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타임과 숨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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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2. 10.
자투리 시간은 과연 남는 시간일까
‘자투리 시간’이 사회적 화두였던 적이 있다. “일과(日課) 사이에 잠깐씩 남는 시간”이라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특정할 수 없는 시간이 때론 무언가를 더 이룰 수 있는 기회로, 때론 어떻게 보낼 것인지 모색해야 하는 과제로 여겨졌다. 자투리 시간을 언급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시기에 따라 다른 맥락으로 읽혔음을 파악할 수 있다. 1983년에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자오락실이 성행하고 있음을 다룬 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남는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소개한다. 십여 년 뒤인 1994년도에는 점심시간을 취미나 자기계발을 위해 사용하는 젊은 회사원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점심시간을 “직장상사를 ‘모시고’ 식사하면서 잡담을 나누는 ‘한가한 시간’이 아니라, 바쁜 생활 중에도 자신을 계발하고 취미를 살리는 ‘황금의 자투리시간’으로 여긴다고 소개한다.
그로부터 10년 사이 자투리 시간은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성격이 되었다. “(입시를 위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한자와 영단어를 외우는 것이 쌓이면 학습량이 제법 될 것”이라는 칼럼은 허투루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 해야 성취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경쟁적인 분위기를 시사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토론과 성찰 없이 일단 더 나은 삶을 살려면 남들보다 노력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강렬히 자리했던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혹은 강요)는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개인의 선택을 압박했던 셈이다(청소년의 수면권 보장을 근거로 게임 셧다운제를 추진하면서 청소년의 심야 학습에 대한 보호에 대한 반론에는 딱히 응답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모두가 자투리 시간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마지막 퍼즐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휴대전화로 자투리 시간에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지그시 ‘염려’하는 기사도 있다. 무선 인터넷과 스마트 디바이스가 대중화되면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선택지가 늘었다. 장소에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면서 자투리 시간의 경계도 불분명해졌다. 순서를 두고 차례차례 진행되던 일들이 여러 갈래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잠깐씩 남는 시간’이라는 것이 불분명해지면서 남는 시간에 하던 일이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무엇을 할지 떠올리는 것 대신 무엇을 먼저 할지 선택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2015년에 ‘스낵 컬쳐’라는 이름으로 짧은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는 개인의 자투리 시간을 점유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투리 시간은 개인이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게 된 걸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2024년도 기사들은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 현금처럼 활용할 수 있는 포인트를 모으는 ‘앱테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스마트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고 숏폼 시청 대신 책을 읽는 등 일부러 자극적인 콘텐츠와 거리를 두는 ‘도파민 디톡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한다. 자투리 시간을 ‘남김 없이’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환경 속에서 개인들이 일상의 균형과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쿨타임, 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인, 선택해야 하는
게임 플레이 중 행동과 다음 행동 사이의 시간인 쿨타임은 자투리 시간과 두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자투리 시간이 하루의 어떤 과업과 그다음 과업 사이에 있는 시간이라면 쿨타임은 게임 중의 어떤 행동과 그다음 행동 사이에 있는 시간이다. 분량은 각기 다르지만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주에 제약이 따른다. 둘째,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스스로 선택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투리 시간의 맥락이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음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꾸준히 당사자의 몫이었다. 쿨타임도 마찬가지다. 게임의 성격이나 설정된 조건에 따라 상황은 다르지만 그 시간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는 게이머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쿨타임은 어떻게 보내야할까? 게이머의 선택인 만큼 정답은 없지만 쿨타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쿨타임을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반드시 활용해야 하는 전략적인 요소로 여겨 쿨타임에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하는 반문에 대한 나름의 답도 될 것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쿨타임은 왜 (하필) ‘쿨’타임이냐는 것이다. ‘핫’(hot)과 ‘콜드’(cold) 사이를 뜻하는 ‘쿨’(cool)은 유무형의 멋짐을 표현하는 문화적 맥락의 의미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쿨타임이 ‘쿨다운’(cooldown)을 차용한 표현임을 고려하면 쿨타임의 ‘쿨’은 차갑고 서늘하며 침착하다는 사전적 의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특정한 기술이나 아이템만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거나 캐릭터 능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등 쿨타임이 게임에서 플레이가 과잉 또는 과열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과도 부합한다는 점에서 쿨의 사전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쿨타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균형과 침착함이라면, ‘쿨’말고 다른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핫과 콜드 사이에는 ‘웜’(warm)도 있고, 중간 혹은 완화한다는 의미의 ‘모더레이트’(moderate)나 균형 잡힌이라는 의미의 ‘밸런스트’(balanced)도 있다. 차분함을 뜻하는 ‘논살란트’(Nonchalant)나 냉정함을 뜻하는 ‘상프루아’(Sangfroid)는 왠지 어감도 좋다. 그런데 이 단어들에 ‘타임’을 붙이면 나름대로 약어를 만들어 입맛을 살려봐도 여전히 ‘쿨’만 못하다. 이렇게 느끼는 건 ‘쿨’이 게임 말고도 일상적으로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 맥락도 있긴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쿨타임이라 부를 수 있느냐다. ‘로딩’도 쿨타임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장소나 레벨이 전환될 때, 목표 달성을 실패해 체크/세이브 포인트로 다시 돌아가거나, 리스폰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쿨타임에 해당할까? 로딩은 게임 플레이 자체가 유보되는 반면 쿨타임은 특정 행위만 제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이로 인해 로딩은 게임 전략의 일부로 활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쿨타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쿨타임의 초점을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순간, 즉 쿨타임이 종료되는 시점인 ‘쿨하게 다운된 상태’에 두는 것이다.
그런데 초점을 쿨하게 ‘다운되어가는’ 과정으로 옮기면 로딩도 쿨타임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피파〉 시리즈의 로딩 또는 대기 화면에서 플레이 연습을 할 수 있다거나, 레이싱, 대전 액션 게임 등에서 스테이지 종료 후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여준다거나, 로딩 화면에서 게임에 대한 각종 정보나 팁을 제공하는 것은 게임 전략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도, 이어질 다음 플레이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쿨타임의 기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로딩은 게임이 다음 단계를 연산하는 과정이지만 이 시간동안 게이머는 특정한 동작을 연습하거나 미리 조작해보면서 워밍업을 하거나, 앞서 잘한 혹은 잘하지 못한 플레이를 되새기거나 복기하고, 게임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면서 이제 이어질 플레이를 어떻게 할지 구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a tempo, 자기만의 페이스로
이처럼 균형과 침착함을 추구하는 쿨타임의 범위를 로딩까지 포함한다면 쿨타임을 게임 플레이 중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숨고르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다. 앞서 사용한 스킬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유닛 생산이 마무리되어서 추가 생산을 지시할 수 있을 때까지 ‘벼르는’ 것도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앞서 플레이한 내용을 만족스러워하거나 불만족스러워하며 어떤 부분을 잘 했거나 그렇지 않았는지 복기하는 것도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게임이나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로딩에 걸리는 시간동안 가만히 있는 것도 (물론) 숨고르기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행위들이 게임 플레이와 플레이 사이를 잇기 때문이다. 승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쿨타임에 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가 ‘이기려면 해야만 하는 행위’로 좁혀지겠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즐거움을 목적으로 한다면 쿨타임에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자기만의 페이스’(my own pace)에 따라 게이머 스스로 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숨고르기가 중요한 이유는 지속에 있다. 게임은 승패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재미있지만, 이겼을 때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충분하다면 지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을 우선시한다면 패배는 게임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며,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이길 수 있느냐를 가장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에 흥미를 느끼는 동안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고, 다른 게임을 선택할 때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으로 고를 수 있다. 숨고르기는 게임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시, 쿨타임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무엇을 선택하든 자기만의 페이스에 따라 게이머 스스로 정하면 된다. 게임에서 쿨타임이 마련된 것은 게임 디자인적인 배경 때문이었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게이머에게 달렸다. 게임의 쿨타임은 해당 게임을 안정적으로 (그리고 오래) 플레이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게이머가 플레이하는 게임은 그 게임말고도 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쿨타임을 두고 치킨을 먹는 것은 치킨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인 것처럼 게임에서의 쿨타임도 게임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일 필요가 있다. 하여 나는 쿨타임에 숨고르기 말고도 ‘관조’도 함께이길 바란다. 게임을 하고 있음을, 할 게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더해진다면 지금 하고 있는 게임과 앞으로 하게 될 게임이 더 큰 기대와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투리 시간에 부러 밖으로 나가 볕을 쬐고 산책하는 것이 일상을 더 윤택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