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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협곡에서 - <당신엄마가 당신보다 잘 하는 게임〉에 부쳐

05

GG Vol. 

22. 4. 10.

평등한 게임이라는 환상 

 

사람들이 게임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공평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모니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그가 제때에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은 인종, 성별, 계급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과 그것을 위해 쏟는 노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던 시절 즈음에 유행하던 “전자민주주의”라는 장밋빛 구상, 즉 익명성을 전제로 하는 온라인에서는 모두가 계급장을 떼고 의견 대 의견으로만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의 게임 버전이었다. 


이런 주장은 다양한 이유로 게임에 접근조차 어려운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극 빈곤층 등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를 이미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간 많은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어린 고수들에게 게임의 도道를 사사 받은 풋내기 성인들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어쨌거나 게임의 세계에서는 게임 잘하는 사람이 최고라는 사실은 유효하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은 오늘날 게임을 잘한다는 것의 의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환경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재능하나로 돌파하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지는 따져볼 일이다. 


데이터 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념을 배반하는 데이터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령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NBA(전미농구협회)를 가난한 흑인들이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의 장으로 여긴다. 하지만 정작 데이터는 반대다. NBA는 점차 중산층 이상의 배경을 가진 선수들로 채워지고 있고, 그들이 가난한 선수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저자는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양육된 아이들이 좋은 영양 상태를 유지하면서 더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규칙을 지키는 등의 사회적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1). 


‘게임을 누가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이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에는 무시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게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것을 놔두는 것은 책임방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런 개입들은 필연적으로 게임을 더 돈이 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Pay to win이라는, 돈을 많이 낼수록 강해지고 승리하는 게임들의 승승장구와, 하나의 게임을 잡다하게 쪼개서 팔아치우는 부분유료화의 전면화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게임들이 있다. 하지만 자녀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신형 컴퓨터를 사주고 프로게이머 학원에 보내주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게임계에서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인성’논란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한 문제들은 앞선 예처럼 교육과 양육환경의 문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프로스포츠들에 비하면 아직은 덜 체계화 되어 있을 수는 있지만, 만약 e-sports가 진짜로 다른 인기 스포츠들만큼의 위상을 획득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프로게이머가 되려고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경쟁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뉜다. 무엇보다 이런 것들은 티어로 알 수도 없고, 반영되지도 않는다. 



엄마가 모욕이 된 세계 


오늘날의 인터넷이 그렇듯이, 게임은 익명성을 기반으로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는 무차별적 모욕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모욕하는 것이니 그것 또한 평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욕이 진짜로 ‘무차별적’인지는 살펴봐야 한다. 박서련의 단편 소설인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2)은 동명의 소설집의 표제작이다. 소설은 무용을 전공할 뻔하고, 외국계 게임회사에 다니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은 중산층 가정주부인 ‘당신’3)의 이야기를 다룬다. 


초등학생인 아들은 게임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아이에게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부모인 당신은 고민 끝에 게임과외를 떠올린다. 최초로 찾아온 것은 명문대를 다니며 챌린저 티어인 남자 대학생이다. 그는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나무라며 부모라도 아이가 하는 게임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니 자기가 가르쳐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게임을 가르쳐 주겠다던 그는 그걸 빌미로 손을 잡고 가슴에 팔꿈치를 갖다 대며 성추행을 한다. 이제 어리지로 순진하지도 않은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고, 단호하게 그를 내쫓는다. 불쾌감을 뒤로하고 새롭게 만난 과외선생은 다이아 티어의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이다. 당신은 그에게 여성적 매력이 없음을 안도하며 아이의 과외선생으로 낙점하지만, 그는 아이가 아니라 당신이 게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선생의 등쌀에 떠밀리듯 당신은 게임을 시작한다. 그런데 당신은 놀랍게도 재능이 있었다. 당신은 승리를 쌓아가며 오랜만에 온전한 성취감을 맛본다. 


순식간에 아이의 티어인 브론즈를 넘어 골드에 진입한 당신은, 때마침 아이의 라이벌이 아이와 전교회장 출마를 두고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신은 불신하는 아이를 이겨 실력을 입증하고, 아이의 라이벌을 게임으로 불러내 보기 좋게 압살해버린다. 하지만 사실 게임을 그다지 잘 하지도 못했던 아이의 라이벌은 패배에 승복하지 않고 아이의 계정에 접속해 있는 당신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알게 된다. 게임에서 ‘엄마’는 그 자체로 욕설로 받아들여지고, 당신이 엄마라고 타이핑할 때마다 ‘XX’가 그것을 대체한다는 것을. 아이의 라이벌은 계속해서 우회적으로 너희 엄마를 외치지만, 게임은 엄마인 당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이긴 것은 당신이지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며 패배감을 맛본다.



게임, 엄마, 여성 


이 소설은 여성과 게임의 관계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례들을 엮어 한편의 악몽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악몽은 엄마의 것이다. 소설 속의 ‘당신’은 새로운 세대의 교육받은 엄마이고, 자녀 양육에 관한 최신의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는 중산층이다. 훈육과 금지보다 이해와 도움을 통해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고, 과도한 애정관계를 형성해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소위 깨인 엄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은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은 아이의 미래를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고,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이는 의존적이고 버릇없게 자라고 있다. 당신은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고 모든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는 미숙한 어른임에도, 자신이 아이를 빈틈없이 케어하고 있다는 허위의 자족감에 빠져 있다. 따라서 소설은 엄마인 당신을 온전한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당신은 당신이 빠져있는 함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심지어 공모하고 있는 존재에 가깝다. 


게임문화에서 엄마의 표준적인 모습은 당장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는 존재이지만, 소설 속의 당신은 이런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녀의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조망하고 싶어 하는 욕망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게임에 직접 뛰어들게 되는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지든 방임이든 개입이든 간에 게임은 엄마들에게 불안의 영역이다. 그것이 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담론이나 연구들은 온전한 논의가 아니라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말하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때문에 엄마들은 대부분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게임에 맞서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이런 역할들을 엄마가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양육과 돌봄이라는 문제가 엄마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일’로 여겨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삶이 평가되는 종류의 문제이다. 하지만 학업성적이나, 일의 성과 같은 것에 비해 양육은 지극히 평가가 어렵다. 사회적으로는 아이가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소득 직업을 갖는 것 정도가 성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결국에는 엄마의 잘못이 되고야 만다. 


이 함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양육의 책임을 모든 가족과 사회에 실질적으로 분산하고, 엄마들에게 합당한 사회적 인정과 자리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엄마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지운다. 직장에서는 자기만 조직에 헌신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이며, 밖에서는 이기적인 ‘맘충’이고, 가족들에게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엄마이자 아내다. 게임에 대한 ‘엄마’들의 적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방어적인 반응이다. 자신의 의무는 아무것도 줄어든 것이 없는데, 남편과 자녀가 시간과 돈을 게임이라는 잘 알지도 못할 것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의 악몽은 여자에 대한 것이다. 게임에서 가장 심한의 모욕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여성형이다. 게임을 못한 것이 남자일지라도 욕을 먹는 것은 애꿎은 엄마와 전국의 아무 상관없는 ‘혜지’들이고, 평생을 모쏠로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남자친구 따라서’ 게임을 시작한 줏대 없는 게이머 취급을 당한다. 


그런가하면 많은 남자게이머들이 여자게이머를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여긴다. 엄마, 선생님, 여가부(!)처럼 여자는 게임을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게이머 여성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저도 그 여성은 나보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며, 게임을 ‘가르쳐’줘야할 존재일 것이라는 가정이 붙는 경우가 대다수다. 게임을 잘하는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실력은 언제나 ‘합리적 의심’에 휩싸이고, 폄훼당하기 일쑤다. 자신이 그 여성게이머보다 게임을 못하더라도, 게임실력을 의심하고 훈수를 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남성게이머들이 넘쳐난다. 


게임문화의 공식적인 입장은 ‘게임만 잘하면 되지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이지만, 이것으로는 게임문화 전반에 넘쳐나는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딜루트는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에서 많은 게임커뮤니티의 주류담론들이 모두를 동등한 게이머로만 대해야 하며, 친목질을 방지하고 성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드러내선 안 되는 성별은 오직 ‘여성’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라고 지칭하고, 여성 게이머 이슈에서는 입을 모아 조롱하기에 바쁘지만 그런 것에 문제를 제기할 때 만 “남자건 여자건 그냥 각자 게임을 하면 그만”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4)

 

최근 몇 년간에 걸쳐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게임업계의 성차별, 남성중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아시아시장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런 흐름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게이머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의 책임 있는 단위들이 하다못해 말이라도 차별에 대한 반대를 뚜렷하게 표하는데 반해, 한국과 아시아는 모든 것을 소비자-게이머들의 뜻이라며 회피하기에 바쁘고, 거기에서 힘을 얻은 일부 남성게이머들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앞장서서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렇듯 오늘날의 게임문화는 엄마에게도 여성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이 이렇게 특정한 남성 집단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새로움도 품을 수 없음을, 그래서 결국에는 고립되고 도태될 것임을 예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당신’은 게임을 통해 그간 얻지 못했던 승리감을 맛본다. 그가 현실에서 다뤄야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고, 끝나지도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나 게임은 짧은 시간동안 승리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당신은 패배 역시 기뻤을지 모른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조차 없는 세상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판정을 내려주고, 심지어 언제든지 다시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였다. 게임은 이미 현실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로 침식되어 있었고, 게임은 그를 “XX”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임의 세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 할 수 없고, 현실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협곡에서도 똑같은 기울기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는 게임에서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의심하며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는 게임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지겨워진다. 왜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 기어코 현실의 가장 나쁜 것들을 끌고 들어오고야 마는가? 왜 누군가를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리는 것에서 음침한 즐거움을 얻는 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녀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게임하는 것 대신에 진짜게이머와 가짜게이머를 구분하는 의미 없는 언쟁에 휘말려야 하는가?


게임은 가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지만,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은 우려스럽다. 더 약탈적인 비즈니스모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지와 무시, 독성을 가득 머금고 여성과 소수자를 혐오하는 커뮤니티문화. 이 흐름들을 멈출 수 없다면, 게임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우리와 닮은 ‘게임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더 손을 쓰지 못하게 되기 전에 게임을 되찾자. 이 모든 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1)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모두 거짓말을 한다》, 더 퀘스트, 2018.  
2)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3) 당신은 이름이 아닌 2인칭 대명사이다. 
4) 딜루트,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동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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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사회학연구자)

지은 책으로 《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설명서》, 《한국, 남자》, 《잉여사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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