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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inary Corrupted Dungeon Love: ‘플레이어블’을 구하지 못한 서사와 갈등, <디아블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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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2. 10.

     

세계관 집착이 가져온 엔드 콘텐츠의 부재


 <디아블로4>는 초반의 성과를 이어가지 못한 채, 이견을 다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실패했다. <디아블로4>의 실패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동했겠으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패착을 뽑자면 장르적 소구점을 견고히 세우지 못한 점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디아블로4>는 초반의 흥행과 기대감조차 무색하게 시즌3 ‘피조물의 시즌’ 공개에도 게임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게임메카를 포함한 주요 매체는 <디아블로4>가 MMORPG와 핵앤슬래쉬, 온라인 게임과 패키지 게임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입을 모았다.


플레이의 패키징 방향을 놓쳐버린 콘텐츠 기획은 개발의 방향마저 잃어버린 듯 보였고, 플레이어들은 <디아블로4>의 플레이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고 기대감을 걸어야 할지 난감해야 했다. 그나마 자랑으로 삼을 수 있던 탄탄한 스토리는 완결을 보고 난 뒤, 2회차 3회차 플레이는 소비의 역치를 충족하지 못하고 그 힘을 잃어버렸다. 이 모든 난관을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을 찾는다면, 아마 ‘앤드 콘텐츠의 부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블리자드 개발진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디아블로4>의 엔드 콘텐츠를 부재하도록 만들게 되었나? 혹자는 블리자드가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Activision과 <캔디 크러쉬>의 King을 인수한 뒤, 게임 개발사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사업에 눈이 멀어 게으른 기획과 방만한 운영 끝에 현 상황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지적할 것이다. 또는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업을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컴퓨터를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뜬구름을 잡더니 결국 스토리와 같은 허무맹랑하고 현학적인 소구점에 집착한 나머지 현 상황에 이르렀다고 지적하는 평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의견 모두 블리자드가 지난 10년간 <스타크래프트2> <디아블로3>를 공개하며 직면해야 했던 비판이다. 위의 비판 모두 경영진의 방심이라고 지적되어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비판 모두 다소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두 비판 중 조금 더 타당해 보이는 쪽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디아블로4>는 서사, 그것도 애정 서사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이 게임으로서 갖추어야 할 장르적 소구를 크게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동안 블리자드가 10년이라는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해온 것은 경영진의 방만한 태도 때문이 아니라, 블라자드가 본인들의 장점이라고 여겨왔던 세계관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궁극적으로 개선해야 할 플레이의 재미를 혁신시키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디아블로의 실패 요인, ‘엔드 콘텐츠의 부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블라자드가 집착한 세계관에 대한 집착이 어떤 패착을 가져왔는지 톺아보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은 반드시 플레이어블해야 한다


 <디아블로> 시리즈에 있어 중세기독교의 역사와 톨킨을 떠올리게 만드는 중간계를 섞어놓은 세계관은 그 자체로 <디아블로>의 정체성이었다. <디아블로>가 구축한 장엄한 세계관은 독창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널리 알려진 요소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여 걸출한 IP를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더불어 플레이어는 우수하게 조율된 타격감을 통해 <디아블로>가 구축한 매력적인 세계관을 탐방하는 재미에서 시리즈에 대한 기대를 걸 수 있었다. 이는 블리자드가 빠르게 팬덤을 끌어모으는 바탕이 되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특징은 블리자드가 <스타크래프트1> <디아블로2>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서사적 주인공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게임으로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플레이의 미덕이 있다. 게임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것이며, 플레이어는 어떤 방식으로든 플레이에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기 위해 시리즈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 <디아블로2>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디아블로>라는 게임 내에서 주인공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소서리스’ ‘네크로멘서’ ‘바바리안’ 등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릭터에 집중되어 있었다. 플레이어는 게임이 마련한 서사를 경험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블한 캐릭터를 플레이해야만 했다. 주인공은 단순히 서사를 탐험하고 전달하는 매개가 아닌, 선택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결과를 만들어가는 존재에 가깝다.


 <디아블로2>의 이러한 특징을 대변하는 요소를 뽑자면 많은 플레이어가 <디아블로> 시리즈를 넘어 핵앤슬래시 역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회자하곤 하는 “Act 5: Lord of Destruction”를 생각해볼 수 있다. “Act 5: Lord of Destruction”까지 <디아블로> 세계관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앞서 언급했던 서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플레이어블 한 존재로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이야기를 전승하기 위해 던전을 돌아다니는 캐릭터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디아블로2>의 마지막, 다시 말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플레이어는 자신이 던전을 돌아다니며 레벨을 올리는 수련을 수행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자각하며 ‘끝판왕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소명을 부여받는다. 이는 게임을 플레이한 이유에 대해 단순하고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며 그동안 플레이어가 겪었을 서사적 경험을 하나의 소구로 정리한다. 더불어 “Act 5: Lord of Destruction”에서 이용된 시네마틱 시퀀스는 그러한 플레이어의 기대를 배가시키며 게임 서사로서 날카롭고도 뾰족한 소구점을 만들어낸다.

     

     


게임에 어울리는 서사, 게임에 어울리는 갈등


여기서 중핵이 되는 것은 <디아블로2>가 가지고 있는 소구의 바탕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숙명적 결투’와 같이 커다랗고도 직접적으로 체감이 가능한 갈등 위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갈등을 십분 활용하며 선형적이며 결말이 정해진 서사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쾌감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둠 리부트>(2016)와 <둠: 이터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 스토리란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는 존 카맥의 격언 아닌 격언으로 유명한 둠 시리즈이지만, <둠>은 게임 스토리로서 갖추어야 할 명료하고 직관적인 이야기의 갈등 구조를 갖추고 있다. 던전에 악마와 갇히게 되었으니 악마들을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의 단순한 소구는 둠가이라는 인상적인 먼치킨 캐릭터를 구현하는 바탕이 되었고, 그 바탕 위에서 플레이어는 둠가이를 컨트롤하며 경쾌한 악마 대학살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야기 자체에 무심한 듯 보이지만, 갖추어야 할 기본기는 <둠>과 달리 <디아블로4>는 이야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콘텐츠에 어울리는 갈등’이라는 기본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디아블로4>는 릴리트와 이나리우스의 어긋난 사랑이라는 갈등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릴리트와 이나리우스가 어쩌다가 갈등을 겪게 되었고,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관찰할 수는 있지만, 사실상 그들의 행위에 유의미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결말조차 그들의 어긋난 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남겨지는 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게임으로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플레이의 미덕’이 부재해 있다. 플레이어가 무엇을 플레이하든, 릴리트와 이나리우스는 그들의 선택을 한다.


여기서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디아블로4>가 가지고 있는 애정서사 그 자체가 아니라 애정 서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릴리트-이나리우스 간에 벌어진 사실상의 부부 갈등이 게임에 적합한 갈등이었냐는 것이다. 물론, 릴리트와 이나리우스의 애정 서사는 <디아블로>라는 IP의 세계관을 두텁게 만들었다. 때문에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시퀀스들은 그 어느때보다 강렬했으며, 그 자체로 게임의 소구점이 되었다. 그 세계관에 대한 ‘감상’이 소구점이 되다 보니, 가장 플레이어블한 엔드 콘텐츠 역시 방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블리자드는 플레이어가 시네마틱 시퀀스를 보기 위해 던전을 통과하는지, 아니면 서사의 주인공을 되는 경험을 위해 던전을 통과하는지 (최소한 본편에서는) 심도 있게 피드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정도다. 이 때문에 <디아블로>는 장엄한 서사시를 경험하게 만들기 위해 던전을 통과해야 하는 값비싼 예술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쉽게는 이는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대중을 상대로 세일즈하는 텐트폴 상업 게임에서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블리자드 역시 세계관에 집착하며 벌여놓았던 문제들을 수습하고 극복하기 위해 서사의 주요한 인물들을 릴리트와 이나리우스가 아닌 메피스토로 두는 등 세계관 내에서 인물들의 배치를 바꿔가는 식의 스토리 이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놓기 위한 시도들이라고 기대해본다. 다만 지난 10년간의 행보를 돌아볼 때 걱정되는 것은 그 장엄한 세계관을 구축했던 블리자드 기획진의 에고다. 플레이어가 플레이어인 이유는, 플레이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게임이다. 나아가 영화가 되려는 게임의 욕망은 그다지 독특하지 않다. 많은 개발자와 기획자들은 영화스러운 게임을 꿈꾸고, 플레이어 역시 영화스러운 플레이를 기대한다. 그러나 영화인 게임이 영화스러운 게임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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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리서치앤컨설팅그룹 STRABASE 뉴미디어・게이밍 섹터 연구원.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한국콘텐츠진흥원) 「저작권 기술 산업 동향 조사 분석」(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 참여했다. 2020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2021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부문 신인평론상, 2023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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