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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게임과 행위 원리 – 놀이와 협박

13

GG Vol. 

23. 8. 10.

플레이어는 게임을 왜 플레이하는가? 이 질문은 노는 자가 왜 노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될 수 있다. 최근의 논의들 중에는 게임을 예술로 ‘인정’받고자 어떠한 실용성이나 사회 · 정치적 참여 등에 기여한다며 생산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게임은 그러한 효용적 가치들을 충분히 발생시킬 수는 매체인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것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가 정말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실천과 효용을 함양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500시간 동안 앉아 있는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게임, 즉, 놀이의 형태는 고양이의 놀이이다. 사람이 레이저나 막대기, 털 장난감 등으로 인공적으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고양이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태까지 잘만 놀아 왔고 지금도 잘만 놀고 있다. 고양이는 자연 속에서 나뭇잎이나 막대기, 빛, 곤충이나 동물 시체 등을 갖고 논다. 이러한 놀이는 언뜻 사냥을 연습하기 위해 그 행위들을 가상으로 모방하여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가장 중요한 순간, 정말로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 그 시체를 뜯어 먹기 바로 직전에 보이는 유희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 놀이의 본질에는 어떠한 가상도 모방도 연습도 없으며, 실용성이 아니라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죽어서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시체나 척추가 부러진 채로 아직 죽어가고 있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그저 꿈틀거리기나 하는 초주검의 동물을 붙잡고 양손으로 데굴데굴 굴리거나 입으로 물어 공중으로 던진다던지 하는 행위는 그 어떤 다른 ‘실제 행위’도 모방하지 않고 있고 그저 그 자체로서가 이미 고유한 실제 행위이다. 그리고 이 놀이 행위들은 그 어떤 실용적 경험치에도 봉사하지 않고 그저 식사 이전의 재미, 신남, 기쁨 등만을 생산해 내고 있을 뿐이다.


즉, 놀이로서 게임은 즐거움을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로서가 목적이다. 다른 외부적 목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게임 <핫라인 마이애미>의 결말 장면에서 이러한 게임의 행위 목적성을 아주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게임의 진행 과정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보통의 결말 (normal ending)’과, ‘숨겨진 결말 (secret ending)’의 구조이다. 두 가지 결말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플레이어가 만나게 되는 두 인물은 해당 게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들을 배후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던 ‘청소부 (janitor)’들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요 사건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어느 날부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고, 이렇게 동물 마스크를 배달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전화의 내용은 어떤 특정 장소로 가서 배달받은 동물 마스크를 쓰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 전화의 발신자가 바로 청소부들이고,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명령을 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온 명령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게 된다. 주인공은 결국 청소부들의 비밀 본부를 찾아내고. ‘보통의 결말’에서 이들에게 ‘왜’ 이러한 일들을 벌이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청소부 A: 그야 심심했으니까 그렇지!

청소부 B: 왜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해야 하겠어?

너는 우리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질러 왔잖아, 안 그래?


청소부들은 주인공이 제기한 ‘왜’에 대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은 그저 자신들의 “장기 말”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청소부들은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을 조종하며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또한 청소부들의 명령에 따르면서 직접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실제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살해하는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을” 저지름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들에게 “너희들은 왜 사람을 죽이는 거야?”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소부들은 그 질문 속의 주어 설정이 굉장히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아무도 안 죽였어, 너가 죽였지...” 즉, 이 ‘보통의 결말’은 청소부들과 주인공 모두의 행위가 다른 어떤 목적으로도 변명 될 필요 없이 오로지 즐거움만을 위해 실행되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주인공을 조종해 사람들을 죽이며 즐거움을 얻은 또 다른 놀이자, 플레이어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명령하고 주인공을 갖고 노는 놀이자로서의 청소부와 청소부의 명령을 수행하며 즐거움을 획득하는 놀이자인 주인공의 구도처럼, 플레이어에게 명령하고 플레이어를 갖고 노는 게임이라는 놀이자와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이행하며 즐거워하는 플레이어라는 놀이자의 구도 또한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전반부에서 만나게 되는 닭 마스크의 환영은 주인공-플레이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게임과 플레이어 사이에서 생산되는 즐거움이 가지는 본질적인 행위 원리의 진실을 시사한다.


"너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걸 좋아하니?"


즉, 주인공이 모르는 전화 속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 게임이 명령하는 사항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르는 것도, 결국 이 행위자들 모두가 그 명령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단 하나의 행위,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진실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명령하는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맞닥뜨릴 수 있는 튜토리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너에게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 와 있다. 이 게임은 좌우 스틱으로 조작된다. R 버튼을 눌러 때린다. 얼굴을 노려라! 우선 네가 누군가를 쓰러뜨렸으면 그를 마무리까지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너는 X 버튼을 누른다. 알겠나? R을 눌러 때려라! X를 눌러 끝내라! 내 말 알아듣겠나? 실수하지 말아라!


튜토리얼에서부터 <핫라인 마이애미>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 속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살인 행위뿐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탑다운 형식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사람 형상을 조작해 또 다른 조그만 사람 형상들을 쏘고 때리고 찢어발기는 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전부인 이 게임을 그럼에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원인’은 우리가 이러한 가학 행위에서조차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즐거움이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속편에서도 우리의 행위 원리에 대한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 존재한다. <핫라인 마이애미 2>의 16번째 장, “사상자들 (Casualties)”에선 죽음이 거의 확정된 임무에 자신들의 부대원들을 보내게 된 “대령 (the Colonel)”이란 인물이 임무 전날 밤, 죽은 퓨마의 안면 피부를 벗겨 미간 부위에 피로 성조기를 그려 놓은 다음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쓰고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게 보이나? ... 내 얼굴이 보이냐고? 이것이 내 진정한 본성(nature)이다! 보이지, 안 그래? 이게 나야! 이게 우리 모두란 말이다. 우린 동물이야! ... 부인할 길은 없어! 우리가 빌어먹을 동물들이라는 것을! 그들은 우리가 학살하거나 학살되도록 내보내고 있지...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 앉아서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할지를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우리 자신의 의지는 없다. 그저 영혼 없는 복종일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우리가 아는 것은 그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걸 즐기고 있다는 거야. 파괴와 폭력... 이것들은 그저 우리 본성의 일부일 뿐이지.”


위의 대사를 말하는 “대령”이 퓨마라는 동물의 얼굴을 벗겨 마스크로 쓰고 미간에 피의 성조기를 그려 놓았던 것, 그리고 이 피의 성조기는 바로 청소부들이 암약하는 비밀 단체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령”의 발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 게임의 제작자들이 말하고자 했던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디오니소스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우리가 자연 (nature)의 의지와 공명하며 그 모든 것들을 깊이 즐기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갑작스레 왜 대령이 청소부들의 상징을 사용했다고 해서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표하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개발자도 단 두 명이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보여지는 청소부들의 얼굴그래픽은 게임 개발자들 자신들의 얼굴을 픽셀로 캐리커쳐한 형상이다. 즉, 청소부들은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페르소나인 것이다. 주인공이 청소부들에게 그들이 “누구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를 추궁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 밑에서도” 일하고 있지 않은 “독립”적인 작업자들이며 “모든 것을 우리끼리 다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마치 이 게임을 제작한 두 명의 독립 개발자들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부심과 마주하는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소부들의 대사를 통해 이 게임의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순전히 즐겁기 위해 창작 행위를 한 것이며, 그 어떤 누구의 명령이나 협박과 같은 외부적 조건 따위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청소부들이 주인공을 “장기 말”이라고 불렀던 것은,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조종하며 자신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개발자들도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를 갖고 놀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는 <핫라인 마이애미>뿐만 아니라 모든 게임에서 참이다. 게임은 항상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도전과제 그리고 R 버튼을 눌러 때리고 X 버튼을 눌러 마무리하는 조작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령을 제공하고 그 명령의 가짓수가 곧 게임의 부피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때 게임의 명령을 플레이어가 따르게 되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우선 첫 번째로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처럼 그저 재밌어서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주인공이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나 조건 따위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목소리에 그대로 따랐던 것은 그가 청소부들의 지시사항, 그러니까 대량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자신의 명령이 플레이어에 의해서 제대로 실행될지의 여부를 항상 즐거움만에 맡기지는 않는다. 즉, 자신이 명령받은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마저도 제대로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강제와 협박 같은 외부 목적적 수단들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에 게임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건적이고 강제적인 명령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을 우리는 <핫라인 마이애미>의 ‘숨겨진 결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겨진 결말’은 플레이어가 청소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특정 패스워드를 찾아 놓고 비밀 본부에 있는 컴퓨터에 해당 패스워드를 집어넣어야지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숨겨진 결말’을 보기 위한 조건을 만족한 뒤 청소부를 만나면 주인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


청소부 A: 정신 나가...? 네가 깨달아야 하는 건 말이야-

청소부 B: 사람들이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청소부 A: 우리 사회 전체가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지.


여기서 청소부들은 게임 바깥의 현실에도 적용되는 조건 명령 방식, 협박에 대해 꽤 좋은 비평을 남기고 있다. 청소부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가 위에서 최근 게임에 대한 논의들이 그 목적성에 대한 변명으로 천착한다고 언급했던 정치 · 사회의 표본이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하리라. “하지 않았을 시 결과가 따를 거”라는 협박으로 행위의 원인 항을 강제로 채우는 법, 규범, 도덕, 국가 등은 청소부들의 대사 그대로 “이 원칙 위에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원칙”,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가 거세 협박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에게 습득되는 과정부터가 바로 “이 원칙”의 실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체계가 신경증 환자와 같은 모범 시민들에게 명령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의 명령 방식이 플레이어를 향한 게임의 또 다른 명령 방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에 좀 더 집중하기로 하자. 왜냐면 미리 말하건대,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러한 명령 방식들은 플레이어-행위자의 즐거움에 기반한 비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명령 이행보다 현저하게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핫라인 마이애미>에서 “R을 눌러”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X를 눌러” 쓰러진 상대방의 머리를 밟아 으깨라는 명령에는 그 어떤 조건절도 선행하지 않지만, 게임은 때때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의 조건절을 플레이어 행위의 원인으로 설정하고자 ‘협박’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협박은 HUD에 떠올려져 있는 ‘체력 바’와 같이 주인공의 죽음, 즉, ‘게임 오버’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태의 UI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명령들은 처음에 즉각적으로 플레이어를 게임플레이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UI의 대화 방식으로는 효과적이다. 당장 ‘죽음’이라는 협박이 가지는 급박함이 우선 게임에 몰입하기 이전까진 게임 외부의 경험적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게임 안의 현실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 끊임없이 즐거움을 탐색하는 플레이어에게 저러한 협박은 그다지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하지는 못한다.


물론 체력을 채우고 유지하고 관리하는 그 행위들 자체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플레이어는 게임플레이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지만, 이 시점에서 UI가 원래 가했던 협박의 조건절, ‘나를 채우지 않으면 주인공은 죽게 되고 너는 게임을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게 된다’는 문구는 그 전과 같은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으면 뭐 어떻단 말인가? 게임은 언제든지 다시 플레이할 수 있다. ‘게임 오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저 죽기 전까지의 플레이 과정을 다시 돌려 플레이해야 한다는 일시적인 불편 정도밖에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불편과 싸우는 것 자체 또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게임플레이의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소위 ‘죽음’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강제하는 협박으로 기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심지어 게임 속에서 일부러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한다. 체력이 바닥났으나 회복 수단까지 다 떨어졌을 경우, 스테이지를 거의 다 클리어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충분한 점수를 얻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경우들에는 이제 게임 내에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가능성이 소진되어 더 이상 원하는 만큼의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그저 빨리 죽고 다시 시작해 즐거움의 가능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혹은 그냥 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죽는 행위 자체가 발생시키는 즐거움을 위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죽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의 죽음 자체가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게임들, 그러니까 주인공이 죽을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흥미로워 일부러 그 가능한 모든 죽음의 시나리오들을 전부 실험해 보도록 만드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게임 오버’의 협박이 더더욱이나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특히 <데드 스페이스>, <사일런트 힐>, <바이오 하자드> 등의 호러 장르 게임들에선 괴물, 환경 등 주인공의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 각각이 저마다 고유하고 독창적인 죽음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새로운 위협 요소와 마주칠 때마다 이 요소는 주인공을 어떻게 죽이게 될 것인지를 실험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실재적 차원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단 한 번의 죽음이 곧 삶의 영구적인 끝을 의미하는데,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플레이어가 급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게임 속 현실에 몰입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그렇다면 게임에서 조건 없는 즐거움의 명령이 조건적인 협박식의 명령보다 유효하다는 걸 현실에서의 행위 원리와 비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고. 우선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적 차원에서도 이미 언제나 “죽음의 경험이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게임 속 세계 자체에서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이 실재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간주되는 게임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

보편적으로 게임들은 그 안에서 주인공이 죽었을 때 플레이어가 ‘불러오기’ 혹은 ‘이어하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다시 주인공을 부활, ‘재생성 (respawn)’시키는 과정을 게임플레이 바깥의 메뉴 영역에 국한되어 벌어지는 일인 것으로 ‘가정’한다. <핫라인 마이애미>의 예만 보더라도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몇 번이고 반복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카타나 제로>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에는 주인공도 주인공이 속한 세계도 모두 주인공의 영원히 반복되는 죽음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카타나 제로>에서 주인공은 ‘크로노스 (Chronos)’라는 이름의 마약을 투여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 전투 상황, 즉, 주인공의 끝없는 죽음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들은 주인공의 계산 속 경우의 수들인 것이다. 이렇게 됐을 경우 게임 내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오직 주인공이 죽지 않고 모든 적을 처치한 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 바로 그 경우의 수뿐일 테지만, 우리는 이 또한 허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니체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그 자체가 미학에서는 도대체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삶과 세계는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면 현실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에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기준은 전혀 무의미할 터이다.2)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마치 일년처럼 느껴지”고 “모든 말이 길어지고, 모기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주인공 그 자신의 주관적 현실에선 그 모든 죽음의 경험들은 더욱 생생해질 여지도 없을 만큼 실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카타나 제로>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죽음은 주인공에게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로 아주 선명하게 실재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핫라인 마이애미>를 포함해 아무리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 세계 안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 죽음을 경험하는 주인공 자신조차 자신의 죽음에 무지하다 하더라도, 정작 플레이어는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모두 자신의 경험 안에서 플레이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주관적’ 실재에서 그 모든 죽음은 언제나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근본적인 목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게임 내에서 명령되는 사항들을 플레이어가 이행하는 원리 중에서 조건절로 협박하는 명령보다 조건 없이 플레이어 자신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명령들이 언제나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면, 애초에 현실에서 플레이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500시간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게 하는 원동력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오직 즐거움뿐이리라. 그리고 굳이 게임이 예술의 영역 안으로 포섭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겠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어떤 외부적 목적도 전혀 안중에 놓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움만을 끌어내기 위해 플레이한다는 지점에서만 예술과 궤를 함께할 수 있다. 아니면 예술이 게임과 궤를 함께하든가. 물론 이 포섭과 범주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인간 행위라는 점에서 목적과 원리가 동일하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말하자면, 애초에 예술 현상이 무슨 외부적 효용을 위해 벌어진단 말인가?



1) 안티 오이디푸스, 547p.
2) 비극의 탄생, 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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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폭력과 고통, 그리고 분열의 상관 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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