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된 걷기와 우연한 만남의 장소 – AR 산책 게임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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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5. 2. 10.
* 구글맵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Google Maps: Pokémon Challenge” 만우절 이벤트 영상
나는 나름 <포켓몬 고 Pokémon GO>의 고인물이다. 2016년 속초 대란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2017년 1월 국내 출시 직후부터 지금까지 플레이하고 있다. 초창기의 <포켓몬 고>는 황량했지만 충만했다. 체육관에서 열리는 레이드도, GO 배틀리그라는 PVP 시스템도 없었다. 심지어 6개월 늦은 국내 출시 직후에야 2세대 포켓몬이 추가되었고, 2018년까지는 필드리서치(퀘스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 구글맵이 지도 곳곳에서 포켓몬을 발견할 수 있게끔 했던 만우절 장난[1]이, 닌텐도와 나이언틱의 공식적인 협력으로 이어지며 현실화되었다는 설레임은 순식간에 천만 단위의 유저가 스마트폰을 들고 산책하게끔 만들었다. 포켓몬을 직접 포획하고 도감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포덕’들을 유혹하기엔 충분했다. 우리는 텅 빈 지도 위를 걸어다니는 아바타와 자신을 동기화했고 CP가 더 높은 포켓몬, 아직 잡지 못한 포켓몬이 나타나기만을 바라며 걸음 수를 채웠다.
<포켓몬 고>, 최근에 갑작스레 흥행하기 시작한 <피크민 블룸 Pikmin Bloom> 등 나이언틱의 게임들은 유저의 일상을 변화시킨다. 집 주변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 간판들 사이에 숨어 있던 교회와 생각 없이 지나치던 벽화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출퇴근길과 등하교길은 게임 속 스팟(포켓스탑, 빅플라워 등)을 포함하게끔 변경된다. 레이드 시간에 맞춰 산책을 떠나거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포켓몬이나 꽃의 정수를 얻기 위해 길을 나서기도 한다. 엘피 본의 지적처럼 온라인 지도 속에 담긴 ‘스마트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는 데이팅 앱에서 가까운 거리의 상대를 찾아 나서듯 <포켓몬 고>에서 피카츄를 찾아 나선다(Bown, 2022/2023,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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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인그레스>, <포켓몬 고>, <피크민 블룸>, <몬스터 헌터 나우>의 플레이화면
나이언틱의 AR 게임들은 나이언틱은 구글맵(국내에서는 오픈스트리트맵[2])을 기반으로 현실의 지도 위에 게임의 가상을 겹쳐 놓는다. 첫 작품인 <인그레스>는 인라이튼드와 레지스탕스 두 진영의 ‘땅따먹기’를 지도 위에서 펼쳐낸다. <포켓몬 고>는 본가 시리즈의 연장선상으로 야생의 포켓몬을 연구하는 윌로우 박사의 부탁을 받아 모험을 시작한다. <피크민 블룸>은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명체 피크민을 게임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설정을 갖는다.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한 <해리포터: 마법사 연합 Harry Potter: Wizards Unite>은 마법사 세계의 존재들이 머글 세계에 유출되는 이상현상을 조사하고 해결한다는 설정이다. 가장 최근작인 <몬스터 헌터 나우 Moster Hunter Now> 또한 ‘몬스터 헌터’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버렸다는 설정을 갖는다.
각각의 설정들은 현실의 제도를 게임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세계만들기(worldbuilding)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발 딛고 걸어 다니는 길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한다. 워킹 시뮬레이터(walking simulator)가 아닌 걷기-기계(walking-machine)랄까. 이 게임들에서 강조되는 것은 수집이다. <포켓몬 고>에서는 전투보다는 포획과 도감채우기가 강조된다. 전투는 ‘고인물’을 위한 엔드 콘텐츠에 가까우며, 지방별 도감뿐 아니라 정화/그림자/별3/색이 다른/이벤트/메가진화 등 다양한 도감 카테고리를 제공하며 ‘도감작’의 재미를 게임의 최우선으로 내세운다. 무수한 ‘데코 피크민’을 선보인 <피크민 블룸>이나, 같은 수집물을 반복해서 모을수록 도감이 강화되었던 <마법사 연합>도 마찬가지다. 나이언틱의 산책 게임들이 유저들을 걷게 하는 방식은 걸음 수나 걸은 거리에 따른 보상체계, 저곳에 물리적으로 도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수집품의 제공이다. 강가나 바다에서는 물 타입 포켓몬이 더 자주 등장하고, 대학 캠퍼스에 가야 대학 데코 피크민을 얻을 수 있다. 이 게임들의 세계는 현실의 지도 위에 가상의 세계를 결합함으로써 우리를 걷게 한다. 스마트폰을 통해서만 접속할 수 있는 AR 게임의 화면에서 현실 세계와 게임의 가상 세계라는 위계는 다소간 무력화된다(박동수, 2022).
친구들에게 <포켓몬 고>를 추천할 때 종종 “좋은 산책 메이트”라고 소개하곤 했다. AR 게임은 우리를 물리적으로 움직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방구석 게이머들을 집 밖으로 나가게 한” 게임이다. <포켓몬 고>가 걸은 거리를 기반으로 알 부화나 파트너 포켓몬과의 친밀도를 올릴 수 있게 했다면, <피크민 블룸>은 걸음 수를 통해 피크민 모종을 기르거나 임무를 클리어하는 등의 방식을 취한다. 피크민은 유저가 산책한 길 위에 꽃을 심고, 그 결과는 지도 위에 그려진 꽃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친구와 함께 걸음 수나 심은 꽃의 수 등을 종합하는 ‘함께 걷기’ 임무나 특정한 기간 진행되는 ‘함께 걷기’ 등의 기능은 유저들이 더 멀리, 더 오래 산책하게끔 한다. 다른 AR 게임보다도 산책이 강조된 <피크민 블룸>이 러닝이 트렌드가 되고 건강 관리를 위해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필수적이게 된 지금 시점에서 급작스럽게 유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또한 커뮤니티의 구성과 유저의 조직화가 필수적인 <인그레스>나 자연스럽게 지역 레이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끔 유도한 <포켓몬 고>처럼 새로운 방식의 지역 커뮤니티를 가능케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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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스틸컷. 용산 미군기지 출입구에서 <포켓몬 고>의 AR 기능으로 꺼낸 ‘뮤츠’를 캡쳐한 화면.
다른 한편으로 AR 게임은 구글 스트리트뷰나 구글어스로 방구석 세계일주를 하거나 배달의 민족에서 우리집으로 다가오는 라이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는 반대에 놓인다. 이전의 지도/GPS 기반 서비스들이 세계를 집안의 화면 안으로 옮겨두었다면, AR 게임은 우리의 걸음을 따라 세계를 재설정하는 일이다. 타라 피클(Fickle, 2019, 156)은 GPS 기반의 <포켓몬 고>가 여러 내비게이션 앱이 수년 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유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변형시켰으며, 사용자가 "스마트폰의 형태로 지도가 지향하는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경험을 제공하며, AR과 GPS 기술을 탑재한 게임이 이국적이고 낯선 동시에 안전하고 친숙한 세계를 구현한다고 지적한다. 포켓몬이나 피크민 같은 가상의 생명체를 구현함과 동시에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포켓몬 고>의 구성이 ‘나’를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키며 포켓몬이라는 포획 대상, 체육관이라는 점령 대상 등으로 구성되기에 제국주의적 혐의를 갖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Ibid, 160-161). 이는 태생부터 점령 게임이었던 <인그레스>나 몬스터를 ‘토벌’하는 <몬스터 헌터 나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지도’의 문제는 AR 게임을 여러 정치적 문제와 직면하게끔 한다. 실제로 <포켓몬 고> 출시 직후 미군은 기지 내 병력에게 안보구역 내에서 플레이하지 말 것을 경고했으며, 국내에서는 청와대 등의 보안 시설이 게임을 통해 노출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영화/미술 작가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용산 미군기지 내 포켓스탑을 통해 기지 내부의 이미지를 염탐함으로써 AR 게임이 정치적, 군사적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AR 게임이 유저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구성을 취한다 하더라도, <포켓몬 고>나 <피크민 블룸>은 우리를 (벤야민이 말한) 산보객(Flâneur)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일상과 결합된 게임은 우리를 걷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야를 주변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 평평한 지도 위에 머물게끔 한다. 일련의 게임 속 지도는 등록된 길 외에는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 공공시설, 역사적 장소, 공공성을 띠는 조형물 등으로 구성된 특정한 ‘스팟’들은 해당 공간의 사진과 함께 등장한다. 우리는 그 공간들을 직접 보는 대신 게임으로 매개된 사진을 통해서 본다. 게임을 통해 스팟의 존재는 알게 되지만, 동시에 게임은 그 공간들을 비장소적 기호로 치환하여 스쳐지나가게끔 한다. <포켓몬 고>가 “(기업의 이익에 복무하는) 올바른 곳에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예컨대 조직적인 봉기를 막기 위해) 잘못된 곳에 모이는 걸 막을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본의 지적(Bown, 2022/2023, 79)은 나이언틱이 몇몇 기업과의 콜라보를 통해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카페 등을 스팟으로 지정한 사례에서 이미 드러났다. 산책 게임은 우리를 산책하게 하고 건강이라는 동시대적 이슈와 결부시키지만, 동시에 일련의 지도 서비스가 유도하는 행위성을 곧장 유저에게 부여한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포켓몬 고>는 유료로 ‘리모트 레이드 패스’를 출시한다. 산책이 위험한 행위가 되었기에, 본래 해당 체육관에 가야만 가능했던 레이드 콘텐츠를 원격으로 즐길 수 있는 아이템이다. <포켓몬 고>를 일상적 루틴으로 받아들인 유저들은 기꺼이 리모트 레이드 패스를 구매했고, 나이언틱은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렸다. <포켓몬 고>에 의해 이미 훈육된 유저들은 게임의 본질적 행위성이 수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과금하는 이들이 되었다. 유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스팟이 무엇이냐보단 레이드에 등장한 포켓몬이 무엇이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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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크민 블룸>에서의 ‘탄핵시위걷기’ 화면(좌)와 남태령 태그를 단 피크민(우)
이렇게만 본다면 나이언틱의 게임들은 건강을 경유하여 유저들의 무임자유노동(free labor)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빼가고 과금을 유도하는 다분히 기술-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 존재처럼 다가온다. 물론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포켓몬 고> 등은 새로운 지역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림자 전설 포켓몬을 포획할 수 있는 그림자 레이드나 이벤트성으로 진행되는 엘리트 레이드처럼 오프라인 참여를 강제하는 <포켓몬 고>의 몇몇 콘텐츠가 진행되는 동안 게임플레이를 위해 거리로 나갔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 지역별 오픈채팅방을 통해 모인 학생부터 중년 남녀까지의 사람들부터 부모와 함께 스마트폰을 들고 레이드에 참여하는 아이들까지, 레이드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질적인 집합은 잠시간 길거리를 다른 풍경으로 바꿔 놓는다. 최근의 목격한 <피크민 블룸>에서의 사례는 산책이 일종의 연대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24년 12월의 어느 날 누군가는 산책을 통해 모은 ‘하얀 국화’의 꽃잎을 사용해 국회 빅플라워에 하얀 국화를 피웠다. 행진이 포함된 집회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피크민을 할 수 있다”라는 조언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누군가는 “광화문탄핵시위걷기”라는 이름의 ‘함께 걷기’ 초대 링크를 게시해 행진의 기록으로 남겼다. ‘남태령 대첩’이 있던 날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는 방법으로 “피크민 하러 왔다고 말하자”라는 트윗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홍콩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 あつまれ どうぶつの森> 유저가 ‘광복홍콩 시대혁명(光復香港 時代革命)’이라 적힌 섬을 만들었던 것처럼, 한국의 누군가는 <피크민 블룸>의 지도 위에 꽃으로 ‘탄핵’이라는 글자를 그려 넣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12월 23일 남태령에서 얻은 지하철역 피크민이 ‘남태령’ 태그를 달고 나와 당시를 상기하게 해주었다.
<피크민 블룸>의 갑작스러운 흥행의 이유는 아무도 파악하지 못한다. 친구 추가 QR코드 기능의 추가라던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캐릭터가 귀여움을 얻으며 유행하기 시작했다던가, 산책과 건강이라는 트렌드에 맞춘 유행이라는 설명은 어딘가 부족하다. <포켓몬 고>가 강력한 IP를 앞세워 흥행에 성공했다면, ‘피크민’ 시리즈는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게임이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일련의 산책 게임은 우리를 언제나 게임하게끔 만들었다. PC나 콘솔이 아닌 무료 모바일 게임이라는 지점도 흥행의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산책 게임은 우리의 생활 세계 위에 덧씌워진 또 하나의 세계를 가능케 해주며, 지겨운 출퇴근길과 등하교길을 짧은 모험의 시간으로 만들어 준다. <피크민 블룸>이 처음 출시된 2021년 게임을 설치했다가 텅 빈 지도만을 보고 며칠 뒤 삭제했었다. 지금의 <피크민 블룸>은 발길이 닿는 거의 모든 곳을 꽃으로 뒤덮었다. 일종의 ‘비동기 멀티플레이’로서 산책 게임들은 사람들을 게임이 유도하는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끔 하지만 때로는 상상치 못한 연대를 가능케 한다. <데스 스트랜딩 Death Stranding>에서 누군가 설치해둔 집라인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따봉’을 눌러본 기억이 있는가. 산책 게임은 각자의 황량한 디지털 디스토피아를 산책하게끔 하지만, 이따금 고개를 돌리면 엄지를 치켜세울 직접 타인을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1] 해당 이벤트는 구글과 닌텐도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나이언틱은 당시 구글 산하의 기업으로 스트리트뷰나 구글어스 등 구글맵의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 나이언틱의 CEO 존 행키와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포켓몬 컴퍼니의 이시하라 츠네카즈는 해당 콜라보의 성공 이후, 나이언틱이 2014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인그레스 Ingress>를 기반 삼은 <포켓몬 고>의 개발을 결정한다.
[2] 구글맵은 국가 안보 등을 이유로 국내에서 지도 반출이 허용되지 않아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재 서비스되는 구글맵의 국내 지도는 SK텔레콤이 제공하는 지도이며, 따라서 위키피디아 형태의 지도 서비스 오픈스트리트맵이 대안으로 채택되었다. 때문에 <포켓몬 고>의 국내 출시가 해외보다 7개월가량 지연되었으며, <포켓몬 고> 출시 이전까지 <인그레스>는 국내에서 지도 없이 텅 빈 화면 위에 ‘포탈’만 등장한 형태로 서비스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