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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쓸데없음과 효율성의 미학: 게이머는 왜 하필 게임에서 효율적 행위를 추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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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6. 10.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 하느라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거야!’

     

이어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장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청년, 청소년들은 ‘가정-내-관리자’로부터 고함을 동반한 힐난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고통을 수반한 손길까지 언제든 주어질 수 있음을 감수해야 했다.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각계각층에 포진한 ‘관리자’들은 게임과 게이머를 향해 다양한 비판과 충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중에서도 빈출하기로 손꼽히는 것은 ‘게임은 쓸데없다.’라는 비판일 것이다. ‘게임을 한다고 밥이 나오는가, 쌀이 나오는가?’ 먹고 사는 일의 엄혹함을 환기하고 게임의 불필요함을 꼬집는 이러한 말 앞에서 게이머들은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게임에서 대체 어떠한 실용성, 생산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게임보다는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행위를 하라는, 그리고 현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삶을 꾸리라는 세간의 충고에 게이머가 반론을 제기하기란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게임과 게이머에 대한 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게임이 실용성, 생산성, 효율성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은, 게이머의 비일관적 행태를 지적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를테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 왜 정작 게임 내에선 가능한 효율적인 행위를 하고자 애쓰는가?’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게이머들은 게임 내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행위를 수행하고자 분투한다. 그것은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한 지향에서 확인된다. 이를테면, 레이싱 게임의 플레이어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따라 최적의 속도로 코너링 등을 수행하고자 한다. 최적화된 동선, 순서, 계획의 수립과 그것의 효율적 수행은 ‘타임 어택’을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는 게임에서 공통으로 확인된다. 이와 유사하게 <문명>과 같은 턴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등의 불가사의를 AI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매 턴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가능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스타 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자원의 수집과 유닛의 사용에 있어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행동했는지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유닛 사용의 차원에서는, 소위 ‘마이크로 컨트롤’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유닛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 생산성을 문자 그대로 극한까지 추구하는 방식이 확인되기도 한다.


* 압도적인 생산력을 자랑하며 ‘물량 테란’, ‘괴물 테란’ 등으로 불렸던 최연성 선수

     

이처럼 실제로 게이머들은 실용성, 유용성, 생산성을 갖추지 못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도 정작 게임 내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행위,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 애쓴다. 게임의 불필요함과 게이머의 현실감각 부재에 개탄하는 ‘관리자’들은, 이러한 게이머들의 행태에서 ‘쓸모없는 일을 하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비일관성’을 발견한다. 그들에 따르면,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이다.

     

     

불필요한 게임의 불필요한 장애물

     

게임은 쓸모없고, 게이머는 비일관적인가? 철학자 버나드 슈츠는 게임의 가치와 의의에 관해 성찰한 바 있다. 철학과 게임. ‘관리자’들의 관점에서는 쓸모없는 것들 간의 불필요한 만남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슈츠는 그러한 시선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게임이 쓸모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맥락에선’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게임 플레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시도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마리오를 조종하여 다양한 장애물을 넘어서는 것?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짐 레이너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캐리건을 구해내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소드코스트의 도시 발더스 게이트를 구하기 위해선 D&D 규칙에 따라 절대자(The Absolute)를 물리쳐야 하지만, D&D 룰을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며 게임 내 도시가 몰락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필요하다. 그것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그만두고 게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불필요해지는 것들이다.

     

슈츠는 이처럼 게임 내에 존재하는 목표, 규칙, 서사, 재현, 메시지 등의 차원에서 게임의 의미, 가치, 효용을 끌어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이 실질적이거나 실용적인 의미를 갖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그가 게임에 대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최종 평결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게임 내 장애물이 굳이 극복될 필요가 없는 것임에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려 하는 플레이어의 고투, 분투에서 게임의 의의를 도출한다.

     

이러한 슈츠의 관점에 따르면, 게임이 부과하는 제약과 틀 내에서 플레이어가 더 효율적인 행위, 최선의 선택, 최적화된 경로를 추구하는 것은 비일관적인 행태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플레이어가 게임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 고투하는 데 게임의 의의가 있다는 관점은, 게임에서의 효율성의 추구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다. 플레이어가 게임 내 규칙과 제약 아래에서 최적화된 동선을 따르고, 효율적으로 유닛을 운용하고, 최선의 선택을 통해 AI를 앞지르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달성하게 되는 게임 내 목표 자체가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분투 행위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 슈츠의 생각이다. 게임의 목표, 장애물 등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분투와 고투 자체를 즐기려는 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임에 관한 슈츠의 이러한 정의가 게임 일반을 아우르는지에 관해서는 물론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의 통찰이 시사하는 바는, 효율성이 곧 실용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실용적 가치, 생산적 가치를 찾기 어려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효율성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한 행위의 가치는 목표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가치는 효율적으로 수행되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 가치는 심지어 예술적인 것일 수 있다.

     

     

행위성의 예술과 효율성의 미학

     

C. 티 응우옌은 그의 저작 <게임: 행위성의 예술>에서 슈츠의 사유를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티 응우옌은 게임의 가치가 서사적 탁월성, 세계의 재현, 사회 비판적 기능 등 다양한 차원에서 성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이라는 매체가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그런 차원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티 응우옌은 슈츠에 동의하며, 게임 플레이어가 수행하는 분투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게임은 비록 쓸모없고 불필요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을지언정, 플레이어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매체로 게임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즈: 스카이라인>에서 게이머들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간을 미적으로 구성하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에서는 민첩한 반응과 상대 플레이어와의 심리전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할 수 있다. <문명>은 전략적 사고와 최적화된 선택이라는 행위성을 체험하게 하는 게임이다.

     

여기서 게임의 예술적 가능성이 발원한다고 응우옌은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고자 행동할 때 그 행위 자체에서 미적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리오넬 메시의 해트트릭 기록에도 감탄하지만,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유려한 움직임과 상대 선수를 기만하는 아름다운 동작을 되풀이하여 보곤 한다. FPS 게임에서 민첩한 반사신경과 정교한 조준으로 수적 열세마저 극복하는 플레이에는 환상적이라는 말을 붙인다. 체스 플레이어들은 허를 찌르는 그랜드마스터의 체스 말 운용에서 전율을 느낀다. 응우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성에서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과 행위성에서 예술적, 미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응우옌의 통찰은, 불필요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하려는 게이머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효율성 역시 미적 감각을 환기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려한 드리블러의 발재간에도 환호하지만,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대를 제치는 축구선수의 우아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에도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한 효율성은 일종의 절제미를 환기한다. 효율성은 정합성과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자원과 에너지가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투입되었을 때, 그것은 정합성과 조화에서 비롯하는 미적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학자들은 딱딱한 계산 기계가 아니다. 수학적 난제를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풀이, 과정, 공식 앞에서 그들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흡사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와 유사하게, 오컴의 면도날은 단지 이론적 검약성만을 함의하지 않는다. 어려운 문제를 명쾌하고도 효율적으로 풀어내는 설명은 미감을 자극한다. 효율적 행위는 미적 체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게이머들은 굳이 게임의 ‘쓸 데 있음’을 입증하고자 항변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행위성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게이머들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효율성은 실용성과 동의어가 아니며, 효율적인 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행위성과 효율성이 담지할 수 있는 가치에는 미적, 예술적 가치가 포함된다. 게임의 행위성, 행위의 효율성, 그리고 오컴의 반짝이는 면도날은 이런 점에서 미학적 대상일 수 있다.

Tags:

무용성,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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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구자)

철학연구자로서의 정체성과 게임애호가 및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강의, 강연, 연구, 저술, 번역 활동에 임해왔으며, 현재는 인하대 등에서 학생들과 사유를 공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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