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와 랜디 오턴을 한몸으로 간주한다—WWE 비디오 게임을 통해 온몸으로 슈퍼스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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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2. 10.
내가 WWE 비디오 게임을 처음 접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 조금 전, 넷플릭스 다큐 시리즈 〈미스터 맥마흔〉이 공개되고 조금 지나서, 그리고 프로레슬링이라는 예술 형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지 반 년 정도 지나고서였다. ‘홈파티’라고 수식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20대 남성 넷이 모인 자리, 친구의 플레이스테이션 컬렉션에서 내가 선택한 파티 게임이 〈WWE 2K22〉였다. 소프트를 켜고 우리는 바로 플레이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에 착수했지만, 옷의 색상까지는 까지도 못하고 끝없는 이름과 이름의 사이를 헤매다가 (WWE 2K22는 정말 세세하게 ‘이름’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 프로레슬러 이름, SNS 계정 이름, 링에 입장할 때 나오는 이름, 그걸 부를 때 음절마다 읽는 방법……) 인내심이 바닥난 우리는 우선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캐릭터를 골라서 해보자고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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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E 2K22〉 실제 플레이 화면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의 ‘원작’에 해당하는 WWE 프로레슬링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어릴 때 프로레슬링을 보면서 자라지도 않았다. 몇십가지는 되어 보였던 선택지 속에서 유일하게 머릿속에서 이름과 얼굴을 연결해서 떠올릴 수 있었던 이름을 플레이어 캐릭터로 고르고, ‘세컨드’ 캐릭터를 고를 때는 WWE를 잘 아는 친구들이 가장 크게 웃은 이름 앞에서 커서를 멈췄다.
이 넷의 조합의 어디가 그렇게 웃긴지, 나는 아직 정확히 이해할 정도로 WWE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WWE 2K22〉에 앞서 혹은 평행하게, TV에서 2022년의 WWE가 방영되고 있었으며, 우리가 만들어낸 화면이 현실의 2022년의 WWE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광경이라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개그 동인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같이 웃기에는 충분한 단서가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WWE를 잘 알고 있다면 위의 이미지를 보고 픽 웃었을지도 모른다.
‘프로레슬링 게임’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대전격투게임’이나 ‘트레이딩 카드 게임’처럼 구체적인 범위가 존재하는 장르가 아닌 만큼, 프로레슬링을 다룬 것이라면 무엇이든 프로레슬링 게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쨌거나 가장 큰 한국어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인 나무위키의 ‘프로레슬링/게임’ 항목은 게임 플레잉 방식과 상관없이 ‘원작’에 해당하는 실제 프로레슬링 단체가 어디인지(“WWE 관련”, “올 엘리트 레슬링 관련”, “그 외 단체 관련”), 혹은 처음부터 허구인지(“가상 세계 관련”)를 기준으로 분류되어 있다.
나는 주로 휴대용 콘솔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닌텐도 스위치로도 즐길 수 있는 패미컴 〈프로레스〉(1986), 그리고 프로레슬링에 박식한 친구들 사이에서 꺼내면 배로 재미있는 〈프로레스 검정 시험 DS〉(2010)가 가장 처음 접한 프로레슬링 게임이었다. 또 2D 모에 문화를 좋아하는 오타쿠로서 미소녀 캐릭터가 등장하는 〈럼블 로즈〉 시리즈 등에도 관심이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은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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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레스〉(1986)의 단순한 구성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사람 셋만 있으면 프로레슬링이 성립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상기시킨다.
WWE와 WWE의 회장 빈스 맥마흔이 80년대 이후의 미국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온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계 미국인 영화감독 에릭 바일러[1]는 “현실을 구부리는 프로레슬링의 법칙이 케이블 뉴스, 토크쇼, 리얼리티 TV로 확대된” 1980년대를 미국 문화 격동의 시기로 꼽는다. 예를 들어, 토크쇼를 켜면 ‘정치 토론’을 볼 수 있지만, 사실 패널들은 모두 같은 방송국으로부터 고용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일종의 프로레슬링이라는 것이다[2].
비평가 마크 피셔는 리얼리티 TV의 대중화가 “‘부’와 ‘명성’ 이상의 것을 열망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내보일 수 있었던 대중 문화 영역을 지워”버린 결과, “환상 대상”을 잃어버린 우리가 이제는 “환상에 빠진 주체 자체와 ‘동일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고 주장했다[3]. 이를 뒷받침하듯, 바일러가 경험한 WWE는 만약 (곧잘 퀴어와 소수인종으로 이루어진) 악역이 선역을 이기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칙을 했기 때문이라는 세계관에 동조하고 호응하는 관중 역할을 연습하는 장이었다.
바일러의 팟캐스트에서 아브라함 조세핀 리즈맨[4]은 트럼프의 성공적인 2007년 WWE 레슬매니아에서의 등장을 그가 이후 버서(birther) 음모론[5]의 선두주자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넓혀나갈 수 있었던 배경으로 분석한다. 바일러와 리즈맨에 의하면 트럼프주의 및 파시즘이 그 지지자들에게 어필하는 최대의 매력은 시대를 되돌려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이다. 그 동심은 때로는 “원하는 것은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고 악은 반드시 쳐부술 수 있다”는 선악의 단순화와 분명함이기도 하고, 때로는 트럼프의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있었을 뿐인 40분짜리 댄스쇼[6]”나 적어도 80~90년대의 모든 대중문화 향유자들이 즐겼다고 하는 프로레슬링과 같은 문화적 오브젝트이기도 하다.
사상가 롤랑 바르트는 관습과 이데올로기를 기능하게 하는 기호들에 관해 저술한 1957년 저서『신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레슬러는, 적어도 잠시 동안에는, ‘자연’으로 통하는 열쇠, 선과 악을 구분해 내는 순수한 제스처, 그리고 그렇게 겨우 이해할 수 있게 된 ‘정의’의 형태를 드러내기 때문에 신적인 존재로서 남게 되었다.”[7]
TV 이전, 1950년대 프랑스의 레슬링은 서커스나 “파리에서 가장 지저분한 홀에 숨어서 hidden in the most squalid Parisian halls”[8]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30, 40년 후 빈스 맥마흔은 TV 방송 프로그램을 장악하는 것으로써 WWE를 프로레슬링의 주류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고, 바르트가 본 것과 같이 대중의 정서를 온전히 표현하는 예술이었던 프로레슬링은 반대로 대중에게 특정한 정서를 일방적으로 발신할 수 있는 권력을 TV를 통해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코로나라고 하는 아주 특정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TV와 동시에 현장에 존재하는 공연예술의 측면을 지켜왔으며, 빈스 맥마흔은 WWE를 통해 트럼프주의의 목소리를 키웠을지언정 거기에 대한 이견을 말할 여지까지는 없앨 수 없었다. 게다가 동시대 서브컬처 연구자 우노 츠네히로가 지적하듯, 2010년대를 거쳐 2020년대에 접어든 “현재 문화의 중심은 종이나 스크린 위의 타인의 이야기를 수신하는 쪽이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9].
2024년,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방영된 WWE에는 현장의 사람들이 넷플릭스와 맥주 브랜드를 홍보하는 헐크 호건을 야유하는 대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대중은 인종차별적 언어 사용과 트럼프 지지자로 알려진 호건을 영웅적인 선역으로도,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 보였다. 이 현상을 두고 연구가 샤론 메이저[10]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트럼프는 프로레슬링에 몹시 영향을 받았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 한가운데의 링 위에서에서 한가운데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죠. 그는 물론 아주 기분이 좋겠죠. 하지만 그 영향력을 정말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입니다.[11]”
물론 모든 사람이 헐크 호건에게 야유하기 위해 그 현장에 있을 수는 없다 (WWE는 그러한 구조를 이용해 현장에 있는 관중보다 훨씬 많은 대중을 향해서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발신해왔다.) 그렇지만 우노는 확장현실의 시대에 접어든 우리가 “혁명적인 접근이 아니라 해킹적인 접근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나이언틱의 〈인그레스〉 및 〈포켓몬 GO〉와 같은 AR 게임을 이 시대의 ‘해킹적인 접근’의 예시로 든다[12].
그렇다면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로 WWE를, 그리고 WWE를 벗어나서 한 번도 프로레슬링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WWE의 리얼리티를 해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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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E Smackdown vs. Raw 2009〉 플레이 화면
〈WWE 2K22〉, 〈WWE Smackdown vs. Raw 2008〉, 〈WWE Smackdown vs. Raw 2009〉 총 3작품을 플레이해본 바,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는 크게 커스터마이징 기능, 대전 모드와 가벼운 RPG 모드, 그리고 ‘액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WWE 게임은 ‘자유도’가 높다. 게임을 평가할 때, ‘자유도’는 곧잘 쓰이는 단어이지만 그 쓰임의 범위는 넓고 추상적이다.〈2K22〉에 이르러서는 음절 단위로 이름 부르는 방법을 조정하거나 외부 이미지로부터 텍스처를 불러올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기능의 풍부함도 일종의 자유로움이고, 대전 모드는 물론이고 스토리 모드에 해당하는 RPG 파트에서도 얼마든지 쓰고 싶은 기술을 전부 연출하고 상대를 당장 ‘핀폴’로 제압하지 않는 것을 시스템적으로 허용하는 것도 자유로움의 한가지이다.
그리고 ‘액션’. 액션 영화나 만화와 같이 감상하는 ‘액션’과 달리, 비디오 게임의 액션은 플레이어의 ‘액션action’ 즉 행동을 요구한다는 특징이 있다. 통념적으로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되는 조이패드나 키보드 조작조차, 그것이 손가락 끝이나 손목, 목이나 허리 따위에 전달하는 촉각과 영향은 분명하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비디오 게임 플레이어들은 곧잘 몸에 맞는 키보드나 게이밍 의자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 닌텐도 DS판 WWE 시리즈는 그런 의미에서는 각별하게 느껴졌다—나에게 있어서 터치스크린에 나이테 같은 흔적을 남기는 터치 조작과 천식이 있는 몸으로 힘껏 숨을 불어넣게 하는 마이크 입력은 몹시 신체적으로 와닿는 인터페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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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기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잡아야 합니다.”
시간을 들여 세부적인 커스터마이징을 마친 플레이어 캐릭터는, 꼭 ‘실제 나’와 닮지 않았더라도 나와의 고유한 관계성을 갖기에 몰입할 만한 대상이 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자신의 자아와 연관된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액션’을 통해 신체적인 차원에서도 몰입한다.
우노 츠네히로는 오늘날 〈포켓몬 GO〉와 같은 게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기 위한 렌즈로써 의도되었다고 해석하며, 이런 게임을 플레이하면 2차창작을 할 때와 같이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능동적인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3].
근본적인 영향력은 관객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부터 정해질 수밖에 없는 WWE 프로레슬링이 게임적인 리얼리티 쇼라면,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는 WWE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표현하기 위한 2차 창작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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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WE2K22 】#홀로파이터 대집합!? 더빙으로 싸우는 아이돌들 Fighter All Stars! voice over wrestling!【홀로라이브/사쿠라 미코】
버츄얼 유튜버 그룹 hololive는 WWE 2K22의 정교한 커스터마이징 기능으로 멤버들의 모습을 구현해서 플레이하는 기획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들은 재현된 레슬러 캐릭터들에 이입해서 플레이할 뿐만아니라, 녹화한 플레이 영상에 육성肉声을 입히는 더빙 작업을 통해 더더욱 WWE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전유하고 있다 (말그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일찍이 마크 피셔가 일컫길 리얼리티 TV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환상 대상”이 부활할 수 있을 듯한 낌새를 느낀다.
게임속의 링 아나운서가 당신의 이름을 한 음절씩 정확히 호명할 때, 그것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호명하는 목소리이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서 생각하고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일깨워주는 점호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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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한몸이 된 ‘랜디 오턴’
주관을 가지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반드시 긴 시간을 들여서 세세한 커스터마이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닌텐도 DS용 〈WWE Smackdown vs. Raw〉시리즈에서 대개 랜디 오턴으로써 플레이했다. 그래도 그 ‘랜디 오턴’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움직임과 그 결과를 비디오 게임 속에서 보여주는, 그러니까 나를 반영하는 나만의 고유한 ‘랜디 오턴’이다. 나는 사실 WWE의 랜디오튼이 선역인지 악역인지, 이기는 경기가 많은지, 혹시 반칙을 통해서만 이길 수 있는 레슬러인지 전혀 모르지만 내가 플레이하는 랜디 오턴이 어떤 캐릭터인지는… 내가 나 자신을 아는 만큼은 잘 알고 있다.
우노 츠네히로는 오늘날에 대해 “이 확장현실의 시대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깊게 파고들어서 이 현실을 확장하고 바꿔가기 위한 상상력이 비판력 있는 허구로서 기능하는 시대”라고 평했다. 우리 시대가 WWE의 영향력으로부터 당장 탈출할 수 없다면, 이를테면 WWE 비디오 게임 시리즈를 플레이함으로써도 우리에게 발신되는 메시지들을 비판하고 속아주리라 기대하는 거짓말로 점철된 현실을 ‘해킹’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