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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X를 찾아서] 체력과 기회

06

GG Vol. 

22. 6. 10.

디노미네이션


오랜 와우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0년대 초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60레벨 만렙 체력은 대략 4천 대 근처였다. 캐릭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풀 파밍이 완료된 탱커도 1만을 넘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이 좀 지나 같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체력은 지나간 시간과 비례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14년 출시된 확장팩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에 이르면 10만 단위의 체력도 보기 드물지 않은 상황을 맞았는데, 이때 블리자드는 능력치 압축이라는 이름의 디노미네이션을 결정했다.


디노미네이션은 게임 안에서 작동하는 스탯들을 동일한 비례식 하에 전반적으로 낮추어 잡는 변화를 가리킨다. 특정 패치를 기점으로 게임 내의 모든 스탯들, 레벨, 캐릭터의 체력과 공격력, 마나량과 회복량, 몬스터의 체력과 공격력 같은 전반적인 수치가 일제히 하향조정되었다. 물론 상호작용하는 모든 수치가 함께 하향된 터라 전체적인 게임의 밸런스가 크게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언제 하향했냐가 무색하게 이어지는 패치를 통해 다시금 게임 내의 모든 수치들은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 플레이어는 지속적으로 과거보다 더 강한 적과 맞서 싸운다는 감각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이룬 승리는 경험치와 레벨, 아이템이라는 보상을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누적되며,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는 또다시 다가오는 더욱 강한 도전에 맞서는 구조 안에 선다. 플레이 이력이 서버에 기록되며 마치 플레이어의 소유물인 것처럼 인식되는 온라인 기반의 게임이 지속되는 한, 이 영원한 우상향의 그래프는 지속될 것이다.



체력과 기회


디지털게임에서 체력의 근원을 거슬러올라 생각해보면 ‘기회’라는 개념에 맞닿을 것이다. 체력 개념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초창기 아케이드 시절에도 난이도 – 숙련도의 대결 안에는 도전기회라는 규칙이 존재했었다. 제시된 난이도를 향한 도전의 의미는 실패의 가능성이 있을 때 발생한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에서 외계인 무리가 지상에 닿을 때, 〈팩맨〉에서 식탁보 유령에게 붙잡힐 때, 〈테트리스〉에서 쌓인 블록이 천장에 닿을 때 맞는 게임오버의 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플레이어는 분투하며 클리어를 향해 달려나간다.


한 판의 플레이는 그러나 한 번의 기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소프트웨어마다, 혹은 아케이드나 콘솔 기기의 설정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한 판의 게임에는 일정 숫자의 도전기회가 주어졌다. 잔기, 생명 등으로 표현되었던 이들 도전기회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던 간단한 숫자의 기회였고, 기회의 상실은 작은 규모의 리스타트 – 플레이가 이어지지 않고 실패 후에 다시 리트라이되는 방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체력 개념은 기회의 부여 차원에서 이 실패 후 리트라이를 좀더 연속적인 감각으로 바꿔낸다. 이를테면 벨트스크롤 액션게임 〈골든액스〉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1개의 생명당 총 3개의 체력 바를 가지고 나오는데, 적의 공격을 받으면 체력 바가 하나씩 줄어들고 체력 바가 0이 되면 하나의 라이프가 날아가는 방식이다. 이때 도전기회, 다시말해 허용되는 실수의 수는 체력바 X 생명 수로 나타난다. 3개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했다면 클리어까지 허용되는 피격의 수는 총 9번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과 라이프는 그 실패의 결과 면에서 연속성이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피격당했지만 생명이 줄지 않는 경우에는 말그대로 체력이 깎이면서 나타나는 약간의 경직과 넉백 정도에 머무르지만, 캐릭터가 사망한 경우에는 아예 새로 캐릭터를 출현시키면서 생명을 깎는 연출을 보여준다. 같은 기회지만 체력  생명으로 이어지는 점층적인 구조를 통해 실패의 패널티는 다르게 기능한다.


〈파이널 파이트〉에 이르면 이제 체력은 바bar로 표시된다. 적의 공격은 모두 동일한 1회의 피격이 아니라 적과 공격의 유형에 따라 다른 수치의 피해를 플레이어의 체력에 입히는데, 이때부터는 그 피해량을 숫자로 매기는 대신 일종의 인포그래픽인 체력바를 통해 표현한다. 플레이어는 정확히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히고 입는지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너구리〉에서 한 번만 압정을 밟아도 게임오버되던, 가벼운 숫자의 도전기회는 체력 바라는 표현의 시대에 이르면서 점차 실패와 도전의 관계를 좀더 연속적인 변화량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동시에 보너스 점수 등을 통해 추가 도전기회를 받을 수 있었던 방식 또한 체력 바의 시대에는 숫자로 표기되는 점수 대신 음식, 약물과 같은 체력과 상관관계를 이루는 아이템을 획득해 받은 피해를 복구하는 은유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체력 바의 시대에 이르면 도전과 기회는 횟수가 아닌 게이지로서 좀더 연속적인 형태의 기회로 변화한 것이다.



방향성이 아니라 표현의 다변화


횟수로서의 기회가 체력이라는 형태의 연속적 기회로 변화한 데에는 일정부분 컴퓨팅 기술의 발전 또한 기능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서두에 언급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디노미네이션 사례와도 통하는데, 디노미네이션의 이유로 당시에는 과도하게 상승한 수치 때문에 개별 컴퓨터의 연산능력이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된다는 점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8비트 시대의 컴퓨터로는 아무래도 연속적인 기회로서의 체력 연산보다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규칙이 우선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디지털게임의 규칙은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TRPG와 같은 아날로그 게임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이를테면 대전격투 게임에서 타격과 피격의 순간 각각의 행동에 맞추어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해 실시간으로 반영해 결과에 반영하는 게임규칙을 가능케 하면서도 동시에 연산력과 같은 제한에 의해 생명, 체력과 같은 다른 양식의 도전기회를 규칙화하는 영향력을 동시에 발휘한다. 


그러나 이 변화의 방향은 반드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당장 오늘날의 전투형 게임들은 도리어 방대해진 체력량을 새로운 연출요소로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타격감(이 개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을 위한 연출에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꽂아넣는 피해량이 막대한 숫자로 표기되는 방식이 들어간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체력 바는 자세히 보면 전체 체력 바의 총량을 100%의 길이로 두되, 레벨업과 아이템을 통해 향상되는 체력의 수치를 체력바 사이에 일정 단위로 표기되는 눈금을 통해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늠할 수 있게 한다. 


MMORPG에서 나타나는 수치의 우상향도 다른 장르에서는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매 게임마다 다시 리셋되는, 서버에 레벨과 경험치가 축적되지 않는 순환형 시간에 놓인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플레이할수록 나의 캐릭터가 강해진다’는 전제가 희미해지기 때문에 체력의 절대값은 반드시 우상향하지 않으며 고정된 최대값 – 최소값의 범주 안에 위치한다. 이처럼 도전기회라는 규칙은 기술과 환경, 노하우의 변화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기보다는 더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확보하며 다양화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강해지지 않는다


서두에 언급한 디노미네이션의 사례와, 세부적인 규칙연산의 결과를 플레이어에게 데이터로 보여주느냐 혹은 연속적인 기호를 통해 보여주느냐의 문제의 기저에는 결국 난이도 – 숙련도 길항이라는 디지털게임의 근본적인 갈등구조 자체에는 크게 변화하지 않아 왔다는 전제가 있다. 


난이도 – 숙련도 길항에 관여하는 데이터값들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력이 1천만!’, ‘체력이 500만!’같은 숫자 크기가 아니다. 100만에서 99만 9,999를 뺀 1이라는 값, 난이도와 숙련도가 주고받은 그 연산의 결과값이 길항의 의미이자 결과물이기에 체력과 공격력은 동시에 하향될 수 있다. 최근 모바일게임 광고에서 ‘플레이어의 강함’을 어필하기 위해 보여주는, 막대한 공격력을 뽑아내는 장면이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 플레이를 통해 정말 강해지는 것은 아마도 플레이어의 몸에 쌓이는 숙련도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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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유년기부터 게임과 친하게 지내왔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이야기를 업으로 삼은 것은 2015년부터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오다 일련의 계기를 통해 전업 게임칼럼니스트, 평론가, 연구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게임의 이론』(2018), 『슬기로운 미디어생활』(2019), 『현질의 탄생』(2022) 등의 저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9) 등의 논문, 〈다큐프라임〉(EBS, 2022), 〈더 게이머〉(KBS, 2019), 〈라이즈 오브 e스포츠〉(MBC, 2020)등의 다큐멘터리 작업, 〈미디어스〉'플레이 더 게임', 〈매일경제〉'게임의 법칙', 〈국방일보〉'전쟁과 게임' 등의 연재,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팟캐문학관'과 같은 여러 매체에서 게임과 사회가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한다.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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