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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게임과 기이한 유령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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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4. 8. 10.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물론 다들 이것이 꽤나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령은 수많은 비디오게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시리즈의 부끄부끄부터 「F.E.A.R.」 시리즈의 알마까지, 비디오게임에는 다양한 아이코닉한 유령 캐릭터들이 존재한다.


다만 질문은 단순히 ‘유령 캐릭터가 있느냐’로 한정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과연 ‘유령성’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가령, 「홈 스위트 홈」의 악령 ‘벨’과 「파피 플레이 타임」의 괴물 ‘허기우기’는 구분되는가? 이들이 각기 다른 개념의 존재로 인식되는가? 두 존재는 큰 틀에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둘 모두 플레이어 캐릭터를 인식하고, 추적하며, 접촉하면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말하자면 비디오 게임에서의 유령은 대체로 물리적 존재인 괴물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가장 오래된 유령, 「팩맨」의 네 유령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바꿔말하면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그 탄생부터 ‘접촉’을 기반으로 하는 물리적 오브젝트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질문은 크게 우회해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비디오게임에서 유령은 괴물과 구분될 수 있는가? 또는 비디오게임은 유령성을 가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비디오게임에서의 유령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유령과 접촉의 모순적 메커니즘


유령이란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 지점, 접촉과 접촉 불가능성의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령이란 물질적corporeal이면서도 비실체적incorporeal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벽을 투과하고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때때로 물건을 건드리고 소리를 발생시킨다. 유령이란 볼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물성을 초월한다.


앞서 말했듯 비디오게임의 유령이란 이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순적 개체들이다. 이 유령들은 언제나 플레이어 캐릭터를 향해 돌진하고, 그들과의 접촉을 위해 활동한다. 그들은 엄밀히 실존한다. 카메라로 악령을 퇴치하는 「령~제로~」 시리즈의 가장 대표적인 전략은 ‘공격당하기 전에 쓰러뜨린다’이다. 여기서 악령의 공격이란 접촉의 메커니즘을 전제한다. 플레이어는 그들이 ‘접촉해오기 전’에 촬영이라는 비실체적 공격으로 쓰러뜨려야 한다. 이는 전적으로 아이러니다. 여기서 물질성을 초월하는 존재는 악령이 아니라 (물질인) 카메라다. 「F.E.A.R.」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구조는 동일하다. 플레이어는 알마가 생성해낸 유령Ghost들을 총을 쏴 제거할 수 있다. 여기서도 차라리, 거리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총이 유령보다 훨씬 초월적이다.


*「제로 : 월식의 가면」

비디오게임의 메커니즘은 (히트박스로 규정되는) 충돌을 전제한다. 결국 이 내부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은 게임적 구조를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있어 그런 조건은 전적으로 ‘글리치’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벽이라는 구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유령적이라기보다는 ‘벽뚫는 버그’를 연상시키며 따라서 불공정의 감각을 초래한다. 비디오게임에서의 물질성의 초월은 그 한계지점의 돌파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위력의 일방적인 우위성에서 온다.


「화이트 데이」의 공포의 핵심은 일방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수위에게서 나타난다. 오히려 물리적 한계지점을 뛰어넘는, 구조와 무관하게 천천히 접근해오는 머리 귀신은, 그 시청각적 특성을 통해 아찔함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머리 귀신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하지 못하기에 그다지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못한다. 차라리 그들이 공포스러운 것은 접촉을 통해 수위라는 물리적 주체를 불러들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머리 귀신조차 아찔한 감각과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접촉이라는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


따라서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전적으로 현존presence한다. 있는듯 하지만 없거나 또는 없는듯 하지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 존재를 가진다는 의미다. 이를 정확히 보여주는 게임이 바로 「파스모포비아」다. 이 게임은 다양한 방법론과 조건들로 어떠한 유령이 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말하자면 이 게임의 목적은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물론 유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편 명백히 오브젝트로써 그 공간에 ‘존재한다’. 게다가 이 게임의 팬덤은 유령이 가진 감각 패턴을 밝혀냈는데, 재미있게도 그 가시범위는 물체에 의해 일정량 차단될 수 있다. 심지어는 유령의 종류에 따라 이동속도나 가속도 여부까지 부여되어 있다.[1] 이 게임에서 유령은 투명invisible하지만 비실체적incorporeal이지는 않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 유령이 초월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철저히 일방적인 실체라는 정도일 것이다.


*「파스모포비아」에서 유령의 감지 범위를 설명하는 이미지 (출처: 레딧)


데리다의 유령론으로부터


한편 유스티나 야닉Justyna Janik은 2019년의 에세이 《Ghosts of the Present Past: Spectrality in the Video Game Object》에서 비디오게임의 유령에 달리 접근한다. 야닉이 끌어들이는 것은 데리다의 유령론hauntology이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존재론ontology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유령론을 도입한다. 그의 정리에 있어 유령은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존재, 과거의 존재이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주는 그리고 미래까지 예시하는 존재다.


야닉은 특히 유령의 몰시간성anachronie[2]을 중심으로 유령론의 적용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차용한다면, 비디오게임에는 오히려 유령을 탄생시킬만큼의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야닉은 이렇게 적는다. ‘게임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는 거의 동시에 제작되는 것 같다.It seems that the game world’s past, present, and future are produced almost simultaneously(...)’[3] 즉 「F.E.A.R.」의 악령 캐릭터 알마는 유령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거는 어디까지나 게임 외적으로 설정되어진 과거에 불과하다. 알마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뛰어들고 마주친 그 순간에 형성된 현재 시제의 존재임이 분명하다.[4] 물론 야닉은 이러한 시간 형성의 동시성을 유령론의 몰시간성과 어느정도 동일시한다. 하지만 선형적 시간의 인과개념이 없다는 것은 압축할만한 시간의 원본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알마가 몰시간성의 존재인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과거조차 없는 존재다.


이것은 비디오게임의 유령 일반에서 반복되는 성질이다. 이 유령들에게 부여된 ‘유령이 된 배경’이라는 사건들은 (야닉이 규정한) 게임 세계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오직 허구적으로 구성된 이유에 불과하다. 결국 플레이어는 과거에 대한 증언, (「바이오쇼크」 등에서 볼 수 있는) 환영, 기록, 때로는 명백히 시각적인 컷씬 등을 통해 그들이 허구적 과거로부터 온 존재임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마주치는 그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시작함과 동시에 발생한 현재의 존재다. 만약 플레이어가 과거를 지시하는 허구적 기록들과 마주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영 현재라는 시간에 묶일 수 밖에 없다.[5]


*「룸」에 등장하는 러스티의 유령

물론 게임 세계의 과거를 통해 생성되는 유령들도 존재한다. 루카스아츠의 「룸」에서 주인공 보빈은 대장장이들의 도시 ‘포지’에 들어가기 위해 포지의 소년 러스티와 모습을 뒤바꾼다. 보빈이 포지에서 활동하던 중, 직전 이벤트에서 보빈에 의해 꼬리에 불이 붙은 검은 용이 포지의 앞에 나타난다. 용은 보빈의 모습을 한 러스티를 발견하고는 잡아먹어 버린다. 나중에 포지에서 나온 보빈은 러스티의 뼈 위에 떠오른 유령과 만난다. 그리고 이 유령은 생전과 달리 분노에 찬 표정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이 장면은 당대 기술적 한계 때문에 썩 공포스럽게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행동이 가져온 하나의 비극으로써 강렬히 각인된다. 물론 러스티의 안타까운 경험은 전적으로 스크립트로 만들어진 것으로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티의 유령은 명백히 게임 세계의 인과가 만들어낸 존재이다. 조금 더 내밀한 유령은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 마주하는 병사들의 유령이다. 보스 중 하나인 ‘더 소로우’는 주인공 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죽음의 환영을 보여준다. 플레이어는 더 소로우를 따라 어두운 강을 거슬러 오르며 지금까지 자신이 죽인 모든 병사들의 유령과 마주친다. 병사들은 플레이어가 그들을 살해한 방식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른 원통함의 대사를 내뱉는다. 러스티의 유령이 결코 회피 불가능한 인과가 만들어낸 유령이라 한다면, 병사들의 유령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른 결과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령들은 지난한 역사의 표출물이 아니라 단기적인 감각적 대상물로써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6] 이것은 야닉이 말한대로 비디오게임의 게임 세계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이 표출하는 게임 세계의 역사란 극도로 짧기에 무언가의 기표가 되기엔 지나치게 순간적인 셈이다. 그 정도의 역사는 그저 현재라는 시간에 귀속되어 버린다.



기이한 유령들


이렇듯 비디오게임의 유령이란 (1) 물성을 가진 실체의 존재이며 (2) 과거로부터 오지 않은 현재의 존재다. 따라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란,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괴물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크 피셔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제시한 기이함과 으스스함의 개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마크 피셔는 이렇게 적는다.


“나는 기이한 것The weird이란 특정한 형태의 동요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포함된다. 기이한 존재 혹은 대상은 너무나 이상해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혹은 적어도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7]


“으스스한 것The eerie은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질문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때에 여기 어째서 무언가 있는가? 무언가 있어야 하는 때에 어째서 여기 아무것도 없는가?”[8]


우리의 관점에서 기이함이란 괴물의 것이며 으스스함이란 유령의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어째선지 계속 기이한 것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비디오게임의 유령들은 움직여서는 안되지만 어째선지 움직이는 「프레디의 피자가게」의 인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어딘가 잘못된 존재들이지만(「슈퍼 마리오」의 부끄부끄는 다른 적들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가진다.) 철저히 존재감을 가진다(킹 부끄부끄의 존재감은 지나치다.).


비디오게임의 유령은 왜 기이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가? 가장 쉬운 답이라면 비디오게임이 직관적 감각의 영역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디오게임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은 쉬이 존재할 수 없다. 그곳은 설령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 하더라도 그 데이터가 공간 내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곳이다. 결코 없어야 하는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히려 이 규정을 넓혀본다면 다른 결론과 마주할 수도 있다.


진정 없어야 하는데 존재하는 것, 있어야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비디오게임의 본질적 속성이지 않는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존재하는 세계, 만져지지 않음에도 만져지는 디지털의 물성은 그 자체로 으스스한 것에 속한다. 즉, 비디오게임이 바로 으스스한 것이다. 그리고 비디오게임의 세계가 으스스한 세계라면, 그 내부에서 따로 으스스한 것이 존재할 수는 없다. 비디오게임의 내부에서는 모두가 유령이다. 그곳에서 따로 유령적인 것이 존재하는 지 묻는 것 자체가 곤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하다가 사망했을 때, 혹은 「어몽어스」를 하다가 빠르게 처형당했을 때, 즉시 유령의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는다. 이 전환이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신묘한 영적 세계의 탐구 같은 것은 없다. 전의 존재와 후의 존재 사이에서 어떠한 상태의 전환이 발생한 것일 뿐이라면, 사망하기 전에도 유령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애초에 비디오게임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영적 세계다. 우리가 컨트롤러를 조작하지 않는다면, 그 껍데기(=플레이어 캐릭터)는 마치 영혼없는 골렘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다. 플레이어 주체가 그들의 육체에 들어가는 영적 존재나 다름 없다. 적의 육체에 빙의해 싸우는 아케이드 게임 「판타즘」이나 다양한 물체에 빙의해 퍼즐을 풀어가는 「고스트 트릭」은 어떤 면에서 메타적 비디오게임처럼도 보인다.


*「고스트 트릭」

결국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영적인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존재하는 오브젝트로 가득 차 있다. 활기찬 NPC들로 가득찬 오픈월드 게임의 도시를 보는 것은 허크 하비의 「영혼의 카니발」을 관람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유령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 곳에는 인간 육체를 통해 만들어진 유령은 없으며,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유령이다. 여기서 특별히 더 유령으로 규정될 존재는 없다. 차라리 이곳, 비디오게임의 세계를 유령과 괴물의 세계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순간이동같은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단어 anachronie의 번역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역자인 진태원의 번역을 따른다.
[3] Justyna Janik, 《Ghosts of the Present Past: Spectrality in the Video Game Object》,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Games, 2019, p9
[4] 야닉은 이 개념의 설명을 위해 게임의 세계를 두 개의 층위로 나눈다. 하나는 게임의 서사 부분을 결정하는 허구적 세계fictional world이며 또 하나는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접촉하는 게임 세계game world이다. ‘첫 번째 층위는 게임으로 표현되는 캐릭터, 사물, 장소, 사건의 디제이시스적 영역인 허구의 세계다. 두 번째 층위인 게임 세계는 비디오 게임 오브젝트의 물성에서 비롯된다.The first layer I will consider is the fictional world – the diegetic domain of characters, objects, places and events that is represented by the game. The second layer, the game world, emerges from the materiality of the video game object.’ (같은 책, p2)
[5] 야닉은 허구적 세계와 게임 세계라는 두 층위의 긴장이 데리다적인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시간의 개념 뿐만 아니라 허구적 세계에서 의미론적인 효과가, 게임 세계에서 디지털 물성의 효과가 나타나 중간자적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닉이 서술하는 효과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허구적 세계의 층위가 긴장을 형성할 만큼 충분히 도드라지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디지털 물성을 감각하면서 의미론적 층위와 마주하지 못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며, 그 경우 과거는 없는 것과도 같다.
[6] 「룸」에서 보빈은 러스티를 되살린다. 러스티의 유령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7]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구픽, 2019, p20
[8] 같은 책,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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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만화와 게임, 영화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합니다. MMORPG를 제외한 <파이널 판타지> 전 시리즈 클리어가 라이프 워크입니다. 스팀덱을 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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