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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산책하기(장려상)

07

GG Vol. 

22. 8. 10.

지난 5월 2일 민형배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인물을 통한 음란행위”를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1).  물론 민형배 의원의 개정안은 현실의 성폭행 범주를 고스란히 옮겨와 메타버스 속 성범죄를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개정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메타버스라는 아바타를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보며, 아바타의 경험이 실제 신체의 체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타버스 등의 용어로 불리는 가상공간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은 게임이다. 디지털 게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이동 및 탐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타리의 게임 〈어드벤처〉(1979)의 이스터에그를 찾아내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마지막 미션이 시사하듯, 게임이라는 경험의 본질은 공간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험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메타버스 성범죄의 사례는 게임에서의 경험이 실제의 경험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MMORPG에서 타 유저와의 의사소통, 오픈월드 게임에서 마주하는 NPC와의 랜덤 인카운터 등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현대인이 마주하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나 에드거 앨런 포 등 19세기 문필가의 작품을 분석하며, 대도시 군중의 모티프가 반복됨을 지적한다. 그는 이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대도시 군중 속을 걷는 거리 산책자의 충격체험이 신문, 아케이드의 간판, 대중교통 등이 초래하는 대도시의 촉각적 경험과 충격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2).  이는 변화하는 현대 파리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는 산책자의 행위에 주목했던 보들레르의 관점이, 대도시 군중과 어깨를 부딪히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대도시의 산책자의 상황에 이르러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변화는 벤야민이 살아가던 1920~30년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동시에 대도시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고 있다. 어쩌면 벤야민이 말하던 충격체험은 대도시의 속도 속에서 삭제된, 폴 비릴리오의 말을 빌리자면 “속도에 의한 공간의 절멸”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경험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디지털 게임이 구현하는 가상공간의 경험은, 삭제된 경험을 되살리는 것일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서로의 아바타가 맞닿는 과정이 플레이어의 신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지털 게임은 인간에게 실제 살아가는 공간과 유사한 현실성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디지털 공간의 현실성은 가상공간이 더 이상 실재가 아닌 가상이라 치부되며 실제의 열화된 버전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과 동등한 선상에 놓고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하게 된다3).  이러한 인식 속에서 게임이 제공하는 공간 경험은 신체가 느끼는 ‘정동적 놀람’의 상태를 동반한다. 게이머들이 〈레드 데드 리뎀션 2〉(2018) 속 아서 모건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감동을 느끼거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 속 엘리의 폭력적 복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그러한 ‘정동적 놀람’ 상태의 대표적 예시다.


공간 경험에 기반한 정동적 놀람의 상태는 앞서 언급한 산책자의 충격경험과 유사하다. 앞서 언급한 예시를 이어가자면, 아서 모건의 여정을 함께한 플레이어의 경험은 광활한 게임 속 영토를 탐험하는 경험과 함께한다. 선형적인 구성의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엘리의 여정을 함께하더라도, 그것은 게임 속 스테이지를 옮겨 다니던 이동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게임 속 플레이어블 캐릭터 혹은 아바타의 가상 신체를 통해 게임 속 공간을 돌아다니는 산책자가 된다. 그러한 산책자로서의 경험이 강조된 게임을 꼽자면 코지마 히데오의 〈데스 스트랜딩〉(2019)이 있겠다. 〈데스 스트랜딩〉은, 물론 전투가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동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샘은 배송기사고, 멸망 이후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이 쉘터에서 저 쉘터로 배송한다.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콘텐츠는 그러한 배송 자체다. 


때문에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은 ‘배송하는 감각’을 재현하는 것에 있다. 디지털 게임이 게임기기의 입력장치를 통해 캐릭터의 움직임을 모방한다고 할 때, 〈데스 스트랜딩〉의 조작방식은 무거운 화물을 등에 짊어지고 움직이는 주인공 샘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체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 짊어진 화물의 중량에 따라 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그때마다 게임패드의 트리거 버튼을 알맞은 방향으로 눌러 샘의 무게중심을 잡아주어야 한다. 만약 무게중심을 잃은 샘이 넘어지게 된다면 짊어진 화물들이 쏟아지게 되고, 화물들을 다시 주워야 하는 것은 물론 화물이 데미지를 입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샘이 황량한 게임 속 세상을 걸어 다닐 때뿐 아니라, 바이크 등 탈것에 탑승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는 샘을 통해 게임 속 세계를 산책하며 그곳을 경험한다. 게임패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물리적 경험은 게임이 지닌 가상공간 속에서의 체험을 강조한다. 물류를 배송하며 겪는 BT(Beached Things, 좌초된 것들)나 택배도둑 뮬(Mule)과의 전투,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후에 따른 어려움 등은, 비록 벤야민이 정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일지라도, 일종의 충격체험을 플레이어에게 선사한다.


혹은 산책을 의도치 않은 게임 속에서 산책을 시도함으로써, 게임에 내재된 규칙을 전용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2021년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2017) 내에서 진행된 〈에란겔: 다크투어〉 퍼포먼스가 대표적인 예시다. 퍼포먼스는 온라인으로 접속한 다른 참가자들을 이끄는 리드 퍼포먼서로 게임평론가 이경혁, 디지털 스토리텔링 연구자 권보연, 기계비평가 이영준을 섭외하여 각기 게임을 잘 아는 원주민, 게임을 잘 알지만 다른 게임세계에서 이주한 이주민, 게임 자체를 모르고 완전히 낯설게 초대된 이방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하고, 게임방송 BJ를 섭외하여 퍼포먼스를 중계하였다. 〈배틀그라운드〉 속에서 리드 퍼포먼서 및 이들을 돕는 조교 역할을 수행하는 퍼포머들이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 내의 지역인 ‘에란겔’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한다는 컨셉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에란겔: 다크투어〉의 메뉴얼은 "단 한 명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대신, "단지 총성을 멈추는 것만으로도 이 게임 공간 속에 의미가 풍부한 각종 오브젝트와 건물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4) 이라며, 마치 몰락한 구 소비에트 연방의 어느 변두리를 연상케 하는 게임의 무대가 되는 가상공간 에란겔 섬에 대한 다크투어리즘을 제안한다. 참가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관광객으로서 게임에 접속하고, 세 명의 리드 퍼포먼서가 진행하는 게임 내 강연의 청중으로, 다른 퍼포먼서 및 참가자들과 함께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는 산책자로, 마지막에는 한자리에 모여 게임이 구현하는 동작의 한계 내에서 집단적인 의식의 춤을 추는 퍼포먼서로 참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에란겔: 다크투어〉는 디지털 게임의 가상공간을 산책하고 관광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으로 그곳을 경험할 것을 제안한다.


세 리드 퍼포먼서의 강연은 기본적으로 디지털 게임이 그려내는 가상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일종의 정서적 피난처나 단순한 유희공간이 아닌, 그것이 드러내는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규칙, 상호작용 등의 요소들을 통해 현실과 관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배틀그라운드〉가 묘사하는 가상공간이 지금의 모습이 되기 전에는 어떤 인류학적 장소였을 수 있다는 암시를 찾아내거나, 각기 다른 규칙이 존재하는 다른 가상세계 혹은 현실세계의 이야기를 에란겔의 상황과 중첩시키는 등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전용하는 것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산책자의 기억술을 대도시가 아닌 디지털 게임이라는 대안적 공간 안에서 소생시킨다. 


또는 정말로 산책과 결합된 게임의 형태를 떠올려볼 수도 있다. 나이언틱이 개발한 〈포켓몬 고〉(2016)를 실행하면 구글맵(Google Map)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지도가 등장한다. 현실의 지리학을 고스란히 가져온 지도 위에 포켓스탑과 포켓몬 체육관이 표시되어 있고, 플레이어의 실제 위치는 스마트폰의 GPS를 통해 게임 내 캐릭터의 위치와 동기화된다. 〈포켓몬고〉의 지도는 아무런 지명, 건물명, 교통수단 정거장 등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단지 텅 빈 지도 위에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공공성을 띠는 조형물 등이 포켓스탑의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의 생김새마저 포켓스탑을 터치해야 등장하는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포켓몬 고〉의 플레이어는 평소라면 지나쳤을 장소에 게임을 위해 머무르게 된다. 이를 통해 익숙한 산책로, 등굣길, 출퇴근길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게임의 공간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접속 가능하지만, 게임의 가상공간 자체가 현실의 지리학을 따르는 덕분에 게임의 가상공간과 현실의 공간 사이의 위계가 무력화된다. 


그럼으로써 〈포켓몬 고〉의 유저들은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희귀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포획할 수 있는 레이드나 인게임 재화를 얻기 위해 필수적인 체육관 점령 등 다수의 유저가 참여해야 하는 콘텐츠는 지역 별로 〈포켓몬 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게끔 유도한다. 굳이 오픈 채팅방 등을 통해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레이드나 체육관 점령 등을 위해 〈포켓몬 고〉를 켜고 산책하다 보면 다른 유저를 마주칠 수 있기도 하다. 그러한 상황을 발생시키는 것 자체가 〈포켓몬 고〉의 콘텐츠인 셈이다. 게임이 만들어내는 가상공간이 점차 현실의 공간과 위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소위 메타버스의 시대라 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포켓몬 고〉의 사례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다. 더 나아가 정여름 작가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처럼 실제 공간 위에 덧씌워진 가상이라는 〈포켓몬 고〉의 컨셉을 영화와 미술 작업에 활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다시 처음 언급한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 이야기로 돌아가자. 게임의 가상공간 안에서 산책자로서 활동할 수 있다면, 그것에 따른 부작용 내지는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 또한 가상공간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산책자, 그러니까 플라뇌르(flâneur)는 프랑스어 남성명사다. 이는 보들레르나 벤야민이 플라뇌르를 개념화하던 시기의 산책자는 주로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닿는 사물적 대상이거나 소득을 얻기 위해 길 위를 서성이는 성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로런 엘킨이 제시한 "도시를 걷는 여자들", 즉 여성명사 플라뇌즈(Flaneuse)는 그러한 개념어의 전복이다. 


“성폭력 특례법 일부개정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은 게임과 메타버스 내에서도 플라뇌르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플라뇌즈는 아직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게임에서의 공간 경험이 현실에서의 경험과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아니, 굳이 분간할 필요 없이 제2의 자연으로 가상공간이 존재하는 상황에 가깝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게임 내 성폭력, 각종 차별과 혐오발언은 자유로운 산책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게임 속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경험의 질을 규명하는 것은 그곳의 성격을 직시함으로써, 이곳저곳에 산재한 문제를 해소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의 경험이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 될 때, 모두가 동등하게 게임 속을 산책할 수 있을 때, 가상공간의 유토피아라는 허황된 꿈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1) 국민참여입법센터 국회입법현황, https://opinion.lawmaking.go.kr/gcom/nsmLmSts/out/2115468/detailRP (2022.06.27 접속)
2)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4』, 최성만(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10.
3) 오현주, 「디지털 게임 공간의 체험적 특성」, 홍익대학교 대학원 영상학과 박사논문, 2016.
4) <에란겔: 다크투어>에 관한 스테이트먼트, 매뉴얼 등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notion.so/03-20-21-14-00-15-00-2-4652d0e6c472438595a27e889dd55b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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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학부에서 예술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미술, 게임, 방송 등 시각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영화평론가, 팟캐스트 [카페 크리틱] 진행자, 공동체상영 기획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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