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파이더맨 2, 코믹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서사를 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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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12. 10.
요즈음의 콘텐츠는 독립적이지 않다. 모든 콘텐츠는 유기적이고, 서로 다른 매체,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가지를 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낸다. 하나의 기원에서 출발하더라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수많은 매체에서 저마다 다른 과실을 맺어내는 미디어 프랜차이즈는 모든 창작물이 지향하는 바가 되었다.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수많은 프랜차이즈들도 여러 방면으로 확장을 시도해왔다. 영화에서 시작해 이미 코믹스, 소설, 애니메이션이 계속 쏟아져 나온 ‘스타워즈’ 는 게임 쪽에서도 루카스아츠의 작품들을 위시해 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헤일로’ 는 반대로 게임에서 영상물, 소설, 코믹스로 뻗어나간 사례다. 이런 흐름은 슈퍼히어로 파생 작품들도 시작지점만 다를 뿐 유사하다.
하지만 슈퍼히어로 창작물들은 어떤 면에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바로 캐넌, 정사의 기준이 매우 느슨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코믹스는 하나의 정사가 아니라, 수많은 비사들의 집합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제작사, 제작자 쪽에서 캐넌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코믹스는 개별 이슈가 서로 다른 설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나의 공인된 정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수많은 비사 중에서 인기가 많고, 가장 퀄리티가 좋은 것들이 선택을 받아 이어나가는 식의 구조를 띈다.
때문에 유독 코믹스 기반의 파생 작품들은 독자적인 서사를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코믹스의 감각을 그대로 이어가던 많은 창작물들이 혹평을 받고나서야 사람들은 ‘코믹스는 생각보다 대중적이지 않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작 코믹스 팬들의 기준으로 만들게 되면, 지나치게 유치하거나 아무리 원작 설정이라지만 선을 넘는게 있었던 것.
슈퍼히어로 기반의 최고의 프랜차이즈였던 MCU 가 최근 부진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스칼렛 위치를 위시한 캐릭터들의 코스튬이 점점 원작을 닮아가고, 설정만 믿고 배경서사를 생략하거나, 인물 간의 관계를 대충 그리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 그러다보니 중심 서사도 재미가 없어지고, 또는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특히 멀티버스의 적극적인 채용은 그런 이른바 ‘뇌절’ 의 끝으로 가, 모든 이슈와 관련 설정을 다른 차원의 이야기, 그저 멀티버스라는 식으로 사건의 근원과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서 더더욱 성의없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했다.
* 스파이더 토템, 마스터 위버, 스파이더 마더… 문자 그대로 우주로 뻗어나가는 설정
그렇다면 ‘마블 스파이더맨 2’ 게임은 어떨까. 우선, 스파이더맨은 원작 코믹스에서는 그야말로 뇌절 설정의 상징이다.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 바로 그러한데 스파이더맨과 같은 거미류 슈퍼히어로의 숫자가 늘어다나보니 추가된 설정으로, 그냥 유전자 변이 거미에게 물려 생긴 슈퍼히어로가 갑자기 우주적이고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거기에 스파이더맨은 복식만 수십가지에 이르고,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스파이더 센스에 대한 묘사도 작품마다 제각각이곤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 코믹스가 각 작가에 의해서 뇌절에 뇌절에 뇌절을 반복하여 마구잡이로 확장한 뒤에, 이 중에 괜찮은 걸 타이인 이벤트로 정리하면서 채택하는 식으로 전체 흐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굉장히 난잡하고, 온갖 좋은, 그리고 나쁜 설정이 난립하면서 그 안에서도 어떤 설정은 버려지고 어떤 건 정사로 채택된다. 물론 코믹스 팬들에게는 이것이 재미요소였고, 다른 것보다 훨씬 짦은 코믹스의 소비 사이클에서는 괜찮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게임이나 영화처럼 제작 기간이 길고 한 작품의 서사 단위가 긴 매체에서는 이런 방식을 채택할 수 없었다. 때문에 게임이나 영화는 그 자체로 일종의 총집편처럼, 작품이 어떤 설정을 채택하고 있고,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인섬니악의 비디오 게임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그 정리의 시작을 빌런과 주인공, 스파이더맨의 관계 정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스파이더맨’ 에게는 정말이지 수많은 빌런이 있다. 단일 히어로로서는 가장 많은 빌런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와중에 극적인 서사를 위해서 스파이더맨이 어떤 빌런을 만나게 될지를 미리 정리해두는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1편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스파이더맨이 이미 히어로 활동을 한지 꽤 시간이 지났고, 수많은 잡다한 빌런들을 이미 다 정리했다는 걸 단 번에 보여준다. 스콜피온, 라이노, 벌쳐 같은 단일로서는 큰 비중을 가지기 어려운 빌런들은 이미 스파이더맨을 만나 싸웠고, 감옥에 가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인 옥타비우스 박사가 서사의 중심으로 초반부터 등장한다. 여기서 대강의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 작품의 스파이더맨은 여러 잡다한 빌런들은 이미 다 처리했지만, ‘닥터 옥토퍼스’ 나 ‘그린 고블린’ 은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서사가 옥타비우스 박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상, 우리는 이 작품에서 이 빌런과 대적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다른 설정들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직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인 마일즈 모랄레스는 피터 파커의 그 유명한 각성의 과정, 본작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스킵한 그 과정을 대신 되풀이하고 보여주며, 이 작품의 후반이나 또는 다음 작품에서 그가 두번째 스파이더맨이 될거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히로인은 그웬 스테이시가 아니라 MJ 라는 것, 이번 스파이더맨이 가진 기술적 역량들, 그리고 멀티버스 따위는 없다는 것, 그의 경제적 상태 등등 수많은걸 빠르게 정리한다.
우리는 이미 ‘스파이더맨’ 이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다. 이는 코믹스보다는 대중 서사인 영화의 덕택이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이미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부분은 게임에서는 빠르게 생략되거나 암시되며, 그 이상의 부분들은 명시적으로 정리된다. 그래서 모든 독자들, 스파이더맨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코믹스팬부터 스파이더맨이라고는 영화 밖에 보지 않은 이들까지 모든 독자를 동일한 출발선에 위치시킨다.
이는 이 게임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점 중에 정말 일부분이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사가 이 게임에서 정말 중요한 위치이고 그 서사라는게 원작과 수많은 변형이 이미 있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게임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닌가?’ 도 동시에 이야기해야 한다. 이 스파이더맨은 멀티버스도 아니고, 등장하지 않을 빌런은 누구이며, 우리가 아는 스파이더맨 서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같은걸 계속 전해야 한다.
‘마블 스파이더맨 2’ 는 이런 부분이 더더욱 중요했다. 2편이 제대로 가속을 받아 서사를 진행시키려면 1편에서의 이런 정지작업이 필수였고, 그 다음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2편에서는 새로운 인물들, 그리고 이전에 등장했지만 아직 서사적인 쓰임이 다하지 않은 인물들, 그리고 이제는 이야기 전면에 나서야 하는 기존의 인물들 등 수많은 인물들이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오스본 부자가 전면에 나섰고, 베놈이라는 새로운 빌런을 위해 필요한 부가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기존의 빌런들이 퇴장하기 시작한다. 벌쳐, 스콜피온 같은 부가 빌런들은 확정적인 죽음을 통해 서사에서 사라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미 익숙한 이야기’ 인 스파이더맨은 ‘새로운 이야기’ 로서의 당위성을 얻게 된다.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 간의 관계, 설정 장치, 서사의 흐름들을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어기면서, 전체 총합은 크게 변하지 않음에도 굉장히 새로운 이야기를 접하는 것 같은 감각을 만들어 낸다.
* 어쩌면 이런 부분이 좀더 설득력을 줄 수도 있겠다
원작이 있는 작품들에게 원작은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독이 된다.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작과 파생작들은 대체로 차원 자체가 다른(말그대로 과학적인 의미의 ‘차원’ 도)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아무리 1대1로 대응하여 옮기더라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고, 또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 1대1 이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핀오프나 파생작품들은 원전의 요소들을 취사선택할 수 밖에 없으며, 이 취사선택이 어떻게 되느냐가 항상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
특히나 코믹스에서 온갖 설정을 쏟아내는 슈퍼히어로물은 이 문제가 더욱 심하다. 간단하게는 코스튬의 재현에서부터 멀리가면 빌런의 선택, 캐릭터에 걸친 부가 서사들의 선택까지 모든게 선택의 문제가 된다. 가령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뇌절 그 자체인 설정들과 절대 빼놓아서는 안되는 설정들이 많이 있다. 벤 삼촌의 죽음은 스파이더맨을 구성하는데 빠져서는 안되는 사건이다. 반대로 스파이더 토템 같은 설정이나, 많은 이들이 고평가하는 이슈인 ‘슈피리어 스파이더맨’(닥터 오토퍼스의 정신이 스파이더맨의 육체에 깃들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의 경우에도 자칫하면 설정이 과한,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여기서 재미있는 선택을 한다. 먼저 벤 삼촌의 죽음 같은, 영웅을 형성하는 서사를 모두 본편에서 빼버렸다. 설정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미 작품 상에서는 오래전 지나간 일이며 구체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되기보다는 플레이어, 스파이더맨의 팬들이 ‘당연히 그런 사건이 있었겠지’ 라고 추측하고 넘어가게 만든다. 대신에 이런 시련을 본편에서 겪는 건 2대 스파이더맨인 마일즈 모랄레스다.
이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건 항상 구태의연하고 지루할 위험이 있다. 그게 비록 필수적인 부분이라 하더라도, 서사를 정직하게 항상 모든 사건의 발단에서 시작하는 건 좋은 수가 아니다. 모든 서사는 시작부터 독자를 강력하게 흡인할 의무가 있으며, 이야기의 시작지점은 이야기의 마무리와의 간극을 고려해 정해져야 한다. 동시에 비극의 과정을 마일즈 모랄레스에게로 옮겨, 플레이어들에게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2대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본작에 녹이고, 감정적인 이입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은, 원작의 설정을 차용하되 그 주도권은 확실하게 본작에 있고, 원작의 설정을 가져오는데에 1대1로 매칭하지 않고 적절히 변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기표와 기의의 상관관계 같다. 예를 들어 ‘베놈’, ‘카니지’, ‘스크림’ 같은 주요한 이름들은 모두 등장하지만, 그 기표 아래에 본질들은 원작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카니지의 정체인 클리터스 캐서디는 광신도 컬트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캐릭터성을 부여 받아 뉴욕 전체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이끌어 DLC의 리딩 빌런이 될만한 포스를 풍긴다. 반면에 스크림은 단편적인 등장이지만 MJ 의 속내를 피터 파커에게 비춰주고, 둘의 화해와 결합을 더 단단하게 하는 기폭제로서 작용한다.
* 본작의 베놈은 그 정체가 코믹스와 다르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심비오트를 활용하는데 있어 베놈, 카니지, 안티베놈, 스크림을 넘어서서 2세대니 뭐니하는 설정으로 양산되던 것들을 모두 쳐내고 유명한 심비오트까지만 딱 사용한 것도 적절한 원전의 채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원작 설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 설정을 본작이 우위를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있다는 점, 또한 설정에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매우 훌륭하다. MCU 는 오히려 그런 설정 자체에 휘말려, 수많은 등장인물을 그대로 등장시키면서 적절한 번안을 하지 못해 영화 내에서 캐릭터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 역력하다. ‘이터널스’ 에서 청각장애인으로 번안하여 꽤 깊이있는 캐릭터를 보여준 마카리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특색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크의 경우, 원작에서는 지나치게 피터 파커에 의존하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던걸 의식하듯 마일즈 모랄레스와의 다른 접점을 가지고 등장한다.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중간에 등장한 헤일리의 주변인물과 동일하다면(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실크, 신디 문도 원작과 다른 독자적인 캐릭터 서사의 길을 걷는 듯 보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그 탄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모두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가 또 한 번 새로운 이야기로서 매력을 품게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원전의 설정을 있는 그대로 모두 써야 한다는 강박 아래 미리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설정 덩어리가 아니라, 쳐낼 것은 쳐내고 핵심만을 남김으로서 가지각색인 플레이어들의 사전 지식 정도와 무관하게(물론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 자체는 알고 있어야 하지만)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는게 중요하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 까지만 챙겨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들이다.
‘마블 스파이더맨 2’ 의 서사는 단순히 본작, 아니 조금 더 나가서 1편에서 시작된게 아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을 수십년 동안 여러 차원을 통해 이어진 스파이더버스에 플레이어들을 중간 난입시켜야 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이미 지난 수많은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겪은 이들에게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여야 했다. 이 두가지를 모두 잡는건 성공보다 실패가 가까운 일이지만, 인섬니악은 그걸 해냈고, 그래서 올해 최고의 게임을 논하는데 한자리를 꿰차기 부족하지 않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건 방법론도 다양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독자를 설정하지 못하면 어떤 좋은 이야기라도 먹히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은 이야기를 쓰기 전에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기를 당부했다. 그리고 매번 그의 가상의 독자 역할을 맡아준건 그의 부인, 태비사 킹이었다. 비록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좋은 이야기에서는 필수적인 고민이다.
훌륭한 독자설정, 그리고 이들을 휘어잡기 위한 폭넓으면서 절제된 이야기. ‘마블 스파이더맨 2’ 은 올해 최고의 서사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