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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pang 2> - 부담 없는 플레이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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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12. 10.


 2023년 6월 21일에 발매된 초고속 고어 액션 FPS 게임 <Trepang 2>는 어떤 면으로 미루어 봐도 ‘완벽한’ 게임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심지어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다’라고 말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망설임이 어른거린다. 우선 제목에 ‘2’라는 숫자가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Trepang 2>에는 전작이 없다. <Trepang 2>는 인디 개발 스튜디오인 Trepang Studios의 첫 공식 발매작인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Trepang 2>의 미발매 데모 버전이 ‘Trepang 1’인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목의 비밀은 개발자들의 공식 디스코드 서버 FAQ 채널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다. <Trepang 2>의 개발자들은 2011년 12월, 48시간만에 게임을 개발하여 완성하는 루둠 다레 (Ludum Dare) 대회에 출전한 바가 있다. 이때 제출했던 아주 작은 크기의 (게임의 전체 파일이 1.78 메가바이트이다) 게임이 바로 ‘Trepang’이라는 제목을 가졌었는데, 이 게임은 해삼을 조종하여 장애물들을 피해 바다를 건너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2D 횡스크롤 게임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어로 해삼이 trepang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 게임은 <Trepang 2>의 전신이기는커녕 스튜디오의 첫 공식 발매작과 모든 면에서 아무런 유사점을 가지지 않는다. 즉, 초고속 고어 액션 FPS 게임인 <Trepang 2>는 해삼과 완벽하게 무관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개발자들이 처음 만들었던 거의 낙서 수준의 게임의 제목이 ‘Trepang’이었다는 이유로 지금과 같은 제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Trepang 2>는 게임의 제목과 내용 사이에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

     

* 문제의 ‘Trepang 1’

     

 일반적으로 작품의 제목은 분명 작품 그 자체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으로 지을 텐데, 그와 엇비슷한 노력조차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데서부터 <Trepang 2>는 진지함이라는 가치와는 망설임 없이 결별하고 있다. <Trepang 2>가 이처럼 자신의 불성실함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게임이 주력으로 삼는 분야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앞서 게임을 수식했던 바와 같이 <Trepang 2>는 초고속 고어 액션을 플레이 경험으로 구성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고 그 외의 부분들에서는 그다지 부차적인 수고를 들이지 않기로 단호하게 결정한 것이다.



숨 쉴 틈 없는 플레이의 확실한 즐거움


* 한 손에 한 정씩 산탄총을 쥐고 장전하는 동시에 적을 발로 차는 모습

     

 먼저 <Trepang 2>에서 가장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액션 요소인 양손 사격부터 살펴보자.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일반적으로 미디어에서 양손 사격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권총이나 기관단총뿐만 아니라 산탄총, 돌격소총, 유탄 발사기마저 양손으로 난사할 수가 있다. 물론 중형 화기의 양손 사격 자체를 <Trepang 2>가 최초로 선보인 것은 아니고 이미 <울펜슈타인>과 같은 여러 FPS 시리즈에서 무식하게 커다란 무기들을 양손에 쥐고 발사해대는 주인공들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Trepang 2>의 주인공이 산탄총을 양손에 들고 한 손씩 번갈아 가며 장전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1인칭으로 보고 있노라면 (좋은 의미에서) 정말 가관이라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이 기능으로 인해 게임 내의 거의 모든 무기들은 조준 사격이 불가능하며 지향 사격을 강제한다. 이러한 조작 방식은 적과 차분하게 교전하거나, 은신 플레이를 원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분명 기능적 문제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고 차분한 조준 같은 것은 하수구 아래로 내다 버린 대신 이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쉬지 않고 사방으로 움직이며 중-근거리 난사로 적들을 갈아버리는 고밀도의 액션 플레이에 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주인공 캐릭터인 “실험체 106번”은 우선 기본적으로 굉장히 재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지만, 거기에 더해 슬라이드부터 장애물 넘기, 기어오르기, 그리고 발차기를 이용한 월 점프 (wall jump)까지 (보통 월 점프는 게임에 기술로 탑재되어 있을 경우 벽을 향해 점프를 두 번 하는 걸로 자동적으로 발동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Trepang 2>는 벽을 향해 점프 뒤 원래는 공격용인 발차기를 벽을 향해 사용했을 때 월 점프가 발동하도록 구성해 놓았다. 굉장히 독특한 이동 기술 설계라고 볼 수 있겠다) 구사할 수 있어 사방으로 매우 현란하고 정신없이 움직일 수 있다. 또 이동 기술 바깥에 주인공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 기술로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정도로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집중 (focus)”,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가 투명해져 적들에게 보이지 않는 채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은폐 (cloak)”가 있다. 그런데 거의 항상 엄청나게 많은 수의 적들이 주인공을 둘러싸 총알을 포화같이 쏟아대는 <Trepang 2>의 전투 환경에서 플레이어가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적을 살해했을 때 적이 떨어뜨리는 방어구를 줍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얘기했던가? 즉, 한 자리에 머물었다간 체력이 눈 깜박할 사이에 바닥나는 <Trepang 2>에서 이동 기술들과 특수 기술들은 플레이어가 이용 가능한 기술인 동시에 그것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이용하지 않으면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이 불가능한 기술이기도 하다.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결코 상황을 찬찬히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고 거의 저 모든 기술을 키보드나 컨트롤러에 손이 가는 대로 본능에 맡겨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적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조준하여 사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집중”밖에 없는데, “집중”은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 “은폐”도 마찬가지로 사용 가능한 양은 한정되어 있지만 기술을 전부 소진한 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사용량이 다시 회복되는 반면, “집중”의 경우에는 알아서 다시 채워지지 않고 반드시 플레이어가 또 다른 적들을 공격하여 죽여야지만 기술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집중”을 통해 느려진 시간 속에서 그나마 몇 초 가량이나 숨을 돌린 다음에는 다시 또 상황 파악이 불가능한 척수 반사의 전투 세계 속으로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Trepang 2>는 플레이어가 구사할 수 있는 초인적 능력과 플레이어를 몰아넣는 도전적 상황을 조화롭게 제공함으로써 숨 가쁘게 박진감 넘치는, 역동적인 플레이 경험을 구성해 낸다.



숨김없는 가벼움


*  “모스맨”, “백룸”, “모노리스”

     

 <Trepang 2>는 현대를 배경으로 호러 요소가 가미된 초능력 FPS 게임이라는 점에서 <F.E.A.R> 시리즈의 정신적 후속작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혈흔과 총상, 그리고 사지 분리는 물론 갖가지 내장 부위들부터 척추, 뇌까지 바닥에 굴러다니도록 (그리고 발로 찰 수 있도록) 세세하게 구현해 총을 한참 쏘다 보면 맵 전체가 거의 지상에 소환된 지옥도처럼 변해 있는 <Trepang 2>는 아주 훌륭한 고어 게임으로 평가할 수는 있어도 엄연한 의미에서 <F.E.A.R>와 같은 진지한 호러 게임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어 보인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이 게임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스토리 및 세계관 설정에 사용된 이른바 ‘호러 요소’들도 진정으로 공포를 제공하려 한다기 보단 그저 ‘호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들이다.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보스가 그 유명한 도시 전설 “모스맨 (mothman)”인 것에서부터, 인터넷 시대의 비교적 최신 괴담인 “백룸 (backroom)”을 맵으로 구현한 레벨, 사실상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모노리스 (monolith)”를 조금 두껍게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물체의 발굴 현장까지, <Trepang 2>에 등장하는 소재들의 십중팔구는 대중문화에서 정말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것이거나 아니면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것들이다.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2018년 개봉한 박훈정 감독의 영화 <마녀>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미 <마녀> 자체가 끔찍하리만치 뻔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Trepang 2>가 얼마나 서사적 독창성으로부터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지가 뚜렷하게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루고 있는 게임은 애초에 제목이 ‘해삼 2’라는 걸 절대 잊지 말도록 하자. <Trepang 2>는 스스로 소재의 난잡함과 키치함 같은 것들을 전혀 숨길 생각이 없고 흔하기 짝이 없는 극도로 싸구려처럼 느껴지는 클리셰를 사용하는 데에도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그들 자신감의 근거인 뛰어난 고어 액션 플레이에 플레이어가 부담 없이 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근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 부피가 더 방대해지는 수많은 오픈 월드 게임들을 플레이하던 도중 플레이어가 갑자기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은 이제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픈 월드 탈진 (open world fatigue)”이라고도 불리는 이 막막함의 감정은 사실 단순히 오픈 월드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흔히 ‘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게임에서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웅장하고 인상적인 스토리로 정평이 난 게임들과 마주할 경우에 플레이어는 자신이 해당 게임의 모든 콘텐츠를 하나도 빠짐없이 즐겨봐야만 할 것 같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느끼기 쉽다. 말하자면 ‘완벽주의자 (perfectionist)’ 플레이를 향한 이러한 부담은 플레이어가 쉬이 게임에 손을 댈 엄두를 못 내도록 막는 주객전도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일례로 얼마 전 필자가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를 다시 켰을 때 마지막으로 저장한 일자가 2022년 8월 12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반부까지 플레이해 놓고 게임의 지나치게 넓은 분량, 전부 다 일일이 확인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상호 작용 가능한 요소들,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텍스트의 홍수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아 게임을 다시 시작할 엄두를 1년 넘게 내지 못했던 것이다.


 <Trepang 2>에 숨겨진 비밀들이나 수집 가능한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의 전체적인 가벼움으로 인해 그러한 콘텐츠들은 부담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모아도 그만, 안 모아도 그만이며, 우연히 눈에 띄면 확인하겠지만 굳이 그것들을 빠짐없이 찾기 위해 같은 스테이지를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반복해서 플레이하고 맵 전체를 샅샅이 뒤지지는 않는 종류의 항목들인 것이다. 따라서 <Trepang 2>는 게임을 시작하는 데서부터 끝내는 데까지 매우 가볍게 임할 수 있으며, 게임을 전부 클리어한 이후에 다시 플레이할 때에조차 편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소위 ‘대작’들을 회차 플레이할 때 드물지 않게 느끼는 ‘이걸 또 언제 다 플레이하나’ 싶은 마음을 <Trepang 2>의 리플레이에선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게임 자체가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덕분도 있지만 플레이어가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스토리를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단선적인 순서로 쭉 플레이하도록 만들지 않고, 그때그때 원하는 스테이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한 미션 시스템 덕분이기도 하다. 이는 <Trepang 2>과 유사하게 고어와 액션을 주 플레이 요소로 꼽았던 <라스트 오브 어스 2>에서도 채택했던 방식인데 (비록 이 둘이 각자 중점으로 두는 고어 액션의 측면은 서로 상당히 다르지만), <라스트 오브 어스 2>에서도 원하는 맵 구성과 적 배치, 전투 상황 등을 언제든지 다시 즐길 수 있도록 스토리 진행의 구간별로 리플레이를 가능하도록 설계해 놓았었다. <Trepang 2>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샌드박스 맵까지 구현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정말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자유롭게 액션과 고어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와 같이 원할 때마다 켜서 잠깐잠깐 플레이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다시 끄는 것이 가능한 <Trepang 2>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Trepang 2>는 매우 뛰어난 고어 액션 게임플레이를 구사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게임의 진지함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고, 또 그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볍고 천박한 게임의 인상이 다시 플레이어에게서 부담을 덜어 훌륭한 게임플레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상호피드백적인 효과의 고리를 형성한다. <Trepang 2>를 통해 게임이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 언제나 방대하며 무거운 내용과 숭고함, 비장함, 웅장함과 같은 중후한 인상들이 반드시 효용적이지만은 아닐 수도 있으리란 것을 생각해 볼 만하리라. 물론 그렇다고 또 즐거움이란 게 꼭 가벼울 필요도 없지마는, 게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경험’이란 무조건 부피와 무게를 늘려서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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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폭력과 고통, 분열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을 제작하고 연극 <오페라 샬로트로니크> 드라마터지를 맡았다. 『호르몬 일지』를 썼고, 『미친, 사랑의 노래』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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