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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 되어 돈이라도 있고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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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12. 10.

게임이 예술 되어: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게임이 예술인가 하는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다. 시대 따라 논의의 초점도 발전했다. 학계 내부에서 논의의 초점 하나가 영글면 바깥으로도 튀어나왔다. 열매는 칼럼이나 기사의 형태로 이따금 맺혔고, 지나가던 대중들은 댓글창에서 입씨름을 벌이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러던 2011년, 열매를 모으던 학계와 지나가던 대중들이 잠깐 멈추어선 소식이 있었다. 2011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게임을 예술에 포함시키는 판례를 남겼다. 캘리포니아 주법에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을 판매 혹은 대여하는 것이 불법이라 규정한 법이 있었는데, 이 법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위배되는 헌법은 수정헌법 1조. 예술 장르에게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부분이다. 이 판례가 나온 후 미국의 국립문화예술진흥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NEA)은 지원 대상에 게임을 포함시켰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예술’ 항목의 이름을 ‘미디어 예술’로 바꾸면서 비디오 게임을 집어넣은 것이다.



11년이 지난 올해, 한국에서도 같은 소식이 있었다. 2022년 9월 27일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이 공포되어 6개월 후인 2023년 3월 23일부터 효력을 가진다. 조승래 의원은 게임을 문화예술의 범위에 추가하는 부분을 대표 발의했다. 애니메이션은 유정주 의원, 뮤지컬은 이병훈 의원 대표 발의에 의해 추가되었다. 판례로 규정을 바꾼 미국과 달리 한국은 입법으로 규정이 바뀌었으므로 바뀐 조항에 따라 자동으로 게임은 지원 대상 예술 장르가 된다. 법의 제목부터 문화예술‘진흥’법이지 않은가. 일찍이 우탱클랜은 불멸의 구절을 랩했다.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 주변 모든 것은 돈으로 돌아갈지니. (줄여서 CREAM이다)


크림처럼 달달한 지원금을 노리기 위해 법을 들여다 보자. 문화예술진흥법에는 지원금과 장려 정책이 명시되어 있다. 7조에는 전문예술법인을 만들 수 있는 규정이 있고, 11조에는 장려금 정책이, 14조에는 문화산업 지원에 관한 규정이 있다. 4장은 아예 전체가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항들이다.



게임 속에 예술이 너무도 많아: 게임 내의 예술의 영토


게임의 특성인 경쟁성이나 참여성이 예술의 속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는 반박이 되었고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서 추가 논의로 들어간 주장들이다. 그런데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게임의 예술성 논의는 국가 시스템에 의해 한 단계를 넘어갔다. 법적으로 예술의 범주에 들어갔다. 다음 차례는 국가가 예술에게 주는 지원금과 지원책을 받으면 된다. 독립 개발자들은 국가 지원금을 받아 제작비로 쓸 수 있을 것이고, 대형 게임사 또한 국가의 연기금을 투자자로 받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형 회사의 투자 사정은 그렇다 쳐도, 미국 NEA의 기금 지원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개인 개발자나 소규모 그룹 개발사에 지원이 갔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게임의 어느 부분이 예술성을 갖고 있을까? 게임은 그림, 영상, 문자, 음악, 음향, 여기에 더하여 프로그래밍 코드 등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의 예술성은 이 구성 요소 중 어디에 있는가? 혹은 이 구성 요소 모두 내지는 요소의 집합에 있는가? 감독, 각본, 연기 정도로 정리가 가능했던 영화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하다. 게임이 훨씬 더 복합적인 장르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게임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게임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 중 어디까지가 법적 예술인이 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곱씹어 보면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게임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디렉터, 혹은 디렉터들인가? 아론 스머츠(Aaron Smurts)는 게임 제작자가 영화 감독처럼 총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작업을 한다며 예술가로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게임 제작자도 영화 감독도 독립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서사를 만들어낸 각본, 서사를 수행해낸 연기, 둘을 합쳐 의도를 투사해낸 감독의 셋으로 예술성의 영역을 정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촬영 행위 자체도 기법과 의도가 있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분장과 의상과 음악도 같은 노선을 탔다. 물론 위계상 감독이나 각본이 가장 상위에서 통합 권위를 가져가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하위 분야들의 예술성이 완전히 부정당하지는 않는다.


그럼 게임에서도 비슷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픽과 디자인을 입히는 파트까지는 예술일 것 같다. 그럼 UI 디자인은? 배경음악을 만드는 인력이 예술인이라면 음향을 디자인하는 인력은? 시나리오 작가는 예술인에 포함될 것 같은데, 이를 검수하고 수정하는 인력은 어떨까? 그러고 보니 소설과 만화에서 편집인은 예술인이던가 아니던가?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요소를 동원해 컷신 시네마틱 영상을 만들어내는 인력은 어떨까? 게임이기에 가능한 질문도 더해진다. 비디오 게임을 하나의 작품/상품이게 만들어내는 기술은 프로그래밍 기술이다. 그럼 게임 코딩을 한 프로그래머들은 예술인이 되는가?


비록 게임 제작진의 대다수가 감독/디렉터의 의도 하에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긴 하지만, 영화 제작도 같은 형태니까 게임에서도 대다수의 인력들을 예술인으로 인정해주면 될 것 같다. 그런데 프로그래밍도? 약간의 거슬림이 생긴다. 비디오 게임의 근간을 쌓는 작업이니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지가 너무 ‘기술직’이다.


사실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 어차피 ‘藝術’이건 ‘arts’건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는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정교하고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 경지를 지칭하는 개념이 점차 변하여 현재에는 예술성을 지칭하는 개념이 된 것이니까. 따라서 우리는 받아들이면 된다. 코딩하는 프로그래머도 게임을 만드는 데에 참여했다면 예술인일 수 있다. 그게 새로운 시대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낸 코드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도 하지 않는가. 물론 저 표현은 비유적 표현에 의한 감탄이지만, 법적 영역에서는 건조한 사실 진술이 될 수도 있다.


코딩도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시선은 이미 한참 전에 제시되었다.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는 2013년에 큐레이터로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게임 14종을 선정해 전시했다. 안토넬리는 전시작을 선정하기 위해 만든 기준에 그래픽, 유희성 등의 ‘예술적 기준’ 외에도 조작의 참신성과 코딩의 우아함을 집어넣었다. 같은 해, 독일의 미디어아트 전시회인 트랜스미디알레(Transmediale)에는 아예 즉석 코딩 공연이 올라갔다. 게임의 장르적 특성인 유희성이 규칙에서 나오고 그 규칙을 현실화시킨 것이 코딩이므로, 코딩의 최적화 수준 또한 예술성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 이미 음악 연주의 방법으로 코딩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게임의 예술화, 혹은 게임의 예술 편입은 예술 역사에서 혁명적 사건이다. 과거 게임의 예술화를 부정하는 논의를 다시 돌이켜 보자. 경쟁성이나 참여성 등의 특성이 기존 예술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 경 나왔던 소설가 이영도의 발언이 기억에 남는다. ‘예술의 목적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게임의 목적은 타자를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게임은 예술이 아니지만 예술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스포츠는 예술이 아니지만 가치를 폄하 당하지 않는다.’


게임의 다른 속성인 ‘협동’이 부각되면서 이 논리의 힘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주목할 가치는 있다. 이 관점에서 게임의 예술화를 바라본다면, 예술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질적인 체계를 가진 장르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로 가장 이질적인 장르라는 점은 게임의 특성 중 수용자의 참여성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예술 장르에서 수용자의 기본 태도는 감상 내지는 관조였다. 반면 예술 신입인 게임에서는 직접 참여하여 경험한다. 새로운 수용 형태가 예술에 들어온 것이다.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보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로 용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가 했던 말이다. 수용자 미학 이론으로는 맞는 얘기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이 된 것은 사람들이 미술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 수용자에게 달렸다. 사람들이 예술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예술품이 완성되며, 사람들의 해석에 따라 예술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돈이라도 있고 없고: 지원금과 노동권


그리하여 과거 논의까지 건드려가면서 얻어낸 결론은 낯설긴 해도 만족스럽다. 사람들이 게임을 예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예술임을 인정했다. 이제 만족스러움을 안고 내년 3월부터 국가 지원금을 받아가면 된다.


하지만 당장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예술인 지원 정책을 규정하고 있는 법은 예술인복지법인데, 이 법의 개정안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내의 논의가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이 논의에는 코딩 프로그래머의 예술인 인정 여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담당 부처의 논의가 대강이나마 윤곽이 잡히면, 그때 가서야 예술인복지법의 구체적인 개정안과 새 시행령이 나올 것이다.


현재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의원들이 발의해놓고 논의하고 있는 예술인복지법 내용은 예술인 자격 증명과 경력 증명에 관한 내용이다. 정부에 예술인으로 등록을 하여 지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각종 서류가 필요하다. 그중에는 국가가 ‘예술 활동’이라고 인정하는 특정 활동의 증명도 있다. 물론 이런 서류 구비는 힘들고 귀찮고 헷갈리는 일이다. 그래서 앨범을 몇 장씩 내고 10년 넘게 활동한 중견 음악인도 예술인복지법에서 보면 예술인이 아닌 상황이 흔하다.


그러다 보니 예술인 등록제는 예술 활동을 증명한다기보다는 예술인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더 많이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주류 시장과 비주류 담론 양쪽 모두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예술인임을 증명하고 지원금을 타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현재는 이런 부작용을 없앨 패치를 논의하는 중인데, 현재 발의되어 올라와 있는 개정안을 보면 논의가 건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기실 국회는 지원금 관련한 고민만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 개정에 있어서는 노동권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예술인복지법 5조는 예술인이 불공정 계약을 하지 않도록 하는 표준계약서 조항이다. 활동 증명과 표준계약서에서 알 수 있듯 주로 개인 및 프리랜서를 위주로 패러다임이 잡혀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인 연예인이 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체결할 때의 계약서 또한 이 조항을 기준으로 작성된다. 따라서 현재 게임 제작사와 노동 계약을 맺고 입사해 있는 시나리오 라이터, 디자이너, 3D 모델러, 코딩 프로그래머 등등에게도 표준계약서 준수 여부가 중요해질 수 있다. 게임업계의 고질적인 노동 문제를 풀 실마리가 여기서 등장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술인복지법이 언제 어떻게 개정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구체적인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게임의 예술화에 있어서 한국은 이제 첫 번째 페이지를 연 것이고, 단순히 법 한두 개를 개정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인 업계 모니터링과 철학적 담론 탐색이 있어야 하며, 그 결과는 향후 여러 번의 개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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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인)

프리랜서 기자. 이 직업명은 ‘무직’의 동의어라고 확신하고 있다.
딴지일보에서 기자 커리어를 시작하여 국정원 댓글 조작을 최초로 보도했다.
애써 뺀 살이 다시 돌아온 것에 자신을 탓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돌고 도는 윤회의 쳇바퀴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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