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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관객에게 말걸기 -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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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3. 6. 10.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야기는 하고 싶어


필자는 게임제너레이션으로부터 "북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에 대한 게임전문가 관점에서의 리뷰"를 요청받았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게임전문가도, 미술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잘못 주름을 잡았다가는 큰 코를 다칠 게 뻔했다. 하지만 북서울미술관은 필자의 집 앞이었던 데다, 고료의 유혹이 상당했다. 그렇게 흔쾌한 척 '퀘스트'를 수락했지만, 이 주제에 적당한 '레벨'인지 자문한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1, 2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관람객이 플레이어가 되어 전시장 곳곳의 작품들과 상호작용한다는 콘셉트를 가진 기획이다. 작품들은 '게임적' 연출이 되어있어서 관람객의 개입을 유도한다. 여섯 작가(팀)는 곳곳에 '게임적'인 맥락을 삽입해 문제 해결의 재미를 집어넣었다.


여기서 '게임적'은 "플레이어에게 더 많은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이머시브 시뮬레이션’ 게임"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팸플릿에서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머시브 심에서는 플레이어가 환경의 거의 모든 요소와 상호작용한다. 플레이어는 정해진 공략을 반드시 따르지 않더라도 자율성을 갖고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며 독창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시행착오를 통해 숙련도를 쌓으며 게임의 세계관에 더욱 몰입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근데 어쩔 건데?


보라색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 월드에 던져진 듯 아리송하다. 시작하자마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도 자유고, 하나의 전시에 1시간을 쏟아도 자유다. 게임에서도 그렇듯, 높은 자유도는 플레이어에게 '여기서 뭘 어쩌라고'라는 긴장감과 '어디까지 되나 보자'는 해방감을 준다. 필자는 오픈 월드 게임에서 금지된 사랑, 수급(首級) 모으기, 전부 죽이기, NPC의 이상 행동 유발 같은 ‘사문난적’ 플레이를 즐기는 편인데,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는 뒤에 설명하도록 한다.


윤지원 작가는 〈관객에 대한 절대적인 작용〉이라는 비디오 아트에서 "예이젠시테인이 이야기한 유기성과 파토스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견문과 학식이 짧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누군지, 유기성과 파토스란 어떻게 충족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  그 작품 맞은편의 〈무제(관객에 대한 상대적인 작용)〉에서는 한국이나 홍콩을 촬영한 다섯 푸티지가 재생되고 있다. 두 작품 사이에서 아이들은 모래를 만지며 놀고 있었다. 이곳에서 필자의 '반응'은 이것이었다. ― 하품하기. 


모든 '게임적'인 것들이 그러하듯이, 제작자는 플레이어를 완전히 방치하는 않는다. 창작자들은 으레 자신의 메시지를 은근하게 숨겨놓지만, 수용자들이 그 고갱이를 조금씩 맛보고 '얻어가는 게 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팸플릿과 볼펜은 '공략'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지도와 가이드, 카드로 구성된 알찬 전시 팸플릿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전시에서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라는 가이드를 제시한다. 플레이어는 가이드를 통해 자신만의 관람 지도를 그리고, '보상'을 획득하기도 한다. 필자는 어디에도 경고 문구가 없었기 때문에 팸플릿과 볼펜을 집에 가져왔는데 분명히 '얻어가는 게 있'었다. 




인터넷산악회 팀은 다소 적극적으로 '호보연자 심조불산'2) 을 주장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손을 뻗어 전시물을 지우거나 Y/N의 대답을 거쳐 뉴스를 접하게 되는 등 플레이를 통해서 산악회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전시실 2에서 모든 비디오 아트를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산'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이들은 경전철을 타고 북한산에 가면서 "등산이 피식민의 정체성을 뚫고 한 세기 동안 하나의 문화로 뻗어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가리왕산의 원시림이 평창 동계올림픽 알파인 스키 경기 때문에 파괴되는 다큐멘터리도 볼 수 있었다. 배드램(Badlamb)의 〈Gula〉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데,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에디 베더가 연상되는 보컬의 절규와 함께 나무들이 무참하게 잘려 나간다. 여담이지만 이 가리왕산 원시림 문제는 아직 진행형이다. 정선군은 올림픽 이후 가리왕산의 자연생태 복원을 약속했지만, 선수들을 태우던 리프트를 관광용 케이블카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3)


인터넷산악회는 관람객을 전시장 바깥으로 안내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냐면, 가서 보면 안다.




은근히 민중가요 권하는 전시?


전시장 한편에 쌓여있는 흑백 A4 유인물은 공식(?) 팸플릿보다 조금 더 노골적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가이드 이상의 '해법 제시'에 가깝다. 전시장이 어두웠기 때문에 챙겨둔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읽어봤는데, 전시를 어떻게 보면 좋을지 '선동'한다.


어떤 유인물에서는 "정의감이 불탄다"라며 "조용한 곳에서 혼자 들을 수 있다면" 정윤경의 〈시대〉를 들어보라고 한다. 또 어떤 유인물에서는 북서울미술관이 〈상계동 올림픽〉이 촬영된 곳과 가깝지 않으냐며, 다큐멘터리를 보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는 주체로서 서로를 응시하는 거야"라는 "전시를 애니미즘처럼 보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다. 


샘 발로우의 〈이모탈리티〉는 그냥 게임 그 자체다. 인터랙티브 필름으로 플레이어는 수십 년에 걸쳐 기록된 클립을 보면서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그러나 게임의 분량은 10시간에서 15시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관람객은 이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없다. 누군가 패드를 잡고 있을 때 나머지 관람객들은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눈치게임'이다.


 

〈타이틀 매치〉라는 유인물에서는 "게임이라는 것은 블루투스처럼 나와 1:1로 대응한다. 내가 플레이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이용할 수 없다. (중략) 그런 면에 있어 샘의 작업은 충분히 작동한다. 보고 추리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라고 해설한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블루투스의 멀티페어링 기능을 모르고 있나 보다. (농담이다.) 비록 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술관에서 작품 앞에 멈추어서 의도를 추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게임 연구자 제스퍼 율(Jasper Juul)이 내린 게임에 대한 매체적 특성을 미술관과 서울이 동시에 정신을 빼앗아 가는 오늘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게임의 정의는 새로운 게임과 플레이어의 등장, 매체적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빠른 속도로 변화 및 갱신된다. 그러나 게임만이 가질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은 세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첫째 규칙과 장애물이 있을 것, 둘째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를 가질 것이다. 셋째 경쟁 과정을 거쳐 반드시 특정 승부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보상이 있다. 승부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규칙이 있고 장애물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일종의 제의(ritual)와 습관(habit)으로서 미술관에서도 적절한 멈춤과 플레이가 있다."4)


아무튼 시간이 많다면, 이들의 관점으로 전시를 톺아보는 것도 좋다. 필자는 등산스틱으로 TV 전원을 켜느라 10분을 헤맸지만. (끝내 영상을 재생하는 데 실패했다.)




풍선을 불어도, 돌탑을 쌓아도.


안타깝게도 필자에게 이번 전시의 의미를 짚어낼 ‘전문가’적 역량은 없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어떻게 즐겨도 좋은 전시다. 예쁜 풍선을 불어서 가지고 나갈 수 있다. 돌탑을 쌓으면서 소원을 빌어도 좋다. 망원경을 들고 전시장을 둘러봐도 좋다. 


관람 안내문에서 기획팀은 “미술관을 떠날 때 현대미술을 이해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필자 같은 사람은 뒤집어 놓은 변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모든 미디어가 그러하듯이 현대미술이라는 것도 결국 관람객에게 말을 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는 지도와 활동지, QR코드, 대형 스크린, 엑스박스, 전단지, 모래와 돌멩이 등등을 동원해서 말을 걸고 있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상호작용은 시작된다. 오픈 월드에 ‘자유도’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없다.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있지만, 칼 존슨(GTA 산 안드레아스)처럼 자동차를 훔칠 수는 없듯이 결국 프로그램의 한계와 제작자의 의도 안에서 기능하고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호’작용을 완성하는 것은 수용자다. ‘모딩’을 통해서 플레이어가 나름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획팀이 걸고 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떤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플레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해보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7월 9일까지 노원구 북서울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프리 투 플레이로 입장료는 없으며, 부분유료화 BM(비즈니스 모델)은 없다. 월요일은 미술관이 놀기 때문에 관람객이 가서 놀 수 없다. 




 [부록] 필자의 기행 모음


▲ 스마트폰 배터리가 없어서 지도를 읽는 척하고 잠시 충전했다.

▲ 1층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 오는데, 뭐라는지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 확인 결과, 발신은 막혀있었다.

▲ 풍선을 불다가 터뜨리고 말았다. 온 전시장에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실수에 가까웠지만 묘한 쾌감이 들었다.

▲ 지우개에다가 낙서를 했다.

▲ ‘전단을 발견한다면 절대 전화하지 마세요’라길래 전화를 걸어봤다. 진짜 있는 번호였다.

▲ 망원경 초점을 전부 풀어버렸다.

▲ 영상이 상영 중인 2층에 이스터 에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속 걸어 다녔다.

▲ 뒤에 사람이 기다리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이모탈리티〉를 플레이했다.5) 

▲ 스티커를 이상한 곳에 부착했다.




1)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소련의 영화감독으로 〈전함 포템킨〉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화의 구조〉(1939)에서 관객을 '엑스타시'로 이끄는 '파토스'를 창작의 기본이 되는 원리라고 주장한다. 
2) 뒤집어서 읽으면 ‘산불조심 자연보호’.
3) 하상윤 (2023. 03. 05.), "원시림 복원 대신 관광용 케이블카... 가리왕산의 비애", 〈한국일보〉
4) 〈왜 악동은, 알고 보면 착한가 ― 미술관과 ‘파라큐레토리얼’〉 작자 미상.
5) 샘 발로우의 〈이모탈리티〉는 스팀에 이미 출시되어있으며 한국어 빌드가 있다. 필자는 그 사실을 알고도 계속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Tags:

북서울미술관, 전시,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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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디스이즈게임 취재기자. 에디터와 치트키의 권능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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