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 Back

똥겜 리뷰를 보는 즐거움

05

GG Vol. 

22. 4. 10.

정식 발매 이전부터 올해의 게임이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타이틀도 막상 플레이해보니 기대 이하인 경우가 있다. 역으로 잘해야 범작 혹은 괴작에 가까우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플레이어 수가 늘어서 흥행하는 게임도 있다. GOTY 여부가 구매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위와 같은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특정 스튜디오의 시리즈는 믿고 구매한다는 말의 맥락도 게임이라는 상당한 시간을 소진하는 활동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둘러싼 즐거움이라는 경험이 소위 갓겜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속칭, ‘똥믈리에’라고 지칭되는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뾰족하게 다듬었기에 회자되는 이들도 있다.     


똥겜 전문 리뷰어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똥겜’과 혼용되서 사용되는 ‘망겜’, ‘쿠소게(クソゲー)’와의 용례를 통한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혹자는 망겜과 똥겜을 동의이음어와 같이 분류하기도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게임을 총칭하는 망겜과 똥겜을 사용하는 맥락은 다른 지점이 있다. 똥겜의 번역어인 쿠소게와도 똥겜이 활용되는 지점은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다. 


* 검색엔진에 뜨는 ‘망겜’에 관한 연관검색어(좌)와 한국인 게이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짤(우)

‘망겜’과 관련된 연관 검색어 중 루리웹에서 파생된 짤, “망겜이 다 그렇죠 뭐”가 가장 상위에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경우 망겜은 처음부터 흥행에 실패한 게임이라기보다 ‘고인물’이 잔존하지만 더 이상 신규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거나 신규 유저의 유입이 없는 상태에서 비슷한 루틴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사용자만 남은 경우를 의미한다. 과거 〈팡야〉를 샷 한 번으로 홀인원하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언의 종류와 각도, 바람의 세기와 거리를 엑셀로 계산했던 사용자들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뿌요뿌요〉의 치가 떨리는 효과음 ‘빠요엔’을 상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검색엔진에 ‘쿠소게’를 쳤을 때  나오는 연관검색어(좌)와 ‘똥겜’과 관련된 연관검색어(우)

쓰레기 게임을 뜻하는 ‘쿠소게(クソゲー)’는 반대인 ‘카미게(神ゲー)’가 함께 거론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통칭 갓겜의 반대로 사용된다. KOTY(Kusoge Of The Year)가 매해 진행되기도 하고, 잡지 소년매거진에서는 역대 쿠소게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별도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악의 쿠소게를 꼽는 것에는 일련의 기준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쿠소게가 그 게임의 형편없음을 성토하는 멸칭인 것에 비해, ‘똥겜’의 관련 검색어는 해당 게임을 골라서 플레이하기 위한 ‘추천’이나 ‘소믈리에’와 결합되어 하나의 단어처럼 활용되는 경우가 눈에 띤다. 별칭 ‘똥겜 메이커’로 더 많이 불리는 〈마인크래프트〉의 맵 256도 연관 검색어에 올라가 있다. 이는 똥겜과 이를 둘러싼 영역이 탐사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똥겜은 단순히 선택지에서 회피하고자 사용하는 수식어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플레이어는 똥겜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물리엔진을 무시하거나 기존 게임 디자인의 법칙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게임을 만드는 일, 그리고 그런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전자의 예시로 〈염소 시뮬레이터〉를 위시한 몇몇 타이틀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로 손꼽히는 스트리머나 리뷰어 역시 적지 않다. 〈슈의 라면가게〉와 같은 쥬니버게임(네이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었던 플래시 게임) 플레이로 흥한 유튜버 ‘선바’는 어른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게임을 계속한다. 플레이어의 괴로움이라는 대주제로 웹툰연재를 이어가는 〈노8리뷰〉는 괴로워하는 ‘노동8호’의 모습 자체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앞서 언급된 똥믈리에의 대표 시리즈인 〈AVGN(The Angry Video Game Nerd)〉은 유튜브라는 매체 자체의 역사에 비등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너드(nerd)’를 화나게 만드는 비디오게임이라는 시리즈 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플레이어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의 법칙을 습득했고 취향을 만들어 가는가를 반대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명력을 표시하는 파라미터가 배경색과 구분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인터페이스, 배경으로 활용될 것이라 예측했던 벽이나 계곡이 닿기만 해도 죽는 장애물로 디자인됐을 때, 스테이지의 구분이 무의미하거나 갑작스럽게 난이도가 올라가는 경우, 저장이 되지 않아 지루하게 처음 스테이지를 반복하게 만드는 안일한 게임 디자인으로 플레이 시간을 늘리는 경험마다 너드는 단말마의 비명과 같은 욕을 내뱉으며 맥주를 들이킨다.  


〈AVGN〉을 시청하는 즐거움의 맥락은 복합적이다. 초창기 가정용 게임기 시절부터 콘솔게임을 즐겨온 플레이어는 다양한 콘솔기기와 주변 기기를 함께 소개하면서 당시 게임 플레이의 경험과 유통된 플랫폼, 콘텐츠로서 소비했던 문화를 상기한다. 게임다운 게임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게이머라면 사야한다고 광고했지만 주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콘솔에 대한 리뷰나 최악의 게임을 구분할 때 거론되는 똥겜지수(Shit Scale) 레드에 이름을 올린 〈배관공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홍콩 97〉에 대한 리뷰는 게임 문화사의 야사(野史)에 해당한다. 영화와 같은 연애시뮬레이션을 표방했으나 동영상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배우가 연기한 스크린샷만 감상하게 만드는 〈배관공은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횡크스롤에 도트방식으로 디자인된 재현 방식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식하기까지 실패 과정을 보여준다. 이 똥겜을 플레이하는 너드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게임 문화사가 누적해 온 게임다움이라는 척도를 시청자가 충분히 내재화했기 때문이다.    

리뷰를 보는 즐거움은 단순히 똥겜을 ‘똥’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오기도 한다. PS4용으로 만들어졌지만 500메가의 용량을 자랑하는 슬림한 게임 〈라이프 오브 블랙 타이거〉에 대해 너드는 대나무와 하이에나 똥 같은 것으로 만든 컴퓨터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농담을 한다. 그가 게임의 형편없음에 분노할 때 사용하는 비유에서도 똥은 다양한 변주로 활용된다. 오프닝 화면에서도 콘솔에 똥을 붓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구독자에게 단순히 웃기는 요소일 수도 있고 불편한 방식의 재현일 수도 있다. 


똥을 언급하는 농담과 욕설뿐만이 아니라 똥이라는 물질 자체를 다루는 방식도 이중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혐오와 은닉하기, 숭배와 카타르시스의 경험으로서 배설을 다룬 역사는 유구하다. 하지만 의학과 약학, 신앙과 같은 큰 범주에서 똥이 활용되던 양상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아는 부모에게 자신의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똥을 선사하고, 양육자는 그 행위를 기뻐하고 칭찬한다. 그러나 의무 교육기관에서 용변을 보는 용도로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놀림의 대상이다. 이는 위생을 학습하고 관리, 감독한다는 명목으로 학교 화장실 문의 형태가 위아래 공간을 비워둔 모양이라는 점도 요인일 것이다. 놀림을 피하기 위해 의지력을 발휘해가며 학교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 이라도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맥락 없이 거론되는 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웃는다. 사회인이 된 커뮤니티 애호가는 회사 화장실을 쾌변의 장소로 사용하는 상황을 트위터나 익명 게시판에 올린다. 혹은 이와 같은 트윗이 게시된 것을 읽으며 실소한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넘나들며 똥은 농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다. 


똥겜 리뷰를 보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 역시 양가적이다. 똥겜 리뷰를 보는 사람은 똥겜을 플레이하지 않는다. ‘본다’는 행위는 ‘구경’의 요소와 ‘관음’의 요소를 상호적으로 환기한다. 구경이 집합적이고 비관여적인 시각 행동이라면 관음은 개별적으로 이뤄지며 적극적으로 시각을 내재화한다. 이 두 요소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유튜브를 통해 전시되는 게임 리뷰는 플레이어의 거듭되는 실패와 이로 인한 분노를 극적인 요소로 분절해서 표현한다. 이를 시청하는 경험이 즐겁다면 그것은 똥과 같은 용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너드의 (비유적 의미로서의)배설을 시청하는 이의 감각과 병치하는 것에서도 오는 쾌감일 수도 있다. 동시에 과장되게 표현하는 너드의 좌절을 관여하지 않고 조망하는 것에서 오는 폭소이기도 하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게임 플레이를 보면서 향유하는 즐거움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은 총체적인 상으로서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는 지점과 상당히 닮았다.   


Tags:

글이 맘에 드셨다면 ​공유해보세요.

이경혁.jpg

(성균관대학교 강사)

패미콤을 화목한 가족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광고한 덕분에 게임의 세계에 입문했다. <저스트댄서> 꾸준러. 『81년생 마리오』, 『게임의 이론』, 『미디어와 젠더』 등을 함께 썼다.

이경혁.jp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