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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시대 한국 게임비평의 흔적들

02

GG Vol. 

21. 8. 10.

한국에서 게임의 역사는 길지 않다. 길다 짧다는 것이 주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길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은 한국 게임의 역사가 길지 않다고 한다. 다른 매체에 비하면 그 탄생이 늦어서 짧다. 미국, 일본보다도 짧은 편이다. 주변부의 다른 국가에 비하면 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게임의 역사를 몇 년으로 봐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가 한국 게임 역사의 시작이라고 하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1987년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 시행 시기와 함께 출시된 〈신검의 전설〉을 그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1983년 컴퓨터 보급과 컴퓨터 잡지의 발간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그에 앞서 아케이드용 전자 오락기들이 막 수입되고, 가정용 오락기들이 수출용으로 제작되던 때를 시작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짧게 잡는다면 25년 정도가 될 것이다. 가장 길게 잡는다면 50년이 될 수 있는 이 역사는 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80년대 〈갤러그〉를 하던 오락실 어린이들이 지금은 성인이 되어 비슷한 연배의 자녀를 둔 학부모가 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게임이란 매체가 다른 매체만큼 우리 사회에서 자리 잡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될 것이다. 다만 우리 안에서 문화로서의 게임의 위치가 산업적으로의 게임의 위치만큼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이유로 여러 가지를 지목할 수 있겠지만 다른 매체처럼 충분한 평론 등이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임 평론이란 분야는 다른 매체만큼 활성화되어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대부분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국내에서 게임 평론은 존재하지 않으며 해외의 평론만을 수입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 평론이 필요하다고 하는 견해만큼이나 게임평론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많은 부분일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서 게임 평론 시도들은 일부 웹진의 기자들을 통해 이루어지거나, 일부 게임평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꾸준히 평론을 지면에 생산하는 게임평론가는 매우 적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 게임 평론계는 의미 있게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25년 동안 한국 게임계는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렇다 보니 실제 게임평론을 생산하지 않는 자칭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최초의 게임평론가라고 이야기하는 웃지 못할 상황들도 벌어지고는 한다. 이런 점을 정리하려면 먼저 과거에 있었던 게임비평에의 시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게임잡지를 통해 나타난 초창기의 게임평론 시도들


한국에서 최초의 게임잡지를 꼽으라면 1990년에 창간된 〈게임월드〉일 것이다. 그 무렵 컴퓨터 게임을 복사해주거나 판매하는 소프트하우스 중심으로 동인지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공식적으로 출판된 게임잡지는 〈게임월드〉가 가장 먼저였다. 이후 〈게임뉴스〉, 〈게임챔프〉, 〈게임정보〉 등 다양한 가정용 게임기를 다루는 게임잡지들이 출간되고 이후 컴퓨터 게임을 다루는 컴퓨터 게임 전문지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잡지들은 국내에서 게임 문화가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끼쳤지만, 시기상 게임의 유입보다는 늦었다.


흔히 한국 게임개발 원년으로 다뤄지는 1987년보다 4년 이른 1983년 창간된 〈컴퓨터학습〉과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서는 이미 컴퓨터와 게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각 컴퓨터 제작사별로 제공되는 게임들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 무렵의 게임에 대한 소개를 평론이나 공략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었다. 〈컴퓨터학습〉 1984년 1월부터 3월까지 3차례에 걸쳐 실린 〈제비우스 1,000만점 돌파의 비밀〉은 일본 컴퓨터 잡지에 있는 공략을 그대로 옮겼으나, 국내 최초의 게임공략으로 인지되며, 〈컴퓨터학습〉이 이후 게임을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제비우스〉 공략이 실린 컴퓨터학습 1984년 1월호와 2월호.

컴퓨터 전문 잡지들의 게임 필자들은 학생들이 주로 맡은 경우가 있었는데, 대부분 투고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게임 초기에 게임평론가로 활동했던 박병호는 학생 때 〈컴퓨터학습〉에 게임공략을 투고하여 잡지에 게재된 것을 인연으로 〈컴퓨터학습〉에 MSX 게임공략을 꾸준히 연재하였다. 상당히 많은 필자가 게임공략으로 활동하였으나 이 중 게임평론가로 활동을 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박병호는 이후 〈PC매니아〉 등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평론가로 활동하며 나중에 〈게임피아〉 등의 잡지와 〈경향신문〉에서 종합지 최초로 게임 관련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 〈컴퓨터학습〉 86년 3월호에 실린 〈헬기대작전〉의 공략. 〈헬기대작전〉은 윌라이트가 제작했던 〈번겔링만의 습격〉 MSX판의 국내 유통 제목이다. 

1990년대 초 게임잡지들의 창간은 이러한 컴퓨터 잡지들의 게임 코너의 영향들을 받았다. 초기 게임잡지 중 특히 주요한 영향을 꼽은 잡지라면 〈게임월드〉, 〈게임챔프〉, 〈게임채널〉 등이 있으며, 게임잡지들은 대부분 창간과 함께 필자들을 모집하며 기술 중에 게임 평론을 요구하기도 했다. 93년 추가로 〈게임정보>를 창간한 미래시대는 "나도 게임평론가"라는 코너로 독자들의 게임에 대한 평가를 연재하기도 했다.


* 〈게임정보〉에 실렸던 독자마당 '나도 게임 평론가' 코너. 

93년에 창간된 〈게임챔프〉는 기자들을 명인으로 지칭하며 신작들을 모아 평가를 했다. 평론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평점과 함께 기자의 이름을 걸고 평가를 하는 시스템은 이후 창간되는 〈PC챔프〉-〈PC파워진〉으로도 이어져 기자의 이름과 함께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 업계를 평론하는 연재하는 지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게임챔프〉에 실린 명인의 게임평가. 

초기의 게임잡지들이 일본의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게임 유통사였던 동서게임채널에서 발행한 〈게임채널〉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 유학을 계기로 게임산업에 진출하게 된 대표의 영향도 있겠다. 〈게임채널〉은 창간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미국의 〈컴퓨터게이밍월드지〉의 칼럼이나 게임에 대한 평가를 국내에 소개했으며 바이라인과 함께 기자 사진이 같이 소개되기도 했다. 


한국 게임 시장이 컴퓨터 게임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컴퓨터 게임 전문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존 게임잡지들의 부록으로 시작해서 자매지로 창간되는 경우부터 방송사에서 직접 창간하는 경우까지 다양한 잡지들이 창간되었으며 비디오 게임 잡지의 편집 형태가 일본 게임잡지를 따라가는 그것과 달리 좀 더 미국의 게임잡지에 가깝지만 고유한 형태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기자들의 이름을 걸고 게임 자체를 깊게 평가한다던가, 게임뿐만 아니라 업계나 문화 자체에 대한 칼럼을 기자의 이름을 건 코너 등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93년 12월 정보문화센터에서 주최한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는 여러 수상작이 나오며 실제 게임으로 발매되는 단계까지도 갔는데, 당시 인식으로 게임 시나리오 공모전 수상자는 게임전문가라는 인식이 있어, 이 수상자들이 게임 칼럼니스트들로 활동하는 예도 있었다. 이 중에서도 이문영 씨의 경우 다양한 기고와 함께 게임피아에서 울티마 온라인 여행기 등을 연재하기도 했다. 


* 〈피씨파워진〉에 실렸던 기자들의 평론이나 칼럼들.

〈게임월드〉와 〈게임챔프〉가 시작한 가정용 게임 잡지들은 〈게임매거진〉, 〈게임라인〉 등 후속 잡지들이 출현하면서 좀 더 다양하게 바뀌었다. 모두 다른 잡지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가능한 일본의 최신 정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부분과 함께 깊이 콘텐츠를 만들려는 노력이 함께 했다. 〈게임매거진〉의 경우는 TRPG를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으며 〈게임라인〉은 좀 더 자신의 색이 강한 콘텐츠가 강점이었다. 이중 게임라인에서 연재했던 'B급 게임의 심오한 세계'는 게임에 대해 좀 더 깊게 접근하면서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 〈게임라인〉에 실린 B급 게임의 심오한 세계 코너.

게임잡지의 인기가 좋다 보니 그동안 〈게임채널〉이나 〈PC챔프〉에서 기사 협약을 통해 단신으로만 소개되던 〈컴퓨터게이밍월드〉를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출간하던 잡지사인 정보시대에서 직접 라이선스를 가져와서 창간하는 예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시도는 게임잡지들의 과다한 경쟁으로 인해 길게 가지는 못하였다.


〈게이머즈〉를 발행하던 게임문화는 일본의 잡지 〈게임비평〉의 라이선스를 얻어 일본의 잡지 내용에 한국에서 제작한 원고를 추가하여 같은 이름으로 〈게임비평〉을 격월로 출간하였다. 일본의 〈게임비평〉처럼 광고를 전혀 받지 않아 독립적인 편집을 보장한다는 기조는 격월로 좀 더 깊은 주제의 이야기들이 실렸으며, 국내 실정에 대한 분석, 평론이나 당시 〈악튜러스〉를 개발했던 김학규가 〈악튜러스〉의 개발 철학과 다루는 주제에 대해 기고를 하는 등 인상적인 시도가 많았으나, 3년 정도 이어지고 휴간하였다.


* 〈게임비평〉 표지.

한국에서 90년대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의 한 축이 잡지라면, 다른 한 축은 PC통신일 것이다. PC통신이 등장하기 전에는 게이머들의 교류는 각 지방 소프트하우스를 중심으로 매우 작게 일어났으며, 잡지에 기고하던 필자들 역시 이렇다 할만한 교류가 있지 않았다. KETEL이 등장하고 개오동이 등장하고서야 게이머들이 장소를 초월해서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곳에서는 활발하게 이야기가 오갔는데, 이러한 PC통신 동호회의 특징이라면 게시판에 대한 강한 규칙이라 양식이나 내용을 구분할 수 있는 제목의 말머리 등을 강하게 통제하였다. 초반에는 게임의 공략 질문 친목 위주로 운영되었다. 처음엔 PC통신 서비스가 KETEL이 이름을 바꾼 하이텔뿐이었지만 이후 PC-Serve가 이름을 바꾼 천리안과 나우누리 등의 서비스가 늘어나고 게임을 다루는 동호회도 늘어났다.


이러한 동호회에서는 게임에 대한 소감, 평가에 대한 수요가 있어 한곳에 모아놓기 시작했으며 당시의 컴퓨터 자원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된 게시판 숫자, 글, 자료실 용량으로 기존 게시판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90년대 후반에서는 동호회들마다 평론, 평가 게시판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다 보니 게임의 홍보에 게임평론가란 호칭과 함께 이름과 하이텔 아이디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 하이텔 시뮬동의 소개/평론 게시판.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걸쳐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들은 게임전문지뿐만 아니라 그 밖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게임평론가로 활동하던 박병호는 1996년부터 5개월에 걸쳐 경향신문에 "다시 보는 컴퓨터 게임"을 매주 연재하였으며, 이는 알려진 종합지에 연재된 최초의 게임칼럼이다. 1999년에는 문화연구로 게임에 접근한 박상우가 〈씨네21〉에 게임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무가지로 시작한 잡지 〈페이퍼〉에서도 “박정선의 게임스테이션”이란 제목으로 게임칼럼이 연재되었다.


2000년대 초 게임의 중심이 PC게임에서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고,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종이 잡지의 영향력이 줄어가면서 2010년에 이르러선 대부분의 게임 잡지들이 폐간하였다. 이후 게임비평 공모상 등의 시도와 함께 저술 활동을 한 게임평론가들이 등장하고 사라져왔다. 


가끔 왜 한국에 게임 평론이 뿌리내리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주변과 여러 이야기를 나눠왔다. 그중 한 가지는 시장이 게임 평론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90년대에서 2010년에 이르러서 게임 평론에 대한 요구가 없었을까. 90년대 당시의 독자 코너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게임 평론을 찬양하고 한국의 게임 평론은 수준이 낮으니 노력해야 한다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각 게임잡지의 구인코너에서 요구하는 능력에 게임 평론은 빠지지 않으며, 1998년에 호서대학교에서 게임공학과가 개설되면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게임평론가와 매니저 양성이 목표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국내 게임 잡지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관에서 진행하는 행사나 지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역시 수요 덕분일 것이다. 2008년부터 진행된 게임비평 상이나 월간 〈게임문화〉지 같은 것은 기존의 게임잡지에서 시도되었던 평론의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하였으나, 재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시행사나 주관사의 의지 때문에 지속되지 못하고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 게임잡지, PC통신의 게임 평론의 특징이라면 그 특징이 외국의 것을 흉내를 내거나, 자신만의 이론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초기의 게임잡지들에서는 게임 평론보다도 게임음악 평론들이 먼저 등장하며, 초기 게임 평론 역시 평론이란 호칭을 단 원고는 고전 게임 평론 등을 먼저 살펴볼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일반적으로 다른 매체의 비평에서 사용되는 접근들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게임들과의 비교들이 평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평가를 작성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미성년자라는 점. 그리고 매체 중에서도 주로 게임을 접했다는 것 역시 당시 평론이 게임의 바깥을 다루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면서 이러한 평론 경험을 했던 학생들이 성장하여 계속 게임 평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시장이 너무 척박하였다. 앞서 게임 비평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이 금전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수요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겠다. 〈게임챔프〉에서 “명작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칼럼은 필자를 공개하지 않고 1년에 걸쳐 연재되었는데, 독자들에게 평론으로의 반응 역시 좋았다. 나중에 가서야 필자를 공개하였는데, 당시 막 창세기전을 출시한 소프트맥스의 최연규였다. 이처럼 게임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게임개발자를 겸업하거나, 게임지 기자, 필자로 일하는 상황이었다. 게임 평론을 할 수 있는 게임전문가들이 대부분 게임업계 내에서 게임 지식이 있는 사람 외에는 힘든 상황이었고, 게임 평론의 원고료만으로는 충분한 수입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씨게임잡지 등에서 소개되는 어떻게 하면 게임 필자가 될 수 있나요.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필자들은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다고 언급하며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매우 힘들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박상우 역시 2000년 피씨피워진에서 실린 게임평론가란 직업에 대한 인터뷰에서 영화평론가도 먹고살기 힘든데, 게임으로 돈을 벌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게임평론가와 하드코어 게이머의 관계 역시 평론이 계속되기 힘든 환경이라 지목된다.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평단과 하드코어 게이머의 골을 크게 부각해 이러한 거리감이 최근에 생겼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2000년 〈피씨파워진〉의 기자 칼럼에서 게임 평론 부진의 원인을 맹목적인 팬덤 문화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역시 20년 전에도 존재하는 전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에 나왔던 것처럼 게임 평론에 대한 반응은 자신의 게임 지식을 자랑하는 형태로 흐르거나, 자신의 느낌과 다르다며 “겜알못”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 평론을 지속하기 힘든 환경이다 보니 박병호의 경우는 1999년 미국 유학으로 더는 게임 평론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박상우 역시 일반 문화지와 게임전문지에서 집필활동을 하였으나 지면의 부족으로 지속되지 못하기도 했다. 평론가나 전문 필자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게임개발사로 직장을 옮기기도 했다.


비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러서도 지면과 인식의 부족으로 게임 평론 활동이 지속되는 경우는 찾기가 힘들다. 이렇다 보니 이러한 시도들이 대부분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게임평론가들은 대부분 앞선 평론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해외의 칼럼이나 다른 매체 평론의 방법론을 통해 혼자 고민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활동이 다른 평론가들에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 각 평론가가 저술한 평론의 숫자 역시 많지 않다 보니 각자의 개성을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존재를 알기조차 쉽지 않다.


2000년 박상우가 게임평론가란 직업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게임은 산업이 아닌 문화"라고 이야기했다. 2021년에도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공허하게 외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1년 동안의 시도들이 쌓아나갈 수 있었다면 좀 덜 공허할 수 있었을까.


2000년의 평론에서 다루는 게임과 2021년에 평론을 다루는 게임은 다르다. 게임 평론에 대한 시도를 더 찾아보기 힘든 것은 2010년 이후의 게임들이 단발적인 작품이 아니라 대부분 서비스 형태의 게임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이야기하기 더욱 힘들어진 영향도 존재할 것이다. 가정용 게임의 보급과 스팀 같은 서비스들이 일반적으로 늘어나면서 인디게임을 비롯한 싱글 플레이게임 운신의 폭이 늘어나, 이러한 게임에 대한 평론은 지금은 게임웹진 등에서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 게임에서 주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온라인게임에 대한 평론은 시도할 방법조차 찾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커뮤니티 중심으로 재편된 게임웹진의 온라인게임 사이트들은 이제 공략조차 기자가 작성하지 않고 이용자가 작성하는 상황에 이르러 전문가가 더는 전문성을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최근 5년간은 게임산업 바깥의 지면에서 게임평론들을 찾아보기 쉬워졌다. 케이블은 물론 공중파 라디오에서도 게임 전문 코너가 생겼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론들에서 지금 까지의 한국 게임에서 있었던 평론의 영향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2030년에 연구자나 산업관계자들이 "한국에 게임 평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확언할 수 있을까. “옛날에 게임잡지들이 있었고,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나 〈게임제너레이션〉 같은 시도가 있었다.” 정도만 언급될 수도 있다. 그조차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게임비평 잡지나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는 현재는 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게임비평〉 등의 과거 게임을 다루던 잡지들은 이제 레트로 게임 아이템이 되어 수집가들에 의해 비싸게 거래되는 것이 보통이고, 게임문화재단의 〈게임문화〉는 분명히 당시에는 pdf로 배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구할 방법이 없다. 책이 아닌 인터넷의 자료들은 더욱더 쉽게 휘발된다. 


한국엔 게임 비평에 대한 시도들이 있었다. 끊임없이 있었다. 모든 시도가 무의미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쌓는 데는 실패했다. 어떻게든 부스러기를 모으다 보면 계속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느낌을 받는다. 게임 평론 문화를 탑처럼 이야기했다. 이것이 탑이고 재료를 쌓는 데 실패했다면 탑을 세우는 데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탑이 아니라 화학작용이라면 어떨까. 수많은 재료가 쌓여왔고 무언가 촉매로 인해 화학작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게임제너레이션-GG〉가 그것이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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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개발자, 연구자)

게임애호가, 게임프로그래머, 게임역사 연구가. 한국게임에 관심이 가지다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2006년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있다. 〈한국게임의 역사〉, 〈81년생 마리오〉등의 책에 공저로 참여했으며, 〈던전 앤 파이터〉, 〈아크로폴리스〉, 〈포니타운〉, 〈타임라인던전〉 등의 게임에 개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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