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되는 것, <Life is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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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2. 10.
모든 미디어는 동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다른 매체들을 상호 참조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기를 통해 구현된 게임과 비교해본다면 콘솔이나 PC를 통해 플레이할 수 있는 지금의 어드벤처 게임은 동일한 영역에서 다루기 어려울 정도다. 하나의 사(史)를 기술할 수 있을 만큼 개별적인 영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각각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게임 디자인을 비롯한 재현적 특징과 이에 따른 플레이 방식이 상이하게 분화됐다. 이 과정에서 게임은 다른 시각 중심의 미디어 기법을 적극적으로 재매개(remediation)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시네마틱 트레일러에서 자주 활용되는 영화의 컷 분할이나 카메라 기법부터 드라마 시리즈를 차용한 에피소드식 전개를 서사를 구성하는 큰 축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그 예시를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앞서 거론된 미디어들보다는 드물지만 보다 이전부터 근대를 상징하는 기술이자 매체였던 대상, 바로 ‘사진’을 재매개하는 방식을 통해 주요 사건을 전개하는 게임도 존재한다. 돈노드의 대표작 <Life is Strange>가 그러하다.
블랙웰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 맥스는 5년 만에 혼자 돌아온 고향에서 적응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클로이와 재회하기 이전까지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사진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할 것인가 여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나서 맥스의 세계는 단절되었던 우정과 관계의 회복, 학교 내 커뮤니티에서 초래되는 약물을 포함한 폭력의 문제, 나아가 지역 내 실종사건까지 급속하게 확장된다. 지역 유지인 가문 덕분에 교내에서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집에서는 무시당하는 네이선은 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적인 성향을 통해 보여준다. 그 네이선이 총기로 위협하다 살해한 대상이 자신의 친구이자 이사하면서 관계가 단절된 클로이라는 것을 맥스는 시간을 돌려 그녀를 구한 뒤에서야 깨닫는다.
*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특정한 관점과 초점을 맞출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맥스가 찍은 파란 나비는 <Life is Strange>의 시발점이자 선택의 종결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활용된다.
결정적 실수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동일한 시간선의 과거를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상상은 너무도 흔한 클리셰가 되었다. 다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소환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세이브’, ‘로드’라는 게임 디자인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부터 요시다 히로시(吉田寛)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특수한 재현 양상이 다른 미디어에 미친 영향력에 대한 지적은 유구하다. 게임이 다른 미디어를 재매개하며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웹소설, 애니메이션 역시 게임을 재매개하며 새로운 방식의 서사를 찾아냈다. <Life is Strange>에서 시간을 조절하는 맥스의 능력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특정한 국면을 분절적으로 저장하고 다시 불러오거나 실패한 과거를 성공한 현재로 덮어쓴다는 게임의 독특한 시간 재현 방식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정지시키고 특정한 국면의 시간선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음에도 맥스의 이능은 전능하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붙들고자 하는 이능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도 사진을 매개로 하고 있으며 사진이 갖는 매체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맥스가 자신이 찍힌 사진을 통해 사진이 포착한 시간의 한정된 공간 일부에 위치한 자신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세 번째 에피소드인 ‘카오스 이론’ 중에서도 후반부다. 클로이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대마를 피우며, 트레일러에 거주하는 마약상에게도 협박을 받는 문제적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이라 생각한다. 맥스가 도달한 시간선은 바로 그 클로이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직전 집을 나설 때다. 사진이 포착한 좁은 공간 내에서 차키를 숨기는 일에 성공한 맥스는 클로이의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을 막는다. 그러나 13살의 맥스가 저지한 사고 이후 18살의 맥스가 되어 마주한 새로운 현재는 전신 마비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클로이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Life is Strange>는 맥스의 시점에서 선택한 결과가 과거, 현재,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지문을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특정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에 자리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재현을 위한 도구로 캔버스가 아닌 사진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사진은 결국 특정한 앵글을 통해 제한된 대상의 부분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의 주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그것은 어떤 대상을 선택하고 무수한 상황 속에서 특정 국면만을 포착하는 하나의 시선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분절된 샷(shot)은 결코 인간이 전지적일 수 없으며 파편화된 특정 장면을 통해 이어놓은 느슨한 인과가 늘 그 밖의 다른 균열을 배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의 매체적 특성은 어드벤처 게임의 수색 혹은 탐사와도 맞물린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 서사가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과는 별도로 특정한 상황에서 정지된 시간과 공간에 위치한다. 다수의 선택지를 대면하기에 앞서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탐색은 맥스의 이능과 게임이 디자인한 플레이어의 권력을 중첩시킨다. 플레이어 아울러 맥스는 판단을 지연하거나 혹은 선택을 번복하는 방식을 통해 더 나은 경로를 찾고 자신이 계획한 시간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지향점이다. 특정한 국면에서 수행되는 서사와 탐사는 가능성의 다른 지점들의 내적 규모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접한 유형을 통해서만 타인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든 면모를 알 수 있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 불가능하다. 클로이가 실종자 몽타주를 붙여 가면서 애타게 찾고 있던 레이첼 역시 탐색을 거듭하다 보면 클로이가 진술한 친구 레이첼과는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교사 제퍼슨과 내연 관계였다는 소문, 마약상 프랭크와 연인에 가까워 보이는 정서적 유대를 가졌던 과거는 클로이가 아는 레이첼과는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예다. 블랙웰을 다니는 누구라도 그를 싫어할 것이라 평가받는 클로이의 양부 데이빗은 암실에 감금된 맥스가 탈출하는 데 일조하는 결정적인 활약을 한다. 비록 그가 직업 군인이었던 시절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압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클로이를 염려하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강박에 가까운 조사와 수집, 수사를 통해 뒤늦게 증명된다.
그렇기에 (플레이어와 맥스 모두를 포함한) ‘나’의 현재적 판단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쉽지 않다. 불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선택과 번복이 계속될수록 시간선을 리셋하는 것에 대한 리스크는 커지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그럼에도 선택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책임에 따라오는 무게를 동반한다.
<Life is Strange>의 탁월한 지점은 마지막 선택을 남겨둔 맥스의 ‘악몽’ 부분의 묘사에 있다. 게임은 이제 플레이 문법의 관성을 비튼 메타 게임도 그 수를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정한 서사적 클리셰를 누적해왔다. 친구 혹은 연인, 부모님과 같이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한 선택과 분투는 익숙한 서사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되어 멀어졌다 5년 만에 재회한 친구를 위해 분투하는 맥스의 내면은 어떨까? 클로이와 만난 일주일 간의 맥스는 분명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누구 하나의 충실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클로이는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인간상이다. 동시에 몇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정서적으로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악몽이 맥스에게 보여주는 클로이는 그녀의 미숙함을 조롱하고 맥스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맥스와의 관계 이상의 유대를 과시한다. 악몽은 자신의 충실성이 배반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내면을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살리고 싶어 했던 클로이와의 관계가 아카디안 만을 떠나서도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반복되던 블랙웰에서의 일주일이 그들의 가장 예외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
선택을 위해 제시되는 두 개의 분기점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 삶, 매끈한 하나의 서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선택은 불가피하다. 오히려 굴절된 한 분면만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가 그 선택이 충실한 것임을 간절하게 희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