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 - 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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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1. 12. 10.
1. 두 아이 아빠의 게임 라이프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털어놔야겠다. 지난 몇 년 동안 게임을 즐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저런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가진 탓에 늘 마감에 쫓긴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두 아이가 반긴다. 둘 다 아직은 엄마, 아빠의 손이 많이 가는 나이다.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과 잠시나마 놀아준다. 고집 센 아이들을 설득해 씻기고 재우면 대략 밤 10시다(정신적·체력적으로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다). 이때부터 명목상 자유시간이지만 대개는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게 된다. 어쩌다 여유가 있더라도 게임기로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1~2시간 만에 끝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밤 게임을 저장하면 언제 다시 데이터를 불러낼지 기약할 수 없다. 한 번 흐름이 끊긴 게임을 다시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최근 육퇴 후 아내와 함께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하겠노라며 큰마음 먹고 패키지 버전을 2개나 구입했지만, 한 달 동안 고작 ‘아시라 세트’를 맞춘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둘째를 재우다 그대로 잠드는 날이 많았고, 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몇 번의 솔로플레이를 하다가 새로운 업무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멀어졌다.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사냥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서 플레이 시간이 늘어나면 업무는 물론, 가족과의 일상이 대검에 썰려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생이라는 맵에서 홀로 사냥하던 시즌1은 끝났다. 시즌2에서는 두 아이가 동반자 아이루(몬스터헌터의 고양이 서포터)처럼 늘 함께한다. 아침에 두 아이를 등원시키려면 일찍 잠을 청해야 한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바깥 활동을 하니 평일보다 더 여유가 없다. 부족한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40대 중반에 접어드니 체력은 물론,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다. 〈몬스터헌터〉처럼 컨트롤이 필요한 게임은 오래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처럼 여유가 있을 때는 게임기를 켜기보다 넷플릭스에 접속한다. 궁금한 게임이 있으면 유튜브 영상을 본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내 삶에 게임이 끼어들 공간은 거의 없는 셈이다.
2. 자동화된 게임: 핀볼과 〈월드플리퍼〉
이런 두 아이의 아빠가 오랜만에 빠져든 게임이 있다. 사이게임즈에서 개발한 〈월드플리퍼〉다. 복고풍 도트그래픽으로 핀볼 게임과 RPG를 접목한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플레이어는 6명의 캐릭터(메인 3명, 서브 3명)를 조합해 파티를 구성하고, 핀볼처럼 디자인된 맵(스테이지)에서 적을 물리치게 된다. 화면 하단 플리퍼로 구슬 대신 캐릭터를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데, 캐릭터를 터치하면 적에게 돌진할 수 있고, 게이지가 쌓이면 고유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일본식 RPG의 소위 ‘몸통박치기’를 핀볼 게임과 적절하게 섞은 느낌이다. 핀볼 게임이 그렇듯 이 게임도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타이밍에 맞게 플리퍼를 터치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스킬을 쓰는 것이 전부다(애초에 캐릭터를 직접 조작하는 게 아니라 플리퍼로 날린 뒤 지켜보는 구조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 중 대부분의 시간은 조작보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득점을 ‘지켜보는 데’ 할애된다.
* 〈월드플리퍼〉는 핀볼 개념과 RPG를 섞으며 자동 플레이에 대한 나름의 납득 가능한 지점들을 구현해낸 바 있다.
처음부터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되어 있다 보니 ‘자동’ 기능을 사용해도 큰 이질감이 없다. 오히려 AI가 나보다 더 정확하게 적을 조준하고, 알맞게 스킬을 구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컨트롤이 필요 없을 만큼 캐릭터가 성장하면 자동 진행은 어느새 옵션이 아닌 디폴트가 된다. 자동 플레이의 비중이 수동 플레이의 비중을 넘기는 시점부터 게임은 본격적인 ‘보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그에 맞춰 게임의 핵심 재미도 변화한다. 플레이어는 캐릭터 육성에 필요한 재화를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핀볼 게임을 반복해야 한다. 처음 몇 번이야 재미를 주겠지만 반복이 거듭되면 단순노동으로 변질된다. 자동 기능은 이 ‘반복구조’를 대행해준다. 전통적인 RPG에서는 성장을 위해 지루한 구간(소위 레벨노가다)을 참고 인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어른 게이머들은 이를 감당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성장한다는 것은 게임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플레이어는 자동화를 통해 얻어진 재화를 전략적으로 분배하고, 성장한 캐릭터를 조합해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데서 재미를 얻는다. 자동 기능은 전체 게임 디자인의 일부이자 게임의 구조적인 재미를 작동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드플리퍼〉가 플레이어의 개입이 최소화된 ‘핀볼’을 차용한 것은 꽤나 영리한 설정이다. 핀볼 게임의 구조가 ‘지켜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오토 플레이로 전환시키고, 수집형 RPG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동 기능을 합리화시키기 때문이다.
3. 플레이의 경계가 사라지다
‘보는 게임’을 ‘플레이어의 참여가 최소화된 게임’으로 정의한다면 앞서 언급한 〈월드플리퍼〉를 포함해 자동 기능이 탑재된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이 아마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비주얼과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는 게임도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보는 게임’이란 시각적인 이미지에 관계없이 ‘플레이어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게임’으로 한정짓고자 한다. 따라서 화면을 보지 않고 ‘방치’하는 게임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보는 게임’에 포함될 것이다. ‘보는 게임’의 핵심은 ‘플레이의 자동화’다. 오늘날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 오토 플레이는 필수 기능으로 자리잡았다. RPG 장르의 자동 사냥은 물론, 캐릭터 조작 없이 클릭 한 번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것도 일종의 오토 플레이 요소다.
진행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참여하는 부분은 주로 습득한 재화를 배분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보는 게임’은 그래서 이중적이다. 그것은 스스로 작동하는 게임화면을 바라보는 것이자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행위의 영역이 아닌 인식의 영역이다. 캐릭터의 성장을 지켜보고 개입하는 존재로서 플레이어는 게임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제 게임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물리적인 하드웨어와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동화된 세계를 인식하고 떠올리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게임이 된다. 플레이의 경계는 무너졌다. 하지만 이런 열린 상태가 한편으로는 불안하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매직서클’의 경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보는 게임’은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무너질 때 ‘워라밸’의 균형도 무너진다. 자동화된 놀이가 생활과 인식의 영역으로 침범할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보는 게임’은 쾌락의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늘 미끄러진다. 그래서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도 욕망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는다.
4. ‘보는 게임’의 기원
‘보는 게임’은 스마트폰 등장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으나 게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기부터 그 원형이 발견된다. 나는 〈게임, 게이머, 플레이: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에서 초창기 게임의 진화 과정을 아케이드 게임과 PC 게임이 서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아케이드 게임이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을 극대화하는 형태로 발전했다면, PC 게임은 이야기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런 관점에서 PC로 등장했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는 ‘보는 게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그래픽 어드벤처 게임은 물론, RPG, 시뮬레이션 게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초기 PC 게임들은 물리적인 조작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지켜보는’ 형태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PC 플랫폼의 하드웨어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키보드’라는 입력도구는 조이스틱과 달리 문자를 입력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고, 초기 PC의 낮은 그래픽 성능은 움직이는 이미지보다 고정된 이미지와 텍스트 중심의 게임을 강제했다. 게다가 PC는 아케이드 게임과 달리 긴 플레이 시간을 보장했다. PC 플랫폼에서 게임의 플레이 타임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저장 기능은 게임 플레이가 일상생활에서 적절하게 끊어지고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왔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이런 PC 게임의 특성이 극대화된 장르 중 하나다. 〈삼국지〉나 〈문명〉 시리즈는 대부분 명령을 내리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PC라는 업무용 하드웨어가 비디오게임과 결합되면서 그 게임 스타일도 마치 직장에서 업무 지시를 내리듯 사무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당시에 PC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은 놀이라기보다 업무에 더 가까웠다. 어쨌든 이런 ‘보는 게임’의 흐름은 2000년대 웹 게임을 거쳐 스마트폰 게임으로 이어진다.
5. ‘보는 게임’은 어떻게 게임시장의 주류가 되었을까?
과거 PC라는 하드웨어의 등장으로 새로운 게임 장르가 등장했던 것처럼 스마트폰이라는 하드웨어는 ‘보는 게임’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24시간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터치스크린’ 단말기는 PC가 그랬듯이 캐릭터를 조작하기가 불편했다. 뭔가를 보고 조작하기에는 화면이 너무 작았고, 물리버튼이 없어서 정교한 컨트롤도 어려웠다. 오토 플레이 기능은 이런 하드웨어의 한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24시간 플레이가 가능한 개인화된 기기라는 점도 오토 플레이에 영향을 미쳤다. 스마트폰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언제 어디서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상태로 플레이어 곁에 대기 중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플레이어는 24시간 스마트폰을 들고 있을 수 없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동일하지 않고, 대부분의 온라인 모바일 게임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한(혹은 비용을 더 지불한)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흘러간다. 늘 손안에 있는 하드웨어, 항상 게임에 접속할 수 없는 플레이어,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게임 내 경쟁구조. 이 세 가지 요인이 맞물리면서 ‘자동 사냥’ 혹은 ‘오토 플레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탄생한다.
물론 하드웨어 특성만으로 ‘보는 게임’이 주류가 된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보는 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게임이 재미를 만들어내는 구조와 더불어 오늘날 수용자들의 게임 플레이 환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게임을 ‘선택’한다는 것은 취향은 물론 자신의 플레이스타일과 라이프사이클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다. 아무리 게임이 재미있어도 플레이하는 과정이 내 삶의 파장과 맞지 않으면 버려지게 된다. 우리 집 책꽂이에 방치된 닌텐도 스위치와 〈몬스터헌터 라이즈〉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바쁜 와중에도 꾸역꾸역 어떻게든 즐기는, 아니 즐기는 것이 용인되는 〈월드플리퍼〉처럼 말이다.
여러 모바일 게임 중에서도 〈월드플리퍼〉가 내 삶의 틈새로 구슬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게임은 각각의 플레이 과정이 작은 단위로 분절되어 있다. 레벨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하나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3분 정도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나에게 재화를 빨리 모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드플리퍼〉에는 유저간 PVP가 없다. 경쟁 요소가 거의 없다보니 캐릭터 수집이나 성장에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과정이 즐겁다. 멀티 플레이도 마치 솔로 플레이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다. 3명의 플레이어가 함께 진행하는데, 타인의 생성한 룸에 참여하면 행동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알람 신호가 울리면 클릭해서 참여하고, 오토 플레이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리면 재화를 얻을 수 있다(물론 이벤트 난이도에 따라 컨트롤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채팅 기능이 없어서 커뮤니케이션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런 특성 덕분에 나는 일상생활에서도 부담 없이 멀티 플레이에 참여해 재화를 모을 수 있다. 일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클릭해서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도중에 전화가 오거나 접속이 끊겨도 자동 전투는 끝까지 진행되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집중이 필요한 업무를 할 때는 이마저도 어렵지만 간단한 업무를 할 때는 충분히 병행 가능한 수준이다. 이렇게 해서 일과 게임을 동시에 처리하는 신인류가 탄생했다(멀티태스킹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6. 시간은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어
누군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것처럼, 나 역시 시간이 없지만 게임은 하고 싶다. ‘보는 게임’은 그런 어른 게이머의 모순된 욕망을 어느정도 충족시켜준다. 일과 게임의 밸런스, ‘워게밸’이 가능하다고 합리화하면서 스마트폰에 게임을 설치한다. 하지만 불온한 멀티태스킹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일과 게임, 둘 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외치는 탓이다. 처음에는 똑같이 아껴주겠다고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균형은 무너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결국 게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게임은 그동안 발생한 ‘매몰비용’의 영수증을 들이대면서 붙잡는다. 오래 붙잡은 인연일수록 끊어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누군가는 일을 잠시 밀쳐두고 게임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삶의 조건에 맞게 수많은 게임들이 소비된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 욕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다이어트 코크’를 이야기한다. 다이어트 코크는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콜라다. 우리는 가짜 콜라, 유사 콜라를 마시면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원래의 핵심이 제거된 콜라를 마시면서도 기존에 느꼈던 ‘청량감’과 ‘각성효과’를 기대한다. 다이어트 코크를 마시면서 오리지널 콜라를 욕망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제거함으로써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보는 게임’도 어쩌면 그런 다이어트 코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콜라에 카페인과 설탕이 필요하듯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요구된다. 이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쾌락을 위해 자신의 노동시간을 마음껏 투입할 수 없다. 그래서 게임회사는 우리가 게임에서 누려야 할 플레이 시간을 제거한다. 바로 일상을 방해하는 해로운 성분이 제거된 ‘보는 게임’이다. 사실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그 몰입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보는 게임’에는 그 본질적인 부분이 제거되어 있다. 마치 카페인과 설탕이 제거된 다이어트 코크처럼 말이다.
나는 일하면서도 게임을 즐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했던 게임은 업무 사이에 던져진 또 다른 업무였을지도 모른다(유저들이 ‘일일퀘스트’를 ‘숙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본질이 제거되면서 욕망은 더욱 극대화된다. 무엇보다 해롭지 않다는 생각에(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더 많은 시간을 안심하고 게임에 투입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투입한 시간은 결코 작지 않다.
7. 포장된 쾌락의 한계
게리 S. 크로스, 로버트 N. 프록터의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는 초콜릿, 담배, 사진, 축음기, 영화 등 ‘포장된 쾌락의 혁명’에 대한 내용들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테크놀로지는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오늘날 사람들이 매우 쉽고 빠르게 열량을 섭취할 수 있게 했다.” 19세기 말부터 기업들은 지방, 당분, 염분 등을 농축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멀리 운반할 수 있도록 포장했다. 시중에 ‘포장된 쾌락’이 넘쳐나면서 미각, 시각, 청각 등 한때는 희소했던 감각들을 이제는 너무나 쉽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포장된 쾌락은 감각 경험의 강도를 크게 높였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마약이다. 씹거나 연기로 피우거나 차로 마셨던 아편은 모르핀, 헤로인으로 정제되었고, 새로 발명된 주사기를 통해 혈관에 직접 주입되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담배회사는 새로운 가공법으로 연기의 맛을 순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연기를 폐 깊숙이 흡입하게 되었다. 제품 자체는 순해졌지만 오히려 건강에는 치명적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포장된 쾌락이 전달되는 과정을 주사기 같은 튜브에 빗대어 ‘튜브화(tubularization)’라고 부른다.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공연장에 가는 대신 ‘아이팟’을 켜는 것, 짧은 기간에만 허락되었던 축제의 즐거움을 일 년 내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놀이공원’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디오게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즉, 기술은 사람들이 놀이를 즐기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매우 쉽고 빠르게 재미와 쾌락을 충족시킬 수 있게 했다. 컴퓨터는 인간이 놀이를 위해 수행해야 할 것들, 이를테면 놀이도구의 배치, 규칙의 적용, 컴포넌트의 이동, 점수 계산 등을 기계가 대신하도록 만들었다. 비디오게임은 TV보다 상호작용성이 뛰어난 매체였지만, 한편으로는 놀이에서 인간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과거의 놀이를 생각해보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놀이들은 물리적인 공간에 친구들을 모으고, 몸을 움직여야 하며, 탈락하면 다른 친구들이 승부를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놀이를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 대상, 시간이 필요했다. 즐거움을 얻기 위한 일종의 ‘허들’이었다. 비디오게임은 이런 허들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물론 접근이 간편해진 만큼 규칙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산업이 성장하고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게임은 점차 ‘튜브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비디오게임은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편리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드코어 게임들은 난이도를 대폭 낮추거나 ‘EASY MODE’를 추가했고, 닌텐도 DS와 Wii는 ‘캐주얼 혁명’을 일으켰다.
스마트폰은 이런 튜브화를 더욱 강화시켰다. 특히 모바일 플랫폼의 ‘보는 게임’은 자동화와 튜브화가 결합된 ‘포장된 쾌락’의 극단적인 형태다. 심지어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는 현실의 자본으로 보다 압축된 시간을 구입할 수 있다. 자동으로 진행되는 전투조차 곧바로 결과를 볼 수 있도록 스킵해 버리는 티켓은 더 빠른 ‘포장된 쾌락’을 위한 입장권이다.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된 휴대용 모바일 기기는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서버에 접속된 게임환경을 제공한다. 주머니 속의 사탕을 꺼내듯 하드웨어를 꺼내서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은 채, 일상에 해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쾌락을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길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게임은 어쩌면 구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구원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오히려 이런 게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과거에 즐겼던 게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마치 비디오게임을 시작하면서 구슬치기가 밋밋해진 것처럼 말이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다.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희소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쾌락에는 상대적 희소성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며, 너무 많으면 지루해진다. 무엇보다 쾌락이 ‘래칫 효과(rachet effect: 수준이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지 않는 효과)’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상품화되지 않은 쾌락을 밋밋하게 만들어버린다. 포장된 쾌락은 전에는 귀하고 드물었던 것을 흔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결국 포장된 쾌락 바깥 세계에 대한 흥미가 점차 약해지며 우리는 더 이상 그 세계를 열망하지 않게 된다. 내가 〈몬스터헌터 라이즈〉를 즐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월드플리퍼〉의 포장된 쾌락에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8. 1973년의 핀볼과 2021년의 월드플리퍼
다시 〈월드플리퍼〉를 가만히 바라본다. 어쩌면 ‘보는 게임’이란 핀볼 기계를 떠도는 구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슬은 스스로 랜덤으로 점수를 얻고 시간이 지나면 중력에 의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아주 잠시 플리퍼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게임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973년의 핀볼』에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거대한 창고 안에서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핀볼 기계를 찾아내고 나서야 그는 충족되지 않던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보는 게임’은 다이어트 코크처럼, 포장된 초콜릿처럼 놀이의 중심에 닿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노동에서 벗어나 놀이 자체를 온전히 마주할 때까지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2021년의 나는 〈월드플리퍼〉를 플레이하면서 유년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핀볼 기계를 찾아 헤매고 있다.
“핀볼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내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갈 곳 없는 상념도 사라졌다.”
- 무라카미 하루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