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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XX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최우수상)

07

GG Vol. 

22. 8. 10.

달리의 이미지들  


그레이엄 하먼의 책 〈예술과 객체〉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르에 무관하게 예술 작품은 환언하기가 불가능하다. (중략) 지식은 언제나 위로 환언하기 혹은 아래로 환언하기에 해당하지만, 예술은 소크라테스적 철학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1)


여기서 ‘환언’(환원과 헷갈릴 수 있는)이라는 개념이 많이 낯설다면 원문에 있는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를 가져오는 것이 좀 더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저자는 패러프레이즈의 가능 여부에 따라 지식과 예술이 구분되는 경계선을 긋는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당시에는 조금 뜬금없게도 OpenAI 사(社)의 이미지 생성 AI 시스템인 달리(DALL・E)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었다. 그것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유저가 간단한 설명(예를 들어, 말위에 탄 우주비행사 같은)을 제시하면, 달리는 조금씩 스타일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 설명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 중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바꿔도 제시된 설명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히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미지는 언제나 그것의 묘사나 혹은 분석만으로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같은 설명에 기반한 이미지들이라고 해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온전하게 ‘설명’해낼 수는 없다. 다만 달리의 이미지들에는 (James Bridle이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2)에서 날카롭게 펼쳐 보이듯이) 유튜브의 보상 알고리즘에 의해 추동된 채로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조금씩 변조되지만 여전히 똑같은 주제와 전개 과정, 캐릭터를 공유하는 수많은 영상들과 유사한 종류의 스산함이 묻어나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 달리(DALL・E)의 이미지들(왼쪽) 그리고 챗봇 플라밍고와의 대화(오른쪽)  

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한 트윗3)을 인용한 김성완 인공지능 연구자의 페이스북 4)이었다.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자인 Antoine Miech는 그들이 새로 개발한 AI 챗봇 플라밍고(Flamingo)에게 달리 2(2022년에 새롭게 등장한 달리의 새 버전)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여준 뒤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냐고 묻는다. 가짜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럼 이 가짜 사진을 만들어낸 기술은 무엇일까 라고 다시 묻는다. 플라밍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a GAN to create this image.”(누군가 GA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든 것 같습니다.)


이를 인용한 김 연구원은 “물론 DALL-E 2은 GAN 모델이 아니라 최신의 Diffusion 모델로 이미지를 생성한 거지만 이정도면 최고의 답변입니다.” 라고 코멘트를 덧붙였다.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고 또 대단한 성취가 맞지만 여기서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플라밍고가 ‘얼추’ 맞췄다는 점에 있다. 만약 플라밍고가 ‘누군가 Diffusion 모델을 이용해서 이 이미지를 만들어 냈습니다.’ 라고 확고하게 대답했다면 완벽한 답변이었겠지만 나는 별달리 흥미를 못 느꼈을테고, ‘스카이넷이 멀지 않았구나!’ 같은 부질 없는 한탄이나 하고 앉았을 터였다. 물론 Antoine 가 직접 이어지는 트윗에서 밝힌 것처럼 플라밍고를 훈련시킬 당시에 달리 2에 대한 웹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러한 모범적인 답변은 불가능했다. 즉, 플라밍고는 달리 2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제공된 사진이 (Diffusion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장 발전된 형태의 머신러닝 테크닉(GAN, 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을 ‘추론’해 낸 것이다. 


그 추론의 과정은 연구자들에게도 대부분 블랙박스에 가깝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AI 챗봇은 (인간의 시지각은 인지 못하는) 딥러닝으로 구성된 이미지의 정체를 수월하게 알아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에게 실제 인물 사진들과 This Person Does Not Exist5) 같은 사이트에서 GAN 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랜덤하게 섞어서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 둘을 구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플라밍고라면 앞서 달리의 이미지를 봤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된’ 영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나와는 다르게, 혹시 플라밍고는 달리의 이미지들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 소름끼치는 동질성을 꽤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플라밍고의 관점에서는 달리의 이미지들은 서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DALL・E)의 이미지들은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 지점에서 패러프레이즈가 가능한 것들, 즉 지식의 범주를 좀 더 넓혀 볼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뒤 혹은 빠르면 내년에는 동영상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플라밍고 2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 때 유행하게 될 어떤 오픈월드 게임의 인게임 플레이 영상을 이 놀라운 챗봇에게 보여준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의 대답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It looks like someone used Ubisoft's open-world formula to create this game.”(누군가 유비식 오픈월드 게임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Ludonarrative dissonance 어게인?


게임 역시 지식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지식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어쌔씬 크리드〉 시리즈의 디스커버리 투어 모드를 통해서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전들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닐 수 있으면 진정한 지식의 힘이 비로소 발현되는 것인가.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경우처럼 날이 추우면 말의 고환이 수축한다는 식으로 실제 동물들의 행동 패턴과 생리적인 과정들을 게임 속에서 정밀하게 재현하면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지식인가. 15세기 초반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 지방)내에 프라하 인근 지역을 마치 스캔해서 옮긴 듯한 디테일과 당시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킹덤 컴: 딜리버런스〉는 역사 지식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질문들이 그 모든 ‘당연한’ 답변들에 의해 집어 삼켜지기 전에 ludonarrative dissonance(이하 루도)의 샛길로 잠시 빠져 보자. 


'게임내러티브 부조화'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루도를 둘러싼 논의는 한 블로그 6)에서 시작되었다. 게임개발자 Clinton Hocking은 〈바이오쇼크〉를 플레이 한 뒤 자신이 느낀 어떤 불편한 감각을 전달해 줄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어가 좀 어려워 보여서 그렇지 이 개념은 사실 꽤 직관적이다. 게임의 공식적인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게임플레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내러티브가 서로 심하게 상충될 경우 몰입감이 완전히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두 내러티브의 간극을 루도라고 정의한다.


민감한 스포일러의 이유로 바이오쇼크는 제외하고 〈배틀필드 1〉의 예를 들어보겠다.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인 이 FPS 게임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서 묵직한 반전(反戰)의 모티프를 전달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려한 그래픽으로 구현된 그 참상들을 ‘감상’하면서 잠시 간담이 서늘할 수는 있겠지만 총을 쏠 때마다 느껴지는 반동과 탱크를 직접 운영하는 감각, 폭탄들이 떨어져서 폭발하는 떨림 같은 촉각적인 경험에 중독되는 순간 그 반전(反戰)의 내러티브는 플레이어가 ‘손맛’에 취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달성하게 되는 일종의 기이한 성취로 탈바꿈한다. 폴리곤의 비교적 최근 칼럼7)에서도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잊을만 하면 다시 등장하는 오래된 떡밥인 루도는 블록버스터(트리플A) 게임의 산업적인 측면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실재하는’ 두 내러티브의 부조화인 루도는 게임 고유의 현상이며, 고쳐야 할 문제라는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루도가 없는 게임이 가능할까. 바꿔 말해서 두 개의 내러티브가 완벽히 매끈하게 엮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내러티브만을 가지게 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연출해 낸 게임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테트리스〉와 같은 고전 게임이 떠오를 수 있다. 다만 테트리스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게임플레이를 제외한 내러티브를 아예 배제한 경우에 가깝다.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이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몇몇 고전게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를 통한 경험과 (비록 장식에 불과할지라도) 공식적인 내러티브가 평행선을 달리는 구조를 채택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사가 아무리 게임플레이를 내러티브에 일치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예측 불가능한 플레이어들의 변칙성은 때때로 이러한 노력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유튜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스피드런(speedrun) 영상이 대표적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버그마저 초월해 버리고) 〈엘든링〉을 7분 안쪽으로 클리어 해버리는 영상8)만큼 루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인터넷의 수많은 자생적인 커뮤니티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 모드(mod)들은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모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베데스다의 게임 중 하나인 〈폴아웃 4〉를 살펴 보자. 인벤토리의 무게 제한을 해제해주는 모드는 거의 ‘바닐라’ 상태와 마찬가지라고 여겨질 정도로 매우 사소한 변형이지만, 그것이 내러티브에 끼치는 여파는 생각보다 크다. 무게 제한이 없어진 플레이어는 더 이상 보급과 거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따라서 〈폴아웃 4〉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맵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정착지 건설에 매진할 이유가 사라진다. 또한 인벤토리의 용량을 늘려주는 캐릭터 퍽(perk)을 찍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에 플레이어 캐릭터의 성장 역시 달라진다. 가장 간단한 모드의 파급력이 이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러티브 사이의 간극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모더(modder)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는 놀이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루도를 특정 게임들이 때때로 맞닥뜨리는 문제일 뿐이라고 납작하게 눌러 놓은 채 지나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의 디지털 게임이 가지는 핵심적인 특성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편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루도가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라면 우리(게이머)는 어떻게 여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게이머들은 많은 경우 특정한 논리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 실험가들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역시 사례와 함께 중첩시켜 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통칭 야숨)에서 우리는 시작하자마자 최소한의 조건만을 갖추고, 하이랄 성으로 곧장 ‘날아 가서’ (실력이 받쳐 준다면) 가논을 처단하고 게임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내버릴 수 있다. 혹은 정확히 그 반대로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가논과 그 짐승을 온 힘을 다해서 봉인하고 있는 젤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링크 앞에 펼쳐진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비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게임이 바로 그 방향으로 게이머들을 은근하게 유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기억을 되찾고 재앙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앞의 설산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신전은 궁금하지 않아? 라는 식으로. 혹은 여관 주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메뚜기를 10마리 잡아보자는 등. 그 광대한 세계가 끊임없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정도(正道)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한다. 마치 게임 스스로가 루도를 원하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야숨은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목표는 내용이 아무튼 그 매체를 가리키거나 암시한다는 것이어야 한다”9) 는 그린버그식 정의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방가르드 게임일지도 모른다. 


∗ 뇌전의 검을 들고 잔디를 깎는 링크 

위와 같은 샌드박스적인 펼쳐짐은 게임 내에서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물리적인 상호작용들과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실험’에 몰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들을 실제로 발과 손을 ‘디딘 채’ 올라가 볼 수 있고, 게임 내의 대부분의 요소들과 촉각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철로 된 무기는 비오는 날 떨어지는 번개에 취약하며, 횃불을 들고 들판에 가면 들풀들이 탄다) 상호작용할 수 있는 세계는 게이머들로 하여금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토록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에서 공식적인 내러티브는 중요한 맥락으로 부상한다. 이 세계는 논리적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같은 세계는 아니다. 마치 장르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암묵적인 장치들이 핍진성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기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임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시스템만의 논리에 장르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앞서 봤듯이 우리는 야숨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바로 그 모든 행동들의 가능성을 떠받치고 있는 하이랄의 대지는 가논의 재앙이 100년 간 유예된 세계이다. 어딜 가든 우리는 계속해서 그 흔적들과 마주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애써 무시한 채 마치 아무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한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링크(게이머)가 그 앞의 설산을 오를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캐릭터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어차피 그저 수많은 폴리곤 덩어리일 뿐 아닌가.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은 가능하고, 뭐든지 해도 된다’ 라는 말은 마치 자유처럼 들리지만 사실 정확히 그 반대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게이머들은 내러티브라는 관습화된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그 세계에서 마음껏 실험할 자유를 얻는다. 그에 따라 게임은 게이머들이 내러티브라는 조건 아래에서 주어진 시스템의 한계를 가늠해 보는 지속적인 실험 과정으로 변모한다. 



재현성 위기는 기회다 


‘게임은 지식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게임은 실험 과정일 수 있다’ 라는 답변은 대략 근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실험을 하다 보면 그게 지식이 되는 것 아닌가. 미안하지만 실험과 지식 사이의 그 (빌어먹을) ‘간극’은 생각보다 심대하다. 실험에서 지식으로 이르는 과정을 간단히 상기 해보자. 자신이 세운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 중 하나가 실험이고, 물론 실험 역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험을 검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실험이 제대로 설계되었다면 그 실험을 누가 하든, 어디서 하든 혹은 몇 번을 반복하든 간에 (모든 변인이 적절하게 통제된다는 가정 하에서) 도출되는 값은 동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 시리즈에서 보통 헐벗고 다니는 고인물 ‘망자’들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들이 마치 미래에서 온 것처럼 가장 최적의 움직임으로 길 위에 잡몹들을 빠르게 압살해 버리고, 보스마저 한 대도 맞지 않고 여유 있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반복된 수많은 실험들(YOU DIED)을 통해서 이 실험의 결과값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크 소울은 리듬 게임이라는 농담10)도 바로 이 연장선상에서 나온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들이 ‘YOU DIED’ 라는 문구를 볼 때마다 맵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질 뿐 아니라 잡몹들의 출현 위치와 등장하는 숫자도 랜덤으로 변하고, 결정적으로 보스의 공격 패턴마저 전혀 예측 불가능하게 달라진다면 어떨까. 제 아무리 고일대로 고인  망자들이라도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다닐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실제 랩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하던 중에 일어난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그 실험은 엉터리이고, 실험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설은 지식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일이 유명하고 권위 있는 저널에 이미 게재된 논문을 바탕으로 한 실험에서 벌어졌다면? 그것도 한 두 건이 아니라면? 스캔들을 넘어서 위기 상황이라고 부를 만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실제로 그 일들이 벌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재현성 위기(The replication crisis)라고 부른다. 네이쳐(Nature)지에서 1,576명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 조사를 소개하는 2016년 아티클11)에 따르면 그들 중 70% 이상이 다른 연구자가 진행한 연구의 실험들을 재현(반복)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대답했다. 더 충격적이게도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직접 한 실험들을 재현하는데도 실패했다. 


재현성 위기가 단순히 자연 과학 영역을 넘어서 (특히 이 문제가 처음 대두된 영역이 심리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지식계 전반에 던진 충격파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이 현상을 게임과 겹쳐 보면 심각한 위기로 가득 찬 큰 길 옆에 또 다른 샛길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다크 소울〉 시리즈가 충실히 이행된 실험의 메타포로 기능했듯이, 우리는 재현성 위기를 반영하는 게임들을 탐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타임루프물만큼 재현성 위기를 제대로(?) 겪고 있는 게임도 없어 보인다. 플레이어는 모종의 이유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이 강제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상황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반복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 폴리곤의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12) 영상에서 올바르게 짚어내듯이 모든 게임은 근본적으로 타임루프물이다. (“All video games are implicitly time loops.”) 왜냐하면 캐릭터가 죽더라도 우리는 세이브를 통해서 (세이브가 없는 로그라이크 같은 게임이라면 게임오버를 통해서) 언제든 다시 특정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임은 어떤 식으로든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다고 다시 고쳐 말해야 할까. 


그 결론으로 시급히 달려가기 전에 잠시 게임에서 반복이 지니는 모호함을 상기 해보자. 우리는 게임의 소프트웨어적 특성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함에 있어서 자잘한 반복적인 행위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된다. 특정한 버튼에 할당된 특정한 행위들을 하는 것의 조합들이 매우 다양한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게임 개발자들은 플레이어를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반복적인 조합을 피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세심하게 디자인한다. 이는 특히 아이러니하게도 (또 어쩌면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타임루프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반복되는 플레이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절차적으로 생성되는(procedurally generated) 레벨을 도입한 〈리터널〉, 계속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더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플레이어들을 끊임없이 새로운 공간으로 유도하는 〈포가튼 시티〉, 같은 지역이라도 어떤 시간대인지에 따라 분위기와 적들의 규모와 위치가 변하는 〈데스루프〉 등. 결과적으로 우리는 대놓고 타임루프를 표방하는 게임들 내에서 오히려 반복적인 ‘실험’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타임루프물이 아닌 게임이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잇 테이크 투〉는 마치 뷔페처럼 모든 스테이지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극도로 잘 조율된 레벨 디자인을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역시 극도로 타이밍이 좋은 자동 세이브 기능 덕에 플레이 중 캐릭터가 죽더라도 이미 지나쳐 온 과정을 반복하는 행위를 최대한 피할 수 있다. 


이제는 반복을 회피하려는 강박이 없으며, 그 반복의 결과들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게임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게 과연 ‘재미있는’ 게임일까. 나는 당연히 그런 게임들은 존재하며 심지어 끝내주게 재미있는 것도 있다고 주장할 참이다. 그 중 하나가 〈프레이〉다. 〈프레이〉가 특히 훌륭하게(?) 재현성 위기에 처해 있는 이유 중 큰 부분은 이 게임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머시브 심(Immersive Sim)이라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한 야숨과 폴아웃 등도 반응성이 뛰어난 시스템 우선의 플레이 스타일로 몰입형 시뮬레이션적인 특징을  공유하지만 오픈 월드라는 형식을 경유해서 그것들을 마치 빵에 잼 바르듯이 얇고 넓게 펼쳐 놓는다면, 〈프레이〉는  ‘탈로스-1’ 이라는 우주 정거장 하나만을 배경으로 삼는 대신 해상도를 극적으로 높인다. 


∗ 우주에서 바라 본 탈로스-1 스테이션

예를 들어, 나는 플레이 하던 도중 잠긴 문으로 막힌 공간을 발견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만 촘촘한 창살 사이로 내부 공간을 엿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 안에는 문 옆에 조그만한 버튼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장난감 석궁으로 좁은 창살 사이를 조준해서 그 버튼을 맞추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공간에서 키카드를 입수할 수 있었다면 그냥 그 키카드로 문을 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힘이 충분했다면 그 공간 뒤쪽에 장애물들을 치우고 그 공간으로 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관건이 되는 것은 게임의 물리엔진을 위배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이든 허용되며, 스크립트로 짜여진 공식적인 루트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아주 작은 버튼 같은) 꽤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논리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 특성은 제한적인 공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이 게임의 레벨 디자인과 결합하며 이상적인 실험 환경을 구축한다. 여기서 반복되는 실험들의 제각기 다른 결과값들은 모두 ‘정당’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즉, 이 실험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동어반복적 회로를 차단하기


게임은 예술이 아니며, 지식이 되는 것에는 실패한 실험 과정이라는 시나리오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인기가 있는 가능성도 아닐 듯하다. 게임은 예술 혹은 문화, 하다못해 지식이라도 ‘되어야만’ 하는 시대에 무슨 생뚱맞고 처량하게 실패한 실험 운운인가. 그런데 어쩌면 바로 실험이 ‘실패’한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게임 = 예술, 지식, 문화’ 와 같은 (완벽하게) 숨 막히는 동어반복적 회로를 잠시라도 차단하고 완전히 다른 회로를 돌려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게임이 당위적으로 스스로를 정의/선언할 필요가 없는 회로를 말이다. 〈포탈 2〉의 그 모든 ‘실험’들이 스펙타클하게 실패한 이후 글라도스(GLaDOS)는 마침내 골칫덩이 실험체인 첼(플레이어)을 바깥 세상으로 놓아준다. 특유의 위트와 미묘한 슬픔이 뒤섞인 그녀의 작별인사13)는 마치 기이한 예언이 그렇듯이  예상치 못한 어떤 가능성을 예비한다. 

 


Go make some new disaster         (가서 새로운 사고를 쳐)

That's what I'm counting on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You're someone else's problem     (너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니까)

(I used to want you dead but)        (예전에는 네가 죽기를 원했는데)

Now I only want you gone            (이제는 그냥 너가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1)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90-91.
2) James Bridle, “Something is wrong on the internet” Medium, 2017.11.7. medium.com/@jamesbridle/something-is-wrong-on-the-internet-c39c471271d2 
3) Antoine Miech, Twitter, 2022.5.3. twitter.com/antoine77340/status/1521218333412139009 
4) 김성완, Facebook, 2022.5.7. 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748085815216489&id=100000454416270 
5) https://this-person-does-not-exist.com/en 
6) Clinton Hocking, “Ludonarrative dissonance in Bioshock” Typepad, 2007.10.7. clicknothing.typepad.com/click_nothing/2007/10/ludonarrative-d.html 
7) Chris Plante, “The Last of Us 2 epitomizes one of gaming’s longest debates” Polygon, 2020.6.26. polygon.com/2020/6/26/21304642/the-last-of-us-2-violence
8) Distortion2, “Elden Ring Any% Unrestricted Speedrun in 6:59 (WORLDS FIRST SUB 7 MINUTES)” Youtube, 2022.4.12. youtube.com/watch?v=XuUEk6e1LOE 
9) 그레이엄 하먼, 『예술과 객체』, 김효진 역 (서울: 갈무리, 2022), p.230. 
10) “[영상] 다크소울은 리듬게임이다.” 루리웹, 2021.9.16. bbs.ruliweb.com/family/4892/board/183787/read/9590253 
11) Monya Baker, “1,500 scientists lift the lid on reproducibility” Nature, 2016.5.25. nature.com/articles/533452a 
12) Polygon, “Time loops are a weird genre for an anxious time ” Youtube, 2022.1.29. youtube.com/watch?v=QWEVGbVoxQ4 
13) TheMediaCows, “Portal 2: End Credits Song 'Want You Gone' by Jonathan Coulton [1080p HD] ” Youtube, 2011.4.19. youtube.com/watch?v=dVVZaZ8yO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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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잡다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입니다. 역시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임에는 특히 관심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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