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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언제 시작할까 - 북미 최대의 게임쇼, E3가 맞이한 변화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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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6. 10.

여름은 언제 시작할까? 한국에는 입하라는 날이 있기 때문에 이 날이 공식적으로 여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절기상 여름 말고 사람들은 누구나 본인의 문화적 배경이나 취향에 따라서 서로 다른 날을 여름의 시작으로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는 100일간의 여름(100 days of summer)라는 개념이 있다. 5월의 마지막 월요일에 자리잡고 있는 공휴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여름의 시작으로 본다. 한국으로 치면 현충일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메모리얼 데이는 가진 의미와는 상관 없이 그렇게 한국의 절기로 치면 입하같은 날이다. 그리고 여름의 끝은 9월의 첫째 월요일인 레이버 데이다. 노동절 연휴가 되면 이제 여름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대략 이 기간이 100일이기 때문에 이 때를 100일간의 여름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소소한 인기를 끈 영화 500일의 썸머 또한 이런 개념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여름에 특별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개념. 이 개념에 입각해서 보자면 게이머들에게 여름의 시작과 끝은 뭘까? 게이머들에게 여름의 시작은 E3고 끝은 게임스컴이다. 


 

매년 E3가 열리던 6월은 게이머들에게 올해 대작들은 뭐가 나오는지 볼 수 있고 더운 여름 집 안에 혹은 사무실에서 ‘돌릴’ 게임이 뭔지 생각해 보는 시기였다. 화려한 부스들이 가득한 E3의 행사장에 가지 못하면 무척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E3는 ‘산업종사자들을 위한 행사’였던 기간도 꽤 길다. 일반적인 게이머들은 행사장에 들어갈 수 없었을 때도 많았다는 이야기. 하지만 E3는 언제나 일반 게이머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형 게임사들이 발표하는 뉴스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미의 게이머들에게 E3는 ‘게임의 여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코로나는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게임의 여름도. 

 

하지만 2020년에는 게임의 여름이 없었다. 코로나가 여름이란 존재를 삭제해버렸다. E3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오프라인 이벤트들이 취소됐다. 미국 내에서 2020년에 가장 크게 유행을 탔던 말을 하나 꼽자면 ‘취소’(cancel)였을 정도. 취소를 망설이면서 시간을 끄는 행사들은 온라인에서 ‘책임감없이 행동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E3의 오프라인 이벤트 취소는 너무 당연한 수순이었다.

 

E3는 아주 전형적인 공룡이었다. 기업은 생산성을 떨어뜨리지 않고 재택 근무로 전환해야 하며 이런 유연성이 바로 기업의 경쟁력이라는인식에 기초해 볼 때 E3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경직된 회사였다. 온라인 이벤트로 재빠르게 전향해서 브랜드를 살릴 기회가 없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이벤트를 취소한 뒤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온라인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게임의 여름은 신호탄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공상태가 된 이 자리를 누가 채울까 하냐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온라인 이벤트로 E3에 모일 시선을 잡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치고 들어가서 가장 눈 길을 끈 것은 제프 킬리였다. 

 

진공상태를 채우려던 제프 킬리

 

제프 킬리는 캐나다 출신의 게임 저널리스트이자 게임 행사의 사회자이며 프로듀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E3의 메인 행사들을 진행했었다. 게임계 최대의 이벤트마다 호스트로서 함께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거대했다. 본인이 주관하고 프로듀싱하는 ‘아카데미 스타일’의 게임 시상식인 The Game Awards(TGA)를 시작한 2014년 경부터 그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보통 매체에서 선정을 하고 리스트만을 발표하던 기존의 게임 시상식과는 달리 TGA는 화려한 쇼를 동반했고 그 중심에는 호스트인 제프 킬리가 있었다. TGA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GOTY를 정할 때 메이저로 거론되는 행사에 꼽힐 정도로 급성장을 했다. 



그렇게 본인 자신의 브랜드가 그 어떤 게임계의 인사보다 커져감을 느낀 그는 사실 2020년에 본인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해오던 E3호스트 역할을 고사했다. 본인이 떠남으로서 무게감이 떨어진 E3를 대체할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인들의 예상이었다. 타이밍 또한 절묘했는데 그 동안 영향력이 꾸준히 하락해 온 E3 2020년에 치명타를 맞을 것으로 보였다. 제프 킬리 외에도 행사장의 디자인을 책임지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하기로 했던 에이전시 iam8bit 또한 e3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히면서 행사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로나는 이런 계획에 도움도 아니고 타격도 아닌 이상한 상황을 만들었다. E3가 없어진 진공상태를 만들었지만 제프 킬리 조차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완벽히 대비됐을리가 없다. 그는 업계인들에게 Summer Game Fest(SGF)라는 행사를 조직할 것이며 원하는 게임제작사나 퍼블리셔들은 누구나 무료로 참여가능하다고 덱을 만들어 돌리기 시작했다. 딱 봐도 허술한 느낌이 들었지만 급하게 만들어진 것 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반응도 있었다. 급조된 100% 온라인 이벤트긴 했지만 제프 킬리 개인의 브랜드를 통해 꽤 많은 게임사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E3가 없어진 공간은 누구도 제대로 채우진 못했지만 그나마 제프 킬리가 앞서가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승부의 해 2021

 

2021년에는 자연스럽게 대결구도가 형성됐다. 2020년을 통채로 날려버린 E3측은 이번에야 말로 100% 온라인 이벤트를 진행하겠다고 하면서 2월부터 계획을 발표해나갔다. 버추얼 부스와 온라인 컨퍼런스를 혼합한 형식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공식적으로 게임의 여름이 돌아왔음을 알린 것이다. 지난해 SGF는 물론 TGA까지 100% 온라인 이벤트로 진행하면서 경험을 쌓은 제프 킬리는 2021년을 E3 타도 원년의 해로 정한 것같이 매우 공격적으로 행사를 준비했다. E3의 개최날짜가 발표되자 거의 비슷한 시기를 골라서 SGF를 개최했다. 정면승부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행사가 조금씩 가까워 오자 양측은 게임의 여름을 준비하는 퍼블리셔들에게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닌텐도, 마이크로소프트, 유비소프트, 소니와 같은 초대형 퍼블리셔들이 어떤 행사에 참가하는지가 이벤트의 성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주목도가 높은 이벤트에 마케팅 예산을 쏟아부어 자신의 게임을 알려야 하는 중소 퍼블리셔들은 치열한 눈치게임에 들어갔다. 게임의 여름에서 살아남은 승자는 SGF일지 E3일지에 많은 이목이 쏠렸다. 

 


E3와 SGF 누가 이겼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승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E3는 전통의 강자답게 많은 퍼블리셔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닌텐도, 유비소프트, 스퀘어 에닉스, 엑스박스와 베데스다 등이 E3의 브랜딩 아래 자신들의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E3의 버추얼 부스 및 행사의 진행은 최악이라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특히나 시스템 오작동으로 버추얼 부스를 운영해야 하는 벤더들이 접속조차 하지 못하는 사고가 기사화 되기도 했다. 코타쿠가 쓴 ‘E3는 매우 실망스럽다’는 직설에 가까운 기사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SGF가 완승이냐고 하면 그렇게 말하긴 힘들다. 많은 퍼블리셔들이 SGF의 브랜드 아래서 행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제프 킬리는 현재 게임계에서 가장 많이 기대를 받는 게임 엘든링을 본인의 행사를 통해서 공개하면서 이른바 ‘대세감’을 보여줬다. 최소한 SGF E3와 ‘맞짱’을 뜰만하다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물론 엘든링을 제외하면 쇼 자체는 AAA급 타이틀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실망스럽단 의견도 많았다. 

 


게임쇼의 미래 

 

사실 그렇다면 SGF E3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에서 격돌을 한 두개의 행사는 게임쇼의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100%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번 이벤트는 과연 우리에게 게임쇼라는 것이 필요한가 되묻게 한다. 일주일 동안 벌어진 게임계의 축제는 E3 SGF라는 ‘행사의 브랜드 네임’보다는 거대한 게임을 보유하고 언제 어떻게 이를 공개할지 칼자루를 쥐고 있는 퍼블리셔들에게 좌우됐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동시시청자수를 기록한 것은 닌텐도의 이벤트였다. 엘든링이 나온 SGF를 아주 근소한 차이로 제쳤다.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있는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후속편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닌텐도의 행사 자체는 닌텐도의 중역들이 어설픈 스피치를 하는 최악의 것이었지만 IP의 힘으로 310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끌어모은 것이다. 



그렇다면 닌텐도의 발표가 E3라는 브랜딩 아래 이뤄지지 않았다면 과연 주목도가 떨어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과연 게임쇼라는 커다란 우산을 필요할까? 퍼블리셔들이 그 우산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오프라인 행사를 개최하기로 결정한 PAX 웨스트 때 다시 한 번 떠오를 것이다. 코로나는 모든 것을 바꿨지만 가장 크게 바꾼 것은 게임쇼라는 개념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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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인)

캘리포니아에서 살면서 게임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 출연하고 매체에 기고를 하며 많은 분들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패션부터 게임까지 분야에 상관없이 재밌는 글을 평생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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