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놀이’로서의 비장소 : <8번 출구>를 포착하기
19
GG Vol.
24. 8. 10.
1. 유동하는 공포의 교집합은‘어디’인가
현대의 공포는 흐른다. 곧, 어디서든 틈입한다. 일찍이 공포라는 키워드 하에 내포되어 온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상들―가령 괴물, 귀신, 살인마, 악마 등―만으로 이 정서의 출처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당 공포는 좀 더 내밀한, 혹은 하이퍼객체[1]와 같은 유동성을 발휘하기에 우리는 이 공포를 ‘앎’의 영역으로 안배하기에 항상 실패한다.
바우만은 인간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순간은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라고 토로한다[2]. 그리고 “공포에서 벗어나, 공포의 온상인 무지에서 해방된 세계”로 나아가야 했을 근대(이성)의 희망이 단지 “길고 긴 우회로에 불과했음”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유동적 근대의 환경이 인간의 일생 전체를 다각적인 공포 속에 몰아넣게 되었음을 설파한다[3]. 우리는 나날이 불어나는 ‘불확실한’ 공포를 동반자 삼아 ‘불확실한’ 삶을 영위하는 유목민이 되어서는, 이 유동하는 공포를 ‘명명하는(내지는 개념화하는)’ 일로부터도 한계를 느껴왔다.
다만 유동성으로 말미암아 ‘미지의 것’으로 한계 지었던 공포에 대하여, 그 윤곽을 포착할 수 있는 주요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4]’에 다름없지 않을까. 공간 자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집약될 때, 우리에게는 식별 불가능했던 공포를 잠시나마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공간은 직접 경험과 추상적 사고라는 양극단을 가진 연속체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인식가능하기 때문이다[5]. 그리고 현대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공포란 어쩌면 시간에 대한 공포보다 ‘몰입’을 해내게 되는 공포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푸코의 진단―오늘날의 불안은 확실히 시간보다는 공간에 훨씬 더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믿는다―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6].
실제로 우리는 육박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지금-여기’의 내가 머물고 있거나 머물렀던 곳의 으스스함에 대해, 더 나아가 그곳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해 더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대성이나 추상성이 강한 시간의 공포와 달리, 객관적 지표로서의 구획을 실마리로 지닌 공간의 공포는 인간(들)에게 있어 크고 작은 교집합을 이루게 될 가능성을 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현재 유동하던 공간의 공포가 과연 어떤 공동의 지점을 발생시키고 있는가, 즉 ‘어디에서’ 고이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어디에서’의 문제는 서브 컬처계에서, 특히나 게임의 영역에서 창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8번 출구>는 바로 이 ‘어디’에 대한 확증의 재현에 다름 없다. 이를테면 소위 ‘유동하는 공포’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흘러들어와 있었고, 이를 포착한 사람들에 의해 그 공포가 어떤 식으로 ‘고임’을 이루며 특정 공간으로서 구축되거나 변용되고 있는지.
<8번 출구>는 호러 게임 특유의 점프 스케어를 연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공간 자체에 압축된 공포만으로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식이다. 사실 게임 자체의 구성은 단순하다. 끝없이 펼쳐진 지하도에서, ‘8번 출구’에 도달할 때까지 소위 ‘이상 현상’이라 불리는 지점을 찾아 탈출에 성공하면 된다. 길게는 60분, 짧게는 2분 남짓으로까지 클리어가 가능하며 특유의 무한 반복 구조로 인해 형식만 놓고 본다면 플레이어 입장에서 다소 ‘심심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 게임(의 정체성인 공간)을 두려워하고, 플레이하고, 급기야는 그에 매혹된다. 어디선가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논)픽션의 ‘어디’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집단적인 공포와 몰입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
2.‘비장소’라는 호러 : ‘인간(성) 없음’의 장
<8번 출구>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지하도이다. 지하도는 일반적으로 ‘북적이는 익명의 사람들’이 ‘스치듯’ 교차하고 통행하는 곳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오제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은 정체성의 장소, 관계의 장소, 역사의 장소로서의 특질을 갖는 ‘인간적(인류학적) 장소’와 다른, ‘비장소(non-place)’로서 구분되는 곳이다.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가 되는 셈이다[7].
지하도를 비롯하여 공항,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이러한 비장소로서 지목될 수 있다. 오제는 사람보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의한 매개가 중심이 되는 이러한 비장소의 요소―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해당 장소를 단지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드는―의 작용이 해당 공간에서 요구하는 ‘승객’이나 ‘소비자’, ‘운전자’와 같이 익명의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단일한 정체성을 생성해 냄을 거론한다[8]. 그리고 이러한 비장소와 이용자들의 일시적인 ‘계약 관계’를 통해 비장소 안에서의 ‘나’의 존재는 ‘행인’과 같은 다소 안정적인 익명성으로서 포섭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8번 출구>에서는 이러한 비장소가 ‘호러’가 된다. 그 이유를 꼽자면, 이때의 ‘비장소’에는 플레이어인 ‘나’를 제외한 최소한의 ‘인간(성)’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장소’ 자체가 ‘인간-인간’ 간의 직접 경험이나 교류에 대한 느슨함을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험해온 비장소는 ‘대중’ 자체가 경유하는(해야만 하는) 공간으로서 인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장소는 누구나 그곳을 지나칠 수 있다는 ‘공적 공간’의 지위로서 건설되고 이해된다. 비장소에서 인간은 ‘동존하며 교차하기’라는 공공의 역할을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공동으로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해당 공간에서 ‘이용자’라는 역할을 획득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장소에 단독자로서 남게 되었을 때, 공적인 행보에 능숙했던 우리는 이 공간에서의 갑작스러운 사적 행보에 불안을 느낀다. 인간(성)들 사이에서의 익명성이라는 ‘보호막’은 사라지고, 어느새 끊임없이 증식하는 공간과 불명료한 ‘나’만이 대면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익명’으로서의 ‘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장소의 바깥에서의 ‘나’의 정체성도 아닌 ‘모름’이라는 공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나’가 된다.
물론 지하도의 복도를 돌 때마다 우리는 ‘중년 남성’의 형상을 띤 NPC의 출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이 결여된, 움직이는 메트로놈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해당 공간 내 플레이어(나)의 탈출 욕구나 공포에는 관심이 없다. 게임 내 ‘루프’의 루즈함을 덜기 위한 오브젝트로서, ‘중년 남성’은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의 일부’로서 기능함에 가깝다.
실제 비장소에서 ‘나’에게 가해지는 위해는 인간(성)에 의해 구호받을 수 있지만, <8번 출구>의 지하도에는 그럴 만한 인간된 타자가 없다. 붉은색 물이 밀려오고, 액자에 귀신이 생기고, 안내판이 뒤집히는 등 예측 불허한 ‘이상 현상’만이 랜덤으로 ‘나’를 덮친다. 어쩌면 <8번 출구>는 익명성에 묻히는 순간 동반되는 비장소성으로부터의 고독, 곧 익명성에 지나치게 안주할 경우 언젠가 어떤 인간(성)으로부터도 구호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여과 없이 재현해 낸 ‘있을 법한’ 평행 공간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3.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 : ‘영속적인 현재’에서의 놀이
이처럼 <8번 출구>를 비롯한 ‘호러’된 비장소의 재현 시도들은 해당 게임이 출시된 2023년 이전부터, 북미 커뮤니티 레딧(Reddit)이나 트위터와 같은 웹 공간에서 굵직하게 출몰해 왔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대중들의 ‘몰입’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8번 출구> 자체의 모티브이면서 ‘호러화된 비장소’가 밈(meme)이 된 형태를 총칭해 온 개념이 바로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이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1909년부터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학술적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해 왔으며, 건축이나 미술 등의 분야에서 차용되다가, 이후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웹공간을 순환하는 ‘인터넷 밈’의 일환으로 점층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출몰한 바가 있다. 이때 ‘리미널’은 ‘문간방(threshold)’ 또는 ‘경계’를 나타내는 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두고 있으며[9], 인류학자 아놀드 판 헤네프(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통과의례[10]’의 3단계 구분―①분리(separation) ②전이(transition) ③재통합(re-aggregation)[11]―의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문화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일상적인 문화•사회의 상태와,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시간을 경과시키며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구조적인 지위를 정해가는 과정 사이의 ‘문턱에 있음(리미널리티)’의 상태를 보다 발전시켜 문화적 변화의 전반적인 국면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확장시키기도 했다[12]. 그리고 이런 ‘문턱됨’에서 비롯된 ‘리미널 스페이스’란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진[13],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하나의 분야 또는 다른 분야도 아닌, 그들 사이에서(in-between)의 제3의 공간(thirdspace)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뜻으로 정의될 수 있다[14].
'밈'으로서 대두된 리미널 스페이스에는 ‘문턱에 있음’ 상태의 비장소를 출처 삼은 이미지들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동반된 감각은 대개 ‘공포’로, 이때의 ‘리미널 스페이스’는 <8번 출구>의 지하도와 같이 친숙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위화감과 두려움을 지닌다. 대부분 인적이 없고 시간대가 불명한 이미지의 정보값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텅 빈 건물 복도, 호텔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새벽의 어느 국도, 영업이 끝난 쇼핑몰의 내부 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15].
그러나 유튜브 스트리머들의 <8번 출구> 플레이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해당 공간을 과연 ‘공포’의 대상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판 헤네프는 일찍이 이러한 ‘문턱된’ 상태가 적용된 시간을 ‘실험’과 ‘유희’가 넘쳐 흐르는 ‘미술적인 시간’으로 파악하면서,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여러 활동들을 ‘직설법’이라 한다면 사회 문화적인 과정에 있어서의 ‘리미널리티’란 마치 ‘가정법’과도 비슷하여 현실적이고 직설법적인 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일종의 사고•언어•상징•메타포에 대한 ‘놀이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담지하는 ‘가정법적인 시간•공간’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기도 한 바가 있다[16].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으로서 우리는 ‘밈’된 리미널 스페이스의 이면에도, 일종의 ‘놀이’로서 대중을 견인하는 측면이 존재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8번 출구>에 대두되는 리미널 스페이스(내지는 비장소)의 경우, 표면적으로 그것은 게임이라는 형식상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포에서 오는 유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그 심층에는 ‘영속된 현재’에 대한 놀이의 감각을 즐기는 플레이어의 정서가 개입되어 있기도 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현재성’의 지배는 본디 비장소의 특질로, 리미널 스페이스는 이때의 ‘현재성’을 영구히 늘어뜨리는 마력을 지닌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은 요소는 불분명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턱된 상태’를 이미지나 게임과 같은 매체로서 창조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유할 뿐인 비장소의 현재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며, 그에 따른 자극에도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로제 카이와에 따르면 규칙과 놀이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놀이의 원천에는 근본적인 자유―쉬고 싶은 욕구이며 아울러 기분전환 및 변덕스러움의 욕구―가 있으며, 이런 자유는 놀이의 필수 불가결한 원동력이 된다[17]. 곧, <8번 출구> 역시 해당 공간 내에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규칙(e.g.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세요.”)이 존재하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진입하는 리미널 공간 특유의 ‘영속된 현재’에는 공포만으로 포섭하기 어려운 ‘놀이’의 욕망, 그로 인한 자유로의 (불)가능성이 혼융되어 있다.
4. 공간은 행위자가 된다
공간은 힘이 세다. 개중 비장소는 유동하는 공포의 교차점이자, 몰입할 수 있는 놀이로서의 가능성이 결집된 곳으로, 이를 활용한 ‘리미널 스페이스’라는 밈이 게임의 세계에서 각광 받고 있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불안과 매혹의 비장소는 게임 내에서 현실과 사이버 공간을 횡단하며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마침내 ‘인간-공간’의 지위 설정에 대한 역전까지를 가능케 한다.
기존 체계에의 인간이 언제나 공간을 생성하고 존립하게 하는 존재였다면, 비장소성을 담지한 리미널 스페이스에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행위하는 쪽은 공간인 셈이다. 이를테면 <8번 출구>의 경우 인간(플레이어)에게 주어진 수행성이 오직 앞뒤로 걷거나 달리는 일에 그쳤다면, ‘지하도’라는 비장소는 그 자체로 각종 ‘이상현상’을 일으키며 인간보다 더욱 스펙터클한 움직임과 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이 공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익숙하던 객체가 아니며 거꾸로 우리를 응시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던져버린다[18]. 그 안에서 인간은 공포로서 압도당하는 한편, 놀이로서 유희하는 복합적인 감각을 지닌다. 이때의 감각에는 비장소성에서 기인한, 근대적 개인들의 내밀한 신경증 같은 것이 동반되어 있다.
결국 게임 내 리미널한 비장소에 대한 ‘공포’와 ‘몰입’의 요인 탐색에 착수하는 일로부터. 우리는 게임의 사회학이 아닌, 게임을 시발점으로 둔 사회학의 단초까지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게임은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이 투영된 공간, 곧 ‘어디’의 가능태를 탄력적으로 선취하는 사회적 기술로서 긍정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