신체 감각’로 정의한다. Pain보다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고통인 Suffer 또한 외재적 요인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로 지칭하는 데 쓰인다. Suffer의 경우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해로움이 가해진 것, 고통이나 괴로움 또는 슬픔으로 따르게 된 것’으로 정의되는데, 가해지(inflicted)거나 따르게 된(submit) 것으로 인한 감정 결과라는 점에서 외재적 요인을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한다고 볼 수 있다. Suffer의 경우에는 12~13세기에 기록된 사례들을 바탕으로 정의되어 전승된 것으로, 이 시기가 중세 후기라는 점에서 ‘to submit to god’과 같이 신의 의지 하에서 벌어진 필연적 우연의 증후로 고통을 이해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고통과 피로는 동서양 간에 필연과 우발 혹은 의지의 문제 등 작지 않은 차이를 가지고 있으나, 핵심적으로는 내재적 요인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 말해, 인류는 고통과 피로가 내재적으로 발명되거나 발견되는 요인이 아니라고 믿어왔다.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는 그 이유가 외부에서 기인한 내부의 변화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이해는 관찰과 귀납을 바탕으로 현상을 이해한 근대의 20세기에 이르며,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취합되는 경향을 보인다. 20세기에도 스트레스 역시 외재적 요인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는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Hans Selye, 1907~1982)가 네이처지에 개재한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재에 대항하는 내재의 고통, GAS와 스트레스


*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 (출처: 위키피디아)

 1936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내분비학 교수 한스 셀리에는 네이처지에 「다양한 유해 자극으로 생긴 증후군(A syndrom Produced by Diverse Nocuous Agents)」이라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출판한다. 한스 셀리에는 위 논문에서 실험군 쥐들을 ‘한겨울에 옥상 지붕 위에 올려놓기’ ‘고의로 상처 내기’ ‘극심하게 더운 보일러실에 가두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유해 자극(Nocuous Agents)을 가한 뒤, 실험군 쥐에서 생긴 신체적 반응과 일반 쥐의 신체 반응을 비교 측정했다. 그 결과, 다양한 유해 고통을 가한 쥐들에게서는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 반응 과정이 공통적으로 관찰되었다. 이 과정은 유해 자극이 들어오면 뇌의 시상하부가 코르티코트로핀 방출호르몬(corticotropin-releasing hormone, ‘CRH’)을 분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CRH는 뇌하수체로 이동해 부신겉질자극호르몬(adrenocorticotropic hormone, ‘ACTH’)으로 불리는 코르티코트로핀을 방출시킨다. 이때 ACTH는 혈관을 통해 부신으로 이동하여 코르티솔 등의 당질코르티코이드를 분비한다.


 그리고 당질코르티코이드는 부신속질을 포함해, 체내로 퍼진다. 체내로 퍼진 당질코르티코이드는 지방세포에서는 지방산을 생산하고 근육세포에서는 단백질을 분해하게 만들어 포도당 대사를 높인다. 한편 부신속질에서는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해 혈압 상승과 심장 박동 증가에 관여하는 등 교감 신경이 지배하는 기관의 작용을 촉진한다. 이렇게 생산된 포도당과 빠르게 돌아가는 혈류들은 뇌 등으로 에너지를 공급하여 유해 자극에 대한 대항을 촉진하고 일시적인 에너지 대사를 높인다. 이는 과정은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으로 불리며, 한스 셀리에는 이 과정의 연속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고 발표한다.


* GAS의 3단계 (출처: 위키피디아)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 GAS)’은 크게 [경계(Alarm)→저항(Resistance)→소진(Exhaustion)] 3단계로 분류되지만, 한스 셀리에는 주요한 현상은 3단계인 소진에서 나타난고 보았다. 1단계와 2단계는 투쟁-도피 반응의 강도 차이가 있을 지언정 스트레스 자극에 반응해 신체 보호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주요한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1단계와 2단계 실험군 쥐의 경우 흉선・비장・임파선이 수축했으며, 체온이 내려가고 소화기가 손상되는 공통 반응을 보였으며, 그 후 48시간이 지나면 부신이 커지고 성장과 생식선이 위축되는 2단계 반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러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유해 자극에 노출된 실험군 쥐의 경우 소화계·심혈관계 장애를 비롯해 궤양・우울증 등을 보였다. 이는 만성적인 상태로 신체가 신체 보호를 포기하는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 결과였다.


 특히 다양한 유해 자극에 대한 공통반응이라는 점에서 ‘만원 지하철’ ‘찜통 더위’ ‘살을 애는 추위’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되는 고통과 피로를 ‘스트레스’라는 단어로 묶어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한스 셀리에는 위 과정이 모두 자율 교감 신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한 것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재인에 의해 발생된 신체의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대신 한스 셀리에는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이 주장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누적된 내재의 피로, CSR과 사회 자본

* 셸쇼크를 겪고 있는 군인 (출처: 위키피디아)

 한스 셀리에가 발표한 주장의 직관성만큼이나, 산업계는 발표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치료나 의료 활동에 한스 셀리에의 발표를 적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즉각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스 셀리에의 스트레스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통용되진 않았었다. 오늘날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양차 세계대전, 특히 세계 2차 대전의 그림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양차 세계 대전은 대규모 사상자와 함께 급진적으로 많은 임상 데이터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전투 피로 반응(Comabat Stress Responce, ‘CSR’)에 관한 것이었다. 전투 피로(Combat Fatigue)로 불리기도 하는 CSR이란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전투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다양한 행동을 포괄하는 급성 반응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기 못하거나 느린 반응을 보이는 등 군사 작전의 누적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반응을 포괄한다.


 CSR는 세계 1차 대전에서 있었던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된 연구 분야다. 미국의 의료 장교 토마스 셀만(Thomas W. Salmon, 1876~1927) 등이 출판한 「영국군의 정신 질환 및 전쟁 신경증(셸쇼크) 치료와 구호」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나, 이러한 자료들이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대규모 살육을 재현하기 전까지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일례로 셀만이 세웠다고 여겨지는 PIE원칙의 활동 등이 그러하다. PIE원칙은 ①사상자를 전투 소리가 들리는 전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치료 할 것(Proximity) ②즉각적 치료를 시행하되 특정 환자의 부상 완치를 기다리지 않을 것(Immediacy) ③모든 사람이 휴식과 보충을 거친 후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도록 만들 것(Expectancy)을 요구한다. 그러나 PIE원칙은 휴식이 필요한 군인을 참호로 밀어넣는 근거로 활용되며 수많은 PTSD환자와 ‘비겁함을 보인다’는 이유로 즉결처형되는 피해자들을 양상했다. 세계 2차 대전에 이르러서야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통해 ‘셸쇼크(Shell Shock)’와 같은 반응이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피묻은 경험을 통해 스트레스는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의료 개념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학계에서 신호체계로 받아드려지던 스트레스 반응 또한 누적되면 실생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파급은 단순히 스트레스가 신체를 망가뜨린다는 데 그치지 않고, ‘외재인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뒤집어놓았다. 이는 오늘날 스트레스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일컫어지는 신경 내분비학자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Morris Sapolsky, 1957~)에 의해 학제화 되었다. 새폴스키는 『왜 얼룩말은 위궤양에 걸리지 않는가(Why Zebras Don't Get Ulcers, 1994)』에서 원숭이와 같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를 연구하며, 사회성이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요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로버트 새폴스키

 새폴스키는 종교나 사회경제적지위(Social Economic Status, SES)와 같은 지수가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 바탕에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온 진화적 경향이 있다고 지목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들은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구체적인 시공간과 상황에 대한 출처를 기억할 수 있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나아가 일화기억의 누적을 통해 복잡한 통계적 규칙을 의미 기억(Sementic memory)으로 가공시키고, 이를 말 그대로 ‘육체화’ 시켜왔다. 스트레스는 이러한 생존 전략에 따른 육체화 시스템의 일종이다. 이는 사회성을 가진 포유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환경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율신경계를 진화시켜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스트레스라는 말이 된다. 즉,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쉽게 노출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트레스 과정을 밟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화기억을 누적하여 의미기억으로 넘길 때 벌어지는 상상(Imagination)을 겪을 때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새폴스키는 이 과정에서 SES지수와 같은 사회성이 스트레스와 결합된다고 주장하며, 그 과정을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부자 동네에서 원활한 치안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산다면 카페에서 화장실 갈 때 노트북과 같은 고가품을 잃어버릴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치안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면, 카페에 노트북을 가져가는 것은 도난을 경험할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적인 상황으로 번안하면, 강남에 살면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가 높은 미래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일 때, 나는 그럴수 없다’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작동할 수 있다. 이는 상대적 가난이 스트레스를 높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연히 비교가 쉽고 소통이 활발한 환경은 스트레스를 받을 확률 또한 높인다.

     


스토리징 시스템 역량에 따라 내재화된 시스템


 지금까지 아주 거칠고 간략하게 고통과 피로가 어떻게 스트레스로 이해되었고, 스트레스에 대한 인지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알아보았다. 그 과정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고통과 피로에 대한 인지와 이해는 외재인에서 내재인으로 변해왔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나는데, 그 배경을 지목하자면 컴퓨터의 변화는 가소성(Plasticity)을 높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가소성이 높다는 것은 복잡한 프로토콜 시스템을 완성해 왔다는 뜻이며, 더 깊게는 그 프로토콜은 (적정엔지니어링이라는 전제 하에) 대용량 스토리지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대용량 스토리징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의 관점에서 고통과 피로의 재현은 컴퓨터 게임에서 스토리징 시스템의 역량이 높아질수록 내재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였다.


 게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주 간략하게 스토리징의 역사를 훝으면, 스토리지는 인간의 힘을 빌리는 방식을 통해 (거의 완전히) 외재적으로 존재해왔으나, 점차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되며 비가시적으로 변해왔다. HCI의 관점에서 초기 컴퓨터의 스토리징은 인간의 수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다. 이는 최초의 컴퓨터로 호명되곤하는 애니악과 같은 경우에도 오늘날 컴파일링(Compiling)에 해당하는 과정에 인간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즉, 컴퓨터의 높은 추상 수준을 인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인간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점차 마그넷 테이프인 플로피 디스크와 같은 자기장 방식에서 광학 방식의 CD로 발전되며 차차 가소성을 높여갔다. 그리고 SSD와 같은 반도체 수준에 이르러서는 높은 수준의 가소성을 확보했다. 더불어 하드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를 넘어서, 데이터센터 바탕의 클라우드 프로토콜 단계까지 제어할 수 있는 블록체인과 같이 소프트웨어 수준의 스토리지로 발전했다.


     

외재성을 빌린 형식적 고통, <Tennis for Two>


* 테니스 포 투 (출처: 위키피디아)

 스토리지가 컴퓨터 시스템 안으로 내재화된 과정은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기록을 외주화하여 인간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시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록이라는 인산의 피로가 컴퓨터 안으로 스토리지가 녹아들어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컴퓨터의 시뮬레이션 역량을 높여온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역시 고통과 피로를 인간의 영역에서 시뮬레이션의 영역으로 옮기며 고통과 피로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게임의 고통과 피로는 초창기 게임들에서도 (굉장히) 옅은 방식으로라도 관찰할 수 있는 요소다. 그만큼 초창기 게임들에서는 스트레스의 영역에 있다고 정의하는 게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추상성으로 고통과 피로를 재현했었으며, 초창기 게임에서 재현된 고통과 피로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외재성을 통해야만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고작해야 상징 수준의 고통과 피로를 재현한 셈이다. 이러한 상징으로는 승리와 패배라는 아주 기초적인 단위의 고통과 피로가 있었다.


 종종 최초의 게임으로 지목되곤 하는 <Tennis for Two>(1958)의 경우에 고통과 피로를 염두해두고 기획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의 개념은 명확했는데, 이는 게임의 디자인 자체가 테니스를 재현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Tennis for Two>는 원자력이 핵개발만으로 쓰이지 않으며, 평화로운 사용에도 기여할 수 있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매체였다는 점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기획된 게임이었다는 말인데, 이는 <Tennis for Two>를 디자인한 히긴보텀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놀이의 투기성’을 활용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놀이의 투기성’이란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에서 소개되는 놀이의 본성 중 하나로, 하위징아에 따르면 사행성을 내포하는 투기는 단순히 금전적 사행성을 넘어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한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 게임의 사례와 같이 주술적 의미를 바탕으로 한다.


* IBM 305 RAMAC (출처: 위키피디아)

     

 놀이의 투기성은 놀이의 4가지 원칙 중 하나인 강한 경쟁성과 쉽게 혼합될 수 있으며, 놀이의 이 두 가지 요소는 놀이의 참여자로 하여금 몰입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추측컨대 히긴보텀은 놀이가 가져오는 몰입효과를 겨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놀이의 투기성은 사행성이 내재한 것처럼 사적으로든 형이상학적으로든 손실이라는 고통을 창출할 수 있는 맹아이기도 하다. 따라서 <Tennis for Two>가 승/패를 전제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UI를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경기장에서 승/패라는 일회적인 제로섬을 통해 고도로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고통을 생산한다. 이는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그 외재성이 더 강해지는데, 여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껴 있다. 최초의 하드디스크(HDD)로 불리는 IBM 305 RAMAC의 경우, 보조 저장장치임에도 1톤이 넘는 장치였다. 즉, 애초에 기록으로 결과를 누적시킨다는 개념 자체가 <Tennis for Two>에는 심각한 오버엔지니어링이었을 수 있다.

     


누적과 고통의 현실적 재현, 헬스바 시스템과 그 후예들 


* 퐁 (출처: 위키피디아)

     

 <Tennis for Two>을 통해 형식적 고통이 재현된 이후 게임은 고통을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지 않았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는데, <Tennis for Two>를 계승하여 게임을 대중적으로 보급시켰다고 여겨지는 아타리의 <Pong>(1972) 또한 <Tennis for Two>만큼이나 간단한 그래픽과 규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역시 전용콘솔을 통해 보급되었다. 다만, 이를 단순히 스토리지의 용량과 크기 문제 등 하드웨어적인 문제만으로는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IBM이 8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상업적으로 출시한 해는 1971년이며, 이때 생산된 플로피 디스크들이 IBM370의 부품으로 사용되었다치더라도 소량의 데이터를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정착된 것은 1973년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보다는 가소성을 시스템에 프로토콜화 하는 방식에 있어서 편의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유의미한 HCI 가치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흔적은 <Pong>이나 가정용으로 출시된 <Home Pong>(1975)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당시 <Home Pong>에 사용된 RAM을 포함해 회로 기판의 분석을 차치하더라도, <Pong>과 <Home Pong>에서 재현되는 승/패의 형식적 고통은 <Tennis for Two>이 재현한 것을 횟수로 누적하는 방식에 그쳤기 때문이다. 고통의 재현에 있어 혁신은 오히려 아타리의 <가라테>(1979)와 같이 격투 시스템을 가진 게임을 통해 진행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격투를 통한 직접적인 가격의 고통을 기호적으로 재현하고는 있으나 원리적으로는 <Pong>의 수준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고통을 누적의 개념으로 바라본 사례는 ‘아타리 쇼크’를 2년 흘러보낸 뒤에야 이뤄졌다. 남코의 <드래곤 버스터>(1985)는 헬스바 시스템을 도입하며 누적된 스트레스를 게임에 내재된 UI의 형태로 구현하며 누적된 고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혁신의 바탕에는 PC의 보급과 같은 사건들 역시 한 몫했을 것이다.



* <스트리트 파이터2> 롱플레이 (출처: https://youtu.be/xI284D4y1q4?feature=shared)

     

 이러한 헬스바 시스템이 이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HCI로 활용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2>(1991)부터다. <스트리트 파이터2>에서는 헬스바가 일정부분 줄어들면 패배를 뜻하는 K.O.가 깜빡이는 방식으로 시각적 요소를 통해 긴박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긴박성의 연출까지 오는 데에는 <페르시아의 왕자>(1989)와 같이 플레이 시간을 60분으로 제한하고 이를 “60 MINUTE LEFT”와 같은 경고문구를 통해 시간을 한정 자원으로 제시하는 등의 플레이 디자인의 발전 또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게임 내에서 헬스바의 상태에 따라 K.O.가 깜빡이는 형태로 가소성을 적극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끌고 들어오며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는 방식의 스트레스를 제시하며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데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피로의 누적과 고통을 엮어 게임의 플레이 디자인에 가소성을 추가하는 방식은 가소성 스토리지가 어느 정도 완성된 PC들이 가정에 보급이 완료되어가며 더 각광받기 시작한다. <블러디 로어>(1997)의 경우에는 공격과 피해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동물로 캐릭터를 변신시킬 수 있는 수화 시스템으로 가소성을 내재화하기도 했다. 이렇게 특정한 값이 누적된 결과, 높은 공격성을 갖추게 되는 형태의 가소성 내재는 스트레스를 단순히 손상의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닌, 변화의 성질로 해석했다는 데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현대적 사례로는 프롬소프트의 <세키로: 새도우 다이 트와이스>(2019)의 체간 시스템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세키로>의 체간은 캐릭터의 현 상태와 피해의 누적과 방어 정도 등을 상세하게 고려하여 GAS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핍진성 높은 스트레스를 재현한다.


* <세키로> 체간 시스템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V_dJx5TRTQ)

     


<토탈워>, 예측하는 유닛과 스트레스 경험으로서 HCI


 <세키로>와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유닛)의 상태를 고려하여 스트레스를 플레이에 내재한 사례는 21세기 초반부터 대중화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세가의 <토탈워>시리즈(2000~)를 생각해볼 수 있다. <토탈워>시리즈에는 사기(Moral) 시스템이 내재되어 있는데, 물론, <토탈워> 초기작인 <쇼군: 토탈워>(2000)의 경우, 사기가 떨어지면 깃발의 색이 변하며 패주(敗走) 등으로 결과가 구현되는 스트레스 재현의 양상을 보인다. <쇼군>에서 독특한 점은 처형을 통해서 사기를 충전할 수 있게 시스템화 해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교육을 재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나름의 윤리를 새우는 행위를 플레이에 직접 재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게임 내에서 사건에 따라 사회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 사기 시스템을 통해 유닛이 처벌이라는 교육을 통해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학습했다고 여기는 HCI로 볼 수도 있다.


 <토탈워>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미디블: 토탈워>에 이르면, 사건에 따른 사회성 구성이 더욱 구체화 된다. <미디블>에서는 포로의 몸값을 받는 것을 통해 사기가 충전되기도 하는데, 이는 경제적 가치를 확인하는 사건이 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토탈워>는 내재된 가소성에 따라 단순히 게임의 UI요소를 변경시키는 것이 아닌, 스트레스를 시뮬레이션 플레이할 수 있게 구현해 높은 수준의 HCI를 구성해간다. 더불어 높은 수준으로 구현된 HCI는 당대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들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이를 통해 당시를 상상하게 만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통해 <로마2 : 토탈워>를 지나치게 플레이어블하게 만든 점, 그리고 그 직후 <토탈워: 아틸라>처럼 내지된 스트레스 시스템을 내러티브를 풀어내는데 적극 활용했을 때 그 체험이 크게 다르다는 점은 곱씹어볼만한 감상을 제공한다.


 이처럼 고통과 피로로서 게임에서 재현한 스트레스는 UI를 통한 연장된 체현을 넘어 시뮬레이션으로 적극 활용된다. 이는 무엇보다 시뮬레이션으로서 높은 품질의 몰입을 제공하는데, 이러한 게임에 대한 감상과 이해는 어떤 세계로 그 시뮬레이션을 이해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게임의 이용자가 게임에 내재된 스트레스 시뮬레이션을 통해 어떤 사회를 구성하느냐로 귀결될 수 있다. 특히 <SIMS>나 <리니지>와 같은 복잡한 MMORPG의 경우, (본지에서는 분량과 허락된 시간 상 패키지로 제한하여 언급된 타이틀들과 달리) 보다 생생한 가상의 SES를 구성하며 게임 내에서 체험하는 장소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의도치 않았던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통계라도 다루면 다행인) 사회학의 차원이 아닌, 심도있는 의료학적 이해와 폭넓은 컴퓨터 공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 고되고 지난하며 큰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작업이겠으나, 넓은 확장성이 기대되는 만큼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1] “Punishment, penalty, suffering or loss inflicted for a crime or offence.”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1.a,” September 2024, (https://doi.org/10.1093/OED/3543292423)
[2] “Physical or bodily suffering, a continuous, strongly unpleasant or agonizing sensation in the body”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pain (n.1), sense 3.b,” September 2024, (https://doi.org/10.1093/OED/9428204415)
[3]  “To have (something painful, distressing, or injurious) inflicted or imposed upon one; to submit to with pain, distress, or grief.” Oxford English Dictionary, s.v. “suffer (v.), sense I.1.a,” September 2024, (https://doi.org/10.1093/OED/7485489281.)
[4] Thomas W. Salmon,(1917). 「The Care and Treatment of Mental Diseases and War Neuroses ("Shell Shock") in the British Army」 (https://archive.org/details/caretreatmentofm00salmrich/page/8/mode/2up)
[5]  H. Matson (2016). 「The treatment of “shell shock” in World War 1: Early attitudes and treatments for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and combat stress reaction」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924933816023981)
[6] 국내에는 『스트레스: 당신을 병들게 만드는 스트레스의 모든 것』(사이언스북스)로 번역되어 있다.
[7]  Tristan Donovan(2010). 『Replay : the history of video games』 (https://archive.org/details/replayhistoryofv0000dono)
[8] Edwin Zschau.(1973). "The IBM Diskette and its Implications for Minicomputer Systems".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6536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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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리서치앤컨설팅그룹 STRABASE 뉴미디어・게이밍 섹터 연구원.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저작권 기술 산업 동향 조사 분석」(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부문 신인평론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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