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게임, 멀티플레이, 그리고 경쟁
08
GG Vol.
22. 10. 10.
한때는 ‘온라인 게임’이 곧 새로운 미래가 될 거라 믿던 시기도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이벤트까지 거친 후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을 수용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게임은 여전히 오프라인이 중심인 느낌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첫째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감각이다. ‘경쟁’을 유도하는 게임 시스템이라면 인간을 상대로 하는 편이 가장 재미있다. AI와 경쟁하는 것은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진다. 가정용 게임기가 ‘2인용’ 컨트롤러를 동반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온라인을 활용한 FPS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등도 이러한 맥락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쟁’만이 이런 감각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협력해 공통의 과제를 달성하는 것 또한 게임을 ‘함께’하는 일의 묘미다. 온라인을 활용한 게임 자체는 PC통신 시대에 이미 등장했는데, 이른바 MUD(Multi User Dungeon) 게임이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전세계 이용자들과 함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MMORPG들이 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 사람이 공통의 과제를 해결한다는 사실 자체가 만들어내는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두 번째 기대, 일상과는 분리된 또다른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공통 과제를 달성하려면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협력을 할 수 없는 상대와는 필연적으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류하고 협상하며 손을 잡았다가 다시 놓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하나의 ‘사회’가 성립되고 작동하는 과정이 게임 내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게임 사회가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으므로, 이 안에서의 ‘나’ 역시 현실 사회와 분리돼있다. 따라서 ‘나’는 게임 안의 ‘아바타’에 대안적 자기상을 투영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현실 사회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게임 내 사회를 대한다. 따라서 게임과 현실은 형식상 분리돼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유사성을 가진다. 혹시 그렇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나’는 게임 내에서 ‘대안적 나’로 존재하기 위해 게임 내 법칙이 어느 정도 현실을 따르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의 나’는 게임 시스템과 상호 교류하며 긴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게임 내 세상이 현실처럼 부조리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게임 내의 현실 모사가 마치 ‘성경공부’ 같을 필요까지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의 부조리는 게임 시스템에 어느 정도 실감이 날 만큼만 반영되어야 한다. 이용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조차 현실과의 유사성이라는 명목으로 게임에 재현되면 ‘대안적 나’를 게임 내에서 추구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의 이용자인 우리는 현실의 무엇에 대한 재현까지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보면 이게 드러난다.
초창기 MMORPG의 설계자들은 게임 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종합격투기 링처럼 여겨지기 보다는 대안적 사회로서 소비되기를 바랐다. 울티마 온라인이나 에버퀘스트와 같은 사례를 보면 그렇다. 초기 울티마 온라인의 경우 최대 7개의 부문 스킬에 대해서만 ‘그랜드 마스터’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채광’, ‘낚시’, ‘벌목’과 같은 생산 기술부터 ‘검술’, ‘궁술’ 등의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킬의 종류는 50가지에 달한다. 이용자 입장에선 이 중 자기 캐릭터 컨셉에 맞는 스킬 7개 스킬만을 선택해야 하는 거다. 레벨을 올리면 ‘아바타’를 한도 끝도 없이 강화할 수 있는 현대 게임 디자인과는 다른 형태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다른 사람과의 협동을 장려하고 레벨 올리고 사냥하는 것 외의 활동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용자는 결과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감당하게 된다. 과거 MMORPG 이용자들이 자기 경험담을 연재의 형식으로 올린 글이 인기를 얻었던 것도 이런 특성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창기 MMORPG의 형태는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경쟁 위주, 즉 자기 캐릭터를 강화하고 여기에 맞춘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울티마 온라인류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용자의 시스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기대’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력’에 상응한 ‘보상’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력’의 결과가 수치화 되어 정확히 측정되어야 한다. 즉, 온라인 게임 일부의 이러한 변화는 ‘현실의 자신’이 사회에 바라는 법칙이 게임 시스템 내에서도 작동하기를 바란 결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의 반영이 ‘게임의 재미’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오늘날 게임을 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태도는 ‘노력’과 ‘보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 느껴질 때가 많다. 어느 시점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보상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알아 내야 남보다 빨리 ‘강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성’의 추구가 ‘재미’의 대부분을 뒤덮어버린 듯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최강 종족’에 관련한 밈은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테란, 프로토스, 저그 중 최강의 종족은 무엇인가 하는 논쟁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게 뭐든 제4의 종족, Korean이 최강이라는 결론에 이견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민속놀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내 스타크래프트 이용자 숫자가 많았던 때문이다. ‘고수’가 등장할 확률은 어느 나라든 낮지만 모수가 크면 절대적 숫자는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사회 전반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 큰 한국 사회의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개발자가 유도한대로 정해진 시스템에 맞춰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규칙의 허점을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하면서 경쟁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에 한국인들이 특히 익숙했던 것 아니냐는 추론이다. 우리는 이미 스타크래프트 뿐만이 아닌 뉴스에서도 법제도를 교묘하게 악용한 사기꾼의 사례나 입시 제도를 둘러싼 논란 등에서 비슷한 예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공적인 틀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한국이 각자도생의 ‘저신뢰 사회’라는 사실은 OECD의 설문조사나 해외 연구기관의 통계,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학자의 주장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뒷받침 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19 레가툼 번영지수’를 보면 한국은 사회자본 부문에서 전체 167개국 중 142위를 기록했다.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이런 근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나마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게임 장르에선 이러한 각자도생의 본능이 ‘재미’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을 수 있다. 정신적 피로를 안기는 ‘채팅’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앞서 짚었듯 우리가 온라인 게임에 거는 기대가 현실의 부조리까지 전부 재현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용자가 거의 모든 게임을 대하면서 나타나는 ‘효율성 추구’는 ‘경쟁’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게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재미의 폭을 제한하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는 ‘효율성 추구’가 게임과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스펙 쌓기로 피곤한데 게임에서까지 그래야 하는가?
문제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뭘 만들어도 여기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각자도생의 현실 사회도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이리 저리 조율돼 반영된 결과이다. 바로 그 사람들을 가상현실이라는 다른 시스템 안에 넣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경쟁을 위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시스템의 반대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게임일까? 앞서 언급한대로 ‘대안적 나’를 추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게임이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게임의 형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날 이 모델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게 ‘온라인 없는 오픈월드’이다.
‘오픈월드’의 핵심은 그것 자체가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현실세계의 정밀한 모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오픈월드’라면 그 안에서 다른 외부의 개입 없이도 이용자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최대한도로 구현하기 위해 유명 오픈월드 게임들은 사실적 그래픽으로 넓은 세계를 묘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이런 것들은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문제는 내용이다. 온라인 게임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매일 새로운 사건과 드라마가 창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없는 오프라인 오픈월드는 어떻게 ‘사회’일 수 있는가? 수많은 ‘퀘스트’가 등장하는 식의 구성이 ‘오픈월드’의 필수가 된 건 이런 이유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출력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를 인공지능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튜링 머신의 아이디어와 유사한 결론이다. 이용자가 예측할 수 없고 언제나 새롭게 느낄 만큼의 수많은 사건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대안적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게 ‘오픈월드’의 한계를 규정짓는 요소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퀘스트’는 어디까지나 ‘퀘스트’일 뿐이다. 게임 내 사건이 더 이상 ‘사건’일 수 없다면, ‘오픈월드’가 ‘현실 사회’의 모사처럼 보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 사건 등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또 하나의 타개책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어쌔신 크리드 오딧세이’에서 우리는 결코 요구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질문’의 방식으로 돌려 표현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퀘스트’를 수주하면서 현실의 역사에 속해있다는 감각을 갖게 되고, 이것이 게임 내에서 ’사회’의 존재를 체감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굳이 그 시대의 최강자가 되기 위한 최단 경로를 밟는 것에 몰두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어떤 인물이 되어 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이런 저런 설정은 완전한 역사적 인물로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쌔신 크리드’가 그리는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기 위해서는 역사와 현실을 넘나드는 초현실적 액자 구성을 받아들여야 하고 외계인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고대인들의 사회를 둘러싼 갖가지 설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쌔신 크리드’는 이상적인 ‘오픈월드’를 구현하는데 전적인 노력을 쏟은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것으로 ‘오픈월드’의 ‘구멍’을 메꾸는 시도는 ‘효율성 추구’의 함정으로부터 게임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아예 이 대목에만 집중한 게임도 있다. ‘대항해시대’를 비롯해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로 유명한 코에이의 ‘태합입지전’ 시리즈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 사례로 들 수 있다.
18년만에 리마스터 된 5편의 경우 장엄한 자연 환경의 묘사나 월드맵의 끝없는 물음표 같은 것은 없다. 이 게임은 철저하게 그림과 숫자로만 이뤄져있다. 그럼에도 게이머는 일본 전국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 되어 주체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는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기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한다든가, 그 전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꾀하는 등의 대안역사적 시도를 해볼 수 있는데, 아예 이런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미니게임으로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상징화 해 대체한 시도는 따로 주제를 잡아 다뤄볼만한 기법이다.
이제 다시 애초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와보자. ‘역사’를 설정으로 삼는 ‘오픈월드’를 통해 가상 사회와 현실의 접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대안적 시도를 허용하는 게임 디자인이 가능하다면, ‘현재’나 ‘미래’를 근거로 한 것도 동일한 효과를 거두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한 ‘오픈월드’ 게임의 존재는 이 가능성을 시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에서, 혹은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정말로 이용자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를 묻고, 모두에게 득이 되는 선택을 스스로 고안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게 ‘게임적 재미’로서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이들이 그러한 과업에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다면, 게임은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온라인 게임’의 어떤 이상이 기계적 효율성 추구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프라인’에서도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직선적이면서 또한 가장 어려운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