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대한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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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12. 10.
트랜스페미닌 (transfeminine)은 논바이너리부터 트랜스여성까지, 트랜스젠더 중에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젠더 표현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논바이너리 중에 스스로를 여성 젠더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이들 (she/they)이 여기 속하고 트랜스여성 (she/her)이 가장 확실하게 속하는 계열이다. 그리고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라고 하면 다양한 SNS 및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를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한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를 이른다. 정체성 기반 네트워크들이 으레 그러듯이 젠더 정체성만을 구심점으로 삼고 모이다 보니 사실상 소속원들끼리 정체성 외에 딱히 공통항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오히려 당연하게도 개개인 각자가 서로 전혀 다른 고유하고 개별적인 특질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나마 공유되고 있는 조그마한 지표라도 발견하면 그것들을 중심으로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향유한다.
특히 최근 트랜스페미닌 커뮤니티에서 반복적으로 호명되는 게임들이 있다. <울트라킬> (2020), <시그널리스> (2022), <폴아웃: 뉴 베가스> (2010), <셀레스트> (2018), 그리고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 (2021)는 각자가 트랜스펨들을 중심으로 하는 탄탄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양식의 밈들에서도 유난히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게임들은 어째서 트랜스펨[1]들에게 선택된 것일까? 이 게임들이 트랜스페미닌 정체성과 따로 특별히 공모하는 지점이라도 있는 걸까?
<울트라킬>: 천사의 자기탐색과 CCTV 플레이어[2]
<울트라킬>은 아직 얼리 액세스 상태인 인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상당한 크기의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초고속-초폭력 고옥탄가의 FPS 게임이다. 미래에 모든 인류가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울트라킬>의 세계관에서 오직 남은 것은 피를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전쟁 기계들 뿐이다. 그리고 게임은 더 많은 피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기계 “V1”의 이야기를 다룬다. 플레이어가 V1의 눈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는 지옥을 지배하는 천사들의 고압적이고 수직적인 위계가 모든 영혼을 억압하고 있다. 딱히 V1에게 저항적이거나 혁명적인 정신이 있어서 천계와 맞서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더 많은 피를 흘리기 위한 여정 속에서 천계 의회를 대표해 검을 휘두르는 “지옥의 심판자” 가브리엘과 싸우게 된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한 명의 주인공이 한 명 이상의 여러 적수들, 혹은 체제 전체에 부딪히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무너뜨리는 구조는 액션 게임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심지어 아직 완결이 안 났음에도) <울트라킬>의 주요 적대 인물인 가브리엘이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었던 천국에 대한 믿음을 주인공과의 만남을 통해 뿌리부터 의심하게 되고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세계관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며 스스로의 생의 목적, 나아가서는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여정은 액션 게임의 문법 속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작 주인공 V1은 단 한 줄의 대사도 갖지 않고 그 스스로가 고유하고 특별한 인격을 가지지도, 당연히 존재의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울트라킬>의 서사는 주인공의 성장이 아니라 적의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울트라킬>의 1막 마지막 장면의 보스전에서 가브리엘은 주인공과 첫 전투 이후 난생 처음으로 삶 전체에서 패배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때 대답 없는 신과 천국, 천사의 완전함에 대해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던 굳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패로 말미암아 천계에서 파면당한 가브리엘은 실패의 경험을 증오로 돌려 2막 보스전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 내 주인공의 적수라는 운명에 이기지 못하고 당연히 연거푸 패배하고 만다. 이 두 번째 패배 직후 가브리엘은 주인공으로 인해 피어올랐던 증오를 자기 존재 변화의 연료로 삼는다. 즉, 가브리엘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어야 했을 신의 의지가 그대로 이뤄지지 않고 신의 가호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서 살아온 것이며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의문하게 된 것이다. “완벽해야 했을 조각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다 (The pieces never fit together to begin with.)” 찾아온 현현顯現에 따라 가브리엘은 처음으로 검을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의 의지로 휘둘러 지금까지 스스로 명령을 따라왔던 천국 의회를 직접 몰살한다.
총 3막으로 예정된 전체 서사 중에 현재 2막까지 완성되어 있는 <울트라킬>에서 플레이어에겐 별다른 서사가 주어지지 않고 주인공은 적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촉매 역할을 담당한다. 즉, 오히려 서사는 적대 인물이 경험하고 플레이어는 스스로가 인물의 변화 원인이 되어 적이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대적 시선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가브리엘이 겪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감정도 인격도 서사도 없는 V1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가브리엘과 정반대로 V1은 플레이어에게 오로지 게임 화면으로 송출되는 1인칭 시선만을 제공한다. V1은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없이 철저히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플레이어의 의지를 완벽하게 운반하는 그릇이 된다. 말하자면 주인공 캐릭터가 개별적 인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플레이어의 의지에 개입하지도, 플레이어를 방해하지도, 가리지도 않으며 분리 없이 플레이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가브리엘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으며 점점 독자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소격 효과를 일으킨다. 플레이어 자신도 스스로 삶과 존재의 목적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충분히 겪어온 트랜스젠더들은 이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보단 경험적 공감을 느끼는 일이 더 잦을 것이다.
나아가 <울트라킬>의 게임플레이는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매우 다채롭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용이한 조건을 가진다. 특히 게임 내 물리 엔진 및 총알 발사 메커니즘 등을 농락하며 수직 가속도를 수평 가속도로 전환해 맵을 눈 깜짝할 사이에 횡단하고 공중에 던진 동전에 총알을 420574331번 튕긴다든지 (아무렇게나 쓴 숫자가 아니라 실제 기록된 횟수이다) 하는 기행들이 가능한 환경은 플레이어들의 창의력과 집중력,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울트라킬>의 제작자 하키타 (Hakita)는 본인이 바이섹슈얼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그 외에도 3D 디자이너 겸 그래픽 프로그래머인 빅토리아 홀랜드 (Victoria Holland)와 컨셉 및 텍스처 디자이너 프랜시스 시에 (Francis Xie)는 본격적으로 각각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당사자이기도 하다. 즉, 작품 자체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에 의해 제작된 만큼 팬 커뮤니티 또한 성소수자들을 기반으로 구성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나아가 하키타는 기계 로봇인 주인공 V1에게는 어떤 젠더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냐는 팬들의 논의에 V1은 기계이기 때문에 젠더가 없으나 he/him 대명사를 사용한다고 답변했으며, 그럼에도 <울트라킬>에는 동시에 기계“임에도” 젠더가 존재하는 개체들마저 있다. “마인드플레이어” (Mindflayer)라는 적이 대표적인데, 게임 내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녀는 머리 부분만이 기계 본체임에도 그 아래로 인간의 신체 형태와 유사한 플라스틱 외피를 굳이 스스로 형성해 활동한다. 플라스틱 신체 부분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기능이 없이 오직 미적인 목적만을 지니고 있음에도 마인드플레이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파괴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힘을 다해 이 플라스틱 신체를 보호하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필연적으로 주어진 신체가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여 형성한 몸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인드플레이어의 습성은 현실 속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단적인 비유로 읽힐 수밖에 없다.
<시그널리스>: 몸과 시간, 인식의 비명
<시그널리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올해 출시된 <사일런트 힐 2>의 공식 리메이크보다도 더욱더 충실하게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서바이벌 호러 인디 게임이다. 즉, 게임플레이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탑다운 형식의 2.5D 그래픽을 기용하며 때때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고 라디오를 비롯한 퍼즐을 적극적인 사용하며 의도적으로 불친절한 인벤토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그널리스>를 독립적인 걸작으로 만드는 면모는 극단적일 만치 비선형적이며 표현주의적인, 언뜻 난해하기까지 한 연출 방식이다. <시그널리스>가 한계까지 실험한 표현주의적 연출은 바로 시간과 인식의 비선형성, 존재의 분열 등을 다루는 서사와 운명적으로 맞물리며 빛을 발한다. 다시 말해 최근 인디 게임 중 <사일런트 힐>을 제대로 계승하는 또 다른 작품 <피어 앤 헝거> 시리즈가 그 계보 상의 공포와 끔찍한 그로테스크를 이어 나가고 있다면 <시그널리스>는 실질적으로 존재론적 비애와 절망의 측면에서 서바이벌 호러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먼 미래의 전체주의 사회 “유산 (Eusan)”은 성간 단위로 통치가 이루어지고 우주 개발을 진행 중이다. <시그널리스>의 세계관에서 “생체 공명”이라는 일종의 텔레파시 능력을 지닌 자들은 타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의 유기체 조직에까지 간섭할 수 있고, 나아가 집단의 의식을 변형하는 형태로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의 유산 당국은 기존의 제국 체제에 대한 반란을 통해 세워졌는데, 이 제국의 여왕이 바로 강력한 생체 공명 능력을 통해 인류를 다스리던 자였다. 즉, 전 제국은 인식론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현 당국은 제국 통치에 대한 반발로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유물론적 통치 사회가 탐험이라는 명목을 뒤집어쓴 기약 없는 우주 항해를 통해 한 생체 공명자 “아리안느 양”을 사실상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추방 조치에 처하자 인식론적 공포가 물질세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생체 공명으로 인해 변이되고 있는 세계를 헤치고 아리안느를 다시 찾아야만 하는 복제-인조인간 “엘스터”를 조종한다. <시그널리스>의 세계 속엔 두 유형의 인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엘스터와 같은 “레플리카”이고 다른 하나는 레플리카의 원형이라는 의미로 레플리카가 아닌 인간을 이르는 “게슈탈트”이다. 레플리카는 뛰어난 개인들의 신경패턴을 복사해, 인공내골격에 생물학적인 배양물을 채워넣은 뒤 외골격으로 둘러싼 신체에 이식한 복제품들이다. 같은 판본을 기반으로 복제된 개체들이므로 예측 가능한 일꾼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복사 과정에서 기억은 전부 삭제하고 오로지 능력과 성격만을 남김에도 게슈탈트 생전의 중추 기억을 자극하는 외부 자극이 주어지면 기억의 편린이 재구성되고 만다. 또는 한정적이고 반복적인 임무 바깥의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다면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레플리카가 게슈탈트의 기억을 되찾는 낌새를 보이거나 명확한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들킨다면 그 즉시 “폐기”당한다.
즉, 게슈탈트와 레플리카 모두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사회 안에서 고유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내쫓기고 학대당한다. 특히 아리안느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많은 레플리카들은 그전까지 탄압당한 욕망과 트라우마 등을 고통스러운 형태로 드러낸다. 아리안느의 생체 공명은 단순히 현재 인식되는 공간적 물질계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기억과 시간까지 변이시키는데, 이로 인해 플레이어가 엘스터의 눈을 빌려 인지하는 세계엔 엘스터가 아닌 다양한 개인들의 경험 또한 섞여 들어온다. 특히 이 지점이 <시그널리스>의 서사와 연출을 난해하게 만드는 최전방이다. 현재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경험이 정확히 누구의 시공간이었는지 유추하기가 극도로 어려우며, 시퀀스마다 불규칙하게 게임은 1인칭과 3인칭 관점을 오가는데 플레이어는 관점 변경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엘스터를 통해 경험하는 타인의 기억 중 하나는 아리안느가 유물론적 기치를 바탕으로 한 유산 당국에서 경시되는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리고 하얀 머리와 붉은 눈 등 남들과 다른 외모로 인해 성장 과정 속에서도 괴롭힘을 당해오던 것이었다.
규범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로 배제당하고 항상 폭력의 최전방에서 사는 트랜스젠더에게 <시그널리스> 속 유산 사회와 그 시민들 사이의 고통스럽고 불합리한 관계는 먼 얘기가 아니다. 특히 유기체적, 즉,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존재인 레플리카는 트랜스젠더에게 비유 이상의 즉물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게임 내에선 레플리카의 피와 살은 언뜻 인간의 평범한 살점과 구분되지 않는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생체공학으로 가공된 조직이기에 표류한 우주선 안에서 게슈탈트가 배고프다고 레플리카의 살을 뜯어 먹어 봤자 소화를 시킬 수 없다는 지침을 찾을 수 있다. 레플리카라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들은 고유한 인간 존재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자원”, 보급형, 모조품으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인간 도식의 모방이자 게슈탈트의 복제, 변주에 불과한 개체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레플리카는 단독적 인격과 자아가 필연적으로 깨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적 판형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시그널리스> 작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게슈탈트, 레플리카를 막론하고 절대 대다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레플리카의 경우 그 키가 최대 260cm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로 이루어진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많은 트랜스펨에게 공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생체 공명의 영향으로 개인들이 몸의 물질적 차원과 몸에 대한 인식 사이의 경합을 겪어 변이하는 과정은 트랜스성의 관점에선 그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그널리스>에서는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함선이나 우주정거장 등 세계 전체의 물질적 차원이 인식의 변화에 의해 피와 살점, 내장 등으로 점차 침식되어 간다. 마치 트랜스적 신체 인지 방식이 바깥 세계로까지 확장된 듯이 말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세계 관찰 관점의 자유를 제공하지 않고 1인칭 시각과 3인칭 시각을 임의로 강제하는 것 또한 매체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몸이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 유물론적 유산 사회가 시민 개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공명한다. 즉, 언뜻 호러 장르라는 특징 때문에 변이하는 신체가 존재들에게 고통이나 폭력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시그널리스>에선 오히려 그전까지 개개인의 존재를 가두고 각자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신체에 대한 인식의 반항이자 탈출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공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 또한 신체를 통해 인식하고 몸에 직접 기록되기 때문에 트랜스 당사자들은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도 비규범적인 경우가 많다. <시그널리스>에서 아리안느는 우주 속으로의 기약 없는 망명 속에서 결국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고, 그녀의 왜곡된 시간은 그녀가 생체 공명으로 영향을 끼치는 게임 내 세계에까지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반드시 고유한 트랜스성으로서는 아니지만 현실의 조건으로 인해 흔히 처할 수밖에 되는 트라우마적 경험들로 인해 직조당하는 시간의 영원성과 동일하다. 마치 전쟁 경험자들이 흐르지 않는 특정 시간 속에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에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도, 일정하게 작동하지도 않는다. <시그널리스>는 서사의 비선형성 뿐만 아니라 사건들의 공시성 (synchronizität)을 통해서도 인과적이지 않은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즉,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공명하는”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 말이다.
끝으로 블랙홀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건의 지평선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는 우주 검열 가설을 제창한 로저 펜로즈의 이름이 아리안느가 탑승한 우주선에 붙어 있듯이 억압당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는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분명 다양한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재해 왔음에도 스스로의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현재 또한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당사자가 아닌 바깥의 시스젠더들에겐 전혀 미지의 영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주에선, 누구도 당신의 비명을 들을 수 없다.”[3]
바깥을 향한 언어의 갈망
따라서 <시그널리스>는 <울트라킬>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밀착된 방식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기에 게임 외적 측면에서 살펴보지 않아도 어째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형성됐는지는 의문의 영역조차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쯤 되면 안 봐도 뻔하다고까지 할 수 있겠지만 2인 제작 게임인 <시그널리스>는 전적으로 트랜스 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제작자 유리 스턴 (Yuri Stern)은 논바이너리이고, 디자이너 바바라 비트만 (Barbara Wittmann)은 트랜스여성이다. 그러므로 <울트라킬>과 <시그널리스> 모두 작품 내외 양면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한다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극도의 고난이도 플랫포머 게임 <셀레스트> 또한 말 그대로 게임 안팎으로 스스로와 싸우며 산에 올라가는 고난과 역경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찾는 과정을 그리며 트랜스젠더로서 정체화와 트랜지션 과정을 그려냈다. 역시 제작자 매디 소슨 (Maddy Thorson) 본인이 게임 출시 이후에 커밍아웃하였기도 하다. 그러나 <폴아웃: 뉴 베가스>와 같은 경우는 커뮤니티 상에서 다른 게임들보다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고 거의 트랜스펨의 상징과도 같은 지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자체가 직접적으로 트랜스성과 관계하고 있지도, 작품 제작 차원에 트랜스 당사자가 개입되어 있지도 않다. <길티 기어 스트라이브>도 전반적으로 <폴아웃: 뉴 베가스>와 크게 다르지 않고, <길티 기어> 시리즈 내에서 이미 2002년에 처음으로 출시되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역사를 가지고 존재해 왔던 “브리짓”이라는 캐릭터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 와서야 본작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해당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춘 팬덤 문화가 형성된 바가 있지만, 이 한 명의 매우 국소적인 캐릭터를 제외하고 전체 게임 차원에서는 특별히 트랜스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도, 트랜스적 게임성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게임과 가장 충실하고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트랜스펨들은 브리짓을 기점으로 유입층이 늘어난 팬덤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의 전체적이고 실질적인 게임 영역에 자신을 투여하는 실제 격투 게임 대회를 중심으로 <길티 기어> 커뮤니티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초에 트랜스펨 개인들이 게임 영역에 대거 투입되고 전문적인 수준까지 훈련되는 일이 많은 것은 현실의 물리적 사회 공간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고 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며 아주 철저히 배제되어 온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오랜 역사에서 오직 접근할 수 있는 취미라고는 외부의 공공장소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유가 크다. 따라서 이미 트랜스펨들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게임들을 즐겨왔고 그저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좋은” 게임을 즐겨왔기 때문에 우연히 플레이 경험이 겹친 사례의 대표가 <폴아웃: 뉴 베가스>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선택지와 플레이어 행동에 대한 예상치 못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결과들, 대화의 풍요로운 문체 등 현대적 RPG 게임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폴아웃: 뉴 베가스>에 대한 트랜스펨들의 선호는 단지 자기 탐색의 시간을 불가피하게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트랜스 당사자들이 비교적 고상한 취향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반농담 반진담으로 설명하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펨 커뮤니티가 문화 코드로 정체화하는 게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트랜스 정체성과 관계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필요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저 트랜스펨 당사자들이 실제로 지금까지 각자가 시간을 많이 투여해 온 게임들이라는 것만이 약분 불가능한 최소한의 정수다. 애초에 트랜스 정체성 자체가 하나로 압축될 수 있는 단일한 결정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하고 고유한 개인들의 사실상 임의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에 당연한 사실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동일한 구심점을 축으로 공전하며 조직된 코드의 궤적들을 따라 문화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으로 주변적 존재들은 삶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끼리 같은 작품을 향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연결감을 느끼고 만연한 소외와 고독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을 매개 삼아 존재할 수마저 있다. 즉, 자신의 향유에 설명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증명을 이루고 작품을 자기 정체성의 코드로 기입해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성 규범 사회의 문화 코드를 대여하거나 그것에 편입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탈취해 고유하고 독자적인 맥락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별적 언어, 방언을 만들어 냄으로써 소수자들은 스스로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또한 밖으로 내쫓긴 이들에게 기존 사회와 언어 안에는 자신들을 위한 자리가 없으므로 대안적 관점을 창조해 내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역으로 작품 자체 또한 확장하고 그 의미를 다양화하며 그 질료를 풍요히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즉, 트랜스펨 커뮤니티의 문화 코드 구성 과정은 정체성과 게임이 상호적으로 재조직하는 교차 전이이다. 참조할 계보가 없는 돌연변이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인공 고향은 말라붙은 터전에 다시 양분을 불어넣는다.
추신
트랜스펨들이 실제로 아주 오랫동안 게임을 즐겨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 상의 연결과 공유가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맥락은 기존에 “여자”는 게임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 같지도 않은 편견이 생각보다 꽤 널리 퍼져 있었기에 트랜스펨들 또한 자신의 취미가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게 인식될까 봐 자랑스럽게 드러내기를 꺼리고 수치심에 부인하고 감추며 억눌러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게이머에 대한 오명이 점점 벗겨지며 오히려 스포츠 게임과 같은 남성 위주 게임을 “캐주얼”한, 비전문적 게임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역으로 여성 게이머를 “코어”하며 전문적인, 집요한 플레이어들로 재조명하는 관점이 유통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트랜스펨들도 수치심과 열등감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게임에 대한 취미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서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