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의 탄생, 새로운 플레이의 탄생: 〈현질의 탄생〉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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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Vol.
22. 12. 10.
놀이란 본래 아무것도 (경제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무언가였다. 디지털 게임(이하 ‘게임’)은 놀이라는 맥락에 디지털 기술이 덧붙으면서 탄생했다. 놀이와 디지털 기술의 접합으로 가상공간에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놀게끔 만든 것이 게임이다. 하지만 게임이 지닌 폭발적인 가능성에 주목한 산업자본의 개입으로 게임도 산업화된다. 이제는 일부 예술적 실험들을 제외하면 게임은 대부분 엔터테인먼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상품이자 서비스이다. 게임이 상품이자 서비스라는 말은,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일종의 대가를 지급해야 함을 의미한다. 게임을 개발하고 유통하는 데 크고작은 비용이 드는 만큼 플레이어들의 대가 지급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게임 자체가 달라지기도 하고 플레이어들의 반응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광고를 보든,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든, 현금으로 결제를 하든 게임 플레이에 대해 대가를 지급하는 것은, 게임사-게임-플레이어 간 경합의 영역이 된다. 이경혁의 신간 〈현질의 탄생〉은 그 영역 내 양상과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텍스트다.
책은 크게 2부로 구분된다. 각 부별 분량도 거의 비슷하다. 1부에서는 먼저 게임의 ‘결제사(史)’를 다룬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서 (하지만 가끔은 해외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게임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결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핀다. 결제는 게임 공간, 플레이어의 실력과 같은 ‘게임 밖’, 그리고 난이도, 장르와 문법, 플레이 타임과 같은 ‘게임 안’의 요소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살피기 위해 저자는 두 축을 구분틀로 삼는다. 한 축은 게임 플랫폼이다. 아케이드 게임에서부터 가정용 콘솔게임, PC 게임, 온라인 게임, 그리고 모바일 게임에 이르기까지 플랫폼의 등장시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다른 한 축은 결제와 관련된 요소들로, ‘대여-구매·소장-불법복제’, ‘물리적 매체 구매·소장-디지털 (소프트웨어) 다운로드-스트리밍’, ‘무료-정액결제-부분 유료결제’와 같이 여러 기준에 따라 본문에 따로 또 같이 등장한다. 이처럼 플랫폼의 축을 결제와 관련된 여러 축들과 교차시키며, 결제가 게임에서 갖는 의미들을 다양하게 논의하는 것이 1부의 대강이다.
2부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질 이야기가 시작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강한 반발을 사지만 한국 게임이 역대급 매출 및 이용자 수를 기록하고 있는 모순적이거나 양가적인 상황이, 현질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입을 뗀다. 현질은 일차적으로는 현금(現金)의 ‘현’과 접미사 ‘-질’의 합성어로, 게임 내 캐릭터, 아이템, 재화 등을 현금으로 사는 행위를 낮잡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는 특정 결제방식을 현질이라고 부를 때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이 결제가 실제 게임 플레이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와 ‘그러한 결제가 사실상 강제되는가’임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경쟁하는 온라인 게임 안에서 부분유료결제를 통해 게임 내적인 승패나 우열의 관계에서 확실한 우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결제가 만드는 우위가 매우 확고하고 넘어서기 어려워서 게임을 플레이할 때 그 영향력이 크다면, 그것이 현질’이라고 조작화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현질이 플레이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결제방식은 현질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의 승패를 결정하는 특정한 결제양식은 게임 내부의 변화, (저자가 문제적 상황으로 인식하는) 자동전투와 확률형 아이템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먼저, 자동전투의 배경에는 무한히 영속하는 게임시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과정이 필수적으로 자리한다. 경쟁에서 게임 플레이를 자동으로 유지하는 행위는 그보다 훨씬 더 간편한 해결책인 경험치와 아이템을 유료로 구매하거나 부스트하는 현질과 선택적 상호관계를 이룬다. 또, (과도한) 확률형 아이템은 유용한 아이템이나 기능을 순수하게 구매할 수 없게 하고 오직 확률형 아이템으로만, 그것도 아주 낮은 확률로 뽑히도록 만듦으로써 플레이어가 많은 지출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현질과 자동전투-확률형 아이템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지점이 이렇게 나타난다.
현질이 놀이로서의 게임 플레이에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라 치부하고 그것을 멀리하자고 말해버리면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현질을 유도하거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게임산업의 전략이 아주 은밀하면서도 치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이 알게 모르게 게임산업의 상업적 팽창과 지속에 복무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현질의 자장 속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이제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플레이 현장에서 게임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전통적 플레이에서 난이도와 숙련도 사이의 길항은 이제 게임 텍스트와 플레이어 사이의 독립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고난이도 상황에 대해 숙련도가 미치지 못하더라도, 현질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 이용자와 규칙이라는 전통적 플레이 상호작용은 그렇게 현질로 인해 계속 침범받는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러한 상황을 두고 현질에 기반한 플레이는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고 비난하지만, 저자는 현질의 시대 게임 플레이를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기보다는 새로운 플레이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질 플레이를 진정한 플레이가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현질에 매달리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전통적인 게임 내 플레이를, 게임 외적인 납금행위와 연결함으로써 플레이 개념 자체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 논의를 끌어가기 위해 ‘납금 플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납금 플레이란 ‘플레이어가 게임 규칙 안에 존재하는 아이템이나 경험치 등을 포함한 게임 내 수치와 상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상을 구매함으로써 플레이를 만드는 난이도-숙련도 길항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현실의 행위면서도 게임의 난이도와 숙련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지점을 납금 플레이로 새롭게 개념화함으로써 현질 대중화 이후 현실과 직접적인 교차점을 지닌 현실의 결제로 게임 이후의 플레이를 살펴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현질과 플레이 사이의 그 무엇들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친다.
지금의 게임 플레이가 더 이상 게임의 시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임 텍스트-플레이어 간 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납금 플레이 개념이 갖는 타당성과 확장성은 크다. 실제 산업자본의 욕망 하에서 비자율적으로 혹은 다분히 교섭적으로 플레이를 하고 있는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전혀 즐겁지 않다면 게임을 지속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지속하는 플레이어들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시대적 당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질에 기인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플레이가 그냥 별일 아닌 것이라 해버리면, 그 말은 게임이 그 이상의 의미있는 경험을 제공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게임에의 참여가 플레이어에게 어떤 영향력이 있는 무언가라면, 그에 대한 이해는 진지한 것이어야 한다. 좋은 플레이와 나쁜 플레이, 바람직한 플레이와 바람직하지 못한 플레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플레이다. 게임을 하는 모두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 이제 플레이어들은 게임 프레임과 현실세계의 프레임이 교차하는 제3의 공간에 거주한다. 그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그들만의 방법을 찾고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플레이어는 (만약 그가 정말 플레이어 빠져들고 있다면) 더 잘 플레이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도 돈을 쓰기 위해 플레이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플레이하기 위해 플레이한다.
본문의 흐름을 좇으며 써내려간 서평이지만, 앞에서 다루지 못한 〈현질의 탄생〉의 여러 미덕들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대표적으로, 석사학위논문에 기반한 텍스트임에도 쉽게 잘 읽힌다. 저자가 연구자만이 아니라 비평가로서 (그것이 텍스트를 매개한 것이라고는 해도) 독자와의 만남을 늘 고민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이론을 정리하고 그에 기반해 논리를 쌓아가는 대신 이슈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면서 그 과정에서 슬쩍슬쩍 개념들을 내놓는 방식, 혼자 말을 꺼내는 대신 앞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등 논의방식도 꽤 독특하다. 전자오락실에서 숙련된 플레이어들의 대전을 함께 서서 지켜보던 (하지만 본인은 게임을 정말 잘 하지는 못하는) 동네 선배가 흘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달까. 다만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방식으로 종합해 들려주는 선배.
마지막으로 책 제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은 게임 결제 전반을 둘러싼 환경과 결제의 역사, 그리고 그 결제‘들’이 갖는 의미를 폭넓게 다룬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이 ‘결제’의 탄생이 아니라 ‘현질’의 탄생이었을까? 저자도 92쪽에 이르러서야 “여기부터가 현질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라고 언급할 정도로 현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야 등장한다. 하지만 책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 게임의 결제사를 지나, 2부를 읽으면서 현질이 게임의 안과 밖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읽고나면, 그제서야 지금의 게임산업과 문화에서 현질의 탄생이 갖는 중요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질의 탄생〉은 결제도 아니고 현질도 아닌, 지금의 게임을 말하는 연구서이자 보고서이자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게임을 계속 해나가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펼쳐들어야 한다.