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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사람들을 지켜라 - 만화는 어떻게 멸시와 비하를 딛고 일어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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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6. 10.

1972년 6월 29일 동아일보에선 “불량만화 화형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불량만화는 사회악의 근원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한 자리다!)에서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를 열고 만화책을 모아 불태웠다. 이 단체는 만화를 두고 ‘유소년의 정서발달을 해친다’, ‘제대로 된 지식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주류의 시선에서, 당시 만화는 ‘악서’였던 셈이다.



* 애니센터 앞에서 불타는 만화.  

1996년에는 정부가 만화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른바 ‘청보법 파동’이다. 여기에 항의하기 위해 만화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고, 1997년에는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기소됐다. 대회가 열린 1996년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 됐고, 2001년 국가 공식 기념일이 됐다. 


2000년 여름에는 ‘둘리아빠’ 김수정 당시 만화가협회장의 주도로 청보법 파동에 항의하는 침묵시위가 개최됐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가협회 회원과 함께 나서겠다”고 이야기했지만, 현장에는 아마추어 만화동아리 연합,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있었다.[1]  2012년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일부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독자와 작가들이 함께 싸웠다. 이 결과 세워진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서는 2018년 ‘웹툰 자율규제 연령등급 기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콘텐츠 분야 최초로 ‘차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자가진단표를 공개[2] 하기도 했다. 대중과 호흡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이후에도 평단과 독자들이 웹툰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는 창작자와 향유자가 한 목소리를 내며 만화를 지켜낸 순간들이다. 말하자면, 불량 콘텐츠였던 만화가 문화가 되어가는 장면이다. 현재, 2021년에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중교통에서도,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어디서나 웹툰을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의 만화는 이렇게 ‘문화’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게임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게임은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치고’, ‘폭력성을 추동해 범죄를 유발하고’, 심지어 ‘중독을 유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저 말들은 만화에도 똑같이 쓰였던 말이다.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문화다


소위 ‘주류’의 시선에서 보는 만화는 하위 문화로 여겨졌다. 불량하고, 어딘가 해로울 것 같고, 악당들이 유해물질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이미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도 만화 화형식(?)이 거행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탄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업체들이 앞장서서 CCA(Comics Code Authori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승인된’ 만화만 발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표현의 자유보다 무서운 것이 주류의 시선이었던 셈이다.


* 미국 CCA의 승인 씰.

이런 주류의 시선이 탄압하는 역사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유구하다. 소설이, 신문이, 영화가 그랬다. 그러니 가장 막내(?)격 매체인 만화와 게임이 탄압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새로 등장한 매체에 느끼는 공포’를 부르는 말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과 오명,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즐기는 사람들의 힘이 가장 컸다. 2000년 종로 거리에서, 2012년 온라인 게시판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함께 목소리를 냈고, 결국 만화는 천천히 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만화계에선 여전히 플랫폼의 역할, 콘텐츠 제공자의 책임, 작가의 위상 변화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동성이야 말로 문화의 핵심이다.


* 〈판타스틱 4〉이슈 1. 우측 상단에 CCA 씰이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 문화를 향유하는 향유자의 열망이 끊임없이 충돌할 때, 문화는 빛을 발한다. 때로는 규제에 질문을 던지며 돌파구를 만들기도 하고, ‘판’ 밖의 돌팔매질에 창작자와 향유자가 함께 항의하기도 하고, 때론 서로를 질타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가능한 중심에는 콘텐츠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 어떤 콘텐츠가 ‘문화’로 여겨진다는 건, 이런 과정을 거쳐 제공자와 향유자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의미한다.


게임 역시 즐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만화와 게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만화는 그동안 개인 창작자가 주류였지만, 게임은 태생부터 기업이 개발하는 산업의 요소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CCA의 사전검열을 피해 피 대신 불꽃이, 살점 대신 바위가 튀는 <판타스틱 4>를 만들어냈고, 한국에서는 시장이 사라지자 온라인 공간에서 창작을 이어간 작가들이 웹툰의 씨앗을 틔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게임’은 기업이 만들고, 기업은 이윤을 남겨야만 존속할 수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액제를 넘어 ‘가챠’로 불리는 뽑기를 만났고, ‘P2W(Pay to Win)’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에도 익숙해지게 됐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 게이머들은 이 과정까지도 어느정도 이해했다. 게임의 태생과, 내가 즐기는 게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이 즐기는 건 단순히 게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게임이 주는 경험과 다른 유저와 협동-경쟁하며 느끼는 경험의 총합이다. 그동안 게임이 부당한 탄압을 받을 때 마다, 게이머들은 항상 게임 옆에 서서 비난을 받아냈고, 또 맞섰다.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지키기 위해서 게이머들은 목소리를 높여왔다.



게임은 문화다. 게이머에겐.


오늘날 게임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게이머에겐 ‘게임은 문화’라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의 청소년기는 스타리그가, 20대는 LCK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에게 게임은 나 혼자서 즐기는 놀이를 넘어 함께 열광하는 문화였다. 게임을 만화처럼 불태우는 시대는 지났다. 사회의 시선은 느리지만 변하는 중이다. 게이머들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 게이머들은 창작자들, 즉 게임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블리자드의 ‘님폰없’ 사태, 한국의 트럭시위 릴레이를 보면 전세계적인 추세로 보인다. 


* 밈이 된 '님폰없'.

이제 게이머들은 ‘게임은 문화’라는 말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특히 대형 게임사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게이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게임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오히려 게이머들이 ‘더 강한 규제’를 외치는 상황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있다. 


만화는 발전 과정에서 ‘독자’의 힘으로 핍박을 이겨냈다. 미국은 ‘수퍼히어로’ 장르로, 한국은 독자와 함께 성장했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2000년과 2012년 사례, 화형식을 거쳐 MCU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심엔 독자가 있었다. 최근 웹툰계에 대두되는 플랫폼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읽는 사람’을 존중하고, 플랫폼을 찾는 이유가 작품임을 생각하라는 의미다. 결국 창작자, 콘텐츠 제공자가 ‘즐기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문화라고 부르기 어렵다.


게이머들에게 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문화다. 게이머들은 게임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만화계의 2000년과 2012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이 원하는,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내기 위해 50년 전 마블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게임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다. 문화 콘텐츠로서 게임은, 이제 기로에 서 있다. 





[1] 손발을 잃고 할 말을 잃은 만화가들의 침묵시위, 중앙일보, 2000. 7. 23 https://news.joins.com/article/682613 
[2] 웹툰자율규제 연령등급기준에 관한 연구,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s://www.kocca.kr/cop/bbs/view/B0000147/1836747.do?searchCnd=&searchWrd=&cateTp1=&cateTp2=&useAt=&menuNo=201825&categorys=0&subcate=0&cateCode=&type=&instNo=0&questionTp=&uf_Setting=&recovery=&option1=&option2=&year=&categoryCOM062=&categoryCOM063=&categoryCOM208=&categoryInst=&morePage=&delCode=0&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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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2013년부터 만화/웹툰 리뷰 팟캐스트 ‘웹투니스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2019년 콘텐츠진흥원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2019년부터 웹진 ‘웹툰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고, 만화를 중심으로 이뤄진 시장 저변의 많은 것들을 찾아보는 일을 합니다.

소설 <룬의 아이들>과 스타리그, LCK, 그리고 수많은 웹툰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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